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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황혼에서 새벽까지

사기 당하는 사람에게는 다 사기성이 있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언젠가 저녁 귀가 길에 여의도를 지나면서 신호대기 중이었는데 트럭 한대가 오른편에 바짝 붙더니 창문을 열고 운전기사가 소리쳤다. “제주옥돔, 광어, 전복 횟감 좋은 거 있어요. 주문받은 거보다 더 갖고 와서 창고로 돌아가는데 담배값하고 소주값만 주고 다 가져가세요.” 나는 주섬주섬 트럭 꽁무니를 좇아갔다. 트럭은 하필이면 가로등도 드문 어두컴컴한 길가에 섰다. 트럭의 남자는 00수산 대리라는 명함을 내밀면서 가격표를 보여주었다. 전복 32만원, 옥돔 16만원…. 남자는 ‘소주값’ 운운하면서 한 박스에 5만원씩만 받겠다고 했다. 이런 횡재가! 약간의 흥정 끝에 나는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털어서 14만원을 주고 짐칸 구석에 있던 박스 여섯개를 내 차에 옮겨 실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환한 거실 형광등 아래서 박스를 하나씩 열어보고는 기절할 뻔했다. 전복은 바싹 말라비틀어진 것을 얼음 위에 드문드문 붙여놓았고, 제주옥돔과 광어는커녕 황돔만 다섯 박스였다. 그나마 1주일 뒤엔가 중금속에 오염된 중국산 황돔이 국내에 유통되고 있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을 때 이 박스들은 모두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허망한 최후를 맞았다. 나는 보급투쟁 나온 시장의 게릴라들에게 간단히 지갑을 털린 셈이다. 시장의 게릴라들은 양민의 지갑만 노리지 목숨은 건들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라고 할까. 사실, 맛있는 회를 합법적인 경로로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먹겠다는 투철한 시민의식이 확립돼 있었다면 게릴라들의 낚시질에 그처럼 간단히 걸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고 이후의 삶에서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 ‘사기 당하는 자도 다 사기꾼 기질이 있다.’ 최근에 나는 뜻밖의 낭패를 당하면서 새삼 몇년 전의 교훈을 되새기게 되었다. 나는 이를테면, 도와달라는 간곡한 요청에 못 이겨 거리로 나섰다가 뭇사람들에게 돌팔매를 맞는 그런 경험을 했다. 그건, 애인이 강도로 돌변하고 도적이 몽둥이를 드는 것과 같은 역설이었다. 사람이 살다가 그런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그런 건 그저 영화적 상상력이 허용하는 사건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자동차 없는 교통사고에서 살갗 대신 마음이 찢기고 보니, 갑자기 영화 속에서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이상한 운명에 걸려들어 허비적거리던 그 딱한 사람들의 얼굴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뇌성마비 처녀를 좋아해서 잠자리를 하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친 가족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던 종두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황혼’ 무렵에 자신을 은신처로 안내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어떤 술집에 들어섰다가 은신처는 고사하고 밤새 흡혈귀떼한테 시달리고는 ‘새벽’ 무렵 기진맥진해서 이 이상한 술집을 빠져나온 조지 클루니의 허탈한 표정은 또 어떤가. 해가 지글거리는 사막지대 한가운데 ‘U턴’ 표지판 앞에서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차 고치러 어떤 낯선 마을에 들어간 숀 펜은 한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자기 집 커튼을 달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비적비적 그 집으로 따라갔다가 결국 이 낯선 마을에서 온갖 치정에 얽힌 미스터리들의 그물에 포박되어 마침내 돈 잃고 목숨까지 잃지 않았던가. 물론 그 모두들은 ‘유혹에 약하다’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결함을 지니고 있었다. 나이 마흔이 불혹이라고? 글쎄다. 사람의 나이에 불혹이 찾아오는 시기가 있기나 할까. 학문 이야기를 하면서 ‘서른에 뜻을 세우고(而立), 마흔에 흔들리지 않고(不惑)’라고 했을 때,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어떤 이론을 세우고 그 확신에 흔들림이 없다는 걸까. 아니면 학문에 뜻을 두었으면 그 태도에서 흔들림 없다는 걸까. 어느 쪽도 다 틀린 것 같다. 장국영은 마흔이 훌쩍 넘고도 영화나 음악은 고사하고 심지어 죽음의 유혹에 몸을 던져버렸다. 대중의 스타라는 건 너무나 아찔한 장소여서 늘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제 초심자이긴 하나 그래도 소설 쓰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건 다행스런 일이다. 창작이 인생을 제련해서 금을 캐내는 작업이라면 큰 산 하나가 무너졌을 때 얻을 것이 그만큼 많아질 테니까 말이다. ‘별일없다’는 건 작가에겐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흔들림 없다는 게 작가에게 결코 좋은 품성일 수 없는 것처럼. 조선희/ 소설가

<선생 김봉두>를 보고,코미디영화의 진화를 고민하다

며칠 전 지면을 통해 접한 한 영화사 대표의 다음과 같은 자조 섞인 발언은 나에게 새삼스러운 충격이었다. “영화를 하겠다고 돌아다니는 시나리오의 90%가 코미디다. 이놈의 영화판이 코미디 왕국이 될지 코미디 망국이 될지 두고볼 일이다.” 우선 그 90%라는 수치는 막연한 나의 평소 예상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어서 놀라웠다. 그 수치가 과연 엄밀하고 객관적인 통계수치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수치가 일선에서 영화를 생산하는 현장의 압력 체감 지수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의문(코미디 왕국이 될 것이냐 코미디 망국이 될 것이냐)에 대해 답하는 문제는 그리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또 그러한 현상이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단은 내 개인적 능력이나 이 지면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문제이다. 어쨌든 그 충격의 여파 탓인지 또 한편의 코미디영화인 <선생 김봉두>를 찾는 내 마음속에서는 계속 다음과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그 90% 중에 실제로 영화로 제작될 수 있는 작품은 몇편이나 될까? 그토록 치열한 경쟁을 뚫고 만들어진 한국의 코미디영화는 과연 진화하고 있는가? <선생 김봉두>의 포스터에는 배우 차승원이 홀로 우뚝 서 있다. 그런데 그의 표정과 이미지는 기왕의 그것이 아니다. 말쑥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귀여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울고’ 있는 그의 모습은 퍽 자연스럽고 어울린다는 느낌을 준다. 이 포스터의 이미지는 영화 <선생 김봉두>를 잘 요약하고 있다. 포스터가 약속하는 바에 대한 기대로 이 영화를 찾은 관객이라면 배신감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배우 차승원의 변신, 웃음과 감동의 휴먼드라마. 이 영화에는 지난해 한국영화 흥행을 이끌었던 <가문의 영광>의 공격적인 웃음 코드와 <집으로…>의 잔잔한 감동 코드가 한데 잘 어울려 있다. 몇 군데 거친 바느질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는 흠이 있기는 하지만, 웃음과 감동을 한데 어우르는 수사법에는 탄탄한 기본이 갖추어져 있다. 이 영화의 진짜 미덕은 차승원을 원톱으로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결코 그의 개인기에 안이하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데 있고, 웃음과 감동을 적당히 결합하려 하기보다는 진심으로 감동쪽에 무게중심을 두고자 하는 진정성에 있다. 차승원은 원톱답게 종횡무진 그라운드를 누빈다. 몇몇 장면에서 그의 개인기는 빛을 발한다. 그러나 진짜 웃음과 감동을 자아내는 것은 그의 튀는 개인기를 자연스럽게 뒷받침해주는 감독의 전략(수사법)과 동료 선수들의 팀워크(자연스러운 연기)다. 공격적 웃음과 잔잔한 감동을 동시에 이 영화의 가장 눈에 띄는 수사법 중 하나는 적절하게 배치된 반복이다.