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텔레@CASHFILTER365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 검색결과

기사/뉴스(2003)

[영화읽기] 한없이 막장인, 그래서 정확한 멜로드라마

<스플라이스>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분명히 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영화가 아무리 그럴싸하게 위장을 하고 있다고 해도 하드 SF가 아니라는 것이다. <스플라이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시체 조각을 꿰매어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들 가능성보다 특별히 더 높지 않다.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상적인 과학자들이 영화 속 주인공 엘사와 클라이브가 벌이는 실수를 그대로 반복할 가능성은 전무하다. 하긴 익숙한 장르 관객은 컴퓨터가 ‘인간+동물 유전자 합성 삐뽀삐뽀!’를 알릴 무렵부터 그런 기대는 접었겠지만. SF라고 할까 막장드라마라고 할까 정말 딱 <프랑켄슈타인>이다. 빈센조 나탈리는 유전공학 시대를 무대로 자기만의 <프랑켄슈타인>을 만들었다. 심지어 주인공들의 이름마저 힌트가 된다. 엘사와 클라이브. 이들은 유니버설 <프랑켄슈타인> 시리즈의 배우들인 엘사 란체스터와 콜린 클라이브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일들 대부분은 <프랑켄슈타인>에서도 일어났다. 다양한 유전자들을 조각이불 만들듯 꿰매어 만든 드렌과 다양한 시체 조각들을 하나로 합쳐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비교는 너무 손쉬워 민망할 지경이다. 드렌과 엘사의 관계. 엘사의 애인인 클라이브와 드렌의 관계 역시 <프랑켄슈타인>의 부자 관계의 성전환한 거울상에 가깝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건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와 주제가 현실 세계의 과학보다는 장르 관습에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빈센조 나탈리가 유전공학에 대해 무슨 의견을 가지고 있건 <스플라이스>는 현실 과학과 그 위험성에 대해 생각처럼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스플라이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환상의 슈퍼 과학을 통해 과장된 가공의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로, 여기서 ‘과학’은 ‘마법’으로 전환되어도 아무런 무리가 없다. 중요한 건 이 시치미를 뚝 뗀 비현실적인 도구가, 소재가 되는 인간 드라마에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이다. 그것은 꼭 현실적이지 않아도 좋다. 그 연역과정이 얼마나 타당하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 인간을 잘 설명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우리가 가장 집중해야 할 것은 과학이 아니라 멜로드라마다. 그것도 가족드라마. 빈센조 나탈리는 <스플라이스>를 통해 우리가 올해 텔레비전에서 보았고 앞으로도 보게 될 막장 연속극들을 모두 모아서 쌓아올려도 그 발뒤꿈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막 나가는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현실세계만을 다루는 연속극 작가들은 결코 빈센조 나탈리의 영역에 도달할 수 없다. 그들의 제한된 상상력과 현실이 길을 막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막장성은 기존 SF의 우주전쟁이나 시간여행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SF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SF의 도구를 타고 영화는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했고 갈 수도 없는 곳으로 간다. 단지 그 종착역이 다른 행성이나 다른 시간대가 아닐 뿐이다. <스플라이스>가 다른 행성 대신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가족 관계, 그것도 모녀 관계가 도달할 수 있는 경계선의 끝이다. 이 영화에서 엘사와 드렌의 관계를 보자. 빈센조 나탈리는 시작부터 우리가 ‘어머니와 딸’에 대해 품고 있는 고정관념 저 너머의 지점에서 이야기의 터전을 잡는다. 엘사는 자신의 유전자 절반을 제공해준다는 기본적인 행위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것을 반대로 한다. 잉태하는 대신 잉태시키고, 보호하는 대신 이용하고 학대한다.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 영화의 모든 이야기들은 이런 식으로 부모 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심지어 영화가 깃발처럼 흔드는 ‘유전자 공학으로 탄생한 신종 생물에 대한 창조자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주제를 볼까? 얼핏 보기에 이것은 전적으로 과학과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스플라이스>에서는 훨씬 친숙한 주제로 치환된다.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와닿는 건 언제인가? 바로 부모 관계와 임신이 개입되었을 때다. 왜 사람들은 우리의 몸이 모두 유전자 공장이며 실험실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인가. 엘사의 이런 위치는 자연스럽게 ‘나쁜 엄마’의 역할로 넘어간다. 하지만 엘사의 역할이 부정적인 여성적 스테레오 타입을 일부러 과장한 것이라는 의심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자. 타당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라(오히려 반대다) 기능성을 따진다면 더 큰 의미가 있는 주제가 이미 있으며, 엘사의 역할 역시 거기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플라이스>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창조주’로서 부모의 권리이다. 이는 서구의 유대/기독교 전통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미신으로,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의 주제이기도 했고, 그 이후 수많은 SF에서 복제된 주제이기도 하다. ‘나쁜 엄마’인 ‘미친 과학자’ 엘사의 위치가 보기만큼 단순하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부분의 SF영화에서 엘사의 위치는 아버지와 남성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이 두 역할은 겹치지 않는다. 이 역할을 여성에게 주는 것은 단순한 역할 전환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미 과학이 부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처럼 계승되어오던 ‘창조주 아버지’에 대한 신화를 무심히 깨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나탈리는 당연하다는 것처럼 그 역할을 여성인 엘사에게 주는데, 그 부정할 수 없는 생물학적 정확함은 오히려 신선해 보인다. 부모의 위치가 바뀌면서 드라마도 변화한다. 아버지-아들의 관계를 다룬 일반적인 <프랑켄슈타인> 신화는 대부분 아버지의 권위에 대항하는 아들의 이야기로 수렴된다. 누가 권력을 잡아 신의 위치를 지키거나 차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하지만 <스플라이스>에서 권력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이 영화에서 좀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해’의 영역이다. 이 역시 기본 골격은 익숙하다. 영화에서 드렌이 펼치는 모든 이야기는 “왜 엄마는 날 이해 못해!’라는 10대의 절규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단지 영화는 익숙한 순환의 미신을 깬다. 엘사는 끝끝내 드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온전한 딸로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그것은 ‘나쁜 엄마’인 엘사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딸’인 드렌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리 약간의 유전자를 공유한다고 해도 둘은 생물학적으로 어쩔 수 없는 타자이고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엘사가 드렌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가두려 해도 드렌은 늘 새로운 탈출구를 찾는다. 피와 살이 튀는 가족 멜로 드렌의 이야기는 이 이해불능 사태를 극도로 과장한 잔인한 코미디 시리즈다. 엘사와 클라이브는 드렌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이 정체불명의 생명체이며 딸인 존재를 익숙한 틀에 넣고 해석했다가 그것을 깨트리고 다음 틀에 넣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늘 불완전한 해답만을 제공해줄 뿐이며 드렌은 늘 이해 불능의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것은 부모에게 최악의 악몽이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그들의 연속이길 바라고 성장 과정의 불이해는 순환의 과정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탈리는 드렌과 엘사의 관계를 그리면서 그 미신을 하나씩 발로 밟아 으깬다. 영화 후반에 이르면 드렌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학대들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엘사의 폭력적인 대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엘사에게는 드렌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는 방법이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다. 아마 그런 것은 처음부터 없는지도 모른다. 아까 나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에 드러나 있는 과학이 아니라 그를 매개로 발생하는 멜로드라마라고 했다. 하지만 다시 보면 <스플라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과학에 대한 영화다. 단지 그것은 유전공학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과학의 추구와 그 결과물에 대한 소유욕과 통제의 환상에 대한 은유이다. 나탈리가 <스플라이스>를 통해 거둔 최대의 업적은 이 익숙한 추구의 과정을 피와 살이 튀는 가족 멜로드라마의 언어를 통해 재구성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 멜로드라마는 한없이 막장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다. 늘 경계선 밖을 탐구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막장 아닌 어떤 것을 기대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당연한 사실이라면 우린 처음부터 이 막장 드라마의 가능성에 대비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소녀들만 좋아하라는 법은 없다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이클립스>가 개봉한다. <씨네21>은 <트와일라잇>과 <뉴문> 개봉 당시 이 영화에 관한 뜨거운 팬덤 현상에 관해 입체적으로 기사화한 바 있다. 세 번째 시리즈 <이클립스>는 좀더 친밀하고 유머러스해졌다. 그러나 기본적인 감성은 변하지 않았다. 이쯤 되니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한 소녀들의 이례적인 열광에 관해 단상을 붙일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인기와 매력을 어떻게 볼까. 가장 거리가 멀어 보이는 아저씨의 눈으로 보면 신선하지 않을까?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연관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는 게 곧 밝혀졌다. “이 시리즈는 소녀 취향이다”라고 누군가 단언하자 다들 동의했다. 그러자 누군가 이어 말했다. “그것에 관해서는 많이 써왔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영화와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필자가 써서 의외성을 주면 어떻겠나. 가령 아저씨가 보는 길티 플레저로서의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어떠한가.” 화살의 방향은 이제 엉뚱하게 바뀌었다. 소녀들과 가장 어울려 보이지 않을 사람은 누구인가, 아저씨 중의 아저씨는 누구인가, 그 오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결국 피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당첨됐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소녀들에게 미안하다. 키다리 아저씨는커녕 키 작은 아저씨가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한 어설픈 단상을 풀어놓게 된 사연은 이렇게나 순식간이었다. 그러니까 회의시간에는 딴생각을 하면 안된다. 다행히도 <트와일라잇>과 <뉴문>이 싫지 않았다. 환호까진 아니었어도 관심 가는 부분들이 없지 않았다. 텔레비전으로 뒤늦게 <트와일라잇>을 보았을 때 어떤 매력을 느꼈고 “애들이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네” 하고 뭔가 아는 척 혼잣말을 했던 기억도 있다. <뉴문>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저 멀리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하고 자신의 할머니인 줄 알고 좋아하던 여주인공 벨라가 가까이 다가온 노인을 보고 미래의 나이든 자기 자신의 모습임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장면은 인상 깊이 남아 있다. 1편 <트와일라잇>이 장르적 균형감각과 하이틴물의 자극에 민감했다면 2편 격인 <뉴문>은 원작이 지닌 분위기를 좀더 숭배함으로써 오히려 실패작으로 취급받은 것 같다. 솔직히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재미를 말할 때는 만듦새의 편차를 논하기보다 원작에서 시작된 소녀들의 환호성이 어떻게 영화에서도 이어지는지 그 속내를 궁금해하는 편이 더 흥미롭겠다는 생각이다. 무엇이 소녀들의 환호성을 끌어내는가. 끝내 알지 못한다 해도 자리가 이렇게 되었으니 한마디 거들고 싶은 게 이 아저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뒤늦게 TV로 본 <트와일라잇>의 매력 먼저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관해. 출중한 외모의 남자 배우 로버트 패틴슨 때문인가. 일단 그런 것 같다. 개인적으로만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크리스토퍼 워컨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청년의 외모는 창백하고 차갑지만 이성적인데다 연민까지 끌어내는 면모가 있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뱀파이어 주인공에 제격이다. 게다가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의 행위는 관능적 성행위로 은유되어온 것이 사실인데 이 친구가 낮은 목소리로 대사를 던질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거절하기 힘든 구애의 행위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조차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알려진 것처럼 거의 모든 화제가 로맨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벨라의 사랑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벨라에게 투영된 소녀들 자신의 사랑에 관한 어떤 욕망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어떤 관객은 여기에 관해 온라인상에 귀여니의 소설식으로 평해 놓았다. “다들 나만 좋아해. 그리고 내 속은 아무도 몰라.” 그 말은 적절하다. 혹은 툭하면 얼굴이 상기되고 거르지 않은 짜증을 내고 다니던 <미쓰 홍당무>의 여주인공 양미숙이라면 벨라를 보고 다른 식으로 심하게 말할 것이다. “네가 무슨 캔디냐. 다 너만 좋아하게.” 그것은 사실이다. 모두가 벨라를 좋아한다. 그것이 소녀들이 벨라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존재한다는 것이 더 흥미롭다. 모두가 벨라 때문에 곤경을 겪는다. 벨라가 뱀파이어 에드워드를 사랑하게 되고, 그들이 그것을 숙명으로 여기자, <뉴문>부터는 늑대의 혈족인 제이콥과의 삼각관계가 강력하게 형성되고 <이클립스>에 이르면 그 삼각관계는 정점에 이르게 된다. 꾸준히 이어지는 삼각의 릴레이. 그런데 삼각관계와 숙명적 사랑에 관해 말할 때 벨라가 사랑하지만 정작 사랑하는지조차 모르는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이제는 더 중요해 보인다. 너무 뻔해 보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벨라를 사랑의 열병으로 몰아넣은 대상인 에드워드와 제이콥에 관해 말할 때 잘 묘사되지 않는 인상 하나가 있다. <뉴문>에서 에드워드의 가족이 벨라의 깜짝 생일파티를 해주기 위해 모여 서 있을 때 혹은 <이클립스>에서 외부인을 기다리며 에드워드 가족들이 무리지어 서 있을 때, 그들의 자태와 패션 등이 미국의 텔레비전 드라마의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나는 그들이 서 있을 때 어딘지 모르게 뉴욕 최상류층의 이야기를 다루는 <가십걸>의 포스터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그에 비한다면 제이콥과 그의 가족은 인디언의 혈족이며 오두막에 가까운 허름한 집에 살고 있으며 웃통은 벗고 다니고 성격은 거칠고 투박하다. 세련되고 부유한 상류층 화이트칼라와 거칠고 투박한 블루칼라라는 대립구도가 <트와일라잇> 시리즈 안에 있다는 것이 때묻은 아저씨의 눈에는 중요해 보인다. 해선 안 되는 것에 대한 소녀들의 환상 오해가 없으면 좋겠다. 이건 벨라의 로맨스가 은연중 상류층 출세기로 점철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건 지금 이 말의 핵심에서 벗어난다. 그보다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중요한, 벨라와 에드워드와 제이콥의 삼각관계가 그녀를 사랑받고 사랑하게 만드는 모종의 대립구도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가령 하이틴 대 어른, 사람 대 뱀파이어, 늑대 대 뱀파이어, 나쁜 뱀파이어 대 착한 뱀파이어, 높은 지위의 뱀파이어 대 낮은 지위의 뱀파이어라는 식으로 겹겹이 대립 국면이 형성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제의 원인이 된 벨라는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위반하고 뛰어넘어야 한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는 일관되게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것’이 대치하고 있으며 그것이 교차할 때 긴장감이 증폭한다. 특히나 벨라는 마치 그 규약들을 무너뜨리고 위험에 빠뜨리는,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새로 세우는, 일촉즉발의 사태 그 자체다. 그것이 벨라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서 벨라의 사랑을 그냥 사랑이 아니라 더 낭만적이며 더 숙명적인 것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벨라의 선택 때문이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것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벨라 때문이다. 벨라는 에드워드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제이콥의 만류에도, 심지어 에드워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뱀파이어가 되기를 희망한다. 하이틴 문화에 대한 관습적 이해도의 차이에 따라 한국 소녀들과 미국 소녀들의 환호성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벨라의 사랑의 정체는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무엇을 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걸 하고 싶다’에 가까울 것이다. 그것이 <트와일라잇>의 로맨스를 영원하게 한다. 벨라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에드워드인지는 모르겠으나, 벨라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독자와 관객의 환상은 벨라와 에드워드를 둘러싼 그 장벽과 금지가 아닐는지. 그러니 벨라가 숙명이라고 말하는 것에 관해, 이 시리즈를 사랑하는 소녀들이 그렇게 믿는 것에 관해, 정작 사랑의 마음을 불러온 건 강력한 금지와 장벽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 될 것인가. <트와일라잇>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판타지는 그것을 숙명에 대한 실현으로 뒤집어 읽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고전적 사랑에의 낭만성으로 대표되는 작품들. 로미오와 줄리엣 사이에 놓인 기나긴 밤 그러나 곧 오게 될 헤어짐의 새벽. 엘리자베스 베넷과 미스터 다아시 사이에 놓인 오해의 소용돌이(<오만과 편견>).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사이에 놓인 증오에 가까운 사랑(<폭풍의 언덕>). 당신이 남자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서는 그와 당신 사이에 장애를 설치해야만 한다는 대중연애지침서의 가르침에 이르기까지 모두 해당하는 그것이 미국 소도시의 평범한 10대 소녀 벨라와 109살 먹은 뱀파이어 에드워드의 사랑으로 옮겨왔다. 아저씨도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좋다 <트와일라잇>의 원작자 스테파니 메이어는 소녀와 뱀파이어가 사랑에 빠지는 ‘꿈’을 꾼 다음 이 작품을 쓰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19세기에 꿈을 포함하여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을 분석하기를 즐겨했던 그 유명한 아저씨는 참고할 만한 말을 이미 해두었던 것 같다. “리비도를 최고조로 부풀리기 위해서는 어떤 장애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역사의 모든 시기에서, 만족을 가로막는 자연적 장벽이 충분치 않았던 어떤 곳에서건 인류는 사랑을 즐기기 위해서 인습적 장벽을 세웠다.” 어쨌거나 원작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을 써내려간 식이니 우리는 그 아저씨의 말을 참고할 만하다. 물론 여주인공 벨라와 <트와일라잇>의 소녀들은 다르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뉴문>에서 벨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침대에 두고 잔다. 영화에는 제외되었지만 원작 <이클립스>에서 벨라는 <폭풍의 언덕>의 한 구절을 마치 경전처럼 읽는다. “만약 모든 것이 사라져도 그가 남는다면 나는 여전히 살아갈 거야. 하지만 다른 모든 게 남고 그만이 소멸한다면 이 우주는 아주 낯설어지겠지.” 벨라의 그 말을 믿고 싶다. 그 말은 아름답다. <이클립스>를 극장에서 본 날 벨라는 에드워드의 프러포즈를 마침내 받아들였고 극장을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관심을 갖게 된, 그러니까 미스터 다아시가 되고 싶었으나 남산 밑의 아저씨 중의 아저씨로 뽑힌 키 작은 아저씨는 잠깐 딴생각을 해보았다. 그나저나 이유는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아저씨도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좋다.

