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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장편애니메이션 <오세암> 미리 보기 [2]

길손이의 아이다움과 더불어, 엄마를 그리며 서로를 다독이는 남매의 우애는 담백한 이야기에 애틋한 체온을 불어넣는다. 석탑 위에 기어올라 새들에게 우렁차게 인사하던 길손이가 노래를 청하는 노스님의 말에 <섬집 아기>를 부를 때, 절 마루에 앉은 감이의 플래시백으로 슬그머니 전환하는 프레임. 아직 아기인 길손이를 업은 감이와 엄마의 정다운 한때에 대한 회상은 물론, 절에서 누나를 괴롭히는 마을 아이들에 맞서다가 되레 그 애들의 엄마에게 꾸중을 듣고 설움에 목이 메는 길손이, 제 무릎을 베고 잠든 동생을 쓰다듬으며 자란 모습을 볼 수 없어 몰래 눈물짓는 감이 등 ‘엄마 없는 하늘 아래’ 살아가는 남매의 외로운 속내는 짐작을 벗어나지 않는데도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있다. 한겨울 폭설로 관음암에 고립된 5살 동자가 부처가 됐다는 불교 설화를 토대로 한 원작이 좀더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다면, 가족용을 표방한 애니메이션은 “아이의 순수”에 초점을 맞췄다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본다는 부처님처럼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 엄마를 보고 육신의 눈이 닫힌 누나에게 바깥 세상을 더 잘 알려주겠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관음암에 올랐던 길손이는, 원작처럼 불교적인 해탈이라기보다는 엄마를 간절히 그리는 아이의 마음이 승화된 의미로서의 기적을 맞이한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되, ‘엄마’라는 아련한 그리움이 환기하는 잃어버린 동심 혹은 소박한 행복으로 잠시나마 메마른 가슴들을 적시고 싶다는 게 제작진의 바람이기 때문. 사실적인 묘사의 힘 느릿하고 아기자기한 극의 전개가 좀 밋밋하다 싶을 때도,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의 힘은 만만치 않다. 설악산과 강원도 사찰 등을 몇 차례 답사하고 카메라에 담아가며 그림으로 옮겨낸 가을숲과 눈덮인 산길, 처마의 곡선과 풍경, 비바람과 세월에 적당히 바랜 듯한 단청의 색감이나 사진으로 찍어 일일이 덧칠한 불상과 탱화까지 세심하게 살려낸 자연과 산사의 수려한 이미지에는 토속적인 정감이 어려 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장면이나 개울물 등 일부 배경에 입체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3D를 사용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원화와 동화까지의 수작업을 거친 뒤 채색부터 컴퓨터를 사용한 2D디지털의 푸근한 질감이 살아 있다. <백구>나 <마리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오세암>의 인물 역시 일본이나 미국과 다른 한국적인 캐릭터에 대한 시도의 일환. 살짝 꼬리가 올라간 눈에 실제 또래들의 체형 비례를 고려해가며 그렸다는 길손이, 쪼그려 앉거나 뛰어다니는 모습 하나하나 감독의 5살배기 딸을 참조했다는 동작의 자연스러움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친근한 캐릭터를 고민한 산물이다. <백구>의 토종 진돗개에 이어 털에 눈이 파묻히다시피한 토종 삽살개를 모델로 한 바람이까지, 구석구석 우리 고유의 것을 애니메이션에 담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다. 기획에 들어간 것은 2000년 7월이지만, 시나리오 각색과 콘티를 끝낸 뒤 실제작에 소요된 기간은 약 1년 반. <오세암>은 개봉예정이거나 제작 중인 국산장편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적은 15억원 순제작비로, 비교적 짧은 기간에 완성됐다. <아기 공룡 둘리> 이후 국산 장편애니메이션의 대중적 성공 사례가 없는 현실, 협소한 국내 애니메이션 시장의 여건을 고려한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규모가 적다’는 이유로 투자자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다고. 하지만 해외 OEM 작업을 기반으로 쌓아온 제작노하우와 한국적인 가족용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창작의도가 맞물린 <오세암>은 소박하지만 훈훈한 동화와 안정된 만듦새로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같은 날 개봉예정인 <모노노케 히메>와의 경쟁은 적잖은 부담이 되겠지만, “마음을 다해 바라면 만날 수 있다”는 <오세암>의 동심이 내건 주문이 관객에게도 전해지길 기대하고 싶다. 황혜림 blauex@hanmail.net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장편애니메이션 <오세암> 미리 보기 [1]

