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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그 액세서리] 화풀이 대신 다시 헤드폰을 쓰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톰(로맹 뒤리스)은 라이터를 뱅글뱅글 돌리는 습관이 있고 가죽 블루종을 입을 때도 타이 매는 걸 좋아하는 스물여덟살의 젊은 부동산 중개인이다. 허울이 부동산 업자일 뿐,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은 집세가 밀린 세입자를 야구 방망이로 두들겨 패거나 철거 예정인 건물에서 버티는 입주자를 쫓아내기 위해 계단에 쥐를 풀고 수도와 전기를 끊는 추접한 일이다. 시궁창 같은 일과에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음악뿐이다. 식당에서 아버지를 만날 때나 차 안에서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릴 때, 혹은 건널목을 건널 때 톰은 늘 헤드폰을 쓰고 있다. 동그란 소니 헤드폰으로 그가 듣는 음악은 주로 ‘텔레팝뮤직’이나 ‘킬스’의 곡이다. 멜로디와 비트에 집중하는 톰의 취향은 알고 보면 죽은 엄마 소니아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엄마의 연주테이프를 오랫동안 보관해왔다. 가끔씩 스스로를 위해서만 피아노를 치던 톰은 어느 날 시립 음악단의 피아노 연주자 오디션을 보기로 결심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중국인 소녀에게 피아노를 다시 배우는 동안 톰은 뜻대로 안되는 연주 때문에 분노하고 엉뚱한 화풀이를 하고 소리를 질러댄다. 낮에는 주먹질을 하고 창문을 부수다가 밤에는 손등이 찢어진 손으로 바흐의 ‘토카타 E 마이너’를 연주하는 기우뚱한 생활. 톰은 커다란 헤드폰을 뒤집어쓴 채 음악을 듣고 술집 탁자와 자동차 대시보드, 리나스 샌드위치 접시를 건반 삼아 피아노 연주를 연습한다. 헤드폰을 쓰는 순간 톰은 프라이팬에 맞아 쓰러진 아랍 남자도, 부인을 따돌리고 매일 밤 바람을 피우는 친구도, 깨진 창문과 자루에서 풀려나온 쥐와 쫓겨난 자들의 악을 쓰는 목소리도 다 잊는다. 그저 호로비츠의 다큐멘터리에서 본 경주마가 트랙을 달리는 것 같은 손가락의 리듬감만 기억한다. 마침내 오디션 날. 톰은 한번도 입지 않은 크리스찬 디올의 흰 셔츠를 꺼내 입고 중국 차를 한 모금 마신 뒤에 슈트 차림으로 오디션을 보러 간다. 손수건으로 건반을 닦고 심호흡을 한 뒤 연주를 시작한다. 그러고는 완전히 망친다. 다시 거리로 나온 톰은 엉망이 된 스스로의 연주에 화를 내거나 울지 않는다. 거리의 깡통을 걷어차거나 쓰레기통을 뒤엎지도 않는다. 다만 사거리에 선 채로 다시 헤드폰을 쓴다.

[도서] 라틴의 영혼을 듣다

질베르토 음악을 듣고 싶다 지수 ★★★★★ 라틴 음악에 대한 정보 지수 ★★★★ 2003년 조앙 질베르토의 도쿄 콘서트. <행복>을 마친 그는 품에 안은 기타 위로 몸을 기대듯, 오른손을 입 언저리에 댄 채로 고개를 숙였다. 몇분이 그렇게 지나고도 그가 좀처럼 일어날 기색이 없자, 관객은 박수를 쳤다. 그는 미동도 없이 앉아 있을 뿐이고 사람들의 박수 소리는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그는 그렇게 20분여를 앉아 있었다. 그러다 나이 든 외국인이 맨발로 걸어나와 부드럽게 질베르토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환호성. 질베르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빔의 곡 <코르코바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질베르토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로 관객의 박수 소리 하나하나에 마음으로 답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런 관객을 찾고 있었다.” 작사가이자 EBS 라디오 <세계음악기행>의 주말 DJ인 박창학이 쓴 <라틴 소울>은 남미 음악에 대한 이것저것을 들려주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뮤지션 이름 읽는 법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늘어놓다가, 좋아하는 뮤지션에 얽힌 일화들을 회고하다가, 음반을 추천하다가, 노래 가사를 해석해주다가 한다. 음반이 너무 많아 뭐가 뭔지 헷갈리는 피아졸라의 디스코그래피에 얽힌 사연과 베스트 음반 추천은 라틴 음악에 갓 입문한 이에게 큰 도움이 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모든 게 라틴 음악에 대한 것으로 수렴된다. 그러니 이 책 자체가 라틴의 영혼, 그러니까 ‘라틴 소울’인 셈이다. 많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지만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아무래도 보사노바의 창시자이자 ‘보사노바의 신’으로 불리는 조앙 질베르토에 대한 부분이다. 보사노바를 세계에 알린 <<게츠/질베르토>> 음반을 녹음하던 때 질베르토의 불평불만 때문에 가운데 낀 (무려!)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든지 하는 일화들은 흥미진진하다. 특히 일본 잡지에 실렸던 브라질 상파울루대학 음악사 교수 로렌조 맘미의 글을 중역해 실은 ‘조앙 질베르토와 보사노바의 유토피아적 계획’은 음악과 보사노바, 그리고 질베르토에 대한 아름답고 통찰력있는 비평글이다. “신체적으로도 음악적으로도 조앙 질베르토는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이같은 태도에는 대체로 퇴보적이라는 딱지가 붙여지곤 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미래를 지향하며 유토피아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그가 노래하는 텔레비전 광고에서조차 나태함이 아닌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감각이 전해진다. 재즈가 힘의 의지라고 한다면 보사노바는 행복의 약속이다.” 보사노바를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도 멈추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글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영화와 드라마 대표작 가이드