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명장면 가운데 하나는, 두번에 걸쳐 반복되는 소석과 봉두의 물수제비 장면이다. 소석의 첫 번째 물수제비 뜨기는 아직은 낯선 선생님에 대한 조심스럽고 수줍은 마음의 표시이다. 시간이 지난 뒤, 소석의 그 몸짓에서 투수의 자질을 발견해내는 봉두의 기발함에는 누구나 웃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기발한 반복이 단지 웃음만을 위한 장치는 아니다. 봉두는, 어떻게든 소석을 전학시킬 빌미를 찾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그 행위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소석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훌륭한 교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말하자면 소석의 수줍은 연서에 뒤늦게나마 답장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단, 아직은 자신도 잘 모르는 채, 진실에 눈먼 채 그렇게 하고 있다. 그 순간 소석과 어울려 함께 물수제비를 뜨는 봉두의 몸짓에는 천진한 즐거움의 기운이 넘쳐흐르지만, 정작 봉두 자신은 아직 그 진짜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그 이중의 천진함(소석과 봉두의 눈멀어 있음)은 웃음과 함께 잔잔한 감동의 여운을 남긴다. 마치 물수제비 뜨기로 인해 일어나는 그 잔잔한 파문들처럼 말이다. 이러한 아이러니한 상황 설정은, 도시(어른)와 시골(아이)의 충돌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가 기초하고 있는 기본 수사법이고, 자연스럽게 감동어린 웃음을 자아내는 비결이기도 하다. 봉두가 약삭빠른 자신의 이해를 위해 행동하면 행동할 수록 그것은 아이들을 위하는 행동이 되며, 아이들이 봉두의 속셈에 눈멀어 있을수록 그것이 봉두의 발목을 잡는 힘이 된다는 아이러니. 봉두는 자신의 점심 해결을 위해 급식을 추진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점심을 걸러야 하는 소석에게 은혜를 베푼다. 그리고 그에 대한 소석의 애틋한 보은 행위는 결정적으로 봉두의 발목을 잡는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언제나 늦게 도착하는(읽게 되는) 편지(또는 응답)들이다. 봉두가 짭짤한 부수입으로 시작한 최 노인 과외. 문맹이었던 최 노인은 그로 인해 한글을 깨치고 3년 지난 손자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첫 번째 늦게 도착한 편지. 그런데 봉두는 나중에 뒤늦게 아이들의 편지를 읽게 됨으로써 최 노인의 그 행위를 자기 스스로 반복한다. 이 반복된 지연의 행위는 그 뒤늦음으로 인해 눈먼 자가 눈을 뜨는 개안의 과정을 벅찬 감동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또 뒤늦게 도착한 두개의 편지(응답). 봉두는 자신 속의 ‘악마’를 죽이고 아이들과 함께하기로 결심한 뒤에, 역설적이게도 그제야 비로소, 그토록 바라던 ‘폐교 통보서’를 받아든다. 봉두의 아버지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의 제자들과의 만남은 그가 죽고 나서야 이루어진다. 이 두개의 편지(응답)는 그 뒤늦음 때문에 뒤늦은 깨달음의 가슴 아픔을 증폭시킨다. 도시와 시골의 이분법은 현실의 도피 우리가 이 영화에서 처음 만나게 되는 이미지는 학부모가 봉두에게 건네는 흰 봉투의 클로즈업이다. 영화에서 이 흰 봉투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제작진이 밝혔다시피 주인공 김봉두의 이름은 금봉투(金封套)의 코믹한 변용이다. 말하자면 선생 김봉두는 돈 봉투의 의인화인 셈이다. 그런데 영화 속의 봉투는 도시와 시골에서 다른 방식으로 순환한다. 서울에서의 그것은 끊임없이 도시 공간을 순환하는 일종의 화폐로서 기능한다. 학부모의 작은 성의가 담긴 그 봉투는, 봉두에 의해 아버지의 간병인에게 수고비로, 상급자들에게 성의 표시로 전달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종의 필요악이다. 봉두의 잘못은 오로지 정도를 넘어선 지나친 과욕에 있다. 그런데 시골에서 그 돈 봉투가 하는 역할은 서울에서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들은 언제나 너무 늦게 도착함으로써 그를 분노케 하고(서울에서 전학 온 학부모가 내미는 흰 봉투), 끝내는 그를 감동시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한다(소석의 손때 묻은 봉투와 최 노인이 건네는 서울의 ‘그것과는 다른’ 봉투). 봉투를 매개로 한 이 도시와 시골의 이분법은, 거부하기 힘든 수사적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진짜 현실로부터 우리의 눈을 가리는 장치일 수도 있다. 돌이켜보면 이 영화의 초반에는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통렬한 풍자코미디(블랙코미디)의 뇌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불량 티처’ 김봉두의 행위와 태도는 다소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선생님의 차별 대우의 이면을 보여준다. 촌지를 찔러주는 학부모 앞에서 한없이 비굴해지는 선생 김봉두가, 일단 교단에 서면 같은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평소 부모의 성의가 어느 정도였느냐에 따라 다른 처벌을 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해진다. 그러나 그런 그도 진짜 힘있는 학부모를 잘못 건드린 탓에 무참하게 무너진다. 이런 비상사태를 대비해서 틈틈이 눈치껏 상납을 해왔지만 함께 죽을지도 모른다는 은근한 교장의 협박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 논리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뇌관을 깔아놓기만 한 채 조심스럽게 우회하여 아직 오염되지 않은 산골 오지로 향한다. 그 방향 전환은 무리없이 한편의 가슴 찡한 휴먼드라마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분명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불량 티처 김봉두의, 산골 아이들의 천진한 동심 속에서의 자기정화. 이것이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스틸 사진 속에 담긴 폐교가 된 산내분교의 색바랜 이미지들이 보여주듯이, 그 시골의 정화능력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에 불과하다. 오염된 도시인들의 추억 속에 남아 있는 마음속의 고향. 과연 그곳에 도시의 타락을 정화시킬 힘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영화는 이러한 의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한 장면(개인적으로 그 장면의 상황 설정은 최악의 것이었다)은 영화의 안이한 현실 인식을 징후적으로 보여준다. 밭에 물을 대기 위해 깔아놓은 호스와 그것을 밟고 지나가야 하는 경운기 탓에 시작된 마을 사람들의 분쟁. 봉두는 그 분쟁을 슬기롭게 해결함으로써 찬사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설정은 지나치게 시대착오적이고(웬 새마을운동 홍보영화!) 위험하기도 하다. 그런 문제의 해결에는 도시의 지식보다 농촌의 지혜가 더 필요한 법이다. 과연 시골은 여전히 그렇게 어리석을 정도로 순박하기만 한가? 또는 그래야만 하는가? 물론 이것은 작은 징후에 불과하며 사소한 트집일 수 있다. 또 하나의 커다란 징후. 학생들의 전학을 위해 학부모들을 설득하는 봉구의 논리는 희극적으로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땅의 모든 학부모들의 약한 고리를 제대로 공략하고 있다. 시골의 학부모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학부모들의 흔들리는 눈빛, 그리고 “거리마다 푸른 꿈이 넘쳐흐르는” 서울 찬가를 부르는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데 봉두를 좌절하게 하는, 아이들의 그 유혹에 대한 저항 논리는, 너무나 순박한 것이어서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 순박성은 결국 도시가 시골에, 어른이 아이에게 투사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그 오염되지 않은 마음의 고향에 대한 판타지는 애잔한 감동과 함께 잠시 우리의 오염된 현실을 잊게 해주고 위안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감동이 크면 클수록 한국의 코미디영화가 아직도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그 한계에 대한 아쉬움도 커진다.