“엄마 얼굴이 생각 안나…”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참으로 오래된 기억의 주크 박스 한켠에, 어린 날 한두번쯤 되뇌어봤음직한 동요 <섬집 아기>도 아마 들어 있을 것이다. 엄마를 기다리며 홀로 잠든 아이의 풍경화가, 어린 맘에도 어쩐지 서글픈 정감과 막연한 그리움의 여운을 남기던 노래. <오세암>은 극중에 삽입된 이 노래처럼,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린 지금에서 돌이켜보면 멋쩍을 만큼 투명한 동심의 기억을 부르는 애니메이션이다. 해맑은 순수 운운하는 건 어른들의 공연한 향수라고, 인터넷 시대의 영악한(?) 아이들에게 동심이 웬말이냐고 툴툴거린다고 해도, 이미 성장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이로서는 결코 다 기억해낼 수 없는 유년의 소우주에만 존재하는 비밀.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래서 간절히 원하면 엄마를 만나리라는 믿음을 지키는 5살배기 소년 길손이, 그런 동생을 안타깝게 보듬어주는 눈먼 소녀 감이의 여정은, 그 비밀에 가까운 눈높이에서 두 남매의 소망과 성장기의 한 토막을 들려준다. 알려져 있다시피 <오세암>의 원작은 동화작가 고 정채봉 선생의 동명소설. 1985년 초판된 이래 10만부 이상이 팔린 스테디셀러로, 1990년 박철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바 있다. <오세암>은 2000년 10월부터 약 석달간 인기리에 방영됐던 TV애니메이션 시리즈 <하얀마음 백구>(이하 <백구>)의 제작진이 고른 두 번째 프로젝트.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나면 이합집산하기 쉬운 국내 제작환경에서 보기 드물게 이정호 PD, 성백엽 총감독 등 <백구>를 거친 팀은 마고21이란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만들었고, 첫 장편애니메이션 <오세암>을 기획했다. 부모를 잃고도 꿋꿋이 살아가는 오누이와 진돗개의 우정을 담은 <백구>의 알찬 성공이, ‘한국적인 가족용 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남겨준 덕분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즐길 수 있는 훈훈한 이야기, 우리 고유의 정서와 인물과 풍경을 담은 작품을 고민하겠다는 야심찬 출사표 아래 보낸 약 2년 반의 시간. 4월25일로 다가온 개봉을 앞두고 마지막까지 리테이크와 사운드 작업에 한창인 <오세암>을, 강남의 한 녹음실에서 미리 들여다봤다. 잊혀진 정서, 푸근한 감성 여정의 시작은, 길손이의 표현대로라면 “하늘처럼 생긴 물인데, 꼭 보리밭같이 움직”인다는 바닷가. “바람을 타고 엄마 있는 데까지 갈 수 있을” 날개를 가진 갈매기를 부러워하며 뛰놀던 소년은 앞 못 보는 누나의 손을 끌고 모래사장에 작은 발자국을 찍으며 마을로 향한다. 빨갛게 물든 단풍 너머로 보이는 산봉우리, 구불구불한 흙길 양옆으로 펼쳐진 누런 논밭, 그리고 감나무의 홍시를 따거나 말뚝박기를 하는 아이들과 광주리를 이고 지나가는 아낙네들. 짚더미가 실린 소달구지를 얻어 탄 남매와 함께 펼쳐지는 늦가을 농촌의 정경은, 고운 색조와 꼼꼼한 필치로 그려낸 한폭의 담채화 같다. 70년대 복고풍이지만, 우리 고유의 산수를 닮아 사실적이면서도 정겨운 운치를 지닌 공간. 개울가에서 삶은 감자를 사이좋게 나눠 먹고, 후두둑 떨어지는 단풍 세례에 가을을 느끼는 두 아이의 티없는 웃음까지, <오세암>은 현대 도시의 삶에서 잊혀진 정서와 풍광으로 문을 연다. 그렇게 세상에 없는 엄마를 찾아나선 길손이와 감이는 우연히 마주친 삽살개와 친구가 되고, 설정 스님 일행을 만나 절에서 겨울을 나게 된다. 하지만 “스님들은 부처님 흉내만 내”고, “움직이는 건 나하고 바람이(삽살개)밖에 없”는 절간 생활은 어린 길손이에게 따분하기 그지없다. 법회 중인 불당에 성큼 들어가 “아저씨랑 다 똑같아서, 한참 찾았네” 하고 씩 웃으며 설정 스님에게 누룽지를 건네는가 하면, 걸레로 바닥을 훔치지만 씻지 않은 발의 자국만 찍어대는 길손이. 밥값이라도 하려고 초겨울 날씨에 설거지를 거드느라 손이 어는 누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단의 과일을 무너뜨리고 염주를 끊어먹고 스님들의 고무신을 몽땅 나무에 매달아놓는 길손이의 천진난만한 활약은 자칫 단조롭게 느껴지기 쉬운 산사의 일상에 오밀조밀한 웃음을 풀어놓는다. 짤막한 원작을 75분 길이의 장편으로 각색하면서, 아이다운 세계와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보강된 <오세암>은 성장동화의 색채가 짙어졌다. 개울에서 수도 중인 스님의 옷을 노루에게 입히고는 춥지 않을 거라며 뿌듯해하고, 설정 스님을 따라 관음암으로 가는 길에 힘이 부치자 “나 굴러갈래” 하며 대뜸 눈 위로 데굴데굴 굴러버리는 아이. “엄마 얼굴이 생각 안 나… 만날 누나 꿈에만 나타나고, 내 꿈에는 한번도 안 와. (중략) 엄마는 바람 같아. 내 마음만 흔들어놓고 보이지가 않아.” “겨울인데 꽃이 피었어. 저기 돌부처님이 입김으로 키우셨나 보다, 그치? 병아리 가슴털처럼 보송보송 털이 났어.” 원작자 특유의 표현을 상당 부분 살린 대사도, 아이의 세상이 품은 비밀을 들춰 보이듯 독특한 미감을 지니고 있다. 길손이의 목소리를 맡은 MBC 공채 15기 성우 김서영씨의 자연스러운 연기도, 톡톡히 한몫했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영화 <살인의 추억>은?

