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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나의 친구 그의 영화] 판타스틱했던 옛 극장을 닮았어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의 누구나 예상 가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개그콘서트-소비자 고발>의 황현희 PD가 자신의 예고를 지키지 않듯 소설가 고발의 본 PD 역시 소설가 김연수를 집중 조명하겠다는 지난편의 예고를 지키지 않을 예정이다.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는 게 겁난다. 파렴치한 남자일 뿐 아니라 강간범이기까지 하다는데, 아무리 영화라고 해도 친한 친구가 그런 나락으로 빠진 걸 어찌 눈뜨고 볼 수 있을까. 혼자서는 도저히 보지 못할 것 같으니 동네방네 수소문하여 소설가 단체관람이라도 추진해볼까 싶다. 관심있는 소설가들은 연락주기 바란다. 지난주 김연수 배우가 따님과 함께 보았다는 <초코초코 대작전>의 뜬구름 잡는 듯하나 지나치게 리얼리즘(이라는 게 현실의 리얼한 사실에 입각한, 그거 맞지요?)을 표방하는 스토리를 읽고 나니 나 역시 아주 오래전 아버지와 함께 보았던 영화가 생각난다. 1937년생이신 아버지는 온몸에 두꺼운 뼈를 장착하고 계시며(현재 몸무게 97kg), 노인정에서는 온갖 잡무를 도맡아 할 정도로 활동적이시고 (노인정의 영계랄까) 드라마는 꼬박꼬박 챙겨보지만 (아침 드라마 필수!) 스포츠는 절대 보지 않는 감성 풍부한 분이다. 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영화 보는 법을 배웠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 중 첫 번째가 같은 영화를 두번 보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자면 아버지는 영화를 ‘무척’ 사랑하는 분이었다. 같은 영화를 세번씩 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보는 영화 장르는 단 하나였다. 무조건 액션이었다. 아버지는 극장에 가서 같은 액션영화를 두번, 세번 보았다. 아버지 짐자전거에 묶여가던 풍경 극장에 가던 날을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아버지는 (뒷좌석에 높은 손잡이 같은 게 세워져있어 짐을 묶기 편하도록 만들어진) 짐자전거에 형과 나를 꽁꽁 묶고 극장을 향해 페달을 밟았다. 불면 날아갈까 자전거에 태우면 떨어질까 노심초사 걱정하는 아버지의 잔정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짐자전거에 묶여서 거리로 나설 때는 창피해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과 나는 적들에 생포된 포로의 모습으로 극장에 끌려갔다. 극장에 들어서면 아버지는 우리 둘을 앉혀놓고 영화 관람에 집중하셨다. 보고 또 보고 또 보았다. 아버지가 이소룡의 무술에 심취해 있을 때 형과 나는 잠에 취했다. 처음이야 열심히 보았지만 같은 영화를 두세번 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극장에 앉아서. 아버지는 신비로운 무술을 보고 연방 껄껄 웃었고 (지금도 텔레비전을 보다 훌륭한 액션만 나오면 그러신다) 우리가 자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화를 충분히 사랑한 아버지는 다시 우리를 짐자전거에 묶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 보았던 영화는 단 한편도 기억나지 않지만 형과 내가 잠에 심취했던 극장의 분위기만큼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생이 되고 영화를 열심히 보았다. 주로 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그래요, 저, 그런 학생이었습니다) 시장 한복판에 있는 아카데미 극장에서 동시상영을 보았는데 극장 분위기가 참으로 남달랐다. 소도시 김천에서 좀 논다 하는 학생들이 극장에 모여들었는데, 이 학교 저 학교가 뒤섞이다보니 영화 ‘친구’의 극장 패싸움 장면까지는 아니더라도 소규모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극장의 최고 명당은 스크린 바로 앞 그러니까 제1열이었는데, 이곳은 동네에서 최고로 잘 노는 형들이 스툴처럼 생긴 의자에 다리를 턱 하니 올리고 담배를 피우며 영화 관람을 하는 자리였다. 극장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풍경인데 그때는 그랬다. 화면에서는 비가 내렸고, 맨 앞자리에서는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답은 늘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가스 제닝스의 영화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을 보면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극장의 풍경이었다. 영화의 첫 장면에 극장이 등장한다. 동네에서 좀 노는 아이인 리 카터는 오래전 우리 동네 아카데미 극장의 형님들처럼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관람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담배도 끊었는데) 한대 피우고 싶었다.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에도 극장이 등장한다. 주인공 윌이 리 카터를 위해 촬영한 단편영화를 상영하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극장의 풍경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이소룡의 영화를 보던 풍경과 비슷했다. 언제부터 극장이라는 풍경이 사라진 걸까. 이런 극장이 동네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극장의 시작은 무조건 동네의 영화여야 한다는 규칙을 세운 다음, 영화 <비카인드 리와인드>에서처럼 동네 사람들이 함께 만든 영화를 상영하는 것도 좋겠고, 학교에서 내준 영화 만들기 숙제를 동네 사람들 앞에서 상영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나라면 어떤 영화를 보여주고 싶을까. 유명 소설가가 한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동안 쫓고 쫓기고 속고 속이며 편집자와 싸워나가다 결국 마감이 한참 지나서야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되는 휴먼드라마가 좋을까, 아니면 유명 소설가가 우연히 한 영화에 파렴치한으로 등장했다가 점점 개성이 강한 조연을 맡게 되고 악역 전문 배우가 된 뒤 자신의 실제 성격마저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마는 본격 스릴러물이 좋을까. 써놓고 보니 둘 다 코미디물이 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생각을 말자. 영화 시작하기 전에 젊은이들이 만든 단편영화 한편 트는 것도 불가능한데, 꿈같은 이야기다. 가스 제닝스 감독의 전작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뒤늦게 보고 호들갑 떨며 칭송하던 영화였다. 원작도 원작이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뻔뻔하다. “아, 그런 리얼리티의 문제는 말이죠, 저의 영화에서는 취급하지 않습니다”라는 듯한 태도가 영화 전체에 깔려 있다. <나의 판타스틱 데뷔작>도 마찬가지다. 가스 제닝스가 좋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장난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굳이 영화 전체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것 같지도 않다. 어딘지 모르게 비어 있고 “그래서 이게 다야?” 싶기도 하고, 사건은 늘 뜻밖의 길로 전진하고 정답은 늘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 가스 제닝스의 영화는 아귀가 딱 맞물리면서 지독한 감동을 준다든지 엄청난 반전 때문에 손에 땀을 쥔다든지 하는 장면은 거의 없고 모든 게 부실하고 널널하다. 가스 제닝스의 영화는 어쩐지 오래전의 극장을 닮았다.

