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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붕가부>의 한동일 감독이 만드는 <도리도리 숲의 잼잼요정>

도리도리 숲으로 놀러오세요! 7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자고 결심했을 때,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 중 하나가 ‘가가멜 아저씨’를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선배에게서 후배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 별명은 수위 아저씨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회사에 들어설 때마다 <스머프>를 떠올릴 수 있었던 덕분에, 사회생활이 다소나마 풍요로워졌으니, 성격은 파파 스머프 같은 가가멜 아저씨에게는 이만저만 신세를 진 게 아니다. 마르크시즘의 이상을 구현했다느니 동성애를 평등하게 묘사했다느니 하지만 <스머프>가 좋았던 것은 그렇게 복잡한 이유가 아니었다. 풀숲을 지나칠 때마다 어쩌면 저기에도 요정들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DR face가 기획 중인 52부작 3분 시리즈 <도리도리 숲의 잼잼요정> 역시 숲에서 벌어지는 요정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붕가부> <게으른 고양이 딩가>를 만든 한동일 감독의 작품답게 역시 3D애니메이션이다. 초기부터 3D 분야를 개척해온 그의 영상에는 따스한 질감이 숨쉬고 있다. 동물의 털은 물론이요 피부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4살에서 7살을 타깃으로 하고 있는 만큼, <도리도리 숲의 잼잼요정>에서는 일단 동화 같은 색감이 눈에 띈다. 주인공은 고깔모자와 큰 코가 인상적인 소심한 잼잼요정. 호기심이 많지만 매사 자신감 없는 그는 조금 바보스럽지만 열심히 사는 노력파다. 그가 사는 도리도리 숲에는 각자 신비한 능력을 지닌 요정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태어날 때부터 재능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특기를 찾아 연마하면서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잼잼요정 역시 자신의 능력을 찾아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 그러나 실수만 연발하는 그로서는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3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담아내야 하기에 서사적인 이야기보다는 예쁜 영상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에서 소품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정들의 탈것은 특히 눈에 띄는 점. 도리도리 숲의 요정들은 동화 속에 나올 법한 지팡이는 물론, 곤충이나 동물, 비행정, 로봇 같은 걸 타고 다닌다. 메커닉, 로봇이라고는 해도 자연과 전혀 위화감 없는 것들이다. 탈것이 아니어도 이 마을 요정들은 우산, 목발, 약초 등 재미있는 소품들을 하나씩 지니고 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귀여운 요정들도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요소. 비의 요정, 이슬의 요정, 꽃의 요정, 바람의 요정 등 보기만 해도 깜찍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초기부터 3분 시리즈를 개척해온 한동일 감독은 인지도를 넓히기 위해서는 짧더라도 길게 노출되어야 한다는 전략을 이번에도 고수, 노하우를 쏟아붓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캐릭터 상품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캐릭터 상품을 보고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는 경우도 무시할 수 없어요. 유아층을 노리고 제작하지만 구매층은 20대 여성이라는 점이 신기하다면 신기한 점이랄까요. 이유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10여년 넘게 이 일을 해온 한 감독의 분석력은 조만간 시장을 제패할 것 같다. 그러나 <도리도리 숲의 잼잼요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산업적으로 무장한 기획력보다는 한동일 감독의 맑은 눈빛에 있다. 자신의 상상을 영상으로 풀어내면서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만저만 귀여운 아이들이 태어날 것 같지 않다. 업데이트되는 소식은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http://www.face-dfp.co.kr).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

[새 영화] 나이아 바르달로스의 <나의 그리스식 웨딩>

시끌벅적 결혼과정, 미 전역이 환호했다. “우리가 철학을 할 때, 너희 조상은 나무를 탔다구.” 시카고에서 이름도 근사한 그리스식당 `춤추는 조르바'를 운영하는 그리스계 미국인의 민족적 자긍심은 하늘을 찌른다. 등교길의 딸들에게 상기시키기를 잊지 않는다. “그리스의 3대 발명은” 입을 모아 하는 대답, “천문학, 철학, 민주주의!” 딸들은 그리스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고 믿는 아버지의 딸 툴라가 앵글로 색슨 남자와 결혼을 하겠단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긴 하는데, 신랑감 이안은 50명 대가족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야단법석 절차를 치뤄내야 한다. 이 시끌벅적한 결혼이야기 <나의 그리스식 결혼>은 2002년 할리우드 최대의 돌출 성공작. 영화는 주인공 툴라 역의 그리스계 카나다인 니나 바르달로스의 1인극이 원작이다. 14일 개봉. 툴라가 당신을 얼마나 닮았느냐는 한 영화잡지의 질문에 니나 바르달로스는 “바로 내 얘기”라고 대답했다. 니나는 그리스 이민 2세대고, 툴라처럼 뒤늦게 이안 고메즈라는 `기사'를 만났고, 이안은 영화속 이안처럼 그리스 대가족에 합류하기 위해 영세를 받고 그리스 정교도가 되었다. 모험심이야말로 현실과 허구의 두 인물의 공동자산. 툴라가 자기 삶을 개척하기 위해 식당을 벗어나 대학으로 갔다면, 니나는 캐나다를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그러나 `소수민족' 그리스계 배우에게 기회는 바로 주어지지 않았다. “네 얘기로 직접 연극을 하면 어때” 한 친구의 말에 되묻기. “무슨 얘기” “네 결혼 이야기.