[영화 부문] 일본판과 프랑스판, 뭐가 다를까 비밀 秘密 1999년 | 감독 다키타 요지로 | 출연 히로스에 료코, 고바야시 가오루 더 시크릿 The Secret 2007년 | 감독 뱅상 페레 | 출연 데이비드 듀코브니, 올리비아 설비 <비밀>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의 반열에 올린 작품이자 영화로 만들어진 그의 첫 번째 소설이다. 또한 히가시노 게이고는 데뷔작 <방과 후>로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이후 내내 상복이 없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정통 추리물의 작법에서 벗어나 ‘빙의’라는 초자연적 소재를 채택한 이 작품으로 비로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원작 <비밀>과 8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과 프랑스에서 제작된 두편의 영화는 서사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보인다. 다키타 요지로의 <비밀>이 원작에 충실하되 유머러스한 기조를 잃지 않은 편이라면, 뱅상 페레의 <더 시크릿>은 딸의 몸에 깃든 아내와 남편간의 갈등을 중심에 놓았다. 그리고 원작 <비밀>의 시점이 남편/아버지에게 집중된 반면, <더 시크릿>은 빙의된 아내의 심리 묘사에 치중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일본판 영화에서도 유지되었던 결말의 반전이 <더 시크릿>에서는 모양새를 달리한다. 한편 영화 <비밀>에는 원작자인 히가시노 게이고도 대학 교수 역할로 카메오 출연한 바 있다. [영화 부문] 게임의 본질은 함수 게임 g@me 2003년 | 감독 이사카 사토시 | 출연 후지키 나오히토, 나카마 유키에 <용의자 X의 헌신>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기하 문제로 보이지만 실은 함수 문제’라는 표현과 함께 본격 추리물의 트릭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즉 이것은 주어진 단서들을 조합하여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전제부터 다시 사유하라는 것. <게임의 이름은 유괴>를 원작으로 한 영화 <게임> 또한 이처럼 발상의 재구성을 요하는 트릭을 숨겨놓은 채 관객을 게임으로 초대한다. 제안서를 거절당한 광고기획자 사쿠마는 광고주 가츠라기의 집 앞을 서성이다 가츠라기의 딸인 쥬리를 만난다. “나를 유괴하지 않겠어요?”라고 유혹하는 쥬리. 그리하여 가츠라기를 상대로 한 사쿠마와 쥬리의 유괴 자작극 게임이 시작된다. 빈틈없는 유괴 시나리오를 만드는 철두철미한 광고기획자 사쿠마 역은 후지키 나오히토가 맡았다. 히가시노 게이고 또한 그에 대해 “이미지 그대로의 캐스팅”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영화 부문] 입시 비리를 둘러싼 장르 삼중주 호숫가 살인사건 レイクサイド マ-ダ-ケ-ス 2004년 | 감독 아오야마 신지 | 출연 야쿠쇼 고지, 야쿠시마루 히로코 명문 사립중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세명의 학생과 그 학부모들, 그리고 유명 입시 강사가 외딴 호숫가 별장에 모인다. 그곳에 뜻하지 않은 방문자가 찾아오고, 이어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원작 <호숫가 살인사건>은 세개의 장르가 동거하는 소설이다. 살인사건을 은폐하려는 이들의 처절한 노력을 다룬 전반부의 스릴러 전개는 어느새 클로즈드 서클, 즉 밀실 트릭을 규명하는 본격 추리물로 바뀐다. 그리하여 밝혀지는 진실은 입시제도의 추악한 이면이라는 사회파 미스터리적인 고발로 가 닿는다. 아오야마 신지가 각색을 통해 방점을 찍은 부분은 그중 세 번째. 원작에 비해 인물의 수도 줄이고 사건 전개도 단순화한 영화판 <호숫가 살인사건>은 범인과 피해자의 행동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등 추리물로서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반면 경쟁을 부추기는 입시제도에 대한 당사자들의 입장을 더욱 첨예하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일제고사 실시와 3불정책 폐지 등 뜨거운 감자가 산적한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을 섬뜩하게 상기시킨다. [영화 부문] 남겨진 자의 고통 편지 手紙 2006년 | 감독 쇼노 지로 | 출연 야마다 다카유키, 사와지리 에리카 시작과 함께 범죄가 일어나고 범인이 체포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관객에게 낱낱이 보여진다. 요컨대 <편지>는 추리물이 아니다. 그 직후부터 카메라는 남겨진 범인의 동생 나오키를 쫓는다. 자신을 뒷바라지해주던 형의 투옥으로 인해 진학을 포기한 나오키는 직업전선에 뛰어들지만 ‘살인자의 동생’이라는 꼬리표는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닌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 가장 정통적인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까운 <편지>를 각색한 이 영화에서 극을 이끌어가는 힘은, 가족이 재소자라는 사실을 숨기며 살아가야 하는 나오키의 살얼음판 같은 삶의 궤적에서 나온다. 그리고 연대책임을 중시하는 일본사회의 냉혹한 공기가 그 서스펜스를 더한다. 원작과의 주요한 차이점은 나오키의 꿈을 뮤지션에서 개그맨으로 바꾼 것. 그리고 이 차이는 원작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결말을 이끌어낸다. [드라마 부문] 원작을 과감히 벗어난 걸작 백야행 白夜行 2006년 | | 출연 야마다 다카유키, 아야세 하루카 각색에서 원작과 철저히 다른 노선을 견지한 드라마. 그런 이유로 방영 당시 원작의 팬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소설 <백야행>이 15년 전 발생한 전당포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형사 사사가키와 목격자들의 시점을 중심으로 서술된 반면 드라마 <백야행>은 줄곧 범인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이에 관해서는 작품의 자유로운 각색에 대해 열린 입장인 히가시노 게이고조차 부정적으로 평가한 바 있는데 “원작이 미스터리라면 드라마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것이 제작진의 입장이었다. 