“엔딩에 대한 반응은 관객과 나의 싸움”

강우석 감독은 신작을 만들면 최종편집 전에 늘 영화계 지인들을 편집실에 불러 미니 시사회를 연다. 모니터를 한다는 명분이지만 그에게 직언할 만한 영화인들은 많지 않다. 강우석 자신이 먼저 자기 작품에 자긍을 표할 때 그에게 비판적인 말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끼>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다. 잡지계를 떠나 대학교수가 된 뒤에 이 비밀 시사회의 초대명단에 오른 나도 <이끼>를 먼저 보게 됐다. 가기 전에 마음이 불편했다. 혹 직언을 해야 할 상황이 오면 발언 수위 조절에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한반도> 촬영 당시 현장에 갔다가 시나리오를 읽고 비판했는데 그에게 원망을 들었다. <한반도> 개봉 직후에 그를 만나 또다시 비판하자 그의 반응에 날이 서 있는 것을 느꼈다. <한반도>에 대한 내 비판이 균형잡힌 것이었음을 그가 인정하기까지는 개봉 몇주가 지나야 했다. <이끼>의 가편집본을 본 몇달 전, 나는 이 영화가 강우석의 이때까지의 작품 중 최고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반신반의했다. “뭔가? 또 뒤통수치려고?” “영화 속 모든 인물의 캐릭터가 살아 있습니다.” 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근데 흥행은 될 것 같아?” “잘되겠죠. 확언할 순 없지만.” 그로부터 몇달이 지난 뒤 공식시사회가 있던 날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그와 마주쳤다. “어때? 문제없지?” “문제없습니다. 후반부에 확 치고 올라가는데요.” 그는 승자의 웃음을 짓고 사라졌다. 그는 한때 그의 영화를 냉소했던 내게 무언의 승리감을 표하고 있었다. <이끼>는 <공공의 적>과 함께 강우석 영화의 이정표가 될 만한 작품이다. <투캅스>로 부동의 흥행감독이 되기 전부터 강우석 영화는 늘 경쾌한 풍자의 세계였다. 얕게 찌르고 관망하는 코미디를 통해 그는 대중과 접촉했다. 이어지는 <투캅스> 연작과 <마누라 죽이기> <생과부 위자료 청구 소송> 등에서 그는 좀더 깊게 찌르는 대신 풍자의 밑천을 소재에 의존하며 퇴행했다. <공공의 적>은 강우석의 코미디 감각이 일종의 블랙유머적 아이러니로 확장하면서 그의 작품세계의 지평을 바꿔놓았다. 풍자의 무게와 마찬가지로 극적으로 강렬한 파토스가 인물에 스며들어 직선적인 그의 영화에 낯선 여백과 틈과 아이러니를 생성시켰다. 이는 <실미도>의 감상주의에 부분적으로 스며 있던 것이기도 하지만 <이끼>를 통해 더 큰 진폭으로 넓어졌다. 원작 만화의 양식화된 누아르 감성 대신 그는 각 캐릭터에 고르게 에너지를 분산하고 권력시스템 내에서의 리더와 집단의 관계에 대해 복합적인 성찰을 새겨놓았다. 이는 강우석의 직설화법에서 지금까지 가장 멀리 나아간 성취일 것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 윤태호의 만화 <이끼>를 강우석이 영화 <이끼>로 만드는 그림은 뜻밖이었다. = 사실 <강철중: 공공의 적1-1>을 찍고 나서 고민이 있었다. 이 시리즈를 당장 또 이어가는 건 식상했다. 감독으로선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제작자로선 <김씨표류기> <주유소 습격사건2> <용서는 없다> <백야행>을 스타트시켰다. 이 영화 4편에 회사의 운명을 맡길 상황인데, 그 영화들이 안됐을 때 대비할 만한 게 뭐가 있을지 갑자기 불안했다. 시네마서비스 건물을 팔고 어려울 때였다. 막연히 또 다른 흥행영화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하던 참에 <이끼> 기획이 들어온 거다. 렛츠필림의 김순호 대표가 제안한 아이템인데 그가 예전에 내 제작부를 했던 인연이라 읽어보고 거절하려 했다. 그런데 읽다보니 순간적으로 확 끌렸다. 김순호 대표를 불러 어떻게 만들 거냐고 물었더니, 마을 하나를 잘 헌팅해서 15억원 정도 예산으로 찍겠다는 거다. 감독은 누구냐고 했더니, 몇몇 감독을 후보에 올려놓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일이 진행됐는데 내가 후보에 오른 감독들을 다 거절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가 연출하고 싶어서 이런 게 아닐까 싶더라. 김순호한테 내가 연출하면 어떠냐고 했더니, 자기는 발을 빼고 나한테 다 맡기겠다고 했다. 오케이, 그럼 기획비 지불하고 이익금 일부는 나랑 나누자고 했다. 그렇게 시작했는데 후회하는 데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웃음) - 원작만화가 연재 중일 때 결정한 건가. = 3분의 1쯤 전개됐을 때다. 왜 그렇게 성급했나 싶더라고. 나중에 원작이 잘 못 나오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감이 있었다. 그래도 초반에 이 정도의 드라마로 시작했다면 좋은 엔딩이 있을 것 같다고 믿었다. 원작이 좋은 결말을 못 찾으면 내가 찾으려고 했다. 정지우 감독이 각본을 쓴 초고는 원작이 엔딩을 내기 전에 나왔다. 그 뒤에도 죽 고쳤고. 지금 완성된 버전에서 볼 수 있는 엔딩은 촬영 들어간 뒤에도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로 나온 거다. - 원작의 드라마를 영화로 옮기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뭐였나. = 그림을 보면 말이 되지만, 영화에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지 않나. 영지란 여자 캐릭터만 해도 원작에서는 관능적이고 퇴폐적인 면이 있다. 특히 창고에서 4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인, 성교를 암시하는 장면을 그대로 가져오면 영화에선 불편한 이미지가 될 것 같았다. 또, 만화에서는 현재에서 과거로 바로 넘어가는 게 큰 문제가 없지만, 영화는 아무 때나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플래시백이 드라마 호흡을 짜는 데는 상당히 거추장스러우니까. 그런 구성을 다시 짜는 게 어려웠다. - 원작의 분위기는 상당히 누아르적이다. 그 스타일을 버리는 게 이 영화에 좋았던 것 같다. 좀더 캐릭터 중심으로 갔고 그게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 누아르로 만들려 했다면 못했을 거다. 난 그렇게 찍을 방법이 없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누아르로 갔다면 시각적으로 상당히 피곤했을 거다. 감정적으로도 보는 내내 답답했을 테고. 영화 <이끼>는 원작에 비해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린다.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려고 하는 신의 대리자를 자임하는 자와 속세의 소권력자를 자임하는 자의 대결은 원작과 같다. 그렇지만 이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비중은 원작보다 훨씬 커져 있다. 영화는 그들의 반응을 원심적으로 그려내면서 권력자들의 대결구도에 그치지 않는 결론을 예비해둔다. 권력은 필연적으로 악한 것이라는 속설 외에 권력자들의 대립과 소멸 이후에 누군가에 의해 권력은 계속 추구되는 삶의 꼴이 그려지며 좋은 권력과 나쁜 권력이 아니라 권력으로 뭘 소용될 수 있게 하는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아니,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걸 개별적인 인간들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더 큰 잔영으로 남는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이 보여주는 선악의 밀도는 각자 차이가 있지만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공감이 더해지면서 똬리를 튼 뱀처럼 사적인 악과 공적인 선, 또는 그 역의 문제가 인간의 개별성 차원에서 복합적인 차원으로 묘사된다. - 영화에 담긴 권력에 대한 관점이 흥미로웠다. 천용덕 이장이 자신만의 유토피아를 꾸리려고 했던 류목형에게 “넌 신이 되려고 했냐? 난 인간이 되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이상과 현실 차이에서 오는 결핍이나 좌절감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은유로 볼 수도 있겠더라. = 사람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류목형이란 영화 속 인간은, 베트남전의 후유증이라고 하지만, 결국 신처럼 뭔가를 해보려 했던 거다. 그런데 결국 그가 만들려는 파라다이스는 엉뚱한 인간이 만든다. 이런 부분을 정치적으로 대입해도 크게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다. 관객이 영화를 복기할 때 어떤 결론이든 많을수록 좋은 것 같다. 하지만 굳이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보다는 긴장감있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봐주면 좋겠다. - 강우석 감독의 영화는 2000년대 이후로 변했다. <공공의 적> 1편에서 놀란 부분은 이전에 없던 강렬한 파토스가 들어와 있다는 거였다. <실미도>도 신파로 변형된 부분이 있지만 그런 파토스가 있었다. 그리고 <한반도>에는 사라졌고, <이끼>에서 다시 돌아왔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볼 때는 놀라운 게 있다. 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비약하는 지점이 있다는 것 말이다. <이끼>는 그 농도가 더 센 것 같다. 인물 각자의 존재 이유를 다 보여주는데, 그럼에도 파멸의 스토리다. 