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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베를린] 독일 영화사를 한눈에

우중충하고 비 내리는 베를린 포츠담 광장의 가을. 요즘 이곳을 찾는 독일인은 감회에 젖을 수밖에 없다. 장벽이 서고 무너졌던 분단과 통일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이었고, 올 10월3일로 통일 20주년을 맞았다. 통일 직후 허허벌판이던 포츠담 광장은 20년이 지난 지금 모던한 고층 빌딩들로 미래도시를 방불케 한다.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공간을 본뜬 것 같은 이곳은 베를린영화제가 열리는 독일영화의 중심지다. 장벽 바로 옆의 소니센터 안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레스토랑뿐만 아니라 영화박물관인 도이체키네마텍, 예술영화관 아르제날, 독일영화학교가 들어서 있다. 또 여기서 불과 몇 십미터 거리를 두고는 베를린영화제 본부와 행사장이 자리하고 있다. 서로 상호의존하는 기관들이다. 항상 수학여행 중인 학생과 관광객으로 붐비는 이곳의 연간 방문객은 14만명 정도다. 독일 다른 도시들에도 시네마테크가 있지만 자료 소장뿐 아니라 일반인도 열람 가능하고 박물관을 통해 전시까지 하는 시네마테크는 베를린영화박물관이 유일하다. 게다가 이곳은 베를린영화제에서 개최하는 회고전에 필요한 중요한 영화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각본 3만편, 포스터 2만점, 영화 프로그램 6만개, 주요 영화인들 관련 자료 등이 모두 여기에 있다.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1919년 무성영화부터 시작해 길을 따라가면 90년대 독일영화까지 전시되어 있다. 가는 길목에는 각종 시청각 시설로 감독과 영화를 시대별로 소개하고 있다. 오리지널 포스터, 낡은 영사기, 영화소품, 의상들도 눈길을 끈다. 베를린영화박물관은 올 베를린영화제에서 화려하게 선보였던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복원에도 큰 공을 세웠다. 특히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베를린영화박물관이 지난해 선보였던 동구권 영화 회고전 ‘겨울, 안녕’은 의미가 깊다. 원래 이 회고전은 2009년 베를린영화제의 작은 섹션으로 소개됐었고, 이후에는 박물관에 소장되면서 대출도 가능해졌다. 컬렉션 영화들은 공산주의 동구권 국가에서 만들어졌지만, 엄격한 검열에도 불구하고 1989년의 동구권 민주화의 낌새와 분위기를 잘 포착해낸 15편의 작품들이다. 극영화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단편·실험영화도 포함하어 있는 이 회고전 컬렉션은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얀 스반크마이에르 같은 대가들의 작품도 담고 있다. 이 컬렉션에 속하는 영화들은 연말까지 독일 전국의 여러 소극장에서 상영될 예정이다. TV 자료까지 수집, 보관, 전시 베를린영화박물관 관장, 라이너 로터 인터뷰 -베를린 독일영화박물관의 역할은 뭔가. =박물관이라는 존재가 순수한 노스탤지어의 장소라고만 하기 어렵다. 박물관은 과거를 전시한 것 이상을 내포한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제시한다. 워크숍, 강연, 영화 상영을 통해 전시회를 보완한다. 우리의 임무는 독일영화와 외국영화를 기록, 보관하는 것이다. 또 독일영화박물관만의 특별한 점은 텔레비전 자료도 수집, 보관, 전시한다는 점이다. 60년대 국제적으로 알려진 독일 감독 라이너 파스빈더, 폴커 슐뢴도르프, 페터 네스틀러는 원래 텔레비전에서 시작했다. 그래서 독일영화와 텔레비전 방송은 연관이 많다. -‘겨울, 안녕’이라는 회고전에 대한 생각은. =회고전의 영화들은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일반인보다 좀더 예민한 예술가들은 지진계처럼 미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감지했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테제가 틀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지금의 영화들도 우리가 30년 뒤에 있을 일들을 미세하게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겨울, 안녕’은 지금까지 평가절하됐던 영화사의 현상들과 그와 관련된 모순을 환기시킨다. 이 컬렉션은 서로 달랐던 동구권 국가들의 체제와 당시 시대에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전망을 보여준 훌륭한 영화들을 모아놓았다. -예를 들면 동구권 몰락의 조짐이 영화의 어떤 부분에서 드러나는가. =가령 이 회고전 컬렉션 속 영화들은 유머없는 코미디나 현실과 동떨어진 미화된 노동세계 등을 다룬다. 반면 다큐멘터리영화들은 당시 현실과 더 정면으로 대면했다. 그래서 이 회고전의 타이틀도 동독 감독 헬케 미셀비츠의 <겨울, 안녕>(1988)에서 따왔다.

