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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전영객잔] 줌이라는 기호놀이

이것이 어떤 이정표인지, 아니면 짧은 휴식인지, 혹은 간주곡 같은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새로운 시도인지는 분명치 않다. 점점 더 홍상수는 비탈길에 선 것처럼 속도를 내고 있다. 마치 그가 쓰러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더 빨리 달려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운’ 영화에 몸과 마음을 내주고 있다. 몸과 마음? 그렇다. 그는 어떤 것을 의도하기보다는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그 무엇을 (그런데 그 무엇은 무엇일까?)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라도 한 양 서둘러 존재의 증명을 해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홍상수는 점점 더 파악하기 어려워졌다. 홍상수는 매우 공을 들여 이미지란 헛것이라는 설명을 했다(<해변의 여인>). 나는 그가 그 다음 영화를 좀더 미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틀렸다. 심지어 다음 영화의 주인공은 ‘대마초를 피우고 파리로 도망 간’ 화가다(<밤과 낮>). 이미지, 영화, 회화. 소란스러운 허깨비들. 환각. 점과 선. 어떻게 그들 사이를 연결할 것인가의 문제. 어떻게 거기서 정신을 잃지 않을 것인가? 내가 홍상수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쓴 글은 <밤과낮>에 대한 짧은 소개였다(시네마_디지털_서울 2008 카탈로그). 그런 다음 나는 그의 영화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 그것을 붙들려는 내 손을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에 홍상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중편영화 <첩첩산중>, 다음주에 프린트가 나온다는 <하하하>를 찍었고 이미 지금 <사친>(思親)이라는 가제로 알려진 열한 번째 영화를 촬영 중이다. <첩첩산중>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촬영을 끝낸 다음 두달 보름 뒤에, 그러니까 2008년 11월 둘쨋주에 전주에서 닷새 동안에 모두 찍었다. 그러나 <첩첩산중>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시간적으로 매우 가깝게 있긴 하지만 두 영화 사이에서 어떤 친화성이 느껴지거나 혹은 서로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는 않는다. 두 영화는 거의 동일한 스탭들과 작업했고(김훈광 촬영, 정용진 음악, 함성원 편집) 동일한 디지털카메라인 소니 EX 1로 찍었으며 정유미가 연이어 나오긴 하지만 전혀 다른 도시에서 찍었고 (이전에는 제천에서 제주도로, 그러나 여기서는 전주) 전혀 다른 계절이다(여름, 그리고 여기서는 초겨울, 혹은 늦가을). 하지만 무엇보다 여기서 먼저 눈을 돌리게 되는 대상은 다시 한번 등장인물들의 세계가 소설가의 무리라는 점이다. 좀더 홍상수처럼 말하면 여기서는 소설의 효과로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영화감독은 영화 주변을 떠돌고(<극장전>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소설가들은 소설 주변을 떠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첩첩산중>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 처음으로 다시 소설의 사교계 안으로 돌아온 영화이다. 철자로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들의 세계. 간접적인 이미지. 말을 믿지 않는 홍상수가 언어를 다루는 자들 안으로 들어와 그들 사이의 사교에 관한 힘의 관계와 만남 그 사이의 행동들을 바라보고 거기서 서로가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다룬다. 이때 이미지는 글자보다 더 나쁜 것일까, 덜 나쁜 것일까? 아니면 직접적 이미지와 간접적 이미지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위험한 것일까? 첩첩산중, 말하자면 미로 우선 <첩첩산중>의 무대. 전주는 홍상수의 영화 안에서 나쁜 기억이다. 보경의 남편 동우는 전주에 출장 갔다가 여관에서 커피 배달하는 아가씨와 섹스를 한 다음 성병에 걸려서 돌아온다(<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그런 다음 홍상수의 등장인물이 다시 전주에 간 적은 없다. 물론 그의 다른 등장인물들도 같은 도시를 다시 방문하지는 않았다. <첩첩산중>은 처음으로 같은 도시를 다시 방문한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사람은 동우가 아니라 보경의 불륜 상대인 효섭이었다. 그러므로 정수기를 팔러 다니는 동우와 소설가 지망생인 미숙은 만날 일이 없다. 게다가 <첩첩산중>은 전주라는 도시를 보여주는 그 어떤 지표도 없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전주를 찾아간다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말하자면 미로. 첩첩산중. 이야기는 간단하다. 아파트가 ‘疊疊山中’처럼 보인다(이 한자를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마치 아파트처럼 생긴 글자). 영화는 아파트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아무 데서나 시작한다는 뜻이다. 미숙(정유미)이 서울말을 쓰기는 하지만 거기가 서울이라는 어떤 보장도 없다. 마찬가지로 전주에 갔지만 아무도 호남 말을 쓰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동선. 미숙은 선배 진영(김진경)을 만나러 차를 끌고 전주에 내려간다. 그런데 진영은 마침 “엄마와 싸워서” 미숙을 자기 집에 재워주지 못한다. 미숙은 알고 지내던 소설가 전 선생(문성근)에게 전화를 해서 만난다. 둘은 낮술을 마시면서 최근에 상을 받은 소설가 명우(이선균)를 성토한다. 함께 수만모텔에 가지만 “안 하던 짓을 자꾸 하려고 해서 뛰쳐나왔다” (그런데 안 하던 짓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진영의 집에서 잔 미숙은 그녀의 방에서 전 선생의 시계를 발견하고 “오전 내내 꼬치꼬치 캐물은 다음 둘 사이의 관계를” 알게 된다. 전주에 내려온 김에 미숙은 “진짜 존경하는” 은희경 작가의 집을 찾아간다. 우연히 집 앞에서 존경하는 작가와 마주치지만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워서 들어가 봐야” 한다. 미숙은 그녀 앞에서 “좋은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다음 서울에 사는 명우에게 전화를 해서 내려오라고 한다. 그리고 저녁에 미숙과 명우, 진영 셋이서 술을 마신다. 미숙과 명우는 취해서 함께 모텔에 가고,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본 진영은 전 선생에게 전화해서 “모텔을 잡아놓고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다음날 정오쯤 밥을 먹으러 나온 네 사람은 동해횟집에서 마주친다. 밥만 먹고 그냥 가려던 명우와 미숙에게 전 선생은 불러서 왜 인사를 하고 가지 않느냐고 야단을 친다. 명우는 죄송하다고 사과를 한다. 진영은 괜찮다고 대답한다. 쳐다보던 미숙은 “챙피한 줄도 모르고”라고 한 다음 커피를 집어던지고 그 자리를 떠난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떠나가는 미숙의 등에 들리는 전 선생의 한마디다. “저 싸가지.” 모텔이 ‘疊疊山中’처럼 보이면서 끝난다. 이박삼일. <극장전> ‘이전’과 ‘이후’ <첩첩산중>은 홍상수의 유일한 중편영화다.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다시 중편영화를 만들게 될 것 같지는 않다고 대답했다. 물론 앞으로의 일은 알 수 없다. 이 중편영화는 좀 이상한 자리에 놓여 있는데 <극장전> ‘이후’ 홍상수의 영화는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변의 여인>은 2시간7분이다. 그 바로 앞에 있는 <극장전>이 1시간29분, 좀더 앞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가 1시간27분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건 갑작스러운 길이다. 물론 세 번째 영화 <오! 수정>이 2시간6분이긴 하지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1시간54분, <강원도의 힘>이 1시간48분, 그리고 네 번째 영화 <생활의 발견>이 1시간55분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홍상수에게 2시간은 어떤 물리적 한계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밤과낮>은 2시간24분에 이른다(그의 영화 중에서 이제까지는 제일 길다). 그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2시간6분이다. 그는 <해변의 여인> ‘이후’ 2시간의 시간을 넘겨서만 이야기의 리듬을 이어갔다. 영화가 시간의 예술이라는 식상한 표현의 배후에는 매우 중요한 진실이 있다. 무엇보다 상영시간은 영화에서 가장 물리적인 결정이라는 사실이다. 일단 상영시간이 결정되면 관객은 그 시간을 도리없이 체험해야 한다. 차라리 나는 영화란 스펙터클이 아니라 시간의 체험이라고 말하고 싶다. 홍상수는 마치 <극장전> ‘이전’과 ‘이후’가 있는 것처럼 영화의 시간을 늘렸다. 물론 그것이 영화 안의 리듬과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홍상수는 어느 순간 갑자기 리듬이 빨라지거나 혹은 느려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에서 리듬은 일종의 간격이다. 둘 사이의 거리. 둘 사이의 공존. 세워진 면. 홍상수는 자꾸만 볼록하거나 오목한 면을 “다림질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지각으로 이루어진 면적들. 그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영화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이 사람과 저 사람 사이에서, 이 숏과 저 숏 사이를, 혹은 이 사건과 저 사건을,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세워놓을 것인가, 라는 문제. 홍상수라면 이것을 짝짓기라고 불렀을 것이다. 만사형통? 천만의 말씀. 홍상수는 어느 정도의 간격으로 세워놓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순간 거기서 이야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는 관계를 서술하는 대신 얼마만큼 정확한 간격으로 세워놓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홍상수 영화 안에서 구조라는 문제가 너무 압도적이어서 그의 영화 안에서 활동하는 간격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구조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아니, 차라리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홍상수는 구조를 만드는 순간 곧장 원하건 원치 않건 고정적 지시자가 발생하며 의미의 소급이라는 방식으로 해명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싸우려는 욕망의 경제. 그러기 위해서 홍상수는 구조 대신 비일관성으로 이루어진 감각의 흐름에로 이끌린다. 세상의 표면에 대한 감각. 물론 그곳은 환상이 사라진 사막이다. 그 사막 위에 세워진 면들. 면들 사이로 때로는 끈적거리고 때로는 미끈거리면서 흘러(내리거나 흘러)가는 감각. 홍상수가 아무리 열심히 사랑을 다루어도 거기서 낭만적인 정서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거기에 자기의 자리를 버리고 타자라고 가정된 대상을 껴안으려는 어떤 노력도 없기 때문이다. 무서울 정도로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면들. 그 사이의 액체 같은 감각. 이때 종종 홍상수의 영화를 설명하면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말은 반복과 차이이다. 둘은 서로 자리를 바꾸어서 끈질기게 나타난다. 여기서 이 둘이 자리를 바꾸면서 우리에게 던지는 통찰은 대부분 희극적 웃음이다. 내 질문은 반복과 차이가 자리를 바꾸면서 나타날 때 어디서 멈출 것이냐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중간에 중단시키지 않으면 사태가 끔찍해진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만일 홍상수의 영화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고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기다리는 것은 반대로 비극적 파국이다. 그때 우리는 홍상수 영화에서 파국이 예언되는 것을 느껴보는 대신 그것을 고스란히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홍상수의 예술적 재능은 간격의 마지막 순간 더이상의 간격이 없다고 갑자기 텅 빈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우리에게 안겨주는 거의 무아지경에 가까운 실재와의 대면이다. 말하자면 그 순간. 그 다음 간격의 순간을 기다리는데 문득 마주치는 텅 빈 자리. <첩첩산중>은 그 텅 빈 자리를 가장 작게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짧다, 고 말하는 대신 작다, 고 말했다. 왜 그런 인상을 받았을까? 나는 영화를 볼 때는 단지 몇개의 면을 빼놓고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짧다고 생각했는데 다 본 다음의 인상은 작다는 것이었다. 길이로부터 면적에로 바뀐 인상. 이것이 <첩첩산중>을 본 다음 가장 먼저 든 궁금증이었다. 시각적 감각의 회복을 노리다 약간의 우회. 영화를 말하면서 음악을 끌어들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음악은 영화와 존재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태도에 한해서만 말할 것이다. 홍상수는 점점 더 재즈에서의 임프로비제이션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 방법을 어디까지 더 밀고 나아갈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마치 세션을 하는 것처럼 영화를 만들고 있다. 물론 영화는 재즈가 아니다. 이 말은 비유가 아니다. 그날의 공연. 알 수 없는 감흥. 그저 선율의 윤곽만을 정해놓은 상태. 누가 누구를 만나느냐는 문제. 세션으로서의 영화. 이때 홍상수에게 함께 연주할 상대는 배우들이다. 재즈의 대가들처럼 홍상수는 배우들을 자유롭게 자기 영화에 초대한 다음 그 배우들을 건드린다. 그때 홍상수는 먼저 대사로 건드리고, 그런 다음 서로 다른 배우들끼리 서로를 건드리게 한 다음, 카메라로 건드린다. 말하자면 그에게 카메라는 가장 마지막에 건드리는 공명현상이다. 서 있는 면들 사이의 진동. 영화적 기호들 사이의 시청각적 긴장. 이때 홍상수는 약간 수줍게 사람을 바라본다. 나는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라고 썼다. 홍상수 영화의 핵심은 결국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프레임은 대부분 초상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의 사람은 세잔이 바라본 사과와 마찬가지, 라는 사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홍상수의 사과는 걸어다니고 거짓말을 아주 잘할 뿐만 아니라 유혹하고 버림받으면서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한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정도의? 그렇다. 그저 그 정도이다. 이 차이를 과장하려 드는 것은 자꾸만 홍상수 영화를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보려는 비평들의 특징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가지는 결정적 차이점. 홍상수는 그 사람들을 그렇게 쳐다보는 대신 그렇게 느껴보려고 한다. 홍상수는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느껴볼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계속 건드린다. 그가 현장에서 배우들을 자유롭게 놓아둔다는 것은 그의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홍상수는 매우 엄격하게 배우들을 다룬다. 무엇보다도 그의 엄격함은 대사에 종속된 신체의 관리에서 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대사의 증인처럼 말을 하고 그 말에 자기의 행동을 복종시킨다. 이때 인물들의 리듬은 절대적으로 대사에서 오는 것이다. 아니, 차라리 대사하는 면들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이때 이 면들을 무엇으로 건드려야 할까? 나는 홍상수의 줌이 여기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홍상수는 <극장전>에서부터 갑자기 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이 갑작스러운 줌에 대해서 당황했다. 그런 다음 영화 안에서의 줌의 일관성, 혹은 의미, 어쩌면 의도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혹은 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홍상수는 일관되게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거기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다음 약간 귀찮다는 듯이 덧붙였다. “저는 게을러서 그런지 화면을 나누어야 하는데 나누는 대신 그렇게 줌을 통해서 다르게 했어요.” 이상하게도 그 다음부터 모두들 마치 줌을 보지 못한 것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아니 거기서 줌이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귀차니즘의 만연. 나는 그런 태도에 동의할 수 없다. 줌은 아무렇게나 거기서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니다. 줌이 활동하는 순간 숏은 갑자기 자기의 성질을 바꾸어야 한다. 단지 화면의 크기가 변하거나 대상에 다가갔다는 것이 아니라 줌이 활동하는 순간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줌은 이제까지 보고 있던 화면에서 영화라는 기계의 양태를 드러내면서 카메라라는 존재를 말 그대로 ‘보여준다’. 좀더 정확하게 카메라가 건드리는 것은 대상과 프레임 그 사이이다. 말하자면 간격. 그 다음. 홍상수의 설명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다. 만일 그가 줌을 사용하는 것이 단지 투숏에서 더 들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다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홍상수는 단지 한 사람을 찍을 때도 종종 그렇게 했다. 혹은 그렇게 구태여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낄 때도 그렇게 했다. 이를테면 <첩첩산중>에서 진영의 집에 있는 철창 안의 두 마리의 개를 향해 갑자기 줌이 들어가는 이유가 그 두 마리의 강아지 투숏을 “나누어 찍기 귀찮어”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홍상수는 줌의 사용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홍상수는 줌에서 어떤 자유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는 점점 더 많아져서 거의 줌의 과잉에서 오는 화면의 일시적인 무너짐을 느낄 정도다. 마치 인상주의 다음에 도착한 어떤 야만성에의 매혹. 쳐다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대상과 갖고 있던 거리의 한계를 넘어서 다가갈 때 홍상수는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 혹은 칸딘스키 같은 효과가 일어나길 기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지나치게 다가갈 때 잭슨 폴록이나 에드 라인하르트, 루치오 폰타나가 될지도 모른다. 마치 회화가 왜 우리는 물질이 전자와 양자, 중성자 덩어리라는 것을 그리지 못하는가, 라는 질문을 안고 갑자기 형상을 버린 것처럼 홍상수는 왜 사람을 찍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몸과 마음을 느껴보지 못하는가, 라면서 건드린다. 홍상수의 영화에서 줌은 언제나 눈에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기습처럼 보인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두들기는 노크와도 같은 효과. 면의 진동. 홍상수가 여기서 노리는 것은 우리의 시각적 감각의 회복이다. 올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퀴즈를 한번 해보자. <첩첩산중>에서 첫 번째 줌은 언제 등장하는가? 대답은 미숙이나 진영, 혹은 진영 집 앞의 나무에 매달린 감이 아니라 미숙의 전화를 받으면서 “이빨이 아프다”고 대답하는 전 선생의 담배를 피워 무는 모습이다. 영화 안의 리듬적인 인물의 등장. 보이스 오버를 장악한 화자 미숙이 먼 길을 찾아온 대상 진영, 그런데 갑자기 이야기가 곁길로 새면서 전 선생이 등장할 때 줌은 그의 몫이다. 하나의 능동에서 다른 능동으로. 힘의 분산. 감각의 흐름은 갑자기 다른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다음 장면. 이때 줌을 둘러싼 맹렬한 권리투쟁이 벌어진다. 왼쪽에 전 선생이 앉았고 오른쪽에 미숙이 앉아서 낮술을 마신다. 그때 미숙이 말한다. “선생님이 (제가 써야 할 글을) 다 써버렸어요.” 갑자기 줌은 두 사람의 내밀한 관계 사이로 스며들기라도 하듯이 화면을 가득 채울 것처럼 다가간다. 하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런 다음 다시 한번 줌으로 전 선생을 밀쳐내고 미숙에게로 다가간다. 두번의 줌. 그러나 전 선생은 “그 개새끼”라고 명우를 욕하면서 미숙에게 다가간 카메라를 팬으로 다시 자기에게 끌어당긴다. 말하자면 힘의 밀고 당기기. 그때 힘은 느낌에서 나온다. 줌과 팬. 영화에서 두개의 운동. 그러나 이 운동은 얼마나 웃기는가. 세 번째(혹은 네 번째) 줌은 다음날 아침에 뜬금없이 진영 집의 강아지 두 마리를 보여준 다음 갑자기 그 두 마리에게 줌인한다. 두 마리의 개. 나는 이 두개의 신을 서로 결합해서 의미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러나 미숙과 전 선생을 보여준 다음 두 마리의 개를 우리 앞에 같은 방법으로 전시할 때 그것은 줌이라는 기호의 외설적 누설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미숙이 숲길을 걸으면서 전 선생과 통화하는 장면은 <첩첩산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뿐만 아니라 올해 한국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의 하나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의 유일한 풍경이기도 할 장면에서 줌은 거의 무너져내리는 미숙을 따라 들어간다. 숲길은 비스듬하게 프레임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미숙은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전 선생과 통화를 한다. 서 있는 나무들. 미숙은 소리를 지르다가 땅바닥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한다. 세개의 운동.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진영을 만났을 때 집 앞의 감나무를 따라 올라가던 카메라의 팬의 기억.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등장하지 않는 나무). 전 선생과 통화를 하는 미숙에게 수평으로 다가가는 줌(전 선생을 영화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줌인, 반복하는 미숙과의 전화). 두개의 흔적의 힘. 지금 전 선생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수직으로 하강하듯이 쓰러지는 미숙. 세개의 면이 겹쳐진 흔적과 운동. 팬과 줌. <첩첩산중>에서 맨 첫 장면의 아파트 ‘疊疊山中’과 맨 마지막 장면 모텔 ‘疊疊山中’ 사이에 있는 세 번째 ‘疊疊山中’은 은희경 작가의 집 앞일 것이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이상하게 찍혔다. 차를 끌고 미숙은 “전 선생님보다 훨씬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고 싶어서 집을 찾아간다. 이때 붉은 벽돌로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 계단 집은 마치 산속에서 길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 집 앞에서 서성이는 미숙에게 줌으로 다가간다. 그런데 이상한 방식으로 미숙은 줌을 피하듯이 빠져나가서 계단을 올라간다. 철창 너머의 “전 선생님보다 훨씬 좋아하는 작가”의 집 안 풍경. 마치 영화 이야기 저편에 존재하는 현실 속의 소설가의 삶의 공간. 둘 사이를 가로막는 철창 대문. 이편과 저편.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진짜’ 은희경 작가가 나타난다. 이때 은희경 작가와 미숙을 보여주기 위해서 줌아웃을 한다. 여기서 줌아웃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다는 것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영화 안에 찢고 들어온 실재. 미숙이 서 있는 영화와 철창 저 너머에 있는 ‘진짜’ 소설가의 삶 사이의 경계가 갑자기 지워지고 뒤에서 은희경 작가가 나타날 때 줌아웃은 미숙에게 다가간 줌인을 무효화하면서 이 ‘이후’의 장면을 영화와 현실 둘 사이에서 오가는 메아리 같은 응답의 장소로 간격을 바꾼다. 미숙은 은희경 작가에게 “좋은 글을 쓰겠다”고 약속한다. 은희경 작가는 미숙에게 그냥 작가가 아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제일 중요한 작가입니다.” 이 갑작스러운 현실 속의 응답이 영화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올 때 미숙은 맹세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행동한다. 그러나 미숙의 행동은 “좋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해 있는 이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다. 은희경 작가는 집으로 들어가고 미숙 혼자 계단에 남는다. 다시 남겨진 영화. “좋은 글을 쓸” 것이라는 맹세. 이야기를 잘 끝내야 한다. “엄마와 싸우는” 중인 그녀들 물론 여기 은희경 작가의 난데없는 영화 안의 침입에 대한 방어가 있긴 하다. 은희경 작가는 미숙의 질문에 진영의 대답을 반복한다. “저는 지금 들어가봐야 해요, 엄마와 싸워서요.” 나는 이 반복을 단지 진영과 은희경 작가를 묶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첩첩산중>은 여자가 주인공인 홍상수의 첫 번째 영화이다. 혹은 적어도 보이스 오버 화자가 여자인 첫 번째 영화이다. 물론 홍상수는 “여자랑 남자랑 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파란 사과와 빨간 사과는 그것의 내용을 물어서 사과라고 생각할 때는 같은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의 신경지각에 주는 감각을 물을 때 그 둘은 서로 다른 것이다. 무엇을 무엇과 묶을 것인가, 라는 문제. 이를테면 주인공과 ‘엄마’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둘의 차이는 좀더 분명해진다. <극장전>에서 자살을 하려다가 집에 돌아온 상원은 ‘엄마’에게 야단을 맞은 다음 아파트에 올라가 저무는 해를 보면서 “엄마”를 부르며 통곡한다. 상원은 의붓아들이 아니다. 말하자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 반면 <첩첩산중>에서 ‘엄마’는 모두 세번 등장하는데 세번 모두 여자들과의 관계 안에서만 존재를 드러낸다. 첫 번째는 미숙이 집을 떠날 때다. 미숙은 집을 나서면서 혼자 자동차를 끌고 전주로 떠나기 위해서 “엄마를 안심시키느라 호들갑을 떨었다”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말한다. 두 번째는 미숙이 진영의 집에 도착을 했더니 진영이 집 앞에서 “엄마와 싸워서”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세 번째는 은희경 작가의 집 앞에서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는데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워서” 지금 들어가 봐야 한다고 말한 다음 미숙을 바깥에 남겨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첩첩산중>에서 ‘엄마’는 여자들과 묶인다. 딸과 어머니의 관계. 공통점. 홍상수의 주인공들은 누구도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엄마’라고 부른다. 이때 그(녀들)에게 어머니를 부르는 자리는 아직도 자아가 부모로부터 분리에 성공하지 못한 소외의 자리이다. 차이점. 딸들은 어머니와 인정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이때 서로 완전히 떨어진 진영과 은희경 작가는 “엄마와 싸우는” 중이다(하지만 진영은 ‘아마도’ 다음날 아침 엄마와 화해했다. 미숙이 보기에 “진영언니는 복 받은 줄 모른다”). 그리고 매번 집 앞에서 미숙은 따돌림당한다(하지만 그날 밤 미숙은 진영의 집에서 잠을 잘 수 있다). 이 이상한 묶음의 셈에서 미숙은 영화 안에서도 진영에 대한 미숙이지만 영화 바깥에서도 은희경 작가에 대한 미숙이다. 같은 말이지만 은희경 작가와 겹치는 자리는 미숙이 아니라 진영이다. 이때 핵심은 양쪽으로부터 미숙이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가 둘로 분리된 것처럼 보이는 양쪽 모두에게 미숙은 둘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화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화해? 그렇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미숙은 영화와 현실 사이에서 완전히 찢어질 것이다. 미숙이라는 면을 영화 안쪽에서 한번 건드렸고 그런 다음 바깥에서 같은 방법으로 건드렸기 때문이다. 휘청거리는 간격. 말하자면 이 영화 안에서 지금 진동하는 면. <첩첩산중>이 작게 느껴진 이유는 은희경 작가가 계단으로 올라가는 장면을 찍은 다음 바로 이어서 (장소를 고속버스터미널로 바꾸어서) 계단에서 명우가 내려오는 것은 현실 저편으로 사라진 은희경 작가에 대한 영화 안의 대답이다. 미숙은 명우를 만나서 함께 차를 탄다. 그러면서 (보이스 오버로) “남잔 다 똑같애”라고 말한다. 남자가 다 똑같다면 사실 명우와 전 선생도 아무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명우가 영화 안에 처음 나타났을 때 그를 줌으로 당겨서 다가가지는 않는다. 그 둘은 진영을 불러서 셋이서 술을 마신다. 미숙은 술을 마시면서 “난 망했어”라고 푸념한다. 그제야 미숙을 줌인한다. 그때 명우는 술집 바깥으로 나와서 전 선생에게 전주에 내려왔다고 전화한다. 그런 다음 미숙과 명우는 화장실 앞에서 키스한다. 전 선생과 통화한 명우의 그 혀. 말을 다루는 소설가의 혀. 그러나 카메라는 이상할 정도로 이 키스를 무관심하게 쳐다본다. 다음 장면은 이번에는 미숙이 술집 바깥에서 전 선생에게 전화를 한다. 이때 이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숲길 장면의 반복처럼 찍혔다. 명우가 전화할 때는 그저 쳐다보던 카메라가 미숙이 전화할 때는 줌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숲길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숙은 주저앉고 만다. 다음 장면은 다시 술집으로 돌아왔고 두 사람은 진영 앞에서 전 선생과 통화했던 그 혀를 가지고 서로 키스한다. 진영의 시선. 전 선생의 혀. 미숙과 명우의 입. 거의 뒤엉킨 관계. 하지만 아직 더 남았다. 미숙과 명우가 떠나간 다음 진영은 전 선생에게 두 사람이 떠났다고 전화한다. 그때 마치 진영을 감싸안듯이 줌인한다. 진영은 “방을 잡아놓고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동일한 장소. 술집 앞 주차장. 주저앉듯이 전화에 매달려 쓰러지던 가련한 미숙에게 다가가던 무거운 줌. 날아갈듯이 가볍게 전화에 매달려 “그러면 저는 좋지요”라면서 기대감에 들뜬 진영을 따라가는 줌. 두개의 줌의 운동. 그런 다음 기다리는 마지막 만남. “오전 열두시가 지나서” 엘리제 모텔에서 나오는 미숙과 명우는 점심을 먹기 위해 동해횟집에 들어간다. 같은 시간에 전 선생과 진영은 아테네 모텔에서 나와서 같은 집에 들어간다. 이 불편한 자리. 먼저 자리를 떠나는 미숙과 명우를 뒤따라나온 전 선생이 부른다. “야, 너희들 이리 와.” 옆에는 진영이 서 있다. 전 선생은 너희들 왜 인사 안 하냐고 따져 묻기 시작한다. 물론 말도 안되는 상황이다. 이때 이 장면은 미숙과 명우, 전 선생과 진영이 모두 한자리에 모인 유일한 숏이다. 미숙의 차 앞까지 간 미숙과 명우를 전 선생이 부를 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미숙과 명우의 동선 방향을 따라 팬을 한 카메라는 네 사람을 보여준 다음 그냥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이때 마치 카메라는 줌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냥 서서 본다. 자, 이제 질문에 대답할 차례다. 왜 나는 <첩첩산중>이 작다고 느꼈을까? 이 이야기는 ‘하여튼’ 미숙의 보이스 오버로 진행되었으며, 미숙의 방문이며, 미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하지만 모든 장면에 미숙이 나오는 것은 아니며 미숙이 떠난 다음에 카메라가 그 장소에 잠시 동안 남아서 머물기도 하였다). 그런데 세워놓은 이 네 사람 가운데 가장 작게 서 있는 사람은 미숙이다. 줌으로 건드리거나 잡아당기던 카메라로부터 화자인 미숙이 가장 멀리 있을 때 화면의 원근감 안에서 가장 작게 보였다. 가장 작은 면. 너무 멀리 있는 간격. 마치 줌으로 잡아당길 수 없을 만큼 멀리 있다고 느껴지는 포기의 상태. 그때 미숙은 세워진 세개의 면들 사이에서 혼자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였다. 줌의 기호 바깥에 놓여질 때 그것은 홍상수에게 그 면을 느껴볼 수 있는 거리 바깥으로 나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미숙은 네 사람으로 이루어진 사각형의 면을 부숴버리고 바깥으로 나간다. 그때 그 면을 부수기 위해서 미숙은 커피 잔을 집어던진 다음 사각형의 면을 벗어나서 자기 차가 놓여진 원래의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간다. 이때 카메라는 부서진 사각형의 면, 혹은 남겨진 삼각형의 면을 버리고 미숙을 따라서 이 숏의 시작을 거꾸로 되돌리기라도 하듯이 다시 오른쪽으로 팬을 한다. 그러면 영화는 첫 시작과 마찬가지로 ‘疊疊山中’을 보여주고 끝난다. 완전한 대구, 4개의 숏으로 시작한 첫 장면. 4개의 숏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장면. 차이라면 첫 장소는 아파트이고 마지막 장소는 모텔이라는 것뿐이다. 그리고 남은, 어두은 근심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아직 미숙은 차를 타지 않았다. 그런데 화면은 어두워졌고 음악이 흐른다. 이 피아노 선율은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그러니까 전주에 진영을 만나러 갈 때 제목이 떠오르면서 흐르던 음악이다. 나는 잊지 않았다. 미숙은 차를 몰고 가면서 (보이스 오버로) “고속도로를 타니까 하나도 겁이 안 난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그녀는 차를 몰면서 쉴새없이 중얼거렸다. “죽어두 돼, 죽어두 돼, 죽어두 돼.” 그때 미숙과 동승한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불안하게도 경사지어진 프레임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들이받을 것 같은 자세. 전주는 고속버스로도 갈 수 있으며 기차를 타고 갈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숙은 지금 차를 끌고 필사적으로 목숨을 걸고 가는 중이다. 단지 “진영 언니를 만나는”데 그렇게 목숨을 걸 이유가 있을까? 아니, 정말 그렇다면 미숙은 “진영 언니도 잃어버리고 이제 누구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까? 어두운 근심. 미숙은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첩첩산중. 산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

