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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1997)

천둥축구부의 절체절명의 최고의 결전 <썬더 일레븐 극장판: 최강군단 오우거의 습격>

열정적으로 축구를 사랑하는 축구 천재 강수호는 천둥중학교에 입학한다. 하지만 축구부는 허접하기 짝이 없고 선수들은 무기력하고 팀원 수까지 부족할 정도다. 그래도 강수호는 실망하지 않고 축구부를 재건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던 중 염성화를 알게 된다. 염성화는 어린 시절 축구 때문에 사고를 당한 동생으로 인해 축구와 연을 끊었지만 실은 대단한 스트라이커. 천둥중학교 축구부는 지상 최강인 제국중학교와 경기를 갖는데, 이때 눈에 돋보이는 상대편 선수는 신귀도. 그도 처음에는 강수호와 천둥중학교의 적이었지만 곧 천둥중학교에 합류하게 된다. 이유는 절체절명의 축구시합 때문. 축구가 아이들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어느 미래의 지도자는 축구를 끝장내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축구 군단 오우거를 현재에 파견하고 천둥축구부는 그들과 사상 최고의 결전을 하게 된다. <피구왕 통키> <축구왕 슛돌이> 등과 유사한, 아이들을 위한 스포츠 애니메이션이다. 일본에서는 2008년, 국내에서는 2010년부터 텔레비전에서 방영됐다. 처음에는 축구를 소재로 한 롤플레잉 게임으로 탄생했고 인기를 얻자 이내 텔레비전 시리즈로 제작됐으며 영화로까지 이어졌다. 이번 영화는 첫 번째 극장판이다. 열정적으로 축구를 사랑하는 소년 강수호를 비롯한 각종 캐릭터, 시각적으로 번쩍이는 SF적 효과들이 강조됐다. 5월의 어린이날 특수를 겨냥하여 나온 영화이니 아이들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야 하는 부모들에게는 솔깃한 영화다. 어째서 축구가 미래를 망치는 거냐고 예리하게 묻는 조숙한 아이들만 제외한다면, 대체로 아이들이라면 반길 것 같다.

배우가 갖춰야 할 자질? 매력적인 인간 되기가 우선이지

‘박중훈의 연기수업’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풍경일까. 4월21일 CGV상암에서 주성철 기자의 진행으로 열린 <씨네21> 토크쇼의 첫 번째 주인공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무대 앞에서 저와 박중훈씨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보다 많은 관객이 자리를 채워준 만큼 바로 관객과의 대화시간을 가질 거”라는 주성철 기자의 말이나 “개인적인 이야기부터 한국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 정곡을 찌르는 질문 등 모두 환영한다”는 박중훈의 말처럼 토크쇼는 ‘중구난방 박중훈쇼’로 빠질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연기에 관한 진지한 질문들이 다수 쏟아졌다. 그러니까 이번 토크쇼는 ‘연기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박중훈의 대답인 셈이다. 질문을 받기 전 박중훈은 관객과 함께 자신의 출연작 <해운대>(2009)의 메이킹 필름을 봤는데, 그가 연기한 김휘 박사가 쓰나미의 위협으로부터 딸을 지키기 위해 딸이 있는 호텔로 들어가는 장면에 대한 뒷이야기를 들려줬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수중촬영 세트장에서 찍은 장면이다. 그 한신 찍는 데 무려 일주일이나 걸렸다. 수압이 얼마나 강한지 물을 맞는 순간 호텔 복도 끝까지 밀려났는데 전문 스탭 다섯명이 겨우 나를 잡을 수 있었다. 또 세트장 주변에서 큰 소음이 나기에 뭔지 알아봤더니 옆 세트장에서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2009)을 찍고 있더라. (웃음)” 그리고 김휘 박사가 국제해양연구소 지질학자라는 캐릭터 설정 때문에 전문용어 위주의 대사를 해야 했던 고충도 털어놨다. “쓰나미가 시속 300km로 수면 어쩌고저쩌고…. 이런 (전문적인 용어로 이루어진) 대사를 롱테이크로 하려니까 정말…. 그것도 영화가 블록버스터라 모든 배우들이 대사를 긴박하게 해야 했다. 밤새 마흔번 넘는 NG 끝에 겨우 ‘오케이’ 사인이 났는데 그 자리에 있던 엑스트라 분들이 막 박수치고. 부끄러워서 혼났던 기억이 난다. (웃음)” 궁극적으로 연기는 가르칠 수 없는 것 올해로 연기 인생 27년째인 박중훈이 시나리오를 선택할 때 우선시하는 건 크게 시나리오와 감독이다. “먼저 선택이라는 말을 정확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작품을) 선택한다는 건 배우가 잘나갈 때 가능하다. 못 나갈 때는 ‘선택’을 할 수 없다. 그저 작품이라도 들어와라, 는 심정이다. 일단 내가 좋은 상황임을 가정하자. 가령, 감독이 90점, 시나리오가 80점인 작품이 1번. 시나리오가 90점이고 감독이 80점인 작품이 2번.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주저없이 1번을 택할 거다. 또 감독이 90점이고 시나리오가 70점인 작품이 1번. 감독이 70점이고 시나리오가 90점인 작품이 2번. 이때는 2번을 택한다. 물론 감독과 시나리오가 모두 90점 이상인 작품을 하는 게 좋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감독이다.” 지금까지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출연 제안도 많이 들어왔을 것 같은데, 영화만 고집하는 박중훈만의 이유가 따로 있을 것 같다. “성우를 ‘보이스 액터’, 연기자를 ‘스테이지 액터’, ‘무비 액터’, ‘텔레비전 액터’라고 부른다. 모두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그 본질은 같다. 다만 선호도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관객이) 배우들의 하나하나를 두 시간 동안 집중해서 보는 영화를 좋아한다. 한국에서 영화배우 하면 안성기, 박중훈이 먼저 떠오른다라는 말을 듣는 게 좋다.” 박중훈이 생각하는 배우가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일까. “배우 스스로가 매력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버리고 타인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연기라는 건 타인이 됐다고 가정하고 하는 거다. <투캅스>(1993),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내 깡패 같은 애인>(2010) 등 그간 맡은 캐릭터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실제 내 모습이 겹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타인이 필요하면 배우 캐스팅이라는 게 왜 필요하겠나. ‘적역’이라는 말도 배우를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김갑수나 송강호가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현빈이 했던 역할을 맡았다면 20대 여성에게 어필할 수 있었을까.” 매력적인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노력이 필요하다. 직접적인 경험을 쌓는 것과 간접적인 경험을 토대로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 “(박중훈이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움직이며 웃어 보인다) 표정은 입, 하관에서 나온다. 반면 생각과 감정은 눈에서 나온다. 88만원 세대를 이렇게 만든 저도 공범이고, 20대에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있고, 또 분노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 극중 정유미를 헌신적으로 도와주는 오동철 역할을 표현할 수 있었다.” 연기의 테크닉은 필요하지 않냐고? 박중훈은 “한두편 해본 신인들이나 수십년 동안 연기한 베테랑 배우나 테크닉은 똑같다”면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연극과 과학이 만난 게 영화다. 영화연기를 할 때는 포커스, 조명 등 기술적인 면을 염두에 둬야 할 때가 있다. 가령, 키스하는 장면을 찍는다고 하자. (보통 속도로) 이렇게 키스를 하면 화면에서 너무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슬로 모션으로) 그래서 이렇~ 게 가야 한다. (웃음)” 그러나 그는 “테크닉은 연기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연기라는 건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한 말을 인용한다. “영화감독은 가르쳐서 되는 게 아니다.” 박중훈은 그간 수많은 여배우와 함께 작업을 했다. 다음 작품에서 함께하고 싶은 여배우는 없을까. “총각 때 예쁜 여자들과 연기를 하면 가슴도 설렜는데, 결혼한 지금은 그런 마음이 전혀 안 생기느냐, 그건 아니고 오히려 더 간절해진다는…. (웃음) 그런 건 있다. 자신의 세계에서는 예민하지만 개인적인 성격은 좀 무덤덤한 사람이 상대역이었으면 한다.” 어떤 배우들은 또 언제 노출연기를 해보겠느냐고 옷을 벗곤 하는데, 박중훈 역시 노출연기에 뜻을 품고 있지는 않을까. “노출연기는 200% 못할 것 같다. <우묵배미의 사랑>(1990) 때 수치감 같은 것을 느꼈다. 프로로서 옳은 태도는 아니다. 그러나 썩 유쾌하지만은 않다. 다만 과감하게 벗어서 캐릭터를 잘 소화한 배우한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좋은 영화 살리려면 개봉 첫주에 영화 보길 오랫동안 관객과 호흡해온 배우 박중훈이 생각하는 좋은 관객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다. “좋은 관객은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이다. 영화를 스포츠에 비유하면 골프라고 생각한다. 축구, 배구, 야구, 농구 등 움직이는 공을 치는 대부분의 구기종목과 달리 골프는 죽어 있는 공을 띄우는 운동이다. 감독, 배우, 스탭들은 관객의 감정을 두 시간 안에 띄워야 한다. 한국영화를 봐주자, 는 말을 싫어한다. 아닌 영화는 철저하게 외면해야 (제작자들이) 다시는 그렇게 안 만든다. 또 영화는 유통기한이 있다. 극장은 굉장히 냉정하기 때문에 첫주 성적이 안 좋으면 바로 내린다. 좋은 영화를 볼 거면 가급적이면 개봉 첫주 혹은 개봉일에 가깝게 보는 것이 그 영화를 사랑하고 살리는 방법이다.” 토크쇼가 거의 끝날 무렵 함께 자리한 <내 깡패 같은 애인>의 김광식 감독은 “좋은 감독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한 관객의 질문에 “재능 이상으로 운과 인연이 중요하다. 좋은 감독이 되는 것보다 감독이 되는 게 더 어려운 것 같다. (웃음)”고 대답하면서 관객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씨네21>의 오랜 친구답게 배우 박중훈과 <씨네21> 독자는 약 2시간 동안의 토크쇼를 통해 서로의 우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법의 애잔한 뒷모습