장국영(張國榮) 세대에게 바친다 (1969.9.12∼2003.4.1) [2]

장국영은 열두살 때 이미 한번 홍콩을 떠난 적이 있었다. 열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윌리엄 홀든과 앨프리드 히치콕을 위해 옷을 만들었던 재단사 아버지 덕분에 부족함 없는 중산층 아이로 자라났다. 다복한 가정의 귀염둥이였을 것 같지만, 장국영은 부모 형제와 떨어져 외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다. 가장 나이 어린 형제와도 여덟살이나 차이가 났던 그는 일찍 죽은, 그와 생일이 같았던 아홉 번째 형의 분신처럼 여겨졌고, 그런 죽음의 그림자가 없었더라도 충분히 외로웠다. 그의 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을 향한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장국영이 어렸을 때 이혼한 뒤에도 끝장난 결혼에 연연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던 연약한 여자였지만, 학교에 적응 못하는 막내아들을 유학보내자고 주장할 정도의 목소리는 가지고 있었다. “형들이 여자애들과 데이트를 하는 동안 난 구석에 처박혀 군인인형과 바비인형을 갖고 놀았다. 집엔 말다툼과 싸움뿐이었다. 그게 그들이 말하는 결혼이란 것이었다.” <종횡사해> <아비정전> “행복한 기억이라곤 하나없이” 상처만 안고 떠난 장국영은 동양인이 드물었던 1960년대 영국 노포크에서 인종차별에 시달렸고 따돌림을 받았다. 그래도 유모가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여자인 줄 알았던 홍콩보단 나았다. 영국엔 삶이 있었다. 십대 초반 어린 장국영은 주말마다 바닷가에서 식당을 하는 친척집에 놀러가 바텐더를 하면서 가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리고 스스로 이름을 만들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했는데, 그중에서도 레슬리 하워드(애슐리를 연기한 배우)를 제일 좋아했다. 레슬리는 남자 이름이기도 하고 여자 이름이기도 하다. 유니섹스한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아직 공식적으로 확인되진 않았지만, 장국영은 주머니에 넣은 유서 마지막에 ‘Leslie’라는 사인을 남겼다고 한다. 외로움을 머금은 레슬리 재단사 아버지의 강요로 섬유관리를 전공한 장국영은 중간에 대학을 그만두고 홍콩으로 돌아왔다. 반신불수가 된 아버지가 불러들였다고, 혹은 전공과 맞지 않아 스스로 포기했다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가 아주가창대회에 참가해 2등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다. 그저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대회에 나갔던 그는 느닷없이 가수가 돼버렸다. 매니저 진숙분은 그 무렵 발견한 장국영을 “빨간 양복을 입고 노래하던 아주 잘생긴 청년”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지는 음반 발매와 영화 출연, 하지만 성공은 멀기만 해 몇년 동안 장국영은 “딱 1천홍콩달러만 있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매일매일을 보냈다. 너무 젊고 너무 잘생기고 강한 데라고는 없어 보였던 그는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 무렵 출연한 영화들은 그의 예쁜 엉덩이를 보여주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서극과 오우삼이 주도한 홍콩영화의 부흥기가 찾아왔다. <해피투게더> <해피투게더> 그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피흘리며 공중전화 부스에 매달린 장국영, 아내가 딸을 낳았다고 웃으면서, 얼굴 한번 보지 못할 딸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죽은 젊은 경찰. 40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진 <영웅본색>의 주윤발보다 복수를 마치고선 피투성이가 된 채 의자에 앉아 웃는 <영웅본색2>의 주윤발이 희미한 건, 장국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형을 향해 팔짝거리면서 뛰어오던 1편의 장국영은 어느새 훌쩍 자라 자기 그림자를 가진 배우가 됐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달랐다. 주윤발과 유덕화가 남루한 뒷골목의 영웅으로 스스로를 못박았을 때, 장국영은 멜로와 액션, 사극과 현대극, 무대와 스크린을 자유롭게 부유했다. 그는 자신의 노래 같았다. “나는 카메라 앞에 서서 노래를 생각한다. 첫 소절을 부르기 시작하면 이 영화가, 이 인물이 어떠해야 하는지 형상으로 잡히기 시작한다.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당년정>(<영웅본색> 주제가)을 들으면 누구라도 좋았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피곤하면 세겹으로 주름이 잡히는 쌍꺼풀, 가끔은 토라진 것처럼 보이는 볼록한 입술, 태어나기 전 특별한 선물을 받은 듯 곧게 중심이 잡힌 콧날, 무엇보다도 군살도 없지만 근육도 없어 물결처럼 흔들리는 엷은 육체. 장국영은 “그가 나타나기만 해도 카메라는 그에게 집중한다”고 평가받은 완벽한 외모를 가졌지만, 밀랍처럼 매끈한 피부 밑에서 말을 거는 무언가를 눈치챈 사람이 있다면, 오직 장국영만이 소유한 리듬을 느꼈을 것이다. 혼자 외롭게 자라 지나치게 민감해진 소년이,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반응해온 리듬을, 마음으로 들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진정 장국영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야반가성> <동사서독> 강인한 척하면서도 여린, 아비 <영웅본색> <천녀유혼> 등으로 스타덤에 오른 장국영은 그 주제가들과 함께 가수로서도 전성기를 누렸다. 절박하게 바라던 대로 통장엔 1천홍콩달러도 훨씬 넘는 돈이 들어왔다. 그러나 언론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추모 기사에 “그는 판에 박은 대답만 하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덕분에 자주 건방지고 무례하다고 신문 헤드라인에 오르내렸다. 단정했던 라이벌 알란 탐과 비교당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장국영은 그런 비교를 매우 싫어했다”고 썼다. 장국영은 절정에서 물러나고 싶다며 89년 은퇴를 선언했지만, 뒷날 “(알란 탐의 팬이 보낸) 제사용 향과 종이돈을 받았다. 그 무렵 어느 테니스 선수가 라이벌의 팬이 휘두른 칼에 찔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에게 중요한 건 끝없이 넓은 도량이어서, 나는 생존을 위해 한 발자국 물러섰다”고 밝혔다. <아비정전>은 그가 잠시 물러선 절정, 그보다도 한 고개 위에 선 영화였다. 장국영은 “<아비정전>의 아비는 나와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다. 강인한 척하면서도 여리고, 마음 가득 차오른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아비정전>은 그를 진짜 배우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건 연기의 힘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천진하고, 다소는 수다스러운 장국영은 “사실 나는 즐거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노출하게 될 거다. 난 정말 못됐을 수도 있는데….” 그는 이미 어찌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들뜬 연인을 향해 “바닥은 닦은 거야?”라고 매몰차게 굴지는 않을 테지만, 지친 몸을 바람에 실어 달래는 발없는 새와는 비슷했을 것이다. 마음을 붙이려 하면 몰아내고, 혹은 스스로 떠나버리는 아비는, 자주 흰옷을 입고 있었다. “언젠간 날 수 있을 거야”라는 말처럼 하늘로 떠올라버리면 영영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랑한 여자들 모두에게 버림받았고, 많은 친구들 중에서 진실하게 마음 나눌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던 장국영도 언젠가는 바람 속에서 쉬고 싶지 않았을까. 4월1일 홍콩엔 바람이 불지 않았다 해도. 난 영원히 이런 나를 사랑할 거야 즐거움은, 즐거움의 방식은 하나가 아닌걸 숨을 필요는 없어. 내가 좋아하는 삶을 위해 살아가면 돼. 나는 나야. 다른 색깔을 가진 불꽃. 하늘은 저렇게 넓은데, 나는 가장 강한 물거품이 될거야. 이세상을 향해 말할 거야.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 <나 我>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아서” 홍콩으로 돌아온 장국영은 90년대를 보내면서 짐작 못한 방향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한때 그는 동생 같았다. <천녀유혼>을 찍던 왕조현이 장국영을 ‘거거’(哥哥, 오빠, 형)라고 부르면서 그 단어가 애칭으로 굳어졌지만, 물리적인 나이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여인의 치맛자락을 찢고선 갑작스러운 사랑에 활짝 웃는 <우연>이나 함께 죽어 저승에서 연을 맺기로 한 연인을, 겁이 나 혼자 보낸 <인지구>에서, 항상 믿어주기로 했던 연인과의 약속을 깨뜨리고 눈발을 맞으며 세월을 견디던 <백발마녀전>에서, 장국영은 다독여줘야 할 마음 약한 남자였다. 단순히 여성성이라고 부를 수만은 없는 위태로운 기운이 그에겐 있었다. 소녀들 마음속의 장국영은 스무살 많은 어른이나 중성적인 미소년이 아니라 처음으로 안아주고 싶은 남자였다. 그러나 여전히 붓털처럼 휘청이면서도, 그 많은 나이에도, 장국영은 또 한번 껍질을 벗었다. <<<

