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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정기훈] 이 영화로 37년 만에 효도한 듯

모녀간의 애틋한 이야기를 담은 영화 <애자>의 감독이 인터뷰 장소에 등장했다. 예상외로 덩치 큰 사내다. 그렇다면 과묵한 사내? 아닌 것 같다. 말을 붙여보니 적은 말수가 아니다. 수다의 ‘일초식’을 아는 자다. <애자>에서 딸과 어머니 사이를 이어주던 말과 감정의 공방전을 다룬 사람답다. 충무로에서 스탭으로 오래 일하면서 배운 화기애애 공력이 몸에 배어 있어 그렇다고 한다. 도제시스템에서 오랜 시간 동료들과 나눈 애정이 힘이 되어 자애로운 인물들을 만들었고 그 인물들에 자기의 일부분을 투사했다. <애자>의 감독 정기훈과 수다를 떨었다. -평소에도 담소를 즐기나. =담소보다는 방정맞다고 해야 할 거다. 내가 막내 스탭들하고 노는 걸 보면서 (최)강희가 그러더라. “감독이 왜 그렇게 체통이 없느냐”고. 격식이 없는 거다. 오두방정인가? 충무로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몸에 밴 습관이다. 스탭들과의 융화를 중요시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얻게 된 거다. -충무로에서 오래 일했다는 말은 들었다. =대학 졸업하고 23살에 충무로에 들어왔다. 김유진 감독님 밑에서 오래 일했다. <금홍아 금홍아>부터 <약속> <와일드카드> <신기전>까지. <신기전>은 시나리오까지 했다. 내 나이대의 어지간한 감독들은 전부 입봉했으니 경력에 비하면 좀 늦은 편인데 그동안은 글쓰면서 먹고살았다. 각색 작업을 주로 했고, 그게 주로 엎어졌다. (웃음) 뮤직비디오 시나리오를 많이 썼다. 그게 좀 짭짤했다. 그동안 한국에서 만들어진 드라마 형식의 뮤직비디오 중 3분의 1은 아마 내가 썼다고 봐야 할 거다. -김유진 감독과는 유독 각별하다고. =한 10년을 한집에서 살았다. 집이 굉장히 넓으니까. 감독님은 안채, 나는 행랑채. 감독님이 <약속>을 찍고 끝날 때쯤 “내 집으로 들어와라” 하시더라. 아, 이제 진짜 머슴이 되는구나 싶더군. (웃음) 아버지 보는 시간보다 감독님 뵙는 시간이 더 많다. 감독님 밑에 있는 사람 중에 그동안 잘 풀린 사람이 없어서 감독님이 늘 속상해 하셨는데 이번에는 어쨌든 효도했다는 생각이다. 바깥에는 괜찮은 영화 만들었다고 말씀해주시지만, 저녁에는 6시간씩 술먹으면서 많이 혼내신다. (웃음) 시나리오가 아깝다, 이런 건 내가 하면 더 잘하는데 하시면서. 원래는 내가 비주얼에 관심이 많았는데, 감독님하고 같이 살면서 사람들하고 부대끼고 그 속에서 드라마를 끌어내는 것을 많이 배웠다. 사람 사는 걸 봐야 사람 이야기를 한다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일부러 타고 다니신다. 방송쪽에 얼굴 내미시는 것도 싫어하시는데, “야 너 쪽 팔리면 아무것도 못해. 너 임권택 감독님이 얼마나 불행한지 알아?”라고 농담도 하신다. -<애자> 같은 이야기에 관심이 많았었나.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허진호 감독님 영화도 무척 좋아하는데,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리모컨 두고 싸우는 장면 있지 않나. 실은 <애자>에서 텔레비전 보면서 엄마와 딸이 싸우는 장면을 찍을 때 그걸 생각했다. 앞으로도 내 영화는 그런 이야기쪽으로 가지 않겠나 싶다. 그런 게 영화계에서 한 부분 있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애자>가 신파나 통속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나로서는 일상을 다룬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만 일상을 다루는 방법적인 면에서 관객의 눈물을 뽑기 위해 작위적인가 아닌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작위적이지 않으면서 눈물 흘리게 하는 방법이 있을 거다. <애자>에서 그런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보지만 여전히 아쉬움은 남는다.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가 전면에 있다. =처음에는 그보다 다 큰 처녀의 성장 이야기로 생각하며 시작했다. 원래 성장 이야기가 청소년기, 유아기를 많이 다루지 않나. 나는 다 컸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내가 아직도 배울 것이 많구나’ 느끼게 되는 그런 인물을 다루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가족, 그리고 엄마와 딸의 관계 안에서. 서브플롯이 처음에는 다 균등했다. 일도, 가족도 이야기상 같은 몫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투자자를 생각했을 때 감동이 더 필요하겠다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엄마에 대한 이야기가 더 늘어났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많이 바뀌었겠다. =하지만 성장드라마라는 건 편집 때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성공드라마와 성장드라마는 다르지 않겠나. 주인공인 애자가 여유를 좀 가졌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중에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갖게 될 작은 여유 말이다. 즐거움의 상징인 휘파람을 불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여유, 그 정도를 그리고 싶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영화에서 애자를 소설가로 당선시키는 걸로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내가 감독이 되기를 꿈꾸었던 것과 비교하면서.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애자>에서는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여유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누가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유 기집애 여유가 있어 보이네’ 하는 정도만 반응하면 될 것 같다. 영화 속 일들은 우리가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다. 앞으로 어떻게 극복할 건가 묻고 싶었고, 이런 게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가족이란 참 미스터리한 관계이긴 하다.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전쟁통에서만 가능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애자>에서 딸은 애물단지고 엄마는 철천지원수다. 그 둘 사이에 사건이 들어오지 않으면 아마 둘은 평생 싸우면서 지냈을 것이다. 