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렇지, 내 결혼과정의 문화충돌기는 털어놓기만 하면 파티장을 웃음으로 뒤흔들었지. 그래서 니나 바르달로스의 그리스식 결혼은 스탠드 업 코미디로 태어났다. 이것이 바르달로스 출세기의 제1장. 1인극의 관객 중에 톰 행크스의 아내 리타 윌슨이 있었다. 리타는 즉각 남편에게 이걸 영화화하자고 말했다. 시나리오를 한번 써보지, 라는 제안에 바르달로스는 대뜸 시나리오를 내놓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연극은 입소문이 나서 몇몇 영화사로부터 그런 제안을 받고 써둔 시나리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를 이탈리아나 히스패닉으로 바꾸자는 조건을 붙이는 바람에 “무슨 소리야”라고 거절을 해왔던 것. 그런데 리타에겐 그리스피가 반쯤 섞여 있었다. 그리스계, 당연히 원작대로 통과. 영화는 작게 시작됐다. 바르달로스가 받은 각본료는 5백 달러, 출연료는 15만 달러. 제작비는 5백만 달러였다. 감독으로 텔레비전 드라마를 몇편 만든 조엘 즈윅이 선정됐지만, 바르달로스에겐 캐스팅부터 음악과 편집까지 전과정을 주관할 수 있는 재량권이 주어졌다. 그리스계 배우들로 `들끓는' 촬영현장에서 그래도 유명배우는 이안 역의 존 코빗. 바르달로스와 코빗의 만남도 극적이다. “그리스식 결혼에 관한 영화대본을 받았는데, 맘에 들어 연락을 해보니 제작진이 미국에 없다는 거야.” 영화촬영 차 머물던 그가 친지에게 투덜대는 그 순간, 그 호텔 레스토랑에 바르달로스 일행이 앉아 있었다. 영화는 배급도 작게 시작됐다. 마케팅 예산이 1백만 달러.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보통 그 25배를 쓴다고. 대신 적은 수의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해, 입소문과 웃음소리가 그곳에서 터져나오게끔 했다. 그리스계 미국인들의 지지는 없었냐고 웬걸. 이탈리아나 유태인 영화는 있었어도, 그리스인들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는 처음이라서 일대 소동에 가까운 열광이 터져나왔고, 그 환호는 미국 전역으로 전염되어 버렸다는 이야기. 남은 논란은 니나 바르달로스가 신데렐라냐, 미운 오리새끼냐 정도라 할까. <나의 그리스식 웨딩>은 지난 1월26일 현재 미국에서만 2억3천 88만 달러의 흥행수입을 기록했고, 바르달로스는 할리우드가 가장 탐내는 인물 대열에 올랐다. 지금, <코니와 카를라>라는 영화를 준비중이다. 안정숙 기자 namu@hani.co.kr

다시,싸움처럼 <파괴> 만드는 전수일 감독 [2]

▣ 웃는 모드 철원과 부산 현장을 두번 찾아가서 찍은 꽤 많은 필름 중에 전수일이 웃고 있는 컷은 단 한컷도 없었다. 그의 표정은 무표정하거나 웃거나 딱 두 가지 경우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후자는 무척 드물었던 것이다. 철원에서 전수일이 처음 웃은 순간은 촬영이 모두 끝나고 “인터뷰 꼭 해야 하나. 너무 불쌍해 보이기만 할 텐데…”라고 말했을 때였다. 지난해에도 그는 한결같은 말투로 비슷한 문장을 말했지만, 이번엔 표정이 달랐다. <새는…>을 호평한 프랑스 언론의 기사를 직접 번역한 문서들을 들고 나타났던 그는 가리는 것이 많았고, 정말 깐깐한 선생님처럼 보였다. 그를 앞에 두고선 결코 <새는…>의 난해함을 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처절하게 영화를 만드는 와중에서도 전수일은 자신의 험난한 경험을 농담처럼 편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익힌 것 같았다. 자살안내원 S를 연기하는 정보석과 행위예술가 마라를 연기하는 추상미는 모두 일일드라마 촬영에 몸이 묶여 있는 상태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촬영하고 있지만, 등장인물이 많지 않은 탓인지 배우들 사이의 유대는 무척 돈독하다. 장현성은 어느 방송사에서 ‘저예산 설경구’라는 컨셉을 잡아 프로그램을 만들 만큼 <나비> <비디오를 보는 남자> <서바이벌 게임> 등 작은 영화만 두루 거쳤다. 흥행에선 전수일과 막상막하. <나비>가 서울 8천 관객을 동원했다는 장현성에게 전수일은 “내가 훨씬 낫네. 나는 단관개봉이었는데도 서울 4600 했다”고 뿌듯하게 대답했다. 장현성이 “감독님, 저는 <나비>도 별로 재미없었는데 <새는…>은 조금 더 재미없었어요”라고 반격하자 “그거 봤냐? 야, 그런 영화를 뭐 하러 봤어”라며 세번 만나는 동안 처음으로 소리내 웃기까지 했다. 막다른 데까지 몰리면서 만든 자신의 첫 장편이 지난해나 지금이나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외부의 장애 때문에 못하면 못살 거 같아서” 무모하도록 영화를 고집해온 그는 <새는…>이 예정보다 일찍 간판을 내렸을 때, 화가 났었다. 그런 그가 이젠 많이 풀어진 까닭은 바쁜 일정에도 성실하게 동행해준 재능있는 배우들과 어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면서 눈밭도 두려워하지 않는 스탭들 덕분일 것이다. 속타는 심정을 말로 다 할 수는 없어도, 함께하는 사람들을 믿기 때문에, 전수일은 편안하게 영화를 찍을 수 있다. 바람을 막아주는 제대로 된 벽 하나 없는 철원 노동당사 2층, 얇은 옷 한벌만 걸친 추상미가 퍼포먼스하는 장면을 촬영하면서도, 전수일은 급조한 엑스트라들의 동선에 신경쓰느라 연기를 하는 추상미와 장현성은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래도 배우를 믿으니까 그냥 간 거라고. 철원 현장을 정리하고 다음 촬영지인 눈쌓인 진부령으로 이동하는 동안, 추상미는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양수가 자기 몸 위로 쏟아지는 장면을 혹시 잡았는지,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했다. 전수일은 단 한번에 끝내야 했던 그 장면에서 이미 흰 천을 적신 붉은 양수밖에 포착하지 못했지만, 아쉬워하는 배우는 감독에게 기쁨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부산에는 영화하는 사람이 드물지만, 혼자가 맘 편하다”고 말하는 이 고독한 감독은 동등한 비중을 가진 다섯명의 배우를 조율하고 서울과 부산에서 알음알음 모여든 스탭들을 이끄는 사이, 코트 자락처럼 끌고 다니던 그림자를 약간 버렸다. 이수아는 전수일이 처음보다 말수가 훨씬 많아졌다고 했다. 전수일 자신도 원작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면서 전과는 달리 여러 사람의 의견을 귀담아 들었다고 했다. 추상미는 아주 오래 전 다른 감독의 이름으로 제안받고선 한번 거절했던 <파괴>를 그렇게 달라진 시나리오 때문에 받아들였다. ▣ 혼자 몰래 웃는 모드 전수일은 <파괴>를 아무도 모르게 시작했던 것처럼, 좋은 일이 생겨도 널리 알리지 않았다. <이재수의 난> 합작에 참여한 필립 아브릴의 회사 언리미티드가 투자를 결정한 것을 알고 전수일은 부산에 있던 장현성에게 술을 마시자고 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서도 한 시간을 넘기고서야 이 반가운 소식을 입 밖에 낸 전수일. 