그런데 또 뒤에서 큰 그림을 보면 권력승계의 드라마가 이어지는 엔딩이다. = 사실 나는 <공공의 적2>도 사람들이 재미있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나에게 그 영화는 검사라면 이래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나중에 <강철중: 공공의 적1-1>을 찍었을 때 지인들이 근데 2편은 왜 그랬느냐고 하더라. 나는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사회가 굴러간다고 조금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건데 말이다. <한반도>도 <실미도>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못 만든 게 아니다. 하지만 사람을 저렇게 그리면 안된다는 반발들이 있었던 거지. 그래서 <이끼>에서는 좀더 내 속에 있는 진짜 이야기를 하려 했다. 내가 어떻게 영화를 찍고 싶은지, 캐릭터를 어떻게 움직이고 반전을 어떻게 줄지 여기서 한번 다 녹여보려 했다. 믿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을 때 헛발질은 아닌 것 같다. - <한반도>에 대한 이야기를 좀더 해보자. 선악이 분명하고 히어로가 있고 판타지가 있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영화에선 통하지 않는 직설적인 판타지다. = 내가 제작한 <신기전> 때 그런 걸 느꼈다. 이 영화를 두고도 민족주의다 뭐다 하는데, 정말 무섭더라. 우리가 발명한 신기전이란 미사일에 대한 근거와 고증이 있는데도 말이다. 전투장면에서 적들을 너무 쉽게 물리쳐서 그럴까. 갑자기 20대들한테 민족주의 영화로 몰리더라. 그러면 TV에서 <주몽>을 보고 난리친 건 뭔가? 아무튼 한때는 <한반도> 때 욕했던 사람들을 미워했는데, 그 이후로 미워하지 않았다. (웃음) - <이끼>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네티즌의 반발이 있었던 것도 전작의 그런 모습 때문이었을 것 같다. = 왜 하필 강우석이냐, 감독 바꾸라고 했다. 내가 제작자인데, 내가 나를 왜 바꾸나. (웃음) 박찬욱이나 봉준호 같은 특정 감독을 거론하기도 했다. <이끼>의 장르적 특성상, 이 엄숙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왜 당신 같은 감독이 어쭙잖은 유머로 만들려고 하냐는 의견들일 거다. 사실 내가 그런 댓글을 잘 안 보는데, 이번에는 안 본 댓글이 없다. 도대체 사람들이 원작의 어떤 부분에 열광하는지 궁금했다. 그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촬영 중반 넘어갈 때는 우울증까지 생겼다. 방에만 들어가면 고민인 거지. 내일 찍는 게 그리 대단한 장면도 아닌데, 다시 시나리오 보고, 만화도 봤다. 내가 바보가 되는 것 같더라니까. 결국 그때마다 술 마시다가 취기로 잠들었다. 그러다 아침에 눈뜨면 모르겠다, 일단 찍어보자는 심정으로 나가고. 그런데 현장에서 찍다보면 또 오후에는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잘 찍은 기분이 있어. 말하자면 변태 비슷한 거지. (일동 웃음) <이끼>에서 가장 잘된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등장인물들 모두 한 장면 이상씩의 명장면들이 있다. 천용덕 이장 역의 정재영은 느물거리는 면과 사악한 면의 경계 사이에서 인간적인 욕망의 구체적인 덩어리를 보여준다. 이렇게 선이 굵은 캐릭터를 연기하는 쉬운 방책인, 이른바 열연한다는 것의 방증으로서 정재영은 일상적이며 심지어 근친관계를 느끼게 하는 악의 화신을 보여주었다. 박해일은 그런 정재영을 상대해 눈을 똑바로 뜨고 꼿꼿하게 걷는 것의 표면적인 연기의 힘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원작에 비해 가장 진폭이 큰 것은 이장의 충복인 김덕천 역의 유해진의 연기인데 권력에 의탁한 자 내면의 두려움과 피로를 유머로 위장했다가 막판에 폭발시키는 굉장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박민욱 검사 역의 유준상은 거침없이 내지르는 연기의 간결함을 통해 꾸밈없는 듯 보이는 외형이 인물의 내면에 어떻게 가닿는지 증명하고 있다. 김상호와 김준배는 존재감을 축으로 한 타입 캐스팅의 위력을 드러낸다. 또, 영화가 끝나고 나면 유선이 연기하는 영지 역이 가장 뇌리에 남는다. 드라마의 감정선에 충실한 연출자, 쉽게 말해 전형적인 방식의 연출자인 강우석이 이들 배우에게서 각자의 인장을 남기게 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강우석은 대화장면에서 텔레비전 스타일의 나눠찍기 연출을 마다지 않는 감독이지만, 수식이 별로 없는데도 상투적이지 않은 것은 클로즈업이나 기타 고정 화면으로 잡힌 앵글 속에서 배우들이 각자의 존재감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클라이맥스 장면을 비롯해 이 영화는 가장 전형적인 방식이 정통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리듬과 템포로 보여주는 증표다. - 인물의 성격을 묘사하는 태도가 원작과 다르다. 원작은 선악구도가 비교적 명확한데, 영화는 그렇지 않다. 인물 각자의 존재구도가 다 있다. 그게 매력적이기도 하고. 정재영이 연기하는 마을 이장, 절대적 권력자인 천용덕 같은 인물만 봐도 냉혹한 인간이지만 과자와 콜라를 먹으며 컴퓨터로 고스톱을 치는 일상이 자연스럽게 묘사된다. 약간씩 인물들에게 인간적인 피와 살을 덧붙인 건 강우석 감독의 영화세계에서도 흥미로운 변화로 보인다. = <이끼>가 나에게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면서 과거의 나를 거꾸로 추적해봤다. 영화계와 대중은 왜 <공공의 적>에 그렇게 호의적이었는가. 관객이 아주 터진 건 아니지만, 여전히 내 영화의 맨 앞줄에 그 영화를 세우지 않나. 그럼 <한반도>는 일정하게 흥행이 됐지만 왜 그렇게 비난을 받았는가. 관객의 이중적인 태도 탓은 아니라고 본다. 좀더 객관적으로 사람을 봐라, 이런 반응이 아닐까. 직접적인 화법이 지나치면 관객은 우롱당한 느낌을 받는다는 거다. <이끼>를 연출할 때, 이런 장르가 항상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봤다. <공공의 적>의 묘미는 상당히 썩어 있는 악의 축인 인물이 더 큰 악의 화신인 인물과 대결한다는 지점이었다. 결국 사람은 다 얼마간 악한데, 악인이면 끝까지 악인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서도 관객이 이해할 수 있는 악인의 분노를 그리는 한편, 좀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을 담으려 했다. 그게 나름 복잡한 해석에서 나온 건 아니다. 고통스럽게 찍었지만, 전작들에 대한 반성이 <이끼>에 들어 있다고 보면 된다. - 배우들의 연기가 다 좋다. 영지의 캐릭터가 원작하고 가장 다르다. 좀더 밝고 음보다는 양의 기운이 많은 캐릭터다. 원작에서는 완전 음의 캐릭터 아닌가. 그 부분은 시나리오를 처음 쓸 때부터 계획했던 것인가. = 유선이 합류하기 전에 엔딩을 풀었다. 엔딩을 설정하고 앞부분을 다 뒤집었다. 그러면서 영지의 캐릭터도 변했다. 농담 잘하는 여자 같은 캐릭터다. 유선도 처음에는 그런 분위기의 대사를 어색해하더라. 그래서 예정된 엔딩을 설명해주니까 좋아 죽더라. 영화 속 엔딩의 모티브는 영지가 어린 시절에 겪은 상처였다. 그런 설정 때문에 영지가 단순히 남자들의 관음적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스스로 관찰하는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지의 엔딩에 대한 반응은 관객과 나의 싸움이기도 하다. - 엔딩이 절묘했다. 대중영화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면서 동시에 다른 그림을 그려놓는 엔딩이었다. = 일반 관객이 그렇게만 받아주면 흥행할 것 같다. 그런데 평론가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다시 또 불안해지네 이거…. (웃음) - 배우 이야기를 좀더 하자면, 검사 역 유준상의 연기도 신선했다. 원작의 캐릭터는 굉장히 짓눌려 있는데, 영화에서는 스스로 치고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 상당히 많은 성격을 자기 스타일로 끌어들인 것 같더라. = 유준상이 처음에는 불안해했다. 그리 큰 역할이 아니니까. 나는 한컷 찍으면 그 컷이 그대로 나온다고 안심시켰다. 검사가 짓눌려 있는 캐릭터였다면 <이끼>는 현대극이 아니라 사극처럼 보였을 거다. 배경이 시골이고, 인물도 시골 사람이기 때문에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지만, 사실상 과거처럼 보이지 않나. 그래서 검사는 유일하게 현대적인 인물이어야 했다. 그의 말과 행동이 현실과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주려 했다. 유준상은 처음에는 연기에 많은 설정을 계산하고 왔는데, 초반에는 나에게 타박을 많이 받았다. 쓸데없는 동작을 하지 말라고 했다. 말도 또박또박하고. 워낙 순발력이 좋아 바로 따라붙더라. - 천용덕 역의 정재영은 발군인데 그와 대적하는 류해국 역의 박해일도 의외였다. 캐릭터상으로 천 이장에게 먹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박해일에게도 무시하지 못할 기운이 나오더라. = 류해국이랑 박해일이 잘 안 맞는다고 나도 모르게 투정을 자주했다. 처음에는 나를 피하더라고. (웃음) 그도 금방 적응했다. 워낙 에너지가 좋아서 눈에서 불을 뿜는다. - 요즘 한국영화의 흥행작들을 보면 밋밋해지는 경향이 있다. <이끼>는 그렇지 않은 대중영화의 방향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흥행에 성공한다면 긍정적인 여파가 있을 것 같은데, 그래도 두려운 부분이 많을 것 같다. = 당연하지. 세상을 50년 정도 산 사람이 사람을 그리는 데 그렇게 실수하겠는가 싶다가도, 영화 속 인물들이 이 시대에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맞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원작의 팬들은 그 칙칙하고 음습한 마을에 열광했다. 그 드라마를 이해한다면 영화도 충분히 이해받을 거라고 본다.