미궁 빠지는 연쇄살인, 닮아가는 다른 두 형사 살인의 추억? 이상한 제목이다. 추억이라는 건 좋은 기억, 최소한 끔찍하지는 않은 기억을 돌이킬 때 쓰는 말 아닌가. 이 제목은 암암리에 살인의 끔찍함이 잊혀졌음을 전제로 삼는다. <플란다스의 개>에 이은 봉준호 감독의 두번째 장편 <살인의 추억>은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실화극’이다. 1986년부터 1991년까지 10차례 발생한 이 사건의 범인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희생자만 남고, 범죄의 주체도 이유도 모른 채 잊혀가는 사건. 거기에 ‘추억’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을 붙인 제목에서부터, 영화가 연쇄살인극에 더해 시대극이자 사회극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주인공은 사건 발생 당시 화성경찰서 형사인 박두만(송강호)과, 잇따라 사건이 터지자 서울에서 파견돼온 형사 서태윤(김상경). “대한민국 형사는 두 발로 수사한다”는 두만은 과학수사를 할 의지도 능력도 없이 피의자를 두들겨패고 본다. 습관적으로 고문에 의한 자백에 의존하는 두만은, 과연 심증이라도 있는 건지 의심이 가는 구악 경찰이다. “서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태윤은 두만보다는 합리적이다. 두만이 거짓자백 받은 피의자의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언론에 공개까지 했다가 영장이 기각되는 망신을 당한 뒤, 태윤의 입지가 커지고 수사도 보다 과학적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강간 살해되는 여자는 늘어가고, 단서는 전혀 잡히지 않자 태윤도 두만을 닮아가기 시작한다. 부천서 성고문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잇따라 터지던 80년대의 경찰에 대한 묘사가 워낙 사실적이어서 되레 능청맞아 보일 정도지만 그걸 비판하는 건 영화의 목적이 아니다. 실마리를 잡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형사들의 답답함이, 사건의 처참함과 함께 서서히 고조되다가 정점으로 치닫는다. 마침내 범인이 실종된 살인이라는 행위 그 자체가 한 명의 거인이 돼 농촌마을에 거대한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는 그림을 관객의 머리 속에 완성시킨다. 그리곤 시작 때처럼 광활한 보리밭으로 돌아온다. 17년이 지난 그곳엔 잔잔한 바람이 일 뿐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그 보리밭에서 사람이 살인을 추억하는 게 아니라, 살인이 자기 과거를 추억하고 있는 것만 같다. 살인사건 수사의 전개는 잘 만든 연쇄살인 영화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살려 가고, 두 형사의 갈등 구도나 거기서 빚어지는 유머는 형사 버디 영화의 묘미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 시대의 사회상은 물론, 그곳의 공기까지 실어나르는 <살인의 추억>은 올해 나온 한국 영화 가운데 최고의 화제작이 될 것 같다. 임범 기자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들 [4]

내겐 너무 낙천적인 그녀 <키카>(1993)의 키카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명랑한 키카는 방송사에서 만난 미국 소설가 니콜라스를 통해 그의 의붓아들 라몽과 사귄다. 관음증과 기면 발작증이 있는 사진작가 라몽은 어머니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니콜라스와도 관계를 지속하던 키카는 어느 날 감옥에서 탈출한 색광 파블로에게 추행당한다. 라몽의 옛 애인이자 선정적 뉴스쇼의 VJ인 안드레아는 키카의 강간장면을 포착함과 동시에 다른 범죄의 냄새를 맡는다. <키카>를 보지 않은 사람들도 장 폴 고티에의 기상천외한 가죽옷을 입고 카메라를 머리에 매단 빅토리아 아브릴은 기억한다. 하지만 아브릴의 극중 이름은 안드레아다. 영화의 타이틀 롤 키카는 베로니카 포르케가 연기하는 흔한 외모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다. 그러나 평범한 그녀는 만인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자극하는 저주라도 받은 것 같다. 정사장면을 찍는 사진작가 라몽, 아들 애인과 밀회하는 소설가 니콜라스, 키카를 속이고 니콜라스와 밀회하는 친구 암파로, 강간범 파블로, 강간장면을 찍어 방송한 안드레아까지 키카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착취한다. 키카의 주된 장점은 도넛처럼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천재지변이 나도 여자의 최고 무기라 믿는 마스카라를 빼먹지 않는 그녀는, 다정다감하고 수다스럽고 놀라울 만큼 단순하고 섹시하며 기가 막히게 낙천적이다. 악명 높은 강간장면은 대표적 예증. 색정광 탈주범이 몇 시간이고 그녀의 몸에 매달려 있는 동안 키카는 연신 대화를 시도한다. “영화하고 현실이 같아요? 현실에선 코도 풀고 화장실도 가고 싶다구요. 예의도 없어요? 콘돔은 써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내가 도와줄게요. 자유주의자라서 도움이 될 거예요.” 희화화도 이쯤 되면 키카가 초인처럼 보이기 시작하고 남성 관객은 불편해진다. 이건 강간 따위가 사람을 절대 다치게 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판타지다. 마지막 시퀀스에서 키카는 잘생긴 히치하이커를 태운다. “여태 당신처럼 의지할 남자를 찾았어요”라고 반색하며. 하지만 관객은 안다. 결국 이 남자도 키카에게 의지하게 되리라는 걸. 어머니, 그 궁극의 여성성에 바친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의 마누엘라 소중한 아들이 16살 생일날 교통사고로 죽은 뒤 깊은 슬픔에 잠긴 마누엘라는 아들이 늘 알고 싶어했던 생부 롤라와 만난 바르셀로나로 돌아간다. 트랜스섹슈얼인 옛 친구 아그라도, 롤라의 아이를 임신하고 AIDS에 걸린 수녀, 아들에게 죽음의 동기를 제공한 배우 우마 로소가 마누엘라의 새로운 생활에 얽혀들면서 그녀는 또 다른 생의 의지를 얻는다. 