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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포옹,<국화꽃 향기>의 장진영+박해일

장진영과 박해일은 오래 사랑을 기다린 연인답지 않게 웃음이 많았다. 차가 막힐까봐 너무 일찍 출발한 박해일은 뒤늦게 도착한 장진영에게 낮은 웃음기가 머무는 목소리로 설인사를 건넸고, 선배답게 카메라 앞에서 박해일을 잡아끌었던 장진영은 누나 같고 친구 같은 탁 트인 웃음으로 반가운 마음을 드러냈다. 희재와 인하, 처음 맡은 국화꽃 향기와 국화꽃 같다는 고백으로 건넨 첫 키스를 9년 동안 간직한 연인. <국화꽃 향기>는 대학 선배 희재를 사랑하던 인하가 약혼자의 죽음 때문에 스스로를 벌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희재를 다시 빛 속으로 끌어내는 영화다. 그러나 웃음을 되찾은 어느 날, 희재는 자신 몸 속에서 자라나는 아기와 자신을 파먹는 암세포의 존재를 감지한다. 전형적인 눈물의 러브 스토리다. 그러나 일본 삿포로에서 찍었다는 포스터 사진엔 너무 일찍 이별하는 젊은 연인이 아니라 삶의 처음과 끝을 같이한 듯한 평온한 부부의 모습이 있다. 그것은 어른스러운 박해일 덕분이었을까. “해일씨는 진실해서 좋아요. 생긴 것부터. 천진난만한 아이 같지만,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이에요.” 혹은 마음 넓은 장진영 덕분이었을까.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질투는 나의 힘>은 모두 연극했던 선배들과 같이 한 작품이었어요. <국화꽃 향기> 같은 작품은 처음이었는데, 장진영씨가 많이 풀어줬죠.” 장진영은 밝고 화사하며, 박해일은 수줍고 우울하다. 그러니, 두사람의 포옹이 어울린다는 건 신기한 일이다. 스크린의 마법이 두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없는 연인으로 만드는지는 <국화꽃 향기>가 피어나는 2월말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브리짓 존스의 비련 - 장진영 장진영은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도착했구나, 알아볼 여유도 주지 않고 혼자 검은색 소파에 몸을 파묻은 그녀는 검은색 한 가지만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까만 단발머리, 까만 진바지, 까만 눈동자. 눈에 익은 모습보다 한겹 더 팬 마른 얼굴만 파르스름한 빛을 안고 있던 건 <국화꽃 향기> 때문이었을까. 사랑하는 사람 모두를 떠나보내고 혼자 남은 뒤, 한사코 피하려 했던 어린 남자의 사랑을 받아안은 희재. 죽음과 재회를 건너 또 다른 죽음과 마주하는 희재의 9년에 걸친 사연이, 맑은 피부보다 더 솔직하게 나이를 드러내는 장진영의 성숙한 목소리로 전해졌다. “희재가 아이를 낳는 수술대에 누워서 이런 생각을 해요. 인하씨, 집에 같이 못 가서 미안해, 그래도 혼자 안 가서 다행이다…. 그런 한마디가 너무 슬펐어요.” 너무 감정을 아낀 것 같아 약간 후회도 된다고, 장진영은 말했지만, 전혀 슬퍼 보이지 않는 얼굴로 들려준 그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오래오래 남았다. 장진영이 포근한 멜로영화 <오버 더 레인보우> 다음으로 선택한 <국화꽃 향기>는 많은 사람들을 울린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다. 남들은 다들 멜로로 출발하는데 나만 못해본 것 같아서, 도전하는 마음으로 출연한 영화. 눈물을 강요하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원작에 비해 시나리오 과정에서 손을 본 <국화꽃 향기>는 한결 담백하고 절제돼 있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그 절제는 배우에겐 항상 팽팽한 긴장을 유지해야만 하는 부담이기도 했다. “<국화꽃 향기>의 사랑은 정말 오래 가요. 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야 하는데, 영화는 몇년 세월을 건너뛰거든요. 몇 장면만으로 미묘하게 변한 모습이나 굴곡 심한 삶을 표현하려다 보니까 얼마나 드러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희재는 감정을 마음 속에 쌓아놓고 살지만, 배우는 그걸 관객에게 표현해야 하는 거잖아요.” <국화꽃 향기>에 내레이션이 흐른다면 이런 말투가 아닐까 싶을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 촬영할 때의 감정이 아직도 남아 얼마든지 퍼올릴 수 있을 것처럼 보였던 장진영은 옷을 갈아입고, 파트너 박해일과 로맨틱코미디 같은 발랄한 장면을 연출하고선 한 단계 높아진 볼륨으로 돌아왔다.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장면이 있었거든요. 물고기들이 막 지나가더니, 나중에 보니까 온몸이 해파리에게 물린 거예요. 불긋불긋한 자국이 절대 안 없어져서 얼마나 창피하던지.” 죽어가는 희재를 연기하기 위해 달걀과 요구르트만으로 연명하면서 다이어트를 했지만 “적응도 빠르고 포기도 빨라서, 어, 이렇게 먹으니까 되게 맛있네”라고 좋아했다는 장진영. 영화 속에 빠졌다가도 금새 “브리짓 존스 같은” 본래 캐릭터로 돌아오고, 그러다가도 다시 어둠에 갇힌 상처많은 여자로 회귀하는 그녀는 배우와 보통 사람을 쉴새없이 오가는 다이내믹한 인터뷰를 끌어나갔다. 장진영은 <국화꽃 향기>가 끝나자마자 <싱글즈> 촬영을 시작했다. 스물아홉 생일날 애인과 직장을 동시에 놓친 싱글 ‘나난’은 “감정에 솔직하고, 엉뚱하고, 발랄한 캔디” 같아 그 자신과 꼭 닮았다는 캐릭터. 성격 다른 두편의 영화를 연이어 터치한 탓에 머릿속이 헝클어져버렸지만, 장진영은 아직 한번도 배우라는 직업이 싫어진 적이 없다. “데뷔한 지 6년 됐는데 1년에 한편꼴로 영화를 했더라고요. 올해는 많이 해야지, 마음먹었어요. 사실 좀 어지럽긴 해요.” 그녀는 전날 잠을 못 잤고 내일 또다시 잠을 못 잘 것이기 때문에 몰래 하품을 삼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 하품은 누구에게도 피로를 전염시키지 않고 상쾌하게 사라졌다. 스튜디오 바닥 전체가 울릴 만큼 세게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지고서도 누구보다 크게 웃던 장진영은 어느새 하품과 피로를 기운차게 먹어치워버린 것 같았다. 고독은 나의 힘 - 박해일 박해일은 온순한 여유를 띤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티셔츠에 트레이닝복 바지, 잠시 집 앞에 나온 사람처럼 편안해 보이는 차림새. 약속시간보다 일찍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뒤늦게 들어선 기자의 멋쩍은 인사에 되레 “뭐가요?” 하며 소탈한 웃음을 지었다. ‘저는 영원이라 말했지만 그녀는 순간이라고 말했던’ 스무살의 열병을 7년 동안 간직한 채 희재의 마음을 기다린 <국화꽃 향기>의 인하처럼, 박해일은 쉽게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한결같음의 공기를 품고 있었다. 즉흥적인 속도에서 한발 물러난 듯, 또래들과는 좀 다른 리듬을 가진 배우. “세탁기도 꼭 남들 다 자는 밤에 돌리게” 되는 야행성 지향 자취생활을 얘기할 때는 오랜 친구처럼 살갑기도 하고, 인터뷰에서 많이 물어오지만 “이 영화는 딱 뭐다, 어떻게 했다”고 한마디로 못박는 게 어렵다며 신중히 말을 고를 때는 섣불리 채근하기 힘든 예민한 사색가 같기도 하다. 치유되기 힘든 상처를 안은 희재를 지순한 사랑으로 감싸는 인하로 출연한 <국화꽃 향기>는 박해일의 세 번째 영화. 시나리오와 원작인 동명 베스트셀러를 읽고 이내 속편격인 <국화꽃 향기2>를 사서 봤을 만큼 마음이 움직이는 사랑 이야기였다. 