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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서울디지털포럼 2011' 개막(종합)

(서울=연합뉴스) 이연정 기자 = SBS가 주최하는 '서울디지털포럼(SDF) 2011'이 25일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초(超) 연결사회 - 함께 하는 미래를 향하여'를 주제로 개막했다. 이날 오전 열린 개막식에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한나라당 황우여 원내대표,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 윤세영 SBS 미디어 그룹 명예회장 등 국내외 인사 1천여명이 참석했다. SDF 집행위원장인 우원길 SBS 사장은 개회사에서 "인류는 서로 연결의 범위를 확대하며 문명을 발전시켜왔고, 문명이 발달할수록 연결의 범위는 커졌다"면서 "초연결사회는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하며 변화와 발전의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축사에서 "올해는 '스마트 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이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시기"라면서 "올해 (포럼) 주제인 '초연결사회'는 스마트기기와 모바일 혁명이 만들어가고 있는 현재의 디지털 환경을 분석하고 미래 사회상을 전망하는 핵심 화두"라고 말했다. 이어진 축하 공연에서는 미국 출신 지휘자 에릭 휘태커(Eric Whitacre)가 인터넷 가상합창단 프로젝트인 '빛과 금(Lux AurumQue)'을 선보였다. '빛과 금'은 전 세계 12개국, 185명의 연주자를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합창 프로젝트로, 지난해 유튜브에서 공개됐을 당시 60일만에 100만 클릭을 넘어설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개막식이 끝난 뒤 '토크쇼의 제왕'으로 불리는 미국 유명 방송인 래리 킹이 '연결자들'이란 주제로 기조연설에 나서 "첨단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연결'만큼 중요한 건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제가 블라디미르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과 감정적인 교류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연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면서 "두려워하지 말고 위험에 맞서 끊임없이 연결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7일까지 사흘동안 이어지는 이번 행사에서는 이밖에 ITㆍ미래학자 니컬러스 카,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의 창시자인 앨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포스퀘어 공동창립자 나빈 셀바두레이, 여성학자 글로리아 스타이넘 등이 연사로 나선다. 국내 인사 중에서는 황창규 지식경제부 R&D 전략기획단장, 김흥남 한국전자통신연구원장, 배준동 SK 텔레콤 네트워크 CIC 사장, 권희원 LG 전자 홈엔터테인먼트 사업본부장, 이제범 카카오 대표이사 등이 특별 강연을 할 예정이다. 올해로 8회째를 맞는 서울디지털포럼은 디지털 시대의 흐름을 읽고 혁신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유해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 위한 행사로, 매년 세계적인 연사들이 참석해왔다. rainmaker@yna.co.kr (끝) <연합뉴스 긴급속보를 SMS로! SKT 사용자는 무료 체험!> <저작권자(c)연합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신두영의 보라카이!] 지선언니, 이제 편하게 야구보세요. 外

송지선 MBC 스포츠플러스 아나운서가 5월23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자살은 어쩌면 막을 수도 있었다. 트위터에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올렸었다. 누구의 잘못을 탓하기 이전에 야구팬이라면 안타까움이 클 것이다. 그녀가 죽었던 날 <베이스볼 투나잇 야>를 진행한 김민아 아나운서가 울먹이며 클로징 멘트를 했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트위터에 조잘조잘 글을 올리던 송지선 아나운서는 없지만 여전히 그녀의 트위터를 팔로잉하고 있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에 등장한 괴물이 경북 칠곡에 나타날 판이다. 캠프 캐럴 부지에 베트남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에이전트 오렌지(고엽제)를 매립했다는 퇴역 주한미군 스티브 하우스(54)의 고발이 있은 뒤 여기저기서 고엽제에 대한 의혹이 쏟아졌다. 1968년 한국군은 철모에 고엽제를 담아 손으로 DMZ에 뿌렸다고 한다. 그때 뿌렸던 고엽제의 양은 1999년의 국방부 발표보다 50배나 많다고 한다. 고엽제가 이렇게 난리인데 고엽제전우회 아저씨들은 왜 가스통을 들고 미대사관 앞으로 가지 않는지 모르겠다. 유럽 축구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5월29일 일요일 새벽 3시30분에 열린다. 2008년 이후 다시 결승전에서 만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FC바르셀로나가 영국 런던의 웸블리구장에서 격돌한다. FC바르셀로나의 광팬인 <씨네21> 편집장 이하 축구덕후 기자들은 함께 모여서 경기를 관전할 예정이다. 그런데 박지성이 선발출장하지 않으면 어쩌지. 퍼거슨 할배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야겠다. 제발 선발~ 선발~.