장국영(張國榮) 세대에게 바친다 (1956.9.12∼2003.4.1) [1]

희로애락을 품었던 아름다운 사람 장국영을 묻다, 우리의 청춘과 함께 2003년 4월1일, 기자가 다른 일로 머물렀던 홍콩은 미래도시같았다. 사람들은 금속으로 테를 덴 둥근 마스크를 쓰고 다녔고, 괴질의 주요 진원지로 지목된 아파트 아모이 가든은 통째로 격리돼 식량을 배급받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먼 미래에나 일어날 줄 알았던 사건이, 장국영의 죽음이 있었다. 80년대 후반 거짓말처럼 맑고 어린 유생으로, 곧은 마음을 혈육의 정 앞에서 꺾은 경찰로, 우리 마음을 울렸던 그는 이제 세상에 없다. 무척 질나쁜 농담. 만우절을 다시 웃을 수 없는 날로 만들어버린 장국영은 그 자신의 목숨과 함께 우리 젊은 날도 거두어갔다. - 편집자 “죽을 때는 뭐가 보이는지 항상 궁금했어. 나는 눈을 뜨고 죽을 거야” - <아비정전> 오래간만에 <아비정전> 비디오테이프를 꺼내 먼지를 털어냈다. 잊고 있던 동안 턱없이 낡아버려 비닐이 너덜거리는 케이스에는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우리의 청춘은 끝났다”고 적혀 있었다. 영화와는 영 상관없는 것 같았던 그 카피가, 뒤늦게 가슴을 쳤다.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청춘의 시작이 뭔지도 알지 못했던 어린아이들, 끈적한 홍콩의 공기에 취해 바다 건너 작은 섬을 꿈꿨던 아이들은 언젠가 짧고 빛나는 시간에 한기가 스미리라는 사실을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언젠가 장국영이 정말 죽어 너희들의 청춘은 끝났다고 바람처럼 속삭여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2003년 4월1일 오후 7시6분,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오염된 홍콩에서, 장국영이 죽었다.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던 아름다운 남자가 바람도 없이 축축한 공기만 늘어진 흐린 날 만다린 오리엔탈호텔 24층에서 몸을 던졌다. 다음날 아침 홍콩 시내에 깔린 신문 1면 사진엔 장국영이 그가 무대에서 즐겨 사용했던 붉은색 한 덩어리가 번진 흰 시트를 덮고 누워 있었다. 다행이구나, 피를 많이 흘리진 않았구나 생각한, 비오던 아침, 많은 소녀들에게 이젠 진짜 삶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고 조용히 일깨우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많은 걸 원하진 않아. 그저 너의 따뜻한 얼굴이 보고싶을 뿐이야. 네 모습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간다 해도 그 여운이나마 살며시 어루만질래.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려 할 뿐 삐그덕대는 삶을 살려하진 않지. 어느 누가 그런 벌을 받으면서까지 내곁에 있으려 하겠어. 그래도 가끔은, 즐거운 노래를 떠올리듯 날 말할 수 있을까. - <많은 걸 원하진 않아 無需要太多> 거짓말 같았던 4월1일의 밤, 죽은 장국영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가 믿고 의지했던 매니저 진숙분과 18년 동안 우정 혹은 연정을 키워왔던 ‘좋은 친구’(好友) 당학덕이 아니었다. 괴질을 막겠다고 마스크를 쓴 기자들이 공사장 주변 황량한 아스팔트에 흩어진 핏자국을 담았고, 겹겹이 터뜨리는 플래시로 빛의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텅 빈 채 병원 응급실 문을 빠져나오는 들것까지 포획했다. 꽃다발 몇개, 앨범 <총애장국영> 뒷면에 쓰인 사진 한장, 범죄라도 저지른 듯 황급히 카메라를 통과해 달아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휴대폰을 받는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 TV는 ‘歌星張國榮墜樓死亡 終年46歲’라는 자막을 연이어 내보내며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듯했지만, 정작 카메라가 보여준 건 상해가는 피에서 영양분을 빨아먹고자 꼬여든 파파라치들뿐이었다. 장국영이 그런 홍콩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었을까. “홍콩은 너무 넘치고 화려하고 통속적인 도시다. 이곳에서 살기에 나는 너무 무르다”고 고백했던 장국영은 자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했다. 장국영 필모그래피 홍루춘상춘 紅樓春上春 1978 구교구골 狗咬狗骨 1978 *갈채 喝采 1980 *실업생 失業生 1981 영몽가락 [木+寧][木+蒙]可樂 1982 충격21 衝激十十一 1982 열화청춘 烈火靑春 1982 영웅문 楊過與小龍女 1982 드러머 鼓手 1983 첫사랑 第一次 1983 *연분 緣扮 1984 삼문치 三文治 1984 성탄쾌락 聖誕快樂1984 *H2O 龍鳳智多星 1985 구애반두성 求愛反斗星 1985 *위니종정 爲尼鐘情 1985 *우연 偶然 1986 *영웅본색 英雄本色 1986 *천녀유혼 天女幽魂 1987 *영웅본색2 英雄本色2 1987 *인지구 咽智口 1988 *살지연 殺之戀 1988 *신최가박당 新最佳拍當 1989 *인간도-천녀유혼2 人間道 1989 *종횡사해 縱橫四海 1990 *아비정전 阿飛正傳 1990 *호문야연 豪門夜宴 1990 *가유희사 家有囍事 1991 *시티보이즈 藍江傳之反飛組風雲 1992 *패왕별희 覇王別姬 1993 *화전희사 花田囍事 1993 | *동성서취 東成西就 1993 *백발마녀전 白髮魔女傳 1993 *천하무적-백발마녀전2 天下無敵 1993 *금수전정 錦繡前程 1994 *금지옥엽 金枝玉葉 1994 *동사서독 東邪西毒 1994 *금옥만당 金玉滿堂 1995 *야반가성 夜半歌聲 1995 *대부지가 大富之家 1995 *풍월 風月 1996 *대삼원 大三元 1996 *상해탄 新上海灘 1996 *금지옥엽2 金枝玉葉2 1996 *색정남녀 色情男女 1996 *가유희사 97 家有囍事’97 1997 *해피 투게더 春光乍洩 1997 *친니친니 Anna Magdalena 1997 *타임 투 리멤버 紅色戀人 1998 구성보희 九星報喜 1998 *성월동화 星月童話 1998 *유성어 流星語 1998 장국영의 스피드4초 倉王 2000 | 연전충승 戀戰沖繩 2000 이도공간 異度空間 2002 *는 비디오 출시작

[새 책] 마릴린 먼로의 미완의 자서전

서른여섯 해의 삶을 불꽃처럼 살다간 배우 마릴린 먼로의 미완의 자서전 「마릴린 먼로, 마이 스토리」(원제 'My Story')가 도서출판 해냄에서 나왔다. 세상을 떠난지 40년이 지났지만 뉴욕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바람에 휘말려 올라오는 드레스를 부끄러운 듯 두 손 모아 아래로 쓸어내리는 모습의 그녀는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속에 살아있다. 편모 슬하에서 자란 마릴린은 어린시절 남의 집에 맡겨져 식모처럼 일했다. 아버지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교육도 많이 받지 못했다. 아홉 살 때에는 맡겨진 집에 세들어 살던 남성에게 성폭력까지 당했다. 남들보다 일찍 맞은 사춘기, 마릴린의 성적 매력이 남성들의 눈에 띄었을 때부터 그녀는 그들의 시선과 싸워야 했다. 그래서 해결책이라 생각하고 열다섯 나이에 결혼을 선택했지만 결혼은 '도피처'에 불과했다. 불행한 4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그녀가 선택한 것이 할리우드 행이었다. 성적 매력이 그녀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것은 아니었다. 무명시절 '카메라가 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화사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던 마릴린이 영화배우로서 명성을 얻은 것은 영화제작자들이 그녀를 '섹스 심벌'로서 마음껏 '이용한' 덕분이기도 했다. 그녀는 당시 카메라 앞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에로배우'가 아니라 '예술가'가 되고 싶어했다. "최음제 같은 영화로 제가 대중에게 팔리는 건 싫어요. 나를 보면서 잡아 흔들기 시작하는 건 싫다구요. 처음 몇 년 동안은 괜찮았어요. 그러나 이제는 달라요" 하지만 요염하고 매력적인 여자를 '사내아이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마릴린은 프랭크 시내트라, 이브 몽탕, 케네디 형제 등과 염문을 뿌렸고,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와 결혼했지만 9개월만에 이혼했다. 아서 밀러와의 또한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처 디마지오와의 두번째 결혼식을 사흘 앞둔 1962년 8월 5일 그녀는 느닷없는 죽음을 맞았다. 페미니스트 운동가이자 작가인 안드레아 드워킨은 그녀를 두고 "다른 모든 여자와 다르지 않았던, 단지 더 가난하고 더 강하고 더 외로웠던 여자"라고 말한다. 영화배우로서 끊임없는 사랑을 받은 마릴린. 하지만 그녀는 진정으로 원했던 '나 자신이 되는 일'을 끝맺지 못하고 쓸쓸한 삶을 살다간 한 여인일 따름이다. 1974년 첫 출간된 이 책은 사진작가이자 마릴린의 사업 파트너였던 밀턴 그린이 가지고 있던 원고를 엮어낸 것이다. 마릴린은 1954년께 원고를 쓴 것으로 추정된다. 디마지오와의 첫 결혼이 책의 마지막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현정 옮김. 240쪽. 1만원. (서울=연합뉴스)