영화의 21세기적 환생체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신세기에 출현한 가장 비범한 감독은 누구인가? 그 질문에 타이의 영화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이름은 수없이 불렸고 늘 상위권에 있었다. <열대병>과 <징후의 세기>는 21세기 최고작을 뽑는 어떤 자리에서도 거의 빠지지 않고 거론되었다. <씨네21>의 1998년에서 2008년까지의 베스트10 목록에도 있었다. 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여섯 번째 장편영화 <엉클 분미>가 그의 영화 중 처음으로 국내 개봉한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과연 <엉클 분미>는 어떤 영화일까. 그 내용과 감상을 전한다. <씨네21>이 칸에서 그와 나눈 대화(756호), 다시 시네마디지털서울영화제 개막작 감독으로 한국에 왔을 때 그와 나눈 대화(769호) 등과 함께 읽는다면 더 흥미로운 첫 번째 만남의 자리가 될 것 같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이라는 낯설고도 신기한 감독은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던 2000년에 그의 첫 장편 <정오의 신비한 물체>와 함께 출현했다. 이 영화에서 극이 시작되지 않고 아직 다큐일 때 생선장수 아주머니의 슬픈 과거사를 듣고 있던 카메라 뒤의 아핏차퐁은 “우리에게 들려줄 다른 이야기는 또 없나요”라고 묻는다. 아주머니가 뭔가 생각난 듯 말하려 할 때 컷. 휠체어에 앉은 소년과 가정교사가 있는 집 안이 보이고 영화는 이제부터 종잡을 수 없이 흐른다. 정말 종잡을 수 없다. 한명의 화자가 이야기를 하면 아핏차퐁이 그걸 영화로 반영하고, 다시 누군가가 이야기를 보태면 또 영화의 내용으로 반영해 수십명의 이야기로 한편의 영화가 완성된다. 그러니 영화는 말 그대로 산으로 가는데 그 과정이 놀랍게도 생기 있다. 서구의 한 평론가는 그걸 초현실적 기법 안에서 해명하려고도 했지만 실은 그건 집단적 서사 구전의 과정을 영화적으로 명석하게 시도한 것에 더 가깝다. 그때 이야기는 누구에 의해 꼬리 무느냐에 따라 태어나고 또 태어나며 평등하게 혹은 상상적 공동체의 이야기로서 울려퍼진다.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의 운명 혹은 환생하는 이야기 그것이 <정오의 신비한 물체>가 다루고자 한 것 중 하나였고, 환생이란 아핏차퐁의 지속적인 영화적 관심사이며 여섯 번째 장편 <엉클 분미>에서는 환생하는 생물체, 환생하는 영화로 다시 돌아와 있다. 타이의 한 평론가는 아핏차퐁의 영화를 “환생의 시네마”라고도 불렀다.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를 본다는 관점 이미지를 다루는 영화감독 중에는 자신의 작품에 달라붙으려는 개념들을 최대한 밀쳐내고자 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스스로 알아서 매우 명석하게 자기 개념들을 도출하고 정렬해내는 쪽도 있다. 아핏차퐁은 철저하게 후자에 속한다. 그가 자기 영화를 설명할 때마다 참고하는 은밀한 자신만의 개념어 사전이라도 하나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그걸 다 나열할 순 없다. 정글, 질병, 기억, 전생, 시간성, 움직이는 이미지, 연출(directing)이 아니라 고안(conceiving) 등등. 환생은 그중 하나에 속할 뿐이다. 하지만 “<엉클 분미>는 영화와 환생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 영화는 대안적인 우주와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을 창조하는 인간만의 방법이다”, “이 영화는 나의 고향과 내가 자라면서 영향을 받은 영화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라고 그가 말할 때 이 말이 이상하게 지금까지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엉클 분미>는 사람의 환생에 관한 것이되 영화의 환생에 관한 것이고 동시에 그 환생을 보는 관객이라는 유령을 의식하고 만든 것이다. 관객이라는 유령이라니. 이 점은 아핏차퐁이 생각하는 영화의 존재론 혹은 영화의 유령론에서 나온 말이다. 아핏차퐁은 자신의 에세이 <어둠 속의 유령들>에서 “관객 유령들”(the audience ghosts)이라고 표현한다. “영화(film)를 보는 동안 주변 사람들이 어떠한지 알아차린다면 당신은 그들의 행동이 마치 앞에 있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든 유령들 같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영화(cinema)는 그 자체로 마치 주술에 걸린 것처럼 앉아 있는 육체가 담긴 관과 같다. 스크린의 움직이는 이미지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의 카메라 기록이다; 그것들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일제히 엮어냄으로써 영화(film)로 불린다. 이 어둠의 넓은 방 안에서 유령들(관객)이 유령들(영화)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아핏차퐁은 환생의 가능성과 유령의 존재가 영화적 재현과정에 매우 유사하고 또한 영화를 보는 우리의 유령적 상태와도 관련이 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엉클 분미>의 내용은 이렇다. 신장병으로 죽음이 가까워온 것을 아는 분미 아저씨는 도회지에 사는 처제 젠에게 자신의 농장을 물려주고 싶어 한다. 그들 옆에는 정확한 관계는 알기 어렵지만 충복으로 보이는 통이라는 착한 젊은이가 늘 있다. 그들 셋이 어느 날 저녁 식탁에 앉았을 때 19년 전에 죽은 아내와 원숭이 인간에 홀려 그들과 성교한 다음 자신도 원숭이 인간이 되어 집을 떠나버린 아들 분쏭이 나타난다. 그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과거와 내세에 대해 대화한다. 그러다 영화는 얼마간 지났을 무렵 예고도 없이 우화 속 한 공주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녀는 아름답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한탄하다 물속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메기와 성교를 한다.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분미 아저씨가 동굴로 들어가 죽음을 맞고 그의 장례식이 있는 날 무슨 이유에선지 통은 스님이 되어 있다. 사원에서 잠을 청하던 그는 무섭다며 젠과 그녀의 딸이 머무르는 숙소에 와서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야식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그들이 일어섰을 때 똑같은 그들의 모습이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은 이제 두개로 흐르며 마무리된다. 야식을 먹으러 간 사람들의 시간과 그 자리에 남은 사람들의 시간. 이것만 듣고 전모를 알기란 좀 어렵긴 하다. <엉클 분미>, 아핏차퐁의 첫 범작 <엉클 분미>는 알려진 것처럼 아핏차퐁의 비디오 설치미술 작업 ‘프리미티프 프로젝트’와 연을 맺고 있는데, 이 프로젝트의 우연한 첫 시작은 <열대병>을 찍을 당시 알게 된 한 스님이 건네준 책이었다.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는 한 남자(프라 스리파비야티웻)가 쓴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 거기서 아핏차퐁은 자기의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됐다. 하지만 이 책은 아핏차퐁에게 영감을 주었던 것이지 원작이 된 것은 아니다. 아핏차퐁은 작업을 준비하는 중에 타이 북동부로 향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나 마침내 나부아라는 지역에 도착했을 때에야 윤곽을 잡았다. 그는 60년대 이곳에서 정부와 공산당 게릴라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이데올로기 대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당시 시민과 타이 정부 사이에 있었던 대치 국면도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환생하는 것은 어떤 역사적 사건이기도 한 것이다. 아핏차퐁은 여기에 유년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던 코믹북이나 영화의 면모를 함께 넣기를 원했고 그 때문에 영화에는 인간 원숭이나 박색 공주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작 과정 중의 그런 경험이나 계획이 어떤 방식으로 담겼을까. 영화에서 분미 아저씨는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꼈을 때 “내가 옛날에 공산주의자를 너무 많이 죽인 업보”라고 말한다. 그때 그는 지나간 타이의 역사를 은밀하게 불러내고 있다. 여기에 아핏차퐁은 별안간 우화 한 토막을 삽입해 영화의 결을 풍부하게 하려 한다. 갑작스럽게 삽입되는 공주 신은 일종의 환생에 관한 우화인데, 추함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취하고 싶어 하는 공주의 이야기를 데이 포 나이트(특정 필터를 사용하여 낮에 촬영했으나 밤장면의 효과를 내는 촬영기법)로 촬영한 것은 고전적 B급영화의 촬영술을 모색한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마침내 이 영화의 정점이라 할 만한 장면. 동굴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분미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성스럽게 펼쳐진다. 세상을 떠나는 분미 아저씨가 목소리만으로 “난 전생에 이 동굴에서 태어난 적이 있어… 어젯밤 다음 생에 대한 꿈을 꿨어”라며 전생과 다음 생을 말할 때 그의 죽은 아내가 해준 “유령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나 생명체에 머물러요”라는 말도 함께 떠오른다. 분미는 또 다른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것인데,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곳이 다름 아니라 동굴인 건, 그러니까 아핏차퐁이 극장에 비유한 적이 있는 동굴이었던 건, 그가 영화의 장소로 들어가 영화적으로 죽었으니 그가 또 영화적으로 환생할 것이라는 예고일 것이다. <엉클 분미>는 일단 소재나 내용에서 아무나 손댈 수 있을 만한 영화가 아니다. 눈에 잡히지 않는 것들, 미지의 것들, 그것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깊은 명상적 탐구가 몸에 배어 있는 아핏차퐁 정도만이 형상화에 도전할 수 있을 만한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에 관한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 좀 다른 면모도 이제는 함께 말해야 할 것 같다. <엉클 분미>는 여전히 연결이 쉽지 않은 내용이 있지만, 전체적인 감상에서 보자면 전보다 훨씬 수월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동시에 좀 무뎌진 면도 있다는 점이다. 또는 아핏차퐁이 자신의 경험으로 체득해낸 나부아에서의 역사적 운명성이 이 영화 자체만으로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흠도 있다. 그 때문에 <엉클 분미>는 보통의 작품과 비교하자면 현저히 뛰어나겠지만 아핏차퐁의 작품 중에서 볼 때는 그가 첫 번째 양산한 범작이자 첫 번째로 멈추어선 창작의 발걸음인 것 같다. 공력은 오히려 비디오 미술쪽에… 뛰어난 장면은 물론 있다. 사원에서 잠을 자다가 무서워서 못 자겠다고 모녀의 방에 온 젊은이 통. 셋이 야식을 먹으러 가자는 둥 농담을 하다가 갑자기 셋은 텔레비전 화면에 시선이 꽂힌 채 굳은 표정을 짓는다. 거기 타이 시위대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조용히 일어나 야식을 먹으러 간다. 그때 두개의 시간이 공존하게 된다.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여전히 같은 인물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일종의 유체이탈과도 같은 분리가 일어나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은 야식 먹는 사람들의 시간과 텔레비전 보는 사람들의 시간을 공존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장면은 뛰어나긴 해도 아핏차퐁에 걸었던 기대에 비한다면 예상 밖으로 좀 도식적이다. 다음과 같은 비범한 점들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구전적 활력이 놀랄 만큼 이미지를 끌고 가서 결국 모두가 말한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말하기의 혁신성(<정오의 신비한 물체>), 벌레소리와 새소리와 초록빛의 숲과 벌거벗은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육체라는 엄청난 감각의 확장(<친애하는 당신>), 심장 박동처럼 음악이 들리는 순간 춤을 추듯 수풀을 헤치고 직진으로 움직이는 카메라의 활동(<열대병>), 저 밑에서 혹은 저 멀리서 왕의 동상이나 불상을 쳐다볼 때 또는 갑자기 검은 구멍이 스크린에 자리 잡을 때 일어나는 엄청난 시간적 혼미함(<세기와 징후>) 등이 <엉클 분미>의 대개의 장면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좀 당혹스러운 일이다. 어디에서 완만함이 생긴 것일까. 물론 지금까지 그의 발전의 보폭이 너무나 놀라웠기 때문이겠지만 <엉클 분미>의 종종 생기를 잃은 것 같은 배경들, 감각 대신 개념만으로 제시된 유령들, 시무룩해져 있는 카메라, 그 카메라의 약간 붕 떠 있는 것 같은 구도, 때때로 어색한 인물들, 그게 어떤 이유 때문인지 우린 문득 궁금해진다. 그의 영화를 소개하는 이 자리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영화 <엉클 분미>가 비디오 설치미술 작품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것이 이 영화 자체에 장점이 된 것 같진 않다. 이 장편이 중심이고 나머지가 주변이라 생각했던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상영시간이 비록 짧아도 공력은 오히려 비디오 설치미술쪽에 쏟아져들어간 것이 아닌가 싶다. 일례로 프리미티브 비디오 미술 작품 중 단편 <나부아의 유령들>은 10분간의 짧은 시간이지만 숨이 막힌다. 여기서 빛은 그냥 빛의 효과가 아니라 영혼이 담겨 날뛰는 혼불로 여겨지도록 만들어져 있고, 거기 뛰어노는 아이들은 잔인할 정도로 천진난만하고, 본다는 것의 문제는 이중 삼중의 틀로 생각을 불러일으켜 10분 만에 보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다. 당장에 이렇게 예측해볼 수는 있다. 아핏차퐁의 영화적 혁신 중 하나는 새로운 말하기 방식에 있는데, 우리가 흔히 서사라고 말하는 것의 전통적 기능 대신 다른 무엇으로 서사적 느낌을 전개했던 것이고, 그때 그 다른 무엇이란 창의적인 비주얼 텔링이었다. 그런데 <엉클 분미>엔 그 비주얼 텔링의 놀라움이 줄어들었다. 왜일까?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에 다 흡수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비유컨대 <엉클 분미>는 어떤 화가의 연작 중에서도 가장 대형의 화폭에 그려졌는데 듬성한 그림인 것 같다. 그간 비디오 설치미술의 어떤 무엇을 영화에 도입해 혁신을 이루었던 것에 반하여, 둘을 한 프로젝트 안에서 병행하자 갑자기 이번에는 영화쪽에서 힘이 떨어지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잠재울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이 있다 해도 아핏차퐁에 대한 관심과 지지가 당장 철회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21세기에 출현한 가장 비범한 영화감독과 그의 영화가 쉽게 방치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아직 극장에서 정식으로 그의 나머지 다섯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것 아닌가. 아핏차퐁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말해져야 할지 모르겠다. 아핏차퐁은 언제라도 다시 변신을 시도할 영화의 21세기적 환생체이기 때문이다.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비디오 설치미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는 총 7개의 비디오 설치미술과 2개의 단편영화가 포함된다. 2009년 5월17일, 독일 뮌헨의 미술관 하우스데어쿤스트에서 첫 전시를 연 뒤 작품별로 각국의 전시장을 순회하고 있다(서울에서도 현재 미디어시티서울 행사에서 전시되고 있다). 7개의 비디오 설치미술 작품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프리미티브> <나부아> <우주선 만들기> <헌신하는 기계> <저녁 촬영> <뮤직비디오: 나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 <뮤직비디오: 나부아 송>이다. 처음 나부아라는 지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아핏차퐁은 남편 없는 미망인들에 대한 이야기에 끌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마을에 살고 있는 마을 청소년들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됐고 프리미티브 프로젝트는 그들과의 공동작업 형태에 가까울 정도로 서로 어울려 완성됐다. 대다수 작품은 2008년 9월 즈음 나부아에 머물면서 만들었다. 반면, 두개의 단편은 <엉클 분미께 보내는 편지>와 <나부아의 유령들>이다. 전자는 장편 <엉클 분미>를 완성하기 전 감독이 이 영화의 소재가 된 인물 분미씨의 혼령에게 보내는 일종의 위령편지의 의미를 띠고 극화됐다. <나부아의 유령들>은 나부아의 아이들이 한밤에 공을 차고 뛰노는 설정으로 촬영했고, 과거 타이의 SF영화 방식으로 시작하여“빛들의 소통”(아핏차퐁)이라고 할 만한 초현실적 분위기를 흠씬 자아낸다.