[2010 미드] 가을 시즌 미드 신작 9편 - 코미디

5.글로벌 시대, 변방의 전화소리 <아웃소스드> Outsourced | 출연 벤 라파포트, 아니샤 나가라잔, 디드리히 베이더, 리즈완 만지 / 채널 “돌아갈 곳이 없어요, 여기서 성공해야만 한다고요!” 비장한 이 선언은 캔자스에서 뭄바이로 근무지를 옮긴 ‘중미엽기쇼핑몰’의 콜센터 매니저 토드(벤 라파포트)의 대사다. 저렴한 통화요금과 임금을 내세운 인도가 글로벌 기업의 콜센터 기지로 각광받은지도 어느덧 10년.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근무지를 옮겨버린 사장에게 항의도 해봤지만, “학자금 대출이 4만달러”가 남은 그는 군소리없이 뭄바이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겉과 속이 다른 현지 부매니저 라지브를 비롯해 한번 입을 열면 다물 줄을 모르는 굽타, 카스트의 가장 하층민이라서 제대로 말하지도 웃지도 못하는 마두리, 통신판매 대신 폰섹스를 하는 맨미트(이름이 ‘인육’이라서 코미디의 소재가 됨)까지, B급만 모아놓은 직원들을 데리고 벤이 금의환향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하지만 <아웃소스드>의 의도는 충분히 들여다보인다. 뭄바이라는 허브 도시에서 여러 문화가 충돌하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웃음으로 이용하되, 쇼가 일단 정점에 오르면 글로벌 경영시대의 소비주의, 문화사대주의 등 영리한 소재를 마음껏 활용할 수 있을 것. ‘중미엽기쇼핑몰’의 소품들만으로도 명절 단골 TV프로그램인 <퍼니스트 홈비디오>의 효과를 내고 있으니 각오하시라. Up <오피스>의 총괄프로듀서 켄 콰피스가 뭄바이로 사무실을 옮긴 격. 재미는 보장됐다. Down 재료와 레시피는 좋은데 조리시간이 길다. 제대로 웃길 때까지 시간 좀 걸릴 듯. 6.철없는 미혼부의 대책없는 육아일기 <레이징 호프> Raising Hope | 출연 루카스 네프, 마사 플림턴, 개럿 딜라헌트, 섀넌 우드워드 / 채널 ‘풍선껌맛’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집에 돌아오던 23살 백수 혹은 수영장 청소부 지미(루카스 네프)는 차도에 뛰어들어 도움을 요청하는 묘령의 여인과 눈이 맞아 화끈한 밤을 불사른다. 하지만 청순하고 아름답던 그녀의 정체는 공개수배 중인 연쇄살인범. 텔레비전으로 머리를 때려 기절시키는 기지를 발휘한 엄마(마사 플림프턴) 덕분에 ‘엽기적인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전기의자에 앉히지만, 화끈했던 그 하룻밤은 임신으로 이어지고 지미는 졸지에 미혼부가 되어 갓 태어난 딸 호프를 키우게 된다. 하지만 15살에 지미를 낳은 뒤 3분요리로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온 엄마와 지미가 청소해놓은 수영장에 낙엽을 도로 날리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아빠(개럿 딜라헌트)가 육아에 도움이 될 리 없다. 스케일로 따지면 유랑악단의 즉흥연주 같은 코미디 <레이징 호프>는 한없이 대책없지만 또 그만큼 낙천적이고, 가난하고 냉소적이지만 마음속은 풍요로운 한 가족의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그려낸다. 단 한대의 카메라로 액션과 반응숏만을 이용해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가 놀랍다. 물론, <레이징 호프>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당연히 ‘호프’ 때문이다. 호프가 자라면서, 이 가족에게 희망(Hope)도 자라날지 지켜볼 일이다. Up 루저들만 모아서 육아 미션을 던져준 리얼리티쇼를 보는 기분, 죄책감 만점의 스릴이 넘친다. Down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은 많은데 유명한 캐릭터는 없음. 진지한 제목도 코미디로서는 살짝 부족.

[김영진의 인디라마] 관계‘들’에 대한 신중하고 치밀한 묘사

나는 김수현 감독의 두 번째 영화를 오랫동안 기대해왔다. 장편 데뷔작 <귀여워>를 2004년에 발표한 이후 김수현은 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그는 꾸준히 시나리오를 썼지만 직선적으로 뻗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방사형으로 퍼지는 이야기를 쓰고야 마는 그의 창작 유전자가 영화계 투자자들의 마음이 들 리 만무했다.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귀여워>를 찍고 난 뒤에 그는 다음 영화에서는 한두명의 주인공이 축이 되는 이야기로 끌고 가겠다고 내게 말했지만 허언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올해 부산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공개된 그의 두 번째 영화 <창피해>가 김수현의 그런 창작 유전자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그는 관계가 아니라 관계‘들’에 주목하고 그걸 상업장편영화라는 매체가 허용하는 선까지 파고들어가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감독이다. 김수현식 만연체적 감정 표현 <창피해>에는 세명의 지우가 등장한다. 강지우, 윤지우, 정지우라는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미술대학 교수인 정지우가 작품 사진 모델로 윤지우를 캐스팅해 학생들과 스탭들을 데리고 해변에 가면서 벌어지는 <창피해>는 윤지우가 정지우와 정지우의 학생인 희진에서 털어놓는 강지우와의 격정적인 사랑에 대한 회상과 윤지우가 정지우, 희진과 나누는 교감이 현재의 플롯으로 교차 전개된다. 스토리는 지그재그로 얽혀 있고 현재와 과거, 현실과 환상이 마구 교차되기 때문에 두서없다는 느낌을 주는데, 김수현의 연출 스타일은 글로 치자면 만연체에 가깝다. 장면의 배분에 무리가 있는 것을 감수하고라도 필요하다면 장면을 길게 지속시키고 어떤 것들은 관객에게 암시 수준으로 짧게 던지고 지나가버린다. 인물들의 감정상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만연체를 마다하지 않는데 스토리의 복선과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기능적으로 처리하고 마는 것이다. 이를테면 비교적 초반부의 한 장면에서 강지우와 윤지우는 형사 민용과 함께 민용의 후배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 간다. 