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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몬트리올] 퀘벡, <그을린> 덕에 “음메 기살어”

2010년 퀘벡은 그을렸다. 지난해 베니스, 토론토 등 각종 국제영화제에 초청되고 수많은 상을 휩쓸며 퀘벡권 캐나다영화의 자존심을 다시 세워준 드니 빌뇌브 감독의 <그을린>(incendies)은 몬트리올의 시네마테크 중 하나인 시네마 뒤팍에서 여전히 상영 중이다. 지난해 부산영화제 최고의 화제작 중 하나였던 <그을린>은 중동 내전으로 고통받는 한 여인의 역사를 지극히 영화적인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텔레필름 캐나다는 지난 9월 이 영화를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부문 지원작으로 선정했다. 텔레필름의 캐럴 브라반 이사는 “깊이있는 주제를 영화적으로 잘 그려낸 이 영화가 지원작이 되는 데 손색이 없으며 캐나다의 훌륭한 감독 중 한명인 드니 빌뇌브의 재능이 국제적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사실 드니 빌뇌브는 퀘벡에서는 이미 잘 알려진 감독이다. 그의 단편영화 는 2008년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바 있으며 2009년작인 장편 <폴리테크닉>가 큰 주목을 받았다. <폴리테크닉>은 평화롭기만 한 몬트리올, 아니 캐나다 역사상 가장 끔찍한 ‘폴리테크닉 학살’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1989년 12월 몬트리올의 에콜 폴리테크닉 공대에서 마크 르팽이라는 기계공학도가 여대생만을 대상으로 무차별 총격전을 벌였고, 결국 14명의 소녀가 목숨을 잃었다. 드니 빌뇌브는 아이러니한 흑백의 아름다운 화면을 통해 이 사건을 돌아봤고, 캐나다의 권위있는 영화상 지니 어워드에서 최우수영화상을 비롯해 9개 부문의 상을 받아냈다. <폴리테크닉>에서 살인자로 분한 배우 맥심 고데트는 <그을린>에서 쌍둥이 중 한명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폴리테크닉>으로부터 1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드니 빌뇌브의 <그을린>은 와디 무와드의 연극을 각색한 영화다. 주인공인 쌍둥이 남매는 잃어버린 아버지와 형제를 찾으라는 엄마의 유언에 따라 레바논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마의 비밀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중동의 역사와 마주하게 된다. 아직도 많은 퀘벡 사람들의 관심 속에 꾸준히 상영되고 있는 <그을린>은 2011년 오스카 외국어영화상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손색이 없다. 오스카 생각하면 12살 소년이 되요 <그을린>의 드니 빌뇌브 감독 인터뷰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 =낮잠을 자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는데 처음 든 생각은 ‘너무 행복하다!’였다. -지금 기분은 어떤가.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원작자인 와디 무와드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올해 지원작의 감독들인 자비에 돌랑, 루이 벨랑제 등은 모두 대단한 감독들이며 퀘벡의 영화가 점점 발전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중에서 나의 영화가 지원작으로 선정되었다니 감사할 따름이다. -수상을 기대해도 되겠나. =오스카에서 이 부문은 경쟁이 치열하다. 100여개국에서 출품된 쟁쟁한 영화와 경쟁해야 하니 말이다. 최종 엔트리가 결정되는 것은 1월이다. 많은 기대를 하지는 않는다. -오스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가 궁금하다. =<그을린>이 여러 나라에서 상영될 때 이미 오스카 지원작 선정을 약간은 짐작하고 있었다. 여러 영화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으니 그것이 장점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아름다움, 시, 그리고 산업의 합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영화를 만들 때 가장 행복하고 편하다. 영화를 만들 때 영화제를 생각하거나 상을 받는 것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더 많은 대중과 공유하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오스카를 생각하면 12살 소년의 마음이 되곤 한다. (웃음)

[유준석] ‘사운드 퍼즐’로 빚은 괴담이다

무척이나 긴장한 모습이었다. 인터뷰가 끝날 즈음에야 유준석 감독은 긴장이 좀 풀렸는지 이런저런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소리를 이용한 공포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에 사운드 전공자는 아닐까 예상해봤는데 그렇진 않다. 소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미스터리 구조로 관객의 오감을 잡아채기 위한 자신만의 일종의 차별화 전략 중 한 가지라고 한다. 유 감독은 2003년에 인비저블 시리즈 1편 <숨은 소리 찾기>를 연출했고 2005년에 OCN에서 방영된 미스터리 시리즈 드라마 <코마> 중 임원희가 주연을 맡은 3편을 연출한 적이 있으며 이번 개봉작 <귀신 소리 찾기>는 인비저블 시리즈 2편이다. 공포영화이며 귀신 소리가 들린다는 시골집을 취재하는 텔레비전 리얼리티 쇼프로그램팀이 주인공이다. -상영시간 40분인 영화가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는 건 이례적이다. 어떻게 성사됐나. =단편을 작업하는 사람들은 영화제 밖에서 영화를 상영하기가 힘들다. 그런 점에서 일단 극장에서 정식 개봉하는 건 의외여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에는 배급사 인디스토리에서 연락이 왔다. 인비저블 시리즈 3편까지 만든 다음 세편을 묶어서 함께 개봉하는 것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난 지금 넋을 놓고 다른 걸 쓰고 있는 중이라 당장 3편을 만들긴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말 나온 김에 그냥 2편만 단독 개봉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돌아섰다. -이른바 <귀신 소리 찾기>가 인비저블 시리즈 2편이며, 3편까지 계획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3편까지 구상했다. 하지만 아직 3편의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생각 중이다. 세편을 모두 묶는 브리지가 필요할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겠고. 지금은 어쨌든 2편 단독 개봉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편까지 묶어서 하는 건 지금으로서는 일단 마음을 비운 상태다. -소리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생기게 된 것인가. =<환상특급> 같은 기묘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기존의 것들과 차별화하고 싶었다. 그러다 시각적인 것보다 청각적인 것에 사람들이 훨씬 더 예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면서 사운드 미스터리를 생각해낸 것이다. -사운드 전공인가. =아니다. 내가 공부를 원래 잘 못했다. 