내 경험을 비춰봐도 가족이란 안식처이며 회귀 본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는 않다. 나도 아버지에게는 핍박받고(웃음) 어머니는 아버지가 낸 생채기를 어루만져주셨다. 그런 부분이 <애자>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엄마와 딸이라는 부분이 조금 뻔하기는 하지만, 뻔하기 때문에 자칫 잊고 사는 건 아닐까. 자기를 돌아보고 부모님을 돌아보는 영화로 비쳐지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나서 관객이 부모에게 전화 한통 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면 좋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영화 일을 하는데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던 모양이다. =소설 속에 나오는 애자와 나의 감독의 길이 비슷하다. 자식이 불확실한 직장에 매달리고 있는 걸 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나도 정말 내가 감독을 할지는 장담 못했으니까. <애자>에서도 엄마는 딸에게 시집이나 가라 하지만 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밀고 나간 거다. 나와 부모님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김영애와 최강희가 닮아 보이기는 한다. =서로 안 닮은 듯 닮은 사람들이다. 먼저 최강희가 캐스팅됐다. 김영애씨도 그전부터 계속 생각은 했었다. 두 사람이 미용실에 앉아 사진을 한컷 찍은 게 있는데 한 화면에 나란히 두 사람이 담긴 걸 보니까 정말 신기하게 닮았더라. 따로따로 보면 안 닮았지만, 둘이 한 프레임 안에서 웃고 있으니 그렇더라. 그걸 보니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더라. 한 프레임에 저 두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되겠구나, 라고. -결혼했나. =아니, 아직. 미혼이다. 이 점 꼭 크게 써달라. (웃음) 그런데 남자로서 매력이 없는 건가? 내가 좋아한 여자는 많은데 나를 좋아해준 여자가 별로 없었다. -기혼자였다면 이번 영화의 이야기는 좀 달라졌을까. =연애는 해왔으니까 꼭 그렇지는 않을 거다. 모든 여자들이 엄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취재를 많이 했다. 그런 엄마와 딸들에 대한 취재가 없었더라면 나도 내 영화 보고 “저 영화 왜 이렇게 신파냐” 그랬을 거다. 하지만 취재하면서 그들 모녀 관계의 독특함이 발견되더라. 그게 여자 관객에게는 특히 많이 와닿는가 보더라. 나는 관객이 엄마와 딸의 반응으로 갈릴 줄 알았는데, 결과적으로는 남자와 여자의 반응으로 갈리더라. 기자들이 리뷰를 쓴 걸 봐도 그렇다. 남자 기자들은 높은 점수를 안 주는데 여자 기자들은 좋은 리뷰를 써주더라. 인터넷에 뜨는 별점을 봐도 그렇다. -취재를 통해 많은 걸 얻었다고 생각하나. =역시 김유진 감독님 밑에 있으면서 배운 거다. 인터뷰와 취재가 중요하다는 거. 상상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만 갖고서는 형태적인 접근밖에 안된다는 걸 배웠다. 그걸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인터뷰와 취재라고 생각한다. <와일드카드>도 김 감독님이 이만희 작가님하고 둘이 썼다고 했지만, 취재는 내가 다한 거다. 석달 동안 날 경찰서에 처박아놓고 “사소한 거라도 다 적어와” 그러시더라. (웃음) 그때 취재했던 게 영화의 연기, 대사 등에 하나하나 녹아들어가는 걸 보고 확신했다. 형사들이 자기 아이들 키를 잴 때 왜 세로로 안 재고 가로로 재냐고 할 때 애들 잘 때만 보니까 그렇다는 대사. 그것도 취재 중에 들은 거다. 사실 한 가지 말하자면 형사들에게는 일반인에게 공개 안되는 그들만이 읽는 잡지가 있다. 밀봉되어 있다. 3개월 동안 함께 있었으니 그걸 보여줄 만도 한데 끝내 안 보여주더라. 그래서 어쩌겠나, 슬쩍했지. (웃음) 1년치 열 몇권 정도 되는 것 중에서 이거다 하는 사건을 발견하고 큰 맥락을 잡은 거다. <공공의 적>에 나오는 대사던가? “강력계 형사는 좀 먹어도 돼” 그런 말 있지 않나. 강력계 형사들이 안 좋은 이미지도 많이 있지만, 정말 쥐꼬리만큼 받으면서 성실하게 일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애자>에서 그런 취재 중 일화는 무엇이 있나. =어머니가 “김치 가져가 이 년아~” 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우리 어머니는 내게 김치를 택배로 보내주지만 누나한테는 그렇게 말하더라. 딸과 엄마는 싸울 때 절대 서로 얼굴을 보면서 싸우지 않는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감정을 소모한다. 내가 모르고 있던 거다. 가령 영화에서처럼 텔레비전 보며 감정적으로 싸운다. 인터뷰나 취재에서 알게 된 거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을 엄마와 딸이 마지막 여행 가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엄마와 엄마 친구 그리고 애자가 마루에 앉아서 대화 나누는 장면이라고 본다. 그 안에는 웃음도 있고 모든 게 있다. 그들은 평행선을 달린다. 평행선을 달리는 것 때문에 자주 싸우기도 하고. -전주 출신인데 영화의 배경은 부산이다. =실제 모델이 있는데 그분이 부산 출신이다. 그리고 영화적으로는 엄마와 딸의 물리적인 거리가 필요했다. 내가 잡은 캐릭터상 전라도 엄마는 안 어울리는 것 같았다. 우리 어머니만 봐도 아는데, 전라도 어머니는 잔정이 많고 화는 속으로 삭인다. 경상도 어머니는 정은 속으로 꽉꽉 감춰놓고 겉으로는 툭툭 윽박지른다. 그쪽이 더 어울린다고 봤다. 사투리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본다. 그게 도드라지면 오히려 안된다고 봤다. 사투리가 좋은 테이크와 감정이 좋은 테이크가 있으면 무조건 감정이 좋은 걸로 선택했다. -실제 모델은 어떻게 알게 됐나.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에서 알게 됐다. 그 친구의 글을 몇개 보는데, 이런 캐릭터로 영화를 만들면 재미있겠다 싶더라. 나이도 꽉 찬 친구인데 써놓은 글을 보면 아직도 철이 안 들었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이 여자의 주변 생활을 그려보자 했다. 이 영화의 원안자로 크레딧에 오른다. 몇 장면은 실제 일어난 일 그대로 썼다. 채팅하는 장면은 그 친구가 엄마와 하던 내용을 내가 직접 갖다 쓴 거다. -영화 보고 부모님 반응이 어떤가. =아버지가 시사회 때 명함을 하나 만들어 오셨다. 거기에 참 민망하게도 “전주가 낳은 영화감독” 어쩌고 이렇게 써놓으셨더라. (웃음) 학력부터 시작해서 이력을 주욱 적어놓은 명함이었다. 정을 속으로 감추고 그걸 표현 안 하시는 분인데… 참… 전주가 낳은 영화감독이라니. 예전이었다면 창피하게 왜 이런 걸 만들어서 들고 다니느냐 했을 거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당신께서 한때 극심한 반대를 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로 37년 만에 효도를 한 것 같다.