장현성은 그가 “혼자 몰래 키득대는” 경우가 이거말고도 더 있지 않을까 짐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전수일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도 했다. 당연하게도 혼자 살짝 좋아하는 전수일의 모습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정색하고 다음날 촬영을 논할 때나 “서울 3만, 지방에선 별로 안 볼 테니까, 전부 전국 7만만 보면 <파괴>는 대박”이라고 무표정하게 셈할 때나 그 속마음에선 어떤 미소가 번질지 조금은 그려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전수일은 1년 전 “다른 영화가 필요”하고 “속도가 빠르기만 한 서울보단 바다가 있는 부산이 좋아서” 사람도 없고 영화 자본도 없는 부산을 지킨다고 말했다. 추운 날씨, 썰렁한 스튜디오 안에서 그 이야기를 나누던 날은 폐건물 앞에서 알몸을 드러낸 <새는…>의 포스터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주 멀고 싸늘한 이미지였다. 그러나 따뜻한 부산 날씨에 익숙한 제작진이 겹겹이 껴입고 마지막 겨울이 머무르고 있는 강원도에서 강행군을 하던 2월 말엔, 그 목소리에서 오히려 온기가 느껴졌다. 다른 영화를 볼 권리가 있어야 한다는 배우들의 논리보다도, <파괴>의 대중성을 믿게 하려는 스탭들의 노력보다도, 설명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희망이 더 믿음직스러웠던 건, <파괴>가 말도 안 되게 시작해 끝을 바라보고 있는 탓이 아닐까. 전수일이 영화를 만든 9년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조차 그 무게에 압도될 정도로 캄캄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영화를 만든다. 만들고 싶으면 만든다는데, 희망을 제외한 어떤 조리있는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 <파괴>의 원작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죽음, 원하거나 이끌거나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각색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다. 죽고 싶은 사람들을 자살로 인도하는 남자가 화자인 이 소설은 죽음에 이르는 두 여자를 중심으로 다섯개의 에피소드를 배치했고, 각각의 에피소드는 인물과 이야기가 겹친다. 전수일은 낯선 화법으로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소설을 영화에 적합하도록 바꾸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동식이 자살안내인 S를 추적하는 미스터리 기법을 이용했다. 영화는 다섯명의 인물에게 거의 비슷한 비중을 할애한다. S(정보석)는 어려서 가출해 술집에 나가는 세연(이수아)과 유명한 행위예술가 마라(추상미)에게 자살의뢰를 받는다. 이들 곁엔 마라의 퍼포먼스를 비디오로 찍고 싶어하는 아티스트 상현(장현성)과 형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총알택시기사 동식(김영민) 형제가 있다. 동식은 상현과 동침한 적이 있는 애인 세연이 자살하자 그 죽음 뒤에 누군가 배후가 있으리라고 믿으면서 세연의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한다. 그 촉수 끝에 자살을 디자인하는 S가 걸려든다. 소설과 영화가 눈에 띄게 차이나는 부분은 구성 외에 인물의 변화다. 소설의 화자가 비엔나에서 만난 홍콩 여자의 에피소드는 마라와 세연에게 나뉘어 붙여졌다. 종잇조각으로 된 옷을 입고 있다가 돈을 내는 액수만큼 종이를 떼어내는 설정은 마라의 퍼포먼스로, 생수병에서조차 정액 냄새가 날 정도로 날마다 함께 사는 남자의 정액을 마셔야했던 기억은 세연의 과거로 간 것. 홍콩 여인 대신 영화에 끼어든 인물은 철없이 죽음을 동경하는 젊은 로커 커트다. 커트는 권총으로 자살한 커트 코베인처럼, 죽음이 자신을 전설로 만들어줄 거라 믿으면서 세연을 통해 S에게 접근하는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커트가 속해 있는 밴드는 부산을 근거지로 활동하면서 <파괴>의 영화음악을 맡기도 한 언체인드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다시,싸움처럼 <파괴> 만드는 전수일 감독 [1]

희망이 있다면, 파괴는 없다 전수일 감독이 또다시 영화를 만들고 있다. ‘또다시’라면, 이 낯선 감독에게도 전작은 있다는 뜻이다. 그는 단편 하나와 중편 두개를 모은 <내 안에 부는 바람>과 제작한 지 3년 만인 지난해에야 개봉한 장편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를 거의 혼자 힘으로 완성했다. 물론 이 두 영화를 본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이제는 <파괴>다.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원작인 이 영화는 전작과는 격이 다른 제작비 때문에 여전히 혼자인 전수일을 거의 파괴의 경지로 몰아넣고 있다. 영화를 만드는 9년 동안 단 한순간도 마음놓을 새가 없었을 사람. 그래도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삶의 터전인 부산에서, 온갖 걱정거리를 짊어지고, 영화를 만든다. 이 놀랍고도 신기한 고집의 소유자를 만나기 위해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파괴>의 현장을 찾았다. - 편집자 강원도 철원 노동당사를 찾은 지난 2월26일 <파괴>는 크랭크업을 10여일 앞두고 있었다. 이젠 마음이 좀 편하시겠어요, 라고 인사를 건넸더니, 전수일 감독은 변하지도 않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답했다. 잠시 뒤 프로듀서로부터 전해들은 사정은 감독이 침통해 보이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파괴>의 순제작비 8억원 중 지금까지 투입된 자금은 5억원 남짓. 그 5억원도 개인투자와 개인대출로 끌어온 돈이고, 촬영이 예정대로 끝난다 해도 부채로 버텨온 비용을 집행할 방법이 없다. 임금을 받을 거라는 확신도 없는 상태에서 일하는 스탭이 여럿이다. 그렇다면 이 현장은 도대체 얼마나 암울할 것인가. 뼈대만 위태롭게 남아 있는 노동당사 건물 사이로는 바람만 몰아치는데, 보온물통 하나 없이 휴대용 가스버너 주위에 바람막이를 둘러치고 줄서서 뜨거운 물을 받는 스탭들은 얼마나 추울 것인가. 그러나 이 역시 성급한 판단이었다. 자의로 도와주는 정체불명의 사람들도 몇몇 섞여 있는 <파괴> 현장은 단출하나 생기있었다. 젊은 스탭들은 말도 안 통하는 폴란드 촬영팀과 한국말로 농담을 했고, 합작을 고려 중인 프랑스 제작자도 들렀다. 