고등학생 때도 꼴찌였다. (웃음) 아, 안동에 있는 대학의 영상 관련 학과에 입학한 적은 있는데 거기가 좀 이상한 학교였다. <두사부일체>가 진짜 있는 이야기더라. 실제로 그 지방 깡패가 학교에 다니질 않나, 기숙사 점호를 몽둥이 들고 하질 않나, 그러다 내가 영화 동아리를 하나 만들어보려 했는데 원래 있던 방송 동아리에서 훼방을 놓아서 잘 안됐다. 안 맞아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독학한 거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관심은 정말 어린 시절부터 내내 갖고 있었다. -소리를 사용하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연출 계획이 있었을 것 같다. =<귀신 소리 찾기>에는 세 가지 유형의 소리가 나온다. 첫 번째는 극중 취재팀이 조작하는 사운드다. 그 소리는 나무를 누군가가 밟아서 나는 소리 같은 것이다. 영화 속 현장이 한옥집이다 보니 음산한 소리를 내자, 하는 생각에서 만들었다. 두 번째는 영화 속 취재팀 중 정필우라는, 귀신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정말 귀신 소리를 찾기 시작할 때 나는 발자국 소리들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녹음기에 녹음된 귀신의 말소리다. 이렇게 성격이 다른 세 가지 소리들이 나온다. 귀신 소리는 실제로 여배우 목소리로 녹음한 다음 컴퓨터에 넣어봤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더라. 너무 또렷하게 들렸다. 대신 남자 목소리로 녹음하고 나서 찌그러뜨렸더니 정말 여자 귀신 목소리 같았다. -페이크 다큐 혹은 방송 리얼리티 프로그램식의 방식을 따랐다. =그 방식을 따르긴 했지만 극영화에 맞춰서 시나리오를 썼다. 콘티만 없었을 뿐 완벽하게 시나리오를 갖고 갔다. 새미 페이크 다큐 정도라고 하면 좋을 것 같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풀었나. =사운드 퍼즐이라는 컨셉이 있었다. 사운드를 소재로 퍼즐을 내서 관객에게 접근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괴담식으로 말이다. 왜 어린 시절에 텐트 속에서 무서운 괴담을 많이 듣곤 하지 않았나.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가장 무서운 괴담은. =실은 그런 게 없다. (웃음) 하지만 2009년에 커피숍에서 바리스타 아르바이트 일을 하던 때인데, 같이 일하는 여직원 다섯명에게 쪽지를 한장씩 서로 모르게 나눠줬다. 그러고 나서 그걸 모아서 동시에 맞춰보라고 했다. 종이에는 각각 뒤, 에, 조, 심, 해, 한자씩 쓰여 있었다. 모아놓고 보니 ‘뒤에 조심해!’이지 않나. 꺅 하고 다들 놀라더라. 그 때, 아 이게 재미있겠구나 생각했다. <귀신 소리 찾기>도 쌍둥이 자매의 불륜 이야기로 진행하다가 막판에는 예상하지 못한 다섯 음절이 맞춰지면서 끝나지 않나. 40분 중 39분이 맥거핀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누군가가, 이 영화 후반부 유치하다, 다시 끝나고 생각해도 유치하다, 이럴 순 있는데 그래도 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진지한 척하면서 죄의식을 건드린 다음 공포 효과를 주는 거다. 영화제에서 상영할 때 재미있는 광경을 하나 봤는데, 관객이 스크린은 안 보고 극장 스피커쪽에 내내 관심을 두더라. (웃음)

<'개콘' 고참 변기수 "라디오에선 신인">

(서울=연합뉴스) 고현실 = "라디오 DJ요? 많이 혼나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KBS 2TV '개그콘서트'(개콘)의 'DJ변' 개그맨 변기수가 올해부터 진짜 라디오 DJ로 변신했다. 그는 지난 1일부터 KBS 2FM(89.1MHz)'변기수의 미스터 라디오'를 진행하고 있다. 변기수는 최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다시 신인이 된 느낌"이라고 소감을 전했다. "개그가 많은 사람들을 향한 것이라면 라디오 DJ는 한 사람을 위해서 이야기하듯이 해야 하잖아요. 개그할 때 톤이랑 달라서 배우면서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프로그램이라 부담이 큰데 설상가상으로 변변한 대본조차 없다고 한다. "2시간짜리 프로인데 대본이 3~4장밖에 안되요. 오프닝과 마무리 멘트 빼면 대본이 거의 없는 셈이에요. 청취자들 신청곡과 사연 위주로 진행하는데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노래를 끊지 않아요. 하면서 스릴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PD님께 욕도 많이 먹고요.(웃음)" 그러면서 그는 "'DJ변'처럼 사운드 볼륨을 직접 올리고 내리면서 진행한다"며 뿌듯해했다. 프로그램에 아이디어를 많이 낸다는 그는 "얼마전 동료 개그맨 변승윤과 변투를 하면 안되겠냐는 제안을 했다"며 능청스레 말했다. 동시간대 프로인 SBS '두시탈출 컬투쇼'를 대놓고 패러디한 아이디어인데도 "타방송도 좋은 점이 있으면 배우는 것이 좋다"며 너스레를 떤다. 변기수는 라디오에서는 신인 DJ지만 '개그콘서트'에서는 최고참 중 한 명이다. 현재 출연자 중 김준호, 김대희, 정명훈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그의 후배들이다. '개그콘서트' 11년 역사에서 6년을 함께 했다. 2004년부터 2~3개월 제외하고 매주 녹화장을 찾았다. 라디오 스튜디오는 오랫동안 서왔던 '개그콘서트' 무대와 달랐다. "바로바로 반응이 안와서 처음에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개그맨들은 무대 위에서 관객의 표정을 보고 반응을 알 수 있는데 이건 내가 말을 했는데 웃겼나 긴가민가 하거든요. 그래서 조급함이 있었는데 이제 편안하게 하려고요." 경쟁이 치열한 '개그콘서트'에서 장수하는 비결을 물으니 아이디어라는 답을 내놨다. "아이디어를 챙겨놓고 사는 사람은 없어요. 모든 개그맨들은 코너가 인기를 얻더라도 4~5개월이 지나면 뭐해야지 하고 고민해요. 전 다행히 돌아다니다 보면 문득 아이디어가 떠올라요. 연기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실생활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찾는 편이에요." '개그콘서트' 코너 '못 말리는 면접관'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그는 이 코너에서 볼품없는 외모의 응시자에게 가차없이 '탈락'을 외치는 면접관을 연기한다. "짜 놓은 지 6~7년 된 코너에요. 원래 개그우먼 김현숙 씨가 상대역이었어요. 대학교 공연할 때 김현숙 씨한테 무조건 '탈락' '탈락' 외치는 캐릭터였죠. 그러다 불현듯 청년실업도 심각한데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만들었어요." 그는 "대박 코너는 아니지만 중간 이상은 한다"며 "공감대를 이끌어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나중에 시청자분들께 면접장에서 억울한 질문 받으신 경험을 프로그램 게시판에 올려달라고 할 거에요. 실제 보면서 자기 경험이 떠올라 씁쓸하다 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는 깐족대는 캐릭터에 일가견이 있다. '까다로운 변선생' '날아라 변튜어디스' 'DJ변' 등의 코너에서 한결같이 밉살스럽고 짓궂은 캐릭터를 연기했다. "사실 제가 혀 짧은 걸 안 들키려고 말을 빨리하다보니 그런 캐릭터가 나왔어요. 빠른 호흡으로 말하면서 남들이 생각하기 전에 제 말을 몰아쳐서 하는 거죠. 똑같은 타이밍으로 얘기하면 웃기기 힘들어요." 왜 코너명에서 변씨 성을 빼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뜸 어릴 적 놀림 받은 이야기를 꺼내 놓는다. "변사또, 변기, 변강쇠 같은 별명이 많았어요. 6학년 반장 선거에서는 아이들이 제 이름 대신 별명들을 적는 바람에 무효표가 나와서 떨어졌어요. 변씨 성을 가진 어린이들에게 힘내라는 뜻에서 자꾸 넣고 있어요." 지금은 '개그콘서트' 대표 개그맨이 됐지만 개그맨이 되기까지 그는 지상파 개그맨 시험에서 13번 낙방했다. 