소매치기인 강지우가 일행과 도망치다가 윤지우가 백화점 옥상에서 던진 마네킹이 강지우 일행이 탄 차와 충돌하면서 사고가 나고, 뒤쫓아온 형사 민용이 강지우에게 수갑을 채웠는데 윤지우도 일행인 줄 알고 함께 수갑을 채운 뒤에 이런저런 곡절로 밥이나 먹고 가자고 그 중국음식점에 온 것이다. 중국음식점 주인인 민용의 후배는 여자들과 좋은 일이 있을 줄 알고 흑심을 품고서 일행을 극진하게 대접하는데 질펀한 술자리가 될 뻔한 이 자리는 강지우가 술기운을 빌려 자기 과거를 고백하는 분위기로 흐르다가, 나중에는 저 혼자 취한 음식점 주인이 자기 상처를 드러내 주사를 부리는 엉망진창의 상황으로 끝난다. 이야기 전개의 기능적인 차원만 따지자면 이렇게까지 길게 늘어질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이 장면을 김수현은 긴 분량으로 할애한다. 형사 역의 배우가 텔레비전 시트콤을 통해 알려진 연기자라는 걸 감안하면, 이 장면 이후로 그가 서사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이만 총총 사라지는 것도 황당하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땐 이런 식의 리듬이 김수현이 스토리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채 정돈하지 못한 탓이라고 여겼다. 두 번째 봤을 땐 이것이 여하튼 김수현식 화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스토리의 리듬보다는 관계의 반응에 주안점을 두고 연출하는 감독이다. 곧 말하는 사람보다는 듣는 사람, 행동하는 사람보다는 그걸 보는 상대편에게 비중을 두고 연출하며 그 반응이 애초의 화자에게 다시 메아리치는 걸 영화의 동력으로 삼는 연출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방법으로 <창피해>는 비일상적인 방식으로 사랑에 빠지는 두 여자의 궤적을 따라간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도식화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강지우는 어릴 적 아버지와 이별한 뒤 관계에서 버림받을 것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이 내재된 여자이다. 윤지우는 남자들에게선 이상하게 만족을 느낄 수 없는, 영화 속 표현에 따르면 이타적 유전자를 지닌 여자다. 고된 백화점 노동으로 살아가던 그녀가 어느 날 자신을 닮은 마네킹을 들고 옥상에 올라가 우아하게 와인 한잔을 들면서 시간을 즐기다가 마네킹을 옥상에서 떨어뜨린 건 빛이 보이지 않는 자기 인생에 대한 유사 자살시도였는지 모른다. 그런 윤지우를 만났을 때 “어머니가 자살하는 것을 보았다”라는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모를 소리를 태연히 하면서 도무지 세상 어떤 일도 자신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식의 행동을 하는 강지우에게 끌린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두 여주인공의 심리를 김수현은 소소하게, 반응을 통해서, 섬세하게 축적시킨다. 극적이고 명시적이며 단언적인 묘사와 달리 뭔가 주인공들의 어조와 제스처를 조심스럽게 훔치려는 듯한 연출 때문에 영화는 더디게 진행된다. 그것들이 축적돼 덩어리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중반 이후에 <창피해>는 그녀들의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정체를 얼마간은 알게 된 듯한 느낌을 관객에게 준다. 이는 윤지우의 근처에서 어른거리는 정지우와 희진을 통해 얻는 감정이기도 한데, 나이가 좀 있는 여교수 정지우와 대학 신입생인 희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윤지우에게 호감을 품고 그녀를 관찰한다. 정지우가 윤지우의 상처의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보듬는 태도라면, 희진은 윤지우의 색다른 동성애 경험에서 삶의 에너지를 본다. 정지우는 광주학살 때 임신한 채로 죽은 젊은 여자의 사진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어 작품을 구상한 것과 마찬가지로 윤지우에게서 어떤 동질의 슬픔을 보는 것 같다. 희진은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에서 만족하지 못한 어떤 결핍의 활로를 윤지우에게서 본다. 적확히 드러나는 관계 속의 감정선 매혹과 상처가 관계들의 둘레에서 여러 겹으로 싸고 도는 이 영화에서 제목 그대로 ‘창피하다’는 감정은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랑 앞에서 자신이 그걸 감당해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라는 감정이기도 하고 사랑을 하거나 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그럴 자격이 있나 우물쭈물해지는 그런 감정이 이 영화에선 창피하다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이런 점에서 <창피해>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여러 관계들에서 상대에게 감응할 수 있는 감성의 최대치를 열어 보이는 영화다. 톱니바퀴처럼 들쭉날쭉하는 리듬 속에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관객인 나는 간혹 숨이 열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영화 속 대사에도 나오는, 들숨과 날숨이 똑같은 두 주인공의 상태에 완벽하게 동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찾아오는 그들의 들숨과 날숨의 호흡에 완전히 동화됐다고 느낄 때 숨이 열린다는 기묘한 해방감을 얻었다. 이는 희한한 체험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김수현의 재능이 상업적으로 통할 만한 것은 아니다. 그가 꽉 짜인 내러티브에서 자신의 감성과 비전을 펼칠 만한 조건이 만만하게 주어질 것도 아니고, 그만큼 눈밝고 기가 센 프로듀서가 드물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개인적으로는 그의 재능이 한국영화계에서 보호받았으면 좋겠다. 그는 다른 시각과 감성을 가진 감독이고 자기만의 예술을 한다. <창피해>에서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관계 속의 감성들은 갯벌에 묻혀 있는 게처럼 가끔 발을 내밀어 관객을 찌른다. 특히 이 영화에서 김효진, 김꽃비 등의 주연 여배우들의 클로즈업이 주는 느낌이 무척 좋은데 이건 단순히 숏 크기를 정해서 얻어지는 그런 감흥은 아닐 것이다. 