무엇보다도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보였던 전수일의 무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일고 있었던 것이다. ▣ 무표정 모드 전수일은 가만히 있어도 진지해 보이는 사람이다. <나비>에도 출연했던 배우 장현성은 “가장 심각해 보이는 그 순간, 사실은 아무 생각도 없다는 걸 뒤늦게 간파했다”고 장난처럼 말하지만, 그의 마음속엔 수많은 상념이 맴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전작만 봐도 그렇다. 조재현이 중편 중 하나에 출연한 <내 안에 부는 바람>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체험하는 시간의 의미를 담은 사색의 산물이었고, 설경구가 무명 시절 주연한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는 평범한 관객이라면 지루함을 참지 못했을 롱테이크로 일관하는 자전적인 영화였다. 오죽하면 추상미가 “감독님이 절대로 보지 말라 그랬다”면서 <새는…>을 피해갔을까. 무표정한 틈틈이 아주 잠깐 웃는 얼굴을 보이는 전수일은 그 자신의 영화가 주는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지명도 높은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원작인데도 <파괴>가 2년 가까이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쩔쩔맸던 것은 전수일의 말처럼 “내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칸과 베니스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던 전력마저, 때로는 심각한 방해물이다. 의욕적으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던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전수일은 <파괴>가 이 정도로 어려움을 겪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파괴>가 누구나 생각하는 자살문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에도 나오듯 “스스로 끝을 결정하는 압축적인 삶이란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가”라는 점에서, 손해보지 않을 만큼의 흥행은 되리라고 자신했다. “한국에선 하루에 서른명이 자살한다고 한다. 1년이면 1만명이 넘는다. 대중적인 소재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결코 쉽다고는 말할 수 없는 원작과 자신있게 난해하다고 말할 수 있는 전수일의 전작에 자신이 없었는지, 판권을 공동소유하고 있던 동아수출공사가 손을 뗐다. 그래도 누군가 투자를 할 것만 같았지만, 사람들은 호의를 보이다가도 계약서를 쓸 순간만 다가오면 등을 돌렸다. 홍승현 프로듀서는 “전수일 감독 영화에 투자를 하겠다고 그러면 주변에서 다들 말린다고 하더라”라는 씁쓸한 소문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디지털 장편영화 후반작업을 진행할 비용이 없어서 일단 <파괴> 프로듀서를 맡은 인물. “<새는…>과는 다를 수 있도록, 감독은 연출만 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서 적성에도 안 맞는 프로듀서에 손을 대게 됐다는 홍 프로듀서는 배우들의 출연료를 많게는 1/3 수준으로 깎는 설득력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그 1/3조차 아직 다 지불하지 못했다. 결국 전수일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시스템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새는…>이 개봉할 무렵 전수일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2억5천만원에 달하는 빚을 짊어지고 있었다. 직접 차린 제작사 동녘필름이 있다고는 해도 어떻게 다시 4억원을 대출받았는지는 차마 묻지 못했지만, 지인들이 믿고 투자한 혹은 빌려준 돈이었다고, 전수일은 돌려 묻는 질문에 돌려 답했다. 그렇게 마련한 제작비 일부에 추상미와 정보석, 이수아, 장현성, 김영민이 포진한 출연진을 믿고 일단 촬영은 시작했지만, 때마침 충무로는 블록버스터들의 연이은 흥행 실패로 한참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촬영한 러시필름을 보고 나머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겠다고 나선 어느 영화사는 아직도 돈을 주지 못한 상태다. 쓴맛을 한두번 본 게 아니라서, 동녘필름은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며 새로운 자금을 구하고 있다. 전수일의 아내이자 <파괴> 제작을 위해 뛰고 있는 조인숙 동아대 교수는 시나리오와 함께 “한번도 남편 하는 일을 말린 적이 없는데…”라는 문장을 언뜻 흘리는 메일을 보내왔다. 몇주 전, 부산 촬영현장에 가기 위해 소식을 주고받았을 때의 밝은 목소리와는 너무 달라진 어투였다. 그래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그녀와 그녀의 제자인 홍 프로듀서는 <파괴>가 전수일의 전작들과 다른 상업적인 힘을 가진다고 믿는다. 여기에 이르러 전수일의 무표정은 한층 더 단단해졌다. “객관적인 전작들과 달리 <파괴>는 인물들의 심리를 따라가는 탓에 인물과 카메라의 거리가 좁혀지긴 했다. 하지만 내 스타일은 그대로다. 나는 아직도 숏과 숏을 나누는 데 거부감이 있다. 배우들의 감정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롱테이크를 좋아한다. 컷을 불러야 하는데도 일부러 배우들을 그냥 놔둘 때가 대부분이다.” 이러니 다른 데서 희망을 찾을 수밖에. 프랑스 유학 시절 전수일을 알게 된 이은진 해외합작 코디네이터는 칸영화제 집행위원장 질 자콥과 친분이 두터운 피에르 루시앵이 자막없는 러시필름만 보고도 너무나 훌륭한 영화라고 칭찬했다며 밝게 말했다. 차이밍량 같은 감독들이 그렇듯, 유럽 자본에서 출구를 찾는 걸까. 프랑스 영화사 언리미티드는 후반작업 지원을 결정했고 유럽 배급까지 맡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영진위가 지원하는 예술영화 프로젝트에서도 두번이나 쓴잔을 마셨는데, “아마도 제정신이 아니어서…” 무작정 촬영을 시작했을 거라고 말하는 전수일은 그 후반작업까지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 길을 전수일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엄숙한 얼굴로 견뎌갈 것이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잭 니콜슨(Jack Nicholson)과 <어바웃 슈미트> [4]