개그맨 중 최고기록일 거라는 그는 "한번에 붙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다부지게 말했다. "떨어지고 새 코너 준비면서 아이디어를 짰던 게 지금 도움이 많이 돼요. 사회경험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어요. 제가 제대로 된 정규직은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어요. 방송국 보도국 스태프, 텔레마케터, 공사장 인부 등을 하면서 비정규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잘 알죠. 그 당시엔 힘들었지만 개그맨이란 꿈이 있어 즐거웠어요." 스스로 실패의 경험이 많은 만큼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의 잇단 폐지로 설 곳이 없어진 후배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적어도 100명 이상은 갈 곳이 없어졌어요. 개그맨들을 믿고 무대를 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그전보다 웃기지 않다고 프로를 쉽게 없애버리지 말고 개그맨들에게 다시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요. 개그맨들은 소모품이 아니잖아요." 개그맨 데뷔와 '개그콘서트' 엔딩 장식이라는 꿈을 이룬 그에게는 버라이어티 MC라는 꿈이 하나 남았다. "많은 사람들이 산에 올랐다 내려가는 건 한순간이라 하잖아요. 전 산 하나 정복하려고 이 일을 시작한 게 아니에요. 산맥에 도전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가 올 거라고 믿어요. 우선 라디오 프로도 제가 청취율 깎아먹었다는 소리는 안 듣게 하고 싶어요." okko@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김석윤] 방송에서 영화까지 신명나는 오락시간

영화계에서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의 김석윤 감독으로 통하지만 방송계에서 그는 김석윤 프로듀서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KBS 방송국 주변을 잠시 거닐 때 지나는 사람마다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걸 보니 그는 확실히 이 분야의 오래된 사람이다. 그는 각종 쇼 프로그램과 드라마 등을 연출해왔다. 영화인이면서 방송인,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흔치 않은데, 그가 영화계에 이름을 알린 건 자신이 연출한 시트콤 드라마 <올드미스 다이어리>가 큰 인연이 됐다. 같은 연출자가 드라마를 만들고 나서 동명의 제목으로 내처 극장판까지 만들었는데, 국내에서 그런 시도 자체가 전무후무했을 뿐만 아니라 개봉 당시 이 영화는 흥행성적과 무관하게 무시하지 못할 소수의 골수팬을 낳았다. 때문에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가 돌아온다면 ‘올미다’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 올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는 예상을 한참 벗어나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왔다. 조선시대의 탐정과 그의 심복을 데리고 요절복통의 사극 세상을 꿈꾸며 온 것이다. -방송과 영화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 건 아니고…. 본사에서 배려해주어 파견 발령식으로 영화제작 업무를 하고 다시 돌아온 셈이다. 일반 회사가 아니고 방송국이다 보니 제약이 덜했다. 방송과 영화 사이에 어떤 공통점은 있는 것 같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라면 시청자, 영화라면 관객, 공통적으로 수용자가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하거나 우울한 분위기를 일소해주는 웃음. 말하자면 예능이란 수용자에게 그런 즐거움을 주는 것이 본연의 임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영화도 그런 형식이다. -영화는 대략 4년 만인데, 일단 촬영 초반이 어땠을까 궁금하다. =전략적으로 보면 첫회는 스탭과 배우가 호흡도 맞추고 해야 하는데… 받쳐주지 않는 게 많았다. (웃음) 첫회에 첫신을 찍었는데, 헌팅 갔을 때는 파랬던 수수밭이 가서 보니 벌겠다. 잎사귀도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져 있었고. 일단 접근이 용이하질 않았다. 특히 날씨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원래 영화의 배경은 여름인데 가을 들어 찍기 시작했으니 촬영 중에 단풍이 들고 눈이 오면 큰일이었다. 개봉 일정은 맞춰져 있었고. 그러다 보니 세트 촬영을 전부 뒤로 미뤄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조건 로케이션, 오픈 세트부터 찍어나갔다. 그런데 이렇게 ‘공간’을 중심으로 찍다보니 이야기상으로는 뒤죽박죽 찍게 됐다. 첫 장면 찍고 마지막 찍고 이야기가 미처 전개되기도 전에 절정을 찍기도 하고. 나보다 연기자들이 많이 헷갈렸을 거다. 이 톤이 맞나 저 톤이 맞나 하면서. (웃음) 그래서 연기자들에게 꼼꼼하게 편집을 보여주면서 했다. 그러고 보니 편집 과정 중에 큰 방향 전환도 한번 있었다. -어떤 전환이 있었나. =추리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라 자세히 말하긴 어렵지만 그게 관객에게 좀 어렵게 받아질 거라는 의견들이 많이 나왔다. 단서는 충분히 만들어놨지만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어려울 수 있다는 거였다. 그보다는 좀더 편하게 갔으면 하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자고 했다. 12세 이상 관람가라면 쉽게 가는 게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래는 단서를 찾아나가며 벌이는 추리극 부분에서 맛깔나는 것도 있었는데 지금은 설명을 많이 하다 보니 그건 좀 줄었다. 그게 장점이 된 것도 같고 아쉬운 점인 것도 같다. 하지만 오락적으로 즐기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스토리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오락적인 포인트를 전달하는 건 더 어려울 거라고 판단했다. -설 시즌 오락영화로서 포인트를 명확히 잡았다는 뜻으로 들린다. =꼭 설 시즌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처음 시나리오 초안을 받았을 때는 영화하겠다는 생각없이 그냥 봤다. “읽어나 보세요” 하기에 “나 사극 안 좋아하고 잘 모릅니다”, 하면서 봤다. 2007년부터 말이 나왔던 작품이라던데 돌다돌다 나에게까지 온 건가 하는 생각도 했고. 읽어보니 오락적으로 뭔가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만들면 오락적으로 갈 것 같은데 괜찮겠나.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나”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 (웃음) 명절을 노렸다기보다 그렇게 오락적으로 만들겠다는 지향점을 갖고 시작한 거다. -원작이 김탁환의 <열녀문의 비밀>이다. 각색하는 과정에서 신경 쓴 부분은. =원작 소설을 재미있게 봤다. 하지만 소설 자체가 영화적이지는 않았다. 원작을 읽고 나니 시나리오 초고가 원작을 영화적으로 바꾸려 한 결과였다는 걸 알게 됐다. 말한 대로 오락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했다. 미스터리 부분들이 추가됐고. 반전 포인트랄까 강도를 높이는 작업도 했다. -현장에서의 즉흥적인 선택도 있었나. =지금 생각나는 건 목소리 굵은 사또가 나오는 장면. 