어느 감독보다 많은 트랜스섹슈얼과 여장남자를 영화마다 끌어들이지만, 알모도바르는 게이의 삶을 프로모션한다기보다 지고한 여성성을 영원히 동경하는 것처럼 보인다. 격렬하기로 이름난 알모도바르의 섹스신은 대부분 이성애자들의 침대에서 벌어진다. 알모도바르의 걸작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마누엘라는 여성성에 대한 알모도바르의 매혹이 결정된 인물이다. 그녀가 알모도바르 전작의 흑장미 같은 여인들 옆에 서 있다면 아마 우리는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 착하고 슬기로운 아들을 가슴에 묻은 마누엘라의 이목구비는 모난 데 없이 잔잔히 일렁인다. 이마에 내려앉은 부드러운 주름은 장기기증을 담당하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내 살처럼 익숙해진 고통과 슬픔을 여미고 있으나, 아들의 상실은 그녀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그늘을 다시 음각했다. 젊은 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연기한 스텔라의 대사를 지금도 생생히 암기하는 마누엘라는 이 세상의 모든 스탠리와 블랑쉬들을 거두고 위무하고 그 틈에서 아기를 키우는 사람이다. 마누엘라의 아들은 <이브의 모든 것>을 <벌거벗은 이브>라고 번역한 TV를 보며 불만스러워하지만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벌거벗은 어머니’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어머니 마누엘라는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사랑은 아들의 죽음을 막지는 못한다. 친구들을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만 병마와 과오의 독을 씻어내지 못한다. 사랑은 강하지만 신의 어긋난 사랑을 이길 순 없다. 알모도바르는 그처럼 무기력한 모성의 결정체 마누엘라에게 한없이 정다운 러브레터를 보낸다. 무작정 기다렸던 남자 <그녀에게>(2002)의 베니그노 간호사 베니그노는 멀리서 지켜보던 알리샤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자 매일 그녀에게 말을 걸며 행복하게 곁을 지킨다. 글을 쓰는 남자 마르코는 실연 뒤 새로운 사랑을 가꾼 투우사 리디아가 소에 받혀 코마에 빠지자 소통의 단절을 못 견뎌한다. 멀리 여행을 떠났던 마르코는 리디아의 부음과 베니그노가 강간죄로 교도소에 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에게>의 제목은 여성을 앞세우고 있지만 ‘그녀’에 붙은 조사는 여격(與格)이다. 그래서 영화의 주체는 두 남자다. 정적이고 말많은 베니그노와 말없고 동적인 마르코가, 따로 또 같이 남기는 진한 인상에 비하면 남자들이 사랑하는 리디아와 알리샤의 존재감은 희박하다. 그렇지만 베니그노는 여성의 영혼을 가진 남자다(<그녀에게>의 무용가는 전쟁터에서 남자들이 죽으면 여자 무용수들이 그들의 육신에서 빠져나온 영혼을 연기하는 공연을 묘사한다). 철들고 내내 어머니 수발만 들며 살아온 그는, 짝사랑하던 알리샤가 식물인간이 되자 그녀의 침대 곁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4년을 보낸다. 베니그노의 마시멜로 같은 얼굴과 봉제인형 같은 몸매, 캐러멜처럼 느긋한 목소리는 그가 가진 정신성의 일부다. 무작정 기다리고 간호하는 남자는 영화사상 악의 세력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는 여걸보다 드물었다. 도입부의 피나 바우쉬의 공연에서 몽유병 환자처럼 눈을 감고 맨발로 방 안을 헤매는 여인을 끝없이 따르며 그녀가 걸려 넘어질 가구를 치우는 고단한 사내는 바로 베니그노의 숙명이다.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알모도바르의 상상을 따라 과거로 돌아가보자. 베니그노의 어머니는 마흔살이 됐을 때, 남편이 자기를 떠났고 미모가 시들기 시작했음을 발견했다. 그녀는 침대 속에 은둔했다. 못생겼다고 정을 주지 않았던 아들 베니그노가 어머니의 생명을 부지한다. 엄마가 추해지는 걸 원치 않았던 베니그노는 간호학에다 미용술까지 배워 엄마를 씻기고 꾸몄다. 인생을 가지고 달리 하고픈 일은 없었다. 20년 뒤 그의 어머니는 문득 물었다. “엄마가 죽으면 뭐할래?” 베니그노는 깜짝 놀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자살할 거예요.”어머니는 동의하지 않았고 끔찍한 세상이지만 그를 매료하는 것이 있을 거라고 충고했다. 착한 아들은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거기에 알리샤가 바람에 날리는 꽃잎처럼 춤추고 있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그/녀들 [3]

개같은 이별, 그리고 다시 관계가 시작되다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1988)의 페파 배우 페파는 분명한 결별선언 없이 통화를 피하며 여행짐을 싸달라는 애인 이반 때문에 미칠 지경이다. 오래 전 정신병을 앓고 이반과 헤어진 전처 루치아는 이반의 여행 동행이 페파라고 믿고 다그친다. 친구 칸델라는 테러리스트와 연애를 했다며 페파의 집에 숨어들고 페파의 아파트를 보러온 커플은 이반의 아들과 약혼녀다. 게다가 칸뗄라를 돕기 위해 찾아간 변호사는 이반의 새 애인. 페파의 우주는 폭발 직전이다. 사랑의 숭배자들은 사랑의 퇴장 역시 합당하게 숭고하고 엄숙한 의식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중년 여배우 페파에게 그런 행운은 돌아오지 않는다. 오랜 애인 이반은 제대로 이별을 고하는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그녀를 피해 다닌다. 여행을 떠날 터이니 가방을 수위실에 맡겨 달라는 비겁한 메시지를 남기는 것이 고작이다. 그러니까 페파의 실연은 충치를 뽑을 때의 개운함을 수반한 뜻있는 아픔이 아니라 생이빨을 뽑는 억울한 통증이다. 온 세상이 그녀의 비탄을 존중하지 않는다.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오래 전 이반과 헤어진 전처는 여전히 페파를 깔보며 욕한다. 