하지만 티없이 순정적인 인물이 되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방송에서 많이 봐오긴 했지만, 밝고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새삼 느꼈다고. 스스로는 “확 빠져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지만,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하는 대사를 담백한 진심으로 소화하기에 박해일은 꽤 어울리는 캐스팅이다. 전작들과 달리 “연극무대 선배들과 같이”한 게 아니었던 현장도, 좀 생소했지만 “언젠가 겪어야 했을” 색다른 긴장을 배우게 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밴드를 이끄는 성우의 아역으로 데뷔한 이후 아직은 돌아갈 기회가 없었지만, 연극은 음악과 더불어 그의 심정적 고향과 같다. “음악적 역량이 뛰어난 건 아니었어도 음악이 좋아서 하고 싶었던” 고교 시절의 꿈을 이뤘다면, 뮤지션이 됐을지도 모를 일. 젓가락으로 책상을 드럼마냥 두드리곤 하던 친구 덕분에 기타와 컴퓨터 음악에 빠진 그는, 대학에서도 메가헤르츠란 밴드에 몸담았다. 잔심부름이 더 많던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는 바람에, 첫 공연의 “원을 푼 건” 뜻밖에 전주영화제의 <와이키키…> 이벤트 무대에서였지만. 재즈 아카데미에 다니며 데모 녹음도 했었으나 “대중가수가 되는 게 아니라면” 모호한 음악의 항로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빙, 비디오방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의 일환으로 오디션을 봤던 96년 말, 아동극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로 연기라는 뜻밖의 돌파구를 찾기 전까지는. 즉각적인 어린 관객의 반응과 함께 호흡하며 “내 것을 퍼뜨리는 듯한” 아동극 때의 첫 느낌, 선배들과 늦도록 술잔과 얘기를 나누다 차비가 없어 목동의 집까지 걸어가곤 했던 기억, 임순례, 박찬옥, 봉준호 세 감독에게 발견되는 계기가 된 <청춘 예찬>까지, 연극의 체험은 박해일에게 현재의 “자양분”이다. <국화꽃 향기> 외에도 사랑한 여자와 사랑하고 싶은 여자를 차례로 앗아간 남자에게 질투와 인간적인 존경을 동시에 느끼는 20대의 섬세한 내면을 드러낸 두 번째 영화 <질투는 나의 힘>, 선량한 이미지에서 벗어나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쫓기는 <살인의 추억>이 올해 개봉을 앞둔 상태. 부쩍 늘어난 주위의 기대가 부담도 되는 눈치지만, “얽매이지 않고” 가고 싶다고 말할 뿐인 그의 소박함은 장중한 다짐보다 미덥다. 박해일 자신이 팬 카페에 올려놓은 푸슈킨의 시구대로, “너의 자유로운 혼이 가고 싶은 대로/ 너의 자유로운 길을 가라”(<네가 황제다. 고독하게 살아라> 중)고 기꺼이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천지 사방에서 인생역전,인생역전 해대니

몇해 전에 이른바 ‘명예퇴직’이라는 말이 명예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들의 목 위를 날아다닐 때의 일이다. 내가 단골로 가던 은행은 지점이 아니고 직원이 청원경찰을 합쳐도 예닐곱명밖에 되지 않는 아담한 출장소였다. 무엇보다 아파트 단지 안에 있어서 가까웠고 조용해서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출장소의 소장이라는 사람이 자신들의 출장소를 마음에 들어하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말을 걸어왔다. 그래서 난생처음 은행창구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아 차도 얻어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하는 특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단골들도 한두번쯤은 그 소파에 앉는 것 같기는 했다. 고향이 충북 어디라는 소장은 매일 목에 넥타이 졸라매고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부동산업자인 나의 자유가 부럽다고 잠깐 경의를 표하고는 요즘 은행원이 얼마나 파리 목숨인지에 대해서는 한참이나 열을 올려 설명했다. 은행이 합병이 되면서 다시 명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40대 후반 차장급들은 몇명 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나도 예의상 맞장구를 치면서 그 나이면 한창 자식들 교육에 돈이 들어갈 때이고 인생에서 자신을 실현할 황금기인데 막무가내로 자르고 또 자르기만 하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고 흥분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점심을 같이하기로 했고 흥분이 스러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까운 냉면집으로 향했다. 냉면집은 그날 따라 북새통이었다. 겨우 자리를 잡은 우리가 냉면을 주문하는데 뒤쪽에서 “김 차장!” 하고 은행장, 아니 은행지점장, 아니 은행지점의 출장소 하고도 최고참 소장을 누군가 불렀다. 김 차장의 얼굴은 금방 고객에 친절을 다하는 은행원 특유의 표정으로 돌아갔고 고개를 돌려 부른 쪽을 향했다. 그리고 자신을 부른 그 인물과 몇 마디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다시 고개를 돌린 그의 표정은 뭘 잘못 씹은 듯 그리 명랑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누구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부터 같이 근무하던 직원입니다. 상고 졸업 하고 은행에 입사했을 때부터 제가 고향도 같고 해서 키워줬다면 키워준 직원이죠. 1차 명퇴 때 잘렸습니다. 나같은 사람이 키워준다고 할 정도니 무슨 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상고 출신에 일선 창구에서만 근무했으니 실력이 있다한들 보여줄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제일 먼저 잘린 거지요. 그때 참 많이 울더라고요. 저 붙들고 원망도 많이 했지요. 제가 희망을 주고 또 줘서 이렇게 됐다는 겁니다. 그땐 참 미안했지요.”냉면은 꽤 질겼다. 그는 가위를 사양하고 냉면은 앞니로 끊어 먹어야 제 맛이라면서 말을 이었다.“은행 그만두고 나가서 교외에 나가서 동업으로 을러브호텔을 샀답니다.” 그의 영어에는 새벽 학원영어반에서 공부한 흔적이 강하게 묻어났다. 엘(L)의 발음이며 ‘텔’의 악센트며…. “그때 제가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엄청나게 무리하게 융자를 알선해줬지요. 그 때도 술 마시면서 고맙다고 울던 놈이에요.” 갑자기 욕이 나오는 바람에 나는 놀라 냉면을 끊지도 않고 삼켰다. “을러브호텔 방이 32개랍니다. 하루 4회전만 하면 2만원씩만 순익을 봐도 256, 을러브에는 휴일도 없으니까 한달에 7680… 6개월 되니까 융자 싹 갚고 1년 뒤에는 을러브호텔이 두개가 되대요. 두개가 네개 되는 데는 8개월, 네개가 여섯개 되는 데는 5개월….” 소장은 고참 은행원답게 시간과 숫자에 무척 밝았다. 나는 그 장본인의 얼굴을 꼭 봐두고 싶었다. 나중에 관상책을 쓸 때 써먹을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는 볼 수 없었고 그 대신 그가 우리가 먹은 냉면값을 계산하고 갔다는 말을 계산대에서 들었다. 짜식이 어딜 냉면 한 그릇으로 때우려고…. 웬일인지 소장은 계속 툴툴거렸다.성석제/ 소설가