그건 원래 정보 전달 이상의 의미가 없었던 역할이다. 그런데 사또로 나올 연기자의 동영상 클립을 보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더라. 그러고 보니 김명민도 목소리 톤이 좋잖아, 그럼 이걸 두 사람의 목소리 톤 대결로 한번 가보면 어떨까, 해서 넣은 거다. 나뿐만 아니라 어느 시기가 되니까 김명민의 머리에서 아이디어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더라. -어떤 것들이 쏟아져 나오던가. =예를 들어 땅콩장수로 분장을 하고 나서 다른 분장은 다 지워도 점 하나는 남겨놓고 가자거나, 미인 한객주(한지민)를 보고 땅콩을 떨어뜨린다거나 하는 것들. 분장 아이디어도 본인이 많이 냈다. 김명민이 연기한 탐정에는 수염이 달려 있기 때문에 이것저것 변장하는 데 어떤 한계가 있었는데도 본인은 그 한계를 넘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오달수는 어땠나. =물론 잘했다. 배우 오달수를 좋아한다. “난 당신을 좋아하니까 영화에서 길게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본인한테는 아마 그게 부담이 됐을 거다. 싫증나지 않게 하면서도 길게 끌고 가는 역할에 대한 부담. 오달수 특유의 톤도 원하지만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영화 전에 오달수가 출연하는 <오구> 공연을 봤는데 그 안에서 이미 자연스럽게 관객을 끌어내는 걸 하고 있었고 그게 좋았다. 오달수가 맡은 서필의 톤이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촬영 당시에는 평이하게 끌어가는 톤에 불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리얼하고 좋더라. 합이 안 맞거나 톤이 안 맞는 부분은 현장에서 잡아가며 더 자연스러워졌다. 생동감있는 결과물이 나온 것 같다. -두 배우의 코믹한 장면이 많다. 베스트를 뽑아볼 수 있을까. =김명민과 오달수 두 사람이 연기한 것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저장고에서 둘이 목매다는 신. 김명민은 김명민대로 오달수는 오달수대로 잘했다. 김명민 혼자 하는 장면을 꼽자면 정자에서의 장면. 그리고 아까 말한 사또와의 저음 대결. 그리고 한객주에게 홀려 넘어갔을 때의 표정도 좋다. 정자 장면에서는 당당한 척하다가 스윽 다시 걸어들어가는 약간의 비굴한 모습이 좋고, 사또와 있을 때나 한객주와 있을 때는 그 짧은 동안의 표정 변화가 좋다. 그리고 오달수 때문에는… (웃음) 오히려 내가 현장에서 NG를 내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연출자로서 모니터보다는 좀더 배우들 근처에 있자는 주의이고 그래서 카메라 옆에 잘 서 있는데 아무리 예상을 한다고 해도 오달수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웃음을 참기 어렵다. 영화에서 오달수가 미친 것처럼 혼자 “배고파, 배고파” 하는 것 있지 않나. 원래 대사는 그냥 단순하게 배고파를 말하는 거였다. 그걸 해보자니까 본인도 처음엔 뻘쭘하지. 하지만 그게 오달수식으로 되더라. 사실 영화에 담긴 건 NG컷인데 좋아서 잘라 쓴 거다. (웃음) -김명민에게는 한객주, 정조, 개장수 등 상대 인물들을 대할 때마다 톤을 달리하라고 했다던데, 이유가 뭔가. =인물의 톤을 놓고 보면 그의 스펙이 보이지 않겠나. 톤은 몇 가지가 있었다. 가장 남자다운 톤, 속물 같은 톤, 정통 사극에 어울리는 톤, 서필과 있을 때는 고등학생 때 친구들끼리 노는 그런 톤, 노비들을 대할 때는 마음속 인본주의가 엿보일 수 있는 그런 톤.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톤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배우와 감독 사이에 의견 조율이 필요할 때도 있겠다. =현장에서 의견이 부딪칠 때는 서로 맞다고 논쟁하지 말고 누가 맞는지 무조건 주변 호응으로 결정하자고 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밀린 경우도 있지만! (웃음) 김명민이 오달수에게 “이런 개 같은 놈이” 하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 대사가 정말 욕하는 것처럼 들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김명민은 약간 장난스럽게 가자고 했다. 그래? 그럼 내가 얼마나 쿨한 연출자인지 보여주겠어 하며 두 가지 버전으로 찍어보자고 했다. 당연히 내 버전이 더 어울릴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현장기사가 두개 중에 떡하니 김명민 버전을 골라서 최종으로 붙여놓은 거다. 게다가 스탭에게 보여주자 다른 스탭들, 그러니까 조금 더 내 편일 것 같은 사람들마저 김명민 버전이 좋다고 하더라. 그럴 땐 당연히 내 걸 버리는 거다. (웃음) -오달수의 연기를 좋아하는 관객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연기를 오래 보는 건 큰 즐거움이었다. =콤비 플레이에 정말 능한 배우다. 극중 서필 역으로 여러 배우 이름이 거론됐지만 오달수 이야기가 나온 순간 한순간에 다 정해졌다. 시나리오상으로 보면 서필 역은 사실 약간 촐싹거리는 그런 캐릭터다. 그런데 오달수가 하니까 오달수만의 설정이 잡힌다. 연기자가 확실히 자리매김하면서 캐릭터가 재구축된 것이다. 나도 오달수의 팬으로서 만족스럽고 재미있었다. -사극을 안 보는 편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사극이 대체로 뻔해 보여서 평소 재미없어 했다는 말처럼 들린다. =사극이라면 다 본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 나는 한복을 입고 나오면 이상하게 무조건 잘 안 보게 된다. 물론 근거없는 선입견이지만 나는 그랬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처럼 선입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장면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영화에는 유독 인물들이 달리는 장면이 많다. =스피디하고 역동적이고 오락적인 스케일. 그런 걸 해봤으면 싶었다. 예를 들면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보이는 그런 느낌. 처음엔 무조건 달릴까, 잘만 달리면 재미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마치 지뢰를 헤치고 가는 느낌을 생각했고 그런 장치를 해놓고 달리자고 결정했다. 달리는 장면 중에는 편집된 아까운 장면도 있다. 장면 자체가 일단 많았으니까. 마라톤 경기를 패러디한 것도 있었다. 속도감있는 사극영화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반면 전반적으로 좀 어수선하다는 평도 있다. =그런 점이 있었다면 스토리 자체는 단순한데 그걸 추리극식으로 보여주면서 생긴 부작용이라고 하겠다. 뒷부분의 대미를 장식해야 하는데 단선이 아닌 이 복합 라인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가령 8가지 스토리를 8가지로 짜맞춘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스토리를 8가지로 짜맞추다보니 생긴 부작용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의도치는 않았겠지만 여하튼 일반적인 독법으로 보자면 이 영화는 속편을 약속하는 것처럼 끝난다. =김명민의 입에서 속편 이야기가 나와서 불이 붙은 거 같은데(웃음), 사실 편집상에서는 지금의 그 투숏이 엔딩은 아니었다. 영화적으로 속편을 상정했던 적은 없다. 19년 가까이 방송을 해서인지 영화가 내게 안 맞는 구석도 있긴 하다. 지금 생각 같아서는, 글쎄, 다시 영화를 하게 될까? 안 할 것 같은데? 이러고 나서 나중에 또 말 바꿀 수도 있겠지. (웃음) 여하튼 지금은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든다.

[로마] 총리님, 영화계까지 따먹으시려고요?