<일루셔니스트> The Illusionist 감독 실뱅 쇼메 / 6월16일 개봉 / 수입·배급 에스와이코마드 “나는 자크 타티가 왜 <일루셔니스트>를 직접 영화화하지 못했는지 완벽하게 이해한다. <일루셔니스트>는 타티 자신과 너무나 가까운 이야기였고, 그는 윌로씨라는 자신의 페르소나 뒤로 숨는 걸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루셔니스트>가 윌로씨에게는 지나치게 심각한 이야기라고 결론내렸고, 대신 <플레이타임>을 만들었다.”(실뱅 쇼메) 자크 타티는 <일루셔니스트> 스크립트를 1956년부터 1959년에 걸쳐 완성했다. 하지만 끝내 실사영화로 실현시키지 못하고 1982년 숨을 거두었다. 이후 그의 딸 소피가 쭉 간직해오던 <일루셔니스트> 스크립트는 <벨빌의 세 쌍둥이>의 감독 실뱅 쇼메에게 건네졌다. 1959년, 텔레비전과 영화와 록스타에 밀려 점점 설 곳을 잃어가던 나이 든 마법사 타티셰프가 스코틀랜드에 흘러들어온다. 타티셰프의 마법에 매혹된 소녀 앨리스가 그의 여정에 동행하고, 두 사람은 현실과 꿈 사이에 가로놓인 장벽에 부딪히며 점점 변해간다. 타티셰프는 앨리스를 딸처럼 아끼고 사랑하지만, 넓은 세계로 처음 나온 앨리스는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다.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흐름과 정서의 변화에 떠밀려 퇴장할 수밖에 없는 이들, 빠르게 변하는 세계와 불화하며 알코올중독과 고독에 지쳐가는 서커스 단원들의 애수 어린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빛난다. 마법을 믿는 사람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존재들끼리 서로 빚어내는 사랑과 존중의 마음 그 자체가 마법이 아닌가. 실뱅 쇼메는 자크 타티의 스크립트를 거의 그대로 옮겨왔지만 단 하나의 변화는 감수했다. 애초 스크립트는 파리와 프라하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파리와 에든버러로 바뀌었다. “프라하에도 가봤지만 인물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움직일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벨빌의 세 쌍둥이>로 에든버러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난 즉시 사랑에 빠졌다. 에든버러는 문명의 중심지와 외떨어진 곳이며 빛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술적인 공간이었다.” 실뱅 쇼메의 확신처럼 우아하고 간결한 그림체는 약간의 빛만으로도 미묘하게 색채가 달라지는 스코틀랜드의 청명한 공기를 손에 잡힐 듯 시각화했으며, 팬터마임처럼 음악과 표정과 분위기로 모든 것을 전달하는 형식은 그 어떤 대사보다 많은 정서를 함축했다. 픽사의 <업>과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아이보다는 어른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다. 놀랄 만큼 아름답고 애잔한 2D애니메이션의 수작이다. up 우리 모두의 쓸쓸한 삶을 돌이켜보게 하는 성숙한 시선. down 어린 관객에겐 ‘대사가 없어서’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칸 영화제] '나치 발언’ 파문, 라스 폰 트리에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칸 영화제 공식행사 입장을 전면 금지 당했다. 칸 영화제 사무국 측이 ‘나치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킨 라스 폰 트리에 감독에 대해 극단의 조취를 취하고 나섰다. 결정이 철회되지 않는다면, 그는 수상을 할 경우라도, 폐막 행사장에 입장하지 못하게 된다. 사건의 발단은 18일(현지시간) 칸 영화제 공식 경쟁부문 상영작인 폰 트리에 감독의 <멜랑콜리아> 상영 후 가진 기자회견장에서 일어났다. 독일계 혈통에 관한 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폰 트리에 감독은 “나는 정말 유대인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러다가 내가 진짜 나치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 가족은 독일인이었는데 이것이 나에게 기쁨을 주기도 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는 "히틀러를 이해한다. 그는 좋은 사람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는 그를 많이 이해한다. 조금은 그에게 공감도 한다"고도 했다. 덧붙여 그는 "그렇다고 2차 대전에 대해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유대인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라며 사태를 수습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유대인을 조금은 싫어한다. 이스라엘은 골칫거리이기 때문이다.”라는 위험한 발언을 이어나갔다. 또 히틀러를 위해 일한 건축가 알버트 스피어를 좋아한다면서 “좋다. 나는 나치다. 예술의 측면에서라면 나는 스피어를 지지한다. 그는 신이 나은 최고의 인간이다”라고 전하기도 했다. 나치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블록버스터를 만들 생각이 없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있다. 우리 나치들은 큰 스케일의 영화를 만드는 걸 좋아한다.”며 화제를 이어 나갔다. 기자회견에 동석한 <멜랑콜리아>의 주연배우 키어스틴 던스트는 폰 트리에 감독의 발언에 당황하여 뒤로 몸을 빼며 “맙소사, 끔찍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장내가 술렁이자 그는 “이 말을 하고 내가 여기서 어떻게 빠져 나가지?”라는 농담까지 덧붙였다. 이날 기자회견 후, 폰 트리에 감독은 주요 일간지 일면에 기사화 됐다. 사태가 일파만파 퍼지자 칸 영화제 사무국측은 폰 트리에 감독에게 공식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폰 트리에 감독은 대변인을 통해 "내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나는 반(反)유대주의자도 나치도 아니다"는 내용의 공식 사과 성명을 냈다. 영화제 곳곳에서 폰 트리에 감독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한 감독은 무대 인사 중, “자칫 말실수 할까봐 이야기 하기가 힘드네요.”라고 하자, 티에리 프레모 칸 집행위원장 “괜찮다. 나중에 사과하면 끝인걸.”이라고 말해, 폰 트리에 감독의 행동에 대한 비난을 전했다. 한편 폰 트리에의 발언을 확대 해석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프랑스 문화잡지 <인록>의 자키 골드버그는 “폰 트리에의 유태인에 대한 발언은 물론 스캔들이 될 만한 일”이다”라고 하면서도 “그런데 마이웬(올 경쟁작 상영작 <폴리스>의 감독)이 기자회견에서 ‘무슬림은 나쁜 무슬림도 있고 좋은 무슬림도 있다’라고 말했을 때는 박수를 받았다"고 했으며 프랑스 문화잡지 <텔레라마>지의 오렐리앙 페렌지 역시 “과거, 유고내전 중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이 세르비아 내전을 옹호를 했을 때나, 체첸사태에 대해 러시아 감독 니키타 미하일코프가 친푸친 성향을 드러냈을 때 조차 관대했던 칸느가, 폰 트리에의 ‘조크’에는 유독 흥분한다.”고 지적한다. 폰 트리에 감독은 2000년 <어둠 속의 댄서>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으며, 2009년 <안티크라이스트> 이후 2년 만에 다시 공식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캐릭터도 진화한다

액스맨 / 레이븐 다크홀름 (제니퍼 로렌스) 이전 시리즈에서 미스틱은 브라더후드 집단의 강력한 2인자였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신해 상대방을 교란하는 미스틱은 금속이 없는 곳에서 어떤 힘도 쓸 수 없는 매그니토를 매번 위기에서 구출했다. 그랬던 미스틱이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이하 <퍼스트 클래스>)에선 사뭇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미스틱 이전, 레이븐 다크홀름이었던 돌연변이 소녀는 젊은 시절의 찰스 자비에와 남매 같은 우정을 나누고, 천재 과학자 행크 맥코이와 로맨틱한 관계로 발전한다. <윈터스 본>으로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던 유망주 제니퍼 로렌스가 레이븐을 연기한다. 로렌스에 따르면 레이븐은 이 영화에 출연하는 모든 엑스맨 캐릭터를 통틀어 시작과 끝이 가장 다른 캐릭터라고. 엑스맨 / 행크 맥코이 (니콜라스 홀트) 전세계 돌연변이들을 찾을 수 있는 찰스 자비에의 ‘세레브로’. 엑스맨의 활동에 필수적인 제트기 ‘엑스젯’. 이 모든 것을 한 천재 과학자가 발명했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서 돌연변이들을 대변하는 정치가로 등장했던 비스트다.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세련되고 지적인’ 정치인 비스트가 아니라 ‘수줍은 이상주의자’였던 과학자 행크 맥코이를 만날 수 있다. 천재 과학자들이 종종 그러듯, 행크는 실험 중인 약물을 자신에게 투여했다가 파란 피부의 털북숭이 야수로 변한다. 행크를 연기하는 배우는 영국 드라마 <스킨스>로 스타덤에 오른 영국 배우 니콜라스 홀트다. 홀트는 <엑스맨> 만화책, 애니메이션, 영화를 모두 섭렵한 시리즈의 열혈 팬이다. 그는 독특한 어휘를 구사하던 만화 시리즈의 행크를 캐릭터에 직접 반영했다고 한다. 헬파이어 클럽 / 세바스티안 쇼 (케빈 베이컨) <퍼스트 클래스> 최강의 적이다. 돌연변이 집단 헬파이어 클럽의 수장인 쇼는 <퍼스트 클래스>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부추겨 미국을 향해 미사일을 조준하게 하는, 냉전시대 핵위기의 주범이다. 동시에 그는 모든 운동에너지를 흡수해 자신의 힘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지녔다. 케빈 베이컨이 연기하는 세바스티안 쇼는 <엑스맨> 원작 만화와 외관상 가장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 18세기 스타일의 고색창연한 복장은 양복으로, 쇼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긴 구레나룻도 사라졌다. 베이컨은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자수성가한 미국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정의한다. 헬파이어 클럽 / 엠마 프로스트 (재뉴어리 존스) 다이아몬드 걸, 화이트 퀸…. 세바스티안 쇼의 오른팔인 엠마 프로스트는 애칭에 걸맞게 우아하고 아름다운 악당이다. 찰스 자비에와 맞먹는 텔레파시 능력을 자랑하며 피부를 다이아몬드로 바꿔 상대방을 공격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슈퍼히어로 캐릭터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스타일을 자랑하는 엠마 프로스트의 의상일 것이다. <퍼스트 클래스>의 제작진은 목부터 발까지, 온몸에 피부처럼 감겨드는 흰색 가죽 캣슈트 등 만화책에 뒤지지 않는 엠마의 의상을 선보일 예정이다. 이 의상을 소화해낼 여배우는 미국 드라마 <매드맨>에 출연했던 재뉴어리 존스다. 1960년대 코카콜라 CF에서 툭 튀어나온 듯한 조각 같은 외모의 소유자인 그녀는 엠마 프로스트를 연기하기 위해 “펜싱과 테니스” 등으로 몸매를 다졌다고.