오!샹그릴라

샹그릴라로 떠나기 전에 나는 영화 <샹그릴라>를 보고 싶었다. 동네 ‘으뜸과 버금’에 알아보니 마침 소장비디오 목록에 나와 있다 한다. 하지만 그건 40년대 흑백영화 <샹그릴라>가 아니라 이름만 딴 유사품이었다. 말하자면 ‘생활의 발정’, ‘모텔 성인장’인 셈이다. 인터넷 검색사이트에 ‘샹그릴라’를 치니 자료가 무진장 뜨는데 대개가 ‘샹그릴라 호텔’들이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피지…. 태평양 연안의 휴양지들엔 샹그릴라 호텔 하나쯤은 다 있다. ‘에이, 지겨운 가짜들!’ 하면서 나는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국 작가 제임스 힐튼의 1933년작 <잃어버린 지평선>은 “설산 협곡에 금빛 찬란한 건축물과 신비스런 절이 있으며, 조용한 호수와 대초원이 있다”고 했지. 우리의 여행코스에는, 일명 샹그릴라인 중티엔(中甸)과 옥룡설산(玉龍雪山)과 그 계곡 호도협(虎渡峽)이 있었다. 이제, 풍광이 아름답고, 100살 노인들이 지천이며, 문명화된 공동체가 건설됐었다는 그곳을 직접 보고 ‘정체를 파악’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윈난성(雲南省) 수도 쿤밍(昆明)에 도착한 나는 간단한 현지조사로 이미 뭔가 좀 잘못돼간다고 느꼈다. 설산의 협곡만 가면 되겠지 했더니, 윈난성에만도 설산이 스무개쯤 있었다. 해발 5000m가 넘어 봉우리에 만년설이 있으면 다 설산이다. 설산의 협곡, 이건 거의 남산의 김 서방 찾기였다. 해발 3300m의 중티엔공항에 내렸을 때 아침녘의 고산도시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깎아지른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운데, 드넓은 평원에는 지붕이 납작한 티베트족의 집들이 엎드려 있고, 그 위로 엷은 운무가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가 샹그릴라라는 거지요?” 하고 물었더니 가이드는 “여기가 다 샹그릴라예요”라고 대답한다. 중티엔은 행정지명이 아예 香格里拉(샹그릴라)로 돼 있다. 지난 97년, 중국 정부는 소설 속의 샹그릴라는 중티엔서 북쪽으로 좀 떨어진 더친(德欽)이라고 발표했다 한다. 하지만 우리 일행엔 중국 정부의 발표를 우습게 아는 분위기가 대세다. “소설로 보면 샹그릴라는 그냥 티베트 어딘가야.” “중국 정부가 약았어. 떠돌아다니는 샹그릴라를 갖다가 자기네 오지관광 홍보에 써먹은 거지.” 중티엔은 시가지만 벗어나면 바로 <황토지>의 무대다. 벌겋고 황량한 산등성이 민가에서 소녀가 오전 나절 물 길러 강으로 내려갔다가 오후 나절 물지게를 지고 돌아오는 그런 오지다. 고산지대로 들어가면서 나는 생수통을 옆에 끼고 연신 물을 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고산증을 예방했다고 자만한 나는 해발 3900m에서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트래킹을 하다가 급기야 산소통 신세를 지고 말았다. 하지만 희박한 공기만큼이나 괴로운 건, 화장실이었다. 중국의 화장실은 설계상의 ‘개방성’으로 인해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지만, 오지로 가면 관광지의 공중화장실도 그 관리에 있어서의 자유분방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트레인스포팅>에 나오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지저분한 화장실’은 어서 꼬리를 내리도록! 우리 일행들은 모두 소식이 오면 산비탈로 올라갔다. 고산증으로 머리도 어지럽고 뱃속도 뒤틀린 나는 급해진 나머지 일행 중의 한 젊은 남자에게 망을 봐달라 하고는 공중변소 뒤로 돌아가서 일을 보았다. 중티엔에 갔더니 어디나 다 샹그릴라였지만 정작 샹그릴라를 찾을 수 없었다. 내 결론은 그게 소설적 허구였다는 것이다. 작가가 외교관 시절 비행기 납치를 당하는 바람에 윈난성의 더친에서 한동안 살았다 하니 그 어떤 곳이 소설의 무대가 되기는 했겠다. 하지만 작가도 전운이 감도는 유럽사회 속에서 문명에 대한 불만이 목구멍에 차오르고 현대라는 정체불명의 트렌드에 적응곤란을 느끼는 한명의 지식인이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이상향에 대한 미련을 샹그릴라라는 이름에 투사했던 건지도. 물론, 그런 허구에 속아넘어가는 걸 바라보는 것이 소설가의 악취미다. 내가 소설에 ‘눌라치타’라는 가공의 유토피아를 그렸더니, 소설 초고부터 단행본까지 몇 차례나 읽은 친구가 어느 날 ‘이탈리아에 출장 가는데 눌라치타를 어떻게 가면 되냐’고 물어서 내게 뜻하지 않은 보람과 쾌감을 선사한 적 있다. 여행지에서 주워온 돌멩이처럼 내 기억에 남겨진 기념품은 이런 것이었다. ‘쾌적한 환경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으면 그곳이 샹그릴라지.’ 한 가지 덧붙여도 좋다면, ‘산소가 충분한 공기’ 정도라고 할까. 조선희/ 소설가 전 <씨네21> 편집장

한방에 바뀐 인생,<역전의 명수> 촬영현장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혹은 갈 수 없었던 길에 대한 후회와 동경은 늘 인생을 허전하게 만든다. 한 남자가 있다. 십대에는 천재골퍼로 날리던 그는 심한 슬럼프의 늪에 빠져 은퇴한 뒤 파산 직전의 너덜너덜한 인생을 연명해나가는 증권사 영업사원으로 전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터널에서 우연치 않은 사건을 겪은 남자는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최고의 프로골퍼’라고 부르는 세계로 넘어가게 된다. 내가 와 있는 이곳은 어디일까? 여기가 진짜 세상일까? 아니면 꿈일까?. <역전의 명수>는 한 남자가 우연히 두 세계를 넘나들게 되면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을 다룬 인생역전기다. 경상도 양산에서 이루어진 이날 촬영은 이상한 세계로 넘어온 뒤 자신이 승완의 아내라며 나타난 한지영(하지원)의 출현과 이미 돌아가신 아버님(김성겸)의 등장에 놀라는 승완(김승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소심하고 어리버리한 ‘증원사 직원’ 승완과 달리 성격 나쁜 ‘스포츠 스타’승완은 자신을 다르게 대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까지 영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불편하다. 신예 박용운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에이원시네마와 웰메이드필름이 공동 제작하는 코믹판타지인 <역전의 명수>는 순제작비 25억원으로 2003년 6월 초에 개봉할 예정이다. 글 백은하·사진 조석환 1. 골프시합을 앞두고 열린 파티에서 강승완을 격려하는 조 장관. 하지만 이런 자리가 처음인 강승완에게 상류사회 입성이 쉽지만은 않은 듯.2. 현실세계에선 돌아가신 아버님마저도 파티에 참석한 이상한 나라. 사람들은 세계적 스타 강승완의 등장을 박수로 맞고 있다.3.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꼼꼼함 때문에 배우들로부터 ‘아줌마’라는 별명을 얻은 박용운 감독.4. 늦은 밤까지 진행되는 촬영에 약간은 지친 기색을 보이는 김승우, 하지원. 그럼에도 김승우는 “테스트는 무슨 테스트, 그냥 슛 가 슛!”을 외치며 의욕을 보였다.5. 피우지도 않은 바람 때문에 티격태격하는 강승완, 한지영 커플. 하지만 주변 사람들 앞에서는 가식적인 다정함을 과시.