봉준호 감독이 말하는 <마더> 탐험기

봉준호 감독과 그의 영화를 이야기하는 건 모험심 가득한 탐험가와 함께 떠나는 여행과 비슷하다. 이미 그 영화의 여정 속을 수십, 수백번쯤 다녀갔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여정이 시작되면 그는 다시금 진지한 자세가 돼 그곳을 탐험하며 생생한 설명을 덧붙여준다. 그는 의례상 던진 질문에도 진지한 고민을 거듭하며, 답변을 하는 중에도 자신의 영화가 가진 함의를 새롭게 분석한다. 봉준호 감독과의 인터뷰가 흥미로운 것은 그렇게 자신의 영화를 객관화하고 그 안을 끊임없이 후벼파는 그의 본성 때문이다. <마더>에 관한 대화 또한 비슷했다. <마더>에 관한 그의 생각 혹은 그와 함께한 <마더> 탐험 기록을 소개한다. -칸영화제는 잘 다녀왔나. =5월15일 떠났다가 어제(19일) 오후에 돌아왔다. 16일 저녁에 영화 상영을 한 뒤 17일 내내, 그리고 18일 칸을 떠날 때까지 계속 인터뷰만 했다. 물론 배우들에게는 흔치 않은 기회였을 것이다. -내심 경쟁부문 진출을 바랐을 것 같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진출해 섭섭하지는 않았나. =음….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김지운 감독님은 다들 50대 아니면 40대 후반 아닌가. 나는 그쪽 나이로 39살이고. 그분들에 비해 나는 너무 젊은 거다. (웃음) 제발 나를 류승완, 김태용, 장준환 이런 감독들과 묶어달라. (웃음) 물론 칸 경쟁 진출을 목표로 영화를 찍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기회가 많다는 얘기다. -촬영을 할 때 이런저런 일로 연락을 했는데, 엄청 힘들다는 느낌을 받았다. 몸도 아팠다고 들었고. =아무래도 쉽지 않은 영화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괴물> 때는 CG 핑계라도 댈 수 있었는데, 이건 정말 나와 주제, 나와 스토리가 완전 벌거벗고 정면대결하는 느낌이라 더욱 어려웠다. 촬영 때는 육체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후반작업 때도 굉장히 예민한 상태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아무래도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만들어가는 게 가장 힘들었던 대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연기에 가장 중점을 뒀다. 혜자 선생님을 중심으로 계속 인물들이 등장하고 퇴장하기 때문에 어디 하나만 삐긋해도 굉장히 치명적일 수 있다고 봤다. -당신이 여러 차례 말했듯이 <마더>는 김혜자라는 배우에서 출발한 영화다. 당신은 김혜자의 ‘국민엄마’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이상야릇한 측면에서 이 모성과 광기의 이중주라 할 수 있는 영화를 떠올렸다고 말해왔다. 그렇다고 해도 스스로의 생각이나 내적 동기가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인물을 극한의 상황에 몰아넣음으로써 캐릭터나 인간들을 더 확연하게 표출시키는 것을 좋아한다. <괴물>에서 가족은 괴물에 잡혀간 현서를 구해야 하고, <살인의 추억>의 형사들은 벼랑 끝에 내몰린 채 수사를 해야 한다. <마더>에서는 혜자 선생님의 어두운 면이나 광기어린 면을 밀어붙이려는 의도가 있었는데 그것이 ‘엄마와 살인사건’이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과 맞아떨어지면서 이런 이야기가 된 것 같다. ‘평온한 한강과 괴물’이나 ‘시골(형사)과 살인사건’처럼 도무지 조화될 것 같지 않은 두 요소를 충돌시키는 것이 내 적성인 것 같다. 김혜자는 신인보다 더 악착같은 배우 -김혜자는 오랜 경험을 통해 공력을 쌓아온 배우다. 감독은 그 배우를 컨트롤하려 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충돌 같은 것은 없었나. =없었다. 어떤 장면을 놓고 해석이 다르거나 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설사 그런 게 있어도 테이크를 거듭하면서 합일점을 찾았다. 예를 들면 혜자가 공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는 장면 있잖나. 거기서 혜자는 사무장의 말을 듣다가 “네, 그런데요…” 하면서 마구 쏟아붓듯 이야기를 한다. 그 장면에 관해서는 나와 혜자 선생님의 해석이 달랐는데, 혜자 선생님의 버전이 더 좋았다. 영화에 들어간 버전이 그것이다. 또 혜자가 미선에게 농약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잖나. 그 장면을 보면서 많이들 웃던데, 혜자 선생님은 좀 스탠더드하게 슬픈 느낌으로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나는 좀 재미있게 해달라고 부탁했고. 나중에는 혜자 선생님도 “아, 이런 느낌으로 하니까 재밌네”라고 얘기했다. 그 정도의 공력을 가진 배우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신 적은 한번도 없다. 사람들은 쉽게 상상 못하겠지만, 혜자 선생님은 자기 연기에 대해 항상 불안해한다. “내가 잘한 거야? 나 텔레비전처럼 했지? 나 이상하지?”라면서 한번 더 찍자고 말하기도 한다. 신인배우들보다 더 악착같다. 나는 그런 면에서 행복했다. -김혜자의 장면을 30테이크 넘게 찍은 적도 있다던데, 체력적으로 힘들어하지 않았나. =혜자 선생님의 첫 촬영날 18테이크를 찍었는데, 그건 복잡한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카메라 움직임에서 실수가 있거나 단역 연기자의 동선이 잘못 됐거나 해서였지 혜자 선생님이 잘못해서는 아니다. 그런데 10테이크 넘어가니까 선생님은 본인 탓이라면서 걱정하셨다. 어떤 스탭들은 내가 어쭙잖게 선생님과 기싸움을 벌인다고 오해하기도 했다. (웃음) 30테이크 이상 찍은 날에는 내가 “오케이”라고 말하자 선생님이 “힘들까봐 억지로 오케이낸 것 아니에요?”라고 물으시더라. “이건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니까 더 찍어도 된다”면서. 그 정도로 열정과 프로정신이 충만한 분이다, 선생님은. 영화의 주제를 암시하는 오프닝 시퀀스 -혜자가 갈대밭을 배경으로 등장해 춤을 추는 첫 시퀀스는 굉장히 강렬하다. =이 영화는 <마더>잖나. 아주 거칠게 말한다면 혜자 선생님을 찍는 영화다. 첫 장면부터 혜자 샘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는 미친 여자일 수도 있고 미쳐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준 거다. 