인물들의 등장부터 퇴장까지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순간은 하나도 없다. 그게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김수현이라는 감독의 재능이 삶과 조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가 늘 닫아놓고 살고 있는 관계의 소통망, 어느 일방으로만 열어놓고 있거나 상투적인 시선으로만 조율하고 있는 틈을 그는 마구 열어놓아 보는 이가 지칠 때까지 밀어붙인 다음 이런 것이 우리 삶의 주변에 있는 아름다운 자취는 아니었겠느냐고 신중하게 묻는다. 그의 만연체 연출 스타일은 삶에 대한 겸손과 대응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작으로 선정, 제작되어 부산영화제에 다행히 출품됐지만 지금으로선 상업적 개봉이 불투명한 <창피해>의 운명을 걱정하면서 김수현의 재능을 좀더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이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뿐 아니라 국제영화제까지 공습했다. 이스라엘영화제가 초청자들의 잇단 취소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미 지난 7월, 가자지구 공습으로 9명이 죽은 참상을 들어 멕 라이언과 더스틴 호프먼이 앞서 열린 예루살렘영화제에 불참을 선언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인들이 이스라엘영화제에 대해 가지는 반감은 유대계 영국인 마이크 리 감독이 불참을 통보하면서 드러났다. 당초 마이크 리 감독은 ‘샘 슈피겔 영화, 텔레비전 학교’에서 진행되는 마스터클래스 강사로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의 시민권 수정법안 추진과 관련해 난색을 표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보수정부가 내린 이 법안은, 비유대인이 시민권을 취득하려면 이스라엘이 ‘유대국가이자 민주국가’임을 인정하고 충성서약을 하도록 규정한 내용이다. 마이크 리 감독은 영화제 주최쪽에 보낸 불참 통보서에 “실망시켜서 미안하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다. 갈 수 없고 가고 싶지도 않고, 가지 않을 것이다”라며 팔레스타인계 주민을 겨냥한 인종차별적 법안에 대한 정치적 소신을 밝혔다. 또 지난 5월, 이스라엘 특공대가 가자지구행 국제구호선을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방문을 취소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며, “좀더 빨리 결정하지 못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을 두고 “어린이를 포함한 무고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사지로 몰아넣는 무자비한 행위”라는 비판을 덧붙인 그는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방문 초청에 응할 것”이라고 편지를 맺음했다. 한편, 영화제쪽은 마이크 리의 결정에 대해 ‘현실에 직면하는 대신, 오히려 가장 멀리 달아난 것’이라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올해로 25회를 맞는 이스라엘영화제는 지난 10월20일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개막해 오는 11월4일까지 열린다.

[오마이이슈] 소신의 계절

나도 소신을 지키고 싶다. 사회적 체면과 지위(씨네리 종신필자라는!)를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아무도 나에게 그걸 묻지는 않지만, 미국산 쇠고기 들여온 협상대표에게만 그게 있는 게 아니거든(옆이나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한 소신은 대단히 후지다. 하물며 국민을 적대시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공직’자의 소신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내년이면 여섯살이 되는, 남달리 운동을 좋아하고 심지어 집착하는(바깥놀이 못한 날에는 숟가락 물고 식탁 다리에 매달려 있거나 물구나무서서 텔레비전을 봄) 아이를 둔 처지라 시의 산하기관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체육기관에 보낼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동네에 대단위 아파트가 재건축되면서 이 기관에 대한 과열조짐이 일더니 지난해에는 ‘새벽 4시에 갔더니 끄트머리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래서인지 올해에는 공개추첨을 검토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반가웠다. 애 운에 맡기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니까. 그랬던 것이 등록 시기가 되자 뒤집어졌다. 예전처럼 선착순 마감을 한다는 것이다. 하룻밤 고생을 하더라도 어떻게든 자식을 그곳에 보내고픈 학부모들의 요구가 빗발쳤다고 한다. 나는 난관에 봉착했다. 새벽 혹은 전날 밤부터 덜덜 떨면서 줄을 서서 기어이 아이를 그곳에 보내야 하는가. 불필요한 경쟁이다. 교육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옳지 않을뿐더러 미학적으로도 꼴불견이다. 무엇보다 나의 원래 의도와도 맞지 않다. 아이가 부디 교육기관에서 ‘진을 다 빼서’ 귀가했으면 하는 게, 그래서 바깥놀이를(괴물놀이나 잡기놀이, ‘엄마도 매달려봐’ 따위) 요구하지 않았으면 하는 게, 나의 ‘이기적 모성’이니까. 어떻게든 일신상의 안락을 꾀하는 소신파인 내가 줄을 서서야 되겠니? 왠지 여기서 무너지면 ‘로드 매니저 엄마’ 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중요한 건 원하는 수요를 충당할 수 있는 양질의 보육·교육기관이 많아지는 것이지만, 그건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학부모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합리적으로 검토하던 방침까지 무력화할 ‘어떻게든 내 자식은…’ 대열에 편승하느냐 마느냐 목하 고민 중이다. 나 하나 ‘거부’한다고 이 문제가 달라지겠는가마는 고민 중에 드는 생각은, 적어도 내가 거부하면 이 문제에서 ‘나’를 지킬 수는 있겠다는 것이다.