<지붕 뚫고 하이킥!> 울다가 웃다가… 정신 사나워 죽겠어!

하루는 배를 잡고 웃다 눈물을 찔끔거리고, 하루는 애처로워 눈시울을 붉힌다. 꼬박꼬박 회당 두개의 시추에이션을 완결시키면서도 인물들의 운명에 연연하도록 관심을 붙들어놓는다. 오후 7시45분대 MBC 일일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극본 이영철·이소정·조성희, 연출 김병욱·김영기·조찬주)이 우리를 정신 사납게 만들고 있다. 인기도 김병욱 PD의 전작 <거침없이 하이킥> 못지않다. 일일시청률 (11월5일 TNS미디어 집계)이 20% 고지에 올랐고 광고 판매율도 100%를 웃돈다는 소문이다. 120회로 예정된 시리즈가 반환점을 향해 달려가는 이즈음 <씨네21>이 일산 드림센터 제5스튜디오의 ‘지붕 없는’ 순재네 집을 방문했다. 김병욱 시트콤을 꾸준히 지켜보아온 듀나의 글과 PD의 중간소감도 듣는다. “시트콤이라며~!” “다섯살짜리 딸이 시트콤 보다가 울었어요.” “상식적인 선에서의 시트콤을 원합니다.” “왜 시트콤을 보면서 걱정을 해야 할까요?”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온 일부 글의 제목은 김병욱 PD의 일곱 번째 작품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이 일으킨 독특한 반향을 보여준다. 분명히 <지붕킥>은 같은 인물이 반복 출연하고 스튜디오 촬영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웃음소리가 효과로 깔리는 시추에이션 코미디다. 또한, 대가족과 그 주변 이웃을 구성원으로 삼는 김병욱 시트콤의 익숙한 구도도 보존하고 있다. 혼돈의 원인은 장르의 암묵적 계약을 넘어서는 정서다. <지붕킥>은, 워낙 인간의 보편적 어리석음과 거기서 비롯되는 페이소스를 기본 재료로 취했던 김병욱 PD의 전작과 나란히 세워놓아도 비죽 튀어나온다. 상황은 훨씬 처절하고 인물들의 행태는 더 절박하거나 병적이며 드라마는 슬픔과 콤플렉스에 한층 예민하게 반응한다. 잠깐. 김병욱 시트콤은 ‘오바’를 해충처럼 질색하는 세계 아니었던가? 김 PD는 진짜 감정을 직면하는 것과 과잉은 다른 사안임을 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절절한 속내를 드러내면 촌스럽다고 여기는 문화에 길들여져 진심과 괴리된 채 생활하는 데에 익숙해진 것 같아요. 표현하는 코미디의 형식이 낡지 않았다면 바닥에 깔린 욕구와 정서야 좀 뜨거우면 어떠냐는 생각이 있었어요.” 일례로 6회 에피소드를 보자. 강원도 산골에서 상경한 세경과 신애 자매는 노숙생활을 하다 실수로 서로를 잃어버린다. 세경은 한옥집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넋이 나간 채 동생을 찾아다닌다. 신애 역시 목 놓아 울며 언니를 찾아 헤매는데, 줄곧 오열하는 틈틈이 주택가에 배달된 우유를 훔쳐 마시고, 편의점에 남겨진 컵라면과 단무지를 싹싹 비우고 노숙자 무료 급식의 밥풀까지 떼먹는다. 한편 도와주러 나섰던 정음은 옷가게 쇼윈도에 정신이 팔리고 인나와 광수는 쾌청한 날씨에 홀려 교외로 놀러가버린다. 밤이 이슥하도록 뒤꿈치에 피를 흘리며 뛰어다니던 세경은 환청처럼 동생의 음성이 들리자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에 귀를 대고 엎드려 운다. 어느 시청자는 “갈 곳 없는 아이가 거리에서 음식 주워 먹는 게 웃기냐?”고 항의했다. 아마 <지붕킥>의 작가와 감독은 웃기기도 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삭막하고 화나고 슬픈 상황이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그 모든 감정을 23분 러닝타임 안에 숨차게 포개놓는다. 가난이 코미디와 비극의 원천 <지붕킥>의 차별성은 주로 세경과 신애의 존재에서 나온다. 형식적으로 우선 <지붕킥>은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에서 시작돼 <거침없이 하이킥>(2006~2007, 이하 <하이킥>)으로 이어진, 개별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장기적 서사를 적극 밀어붙이고 있다. 세경 자매가 헤어진 아빠를 찾는 과정이 이야기의 척추다. 둘째, 낯선 환경에 던져진 소녀들에게 시점을 부여함으로써 성장드라마 성격이 강해졌다. 한편 이들의 강한 자매애와 독립성은 가족 안에서 거의 감화를 받지 못하는 순재네 아이들- 준혁과 해리- 도 성장시킨다. 셋째, <지붕킥>에서 가난이 초래하는 불편과 거기서 파생되는 다양한 감정은 코미디와 비극의 원천이다. 부잣집에 식모로 입주한 세경의 생활이 계급의 대조를 때로 노골적으로 보여준다면 명문대생인 척 과외교습을 하면서 카드빚에 쪼들리는 대학생 황정음은 소비를 결코 따라잡지 못하는 상대적 빈곤을 코믹하게 표현한다. 김병욱 PD와 제작진은 <지붕킥>에서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부러 정의롭게 묘사하거나 픽션을 빌려 사과하지 않는다. 그냥 가난을 얼굴 앞에 확 들이밀고 돈 때문에 인간적 품위를 지킬 수 없는 세세한 상황에서 코미디와 멜로를 만들어낸다. “60분짜리 서사에는 흘러가야 할 큰 방향이 있어서 이런 작은 이야기들을 끼워넣기 힘들어요. 어찌보면 25분짜리만이 다룰 수 있는 영역이라 곧 장르의 자부심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제게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해요.” 오랫동안 영화나 정극 드라마를 향해 갈증을 품었던 김병욱 PD는 이제 25분짜리 서사의 고유한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제가 하고 싶은 드라마를 할 뿐 그것이 어떤 형태로 규정되는지는 관심이 없고요. 웃음 효과도 방송사와 약속이라 조연출이 까는 거지, 전 빼도 상관이 없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채널이 고장난 것도 아닌데(웃음) 다른 걸 보면 되지 않을까요?” 컷의 리듬대로 악보 연주하듯 촬영 “뭐 제가 사갈 것은 없을까요?” 취재 전날 인사 문자를 보내자 김병욱 PD의 시름시름한 답신이 날아왔다. “시간을 좀 사다주세요.” 어느 일일극 연출자든 치러야 할 싸움이겠으나, 김병욱 PD가 더욱 고된 까닭은 그가 세 작가와 더불어 대본 작업에도 직접 매달리기 때문이다. 자기 이야기를 연출하려는 고집이냐 물었더니 다른 방법은 아예 모른단다. “대본을 쓰면서 콘티를 떠올리는 방식이 몸에 배어 제 손이 닿지 않은 대본으로는 콘티를 못 짜요.” 김병욱 PD가 직접 연출하는 <지붕킥>의 세트 촬영은 매주 목·금요일 이틀 동안 밤을 새우며 이루어진다(야외장면은 김영기, 조찬주 감독이 맡는다). 세트에서 소화하는 분량은 일주일 방송분의 절반인 100여신. 목요일은 순재네 집, 금요일은 자옥·정음·줄리엔·광수·인나가 사는 한옥 세트를 중심으로 녹화가 이뤄진다. 11월12일 목요일 오전 11시. 리허설을 위해 모여든 제작진과 배우들이 이 방 저 방 우르르 뛰다시피 몰려다니며 연기의 톤과 동선을 체크한다. 격려차 방문한 엄기영 MBC 사장과 일행을 제대로 응대할 경황도 없다. 아직 분장하지 않은 배우들의 분위기는 캐릭터와 사뭇 다르다. 신세경은 힐을 또각이며 들어섰고 지훈 역의 최다니엘 얼굴에는 뿔테 안경이 없다. 극중에서 퉁명스러운 말투의 소년 준혁인 윤시윤은 주변이 동그랗게 환해지는 웃음을 뿌리며 ‘빼빼로’를 돌리고 있다. 원체 상냥하고 웃음 많은 성격을 쿨한 준혁에게 맞춰 억누르느라 수고가 많다. 점심과 음향효과 녹음을 마친 오후 3시, 촬영이 개시됐다. 세트와 부조정실의 모든 스탭은 카메라 앵글과 연기자의 동선이 컷별로 표기된 ‘악보’- 콘티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세대의 카메라에서 잡은 영상은 촬영과 동시에 악보에 지정된 대로 편집된다. 숏이 아니라, 세 카메라를 한번 배치해 찍어낼 수 있는 한달음의 연기가 구성의 기본단위다. 컷의 리듬대로 손가락을 튕기는 김병욱 PD는 무슨 노래를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세트에서는 현경이 해리의 두 다리를 붙들고 상체 강화 훈련을 시키고 있다. 매사에 급우 신애보다 처지는 딸에게 부아가 치민 체육교사 현경이, 달리기만은 질 수 없다는 결단으로 특훈에 돌입한 것이다. 해리가 팔로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어떻게 하면 더 역동적으로 잡을지 촬영감독과 부조정실 사이에 몇 차례 논의가 오가다 부감으로 결정을 본다. 록키 발보아가 울고 갈 훈련을 거친 해리가 드디어 실력을 발휘해 신애를 뒤쫓는 장면. 곁눈질해본 대본의 지문에는 무려 “영화 <추격자>의 김윤석과 하정우처럼”이라고 써 있다. 두 소녀의 레이스를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던 현경은 해리가 마침내 신애를 붙잡자 승리의 어퍼컷을 날린다. 표출되는 기쁨의 크기를 김병욱 PD가 꼼꼼히 주문한다. “체육인으로서 훈련이 성공했다는 보람이지, 딸이 신애를 때리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하이킥>부터 팀을 이뤄온 김태홍 조명감독은 배우를 대하는 김병욱 PD의 기술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중견 연기자에겐 강한 캐릭터를 심어주고, 신인 연기자에겐 연기력과 캐릭터를 동시에 주입하고, 연기자 캐스팅에 100% 관여하여 비교우위에서 일을 진행한다.” <지붕킥>의 순재네는 지금까지 김병욱 시트콤의 어떤 가족보다 데면데면하다. 가장 순재는 연애에 몰두해 식구들의 생활에 그닥 신경을 쓰지 않는다. 부부간의 대화는 주로 면박, 부모자식간의 대화는 꾸중과 변명이다. 먹이사슬의 최종 고리는 장인회사에서 허수아비 부사장으로 일하는 보석. 그는 자기 의지대로 무엇을 결정한 기억이 아득한 식물 같은 남자다. 53회는 보석의 비애를 아들 준혁의 눈으로 조명하는 에피소드다. 오늘도 순재와 보석의 주된 스킨십은 발길질. 모욕당하는 아빠를 바라보는 준혁의 표정 연기를 PD가 지시한다. “너무 짠한 티를 내지마.” 대선배 정보석이 팁을 일러준다. “속으로만 아픈 마음을 갖고 표정없이 봐.”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라 부르지 못하는 고통 무뚝뚝한 준혁이지만 세경 누나를 마주 볼 때만큼은 동요한다. 깊은 밤 사골을 고며 식탁에서 혼자 공부하는 세경과 차를 마시는 장면. 기쁜 빛이 만면에 완연하자 PD가 다시 제어한다. “준혁이 조금만 웃음을 줄이자. 넌 딱 그만큼 웃을 때가 멋있어.” 세경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오붓한 즐거움에 막 젖어드는 준혁에게 날벼락이 떨어진다. 엄마가 35점짜리 성적표를 세경에게 보여준 것. 이번에는 상반된 주문이 떨어진다. “바로 전 컷이 좋아하는 사람 손에 들린 35점짜리 성적표야. 네가 이 클로즈업에서 제대로 분노해야 다음 장면들이 살아.” 허공에 걸려 있는 감정을 표현하느라 힘든 또 한명의 연기자는 지훈 역의 최다니엘이다. 세경은 그를 향해 막 싹트는 마음을 잘라버리려고 일부러 덤덤히 등을 돌린다. 친절을 거절당한 지훈은 그녀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아야 할까. 오전 리허설에서도 김병욱 PD에게 가이드를 구했던 최다니엘이 말한다. “제3자가 보기에는 분명해 보여도 당사자는 막상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이 있잖아요. 아직 모호해요. 아마 한쪽(정음)은 재미있고 한쪽(세경)은 연민에 가까운 감정이겠죠.” 52회, 53회는 꼬마 악녀 해리의 어휘 절반을 차지하는 ‘빵꾸똥꾸’의 기원과 그 적용사례를 파고든다. 보석이 상품을 걸고 내린 빵꾸똥꾸 금지령. 입에 붙어버렸는지 “빵…”까지 하고 입을 다물어야 하는 대목에서 해리가 그만 “빵꾸똥꾸!”를 내처 외쳐버리자 스탭들이 웃음짓는다. ‘빵꾸똥꾸를 빵꾸똥꾸라 부르지 못하는 고통’이 참으로 눈물겹다. 이 어린 배우는 방영 초기 미운 캐릭터로 미움을 샀으나, 카리스마의 경지까지 연기를 폭발시켜 짧은 시간에 시청자의 적대감을 경외로 바꿔놓았다. “오디션 100:1 뚫을 때만 해도 덜했는데. 이 정도일 줄 몰랐어요. 하나의 연기에 7, 8가지 안이 준비돼 있어요.” 스탭의 존경어린 평이 무색하게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마자 해리는 무섭게 구박하던 신애와 사이좋게 어울려 세경의 목을 끌어안고 텔레토비 노래를 흥얼거린다. 자정이 다가온 세트에는 피로감이 안개처럼 서렸다. 순재네 거실과 마주보고 있는 자옥의 방과 불 꺼진 한옥 마당, 식당과 연해 있는 이순재 F&B 사무실. TV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게 배치된 세트들을 다시 둘러보았다. 세경 자매가 기거하는 옷방에서는 무릎까지 이불을 덮은 최다니엘이 대본을 옆에 둔 채 건공중을 골똘히 바라보고 있다. 몇달이 흐른 뒤 시리즈가 끝나면 이 방들은 허물어질 것이다. 여기서 복닥거리던 사람들- 캐릭터, 배우, 스탭 모두- 은 자기 몫의 성장과 상처를 챙겨들고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안온하게 밀봉된 시트콤의 명랑한 우주를 창조하면서도 종장에 이르면 죽음의 예감과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섭리를 외면하지 않았던 김병욱 PD는, 이번에는 어떻게 이 공간에 안녕을 고할까.