연휴기간 TV 애청프로 '시간 확인' 필수

(서울=연합뉴스) 고현실 기자 = 특집 프로그램이 넘쳐나는 추석 연휴에 애청 프로의 시간 확인은 필수다. 시간대를 옮기거나 특집에 밀려 아예 결방하는 일도 빈번하다. 지상파 방송사는 대체로 드라마는 그대로 편성한 반면 교양은 특집 프로그램으로 대체하고 주요 예능도 특집 형식으로 재구성한다. ◇KBS = 1TV 저녁일일극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연휴기간에도 정상 방송된다. 2TV 아침드라마 '엄마도 예쁘다'와 주말극 '결혼해주세요'도 그대로 방송되고 월화극 '성균관 스캔들'은 21일에만 시간대를 10분 당겨 오후 9시45분 방송된다. 지난주 종영한 수목극 '제빵왕 김탁구'의 빈자리는 특선영화 '의형제'(22일 오후 9시35분)와 '제빵왕 김탁구 스페셜'(23일 오후 9시35분)이 메운다. 21~23일 오후 7시30분 방송되는 1TV 교양 프로그램은 23일 특집 '엄마와 딸'로 대체되는 '기업열전K1'을 빼고는 모두 그대로 방송된다. 반면 이 기간 밤 10시대 교양 프로그램인 '시사기획 KBS 10' '환경스페셜' '생로병사의 비밀'은 모두 특집으로 결방한다. 월~목요일 밤 12시35분 방송되는 2TV 교양 프로그램 '낭독의 발견' '클래식 오디세이' '라이브 음악창고' 'TV미술관'도 20~23일 드라마 스페셜 베스트와 24일 특선영화 '거룩한 계보'로 대체 편성됐다. 금요일 방송하는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밤 12시35분)은 24일 그대로 방송된다. 평일 11시대 2TV 오락 프로그램은 추석특집으로 꾸미는 '해피투게더'(목)와 '청춘불패'(금)를 빼고는 모두 특집으로 결방한다. '해피버스데이'(월)는 20일 특선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 '김승우의 승승장구'(화)는 21일 영화 '청담보살', '추적 60분'(수)은 22일 뮤직다큐 '서울의 달밤'으로 대체됐다. ◇MBC = 드라마는 거의 변동이 없다. 평일 아침드라마 '주홍글씨'가 추석 당일인 22일만 결방할 뿐 그대로 방송되고 시트콤 '볼수록 애교만점'과 일일극 '황금물고기', 월화극 '동이', 수목극 '장난스런 키스'도 시간 변경 없이 시청자를 찾아간다. 반면 평일 저녁 7시대 방송되는 교양 및 예능 프로그램은 모두 결방한다. '약이 되는 밥상'(월)은 20일 '2010 나눔 콘서트', 'TV특종 놀라운 세상'(화)은 21일 '여배우의 집사', '불만제로'(수)는 22일'아이돌 스타 트로트 청백전', '7일간의 기적'(목)은 23일 '2010 스타댄스 대격돌', '원더우먼'(금)은 24일 '원더우먼 최강전'으로 대체된다. 월~목요일 밤 11시대 방송되는 프로그램 가운데 'PD수첩'(화)은 21일 특선영화 '거북이 달린다', '후 플러스'(목)는 23일 '라디오스타 슈퍼쇼'로 대체 편성됐다. '놀러와'(월)와 '황금어장'(수)은 추석 특집으로 꾸며진다. 100분 토론(목요일 밤 12시10분)은 23일 '아이돌스타 트로트 청백전' 재방송으로 대체되지만 금요일 방송되는 '섹션TV 연예통신'과 'MBC 스페셜', 'W'는 24일 동시간대 그대로 방송된다. ◇SBS = 일부 드라마의 시간대가 바뀐다. 월화극 '나는 전설이다'가 종영일인 21일 시간대를 오전 8시50분에서 8시40분으로 앞당겨 방송하고 수목극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는 22일 특선영화 '해운대' 방송으로 결방하는 대신 23일 오후 9시45분부터 2편 연속 방송된다. MBC '동이'와 치열한 시청률 경쟁을 벌이는 '자이언트'는 오후 10시 그대로 방송된다. 아침연속극 '여자를 몰라'는 연휴기간인 21~23일에만 기존보다 10분 빠른 오전 8시30분에 시청자를 찾아가고 저녁 일일극 '세자매'(오후 7시20분)는 21~23일 결방한다. 평일 오후 11시대 프로그램들은 '강심장'(화)과 '스타부부쇼 자기야'(금)를 빼고는 모두 특집으로 결방한다. '긴급출동 SOS 24'(월)는 20일 '스토리쇼 부탁해요', '뉴스추적'(수)은 22일 영화 '해운대', '한밤의 TV연예'(목)는 23일 영화 '김씨표류기'로 대체됐다. 이밖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화요일 밤 12시45분)은 21일 텔레시네마 '나인틴', 'SBS 시사토론'(금요일 밤 12시15분)은 24일 텔레시네마 '천국의 우편배달부'로 각각 대체 편성됐다. '생활의 달인'(수)과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목)는 추석 특집으로 꾸며 각각 22일과 23일 평소보다 20분 빠른 오후 8시30분 방송된다. okko@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소다 가즈히로] 도약과 즉흥의 즐거움을 아시나요

올해 DMZ다큐멘터리영화제의 개막작 <피스>에는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등장한다. 폐암에 걸려 죽어가는 독거노인이 담배를 입에 물며 문득 전쟁 때의 기억을 꺼내는 순간이다. 그는 사람 목숨이 엽서 한장 값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때 그가 입에 문 담배의 이름이 ‘피스’(평화)다. 감독 소다 가즈히로는 사회복지 봉사활동을 하는 그의 장인어른을 좇다가 문득 이 독거노인을 만나고 이 장면을 찍었다. 하지만 운이 좋아 그런 것이 아니다. 소다 가즈히로의 다큐에는 어떻게 이런 장면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찍어냈을까 하는 순간이 종종 있는데 그 과정에 관해 DMZ다큐멘터리영화제가 열리는 파주출판단지에서 그를 만나 들었다. -<피스>는 어떤 계기로 만들게 됐나. =DMZ다큐멘터리영화제쪽에서 평화와 공존에 대한 주제로 단편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처음에는 세명의 감독이 같은 주제로 옴니버스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중 한편으로 기획된 거라 알고 있다. 하지만 만들다 보니 장편이 됐다. 너무 큰 주제라 처음에는 이 프로젝트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좀 꺼려졌던 게 사실이다. 나는 일본의 일상적 면모에 초점을 맞춰왔기 때문에 평화와 공존 혹은 거대한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이것이 정치적으로 너무 옳은 주제이기 때문에 오히려 상투적인 영화가 될까봐 걱정됐다. 하지만 장인어른이 도둑고양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을 보고 나서 일상의 평화와 공존에 대한 힌트를 얻었고, 시작할 수 있었다. 장애인 복지사를 하는 장인어른을 카메라로 따라가다 보니 하시모토 시로라는 노인도 만나게 됐다. -그 장면이 놀랍다. 하시모토가 피우는 담뱃갑에 ‘피스’(PEACE)라고 쓰여 있었는데, 뭔가 그때 이 영화의 주제가 구체적인 느낌으로 전해져 왔다. =그 담배를 봤을 때 나도 정말 놀랐다. 그 담배는 2차대전 뒤에 대중에게 가장 먼저 보급된 담배라고 한다. 일본인은 전쟁에 너무 질려버렸기 때문에 전후 시기에 평화에 대해 희망을 가졌고 그런 뜻에서 이 담배가 나온 것이다. 하시모토도 전쟁 이후에 계속 이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지금 폐암으로 죽어가고 있고, 지금도 계속 그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 점은 이번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이 영화가 지도가 없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하시모토를 찍고 나서 아, 이제 영화가 되겠구나 확신하게 됐다. -좋은 의미에서 이번 영화는 즉흥연출이다. =그것이 바로 내 영화연출의 중요한 방법론이다. 나는 촬영 시작 전에 어떤 조사도 하지 않고 주제도 정해놓지 않는다. 인물에 대해서도 절대로 미리 정해진 촬영 대본을 갖추지 않는다. 단지 촬영하는 동안 일어나는 도약과 즉흥적인 일들을 즐길 뿐이다. 물론 이번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니만큼 주제는 갖고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촬영과 편집을 한 다음 그 안에서 주제를 발견하는 쪽이다. 처음부터 주제에 잠기면 너무 예상 가능한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시모토를 처음 봤을 때도 그가 내 주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테니 찍지 말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제한없이 찍어보자 했고, 마침내 그가 과거 전쟁 때의 이야기를 하는 순간을 만났다. -언제부터 즉흥성을 선호했는가. =그런 게 내게 제일 중요하고 또 다큐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과 상황을 다큐를 통해 영화적 현실로 재생하여 만들 때 그 즉흥성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다수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만 그때는 수없는 조사와 정보와 시나리오와 내레이션을 미리 준비해야 했고, 답답했을 뿐이다. 만약 그 방법을 <피스>에 썼다면, 그러니까 아까 우리가 말한 인상적인 장면은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듣는 와중에 다시 궁금해진 것인데, 처음 DMZ다큐영화제쪽에서 주제가 정해진 작품의 제안을 받았을 때 당신의 심정이 궁금하다. 왜 이걸 내게 맡기는 걸까 하고 생각해본 적이 혹시 있는가. =그렇게까지 생각해보지는 않았고, 다만 내가 이런 주제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기는 했다. 데뷔작 <캠페인>에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주제를 갖고 시작하는 방식은 나와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의 거절할 뻔했다. 하지만 장인어른의 일상을 내 식대로 찍다보니 문득 이게 DMZ쪽이 원하는 작품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하게 된 거다. -처음에는 어려웠던 프로젝트를 완성하고 난 지금, 마음은 어떤가. =너무 기쁘다. 이런 계기가 없었다면 평화와 공존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화란 뭐지, 평화란 어떻게 가능하고 어떻게 깨지는 거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됐으니 말이다. -차기작 또는 요즘 관심사가 있다면. =음, 너무 많은데? (웃음) 20개 정도의 주제가 있다. 지금 작업 중인 것도 있다. 히라타 오리자라는 도쿄에 근거를 둔 연극연출가, 그의 극단과 그의 예술에 관한 다큐다. 300시간 넘게 찍었고 지금 편집 중이다.