잭 니콜슨의 명대사“당신은 날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소” 워런 슈미트 “넌 지금 큰 실수를 하는 거다. 그놈(랜달)이랑 결혼하지 마라. 절대로 하지 마.” 지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워런 슈미트 “지난 밤에 꿈을 꿨단다. 아주 생생한 꿈이야. 니 엄마가 있었고 너도 있었고 니 숙모 에스텔도 있었지. 그리고 거기서, 그래, 그건 진짜 우주선은 아닌데, 그건 비행선이나 비행접시 같은 건데 말이지. 거기서 이상한 생물들이 와서 널 잡아가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게 그러니까, 그놈들이 전부 랜달처럼 생겼더라. 알겠니? 내가 뛰어올라서 널 구했단다.” -<어바웃 슈미트> 중에서 딸의 결혼을 막으려는 아버지 워런 슈미트. 멜빈 유달 “훌륭한 칭찬이 하나 생각났소. 게다가 이건 거짓말이 아니오.” 캐롤 “당신이 무슨 말을 할까 겁나요.” 멜빈 유달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당신 옷차림에 대한 게 아니니까. 어쨌든, 의사가 나 같은 종류의 환자 중 60∼70%는 약을 먹는 게 도움이 된다고 했소. 그런데 난 약을 증오하거든. 증오, 난 약에 대해 증오라는 말을 썼소. 어쨌든, 내 칭찬은 이런 거요. 당신이 내게 찾아와서 절대로 (섹스를) 안 할 거라고 했던 그날 밤 있잖소. 당신이 있었으니까 무슨 말 했는지는 알 거구. 어쨌든, 그 다음날 아침, 난 약을 먹기 시작했소.” 캐롤 “그게 어떻게 칭찬이 되는 거죠.” 멜빈 유달 “당신은 날 좀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었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중에서 캐롤의 환심을 사려는 멜빈 유달. 조커 “난 그냥 겉으로만 웃고 있는 거야. 내 미소는 그냥 피부가 패여서 생긴 거라구. 내 안을 들여다본다면 난 울고 있다구. 내 흐느낌에 동참하지 않겠어.” -<배트맨>에서 비키 베일(킴 베이싱어)에게 자신이 쓴 시를 들려주는 조커. 잭 토랜스 “새로운 규칙을 하나 만들어야겠어. 당신이 여기 와서 내가 타이핑하는 소리를 들으면, 혹은 내가 타이핑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어도, 뭐든 내가 뭘 하는 X같은 소리가 들리면, 내가 여기 있다는 얘기고, 그럼 내가 일하고 있다는 거지. 그건 여기 오면 안 된다는 얘기야! 알아들겠어?” 웬디 토랜스 “예.” 잭 토랜스 “좋아, 그런데 왜 지금 당장 안 나가고 있지. 씨발, 당장 꺼지라구.” -<샤이닝>에서 아내가 음식을 들고오자 광기를 드러내는 잭 토랜스. 맥머피 “제길, 니들이 미쳤다구 생각해? 아니, 넌 미치지 않았어. 미치지 않았다구. 길에 흔한 깡패녀석들이 정말 미친놈들이지. 니들은 아니라구.”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정신병원에서 나가길 두려워하는 환자들을 향해 화를 내는 맥머피. 제이크 기티스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죠?” 가짜 멀웨이 부인 “아내의 직감이죠.” 제이크 기티스 “멀웨이 부인, 남편을 사랑하십니까?” 가짜 멀웨이 부인 “물론이죠.” 제이크 기티스 “그럼 당장 집에 가서 모든 걸 잊으십시오.” -<차이나타운>에서 남편이 바람피우는지 뒷조사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탐정 제이크 기티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품행제로>의 `별난 형제` 작가 이해영,이해준 이야기 [3]

이 해 영 1973년 서울 출생. 유년시절, 음악에 빠져 살았음(지금도 시나리오 작업할 때 볼륨 ’이빠이’ 틀어놓음. 직접적인 영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대사가 씹히거나 그럴 때는 장르와 연관 있는 음악을 취사 선택함. 혹 지방에서 작업할 땐 어떤 CD를 가져갈 것인지 매번 고민) 틈나면 청계천에서 구한 B급 난도질 영화를 보며, 인간은 과연 몇등분 될수 있는가도 연구했음(아직까지 해답을 구하진 못함). 그 놈의 시간이 그래도 남으면 공부도 좀 했음. 하지만, 자식들만큼은 너른 분야에서 고루 활동하기를 바라는 아버지를 둔 탓에 고등학교 때 이과를 선택해야 했고, 수와 관련된 학문과 체질적으로 궁합이 맞지 않은 탓에, 아쉽게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밖에 없었음. 대학입시 때 2교시 수학시험을 시작으로 백지 제출함. 엄한 아버지한테 일방적으로 깨지면서 소극적 저항에 대해 조금 후회했음. 서울예대 광고창작과에 입학한 뒤 평범한 삶을 꾸리려 했으나 과 선배였던 개그맨 남희석으로부터 “눈빛이 음흉하기 짝이 없는 것이 필시 여학생을 어떻게 해보려는 심산을 가진 놈”이라는 지적을 받으면서 한동안 이성들로부터 왕따를 당했고 그 충격으로 이후 고통의 가시밭길을 자원함. 이 해 준 1973년 서울 출생. 9남매 대가족의 막내. 소란스러운 집안이 너무 싫었음. 누나들의 바이올린, 피아노 합주 소리에 여러번 경기도 일으킴. 이후 주로 소음을 피해 후미진 골방과 벽장에서 사색에 잠기는 것을 즐겨함(지금도 음악이라고 하면 치를 떰. 해영의 버릇때문에 회의가 아니라면 시나리오는 주로 거리에서 아이템을 떠올리고 카페에 가서 씀). 고등학교 때는 단편소설을 끼적이며 보냈음. 하지만 정작 대학 진학시엔 정상적으로 살고 싶어서 문예창작학과나 영화과 보다 비교적 현실적인 광고창작과를 지원함. 대학 진학 후, 한때 주위에서 코웃음 치던 아이디어(출력된 음파로 인해 컵이 테이블에서 떨어지지만, 그런 줄 모르고 정작 여인은 죄없는 고양이를 나무란다는 미니 콤포넌트 광고)로 대학생 광고 대상에 입선하는 실력을 과시. 그 해 경쟁작이 예년만 못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지만, 이에 대해서 본인은 “제품의 특성을 잘 살린 컨셉츄얼한 아이디어”라고 자평. 해영이 보컬을 맡고, 자신이 베이스를 맡아 1회용 밴드를 결성함. 맹연습 끝에 김건모, 김원준 등이 거쳐간 교내 무대에서 <니가 웃을 수 있다면> 이라는 애절한 발라드 곡을 연주했으나 클라이맥스 이후 나오는 화음 부분에서 마네킹처럼 굳어 ‘끽’ 소리 못하는 바람에 예선 탈락. 그 이유에 대해서 그는 유년 시절 트라우마의 발작이라고만 설명함. 교내에서 ‘침묵미남’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젊음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진 않는다는 진리를 인지하고 시나리오 작업에 뛰어듬.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11]