세 다스의 진정제를 갈아넣은 토마토 주스를 먹고 잠 속으로 도망치려고 하면, 담뱃불에 침대가 불타오른다. 셔츠 바람으로 호스를 휘두르는 페파 뒤로 무슨 심술인지 알모도바르 감독은 생뚱맞은 우아한 현악을 깔아놓는다. 심지어 페파 자신의 이미지조차 그녀를 비웃는다. 슬픔을 곱씹는 페파 앞의 TV에서는, 아들의 피묻은 옷을 감쪽같이 세탁하고 흐뭇해하는 살인범의 엄마로 분한 그녀가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다. “세제는 역시 백설표예요!” 그런데 이상하다. 극도로 열악한 처지의 이 여인에게 보호와 위로를 청하는 영혼들이 꼬인다. 관계를 확신 못하는 이반의 아들 카를로스와 처녀성을 거추장스럽게 느끼는 그의 피앙세, 시아파 테러리스트와 연루된 친구가 페파의 아파트로 찾아온다. 대홍수를 앞둔 구약성서의 노아처럼 페파가 키웠던 쌍쌍의 동물들도 배고픔을 호소한다. 왜일까? 알모도바르는, 그야 페파가 자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강한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현기증나는 소동 와중에 넌지시 설명한다. 과연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던 페파는, 누군가 문제를 일으킬 때마다 조언하고 수습하며 번번이 구두를 갈아신고 택시를 잡으러 뛰쳐나간다. 급기야 정리하기로 맘먹은 애인의 목숨까지 구해놓고 돌아선다. 이반을 보낸 페파는 사랑의 흔적을 보기 두려워 내놓았던 아파트를 팔지 않기로 한다. “이사는 안 갈래. 이런 전망 찾기 힘들잖아?” <나의 그리스식 웨딩>의 아버지처럼 그리스 어원을 따지자면, 히스테리는 난소가 몸속을 돌아다니며 광기와 신경계의 말썽을 일으킨다는 의미였다고 한 비평가는 지적했다. 신경쇠약은 기원전부터 여성과 짝지워져 약하고 변덕스럽고 감상적인 여성성을 규정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알모도바르의 페파는 제목의 상투성을 멋지게 배반한다. 극중 한 장면에서 페파가 듣는 음악이, 화려한 모험담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기를 보존한 여인에게서 영감을 얻은 <세헤라자데>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얘야, 정말 미안하구나” <하이힐>(1991)의 베키 앵커우먼 레베카는 12살 때 헤어져 외국에서 활동하던 가수 엄마 베키와 재회한다. 엄마를 깊이 동경했던 레베카는 방송사 사장이자 엄마의 옛 애인과 결혼했고, 베키의 노래를 립싱크하는 여장 남자 레딸의 단골 관객이다. 모녀가 서먹한 가운데 사위는 장모에게 다시 치근댄다. 얼마 뒤 그가 총기로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도밍게스 판사는 딸과 어머니를 동시에 용의선상에 올린다. 베키는 반지하방에서 태어난 여왕이다. 그녀의 혈관에는 왕족의 푸른 피가 흐른다. 지하방 벽 꼭대기에 뚫린 창으로 지나가는 화려한 색깔의 하이힐 굽들을 눈으로 좇으며 위대한 미래를 꿈꾸었던 베키는 인기 절정의 디바로 성공했다.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딸 레베카도 낳지만 그녀는 여전히 우주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다. 마리사 파레데스가 연기하는 베키는, 조앤 크로퍼드나 베티 데이비스 같은 오만한 여신들의 자매다. 자서전을 몹시 공들여 집필하는 그녀들의 대단한 자존심과 자기애는 알게 모르게 타인까지 설복한다. 베키의 딸 레베카는 대표적인 희생자. 엄마를 향한 애착과 질투로 삶을 버티고 결국 그녀만큼 베키에게 매혹된 여장 가수와 정착한다. 베키가 위풍당당할 수 없는 유일한 분야는 모성이다. 12년 만에 만난 딸과 포옹하자마자 귀고리에 걸리는 머리칼부터가 흉조다. 엄마의 하이힐 소리가 들릴 때까지 잠들지 못했던 레베카는 엄마가 맘껏 활동하도록 의붓아버지의 죽음을 부추기고, 엄마를 이기기 위해 베키의 옛 연인을 골라 결혼했다. 그러다 승산없는 경쟁이 지겨워져 방아쇠를 당긴다. 수심에 찬 엄마는 충고한다. “얘야, 남자들하고 문제는 그렇게 해결하면 안 된단다.” 마침내 베키는 멋진 여자로서 산 50년을 마무리짓고 멋진 인간이 되리라 결심한다. 분위기 전환도 할 겸. 죽음의 침상에서 딸을 위해 명예를 희생하기로 결단하는 순간에도 베키의 감정은 관객을 의식한 비장한 퍼포먼스 같다. 사실 그것은 연기이자 진정이다. <스텔라>는 딸의 행복에 제물이 된 어머니의 희열을 예찬했고 <밀드레드 피어스>는 한 남자와 엮인 모녀의 재앙을 계고했지만 두 영화의 스토리를 빌려온 <하이힐>은 베키 같은 여왕이 있어서 해피엔딩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과거

지난해 지리산에 풀어놓은 반달곰 반순이가 마침내 죽었다는 소식을 담은 TV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청승맞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내 주변의 몇몇 사람들도 그랬다고 했다. 지난주에 장국영이 죽었다. 홍콩에 다른 일로 취재갔다가 서울과의 전화로 그 소식을 알게 된 김현정은 전화 너머로 계속 훌쩍거렸다. 돌아와서 그에 대한 추모기사를 쓰면서 또 울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를 가슴에 품고 있던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울었을 것이다. 내 가슴에도 스산한 바람이 스쳐갔지만, 그들과 함께 울지 않았다. 시골의 한 고등학교 여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전자메일이 아닌, 우체부 아저씨 감사합니다, 라고 겉봉에 쓰인, 그리고 빼곡한 글씨로 채워진 4장의 편지지가 담긴, 우리가 알던 그 편지였다. 특강을 해달라는 간절한 사연을 담은 그 편지를 옆자리에 앉은 김소희에게 보여주자, 그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무엇이 그를 울게 했는지 막연한 짐작만 하며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전쟁을 증오한다고 여기저기서 떠들어온 나는, 속절없이 죽어간 많은 사람들, 그리고 팔이 잘려나간 아이의 비명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렇게라도 전쟁이 끝난 걸 다행이라고 말하는 내 마음의 야비한 소리를 들었다. 