한국영화도 베를루스코니 앞에서 춤추면 배급을 받을까? 이탈리아 TV계를 독점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영화도 독점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보였다. 영화 제작·배급사인 ‘메두사’를 소유한 베를루스코니는 지난해 말 의류 기업 베네통과 함께 ‘더 스페이스 시네마’ 멀티플렉스 상영관 출범을 알렸다. 이탈리아 전 지역에서 34개의 멀티플렉스와 347개 상영관을 매입함으로써 베를루스코니는 앞으로 전체 매출의 25%를 차지하는 수입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제작, 배급, 상영 시스템 독점이 가져올 파행에 이탈리아 영화계는 무척 곤혹스런 분위기다. 이탈리아 영화계 인사들은 대자본의 독점 시스템을 제도적으로 견제하기도 힘들고, 상업영화든 창작활동이든 간에 앞으로 독점자본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고 아우성이다. 에토레 스콜라 감독은 “베를루스코니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동안에는 영화를 안 만들 거다. 영화는 글쓰는 일이나 그림을 그리는 일과 다르다. 그들은 지원하는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표현을 자유로이 할 수 있다. 누군가를 거부하기 위해 영화를 하기보다는 안 하는 게 낫다”고 항의 의사를 밝히고 나섰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카를로 베르도네 역시 “문화가 병들었다. 영화도 병들었다. 의사가 필요하다. 베를루스코니는 의사가 될 수 없다. 영화는 문화산업이다. 문화산업과 엔터테인먼트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오늘의 교육은 70%가 영상을 통해 이뤄진다. 잘못된 영상을 통해 문화와 엔터테인먼트를 혼동하는 차세대가 걱정이다”고 말했다. 대체 베를루스코니는 어떻게 총리가 되었을까? 방송사 3개를 운영하고 출판과 신문을 장악하고 있는 그가 가진 돈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난니 모레티 감독은 이미 2006년작 <악어>(Il Caimano)에서 이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제73대, 78대 총리를 지내고 2008년부터 다시 총리로 재직 중인 74살의 베를루스코니는 2000년 <포브스>가 선정한 개인 자산 순위에서 120억달러의 재산을 보유해 이탈리아 1위, 세계 14위의 부자에 오른 사업가다. 그는 건설업을 하던 1960년대부터 지역 방송국을 하나씩 사들인 뒤 반독점법을 피할 목적으로 자기 소유의 지역방송국을 묶어 상업 TV방송국 그룹을 만든 다음 이탈리아 최대 상업 TV 방송사, 광고 대행사, 축구팀을 총괄하는 ‘핀인베스트’ 제국을 건설했다. 여기에 속한 방송그룹 ‘메디아세트’ 산하 TV채널들은 이탈리아 전체 시청률의 약 50%를 점유하고 있다. 총리가 통제할 수 있는 국영방송사 RAI까지 합하면 텔레비전 시장의 90%를 점령하고 있는 셈이다. 엉덩이가 보이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출연한 젊고 매력적인 여자들이 남자 상의를 다림질하는 경연을 내보내는 프로그램들은 다 메디아세트 소속 방송국들이 만든다. 최근 이탈리아의 톱 뉴스는 이집트 혁명이 아니라 베를루스코니와 미성년자의 스캔들인 루비게이트다. 마음을 훔친다는 뜻의 ‘루바 쿠오리’로 불리는 모로코 출신 댄서 루비는 미성년자였을 때부터 베를루스코니 자택에 초대받아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녀가 추는 춤인 ‘붕가붕가’는 여성의 음부를 안무하며 추는 춤이다. 둘의 스캔들이 터지자 이탈리아 검찰은 베를루스코니를 미성년자와의 성매매 혐의로 기소했고, 베를루스코니 자택에 초대받은 다른 여성들과 루비의 전화 녹취록을 증거로 수사 중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성추문이 터질 때마다 자신의 방송사를 통해 변명하는 수법을 주로 써왔다. 가슴의 크기가 뇌의 크기와 같다고 생각하는 베를루스코니는 자신의 방송에 출연한 댄서들을 정계에 입문시켜주겠다는 미끼를 써왔다. 2009년 베를루스코니는 댄서 파트리치아 다다리오와도 성추문을 일으켜 화제가 됐었다. 베를루스코니는 그녀를 유럽의회 의원 후보로 공천할 것을 약속했지만 다다리오는 “베를루스코니가 주기로 한 돈과 정계입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며 홧김에 침실 테이프를 공개한 뒤 유럽의회 의원 후보 자격을 박탈당했다. 앤드 카사노바와 실비오 반디넬리라는 이탈리아 포르노 감독들은 베를루스코니의 미성년 성매매에서 영감을 받은 영화 <붕가붕가 프레지던트>(Bunga Bunga Presidente)를 최근 제작하기도 했다. 막 출시된 이 영화는 베를루스코니의 미성년 성매매 증거 자료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게 언론의 평가다.

[진중권의 아이콘] 존재론에서 유령론으로

‘죽어서 격식을 갖춰 땅속에 묻힌 시체가 어찌하여 수의를 찢고 나타났다는 말이오? 그대를 편안히 모신 무덤이 어찌하여 그 무거운 대리석 입술을 벌려 시체를 뱉어놓았단 말이오? 그래, 그대 시체가 이렇게 다시 어스름한 달빛 아래 나타나서 이 밤을 이렇게 끔찍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이오? 아, 자연의 법칙에 묶여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인간의 지혜로는 풀지 못할 문제를 던지고,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곡절이 무엇이란 말이오? 어서 말해 보시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어떻게 해달라는 말이오?’ 마르크스의 유령들 베를린장벽 붕괴 얼마 뒤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1993)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여기서 ‘유령’은 물론 <공산당선언>의 그 유명한 구절과 관련이 있다.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구(舊)유럽의 부르주아들은 이 유령을 내쫓기 위해 “신성한 동맹”을 맺었다. 이 퇴마의식(exorcism)이 효험이 있었던 걸까? 실제로 공산주의는 몰락하고, 한동안 세계는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자들이 부르는 승전가로 요란했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 들뜬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다. ‘마르크스의 정신은 미래에도 유령처럼 출몰하리라.’ 물론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spectre)은 무덤에서 튀어나온 사령(死靈)이 아닐 거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을 쓸 당시 “공산주의라는 유령”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서 날아온 귀신이었다. 즉 그것은 과거에서 되돌아온(revenant) 존재가 아니라 앞으로 미래에서 도래할(a venir) 존재였다. 아직 실체는 없지만 분명히 현실의 층위 위에 얹혀서 아른거리는 어떤 형상. 존재하지도 않으나 그렇다고 부재한다고 할 수도 없기에 섬뜩하게만(unheimlich) 느껴지는 이 형상이 유럽의 부르주아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오늘날 아직도 누군가 ‘공산주의’를 말한다면, 그 유령의 정체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미래에서 온 형상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데리다가 앞으로도 출몰할 것이라 예견한) ‘마르크스의 유령’일 수 있다. 아니면 과거에서 온 형상인가? 이 경우 그것은 ‘르브낭’ 혹은 ‘좀비’일 가능성이 크다. 물론 과거의 것이라고 모두 배척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유산은 데리다의 말대로 ‘주어진 것’(given)이 아니라 ‘맡겨진 것’(task). 마르크스의 유산 역시 ‘필요한 만큼 급진적으로 변형시킴으로써 다시 확증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이념적 외설일 뿐이다. 데리다는 <햄릿>의 대사 두 군데를 인용한다. 하나는 ‘Time is out of joint’라는 햄릿의 한탄이다. 국역본을 보니 ‘time’을 ‘세상’이라 옮겼다. 관절이 어긋나듯이 세태가 잘못됐다는 얘기다. 동생이 형을 죽이고 형수와 정을 통하는 세상. 햄릿은 한탄한다. ‘아, 저주받은 운명이구나. 내가 그것을 바로잡으려 태어났다니.’ 하지만 그 문장을 글자 그대로 옮길 수도 있을 거다. 이 경우 그 말은 시간이 뒤엎어지는 시간착오(anachronie)를 가리킬 것이다. 가령 과거에 속하는 선왕이 현재에 나타나는 것은 시간의 관절이 어긋난 현상이 아닌가. 또 다른 인용은 ‘To be, or not to be’라는 햄릿의 고뇌다. 굳이 ‘사느냐, 죽느냐’라는 번역의 올바름에 관한 논쟁에 끼어들 필요는 없다. 데리다는 이 문장을 무엇보다도 ‘존재해야 할 것이 존재해야 하느냐’, 혹은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느냐’라는 뜻으로 읽는다. 