[영화읽기] 그 애달픈 비관

눈이 크고 목이 짧으며 왜소한 체형을 지닌 인물들의 인상은 마치 아이와 같다. 그 눈짐작은 틀리지 않을 것인데,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들은 결코 어른이 되지 못하는 아이들인 ‘키르도레’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칸나미가 도착한 비행 부대 부근은 대단히 고요하고 평화로워서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것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부대의 파일럿들은 휴게실에서 신문을 읽거나 맥주를 마시고 때로는 드라이브 인 식당에 가서 미트파이를 먹는다. 하지만 경고음이 울려 적기의 침입을 알리면 복고풍의 전투기를 타고 나가 공중전을 치른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통해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전투장면을 게임 보듯 즐기며 전쟁을 판타지로 경험한다. <스카이 크롤러>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가 <이노센스> 이후 4년 만에 완성한 SF애니메이션이다. 롱테이크와 우아한 리듬의 촬영, 실감나는 전투장면의 재현은 일본 애니메이션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 작품이 일본 젊은 세대에 ‘희망의 전언’을 전달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김봉석이 언급한 바 있다(<씨네21> 776호). <공각기동대>(1995) 이후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은 미래를 신생의 이미지가 아닌 몰락의 이미지에 몰아넣는 재현의 관습을 보여줘왔다. 그의 SF물에서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은 묘한 노스탤지어와 맞닿아 있다. 도래할 신생의 어떤 것, 그 미지에 대한 기대감이라기보다는 이미 상실한 무언가에 대한 나른한 조우. 이 우아한 상실의 시선은 아마도 자신이 억압하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 텐데, 이 글은 이 시선의 행방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평화의 나른한 권태와 가짜 전쟁의 재현 <스카이 크롤러>는 근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SF애니메이션이다. 전쟁이 종식되었지만, 평화의 나른한 권태에 빠진 사람들은 군수회사를 동원하여 ‘가짜 전쟁 쇼’를 만들어낸다. 록스톡과 라우테른이라는 군수회사는 ‘키르도레’(Kildren)라는 미스터리한 아이들을 전투기에 태워 전쟁을 수행한다. 중요한 점은 어느 한편이 이겨서 전쟁이 끝나지 않도록 게임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임의 룰은 다음과 같다. 키르도레가 동원된 전쟁에 ‘티처’라는 어른 남성이 등장한다. 흑표범이 새겨진 전투기를 모는 이 성인 남자는 모든 상대를 이기는 게임의 변수다. 그래서 라우테른사가 불리할 때는 그 회사의 일원이 되고, 록스타사가 불리할 때는 이 회사의 일원이 된다. 키르도레는 일종의 상수다. 신비롭게도 이들은 죽어도 되돌아와 다시 전투기에 오른다. 눈치챘겠지만 이 ‘전쟁쇼’는 악무한(惡無限), 즉 종결없는 반복지옥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게임의 룰을 벗어날 도리는 없다. 결코 이길 수 없는 적이 있고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되돌아오는 아이들이 있으며 이들은 절대 어른이 되지 않는다. 영화는 키르도레가 품게 되는 질문,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기시감은 무엇인가’를 중심으로 느슨한 미스터리를 만들어가며 전쟁과 폭력에 대한 외면화된 주제 이면에 정체성과 윤리에 대한 민감한 문제를 배치하고 있다. 일본인에게 혹은 오시이 마모루에게 2차 세계대전은 하나의 최종 전쟁이었으며, 원자폭탄 투하 이후 세계가 균질한 시간대에 접어들었다는 판단은 전쟁에 대한 묘한 반감과 더불어 향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지식인의 이른바 ‘근대의 초극’ 좌담에서 전쟁이란 하나의 자연사적 현상이며 역사가 지속되는 한 끝나지 않으리라는 입장을 내세운 바 있다. 일본에 있어서 2차대전 이후의 세계는 외부의 전쟁을 관조하며 스스로의 전쟁 욕망을 다스리는 시기였기 때문일까? 패전 이후 폭력이란 내재화되고 미학화되어 전쟁이 불가능한 일본사회의 심리적 대안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실제 전쟁이 아니라 이미지로 폭력을 향유하는 방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이런 입장은 극중에서 쿠사나기를 통해 직설적으로 제시된다. “전쟁은 어떤 시대라도 완전히 없어진 적이 없어. 그건 인간에게 그 현실미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야. 같은 시대에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가 싸우고 있다는 현실감. 인간사회의 시스템에는 불가결한 요소니까. 그리고 그것은 절대 거짓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어. 