'서울디지털포럼 2011' 개막(종합)

(서울=연합뉴스) 이연정 기자 = SBS가 주최하는 '서울디지털포럼(SDF) 2011'이 25일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초(超) 연결사회 - 함께 하는 미래를 향하여'를 주제로 개막했다. 이날 오전 열린 개막식에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 윤세영 SBS 미디어 그룹 명예회장 등 국내외 인사 1천여명이 참석했다. SDF 집행위원장인 우원길 SBS 사장은 개회사에서 "인류는 서로 연결의 범위를 확대하며 문명을 발전시켜왔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연결의 범위는 커졌다"면서 "초연결사회는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하며 변화와 발전의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축사에서 "올해는 '스마트 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시기"라면서 "올해 (포럼) 주제인 '초연결사회'는 스마트기기와 모바일 혁명이 만들어가고 있는 현재의 디지털 환경을 분석하고 미래 사회상을 전망하는 핵심 화두"라고 말했다. 이어진 축하 공연에서는 미국 출신 지휘자 에릭 휘태커(Eric Whitacre)가 인터넷 가상합창단 프로젝트인 '빛과 금(Lux AurumQue)'을 선보였다. '빛과 금'은 전 세계 12개국, 185명의 연주자를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합창 프로젝트로, 지난해 유튜브에서 공개됐을 당시 60일만에 100만 클릭을 넘어설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개막식이 끝난 뒤 '토크쇼의 제왕'으로 불리는 미국 유명 방송인 래리 킹이 '연결자들'이란 주제로 기조연설에 나서 "첨단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연결'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제가 블라디미르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과 감정적인 교류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연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위험에 맞서 끊임없이 연결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7일까지 사흘동안 이어지는 이번 행사에서는 이밖에 ITㆍ미래학자 니컬러스 카,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의 창시자인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포스퀘어 공동창립자 나빈 셀바두레이, 여성학자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이 연사로 나선다. 국내 인사 중에서는 황창규 지식경제부 R&D 전략기획단장, 김흥남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 배준동 SK 텔레콤 네트워크 CIC 사장, 권희원 LG 전자 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장, 이제범 카카오 대표이사 등이 특별 강연을 할 예정이다.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서울디지털포럼은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읽고 혁신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해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행사로, 매년 세계적인 연사들이 참석해왔다. rainmaker@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신두영의 보라카이!] 지선언니, 이제 편하게 야구보세요. 外

송지선 MBC 스포츠플러스 아나운서가 5월23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자살은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다. 트위터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었다.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이전에 야구팬이라면 안타까움이 클 것이다. 그녀가 죽었던 날 <베이스볼 투나잇 야>를 진행한 김민아 아나운서가 울먹이며 클로징 멘트를 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트위터에 조잘조잘 글을 올리던 송지선 아나운서는 없지만 여전히 그녀의 트위터를 팔로잉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 등장한 괴물이 경북 칠곡에 나타날 판이다. 캠프 캐럴 부지에 베트남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를 매립했다는 퇴역 주한미군 스티브 하우스(54)의 고발이 있은 뒤 여기저기서 고엽제에 대한 의혹이 쏟아졌다. 1968년 한국군은 철모에 고엽제를 담아 손으로 DMZ에 뿌렸다고 한다. 그때 뿌렸던 고엽제의 양은 1999년의 국방부 발표보다 50배나 많다고 한다. 고엽제가 이렇게 난리인데 고엽제전우회 아저씨들은 왜 가스통을 들고 미대사관 앞으로 가지 않는지 모르겠다. 유럽 축구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5월29일 일요일 새벽 3시30분에 열린다. 2008년 이후 다시 결승전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C바르셀로나가 영국 런던의 웸블리구장에서 격돌한다. FC바르셀로나의 광팬인 <씨네21> 편집장 이하 축구덕후 기자들은 함께 모여서 경기를 관전할 예정이다. 그런데 박지성이 선발출장하지 않으면 어쩌지. 퍼거슨 할배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야겠다. 제발 선발~ 선발~.