어쨌든 이같은 각색을 통해 시효가 만료되기 전까지 해는 떠 있으되 밤과 다를 바 없는 날들을 살아야 하는 주인공들의 내면과 원작의 주제의식은 더욱 부각되었고, 마침내는 가도카와의 TV매거진 <더 텔레비전>이 매년 주최하는 드라마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비롯해 4개 부문을 석권했다. 이 드라마가 논쟁의 중심에 오른 또 하나의 이유는 캐스팅에 있다. 주인공, 즉 범인 역할을 맡은 야마다 다카유키와 아야세 하루카는 2004년에 방영된 멜로드라마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남녀 주인공이었던 까닭이다. 전작의 잔상이 채 지워지기도 전에 이전 드라마와는 판이한 범죄물의 주인공으로 나란히 캐스팅된 터라 몰입할 수 없다는 시청자의 의견이 줄을 이었다. 게다가 15년간 두 사람을 쫓는 형사 사사가키 역의 배우는 다케다 데쓰야. 일본 시청자에게는 학원물의 대명사 <3학년 B반 긴파치 선생>의 긴파치 역으로 각인된 인물이다. 마치 학원 멜로물의 주인공이었던 두 학생을 쫓는 선생님의 구도인 셈인데, 이 또한 제작진들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범인들을 괴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작가와 연출가의 변이다. 참고로 드라마 <백야행>과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같은 작가(모리시타 요시코)와 연출가(이시이 야스하루)에 의해 만들어졌다. [드라마 부문] ‘논리 괴물’ 과학자의 첫 등장 갈릴레오 ガリレオ 2007년 | <후지TV> | 출연 후쿠야마 마사하루, 시바사키 고우 2007년 4분기 게쓰구(<후지TV>의 간판인 월요일 9시 드라마) 히트작. 천재 물리학자 탐정 유가와 마나부가 등장한 단편집 <탐정 갈릴레오>와 <예지몽>의 에피소드들을 각색했다. 그러니까 제작 순서로 보자면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은 드라마 <갈릴레오>의 스핀오프가 되는 셈이다. 얼핏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사건들을 과학으로 규명한다는 매회의 전개는 원작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캐릭터에는 상당한 수정을 가했다. 유카와의 인간적인 측면은 한층 배제되었고 ‘논리 괴물’로서의 면모는 강화되었다. 특히 원작에 없었던 유카와의 “실로 재미있군”과 같은 말버릇이나 사건의 실마리가 떠오른 순간 홀린 듯 수학식을 풀어대는 모습 등은 탐정드라마로서 <갈릴레오>의 개성을 확고히 각인시켰다. 유카와에게 자문을 구하는 형사 캐릭터를 남성인 쿠사나기에서 여성인 우쓰미(시바사키 고우)로 바꾼 것도 각색상의 변화. 하지만 단순히 성적 긴장을 활용하기 위한 이같은 드라마상의 설정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2008년에 발표한 신작 <갈릴레오의 고뇌>에서는 우쓰미 캐릭터를 소설에 등장시키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우쓰미가 등장한 원작 <갈릴레오의 고뇌>의 드라마판인 <갈릴레오 제로>(2008)에서는 거꾸로 유카와의 파트너로 쿠사나기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의 현지 개봉 직전 방영된 스페셜 드라마였던 <갈릴레오 제로>에서는 장차 영화에서 맞붙게 될 유카와의 최대 라이벌 이시가미의 학창 시절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드라마 부문] 개그 퍼래디로 각색한 사기행각 유성의 인연 流星の絆 2008년 | | 출연 니노미야 가즈나리, 니시키도 료, 도다 에리카 사자자리 유성군을 관측하고 돌아온 어린 세 남매는 부모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모습을 발견한다. 자라서 범인을 찾아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하는 그들.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나 어느덧 시효의 만기가 눈앞인 때, 남매 사기단으로서 사기행각을 벌이며 새로운 타깃을 물색 중이던 그들은 부모를 죽인 범인의 단서와 우연히 맞닥뜨리게 된다. <유성의 인연>은 방영 전부터 화려한 라인업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드라마계의 명콤비 구도 간쿠로(작가)와 이소야마 아키(PD) 제작, 그리고 주연으로 자니스의 니노미야 가즈나리와 니시키도 료를 내세운 이 작품은 금요드라마로서는 2000년대 들어 처음으로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특히 세 남매의 사기행각을 액자식의 개그 패러디로 각색한 에피소드들은 ‘대사의 십자포화’로 불리는 작가 구도 간쿠로의 재기가 빛을 발한 대목. 다소 무겁게 진행되는 살인사건의 메인 플롯과 요소요소에 끼어드는 사기 트릭 에피소드의 발랄한 구성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면서 롤러코스터적인 재미를 선사한다. 고수와 손예진의 <백야행> 앞으로 TV와 스크린에서 만날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 먼저 2009년 2분기 드라마로 <명탐정의 규칙>(名探偵の掟)이 편성되었다. <아사히TV> 금요드라마로 4월17일부터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자신이 소설상의 탐정 캐릭터라는 것을 인지하는 주인공을 통해 본격 추리물의 공식을 풍자하는 유머러스한 시리즈. 마쓰다 류헤이의 동생인 마쓰다 쇼타와 오다기리 조의 배우자인 가시이 유우가 주연을 맡았다. 국내에 출간된 <방황하는 칼날>(さまよう刃)도 현재 영화로 제작되고 있다. 끔찍한 범죄를 통해 외동딸을 잃었지만 정작 범인들이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가벼운 형벌을 받는 현실에 분개하여 스스로 복수에 나선 아버지 역할로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데라오 아키라가 캐스팅되었다. 한국에서 제작되는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 영화도 있다. 바로 <백야행>으로, ‘하얀 어둠 속을 걷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남녀주인공 역은 고수와 손예진이, 형사 역은 한석규가 맡았다.