그 고집스런 의협 정신이여

필자는 조니 토의 작품을 몇 년째 연구해 오면서 텔레비전에서 활동한 시기의 영향에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텔레비전 드라마와 무협영화의 영향을 받은 3가지의 특징으로 좁혀진다. 텔레비전 활동 시기의 조니 토의 심층 연구내용을 간단하게 묘사해 보면 이렇다. 액션·멜로·코미디…다양한 분야에 정통 첫 번째. 조니 토가 텔레비전에서 활동하던 시절 대부분 드라마 시리즈 촬영에서 디지털 연출을 맡았다. 드라마 시리즈는 연기자가 같더라도 각 연출자들의 작업 스타일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작품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까닭에 느낌이 서로 다른 드라마 시리즈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런 파트 분담 식 제작 방식으로 각 연출자들이 실력을 겨룰 좋은 기회가 됐을 뿐 만 아니라 연출자들의 문제 해결능력, 적응력을 향상시켰다. 최근 서극, 임영동과 조니 토 감독의 합작품 <트라이앵글>(2007)을 살펴보면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세 감독이 바톤을 터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서극 감독이 발단을 맡고 임영동 감독이 전개 부분을, 조니 토 감독은 결말 부분을 연출했다. 이러한 구성은 글자 그대로 텔레비전 드라마 형식의 구성 방식으로 세 명 감독의 각기 다른 제재상의 흥미와 차이를 느껴 볼 수 있다. 서극 감독은 역사적인 재미를, 임영동 감독은 낙(樂)의 리듬을, 조니 토 감독은 무협적인 분위기를 추구하고자 했다. 그들은 마치 예전 텔레비전의 모습으로 회귀한 것처럼 서로를 격려하면서 기량을 뽐냈다. 텔레비전 연출 시절의 경험은 조니 토에게 좀 더 다각화되고 융통성 있는 작품을 만드는데 도움을 줬다. 작업을 하면서 촬영 현장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을 때의 대처방법과 전혀 다른 환경에 적응 하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실제로 조니 토가 영화계에 발을 들인 초기에 만든 비극적인 드라마 <우견아랑>(1989), 기괴한 사극 액션 <심사관2: 제공>(1993), 실제상황을 그린 영화 <화급>(1997)이나, 자신의 영화사 ‘밀키웨이 이미지’를 설립한 후 촬영한 오피스 멜로영화인 <니딩 유>(2000), 코미디인 <역고력고신년재>(2002), 그리고 홍콩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좋은 인상을 심어준 <암화>(1998), <미션>(2000), (2003)와 같이 범죄조직이나 경찰을 다룬 작품들까지 이 모든 영화들은 그가 정통한 다양한 분야를 보여준다. 무대형식의 조명으로 자신만의 세계 창조 두 번째. 조니 토는 스튜디오 형식을 선호한다. 야외 로케이션 화면이든 스튜디오 세트 화면이든 그의 엄격한 통제 아래 이뤄졌다. 최근 들어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색은 강렬하게 대비되는 조명의 사용이다. 특히 외부 촬영시 많이 사용되는데 무대 조명 효과처럼 그가 중점을 두고자 하는 사물과 인물만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조명효과가 가장 개성적으로 표현 되어 으뜸으로 꼽히는 예가 다. 그 후의 <대척료>(2003)와 <유도용호방>(2004) 역시 조명효과가 잘 표현된 예로 꼽힌다. 이러한 성향은 조니 토의 어두운 야외 배경 촬영시 사용되는 그만의 주된 특색으로 점점 발전했다. 이러한 무대화된 조명효과는 심도의 거리를 짧게 하여 주된 것과 부차적인 것이 구분되는 시각적 효과도 거둔다. 종전처럼 숨기는 방식으로 객관적 사물의 윤곽을 흐리게 만들어 버리면 배경이 길게 이어진 거리일 경우, 인물 앞과 뒤에 3미터 거리밖에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유도용호방>에서 고천락과 곽부성이 밤거리에서 서로 싸우는 장면이 바로 이러한 예다. 홍콩은 황금기부터 현재까지 텔레비전 드라마 촬영에서 연출자가 스튜디오 조명을 아주 밝은 상태로 유지해 어떠한 상황이라도 연기자와 주변 배경의 선명한 해상도를 유지해 근거리에서 원거리로, 원거리에서 원거리로 변화시킨다 해도 효과가 조금도 차이가 없으며, 영상의 주된 영역과 부차적 영역이 모호한 평면적인 효과를 표현할 수 있을 뿐이었다. 조니 토는 영화 산업으로 뛰어든 후 강렬한 개인 색채가 강한 밀키웨이 이미지 작품을 만들어 내면서, 무대형식의 조명을 통해 창작자 의식의 존재를 깨닫게 했다. 동시에 텔레비전 스튜디오 제작과정 중 습득한 감독 고유의 색깔을 발견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스튜디오 형식의 촬영방식은 조니 토에게 여전히 주도적이다. 이런 현상은 무조건 스튜디오에서 화면을 만들어 내고 촬영을 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조니 토는 종종 주요 장면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구도를 연출하기 위해 전면적인 통제가 가능한 스튜디오 촬영을 고집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암전2>(2001) 중 정이건과 유청운의 오토바이 레이스 장면을 들 수 있다. 이 장면의 배경엔 이어지는 긴 거리에 있는데 스튜디오에서만 완성된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래야 했을까? 라는 궁금증을 연발하게 한다. 이 장면만을 살펴보면 정이건과 유청운이 오토바이 페달을 밟으며 쫓고 쫓기는 레이스를 펼친다. 복잡한 카메라 분할과 예리한 장면 배치, 박진감 넘치는 편집으로 승패를 떠난 남자들만의 천진함과 장난스러움이 전해주는 재미를 속속 드러내는 이 레이스 장면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스튜디오에서 완성됐다. 조니 토의 뛰어난 예술적 연출을 바탕으로 본래 약 20-30미터의 가량의 스튜디오 세트가 화면에서는 약 1, 2km 정도로 느껴지게 촬영된 것이다. 이 부분에서 조니 토는 스튜디오 촬영의 뛰어난 매력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연기자에 대한 고집스런 미학 세 번째. 조니 토는 텔레비전 연기자에서 영화배우로 이어져 개성파 배우에 이르는 수순을 밟은 배우들을 사랑했다. <암화> <참새>의 노해붕, <비상돌연> <익사일>의 허소웅, <역고력고신년재>의 황문혜, <유도용호방> <익사일>의 장조휘, <대사건> <익사일>의 장가휘, <흑사회> <복수>의 임가동, <역고력고신년재>의 용천생, <암화> <흑사회>의 소미기, 그리고 <복수>의 황일화 등이 그들이다. 조니 토는 왜 텔레비전의 드라마 훈련으로 다져진 연기자를 선호했을까? 그는 취재 중 자신이 연기자를 보는 방법엔 자신만의 고집이 있다고 언급한 바가 있다. 그리고 연예인과 스타의 연기태도에 의문을 품어 왔다. 텔레비전 연기 제도가 연기자로 하여금 연기의 본질을 깨닫게 함은 물론 유연성과 한계를 분명이 구분하게 한다. 연기자들은 사실은 형태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그의 연기자들에 대해 갖는 고집스런 미학은 심층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 글은 단지 조니 토의 무협 사상과 텔레비전 드라마와의 영향 관계에 대해 설명한 글이며 그간 언급되지 않았던 그의 고집스런 의협 정신에 대해 논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무협영화의 정통은 본래 홍콩에 뿌리 깊게 내려있고, 조니 토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무협을 새로운 각도로 재구성해 전면적으로 현대화시키고, 최근의 유행에 걸맞게 변화시키고, 세대간의 대화를 이끌어 내며,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그런 까닭으로 조니 토의 영화는 그 근본인 홍콩 무협영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국제무대에서도 여전히 추앙받고 인정받는지 모른다. 이 글은 타인의 값진 비평을 마다하지 않으며 근 10년간 홍콩을 대표하며 우뚝 선 거장에 관한 작은 의견임을 밝힌다.

예술가로서의 뿌리 찾기

첫 영화를 만들고 11년. <블루 맨션>의 글렌 고에이 감독은 자신의 첫 작품 <영원한 열정> 이후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싱가포르에선 “이런 유의 영화가 투자 받기 굉장히 힘들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에는 영화 산업이 제대로 조성되어 있지 않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화를 제작하곤 하는데, <블루 맨션>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블루 맨션>이 정부를 비판하는 영화냐. 설마!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영화냐. 전혀! 어느 재벌의 급작스런 죽음 이후 가족간의 갈등이 불거지고 재벌 회장은 영혼으로 돌아와 갈등을 지켜본다는 게 영화의 기본 줄거리다. “유교 사상”이라는 “아시아적 가치”가 여전히 유효한 사회에서 후계자 문제로 반목하는 형제의 모습이나 가족들 사이의 다툼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이야기인 것이다. 20살에 영국으로 건너가 2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살았던 글렌 고에이 감독으로선 더더욱 싱가포르 사회가 답답했을 것이다. 영국에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했고, 졸업을 하곤 드라마스쿨에서 연기를 배웠다. 촉망받는 배우로 연극 무대에 섰고 텔레비전과 영화에 출연했다. 하지만 그는 감독 겸 제작자로 또 연극 연출가로 진로를 선회한다. “운 좋게 남들보다 빨리 배우로서 자리를 잡았으나 동양인라는 한계를 뛰어넘기는 힘들었다. 동양인 남자 배우에겐 마약상이나 깡패 역할만 주어진다. 화가 났다. 그래서 내 손으로 연극 회사를 차렸다. 동양인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왔다. “영국에서 예술가로써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한 것 같아 고향에 돌아와 뿌리를 찾는 중”이다. <블루 맨션>같은 영화를 만들면서 “아버지와 국가에 대해 비판조차 할 수 없는 가부장사회, 부당한 국가의 통제와 간섭”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중이다. 그리하여 그의 바람은 “다음 영화를 만들기 위해 10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됐으면” 하는 것이다.