사나이여 영화행 급행열차를 타라

당신이 새로 발견해야 할 이름 박노식. 한국영상자료원에서 6월19일까지 계속되는 기획전 ‘발굴, 복원 그리고 초기영화로의 초대’의 ‘복원전’에서는 ‘감독 박노식’의 면모가 드러난다. 테크니스코프 복원작 <집행유예>를 비롯해 <육군사관학교>, <하얀 수염>, <왜?>, <광녀>, <폭력은 없다>, <방범대원 용팔이> 등 박노식 감독의 영화 7편이 상영될 이 섹션을 두고 한국영상자료원쪽은 “감히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 단언한다. 이에 한국 액션영화에 대한 혈기 왕성한 탐식가 오승욱 감독이 박노식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거친 배우 시절부터 불균질한 매력으로 넘쳐나던 감독 시기까지, 그의 진면모를 훑는다. 한편 이번 복원전의 부대행사로 6월5일(일) 오후 6시에는 <집행유예> 상영과 함께 오승욱 감독의 해설이 이어지며, 6월12일(일) 오후 6시에는 <광녀> 상영 뒤 류승완 감독과 본지 주성철 기자의 대담이 펼쳐진다. 1970년대 자신만의 넘쳐나는 열정으로 액션영화를 찍었던 박노식 감독을 재발견하는 즐겁고도 놀라운 시간이 될 것이다. 초등학생 때 학교를 오가며 보았던, 콜타르를 먹인 시커먼 판자벽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들로부터 박노식에 대한 나의 기억은 시작된다. 매처럼 부리부리한 두눈을 치켜뜨고 포스터 밖을 노려보는 사나이. 그 사나이가 출연하는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의 인상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지 기억날 정도로 기괴했었다. 커다란 붓글씨로 박력 넘치게 휘갈겨 쓴 <왜?>라는 제목, 쇠고랑을 찬 두손을 높이 쳐들고 그가 분노에 찬 눈으로 누군가를 노려보는 <집행유예>. 집행유예란 영화의 제목이 하도 인상적이어서 나는 어머니에게 집행유예의 뜻을 물어보기까지 했고,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법정에 출두하는 수인들의 행렬을 교실 창문 너머로 바라보면서 나의 머릿속에는 <집행유예> 영화 포스터가 어른거렸다. 지금은 40대에 접어든 그의 아들 박준규가 어린이였을 무렵. 아버지와 함께 우유 광고에 출연한 박준규의 머리를 박노식이 쓰다듬으며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하던 장면도 기억이 난다. 내 어린 시절 박노식은 용팔이였고, 용팔이란 이름의 폭력배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 이전까지 용팔이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그리고 나의 기억과는 다른 기억이 하나 있다. 내 또래 친구의 초등학생 때 기억 속 박노식은 아버지의 강퍅한 평안도 사투리에서 시작된다. 1970년대 중반, 친구의 아버지는 텔레비전에서 박노식이 나오기만 하면 “저 전라도 놈!” 하며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고 한다. 박노식은 지역감정의 증오에 찬 친구 아버지의 시선 속 전라도 출신 영화배우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50년대 중·후반 영화계에 데뷔한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있었다. 장동휘, 박노식, 허장강, 독고성, 이대엽 등등. 그들 중 신성일을 제외하고는 모두 80년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져버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들 중 박노식은 숨막히는 악의를 발산하는 악역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 남성들의 고단함을 제대로 표현한 서민배우로, 거침없이 주먹을 휘둘러대는 액션배우로, 70년대 중반까지 기괴하고 불균질한 액션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으로 거침없이 활력을 쏟아내던 사람이었다. 박노식을 절대적으로 좋아하는 한국 배우라 말하고 다니는 영화광의 입을 빌려 부족하나마 그의 약전(略傳)을 기록한다. 하지만 주의하시라. 무릇 영화광이란 쓸데없는 말을 잘도 지껄이는 자들임을. 멜로배우에서 액션배우로 거듭나기까지 1940년대 초. 전남 여수의 신작로를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뽀얀 얼굴의 10대 소년이 머리에 나까오리라 불리는 하얀 중절모를 쓰고 하얀 양복을 위아래로 빼입고 백구두까지 신고 으스대며 걸어간다. 길가의 어른들이 소년의 이런 모습을 그냥 보고 지나칠 리 없다. 손가락질을 해대며 “저놈 봐라. 학생이 나까오리까지 잡숩고, 건방진 놈이시.” “저 놈 허세가 보통이 아니네.” “저놈 뻥 좀 봐라. 저놈이 쓴 건 나까오리가 아니라 뻥까오리여.” 소년의 허세를 보고 어른들이 질책하자 소년은 커다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남이사.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뭔 상관이여” 하며 자신을 비웃으며 붙여진 뻥까오리에, ‘내가 하얀 양복을 입고 다니니 백작’이라며 둘을 합쳐 스스로 ‘뻥까오리 백작’이라고 좋아한다. 