국가대표 편집기사 김현의 영화인생 7막8장 [3]

#5. 서울 시내 호텔의 커피숍. 신상옥과 김현이 마주보고 앉아 있다. 김현은 싫다고 했다. 78년, 신필림이 허가취소된 지 1년 남짓하던 때였다. 영화사 허가를 다시 내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신 감독의 시도가 다 좌절되자, 신 감독은 자신이 아끼던 편집의 김현을 포함해 촬영, 조명기사를 데리고 홍콩에 가서 영화를 찍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단체로 여권을 준비하던 와중에, 신 감독이 김현과 둘이 먼저 홍콩에 가자고 제안한 것이다. 김현은 영어도, 중국말도 못 하는데 홍콩에 먼저 가서 뭘 할 수 있겠냐며 거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 신 감독이 납북됐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이전에도 신필림은 부도가 나서 1년가량 쉰 적이 있지만 신 감독의 수완으로 극복해왔다. 이제 신필림이 재기할 길은 완전히 사라졌다. 김현은 실업자가 됐다. 한편으로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 해방됐다 싶기도 했다. 그는 “내 꿈은 연출”이라고 줄곧 말해왔지만, 신 감독이 “편집을 알면 연출도 잘된다, 좀더 해라”고 해서 여기까기 왔다. 실업자가 된 게 역으로 감독으로 나설 기회가 될 수도 있었지만, 김현은 돈도 없었고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에게 남아 있던 가난의 그림자가 무서웠다. 이장호 감독이 데뷔해 영화를 찍고 있었지만, 김현은 그걸 편집할 아무런 여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장호의 조감독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배창호 감독이 82년 <고래사냥>을 들고 왔다. “맥주 한잔 더 할까요?” 평소와 똑같은 억양으로 묻는 그는 하나도 취한 것 같지가 않았다. 가까운 맥주집으로 2차를 왔지만, 80년대 이후, 그러니까 편집인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뒤부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90년대 중반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한국의 감독들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써달라고 부탁해왔지만 거절했다고 했다. 지금도 편집을 하고 있고, 몇년은 더해야 하는 처지에서 감독들 품평하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중견감독들이 시들한 게 큰 문제”라면서도 “감독들한테 할말이 정말 많지만, 편집에서 은퇴할 때 할게요”라고 덧붙였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못다 이룬 연출의 꿈을 되새기며 자리를 파했다. #6. 돈암동 삼영필름 사무실. 한쪽 방에 필름 더미가 쌓여 있다. 김현은 혼자서 열심히 자르고 붙였다. <고래사냥>은 명실상부하게 자신이 책임지고 편집한 첫 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편집도 자기가 다 알아서 하는 스타일이었다. 영화는 성공했고, 이후부터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다 맡았다. 84년 충무로에 김현 편집실을 내고, 신필림 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던 박철수 감독의 <어미>를 필두로 신명나게 일하기 시작했다. 유명감독들의 작품이 몰려들었다. 86년 후반부터 동시녹음이 본격화되면서 김현의 주가는 더 뛰었다. 신필림 시절 신상옥 감독이 <대원군> 세트 촬영에서 동시녹음을 했고, 김현은 이미 그때 동시녹음 편집을 해본 상태였다. 87년 전두환 정권에 반대하는 호헌철폐운동이 벌어질 때, 정지영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등과 함께 편집기사로 유일하게 반대서명을 한 탓에 영화사에서 편집 중이던 필름을 회수해가는 일이 벌어졌다. 반년가량 놀아야 했지만, 곧 다시 일감이 밀려들었다. 장선우, 박광수, 강우석 등 데뷔감독들도 줄지어 찾아왔고, 그는 동시녹음 기자재 스탠백이 있는 영화진흥공사로, 필름 싸들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90년에는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이 5천만원가량 하는 스탠백 편집기를 그에게 사줬다. 1년에 10편 넘게 열심히 자르고 붙이고, 마시면서 과로로 쓰러져 한달 동안 병원신세를 지기도 했다. #7. 답십리 김훈의 집. 밤늦게 잠 못 이루고 창 밖을 내다본다. 멀리 동해바다에선 다시 고래가 자맥질을 한다. 48년생. 50대 중반을 넘긴 김현은 영화와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연출을 못해본 것이다. 직접 쓴 시나리오가 4편 있지만, 지금도 엄두를 잘 못 낸다. 실패해서 다시 가난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꾸 따라붙는다. 30대 감독들이, 김현을 어려워해 다른 젊은 편집기사들을 찾아가면서 최근엔 일감이 1년에 4∼5편으로 줄었다.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귀여워>의 김수현 등 그를 찾아오는 30대 감독은 조감독 시절부터 알던 이들이다. 요즘은 40대 후반에 결혼해 낳은, 초등학생 아들과 주말에 북한산 가는 게 갈수록 즐겁다. 주말이 다가오면 설레기까지 한다. 그 즐거움이 영화에 대한 사랑을 대체하기 시작하는 걸까. 이렇게 늙어갈지 모른다는 우려를 애써 떨치며 다시 다짐한다. “난 영화감독이 될 거다.” 김현 필모그래피 1972년 <삼일천하> 1974년 <욕망> 1975년 <아이러브 마마> 1976년 <여수 407호> 1977년 <사나이들> 1980년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4년 <고래사냥> 1985년 <어미> <고래사냥2> 1986년 <황진이> <안개기둥> 1987년 <거리의 악사> <기쁜 우리 젊은날> <안녕하세요 하나님> 1988년 <성공시대> <사방지> <칠수와 만수> <달콤한 신부들> <개그맨> 1989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비오는 날 수채화> 1990년 <우묵배미의 사랑> <남부군> <마유미> <그들도 우리처럼> <꿈>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젊은 날의 초상> <나의 사랑 나의 신부> 1991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서울에비타> <베를린 리포트> <천국의 계단> <경마장 가는 길> 1992년 <걸어서 하늘까지> <하얀 전쟁> <미스터 맘마> <그대안의 블루> <첫사랑> 1993년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웨스턴 애비뉴> <화엄경> <그 섬에 가고 싶다> <투캅스> 1994년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두여자 이야기> <세상밖으로> <게임의 법칙> <너에게 나를 보낸다> <마누라 죽이기> <젊은 남자> 1995년 <남자는 괴로워> <금홍아 금홍아>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맨?> <런 어웨이> 1996년 <러브스토리> <투캅스2> <지독한 사랑> <고스트 맘마> 1997년 <초록물고기> <비트> <산부인과>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 1998년 <태양은 없다> 1999년 <이재수의 난> <정> <구멍> <해피엔드> <박하사탕> 2000년 <킬리만자로> <청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무사> 2001년 <봄날은 간다> <흑수선> <오아시스> 2002년 <연애소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피아노 치는 대통령> 2003년 <와일드 카드> <귀여워> <영어완전정복>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국가대표 편집기사 김현의 영화인생 7막8장 [2]