혜자는 넓게 펼쳐진 서정적인 공간에서 춤을 추는데, 더 중요한 건 춤을 출 때의 표정이다. 이상한 고통이 느껴지기도 하고 유체이탈된 사람 같기도 하고. 어쩌면 그것 자체가 광기인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혜자를 비추면서 제목이 뜨는데, 그때 혜자는 왼손을 옷 속으로 감춘다. 그야말로 뭔가를 감추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 장면을 거기에 붙였다. 이 영화에서 손은 죄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것을 암시하는 장면도 여럿 넣었는데, 오프닝의 두 장면에서 이 영화에 관해 어느 정도 알려주는 것 같다. -첫 장면의 춤은 인상적이었다. 어떤 주문을 했나. =라스트신의 춤은 실제로 관광버스도 태워드리고 해서 익힐 수 있었다. 아줌마들이 “아이고 총각” 하면서 나와 제작부 친구들의 티셔츠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고 하는 것까지 다 보시면서. (웃음) 그런데 첫 장면의 춤은 혜자 선생님의 가장 걱정 중 하나였다. 결국 여자 연출부 2명과 함께 방에서 매일 연습하며 익히셨다. 선생님은 이 장면을 촬영할 때 모든 스탭들이 함께 춤을 췄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춤을 춘 건 나와 서우식 프로듀서뿐이었다. (웃음) 아마도 메이킹필름을 보면 우스꽝스러울 거다. -사건 현장에 출동한 형사반장이 “웬일로 이렇게 현장 보존이 잘됐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재미있었다. <살인의 추억>에 대한 자기반영 같더라. =어찌하다보니 배경도 지방이고, 살인사건과 형사가 나오니까 자연히 나도 <살인의 추억>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차라리 <살인의 추억> 때와 뭐가 같고, 뭐가 다를까, 어떻게 변주해볼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됐다. 80년대 형사인 송강호나 김뢰하는 용의자를 직접 구타했는데 현대가 배경인 여기서는 사과를 차는 것으로 설정했다. 폭력은 쓰지 않되 폭력의 분위기를 조장한달까. CSI 운운하는 점도 비슷한 차원이다. 물론 나른하면서 여전히 아둔한 분위기는 <살인의 추억>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웃다가 슬프다가 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 -형사가 세팍타크로 자세로 사과를 차는 장면이나 혜자가 미선에게 농약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어둡고 심각하면서 무거운데도 거기에 짓눌리지 않는 유머러스한 장면이 많았다. 처음부터 호흡조절을 위해 미리 장치한 것인가. =그런 것을 계산하지는 않는다. 시나리오 쓰거나 찍을 때 본능적으로 나오는 것 같다. 사람들은 어두운 분위기에서 갑자기 웃기고 하니까 걱정을 하는데, 내게는 웃다가 슬프다가 하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일본 관객은 고지식해서 그런지 소심해서 그런지 (일본어투로)“웃어도 되는 것입니까?”식의 반응이다. (웃음) -<괴물>에서처럼 공권력에 대한 불신과 개인의 자위권 문제가 등장하더라. =<괴물>에서 가족들은 사회와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회가 괴물이다’라는 주장이 영화의 주제라고까지 할 수 있지만, <마더>에서는 그저 출발점인 것 같다. 엄마는 어차피 고립하게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엄마가 어떻게 움직이나를 관찰하는 게 핵심이니까. -그럼에도 그것이 당신의 이 사회에 대한 뿌리깊은 생각인 것 같기도 하다. =아, 난 한국사회를 사랑한다. (웃음) 복지도 잘돼 있고, 너무 많은 혜택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웃음) 억눌린 성적 욕망은 히스테리의 기본 -혜자와 도준이 같이 자는 장면이 몇 차례 나오는데, 굉장히 불안한 느낌이 조장된다. 오이디푸스적인 모티브 또한 확실하게 느껴진다. =한국 관객은 혜자와 도준이 섹스를 했다는 생각보다는 도준이 모자란 아들이다 보니 성인인데도 엄마 젖을 만지면서 잘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 같다. 사실 오이디푸스 모티브나 모자간의 성적 관계가 있다, 없다를 떠나서 좀더 넓은 시각에서 보면 <마더>는 섹스에 관한 영화 또는 섹스라는 서브텍스트를 품은 영화다. 많은 대사와 장면에서 계속해서 섹스를 암시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엄마와 아들이라는 틀을 벗으면 좀더 잘 보일 수도 있다. 결국 그 좁은 집에 남녀 단둘이 사는 것이잖나. 엄마는 도준의 섹스를 통제하려 하고. 영화 전체를 누가 누구를 지배하려고 하나, 라는 관점으로 봐도 재밌을 거다. -도준은 엄마의 통제에서 빠져나가려 하는 듯 보인다. 엄마가 약을 먹이는 도중 오줌을 싸는 장면이나 술집을 찾아가고 여성들에게 껄떡거리고 하는 것도 그렇다. =사건이 나던 밤 도준의 여정은 성욕에 이끌린 것이다. 대사에도 나오지만 “발정난 개”의 여정이다. 그야말로 배설을 한 뒤 술집 마담에게 집적거리다가 나중에는 마담 딸에게 집적거리고, 살해당한 아정이까지 쫓아가게 된다. 그리고 결국엔 엄마 젖을 만지면서 잠든다. 그리고 그 여정 속에는 비극이 감춰져 있다. 혜자의 여정에도 성적 요소가 강하다. 혜자는 진태 집에 몰래 들어가는데 커튼 뒤에 갇혀서 진태와 미나의 섹스를 보게 된다. 그 다음에는 그 진태가 웃통을 벗은 채 등장해 뭔가 성적으로 위협적인 이야기를 한다. 얼마 뒤에는 마을 전체의 섹스도 엿보게 된다. 마침내 클라이맥스에 가면 혜자에게 성적으로 공격성을 띠는 남자까지 등장한다. -정말이지 이 영화 속 모든 사건의 이면에는 억눌린 성욕이 존재하는 것 같다. =억눌린 성적 욕망이야말로 인간 히스테리의 기본인 것 같다. 도준은 섹스를 하고 싶은 데 못하는 아이다. 아정이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하고, 마을 남자들의 욕망은 뒤틀려 있고. 그런 가운데 섹스로부터 차단된, 생리대를 쓴 지 아주 오래된 혜자가 그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사회적인 풍자를 많이 배제해서인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성적 히스테리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그 섹스라는 서브텍스트가 지금 당신이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실체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마을 남자들이 소녀 한명을 능욕한 사건이 몇번 있었는데 그런 게 영감을 주기는 했지만 그것을 고발하려는 차원은 아니니까. 