이 모양내기 좋아하고 허세가 보통이 아니었던 소년은 해방과 여순사건, 한국전쟁의 풍파에서 살아남고, 여수에 공연 온 악극단의 연극을 보고 반하여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다. 청년 박노식은 배우가 되고 싶었다. 그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피아골>의 이강천 감독이 그가 악극단에서 하는 연기를 보고 자신의 영화에 출연을 제의한 것. 이강천 감독의 전쟁영화 <격퇴>(1956)로 그는 영화에 데뷔한다. 몇편의 영화에 출연을 하고 인기가 오르자 새내기 배우 박노식의 마음속에 불만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가 이름을 얻게 된 영화들이 멜로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권투와 운동으로 다져진 젊은 육체를 속시원하게 써먹을 수 있는 액션영화에 출연하고 싶었다. 그는 당시 최고의 액션영화 감독 정창화에게 매달렸다. 박노식을 멜로영화 배우라 생각했던 정창화 감독은 처음에는 썩 내켜하지 않다가 그가 하도 매달리니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에서 황해의 부하, 즉 단역으로 출연하라고 한다. 멜로영화에서는 주연급이었기에 마음이 상했지만, 그는 주인공 황해를 배신하고 탈출하는 2분짜리 격투장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소년 시절 뻥까오리 백작이라 놀림을 받았던 그 차림 그대로 촬영장에 나타났다. 온통 하얀색 의상에 하얀 장갑까지 낀 그를 보고 정창화 감독은 촬영하면 그 하얀 옷 다 버릴 텐데, 했지만 그는 황해에게 온 힘을 다해 얻어맞는다. 맞고 일어나서 맞고, 또 맞고. 너무나 치열하게 얻어맞아, 원래 예정했던 영화 속 러닝타임 2분을 오버해서 약 10분 분량으로 감독에게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고, 액션배우로 거듭나게 됐다. 멜로배우의 딱지를 떼어버린 박노식은 무시무시한 악역배우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데,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1964)에서는 벙어리 김진규와 최은희를 학대하는 방탕한 부잣집 아들로, 장일호의 <석가모니>(1964)에서는 싯다르타로 출연한 신영균을 질투하여 괴롭히는 동생으로 출연하여 악의를 마음껏 발산한다. 그뿐이 아니었다. 신경균의 <마도로스 박>(1964), 임원식의 <배신자 샹하이 박>(1965)에 출연하여 마도로스 박 또는 샹하이 박이라 불리는 선원 복장에 파이프 담배를 물고 주먹을 휘두르는 의리의 뱃사나이가 되어 액션배우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카인의 후예>로 대종상 남우조연상 수상 1968년 4월22일 새벽 1시. 대구의 금호 관광호텔 나이트클럽에서 폭행사건이 일어났다. 영화배우 박노식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 넘어져 호텔 깡패가 자신을 때렸다고 생트집을 잡아 호텔의 기물을 부수는 난동을 부렸다는 것이다. 액션영화 배우로 이름을 날리는 동시에 크고 작은 폭행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박노식이 또 폭행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며칠 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유현목의 <카인의 후예>(1968)에 출연하고 있던 박노식과 김진규, 장동휘가 그날의 촬영을 끝내고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다. 10년차 배우 박노식은 좋은 작품이라 생각했던 유현목의 <김약국의 딸들>(1963),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1964) 같은 작품들에서 항상 악역이거나 성격 있는 조연이었다. 그는 아쉬웠다. 이번에 촬영하는 <카인의 후예>는 김진규가 주연이고, 장동휘와 자신이 조연이긴 했지만 자신이 맡은 역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출연했던 그 어떤 영화보다도 연기에 욕심이 났고 대종상을 타고 싶었다. 술에 취한 김에 그는 술자리를 얼어붙게 만들어버릴 말을 내뱉고 만다. “두 형님들 날 싸가지없는 놈이라 욕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잉” 하고는 박노식은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김진규와 장동휘를 노려본다. “이번 대종상은 나가 꼭 타야 쓰것는디, 형님들이 양보하쇼. 그리고 형님들이 암만 몸부림쳐도 말입니다잉. 이 영화에서 역할로 보나 비중으로 보나 나의 연기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잉. 아예 단념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런 천하의 당돌한 말이 어디 있는가? 점잖은 선배 김진규는 태연하게 알았다며 받아 넘겼지만, 천하의 장동휘가 어떤 사람인가? 이따위로 막가는 후배를 그냥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박노식의 성격이 불같다면 장동휘는 활화산이다. 장동휘 왈.