[김영진의 인디라마] '갇힌 목소리'가 거슬리는 이유

제2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몇편의 다큐멘터리영화를 봤다. 이 영화제는 내 예상보다 근사했다. 휴전선 인근 지역에서 열린다는 상징성과 메인극장인 씨너스 이채가 위치한 출판단지의 정갈한 분위기가 섞인 장소도 좋았고, 흥청망청대는 것 없이 영화 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영화제 프로그램의 질이 우수했다. 그중 내가 본 한국 다큐멘터리는 두편이었다. 두편 다 전업 감독이 아닌 저널리스트와 사회운동가가 만든 작품이었다. 영화제 개막 다음날 본 서세진의 <저 달이 차기 전에>는 쌍용차 옥쇄파업의 전말을 내부에서 촬영한 것인데, 내부자들의 곁에서 찍었다는 것만으로 상당한 정서적 파장이 있다. 내부자 입장에서 그들의 고통과 회의를 기록하며 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는 바깥의 회사쪽과 정부의 세에 밀리는 약자의 패배와 희망을 담는다. 진보매체 <민중의 소리>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던 영상기자 출신의 서세진 감독은 당파적인 저널리즘의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이런 유형의 작품은 많이 봐왔지만 비가 그치지 않는 눅눅한 날씨에 극장에서 <저 달이 차기 전에>를 보는 것은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켰다. 속이 꽉 막히고 분출되지 않는 분노 때문에 감정적으로 좀 힘들었다. 동시에 선악의 개념으로 구획될 수밖에 없는 이 싸움에 대한 정의에도 좀 물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영이 끝나고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남자 고등학생은 노동자의 입장뿐만 아니라 반대편 입장을 알 수 있도록 찍었을 수는 없었냐고 감독에게 물었다. 이런 질문은 나이브하다. <조선일보> 사설만 봐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주류 목소리가 넘쳐나고 있는데 모른다는 것도 이상하다. 이 영화 속 노동자의 입장에 대해 뭔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면 그 뿌리가 바로 기왕의 고정관념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반드시 선인가 필자는 <저 달이 차기 전에>에서 다른 것이 걸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깔리는 내레이션이 신경 쓰였다. 관객에게 상황의 개요를 알려주는 설명 기능을 하는 것 외에 대체로 이 내레이션은 정서적이다. 처음 예상과 달리 점차 극한으로 몰리는 노동자의 입장에 대한 공감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공중파 텔레비전이나 주류 언론에서 담아내려고 하지 않았던 그들의 목소리와 감정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노동자를 인간화한다. 그들의 목소리와 형체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당 부분이 공장에 갇힌 노동자가 가족과 통화하거나 가족을 그리워하는 장면으로 채워져 있다. 그들의 개인적인 입장과 사쪽의 일방적 통고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노조원으로서의 입장이 대비되면서 조금씩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이 된다. 영화 말미에 쳐들어오는 경찰과 사쪽의 용역에 쫓겨 패퇴하는 노동자의 모습에선 어쩔 수 없이 이 불행의 맛을 음미하게 된다. 영화의 결말도 얼마간 공식적일 수밖에 없다. 지금은 패배하지만 언젠가는 승리하리라는 프로파간다의 옅은 그림자 말이다. 물론 그 와중에 이 투쟁 대열에서 스스로 이탈한 많은 이들이 있다. 영화는 그들의 모습도 보여준다. 앞서 내레이션이 걸렸다고 한 것은, 이 장치가 영화가 관객에게 맥락화된 태도를 갖는 것을 원천봉쇄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태를 잘 모르는 관객에게 이 내레이션은 일차적으로 줄거리를 알려주는 기능을 하지만 일방적이며 다른 맥락으로 확산되지 못하게 막는다. 영화가 끝난 뒤 사석에서 나눈 서세진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영화 속 노동자들이 그렇게 절박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삶이 바로 막장의 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근무연차가 20년 넘으면 연봉 7천만원 이상을 받는, 중산층의 틀이 보장된 삶에서 곧바로 일용직으로 추락한다는 위기감이 그들을 싸우게 만든다. 이 양극의 삶에서 연대의 흔적을 읽을 수는 없었다.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정당세력을 갖지 못한 그들의 비극은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삐딱한 심보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들이 선거 때 어떤 정파를 찍었을까 궁금했다. 사용자와 정부는 악이고 노동자는 선이라는 이분법만 읽히는 것보다 이런 식으로 다르게 맥락화할 수 있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은 이 영화의 내레이션이라는 장벽 앞에 막힌다. 소수자를 보호하자라는 메시지는 그 직전까지 소수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을 대기업 노동자에 대한 생각 때문에 흐려진다. 영화가 입체적이라도 목소리가 수렴된다면… 지금종의 <오체투지 다이어리>도 흥미로운 영화였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의 오체투지순례에 동행한 이 영화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여준다. 오체투지가 무엇인지, 그것도 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와 국도에서 오체투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영화는 보여준다. 영화 중반에 아스팔트의 지열과 소음, 바람을 가르며 지나치는 차들 옆에서 오체투지하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 일행을 보여주는 장면은 압권이다. 갑자기 세상의 모든 것이 이들을 포위하고 거세게 밀어붙이는 듯이 보이는 기세는 이들이 행하는 오체투지순례의 의미와 상황을 시각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별다른 말도, 감정표시도 하지 않는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뭔가 감정을 표시하는 방식은 대부분 유머다. 그에 반해 그들의 오체투지순례를 둘러싼 일반인의 반응은 각양각색이다. 말도 안되는 논리로 이들을 비판하는 사람에서부터 이들의 순례에 공감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입장이 영화에 반영되는데 그것이 곧 <오체투지 다이어리>의 주된 내용이라고 하겠다. 사회운동가이며 지난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던 지금종 감독은 관객과의 대화에서 그 점을 말했다. 예민한 관객은 아마도 이 영화에 드러난 다양한 사람들의 해석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똑같은 상황을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이처럼 다를 수 있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명박 정부가 소값을 떨어뜨렸다고 분개하는 촌로부터 예수의 수난과 같은 메타포를 읽어내는 가톨릭 신자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의 반응이 이 영화에는 나온다. 개인적으로는 거기서 이 영화의 힘찬 목소리가 진동하고 있다고 느꼈다. 다큐멘터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생성된 목소리, 현실의 다종다기한 목소리가 이 두 순례자 일행을 감싸고 있다. 그 목소리들의 총합에서 이 순례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 각자의 몫이다. 그것이 입체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매력을 이 영화는 지니고 있지만 역시 내레이션이 걸렸다. <저 달이 차기 전에>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인 상황정보를 제공하고 있지만 열려 있는 영화에 비해 닫혀 있고 다층적일 수 있는 목소리를 하나의 일방적 목소리로 가둔다. 꼭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레이션의 기능과 관련해 이 두편의 영화와 다른 느낌의 영화를 마지막으로 거론하고 싶다. 영화제 기간 동안에 본 <카지노 잭: 돈의 미합중국>이라는 다큐멘터리는 미국영화답게 얼마간 상업적이고 유머 넘치며 시니컬한 작품인데, 이 영화에도 당연히 내레이션이 나온다. 풍자적인 입장을 내세운 영화의 성격상 내레이션에는 감상이 끼어들 틈이 없고 내레이션의 톤은 객관적이며 중성적이며 약간 빈정거리는 투다. 이 영화는 공화당 실세를 끼고 전설적인 로비행각을 벌인 잭 아브라모프와 그 주변의 부패를 다룬 것인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심지어 말레이시아 총리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주선하고 돈을 챙긴다(백악관도 돈을 챙긴다. 나는 부시가 정상회담 대가로 돈을 챙긴다는 걸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다). 영화의 맥락 살리는 <카지노 잭…>의 목소리 영화의 결말에서 잭은 실형을 선고받는데 한국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어마어마한 범죄행각에도 불구하고 고작 2년 남짓 감옥에 갈 뿐이다. 그를 건드리는 것은 공화당, 민주당 의원을 망라한 지배블록의 돈 커넥션을 건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청문회도 대충 소란스런 가십성 스캔들 수준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코멘트다. 출연자 중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 “잭이 희대의 악당이기 때문에 그를 제거하기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에 이어 영화는 로버트 레드퍼드가 홈런을 날리는 <내츄럴>의 한 장면을 보여주며 해설한다. “사람들은 20%의 부자가 되면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자신들이 현재 80%에 속해 있어도 언젠가 20%에 속할 수 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부자들의 탐욕을 용인한다.” 결국 시스템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걸 이 영화는 건드리고 내레이션은 그 맥락을 축소하지 않는다. 다소 정서적인 톤으로 기우는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효과에 대해 우리도 생각해봤으면 한다.

부산국제영화제 머스트40 - 지역타파 [4]