아까 내가 서로 다른 요소를 뒤섞거나 충돌시키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엄마와 살인사건’이 그렇듯이, ‘엄마와 섹스’도 정말 안 어울리는 요소잖나. 특히 한국사회에서 엄마는 섹스의 반대말 아닌가. 엄마들이 그렇게 억눌려 있기 때문에 고속버스에서 아저씨들과 부비부비를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웃음) 따져보면 엄마이기 때문에 섹스가 나온 것 같다. 가장 어울리지 않는 요소를 뒤섞는 내 본능에 따라서. 과도한 자식사랑은 숭고한가, 광기인가 -후반부 혜자의 “우리 아들 발톱의 때만도 못한 새끼가…”라는 대사는 당신이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 있다. 그것을 모성이라 불러야 할지 광기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부모들은 짐승이 되기 쉬운 것 같다. 자식으로 인해서 미쳤을 때 그게 숭고한 사랑이냐 야만적인 광기냐, 이 영화는 그 이야기인 것 같다. -이 영화는 혜자가 사람들을 하나씩 만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혜자의 거듭되는 1:1 대결인 셈인데, 그 과정이 <사망유희>까지는 아니더라도 판타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혜자 선생님도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인물들의 대사는 일상적이고 리얼한데 전체를 보면 몽환적이고 아련한 데가 있다고. 혜자는 이 사람, 저 사람을 거쳐서 결국 마지막엔 아들과도 대결하는데, 어차피 이 영화는 엄마가 사건을 헤집고 들어가는 이야기이니까 시각적으로도 혜자가 어디론가, 그것도 우군도 없이 홀로 걸어가는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강조하려 했다. 그것이 핵심 이미지 같기도 했다. -이 영화 전반에 걸쳐서 특징적인 것은 극단적인 빅 클로즈업이다. =미묘하게 불안정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빅 클로즈업을 사용했다. 화면비율을 2.35:1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턱이나 이마가 많이 잘리는데, 그 느낌이 중요해서 2.35 : 1을 썼다. 또 빅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혜자 선생님과 원빈의 눈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는 거짓이나 무언가를 감추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누군가가 거짓을 행하는가는 눈을 보면 잘 드러나는 것 같다. 그리고 혜자 선생님이나 원빈은 눈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기도 해서 눈에 가깝게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당신은 어떤 영화든 스스로 만들고 싶어 하는 특정한 장면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마더>에서 꼭 만들고 싶었던 장면은 무엇인가. =라스트신이다. 혜자가 아줌마들과 어울려 버스 안에서 춤추는 장면 말이다. 2004년에 혜자 선생님에게 출연 제의를 할 때도 이미 그 장면은 있었다. 어릴 때 오대산에 갔는데, 버스가 입구에 도착했는데도 아줌마들은 그 자리에 차를 세워놓고 1시간 넘게 춤을 추더라. (웃음) 그때는 어려서 그랬는지 추태라고 생각했다. 근데 나이가 드니까 좀 달리 보이더라.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각자에게 다 사연이 있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

[김영진의 점프 컷] <김씨표류기>는 표류하고 말았나

<김씨표류기>는 올해 불운한 영화 중 한편으로 꼽힐 만하다. 내가 본 극장에서 대다수 관객은 이 영화를 즐겼다. 사방을 쓱 둘러보니 흐뭇한 미소를 짓는 이들이 많았다. 어느 면에서나 빠지는 데가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소재도, 풀어가는 연출도, 연기도 수준급이었다. 정재영이야 원래 연기를 잘하는 배우지만 그의 상대역이었던 정려원도 기대 이상으로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재미있다는 느낌 이상으로 영화가 나아가지는 못하고 멈칫거리는 인상이었다. 영화 중반까지 치고 올라가던 영화가 절정부를 축으로 완만하게 기력이 하강하면서 귀여운 영화라는 것 이상의 여운을 남기지 못한다. 절정부를 축으로 하강하는 감정이입 파산한 신용불량자가 한강에 투신자살했다가 무인도인 한강 밤섬에 휩쓸려가 그냥 거기 눌러앉아 살게 된다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주요 컨셉은 고독한 인간이 소통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린 주변에서 종종 심심하다는 말을 하는 인간을 보게 되는데 이 영화는 그렇게 팔자 좋은 고독논리에 대한 전면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주인공 김씨는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려다 하필이면 그때 다가온 변의를 참지 못하고 숲속에서 볼일을 본다. 김씨가 엉덩이를 까고 큰일을 보는 걸 보여주는 장면에서 이 희극적인 상황이 가져올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김씨는 자신이 포기하려고 한 육체, 지상에서 삭제하려고 한 육체의 부름을 받는다. 죽으려고 하기 직전에 느닷없이 찾아온 몸속의 경보음, 허겁지겁 찾아온 배설욕구를 해결하고 나서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숲의 정경이다. 그것들은 아마도 너만 여기 사는 게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때부터 김씨는 먹고살기 위해 숲에서 일용할 양식을 찾는데 그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과 같다. 어떤 건 먹어도 되고 어떤 건 먹으면 안된다. 쓰레기에서 찾아낸 짜파게티 수프 봉지는 김씨에게 장기적인 목표를 갖게 해준다. 그는 자장면을 손수 만들어 먹고 싶다. 