영상으로 쓴 입센의 비극

페란 아우디 감독은 연극을 사랑했다. 런던에서 연극배우로 또 연극 연출가로 오랫동안 활동했다. 이것을 외도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자신의 첫 영화를 들고 부산을 찾았다. 비아시아권의 신예를 발굴하기 위해 경쟁부문으로 재탄생한 플래시 포워드 부문에 초대받았다. <프로스트>는 헨릭 입센의 희곡 <절름발이 천사>를 각색해 만든 영화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굉장히 충격이었다. 심리학적으로 여러가지가 뒤섞여 있음은 물론이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신선하다.” 영화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하다.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외동아들 에욜프가 사고로 죽고, 그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부모 알프레도와 리타의 삶도 파국으로 치닫는다는 게 기본 줄거리다. 연극과 영화는 그 표현의 방식 때문에 똑같은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하더라도 결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입센은 매우 시적인 작가다. “연극에선 시적인 대사가 굉장히 많다. 연극이 말로써 상황을 전달한다면 영화는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영화를 찍으며 가장 먼저 한 게 희곡 대본을 영화적 이미지로 바꾸는 작업이었다.” 연극무대와 텔레비전, 영화 등 다양한 매체에서 30년 동안 배우로 활동했던 페란 아우디 감독은 그 경력에서 보듯 매우 열정적으로 삶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다. 스페인에서 태어났고 영국에서 공부한 그는 얼마 전 바르셀로나와 런던을 오가며 영화 한편을 또 찍었다. 감독으로서가 아닌 배우로서 말이다. 게다가 ‘감독’ 페란 아우디는 전 세계를 돌며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프로스트>는 노르웨이에서 찍었고 현재 시나리오 작업 중인 영화는 멕시코에서 찍고 싶다고. “내가 살아온 궤적을 봐서 알겠지만 새로운 곳에서 새 삶을 꾸리는 걸 좋아한다. 이번에 부산에 왔는데, 아시아 땅은 처음 밟아본다. 시차 때문에 조금 어지럽지만 흥분을 감출 수 없다.” 플래시 ‘포워드’ 섹션에 초대된 페란 ‘아우디’ 감독의 이야기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열정이 아우디를 전진시켰다.

[월드액션] 리들리 스콧과 브래드 피트가 뭉쳤다

감독 리들리 스콧과 각본가 스티븐 자일리언이 또 한번 뭉쳐서 힘을 써볼 계획이라고 하네요. 컬럼비아픽처스가 영국의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레드 라이딩>의 판권을 사들여 영화로 리메이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요, 시나리오작가와 감독으로 물망에 오른 사람이 바로 리들리 스콧과 스티븐 자일리언이라고 하네요. 지금 구체적으로 계획에 대한 말들이 오가고 있답니다. 리들리 스콧은 국내에서도 유명한 감독이니 다들 잘 아실 테고요 스티븐 자일리언은 <쉰들러 리스트> <갱스 오브 뉴욕> <아메리칸 갱스터> 등의 각본을 쓴 헐리우드의 유명 각본가입니다. 최근에는 마이클 루이스의 책 <머니볼>을 컬럼비아픽처스를 위해 각색했습니다. 이 영화에는 멋진 아저씨 브래드 피트가 출연을 이미 약속했답니다. 리들리 스콧과 스티븐 자일리언은 오래전에 <한니발>에서 이미 한번 뜨겁게 뭉친 바 있고요, <아메리칸 갱스터>에서 다시 만나 바래지 않은 화려한 팀워크를 선보인 바 있지요. 그들이 그려낸 1970년대 미국의 흑인 마약상과 그를 체포하려는 집념어린 형사의 이야기를 기억하시면 될 것 같네요. <아메리칸 갱스터>에서는 그 시대의 모습과 경찰의 부패 등이 유려한 이야기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는데 이번에도 그들은 그런 종류의 영화를 한번 만들어볼 생각인 것 같습니다. <레드 라이딩>은 원래 영국 작가 데이비드 피스의 시리즈 소설 <레드 라이딩 4중주>를 각색한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입니다. 일곱살 먹은 한 어린 여자아이의 유괴를 둘러싸고 벌어지게 된 경찰의 부패와 권력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하네요. 영화의 배경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바뀌고, 지금 두 사람의 고민은 어떻게 내용을 압축해서 잘 담을 수 있을까, 하는 거랍니다.

이지아 "연기에서 망가지는 것 두렵지 않아요"

(서울=연합뉴스) 윤고은 기자 = 확실히 스트레스가 컸던 모양이다. 드라마가 끝난 지 3주가 흘렀는데 갑자기 눈앞이 번쩍번쩍하더니 글을 읽을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한밤중에 의사 처방을 받아 약을 먹었다. "자고 나니 괜찮아졌다"지만 얼굴이 상기된 것이, 몸과 마음이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친절한 지아씨'답게 있는 힘을 다해 사진을 찍고 성심껏 인터뷰를 했다. "약속된 인터뷰를 어떻게 취소하느냐"며 나온 그가 무척 고마우면서도 다소 미련해보였다. 낯을 잘 가리는 A형에, 자기를 혹사하는 이 완벽주의자는 힘들 텐데도 "뭐든 물어보세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데뷔작부터 대대적인 주목을 받더니 내리 세 작품 연속 흥행에 성공한 '행운아' 이지아(28)가 세 번째 작품을 끝내고 톡톡히 후유증을 앓고 있다. 지난달 막을 내린 SBS TV '스타일' 촬영 후반 왼쪽 다리에 마비 증상이 생긴 그는 여전히 완쾌되지 않아 이날도 다리를 좀 절었다. "눈치 못 채신 분들이 많을 거예요. 후반부에는 제가 거의 앉거나 잠시 서 있는 상태에서만 연기했어요. 움직이는 신이 없었죠. 그냥 어느 날 그런 증상이 왔어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 처음에는 발목이 잘 안 들릴 정도였어요." 이유가 뭐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드라마 끝나고 내리 물리치료를 받고 있다는데, 촬영하면서 마음고생이 심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지아는 2007년 생짜 신인임에도 MBC TV 대작 '태왕사신기'의 여주인공 수지니 역으로 전격 발탁돼 톱스타 배용준과 호흡을 맞췄고, 이후 MBC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두루미 역을 맡아 '강마에(김명민 분) 신드롬'과 함께 인기를 모았다. '스타일'도 평균 17~18%의 시청률로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드라마가 애초 기획 방향을 살리지 못하면서 그가 맡은 서정이라는 인물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아 논란이 됐다. 또 그보다는 박기자 역의 김혜수에게 포커스가 맞춰졌다. "포커스가 누구에게 맞춰졌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서정이라는 인물이 제대로만 그려졌다면, 그가 멋진 여자로 거듭나는 과정이 잘 그려지기만 했다면 아무 문제 없었을 거예요. 그런 점은 김혜수 선배님이나, 류시원 선배님 모두 아쉬워하세요. 앞선 두 작품에 비해 더 욕심을 냈고, 가장 많이 고민을 한 작품이긴 하지만 배운 것도 많아요." 아마도 이 연예계 행운아가 겪은 첫 번째 시련이었을 듯. 사실 그의 행운은 인터뷰 날에도 효과를 발휘했다. 야외에서 사진을 찍고 철수하자마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말 그대로 3년 전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배우가 꿈도 아니었고, 엄두도 못내던 분야였는데 지금은 좀 더 일찍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싶고, 뭔가를 이제야 만난 느낌이다.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났니?'라고 묻고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세 작품 모두 많은 분이 봐주셨다는 점이 감사할 따름이죠. 다만 모두가 날 지켜보고 있다는 게 부담스럽기는 해요. 제가 원래 행사장에 가면 포토월에도 잘 못 설 정도로 남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해요. 사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친구들과 함께 내려갔는데, 모자 쓰고 조용히 다니니까 알아보시는 분이 별로 없어서 좋았어요.(웃음)" '스타일'에서 마음고생을 하기는 했지만 이지아는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며 제작진을 감탄시켰다. '오버연기' 논란도 일었지만, 그가 여배우로서 외모나 이미지를 고려하지 않고 몸을 던져 연기한 것은 높이 살 만하다. 한마디로 그는 성실했다. "어차피 초반에는 다소 만화 같은 설정이 있었기 때문에 오버스럽게 했어요. 또 촬영장에서 다들 재미있게 봐주셔서 더 용기를 얻어서 망가졌죠.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어요. 일단 연기를 시작하면 다른 생각은 전혀 안 들거든요. 내달 선보이는 텔레시네마 '내 눈의 콩깍지'에서는 아예 뻐드렁니로 나오는 등 훨씬 더 망가져요.(웃음)" '행운아'라 불리는 것에 대해 그는 "지금껏 순탄하게 온 것에 너무 감사드린다"면서도 "그래도 나 역시 매 작품 할 때마다 말 못할 고민과 아픔이 있었다"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내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알게 됩니다. 늘 하나라도 더 배워 흡수할 수 있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pretty@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영화읽기] 스타일의 늪에 빠진 SF적 상상력