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이 싸가지없는 새끼야!!” “타라면 누가 못 탈까봐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놈의 새끼 보셨습니까? ” 박노식이 이왕 저지른 것 끝까지 간다며 대드는 순간, 장동휘는 자기 앞에 놓여 있던 술병을 들어 박노식의 머리에 내리친다. 선혈이 흐르고 술집은 아수라장이 된다. 천한 머슴으로 일생을 살아온 하얀 백발의 머슴 도섭 영감(박노식)은 이렇게 세상이 바뀔 줄 몰랐다. 붉은 완장을 차고 세상을 호령하고 부자 놈들을 무릎 꿇게 하다니.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비록 천한 머슴의 딸이지만 너무도 아름답고 현명한 문희는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광기에 차서 날뛰는 아버지 도섭 영감에게서 돌아서버린다. 딸이 변한 것이 김진규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를 증오하고 질투하는 박노식은 자신에게 친절했던 옛 상전의 아들이자 딸이 사랑하는 남자이며 무산자 계급의 적이라 증오해야 하는 김진규와 땀과 흙범벅이 되어 싸움을 한다. 늙었지만 힘이 장사인 그는 마지막 순간 김진규를 죽이지 못하고(죄의식 때문일까?) 그가 가진 모든 힘을 한순간에 소진해버리고 고목나무처럼 풀썩 쓰러져버린다. 폭력사건으로 그의 이름에 금이 가긴 했지만 박노식의 생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카인의 후예>에서 도섭 영감으로 출연한 박노식은 그해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한다. 폭발하는 에너지와 광기를 제대로 표현해낸 것이다. 60년대 한국 서민 남성의 고단함 대변한 용팔이 캐릭터 60년대 후반. 이제 박노식은 거칠 것이 없다.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미남배우들 옆에서 성격배우로 남아 만년 조역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박노식은 날기 시작한다. “나가 전라도에서 올라온 용팔인데 말이시 서울 종로 바닥에서 제일 쎈 놈이 뉘기여!” 김효천의 <팔도 사나이>(1969)에서 하얀 한복 바지저고리에 도리구치를 눌러 쓰고 전라도에서 올라온 사나이 박노식은 김두한 역의 장동휘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지지만, 관객의 머릿속에는 전국 팔도에서 모인 주먹깨나 쓴다는 사나이 중,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껄떡거리는 용팔이가 남았다. 데뷔 초기 전라도 사투리의 억양 때문에 녹음실에서 얼마나 수모를 받았던가. 당시 주연급 배우들이 성우의 목소리를 빌려 자신의 캐릭터를 구축할 때 박노식은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고집하여 더빙을 했다. 그런 그가 이제 영화에서 마음껏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도 되는 용팔이라는 캐릭터를 만난 것이다. 이듬해, <팔도 사나이>의 속편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주연은 김두한 역의 장동휘가 아니다. 김두한의 이야기도 아니다. 전편의 조연이었던 용팔이가 주인공인, 편거영의 전혀 다른 영화 <돌아온 팔도 사나이>(1969)가 탄생한다. 1960년대 말 서울, 용팔이 박노식은 주먹으로 살았던 과거를 뉘우치고, 꽃처럼 아름다운 아내 사미자와 이룬 가정을 위해 날품팔이일지언정 땀을 흘려 일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주먹으로 남을 위협해서 먹고살았던 과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 예전에 그가 몸담았던 깡패 조직은 그를 유혹한다. 그러나 용팔이 박노식은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꽁치 두어 마리를 사서 연탄불에 구워 아내와 함께 먹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달았다. 그런 용팔이를 깡패 조직은 용납하지 않고 간악한 흉계를 꾸민다.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겁탈하고 그의 가정을 박살내는 것이다. 한편, 오늘도 용팔이는 동대문시장에서 지게를 등에 지고 날품팔이를 한다. 오늘은 공치나보다 하고 풀이 죽어 있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용팔이를 불러 사과 두 상자를 배달시킨다. 평소 받는 돈보다 두어배의 웃돈을 쥐어주며. 동대문시장에서 사과 두 상자를 배달해야 할 곳은 저기 광화문을 지나, 아현동 고개를 넘어 신촌 로터리의 서강대학교의 여교수님 연구실이다. 지게에 사과 두 상자를 짊어진 용팔이는 동대문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아이고 솔찮이 힘든데 말이시…” 하며 목에 걸친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아현동 고개를 오르는 용팔이. 그 시간. 깡패들은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납치하여 골방에 가두고 강간하려 한다. 용팔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서강대학교에 도착하는데. 