사나이여 영화행 급행열차를 타라

당신이 새로 발견해야 할 이름 박노식. 한국영상자료원에서 6월19일까지 계속되는 기획전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의 ‘복원전’에서는 ‘감독 박노식’의 면모가 드러난다. 테크니스코프 복원작 <집행유예>를 비롯해 <육군사관학교>, <하얀 수염>, <왜?>, <광녀>, <폭력은 없다>, <방범대원 용팔이> 등 박노식 감독의 영화 7편이 상영될 이 섹션을 두고 한국영상자료원쪽은 “감히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 단언한다. 이에 한국 액션영화에 대한 혈기 왕성한 탐식가 오승욱 감독이 박노식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거친 배우 시절부터 불균질한 매력으로 넘쳐나던 감독 시기까지, 그의 진면모를 훑는다. 한편 이번 복원전의 부대행사로 6월5일(일) 오후 6시에는 <집행유예> 상영과 함께 오승욱 감독의 해설이 이어지며, 6월12일(일) 오후 6시에는 <광녀> 상영 뒤 류승완 감독과 본지 주성철 기자의 대담이 펼쳐진다. 1970년대 자신만의 넘쳐나는 열정으로 액션영화를 찍었던 박노식 감독을 재발견하는 즐겁고도 놀라운 시간이 될 것이다. 초등학생 때 학교를 오가며 보았던, 콜타르를 먹인 시커먼 판자벽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들로부터 박노식에 대한 나의 기억은 시작된다. 매처럼 부리부리한 두눈을 치켜뜨고 포스터 밖을 노려보는 사나이. 그 사나이가 출연하는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의 인상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지 기억날 정도로 기괴했었다. 커다란 붓글씨로 박력 넘치게 휘갈겨 쓴 <왜?>라는 제목, 쇠고랑을 찬 두손을 높이 쳐들고 그가 분노에 찬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보는 <집행유예>. 집행유예란 영화의 제목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나는 어머니에게 집행유예의 뜻을 물어보기까지 했고,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법정에 출두하는 수인들의 행렬을 교실 창문 너머로 바라보면서 나의 머릿속에는 <집행유예> 영화 포스터가 어른거렸다. 지금은 40대에 접어든 그의 아들 박준규가 어린이였을 무렵. 아버지와 함께 우유 광고에 출연한 박준규의 머리를 박노식이 쓰다듬으며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하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내 어린 시절 박노식은 용팔이였고, 용팔이란 이름의 폭력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 이전까지 용팔이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나의 기억과는 다른 기억이 하나 있다. 내 또래 친구의 초등학생 때 기억 속 박노식은 아버지의 강퍅한 평안도 사투리에서 시작된다. 1970년대 중반, 친구의 아버지는 텔레비전에서 박노식이 나오기만 하면 “저 전라도 놈!” 하며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고 한다. 박노식은 지역감정의 증오에 찬 친구 아버지의 시선 속 전라도 출신 영화배우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50년대 중·후반 영화계에 데뷔한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있었다. 장동휘, 박노식, 허장강, 독고성, 이대엽 등등. 그들 중 신성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80년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박노식은 숨막히는 악의를 발산하는 악역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 남성들의 고단함을 제대로 표현한 서민배우로,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러대는 액션배우로, 70년대 중반까지 기괴하고 불균질한 액션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으로 거침없이 활력을 쏟아내던 사람이었다. 박노식을 절대적으로 좋아하는 한국 배우라 말하고 다니는 영화광의 입을 빌려 부족하나마 그의 약전(略傳)을 기록한다. 하지만 주의하시라. 무릇 영화광이란 쓸데없는 말을 잘도 지껄이는 자들임을. 멜로배우에서 액션배우로 거듭나기까지 1940년대 초. 전남 여수의 신작로를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뽀얀 얼굴의 10대 소년이 머리에 나까오리라 불리는 하얀 중절모를 쓰고 하얀 양복을 위아래로 빼입고 백구두까지 신고 으스대며 걸어간다. 길가의 어른들이 소년의 이런 모습을 그냥 보고 지나칠 리 없다. 손가락질을 해대며 “저놈 봐라. 학생이 나까오리까지 잡숩고, 건방진 놈이시.” “저 놈 허세가 보통이 아니네.” “저놈 뻥 좀 봐라. 저놈이 쓴 건 나까오리가 아니라 뻥까오리여.” 소년의 허세를 보고 어른들이 질책하자 소년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남이사.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뭔 상관이여” 하며 자신을 비웃으며 붙여진 뻥까오리에, ‘내가 하얀 양복을 입고 다니니 백작’이라며 둘을 합쳐 스스로 ‘뻥까오리 백작’이라고 좋아한다. 이 모양내기 좋아하고 허세가 보통이 아니었던 소년은 해방과 여순사건, 한국전쟁의 풍파에서 살아남고, 여수에 공연 온 악극단의 연극을 보고 반하여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다. 청년 박노식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피아골>의 이강천 감독이 그가 악극단에서 하는 연기를 보고 자신의 영화에 출연을 제의한 것. 이강천 감독의 전쟁영화 <격퇴>(1956)로 그는 영화에 데뷔한다. 몇편의 영화에 출연을 하고 인기가 오르자 새내기 배우 박노식의 마음속에 불만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가 이름을 얻게 된 영화들이 멜로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권투와 운동으로 다져진 젊은 육체를 속시원하게 써먹을 수 있는 액션영화에 출연하고 싶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액션영화 감독 정창화에게 매달렸다. 박노식을 멜로영화 배우라 생각했던 정창화 감독은 처음에는 썩 내켜하지 않다가 그가 하도 매달리니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에서 황해의 부하, 즉 단역으로 출연하라고 한다. 멜로영화에서는 주연급이었기에 마음이 상했지만, 그는 주인공 황해를 배신하고 탈출하는 2분짜리 격투장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소년 시절 뻥까오리 백작이라 놀림을 받았던 그 차림 그대로 촬영장에 나타났다. 온통 하얀색 의상에 하얀 장갑까지 낀 그를 보고 정창화 감독은 촬영하면 그 하얀 옷 다 버릴 텐데, 했지만 그는 황해에게 온 힘을 다해 얻어맞는다. 맞고 일어나서 맞고, 또 맞고. 너무나 치열하게 얻어맞아, 원래 예정했던 영화 속 러닝타임 2분을 오버해서 약 10분 분량으로 감독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고, 액션배우로 거듭나게 됐다. 멜로배우의 딱지를 떼어버린 박노식은 무시무시한 악역배우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데,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1964)에서는 벙어리 김진규와 최은희를 학대하는 방탕한 부잣집 아들로, 장일호의 <석가모니>(1964)에서는 싯다르타로 출연한 신영균을 질투하여 괴롭히는 동생으로 출연하여 악의를 마음껏 발산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경균의 <마도로스 박>(1964), 임원식의 <배신자 샹하이 박>(1965)에 출연하여 마도로스 박 또는 샹하이 박이라 불리는 선원 복장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주먹을 휘두르는 의리의 뱃사나이가 되어 액션배우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카인의 후예>로 대종상 남우조연상 수상 1968년 4월22일 새벽 1시. 대구의 금호 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영화배우 박노식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 넘어져 호텔 깡패가 자신을 때렸다고 생트집을 잡아 호텔의 기물을 부수는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액션영화 배우로 이름을 날리는 동시에 크고 작은 폭행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박노식이 또 폭행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며칠 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유현목의 <카인의 후예>(1968)에 출연하고 있던 박노식과 김진규, 장동휘가 그날의 촬영을 끝내고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10년차 배우 박노식은 좋은 작품이라 생각했던 유현목의 <김약국의 딸들>(1963),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1964) 같은 작품들에서 항상 악역이거나 성격 있는 조연이었다. 그는 아쉬웠다. 이번에 촬영하는 <카인의 후예>는 김진규가 주연이고, 장동휘와 자신이 조연이긴 했지만 자신이 맡은 역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연기에 욕심이 났고 대종상을 타고 싶었다. 술에 취한 김에 그는 술자리를 얼어붙게 만들어버릴 말을 내뱉고 만다. “두 형님들 날 싸가지없는 놈이라 욕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잉” 하고는 박노식은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김진규와 장동휘를 노려본다. “이번 대종상은 나가 꼭 타야 쓰것는디, 형님들이 양보하쇼. 그리고 형님들이 암만 몸부림쳐도 말입니다잉. 이 영화에서 역할로 보나 비중으로 보나 나의 연기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잉. 아예 단념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천하의 당돌한 말이 어디 있는가? 점잖은 선배 김진규는 태연하게 알았다며 받아 넘겼지만, 천하의 장동휘가 어떤 사람인가? 이따위로 막가는 후배를 그냥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박노식의 성격이 불같다면 장동휘는 활화산이다. 장동휘 왈.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이 싸가지없는 새끼야!!” “타라면 누가 못 탈까봐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놈의 새끼 보셨습니까? ” 박노식이 이왕 저지른 것 끝까지 간다며 대드는 순간, 장동휘는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박노식의 머리에 내리친다. 선혈이 흐르고 술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천한 머슴으로 일생을 살아온 하얀 백발의 머슴 도섭 영감(박노식)은 이렇게 세상이 바뀔 줄 몰랐다. 붉은 완장을 차고 세상을 호령하고 부자 놈들을 무릎 꿇게 하다니.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비록 천한 머슴의 딸이지만 너무도 아름답고 현명한 문희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광기에 차서 날뛰는 아버지 도섭 영감에게서 돌아서버린다. 딸이 변한 것이 김진규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박노식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옛 상전의 아들이자 딸이 사랑하는 남자이며 무산자 계급의 적이라 증오해야 하는 김진규와 땀과 흙범벅이 되어 싸움을 한다. 늙었지만 힘이 장사인 그는 마지막 순간 김진규를 죽이지 못하고(죄의식 때문일까?) 그가 가진 모든 힘을 한순간에 소진해버리고 고목나무처럼 풀썩 쓰러져버린다. 폭력사건으로 그의 이름에 금이 가긴 했지만 박노식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카인의 후예>에서 도섭 영감으로 출연한 박노식은 그해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폭발하는 에너지와 광기를 제대로 표현해낸 것이다. 60년대 한국 서민 남성의 고단함 대변한 용팔이 캐릭터 60년대 후반. 이제 박노식은 거칠 것이 없다.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미남배우들 옆에서 성격배우로 남아 만년 조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박노식은 날기 시작한다. “나가 전라도에서 올라온 용팔인데 말이시 서울 종로 바닥에서 제일 쎈 놈이 뉘기여!” 김효천의 <팔도 사나이>(1969)에서 하얀 한복 바지저고리에 도리구치를 눌러 쓰고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나이 박노식은 김두한 역의 장동휘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지지만, 관객의 머릿속에는 전국 팔도에서 모인 주먹깨나 쓴다는 사나이 중,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껄떡거리는 용팔이가 남았다. 데뷔 초기 전라도 사투리의 억양 때문에 녹음실에서 얼마나 수모를 받았던가. 당시 주연급 배우들이 성우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할 때 박노식은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고집하여 더빙을 했다. 그런 그가 이제 영화에서 마음껏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도 되는 용팔이라는 캐릭터를 만난 것이다. 이듬해, <팔도 사나이>의 속편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주연은 김두한 역의 장동휘가 아니다. 김두한의 이야기도 아니다. 