갱이 있는 거리, 성당이 있는 풍경 <비열한 거리> 1986년 자신의 영화 <라운드 미드나잇>의 주요 배역에 마틴 스코시즈를 출연시켜야겠다고 결심한 베르트랑 타베르니에는 스코시즈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마티, 자네는 반드시 이 영화에 출연해야 해. 그 클럽의 주인은 자네와 똑같거든. 좋은 사람이면서도 엄청나게 잔인한 인간이란 말일세.” 타베르니에는 스코시즈의 이중성을 잘 알고 있었다. 폭력에의 심취와 영적 구원을 향한 열망이라는 이중성 말이다. 그리고 그 불화하는 이중성이야말로 스코시즈 영화의 가장 깊은 속살, 혹은 유년기의 정신적 낙인 같은 것이기도 하다. 총소리가 일상적 소음이었던 뉴욕의 리틀 이탈리아에서 자란 스코시즈는 “동네에서 가장 힘센 존재는 거리의 터프 가이들과 성당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래도 성당의 힘이 더 마음에 끌렸던 모양이다. “조직에 속한 이들은 신부에게 깊은 존경심을 보였는데… 무서운 사내들이 신부들에게 꼼짝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것이 발단이 되어 여덟살 땐가 아홉살 되던 해에 신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신부에의 꿈은 오래갔다. 그의 고등학교 때 성적이 중간 정도만 됐어도, 우리는 지난 주말에 <갱스 오브 뉴욕>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교 졸업반 성적이 최하위 4분의 1에 속하는 바람에 바라던 신학교 진학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스코시즈는 뜻하지 않게 영화감독이 됐고, 칸 황금종려상을 받은 <택시 드라이버>(1976), 세계 영화사의 걸작으로 꼽히는 <분노의 주먹>(1980) 등으로 젊은 거장에 등극했다. 그래도 못다 이룬 신부에의 꿈은 결국 문제투성이 영화 <예수의 마지막 유혹>으로 그를 몰고 갔는데, 15년 동안 준비했다는 이 영화는 그에게 영화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선사했다. 이 영화 속의 예수와 신도들은 얼핏 보기에 갱스터 집단처럼 묘사됐고 예수의 성행위가 암시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제작사로부터 여러차례 거절당한 끝에 4주 동안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제작비를 보태달라고 호소했다는 이야기, 이 영화가 제작단계에서부터 가톨릭 단체들의 격렬한 항의시위에 직면했고 개봉된 극장에선 폭탄테러까지 일어났다는 이야기는 이젠 거의 전설이 됐다. 지금에야 “그와 같이 일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영광”이라는 소리를 귀찮을 정도로 듣지만, 이런 고집과 성향 때문에 젊은 거장 반열에 오르고 나서도 이 골치 아픈 영화감독에게 돈을 대겠다는 제작자는 80년 말까지 드물었다. 칸영화제 감독상을 안긴 <애프터 아워스>(1985)도 감독료를 4분의 1만 받는 조건을 달아 450만달러라는 극히 짠 제작비로 겨우 만들 수 있었다. 데이비드 톰슨 외 역음·임재철 옮김 | 한나래 펴냄 | 1994년 12월 대화는 잘 안 되지만 어쨌든 친구인 스티븐 스필버그(스코시즈는 스필버그를 두고 “그 친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통 모르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가 의도하지 않은 도움을 선사했다. 스필버그는 스코시즈가 탐내던 <쉰들러 리스트> 프로젝트를 자기가 하고 싶다며 <케이프 피어>를 내밀고 갔다. 싫었지만 로버트 드 니로도 그 영화를 원한지라 억지로 맡았는데, 그의 영화에서 최고의 흥행성적을 기록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스콜세지가 돈되는 감독 대열에 들어선 것이다. 동료 브라이언 드 팔머로부터 “자네, 또 반품 처분당했나?”는 조롱 섞인 농담을 듣던 스코시즈의 이후 경력은 지나칠 만큼 순탄하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끊임없이 그에게 이중적 열망을 심어준 고향이며 정신적 자궁인 뉴욕 뒷골목으로 돌아온다. 그는 자기 속의 분열과 모순을 외면하지 못해 결국 자신의 악몽을 탐사하는 길을 선택한다. <비열한 거리>는 스코시즈의 강연과 인터뷰를 모아 정리한 의 번역판으로 “1987년 영국에서 스코시즈가 가진 3회의 강연을 뼈대로 약간의 인터뷰를 덧붙인 일종의 자서전”이다. 폭력과 구원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뒷골목에서 자라난 소년이 관습과 상투구로 가득 찬 할리우드에서 가장 개인적 영화를 만드는 거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가쁜 리듬의 파노라마가 되어 펼쳐진다. 오늘의 스코시즈를 만든 건 정치적 진보성이나 지성이 아니라, 영화 그 자체에 대한 끊임없는 매혹과 쉼없는 개인적 망의 추구였다. <비열한 거리>는 감독의 개인적 욕망을 추방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할리우드에서 기적적으로 작가적 자존을 지킨 한 감독의 경이로운 생존기이기도 하다. “나는 카메라 뒤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스코시즈는 말했다. 백은하 lucie@hani.co.kr 스코시즈가 더 궁금하다면 1994년 BFI는 영화 100주년 기념으로 마틴 스코시즈에게 ‘세기의 영화’ 중 미국 부분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줄 것을 부탁한다. 미국영화를 말하는 데 있어 “전직 강사였고, 영원한 학생이며, 지치지 않은 필름보호주의자이자 그 세대의 가장 축복받은 감독” 인 그가 선택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 다큐멘터리의 스크립트가 책으로 발간된 것이 바로 <미국영화에 대한 마틴 스콜세지와의 사적여행>(A Personal Journey With Martin Scorsese Through American Movies/ Hyperion 펴냄)이다. 스코시즈와 동료인 마이클 헨리 윌슨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감독의 딜레마’, ‘스토리텔러로서의 감독’,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감독’, ‘우상파괴주의자로서의 감독’ 등 5개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트웨인 출판사의 감독 시리즈 중 하나인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레스터 키저 지음/ Twayne Pub/ 1995)는 마틴 스코시즈의 성장기부터 <비열한 거리>에서 <순수의 시대>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한 연대기적 책이며 <마틴 스콜세지: 인터뷰>(Martin Scorsese: Interviews/ 피터 브루네트 엮음/ 미시간대학 출판부 펴냄/ 1999)는 개빈 스미스, 에이미 토빈 등 영화평론가부터 주요 언론과의 심도 깊은 인터뷰를 담고 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48권의 책으로 읽는 감독의 길 -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한다. [9]