<지구에서 사는 법>은 안슬기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다. <다섯은 너무 많아>(2005)가 주변부 삶들이 새로운 유사 가족적 유대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영화였다면, <나의 노래는>(2007)은 빈곤한 가정의 20살 청년이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영화였다. 두 영화 모두 소외된 삶을 다루고 있었지만, 그 삶을 대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더없이 따뜻했다. 그러한 삶 속에 깃들어 있는 작은 희망의 씨앗을 감지하고 믿게 만드는 것, 이것이 그 영화들이 지닌 힘이었다. <지구에서 사는 법>은 그 영화들과는 다른 영화다. 권력자들의 외계 vs 추방자들의 지구 영화는 스스로를 ‘범우주적 불륜드라마’라고 소개하고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륜이라는 파격적인 소재에 SF적 상상력이 더해진 매우 독특하고 낯선 영화’다. 이런 메인 카피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감독의 ‘장르적 스타일’에 대한 취향이었다. 안슬기 감독은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 장르적 스타일을 멋지게 활용한다. 가난한 집 소년의 가출 동기(생계를 위해 고생하는 엄마에게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첫 장면의 ‘좀비영화 스타일’, 그리고 영화의 중간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서 ‘소박하고 귀여운 복수’를 표현하고 있는 ‘액션영화(혹은 코미디영화) 스타일’. ‘소박하고 귀엽다’는 것은, 비록 복수일망정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이고, 장르적 스타일은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를 유쾌하고 멋지게 표현하는 도구가 된다. 때론 의미심장하고, 때론 기발한 재치가 엿보였던 그 장면들을 떠올리며, 호기심과 기대를 품고 영화관에 들어갔다. ‘저예산’으로 ‘SF적 상상력’이 어떻게 구현되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 감지되었던 그 재치의 본격적인 확장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기대되기도 했다. <지구에서 사는 법>을 본 첫 느낌은 일종의 ‘당혹’이었다. 화면분할과 자막으로 ‘외계인들’ 사이의 텔레파시를 표현한 장면은 정말 멋진 ‘저예산 SF’의 진수였지만, 끝내 그들이 왜 굳이 ‘외계인’으로 설정되어야 했는지를 납득할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그 당황스러움은 곧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이 되었다. 과연 이 영화는 ‘SF적 상상력’이라는 장치를 통해 ‘불륜’이라는 소재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준다는 자신의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가? 이 영화는 SF라는 형식을 빌린 불륜에 대한 새로운 탐구인가, 아니면 불륜에 대한 탐구라는 알리바이를 갖고 펼쳐지는 진부한 장르적 유희인가? 이 영화를 ‘SF적 상상력’을 걷어내고 순수한 ‘불륜드라마’로 볼 경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인인 남편 연우(박병은)가 있다. 그에게는 안정된 직장(가령, 공무원)에 다니는 아내 혜린(조시내)이 있다. 요즘 그들은 대화가 잘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두 사람 사이에는 현실에 대한 태도의 차이, 즉 삶에 대한 코드의 차이가 있다. 가령, 혜린은 지방 전문대 강의 자리라도 얻을 수 있도록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연우를 설득하려 하지만, 연우는 ‘자신이 없다’며 거절한다. 한편, 아내는 이미 직장 상사인 한 실장(선우)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그 불륜은 열정에서 시작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거래로 시작되었다. 특히 혜린쪽은 마지못해 그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며, 속으로는 여전히 남편인 연우를 사랑하고 있다. 어느 날 연우는 시인 모임에서 세아(장소연)라는 여자를 만난다. 말없이 눈빛만으로도 소통이 이루어질 만큼 삶의 코드가 같은 그들은 작은 일탈을 시도한다. 연우와 세아의 관계를 알게 된 한 실장은 업무 지시를 빙자해서 혜린이 둘 사이의 관계를 목격하도록 만든다. 연우와 혜린은 격렬한 갈등을 겪지만, 결국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화해한다. 결국, ‘불륜드라마’로서의 <지구에서 사는 법>은 삶의 코드는 다르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는 부부의 일탈과 갈등과 화해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불륜’에 대한 다소 통속적인 설정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 SF적 상상력은 일단 그 통속적인 설정을 더 도식화하고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연우가 ‘지구라는 감옥’에 수감된 ‘외계인’이라는 SF적 설정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인에 대한 일종의 알레고리다. 남편인 연우는 지구에 살면서 ‘지구에서 사는 법’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시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지구에서 추방된 자이고, 그렇기 때문에 결국 ‘외계인’이다. 아내인 혜린은 그 ‘법’에 따라 살아남으려고 직장 상사와 내키지 않는 불륜까지 감행하면서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지구인’이다. 이때 이 영화는 <지구를 지켜라!>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설정된 ‘지구’와 ‘외계’를 대립 구도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외계’가 체제의 권력과 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이라면,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 ‘외계’는 그 체제의 권력과 논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추방된 자들의 공간인 것이다. 전자에서의 ‘지구’가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켜야 할’ 공간이라면, 후자에서의 ‘지구’는 삶을 위해 ‘벗어나야 하는’ 공간이다. 장르적 스타일, 정서적 몰입을 방해하다 그러나 <지구에서 사는 법>은 이런 단순한 기본설정에 만족하지 않는다. 연우뿐만 아니라 연우와 대척점에 있는 한 실장 역시 ‘외계인’이기 때문이다. 이때 ‘외계’는 추방된 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지배자들의 공간이 되고, 역으로 ‘지구’는 지배자들의 공간이 아니라 추방된 자들의 저항의 공간이 된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지구인’에도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순수 지구인이 있고, 외계에서 추방된 외계인인 지구인이 있다. 먼저 저항을 시도하는 것은 순수 지구인들(한 실장에게 이유없이 모욕당하고 구타당하는 젊은 남자와 그의 여자친구)이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처절하게 응징된다. 이 순수 지구인들이 허망한 저항을 시도할 때, 추방된 외계인인 연우와 그를 감시하도록 고용된 지구인인 혜린 커플은 오히려 저항이 아니라 순응을 선택한다. 세아와의 일탈에서 돌아온 연우는 혜린의 요구대로 ‘대학원에 진학’하겠다고 선언하고, 둘은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체제의 수호자(지구라는 유배지의 간수, 죄수들로 하여금 외계로의 탈출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지구라는 현실에 순응하도록 만들 책임이 있는 관리자)인 한 실장이 이 커플의 순응 노력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 실장은 체제의 억압성을 가시적으로 나타내는 기능적 인물이면서, 스스로 체제의 논리에서 벗어나는 문제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 ‘지구’와 ‘외계’라는 이분법(SF적 설정)은, 이렇듯 순간순간 그 의미를 역전시키면서 온통 자기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져든다. 물론 이런 ‘논리적’인 모순과 자가당착이 그 자체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 지배적인 통념을 넘어서기 위한 질문과 탐색의 도구, 즉 일종의 ‘화두’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의 그 ‘논리적 모순’은 ‘불륜’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탐색의 장치라기보다는 과도한 ‘장르적 스타일’에 대한 욕망의 결과로 머물고 만다. 이 영화에는 여러 번에 걸쳐 ‘장르적 스타일’이 등장한다. 검은색 코트와 검은 안경이라는 소도구와 슬로모션으로 양식화된 화법이 그것이다. 그것은 <다섯은 너무 많아>의 한 장면에서 등장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섯은 너무 많아>에서의 그것이 영화가 견지하고 있는 삶에 대한 질문을 유쾌한 정서로 표현해내고 있는 것이었다면, <지구에서 사는 법>에서의 그것은 질문의 전제를 교란시키면서 정서적 몰입을 오히려 방해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것은 ‘스타일’에 대한 물신적 욕망의 징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SF라는 장르’의 과제는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며, 그 새로운 시공간은 현재의 통념과 욕망을 투사하는 무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질문을 던지고 문제화시키는 것이 될 때 빛이 난다. ‘저예산’ SF인 <지구에서 사는 법>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SF인 <써로게이트>와 <게이머>. 이 ‘극과 극’의 추석 시즌 SF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결국 빛을 발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선물용 영화 <극장판 나루토질풍전: ‘불의 의지’를 잇는 자>