그가 자장면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과정이 필요하다. 여기서 그는 자연의 순환에 관한, 자신이 싼 똥을 숲이 거름으로 삼는 것과 똑같은 자명한 이치를 깨닫는다. 오리 똥에서 건져낸 씨를 무작정 심은 그는 결과를 기다린다. 싹이 난다. 그는 이제 주변과 소통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씨를 뿌리면 싹이 나는 것, 행동을 하면 반응을 보이는 것, 적극적으로 화답하는 것, 배설한 것에서 생명이 자라나는 순환에서 김씨는 소통을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는 숲에서 너무 재미있게 논다. 자신에게 응답하는 조그만 밤섬의 생명들에게 환희를 느끼며 그는 자기집 안마당 같은 밤섬 모래밭에서 신나게 뛰며 즐거워한다. 김씨가 밤섬 자연과 나눈 소통은 건너편 아파트에서 자폐생활을 하는 또 다른 여자 김씨에게로 이어진다. 그녀는 남자 김씨의 정신나간 얼빠진 짓을 흥미롭게 관찰하다가 거기 어떤 맥락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의 행동을 그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그와 소통한다. 그는 물론 그런 그녀의 이해와 이해에 비례해 늘어가는 애정을 알지 못한다. 그녀는 일방의 소통을 쌍방으로 바꾸기 위해 나름대로 피나는 노력을 한다. 남자 김씨가 숲의 생명들과 그렇게 하듯이 여자 김씨는 일종의 신호로 남자 김씨와 소통하려고 한다. 남자 김씨는 알아차린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행복하게 되느냐 하면 그건 또 다른 문제다. 각자 섬과 자기 방에 스스로 유폐된 그들의 공간은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 여자 김씨가 부모의 집에서 피신처를 제공받는 것처럼 남자 김씨는 사회로부터 피신처를 제공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자 김씨는 남자 김씨를 돕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 방을 나서야 한다. 그건 남자 김씨가 밤섬을 떠나는 것만큼이나 그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위태로운 일이다. 클라이맥스에서도 왜 감흥이 안 생길까 어쨌거나 그들 각자의 안식처는 깨부숴야 한다. 그들의 삶의 즐거움은 그 안에서 자족적으로 누리기에는 너무 연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깨부수면 그들이 밤섬과 자기 방에서 누리는 행복도 깨어진다. 그게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것일지 모르지만 여하튼 그들 삶의 즐거움은 도피를 벗어날 수 없다. 이것이 <김씨표류기>의 웃음과 멜랑콜리의 정체가 될 것이다. 감독 이해준의 연출은 무난하고 예쁘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을 관객에게 알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고전적 스타일도 아니고 공감각적 환기를 노리는 굵은 호흡도 아닌 애매한 연출태도를 취한다. <김씨표류기>에서 가장 이상한 것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 부분에서 감정이입의 잠깐 멈춤 현상이 일어나고 그 뒤로는 죽 감정이입이 하강한다는 것이다. 남자 김씨가 마침내 자기만의 목표달성을 해내는 장면이 있다. 김씨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는데 카메라는 그런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그런데 관객, 아니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함께 본 사람들도 그랬다고 한다. 감정적으로 낯간지러운 장면이긴 하지만 여하튼 그 클로즈업에서 관객은 적절한 공명을 일으켰어야 했다. 그게 연출의 목표였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까지 감독이 세분한 화면 사이즈의 배분에 문제가 있었거나 내러티브의 목표와는 달리 시각적 콘티의 이상이 달랐다는 것일 수도 있다. 절체절명의 고독에서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느끼는 것, <김씨표류기>는 대안의 삶의 방식을 찾지 못해 허덕이는 사람에겐 적지 않은 영감을 줄 수 있는 작품이었다. 김씨가 손바닥만한 밤섬에서 우주의 기운을 느낀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삶의 전환이다. 그는 예술의 최종목표 중 하나인 공감각적 조응을 제 몸으로 느낀 사람이다. 자기 몸의 배변 욕구에서 다른 생명의 존재를 자각하고 그 생명들이 일정하게 순환하는 과정에 자기 노동을 투여해 그 자연의 일부가 된다. 거기서 그는 혼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없지만 혼자가 아니다. 그 자체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여자 김씨가 끼어들어 어떤 행동으로 도와주려고 할 때 그는 거절한다. 그 거절의 의미를 여자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다른 삶의 방식을 실천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는 협력자이다. 그들은 그런 면에서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 그렇지만 연출은 김씨의 공감각적 기운 충만을 묘사할 만한 솜씨에는 이르지 못했다.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남자 김씨 주변의 친구들이라 할 주변 사물의 생명을 촉각적으로 담아내는 데는 힘이 달린다는 인상을 준다. 거꾸로, 이는 여자 김씨를 둘러싼, 그녀의 삶과 마찬가지로 무미건조하고 적대적인 환경을 묘사하는 데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 김씨가 사력을 다한 용기를 내어 남자 김씨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외출을 감행할 때 그녀가 사는 아파트 동네나 거리를 묘사하는 것도 좀 무미건조하다. 코미디의 외관을 유지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찍어낸 느낌이 강하다. 그것으로 인해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하는 클라이맥스에서의 두 남녀 주인공의 상봉도 예상했던 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 고로, 이 영화는 충분히 외연을 확장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스토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 드라마 이상의 감정 용량을 담아내기 힘들었던 것이다. 스크린에서라면 이 정도의 감정과 의미의 용량으론 좀 곤란하다. 훌륭한 배우들의 연기에도 아쉽게 그렇게 되었다. 이 정도로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이긴 하지만.