전편의 조연이었던 용팔이가 주인공인, 편거영의 전혀 다른 영화 <돌아온 팔도 사나이>(1969)가 탄생한다. 1960년대 말 서울, 용팔이 박노식은 주먹으로 살았던 과거를 뉘우치고, 꽃처럼 아름다운 아내 사미자와 이룬 가정을 위해 날품팔이일지언정 땀을 흘려 일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주먹으로 남을 위협해서 먹고살았던 과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 예전에 그가 몸담았던 깡패 조직은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용팔이 박노식은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꽁치 두어 마리를 사서 연탄불에 구워 아내와 함께 먹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았다. 그런 용팔이를 깡패 조직은 용납하지 않고 간악한 흉계를 꾸민다.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겁탈하고 그의 가정을 박살내는 것이다. 한편, 오늘도 용팔이는 동대문시장에서 지게를 등에 지고 날품팔이를 한다. 오늘은 공치나보다 하고 풀이 죽어 있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용팔이를 불러 사과 두 상자를 배달시킨다. 평소 받는 돈보다 두어배의 웃돈을 쥐어주며. 동대문시장에서 사과 두 상자를 배달해야 할 곳은 저기 광화문을 지나, 아현동 고개를 넘어 신촌 로터리의 서강대학교의 여교수님 연구실이다. 지게에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진 용팔이는 동대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아이고 솔찮이 힘든데 말이시…” 하며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아현동 고개를 오르는 용팔이. 그 시간. 깡패들은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납치하여 골방에 가두고 강간하려 한다. 용팔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서강대학교에 도착하는데. 이미 해는 지고, 사과 두 상자를 받아야 할 여교수님은 퇴근을 하셨단다. “아이고 이거 어쩌면 좋을까잉 그러면 여교수님 댁이 어딘가요잉.” 수위 왈. “여교수님 집은 저기 광나루를 건너 천호동….” 용팔이는 사과 두 상자를 고쳐 메고 신촌에서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그의 땀에 젖은 어깨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과거의 주먹을 숨기고, 가정을 위해 굽신거리며 비굴한 성실함으로 살아야 하는 사내. ‘비굴한 성실함’ 그것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소모된 대한민국 남성들의 트라우마다. 종로 깡패 김두한의 주먹깨나 쓰는 부하 중 하나였던 용팔이 캐릭터는 새마을운동과 조국 근대화로 인해 소모되는 60년대의 한국 빈민 남성의 애환을 표현하는 캐릭터로 새롭게 탄생한다. 전라도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젊은 사나이의 애환을 그린 짝퉁 용팔이 시리즈 <맨발로 올라왔다> <맨주먹으로 올라왔다>까지, 70년대 초 극장가는 용팔이 세상이었다. <인간사표를 써라>로 감독 데뷔 눈이 내리는 명동의 밤거리에 회한이 담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어깨를 움츠린 사내가 들어선다. 그는 깡패였던 과거를 씻고 새로운 조국의 일원이 되고자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꾸리려다 과거의 행적에 발목이 잡혀 한팔을 잃고 명동 거리에서 쫓겨났었다. 사랑하는 아내 문희와 전쟁 뒤 깡통을 들고 명동 거리를 헤매던 자신을 구해준 의붓아버지이자 깡패 두목인 장동휘를 파멸시킨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내는 원한의 거리, 명동에 들어선 것이다. 종로와 명동의 깡패들 이야기를 다룬 신화의 세계. 한국 깡패영화 중 빛나는 한편의 영화인 임권택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의 첫 장면이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쏟아져 나온 한국 깡패영화에 대해 박노식을 빼고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려다 과거의 죄에 발목이 잡힌 깡패영화의 전형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1971년 서울 무교동의 광성실업 20층 빌딩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경거리다. 구경꾼들의 시선은 빌딩의 20층 벽에 쇠줄을 잡고 매달린 사내를 향하고 있다. 안전장치 하나없이 쇠사슬을 붙잡고 빌딩 벽에 매달린 사내. 박노식이다. 구경꾼들 틈에서 조명부들이 반사판을 들고 박노식을 비추고 있다. 반사판에는 “박노식 감독, 제작, 주연. 인간사표를 써라”라고 쓰여 있다. 박노식이 영화감독을? 이 전해에 경관 폭행 사건으로 구류를 살았던 배우 박노식은 구치소 안에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사표를 쓰고 인간답지 않은 벌레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번 드는 것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은 “나도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였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 제작을 한 그의 첫 번째 영화 <인간사표를 써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기괴한 액션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면 고대 원시인 같은 복장의 사내들이 등장하고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이상한 제의를 한다. 굳이 따지자면 1930년대의 북만주 어느 곳인 것 같지만, 다음 신의 배경은 1970년대의 서울이다. 북만주에서 사랑하는 의형제 김희라를 악당 허장강의 음모로 잃은 박노식은 복수를 결심하고 허장강을 찾아 1970년 서울의 무교동 어느 빌딩으로 온 것이다. 김희라의 아내를 찾아가 그의 죽음을 전하려는데 김희라의 아름다운 아내 김지미는 장님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남편 김희라가 돌아온 것이라 오해하고 박노식을 껴안고 오열한다. 사나이 박노식. 의형제의 아내 김지미 앞에서 차마 김희라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김희라 행세를 하며 영화는 진행된다. 무국적. 시대 무시. 훼손된 신체를 복원시키려는 과잉된 열망으로 충만한 비극적인 라스트. 당시에는 대단한 볼거리라고 여겨질 만한 카 체이스. 과거 뻥까오리 백작이라 놀림 받았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상되는, 17세기 유럽 귀족들이 입었을 것 같은 이상한 취미의 의상들. 이 모든 과잉이 범벅된 영화가 <인간사표를 써라>였다. 하드보일드 액션영화와 서민적 미담극 사이 그 뒤 박노식은 총 14편의 영화를 주연·감독한다. 그의 영화들은 뚜렷하게 두 가지 성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영향받은 잔혹함과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따라잡고 싶은 열망, 일본 B급 액션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괴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냉혹한 하드보일드 취향의 액션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서 박노식은 항상 파마를 한 곱슬머리에 찰스 브론슨과 비슷한 콧수염을 기르고 전라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 냉혹한 복수자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인간사표를 써라>를 비롯해 <쟉크를 채워라>(1972), <나>(1971), <집행유예>(1973), <일생>(1974), <왜?>(1974), <광녀>(1975),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6)가 그것이다. 이 영화들은 대개 만주에서 음모와 배신, 죽음으로 시작해 현재의 서울 어느 곳으로 옮겨져 복수극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들에서 줄기차게 이야기되는 것은 짝패, 도플갱어들 사이의 갈등과 훼손된 신체를 복원시키려는 과대망상이다. <인간사표를 써라>에서는 죽은 동생의 눈먼 아내 김지미를 위해 동생 행세를 하고, 심지어 자신의 눈을 주려고 한다. <쟉크를 채워라>에서는 이복동생 신성일과 서로 한 핏줄인 것을 모른 채 앙숙이 되어 대결하고, <집행유예>에서도 예외없이 주인공은 죄의 대가로 눈이 멀고, <광녀>에서는 곱슬머리 가발을 벗어 화상을 입고 민대머리가 된 머리를 드러내며 원한을 호소한다. 다른 하나는 용팔이 캐릭터를 가져온 서민 인정 미담극이다. <하얀 수염>(1974), <폭력은 없다>(1975), <방범대원 용팔이>(1976), <돌아온 용팔이>(1983)가 그렇다. <하얀 수염>은 <카인의 후예>의 도섭 영감의 외모를 그대로 가져와 자식들에게 버림받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뤘고, <돌아온 용팔이>에서는 쉴새없이 떠벌리는 방범대원 용팔이가 왕년 최고의 주먹이었지만 교도소 출소 뒤 새 사람이 된 용구 형님 황해를 모시고 그들의 의붓딸 서미경의 행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그의 도플갱어 애호 취미가 드러나는데 사랑받는 간호사 서미경의 쌍둥이 동생 소매치기 서미경이 등장하여 갈등을 만든다.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선배 장동휘와 술집에서 싸움까지 했던 박노식이니 연출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겠지만 그의 작품들은 너무나 조악하다. <쟉크를 채워라>를 보면 전 신에서 영화와 관계된 대사가 나오면 다음 신에서 박노식이 침대에 누워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을 보고 있다. 마치 끝말잇기, 말장난 같은 유아적인 신 전환 방법이어서 실소를 머금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광녀>의 라스트. 아무리 복수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지만 집단 강간으로 악녀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은 눈뜨고 보기에 괴롭다. 영화를 많이 보고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알겠는데, 표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본을 무시한 조악한 연출이다. 그러나 <왜?>에 이르러서는 조악함이 많이 사라지고 좀더 영화적인 연출을 한다. 과거 팔도 사나이 시리즈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전라도 사나이 의리의 용팔이가 자신의 똘마니 용칠이 장혁을 데리고 일본에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타이틀 시퀀스가 지나고, 일본 야쿠자들이 좌우로 도열한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서 있다. 앗! 저 사내는! 또 다른 박노식이 서 있다. 일인이역. 일본 야쿠자 두목 박노식이다. 박노식의 첫 번째 영화부터 줄기차게 나오는 파마를 한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 박노식이다. 라스트. 전라도 용팔이와 하드보일드 캐릭터 악당 박노식이 영화속에서 처음으로 대면하자마자 두 주인공은 박장대소한다. 두 명의 박노식과 주변인물들도 모두 박장대소 한다. 참 유쾌한 장면이다. 인간 박노식의 분열된 자아. 인정 많고 의리에 살고 죽는 구수한 전라도 사나이 박노식과 하드보일드 영화의 심각한 악당 박노식이 서로를 보고 비웃는 것이다. <왜?>와 <집행유예>에 이르면 박노식표 영화가 볼 만한 영화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왕년의 액션배우 쓰러지다 허세 가득한 뻥까오리 백작, 영화인 납세자 리스트 상위 5위 안에 드는 부자이면서 가난한 자들의 애환을 슬퍼하고 불같은 성격에 굽힐 줄 모르는 마초 용팔이, 인간의 불건전한 악몽을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욕망. 이 위험한 혼돈의 배우 박노식은 1970년대 중반 긴급조치의 철퇴를 맞게 된다. 과거 검찰과의 불화는 그를 폭력영화배우 1호로 낙인찍었고, 검찰청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을 모두 깨버리며 박노식은 자신에게 쏟아진 오명에 분노를 표한다. 배우 출연 금지. 세상은 변해버렸다.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이소룡 영화. 무협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쓸고, 왕년의 액션배우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박노식이 탄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 김두한 시리즈로 떠오르는 액션배우가 된 이대근이 LA 교민 위문공연을 위해 비행기에 탔다가 왕년의 액션배우 박노식을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한다. 박노식은 과거 자신의 영화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배우나 스탭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나한테 한방 맞아주라.” 이대근에게 박노식은 주먹을 들이대며 말한다. “내가 다시 영화 찍으면 한방 맞아줘라.” 이대근은 흔쾌히 한방 맞기로 했고, 그 약속은 <돌아온 용팔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카인의 후예> <하얀 수염>에서 뒷머리를 부여잡고 고목이 거꾸러지듯 쓰러진 것과 똑같이 박노식은 풍으로 쓰러지고 만다. 병상에서 자신을 찾아온 시나리오작가에게 다시 한번 “한방 맞아주라”를 힘없이 말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이 글에 쓴 박노식의 사건과 그의 말들은 박노식의 자서전 <뻥까오리 백작(박노식 지음. 씨와날 펴냄, 1995)에서 인용되었고,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출간된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를 참고로 하였습니다.