명랑하다 재미난다 독립영화탐구생활

서울독립영화제2009 12월11일부터… 경향을 알 수 있는 추천작 15편을 소개함 서울독립영화제2009가 12월11일부터 18일까지 9일 동안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와 스폰지하우스에서 열린다. ‘치고 달리기’(Hit & Run)라는 야구용어를 슬로건 삼은 이번 영화제 출품작은 모두 722편. 지난해보다 100편 이상 많아졌다. 이중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를 비롯한 45편의 작품이 예심을 거쳐 경쟁부문에서 관객을 만난다. 개막작은 지난해 ‘인디 트라이앵글’ 프로젝트에 선정된 민용근, 이유림, 장훈 감독의 옴니버스영화 <원 나잇 스탠드>. 제목처럼 하룻밤의 섹스가 공통 주제다. 국내 초청부문에선 이지상 감독의 <몽실언니>, 애니메이션 <산책가> 등 24편이 상영된다. 장률 감독 특별전과 라야 마틴의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 등 필리핀 독립영화 특별전도 해외초청 부문에 마련됐다. 올해 독립영화의 경향을 한눈에 일별하는 축제에 앞서 ‘치고 달리기’라는 슬로건처럼 ‘명랑하고 역동적인 독립영화’ 15편을 먼저 소개한다. 88만원 감독 김일현 | 애니메이션, 실험 | 컬러 | 13분 | 2009년 눈을 감고 귀로 들어야 한다. 절절한 애니메이션이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다. 한달 생활비 명세표를 숨 쉬지 않고 읽는 남자의 목소리, 영락없이 슬픈 랩이다. 남자가 생활고를 호소하는 동안 호랑이보다 무서운 돈 잡아먹는 여자친구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안절부절못하는 남자는 데이트를 회피하고자 콧소리 섞은 거짓말을 해댄다. 몇번의 승강이 끝에 떨어지는 이별 선고. 그러나 나쁜 남자는 실연 통보에 쾌재를 부른다. 이 나쁜 남자의 이름은 ‘88만원 세대’다. 간단한(그러나 이유있는) 낙서만으로 재기를 보여주는 신통방통 애니메이션. 거짓말 감독 임오정 | 극 | 컬러 | 32분 | 2009년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은 영희와 세상 다 산 것 같은 연희는 둘도 없는 오랜 친구다. 대학 선배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선 두 사람. 그녀들의 손엔 청첩장 대신 수신자 없는 편지가 들려 있다. <거짓말>의 ‘주인없는 편지’는 실은 ‘도둑맞은 편지’다. 헤어지자면서 한때나마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다는 내용의, (사실상) 익명의 편지를 뜯어보고 연희는 뻔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초대받지 못한 결혼식에서 수모를 당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영희는 누군가의 거짓말을 잠시나마 진심이라 믿고 싶었던 연희의 뒷모습을 본다. 연희가 ‘쪽팔려’라고 말할 때, 그건 ‘거짓말’일까 ‘참말’일까. 속주패왕전 감독 이혜영 | 애니메이션 | 컬러 | 17분 | 2009년 사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속주 수련에 나선 기타리스트 박승용, 이라고 주인공을 소개하면 재미없다. 박승용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삼거리기타교습소 원장 쌤 마태풍의 수제자이자(수강생은 달랑 혼자다), 똥통에서 파리와 사투를 벌이며 지옥훈련을 마다않는(전설의 ‘소림기타18괴도권’을 익히기 위해) 의지의 사나이. 그의 입방정은 사부를 외팔이로 만드는 변고를 낳지만, 더 나아가 사부가 혀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한다. 키치와 패러디의 정서로 무장한 이경석의 동명 웹툰이 원작. 갖가지 장르 횡단의 쾌감도 즐겁지만, 쉴새없는 쌍욕과 썰렁한 유머가 더 강력하다. 쿠바의 연인 감독 정호현 | 다큐멘터리 | 컬러 | 72분 | 2009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연인들에게도 해당하는 주기도문이다. <쿠바의 연인>은 발칙하게도 사랑을 시험한다. 한국과 쿠바라는 정반대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 연인들은 자신들이 나누는 사랑의 무게가 얼마쯤 되는지 재본다. 정확한 중량을 확인하기 위해 그들은 발가벗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감독의 의도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치노’(Chino) 소리 듣는 한국 여자는 무작정 쿠바에 갔고, 그곳에서 머물며 만난 쿠바 사람들을 소개한다. ‘카스트로 만세’라고 외치지만 뒤돌아 “12시간 일하고 5달러 버는 삶”이 부럽다고 말하는 쿠바 사람들을 비출 때 다큐멘터리는 ‘푸른 유니콘을 잃어버린’ 인민의 슬픈 눈망울을 감상하는 기록처럼 보인다. 그렇게 낭만의 여행이 끝날 것 같은 지점에서, <쿠바의 연인>은 본색을 드러내고 유턴한다. 택시를 탄 한국 여자의 옆자리엔 폭탄 머리를 한 쿠바 남자가 앉아 있다. 두 사람이 결혼을 약속한 사이임이 얼마 뒤 밝혀진다. 그리고 악마의 씨를 가진 쿠바 남자는 미래의 장모님에게 어서 빨리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국경을 훌쩍 뛰어넘은 사랑이 가능할까. 시종 유쾌하고 저돌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쿠바의 연인>이 증명하고 싶어 하는 명제는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는 아닌 듯하다. 평등을 자위하는 아바나와 경쟁을 추종하는 서울을 오가는 피부색 다른 두 남녀의 ‘대장정연애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진짜 목적은 결혼 팡파르가 아니라 ‘진화하는 혁명’의 가능성 아닐까. 속히 속편이 보고 싶은 다큐멘터리. 조금 불편한 그다지 불행하지 않은 0.24 감독 임덕윤 | 극 | 컬러, 흑백 | 32분55초 | 2009년 먼저 관객은 ‘조금 불편한’ 상황을 감수해야 한다. 중도 시각장애인인 덕윤의 일상을 들여다보려면. 1주일에 세 차례 병원에 들러 혈액투석을 받아야 하는 덕윤을 따라 집 밖으로 나설 때 위험천만한 세상은 흑백 실루엣으로 변한다. 도움을 주겠다는 손은 코브라가 되고, 쌩쌩 달리는 트럭은 탱크 굉음을 낸다. 신기하게도 도중 동정의 시선은 역전된다. 아마도 <이별의 종착역>에 맞춰 덕윤이 휘파람을 불 때 모두들 따라 부를 것이다. 길잡이는 우리가 아니라 어느새 덕윤이다. 직접 출연한 시각장애인 감독은 불행하지 않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는 내기에서 이겼다. <남매의 집> 감독 조성희 | 극 | 컬러 | 43분 | 2008년 어린 남매인 철수와 순이는 지하방에 살고 있다. 그들은 아빠를 기다리는 것 같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텔레비전은 지직거리며 나오지 않고 순이는 바깥에서 누군가가 집 안을 자꾸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아빠는 자기가 돌아오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자꾸 이상한 사람들이 집을 찾는다. 목이 마르다고 해서 문을 열어주었으나 곧 괴이하고 거친 사람들로 돌변한 세 남자는 집 안의 앵무새도 죽이고 마침내는 동생 순이를 납치하기에 이른다. 방 안을 벗어나지 않고 철수와 순이의 집 안에서만 벌어지는 이 영화는 놀랍게도 특수효과 없는 SF에 가깝다. 게다가 영화는 조여드는 압박감으로 곧 찢어질 것처럼 팽팽해진다. 순이를 잡아간 그들은 누구일까.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것일까. 정체 모를 긴장감으로 가득한 영화. 회오리 바람 감독 장건재 | 극 | 컬러 | 95분30초 | 2009년 미숙한 10대들의 감정을 흔히 치기라 부른다.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건 중요치 않다. 10대의 한때는 어설픈 해프닝 혹은 위험한 장난으로 얼룩져 있다고들 여긴다. <회오리 바람>의 태훈을 만날 때 우리는 얼마간 얼굴 화끈거리는 치기를 떠올리며 비웃을지 모른다. 여자친구 미정과 만난 지 100일 기념으로 강원도로 1주일 여행을 떠난 태훈이 서울로 돌아오는 차비가 없어 1만원을 빌리러 터미널 주변을 배회할 때, 거짓말이 들통나 미정의 아버지에게 혼쭐이 난 뒤 대학 입학 때까지 미정을 만나지 않겠다고 각서를 쓸 때, 돈을 벌겠다며 중국집 아르바이트 배달 일을 하다 급기야 오토바이 사고를 낼 때, 태훈은 매번 고개를 푹 숙이고 치기는 더더욱 보잘것없는 모양새가 된다. 그럼에도 <회오리 바람>은 10대들을 치기덩어리라 단정하지 않는다. 치기가 어설프거나 위험한 것은 미숙함이 아니라 절실함 때문이라고 믿는다. 악몽의 현실에 쫓겨 숨이 턱밑까지 차오른 태훈과 미정도 열아홉의 문턱에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헉헉거린 뒤 찾아드는 잠깐의 평온이야말로 어떤 휴식보다 달콤하다는 것을. <회오리 바람>은 태훈과 미정에게, 혹은 그만한 나이의 친구들에게 ‘내 생에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선물한다. “더 하지 못하고 포기했던” 누군가에겐 부러운 선물이기도 하다. <반드시 크게 들을 것> 감독 백승화 | 다큐멘터리 | 컬러 | 94분 | 2009년 인천의 모텔촌에 난데없이‘루비살롱’이라는 인디음악 라이브 클럽이 생긴다. 오랫동안 홍대 인디음악계에서 활동했던 리규영이 차린 곳이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을 것 같은 록음악의 황무지 같은 이곳에 클럽을 만들어놓고도 리규영은 태연자약하게 “홍대에는 클럽데이가 있으니 우리는 모텔데이라도 만들면 된다”고 떵떵거린다. 그의 말이 허풍처럼 들릴 즈음 사건이 시작된다. 홍대에서 활동하던 두개의 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타바코쥬스’가 루비살롱의 일원으로 찾아온다. 영화는 이제 이 두 밴드에 관한 일거수일투족을 그려낸다. “우주에서 온 로큰롤 전도사”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승승장구한다. 실력도 인정받고 유명해지면서 각종 페스티벌의 스타로 급부상한다. 하지만 “홍대 최고의 막장밴드이자 찌질이들의 대마왕”인 타바코쥬스는 매일이 여전히 똑같고 찌질하다. 술에 취해 멤버끼리 싸우는 건 다반사고 공연을 펑크낼 때도 있다. 이 두 록밴드의 엇갈리는 명암을 영화는 따라간다. 게다가 이 영화의 감독은 타바코쥬스의 드러머다. 간단한 마음으로 자기가 아는 친구들을 다룬 다큐멘터리인데, 재미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고 유머가 만만치 않으며 영화의 구성도 재치 만점이다. 때로는 덜컥 가슴 적시는 감동의 장면까지 있다. 스턴트계에 <우린 액션배우다>가 있다면 이제 홍대 인디음악계에는 <반드시 크게 들을 것>이 있다고 말할 만하다. 올해의 가장 쾌활한 영화 중 한편. ACT OF LIFE 감독 임호경 | 극, 다큐멘터리, 실험 | 컬러 | 52분 | 2009년 화자인 나는 죽은 친구 다다의 흔적을 찾아나선다. 그가 떨어져 죽은 아파트 공사장에 가보기도 하고, 생전의 룸메이트를 찾아 죽기 전날 그가 찍었다는 손목사진도 보고, 그가 들렀다는 핑크색 술집의 마담과 대화도 나눈다. 또 그의 죽음을 현장검증이라도 하듯 직접 재연해보기도 한다. “그의 삶 혹은 죽음을 결정”한 사소함의 배후를 파헤치기 위해서다. 하지만 수사는 종결되지 않는다. “당신이 고백한 것들이 왜 구태여 노력해서 고백해야만 하는 것들이 되어버린 거지”라고 자문할 때, 다다는 이미 희미한 기억 부스러기다. 무국적 내레이션을 반주삼은 독특한 레퀴엠. 삶과 죽음의 끝나지 않을 숨바꼭질을 반복 연주한다. 오후 3시 감독 김지곤 | 다큐멘터리 | 컬러 | 24분32초 | 2009년 오래되고 낡은 부산의 한 극장을 영화는 보여준다. 제목 <오후 3시>는 그 극장을 카메라가 들여다보기 시작한 시간을 말하는 것 같다. 초라한 극장에서는 이제는 늙은 영사기사가 혼자 일하고 있다. 손님이 있을 리 없다. 극장은 꼭 초현실적인 장소처럼 포착된다. 하지만 이 극장을 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현재적이다. 현재에 있는 것들이 신기하게도 컷마다 저 추억 속 사진이나 그림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향수로 가득하다. 빠르게 변해가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마지막에 해당할 만한 이 동시상영 극장을 보는 것만으로도 추억에 잠길 만하지만 그걸 포착하는 소리나 색감, 사진적 구도 등은 이를 데 없이 빼어나다. 주목받지 못했던 우리의 삶의 이곳저곳을 평정으로 한번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안내자 같은 영화다. 드라이브 감독 심명훈 | 극 | 컬러 | 11분23초 | 2009년 가죽점퍼를 걸친 남자가 운전 중 휴대폰을 받는다. “여보세요. 네. 출발했습니다. 지금 잠수대교로 가고 있습니다. 가방은 챙겼습니다.” 뒷좌석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인사이드 미러로 보이는 운전자의 눈빛은 음흉하다고까지 할 순 없어도 보통은 아니다. 그리고 흔들리는 십자가! 익숙한 범죄물처럼 운을 떼지만, 이 모든 것이 실제상황은 아니다. 가죽점퍼 사내의 정체가 드러날 때 예기치 않았던 웃음도 터진다. ‘달리고 싶은’ ‘욕구’를 ‘쫓는’ 주인공을 택했다는 점에서 <드라이브>만큼 적절한 제목이 있을까. 여러 번 핸들을 꺾는 <드라이브>처럼, 희망과 절망을 오가는 삶의 박동 또한 시시각각 바뀐다. 땅의 여자 감독 권우정 | 다큐멘터리 | 컬러 | 95분 | 2009년 대학 선후배인 세 여자는 졸업 뒤 곧장 농촌으로 갔다.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꿈이 삶 저편에 있다고 믿지 않았고” 그래서 땅에 투신했다. 그곳에서 만난 동지를 남편으로 삼아 가족도 이뤘다. 10년이 흘렀다. 진주와 창녕과 합천에 흩어져 사는 세 여자는 여전히 농민활동가다. 세 여자의 의지는 더 깊게 뿌리내렸을까. 아니면 흔들리고 있을까. 전반부는 ‘남녀탐구생활’ 농민활동가 편처럼 보인다. “그냥 안 굶어죽으면 되지”라고 하는 소희주씨의 천하태평 발언에 남편은 “지 혼자 나가버리잖아. 같이 활동하면서”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보기 즐거운 언쟁이다. “일이 몸에 붙지 않아” 호미 들면 타박 들었다는 변은주씨의 푸념과 “노총각에게 성은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활동을 보장받았다는 강선희씨의 무용담도 흥미로운 애정표현이다. 농군이 된 세 친구의 거침없는 폭포수 직설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쏠쏠하다. 그러나 <땅의 여자>는 꿈같은 전원일기가 아니다. 누군가는 우는 아이 떼놓고 새벽 일찍 나섰지만 서울 집회에는 막상 가보지도 못하고 주저앉는다. 누군가는 10년 넘는 시집살이 끝에 “내가 이 집 종이야?”라고 참아왔던 속엣말을 터트린다. 누군가는 제 욕심 채우자고 아픈 남편을 병수발 하지 않은 괘씸한 아내라고 손가락질당한다. 그제야 육아와 가사와 논일과 활동을 한데 짊어진 세 여자의 그늘도 비로소 드러난다. 수진들에게 감독 강연하 | 극 | 컬러 | 20분10초 | 2008년 스무살이 넘으면 다른 삶이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교복 대신 유니폼이다. “만날 똑같은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불평하지만 달리 선택도 없다. 아니, 어떻게든 입어야 한다. 그래야 월세 단칸방에서라도 살 수 있다. 대형마트 시식코너에서 일하는 수진만의 처지는 아니다. 지하마트의 다른 코너에도 다른 이름의 ‘수진’이 있고, 화려한 쇼핑몰에도 다른 이름의 ‘수진’이 또 있다. 환상조차 허락하지 않는 현실. 그래서 수진은 수진을 만나 돌을 던진다. 바뀌는 건 없다. 언제나 그 자리, 제자리다. 에스컬레이터 없는 삶에 지친 20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작은 위무의 편지. 복자 감독 정희재 | 극 | 컬러 | 21분40초 | 2009년 삶은 가혹하다. 극단의 선택을 종용하고 나서도 웃으라고 명한다. 삶의 린치는 10대 소녀 복자에게도 예외없이 가해진다. 쫓겨다니던 아버지는 교통사고를 당해 돌아왔다. 빚쟁이 때문에 위장이혼한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냥 내버려두자고 말한다. 다시 함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복자는 울어야 할까, 웃어야 할까. 마지막 장면. 복자는 울음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감는다. 이미 행해진 극단과 앞으로 택해야 할 극단 앞에서 그녀는 아마도 비극은 고작해야 1장이 끝났을 뿐이라고 되뇌일지 모른다. 눈물까지 말라버린 소녀의 얼굴은 이따금 <복자>를 다큐멘터리로 오인하게 만들 정도다. 교미기 Part2-비밀스런 짐승 감독 장은주 | 실험 | 흑백 | 21분54초 | 2009년 섣불리 <동물의 왕국>의 짝짓기를 떠올리진 말자. 검은 옷을 입고 계곡에서 느릿하게 부유하는 여성 혹은 비밀스런 짐승들의 육체만을 반복해서 보여주니 말이다. 어쩌면 <교미기 Part2-비밀스런 짐승>의 문을 열 수 있는 자그마한 비밀의 열쇠는 보여주는 무엇이 아니라 삭제된 무엇일지 모른다. 신비한 의식을 거행하는 검은 유령들의 숲속에서 우리가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것은 남성적인 형상물이다. 모든 사운드는 거세되어 있다. 시각과 청각의 교접을 통한 의미화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인지할 수 없는, 그러나 매 순간 감각하는 비밀스런 짐승들의 관능적인 향연.