B급영화 제왕의 A급 고백 <나는 어떻게 할리우드에서 백편의 영화를 만들고 한푼도 잃지 않았는가> 로저 코먼 지음·김경식 옮김 | 열린책들 펴냄 | 2000년 1월 로저 코먼이 그리스에서 <아틀라스>(1960)라는 영화를 찍을 때의 일이다. 그는 대규모 전투신을 찍기 위해 그리스군 500명을 동원받기로 했다. 그러나 촬영장에 나타난 인원은 고작 50명이었다. 누군가가 실수로 ‘0’을 빠트린 것이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대규모 군대로 되어 있었지만 로저 코먼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 재빨리 대사를 수정했다. “이 적은 병력을 가지고 어떻게 저 거대한 성을 공략하시렵니까? ” 프락시메스의 답 역시 바뀌었다. “소수정예의 헌신적이고 잘 훈련된 병사들은 아무리 많은 오합지졸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교전신조요.” 자랑스럽게 이 일화를 이야기하던 로저 코먼은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영화제작 신조입니다.” 뉴월드영화사, 콩코드-뉴 호라이즌 등을 경영하며 “300편의 이상한 영화 중 280편이 이익을 남겼다”고 자랑하는 이 실적 좋은 제작자는 종종 각종 영화제의 회고전에 불려다닐 만큼 명성을 쌓은 독특한 ‘B급영화의 제왕’으로 불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 촬영도 불가능한 예산”을 들여서 “액션과 적당한 섹스, 그리고 약간의 기발함”에 조잡한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 한편을 일주일 만에 뚝딱 만들어낸 뒤 제작비의 3, 4배에 가까운 돈을 벌어들이는 로저 코먼.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그의 ‘간을 키운 건’ 유학생활을 빙자한 유럽생활이었다. 그는 카메라 밀수가 꽤 짭짤한 용돈벌이가 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스위스 바젤에서 국경을 넘어가면 나오는 조그만 독일 소도시에서 라이카 카메라를 사서 파리의 미국인 관광객에게 팔면 대당 100달러 이상의 수입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독일에 들어가려면 허가가 필요했는데, 로저 코먼은 몇번 들락거린 뒤 입국한도가 넘자 바젤 시내에 차를 주차시키고 전차를 타고 국경 근처까지 간 뒤 아파트단지 사이를 지나가면서 보이는 철조망을 넘어 서독 국경에 다다르는 대담한 그러나 의외로 간단한 루트를 알아냈다. 그리고 이 밀수를 통해 한동안 꽤 두툼히 주머니를 불릴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그에게 “논리와 교묘함, 속임수, 그리고 약간의 대담함, 이런 것들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했다. 이후 코먼은 배급망이 없는 상태에서도 지방 배급자로부터 선금을 받아내는 뛰어난 수완을 선보였고, 메이저스튜디오의 물량공세가 시작된 70년대 후반부터는 TV로 눈을 돌려 유선방송사로부터 촬영 시작 전에 제작비 전체를 회수한 때도 있었다. 한번은 데니스 호퍼가 출연하는 영화를 5만달러에 사들여 “말이 안 되는 영화에 자주 써먹는 방법”인 내레이션을 넣어 재편집해 홈비디오 업자에게 45만달러에 팔았다. 그러나 이런 장사꾼적인 수완만이 로저 코먼의 모든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여배우 베벌리 갤런드가 대역없는 액션연기를 하다 발목이 ‘머리통만하게” 부어버렸다. “옷이 안 들어가서 촬영하기 힘들겠죠?”라는 말에 그는 “걱정없어”라며 그녀에게 4인분의 진통제 주사를 놓고 바지를 종아리까지 찢어서 폭을 넓히고 구두 역시 뒤를 찢어 테이프를 붙인 뒤 촬영을 마쳤다. 그러나 이 일을 겪은 갤런드는 감독에 대한 불평 대신 “로저와 함께 일하면 당신은 뭐든지 다 잘할 수 있다”고 감탄한다. 로저 코먼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 이들 역시 칭송받는 작가감독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러하듯, 자기식대로 영화찍기의 광기에 휘말려 있었던 것이다.백은하 lucie@hani.co.kr 코먼이 더 궁금하다면 <로저 코먼의 영화들: 내식대로 문제없이 영화찍기>(The films of Roger Corman: shooting my way out of troble/ Batsford/ 알랜 프랭크/ 1998)는 초기작 <패스트 앤 퓨리어스>부터 55편의 그의 주요작들에 대한 소개와 간단한 평들이 포함되어 있고, 로저 코먼의 스토리편집자이자 개발이사로 10여년 가까이 지낸 비벌리 그레이에 의해 쓰여진 <로저 코먼: 독립영화계의 대부에 관한 내멋대로 전기>(Roger Corman: An unauthorized Biography of the Godfather of Indie fillmaking/ 르네상스 북)은 ‘개척자’적 기운을 떨치며 오늘날 독립영화감독의 모델이 된 영화감독 로저 코먼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자기 나름대로의 평가와 감상을 덧붙이고 있다. 이외에도 <로저 커먼의 영화: 예산짜기의 천재>(The films of Roger Corman:brilliance on a budget), <로저 코먼: 싸게찍기의 최고봉>(Roger Corman:The best of the cheap acts) 등이 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국산 애니 기대작 두 편 다음달 개봉

국산 애니메이션 두 편이 다음달 말 동시에 관객들을 만난다. <원더풀 데이즈>(사진)(제작 틴하우스)와 <오세암>(제작 마고21)이 바로 그것. 최근 애니메이션의 제작 열기가 높고 각종 국제영화제에서도 한국 애니메이션이 선전을 하고 있지만 흥행면에서는 별다른 성공작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2001년과 2002년 2년 동안 서울 5만4천404명을 동원한 <마리이야기>를 비롯, <더 킹>(서울 1만807명), <별주부해로>(7천580명), <런딤>(3만1천185명)등 네 편의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개봉됐다. 올 한해 스크린을 통해 관객을 만날 채비를 하고 있는 영화는 모두 7~8편. 이들은 하나같이 작품성 뿐 아니라 상업성도 높음을 내세우고 있다. 이중 맨 처음 개봉되는 <원더풀…>과 <오세암>은 공교롭게도 같은 날인 4월 25일을 개봉일로 잡고 있다. 이날 극장상영을 시작할 계획인 일본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까지 세 편의 애니메이션이 한날 개봉되는 셈. <원더풀…>이 강조하는 것은 블록버스터 실사 영화에 견줄 수 있을 만한 스케일이다. '소니 HDW-F900' 카메라와 '모션 컨트롤 Frazier' 렌즈 등 첨단 촬영장비를 사용했으며 2만 기가바이트의 비주얼 데이터와 12만 장에 달하는 동화 등으로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해주겠다는 계획이다. 