[김중혁의 No Music No Life] 먼 곳의 아스라한 풍경

1회와 2회는 봤다. 3회부터는 도저히 못 보겠더라. MBC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얘기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보다는 ‘세살 재미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더 맞으려나)는 게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대하는 나의 자세여서 어지간히 관심이 가는 드라마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면 4회까지는 꾸준히 지켜보는 편인데, 이건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더라.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고,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민망한 화면을 목격했을 때처럼 눈 둘 곳을 모르겠더라.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정말 노래 잘 부르는 가수들인데, 모두 좋은 노래들인데, 내가 좋아하는 개그맨들이 매니저를 해주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든 걸까. 그게 다 내 얘기 같아서 그런 거였다. 나는 가수가 아니지만 가수와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는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평가를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탈락을 예감하며 근심하는 얼굴을 마음 편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거다. <나는 가수다>의 소설가 버전이 있다면? 아찔해 <나는 가수다>가 워낙 인기있다 보니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김중혁 작가님은 혹시 <나는 소설가다>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서 섭외를 받게 되면 응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당대 최고의 작가 일곱명 중에 들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문학적 취향이 남다른 PD의 안목 때문에 섭외를 받게 되면 심정이 어떨까. 응할 수 있을까. 상상이 시작됐다. (전략) 오랜만에 만난 작가 일곱명은 한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미션을 받게 되는데, (짜잔) 미션의 내용은 다름 아닌 세계명작소설을 자신만의 색깔로 다시 쓰기. 아뿔싸, 복불복 시스템으로 김중혁 작가에게 당첨된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걸 다시 쓰라고? 통째로? 읽는 것도 벅찬 <죄와 벌>을 다시 쓰기 위해 일주일 밤을 꼬박 새운 김중혁 작가는 청중평가단 앞에서 소설을 읽어내려가다가 그만 기절을 하고 마는데, 털썩… (후략)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PD님, 죄송하지만 저는 다음 기회에. 모든 작가는 각각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생각과 문체와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밤새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단 한명의 작가로 충분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다른 글을 쓰지만 세상에는 그 모든 세계가 필요하다. 나는 가수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 역시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건모를 김범수가 대체할 수 있을까? 이소라를 임재범이 대체할 수 있을까? 가수들에게 옛 노래들만 부르라고 하는 것도 가혹한 일이다. 누군가 불렀던 곡을 다시 부르게 하는 것은 인테리어가 모두 완성된 집에 들어가서 모든 걸 허물고 새로 공사를 하라는 건데, 공사가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해도 문제다. 매주 이런 비경제적인 일로 가수를 혹사시키는 게 과연 그럴 만한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가끔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 특집 ‘The Musician’처럼 빈 공간에 인테리어 공사하라고 했더니 완전히 집을 새로 지어버리는 바람에 보는 사람 감동의 눈물 쏙 빼는 공연도- 특히, 최백호씨와 함춘호씨와 심성락 선생님 말입니다- 있긴 있다만…). 그의 음악은 ‘원시음악’… 허공에 떠 있는 듯 30년 넘게 음악을 들어오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좋아했고, 좋아하는 노래는 반드시 셋 중 하나에 속한다는 거다. 듣는 순간 내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듣는 순간 선율이 만들어내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눈을 감게 되는 노래가 있고, 어떨 때는 듣는 순간 먼 곳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노래가 있다. 첫 번째를 근시음악이라 부르며 두 번째를 투시음악이라 하고, 세 번째를 원시음악이라 한다, 고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정했다. 하지만 노래 대신 가수가 또렷하게 보이는 노래는 절대 좋아할 수 없다. 야, 이 가수는 고음이 끝내주네, 이 가수는 또 어떤가, 기교가 아휴, 장난이 아니네, 그래, 노래를 참 잘 불러, 라고 생각할 때 그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이미 노래를 잡아먹어버린 거다. 내가 ‘루싸이트 토끼’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버스에서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하다가도 루싸이트 토끼의 노래만 나오면 나는 먼 곳을 봤다. 일산에서 버스를 타고 홍익대로 향할 때 손끝이 찌릿할 만큼 슬픈 <나에겐>을 들었다. 나는 합정역의 사람들과 그 너머의 거리의 풍경들이 일순간 멀어지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모든 게 아스라하게 느껴졌고, 나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그 노래만 들으면 합정역 앞의 풍경이 떠오른다. <손 꼭잡고>를 들을 때는 먼 곳의 맑은 하늘을 보았고, <꿈에선 놀아줘>를 들을 때는 별과 달을 보았다. 루싸이트 토끼의 쇼케이스를 진행하면서 나는 관객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오늘은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공연장 오른쪽 벽면이 부서지면서 먼 곳의 아스라한 풍경이 나타날 겁니다.” 실제로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상상마당도 어쨌든 다른 공연을 해야 하니까, 벽이 부서지는 공연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관객에게 먼 곳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상상하니까 벽 위로 하늘과 별과 달이 떴다.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을 듣기 시작한 지 3년째인데, 그들의 음악이 나와 함께 앞으로 걸어가고, 나와 함께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 기분이 묘하다.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지만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나는 그걸 느낀다. 나 역시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겠지. 우리는 어쩌면 음악들을 들으면서 우리의 변화를 실감하는지도 모르겠다. 음악과 함께 우리는 자란다. (3월에 발매된 싱글 <>에 이은) 그들의 세 번째 정규앨범이 나올 때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들은 어떤 음악을 들고 나타날까. 나는 그 음악을 어떻게 듣게 될까.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새 앨범을 내길 기다리는 시간, 레코드 가게에서 CD를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들의 음악을 상상하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이 음악을 듣는 시간이다. 귀에는 음악이 들리지 않지만 상상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노래들, 곧 만들어질 노래들, 수많은 뮤지션들 각각의 세계에서 쏟아져 나올 노래들, 그 노래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하다. 옛 노래들을 들으면서 오래전의 시간을 추억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아직까지는 내 주위의 수많은 뮤지션들의 새 노래를 기다리는 게 더 큰 즐거움이다.