<전주영화제 프로그래머가 추천한 영화10편>

(서울=연합뉴스) 김지연 기자 = 해마다 봄이면 영화의 성찬을 차려놓는 전주국제영화제(JIFF)가 어느덧 10회째를 맞아 42개국에서 공수한 영화 200편을 준비해 30일부터 손님들을 맞이한다. 정수완ㆍ유운성ㆍ조지훈 프로그래머가 영화제를 찾는 관객을 위해 놓쳐서는 안 될 영화 10편을 추천했다. ▲철서구(West of the Tracks) = 1∼9회 영화제에 소개됐던 신인 감독들 가운데 현재 활약 중인 감독들의 데뷔작을 재상영하는 'JIFF가 발견한 감독열전' 섹션 작품. 왕빙 감독은 철거 명령이 내려진 중국 셴양의 티엑시 공업지구를 2년간 촬영했다. '녹', '폐허', '철로' 세 부분으로 나뉜 영화는 영화제에서만 만날 수 있는 보물 같은 작품으로 551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견딜 수 있는 열혈 관객을 기다린다. ▲킬(Kill) = '공각기동대'를 만든 오시이 마모루 감독과 일본 신예 크리에이터 3명이 만든 옴니버스 액션영화. 영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밤샘도 마다하지 않는 관객을 위한 전주영화제의 인기 심야 프로그램 '불면의 밤' 작품이다. 칼에 의한 액션을 주제로 하며 다양한 시대배경과 형식으로 펼쳐지는 4개의 이야기가 한밤의 디지털 향연을 선사한다. ▲안나와의 나흘 밤(Four Nights with Anna) = 폴란드의 변두리 마을, 간호사 안나를 사랑하는 레온은 매일 밤낮으로 그녀를 엿본다. 괴상하지만 헌신적인 레온의 사랑을 담담하게 묘사해 현대사회의 비정함과 고립된 인간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영화. 1991년 전업화가로 돌아섰던 폴란드의 거장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감독이 17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작품. ▲파르케 비아(Parque Via) = 파르케 비아는 주인공 베토가 세상과 단절돼 머무는 공간이다. 베토와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것은 가끔 방문하는 집주인과 텔레비전, 일주일에 한 번씩 함께하는 창녀 루페가 전부. 엔리케 리베로 감독은 주인공과 집주인 간의 관계를 통해 빈부격차, 인종 차별 등 현대 멕시코 사회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리얼리티를 위한 감독의 세심함이 돋보이는 영화. ▲굿바이 솔로(Goodbye Solo) = 따뜻한 마음을 가진 택시기사 솔로는 한 노인으로부터 자살여행을 위해 2주간 기사가 돼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솔로는 노인의 마음을 돌려 살리기로 결심한다. 미국 내 이주민들의 삶을 그려온 라민 바흐라니 감독이 만든 감성 코미디로, 세네갈 출신 흑인과 백인 노인의 특별한 우정이 관객들에게 따뜻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테라 마드레(Terra Madre) = '대지의 어머니'란 뜻의 테라 마드레는 건강한 땅에서 건강한 정신으로 기른 음식을 먹어야 인간이 살 수 있다는 슬로 푸드 공동체 운동을 말한다. 이들은 언어, 사상, 종교, 정치적 장벽을 넘어 오직 자신과 대지의 관계를 통해 세계화에 맞선다. 이탈리아의 거장 에르마노 올리의 신작으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이탈리아판 '워낭소리'라 할 만하다. ▲너 없인 살 수 없어(No Puedo Vivir Sin Ti) = 법적인 이유로 사랑하는 딸과 생이별을 해야 하는 주인공은 법과 맞서 길고 힘든 싸움을 시작한다. 2003년 대만 6개 채널에서 동시 생중계했을 정도로 대만 사회 전체를 뒤흔들었던 사건을 레온 다이 감독이 감성적이고 호소력 있는 멜로드라마로 재탄생시켰다. 아버지와 딸의 이별 이야기를 흑백화면에 아름답게 담아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것이다. ▲악의 화신(Embodiment of Evil) = 브라질 호러 영화 선구자인 주제 모지카 마린스의 '코핀 조' 연작 완결판. 브라질 영화사상 가장 '매력적으로 사악한' 악당으로 꼽히는 코핀 조는 40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완벽한 후계자를 임신시킬 여성을 찾기 위해 돌아온다. 호러 영화의 모든 요소를 집약해 브라질 사회의 문제점을 비춘다. 간담이 서늘한 밤을 제대로 보내고 싶은 관객들을 위한 영화다. ▲비르와 자라(Veer Zarra) = 비행대대 대장 비르와 파키스탄 여인 자라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 인도의 3대 최고 흥행 감독 중 하나인 야시 초프라가 연출했다. 72세의 노장 감독이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3시간에 달하는 영화는 시종일관 신나고 흥미진진하다. 화려한 춤과 노래, 박력 있는 액션 신과 호화로운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마살라 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질주(On the Run) = 채무 불이행으로 빼앗긴 자신의 차를 찾으려고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찬드레와 그의 여자친구는 임신 사실을 알게 되자 불법 낙태를 위해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일자리를 얻으려 무작정 도시로 오지만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스리랑카 젊은이들의 삶을 다룬 영화다. 스리랑카 특별전에서 선보이는 영화로, 스리랑카의 거장 달마세나 파티라자의 대표작이다. cherora@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스타트렉> 폐인들, 트레키는 누구인가