[나의 친구 그의 영화] “비이이이즈니스!”를 돌려세운 환영

내가 입체사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2007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펼쳐 보면 알 것이다. 이 칼럼의 내용을 이해하려면 그 소설을 꼭 읽어봐야만 할 것이다(라고 쓰지만, 그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칼럼을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설악산 입체사진첩이 있었다. 부착된 두개의 렌즈를 들여다보면 거기 흔들바위나 백담사 계곡 같은 게 생생하게 보였다. 그건 내가 최초로 매혹된 이미지였다. 이 매혹은 내게는 더없이 중요했다. 입체사진을 영어로 스테레오스코피라고 부른다. ‘스테레오’는 ‘입체’(solid)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입체사진은 두장의 사진 사이의 차이에 의해서 입체로 보인다. 스테레오 사운드 역시 이런 원리로 만들어졌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양쪽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는 차이가 난다. 이 차이는 이 세상에 없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중학 1학년 때, 나는 워크맨으로 처음 스테레오 사운드를 들었다. 광활한 들판에 나 혼자 서서 음악을 듣는 느낌이랄까. 그건 이 세상에 없는 공간이랄까. 감각할 수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스테레오가 만들어내는 그 공간은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국민통합’같은 말이 싫다니까 좀더 어렸을 때, 그러니까 텔레비전은 흑백화면이었고 모든 음악 소리는 모노였던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 내가 본 만화 <걸리버여행기>에는 소인 악단이 직접 들어가서 연주하는 라디오가 나오기도 했다. 아이들 중에는 라디오 속에 진짜 그런 소인 악단이 있는 줄 알고 뜯어보는 친구도 있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나 역시 KBS 김천중계소에서 틀어주는 노래를 듣다가 혜은이가 그 중계소까지 찾아와서 부르는 줄 알고 흥분한 적이 있었다. 여름이면 수영하러 가면서 늘 지나갔던 중계소니 노래가 끝나기 전까지는 달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 말에 어른들은 꽤 웃었다. 그러니 이제쯤은 어린 시절 나를 매혹시킨 건 현실에 육박하는 환영, 즉 스테레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라디오에 모노 사인이 뜨면 견디지 못하고 안테나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사람이다. 나는 민주주의마저도 스테레오의 관점으로 이해한다. 서로의 차이를 통해 만드는 입체적인 사회가 내가 상상하는 민주주의 사회다. ‘난 생각이 좀 달라’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회는 모노 사인이 뜬 라디오보다 더 견디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국민통합 같은 말이 제일 싫다. 그건 경제가 어려우니 흑백TV를 보자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는 못하겠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입체영화라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뛸 정도였다. 크리스마스에나 개봉할 줄 알고 방심하다가 이미 개봉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보러 갈 정도였다. 그런데 웬걸, 들어갈 때 입체안경을 나눠주는 직원이 서 있어야 할 텐데,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광고는 맨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중에 나눠주려는 모양이구나’). 실내등이 꺼지고 나서도 안경을 나눠주는 직원은 없었다(‘이건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입체영화인가?’). 하지만 카메라가 눈 내리는 런던의 거리를 날아다니는 도입부가 시작됐는데도 안경은 없었다. 꼭 그저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는 걸 피력한 것뿐인데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고 구박받는 걸로도 모자라 경찰에 끌려가는 것으로 국민통합에 이바지하는 기분이랄까. 좀 억울했다. 알고 봤더니 입체영화는 지정된 극장에서만 하는 것이었다. 급한 마음에 확인하지도 않고 달려간 게 실수였다고나 할까. 엄청나게 실망했다고 이 칼럼에 쓰게 되리라…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평범한 화면으로 보는 <크리스마스 캐롤>도 충분히 놀라웠다. 이 영화에는 단순한 입체영상을 넘어서는 뭔가가 있었다. 입체영상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실사영화와 구별되지 않는 환영을 봤다고나 할까. 말했다시피 감각할 수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사물들은 그렇다. 그렇다면 이토록 감각적으로 사실적인 영상이라면 이걸 환영이라고 불러도 될까? 이걸 환영이라고 부른다면 실사영화도 환영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적어도 실사와 CG의 차이가 현실과 스크린의 벽만큼 크지 않은 것 같다. 단순한 입체영상을 넘어서는 그 무엇 그런데 뜻밖에도 이 실사와 CG의 경계가 모호해진 상황이 이야기의 핍진성(흐흐흐, 소설 창작 강사 시절, 학생들을 괴롭힐 때 쓰던 단어로구나)에 기여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주제란 무엇일까? 젊어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성장한 탓에 돈밖에 몰라, 툭하면 경제를 살리겠다는 둥 직원에게도 값싸고 질 좋게 일하기 싫으면 나가라는 둥 귀신도 따라하다가 턱이 빠질 정도로 “비이이이즈니스!”라고 떠들어대던 한 늙은 인간이 어느 크리스마스이브에 유령이 보여주는 환영을 보고 개과천선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성패는 노회할 대로 노회한 그 늙은 인간마저도 현실과 오해할 정도로 사실적인 환영을 보여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관용을 베풀지 않은 부자들이 죽고 나서 어떤 처지가 될지 보여주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 지도 벌써 15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서 가난하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느니 차라리 감옥에 보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부자들이 많은 건 아마도 그간 이 이야기에 핍진성이 부족했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로버트 저메키스가 만든 <크리스마스 캐롤>을 보니까 인류가 환영을 다루는 능력은 이제 결정적인 지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스크루지였다면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 같다. 특히 꼬맹이 팀이 죽은 뒤에 계단을 올라가던 환영 속의 밥이 스크루지를 빤히 쳐다보는 장면에서는 내 손발이 다 오그라들더라.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개인맞춤 환영을 만드는 일이겠다. 환영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이렇게 일취월장한다면 조만간 각자가 주인공이 되는 <크리스마스 캐롤>도 만들 것이다. 자신의 과거와 미래가 그처럼 사실처럼 보인다면, 어느 누가 “비이이이즈니스!”라고만 떠들어대겠는가. 갈 곳이 없어서 망루에 올라간 사람들이 불에 타죽어도, 죽고 나서는 차가운 냉동고 안에 누워 있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못된 사람들을 환영으로 뉘우치게 하는 일은 유령들이 했으면 좋겠으나, 유령들은 다 죽었는지 뭐하는지.