세태는 어긋났다(out of joint). 나는 그것을 바로잡으려 태어난 운명.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해야 할 그 일을 저지르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존재해야 할 그것’, ‘일어나야 할 그것’, ‘해야 할 그 일’이 아직 현존하지(present) 않는다는 사실이다. <햄릿>의 두 인용은 각각 ‘존재’와 ‘시간’에 관련되어 있고, 이 둘은 다시 하이데거의 유명한 저작(<존재와 시간>)을 연상시킨다. 하이데거의 것을 포함하여 기존의 존재론은 모두 현재, 현존, 현전(presence)의 형이상학이었다. 유령은 다르다. 그것은 부재하면서 존재하고, 죽었으면서 살아 있다. 그것은 데리다가 말하는 ‘차연’이나 ‘흔적’의 시각적 형상에 가깝다. 데리다의 의도는 전통적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존재’를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유령’으로 바꿔놓는 것, 한마디로 존재론(ontologie)을 유령론(hantologie)로 대체하는 것이다. 엑소시스트 마르크스? 유령을 쫓아내려 한 것은 부르주아들만이 아니었다. 구유럽의 부르주아들이 열심히 공산주의 유령을 쫓아버리는 퇴마의식을 거행하는 동안 마르크스 자신도 실은 유령과 싸움을 하고 있었다. 바로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유령이다. 그의 눈에는 자본주의적 현실 자체가 유령으로 비쳤던 모양이다. 하긴 사용가치보다 교환가치를 추구하고, 화폐가 노동의 구체성을 지워버리고, 인간이 아니라 자본의 자기증식을 위해 생산이 행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성야말로 부재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타나는 환영, 즉 유령이 아닌가. 물론 자본주의의 가상성에 대한 그의 과학적 비판을, 우익들의 반공주의 퇴마술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상’에 대한 그의 비판은 여전히 존재론(ontologie)의 한계에 갇혀 있다. 데리다도 슬쩍 언급하듯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마르크스 시대와는 생산과 기술의 조건이 전혀 다르다. 가상이 실재를 대신하고(시뮬라크르), 복제와 원본의 구별이 흐려지고(유전공학), 부재하면서 존재하는 것(텔레마틱)은 이미 물리법칙만큼이나 견고한 현실이다.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 이미 ‘가상은 실재만큼 견고하고, 실재는 가상만큼 유령스럽다’. ‘시간’의 측면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시간은 관절이 어긋났다(out of joint) 클릭 한번에 과거는 현재로 나타난다. 컴퓨터그래픽은 미래를 현재로 가져온다. 현재 위에는 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유령이 배회한다. 이 기술적 조건의 효과는 대중문화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가령 ‘포스트모던’의 상징으로 통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속의 현실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지럽게 뒤섞인다. 메탈과 펑크와 고딕의 미학이 뒤섞인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이 종종 ‘유령론’(hantologie)이라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새 인터내셔널’이라는 데리다의 정치적 대안 역시 그의 철학적 기획 못지않게 급진적이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란, “마르크스 혹은 마르크스주의의 정신 중 적어도 한 가지 요소에 공감하는 이들 사이의 동맹”, 즉 “위상도, 좌표도, 당도, 나라도, 민족공동체도, 시민권, 특정 계급에 함께 속하는 일도 없는 비시간적 연결이다”. 비록 정당이나 노동자 인터내셔널과 같은 제도적 형태를 취하지는 않지만, 이 동맹은 국제법의 상태, 국가와 민족의 개념 등을 비판하는 일에 연대하면서 마르크스의 비판을 새로이 하고, 급진화할 것이다. 계급에 속하지도, 정당의 형태를 취하지도 않는 이 동맹이 어떤 이들에게는 ‘유령’으로 보일지 모르겠다(가령 촛불 시민들을 바라보는 전통 좌파의 시각을 생각해보라. 흥미롭게도 우익들 역시 이 시각을 공유한다). 그 동맹은 부재하나, 동시에 현재한다. 실제로 그것은 유령스럽다(spectral). 데리다 역시 그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이 유령 앞에서 퇴마의식을 벌이려는 이에게는 햄릿의 말을 들려주는 게 어떨까? “이 귀신을 귀한 손님으로 취급해서 환영해주세. 이 사람아, 세상에는 우리의 철학으로는 상상도 못할 일이 허다하게 있다네.”

[장 프랑수아 로제] 모든 영화는 관객을 만날 권리가 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 장 프랑수아 로제. 필름포럼의 임재철 대표는 “한국에서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많은 편은 아닐 것”이라며 아직은 국내에서의 그의 생소함을 시사해주었다.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는 언젠가 어느 글에서 로제가 프로그램 디렉터가 된 직후 첫 번째 연 것이 마리오 바바 회고전이었다며 그의 성향을 언뜻 일러주었다. 시네마테크 부산 허문영 원장은 “프랑스 시네필 특유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인물”이라며 영화인으로서 그의 인상을 전해주었다. 이런 말들 속에서 그가 좀더 궁금해졌다. 시네마테크와 영화에 관한 그의 생각이 듣고 싶었다.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계기로 방한한 장 프랑수아 로제를 만났다. -70년대 클로드 샤브롤 영화의 프린트 복원 계획. 그 과정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60년대 말부터 70년대의 작품들은 샤브롤의 가장 예술적 전성기의 작품들이어서 공을 들이고 있는데, 역시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있다. 판권자들의 동의를 얻느라 그렇다. 하지만 이 경우는 잘하면 올해나 내년 초까지 마무리하여 샤브롤 회고전을 열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다. 샤브롤의 이 시기 작품들은 사실 그의 생전에도 이미 판권문제 때문에 회사끼리 논쟁이 있었다. 그런데 샤브롤의 타계가 계기가 되어 이 문제가 오히려 잘 풀리고 있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일이 좀더 수월해진 것이다. 다만, 샤브롤… 그가 회고전에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울 뿐이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프로그램 디렉터는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하게 됐나. =일을 시작한 건 1992년부터다. 원래는 법학이 전공이다. 그걸 끝내고 나서 프랑스 국립영화센터(CNC)에 들어가서 주로 경제, 산업, 판권에 관련된 일을 했다. 그 당시에 도미니크 파이니(프랑스의 저명한 영화평론가이자 이론가. 예술영화 배급 및 상영도 했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관장, 퐁피두 문화센터 전시관장 등을 역임했다)를 만나게 됐고 친구가 됐다. 그가 91년부터 시네마테크 관장으로 일하면서 내게도 같이하자고 제안을 한 거다. 디렉터가 되기 전 6개월 동안은 시네마테크의 전체 목록과 소장품을 조사 관리하는 일을 맡았고 그 다음 프로그래밍을 하게 됐다. -대단한 시네필이라고 들었다. 본격적으로 시네마테크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 =시네필로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일하는 것은 꿈을 실현하는 일과 같다. 나는 원래 지방에서 공부했고 84년에야 파리에 왔다. 그 뒤 한 6년 동안은 거의 매일 밤 시네마테크에서 영화를 보았다. 내가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니던 그 당시에는 내가 이곳의 프로그래머가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결국 꿈이 실현된 것이다. 다양하고 폭넓은 영화를 발견하고 보여주는 일을 하게 되어 기쁘다. -관객으로서 영화를 열심히 보러 다니던 그때에 막연하게나마 내가 혹시 프로그래머가 되면 이 사람의 영화만큼은 특별전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나. =개인적으로 적어도 이 사람의 모든 전작을 다 보고 싶다고 생각한 감독은 있었다. 존 포드다. 그런데 이미 존 포드의 가능한 전작의 회고전이 1989년에 있었다. 