[song book] 담배가 없어

1972년 2월28일, 일본 나가노의 아사마 산장을 점거하고 열흘간 인질극을 벌였던 무장학생운동 세력 ‘연합적군’ 일당 5명이 체포되었다. 경찰과의 대치 상황에서 총격전도 불사했던 이들은 체포 이후 ‘도피 과정에서 자아비판과 함께 12명의 동지들을 처형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털어놓았다. 동료들의 잔혹한 린치에 목숨을 잃은 12명 중에는 임신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 이미 쇠퇴일로를 걷던 학생운동은 이 충격적인 ‘아사마 산장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같은 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시라케’(白け)라는 신조어가 크게 유행했다. ‘퇴색하다’는 뜻의 동사 ‘시라케루’(白ける)에서 파생된 이 말은 세상 어떤 일에도 무관심한 풍조를 일컫는 용어. 무기력, 무감동, 무관심의 3무주의로 요약되는 시라케는 이상의 좌절을 끔찍하게 목격한 청춘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포크계의 신성으로 떠오르던 이노우에 요스이(井上陽水)는 문제적 싱글 <우산이 없어>를 발표했다. ‘도시에서는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오늘 아침에 배달된 신문 한구석에 써 있었어/ 텔레비전에서는 우리나라의 장래 문제를/ 누군가가 심각한 얼굴로 말하고 있어/ 하지만 문제는 오늘 내리는 비/ 우산이 없어/ 너를 만나러 가지 않으면 안되는데’라는 <우산이 없어>의 가사는 시라케에 젖어 있던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지금에야 이노우에 요스이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지만, 데뷔 무렵이었던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는 미디어에 대해 철저히 적대적인 입장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적시한 <우산이 없어>의 가사도 무관심보다는 불신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그리고 노래의 말미에서 이노우에 요스이는 질문한다. ‘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그건 괜찮은 것일까?’라고. 요컨대 그는 이 노래를 통해 무기력증에 빠진 청춘들의 정서에 영합하기보다는 자문을 통한 각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2008년, 서울의 젊은이들은 시청과 광화문에서 쓰디쓴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이듬해에 그들은 한때 개혁의 표상이었던 전직 대통령의 서거를 경험해야 했다. 마지막 가는 길에 담배 한대 태우지 못했다는 소식에 하루에 열두번도 더 울컥하는 지금이지만,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우리는 다시 세태에 무관심해지거나 더욱 무기력해질지도 모른다. 그건 괜찮은 것일까?

[오마이이슈] 듣도 보도 못한 정부

며칠 세게 놀던 아이가 고열 몸살로 앓아누웠다. 물 한 모금 제대로 삼키지 못하고 찬 마룻바닥을 찾아 몸을 붙인 채 꼬박 하루 반을 보내더니 멀쩡하게 일어나 앉아 밥 달라고 나를 흔든다. 해열제 먹이고 얼음주머니 갈아주는 거 외에 도울 길이 없었다. 짐승처럼 신음하는 동안 옆을 지켜주는 거 외에는(음, 물론 텔레비전도 나와 함께 애를 지켰지). 안쓰러움과 기특함에 이어 생명의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누구한테랄 것 없이 고마웠다. 애 하나 키우면서도 배우는 게 참 많다. 그런데 대체 애를 넷이나 키웠다고 자랑하던 사람의 성품과 태도가 왜 저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가 보스로 있는 이 정부는 용산참사 유가족들과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하지 않았다. 사과는커녕 진상 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오리무중이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이렇게 중요한 일을 몇달째 방치할 리가 없다.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정부다. 행정안전부와 경찰 일각에서 대화 움직임을 보이자 청와대가 “대화는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제동을 걸었다고 알려졌다. 한마디로 제 풀에 지쳐 그만두길 바라는 심산이다. 주검은 다섯달째 냉동고에 있고 장례도 치르지 못한 유가족들은 영안실에서 먹고 자고 있다. 정당한 법집행이었다면 성의있는 대화와 응분의 조처를 회피할 이유가 없다. 수사기록도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무정부지역에 사는 것도 아니고, 이 정부 관계자들이 사이보그도 아닌 이상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염치도 예의도 휘발된 냉혈 철면피가 이 정부의 실용인가. 최근 터져나오는 시국선언과 집회에서 눈길을 끈 손팻말은 “부자감세 1년 20조원=월 200만원 일자리 83만3333개”였다. 역시 한국여성노동자회 여러분들 진정으로 실용적이다. 부자 감세분에 4대강 파내는 예산을 더하면 일자리는 훨씬 늘어난다. 잘해달라 안 하겠으니 잘해준다 우기지나 말고, 아니 제발 때리지나 말았으면 좋겠다. 87년 이후 처음으로 시국선언한 교수들도 한줌, 평일 저녁 제 발로 촛불 들고 모인 시민들도 한줌이라고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기에 바쁘다. 그들이 말하는 ‘절대다수’는 몸과 마음을 지키고자 납작 엎드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인데.