개인적인 경험. 내가 트레키(Trekkie: 열광적인 <스타트렉> 팬들을 일컫는 고유명사)라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인지한 건 심지어 <스타트렉>이라는 시리즈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도 전이었다. 아니, 이미 알고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시리즈는 본 적 없지만 드라마 에피소드의 각색판이 어린이용 문고본이나 잡지 연재물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시 내가 <원더우먼> 3시즌 에피소드인 에 나오는 SF 텔레비전 시리즈(<스타트렉>은 아니었지만 <스타트렉>의 패러디가 아닐 수가 없었다)의 우스꽝스러운 팬들과 <스타트렉>이라는 드라마를 하나로 연결시키지는 못했던 게 분명하다. 처음에 난 그들이 그냥 웃긴다고 생각했고, 다음엔 미국에서는 어른들이 저렇게 놀아도 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어른 중 저렇게 재미있게 노는 사람들은 없었다. 당시 정말 어린애였던 나는 장난감이 결합되지 않은 유희를 이해하지 못했다(사실은 지금도 이해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며 노는 건가?). 하지만 그 에피소드에 나오는 정신 나간 사람들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놀았다. 그들에겐 장난감이 있었고 그 장난감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판타지가 있었다. 그런 것을 보고 놀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은가? 아이작 아시모프, 스티븐 호킹, 그리고 오바마… 사실 트레키들은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놀림감이었다. <원더우먼>에서도 그들은 우스꽝스러웠고 다른 패러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그들은 아군한테서도 공격을 받았다. 1986년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윌리엄 섀트너가 호스트로 나왔을 때 그는 유명한 “Get a Life” 코미디를 선보였다. 그 단편에서 <스타트렉> 컨벤션에 참석한 그는 어이없는 질문을 해대는 트레키들 때문에 폭발하고 만다. “제발 그렇게 살지 마! 이건 그냥 텔레비전 쇼일 뿐이야! 나가서 네 인생을 살아!” 딱하게도 그의 연설은 주최쪽의 농간과 협박에 의해 에피소드에 나왔던 사악한 커크 선장의 연기로 포장되고 팬들은 안심한다.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듯, 트레키는 미국 기크 문화의 가장 막장스러운 사람들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한참 전에 종영된 텔레비전 시리즈의 세계에 집착하고 유치한 장난감들을 모으며 경제적으로도 무능력해서 서른이 넘어서까지 부모 집 지하실에서 산다. 아, 물론 그들은 여자와 데이트도 못해봤다(여기서 그들 대부분의 성별이 폭로된다). 그 때문에 슬슬 팬들 내에서도 출신을 가르는 시도가 벌어지기도 한다. 여기서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고 팬들은 그 이름에 따라 재배치된다. 자신을 트레커로 분류하는 팬들은 적어도 자기네들은 트레키처럼 무능하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다. 그들은 고등교육을 받은 머리 좋은 기크들이고 높은 연봉을 받는 고급 직종의 종사자들도 많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내놓는 리스트에 오른 이름들은 막강하다. 아이작 아시모프, 스티븐 호킹, 마틴 루터 킹, 앨 고어, 마이크 올드필드, 톰 행크스…. 참,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역시 트레커인 것 같단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스포크를 연기한 레너드 니모이에 따르면 그가 오바마를 만났을 때 악수 대신 셋째와 넷째 손가락 사이를 벌리는 발칸 인사를 하더라나!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트레키 못지않다. 아니, 오히려 더 튄다. 그들은 눈에 뜨이는 소동을 저지를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트레키들을 다룬 유머스러운 다큐멘터리 <트레키즈>에 언급되는 사람들 대부분은 트레키라기보다는 트레커다. 그들은 클링온어를 배우고 사무실을 엔터프라이즈 우주선처럼 디자인하고 발칸족처럼 보이기 위해 귀수술을 할 생각을 갖고 있으며 배심원이 되면 정장 대신 스타플리트 장교 유니폼을 입고 법정에 나간다. 이런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게 되면 <스타트렉> 팬들은 막장 중의 막장이라는 악평을 다시 듣게 된다. 수많은 이들의 아이디어를 흡수하며 확장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트레키/트레커들이 그렇게 괴상한가? 그들의 영원한 적수 <스타워즈> 팬들은 어떤가? 그들도 트레키처럼 부모 지하실에서 살며 장난감들을 모은다. <반지의 제왕> 팬들은 어떤가? 트레키들이 클링온어를 한다면 그들은 요정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미들 어스의 역사를 줄줄 읊을 것이다. 달렉 분장을 하고 국회의사당에 쳐들어간 열성 <닥터 후> 팬은 어떤가? 새로 발견한 행성과 위성에 지나와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붙인 <여전사 지나>의 팬은? <바빌론5> 팬들은? <건담> 팬들은? 일단 일본으로 넘어가면, 일본의 오타쿠들은 가장 흉악스러운 트레키들이 했던 것보다 늘 몇배 더 심한 짓을 한다. 얼마 전에 애니메이션 캐릭터와 결혼하겠다고 소동을 부린 남자 일은 잘 풀렸나? 여기에 대한 답을 한다면, 트레키를 아주 특별한 존재로 정의하는 무언가는 없다는 것이다. 트레키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던 1970년대 초에는 특이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 트레키만큼 열정적인 팬들은 다른 팬덤에서도 존재한다. 그들 모두 각자의 독립된 세계를 꾸리고 발전시킨다는 점에서 이들은 특별히 다를 게 없다. 그러나 트레키들을 의미있는 존재로 만드는 방향성은 존재한다. 이들은 유일한 존재는 아닐지 몰라도 특정 그룹의 의미있는 선두주자이기는 하다. 여기서 그들의 괴상한 패션 취향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그 특징은 이들의 우주가 열려 있다는 것이다. 