첫도전, 마음으론 4년 내내 준비했다

전화를 걸어 ‘전세영씨’를 찾았더니 “우리 언니”라며 여동생이 받는다. 동생이 가르쳐준 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전세영씨가 아니라 ‘이후경(25)씨’가 받는다. 전세영은 지금은 퇴사한 선배 동료의 이름인데 그냥 예뻐서 썼단다. 젊은 필진의 등장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 이론과 예술사를 졸업했고, 지금은 출판쪽에 몸담고 있지만 영화 글쟁이로 오래도록 일해볼 각오는 되어 있다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해마다 한번씩 내봐야지 했는데 내자 마자 척하니 당선됐다. 젊은 필진이다. 기대된다. -올해 떨어졌으면. =당연하게 생각했을 거다. (웃음) 그런 다음 내년에 또 해봐야지 생각했을 거다. 혼자서 공부하는 건 어렵다. 이런 계기는 공부를 하게 해주지 않나. 처음 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으론 4년 내내 준비했다. -어떤 기준으로 쓸 영화를 골랐나. =작품비평은 가장 최근에 본 것 중 개인적으로 감동적이었던 것을 골랐다. 남들에게는 덜 훌륭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보면서 울었다. 이론비평은… 학교 다닐 때 친구들에게 의견을 이야기했다가 비판당한 적 있었던 소재를 골랐다. 그때는 너무 나이브하고 허술하다고 비판받았는데. (웃음) 그 뒤로 생각하고 고민한 다음 써봤다. 부끄럽지 않을 정도만 되면 좋겠다. -어떤 영화가 좋나. =로메르!! 그의 영화는 편하고 좋다. 보면 행복하고. 행복해지기 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떤 평론이 좋나. 어떻게 쓰고 싶나. =내게 솔직한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아는 만큼 쓰고 싶다. 나를 아는 주변인들이 봤을 때 그 글이 딱 나처럼 보인다면 좋겠다. 이후경 데이빗 핀처가 테크놀로지를 사유하는 방식 데이빗 핀처의 최근 두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와 <소셜 네트워크>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외도처럼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비록 다음 영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를 통해 스릴러로 돌아온다고 해도 말이다. 그가 가장 정통한 장르는 흔히 스릴러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이 최근 두 작품과 그 전에 만들어진 <조디악>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친밀감이 느껴진다. 물론 이는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테크니션으로서 영화를 만들어 온 핀처의 스타일은 세 영화 모두에서 이어진다. 핀처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그건 과잉된 스타일을 통해 테크놀로지를 동시대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착각의 용기를 엉뚱하게도 <셜록>이란 영국 드라마를 보다 얻었다. <셜록>은 BBC에서 셜록 홈즈 시리즈의 몇몇 대표작들을 묶어 현대물로 번안한 드라마다. 빅토리아시대에서 아이폰시대로 이사한 셜록 홈즈는 아이폰, 블로그, 니코틴 패치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것들은 홈즈의 허기와 나르시시즘을 지탱해주는 현대의 발명물들이다. 그렇다면 탐정소설에 있어 최고의 고전이라 할 만한 셜록 홈즈가 테크놀로지의 시대로 진입했을 때, 고전의 고유한 분위기는 무엇으로 대체될 것인가. 동시대에 대한 코멘트를 하기 위해 드라마는 어떤 스타일을 취해야 하는가. 이는 핀처의 최근작들에 대한 인상을 설명하려 할 때도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드라마가 다듬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셜록>의 중심 아이디어를 쉽게 알 수 있다. 웰메이드 드라마의 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BBC는 이 드라마의 정식버전을 내기 전 파일럿 버전을 만든 바 있다. 두 버전의 차이는 바로 속도감이다. 파일럿 버전은 다소 느슨한 리허설처럼 진행된다. 그런데 정식 버전에서는 모든 요소들에 가속이 붙으면서 훨씬 타이트한 구성을 이루어진다. 이 드라마의 극적 완성도는 속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성된 버전에서 배우들의 대사가 빨라진 것은 물론이고, 편집과 촬영의 양면에서도 속도감이 월등히 향상된 걸 느낄 수 있다. 단순히 극의 전개가 빨라졌다는 말이 아니다. 전체 구성은 파일럿 버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영상이 빠른 속도의 리듬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배우의 대사를 포함한 여러 기술적인 측면을 다듬은 것이다. 특히 터치 모바일 유저들이 친숙하게 느낄만한 ‘아이폰스러운’ 줌인과 자막사용, 장면전환에서는 일상적으로 친숙하게 보아온 비주얼 테크놀로지의 운동감과 속도감이 느껴진다. 영상의 그 빠른 리듬감에 시청자들은 감각을 내맡길 것이다. 그리고 그 리듬감이 드라마가 선사하는 재미의 핵심을 이룬다. 시간적 배경이 19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면서 <셜록>은 동시대를 담아내기 위해 테크놀로지의 여러 속성 중 속도를 선택했다. <셜록>을 본 뒤 뒤늦게 <소셜 네트워크>의 빠른 리듬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핀처 역시 동시대의 테크놀로지를 영화적으로 구현해내기 위해 속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또 <소셜 네트워크>에서 <벤자민>, <조디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외도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에 대한 각기 다른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셜록>이 탐정 문학을 과학수사 드라마로 번역하면서 동시대의 테크놀로지의 속도를 텔레비전 드라마가 어떻게 체화할 수 있을지 시도해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예 ‘페이스북 창안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셜 네트워크>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속도를 영화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이 영화를 만들며 데이빗 핀처가 배우들에게 대사속도를 높여달라고 주문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이 영화의 한글자막은 영화관람을 방해할 정도로 엄청난 양과 속도로 전개된다.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자막을 통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영화가 갖고 있는 빠른 속도의 리듬 그 자체를 느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대사의 속도가 가장 빠른 장면 중 하나다. 술집에서 마크 주커버그와 그의 여자 친구 에리카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광속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주커버그의 대사는 특히 더 빠르다. 이토록 빠른 속도로 영화를 시작하는 건 대중영화로서는 다소 불친절힌 태도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영화로서의 태도에 대한 부담감조차 던져버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속사포로 대사를 쏟아내는 두 인물을 보여주길 계속한다. 그러다가 영화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크레딧 시퀀스에서 갑자기 속도를 늦춘다. 술집에서 기숙사까지 걸어가는 주커버그를 보여주는 비슷한 길이의 쇼트들이 여러차례 길게 이어지는데, 그 느릿함에서 이상한 긴장감이 발생한다. 기숙사로 들어간 주커버그는 곧장 노트북을 펼치고, 다시 영화는 음악과 함께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영화에 다시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크레딧 시퀀스의 간격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마크 주커버그는 교정을 통과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특히 <소셜 네트워크>가 염두에 두었던 테크놀로지의 속도란 인터넷과 모바일 같은 네트워킹 기술의 속도였을 것이다. 영화가 고민했던 것도 넷 상에서처럼 말의 속도와 생각의 속도와 말이나 생각을 실행할 때 발생하는 운동 속도의 삼박자를 어떻게 일치시켜 보여줄 수 있을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빠른 대사 속도는 인터넷 시대의 속도를 물리적으로 전달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현실은 속도전이다. 모두에게 오픈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빨리 결승점에 도달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경기의 법칙이 더 냉혹하게 작용한다. 이를 마크 주커버그는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윙클보스 형제는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다 해도 시대착오적이고 솔직하지 못한데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현실 원칙에 얽매여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속도는 주커버그가 네트워크 상의 속도를 대사를 통한 물리적인 질감으로 전달하면서 만들어지는데, 윙클보스는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그게 그들이 이 영화에서 우습게 보이는 까닭이다. 윙클보스 형제가 참가한 런던에서의 조정 경기 장면은 이 영화에서 잉여적인 부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조정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를 핵심적으로 요약한다. 미니어처 모드로 촬영된 이 장면은 말 그대로 속도전의 재현이다. 조정 같은 스포츠 경기만한 속도전이 또 있을까. 선수들이 직접 노를 젓고 관람객들이 육성으로 응원하는 이 스포츠는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전쟁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그러나 그 차원이 반드시 상위의 질서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조정 경기 장면에서는 스포츠 경기와 인터넷 상에서의 속도전, 둘의 위상이 뒤바뀐다. 인터넷이야말로 그 자체가 속도전이고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마크 주커버그가 고안한 페이스매쉬는 스포츠 경기처럼 진행된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냉혹한 속도전이 스포츠 경기에 비유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스포츠 경기에서는 냉혹함이 증발해버린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속도전쟁에 비하면 신사적인 예절을 지키며 경쟁해야하는 스포츠는 진짜 스포츠, 인터넷이라는 더 현실적인 스포츠를 흉내 낸 미니어처일 뿐이다. 페이스북을 누가 더 빨리 만들어 더 빨리 보급하느냐가 진짜 스포츠다. 윙클보스는 속도만 느린 게 아니다. 그들의 미숙함은 무엇이 더 현실에서 의미 있는 경기인지, 진짜 스포츠에서는 어떤 무질서함과 살벌함이 통용되는지에 대해서마저 무지한 데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속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속도 자체는 어떤 물리적인 속성을 명시하는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속도에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소셜 네크워크>에서 속도는 인격의 일부분이다. ‘실시간 블로깅’은 주커버그의 일부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연애상태를 실시간으로 게시할 수 있는 사용자들에게도 신속함은 곧 그들의 인격과 직결된다. 그들은 인터넷의 속도를 빌어 자신의 인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유하고, 인정받는다. 다시 말해 인정투쟁이 곧 인터넷의 속도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커버그가 에리카와 헤어진 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에리카에 대한 험담을 블로그에 올릴 때, 또 술집에서 재회한 에리카에게 보기 좋게 당한 뒤 기숙사로 돌아와 페이스북의 신속한 확장을 주장할 때, 주커버그는 속도가 인정투쟁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상대보다 빨리 상대보다 먼저 결승점을 통과해야 우승을 하듯이, 상대보다 빨리 실연을 고백하고, 상대보다 빨리 상처를 극복하고, 상대보다 빨리 복수하고, 상대보다 빨리 더 나은 사람을 만나고, 상대보다 빨리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속히 선전해야 한다. 속도전이 되어버린 인정투쟁이야말로 스포츠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인정투쟁이 속도전이 되어버렸을 때, 우리는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가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테크니컬 하지만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인정투쟁이란 것 자체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감정을 오래 지속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속도전의 인정투쟁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자문할 때, 영화는 주커버그의 표정으로 답한다. 제시 아이젠버그의 연기는 최소한의 근육들로 감정의 신속한 순환과 소비를 표현해내는 데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계속해서 누르는 ‘새로고침’ 버튼처럼, 그의 얼굴도 계속해서 새로 고쳐진다. 하지만 유일한 친구,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었던 사람들, 돈을 받고 자신을 옹호해 준 변호사, 그리고 마지막까지 호기심어린 친절을 베풀었던 변호 참고인마저 방을 나간 뒤 홀로 남은 주커버그의 얼굴은 텅 비어버린다. 