#2. 새벽의 남산야외음악당. 통금해제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기상나팔처럼 들려온다. 음악당 무대 한구석에서 신문지 덮고 자던 김현은 부스스 몸을 떨며 일어났다. 자기 어깨와 팔을 쓰다듬으며 남산에서 내려와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시장골목에서 상인들이 나무를 때다가 불씨가 남은 드럼통을 찾았다. 그 옆에 누워 못다 한 잠을 청한다. 60년대 후반, 그때만 해도 시장이 많았다. 닥치는 대로 시장 바닥에서 리어카 끌고, 아무 데서나 자고, 하루에 한끼 먹으면 다행이었다. 끼니 해결이 안 돼 며칠씩 굶게 될 때면, 저녁 무렵에 무교동에 나갔다. 식당 손님들의 구두를 닦아주면, 식당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은 밥을 준다. 식당엔 들어가지 못하고, 식당 밖에서 비오는 날이면 빗물에 밥말았다손 치고 먹던 그 밥이 이후에도 김현의 기억 속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으로 남았다. 그 무렵, 첫 주간지인 <주간한국>이 나왔다. 그걸 팔러 명동으로, 시청 앞으로 나다녔다. 서울 온 뒤 맞은 첫 추석 때 집에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화신백화점에서 옷을 한벌 샀다. 그걸 보물단지처럼 의자 뒤에 걸어놓고 무교동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고 와보니 옆에서 구두 닦던, 서울에서 유일하다시피한 친구가 그 옷을 들고 사라졌다. 집에 못 간 채, 시장도 무교동 식당도 다 문을 닫고 혼자 남아 버텼던 그해 추석은 죽도록 서러웠다. 시청 앞에서 <주간한국>을, 지나가던 검은색 큰 승용차 안의 손님에게 팔았다. 잡지를 건네줬더니 돈을 안 주고 냅다 중앙청쪽으로 달려 가버렸다.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모두 그를 속이고 달아났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영화는 완벽하게 아름다웠다. 김현은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수시로 피를 팔았다. 그 돈으로 극장에 갔다. 명절 무렵이면 암표상들로부터 표 사달라는 부탁과 함께 돈을 받고는, 표를 사서 그냥 극장에 들어갔다. 마침 아메리칸 뉴 시네마 바람이 불던 그때, 주옥같은 영화들이 쏟아졌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워터프론트> <젊은이의 양지>…. 아침에 극장에 들어가 밤늦게 나왔다. 배가 고파 몽롱해진 상태에서도 보고, 보고, 또 봤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에게 영화는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부터 세상 살아가는 실무까지 모든 걸 가르쳐줬다. 그에게 “내 인생의 스승은 좋은 영화”였다. #3. 최인현 감독, 김지미 주연의 <오복문> 촬영현장. 당시엔 허허벌판이던 지금 강남 봉원사 부근 김현은 얼굴에 니스칠을 한 뒤 수염을 붙이고 포졸 옷을 입었다. 옆에서 엑스트라를 지휘하는 스탭이 앙상하게 마른 그를 보고 말했다. “너 고함 제대로 지르겠냐?” 다른 엑스트라들과 함께, 김현은 보란 듯이 “와!” 외치며 달려갔다. 고함은 질렀지만, 배가 너무 고팠다. 쉬는 시간에, 감히 엑스트라 주제에 최인현 감독에게 말했다. “빨리 찍죠. 배가 너무 고파서.” 김현은 그때 여섯편가량의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옷이 시원치 않아서 만날 사극, 포졸 역할만 했다. 거기서 영화를 어떻게 찍는지 곁눈질 할 수는 있었지만, 영화에 다가설 연줄은 이어지지 않았다. 서울 와서 거지처럼 살던 2년 동안, 그에겐 유혹도 있었다. 시장에서 마약이 돌아다녔고, 남대문에 유곽도 있었다. 그가 돈 한푼 없는 줄 알면서도, 그를 유혹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거절했다. 여자뿐이 아니었다. 술, 담배 모두 20대 중반까지 모르고 살았다. 오로지 영화, 스크린에 투사된 빛과 그림자와 조합에 불과한 그 허구가 김현을 지켜주고 있었다. 그에게 영화는 꿈이자, 스승이자, 유혹에서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 자신은 하루하루의 노역 속에 몸과 마음이 시들고 있었다. 서울역 주변에 상인들을 노리는 소매치기가 많았다. 김현은 막 지갑을 가로채려는 소매치기를 보고 말렸다. 곧이어 패거리들에게 서부역 뒤 화물차 주차장으로 끌려갔다. 실컷 두들겨맞고 트럭 화물칸에 쓰러져 실신했다. 깨어보니 트럭이 출발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몸은 피투성이이고, 장마철에 장화 신고 계속 짐을 부린 탓에 발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뛰어내렸다. 한강에 떨어졌지만 한강대교 중간 섬 가까이였다. 헤엄쳐서 나온 김현은 젖은 옷 군데군데 핏자국을 남긴 그대로 전철을 타고 남대문으로 돌아왔다. “내가 왜 서울에 왔던가. 영화 하자는 것 아니었나.” “그땐 꼭 죽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냥 싫은 거 있잖아요. 한창 꿈과 이성을 다듬어가야 할 20대 초반에 인성이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거죠.” 고생이 사람을 만든다는 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금언에 불과한 건지도 모른다. 웃으며 말하지만, 김현의 마음이 편치만은 않은 듯했다. “영화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돈을 모을 다른 일을 생각했겠죠. 이런 삶, 무모하지 않아요? 그럴 가치가 있었던 걸까요?” #4. 용산 오리온전자 옆 신필림 사무실 입구. 영화의상을 담당하는 할머니가 밖에 나와 있다. 김현은 무작정 신필림을 찾아갔다. 사무실 입구에 서 있던 할머니가 어디로 가라고 했다. 가봤더니 소도구 만드는 곳이었다. 활이나 창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고는 만들라고 했다. 신상옥 감독의 <대폭군> <다정불심> 같은 사극을 찍을 때였다. 몇달 동안 일했는데, 돈줄 생각도 안 하고 달라는 말도 못하고, 수시로 밥 굶고, 생활은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연출을 꿈꾸었던 김현은 불만이 쌓여갔다. 안양촬영소에서 <내시>를 찍을 때, 조감독이었던 이장호와 크게 싸웠다. “왜 소도구를 준비 안 했냐”는 질책이 기폭제가 돼 김현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말을 거의 안 하고 지내던 그가 “왜 내가 그걸 준비해야 하냐”며 맞받아쳤고, 주변 사람들이 놀라 웅성댔다. “어, 쟤가 말도 하네.” 추석 때 이장호 조감독이 김현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때 김현은 처음으로 남에게 자기의 사연과 연출을 하고 싶은 꿈을 털어놓았다. 69년 1월1일, 김현은 신필림 편집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의 순정에, 영화가 처음 반응을 보인 순간이었다. “이제 진짜 영화를 만드는구나.” 당시 한국영화는 신필림이 반, 나머지 회사들이 반을 만들어 영화판을 신필림과 충무로로 나눠 불렀다. 신필림은 직원이 500∼600명, 1년 제작편수가 30여편에 이르렀다. 편집실엔 오성환 기사와 여자 둘, 할리우드에서 가져온 무비올라 편집기 4대가 있었다. 김현은 러시필름을 붙이고 감는 일부터 시작했다. 편집실이라는 데가 누가 뭘 가르쳐주는 곳이 아니었고, 그는 혼자서 엔지난 필름으로 나름대로 편집해보며 스스로 익혀가야 했다. 신상옥 감독의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몰라서인지, 알고도 그러는 건지, 직원들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이장호 조감독이 신 감독의 입에서 처음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때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다. 통금이 있던 그때, 신 감독은 야간통행 허가증이 부여된 차를 몰고 다녔다. 신필림 편집실을 안양촬영소 안으로 옮긴 뒤, 김현은 그 안에서 살았다. 24시간 대기조였다. 편집실 구석에 웅크려 자고 있던 어느 날 신 감독이 나타났다. “현아, 예고편 만들자.” 마침내 영화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현아.” 신 감독의 72년작 <삼일천하 김옥균> 크레딧에 ‘편집 김현’이라는 네 글자가 박혔다. 감독들이 말하는 김현 배창호 내 영화 16편 가운데 10편을 그와 함께했다. 나는 스타일이 드라마적 편집에 많이 의존하는 편이 아니다. 원래 머릿속에 있는 순서대로 한다. 문제는 디테일한 호흡을 살리는 거다. 내가 한 영화들이 감정이 중요한 게 많아서, 그 길이가 조금만 길거나 짧아도 흐트러진다. 김현은 사람 바라보는 눈에 깊이가 있어서 그걸 잘 잡아준다. 편집의 호흡도 그 사람의 자세와 됨됨이에서 나온다. 나하고 삶에 공감대를 느끼는 부분이 많아서인지 참 좋았다. 원래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작품에 대해서, 감독은 누구든지 자기도취에 빠지는데, 좋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데, 그런 말을 안 한다. 그만큼 신중하다. 그는 편집 끝내고 한잔하러 갈 때 당시 편집실 화장실에 높게 달린 스위치를 발로 차서 끈다. 일 끝내고 술 먹으러 나가는 즐거움이겠지. 그걸 보고 나도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김성수 박광수 감독 연출부로 <그들로 우리처럼> 할 때 그를 처음 봤다. 