미국형이나 일본형 캐릭터를 벗어난 독특한 캐릭터에 희망과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로 해외 시장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 이밖에 유지태, 전준호 등이 목소리 배우로 나선 것도 관객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2142년 지구상 유일한 청정 지역인 시실섬을 배경으로 이곳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벌이는 전쟁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주인공들의 사랑이 주요 내용. 200여 편의 TV광고를 제작한 CF 감독 출신 김문생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6년에 걸쳐 126억의 제작비를 들여 완성했다. 한편, <오세암>은 한국적 정서의 이야기를 2D 애니메이션 만의 따뜻함에 담고 있다.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의 꼬마보살 설화를 토대로 동심과 자연의 교감을 훈훈하면서도 재미있게 꾸며냈다. 다섯살 꼬마 '길손이'가 앞 못보는 누나 '감이', 삽살개 '바람이'와 함께 엄마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기둥 줄거리. 원작은 2년 전 작고한 동화작가 정채봉씨의 동명 스테디셀러로 원작에 실린 문학적 향기를 살리는 한편 종교적인 색깔보다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다섯 살 아이의 천진난만함에 초점을 맞췄다. 설악산과 사찰 등 배경이 되는 장소의 수차례 답사를 통해 단청, 시냇물, 눈 덮인 산길, 설악산 전경 등에서 한국적인 색감을 찾으려 했으며 실제 아이의 체형과 움직임을 재현해 옆집 꼬마를 보는 듯 살아있는 캐릭터를 창조했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 <하얀 마음 백구>의 마고21이 제작을 맡았으며 순제작비 15억 원으로 제작됐다. (서울=연합뉴스)

[인터뷰] 매춘여성 국회의원 ‘예지원’

처음엔 이런 감정을 느낄 줄 몰랐다. 단지 에스메랄다처럼 “삶을 돌아보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윤락녀 캐릭터를, 무엇보다 “여성이 이끌고 나가는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 “깜찍하고 발칙한” 발상의 <대한민국 헌법 제1조>에 출연하게 됐다. 배우 예지원, 아니 기호 4번 고은비 후보의 ‘국회의원 선거 출마기’다. 헌법 제1조를 아시나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처음엔 대사로 줄줄 외웠죠. 하지만 영화속 합동유세때 실제 장애인, 노숙자분들 등 1500여명의 보조출연자들이 추운 날씨 아랑곳 않고 고은비를 환호하는 데 정말 감동받았어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왜 이들은 1조의 권리를 누리지 못할까. 고은비가 그랬듯이.” 선거를 치르며 고은비가 점차 못가진 자, 소외된 자의 상징이 되어간 만큼 예씨는 소중한 감정을 배우게 된 듯 했다. 영화의 대부분 촬영은 전주에 있는 실제 윤락가에서 촬영됐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우릴 미워하면 어떡하나. 근데 그곳에 있는 분들 정말 평범해요. 단지 밤이 되면 진한 화장과 야한 옷을 입는다는 것 뿐이에요. 방 빌려줄테니 와서 쉬라는 언니, 옷 빌려주겠다는 언니, 와서 밥먹으라고 부엌 빌려준 주인… 모두 못 잊을 분들이에요. 그분들이 아니었으면 실제 고은비의 감정을 못 느꼈을 거에요.” 일간지의 사회면을 장식한 ‘국회 월장’ 촬영까지 마치고 영화개봉을 앞둔 지금, 예씨는 ‘국회의원 당선소감’을 당당히 밝혔다. “말단 샐러리맨이 사장될 수 있고 소외받은 소시민이 능력 발휘하는 세상, 그것이 고은비가, <대한민국…>이 바래는 사회죠. 노무현 대통령도 어떤 의미에선 고은비인 거에요. 이전같으면 이 영화가 ‘시원하다’는 소리만 들었겠지만 이젠 좀더 실현이 가능해진 것 아닌가요” 전주 매춘가에서 촬영 ‘어색한 거 깨게… 뽀뽀 할까요’ 당돌하게 말하던 <생활의 발견>의 쓸쓸한 얼굴의 명숙처럼, 바람처럼 길처럼 자유로워보이는 예씨는 한 구석 애잔함을 간직한 배우다. 으로 데뷔해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 촬영중인 <귀여워> 등 어느 하나 ‘교과서에는 없는’ 캐릭터를 맡아온 이 배우는 “관객들에게 팬터지를 주는 역이 아니라, 관객들과 비슷해 그들이 위로해주고 싶은 역들이죠. 남들은 그만 망가지라지만 전 너무 즐거워요. 속이 후련해요”라 말했다. 텔레비전 드라마 <꼭지><줄리엣의 남자> 정도를 제외하곤 “자주적이고 개척하는 여자”를 해온 셈이다. 촬영중 남진씨의 팬들이 서울에서 버스 하나를 대절해 김밥싸고 내려왔던 이야기를 하며 “우리가 그 나이에도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겠어요” 말하던 예지원 ‘당선자’에게 궁극적인 포부를 물었다. “가만 있어도 향기가 나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어떤 영화? 야당의 국회의원이 여당쪽에서 보낸 듯한 윤락녀와 정사를 벌이다 복상사(물론 대외발표용은 ‘과로사’다)하며 여야 동수가 된 가운데 수락시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열린다. 여당, 야당, ‘단군할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를 외치는 무소속 후보에 기호 4로 이 도시 윤락가에서 일하는 고은비가 출마한다. 끔찍한 성폭행을 당한 동료 사건이 윤락녀란 이유로 수사조차 못받자 분개해, 사투리 ‘징하게’쓰는 욕쟁이 괴짜신부 베드로, 아나운서를 꿈꾸는 동료 세영 등의 도움으로 나섰다. <대한민국 헌법제1조>에서 선과 악의 구분은 시원하리 만큼 명확하다. 여기서 악은 국민들의 속내엔 관심없는 정치인들의 우스꽝스런 모습 그 자체다. 반대편엔 윤락녀를 비롯해 장애인, 노숙자 등이 있다. 정치적으론 너무나 올바른 의식이 장점이라면, 풍자라 하기엔 너무 직설적이고 단면적인 묘사방식은 단점이다. ‘사실적’이라고 넘어가기엔 전반부의 과도한 섹스코드는 불쾌감을 줄 정도. 그럼에도 이 거친 대중영화는 ‘내질러 보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감정과 의식과잉 속에서도, 정많고 서로를 보다듬는 소수자들의 따뜻한 마음만은 진정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사가 있는 출연자만 75명인 영화 속에서 임성민, 최은주 등이 연기한 윤락녀 동료, 기호 3번 후보역의 장대성, 386 세대를 풍자한 듯한 캐릭터 방송기자역의 이문식까지 많은 배역에 골고루 눈길이 가는 것도 미덕. 특히 베드로역의 남진은 안정감있게 영화를 뒷받침해준다. 14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