[김혜리가 만난 사람] <무한도전> 김태호 PD

속도와 밀도는 공존하기 힘든 속성이다. 거기에 지구력과 자기 혁신까지 뒷받침되는 일은 더 어렵다. MBC 주말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경탄스러운 까닭은 그래서다. 단독 프로그램으로 독립한 뒤 181주, 버라이어티쇼의 한 코너였던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까지 포함하면 5년째 방영 중인 <무한도전>은 기동성과 일정한 완성도를 견지하며 진화해왔다. 예닐곱명의 멤버가 어울려 미션과 놀이로 채워진 짧은 여행을 떠나는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등 후발 리얼 버라이어티들이 인기를 끌고 안착하자, <무한도전>은 포맷의 ‘무한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매주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매뉴얼조차 부숴버렸다. 콘서트를 열고 체전과 디자인 경진대회를 벌이고 독창적으로 고안한 규칙에 따라 도심 추격전을 벌이고 연기자 각자가 작가와 프로듀서가 되기를 시도했다. 게임쇼, 패러디, 공익 캠페인 등 과거 한국의 예능이 축적한 모든 소재를 <무한도전>의 방식으로 변용하는가 하면 급기야 미니 방송국으로 둔갑해 지난 추석에는 하루치 프로그램을 ‘졸속’ 제작했고 1년 동안 틈틈이 벼농사를 지어 ‘이건 뭥미(米)’를 생산했다. <무한도전>이 회심의 기획을 내지를 때마다 시청자야말로 헥토파스칼 킥을 맞은 표정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이건 뭥미?” 매주 새로운 핀볼 기계를 발명하는 것과 같은 고역에 몸을 던지고 있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의 외모는 어딘가 천재 피아니스트를 연상시킨다. 한점에 집중하면 만사를 잊어버려 달걀 대신 자명종을 삶아 먹을 것 같은 인상이다(실제로 대학 시절 과 동기는 학생회 총무였던 김태호가 열차 시간표를 착각하는 바람에 100여명이 막판에 서울역까지 구보를 한 추억이 있다고 들려준다). 김태호 PD의 기획과 연출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좌표를 벗어나는 상상력이다. ‘봅슬레이 국가대표 선발전’,‘댄스 스포츠’, ‘벼농사’ 특집 등 장기 기획은 오락 프로그램에 투여되는 통상적 시간의 범주를 넘었고 좀비 특집 ‘28년 후’는 가장 판타지적인 기획을 통해 방송 제작 리얼리티의 맨살을 드러내버렸다. 주말 저녁 시간대에 상상할 수 없었던 침침한 해상도의 6mm 카메라 화면과 사전지식이 전혀 없었던 연기자의 돌출행동으로 인한 ‘28년 후’ 파국적 결말은 거의 충격적이었다. “모든 재난영화가 지구를 구하고 끝나는 건 아니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방송이 나가고 나서 전국의 시청자에게 분노 바이러스가 퍼졌잖아요? (웃음)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을 절감했어요.” 활자가 아니라 이미지로 사고하는 쪽에 익숙하다는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삼각형을 정사면체의 한면으로 볼 줄 아는 사람만이 그처럼 ‘판’을 자유롭게 뒤집을 수 있다. 조연출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개그맨 송은이는 “감각도 뛰어나지만 따뜻한 연출자다. ‘무리한 도전’ 시절부터 언뜻 보면 몰라도 재미있는 작은 리액션을 놓치지 않는 세밀한 편집이 눈에 띄었다”고 평한다. 밖으로는 부단히 모험을 시도하면서 내부적으로 견고한 유사가족의 안정감을 지켜낸 것도 김태호 PD의 중요한 성취다.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캐릭터의 성년에 이른 6~8명의 고정 멤버들은 터무니없어 보이는 목표 앞에서도 능력의 200%를 발휘하며 어떤 다재다능함보다 긍정과 낙천성이 강력한 경쟁력이라는 교훈마저 전했다. 이제 <무한도전>의 연기자들이 다른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마치 돌아올 집- <무한도전>- 을 두고 밖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건 나뿐일까? <무한도전>의 떠들썩한 표면 뒤에는 숨은 그림도 있다. ‘여드름 브레이크’의 소동 뒤에는 황량한 철거지역의 풍경이 있었다. 심지어 ‘식객’편에 대해서도 김태호 PD는 “급식예산을 삭감하는 한편에서 물량 공세를 해법으로 생각하는 한식 세계화 사업이 추진된다. 세계인들이 우리 생각만큼 한식을 잘 알지 못한다는 걸 은연중에 짚어주려는 생각도 있었다”고 밝힌다. 그래서 <무한도전>은 집중력을 요하는 쇼다. 방을 닦으며 건성으로 눈길을 던져서는 100% 즐길 수가 없다. <무한도전>이 ‘피곤하게’ 만든 건 시청자뿐만이 아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김병욱 PD는 “<무한도전>은 예능 분야 종사자들을 엄청나게 피곤하게 만든 것 같다. 이제는 모두 사력을 다해 찍고 혼신을 다해 편집하지 않으면 시청자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관전평을 들려준다. 토요일 오후 약속 장소에 나온 김태호 PD의 빨간 헤드폰 속에는 조용필의 노래가 플레이되고 있었다. 복고 취향에 꽂힌 걸까? 속 편한 짐작이었다. 그는 조용필의 음악으로 이루어진 <맘마미아!> 같은 뮤지컬”을 1년이 넘게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김태호 PD의 휴일이었다. 김혜리: <무한도전>은 걱정해주는 사람이 굉장히 많은 것 같습니다. 매주 토요일 저녁 방영이 끝나자마자 곱씹을 시간도 없이 경쟁적으로 좋고 나쁨을 평하는 인터넷 기사가 쏟아져나옵니다. 최근 ‘식객-뉴욕’ 편 방영 뒤 명현지 셰프와 정준하씨가 벌인 갈등을 놓고 한창 시끄러웠는데요. 김태호: ‘식객’ 특집 첫회에서 허영만 선생님의 <식객>에 나온 “세상의 맛있는 요리 숫자는 세상에 있는 어머니 숫자와 같다”는 말을 인용했는데요. 저희가 볼 때 정준하씨한테 김치전은 어머니가 해준 그 맛이었고 셰프는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김치전을 생각한 것 같아요. 누가 틀린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건데 두분 다 고집이 있어서 생긴 일이죠. 현장에서는 셰프의 지위가 위니까 결과적으로 하극상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김혜리: 두 사람의 불편한 분위기가 미국식 리얼리티쇼에서 흔히 보는 갈등 요소라고 여겼는데 의외로 파장이 커서 놀랐습니다. 한국의 리얼리티쇼에서는 캐릭터들이 밉상이 되는 데에 한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 시청자가 어쨌거나 그들이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이 강한 것 같아요. 김태호: 선한 민족이라 그런가봐요. 착한 인물로 구성된 리얼 버라이어티는 많잖아요. 처음부터 완성된 사람들은 <무한도전>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캐릭터를 가진 유재석씨가 전체 이미지의 4/n가량을 점하고 있기도 하고요. 우리 연기자는 처음에 누가 봐주지 않던 데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오는 데 4, 5년이 걸린 건데 가끔 원래부터 스타들이었다고 착각하세요. 중의적이고 함축적인 ‘<무한도전>스러운’ 자막 김혜리: <무한도전>은 팬덤이 활성화된 대표적 프로그램입니다. 얼마나 피드백을 하시나요? 김태호: 방송 직후에는 흥분 상태에서 비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하루, 이틀 지난 다음에 시청자 게시판을 봐요. 10대부터 30대를 타깃으로 생각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보고요. 최근 대학생 크리에이티브팀을 모집했는데 4천명이 이력서를 냈어요. 아이디어를 뽑아내려는 게 아니라 젊은이들의 생각을 공유하려는 목적이에요. 일종의 아카데미 같은 느낌으로 저와 제작진이 직접 참여해서 운영하려고 해요. 저희로선 일의 능률이 떨어질 수도 있지만 교류를 통해 저희 생각도 젊어질 수 있겠죠. 김혜리: 일반인을 대상으로 치러진 ‘돌아이 콘테스트’특집을 보면서도 <무한도전>의 예비군 인력 풀을 형성하려는 게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김태호: 기본적으로 연기자와 스탭으로 이뤄진 ‘<무한도전> 가족’이 있지만 그 테두리를 많은 사람이 겹겹이 둘러싸야 외부의 충격이나 내부의 폭발이 있어도 충분히 감쌀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돌아이 콘테스트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라는 영화처럼 누가 보기에도 평범한 학생, 회사원들인데 알고보면 ‘또라이’인 사람들을 생각한 거예요. 멀쩡히 지내다가 어느 날 하늘에 ‘또라이’ 마크가 뜨고 홍철이가 드디어 우리가 활약할 때가 됐다고 선언하면 “나는 돌아이야!” 하면서 결집하는 거죠. (좌중 폭소) 김혜리: <무한도전>에서 PD의 존재감이 부각된 건 자막의 구실이 큽니다. 상황요약, 연기자에 대한 연출자의 말대꾸, 시청자를 향한 PD의 ‘구내방송’ 같은 기능을 두루 하면서 화면에 다섯 번째 차원을 보태는 느낌이고, 화면구성이 자막으로 인해 만화책처럼 보이기도 해요. 자막이 또 다른 오락의 소스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했습니까? 김태호: 조연출 시절 1시간 분량이면 A4 용지 100장의 자막을 일일이 손으로 적었어요. 일주일이면 이틀을 소모하는 그 작업이 아무 창의력없이 단순한 노동이 된다면 굳이 우리가 PD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어요.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대단한 도전’ 코너부터 자막을 많이 썼는데, 한번 곱씹어볼 수 있는 자막을 쓰려고 했어요. 캐릭터를 부여하고 상황을 요약하면서 뒤에 올 코미디를 예비하는 발단과 전개를 짚어주는 거죠. 시청자가 “저 못난이들 또 저러고 있네”하고 비스듬한 자세로 보다가 “어? 내 마음이 들켰네?”하고 놀라서 주의깊게 보도록 접근한 거예요. 김혜리: 요즘은 직접 자막 작업에 손대지 않나요? 김태호: 지금은 후배들이 쓰죠. 일단 저와 두 후배 PD, 조연출까지 일곱명이 화요일에 1차 시사를 하면서 자막과 CG에 관한 생각을 공유해요. 이야기를 쥐락펴락할 방법을 찾는 거죠. 목요일에 1차 자막 넣은 편집본으로 웃음 더빙을 하며 모니터를 한 다음 <무한도전>스럽지 않은 자막을 걷어내고 수정하는 작업을 해요. ‘<무한도전>스러운’ 자막이란 너무 직설적이지 않고 중의적이고 함축적인 자막을 말해요. 그게 어르신 시청자에겐 어려운 요소일 수도 있죠. 김혜리: 하긴 <무한도전>은 시청률은 높지만, 간혹 전 국민이 알 법하지 않은 문화적 레퍼런스들이 들어가 있어요. 그래서 TV를 틀어놓고 귀만 기울여서는 흐름이나 재미를 놓치기 쉬워요. 김태호: 저희 부모님도 상당히 어려워하실 때가 많아요. 그러나 다른 프로그램과 비슷하게 가면 예능이 다 같이 먹을거리가 없어져요. 스스로 유목민이라고 부르는데 다 같이 풀을 뜯는 상황에서 저희라도 고개를 들어 다른 풀밭을 찾아보지 않으면 여기서 고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방송사 입사한 이래 3년 전부터 현재까지가 예능이 사내외적으로 가장 높이 대우받는 시기라고 느껴요. 예전 예능국은 일은 뼈빠지게 하면서 부서간 서열로는 밑바닥인 이미지였어요. 지금은 경영과 마케팅, 수익을 따지는 시대가 되면서 드라마와 예능이 맨 위가 됐죠. 지난해에만 <무한도전>이 낸 순수익이 100억원이 넘는다고 들었어요. 광고회사에 따르면 이제는 얼마나 많은 시청자가 보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보느냐가 중요한 시대가 됐다고 해요. 동아일보와 제일기획에 가지 않은 이유 김혜리: 충청남도 대천이 고향입니다. 바다가 가까운 동네였나요? 김태호: 마음먹으면 20분에 시내를 한 바퀴 도는 곳이었어요. 해수욕장은 버스로 삼십분 거리였는데 어머니가 어디선가 제가 물에 빠져 죽을 수 있다는 점괘를 보셔서 어려서는 바다가 금지구역이었어요. 어쩌다 몰래 안 들키고 놀고 왔다 싶으면 옷을 벗을 때 모래가 주르륵 흘러나왔죠. (웃음) 프로그램에서도 대천의 이미지를 가끔 표현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언제인지 모르지만 나중에 돌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김혜리: 텔레비전을 많이 보는 편이었나요? 김태호: 예. 집에서 잘 나가지 않는 아이였어요. 여섯살 무렵에 나도 저런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 PD가 되는 꿈을 많이 꿨어요. 중·고교 시절 그 꿈을 잊었다가 대학원서 쓰면서 원래 PD를 하고 싶었다는 걸 기억해냈죠. 지금도 집에서 엄마가 보시는 가요 프로의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엄마와 누나 옷을 뒤져서 의상을 흉내내 입어본 기억이 스쳐가요. 누나 셋에 여동생이 하나거든요. 대학 시절에도 TV 보는 걸 좋아해서 밤 10시면 드라마 보러 들어갔다가 다시 약속 장소에 나가기도 했어요. (웃음) 김혜리: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선배와 동기 친구에게 들었는데, 신입생 때 “동남아 순회 공연을 마치고 귀국했다”고 말했는데 다들 믿어버렸다면서요? (웃음) 김태호: 당시 제가 얼굴이 까맣고 말랐었는데 마이클 잭슨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수능시험 본 이튿날 미용실 가서 잭슨 머리 해달라고 했거든요. <데인저러스> 즈음에 앞머리 한쪽으로 흘러내린 머리 있잖아요. 그런데 하고 보니 옆집 아줌마 머리하고 똑같은 거예요. (좌중 폭소) 나중에는 변진섭 머리처럼 풀렸고요. 입학하고 교환학생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는 약 파시고 난 텀블링하고 여동생이 앞에서 돈 받았다”고 했더니 약 한달간 다들 믿더군요. 김혜리: 광고 동아리에서 활동하셨죠? 무엇을 배웠나요? 김태호: 15초 안에 극명하게 메시지나 감정을 확 전달해줄 방법을 모색한 고민이 많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지금도 후배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무한도전>은 웃음 rpm(분당 회전수)이 높아야 해”라고 말해요. <해피선데이-1박2일>이나 <일요일이 좋다-패밀리가 떴다>는 앞에서 천천히 흐르다가 마지막에 웃음을 줘도 되지만 우린 1분에 2~4번은 웃음을 줘야 한다는 게 있어요. 김혜리: <동아일보> 입사시험을 최종까지 합격했는데 포기하고 MBC에 지원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한 시기에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김태호: 제가 활자 습득력이 떨어지거든요. 글자를 읽고 이해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예를 들어 <한겨레>를 완독하려면 6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기억은 보통 이미지나 화면으로 해요. 당시 <동아일보> 시험문제는 이메일인가 인터넷의 폐해를 논하라는 것이었는데 컴퓨터 화면에 이메일 프레임을 그려서 메일을 하나 썼어요. 여자친구한테 사과하는 내용을 잘못 보내서 바람 피우다 들킨 것으로 오인받는 상황을 가정했죠. 인턴 합격자 12명에 들었다고 8월20일에 출근하라는 연락이 왔는데 어째 남의 옷 입은 느낌만 들고 한숨만 나오는 거예요. “나 글 쓰는 건 싫은데…”싶고. 정장을 입고 오라는 지시도 마음에 걸렸어요. 결국 “내일 못 갈 거 같습니다”라고 전화했더니 “왜요?” 묻더라고요. “마음이… 안 내키네요”라고 대답했어요. (좌중 웃음) 그 전화 끊고 울었어요. 인생을 그르친 게 아닐까 두려워서요. 일단 다니다 전직을 도모할까도 생각했지만, 선배들 보면 그런 경우 백이면 백 첫 회사에 머무르더라고요. 김혜리: 한데 SBS는 원서내는 날짜를 놓쳤다면서요. 김태호: 오늘까지 접수니 자정까지 하면 되겠거니 믿고 친구와 어울리다가 집에 왔는데 저녁 8시에 마감했더라고요. 그날 같이 논 친구는 이듬해 SBS에 들어갔죠. (웃음) 남은 회사가 MBC와 광고회사 제일기획이었어요. 제일기획은 최종까지 갔는데 재학증명서를 빠뜨렸어요. 인사부 과장님이 다음날 퀵서비스로 보내면 받아주겠다고 했는데, 어린 생각에 설마 재학증명서 없다고 떨어뜨릴까 싶어 안 보냈더니 떨어졌죠. 그냥 정이면 될 줄 알았어요. 서로 눈을 바라보며 얘기했으니까…. (좌중 폭소) 사회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죠. MBC에는 노란 머리에 피어싱을 한 차림으로 면접을 보는데 면접관들이 옷 어디서 샀냐고 웃으며 묻더라고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저렇게 못생기고 튀는 애들이 일은 잘한다고 했대요. 난생처음 발급한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리면서 백화점에서 너무 예쁜 바지를 바라보며 망설이고 있었는데 합격통보를 듣자마자 바지를 산 기억이 나요. 김혜리: 다들 헙수룩한 조연출 시절에도 개성적인 옷차림이 눈에 띄었다고 들었어요. 방송사도 회사인데 옷을 선택할 때 전혀 눈치를 보지 않습니까? 김태호: 너무 옷을 편하게 입으면 사람도 편해지니까, 긴장감을 주고 싶어 그날그날 제 기분과 어떤 촬영이냐 하는 컨셉에 맞게 입어요. 가령 패션쇼편 촬영 같으면 저도 격식있게 정장 입고 가죠. 어느 해인가는 8월31일에 달력으로는 아직 여름이구나 싶어서 하와이안 셔츠랑 반바지 입고 비치볼 들고 가서 편집실에 파라솔 펴놓고 편집했어요. 그날그날 스스로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힘든 경우가 많거든요. 근데 자꾸 화면이 파란색으로 보여서 흠칫 놀랐죠. 선글라스 낀 걸 잊고. (웃음) ‘루저들의 외인구단’식 컨셉으로 유재석과 의기투합 김혜리: 조연출로서 <일요일 일요일 밤에> <논스톱4> <코미디하우스> 등을 거치셨습니다. 무엇을 훈련하고 습득한 기간이었나요? 입봉하면 이런 색깔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구상도 있었을 텐데요. 김태호: 먼저 <섹션 TV연예>를 했는데 연예 프로 PD의 일은 리포터에 가까워서 주체적으로 내용을 정할 수 없었어요. <느낌표>에서 7, 8개월 일했는데 일주일에 하루 집에 들어오는 생활이었어요. 마늘과 쑥을 먹던 시기죠.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편집해서 선배한테 보여드리면 혼나고 다시 금요일까지 완성해놓고 주말에는 가출 청소년들 찾아다니고. 그즈음에는 회의실에 메인작가랑 둘이 앉아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니, 저 여자는 와이프가 왜 밥 먹자는 말을 안 하지?” 하도 같이 붙어 있으니까 부부처럼 느껴지는 거죠. (좌중 폭소) 그 다음 <일요일 일요일 밤에>를 갔는데 편집 잘하는 친구 왔다고 선배들이 손을 뗐어요. 하지만 그때는 힘들어도 재미있었어요. 잘했다고 박수쳐주니까요. 그러다 스물아홉 되던 해 연말에 쓰러졌어요. 열흘 정도 입원하면서 이제 서른인데 이 직업을 앞으로 계속해야 할지 고민했어요. 디자인을 공부해볼까 싶기도 했고요. 결국 5년만 이 회사에서 일해보자 했는데 올해가 딱 5년째죠. 김혜리: <무한도전>에 투입된 것은 <강력추천 토요일>의 한 코너인 ‘무리한 도전’ 시대부터였나요? 아니면 스튜디오로 들어온 <무한도전-퀴즈의 달인>(‘거꾸로 말해요 아하’ 게임을 중심으로 한 코너)부터인가요? 김태호: 2005년 10월 <강력추천 토요일>의 ‘무모한 도전’을 이어받아 ‘무리한 도전’으로 바꾸고 12월에 실내 스튜디오로 들어와 <무한도전-퀴즈의 달인>으로 넘어갔어요. 촬영할 때보다 결과물의 재미가 덜해 시스템 문제일까 캐릭터 문제일까 고민하다가 원점부터 시작하자 싶어 캐릭터를 명확하게 잡을 수 있는 스튜디오로 들어왔어요. MBC로서는 최초로 연기자 한명당 한대의 카메라를 배치했어요. 예컨대 야외에서 노홍철씨가 작게 말하는 멘트가 아주 시적이고 창의력 있는데 풀숏에서는 소화가 안됐거든요. 예능하면 무조건 카메라 한대 주던 때였는데 무조건 일곱대 이상은 있어야 한다고 고집해서 덕분에 인사위원회에 회부될 뻔했어요. 김혜리: 유재석씨는 <무한도전> 이전에도 <외인구단>이나 <감개무량> 등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는 프로를 했었죠. 유재석씨와는 언제 처음 인연을 맺었나요? 김태호: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일할 때 그간 고생했다고 선배가 어떤 프로그램을 하고 싶냐고 물었거든요. “유재석씨랑 하고 싶다. <토요일>로 보내달라”고 해서 처음 만났죠. 유재석씨는 원래 ‘루저들의 외인구단’식 컨셉에 애착이 있었어요. 얼마 전 유재석씨가 그러더군요. 자신의 머릿속에 언제나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그림이 있었는데 그걸 현실로 만들어준 게 저라고. 저 역시 미국 다녀온 직후 영화 <엑스맨>처럼 초능력이 아니라 ‘저능력’을 하나씩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파워레인저처럼 활동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고요. 김혜리: ‘무모한 도전’, ‘무리한 도전’, ‘퀴즈의 달인’을 거쳐 <무한도전>으로 독립해서 180회를 만드셨습니다. 어찌 보면 시즌제이되 시즌 사이에 휴식기가 없는 시즌제였던 셈인데요. 김태호: 드라마는 16부작, 24부작을 하면 끝을 정해놓고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예능은 그게 없어요. 재미있다고 박수치던 분들이 그 손으로 손가락질을 해야 끝나는 게 예능이에요. 재미가 시들고 저거 왜하냐고 사람들이 화를 내야 끝나는 것이 슬픈 현실이에요. 그게 싫어서 사장님께 청을 드렸어요. 2008년 3월까지만 방영하고 적어도 3개월은 쉰다는 계획이었죠. 휴식기 동안 쉬는 게 아니라 배낭 하나씩 메고 6mm 카메라 들고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돌고 오겠다.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를 우리 그림으로 찍어보고 마추피추에 가서 돌을 직접 등에 지고 날라보겠다. (웃음) 그런데 연초가 되니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다는 전갈이 오더라고요. 그 뒤로는 한동안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연기자들도 체력이 바닥나서 <무한도전>만 빼고 다른 프로그램을 다 접겠다고 한 적도 있었어요. 박명수씨는 “난 하나 해선 안돼”라고 했지만. (웃음) 실행되진 못했죠. 캐릭터는 만들어진 것을 주워모으는 것 김혜리: 시청자 입장에서는 2008년 6월 110회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부터 <무한도전>의 르네상스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10회 이후로 여타 리얼 버라이어티와 확연히 구별되는 포맷을 정립한 특집이 이어졌어요. 김태호: 그맘때 연기자들도 어깨가 처져 있었는데 ‘돈가방’과 ‘좀비’특집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어요. 그해 2월 하하 게릴라 콘서트 끝나고 침체기가 있었거든요. 3월 인도 특집은 현지 프로덕션에 사기를 당하기도 했어요. 촬영의 편의를 위해 인도 국영방송에 관련된 프로덕션과 계약을 했거든요. 나무에 10년째 매달려 사는 사두, 평생 앞구르기만 하는 기인 등을 다 섭외해줄 수 있다고 했고, 발리우드 댄서들도 섭외해 뮤지컬 장면을 찍기로 계획했어요. 그런데 촬영 첫날 사두가 왔는데 너무 평범해 보이고 요가를 해보라니까 다리도 못 찢어요. 이튿날에는 두 번째 기인이 왔다는데 보니까 어제 온 그 사람이 저쪽에서 가짜 수염을 붙이고 있는 거에요. (좌중 폭소) 알고 보니 기인 6명이 다 같은 사람이었어요. ‘하나마나 송’(<무한도전> 멤버들의 별명을 소개하는 노래)을 인도어로 편곡해서 뮤지컬을 찍는 날은 한 무리의 여성이 트럭에서 내리는데 할머니, 애 업은 아주머니 등 동네 아낙들인 거예요. 봄까지 상당히 힘든 시기였어요. 김혜리: 매회 아이템을 연기자들이 정말 모르고 오나요? 아니면 유재석씨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인가요? 매회 이번에는 얼마나 알리고 숨길 것인가에 대한 감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김태호: 모르고 접근해야 하는 아이템은 정말 비밀로 하고, 굵직한 아이템은 유재석씨에겐 얘기하는 경우가 있어요. 아무리 리얼이 재밌어도 때로는 마음가짐의 준비 없이는 재미없는 기획이 있으니까요. 절대 얘기하면 안되는 멤버는 박명수, 정준하, 정형돈인데 알면 꼭 연기에 표가 나서죠. (웃음) 김혜리: 6명 내지 7명의 고정 캐릭터들에게 몇 배수의 별명을 지어주었습니다. 고정된 인원의 캐릭터를 변주하는 효과인가요? 김태호: 캐릭터의 수명은 분명 있어요. 유재석씨 경우가 가장 객관적인 인물이라 캐릭터 찾기가 제일 힘들어요. 이를테면 회전목마의 말에는 여러 색을 칠할 수 있어도 돌아가는 축이 되는 기둥에는 색칠하기가 애매한 거죠. 박명수씨는 어쩌면 제일 현실적인 캐릭터인데 그게 외모에도 잘 맞아요. 정형돈 캐릭터도 사실적이죠. 본인이 “난 캐릭터가 없어. 못 웃겨” 한탄하곤 했는데 네거티브 전략을 쓰자고 했어요. 못 웃긴다고 프로그램에서 자꾸 야단치면 <오즈의 마법사>의 겁많은 사자 같은 못 웃기는 개그맨 캐릭터가 되지 않겠냐고. 그런데 요즘엔 결혼하고 부인 덕 볼 거라는 자신감이 커져서 여유를 부리고 있어요. (웃음) 와이프가 손금을 봤는데 한국 7대 손금이라나요. 노홍철씨는 머리가 정말 좋아요. ‘나 잡아봐라’ 특집 같은 경우 홍철씨 아니면 단선적으로 흘러갔을 이야기가 그가 보태는 변수로 인해 판이 커졌죠. 김혜리: 별명으로 캐릭터를 변주하고, ‘체인지’편처럼 서로의 캐릭터를 바꿔입기도 했고 아예 권력관계를 재편하는 ‘박반장 3주천하’도 있었어요. 이정도면 가능한 변용은 다 해본 게 아닐까요? 김태호: 캐릭터는 어차피 제작진이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 것을 주워모으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아예 제가 빠지는 안도 이야기했어요. 예를 들어 <북극의 눈물> 감독께 맡겨본다거나 류승완 감독이 들어와서 해본다거나. 류 감독에게 말씀드렸더니 버라이어티를 할 자신은 없고 <무한도전>팀을 데리고 종일 찍으면 10분짜리 단편은 나오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그 제작과정의 메이킹을 만들면 충분히 협업이 되지 않을까 해요. 올해는 외부와 협력 프로젝트를 활성화한 해였어요. 2, 3년 전에는 당시 예능의 클리셰를 바꾸면서 만들었는데 지난해부터는 아예 환경을 변화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캐릭터가 이미 형성된 상황에서 인물끼리 충돌하는 건 이미 재미가 없거든요. 심지어 저희 멤버가 없는 <무한도전>도 생각해볼 수 있고요. ‘외전’도 생각해봤어요. 그동안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나온 관계들, 예를 들어 ‘여드름 브레이크’의 유 형사와 정 형사의 ‘두 형사 이야기’, ‘여드름 브레이크’에서 탈주한 세 죄수의 후일담을 만드는 거죠. 디즈니 월드도 미키마우스에서 시작했지만 다른 캐릭터가 늘어나면서 피라미드 조직처럼 확장됐잖아요. 하나의 세계를 만들고 싶어요. <무한도전>은 매뉴얼이 없다 김혜리: <무한도전>은 <라인업>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등 여러 리얼 버라이어티의 후발 주자가 등장하자 기존 틀을 스스로 거의 깨버렸습니다. 만약 후발 주자가 없었다면 <무한도전>은 다른 진화의 궤적을 그렸을까요? 김태호: 이제 저희는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직업 체험을 해도 그냥 하루 경험으로 끝낼 수 없고 에어로빅 특집을 해도 한회 재미나게 배워보고 마지막 도전 하나로 마무리할 수가 없어요. 시청자가 저희에게 기대하는 건 뭘 했으면 대회에 나가든지 전국구적 성취감을 느끼게 해주는 거예요. 확실히 다른 프로그램의 존재가 이런 발걸음을 빠르게 만들었어요. 먼저 시작한 입장에서 저희가 한 아이템은 다른 프로에서 할 수 있지만, 그 반대는 허용되지 않아요. 김혜리: 멤버들이 디자인에 도전하는 ‘프로젝트 런어웨이’편에서는 케이블TV의 <프로젝트 런웨이 코리아>를 인용했습니다. 케이블에서 볼 수 있는 국내외 리얼리티쇼 가운데 자극을 받는 프로그램이 있습니까? 김태호: <프로젝트 런웨이>는 국내 프로그램이 방영되기 전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지난해에는 미국의 <프로젝트 런웨이>에 가서 인턴으로라도 일해보고 싶다고 메일을 보내기도 했고요. 해외 프로덕션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세팅이 확실해요. <빅 브러더> <서바이버>를 만든 네덜란드의 엔데몰사도 포맷을 비즈니스 모델로서 세계 각국의 지사를 통해 팔아요. 1, 2년 전 해외에서 <무한도전>의 포맷을 사겠다고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매뉴얼을 요구해요. 그런데 매주 원점에서 시작하는 우린 매뉴얼이 없거든요.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정말 몹쓸 프로그램이다”였어요. (웃음) 김혜리: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엑스맨> 프랜차이즈를 사랑하면서도 커리어의 6년을 바친 것에 대해 불안감을 토로한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김태호 PD도 5년째 <무한도전>에 매달리면서 그런 불안이 있을 텐데요. 아마 그 때문에 같은 프로그램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는 게 아닐까요? 김태호: 원래 가장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은 시상식 같은 쇼였어요. 그런데 막상 방송국에 들어와보니 매우 힘든 작업이고 기회도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무한도전> 하면서 음악 쇼, 시상식, 영화 다 해봤죠. (웃음) 솔직히 PD의 평균수명이 입사 뒤 5년은 조연출하고 현장에서 딱 10년 뛰면 데스크로 가거든요. 전 자칫하면 <무한도전>만 하다가 데스크로 물러날 수도 있는데 누가 제 경력을 챙겨줄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하고 싶은 걸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무한도전>의 색깔을 유지하는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것, 연기자들이 해보고 싶은 걸 담아내며 위안을 구하지 않으면 정말 소모품밖에 안되는 거 같아요. 가장 경계하는 것은 ‘자뻑’ 김혜리: 마이클 잭슨이 타계했을 때 통상의 뮤직비디오 대신 <빌리 진> 공연 영상을 프로그램 말미에 넣어서 화제가 됐습니다. 김태호: 마이클 잭슨을 가슴에 안 품어본 사람이 있을까요? 학창 시절 곳곳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이에요. 고마운 사람한테 감사 표시를 하고 싶었어요. 가장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둘이서 야간자습 시간에 땡땡이치고 늘 하던 일이 레코드점에 가서 발매 안된 걸 뻔히 아는 잭슨의 DVD가 나왔는지 괜히 물어보고 떡볶이 먹는 거였어요. 근데 그 친구가 고3 앞둔 겨울방학에 잭슨의 새 뮤직비디오가 출시된 것도 못 보고 자살을 했어요. 대학 입학 뒤 <넘버 원>이 나왔을 때 친구가 걸어 들어간 강에 던져주고 왔어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을 보면서 그 사람의 섬세하고 시적인 말투 때문에 마음이 아팠어요. 리듬을 아침 햇살 속에 겨우 몸을 일으키는 느낌에 비해 설명하고, 너무 큰 음향을 주먹을 귀에 쑤셔박는 것 같다고 표현하는 그런 사람한테 사람들의 막말이 얼마나 송곳처럼 들어갔을까요. 김혜리: <무한도전>이 시작 화면에는 12살 시청가 표지판을 하하씨의 캐릭터가 들고 있습니다. 그가 군대에 갔을 때 “하하가 올 때까진 어떻게든 하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연기자와 연출자의 실무 관계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는 이 우정은 어떤 의미인가요? 김태호: 형들은 나이와 가족이 있다 보니 다치는 걸 꺼리지만 하하는 비난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어요. “넌 PD 마인드를 가진 연기자야. 내가 고마워하는 걸 알아줘”라고 늘 말하곤 했어요. 실제로 그가 떠난 다음 타격이 오고 시청률이 떨어졌을 때 그동안 비난했던 분들에게 “그것 보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었어요. 내년 봄에 돌아올 텐데 소지섭처럼 몸을 한달 동안 만들어오겠대요. 뭘 위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웃음) 연기자에 대한 제 애정이 남다르다면 저의 사람 대하는 방식 때문인 것 같아요. 먼저 못 다가가는 성격이라 누가 손을 내밀면 꽉 잡아요. <무한도전> 연기자들은 저한테 양손을 내밀어준 사람이니 진심으로 대하고 고민도 나누고 슬럼프라면 처방도 같이 내리고 싶어요. 한 연기자가 촬영 전날 밤 어머니가 중병 진단을 받았다고 전화를 했을 때는 제작비 손해를 감수하고 촬영을 취소했어요. 그럼으로써 한번은 잃는 게 있겠지만 저는 연기자의 신뢰를 통해 더 많은 걸 얻는다고 생각해요. 김혜리: 정준하씨가 접대부 고용 술집 경영에 연루됐다고 비난받았을 때 개의치 않고 멤버로 함께 가기로 한 것은 우정보다 작은 문제라고 봤기 때문인가요? 김태호: 저희가 정준하씨와 만난 자리에서 진실을 말해달라고 청했고 그는 자기를 믿어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진실이라 믿고 밀고 나가겠다고 했고 만약 진실이 아닐 경우는 당신도 나도 틀린 거다라고 이야기했어요. 단순히 친분 때문에 무시하고 가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김혜리: 최근 유재석씨 소속사의 외주제작 문제와 맞물려 유재석씨가 <무한도전>에서 하차한다는 설이 보도됐고, 이어 유재석씨가 <무한도전>을 위해 소속사를 바꾸지 않겠냐는 추측도 돌았습니다. 김태호: 저나 유재석씨는 모르는 일이었고 소속사쪽에서 보도자료를 낸 것 같아요. <무한도전>의 외주제작은 3, 4년 전에 논의됐다가 MBC 내부적으로 밖에 주지 않는다는 결론을 냈어요. 지금 다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 소속사쪽에서 MBC쪽에 뭔가를 제의하고 싶은 게 있어서가 아닐까요. 우리 문제인데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논의하고 있으니 이상하게 느껴져요. 김혜리: MBC 예능의 전통적 특징은 공익성과 휴머니티의 강조입니다. <무한도전> 역시 ‘사랑의 도서관’, 달력 만들기 등 봉사와 기부 컨셉의 기획을 비롯해 ‘벼농사’ 특집, 자영업자 살리기를 표방한 ‘박명수의 기습공격’을 만들었습니다. 공익성을 강조하는 방법도 자선의 형태부터 사회적 약자의 시선을 보여주는 접근법까지 다양할 텐데요. <무한도전>은 이 부분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나요? 김태호: 저희가 제일 경계하는 것이 ‘자뻑’이에요. 우리가 높은 데에 있고 베푸는 방식으로 나누는 것이죠. <느낌표>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러브하우스’를 하면서 일종의 거래가 아닐까 고민했어요. 어려운 사람의 신분을 노출하고 슬픔을 다시 끄집어내 상처를 보여준 다음 그 ‘대가’로 집을 지어주고 도움을 주는 게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었죠. 가출 청소년을 찾아다닐 때, 딸을 찾아나선 아버지가 속옷 바람이어야 하는데 제대로 옷을 입고 나와서 헐레벌떡한 느낌이 없다고 선배한테 야단맞은 일이 있어요. 전 표정만으로 다 보여줬다고 생각했고요. ‘러브하우스’도 방송국에서 간다고 말씀드리면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화장도 하고 계신데 리얼함이 떨어진다고 지우라고 시키는 일이 있었어요. 그런 게 너무 싫어서 공익은 다시 안 한다고 결심했는데 <무한도전>을 하다 보니 어떻게든 나누고 싶었어요. 3, 4년 전 연말 방영분에서 몰래 어려운 분들의 집 앞에 선물을 놓고 왔죠. 김혜리: 그런데 도움받은 분들의 반응을 보여주는 장면이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김태호: 그분들을 노출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아침 집 앞의 용달차를 보았을 때 가족의 아버지가 모든 걸 함축하는 리액션을 하셨어요. “오, 하나님!” 하는 한마디였죠. 치킨집과 삼겹살집을 찾아간 ‘박명수의 기습공격’은 ‘신동엽의 신장개업’을 저희 방식으로 새롭게 접근한 거예요. 거기서 음식점 주인, 먹으러 간 운동선수들, 돈을 쓰는 박명수, 어느 하나 밑지는 장사가 아니거든요. 초대된 선수들은 잘 먹어서 좋고 장사하시는 분들은 불로소득이 아니니까 떳떳하게 돈을 받을 수 있고 저희는 기쁨을 나눠서 좋고 세 가지가 결부돼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공익도 거품은 빼고 진실을 돋보기처럼 확장해서 보여주는 쪽이 맞지 않나 싶어요. “휴대폰 꺼놓고 프로그램만 만드는 게 소원” 김혜리: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 정국에서 자막으로 정치적 코멘트를 넣었다고 화제가 됐고 ‘여드름 브레이크’편에서 철거지역을 배경으로 택해서 주목받았습니다. 그와 같은 세부적 선택을 할 때 망설임은 없나요? 김태호: 저는 한국사회에서 보통 청년으로 자라 군대 다녀오고 대학 졸업해서 매일 신문을 읽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그런 보편적 시각을 담은 자막인데 반대쪽 편향의 시선을 지닌 사람들이 그것을 편향된 정치적 견해라고 봤어요. 그 정도 표현을 주저하는 상황 자체가 도리어 새로운 것 같아요. 불과 3, 4년 전에는 대통령 흉내도 냈잖아요? 빨갱이라고 부르는 협박전화도 받았어요. 김혜리: 예능이 드라마보다 더 사회 현실과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이신가요? 김태호: 특히 버라이어티가 요즘 현실 속으로 많이 들어가잖아요? 그러다보면 만나는 시민, 찾아가는 장소의 현실과 고민과 동떨어져 있을 수 없어요. 다만 주제에 접근할 때도 중의적인 방식을 선호해요. ‘여드름 브레이크’의 경우 철거에 관련된 배경 사실이 없어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 수 있거든요. 정치성이라면 좀비 특집 ‘28년 후’가 더 선명했죠. 1980년에 퍼진 분노 바이러스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요. 김혜리: 영화적인 기획들과 비인기 종목에 장시간에 걸쳐 도전하는 특집을 보면 더이상 “얼마나 웃기느냐”가 더이상 <무한도전>의 절대적 척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태호: 웃음이 가장 크긴 하지만 포괄적 재미를 추구해요. 만약 스릴이 시청자에게 충분한 쾌감을 준다면 웃음보다 스릴을 좇아갈 수도 있고 공익적 내용이 공감을 끌어낸다면 그 부분을 살릴 수도 있어요. 어차피 개그맨들이기 때문에 웃음은 자연히 들어가요. 전체적으로 저희 멤버나 시청자도 시즌1, 2 때처럼 넘어지는 몸개그가 자아내는 웃음만을 재미로 여기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요. 최근 들어 제작진이 바빠진 것은 어느 정도 성장을 마친 캐릭터들을 한꺼번에 다른 환경에 넣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죠. 이번주에 눈떠보면 다른 환경에 처해 있고 다음주는 또 다른 세계죠. 과거 <무한도전>이 집에서 성장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젠 로드무비처럼 역에 멈출 때마다 다른 상황에 맞닥뜨리는 거죠. 가다가 기차가 고장날 수도 있고 그러면 정비를 해서 가야 하고 기관사가 바뀔 수도 있어요. 김혜리: <은하철도 999>가 생각나는데요? <무한도전>이 인기가 확고해지면서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은데요. 김태호: 어디 가서 저랑 잘 안다며 영리적 목적을 채우려는 사람도 있고 프로그램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도 있어요. 이름만 빌려달라는 제안도 있고요. 철저히 거절해요. 제 소원은 휴대폰을 꺼놓고 프로그램만 만드는 거예요. 김혜리: 9년차 예능 PD로 일하는 동안 인간에 대해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나요? 아니면 반대인가요? 김태호: 정말 친한 존재도 가끔은 상처가 되고, 다시는 너희랑 일 안 한다 싶다가도 너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간인 거 같아요. 연기자와 제작진을 향한 감정이 프로그램에 대한 감정으로 연결돼요. 저희끼리 관계가 나쁘면 프로그램도 재미가 없어져서 늘 조심하고 있어요. 이제 <무한도전>은 하나의 프로그램이라기보다 저와 멤버들, 제작진의 관계를 통틀어 규정하는 말 같아요. 저나 멤버들에게 전화가 걸려왔을 때 “<무한도전> 하고 있어”라는 대답이, 한 프로그램을 녹화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나 지금 집에서 쉬고 있어” 하듯 일상을 말하는 걸로 들려요. 追伸 소재고갈? 그게 먹는 건가요? 물론 김태호 PD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소재는 인체 세포 수만큼, 여기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의 숫자만큼 많다고 생각해요. 문제는 그걸 어떤 내러티브로 엮어가느냐죠”라고 털어놓았을 뿐이다. 과거를 물어도 그의 이야기는 깔때기라도 달린 듯, 현재진행형의 기획과 내년에 추수할 아이디어들로 연방 되돌아왔다. 홍콩에 가서 <무간도>를 찍어도 재미날 것 같고, 버라이어티 안에 뮤지컬을 넣는 방식을 숙고 중이라며 상상도를 펼쳤다. 4년 동안 지지부진하던 <무한도전> 캐릭터 사업을 비로소 매듭지었다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고, 사진작가에게 의뢰해서 작업해온 <무한도전> 스틸 사진 전시회를 예고할 때는 설레 보였다. 사진을 촬영하는 동안 그의 배낭을 맡았다가 무게에 무릎이 꺾일 뻔했다. 자료 파일과 서류,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가 들어 있다고 했다. 그 등짐을 멘 채 김태호 PD는 지인의 결혼식장에 가는 길이었다. 누군가에게 ‘재미’란 그렇게 지구만큼 거대하고 무거운 것이었다.