단편영화할 때도 부탁을 해서 편집을 해주셨다. 데뷔한 이래 4편 모두 그와 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단순히 편집 테크닉보다 영화를 읽는 문학적 해석능력의 뛰어남이다. 큰 흐름으로 맥락을 잡아준다. 그가 어떤 제안을 했을 때, 내가 잘 못 받아들이면 감독 생각을 늘 존중해주시니까, 니가 좋을 대로 해라, 그렇게 갈 수도 있지 한다. 그러면서도 반드시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계속 환기시킨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고집부리느라 안 듣다가도, 설득이 된 적이 많다. 지금은 거의 무조건 따라간다. 감독들 고민 중 하나가 숏을 여러 개 찍었을 때, 오케이 컷을 건져내야 하는데 고려할 게 조명, 인물 움직임 등 여러 개다. 어떤 걸 우선 순위로 놓아야 할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그럴 때 이 숏이 좋다, 이런 이유에서. 그런 말 해주는 편집기사는 그밖에 없다. 롱숏으로 이어주는 박광수, 허진호, 이창동 이런 호흡은 거기에 맞춰주고. 나처럼 숏 잘라붙이는 병에 걸린 사람은 또 거기에 맞춰준다. 운동감, 리듬감도 뛰어나다. 강우석 <공공의 적> 빼고 내 영화 다 그가 편집했다. 지금 젊은 편집기사들은 말을 많이 한다. 실력보다 말이 앞서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노련미, 드라마 전체를 보는 눈이 상당히 노하우도 있고, 관록이 있다. 관객이 뭘 원하는지, 어느 부분이 불필요하고 어느 부분에 힘을 줘야 할지를 잘 안다. 코미디의 경우 찍어놓은 화면을 보고 김현 기사가 웃었다, 그러면 극장이 난리난다. 워낙 웃음이 없는 사람이어서. <투캅스> 때 워낙 웃기에, 뭐냐, 장난이냐, 물었더니 아니 정말 웃긴다고 했다. 코미디할 때 그런 말이 있다. 김현 기사를 웃겨라, 그럼 끝난다. 그는 못 찍어온 필름에 대해 욕을 많이 한다. 이걸 뭐 이렇게 찍었냐고 구박한다. 다른 편집기사들하고 다르다. 자기가 편집한 것은 다 좋다고 하는데, 이 양반은 이 영화를 내가 편집하고 있는 게 창피하다, 그런 말도 한다. 독특한 사람이다. <공공의 적>을 그의 제자인 고임표 기사와 했는데, 고임표는 잔재주가 상당히 많다. 속에서 재주 부리는 건 고임표가 탁월하다. 드라마 전체를 보는 건 김현 기사가 훨씬 낫고. 박광수 사람이 매우 진실하다. 편집하면 어떤 신이 안 좋아도 좋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는 안 그렇다. 정직하고 진지하다. 영화계에서 오래 일해서. 한국 영화사 흐름을 전체로 잘 알고 있고, 극장에 옮겨졌을 때 화면 크기 변화 같은 걸 잘 안다. 극장까지 가서 후반작업 문제점을 지적해주기도 하고. 데뷔작 <칠수와 만수> 때, 김현 기사가 스탠백을 가지고 동시녹음을 처음 하고 있었다. 또 유영길 촬영감독 등 주변 영화인들이 다 그를 신뢰했고. 그래서 찾아가 인연이 시작됐고 지금까지 전 작품을 그와 함께 만들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욕망의 생태학 <질투는 나의 힘> 論 [1]

인간은 어떻게, 인간, 그 아름답지 않은 종족이 되는가 욕망의 생태학, 그 유머적인 정신상태에 대한 사생(寫生)의 힘- <질투는 나의 힘>論 지난해 우리는 이상한 영화 한편을 접했다. 박찬옥 감독이 만든 <질투는 나의 힘>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에로 버전으로 패러디한 것이냐고 우스갯소리를 하던 입들은, 부산영화제와 로테르담영화제를 거치는 동안 몰려오는 소문 앞에서 무염해졌다. 가장 뛰어난 데뷔작 가운데 하나이고 감독의 연출력이 빚어낸 결정체라는 평판을 받는 이 영화가 조만간 관객을 찾는다. 모호한 듯 단호한 시선, 조용한 듯 격렬한 심리, 미미한 듯 뚜렷한 행동, 간절한 듯 허무한 사랑. 박찬옥이라는 신예 여성감독은 이런 인간의 조건을 괴력에 가까운 집요함과 정묘함으로 펼쳐놓는다. <질투는 나의 힘>이 제안하는 슬프고도 즐거운 담소에 동참해보기로 한다. - 편집자 어딘지 모르게 슬슬 가려운 곳을 콕 집어서 손톱 끝으로 꼭꼭 누르는 듯한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은 웃음이 터질 구석이 많다. 반면 난데없는 상상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컨대 윤곽선이 희미한 가운데 질감이 풍부한 인상파 그림 한폭과,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명확한 기운을 포함한 옛 플랑드르 미술을 동시에 연상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기이한 콘서트에 와 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원상(박해일)의 독주가 윤식(문성근), 성연(배종옥), 혜옥(서영희)과 함께하는 현악 사중주로, 다시 협주곡으로 확장되는 듯이 여겨지는 것이다. 정처없는 상상은 다시 서울의 거리로 옮아간다. 거기에는 시인 기형도가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사랑을 찾아, 사랑없는 얼굴로 헤매고 있다. 이건 영화의 제목과 정서를 기형도의 동명의 시에서 빌려왔다는 정보가 주는 피할 수 없는 상상이다. 죽은 기형도는 가끔씩 이렇게 자극적으로 귀환한다. 영화가 끝났을 때 상상이 멈춰 선 곳은 어떤 숲속의 늪이다. 검정빛 도는 청록색의 늪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원상의 얼굴이 보인다.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윤식의 딸 미림(김꽃비)이 열려진 방문 사이로 바라보았던 그 얼굴처럼, 원상은 별다른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같다. 늪에서는 더운 습기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숲은 이미 습기로 자욱했고 알 수 없는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지독한 시선, 집요한 영화 이 풍경 속에서 박찬옥은 어디에 있는 걸까. 감독은 늪 가장자리에 바짝 다가가 신발 코에 진흙을 묻힌 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원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늪에 함께 빠져들거나 빠지는 포즈를 취하지 않는다. 원상이 윤식을 평한 것처럼, 그는 절대로 자기를 잃어버릴 사람이 아니다. 그토록 지독한 인간만이 이처럼 집요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돌발적으로 여겨지는 이런 괴력은 <셔터맨>(1994)으로 시작되는 단편 필모그래피 속에서 이미 단면들을 드러낸 바 있다. (1995)은 빌딩 옥상, 자동차 밑바닥 등 도시의 모서리에서, 잠행하는 도둑고양이처럼 소리없이 도발적으로 살고 있는 남자와 여자를 감각적으로 묘사했다. 제1회 서울여성영화제 수상작인 <있다>(1996)는 러시아워의 지하철 안이라는 지극히 제한된 공간에서, 극소의 움직임만으로 감정을 표현하고 끌어내는 실험을 했다. <느린 여름>(1998)은 고등학교 남학생의 사소한 행동과 심리 묘사를 통해 학교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느리고 지루한 리듬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감독 스스로 <질투는 나의 힘>이 이 영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내레이션에 가까운 배우 연기로 드라마를 구성한 <공연한 사실>(1999)을 끝으로 단편영화에 관한 다양한 실험을 섭렵한 그는 <오! 수정>의 조감독을 거쳐 장편 <질투는 나의 힘>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강렬한 데뷔작인 동시에 가장 뛰어난 연출 역량을 보여주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최우수 아시아 신인작가상’을 수상하고 로테르담영화제에서 경쟁부문 최고상인 ‘타이거상’을 내처 받았다. 보도자료에 적힌 감독의 말에 따르면 이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한 젊은 남자가 자기 애인으로부터 유부남을 사랑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 남자의 주변을 서성댄다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연상의 여인이 새로 나타나 관심을 가질까 말까 하는 와중에, 똑같은 남자에게 다시 한번 선수를 뺏기는 거다. 이래서 나온 대사가 “누나, 그 사람이랑 자지 마요. 꼭 자야 된다면 나랑 자요. 나도 잘해요”다. 이런 식으로 발전해가는 단선적인 이야기가 있다는 점에서 <질투는 나의 힘>은 대중적이고 익숙한 영화 형식을 어느 정도 따른다. 이야기꾼의 재간과 감독으로서의 연출력이 갈리는 지점은 그 다음부터다. 박찬옥은 이 갈림길에서 확실한 승부수를 던졌다(실은 자신의 체질을 따른 것일 테지만). 감독은 마치 노련하게 붓질하는 화가처럼 인물의 심리와 행동을 세밀하게 차곡차곡 채워넣는다. 멀뚱하고 한가롭게 찍힌 듯한 점들이 캐릭터의 뉘앙스를 형성하고, 산란하는 빛을 따라 풍경과 타인에게로 번지듯 연결된다. 감독의 관심사는 이야기가 아니라 캐릭터와 그들 사이의 관계다. 인물들은 주로 대사 아닌 것들을 통해 감정을 전달한다. 예컨대 바람 피우다 들킨 사위를 담배 대접해가며 어르고 달래던 장인에게 윤식은 “후회하며 살고 싶지 않다”고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장인의 당혹과 실망은, 긴장으로 올라가 있던 어깨의 높이를 톡 떨어뜨리듯 낮추는 것으로 표현된다. 