나의 분노와 슬픔은 그 야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야비함은 미래의 평온을 희망하고 있었다. 내 슬픔은 뒤죽박죽이며 정당하지 않다. 다만 그것은 늘 과거로부터 온다는 걸 알겠다. 슬플 때, 내 마음은 어떤 과거와 대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비로소 생의 감각이 손을 내민다. 미래는 대개 야비함과 두려움을 예비한다. 마감을 하고 있다가 단편 <스케이트>를 만든 조은령 감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귀한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그 재능의 일부만 펼치고 간 그에게, 그리고 이 땅에 던져졌다 막 육신의 삶을 다한 사람들에게, 그리고 아직 살아 있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쩐 일인지 지난해를 거치며 이제 오래도록 잠자고 있어도 좋을 거라고 믿었던 구절을 꺼내들어 바치고 싶다. 소설가 김영현이 <박하사탕>을 말하면서 인용한, 북베트남 인민군 소년병 출신 바오닌의 소설 <전쟁의 슬픔> 중의 한 구절이다. “내 과거의 깊은 심연에서 끝없이 불어오는 사랑과 자유의 슬픈 바람. 내 인생을 꿰뚫고 이 거리로, 이 동네로, 도시로 끝없이 불어오는… 내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추억의 힘 때문이다.”

007, 이번엔 인도 미녀에 눈독

‘아름다운 여인만 있다면 어디라도 간다.’ 21번째 시리즈가 이번엔 인도 미녀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네덜란드의 팜케 얀센, 프랑스의 소피 마르소, 홍콩의 양자경 등 지금까지 전세계 여러 나라 여인들과 놀았던 화려한 바람둥이 제임스 본드, 그가 다음 영화에서 인도인 본드걸로 물망에 올린 인물은 현재 세명이다. 모두 미인대회 수상자로 미스 월드 출신 배우인 아이쉬와리아 라이와 프리얀카 초프라, 미스 유니버스 수상자이자 모델 출신 배우인 라라 듀타. 이중에서도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아이쉬와리아 라이는 현재 인도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배우 중 하나로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도 선정됐다. 라이의 비서 하리 싱은 시리즈 제작사인 이온프로덕션의 캐스팅 담당자가 라이가 촬영하는 현장에 찾아와 라이의 리허설 장면까지 지켜봤다고 전했다. “그들은 간절히 라이를 캐스팅하려 하고 있다. 본인이 할지 말지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는 것이 비서의 전언. 촬영현장에서 발가락을 다치는 바람에 지금 뭄바이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라이는 최근 스캔들로 몸살을 앓고 있기도 하다. 인도의 젊은 스타로 각광받는 전 애인 살만 칸이 라이의 새 애인에게 살해하겠다고 협박한 사건 때문. 라이는 살만 칸과 공연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라이의 새 애인은 살만 칸을 정신병자라고 비난했다. 어쨌든 인도 여인을 본드걸로 기용하는 것은 21번째 시리즈를 쓰고 있는 시나리오 작가에게 스타일의 변화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인의 윤리 기준에서 제임스 본드와 동침하는 장면을 받아들이긴 힘들 것이라는 예상. 현재 21번째 의 본드 역은 피어스 브로스넌으로 확정됐고, 본드걸 후보로 영국 가수 소피 엘리스 벡스터도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질투는 나의 힘> 말세타령 하는 분들에게 정중하게 감자를 먹이다

말세다, 말세. 유부남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고, 그 여자의 남자는 패주어도 시원찮을 그 유부남 밑에서 헤헤거리며 자청해서 운전 기사 노릇도 모자라 개인 비서 노릇까지 한다. 그 유부남은 문학 잡지 편집장인 한윤식(문성근)인데, 부자집에서 자라 아쉬운 것 별로 없고, 바람피우는 주제에 나름의 논리도 갖추고 있다. 그 논리란 것을 들어보면 지나가던 소도 웃을 말인즉 이러하다. “바람도 못 피우면서 아내한테도 못하는 놈”보다는 “아내한테도 애인한테도 잘하는 것”이 “백 배 낫다”는 것이다. 빙충맞은 그 남자는 석사 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 내성적이고 좀 덜떨어진 인간인데 그 잡지사에 복수를 하러 간 건지 돈벌러 갔는지, 여하튼 기자 노릇을 하는 이원상(박해일)이다. 여기에 정신 출장 보낸 여자 하나 더 있으니 그 이름은 박성연(배종옥)이다. 2차 지망으로 수의학과를 가서 수의사 노릇은 하지만 제 앞가림 못하면서 쓸쓸한 표정으로 담배나 줄창 피워대다가 그 남자를 만나 그 문제의 잡지사에서 사진 기자 노릇을 한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문제는 이 정신 나간 위인이 편집장과 사랑인지 뭔지 모를 요상한 짓을 하면서도 그 남자에게도 발 한 쪽을 걸치고 있다는 것이다. 에고, 말세로고 말세로고! 관습과 이데올로기로 봉합된 세상의 찢어진 미세한 곳을 불안한 회의의 시선으로 보라, 그리고 관습과 이데올로기의 견고한 벽을 무너뜨려라. 여기까지 굳세게 나아가지는 않지만, 모더니즘 계열의 영화들은 이 선상에 있다. 또 이런 영화들은 대체로 극적인 것보다는 일상적인 것을 선호하거나, 일상적이지만 상징적인 것을 다루기도 한다. 동시에 이야기 구조나 스타일에서도 다른 방식을 추구한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모더니즘 영화라고 불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질투는 나의 힘>(박찬옥 감독)은 모더니즘 영화에 속하면서도 ‘일상성’을 배경으로 풍속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는 영화로 분류할 수도 있다. 지식인, 예술가, 부르주아 등의 위선을 처참할 정도로 드러내는 홍상수 영화가 자기 파괴적 모더니즘 영화라면, 이 영화는 세상을 다르게 보자는 ‘계몽형 설득 영화’인 셈이다. 