`흥행감독` 타이틀 얻은 곽재용 감독의 어제와 오늘 [2]

그러므로, <클래식>의 지혜가 어머니 주희의 남자친구 준하의 편지를 읽음으로써, <비오는 날의 수채화>의 지혜와 지수의 사랑은 되살아난다(참고로 <비오는 날의 수채화> 1, 2편과 <클래식>에서의 딸의 이름은 모두 ‘지혜’이다. “원래 딸아이 이름을 지혜라고 지으려고 했지만, 한자가 좋지 않다고 해서 ‘지수’로 바꿨다.” 그리고, 곽재용 감독이 진짜 엽기녀를 창조하기 위해 요즘 세대인 딸들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힌트를 얻은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지혜의 목소리,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생량한 바람이 가을을 예고해줍니다. 그 바람을 편지지에 실어 당신에게 보냅니다…”. “생량한?… 바람을 편지지에 실어 당신에게 보냅니다?… 유치해!… 음… 클래식하다고 해두지 뭐….” 마치 조소처럼, 하지만 풀리지 않을 주문처럼 영화의 초입부에 등장하는 이 대사는 멜로의 감정을 촌스럽다고, 또는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시각들에 대해 지혜의 입을 통해 되묻는 질문이라고도 했다. "장면마다의 장르에 충실한 것" “그 당시에 <비오는 날의 수채화>도 지금 이 영화 <클래식>하고 반응이 비슷했다. 나는 그때 영화계에서 이방인 취급을 당했었다. 그 영화가 복합장르인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멜로드라마를 한 호흡으로 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 장면마다의 장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마다 그 장르에 충실하는 것이다.”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서부터 이어져온 멜로에 대한 생각들은 변함이 없는 셈이다. 또한, <엽기적인 그녀>에서 그녀가 그려내는 상상의 영화들이 곽재용 감독이 말하는 그때마다의 장르에 대한 가장 명백한 예가 된다. 액션이 주가 될 때는 그 스펙터클에, 코미디가 주가 될 때는 그 강도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엔 준비가 안 된 상황이라 안 좋은 쪽으로 콘티를 막 고쳐가며 찍었고”, 그래서 “더 좋아지지 않는 한 고치지 않는다”는 현재의 원칙을 갖게 해준 “최대의 실패작”, <가을 여행>도 아마 그 점에서는 일종의 훌륭한 시행착오였던 셈이다. 장면마다 장르화됨으로써 느슨해지는 총체적인 리얼리티의 허실에 대해 물었을 때는 오히려 “영화는 영화다워야 한다. 현실에서 약간은 유리되어야 한다”고 받아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경험에 바탕한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고 강조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클래식>에서 태수가 준하를 믿고 눈감고 달리기를 하는 장면은 곽재용 감독의 중학교 시절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여기에 적절한 의미를 부여해놓았다. “태수가 믿고 준하에게 연애편지 대필을 부탁했는데, 오히려 준하가 주희를 사귀는 것”에 대한 중의적인 의미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곽재용 감독은 자신있게 말한다. “내 영화를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세번 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한번 볼 때는 잘 모르는 걸 숨겨놓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그의 말에 따르면 <엽기적인 그녀>의 관객은 두 부류로 나뉜다. “그 안에서 UFO를 본 관객과 UFO를 보지 못한 관객.” 또, <클래식>의 후반부에서 “상민 역의 조인성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메시지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재미없어지는 것이 영화”이므로, 곽재용 감독에게 숨겨놓은 것들의 의미란 바로 “쌓이는 감정”에의 헌신인 셈이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 직조의 마술들이 여전히 젊은 세대 안에 같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충고를 하는 것은 어른 티를 내는 것이라 싫다”는 말은 왜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이 언제나 20대 이상을 넘어서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실마리이다. 언제나 시간은 흐르지만, 그 흐른 시간만큼 회귀도 반복된다. ‘성장하지 않는 성장영화’인 듯. 연장전 No 현재진행형 Yes 거의 우격다짐식으로 곽재용 감독에게 스스로 전반전과 후반전, 연장전을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서 <영웅의 이름으로> 전까지, <영웅의 이름으로>에서 <엽기적인 그녀> 전까지, <엽기적인 그녀> 이후, 라고 나누며 난처해했다. <영웅의 이름으로>가 획이 되는 것을 보면 “원래 개인적으로는 제작비 많이 들어가는 영화 좋아한다. (웃음) 기회가 되면 액션영화도 만들고 싶다”는 계획을 언젠가 시도할 것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준비 중인 영화들은 “아직까지는 구체적으로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클래식과 연장선상이 될 것 같다”고 못을 박았다. 클래식과 연장된다는 것은 다시 한번 이전의 영화들의 중심적인 모티브와 형식을 가져가겠다는 말일 것이다. 연장전에 들어선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그는, “연장전이라… 앞으로 승부차기 할 일도 많을 텐데, 뭐…”라며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을 낸다는 의미에서가 아닌, 다시 한번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곽재용 감독은 역시 연장전에 접어든 것이다. 글 정한석 mapping@hani.co.kr 사진 정진환 jhjung@hani.co.kr 디자인 한정연 han7329@hani.co.kr 곽재용 감독의 영화 속 인용과 오마주 빌려온 이미지, 되살린 이미지 곽재용 감독은 자칭, 타칭 한국의 영화광 1세대에 속하며, 시네필적인 감수성으로 한 시절을 보내온 사람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구원의 의미에 감명받고, 죄의식을 말하는 히치콕의 영화적 형식에서 많은 것을 배워온 사람이다. 그러니까, 거의 모든 시네필들이 그렇듯이, 그의 영화 속에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의 흔적이 기입되어 들어가는 순간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주변의 목소리를 인식하고 있는 것인지, “어떤 영화의 장면을 가져온다기보다, 현장에서 이해를 돕기 위해 다른 영화들을 빗대어 종종 설명한다”고 하면서 완곡하게 인용과 참조의 지나친 위험성을 벗어났다. 하지만, 영화 <클래식>에서도 ‘연상’은 있었다. 딸 지혜가 어머니 주희의 편지상자를 열어보는 장면에서 곽재용 감독의 머리 속을 파고 든 것은 베리만의 영화 <화니와 알렉산더>에서의 그 의자였다. 그 영화를 보면서 곽재용 감독은 “그 의자가 마치 어떤 역사성을 갖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지혜가 열어보는 편지상자 역시 어떻게 하면 좀더 그 사랑의 역사를 가질 수 있도록 할 것인지에 많은 부분 신경 썼다. 