전쟁이 무엇인지는 역사교과서에 실려 있는 옛날이야기만으로는 불충분한 거야. 정말로 죽어가는 인간이 있고, 그게 보도되고, 그 비참성을 보여주지 않으면 평화를 인식할 수 없어.” 오시이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은 전쟁과 폭력에 대한 단호한 거부와 반대의 입장을 표면에 드러내는 동시에, 내면에서는 폭력에 대한 묘한 노스탤지어를 심미화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그가 각본을 쓴 애니메이션 <인랑>에서 <스카이 크롤러>로 이어진다. 고요한 평화를 찢는 공중전의 실감나는 재현은 폭력에 대한 강한 선망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인랑>과 <스카이 크롤러>는 전쟁이 불가능한, 혹은 전쟁이 폐쇄된 곳에서 그것을 대체하는 전쟁 게임을 수행하는 폭력-기계로서의 인간을 주제화하고 있다. 키르도레는 본래 군수회사의 상품이었다. 유전자 제어제 개발 도중 키르도레라는 묘한 상품, 즉 어른이 되지 못하며 죽지도 않는 상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아이들이 다시금 환생해서 돌아오는 까닭은, 그가 지닌 파일럿으로서의 성능을 보유하려는 회사의 의도 때문이다. 키르도레는 테크놀로지 조작을 통해 태어났으며, 자율의지 없이 전쟁 게임 속으로 들어와서 영원히 반복되는 폭력을 대리한다. 이 영원한 데자뷰의 세계에서 주인공 칸나미는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의혹도 없이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나 내면에 깊은 의지를 지니고 있어서, 생을 끝내달라는 쿠사나기의 요청에 “그래도 너는 살아라, 무언가를 바꿀 때까지”라고 말한다. 결국 칸나미는 전사하고, 영화의 쿠키 영상(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난 뒤 나오는 부가영상)은 새로 부대로 전속받은 파일럿의 도착을 보여준다. 상관인 쿠사나기는 새로 배속받은 히이가리 이사토(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에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라고 말한다. 이 기다림, 권태와 퇴폐의 무한 지속 속에서 어떠한 온기처럼 잃지 말아야 할 유일한 한 가지는 이 기대감뿐이다. 무한히 반복 생산되는 상품이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회의하며 숙명에 저항하기 위해 영원한 시간의 반복을 감내하는 주인공의 결의는, 마찬가지로 생산된 프로그램에 불과했지만 스스로를 ‘생명’이라 선언했던 <공각기동대>에서의 프로그램 2501, 일명 인형사와 유사한 각성을 보여준다. 불가능한 전쟁을 대체하는 폭력의 미학 <스카이 크롤러>에서 주인공 칸나미가 배속된 전투부대의 지휘관은 쿠사나기(<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의 이름과 같다)다. 더불어 <이노센스>에 등장하는 개(실제로 오시이 마모루가 키우던 개로 알려져 있는데)가 등장해서 그의 전작과 연결되는 서사적 회로를 구성하고 있다. <스카이 크롤러>의 쿠사나기는 <공각기동대>의 결말에서 소녀의 의체를 입은 형상과 거의 유사한 키르도레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한편 주인공 칸나미는 ‘진로우’라는 전임자를 대체하여 이 전투부대에 배속되었는데, ‘진로우’란 <인랑>의 인간늑대인 ‘인랑’(人郞)의 일본식 발음과 같다. 광대한 네트로 ‘융합’하여 다른 생명의 진화 단계로 넘어간 쿠사나기와 전쟁 기계인 인랑은 다시 이 폐쇄적이고 반복적인 전쟁 지옥으로 들어왔는데, 이들이 이 회로에서 빠져나올 도리는 없다. 폭력에 길든 인간늑대 ‘진로우’나 살인 무기인 키르도레를 만든 자들에게 테크놀로지란 조작 가능한 것, 즉 숙명과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자들, 즉 인랑이나 키르도레에게 테크놀로지란 어떠한 숙명 같은 것인데 이들은 자율적 의지로 숙명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애니메이션들이 매혹적이며 의미심장한 어떤 주제와 미학을 건설하고 있다면, 그것은 전쟁과 폭력의 비인도성에 대한 고발이나 ‘그래도 넌 살아라’라는 젊은이에게 건네는 희망의 전언과는 다른 방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오시이 마모루 애니메이션의 매혹은 ‘숙명’의 부근에서 나른하고 우아하며 퇴폐적으로 전개되는 폭력의 심미화에 그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나는 칸나미가 죽기 전에 독백한 ‘항상 지나는 길이라도 경치가 똑같은 것은 아니야. 그것만으로는 안되는 것일까?’라는 가능성의 대사를 희망이 아닌 절망의 메시지로 읽었다. 그것만으로는 안되며, 결코 숙명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여줄까, 아니면 죽여줄래?’라는 쿠사나기의 도발에서 어떤 가능성을 감지하게 되는데, 그녀가 보여주는 그 애달픈 비관, 폭력의 긍정이면서도 부정인 미묘한 정치성이야말로 오시이 마모루 애니메이션이 보유한 심미성의 근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송효정 영화평론가. 대학원에서 식민지 도시문화를 연구한다. 영화와 문학에 대해 글을 쓰고 강의를 한다.