<마이클 잭슨 사망 이모저모>-2

<마이클 잭슨 사망 이모저모>-2 = UCLA 메디컬센터, 팬.취재진으로 장사진 = ○...마이클 잭슨 사망 소식이 인터넷과 라디오, 텔레비전을 통해 전해진 뒤 UCLA 메디컬센터 주변은 몰려든 취재진과 팬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언론사 헬리콥터가 병원 상공을 맴돌고 방송 차량이 병원 주변 거리를 메운 가운데 병원 정문 주변에는 수백명의 팬들이 운집해 병원 측의 공식발표를 기다리고 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인파가 늘어나고 있다. 일부 팬들은 새로운 소식을 고대하며 연신 휴대전화를 했으며 일부는 슬픔을 못 이겨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LA AP=연합뉴스) = 잭슨 전 홍보담당자 "비극 예상했다" = ○...마이클 잭슨의 전 홍보담당자인 마이클 러바인은 잭슨 사망 소식에 자신은 수년간 이 같은 비극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 연예전문사이트 'TMZ닷컴(www.tmz.com)'에 "마이클 잭슨의 첫 아동 성추행사건 당시 홍보담당자로 일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비극적인 소식이 놀라운 게 아니라는 것을 고백한다"고 말했다. 그는 "마이클 잭슨은 수년간 극도로 힘들고 때론 자멸적인 여정을 겪었다. 그의 재능은 의심할 나위가 없지만 세상의 규범에 대한 그의 고민도 엄청났다"며 "어떤 인간도 그런 스트레스가 지속되는 것을 견딜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 잭슨 사망 소식에 인터넷 불통사태 =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순간 많은 사람이 인터넷으로 몰려들면서 월드와이드웹(WWW) 자체가 사실상 불통사태를 빚었다고 'TMZ닷컴'이 보도했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처음 전한 TMZ는 페이스북과 마이스페이스, 트위터 AIM 등 주요 웹사이트들이 트래픽 폭탄을 맞았다며 대부분의 사이트가 작동은 하지만 속도는 매우 느려진 상태라고 전했다. 최근 인터넷에 이 정도의 트래픽이 한꺼번에 몰린 사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뿐이었다고 TMZ는 덧붙였다.(서울=연합뉴스) = 엘튼 존, 공연 중 마이클 잭슨 추모곡 = ○...영국 가수 엘튼 존이 공연 중에 마이클 잭슨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즉석에서 추모곡을 불렀다고 TMZ닷컴이 전했다. 엘튼 존 에이즈재단의 기금 모금을 위한 연례공연 '화이트 타이 앤드 티아라 볼'을 진행하던 엘튼 존은 잭슨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는 즉석에서 "태양이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해주세요(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잭슨에게 헌정했다. 공연에는 리즈 헐리와 휴 그랜트, 릴리 앨런, 켈리 오스본 등 많은 명사들이 함께했으며 잭슨 사망 소식에 일부가 자리를 떴다고 TMZ는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scitech@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MBC, 마이클 잭슨 공연 실황 방송

7월 4일, 텔레비전으로 마이클 잭슨의 전성기 시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게 된다. MBC 는 지난 25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마이클 잭슨의 추모 특집으로 <팝의 황제! 불멸의 라이브> 를 방송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방송되는 영상은 1992년 10월에 루마니아 부쿠레스티에서 있었던 (라이브 인 부쿠레스티 : 데인저러스 투어) 공연 실황을 담은 영상으로 당시 미국 HBO 역대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마이클 잭슨 최고의 라이브 실황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공연에는 MBC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마이클 잭슨의 명곡 1, 2, 3위로 뽑힌 ‘Billie Jean’ ‘Beat It’ ‘Black or White’ 를 비롯하여 ‘I’ll be there’, ‘Heal the world’ 등 마이클 잭슨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1969년 형제들과 함께 잭슨파이브로 음악활동을 시작한 마이클 잭슨은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팝의 전설로 불려졌다. 그의 앨범 ‘Thriller’ 는 빌보드 차트에 무려 37주 동안 1위 자리를 지켰고,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에 등재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활동이 뜸했으나 그가 사망 직전까지도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의 앨범은 1주일에 10만장 이상 판매되었으며 추모 열기가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7월 4일 토요일 밤 12시부터 90분간 방송되는 <팝의 황제! 불멸의 라이브> 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했던 팝가수, 마이클 잭슨을 다시 한번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나의 친구 그의 영화] 물어도 물어도… 답은 얻지 못하리

1. 미남 고민남 고민 상담한 안미남 상담남 고민 해결한 미남 고민남 안녕하세요, 저는 일산 ‘변두리’에 거주하는 미남 고민남(39·소설가)입니다. 일산 ‘중심부’에 거주하는 안미남 김연수 작가님(40·소설가)께서 보내주신 상담글은 잘 읽었습니다. 사실 제 고민 사연은 <한겨레> esc 지면의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에 보냈던 것인데, 착오가 있었나 봅니다. <한겨레>와 <씨네21>이 같은 건물에 있기 때문에 생긴 착오가 아닌가, 저 혼자 추측하고 있습니다(설마 제 고민 사연을 가로챈 건 아니겠지요?). 원하는 분께 상담을 받지 못하여 실망이 크긴 하지만 김연수 작가님도 인생 좀 살아보신 분이라니(저보다는 무려 1년이나 더 살아보신 분이라니)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열심히 글을 읽었는데, 이게 뭡니까, 대충 살라니요. 따지지 말고, 일단 살라니요, 나중에 다 알게 된다니요. 김연수 작가님, 실망이 큽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39년 동안 너무 대충 살아서 “이름을 DC KIM(대충 김씨)으로 바꾸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을 정도였으며,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목도 대충 보는 바람에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대충나무 대충 걸렸네>로 읽어 주위 사람들을 당황케 하기도 했습니다. 