31. 문제가 많은 시칠리아 가족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 Malavoglia 파스콸레 시메카/이탈리아/2010년/94분/월드 시네마 말라볼리아가의 성원들은 문제가 많다. 안토니오는 가업인 어업보다 작곡에 빠져 늘 음악만 듣고 산다. 누나는 모로코 불법이민자와 사랑에 빠지고, 여동생은 돈 많은 낯선 남자와 사귄다. 그러던 중 바다에 나갔던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인다. 할아버지는 부서진 배를 고쳐 그와 남동생을 데리고 바다로 나간다.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은 한 어부 가족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시칠리아의 일상과 이민자 문제를 조명하는 작품이다. 시칠리아 태생인 파스콸레 시메카 감독의 작품으로, 시칠리아 섬을 기반으로 작품을 집필, 이탈리아 진실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조반니 베르그의 동명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시칠리아 섬의 아름다우면서도 건조한 풍경과 어우러진 음악은 영화의 비장미를 더해준다. 특히 안토니오의 음악과 할아버지가 읊는 옛 속담들이 어우러지면서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선사한다. 국내에 잘 소개되지 않았지만, 파스콸레 시메카 감독은 이탈리아에서 다수의 독립영화를 연출해온 중견감독. <말라볼리아 가네 사람들>은 올 베니스영화제 오리존티 부문에 출품,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글 이화정 32. 이라크전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 만두 Mandoo 에브라힘 사에디/이라크/2010년/90분/아시아영화의 창 <만두>는 포스트 이라크전을 다룬다. 후세인의 폭정을 피해 스웨덴으로 망명 간 쉬란은 헤어졌던 삼촌을 만나 이라크로 돌아온다. 쉬란의 가족과 삼촌은 그들의 고향인 이란으로 가기 위해 자동차에 오른다. 그러나 여정은 험난하다. 고속도로에서 폭탄이 쉴새없이 터지고, 검문검색 과정에서 인정사정없는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또, 여기저기 사상자가 속출한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이 풍경, 이라크에서는 일상이다. 물론 전장에서도 한 줄기 희망은 남아 있다. 도로 한가운데서 결혼식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자동차가 고장나 더이상 갈 수 없는 사람들을 태워주기도 한다. 흥미로운 건 이야기가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관객은 차 뒷좌석에 앉은 삼촌의 눈에 비친 풍경을 그대로 본다. 카메라의 눈이 삼촌의 눈이요, 또 관객의 눈이다. 삼촌이 조카와 승강이를 벌이는 경비대를 향해 권총을 겨눌 때, 보고 싶지 않은 풍경 앞에서 눈을 감을 때 우리는 삼촌처럼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전쟁을 직접 겪지 못한 관객에게 전쟁의 참혹함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에서 <만두>의 1인칭 시점은 포스트 이라크전에 어울리는 선택이다. 글 김성훈 33. 상하이의 기억들 상해전기 I Wish I Knew 지아 장커/중국/2010년/138분/와이드앵글 변화와 현대화. 지아장커의 지속적인 테마가 이번엔 상하이를 향했다. <상해전기>는 상하이의 역사를 현재적 관점에서 다시 읽는 시적 다큐멘터리다. 중국에서 최초로 산업화된 도시, 중국 문화의 요람이 된 상하이의 결은 다양하다. 상하이에 살고 있는 혹은 상하이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홍콩과 대만의 정치가, 배우, 갱스터, 노동자 18명의 증언을 모자이크를 통해 중국의 역사를 재조명한다. 중국의 거대한 스튜디오의 흔적을 찾아나가는 동안 상하이의 과거는 증언으로, 또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푸티지로 삽입된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을 결합한 <24시티>의 실험은 이번에도 계속된다. 중국 청두 노동자들의 삶을 통해 중국의 근대화를 그렸던 <24시티>의 형식, 디지털카메라를 사용한 화면도 그대로다. ‘24시티’에 집중된 전작의 단단함을 벗어나, 이번 작품의 범위는 좀더 넓어지고 확장된다. 지아장커 감독은 “근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한 혁명가들의 도시, 상하이의 면면을 탐구함으로써 상하이의 포트레이트를 남기고 싶었다”고 전한다. 영화 속 출연자들을 통한, 생생한 증언들, 그것을 통한 역사와 집단의 역사에 대한 반영은 지아장커 영화라는 인증이다. 올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됐다. 글 이화정 34. 필리핀의 국화는 아이들의 눈물 삼파기타 Sampaguita, National Flower 프란시스 파시온/필리핀/2010년/78분/뉴 커런츠 ‘삼파기타’는 필리핀의 국화를 뜻한다. 필리핀을 상징하는 동시에 필리핀의 아이들이 생계수단으로 삼는 꽃이다. 해가 뜰 기미도 보이지 않는 새벽. 라디오에서는 식사를 준비할 부모와 늦잠꾸러기인 아이가 만드는 평화로운 가정을 이야기하지만, 라디오를 듣는 아이들은 등잔과 통을 들고 삼파기타 밭으로 향한다. 아이들이 모아온 꽃으로 어른들은 목걸이를 만들고, 이를 아이들에게 팔게 한다. 아이들이 꽃목걸이를 들고 거리에 나온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부모가 버렸거나, 부모로부터 강요를 받았거나, 제 스스로 가족을 탈출했거나. 어떤 아이들은 스스로 고아원에 가기를 원한다. 또 다른 아이는 단지 비를 피해 잘 수 있는 곳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삼파기타>는 이 아이들의 현실을 담은 다큐멘터리이자 극영화다. 실제 아이들을 인터뷰하는 한편, 그들의 사연을 재연하고, 그들의 현재를 전하는 함축적인 연출을 보이기도 한다. 등잔을 든 아이들이 삼파기타 밭으로 천천히 모여드는 장면은 서정적이면서도 슬프다. 경찰에 쫓기던 아이가 거리에 서 있는 성모상을 바라볼 때는, 그의 절실함과 신이란 존재의 허무함이 드러난다. 부모, 국가, 신이 버린 아이들은 그럼에도 자기들끼리 연대한다. 생일을 맞은 아이를 위해 음식을 구해와 나름의 만찬을 꾸미는 모습은 따뜻하기보다는 애처롭다. 글 강병진 35.염소에 집착하는 아버지라니 처녀 염소 Virgin Goat 무랄리 나이르/인도, 프랑스/2010년/87분/아시아영화의 창 농부 칼리안에게는 딸이 둘이다. 하나는 부족한 지참금 때문에 결혼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미나이고, 다른 하나는 암컷 염소 라일라다. 미나보다 라일라를 더 아끼는 칼리안의 최대과제는 라일라의 짝짓기다. 어떤 멋진 수컷 염소들을 갖다놓아도 반응이 없자, 칼리안은 비아그라를 빻아 물에 녹여 라일라에게 먹이는 등 갖은 애를 쓴다. 마침내 라일라의 몸에 반응이 온 어느 날, 칼리안은 딸을 데리고 읍내로 향한다. 하지만 마침 높은 정치인이 마을을 방문하기로 하면서 칼리안과 라일라의 여정은 험난해진다. 가는 곳 마다 길을 막고,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면 구금당한다. 칼리안은 라일라의 짝짓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처녀 염소>를 연출한 무랄리 나이르 감독은 인도의 정치사회적 풍경을 풍자해온 감독이다. 집안을 건사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는 아버지와 일이나 공부를 하기는커녕 TV를 껴안고 사는 그의 아들, 그런 남자들 때문에 악을 쓰며 살고 있는 그의 아내는 무랄리 나이르가 관찰한 지금 인도의 가족 풍경이다. <처녀 염소>는 여기에 마을을 억압하는 권력의 기운을 함께 묘사하면서 풍자의 대상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소시민에 대한 권력의 억압을 드러낸다. 하지만 만사를 제쳐두고 염소에 집착하는 칼리안의 모습 또한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허허로운 집착이 낳은 허허로운 좌절을 보여주는 영화다. 글 강병진 36. 아름다운 콜롬비아 풍광이 품은 상처 거짓말의 바다 속 초상들 Portraits in a Sea of Lies 카를로스 가비리아/ 콜롬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2009년/90분/월드 시네마 소녀 마리나는 알코올중독인 할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산사태로 할아버지가 죽고,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즉석사진을 찍어주며 돈을 버는 사촌 하이로는 오갈데없는 마리나에게 함께 떠날 것을 종용한다. 바로 마리나의 기억을 토대로 수년 전 떠나온 고향에서 할아버지가 남긴 집문서를 찾기 위해서다. 실어증과 기면증을 앓는 마리나는 여행 중 잊고 있었던 과거의 끔찍한 기억과 직면한다. 표면적으로는 마리나와 하이로가 고향집을 찾기 위해 떠나는 로드무비지만, 영화는 60년 이상 지속되어 온 내전으로 상처받은 콜롬비아인들의 고통스런 현재다. 카를로스 가리비아 감독은 이 수난사를 얼버무려 말하려 하지 않는다.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기술 속에는 난민으로서의 삶뿐 아니라, 성에 눈뜨기 시작한 소녀의 혼란스런 사춘기까지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사회의 고통을 디테일한 개인의 역사로까지 파고들며 영화는 생생한 힘을 얻는다. 끔찍한 영화 속 현실에도 불구하고 로드무비 속 콜롬비아의 풍광은 이 모든 상처를 치유할 만큼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모순을 선사한다. 글 이화정 37. 아프리카 영화의 저력 맛보기 추락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 A Small Town Called Descent 자밀 쿠베가/남아프리카공화국/2010년/106분/월드 시네마 <추락이라는 이름의 작은 마을>은 남아공의 사회문제인 제노포비아의 참상을 고발하는 경찰드라마다. 남아공의 후미진 마을에서 짐바브웨 출신 남자가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특수경찰 스콜피온 3인조가 곧 파견되고, 그들은 동네 신부의 증언으로 부패한 지역 경찰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그러나 변호사의 비호를 받는 권력자의 진실을 파헤치기란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을 여자의 증언으로 끔찍한 사건이 드러나고 사건은 비극으로 치닫는다. 해마다 일자리를 찾아 아프리카 이주인들이 대거 유입되는 남아공에 제노포비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현재적 문제다. 영화 속 표현처럼 남아공인들에게 이들 이주민들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더러운 외국인’이며, 그런 인식이 불식되지 않는 한 폭력사태는 언제든 가능하다. 줄곧 다큐멘터리를 연출해온 자밀 쿠베카 감독은 대중적인 수사극의 형태를 빌려와 심각한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지루할 틈 없는 짜임새있는 내러티브, 스타일리시한 화면, 빠른 편집이라는 효과적인 도구 속에, 실제 뉴스 화면들을 입혀 현실적인 긴장감 또한 놓치지 않는다. 비극적 현실을 대변하는 아프리카 음악의 사용 또한 눈여겨 볼 만하다. 글 이화정 38. 세계를 향한 이란의 외침일까 방해하지 마시오 Please Don’t Disturb 모흐센 압돌바합/이란/2010년/80분/아시아영화의 창 유명한 TV쇼 진행자인 카림자데흐는 신혼 생활 6개월 만에 파혼 위기를 맞는다. 법원으로 향하는 아내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궤변 수준의 변명만 늘어놓는 그의 말을 아내가 들어줄 리 없다. 한편, 지갑과 휴대폰을 도둑맞은 율법학자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율법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하게 된다. 텔레비전 수리공을 부른 어느 노부부는 그가 정말 수리공이 맞는지 끝끝내 의심하며 결국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자동차, 휴대폰 등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모든 것들에 경고문처럼 붙여 알리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방해하지 마시오’. 저 멀리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도 현대인이 느끼는 비애는 마찬가지인가보다. 영화는 테헤란을 배경으로 일상적이지만 조금은 별스러운 상황을 실타래처럼 얽힌 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해 블랙코미디라는 그릇에 꾹꾹 눌러 담았다. 이란의 여성문제를 비롯해 율법학자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 현실과 율법 사이의 괴리, 이란사회가 처한 도덕과 종교적 가치 사이에서의 선택의 문제 등을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다. 글 김현수 객원기자 39. 김복남처럼 ‘복수의 칼’을 든 여인 트럭 밑의 삶 Chassis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필리핀/2010년/73분/아시아영화의 창 <트럭 밑의 삶>은 필리핀판 <김복남 살인 사건의 전말>이라 할 만하다. 살 집이 없는 두 모녀, 노라와 사라의 거처는 트럭 밑이다.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 없지만 엄마 노라는 하나뿐인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전부 한다. 하루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트럭 운전사들에게 몸을 팔고, 트럭이 부두를 떠나면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싸서 또 다른 트럭을 찾아나선다. 언젠가는 남들처럼 따뜻한 곳에서 편안하게 잠을 자는 꿈을 꾸면서 말이다. 그러나 딸이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으면서 노라의 꿈은 산산조각난다. 분노로 가득한 노라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도 이때부터다. <트럭 밑의 삶>은 항상 남성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필리핀 길거리 여성의 현실을 그린 극영화다. 그러나 감정의 구축보다 현실 고발에 더 신경 쓰는 듯 감독은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연출한다. 시종일관 인물을 따라다니는 핸드헬드 카메라는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흑백화면은 상황을 냉정하게 묘사한다. 한편, 노라의 마지막 복수는 너무나 강렬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글 김성훈 40. 행복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피노이 선데이 Pinoy Sunday 호위딩/대만, 필리핀, 일본, 프랑스/2009년/84분/아시아영화의 창 대만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인 마누엘과 다도의 삶은 낭패의 연속이다. 그들이 꿈꾸는 건 단지 퇴근 뒤의 안락함이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 그녀와 여름밤의 하늘을 보며 맥주를 마신다고 상상해봐!” 그러던 어느 일요일, 두 사람은 길거리에 버려진 빨간색 가죽소파를 발견한다. 문제는 이 소파를 집까지 운반하는 것이다. 트럭을 빌리기는 돈이 부족하고, 버스로 옮기려 하니 태워주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들은 크고 무거운 소파를 직접 들고 가기로 결심한다. <피노이 선데이>는 이들의 ‘뻐근한’ 일요일을 쫓아가는 영화다. 소박한 바람이 좌충우돌 소동극으로 변해갈 때, 애처로운 유머와 안타까운 현실이 드러난다. 영화는 마누엘과 다도뿐 아니라, 그들이 사랑하는 두 여인의 비정한 현실까지 비춘다. 두 남자에게 그들은 다가서고 싶은 아름다운 여성이나, 역시 어디까지나 같은 이주노동자인 그들 또한 밤새워 일하고, 누군가의 정부가 되어야만 살 수 있다. 유머러스한 행복찾기로 볼 수 있지만, 무엇을 원하든 그 소망이 고통이 되는 현실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상당히 냉정해 보이는 결론이다. 글 강병진