synopsis 닌자들이 사는 세상. 히루코라는 절대강자가 나타나 이간질로 나라들을 싸우게 하고 제4차 닌자대전을 유도한다. 자신은 닌자 5대국의 특정한 닌자들에게서 능력을 뽑아내어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강자가 되려 한다. 나뭇잎 마을에서도 주인공 나루토의 스승 카카시가 히루코의 최면에 걸려 그녀의 소굴로 들어간다. 나루토는 마을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그 최면을 받아들여 적진으로 홀로 떠난 스승 카카시를 구하려 한다. 하지만 나뭇잎 마을의 닌자들은 그런 나루토를 막아선다. 나루토는 스승을 구하고 나뭇잎 마을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나루토질풍전: ‘불의 의지’를 잇는 자>는 나루토 탄생 10주년 기념작이다. 1999년 일본의 <주간소년점프>에서 시작된 만화 <나루토> 시리즈는 닌자소년 나루토를 주인공으로 한 닌자만화다. 텔레비전 시리즈로 만들어졌고 2004년부터는 <나루토 극장판 1기>를 시작으로 매해 극장판 시리즈를 개봉하고 있다. 국내 케이블 채널의 방영을 통해 적지 않은 나루토 팬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영화는 각설하고 시작한다. 나루토 팬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시지요, 이제 올해의 극장판이 나갑니다, 라고 신속하게 말하고 시작하는 것 같다. 나루토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은 ‘나선환’, ‘수인분신술’, ‘다중환영분신술’ 등 웬만한 철학용어보다 더 어려워 보이는 닌자들의 술법 이름에 당황할 수도 있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여기는 닌자들이 사는 세상이고 그들 사이에 몇번의 전쟁이 있었고 그들은 서양의 엑스맨처럼 자연을 부리고 형상을 바꾸는 각자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주인공 나루토는 나뭇잎 마을에서 최고의 닌자가 되기 위해 커가는 소년이다. 이야기 전체는 느리고 단순한 면모가 있지만 그게 이 영화의 재미를 크게 떨어뜨리지는 않는 것 같다. 전투장면을 보는 건 재미있다. 상상력도 뛰어나고 구현도 꼼꼼하다. 캐릭터를 보는 건 더 재미있다. 나뭇잎 마을의 캐릭터가 지닌 능력들이 하나둘 선보여질 때 눈도 즐겁다. 덧붙일 만한 건 이 영화가 계몽적이라는 인상을 줄 만큼 하나의 명제 아래 있다는 것이다. “규칙을 어기는 자는 닌자로서 최악이다. 하지만 동료를 버리는 녀석은 더 쓰레기다.” 그런 가르침을 준 스승 카카시가 자기를 희생하여 마을을 구하고자 할 때, 마을을 살리기 위해 그런 그를 내버려두라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나루토는 따르지 않는다. 그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영화의 전체 이야기는 그 구도 아래 나루토가 카카시를 구하러 가는 이야기다. 상상력 좋은 전투장면들이 있고 귀엽고 신비한 캐릭터들이 있고 착한 마음씨도 있으니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선물용 영화로 괜찮겠다.

김하늘 "떨면서 다가오는 팬에게 감동"