조지 루카스의 독재 아래 있는 <스타워즈>의 세계와는 달리 <스타트렉>의 세계에서 크리에이터이 진 로덴베리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이들의 세계는 오리지널 시리즈, 영화판, 이후 TV시리즈들(<더 넥스트 제너레이션> <딥 스페이스 나인> <보이저> <엔터프라이즈>)로 수십년간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흡수하면서 확장되었다. 그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들 대부분은 팬덤 안에서 성장한 골수팬들이었다. 특히 그들 중 전문 과학자들의 투입은 주목할 만하다. 외계인과 지구인 사이에서 혼혈아가 태어날 수 있다고 순진무구하게 믿었던 오리지널 시리즈의 과학과 최신 과학 이론들의 경쟁장이 된 후반 시리즈의 과학 차이를 주목해보라. 이 세계에서 엔터프라이즈호의 모형과 스타 플리트 유니폼보다 더 중요하고 매력적인 것은 열려 있는 허구의 세상 안에서 현실 세계의 진짜 지식으로 스스로 의미있는 창조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시리즈의 과거 회귀가 팬덤에 끼칠 영향은 지금 <스타트렉>의 팬덤은 다소 수상쩍은 과도기를 겪고 있다. <보이저> 시리즈와 마지막 영화판 이후, <스타트렉> 프렌차이즈에 속해 있는 작품들은 계속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엔터프라이즈>와 곧 개봉되는 영화 <스타트렉: 더 비기닝>은 모두 프리퀄이며 아직 쓰이지 않은 과거의 재해석이다. 늘 미래를 향해 달려갔던 시리즈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역사 쓰기를 중단하고 (상대적) 과거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영화가 시리즈로 이어진다면 앞으로도 이런 성향은 계속될 것인데, 이 현상이 팬덤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수십년 동안 이어져온 혼란스러운 세계관을 재정비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어져온 <스타트렉> 팬들의 진취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된다.

[외신기자클럽] 놀리우드 제국의 진실은

한 아프리카 신문의 평론가는 “영화를 하루에 세편씩이나 보고도 우리나라에서 제작되는 작품의 반도 제대로 언급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귀띔한다. 영화를 가장 많이 제작하는 곳은 뭄바이도 로스앤젤레스도 아닌 나이지리아의 라고스라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린 겨우 알고만 있을 정도다. 해마다 2천편이 넘는 영화를 제작하는 라고스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수지 맞은 영화공장이다. 나이지리아에 더이상 영화관이라는 게 없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이러한 기록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영화들은 카세트비디오나 DVD로 (불법 비디오 복제시장에서는 물론) 우체국을 통해 대규모로 판매된다. 이 영화들은 하루 종일 이들을 반복해서 방영하는 위성방송과 텔레비전 채널들을 통해 아프리카 전역으로 전파된다. 그중 흥행작들은 아프리카 식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슈퍼마켓 조직망을 통해 유럽은 물론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출되는데,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을 경우 그 수명은 이틀을 넘기지 않는다. 최근 스위스 프라이부르크페스티벌 같은 몇몇 영화제들이 이 놀리우드 현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놀리우드는 10여년 전 나이지리아 독재정치의 종말과 더불어 탄생했다. 할리우드와 달리 놀리우드 ‘제국’은 대형 스튜디오가 아닌 소형 영화제작소를 중심단위로 해 구성됐다. 일명 사업가들이 돌연 영화제작에 나서는가 하면 가톨릭 교회나 사이비 종교단체들이 그들의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영화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해 그런 시스템이 작동을 개시한 것이다. 라고스에는 엄밀히 말해 촬영소라 할 수 있는 것이 아직 없다. 일반 빌라나 호화 호텔들이 배경을 대신하는 게 보통이고, 좀더 큰 규모의 예산이 요구되는 제작인 경우 해외에서 촬영하기도 한다. 장편영화 한편을 열흘 동안 집중 촬영한 뒤 일주일 동안 후반 작업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처럼 짧은 기간 내에 하는 작업이 기술 면에서 영화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건 두말 할 것 없다. 그래서 손가방을 여는 지퍼 소리가 여배우 목소리보다 더 잘 들리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한데 정작 관객은 그런 점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 같다. 자국영화가 할리우드영화를 월등히 능가하는 걸로 봐서는 말이다. 이런 현상은 작품의 형태보다는 내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까 놀리우드영화는 코미디, 멜로, 탐정영화 등 모든 장르를 다루지만 전적으로 아프리카적 관점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게 되는 장면은, 피해자가 양면 거울을 통해 가해자를 알아보는 스릴러영화의 전형적인 장면 대신 경찰관이 거북이를 눕혀놓고 돌리는 장면이다. 누가 범인인지를 거북이 머리가 가려낸다는 거다. 놀리우드는 꿈에서나 볼 법한 일상생활- 마치 한국 미니시리즈나 TV드라마에 나오는 세계- 과 흡사한 흠도 없이 반듯한 물질만능의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환상을 꿈꾸게 한다. 동시에 에이즈와 같은 사회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이슬람과 가톨릭 사이의 종교분쟁을 다루기도 한다. 놀리우드의 활기는 거의 극치에 달해서 영화산업은 이제 이 나라에서 석유산업에 버금가는 제2의 고용주가 됐다. 