[김영진의 인디라마] 갈수록 깊어지는 그의 영화언어에 경배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장률 감독의 신작 <두만강>이 좀더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이 영화는 장률의 필모그래피에서 최고작일 뿐만 아니라 동시대 영화 가운데서도 걸작 수준에 올라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장률의 영화언어는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스토리의 예정된 인과성을 비집고 삐죽삐죽 솟아나는 감정의 기세가 강렬해서 영화의 대단원에 이르면 거의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장률의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스타일은 늘 그렇듯이 담담한 외형을 지키지만 내적 리듬의 격렬함은 그 자신의 어느 영화보다 거세다. <두만강>은 두만강 어귀에서 북조선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중국의 어느 조선족 동포 마을이 배경이다.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이 마을에 북조선 사람들이 강을 넘어 탈북해 들어온다. 북조선 탈북자들에게 처음엔 동포로서 호의적이었던 중국 조선족 마을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자신들의 먹을 것을 훔치고 이런저런 해코지를 본의 아니게 저지르자 이윽고 그들을 꺼리고 혐오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남한에 돈 벌러간 채 할아버지와 벙어리 누나 순희와 함께 살고 있는 조선족 동포 창호는 북조선과 중국을 수시로 넘나드는 정진이란 북조선 소년과 친구가 된다. 그들의 우정도 어른들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변화를 겪는다. 화면 안과 바깥의 조응과 길항의 연출 방식 간단한 스토리지만 간단하지 않은 것을 담고 있다. 신문 사회면 단신에 나올 법한, 또는 텔레비전 휴먼다큐에 나올 법한 스토리인데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다 여러 입체적 정황을 암시적으로 배치해놓았다. 조선족 아이들이 늘 눈 내리는 마을 어귀 공터에서 중국 공안과 공차기 놀이를 하고, 치매에 걸린 마을 이장 어머니는 늘 강을 건너려 하고, 명태 등을 수송해 파는 마을 상점 아저씨는 트럭에 몰래 북조선 탈북자를 숨겨 들어오고 하는 따위의 정황들이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창호와 정진 두 소년의 우정이 점진적으로 발전해가는 것이 보인다. 처음엔 못 사는 데서 왔다고 은근히 정진을 괄시하던 창호는 정진이 축구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곧 닥칠 건넛마을 아이들과의 축구경기에서 정진이 함께 뛰어주면 좋겠다고, 이를테면 스카우트 제의를 한다. 정진이 병을 앓는 어린 누이동생에게 먹을 것을 구해주러 도강한다는 걸 안 다음부터 창호는 정진에게 더 잘해주는데 상황은 이들의 우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느 날 밤 늦게 한 탈북자 남자가 창호 집을 찾아와 하룻밤만 창고에서 재워줄 것을 청한다. 이튿날 창호와 할아버지가 시내로 간 사이 탈북자 남자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준 순희에게 처음엔 엎드려 절하며 감사를 표하지만 배가 부르고 여전히 먹을 것이 상에 남아 있자 은근히 술을 청한다. “술 한잔 먹었으면 딱 좋갔는데….” 순희가 꺼내준 술병을 그 남자가 급히 거듭 들이켤 때 순희는 텔레비전을 켜고 화면에는 김정일을 찬양하는 관제방송이 흘러나온다. 취기가 얼굴에 불콰한 탈북자는 그 화면을 보고 잠깐 경기를 일으키고 순희에게 먹잇감을 찾은 승냥이의 표정으로 대든다. 이 부분은 <두만강>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면이다. 다른 관객도 그러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이 장면에서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이란 예감을 받았다. 동시에 그 예감이 실제로 적중한다면 이 영화에 실망할 것이란 느낌 때문에 조마조마했다. 그런 일이 왕왕 일어나는 것이 현실이라 해도 이 영화에서 극적 파장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사건이 벌어진다면 뭔가 인위적인 감독의 개입 흔적을 떨쳐내지 못할 것이고 이는 하수의 방식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상대로 탈북자가 천사의 성품을 지닌 순희, 말 못하는 순희에게 못할 일을 저지르는데도 영화의 극적 조율방식에 정이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앞서 말한 텔레비전 화면을 비추고 있고 뭔가 끔찍한 일은 화면 바깥에서 벌어진다. 순희의 비명소리, 헐떡이는 남자의 소리가 김정일 찬양방송의 사운드와 겹치면서 감정적으로 증폭되고 화면이 커트되면 남자는 집에서 나와 허겁지겁 도망치고 그 광경을 창호의 마을 친구인 철부가 몰래 훔쳐보고 있다. <두만강>에서 장률은 이전의 영화에 비해 훨씬 입체적인 방식으로 화면 안에 담긴 것만큼이나, 또는 그 이상으로 화면 밖을 보여주는 것에도 상당한 암시의 너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물들이 화면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지속되는 어떤 상황의 묘사가 화면 안과 바깥의 변증법 속에서 길항관계를 이루며 조응하는 패턴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앞서 조마조마했던 상황이 극적 강조를 넘어 파탄으로 치닫지 않은 것도 이같은 묘사방식 덕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면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바깥으로도 확장되어 계속될 거라는 관객의 인식이 장률의 연출에 따라 차곡차곡 쌓이면서 우리는 스토리 전개보다는 화면 안과 바깥의 상황에 더 예민해지고 그것들이 이루는 보이지 않는 띠에 반응하게 된다. 