되돌아가, <엽기적인 그녀>의 ‘그녀’에게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 <줄 앤 짐>에서의 줄의 이미지가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또는, <비오는 날의 수채화> 1, 2편에 출연한 배우 이경영이 맡은 역의 이름, ‘송천호’. 곽재용 감독은 개인적으로 멜로뿐 아니라 액션영화도 좋아한다. 특히나, 오우삼 감독은 존경에 마지않는다. 오우삼 감독의 페르소나 ‘송자호’에 대한 오마주가 ‘송천호’로 옮겨오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혹은 <비오는 날의 수채화2>의 마지막 장면. 곽재용 감독은 그의 영화 속에서 무서운 아버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실제로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이 굉장히 많은 탓”이라고 했다. “지금은 그런 죄의식으로부터 많이 벗어났지만”, 그때만 해도 “아버지를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인 것 같았고, 더욱이 <비오는 날의 수채화2>에서는 그 죄의식이 더 강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죄의식의 강박은 히치콕의 영화를 불러들였다. 지수와 지혜가 자살을 한 뒤, 천호는 혼자 남아 창고의 의자에 앉아 있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은 바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에서 앤서니 퍼킨스가 앉아 있는 모습과 똑같이 설정한 것이라고 곽재용 감독은 말했다. 아마도 곽재용 감독이 일러주지 않은 연상, 또는 인용들도 많을 것이다. 전에도, 또는 앞으로도.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네 가지 키워드로 읽는 휴 그랜트의 매력 [2]

키워드 둘. 세속적 이기주의자 나태한 휴 그랜트가 시종일관 성실하게 멀리하는 가치가 있다면 ‘심오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연기의 열병에 감염되셨나요?” <피츠프레스>의 인터뷰어가 던진 진지한 질문에 그는 그런 병력은 없다고 대답했다. “학교 때는 여학교 학생들과 무대에 같이 오르고 남들이 나에게 호감을 표하는 것이 기뻐서 연기를 했다. 나는 온갖 올바르지 못한 동기로, 돈과 명성과 얄팍한 재미 때문에 이 직업을 좋아한다.” 여러 미녀들과 스페인의 섬에서 몇주를 지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영화를 고른 적도 있는 휴 그랜트는 <어바웃 어 보이>의 귀족급 백수 윌과 세계관을 같이하는 남자다. 성가신 파파라치는 혐오하지만, ‘로맨틱코미디의 왕자’니 ‘가장 섹시한 수입품’이니 하는 언론이 붙여준 타이틀과 트로피에 대해서는 진지한 연기자 이미지를 해치건 말건 환영이다. 상이라면 밥상이건 뭐건 받는 편이 낫다는 주의. ‘깊이에의 강요’를 얼마나 싫어하냐면, 만의 하나 자신에게 잠재된 심오한 일면을 자극할까봐 클래식 음악도 일부러 듣지 않을 정도다. 신인 시절부터 딱히 대의를 숭상하는 박애주의자를 연기한 일이 없긴 하지만, 속된 이기주의자의 까칠한 면모를 완곡 어법을 쓰지 않고 드러낼 수 있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바람둥이 다니엘 클리버는 휴 그랜트 입장에서 상당히 고마운 친구였다. “그맘때 나는 착한 남자 역할이 좀 지겨워졌고 세상 사람들도 착한 남자 휴 그랜트에 대해 약간씩 위장에 거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과연 다니엘은 얼마나 나쁜 남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휴 그랜트의 답은 본인의 초상과도 아귀가 맞는다. “다니엘이 악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는 10대와 대학 시절, 사회생활에 걸쳐 머리 좋고 매력있고 유머 감각이 있는 인기있는 남자였을 거다. 그러니까 여자들을 사귀기도 쉬웠을 것이고. 하지만 그에게도 삶의 가을이 온 거다.” 휴 그랜트가 볼 때 다니엘을 총체적으로 얄팍한 인간이라 부르는 일은 부당하다. 예컨대 편집인 다니엘은 아마 문학에 관해서는 진지한 전문가일 것이다. 휴 그랜트 본인처럼. 여성 관객이 보기에 휴 그랜트는 확실히 깊이가 없지만, 대신 깊이를 강요해 그와 관계를 맺는 상대를 익사시킬 위험도 없는 남자다. 정복해야 할 희망봉이 없기 때문에 그의 연인은 ‘원정대원’이 돼 고난을 같이 극복할 일도 없다. 휴 그랜트와의 연애는 삶의 보험을 들어주지는 않지만 위험한 보증도 아닐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있는 그대로의 당신 전부를 사랑한다”는 약속은 여자에게 주지 못해도 “나 바람둥이다. 그런데 당신과는 좀더 노력할 용의가 있다. 당신이랑 잘 안 되면 나는 누구하고도 안 될 것이다”라고 그의 브리짓에게 말할 타입이다. 엘리자베스 헐리와 휴 그랜트는 커플 시절 서로를 믿지 않는다고 공언하곤 했다. “우리처럼 많이 좋아하면 서로를 부끄럽게 만들 일은 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을 뿐이다. 5년째부터 “이러다가 자칫하면, 부부처럼 되고 말겠다”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로부터 10년을 더 결혼반지 없이 함께했는데, 휴 그랜트가 밝힌 결혼의 이상을 보면 이해가 쉽다. “결혼에 대한 나의 이상은 <사운드 오브 뮤직>의 폰 트랩 가다. 아내와 서로 피해다니기 충분할 만큼 널찍한 성에 살면서 아이들은 유모가 말끔히 거두고 저녁이면 세일러복을 입혀 (기왕이면 계단에서) 사열한 뒤 잠자리로 보내면 되는. 하지만 내가 현실의 좁은 집에서 아이를 들쳐업고 어질러진 장난감에 둘러싸여 있는 건 싫다. 그나저나 장난감들의 원색은 정말 눈에 거슬린다. 이기적이라고? 나도 안다. ” 키워드 셋. 회의주의자 휴 그랜트는 이기적이긴 하지만, 천성적으로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지 않는다. 순정만화적인 외모를 지닌 로맨틱코미디의 히어로이면서도 남성 관객에게 별다른 반감을 사지 않는 데에는 그런 까닭도 있을 것이다. “휴 그랜트에게는 진지하고 심각한 비즈니스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이 없다. 그는 테이크가 끝날 때마다 ‘난 세계 최악의 배우야’라고 기분좋게 말한다. 나는 휴의 그런 무책임함을 사랑한다.” <네번의 결혼식…> <노팅 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작가 리처드 커티스의 말이다. 영화 속에서나 인터뷰에서나 그랜트는 빠른 머리회전과 위트를 내비치는 조크를 대수롭지 않게 흐린 말꼬리에 슬쩍 붙이고는 농담이 효과를 거두었는지 여부는 신경쓰지 않는다. 비난을 하면 딴청을 피우고 (“댁은 그러고도 잠이 오우?” “아, 전 파도소리를 틀어놓고 자는데요.” <투 윅스 노티스> 중에서), 칭찬을 하면 김을 뺀다(“<어바웃 어 보이>를 보면서 아내가 울다가 웃다가 하더군요. 코미디가 구하는 눈물과 웃음을 당신은 성취했군요.” “그래요…. 그런데 혹시, 부인께서 신경쇠약이신가요?” <스튜디오LA>와 인터뷰에서). 이는 실패를 끝없이 곱씹는 장광설을 도락으로 삼는 반면,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했다는 사실은 겸연쩍어하는 영국인 특유의 제스처이기도 하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 초기작 <사이렌>의 존 듀이건 감독은 “휴 그랜트가 지닌 최고의 상업성은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휴 그랜트는 귀공자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천연덕스럽게 자신이 겪은 우스꽝스러운 망신이나 진짜 명예와 무관한 사소한 모욕의 경험- 국제영화제에서 바지 지퍼를 연 채 기립박수에 화답했다든가 하는- 을 화제로 삼는다. 삶에서 정말 정색하고 엄숙히 취급해야 할 문제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고 말하듯이. 