그의 눈빛은 노트북 화면 너머의 어떤 지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에리카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주기적으로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는 모습은 크레딧 시퀀스의 리듬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주커버그가 만든 ‘페이스매쉬’나 페이스북이 모두 에리카를 향한 인정투쟁이었다면, 그 인정투쟁을 어떤 속도로도 쟁취할 수 없을 때 정지된 얼굴에는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 헛걸음질치는 욕망만이 남아있다. <소셜 네트워크>는 새로운 속도의 시대 속에서 인정투쟁이란 고전적인 주제를 새로운 속도로 풀어낸 셈이다. 얼굴은 그러나 <벤자민>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 요소다. <벤자민>은 테크놀로지를 사유하기 위해 얼굴을 끌어들인다. <소셜 네트워크>의 오프닝 만큼이나 <벤자민>의 오프닝 역시 이 영화의 탐구의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벤자민>은 클로즈업 화면에서 시작한다. 나이 든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눈 클로즈업에서 서서히 줌 아웃하면서 얼굴 클로즈업까지 한 쇼트로 끌고 가는 오프닝 쇼트는 곧장 이 영화가 얼굴을 중요하게 다루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벤자민>에서 브래드 피드의 얼굴은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어떻게 배우의 얼굴이 갖고 있는 고전적인 아우라를 유지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기 위한 섬세한 시험장이다. <벤자민>의 편집이나 촬영은 사실 평범한 편이며, 내러티브에도 소설에 비해 풍부함이 축소된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배우의 얼굴의 배합 비율에 대해 심하게 파고든 영화도 드물 것이다. 많은 애니메이션과 3D 영화들이 기술을 전달하기 위해 플롯과 표정을 쉽게 포기해 버릴 때, <벤자민>은 애니메이션 기술이 얼굴의 표현력을 얼마만큼 강화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한 인물을 모든 나이에 걸쳐 묘사하기 위해 이 영화가 들이는 노력은 어마어마하다. 영화의 특수효과팀은 주름의 정도, 피부의 질감, 머리카락 색의 농도, 검버섯의 면적 등 사소한 세부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벤자민이란 인물을 재현했다. 그것도 한 시기의 얼굴만 만들었다면 좀 더 쉬운 일이었겠지만, 나이가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좀 더 변형된 막을 사용해야했다.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브래드 피트에 씌운 멤브레인 막은 조금만 잘못 손대도 망가질 정도로 섬세해 정밀한 분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런 고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벤자민 버튼의 얼굴은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벤자민의 얼굴에는 어딘지 지나친 면이 있다. 이 지나침은 과하게 섬세한 얼굴표면의 변화에서 비롯되는데, 관객이 육안으로는 짚어낼 수 없는, 거의 무의식적으로만 느껴지는 수준이다. 이는 말하자면 잉여다. 영화는 거의 리얼리즘의 강박에 붙들린 것처럼 노화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단순히 나이의 변화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말 그 나이를 살고 있는 인물의 느낌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늙은 벤자민의 몸은 브래드 피트의 몸이 아니라 어느 노인의 몸을 빌려와 합성한 것이다. 이는 영화적으로 필요한 묘사의 수준을 넘어선다. 하지만 핀처의 영화들에서는 이 잉여가 영화의 키를 쥐고 있을 때가 많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조정 경기 장면이 인터넷에서의 속도전이 사실상의 현실 감각을 지배해 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면, <벤자민>에서는 벤자민의 얼굴이 애니메이션 테크놀로지의 시대로 진입했을 때 배우의 얼굴과 표정이 어떤 기술적 변화를 겪게 되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 변화란 그렇게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배우의 얼굴이 테크놀로지에 모두 자리를 내어줄 필요는 없으며,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벤자민>에서 벤자민도 브래드 피트라는 실제 배우의 존재를 빌려서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영화 속 캐릭터란 허구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어떤 배우의 물리적인 몸을 빌려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란 배우와 허구적인 것이 만나 발생하는 효과 같은 것이다. 벤자민 역시 컴퓨터 그래픽과 배우의 얼굴과 대역배우의 몸과 관객의 심리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만들어진 하나의 효과로서 존재한다. 벤자민을 탄생시킨 건 방대한 양의 정교한 그래픽 기술이기도 하지만, 벤자민을 연기하는 배우이자 개별적 인격체로서의 브래드 피드 덕분이기도 하다. 배우를 어떤 역할이나 캐릭터로 기억할 수 있듯이, 역할이나 캐릭터 역시 배우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육체나 태도를 통해 기억될 수 있다. 관객은 벤자민이 가상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한편으론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임을 전제하고 그를 바라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역의 몸과 그래픽 기술을 버무려 만든 벤자민이 진짜 존재하는 인물처럼 실감되는 것이다. 여러 조각들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게 배우의 존재감이다. 관객은 브래드 피트라는 하나의 배우를 관찰하듯이 벤자민 버튼을 관찰한다. 특히 영화에서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그 인물이 잡지 사진에서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계속 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광고 지면에서는 배우의 유명세만 필요 없다면 얼마든지 그래픽으로 완벽한 얼굴을 찍어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동성을 갖고 있는 영화에서는 배우의 얼굴은 여전히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아무리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표정은 배우의 얼굴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나 <벤자민>과 달리 그보다 일찍 만들어진 <조디악>은 핀처의 필모그래피에서 테크놀로지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유일한 영화다. <세븐>의 소재가 된 사건으로 돌아간 핀처는 모든 테크놀로지를 걷어내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온갖 기교들도 덜어내고, 157분에 걸쳐 단순히 사건을 나열한다. 하지만 이 영화마저 테크놀로지를 또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다. 이제까지 얘기한 두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속성을 하나는 리듬으로 다른 하나는 얼굴이란 표면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본 것이었다면, 이 영화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억제하고 다른 방향을 택한다. 테크놀로지와 속도의 측면에서 <소셜 네트워크>가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매체와 어느 정도 친밀성을 갖는다면, <조디악>은 그와 반대로 드라마들에 반작용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안정적인 장르로 자리 잡은 과학수사물들은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전시하거나, 의사, 검시관, 과학자, 심리학자 등의 주인공들을 앞세워 고도의 기술적 전문성을 표방한다. 반면 <조디악>은 근대적 합리성을 지닌 과학적 도구들을 은근 슬쩍 옆으로 치워버린 채 단지 퍼즐 때문에 사건에 매달리는 만평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를 등장시킨다. 그레이스미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신문을 스크랩하고 먼지 쌓인 창고를 뒤져가며 범인을 좇는다. 2010년 버전의 홈즈보다도 더 오래된 방법으로. 물론 이는 1970년대에 일어난 사건을 거의 고증하듯이 충실하게 재현하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수사물이 넘쳐나는 지금의 세기에 삼십 년이 지난 사건을 크게 윤색하지 않고 그대로 놓고 보여준 까닭은 무엇일까. <조디악>은 사건들에 무리한 논리를 부여하려하지 않는다. 대신 단지 사건들을 늘어놓는 방식을 통해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보가 이동하는 방식, 사건들의 점과 점이 이어지는 방식이 드러낼 뿐이다. 어차피 어디까지가 조디악이 저지른 살인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도 여전히 논란거리인 실제의 미제 연쇄살인사건을 토대로 한 영화가 사건들을 질서정연한 이야기로 억지로 정리해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02년에는 DNA 분석까지 했지만 조디악 킬러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사건의 점들을 이어보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폴 에이버리와 데이빗 토스키가, 후반부에서는 그레이스미스가, 사건의 점들을 잇는 역할을 한다. 그레이스미스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후반부의 리듬감은 특히 훌륭하다. 조디악의 편지가 대중으로부터도 잊히고 조디악 사건이 관계자들로부터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뒤, 그레이스미스는 각 관할 조사관들, 필적감정가, 옛 동료 기자, 담당 검사를 찾아다니며 직접 단서들을 조합해 나간다. 이런 그레이스미스의 영화적 운동은 점들 사이에 벌어져있던 거리를 조금씩 좁혀나간다. 하지만 토스키도 강력반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필적감정가도 불명예퇴직자였던 것을 알게 된 그레이스미스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살인마 조디악이 아니라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바람에 날려 보내듯 과거의 흔적을 서서히 조금씩 지워나가는 시간. 그러한 시간을 물리적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긴 러닝타임은 그러므로 당연하게 느껴진다. 속도와 기술의 시대에 이런 느린 속도로 범죄 사건을 늘어놓은 대로 보고만 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넷이나 게임, 모바일의 시대에 영화는 즉각적인 내비게이션의 기회가 적기 때문에 다른 매체와 비교해 수용자의 인내심을 더 많이 요구한다. 유혹적인 스펙터클 없이 두 시간이 넘는 영화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조디악>은 그런 물리적 조건 아래에서도 지루하게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을 밀고 나간다. <조디악>에서 핀처의 과잉적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시간을 곧이곧대로 나열하는 방식일 것이다. 마치 <벤자민>에서 얼굴의 주름을 하나하나 세공하는 방식을 선택했던 것처럼, <조디악>은 수십년의 시간을 시간 단위, 주 단위, 연 단위로 쪼개어 늘어놓는다. 단순히 서사적 흥미나 스펙터클의 유혹을 넘어서 물리적인 시간을 강조하는 것이 <조디악>의 가장 영화적인 면모다. 리얼타임을 표방하는 <24시> 같은 드라마도 드라마틱한 극적 구조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시간의 탑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조디악>이 롱테이크로 시간을 지탱하는 예술 영화는 아니다. 쇼트도 많고 편집도 느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조디악>이 나름의 리듬을 통해 시간의 무게를 전달하는 게 더 신기해 보인다. 한 가지, 범인의 심리에는 별다른 관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는 무심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범인을 좇는 이들의 욕망, 특히 그레이스미스의 욕망에만 약간의 관심을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 무심함 때문에 영화가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는 사건의 표면의 아래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범인의 욕망,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그런 것들을 굳이 영화 속에 정서로 끌어들여 보는 이에게 억지로 심어주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어떤 과학적 수단과 근대적 질서와 법적 정의를 동원해서도 풀 수 없는 심원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조디악>은 마치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서를 조작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실재를 전달하기 위해 그냥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테크놀로지의 시대에도, 혹은 테크놀로지의 시대일수록, 테크놀로지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핀처의 최근작들은 테크놀로지의 효과에 대해 사유하면서도 끝에는 테크놀로지로도 어쩔 수 없는 허무한 지점에서 멈춰 선다. <조디악>의 서행하는 리듬은 <소셜 네트워크>의 초특급행의 리듬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의 속도는 완전히 반대다. 하지만 전혀 다른 속도의 두 영화에는 모두 어떤 공백,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다. 멍한 눈으로 모니터 너머를 응시하는 주커버그와 비로소 범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그레이스미스. 두 사람을 비추는 각 영화의 마지막을 지배하는 정서는 허무함이다. 너무 멀리 와버린 이 자리에서, 그들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기서 멈춰서는 핀처의 영화들은 앞으로 무엇을 더 보여줄까. 잔혹한 스릴러로 돌아갈 그의 다음 영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