또한 놀리우드 주변으로는 스타 시스템 또한 발달해서 유명 배우 관련 기사들이 신문지상을 가득 메우고, 파파라치들은 이들의 사생활을 적극적으로 추적하고 공개한다. 게다가 스타들은 대개 가수로도 데뷔하는데, 이렇게 해서 영화는 나이지리아에 음반제작 산업을 탄생시켰다. 뿐만 아니라, 놀리우드는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대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헤어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을 유행시키기도 한다. 이 때문에 젊은이들이 장래를 걸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라고스로 대거 몰려든다. 이러한 놀리우드 현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아프리카가 드디어 자신의 서민문화를 직접 도맡게 됐다는 결론을 내린다. 반면 혹자들은 세계 다른 나라들에서 아프리카 대중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수그러들자 여기서 오는 허탈감을 놀리우드가 대신 메워주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song book] 두번의 장례식

이맘때의 일본 대중음악계는 추모 시즌이다. 몇달 전 같은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오자키 유타카가 1992년 4월25일 숨을 거두었고, 록그룹 엑스재팬(X-Japan)의 기타리스트였던 히데가 1998년 5월2일 사망했으며, 자드(Zard)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인기 여성 보컬리스트 사카이 이즈미가 유명을 달리한 날 또한 2007년 5월27일이었기 때문. 세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스스로의 역량을 미처 다 보여주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기에 해마다 이 무렵이면 그들에 대한 추모 공연이나 이벤트 등이 끊이지 않는다. 때맞춰 방송사들도 특집 프로그램들을 편성한다. 이들 중 사망 당시 가장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이는 히데였다. 그가 소속되었던 그룹 엑스재팬은 최고의 위치에서 군림하던 1997년 말 해산을 발표했다. 팬들로서는 해산의 충격에서 미처 헤어나지도 못한 때에 기타리스트 히데의 죽음이라는 이중의 충격을 받아야 했던 것. 1998년 5월1일, 방송 출연을 마치고 귀가한 히데는 다음날 수건으로 목이 졸려 숨진 채로 발견되었으며 그 수건의 끝은 문고리에 매여 있었다. 경시청에서는 자살이라 단정했지만, 의욕적으로 솔로 활동을 전개하던 히데였기에 자살의 정황이 없는데다, 스스로 목을 매기에는 위치가 너무 낮다는 이유로 사고사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렸다. 어쨌든 히데의 사망 이후 두명의 팬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으며, 닷새 뒤에 열린 그의 고별식에는 5만명이 넘는 인파가 식장과 그 주변을 가득 메웠다. 이 숫자는 오자키 유타카의 고별식과 일본의 국민 엔카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고별식에 참석했던 인원을 능가하는 것으로, 당시 그 추도 행렬은 23km에 달했다고 한다. 는 히데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텔레비전의 추모 프로그램에 출연한 엑스재팬의 리더 요시키가 그에게 바친 진혼곡이다. 엑스재팬의 싱글 중에서는 가장 많은 판매고를 기록한 이 발라드는 곽재용 감독의 2004년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삽입되어 제3차 일본 문화 개방 이후 한국영화에 사용된 최초의 일본 대중음악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그 추모 프로그램에서 요시키는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바치고자 이 곡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공교롭게도 히데가 숨을 거두었을 때의 나이 역시 33살이었다

[나의 친구 그의 영화] 그래 목숨 걸고 투표해야해

영화배우도 된 마당에 이번 어린이날에는 영화를 보면서 보내기로 결심하고 아침부터 딸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극장으로 나갔다. 그간 조조상영을 보면서 자유직업인의 이점을 한껏 활용했던 나로서는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극장에 나와 있었다. 그런 식으로 1년에 한번뿐인 어린이날을 때우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좀 놀라웠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세개의 영화가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먼저 <몬스터 vs 에이리언>, 그 다음 <케로로 더 무비: 드래곤 워리어>, 마지막으로 <초코초코 대작전>. 그중에서 우리는 <초코초코 대작전>을 보기로 했다. 뭔가 달콤한 내용일 것 같아서. 그러나 보는 내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더라. 내용은 다음과 같다. 투표에 의해 건강최고당의 헬시 총리가 집권한 이후, 새 정권은 건강 제일을 내세우면서 몸에 좋지 않은 초콜릿을 금지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 법안에 따르면 초콜릿을 제조하거나 판매하는 사람은 물론 그걸 먹는 사람까지도 경찰에 구속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건강을 중시하는 총리를 뽑은 것이지, 어디 초콜릿을 먹지 못하게 만드는 총리를 뽑은 것이냐고 반발하며 시민광장에 모여들던 국민들도 경찰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진압 작전으로 사람들을 강제 해산하고 연행하자, 하나둘 자신들이 괴물을 뽑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국민들은 두 가지 덫에 걸렸는데, 하나는 자신들이 직접 투표해서 그 괴물을 뽑았다는 점이며(이른바 ‘국개론’), 또 하나는 국민이라면 정권이 제정한 법률의 바깥을 상상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점(그러니까 ‘법치’)이었다. 