이 세상에 배우 휴 그랜트를 둘러싼 진지한 토론이 하나 존재한다면 아마 타이프 캐스팅과 장르적 한계에 관한 논란일 거다. 하지만 휴 그랜트는 특별히 살인마 연기를 하고 싶어서 불면증에 걸린 것 아니며 자신은 스테레오 타입의 사슬에 묶여 고통받는 위대한 배우도 아니라는 입장을 줄곧 밝혀왔다. “일정한 나이에 다다르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인물이 될 수 있는지 한계를 자연히 알게 된다.” 그렇게 직업적 야심이 소박해서 좋은 배우가 되겠냐고 혀를 차면 그랜트는 이렇게 응수한다. “수많은 인간이 타고난 소명이 아닌 일로 먹고살지만, 여전히 최선을 다하며 때로는 제법 능숙해지기도 한다. 우리 아버지도 특별히 카펫을 사랑하진 않으셨지만 팔아치우는 데에는 훌륭한 솜씨를 발휘하셨다.” 하지만 휴 그랜트의 냉소는 다정하다. 이 따뜻한 회의주의는 리처드 커티스가 쓴 휴 그랜트 3부작과 <어바웃 어 보이>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삶이 조금 허섭스러워도 괜찮다고, 빚이 늘고 골초가 돼 눈총받아도 자기 페이스만 유지할 수 있다면 세상의 끝이 아니라고 격려하는.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네 가지 키워드로 읽는 휴 그랜트의 매력 [1]

나쁜 남자, 사랑할까요? 서른 넘긴 지 오래인 남녀에게 요정 애칭이 거북살스럽긴 하지만, 줄리아 로버츠가 로맨틱코미디의 팅커벨이라면 휴 그랜트(43)는 오베론쯤으로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 은막에서 휴 그랜트보다 로맨틱한 코미디언, 혹은 그보다 코믹한 연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왕도 왕 나름. 요정의 왕이라고 한들 로맨틱코미디 장르의 왕에게는 경배하는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하긴 휴 그랜트와 자주 비교되는 선배 캐리 그랜트도 비슷했다. 마치 이름이 정한 팔자인 양 두 사람의 그랜트는 언제나, 당연히, 지척에 있는 스타로 여겨질지언정(GRANTED), 존재해주어서 고맙다는 따위의 감격어린 치사를 받는 부류에 속하지 않았다. 배우로서 쓸쓸한 노릇 아닌가, 라고 굳이 염려해줄 필요는 없다. ‘배우 휴 그랜트’의 소명을 누구보다 가볍게 여기는 것은 휴 그랜트 본인이기 때문이다. 어느 명사보다 재미있는 인터뷰를 남기면서도 의미심장한 인물로 여겨지기를 한사코 거부하는 연기 경력 20년의 배우. 어록을 뒤적이다보면, 그라면 새 영화 <투 윅스 노티스>의 제목처럼 2주 전 통보 정도로 큰 소동없이 은퇴할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다. 배우 휴 그랜트와 그의 영화적 자아들은 비슷비슷하게 게으르고 세상사에 시큰둥하고 얼마간 경박하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왜 이 가벼운 남자를 미워할 수 없는 것일까. 키워드 하나. 게으름뱅이 휴 그랜트는 게으르다. 도서관에서 닭고기 샌드위치를 씹으며 권태를 소재로 한 소설을 습작하는- 그는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꽤 한가한 배우였던 그를 ‘월드 스타’로 키운 <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에서부터 휴 그랜트는 늦잠꾸러기였다. 결혼식 들러리 주제에 늦잠을 잔 찰스는 판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의 주연 같은 억양으로 아홉번이나 ‘F***!’이라고 절규하며 식장에 도착한다. 휴 그랜트 필모그래피 <특권층>(1982)<모리스>(1987)<백사의 전설>(1988) <즉흥곡>(1988)<베니스 행 야간 열차>(1993)<비터문>(1992)<남아있는 나날>(1993)<사이렌>(1994)<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잉글리쉬 맨>(1995)<나인 먼스>(1995)<센스, 센서빌리티>(1995)<휴 그랜트의 선택>(1996)<노팅 힐>(1999)<미키 블루 아이즈>(1999)<스몰 타임 크룩스>(2000)<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 <어바웃 어 보이>(2002)<투 윅스 노티스>(2002)<말하자면 사랑>(2003 미개봉) 현실에서도 휴 그랜트는 미적거린다. 연기 생활 20년이 지난 요즘에도, 어쩌다 발이 미끄러져 배우가 직업이 되었다고 믿는 까닭에, 폭과 높이를 계획해 커리어의 금자탑을 척척 쌓아올린다기보다 어디 멋진 샛길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며 산다. “별로 선택한 건 아니다. 그렇다고 일할 때 열심히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늘상 들러붙어 있다. 영화촬영은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느린 지루한 작업이다.” 휴 그랜트는 좀더 창의적인 소설, 시나리오 집필이 꿈이라고 버릇처럼 말하지만 그렇다고 결의에 불타는 재야 작가도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게으른 가난뱅이가 게으른 부자가 된 거다. 창피하지만 나라는 인간은 도무지 규율이 없어서 무시무시한 마감에 목이 졸리지 않는 한 아마 못 쓸 것 같다!” 이처럼 나태한 천성의 그가 응급실에서 동분서주하는 의사로 분했던 <휴 그랜트의 선택>이 매우 어색한 그림을 보여준 것도 당연하다. 일하기 싫어하는 휴 그랜트는 당연히 100편의 시나리오가 오면 99개는 거절한다. 사람들은 그가 로맨틱코미디만 덥석덥석 계약한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랜트는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로맨틱코미디영화를 거절한 배우이기도 하다. “연기를 사랑해서 일하고픈 열정으로 온몸이 불타는 배우들은 본인 역을 뺀 나머지 부분의 난센스를 못 본다. 하나 나로 말하자면 기본적으로 일하기가 싫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이 영화를 안 할 핑계, 결점만 찾게 된다.” 결과적으로, 게으름뱅이 휴 그랜트는 여왕처럼 스크립트를 고르고 작가를 닦달해 퇴고를 거듭하는 바람에 로맨틱코미디에 관한 한 높은 타율을 유지한다. <투 윅스 노티스> <센스, 센서빌리티> 13년간 반려자 관계를 유지한 엘리자베스 헐리와 결별 뒤에도 동료로서 옷차림과 농담에 대한 조언자로 머물고 있는 휴 그랜트는 사랑에 빠지는 데에도 상당히 게으르다. 물론 단기 데이트에는 부지런하다는 평판이지만. 진정한 사랑을 가리켜 “매우 희귀하지만 나는 그 새를 본 적이 있다”고 표현하는 휴 그랜트는 그러나 다시 사랑이라는 대역사를 시작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해한다. 귀찮으니까.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개그콘서트>가 우리를 사로잡은 7가지 이유 [3]