이미 해는 지고, 사과 두 상자를 받아야 할 여교수님은 퇴근을 하셨단다. “아이고 이거 어쩌면 좋을까잉 그러면 여교수님 댁이 어딘가요잉.” 수위 왈. “여교수님 집은 저기 광나루를 건너 천호동….” 용팔이는 사과 두 상자를 고쳐 메고 신촌에서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그의 땀에 젖은 어깨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과거의 주먹을 숨기고, 가정을 위해 굽신거리며 비굴한 성실함으로 살아야 하는 사내. ‘비굴한 성실함’ 그것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소모된 대한민국 남성들의 트라우마다. 종로 깡패 김두한의 주먹깨나 쓰는 부하 중 하나였던 용팔이 캐릭터는 새마을운동과 조국 근대화로 인해 소모되는 60년대의 한국 빈민 남성의 애환을 표현하는 캐릭터로 새롭게 탄생한다. 전라도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한 젊은 사나이의 애환을 그린 짝퉁 용팔이 시리즈 <맨발로 올라왔다> <맨주먹으로 올라왔다>까지, 70년대 초 극장가는 용팔이 세상이었다. <인간사표를 써라>로 감독 데뷔 눈이 내리는 명동의 밤거리에 회한이 담긴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어깨를 움츠린 사내가 들어선다. 그는 깡패였던 과거를 씻고 새로운 조국의 일원이 되고자 사랑하는 아내와 가정을 꾸리려다 과거의 행적에 발목이 잡혀 한팔을 잃고 명동 거리에서 쫓겨났었다. 사랑하는 아내 문희와 전쟁 뒤 깡통을 들고 명동 거리를 헤매던 자신을 구해준 의붓아버지이자 깡패 두목인 장동휘를 파멸시킨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사내는 원한의 거리, 명동에 들어선 것이다. 종로와 명동의 깡패들 이야기를 다룬 신화의 세계. 한국 깡패영화 중 빛나는 한편의 영화인 임권택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의 첫 장면이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쏟아져 나온 한국 깡패영화에 대해 박노식을 빼고 이야기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려다 과거의 죄에 발목이 잡힌 깡패영화의 전형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렸다. 1971년 서울 무교동의 광성실업 20층 빌딩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구경거리다. 구경꾼들의 시선은 빌딩의 20층 벽에 쇠줄을 잡고 매달린 사내를 향하고 있다. 안전장치 하나없이 쇠사슬을 붙잡고 빌딩 벽에 매달린 사내. 박노식이다. 구경꾼들 틈에서 조명부들이 반사판을 들고 박노식을 비추고 있다. 반사판에는 “박노식 감독, 제작, 주연. 인간사표를 써라”라고 쓰여 있다. 박노식이 영화감독을? 이 전해에 경관 폭행 사건으로 구류를 살았던 배우 박노식은 구치소 안에서 수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사표를 쓰고 인간답지 않은 벌레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번 드는 것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은 “나도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였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 제작을 한 그의 첫 번째 영화 <인간사표를 써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기괴한 액션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면 고대 원시인 같은 복장의 사내들이 등장하고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이상한 제의를 한다. 굳이 따지자면 1930년대의 북만주 어느 곳인 것 같지만, 다음 신의 배경은 1970년대의 서울이다. 북만주에서 사랑하는 의형제 김희라를 악당 허장강의 음모로 잃은 박노식은 복수를 결심하고 허장강을 찾아 1970년 서울의 무교동 어느 빌딩으로 온 것이다. 김희라의 아내를 찾아가 그의 죽음을 전하려는데 김희라의 아름다운 아내 김지미는 장님이었고, 그녀는 자신의 남편 김희라가 돌아온 것이라 오해하고 박노식을 껴안고 오열한다. 사나이 박노식. 의형제의 아내 김지미 앞에서 차마 김희라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김희라 행세를 하며 영화는 진행된다. 무국적. 시대 무시. 훼손된 신체를 복원시키려는 과잉된 열망으로 충만한 비극적인 라스트. 당시에는 대단한 볼거리라고 여겨질 만한 카 체이스. 과거 뻥까오리 백작이라 놀림 받았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연상되는, 17세기 유럽 귀족들이 입었을 것 같은 이상한 취미의 의상들. 이 모든 과잉이 범벅된 영화가 <인간사표를 써라>였다. 하드보일드 액션영화와 서민적 미담극 사이 그 뒤 박노식은 총 14편의 영화를 주연·감독한다. 