이 영화는 불륜, 탈선 등에 대해 다른 시각을 보탤 뿐이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일부일처제의 폭력성과 사랑의 배타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는 사회라든가 지배 구조 등은 지워져 있다. 단지 부유하는 인간만 있다. 맞다. 인간이란 게 원래 떠도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관습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사납게 대든 셈이 된다. 하지만 마지막 시퀀스는 심한 진동을 안긴다. 한윤식의 딸과 이원상의 미래에 대해 어떤 암시를 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이 정말 암시라면 <질투는 나의 힘>은 아주 멀리 나간 영화가 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영화는 말세 타령을 하는 분들에게 정중하게 감자를 먹이는 귀여운 영화가 될 것이다. 여하튼, 그런데 나는 왜 이 평화로운 세상을 보면서 맥이 풀렸을까 영화평론가·경희대 교수

유토피아 그리고 위대한 사랑 이야기,<모노노케 히메>

■ Story 어느 부족의 마을에 재앙신이 나타나 마을 사람을 위협한다. 아시타카는 결투 끝에 재앙신을 쓰러뜨리지만 오른팔에 저주의 상처를 새기게 된다. 그는 곧 죽어야 할 운명인 것. 아시타카는 재앙신이 어떤 원인으로 한을 품게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 길을 떠난다. 한편, ‘시시’ 신의 숲 건너편에 위치한 타타라 마을은 에보시라는 여군주가 지배한다. 에보시 일행은 식량을 나르던 중 들개의 신에게 습격을 당하지만 총포를 사용해 위기에서 벗어난다. 아시타카는 들개의 신 옆에 있는 원령공주를 처음으로 만난다. 원령공주 ‘산’은 에보시의 목숨을 노리고 마을에 잠입하고 아시타카는 그녀의 목숨을 가까스로 구한 뒤 마을을 빠져나온다. 인간들은 ‘시시’ 신의 목을 노리고 숲으로 모여들고 다른 지역에서 몰려온 신령한 존재들은 또한 인간과 대전투를 맞이할 채비를 서두른다. ■ Review 몇년 전, <모노노케 히메>라는 신작 애니메이션을 지면에 소개할 때였다. 제목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가 고민스러웠다. 후보1. 도깨비 공주. 독자층이 이해하기 쉽겠지만 의역이 심했다. 후보2. 모노노케 히메. 적당한 제목이지만 의미전달이 약간 난해하다. 후보3. 원령공주. 원령(怨靈)이 ‘모노노케’의 정확한 번역이라는 점에서 통과. 그래서 당시부터 <모노노케 히메>를 열심히 <원령공주>로 표기했었고 이 작품을 아직까지 같은 제목으로 알고 있는 이가 적지 않다. 이 에피소드는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 제목을 이해하는 것이 작품 이해에 적잖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최근 개봉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두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이다. 그녀는 ‘산’ 혹은 ‘원령공주’라고 불린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과 마찬가지로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가 연출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우리는 곤혹스런 경험을 한다. 적어도 이제까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을 기억한다면 그렇다. <이웃집 토토로> 등에서 그랬듯 그의 세계는 꿈과 비행(飛行)의 모티브를 언제나 담고 있었다. 아스라한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지만 <모노노케 히메>는 상황이 다르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원령공주, 그러니까 ‘산’은 입가에 피를 흘린 채 첫 모습을 드러낸다. 다른 인간과 맞서 싸우길 주저하질 않는다. 칼을 휘두르며 공중에서 재주를 피운다. 끔찍한 장면도 여럿 있다. 무사의 목이 순식간에 잘려나가고 팔과 다리가 떨어져나간다. 그들의 살점은 사방으로 튄다. 신령한 존재, 즉 외견상 멧돼지로 보이는 동물들이 집단으로 떼죽음을 당한다. 이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변심일까? 그는 더이상 자신이 오랫동안 되풀이했던 철학, 즉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다”는 견해를 중도에서 포기할 태도를 보이는 걸까? 속단하긴 이르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와 많은 부분 흡사하다. 자연의 편에 서서 인간에 맞서는 여자아이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 아이는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신비로운 능력이 있으며 거의 여신에 근접한다. 아이는 인간들의 편에 선 아시타카라는 소년과 우정을 나눈다. 재앙신의 덫에 걸려 곧 죽을 운명이 되어버린 아시타카는 ‘산’과 교류하면서 자연의 위대한 힘을 깨닫게 된다. 작품의 줄거리에서 감지할 수 있듯 <모노노케 히메>는 <반지의 제왕> 등의 판타지 작품이 그랬듯 분열된 세계의 갈등을 서사의 주요한 축으로 삼는다. 갈등은 인간세계와 대자연이라는 구도로 짜여진다. 세부적인 갈등은 중세가 배경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일본의 과거로 우리를 인도한다. 작품 배경이 되는 무로마치 시대는, 일본 역사상 중요한 시기다. 산림을 개척하고 제철업이 활기를 띠면서 일본은 자연을 통제하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당시를 일본의 현대사와 비교하면서 “위험한 성장을 거듭하는 시기”라고 논한 적 있다. 여기서 ‘산’이라는 야생의 소녀는 본래 이름인 ‘산’, 그리고 그녀에게 위협감을 느끼는 인간사회에선 ‘원령공주’로 통하면서 이중적 삶을 살게 된다. "자연과 인간의 공생이라는 생태학적 주제"라는 관점이 일본 평단의 일반적 시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모노노케 히메>는 유토피아, 그리고 위대한 사랑 이야기다. 