‘…생활사투리’는 어느 날 떡하니 박준형의 머릿속에서 잉태된 ‘순수혈통’의 코너는 아니다. 이런 유의 영어교육프로그램을 응용한 사투리 교육코너는 SBS 창사초기 코미디나 강원방송 정규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서 보거나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뿐이 아니다. <개그콘서트>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코너들은 어디서 본 듯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지난 1월19일 보수작업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는 ‘봉숭아학당’이다. 이미 이창훈의 맹구 시절부터 시작된 이 코너는 <개그콘서트> 내에서도 수많은 멤버이동을 보이며 장수하고 있다. 한참 인기를 끌었던 박성호의 ‘뮤직토크’만 해도 “냉장고를 녹이는 뜨~거운 남자” 박세민이 80년대 코미디에서 써먹던 ‘팝개그’의 재탕이었고, 난쟁이처럼 무릎으로 발을 대신하는 ‘몽당친구들’은 이미 <개그콘서트> 내에서 이병진이 선보였던 코너다. 하지만 이런 현상에 대해 김영식 PD는 “미묘한 데커레이션이 불러일으키는 큰 차이”라고 설명한다. “작은 변화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다르게 느낀다. 옛날보다 재미없으면 아류라는 소리를 듣는 거고 훨씬 재밌으면 그걸 딛고 일어서는 거다. 특별히 ‘오리지널리티’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쩌면 <개그콘서트>의 중심에 81년 MBC <청춘 만세> 이후 KBS <유머 일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에서 맹할약해왔던 장덕균이 메인작가로 포진해 있다는 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땅에 개그란 것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후 많은 유행코너를 만들어왔던 이에게 더이상 ‘진짜’에 대한 강박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이런 유연성과 열린 태도는 <개그콘서트>의 소재와 주제 형식의 범위를 “KBS방송 규정이 허락하는 한” 못할 것 없이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건 개그다. 그리고 전투다. 그리고 생존이다. <개그콘서트>를 이끌어온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이번주에 웃기지 못하면 다음주에 나올 수 없을 것’이라는 공포요, 긴장이다. 이미 코너를 잡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대로, 아직 코너를 따내지 못한 사람은 그 사람대로. 그리고 시청자들은 이 처절한 서바이벌의 현장을 지켜볼 수 있다는 약간은 가학적인 즐거움을 얻는다. 강섬범이 인기 개그맨의 권좌에 오르기까지 대한민국 철도역을 다 외우던 ‘수다맨’이나 박자를 놓칠세라, 핏대를 세우고 열중해서 웅변하고 있는 ‘연변 총각’을 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맞습니다 맞구요”라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성대모사로 몇주 만에 급부상한 ‘노통장’ 김상태 역시 공채 14기로 입사해 <개그콘서트>에 합류했지만 4년 동안 녹화 전 객석 분위기를 잡는 ‘바람잡이’의 시절을 거쳐야 했고, ‘어차피 당선자 성대모사는 먼저 하는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으로 대선 과정부터 테이프를 체크하며 노 당선자 성대모사를 준비해온 것이다. 또한 개편과 함께 폐지되긴 했지만 두세명이 번갈아가며 노래의 한자한자를 떨어뜨려 불러댔던 ‘지그재그송’ 같은 코너는 보고있자면 재미있다, 라는 생각을 넘어 안쓰럽고 아슬아슬할 정도였다. 그러나 오히려 무대에서 안쓰러운 것은 양반이다. 새 코너를 준비해서 가지고 와서 보자는 말이 떨어지면 개그맨들은 나름대로 팀을 결성해서 개그를 만들고 전체 리허설을 할 때 선을 보인다. 물론 ‘생활사투리’의 경우처럼 처음 보자마자 모두들 재밌겠다, 해서 그날 바로 녹화를 뜬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리허설에서 버려지는 것이 많고 1, 2주 나가고 없어진 것도 많다. 재미없다, 약하다 할 때는 버리고 다시 써라. 좀 여지가 있으면 다음주에 다시 준비해와라. 녹화를 떠보고 판단해보자는 식이다. 공채 개그맨이라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개그콘서트>는 다른 방송사에서 온 사람이든, 학교에서 바로 온 사람이든 간에 신선한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다면 공채 여부에 상관없이 출연시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 말했듯이 각 코너가 서로 넘나들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분명한 경쟁 또한 존재한다. 물론 언성을 높이는 건 아니지만 A라는 코너에서 B코너의 유머를 따오려고 할 때 ‘그건 우리 건데…’라며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기도 한다. 매일 4, 5시간을 모여서 연습하고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도 모자라 그 시간 이후에 밤에 모여서 따로 연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코너를 가지고 왔는데 계속 ‘까이고’ 반응이 안 좋고, 어쩌다 녹화는 떴는데 방송 안 나가고, 그런 걸 몇번 겪다보면 개그맨을 때려치우겠다는 결심을 굳혔다가 며칠 뒤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이들은 중압감을 가지고 웃긴다. 언제나 밀려날 수 있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의해서다. 냉정하고, 비정하다. <개그콘서트>는 그래서 긴장되고, 그래서 웃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한국영화 개봉후 79일 지나면 비디오 출시`

국내에서 제작돼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들은 평균적으로 극장 개봉후 79일이 지나면 비디오로 출시되는 것으로 나타났다.유세경 이화여대 교수와 정윤경 방송영상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이 최근 내놓은 `멀티미디어 시대의 영상콘텐츠 유통 현황과 활성화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99년부터 2001년 상반기중 국내에서 제작돼 극장에서 개봉된 영화 122편중 비디오시장에 나온 112편의 경우 극장 개봉후 비디오 출시까지 평균 79일이 걸렸다.미국 영화가 미국내 비디오 시장으로 가는데 약 183일 정도 소요되는 것과 비교할때 매우 짧은 기간이라며 영상산업이 발전돼 있는 국가일수록 이 기간이 길게 나타나는 현상이 발견된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분석기간중 연도별로 비디오 출시까지 걸리는 기간이 99년 86일, 2000년 79일,2001년 상반기 69일 등으로 점점 짧아지는 추세가 나타났는데 이는 극장 수입에서투자비용을 모두 회수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판매창구가 다양해지면서 비용 회수 가능성이 있는 창구로 빨리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됐다.또 국내 제작 전체 122편의 영화들이 극장 상영 다음에 거친 후속판매창구를 보면 극장-비디오-유료케이블.인터넷.지상파중 하나 등으로 2개의 후속창구를 거친 경우가 34.4%로 가장 많았다.이어 극장-비디오-유료케이블-인터넷.지상파중 하나 또는 극장-비디오-인터넷-유료케이블.지상파중 하나 등 후속창구가 3개인 경우가 33.6%로 뒤를 이었고 비디오출시로 그친 경우도 22.1%나 됐다.비디오 출시에 이어 유료케이블에서 방영된 영화들의 경우 평균적으로 비디오출시후 171일이 지나서 유료케이블에서 방송되기 시작했다.보고서는 영화의 경우 다양한 후속판매창구가 존재하나 극히 일부분의 영화만이 활발하게 유통되고 있으며 매체간 배포시기가 다른 나라와 비교할때 매우 짧은 것으로 나타나 창구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분석했다.보고서는 특정매체가 배타적 상영권한을 갖는 기간(홀드백 기간)을 짧게 확보함으로써 영상물의 신선함을 유지하고 이를 통해 경쟁매체보다 많은 수용자를 선점하는 것은 단기간의 수익확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다 안정적인 유통수익 확대 측면에선 그다지 바람직한 전략으로 볼 수 없다고 평가하면서 유통창구를 활성화하기 위한 공적자금에 의한 유통전문사 설립을 제안했다.