그의 영화들은 뚜렷하게 두 가지 성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마카로니 웨스턴에서 영향받은 잔혹함과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따라잡고 싶은 열망, 일본 B급 액션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괴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냉혹한 하드보일드 취향의 액션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서 박노식은 항상 파마를 한 곱슬머리에 찰스 브론슨과 비슷한 콧수염을 기르고 전라도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 냉혹한 복수자의 캐릭터를 연기한다. <인간사표를 써라>를 비롯해 <쟉크를 채워라>(1972), <나>(1971), <집행유예>(1973), <일생>(1974), <왜?>(1974), <광녀>(1975),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6)가 그것이다. 이 영화들은 대개 만주에서 음모와 배신, 죽음으로 시작해 현재의 서울 어느 곳으로 옮겨져 복수극으로 진행된다. 이 영화들에서 줄기차게 이야기되는 것은 짝패, 도플갱어들 사이의 갈등과 훼손된 신체를 복원시키려는 과대망상이다. <인간사표를 써라>에서는 죽은 동생의 눈먼 아내 김지미를 위해 동생 행세를 하고, 심지어 자신의 눈을 주려고 한다. <쟉크를 채워라>에서는 이복동생 신성일과 서로 한 핏줄인 것을 모른 채 앙숙이 되어 대결하고, <집행유예>에서도 예외없이 주인공은 죄의 대가로 눈이 멀고, <광녀>에서는 곱슬머리 가발을 벗어 화상을 입고 민대머리가 된 머리를 드러내며 원한을 호소한다. 다른 하나는 용팔이 캐릭터를 가져온 서민 인정 미담극이다. <하얀 수염>(1974), <폭력은 없다>(1975), <방범대원 용팔이>(1976), <돌아온 용팔이>(1983)가 그렇다. <하얀 수염>은 <카인의 후예>의 도섭 영감의 외모를 그대로 가져와 자식들에게 버림받는 노인의 이야기를 다뤘고, <돌아온 용팔이>에서는 쉴새없이 떠벌리는 방범대원 용팔이가 왕년 최고의 주먹이었지만 교도소 출소 뒤 새 사람이 된 용구 형님 황해를 모시고 그들의 의붓딸 서미경의 행복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물론 여기서도 그의 도플갱어 애호 취미가 드러나는데 사랑받는 간호사 서미경의 쌍둥이 동생 소매치기 서미경이 등장하여 갈등을 만든다.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선배 장동휘와 술집에서 싸움까지 했던 박노식이니 연출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겠지만 그의 작품들은 너무나 조악하다. <쟉크를 채워라>를 보면 전 신에서 영화와 관계된 대사가 나오면 다음 신에서 박노식이 침대에 누워 일본 영화잡지 <스크린>을 보고 있다. 마치 끝말잇기, 말장난 같은 유아적인 신 전환 방법이어서 실소를 머금게 하는 대목이다. 그리고 <광녀>의 라스트. 아무리 복수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지만 집단 강간으로 악녀에게 복수를 하는 장면은 눈뜨고 보기에 괴롭다. 영화를 많이 보고 열심히 공부한 것은 알겠는데, 표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기본을 무시한 조악한 연출이다. 그러나 <왜?>에 이르러서는 조악함이 많이 사라지고 좀더 영화적인 연출을 한다. 과거 팔도 사나이 시리즈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전라도 사나이 의리의 용팔이가 자신의 똘마니 용칠이 장혁을 데리고 일본에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타이틀 시퀀스가 지나고, 일본 야쿠자들이 좌우로 도열한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서 있다. 앗! 저 사내는! 또 다른 박노식이 서 있다. 일인이역. 일본 야쿠자 두목 박노식이다. 박노식의 첫 번째 영화부터 줄기차게 나오는 파마를 한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 박노식이다. 라스트. 전라도 용팔이와 하드보일드 캐릭터 악당 박노식이 영화속에서 처음으로 대면하자마자 두 주인공은 박장대소한다. 두 명의 박노식과 주변인물들도 모두 박장대소 한다. 참 유쾌한 장면이다. 인간 박노식의 분열된 자아. 인정 많고 의리에 살고 죽는 구수한 전라도 사나이 박노식과 하드보일드 영화의 심각한 악당 박노식이 서로를 보고 비웃는 것이다. <왜?>와 <집행유예>에 이르면 박노식표 영화가 볼 만한 영화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왕년의 액션배우 쓰러지다 허세 가득한 뻥까오리 백작, 영화인 납세자 리스트 상위 5위 안에 드는 부자이면서 가난한 자들의 애환을 슬퍼하고 불같은 성격에 굽힐 줄 모르는 마초 용팔이, 인간의 불건전한 악몽을 줄기차게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은 욕망. 이 위험한 혼돈의 배우 박노식은 1970년대 중반 긴급조치의 철퇴를 맞게 된다. 과거 검찰과의 불화는 그를 폭력영화배우 1호로 낙인찍었고, 검찰청의 유리창이란 유리창을 모두 깨버리며 박노식은 자신에게 쏟아진 오명에 분노를 표한다. 배우 출연 금지. 세상은 변해버렸다. 할리우드 액션영화와 이소룡 영화. 무협영화들이 극장가를 휩쓸고, 왕년의 액션배우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 박노식이 탄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 김두한 시리즈로 떠오르는 액션배우가 된 이대근이 LA 교민 위문공연을 위해 비행기에 탔다가 왕년의 액션배우 박노식을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한다. 