하물며 주요 캐릭터들이 구사하는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언어 못지않게 격렬하고, 어떤 언어보다 솔직하며 정확하다. 이건 몹시 사실적이다. 우리의 실생활이 아마도 이런 식일 것이다. 풍경을 사생(寫生)하듯이 인간의 육체적 표면을 묘사하는 사생문의 문체를 따라 심리와 의미들이 죽 엮어져 나온다. 그러니 이 영화의 줄거리를 묻지말라. 그건 러닝타임보다 더 길어진다. 갖고싶다… 고로 질투한다 문성근, 배종옥, 박해일은 그 나이 때의 그런 캐릭터를 제일 잘 연기할 수 있는 배우들이다. 아마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런 애매한 표현이 딱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조용한 성격의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의 강렬한 연기는 사소한 아이러니와 진실들이 넘치는 대사와 어우러져 이 영화를 가장 주목할 만한 새로운 한국영화로 만들어냈다.”(<버라이어티>의 데릭 엘리) 세 인물의 캐릭터는 단독으로 묘사되지 않고 관계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원상이 어떤 사람인지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를테면 윤식과 연결되어 있을 때의 원상은 분노와 흠모라는 모순된 감정에 사로잡힌 청년이다. 반면 하숙집 딸 혜옥과 함께 있을 때의 원상은 자신이 가진 어떤 여유들을 베푸는 성숙한 사람의 입장에 선다. 연상의 사진작가 성연과 나란히 놓인 원상은 자신을 앞서가는 원숙함과 도덕적 자유로움 앞에서 칭얼거리는 설익은 소년이 된다. 감독 스스로 밝힌 것처럼, 다면체적이고 분열되어 있으며 때와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원상을 통합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바로 질투다. 말 그대로 ‘질투는 나의 힘’이다. 내 질투의 표면적인 대상은 윤식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여러 가지 결핍으로부터 생겨난 욕망이 날아가 꽂히는 것들이다. 윤식은 나의 애인을 빼앗아갔다. 그는 나보다 부유하다. 그는 문화적으로도 지적으로도 나를 앞선다. 이것이 결합되어 만들어내는 어떤 향취가 나를 매혹시킨다.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갖고 있지 못한가를 깨닫는다. 나는 그것을 갖고 싶다. 이런 욕망이 원상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만든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박찬욱-류승완,<지구를 지켜라!>를 권하다 [1]

박찬욱-류승완, 이상한 감독 2人이 괴상한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 보내는 열렬한 응원 지난 3월 중순 <지구를 지켜라!> ‘VIP시사회’가 열리던 한 극장에는 유난히 열광적인 분위기의 한 무리가 눈길을 끌었다. 광란이라 할 만큼 뜨거운 반응을 보냈던 이들의 정체는 박찬욱, 김지운, 허진호, 봉준호, 류승완 등 젊은 감독들. 이날 그들은 <지구를 지켜라!>의 기발한 세계에 취했고, 이어진 자리에서도 술과 대화에 취했다. 그중에도 유난히 목소리를 높였던 박찬욱 감독과 류승완 감독이 한 카페에서 만나 <지구를 지켜라!>에 관한 수다를 떨었다. 4월12일이면 <마루치 아라치>(가제)의 크랭크인에 들어가는 류 감독과 5월 초 <올드 보이> 촬영에 돌입하는 박 감독 모두 초 단위로 일정을 짜야할 정도인데도 시간을 내준 것. ‘동업자’로서의 연대의식 때문이 아니라 이 영화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서였다.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예전 영화광 시절의 즐거움을 잠시나마 되찾았던 두 감독이 “이 영화를 응원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승완▷찬욱: 반전1인시위 하라구? 박찬욱 | (웃으면서)어 승완아, 소문에 <마루치 아라치>의 크랭크인이 내년으로 미뤄졌다더라. 류승완 | 감독님, 제발 악소문 좀 내지 마세요. 아, <올드 보이>는 감독 바뀌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박찬욱 | (웃음) 도대체 개봉이 언제야, 개봉이? 류승완 | 아직 개봉을 안 잡고 있어요, 일부러. CG 분량도 많고 스케일도 커서 개봉일을 미리 정해놓을 수가 없어요. 박찬욱 | 난 11월이거든. 알지? 류승완 | 아, 전 11월엔 죽었다 깨도 못해요. 저희는 8월 말 정도까지 촬영하는데 후반작업이 길어질 것 같아요. 박찬욱 | 후반작업 들어가면서 다음 작품 촬영에 들어가면 되겠네. 류승완 | 원하는 게 그건데. ‘류승완이 해냈다’,(웃음) 이런 좋은 소문을 내놓고 작품이 끝나기 전에 계약을 해서…. 계약만 하면 전쟁이 나도 되고…. 박찬욱 | 전쟁, 그거 어떡하니? 류승완 | 아차, 감독님. 00당에 제 연락처 가르쳐주셨어요? 박찬욱 | 아니. (침묵) 류승완 | 거기서 감독님이 가르쳐줬다고 하던데요. 제가 촬영준비 때문에 낮엔 시간이 정말 없다고 하는데도 계속 1인시위를 하라더군요. 박찬욱 | 거 참 이상한 애들이네. 내가 네 전화번호 가르쳐줬다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는데…. 찬욱▷승완: 송강호 선수가 이 영화 두번봤대 류승완 | 아, 그렇죠. <지구를 지켜라!> 어떻게 보셨나요? 박찬욱 | 이창동 감독이 문화부 장관이 되는 걸 보고, 이젠 나도 영화 만들어 칭찬도 많이 받을 수 있을 줄 알았거든. 당분간 영화 못 만드실 테니. 그런데 이런 영화가 나오고…. (한숨) 앞으로 <살인의 추억> <장화, 홍련>도 나오지…. 올해도 틀렸구나…. (웃음) 그런 착잡한 마음이지. 산 넘어 산이구나, 하는. 허진호가 나보다 늦게 찍을 것 같아서 그나마 위안은 되는데, 어떡하냐 이제. 류승완 | (애써 정색하며) <선생 김봉두>가 잘돼야죠.(류승완 감독은 <선생 김봉두>의 제작사인 좋은영화에서 새 작품을 만든다) 저는 그거예요. (웃음) 박찬욱 | 좀 진지해지자. 나는 장르영화가 볼 때는 즐겁지만, 만들 땐 안 내키는 그런 갈등 속에서 지냈어. 내가 만든 영화가 완전히 장르에서 벗어난 게 아니면서도, 만들 때는 장르적으로 막 간다는 게 별 재미가 없어서 괴로워하던 참이라고. 근데 이 영화는 장르영화이면서도 장르를 갖고 놀다시피 하니까 그런 게 부럽기도 하고. 그런 감독이 한국에 필요한데, 기다리던 재능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런데 이게 <선생 김봉두>에 비해 어떻다는 거야. 류승완 | 일단 <선생 김봉두>의 흥행이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웃음) 사실 저는 <선생 김봉두>를 재밌게 봤거든요. 영화의 완성도나 이런 걸 떠나서 만든 사람의 진심이 보여서 좋았어요. 같은 맥락에서 <지구를 지켜라!> 같은 경우는 주류에서 장르를 활용해 어떻게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가, 이게 너무 잘 보이니까. 감독 개인의 얘기이기도 하고, 장르의 외피를 썼으면서 그거대로 가지 않기도 하고. 박찬욱 | 우리 제작실장은 팀 버튼보다 나은 재능이라고 그러던데. 팀 버튼이 없었다면 또 이런 영화도 안 나왔겠지만. 류승완 | 저는 장준환 감독 단편도 봤고, 함께 일해봤던 경험이 있고, 개인적인 친분으로 시나리오도 먼저 봤거든요. 그래선지 영화에서 만든 사람이 계속 보이더라구요. 그게 되게 좋았어요. 물론 개인을 모르고 그냥 영화를 봤을 때야 다르겠지만, ‘현장에서 저 사람 어디서 낄낄댔겠군’, ‘왜 저렇게 만들었는지 알겠군’, ‘저때 정말 자기가 무서워했겠군’, 뭐 이런 식이니까 재밌더라구요. 박찬욱 | 난 잘 모르는데도 재밌었어. 류승완 | 요샌 그렇게 개인적인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그러니까 자기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잖아요. 그리고 자기를 드러내려고 해도 뭔가 이렇게 덮게 되고…. 박찬욱 | 장 감독은 잘 모르지만 난 (신)하균이를 보는 게 좋았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도 함께했지만 <복수는 나의 것> 때 미안한 마음이 있었거든. 거기서 말을 못하는 역할이었으니까. 자기 표현의 무기를 뺏어놓고 연기시키는 게 미안했는데, 여기서 적역을 맡아 날아다니는 걸 봤거든. 하여간 시사회날 기분이 너무 좋아서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 장준환, 허진호 감독, 뭐 이렇게 새벽 6시까지 술 마셨다니까. 근데 하균이는 중간에 도망가고. 그래서 하균이한테 문자 메시지 보냈어. 두나한테도 보내고. 류승완 | 아 감독님, 요즘에 문자도 보내세요? 박찬욱 | 그럼. ‘하균이 영화 끝내주더라’ 이렇게 보냈더니, 두나는 그때 촬영 중이더라구. 새벽 6시에. 근데 어떻게 걔는 금방 알더라. ‘아직도 술 드시나요’ 하고 답이 오더군. 문자에도 그런 게 보이냐? 혀 꼬부라지고 그런 게? 아, 내가 6시에 일어나서 뭘 했을 거라고 생각을 안 하는 거지, 그지? (웃음) 류승완 | 새벽 6시에 문자는 잘 안 보내죠. (웃음) 박찬욱 | 특기할 만한 사항은 송강호 선수가 이 영화를 두번 봤다는 거야. 1년에 2편 보는 사람이. 올해 분량 다 채운 거야. (폭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