[아저씨의 맛] 올해의 아저씨로 그대를 선정하리 (최종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이 시점에 몇명 있지도 않은 친구 중 하나가 나의 안티였음이 밝혀지다니(<씨네21> 732호 ‘오마이이슈’ 참조) 먼저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 나, 손석희 정말로 좋아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그 사람이 만들거나 참여한 작품을 꼭 경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박찬욱을 좋아한다고 박찬욱 영화를 꼭 봐야 하는가 말이다(으응? 이거 아냐?). 그녀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지만 주얼리 정을 더 좋아하긴 한다. 실은 사랑한다. 한때 MSN 대화명이 보사마였으며, 방송 담당후배에게 보사마 인터뷰는 어떻겠냐며 지그시 강압적으로 기사화도 성사시켰고 매일 잠자리에 들기 직전 그가 출연한 <지붕 뚫고 하이킥!>의 모든 장면을 낱낱이 복기하는 짓을 <거침없이 하이킥>에 이어 또다시 하고 있다. 내가 <지붕킥>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는 부분은 청춘남녀들의 러브러브 사각관계도 아니고, 해리와 신애의 <톰과 제리>식 아옹다옹도 아닌 바로 보사마와 세경의 치열한 경쟁과 권력관계다. 일반적으로 한 집안의 서열 2위쯤 되는 사위와 권력의 최하층에 있는 가정부와의 암투는 한국 드라마사에 전무후무한 플롯이며 대한민국 사위계의 한점 얼룩으로 남은 미달이 아빠조차 이렇게 기묘한 긴장관계를 보여준 적은 없다. 게다가 이 관계에서 표면적인 약자인 세경은 ‘시크한 듯 무심’한데 보사마 혼자서 맹렬하게 경쟁심과 권력의지를 불태운다는 것이 비극적인 부조리다. 이순재 고사를 앞두고 세경을 견제하며 공부하는 보사마는 측은하고, 유일하게 만만한 세경에게 종종 언성을 높이며 명령하고 싶어 하는 보사마는 치사하다. 그런데도 보사마가 멋진 건 이렇게 웃기고 한심해서 도무지 좋게 보이기 힘든 그 모든 상황에서도 늘 품위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 캐릭터건 버라이어티쇼의 코미디언이건 요즘 웃음을 주는 아저씨들은 대체로 가부장의 권위와 함께 품위를 패키지로 갖다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비난할 생각은 없다. 두개가 분리되기는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2009년 텔레비전 화면으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아저씨 캐릭터들 가운데 유일하게 보사마만이 권위의 부재와 품위의 만개를 실천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가 아직 잃지 않은 한 가닥 낭만주의는 이 드라마의 뾰족하고 차가운 웃음 한가운데서 우리에게 미지근한 손난로를 제공한다. 그래서 ‘아저씨의 맛’의 막을 내리며 올해의 아저씨로 보사마를 선정할란다. 보사마, 아니 족사마! 2010년에도 족구황제 족사마의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처럼 잠깐잠깐(자주는 말고요) 당신의 찬란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세요.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게 감사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가족애의 회복과 성장 <카페서울>

synopsis 일본인 프리랜서 기자인 준(사이토 다쿠미)의 전문 취재 분야는 식도락이다. 취재차 서울을 찾은 그는 우연히 전통떡 카페 ‘모란당’을 알게 된다. 그는 모란당에서 만든 떡맛에 감동해 취재를 시작한다. 그런데 모란당은 동네에 불어닥친 재개발 붐으로 철거위기에 놓여 있다. 어느 날 모란당의 주인인 상우(최성민)가 용역깡패들에게 폭행당하고, 소식을 들은 상우의 동생 상혁(김정훈)이 가게를 찾아온다. 한때 음악에 빠져 집을 나갔던 상혁은 준과 함께 모란당을 지켜내기로 결심한다. <까페서울>은 일본의 제작사와 감독, 한국의 스탭들이 모여 만든 영화다. 영화에서 보이는 한국과 준의 대사로 들리는 일본은 모두 개발의 흐름에 따라 전통적인 가치가 사라져가는 곳이다. 일본 전통과자를 만들던 부모 밑에서 자란 준 또한 동네에 들어선 아파트에 가게를 내줄 수밖에 없었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일본인인 그가 같은 상처를 겪은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 전통을 수호하면서 가족애를 회복하는 한편, 성장한다는 게 <까페서울>의 이야기다. 분명 억지스러운 설정이지만 거부감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선한 의도가 재미까지 보장해주는 건 아니다. <까페서울>의 장르는 떡을 소재로 한 요리영화에 가깝다.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미션과 요리대결이 결부되는 상황은 일본의 요리만화에서도 볼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플롯이다. 그런데도 영화가 요리대결의 긴장과 관객의 혀끝을 진동시킬 요리과정을 묘사하지 않은 건 아쉬운 점이다. 게다가 요리대결의 결과가 맛이 아닌 추억의 힘에 의해 좌우되는 설정은 주제에 부합하는 것과 별개로 밋밋해 보인다. 가족애를 강조하거나, ‘파이팅!’을 외치는 장면들이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에 실려 전면에 나서는 탓에 다소 민망한 순간들도 있다. <까페서울>은 최근 한국에서 개봉한 텔레시네마 시리즈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텔레시네마는 한국의 배우와 드라마 PD, 일본의 작가가 협력한 프로젝트다. 동아시아 영화시장의 통합 비전을 강구해본다는 의미는 있지만, 작품성으로나 시장성으로 볼 때 두 프로젝트 모두 소품에 가까운 결과물을 내놓는 데 그쳤다. 처음부터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정도였을까, 아니면 그만큼 이야기를 구성하는 양국의 정서가 다른 걸까. 비슷한 프로젝트가 또다시 계획된다면 그때는 좀더 과감한 시도를 해야 할 듯 보인다.