많은 일본 비평가들은 <모노노케 히메>가 지니는 애니미즘적 태도, 그리고 일본 전통신앙과의 관계에 주목했다. 사에코 준코가 지적했듯 “자연과 인간의 공생이라는 생태학적 주제”라는 관점이 일본 평단의 일반적 시각이다. 반면, 서구의 시각은 차이가 있다. 줄리아 세르토리는 “이 작품을 생태학적으로 고찰하는 것은 적당치 않다. 오히려 모든 존재는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라며 흥미로운 견해를 제출한 바 있다. 모든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이 유토피아, 그리고 위대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다는 것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일본 개봉 당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키네마순보>에서 평론가 사토 다다오와 대담을 나눈 적 있다. 당시 그는 “생활하다보면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장소와 시간, 그리고 빛에 주목하게 된다. 이것을 또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다보면 어느새 자연주의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작업의 특징이 아니겠는가”라며 반문한 적 있다. <모노노케 히메>는 인상파 화가들이 ‘빛’을 화폭에 옮기듯 섬세하게 작업한 결과물이다. 마른 땅에서 풀이 슬며시 고개를 내밀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것만으로 <모노노케 히메>는 충분히 관객을 웃고 울린다. 창문 밖으로 자연의 초록빛을 보며 잠시 웃을 수 있다면, 그것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언젠가 들려줬던 옛날이야기를 마음 속 어딘가 곱게 간직하고 있는 탓은 아닐지. :: 미야자키 하야오 인터뷰" 다음 작품은 90살 할머니 된 여자아이 이야기" 지난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내놓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게 전작 <모노노케 히메>에 대한 해묵은 궁금증을 털어놨다. 이 인터뷰는 <모노노케 히메>의 수입사인 대원C&A와 홍보사 영화인의 도움으로 서면으로 진행됐다. -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과 오스카에서 수상한 것을 축하한다. 당신의 작품이 범세계적 공감과 지지를 얻고 있는 비결은 뭘까. 나는 결코,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결국은, 국제적으로도 어필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 같긴 하지만. - <모노노케 히메> 이후 작품의 스피드와 스케일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닮아간다는 의견도 있다. 할리우드에선 내 작품이 할리우드영화와는 근원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나는 할리우드영화는 물론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라는 건 선배의 것을 받아들이고 소화한 뒤에 후배에게 전수하는 것이니 만큼, 뭔가 다른 영화에서 영향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 <모노노키 히메>는 공공연하게 당신의 ‘은퇴작’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나는 항상 ‘이 작품이 마지막이다’라고 생각한다. <모노노케 히메>의 경우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고 생각됐기 때문에, 거기서 끝낼 수 없었다. 새로운 감독을 기용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능한 한 젊은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만, 그럴 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도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 <모노노키 히메>는 ‘자연과의 교감’을 다룬 일련의 작품 중 마지막 스토리다. 인간과 자연의 갈등과 대결에 대해 당신이 도달한 결론은. 인간은 자연과 투쟁하는 문명을 구축해왔다. 자연이 문명을 파괴하려고 할 때, 문명 또한 위험한 상태에 처한다. 나는 그 곤란하고 어려운 화제에 도전할 시기가 온 것이라 생각한다. 어느 한 시기, 아마도 무로마치 시기 정도에 일본인은 사자신을 죽이고, 성스러운 자연에 대한 경의를 잃어갔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런 모든 전 과정을 표현한 것이다. - <모노노케 히메>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나온다. 전쟁이라는 것은 폭력이다. 그 점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이다. 잔인한 장면을 삽입해야 했기 때문에 어린이들에게는 인기가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린이들에게 더욱 인기가 많은 점에 놀라움과 기쁨을 느꼈다. 어린이들은 본능적으로 이 작품의 본질을 잘 간파했다고 생각한다. - <모노노케 히메>는 최초로 컴퓨터그래픽을 동원한 작품이다. 그런 작업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CG는 극히 일부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기존의 촬영에서 사용해왔던 기술에 조금 추가된 기술이라 생각한다. 단, 셀부분에서 부분적으로 디지털 페인트로 표현하였다. 퍼센트로 말하자면, 1/100 정도일 것이다. - 다음 작품 계획은. 차기작 <하울>은 내년 여름 개봉예정으로 준비 중이다. 영국 동화작가 다이아나 윈 존스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17살 여자아이가 마법에 걸려 90살의 할머니가 되어버리는 이야기이다.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