이거 보십시오, 돈 받고 쓰는 글도 이렇게 대충 쓰고 있지 않습니까. 영화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고 벌써 3매 채웠습니다. 김연수 작가님은 언행일치를 몸소 실천하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충 살라더니, 자신도 대충 살더군요. 고민을 해결해 주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고민남에게 자신의 고민을 상담 받으려 하다니, 정말 돈 받고 쓰는 글을 이렇게 대충 써도 되는 것입니까. 아무튼 저에게 질문하셨으니 저도 답변을 해드리렵니다. 질문은 이랬지요. 세상은 점점 나아지는 것인가? 여긴 조금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답이야 간단합니다. 답은 없습니다. 이것은 질문으로만 존재가 가능한 질문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질문이 있지요. 답과 함께 짝패를 이루는 질문이 있는가 하면, 질문으로만 존재가 가능한 질문이 있습니다. 두 번째 종류의 질문은 답을 얻는 순간 질문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 제가 너무 진지했지요. 대충 살아야 하는데, 잠깐 딴생각을 하다보니 너무 진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서로의 고민은 각자 알아서 풀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요. 이상 변두리에서 대충 김씨였습니다. 2. 삶은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혼돈 태어나서 한번도 상담 같은 걸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고민을 열심히 들어준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거의 없다. 고민을 잘 듣지 못하니, 고민 얘기 하기도 미안한 거다. 내 고민 얘길 잘하게 되면 남의 고민도 잘 듣게 되려나. 상담의 중요성은 알고 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아무리 무겁더라도 누군가에게 얘기하고 나면 한결 가벼워진다. 그 어떤 초특급 비밀이라도 누군가에게 발설하고 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상담이 한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도 한다. 가끔은 나도 상담 같은 걸 받아볼까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에잇, 그 돈으로 김연수랑 술이나 마시자’ 싶은 마음이 들고 실제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다보면 고민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물론 해결되는 게 아니라 뒷전으로 밀리는 거다- 결국 남는 건 두통과 속쓰림뿐이지만 고민 얘기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본전은 건진 게 아닌가 싶다(라고 위안해야지). 사람들은 결정적인 선택을 해야 할 때 상담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할지 모르는 거다. 이거냐 저거냐,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 갈 거냐 말 거냐, 죽을 거냐 말 거냐. 그래서 사람들은 묻고 또 묻고, 점집에도 가보고, 종교에도 의지하고, 그러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걸까. 더 많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걸까.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닐 수도 있다. 정작 우리가 며칠 밤을 새우며 고민하는 선택의 갈림길들이 훗날 돌이켜보면 별것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선택한 것이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 우리가 그 결과를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샘 레이미 감독의 최근작 <드래그 미 투 헬>을 보며 그런 생각이 짙어졌다. 주인공 크리스틴은 정말 별것 아닌 일로 저주를 받고, 삶이 꼬인다. 대출 연장을 신청한 집시 노파의 부탁을 거절하며 모욕을 주었다는 게 이유인데, 내가 보기엔 모욕도 아니다. 단순한 선택이 만들어낸 최악의 결과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 합리적 세계라면 좋은 원인에는 좋은 결과가, 나쁜 원인에는 나쁜 결과가 따라붙는 단순한 세계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분명하다. 잘 살면 된다. 좋은 원인만 만들면 된다. 하지만 삶이란 일직선도 아니고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것도 아니고 우연과 필연이 아무렇게나 뒤섞인 혼돈일 뿐이다. 우리의 선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지난 칼럼에서처럼 다시 묻게 된다. 정말, 솔직히,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역시 김연수 작가의 충고처럼 대충 사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 건가. 나는 <드래그 미 투 헬>이 즐겁지 않았다. <이블 데드> 시리즈를 도대체 몇번이나 보았는지 브루스 캠벨의 표정까지도 기억하며 모든 장면에 열광했던 나인데, 샘 레이미의 귀환은 너무 싱거웠다. 예전에 비해 장난도 덜했고, 까무러치게 웃기는 장면도 적었다. 거장인 건 알겠지만 장르 특유의 쾌감에 좀더 충실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크다. 무엇보다 가장 싱겁고 허무했던 것은 결말이다. 튀어나오는 내장들과 똑, 똑, 으스러지고 부러지는 뼈들과 나부끼는 핏자국에 놀라면서도 배꼽을 붙잡고 낄낄거리며 몇번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해피엔딩(이라고 하기엔 뭔가 쑥스럽고, 해피엔딩 비슷한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원인이야 어쨌든 결과는 해피엔딩이고, 적들이야 어쨌든 우리는 승리할 거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웃을 수 있었던 거다. 나도 안다. 현실은 <이블 데드>보다 <드래그 미 투 헬>에 가깝다는 것을. 원인을 훌쩍 뛰어넘는 해피엔딩보다 원인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끔찍한 엔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