이런 것을 장률이 새로 창조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로베르 브레송과 같은 서구 감독이 이미 성취한 미니멀리즘의 변증법을 따라하거나 계승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뭐랄까, 다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너무 가슴이 아플 만큼 현실의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을 끌어안으려고 하는 감독의 예술적 포용력의 깊이를 이 화면 안과 바깥을 아우르는 스타일이 대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많은 아우성과 슬픔과 분노를 눌러 담은 영화 영화 후반에 이르면 정말로 관객도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화면 속 인물들의 담담한 행동과 달리 파도처럼 밀려든다. 친구 철부에게 누나 순희가 탈북자에게 강간당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그리고 순희가 그 일로 임신한 것을 안 뒤, 창호는 마을 아이들을 데리고 탈북자들을 린치하러 다닌다. 절친했던 정진과 다른 탈북자 소년들에게도 똑같이 막 대한다. 어느 날 정진이 순희 누나가 차려준 밥상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집에 돌아온 창호는 욕을 한다. “야, 임마, 네가 왜 여기서 밥을 먹고 있어?” 정진은 당당하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창호에게도 약속을 지키겠다고 한다. 무슨 약속이냐고 창호가 되묻자 이웃 마을 아이들과 축구경기 할 때 꼭 오겠노라는 약속이라고 정진이 말한다. 먹을 것을 싸주려는 순희 누나에게 정진은 이제 자기 어린 여동생은 죽었으니 그것은 필요없다고 말한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설명하는 것은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관객에게 실례다. 더이상 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가 예상했더라도 차마 응시하지 못할 대단원의 파국이 펼쳐진다. 그건 앞서 말했던 화면 안과 바깥의 조응과 길항을 엮는 최고조의 장률 연출이 펼쳐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평론가로서 이렇게 쓰는 것이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두만강>의 절정부에서 울고 싶은데 울 수 없는, 꺽꺽대고 목에서 막히는 슬픔을 느꼈다. 거의 참을 수 없는 폐소공포증을 느꼈다. 등장인물들의 삶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이 포괄하는 이 땅의 비극에 대해 갖는 공포였다. 그 어떤 정치가나 예술가가 이토록 비통한 슬픔을 보여줬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 어떤 영화가 이렇게 격조있게 동포들의 삶의 불행을 보여줬는지도 생각나지 않는다. 여기서 그 격이란 것은, 화면 안에서 물리적으로 컷을 계산해 붙여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다른 영화에서 다섯개의 컷이 필요하다면 한두개의 컷으로도 보여주는 게 가능한 시와 비슷한 것이라고 느껴진다. 표현할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말수가 적어지는 상황처럼, <두만강>의 화면은 과묵함 뒤에 수많은 아우성과 슬픔과 분노를 눌러 담고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눈 내리는 두만강 다리를 걸어가는 치매에 걸린 노파의 이미지가 길게 보인다. 이 이미지는 강렬한 상징을 넘어선 근원적인 비극성을 품고 있다. 이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장률 감독의 예술적 자아에 그저 경의를 표하고 싶을 따름이다. <두만강>은 올해 가장 푸대접받은 걸작이며 그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고 절실하게 바라게 되는 영화이다.

[할리우드 뉴페이스 10] 부드러움 뒤에 강인함

일찍이 스파이더맨의 특징은 무엇이었던가. 일단 기본적인 자격 조건은 유약남이다. 수줍고 여리고 감수성 뛰어난 청년. 하지만 영웅의 옷을 입었을 때는 누구보다 강인하고 당당해지는 그런 남자여야 한다. 앤드루 가필드가 당대의 가장 뜨거운 할리우드 시리즈 중 한편인 <스파이더맨4>의 차세대 피터 파커로 낙점된 걸 보면 그런 양면의 이미지를 호소력 있게 잘 전달했던 것 같다. 그간에 여러 역할을 거치며 주목을 요하는 신인 남자배우로 거듭 거론되었던 것도 아직 초보 신인에 불과한 그가 수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었던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가능성은 일찍부터 검증됐고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체조와 수영으로 다져놓은 몸이라 그런지 균형감각이 있으면서도 그는 어딘가 우수에 젖은, 그리고 주변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아웃사이더의 역할을 더할 나위 없이 잘해냈다. 2005년에 텔레비전 출연으로 얼굴을 알리더니 2007년에는 <버라이어티>가 선정한 주목할 만한 남자배우 10인에 오르고 2008년에는 드디어 영화 <보이 A>에서 그의 진가를 발휘한다. 유년 시절에 죄를 짓고 복역한 뒤 나와 다시 사회의 적응하려는 이 힘겨운 청년의 일화를 그는 유능하게 연기해냈고 영국 아카데미 어워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 뒤로는 영화배우로서 쾌속항진이다. 2009년에 마크 로마넥의 <네버 렛 미 고>를 거쳐 오는 11월에 우리를 찾을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 그리고 <스파이더맨4>까지. 로버트 드 니로나 대니얼 데이 루이스, 알 파치노를 존경한다고 한 걸 보면 욕심이 많은 친구다. 그가 <스파이더맨>으로 돌아올 때 영웅은 또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보자. 아니, 그전에 <소셜 네트워크>에서 그의 연기를 확인할 수 있는데, 꽤 근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