박노식은 과거 자신의 영화에서 같이 일하고 싶은 배우나 스탭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나한테 한방 맞아주라.” 이대근에게 박노식은 주먹을 들이대며 말한다. “내가 다시 영화 찍으면 한방 맞아줘라.” 이대근은 흔쾌히 한방 맞기로 했고, 그 약속은 <돌아온 용팔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카인의 후예> <하얀 수염>에서 뒷머리를 부여잡고 고목이 거꾸러지듯 쓰러진 것과 똑같이 박노식은 풍으로 쓰러지고 만다. 병상에서 자신을 찾아온 시나리오작가에게 다시 한번 “한방 맞아주라”를 힘없이 말했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이 글에 쓴 박노식의 사건과 그의 말들은 박노식의 자서전 <뻥까오리 백작(박노식 지음. 씨와날 펴냄, 1995)에서 인용되었고,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출간된 <신문기사로 본 한국영화>를 참고로 하였습니다.

[김중혁의 No Music No Life] 먼 곳의 아스라한 풍경

1회와 2회는 봤다. 3회부터는 도저히 못 보겠더라. MBC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 얘기다.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보다는 ‘세살 재미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더 맞으려나)는 게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대하는 나의 자세여서 어지간히 관심이 가는 드라마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라면 4회까지는 꾸준히 지켜보는 편인데, 이건 도저히 그러지 못하겠더라.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겠고,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민망한 화면을 목격했을 때처럼 눈 둘 곳을 모르겠더라.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정말 노래 잘 부르는 가수들인데, 모두 좋은 노래들인데, 내가 좋아하는 개그맨들이 매니저를 해주고 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보기가 힘든 걸까. 그게 다 내 얘기 같아서 그런 거였다. 나는 가수가 아니지만 가수와 비슷하다면 비슷할 수 있는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평가를 기다리며 초조해하고, 탈락을 예감하며 근심하는 얼굴을 마음 편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거다. <나는 가수다>의 소설가 버전이 있다면? 아찔해 <나는 가수다>가 워낙 인기있다 보니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김중혁 작가님은 혹시 <나는 소설가다>라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서 섭외를 받게 되면 응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당대 최고의 작가 일곱명 중에 들 가능성은 전혀 없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문학적 취향이 남다른 PD의 안목 때문에 섭외를 받게 되면 심정이 어떨까. 응할 수 있을까. 상상이 시작됐다. (전략) 오랜만에 만난 작가 일곱명은 한자리에 모여 담소를 나누다가 갑자기 미션을 받게 되는데, (짜잔) 미션의 내용은 다름 아닌 세계명작소설을 자신만의 색깔로 다시 쓰기. 아뿔싸, 복불복 시스템으로 김중혁 작가에게 당첨된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이걸 다시 쓰라고? 통째로? 읽는 것도 벅찬 <죄와 벌>을 다시 쓰기 위해 일주일 밤을 꼬박 새운 김중혁 작가는 청중평가단 앞에서 소설을 읽어내려가다가 그만 기절을 하고 마는데, 털썩… (후략)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PD님, 죄송하지만 저는 다음 기회에. 모든 작가는 각각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생각과 문체와 문장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 수많은 작가들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작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설이 그저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래서 누군가 밤새 들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면 세상에는 단 한명의 작가로 충분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레이먼드 챈들러와 스티븐 킹과 미야베 미유키는 모두 다른 글을 쓰지만 세상에는 그 모든 세계가 필요하다. 