국민들의 저항은 이 두 가지 덫에 의해 무력화된다. 정권의 주된 공격 방법은 ‘우리를 뽑은 사람들은 너희들이다’와 ‘모든 불법적인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논리를 번갈아 사용하는 것이다. 두 가지 덫, 국개론과 법치에 무력화된 우리를 마주하다 그리하여 헌법에 보장된 집회 및 결사의 자유와는 무관하게 주간이든 야간이든 모든 집회는 이 나라에서(어느 나라에서?) 금지된다. 정권은 초콜릿 금지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된 집회를 가지는 건 불법행위라고 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법행위가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과 합치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공권력은 합법 영역에 대해서 사유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괜찮고 그 다음부터는 법적 논란의 영역이라는 식으로 신중하게 접근하지 않고, 오직 불법의 가능성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공권력은 그 불법의 가능성이라는 잣대로 기본권을 포함한 국민의 모든 행위를 구속 수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이렇게 되면 ‘먼지털이’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지만,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신고된 집회마저도 원천봉쇄하고 참가자들을 불법시위자로 연행한 뒤 엄중처벌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기본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니 바로 ‘중딩 3년생’들이다. 이 중학생들의 주장은 간단하다. 왜 초콜릿을 먹을 수 없는가? 이에 대한 정권의 설명은 그건 불법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콜릿을 먹는 게 불법적이라면 애당초 법이 잘못된 게 아닌가? 중학생들이 다시 되묻는다. 법의 잘잘못을 따지는 일은 정권의 영역을 벗어난 일이다. 법 자체가 그 정권의 사적 이익에 부합되게 제정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되물음에 대해 정권은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다. 나를 뽑은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다. 고로 그런 법을 만든 건 너희들이지 내가 아니다. 나는 위임받은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할 뿐이다. 어른들은 이 덫에 빠져서 무기력해졌지만, 중학생들에게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모든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자. 왜 초콜릿을 먹으면 안되는가? 뿔난 중딩들 vs 촛불소녀, 초콜릿 경찰 vs 민주 경찰 그리하여 이 무서운 중딩들은 ‘초콜릿 언더그라운드’라는 지하조직을 만들고, 헌책방을 뒤져 인터넷에서 검색이 금지된 초콜릿 제조법을 알아낸 뒤 밤마다 모여서 초콜릿을 먹는 불법집회를 연다. 정권과 그들의 사병으로 전락한 경찰, 그리고 알아서 스스로 통제하는 언론은 이들 중딩들을 체제전복세력으로 규정하고 검거에 나선다. 말하자면 이놈의 정권은 초·중·고와 싸우는 셈이다. 결국 경찰은 다른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채증자료를 토대로 불법집회에 적극 가담한 증거를 다수 확보한 중학생 한명을 연행해 구속시킨다. 출동 직전, 경찰본부장의 독백은 경찰 수뇌부가 집회에 나선 이 중학생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준다. “법을 어기는 쓰레기 같은 놈들.” 경찰이 친구를 강제 연행하는 데 흥분한 스매져가 정부의 편을 드는 반장 프랭키에게 소리친다. “데이브가 뭘 잘못했는데? 물건을 훔쳤어? 사기를 쳤어? 사람을 죽였어? 이런 사회가 무슨 건강한 사회야.” 이런 사회가 무슨 건강한 사회냐고 비아냥거리는 데에는 정권의 통제를 받는 텔레비전과 라디오에서는 건강최고당 헬씨 총리가 나와서 연방 초콜릿 없는 건강사회를 만들어가자고 떠들어댔기 때문이다. 초콜릿에 대한 정당한 욕구를 강제 진압하면서 국민들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서 마침내 폭발할 지경이 되는데도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건강최고당은 시민광장에서 무슨 페스티벌인가의 개막식을 한단다. 한마디로 제 무덤을 파는 것이다. 며칠 전에 서울광장에서 열린 이 개막식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더라? 만화영화를 보는데 이게 현실인지 허구인지 헷갈린다면 그 사람의 정신세계의 오묘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꼴이었다. 어린이날을 맞이해서 딸과 극장에 갔다가 정부 말대로라면 폭력시위를 선동하는 좌파영화를 봤다고나 할까. 연초에 용산참사를 보면서 앞으로는 목숨 걸고 투표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만화영화의 주제 역시 정치를 외면하지 말고 반드시 올바르게 투표하자는 것이었다. <초코초코 대작전>은 이명박 시대의 컬트 작품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인 건 초콜릿을 사수하려는 학생들을 진압하려는 경찰들 이름이 ‘초콜릿 경찰’이라는 것. 그게 꼭 ‘민주 경찰’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권력이 비판세력의 언어까지 선점하면 독선은 불가피하다. 마침 영화를 보고 난 뒤 뉴스에서 들으니 청와대로 초청한 어린이들 앞에서 대통령은 퇴임한 뒤에 ‘녹색운동가’가 되겠다고 말했다더라. 이 뭥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