그 당시의 프로그래머였던 베르나르 마티노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고 그때는 마치 내 꿈이 실현된 것처럼 기뻐 열심히 보러 다녔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시네마테크의 회고전은 시간을 두고 여러 번 반복해서 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에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알프레드 히치콕 회고전을 열고 있다. 물론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똑같은 시네아스트의 회고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20년 뒤에 열리는 것이라면 우린 또 다른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 매번 새로운 시네필 문화가 조성되고 조명될 수 있다. 회고전이라는 것은 관객의 수용에서 이해하는 방식의 변화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며, 영화의 역사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점과 관련해 한 가지 질문이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요즈음 프랑스 관객의 새로운 경향 혹은 새로운 시네필의 경향과 변화는 어떤 것인가. =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긴 하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지금까지 단 한 종류의 시네필만 존재한 것이 아니다. 여러 가지 다양한 감수성들이 존재해왔다. 1950년대에는 <카이에 뒤 시네마>가 많은 영향력을 미쳤으나 곧 <포지티프>가 등장했고 <카이에 뒤 시네마>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포지티프>를 읽으며 감성적인 경향을 이어갔다. 2차대전 이후 그리고 누벨바그 이후에 달라진 것 중에서 미국영화의 선호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무렵부터 공산주의적 영향도 많았기 때문에 미국영화의 선호조차도 물줄기 중 하나에 해당한다. 다수의 영향들은 여전히 존재해왔고 68혁명 이후에는 훨씬 더 다양한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래서 68년 이후에는 전통적 의미의 시네필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게다가 오늘날에는 더더욱 찢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최근 들어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보아야 할 작품의 숫자나 종류가 많아졌기 때문에 모든 영화를 공통으로 다 볼 수가 없게 됐다. 그 많은 가능성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생겼고 나머지는 버려야 하게 된 것이다. 과거에 비해 공유하는 일정한 경향이 사라지게 된 거다. -만약 상황이 그렇다면 시네마테크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당신의 입장에서 어떤 영화들을 프로그래밍할 것인가의 선택의 문제는 점점 더 중요해진다. 어떤 점들을 주로 고려하는가. =지적한 그대로다. 프로그래머로서의 역할은 선택이다. 나의 역할은 어디선가 숨겨져 있는 영화들을 찾아서 보여주는 것인데, 이런 선택은 늘 논쟁의 여지가 있는 것이고, 모든 관객이나 비평가가 다 공감할 순 없다. 어떤 경우에는 왜 이 사람인가, 왜 이 작품인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책임을 지는 것이 나의 할 일이다. 나는 프로그래머를 갤러리의 큐레이터로 비교하곤 한다. 한 예술 작품의 상징적 경제적 가치를 찾아내고 높이는 것이 갤러리의 역할이라면 시네마테크도 어떤 영화가 지닌 가치를 찾아내 검증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중에는 히치콕처럼 기존 거장의 영화도 있겠지만 알려지지 않은 이들의 영화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엔 논쟁의 여지가 더 많다. -동료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것만은 한번 해보자, 하며 밀여붙인 경우가 있는가. =아주 최근 들어 그런 경험이 있다. 제스 프랑코(평생 수십개의 가명으로 저예산 B급 호러와 소프트코어 장르를 만들어온 스페인의 영화감독)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이렇게 마이너한 사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있느냐고 반대했지만 내가 밀어붙였다. 이런 경우에도 역시 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시네아스트는 저예산으로 에로틱영화 전문 상영관에서나 상영할 법한 영화로 60, 70년대에 주로 활동했고 200편 정도의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워낙 저예산으로 찍다보니 오히려 강박적인 성격이 강해졌고 마치 프랑스의 아방가르드를 연상시키는 면모가 있다. -이번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의 경우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지원한 영화들은 어떤 선택에 의한 것이었나. =‘시네마테크의 역사와 관련된 영화와 시네아스트’라는 주제를 서울아트시네마로부터 전달받았다. 그걸 염두에 두고 선정했다. 내가 이번에 시네토크를 하는 영화들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필립 가렐의 <내부의 상처>는 90년대에 도미니크 파이니가 관장으로 오면서 복원해낸 것이고, 장 마리 스트라우브-다니엘 위예의 <로트링겐>은 다니엘 위예의 사후에 스트라우브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기증한 것이다. -당신이 보기에는 프랑스의 젊은 감독 중 누가 밝은 미래를 갖고 있는가. 개인적인 선호도가 듣고 싶다. =젊은 감독 중에는 단연 알랭 기로디(<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 <때가 되었다> <도주왕> 등을 연출했다)! 독창적이고 기발하다. 그의 영화는 다른 영화들과 흡사한 면이 거의 없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적도 없고 소수에게만 관심을 받지만 나로서는 주목하는 감독이다. -한국의 동세대 감독 중 ‘만약 이 감독이라면 나중에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회고전을 마련해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감독이 있나. =지금 한국영화를 이끌어가는 감독들은 90년대 이후에 나온 감독들인데 그중에서는 홍상수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다. 홍상수 감독의 경우는 <하하하>의 프랑스 개봉에 맞추어서 올해 3월에 전작 회고전을 여는 것으로 이미 기획되어 있다. 봉준호 감독의 경우는 아직 편수가 많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들보다 더 젊은 감독을 꼽자면 나홍진과 양익준이 있을 것이다. 아직 한두편을 만든 감독들이지만 매우 큰 잠재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시네필인 당신의 경험을 빌려서 한국의 젊은 시네필에게 한마디 조언한다면. =영화의 마케팅이 활성화되면서 우린 영화를 이렇게 저렇게 범주화하고 구분하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시네필이라면 모든 영화에 전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모든 영화를 다 좋아할 수는 없지만 모든 영화에 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저런 영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하나가 있는 것이다. 이건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창립자 앙리 랑글루아의 생각과도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다. 그의 이념은 ‘영화’라는 하나의 표현방식이 있는 것이며 모든 영화가 다 관객을 만날 권리가 있다는 것이고 그 공간이 시네마테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모든 영화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나의 원칙도 모든 영화들에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엘비스 코스텔로] She? 팝의 모든 게 나의 무대