(하노이=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공항에서 다가오는 팬이 안아달라며 다가오는데 떨고 있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저도 살짝 눈물이 고일 정도로 감동적이었어요." 영화 '7급 공무원' 홍보차 베트남을 찾은 배우 김하늘이 베트남 팬들에게 받은 사랑의 감동을 전했다. 19일 오후 '한-베트남 주간' 행사의 하나로 열린 한국 영화제 개막식에 앞서 만난 김하늘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7급 공무원' 포스터가 붙어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화보 촬영차 베트남을 들른 적은 있지만, 영화 홍보를 위해 그가 베트남에 오기는 처음이다. 김하늘이 호찌민에 도착한 것은 17일 자정이 넘어서였지만 공항에는 김하늘을 보려는 많은 팬이 기다리고 있었고, 현지 언론은 이를 '한밤중 대소란'으로 전하기도 했다. "한국 팬을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한국의 드라마와 영화를 다 알고 있는 것도 놀랍고, 한국말로 '사랑한다'고 하고 안아달라고 하는데 저도 감동받았어요." '7급 공무원'은 한-베트남 주간의 영화제가 끝나고서 베트남에서 정식 개봉할 예정이다. 김하늘은 베트남을 시작으로 홍콩과 싱가포르를 도는 아시아 투어를 진행 중이다. 그는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이 베트남에서 그대로 사랑받는 것을 보면 두 나라의 정서가 비슷한 것 같다"며 "홍콩과 싱가포르에서는 어떤 느낌을 받을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올해 봄 영화 '7급 공무원'이 개봉한 뒤 한일 합작 드라마인 '텔레시네마' 촬영을 마치고 미국에서 화보 촬영을 하는 등 바쁜 시간을 보냈다는 그는 "곧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귀띔했다. "마음에 드는 드라마와 영화가 있어서 고르고 있는 중이에요. '온에어'와 '7급 공무원'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곧 찾아뵐게요." eoyyie@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허풍선이 타란티노의 거대한 농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언어 유희를 만끽하며 즐기는 다섯 단계 쿠엔틴 타란티노의 신작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개봉한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역사극에 타란티노가 도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운데 뚜껑을 열어보니 희한한 영화다. 타란티노는 작정을 하고 그 어두웠던 시기에 자기의 독한 농담을 던진다. 타란티노가 상상하는 2차대전 히틀러 암살 대작전은 어떤 영화인가. 그가 영화에 사용한 챕터별 방식대로 따라가보자.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영화적 포인트를 짚어봤다. 챕터1. 분탕질 우화: 타란티노식 기선제압 “옛날 옛적 나치 점령하 프랑스…”라는 자막과 함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시작한다. 이것은 진지한 역사극이 아니므로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 서부극을 보는 것과 같이 봐달라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의 제안이며 기선제압이다. 타란티노는 이 영화를 다섯개의 챕터로 나누고 있다. 첫 번째 챕터에서 세 자매의 아버지인 프랑스인 피에르 라파디트는 저 멀리 그의 집을 향해 오는 군용 지프차 한대를 발견하고 긴장한다.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 차에서 내린 나치 장교 한스 란다(크리스토프 왈츠)는 본론을 뒤로한 채 프랑스 주인장에게 예의 바르지만 위협적인 말을 이어 던진다. 그의 말은 내용이 없지만 뱉을 때마다 덫처럼 무섭고 이 집의 주인은 그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다. “유대인 사냥꾼”으로 불리는 한스 란다가 이 집에 온 이유는 주인이 마룻바닥에 숨겨준 유대인 가족을 몰살시키기 위해서다. 결국 가족이 죽을 때 한 소녀만이 살아 도망치고 그녀의 이름은 뒤에 파리의 작은 극장의 사장이 되는 쇼사나(멜라니 로랑)다. 시간이 흐르고, 미군은 나치 세력을 한방에 제거할 수 있는 암살 계획을 세운다. 거침없는 승전으로 나치에 일종의 공포의 상징이 된 알도 레인 중사(브래드 피트) 일당이 히틀러와 괴벨스 등 나치 주요 인사를 암살하기로 한다. 그 임무를 나치의 선전영화 <민족의 자랑> 시사회장에서 수행하기로 한다. 쇼사나를 사모하게 된 나치의 전쟁 영웅이자 영화 <민족의 자랑>의 주인공 배우의 설득으로 쇼사나의 극장이 시사회장으로 선택되고, 히틀러도 이 자리에 참석하기로 한다. 쇼사나는 그녀대로, 알도 레인 일당은 그들대로 암살 작전을 짠다. 이야기로만 보아도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역사의 진지한 재구성물로 계획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늘 잘하는 것처럼 분탕질하며 놀아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 제3제국(나치 치하의 독일)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유대계 미국인인 내 친구들에게 그 시나리오를 줬더니 ‘정말 대단하다. 멋진 상상력이다. 지금까지는 내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일인데’라고 말했었다. 그전에는 몰랐지만 독일인들 역시 그런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상은 했지만 그저 상상으로 끝냈던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어본 사람들은 그 시나리오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지만, ‘과연 우리가 이 영화를 독일에서 찍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결국 독일에서 촬영하기로 결정이 났고 다들 몸조심하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가 흥미있어하는 건 상상력의 쾌감이지 역사는 아닌 셈이다. 그렇게 하여 <재키 브라운> 이후에 이따금씩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던 <바스터즈: 거친녀석들>은 “쿠엔틴 타란티노식 동화”(다이앤 크루거), “원기왕성하고 창의적이며 폼을 재면서도 재미있는 유능한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미국 쇼 비즈니스의 맥락에서 2차대전을 위치시킨 거의 첫 번째 영화”(짐 호버먼) 라는 평가를 듣는다. 챕터2. 괴물이 나타났다: 히어로를 찾는 법 타란티노의 이야기는 종종 이런저런 가지를 많이 친다. 혹은 그의 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느 때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타란티노의 인물 구도는 집단적이며 그 캐릭터마다 특징적이다. 타란티노가 이번에 선택한 방식은 출신 국적에 맞는 다국적 배우의 캐스팅이다. 미국 군인 알도 레인으로는 브래드 피트를, 쇼사나 역으로는 프랑스 출신의 멜라니 로랑을, 비밀 스파이 브리지트 폰 하머스마르크 역에는 독일 출신의 다이앤 크루거를, 그리고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인물 게슈타포 장교 한스 란다 역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크리스토프 왈츠를 캐스팅했다. 전체를 관통해서 본다면 물론 알도 레인과 한스 란다가 가장 눈에 띄는 역할이다. 미남자에서 시작했지만 이제 더이상 미국에서 바보, 멍청이, 머저리, 단순무식의 역할을 브래드 피트보다 더 양식적으로 잘 해내는 배우는 많지 않다. 알도 레인 중사는 아파치처럼 독일군의 머릿가죽을 벗겨 승리의 쾌감을 맛보고 포로들의 이마에 나치의 상징인 만자(卍字)를 칼로 새기기를 즐긴다. 하지만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진짜 히어로는 따로 있다. 게슈타포 장교 한스 란다, 누군가 “단순히 악인이 아니라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라는 이 연회의 주인”이라고 칭했을 만큼 강렬한 인물, 그리고 그 역을 치밀하게 구축한 크리스토프 왈츠가 진짜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007 골든 아이> 등에도 출연했지만 영화에서는 그리 낯익지 않은 52살의 이 배우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텔레비전에서 30여 년간 연기해왔다. 그가 토끼를 몰듯이 우회하여 질문을 던지며 핵심으로 다가설 때 그의 표정과 말은 차갑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차가움은 늘 지나친 공손함으로 위장되어 있다. 그 공손함은 늘 잔혹함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그는 때때로 코믹하기까지 하다. 성인이 된 쇼사나는 우연히 한스 란다를 만나 몇 가지 질문을 받게 되는데, 그가 돌아서 나간 다음 쇼사나는 겁에 질린 울음을 터뜨린다. 숨죽이며 그 장면을 보는 건 관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는 그러니까 괴물이 하나 나타난 것인데, 그가 한스 란다이며, 크리스토프 왈츠다. 챕터 3. 영화 작전 Operation Kino: 어느 길로 가든 영화로 통한다 타란티노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처음 구상할 때 그에게는 “미션을 수행하는 남자들”이라는 모티브가 있었으며 그에 해당하는 영화, 로버트 알드리치의 <특공 대작전>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 영화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초기 단계에서만 그랬다. 