[그 액세서리] 진주는 여자의 상징

다시, 메릴 스트립과 에이미 애덤스다. <다우트> 이후 일년 만의 재회. 에이미 애덤스는 간이 큰 건지 자신감이 지나친 건지 식탁 밑에서 내일 당장 내다버려야겠다는 주인의 얘길 엿들은 강아지 같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도 메릴 스트립과의 투톱 주연을 마다하지 않는다. <줄리&줄리아>는 1940년대 파리의 줄리아와 2002년 뉴욕 퀸스의 줄리 얘기다. 줄리아(메릴 스트립)는 살집이 풍만하게 잡히는 40년대의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주부. 겉치레를 싫어하고 실용적인 걸 좋아하는 쿨한 성격이지만, 여자라는 본질과 천성을 온몸과 마음으로 즐긴다. 그래서 요리를 할 땐 남자 유니폼 같은 편한 셔츠를 입고 앞치마는 스커트 허리에 아무렇게나 꽂아둘지언정 사랑받는 ‘하우스와이프’의 표본인 진주 목걸이만은 꼭 챙긴다. 이후 줄리아 차일드가 텔레비전에서 요리쇼를 하는 전설적인 셰프가 된 뒤 독특한 억양의 클로징멘트 ‘본 아페티!’(프랑스어로 “맛있게 드세요”)와 목에 딱 맞게 채운 진주 목걸이는 그녀의 상징이 된다. 줄리(에이미 애덤스)는 별 볼일 없는 중급 공무원으로 9·11 사태의 후유증을 상담하는 지루한 일을 하지만 밤에는 식도락가로 변신해 자신의 블로그에 ‘줄리아 차일드식’ 레시피를 올린다. 줄리아 차일드의 긍정과 낙천, 삶에 대한 사랑은 줄리에게 빛이고 희망이고 구원이다.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서로 다른 시절을 산 줄리아와 더 밀접한 관계를 원하는 줄리에게 남편은 진주 목걸이를 선물한다. 바로 줄리아 차일드의 ‘그 진주 목걸이’다. 따뜻한 감정에 대해서라면 따를 자가 없는 감독 노라 애프런이 만들고 앤 로스가 의상을 맡은데다 음악은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줄리가 랍스터와 난투극을 벌일 때 토킹 헤즈의 <사이코 킬러>를 배경음악으로 넣는 센스라니). 그리고 메릴 스트립과 뜻밖의 즐거움 스탠리 투치까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1940년대 파리와 2002년의 뉴욕을 공평하게 분배한 장면들도 즐겁고 ‘르 코르동 블루’와 ‘셰익스피어&컴퍼니 서점’, ‘딘 앤 델루카’ 같은 친숙한 이름들도 반갑다. 무엇보다 <줄리&줄리아>는 죄의식없이 버터와 휘핑 크림, 초콜릿 파이와 마요네즈를 먹는 기분을 기억하게 한다. 고기맛 젤리라는 ‘아스픽’, 닭간과 크림치즈로 속을 채운 닭고기 요리 ‘뿔레 오티 아라 노르망’, 맛있는 디저트 ‘플로팅 아일랜드’(예전에 이태원 르 생텍스에 이 메뉴가 있었다), 줄리아와 줄리의 궁극의 메뉴였던 비프 부르기뇽이 화면에 꽉 찰 땐 냉정한 이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관 따위는 다 잊게 된다. 그저 식욕만 남고, 그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 정직하고 가치있는 감정인 듯 느껴진다.