끊임없이 자신을 재발명(혹은 재발견)한 전설적인 뮤지션이 내한 공연을 한다. 지금 환호성을 지르고 계실 마돈나 팬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주인공은 엘비스 코스텔로다. <노팅힐>의 감상적인 주제곡 를 부른 그 뿔테안경의 중년 남자? 맞다. 하지만 는 코스텔로라는 천재를 대표하기는 한참 무리인 노래다. 그는 지난 1977년 영국에서 펑크록 음반 ≪My Aim Is True≫로 데뷔한 뒤 지난 30여년간 쉬지 않고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은 뮤지션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2월27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의 첫 번째 내한 공연에서 대체 코스텔로는 어떻게 30여년간의 음악을 정리해서 보여줄 것인가. 내한 공연 직전 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는 코스텔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국에 오기까지 왜 이렇게 시간이 걸린 건가. =글쎄. 초청을 이제야 처음으로 받아서? (웃음) -당신이 공연하게 될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은 런던의 앨버트홀처럼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공간이다. =아! 처음 들었다. (웃음) 근데 그곳도 앨버트홀처럼 사운드가 훌륭한 공간인가? -음향시스템이 아주 좋다고 들었다. =다행이다. 이번 공연은 밴드 없이 나 홀로 이끌어가는 솔로 콘서트다. 내 목소리와 기타 외에는 다른 악기가 없다. 그래서 오히려 더 다이내믹한 어레인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한 가지 악기만 다루는 게 단조롭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그게 더 버라이어티할 수도 있다. 어쿠스틱 기타와 일렉트릭 기타를 모두 사용할 거다. 물론 <노팅힐>의 삽입곡인 도 부를거다. (웃음) 한국의 대중이 오로지 의 주인공으로만 나를 인식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런데 홀로 무대에 서는 이런 식의 솔로 공연을 선택한 이유는 뭔가. =이건 한국에서의 첫 공연이다. 나를 소개하는 무대다. 밴드와 함께한다면 오히려 내 음악을 버라이어티하게 보여줄 수 없다. 물론 운이 좋아 다음에 또 한국에서 공연하게 된다면 오케스트라와 함께한다거나, 다른 방식의 공연도 해보고 싶다. 지난 32년간 만들어온 음악을 한번에 다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당신은 종종 ‘팝 사전’(Pop Encyclopedia)이라 불릴 만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음악 장르를 다 섭렵하며 변신해왔다. 77년 데뷔했을 때는 성난 펑크 록 뮤지션이었고, 80년대에는 뉴웨이브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후에는 재즈, 클래식, 알앤비, 솔, 컨트리 등 모든 장르를 거쳤다. 대체 어떻게 스스로를 재발명해올 수 있었던 건가. =글쎄, 흠, 내가 스스로를 재발명해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직관을 따라 흘러왔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폴 매카트니처럼 젊은 날의 우상과 함께 곡을 쓰는 엄청난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껏 나는 300여곡의 노래를 만들어왔다. 텔레비전 삽입곡과 발레 삽입곡도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을 정상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로 해냈다. 음악 학교 따윈 가진 않았다. 그저 새로운 모험이 매 순간 나에게 다가왔다. 그 덕분에 내가 어떤 일정한 경향에 발목을 잡히지 않고 지금껏 잘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많은 영화에 곡을 빌려주거나, 종종 당신 자신으로 출연해왔다. 직접 영화를 제작하거나 당신이 아닌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은 생각은 없나. <스파이스 월드>의 카메오 역할 같은 건 잠시 잊어버리자. =<스파이스 월드>. 그 영화 아주 재미있었는데. (웃음) 영화는 부업일 뿐이다. 직업에 따라오는 일종의 부상이라고 할까. 정말로 영화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게다가 요즘처럼… 납득할 만한 이유없이 폭력이 가득한 영화적 경향을 싫어하는 편이기도 하고. 대신 내 노래를 이용하고 싶어 하는 영화인들과 일하는 건 좋다. 그럴 때마다 내 음악을 어떤 방식으로 영화에 공헌하도록 만들 것인가를 고민한다. 단, 영화에 사용되는 내 음악은 어디까지나 보조도구여야만 한다. 음악이 드라마를 영화로부터 뺏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건 말이 안된다. -지난주에 그래미 시상식을 봤다. 믹 재거가 공연하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당신 역시 50대 후반 아닌가. 육체적인 힘을 어떻게 유지하며 음악을 만들고 공연하나. =믹 재거는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잖아! (웃음) 나도 그래미 시상식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재거의 공연은 정말로 초현실적으로 멋졌다. 그 무대에는 믹 재거 외 어떤 것도 없었다. 그저 진실한 에너지뿐이었다. 나에게는 3살 된 쌍둥이 형제가 있는데, 나 역시 여전히 건강하다. 매일매일 지금 같은 에너지를 갖고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에 감사하며 산다. 요즘 나에게 중요한 건 퍼포먼스다.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는 일도 재미있지만 역시 퍼포먼스를 하는 게 젤 중요하다.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내 음악을 어떤 식으로 쇼에 올릴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 하나의 노래가 하나의 얼굴만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나라마다 특별히 인기있는 노래가 있는 것도 재미있다. 한국에서는 가 인기있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가 인기있다. 둘 다 로맨틱한 노래지만 후자는 네덜란드답게 아주 어두운 부분이 있는 곡이다. (웃음)

[오마이이슈] 그래도 일본 정부를 믿는다

아이가 먹고 싶어 하던 버터를 듬뿍 발라 새우를 구워줬다. 놀이터에서 괴물놀이를 지칠 때까지 했다. 방치돼 있던 베란다 화분에 물을 주고, 이웃을 불러 밥을 차렸다. 몇몇 지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햇볕에 이불을 널고, 박완서 소설을 읽고, 주민센터 요가에 늦지 않게 갔다. 소소한 일상이 눈물나도록 고마웠다. 그들에게도 그날이 이런 여러 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천재와 인재 중 하나를 고르라면 차라리 인재를 택하고픈 기분이었다. 최소한 맥락을 설명할 수는 있으니까. 숨죽인 채 텔레비전 뉴스 화면을 봤다. 그런 생각도 잠시, 원전 폭발과 방사능 유출 위험을 접하자 이런 구분이 무의미했다. 특집뉴스 끝머리에는 아랍에미리트 원전 기공식에 참석해 “한국 원전이 최고”라고 자랑한 대통령의 모습이 나왔다. 방사선 폭증 위기가 48시간이 고비라는 진단이 나온 날 대통령은 “한국 원전은 일본보다 뒤에 지은 거라 안전하다”고 말했다. 민망했다. “완전히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됐던 위험도 실제로는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며 원전 가동시한 연장 결정을 연기한 독일 총리 모습과 대비됐기 때문만은 아니다. 세상에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위험은 없다. 위기 대응 매뉴얼이 강박적이란 소릴 들을 만큼 꼼꼼하고 잘 훈련돼 있는 일본도 대재앙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우리 원전은 진작부터 부실 시공이 확인돼 왔다. 민영 도쿄 전력의 무능과 일본 정부의 소극적 정보공개 및 대처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지만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일본 정부를 믿는다. 방사능 위험으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피하는 와중에도 반대 차로로는 단 한대의 차량도 튀어나오지 않는 기이할 정도로 고집스러운 질서의식에 기가 막히면서도, 각국에서 온 구호의 손길을 안내하고 협조할 여력이 안된다며 일부 되돌려보낼 만큼 체계를 중시하는 대처 방식을 답답해하면서도, 지금으로선 일본의 재난 대응 시스템과 이를 지휘하는 일본 정부를 믿고 응원할 수밖에 없다. 화면에 비친 일본 도호쿠 지역 해안 마을은 진작에도 화려하지 않았다. 높은 아파트도 허황된 조형물도 없었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수수해도 그 무엇보다 값진 생업이요 터전이었을 것이다. 전화기 든 손을 덜덜 떨던 그녀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을까. 마음 깊이 기도한다. 부디 더이상의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