마모되지 않는 매혹의 그녀를 만나다

어렸을 적 김지미가 동양최고의 미인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걸 들었을 때도 나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김지미라면 동네 어귀에 붙은 영화포스터에 새겨진, 빛바랜 여주인공의 이미지로만 남을 뿐이었다. 실제 스크린에서 봐도 그다지 감흥은 없었던 것 같다. <토지>와 같은 영화는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김지미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상당히 잘 생긴 여배우라는 인상만 남았다. 언젠가 텔레비전의 나훈아 쇼에서 객석에 있는 그녀를 시청한 적이 있는데 목소리가 탁음이어서 깜짝 놀랐다. 극장에서 들었던 목소리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뭐랄까, 주변은 아랑곳하지 않는 위풍당당한 기개가 있는 목소리였다. 비너스가 아닌 중년의 연기파 배우 철이 들어 자세히 영화를 들여다볼 무렵 내가 본 김지미의 영화는 전부 다 좋았다. 임권택의 <길소뜸>과 <티켓>, 이장호의 <명자 아끼꼬 쏘냐>였다. 그녀가 한 시대를 풍미한 비너스였는지는 몰라도 내게는 중년의 연기파 배우로 보였다. 원래 임권택 감독과 찍기로 했던 <비구니>가 불교계의 압력으로 제작이 중단되었을 때 신문지상에는 그녀가 머리를 하얗게 밀어낸 모습이 사진으로 실렸는데 그때도 참 잘생겼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러나 <길소뜸>에서 동란 시절에 사귄 동네 첫 사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30여년 만에 상봉했음에도 혈육을 포기하는 유복한 중산층 주부 역할의 김지미는 적어도 내게는 처음으로 인간화된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가진 사람의 염치와 치욕이 혈육의 정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걸 애써 누르는 냉정한 모습을 연기하는데 이처럼 복합적인 진동은 과문한 내 소치로는 이전에 본 적이 없었다. <길소뜸>에서 김지미가 연기하는 화영은 청춘기에 사랑했던 남자와 재회했으나 그는 이미 추레한 중년 남자가 되어있다. 인간적으로 측은지심을 느낄 수는 있으나 과거의 사랑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에서 났으나 전쟁 난리 통에 잃어버린 아들은 무학자에 가난한 무지렁이로 살고 있고 어느 쪽으로나 육친의 정을 되살릴 수 없다. 화영은 냉정하게 거리를 두고 옛 애인과 아들, 두 남자와 회자정리 하는 길을 택한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화영이 신성일이 연기하는 동진과 이별할 때 그녀는 동진에게 명함을 준다. 그 명함은 화영의 것이 아니라 남편 명함이다. 명함을 들여다 본 동진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짓고는 명함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들도 이산가족이긴 하지만 이미 각자 가정이 있는 몸이다. 동진의 입장에선 더 미련이 남을지도 모른다. 고단하게 살아온 듯한 그의 삶에서 지킬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화영에게는 그와 달리 지킬 것이 많다. 남편의 명함을 주는 화영의 행위는 싸늘하게 느껴질 만큼 이성적이다. 이것은 임권택 감독의 연출에 크게 빚진 것이기도 하지만 김지미의 극적으로 과장하지 않는 연기는 오히려 그 때문에 더 극적이었다. 임권택의 또 다른 대표작 <티켓>은 김지미의 연기 인생을 응축할 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김지미는 지방 소도시에서 다방을 운영하는 민 마담으로 나와 부패한 자신의 인생을 견디며 그녀만큼이나 부패하게 될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매춘업을 한다. 부패의 숙주이자 동시에 그녀들의 삶을 부패하게 만든 삶에 대해 애증을 갖고 있는 민 마담은 인간적으로 미워할 수 없는, 인생을 잘못 산 여자의 피로와 절박함과 체념과 연민을 동시에 품고 있는 여자다. 가혹하게 다방 종업원들을 생존경쟁으로 내몰아 채근하던 소(小) 권력자로서의 그녀는 동시에 그녀들의 유사 어머니이자 언니와 같은 존재이고 그녀들은 야박한 삶의 전쟁터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여하튼 꾸리고 산다. 영화의 후반부 한 장면에서 민 마담이 젊은 레지들을 앞에 놓고 다방에서 신세한탄을 하는, 길게 찍혀진 장면에서의 김지미의 연기는 강인한 카리스마 속에 슬쩍 감춰놓은 인간적인 연약함이 드물게 드러나면서 강함과 부드러움이 병렬된 에너지로 분출되는 매우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다. 임권택은 가차 없이 영화 속 인물들을 삶의 구석에 밀어 넣지만 그 인물들은 또한 원초적인 삶의 에너지로 견디어낸다. 이 긴장이 <티켓>에서는 팽팽한 극적 긴장의 심줄로 끝까지 지탱되고 있었다. 스크린에 존재를 새기다 아쉽게도 김지미의 연기 인생 후반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이장호의 필생의 대작 <명자 아끼꼬 쏘냐>에서 김지미는 젊은 시절부터 노역까지 소화하는 의욕을 보이지만 그녀의 본색이 드러나는 것은 영화 속에서 중년 이후의 삶을 연기할 때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좋았다. 한민족의 역사적 외상을 자기 몸에 품고 살아낸 것 같은 영화 속의 명자는 지난한 세월에서도 자기 색깔을 잃지 않고 군림했던 김지미라는 스타배우의 육체를 통해 구현될 때 칼로 찔리는 것 같은 상처의 흔적을 낸다. 종래의 김지미의 스타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은 김기영 감독의 몇 편의 영화들에서도 그랬다. <화녀 82>나 나중에 보게 된 <육체의 약속>과 같은 영화에서 김지미는 괴이한 인간의 마성을 탐구하는 김기영 감독의 일그러진 인간의 초상에 기꺼이 복종하는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이상하게 그 불균형이 시각적으로 진한 잔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김지미가 영화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된지 오랜 후에 나는 교육방송의 한국영화특선 프로그램을 3년 여 간 진행하면서 숱한 김지미의 영화를 보게 됐다. 1960년대의 한국영화들을 방영하는 이 프로그램에선 과장을 보태면 한 주 걸러 김지미 주연의 영화를 틀어주는 것 같았다. 김수용 감독 <사격장의 아이들>이나 이성구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진지한 드라마에서부터 <댁의 부인은 어떻습니까?>, <팔도며느리> 등의 계도성 오락영화, <내 주먹을 사라>, <홍콩의 마도로스>, <요화 장희빈>, <대원군> 등에 이르기까지 그 시기 한국영화계의 스타들이 다 그렇지만 엄청나게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김지미는 출연하고 있었다. 연기한다기보다 스크린에 존재하는 김지미는 동시대의 다른 여배우들과는 달리 늘 기세가 세고 당당하며 남자들이나 주변 세상에 맞서는 듯한 여성 이미지를 풍긴다. 아름다운데다 기세가 세서 실제로 만나면 왠지 기가 죽을 것 같은 강한 여성의 분위기는 그 이후로도 유례가 없을 것이었다. 늙어, 더 아름답다 이번 회고전에 상영되는 <불나비>는 김지미의 그런 스타 페르소나가 비교적 정돈된 각본을 통해 다양하게 시연되는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요부와 정숙한 현모양처를 상황 별로 오가며 여러 이름을 가진 정체불명의 여주인공으로 나온다. 남성 주인공이 홀린 듯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탐문하는 동안 녹아드는 매혹의 늪, 너무 반들반들해서 닿으면 미끄러질 듯 눈부신 바위를 기어오르는 것 같은 심정으로 김지미를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의 재미다. 서사의 농도가 치밀해서 빨려드는 쾌감은 없지만 느슨한 서사의 틈을 비집고 나와 메우는 김지미의 존재감은 장르영화에 소용되는 스타의 이미지 파워를 실감하게 해준다. 고전기의 많은 배우들이 그랬듯이 김지미도 숱한 영화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마모시키고 소모해 기진하는 운명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솔직히 말해 전성기 그녀의 출연작들에서 굵직한 대표작을 고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김지미 외에 김지미의 연기를 보기 위해서는 그녀의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그런데도 엄청난 다작 필모그래피의 수렁 속에서 기진하지 않은 그녀의 존재감, 단지 미모의 카리스마가 뛰어났다는 것을 넘어서는 어떤 강력한 존재감이 김지미를 김지미답게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불어라 칼바람, 외화의 공습이다 [6]

13. 존 카메론 미첼과 니콜 키드먼, 이름만으로도 떨리는 <래빗 홀> Rabbit Hole 감독 존 카메론 미첼/출연 니콜 키드먼, 아론 애크하트/개봉 2011년 2월 <헤드윅> <숏버스> 등 만드는 영화마다 화제를 낳고 관객을 사로잡으며 매력을 발산해온 감독 존 카메론 미첼이 니콜 키드먼이라는 강단있는 메이저 여배우와 만나 만들어낸 영화라는 점만으로도 흥미롭다. 베카 코벳(니콜 키드먼)과 호위 코벳(아론 애크하트) 부부는 어린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교통사고로 갑자기 아들을 잃게 되고 집안은 엉망진창이 된다. 베카는 도저히 아들의 죽음을 믿을 수 없다. 오히려 아이의 물건들을 버리기까지 한다. 남편은 그런 아내가 안타까우면서도 걱정스럽다. 행복했던 가정은 온데간데없고 서로간에 갈등이 커진다. 그즈음 베카는 아들을 차사고로 죽인 장본인인 십대 소년에게서 오히려 어떤 기이한 위안을 얻으려 한다. 2007년 토니 어워드에서 수상한 연극을 각색한 작품이다. 니콜 키드만이 직접 자신의 제작사에서 제작했고 토론토영화제에서 상영했으며 미국 내에서도 아직 개봉되진 않았다. 토론토에서 이 영화를 본 몇몇 사람이 강력한 호평을 올렸다. 지난 10여년간 각종 영화제를 다녔다고 자부하는 한 저널리스트는 “내가 지난 영화제들에서 본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한편이다. 흠잡을 데가 없다”고 말한다. “아름답게 연기하고 참을 수 없이 긴장감 넘치는 <래빗 홀>은 쉬운 상투로 결코 흐르지 않고 관습적인 접근으로 안심하지도 않는 드물게 진심어리고 민감한 영화다”라는 평도 있다. 글 정한석 14. 거장의 이야기는 후대로 이어지고 일루셔니스트 L’Illusionniste 감독 실뱅 쇼메/개봉 2011년 1월 자크 타티와 실뱅 쇼메, 이 두 이름은 <일루셔니스트>를 통과하기 위한 관문과도 같다. <일루셔니스트>를 제작한 실뱅 쇼메 감독은 단편애니메이션 <노부인과 비둘기들> <벨빌의 세 쌍둥이>로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는 물론 오스카와 BAFTA(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목받으며 스타로 떠올랐다. 쇼메는 2005년,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사랑해, 파리>에 참여해 극영화를 경험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위대한 코미디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자크 타티는 <일루셔니스트>의 시나리오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타티가 직접 제작하지 못한 시나리오는 쇼메의 손에 넘어갔고, 결국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했다. 타티가 사망한 해인 1982년에 쇼메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니 둘은 만난 적이 없다. <일루셔니스트>는 1950년대 후반의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마술사와 그를 진짜 마술사라고 믿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쓸쓸한 색채의 그림은 영화의 정서를 대변한다. 영화 속 마술사와 젊은 여자는 타티와 그의 큰딸을 대신하는 캐릭터다. 쇼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이렇게 얘기한다. “<일루셔니스트>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그린 영화다. 결코 로맨스영화가 아니다.” 원래 타티가 그린 도시는 스코틀랜드가 아닌 체코의 프라하였다고 한다. 아무래도 쇼메는 자신의 애니메이션 회사 ‘장고필름’이 위치한 스코틀랜드가 더 익숙했나보다. 글 이주현 15.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이름으로 히어애프터 Hereafter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출연 맷 데이먼, 세실 드 프랑스 /개봉 2011년 2월24일 <히어애프터>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하는 초자연적 스릴러라고 알려져왔다. <프로스트 VS 닉슨> <더 퀸> 등의 각본가 피터 모르간이 각본을 쓰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자 중 한명으로 참여하여 완성한 영화다. 영화는 세 사람의 각기 다른 주인공의 이야기를 하나로 모아간다. 중심은 조지(맷 데이먼)라는 인물. 그는 가난한 공장 노동자이지만 사후세계의 죽은 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지녔다. 마리(세실 드 프랑스)는 프랑스의 텔레비전 저널리스트인데 그녀는 거대한 쓰나미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 중 한명으로 죽음의 벼랑 끝에서 살아 돌아온 경험이 내내 그녀의 현실을 붙들게 된다. 그리고 영국 런던의 어린 소년 마커스, 그의 쌍둥이 형제가 다른 아이들에 쫓겨 도망가던 중 차사고로 죽게 되고 마커스는 형제의 죽음으로 참기 어려운 슬픔에 빠진다. 쌍둥이 배우 프랭키와 조지 맥라렌 형제가 이들을 연기한다. 각본을 미리 본 미국의 영화산업지 <버라이어티>는 <히어애프터>가 “<식스 센스>의 맥락 안에”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식스 센스>를 만든다면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식스 센스>가 더이상 아닐 것이다. 그가 장르주의자의 면모를 버리지 않지만 장르적 반전의 놀라움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공개된 예고편 클립을 보고 무작정 예상해보자면 이 영화는 알려진 것처럼 초자연적 스릴러라기보다는 초자연성을 겪는 사람들의 휴머니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각본가 피터 모르간은 “영적인 소재이면서 또한 로맨틱하며 설명하기 쉽지 않은” 영화라고 했고 이스트우드는 “삶에서 트라우마를 경험한 세 사람의 이야기이며 어떻게 이 이야기들이 서로 모이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의 중요한 시퀀스에서 이 모든 이야기들은 마침내 정점에 이를 것이다”라고 했다. 이스트우드, 그의 최신작 <히어애프터>의 열쇠말은 어쩌면 초자연적 스릴러가 아니라 죽음과 그 너머 혹은 남겨진 사람들에 관한 성찰의 드라마일지도 모르겠다. 글 정한석 16.<쇼 걸>에 <시카고> 추가요, 그리고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버레스크> Burlesque 감독 스티브 앤틴/출연 크리스티나 아길레라/개봉 2011년 2월 “LA행 표 주세요.” “편도요, 왕복이요?”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가수의 꿈을 키우던 시골 소녀 앨리(크리스티나 아길레라)는 LA의 오디션장에서 줄기차게 탈락한다.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공간은 클럽 ‘버레스크’. 전직 댄서 테스(셰어)가 운영하는 이 근사한 극장은 현란한 춤과 노래, 화끈한 여인들이 누비는 쇼로 유명하다. 웨이트리스로 취직한 앨리는 버레스크 무대에 오르는 날을 꿈꾸며 고군분투한다. “버레스크 쇼는 섹시하고 관능적이죠. 상대방을 애태우는 몸짓, 그 춤, 아름다운 여인의 예술이기도 하고요.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버레스크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 뮤직홀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쇼의 형태다. 풍자와 야유가 공존하는 퍼포먼스, 노래와 춤과 (대개는) 스트립댄스가 결합된 어덜트 엔터테인먼트, 가죽옷과 피시넷 망사 스타킹을 신은 여인들이 군림하는 무대. 버레스크가 다시금 부흥하게 된 건 1990년대부터다(패션 잡지 독자라면 뮤지션 마릴린 맨슨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버레스크 퍼포머 디타 본 티즈를 기억할 것이다). 이제 그 무대가 영화 속으로 옮겨졌다. 19세기 파리의 ‘물랭루주’ 클럽까지 갈 것도 없이, 여기 <쇼 걸>이 <시카고>에 겹쳐진 것만 같은 뜨거운 현장이 펼쳐진다. 10년 만에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여신 셰어는 물론이거니와 마돈나의 뒤를 잇는 우리 시대의 디바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의 영화 데뷔작이라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글 김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