거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긴 했지만 그 뒤 완전히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쓸 때는 나만의 <특공대작전>(The Dirty Dozen)을 써보자고 생각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에 글을 쓰게 만든 동기는 바로 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알려진 것처럼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원제 <인글로리어스 바스터즈>는 <특공 대작전>에서 영감을 얻어 엔조 G. 카스텔라리가 1978년에 만든 <인글로리어스 바스터즈>에서 제목을 따왔다. 모조품을 모조화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진 타란티노가 아니던가. 타란티노 자신이 앞선 두 영화에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그 영화들과 내용적으로 거의 연관이 없는 별개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만약 타란티노에게 정말 중요했던 걸 하나 꼽자면, 그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이 어느 길로 가든 영화로 통해야 한다는 것이었으리라. 예컨대 이 영화의 작은 유머 중 하나는 히틀러 암살 첩보작전에 동원되는 대원 중 하나가 전직 영화평론가라는 점이다. 단순히 독일 UFA영화에 대한 전문가이며 독일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그가 첩보작전에 동원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웃자는 뜻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물들은 종종 독일의 유명 감독 막스 린더와 레니 리펜슈탈과 G. W 파브스트에 관하여 말하고, 시사회장에는 독일의 유명 배우 에밀 야닝스가 등장하며 또 40년대 UFA 영화의 스타 같은 여배우가 존재하며 <민족의 자랑>(Nation's Pride) 이라는 나치의 선전물이 있다(히틀러가 이 선전물을 보며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영화에 나온다). 나치가 선전 전략으로 영화를 이용한 것은 다 아는 일인데 그 점이 타란티노에게는 상상력의 창고가 된 셈이다. 타란티노에게 2차대전과 대학살의 의미는 사라진다. 물론 타란티노가 마지막 챕터에 이르러 가스실의 공포를 밀폐된 극장 안의 공포감으로 바꿔 상상해낸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건 유추일 뿐이다. 타란티노는 2차대전에 관한 영화들을 본 자신의 감상기와 영화산업을 장악하고 있었던 나치 정권 치하에 가능한 공상에 더 관심이 있다. 니트로 필름이 폭발하여 시사회가 열리던 극장은 화재에 휩싸이고 잔혹 코믹한 동화는 이제 거의 끝나간다. 다만 이 영화의 모든 길은 영화 속 영화 <민족의 자랑>의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으로 향해 있다. 그 때문에 “영화의 힘이 제3제국을 무너뜨린 것”이라고 타란티노는 농담처럼 말한 것이다. “제3제국(히틀러 치하의 독일)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영화다. 나는 영화가 그런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영화로 인해 그들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든다. 나는 쇼사나가 불을 지르게 해야겠다(영화관 안에서)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나니 ‘무엇으로 불을 지르지? <유대인 쥐스> 필름으로? 아니면 <위대한 환상>의 필름으로?’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영화란 늘 주요한 서브 텍스트에 해당했지만 영화 세계 그 자체가 영화 속 현실이 된 건 처음 있는 일이라는 평가들도 그래서 나오고 있다. 챕터4. 말하고 말하고 말하고: 총격전 보다 긴장감 넘치는 그것 만약 당신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보고 흥미로워 한다면 그건 유난히 멋진 액션신이나 특별히 아름다운 영상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는 듣는 재미가 있다. 이 영화의 스탭 중 한명은 2차대전에 암살 작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라기에 피가 흥건한 격투장면을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렇지 않았다고 회고한다. 짐 호버만은 <바스터즈:거친녀석들>에 관하여 “폭력은 즉각적으로 오지 않는다.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은 빵빵 총 쏘는 것만큼 많이 말하고 또 말한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이 영화의 액션과 폭력은 말이며 많은 말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오고 갈 때 금방이라도 그 자리가 폭파될 것 같고, 그 말들이 쌓이는 한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치닫는다. 실은 타란티노의 영화에서 폭력이란 수다의 일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저수지의 개들>을 만들고 나서 그에게 붙여진 오래된 별명 중 하나가 헤모글로빈의 철학자였지만 그 말은 부주의했다. 타란티노의 것은 피가 아니란 말이다. <저수지의 개들>에서도 역시 그 영화의 매력은 할 일 없이 떠들어대는 초반부 대화 씬 에서 이미 조성된다. 타란티노의 인물들이 허황된 말을 하고 서로 툭툭 주고받을 때 총격전보다 더 긴장감이 넘친다는 건 이미 우리의 경험이지 않은가. 그 말들이 분위기를 만든다. 그런 점에서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에는 터질 것처럼 밀도 높게 분위기가 조성된 장면이 하나 있다. 영국군 아치 히콕스 일행이 비밀 스파이 노릇을 하는 여배우를 만나러 갔을 때 그들이 도착한 곳은 라 루이지안이라는 지하의 후미진 카페다. 거기에는 하필 독일병사들이 한 친구의 득남을 축하하며 단어 게임을 하며 노는 중이다. 어쩌다 그 무리의 한 병사가 여배우가 있는 이쪽 아치 히콕스 일행에 관심을 보이면서 계획이 슬슬 꼬여간다.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갑자기 진지가 형성되고 긴장은 고조에 오른다. “라 루이지안 장면은 저수지의 개들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치와 독일인들이 등장하고, 창고가 아니라 지하 바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라고 타란티노는 말했는데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말의 액션이 펼쳐지는 장면 중 하나다. 챕터5. 포커 게이머 타란티노: 그가 당신에게 게임을 제안한다 타란티노가 흔한 말처럼 탕아라면 그가 만드는 영화는 분탕질의 영화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당돌한 놀이로서의 영화를 만드는데 이제 그 소재가 역사극으로 흐른 것이다. 어쨌든 그의 방식은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 있고 폭발이 아니라 폭발 직전까지 끌고가는 시간에 있다. 타란티노의 영화에는 무의미해 보이는 도중에 분위기가 생긴다. 액션/리액션의 단계별 총합이 아니라 액션 이후와 리액션 이전의 소강상태가 타란티노의 영화에서는 더 중요하다. 타란티노의 영화를 말할 때는, 그러니까 비유의 욕망이 일어난다. 테이블에 앉아 우리가 손에 든 카드패를 알아보는 데에 그리고 그의 패를 숨기는 데에 재주가 있는 도박사라고 그를 비유해보자. 그는 몇 장의 카드패를 쥐고 시가를 물고 상대를 조롱하듯 한다. 하지만 중요한건 카드게임의 승자란 늘 패를 뒤집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패를 뒤집는 순간은 모든 승패가 갈린 뒤다. 어떻게 눙치는가. 어떻게 허풍을 치는가. 어떻게 진심을 감추는가. 어떻게 떠벌이는가. 그것이 테이블에 앉은 뛰어난 도박꾼의 재주이며 도박사 타란티노와 그의 기술이다. 타란티노의 영화들은 대개 눙치고 허풍치고 떠벌이며 패를 뒤집기 직전까지 우리를 쾌감으로 현혹한다. 도박사의 진심이 오로지 성실한 허풍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은 즐길 만한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타란티노가 부리는 기술 중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다국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에 있다. 독어, 영어, 프랑스어가 난무하는 상황에서 무언가 정보의 부족과 기호의 착오가 발생하며 극의 흐름을 급반전시킨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드리고자 한다. 어떤 언어를 알아듣고 못 알아듣는 것(첫 번째 챕터와 다섯 번째 챕터), 혹은 관습의 기호를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세 번째 챕터)에 따라 각 챕터는 기승 전결화되고 있다. 그것이 각개의 챕터로 나눠진 이유처럼 보이는데, 거기에는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기호를 이용하여 우리에게 게임을 걸어오는 타란티노의 야심이 있다.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은 말의 연회장이며 기호의 착오로 놀이하는 거대한 농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