[전영객잔] 이 시체를 보라, 그리고 응답하라

올해 일년 동안 한국영화의 이미지가 무엇이었느냐고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면 그냥 간단하게 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한국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내내 이 집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그냥 다시 저 집에 들어간다고 느낄 정도였다. 먼저 세편의 영화. 가장 무서운 집.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감독 구경남(김태우)은 낯선 제천에서 하는 영화제에 참석했다가 친구 부상용(공형진)을 만난다. 그리고 한밤중에 그의 집을 방문한다. 그는 이상한 아내 유신(정유미)과 살고 있다. 이 집은 문턱을 넘을 때마다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아무리 앞과 뒤를 따지려 들어도 일시에 이 모든 시도를 와해시키면서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서부터가 착각인지 알 수 없는 마술적 상황으로 끌고 간다. 숏 사이의 접속이라는 몽상. 말 그대로 귀신들린 집. 가장 이상한 집. 박찬욱의 <박쥐>. 신부 상현(송강호)은 친구 강우(신하균)의 집을 찾아간다. 나는 이 영화를 두번 보았지만 아무리 맞추어보아도 일층과 이층의 면적이 일치하지 않는다. 이 가분수의 집은 거의 쓰러질 것만 같다. 이층은 과밀하게 우굴거리고 일층은 대부분 비어 있다. 도무지 올라갈 방법을 알 수 없는 이층. 올라온 다음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서 마치 자기 증식이라도 하듯이 늘어나는 방들. 도대체 이층에는 몇개의 방이 있는 것일까? 이야기를 따라 전개되는 것 같은 복도. 라 여사(김해숙)는 비밀을 알고 있을까? 태주(김옥빈)가 이 집에서 나가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가장 음란한 집. 봉준호의 <마더>. 낮에도 거의 밤처럼 어두운 집. ‘마더’(김혜자)는 자기 집에서 이불을 펴고 아들과 한번 하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지 못할 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핑계이다. 도준(원빈)의 방에서 한밤중에 윗옷을 벗은 친구 진태(진구)가 걸어나와서 그녀를 껴안을 때 그녀가 정말 안아주기를 바랐던 사람은 누구일까? 두명의 이중효과, 혹은 착시효과. 이때 어느 쪽이 환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뒤에서 얼굴을 보지 않고 안을 때, 도준과 ‘마더’가 몇 차례이고 그 체위를 반복하면서 이불에서 껴안을 때, 그래서 견딜 수 없는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을 때, 위반의 선을 마지막으로 방어하기 위해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잠과 꿈. 무의식과 환상. 죽음과 섹스는 생각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 이 음란한 환상을 건너지 않고 ‘마더’를 설명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의 집들을 생각하다 물론 다른 집도 있다. 또 다른 세편의 영화들이 다루는 집. 이를테면 박찬옥의 <파주>. 은모(서우)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중식(이선균). 그는 왜 환대받지 못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 왜 은모는 자기 집에서 주인이 아니라 손님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혹시 그 집이 환대하지 않는 사람은 중식이 아니라 은모가 아닌가? 시간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혹은 할 수 없다. 플래시백으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집. 사라졌다가 나타나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집. 그런 다음 폭발시켜버린 집. 그때 정말 폭발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와중에 진행되는 철거. 집을 부순다는 문제. 혹은 철거 용역에 몸담은 상훈(양익준). 내면 속의 지옥과 같은 두채의 집. 상훈과 연희(김꽃비)의 집. 집을 부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도시의 변경에서 부서져가는 집. 쫓겨나는 사람들. 집에서 쫓겨나면 어디서 살아야 할까. 양익준의 <똥파리>. 미쳐버린 동생, 혹은 신들린 동생을 찾아서 돌아온 언니 희진(남상미)이 마주해야 하는 집. 아파트라는 집. 그 집의 수상한 이웃들. 이용주의 <불신지옥>. 그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집에 관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올해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2가에 세워진 5층 상가에서 새벽 6시45분에서 8시30분 사이, 고작 1시간45분 만에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죽었고 23명이 부상당했다. 집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전선이다. 그것은 육체이며, 삶이며, 실제의 현실이다. 모든 것은 거기서 시작되고, 시작되어야만 하며, 거기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집은 삶의 크기이며 그것을 탈취당할 때 삶도 도둑질당할 것이다. 집의 전유와 재전유에 대한 전술을 우리는 공유해야만 한다. 왜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은가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에 긴급하게 한편의 영화를 추가하고 싶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이 영화는 올해의 발견이자 최전선이다. 정재훈의 다큐멘터리 <호수길>은 마치 이 모든 비밀회의에 가까운 유령들의 난국을 타개해야 할 방법을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상황을 수정하려고 한다. 나는 이 영화를 무조건 긍정하고 싶다. 한국영화가 건축적 구조 안에 갇힌 것처럼 보일 때 거의 오로지 혼자서 <호수길>은 전혀 다른 지리적 탐사를 시작한다. 우리는 서로 전혀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호수길>의 선언이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지식도 필요없다. 그냥 같은 시대에 같은 지리적 동네에서 함께 공존한다는 의식만 갖추고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허깨비가 아니다. 영화 제목 <호수길>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의 골목 이름이다. 영어 제목도 ‘Hosu-Gil’이다. 이게 골목 이름이긴 하지만 이 동네에는 호수가 없다. 아마도 예전에는 있었을 것이다. 아무리 이 길을 따라가 보아도 호수는 나오지 않는다. 예전에는 있었지만 없어진 것. 그리고 이 영화는 지금은 있지만 없어져가는 것에 관한 영화이다. <호수길>은 간단하지만 소개하기에 까다로운 영화이다. 그래서 시네마디지털서울 신은실씨의 소개가 조금 길긴 하지만 대신 인용할 생각이다. “낮에 나온 반달이 뜬 하늘과 산이 보이는 동네에는 ‘호수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골목이 있다. 사철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동네에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한편, 볼일 보러 집을 나서는 아주머니, 산책하는 젊은이와 소년 소녀들, 텃밭을 일구는 아낙들, 마실 나온 할머니,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과 그들을 돌보는 엄마가 있고, 때로는 경찰차가 동네를 오가고, 개와 고양이도 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네의 마지막 불빛이 꺼져버리고, 갑자기 빛이 번쩍이자 빈집 천지가 되어버린 동네를 부수는 굉음이 들려온다. 개는 먹이를 찾아 헤매고, 고양이는 죽음을 맞는다. 빈집에서는 불꽃과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하고, 불도저와 인부들은 물을 뿌려가며 동네를 계속 부순다. 햇빛은 강하게 빛나고, 새들도 동네를 떠난다.” (시네마디지털서울2009 카탈로그, 105쪽) 시적인 소개의 문장들. <호수길>에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고,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없다. 물론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기는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다. 분명하게 들리는 소리는 그저 동네 어귀에서 개짓는 소리뿐이다. <호수길>의 마지막 자막은 다음과 같다. “이 영화의 촬영은 2006년 가을부터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SF영화같아보이는 이유는 <호수길>은 2년 동안 촬영한 영화이다. 그건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때 이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호수길>은 자기 운명을 알고 있는 영화이다. 정재훈은 취미로 자기가 사는 동네를 찍다 보니 어느 날 갑자기 재개발 지구로 결정되어서 사람들이 이주하고 텅 빈 동네에 혼자 남아서 이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간단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영화. 그러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바라보면서, 상황에 대한 그 어떤 방어능력도 없이 할 때 매우 복잡하게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다. “동네에 어느 날부터인가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어요. 기분이 나빠졌어요. 그래서 촬영을 시작했지요.”(2009년 11월7일 관객과의 대화) 물론 이 말은 비유이다. 이 영화에는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이 단 한숏도 나오지 않는다. 그때 나는 정재훈의 비유가 인상적이었다. 검은 안경을 쓴 사람들. 장르영화에서 악당들을 한눈에 알아보기 위해서 사용하는 인덱스. 혹은 공동체 커뮤니티에 나타난 낯선 이방인들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소도구 컨벤션. 그는 왜 그런 비유를 사용한 것일까? 정재훈이 촬영을 시작한 첫날은 아무리 빨라도 서울시 은평구 응암2동이 재개발지구로 결정된 다음일 것이다. 말하자면 행정적 결정이 난 다음에 시작된 영화. ‘포스트’로서의 영화. 이미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결국 떠나가야 하는 결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 아이들. 물론 영화는 단 한번도 그들에게 물어본 적이 없다. 좀더 정확하게 카메라는 동네 주민들과 접촉하지 않는다. 마치 낯선 혹성에 와서 탐사를 하는 듯한 카메라. 당신은 이 영화가 우주로부터 불시착한 것처럼 시작한 첫 장면을 생각해야 한다. 나는 자꾸만 <호수길>이 SF영화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언제나 일정한 거리만큼 물러나 있고 그들과 카메라의 거리는 그들이 하는 대화가 들리지 않을 가청영역 바깥에 놓여 있다. 그래서 목소리는 들리는데 말이 없다. 말의 바깥에 있을 때 대상은 풍경의 일부가 된다. 망원렌즈로 담은 사람들은 카메라의 마이크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정재훈은 카메라의 거리감과 거의 동일한 마이크의 사용을 통해서 시각과 청각 둘 사이의 거리감을 일치시킨다. 그렇게 물러났을 때 영화에서 남는 것은 동사뿐이다. <호수길>은 오로지 동사들만이 존재하는 표면효과만을 따라가고 있다. 우리는 표면을 본 다음 그 안의 현실에서 작동하는 인과관계를 따져 물어야만 이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말하자면 <호수길>을 보면서 나를 집중하게 만들었던 표면효과들의 예. 정재훈은 철거를 사건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시위에 관심이 없다. 틀림없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갈 데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고요하게 진행된다. 동사무소 직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며(행정적 작동) 측량 기사들의 모습도 등장하지 않는다(수행적 장치). 물론 전경들도 나타나지 않는다(사건의 변수). 먼저 첫 번째, 은평구 응암2동은 지방 시골에 있는 폐쇄된 동네가 아니다.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면 종로3가에서 채 30분이 걸리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는 서울 안의 거주지역이다. <호수길>에서 철거 공사가 시작되기 전, 그러니까 시작하고 난 다음 42분이 될 때까지 이 동네의 생활을 찍은 장면들에서 신기할 정도로 남편들, 혹은 아버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영화를 본 다음 정재훈을 만났다. “이 동네에 출근하듯이 가서 찍은 건가요?” 말하자면 촬영을 정해놓은 시간대가 있느냐는 질문의 우회. 그가 대답했다. “아뇨, 전 이 동네에 살면서 찍었습니다.” 정재훈은 남편들이, 혹은 아버지들이 거리에 보이는 시간대를 피해서 찍었다(또는 그것을 편집에서 사용하지 않았다). 그 사실 때문에 마치 이 동네가 세상에서 일시적으로 분리되어 나온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영화의 후반부, 이 동네를 때려부술 때 비로소 등장한다. 그런데 이런 배제 상태의 진행은 다큐멘터리에서 신기한 결정이다.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그 다음 두 번째. <호수길>의 자막에 따르면 영화는 “2006년 가을에서 2007년 봄까지. 그리고 2008년 2월26일, 7월10일, 2008년 8월부터 11월까지” 찍었다. 이 기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를 모두 담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치 은평구 응암2동은 날씨의 변화가 전혀 없는 동네처럼 보인다. 언제나 화창하게 갠 맑은 날씨. 단 한 차례의 비도 오지 않으며, 겨울 내내 단 한번도 눈이 내리지 않는다. 아니, 흐린 날씨조차 없다. 여기는 캘리포니아가 아니다. 우리는 서울에서 살면서 이렇게 맑은 날씨를 볼 수 있는 날이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말의 방점은 서울이다.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는 맑은 날씨로 설정하면 그걸 여러 날에 나누어 찍을 때 숏을 연결시키는 일이다. <호수길>은 단 하루로 설정한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사건도 없이 그 동네의 일상을 찍었다. 장면 사이의 극적인 연결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동네의 날씨는 언제나 맑게 개어 있을 뿐이다. 맑은 하늘. 구름조차 없는 날씨. 다만 가끔 바람이 분다. 거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 <호수길>의 첫 장면은 낮달이 보이는 하늘이다. 낮에 달을 보다니. 그런 다음 마치 카메라는 거기서 추락하는 무언가를 뒤쫓듯이 지구로 내려온다. 아니, 자신이 추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로 내려온 다음부터 카메라는 항상 멈춰 서서 찍고 있다. 우주선이 고장 난 것일까? 그 자리에서 옆으로 팬을 하거나 혹은 틸트를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은 극영화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 두 가지 뜻. 극영화는 그렇게 인물을 세워놓거나 아니면 프레임을 정해놓고 동선을 설계했다는 뜻이다. 다른 뜻. 다큐멘터리에서 일단 카메라가 서면 그걸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물을 쫓아갈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연히 그 장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다. 장소의 느낌, 시간의 흐름.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인물을 쫓아가느라 바쁘고 사건을 다루느라 매달리는 동안 정재훈은 응암2동을 느껴보고 있다. 정재훈은 <호수길>을 세 가지 방식으로 찍었다. 하나는 카메라가 고정해서 서 있는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42분10초 이후, 그러니까 철거 ‘이후’부터 손으로 들고 찍은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대조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 차라리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잘못 느꼈으면, 이라고 바라고 있다고 느낄 정도였다. 아마도 정재훈은 할 수만 있었다면 나머지도 모두 멈춰 서서(fixed) 찍었을(camera) 것이다. 그런데 철거 ‘이후’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때 움직이는 이유, 혹은 손으로 든 이유는 (아마도)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우선 미학적 근거. 앞부분의 멈추어선 카메라는 그 동네의 일부처럼 보인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그 동네의 시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거기 서 있는 오래된 건물이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 다음 철거가 시작되자 카메라는 자기가 의지할 데를 잃어버린 것처럼, 자기의 근거를 상실한 것처럼 흔들린다. 표류의 상태. 자기가 살던 장소가 낯선 공간이 되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향이라는 지평의 상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과 전혀 말을 나누지 않는 마이크를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그 다음 실용적 이유.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철거현장에 단 한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카메라를 들이댄 지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아 누군가에게 촬영을 제지당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철거 현장은 이상하게도(당연하게도?) 마치 사건 현장처럼 그것을 은폐하려고 한다. 혹은 그 정도라면 운이 좋은 경우이고 카메라를 압수당하거나 신분을 물어본 다음 왜 여기서 촬영을 하고 있는지를 설명 못하면 신고를 당할 수도 있다. 카메라를 세워놓으면 갑작스러운 충돌 혹은 압수로부터 달아나기 어려울 것이다. 손으로 들고 찍을 때에만 확보할 수 있는 시간. 게다가 <호수길>은 대부분 혼자 촬영하면서 진행되는 영화이다. 말하자면 손으로 들어야 하는 상황. 전술로서의 핸드헬드. 이 긴급함. 깨져버린 평화. 고요함 뒤의 위기감. 마치 정지된 것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손으로 들고 찍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호수길>이 담고 있는 ‘이후’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오가와 신스케의 유명한 테제. 다큐멘터리에서 카메라를 다루는 손과 발은 그 영화의 세계관이다. <호수길>은 그것을 실천한다. 마지막 남은 방법은 ‘이전’ 장면의 멈추어 선 숏에서 갑자기 인서트처럼 개입하는 줌의 사용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할 것이다.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고 정재훈의 첫 번째 대상. 지구로 내려온 카메라가 먼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벌레와 움직이는 나뭇잎들이다. 거기에는 아직 사람이 담기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 물론 이 영화는 자연을 예찬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운드는 거의 들리지 않고 응암2동의 골목을 보여주는 프레임들은 마치 <스틸 라이프>의 구도에 가깝다. <호수길>은 같은 화면을 일정하게 되풀이하면서 반복해서 보여준다. 어떤 학습효과. 우리는 이 동네의 풍경을 마치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이 일정한 간격의 진행에는 우리가 충분히 그 풍경을 보았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린 다음 화면이 바뀐다. 그 안에 담긴 삶의 리듬감. 동네의 소리들이 매우 작게 녹음된 화면들은 시작하고 4분40초가 지나서야 비로소 마치 스며들듯이 분명하게 들린다. 저물어가는 여름, 혹은 이미 시작된 가을. 골목 계단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면 아줌마와 소녀가 계단을 걸어내려온다. 그 둘의 사이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 둘은 지나가면서 흘낏 카메라를 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재훈은 개의치 않는다. 카메라는 이 계단에서 사람이 지나가길 기다린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우연히 그 시간에 여기를 지나갔고 그렇게 그들이 지나가기를 내버려둔다. 그렇다고 이 두 사람을 설명할 생각도 없다. 정재훈에게 중요한 것은 이 시간을 담는 것이다. 이 순간 지나가는 두 사람은 이 시간에 나뭇잎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동일한 세상이라는 리듬의 일부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호수길>을 진행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호수길>에 관한 그 어떤 정보 없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할지라도, 그러니까 ‘이후’ 철거가 시작되는 참혹한 장면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할지라도, 당신은 이 영화에서 감도는 이상한 불길함이 불러일으키는 긴장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이를테면 무언가 일촉즉발의 느낌. 이토록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사건과 마주하는 것이다. 사건이 없는 서울의 풍경은 우리를 긴장시킨다. <호수길>은 낮의 풍경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한밤중으로 건너뛰어들어간다. 어떤 조명의 도움도 없는 촬영. 그저 골목에 켜진 가로등, 혹은 대부분 불이 꺼진 동네. 모두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영화 혼자 깨어 있는 것은 대부분 이유가 있다. 거기 무언가 기다려서 보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장면들은 아주 깊은 밤, 거의 대부분이 잠든 밤까지 기다려서 찍은 것 같다. 왜냐하면 불을 켠 집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외로운 섬처럼 불이 켜진 집. 하지만 우리가 기대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하라 그러면 다시 <호수길>은 낮 시간으로 옮겨간다. 어제와 다름없는 하루. 두 번째 낮은 이 동네의 작은 텃밭에서 (무언가를) 경작하는 할머니와 아저씨의 모습이다. 이때 카메라는 갑자기 줌으로 다가간다. 좀 갑작스러워서 느닷없게 느껴지는 줌은 우리에게 지금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에 대한 물리적 확인처럼 보인다. 정재훈은 줌으로 다가가서 무언가를 잘 보려는 생각이 아예 없다. 텃밭에 있는 할머니와 아저씨에게 다가가서 무얼 보여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 골목길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다음 두 번째 밤을 맞는다. 앞에서 본 밤 장면과 똑같진 않지만 그러나 같은 태도를 갖고 밤을 지새운다. 물론 이 장면이 밤을 지새우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오랫동안 찍힌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동네의 고요한 시간대를 찍기 위해서 기다려야 하는 카메라는 도리없이 밤을 새웠을 것이다. 말하자면 그 시간을 찍기 위해서 기다리면서 보내는 시간. 두개의 시간. 기다리는 시간(의 두께). 촬영한 시간(의 순간). 그러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사건도 보지 못한다. 혹은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출현도 없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지키는 것일까. 그런 다음 다시 낮. 같은 리듬의 반복. 저 멀리 할머니 한분이 걸어가고 있다. 지팡이에 의지해서 가까스로 걸어갈 정도로 불편한 걸음걸이. 그렇게 걸으면서도 힘겨워서 자꾸만 다른 한손으로는 벽에 기댈 만큼 힘겨운 걸음.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때 갑자기 움직이면서 할머니에게로 줌인한다. 우리는 등 뒤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할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본다고 해서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줌으로 쫓아가던 카메라는 특별하게 무얼 보려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한번 더 줌인을 한다. 두번의 줌인. 지나치게 멀리서 줌을 해서 심지어 화면의 질감에 픽셀이 묻어나는 게 보일 정도이다. 흔히 말하는 ‘화면이 뭉개지는’ 거리까지 다가간다. 이례적인 방법. 우선 정재훈은 할머니(의 행동이나 동선)을 훔쳐볼 생각이 없다. 할머니는 그저 걸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줌은 둘 중 하나이다. 이 줌인은 대상의 방법을 기억시키는 기호이다. 같은 말의 다른 말. 여기서는 대상이 아니라 대상을 보는 줌의 방법을 보라는 뜻이다. 혹은 이러한 방법으로 보는 대상은 동일하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모든 대상을 이런 방식으로 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거의 멈춰 서서 진행되는 숏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리듬감이다. 이 줌인은 대상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느낌이 들기는커녕 그 화질 때문에 오히려 대상과 카메라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이 장면이 <호수길>에서 어떤 전환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다시 원래의 리듬으로 돌아간다. 놀이터에서 잠든 할머니. 아이들의 노는 소리.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그리고 같은 구도가 되풀이된다. 우리는 화면의 변화에 대해서 점점 민감해진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할아버지는 두터운 옷을 입었고 나뭇잎들은 단풍이 들었다. 세 번째 마주치는 밤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길한 밤이다. 밤거리에 불빛도 없이 개가 짖고 있다. 개는 낯선 사람을 가장 먼저 알아보는 짐승이다.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먼저 소리칠 때, 지금 여기에 들어선 낯선 자를 조심하라는 경고이다. 낯선 자들. 그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다시 되풀이되는 낮 장면. 우리가 이미 보았던 계단 길. 골목길을 올라오는 소녀. 아이들은 종종 카메라를 쳐다본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눈 마주침이 영화와 인물 사이의 어떤 이화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저 거기 있는 나무가 눈을 돌려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 인사를 하는 것 같은 친화감. 그런 다음 <호수길>에서 가장 이상한 숏이 등장한다. 몇번이고 반복되는 응암2동의 전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롱숏 장면이 아이들의 얼굴과 디졸브된다. 교과서적으로만 말하면 디졸브는 추억의 입구이거나(플래시백의 시작) 두개의 장소 혹은 사건을 연결할 때 사용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 어느 쪽도 아니다. 그런 다음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가까이 다가가서 찍는다. 여기서는 망원렌즈로 찍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들에게 카메라와의 접촉을 허락한다. 아이들은 유심히 바라보다가 차례로 다가와서 카메라를 만지기도 한다. 마치 기억의 소환과도 같은 순간.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서 함께 생각하도록 요구할 때, 나는 이 롱숏의 집들이 다름 아닌 클로즈업의 아이들이 사는 장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롱숏과 클로즈업의 매듭. 차라리 단일한 결합. 숏으로 나누고 그런 다음 재결합. 그러나 두개의 숏이 디졸브 형식을 가지면서 만들어내는 유령효과. 유령들. 거기 이제는 살지 않는 아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불길함, 혹은 사태를 예견함 그리고 다시 우리가 몇번이고 보았던 그 골목길. 동일한 프레임. 멀리 떨어진 카메라(와 마이크). 아줌마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아이들이 그 길에서 뛰어논다. 저 멀리서 오던 할머니는 힘에 부치는지 중간에 놓인 침상에 앉아 쉰다. 6분40초 동안 그저 그 자리에서 지속되는 이 장면은 앞부분, 그러니까 철거가 시작되기 ‘이전’ 장면 중에서 가장 길다. 하지만 이 장면은 플랑 세캉스가 아니다. 마지막 순간 갑자기 줌으로 잡아당긴 아이의 얼굴 클로즈업을 보여준다. 그러고 나면 이제 평화로운 장면은 모두 끝났다.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보는 저녁 장면. 몇번이고 보았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응암2동의 전경. 동네 여기저기에 불빛이 들어온다. 다시 밤 장면. 동네 전경을 보여주지만 사실상 어둠 속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전봇대의 불안정한 불빛. 다시 낮. 동네 어귀에 서 있는 할아버지는 자꾸만 돌아본다. 그 할아버지를 카메라는 줌으로 당겨서 보여준다. 이제까지 이렇게 카메라를 의심하듯이 바라보던 시선은 없었다. 무엇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카메라를 그렇게 쳐다보게 만든 것일까? 카메라도 이제까지 무심하게 지켜보던 것과 달리 할아버지를 망원렌즈로 쫓아간다. 거의 ‘뭉개질 정도로’ 다가간 줌. 그런 다음 놀이터가 보인다. 이때 카메라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저 멀리 아파트촌에서 솟아오르는 연기. 여기는 바그다드가 아니다. 도시 한복판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때 우리가 느끼는 불길함. <호수길>은 그렇게 우리에게 사태를 예감하게 만든다. 침묵. 그저 물이 떨어지는 소리. 회색빛 시멘트 벽을 따라 처마에서 물이 떨어진다. 이 장면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계절을 알 수 있는 시간의 기호가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겨울이라는 추위를 보게 만든다. 두 번째. 거기 그 집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느낌이 없다. 누가 물을 틀어놓은 것일까? 어디서 물이 새는 것일까? 그 물방울은 고드름이 아니다. 말하자면 인적이 사라진 황폐함. 그러나 아직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아니다. 다시 밤. 무시무시한 밤. 사람들이 사는 마지막 밤. 유리창 너머로 텔레비전 모니터의 푸르스름한 빛이 흘러나온다. 그 사이로 사람이, 어쩌면 모니터에 보이는 그 누군가가 희미하게 어른거린다. 유령의 흔적. 그가 사람이라면 이 한밤중에 왜 잠들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일까? 그가 모니터 속의 그림자라면 지금 이 늦은 밤에 누가 보고 있는 것일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저 빛은 무엇인가? 저 푸르스름한 빛만이 남았다. 저건 등대가 아니다. 불 꺼진 동네. 그리고 개 짖는 소리.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그때 문득 카메라는 그리운 듯이 하늘을 본다. 어둠 속에서 관용도가 매우 낮은 저가기종의 디지털카메라로 밤하늘을 본다(는 것은 미친 짓이거나 무언가 필사적으로 거기 볼 게 있다는 뜻이다). 프레임을 메우는 지글거리는 그레인. 밤하늘에 구름이 지나가고 나면 달이 슬그머니 모습을 내민다. 나는 이 영화의 첫 장면이 낮달이었음을 기억한다. 달은 다시 지워진다. 파리가 들끓는 고양이, 그 무시무시함 42분10초. 다시 여름. 다시 놀이터. 그러나 우리를 잡아끄는 것은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청각적 소리이다. 갑자기 유리창이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 철거 ‘이후’의 첫 장면.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오른쪽으로 느리게 팬을 하는 이 파노라마 숏은 ‘경축 응암 제8구역 관리처분 계획인가’라는 플래카드를 보여준다. 집들은 이미 창문이 대부분 뜯겨나갔고 거리는 마치 지금 막 폭탄 테러를 당한 듯이 파편이 나뒹굴고 있다. 이 스산한 바람소리. 나뭇잎들은 그때처럼 펄럭이고 있다. 두개의 펄럭임. 플래카드와 나뭇잎. 우리가 몇번이고 본 그 골목길을 따라 카메라는 느리게 뒤로 걸어간다. 이동한다고 말하는 대신 걸어간다, 고 말한 이유는 명백히 이 후진 트래킹숏은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말 그대로 손으로 들고 뒷걸음질치면서 찍은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나가버린 이 동네에서 정재훈이 마주치는 건 거의 부서져버린 화단에서 놀고 있는 한 마리 고양이다. 이때 우리는 이 고양이를 이제까지 정재훈이 사람을 보여준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해야 한다. 지나치게 줌으로 다가가서 픽셀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로 뭉개져버린 화면. 왜 정재훈은 사람과 고양이를 같은 방법으로 찍고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의인화의 숏.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주었던 한계 허용치를 벗어난 줌. 정재훈은 거기 있는 건 고양이가 아니라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 어쩌면 뛰놀던 소년 소녀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혹은 그들을 기억하는 그의 방법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고양이에서 느리게 줌아웃하는 카메라는 카메라와 고양이 사이에 끼어든 두 마리의 나비를 따라 움직인다. 당연히도 이 나비는 CG가 아니다. 우연히 끼어든 나비. 정재훈은 예민하게 그 우연의 리듬을 따라 카메라의 시선을 옮겨간다. 그러나 나비는 매몰차게도 금방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철거는 계속되고 있지만 정재훈은 그 현장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보는 것은 오로지 흔적들뿐이다. 정재훈이 고양이 다음에 마주치는 건 골목을 떠도는 개 한 마리이다. 그리고 그 개를 따라간다. 그 개는 우리가 이미 보았던 그 골목, 어린아이가 뛰어놀면서 카메라를 얼핏 바라보던 그곳에서 마치 그 아이처럼 혼자 논다. 누가 버리고 간 것일까? 개는 먹을 것을 찾아서 여기저기 쓰레기통을 뒤진다. 하지만 사람들이 떠나간 이 골목에 먹을 것이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 불쌍한 개. 그 개의 목에 묶여 있는 목걸이를 보건대 아마도 인도견이었던 것 같다. 그 개 없이 그 개의 주인은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을까? 남아 있는 존재들은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정재훈은 자꾸만 나무를 바라본다. 아니, 차라리 그 참혹한 풍경에서 눈을 돌리기 위해 눈길을 돌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멀리서 포클레인이 집을 때려부수는 소리는 쉴새없이 들려온다. 정재훈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길, 이미 우리가 보았던 계단, 카메라가 서 있던 자리를 차례로 방문한다. 거기에 감정을 담는 것은 아니지만 보는 우리는 이미 사라져버린 풍경 앞에서 쫓겨난 과거의 시간을 본다. 영화가 시작된 지 54분15초. 저 멀리서 공사하는 포클레인.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대 로봇. 부서지는 집들. 날리는 먼지가루. 거기에는 어떤 애도도 없다. 누군가가 두고 간 빨래. 바람에 펄럭이는 이불보. 그 이불이 불러일으키는 상념. 이불은 잠을 잘 때 덮는 것이다. 우리는 잠을 집에서 잘 때 제일 편하다. 자기가 살던 집을 떠나서 낯선 곳에서 잘 때의 불편함. 그런데 왜 이불을 두고 간 것일까. 이불이 불편한 짐이 되는 삶을 상상해보라. 이 풍경을 바라보는 건 전봇대의 참새들이다. 정재훈은 마치 그들을 출연이라도 시킨 것처럼 자기 카메라 안에 담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집 저편으로 새떼가 무리를 지어 이곳을 떠난다. 말하자면 이제는 아무도 살 수 없는 곳. 날아갈 수 없는 카메라는 시선을 떨구듯이 땅으로 눈을 돌린다. 거기 우리가 좀전에 보았던 고양이가 죽어서 화단에 버려져있다. 이 말의 방점은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버려졌다는 말은 누군가가 이 고양이를 죽였다는 뜻이다. 누가? 대답은 명백하지만 끔찍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떠났고 남은 사람은 둘 중 하나이다.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과 지금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 이 고양이는 누구의 고양이일까? 이곳을 떠날 수 없는 사람. 이곳을 철거하는 사람에게 가장 귀찮은 건 누구일까? 떠나지 않는 사람. 그를 떠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협박. 가장 무서운 협박은 목숨을 놓고 벌이는 협상이다. 시체를 보여주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직접적인 위협이다. 파리들이 들끓는 고양이의 시체. 시체가 보여주는 이 장소의 무시무시한 상황. 이때 <호수길>에서 거의 유일하게 노이즈에 가까운 음향효과를 들을 수 있다. 스피커를 찢는 듯한 피드백 노이즈. 시체라는 결과 안에 담긴 폭력을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살아본 우리 시대의 철거에 관한 경험의 공유이다. 만일 이 시체를 그저 무심코 지나친다면 매년 전세 이사 걱정없이 사는 당신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 <호수길>은 시종일관 거리에서, 골목길에서, 계단에서 진행된 영화이다. 하지만 56분30초가 되었을 때 정재훈은 집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가 집 안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발견하려는 것은 아니다. 집은 이미 모두 부서졌고 거기에는 삶의 흔적이 없다. 정재훈은 방 안에서 거의 중얼거리는 것 같다. 도대체 집 안과 바깥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그때 누구라도 깜짝 놀라게 쾅, 소리가 들리면서 바람결에 문이 닫힌다. 이 소름끼치는 소리. 사람 없는 집에서 문을 여닫는 바람. 카메라가 방 안을 둘러보기 위해서 천천히 한 바퀴 돌면 뜯겨져나간 창문 바깥에서는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고 있다. 그때 여닫히는 방문 소리와 기울어져가는 천장, 비틀리는 건축물의 기둥이 내는 사운드는 마치 사라져가는 집이 내는 신음소리처럼 무겁고 비통하다. <호수길>의 마지막 장면은 7분15초 동안 포클레인이 집을 부수는 단 하나의 숏이다. 주변은 이미 다 부서져서 그 많던 집들은 사라졌고 마치 공터처럼 텅 빈 공간에 세채의 집이 서 있을 뿐이다. 폭탄을 맞은 것 같은 풍경. 아니, 차라리 여기는 달 표면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중 가운데 집을 포클레인이 부수기 시작한다. 정재훈은 그걸 바라본다. 이 장면은 너무 짧다. 여기서 이 시간은 특별한 호소이다. 7분15초는 이층집 한채를 완전하게 다 때려부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사건없는 사건. 패배가 불 보듯한 상황의 정치학. 집은 우리의 삶의 방어선이다. 그것을 갖기 위해 삶의 대부분을 보낸다. 그 집에서 쫓아내기 위해 내가 알지 못하는 협상 테이블에서 재개발 결정이 난다. 그런 다음 그 집을 부수는 데는 고작 7분15초면 충분하다. 폭력적으로 기획된 질서. 그것을 당해낼 수 없는 가여운 존재의 슬픈 지리학. 정재훈은 두번 이 동네를 마지막으로 360도 회전하면서 바라본다. 거의 다 부서져버린 동네. 그게 단지 기억의 철거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집을 부수는 건 추억이 아니라 현실이다. 푸르른 하늘. 맑게 갠 날 떠 있는 한점 구름. 오늘은 날씨가 참 좋다. 응암2동은 그렇게 거의 다 부서졌다. 그런 다음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장면.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 불꽃. 우리 마음에 있는 그 꽃. 그저 재가 되게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그 꽃을 온 들판에 피어오르게 할 것인가. 기다림. 기대가 와야 할 미래. 기대, 그리고 미래. “나는 집 밖으로 나가서 동네를 오랫동안 쳐다보곤 했다. 그렇게 동네에 머무르면서 내가 보고 들었던 게 이야기가 되었다” 정재훈 자신의 <호수길>의 소개의 글. 그 비통한 과거완료시제. 이제 그는 더이상 이 동네에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더이상 오랫동안 쳐다볼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더이상 보고 들을 만한 것도 없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호수길>은 푸닥거리가 아니다. 그 반대로 우리에게 이 침묵으로 가득 찬 영화는 요구한다. 정당한 요구. 요구의 정의. 응답하라! 당신이 대답할 차례이다. 함께 대답할 당신에게 있는 힘을 다해서 해피 뉴 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