영화사 신문 제7회 (1919~1922) [2]

스웨덴의 두 거장 빅토르 쇠스트롬과 모리스 스틸러의 영화세계 스웨덴영화의 두 거장, 빅토르 쇠스트롬과 모리스 스틸러를 아는지? 전후 해외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이들은 이미 1910년대 초부터 꾸준한 수작들을 만들어왔다. 그들의 영화는 미국이나 프랑스영화와는 다른 스칸디나비아 특유의 미학적 특징을 보여줘서 이채롭다. 빅토르 쇠스트롬과 모리스 스틸러는 둘 다 연극 무대에서 먼저 명성을 얻은 뒤에 영화에 입문했으며, 스벤스카영화사에서 감독, 연기, 각본을 동시에 겸하고 있다. 또한 스웨덴의 여성소설가 셀마 라아게를뢰프의 소설을 줄곧 영화화해왔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빅토르 쇠스트롬은 인간의 내면심리를 깊이 통찰해온 감독이다. 그의 최근작인 <유령 마차>(1920)는 이를 잘 보여주는 영화. 새해 이브에 죽어가는 술취한 시골뜨기가, 사신이 모는 유령마차를 타고 자신을 사랑했던 두 여인을 그가 어떻게 망쳐놓았는가를 보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단 4명만이 출연하며 어떤 극적인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다. 쇠스트롬에게 문제가 된 것은 내적인 갈등이었는데, 타락하기 쉬운 인간의 속성은 결국 구원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몹시 어둡다. 세계대전의 종결 뒤 쇠스트롬을 해외에 알린 <무법자와 그의 아내>도 마찬가지. 사랑에 의지해 모든 것을 버리고 황야에서 살아가는 주인공 부부는, 그러나 죽기 직전 치졸하고 추한 싸움을 벌인다. 한때 서로 깊이 사랑했으나 배고프고 추위에 지친 두 사람이 악다구니처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기란 정말 끔찍하다. 프랑스 비평가 루이 델뤽은 이 영화를 “놀라운 작품”이라고 상찬하며 이렇게 말했다. “감정의 예리한 서정성과 끔찍함, 폭력적인 싸움, 사막처럼 황폐한 눈 위에서 최후의 포옹을 하면서 삶에서 달아나버린 두 연인의 비극적인 결말을 보고 프랑스 관객은 충격받았다.” 모리스 스틸러는 센세이셔널한 멜로드라마 <블랙 마스크>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초기작들은 신통치 않아서 개봉 전 몇년씩 창고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 이어 그는 ‘최초의 세련된 섹스 희극영화’라는 홍보카피가 달린 영화 <에로티콘>(1920) 등 주로 희극영화에서 장기를 보였다. 하지만 스틸러의 최고작으로는 희극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스웨덴을 배경으로 한 비극 <아르네 경의 보물>(1919)이 꼽힌다. 대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인 여성이 남자가 학살의 주범이라는 걸 모른 채 사랑에 빠진다. 남자 역시 여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도망치기 위해 여자를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결국 여자는 죽는다. 폭력과 처벌에 관한 이 도덕적인 이야기는 불길한 예감, 스웨덴 시골의 뛰어난 정경 등에 둘러싸여 그로테스크한 비극의 분위기를 풍긴다. 이 영화 역시 <유령 마차>처럼 라아게를뢰프의 소설을 영화했다. 윌 헤이즈 인터뷰“배우 사생활, 대중에 영향 크다” 1922년 미국 정부의 검열을 피하고 추락한 할리우드의 이미지를 일신하기 위해 주요 스튜디오들이 일종의 동업조직인 영화제작자 및 배급업자협회(Motion Picture Producers and Distributors Association·이하 MPPDA)를 설립하고, 전 공화당전국위원회 의장인 윌 헤이즈를 회장에 임명했다. 과연 그는 할리우드의 도덕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어떠한 복안을 가지고 있는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의외의 인사처럼 보인다. 난 공화주의자이고 독실한 장로교도다. 워싱턴 정가에 발도 넓다. 영화를 불신하는 대중과 정치인들을 안심시킬 수 있다. 그러면 정부 검열의 도입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에 대한 진단은. 지금 할리우드는 위기에 처해 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사회는 성적, 도덕적으로 개방의 급물살을 타고 있다. 금주법이 있긴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나. 할리우드영화들은 이런 사회 분위기에 영합해 밀주, 재즈, 난장파티 같은 소재들을 다뤄왔다. 그뿐인가? 아직 재판 중이긴 하지만 유명 코미디언 패티 아버클이 취중 파티 중에 여배우 버지니아 라프를 강간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렇듯 배우들은 문란한 사생활로 대중의 신의를 잃어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중이 할리우드를 고운 눈으로 보지 않는 건 당연한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계획은. 자정 노력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제작자들이 사생활에 문제가 있는 배우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것을 도울 예정이다. 또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조심해야 할 것’을 정하고 모든 시나리오의 시놉시스를 제출받아 승인 여부를 가릴 것이다. 박스2/ 러시아로 간 <인톨러런스>자본주의의 냉대, 공산주의의 환대 잠깐 퀴즈. 1922년 현재 소련영화사에서 대중성과 정치성, 예술성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둔 최초의 걸작은? 놀라지마시라. 답은 데이비드 G.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다. <인톨러런스>는 혁명 전인 1916년 러시아에 수입됐다. 하지만 배급업자들이 내용의 난해함을 이유로 상영을 거절하는 바람에 창고에 박혀버렸다. 그러다 혁명 뒤, 이 영화의 ‘선동성’을 알아본 볼셰비키 정부가 1918년과 1919년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각각 프리미어를 열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레닌은 특히 <인톨러런스>의 ‘모던 스토리’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네 가지의 이야기를 교차편집한 <인톨러런스>에서 ‘모던 스토리’는 농장에서 해고된 노동자가 도시 갱조직에 들어가지만 같은 노동계급의 여성을 사랑하게 되면서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을 시작한다는 이야기. 그는 조직의 음모로 살인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게 되지만 진실이 밝혀지면서 가까스로 죽음에서 구출된다. 레닌이 전국 상영을 지시한 이래 이 영화는 1922년 현재까지 러시아 전역에서 상영되고 있다. 또한 레닌은 그리피스에게 영화산업의 수장자리를 제의했다. 하지만 자신의 스튜디오 개관을 앞두고 있던 그리피스는 이를 거절했다. <인톨러런스>에 반한 건 레닌만이 아니다. 미국의 몽타주에 관심이 컸던 쿨레쇼프는 워크숍에 참가한 학생들과 함께 이 영화를 수없이 보고, 프린트를 잘라 수백 가지 방법으로 재조합해보았다. 그리피스의 편집방법을 이해하고, 나아가 숏의 정렬이 의미를 생산하는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미국에서 냉대받은 <인톨러런스>는 미국과 정반대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나라에서 환대받고 있다. 묘한 아이러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