나는 가수들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들 역시 하나의 완결된 세계다. 그 세계를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지만 그 세계에다 등수를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김건모를 김범수가 대체할 수 있을까? 이소라를 임재범이 대체할 수 있을까? 가수들에게 옛 노래들만 부르라고 하는 것도 가혹한 일이다. 누군가 불렀던 곡을 다시 부르게 하는 것은 인테리어가 모두 완성된 집에 들어가서 모든 걸 허물고 새로 공사를 하라는 건데, 공사가 성공해도 문제고 실패해도 문제다. 매주 이런 비경제적인 일로 가수를 혹사시키는 게 과연 그럴 만한 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가끔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100회 특집 ‘The Musician’처럼 빈 공간에 인테리어 공사하라고 했더니 완전히 집을 새로 지어버리는 바람에 보는 사람 감동의 눈물 쏙 빼는 공연도- 특히, 최백호씨와 함춘호씨와 심성락 선생님 말입니다- 있긴 있다만…). 그의 음악은 ‘원시음악’… 허공에 떠 있는 듯 30년 넘게 음악을 들어오면서 내가 깨달은 게 있다면 내가 좋아했고, 좋아하는 노래는 반드시 셋 중 하나에 속한다는 거다. 듣는 순간 내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는 노래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듣는 순간 선율이 만들어내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눈을 감게 되는 노래가 있고, 어떨 때는 듣는 순간 먼 곳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게 되는 노래가 있다. 첫 번째를 근시음악이라 부르며 두 번째를 투시음악이라 하고, 세 번째를 원시음악이라 한다, 고 (누구 맘대로?) 내 맘대로 정했다. 하지만 노래 대신 가수가 또렷하게 보이는 노래는 절대 좋아할 수 없다. 야, 이 가수는 고음이 끝내주네, 이 가수는 또 어떤가, 기교가 아휴, 장난이 아니네, 그래, 노래를 참 잘 불러, 라고 생각할 때 그 가수는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이미 노래를 잡아먹어버린 거다. 내가 ‘루싸이트 토끼’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 때문인 것 같다.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먼 곳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버스에서 책을 읽거나 다른 일을 하다가도 루싸이트 토끼의 노래만 나오면 나는 먼 곳을 봤다. 일산에서 버스를 타고 홍익대로 향할 때 손끝이 찌릿할 만큼 슬픈 <나에겐>을 들었다. 나는 합정역의 사람들과 그 너머의 거리의 풍경들이 일순간 멀어지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모든 게 아스라하게 느껴졌고, 나만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그 노래만 들으면 합정역 앞의 풍경이 떠오른다. <손 꼭잡고>를 들을 때는 먼 곳의 맑은 하늘을 보았고, <꿈에선 놀아줘>를 들을 때는 별과 달을 보았다. 루싸이트 토끼의 쇼케이스를 진행하면서 나는 관객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오늘은 특별한 무대를 준비했습니다. 공연이 시작되면 공연장 오른쪽 벽면이 부서지면서 먼 곳의 아스라한 풍경이 나타날 겁니다.” 실제로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상상마당도 어쨌든 다른 공연을 해야 하니까, 벽이 부서지는 공연은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관객에게 먼 곳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상상하니까 벽 위로 하늘과 별과 달이 떴다.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을 듣기 시작한 지 3년째인데, 그들의 음악이 나와 함께 앞으로 걸어가고, 나와 함께 변하고 있다는 걸 느낄 때 기분이 묘하다.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지만 루싸이트 토끼의 음악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고, 나는 그걸 느낀다. 나 역시 크게 변하는 것 같지 않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겠지. 우리는 어쩌면 음악들을 들으면서 우리의 변화를 실감하는지도 모르겠다. 음악과 함께 우리는 자란다. (3월에 발매된 싱글 <>에 이은) 그들의 세 번째 정규앨범이 나올 때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들은 어떤 음악을 들고 나타날까. 나는 그 음악을 어떻게 듣게 될까. 내가 좋아하는 뮤지션들이 새 앨범을 내길 기다리는 시간, 레코드 가게에서 CD를 집어들고 집으로 돌아오며 그들의 음악을 상상하는 시간, 그 모든 시간이 음악을 듣는 시간이다. 귀에는 음악이 들리지 않지만 상상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노래들, 곧 만들어질 노래들, 수많은 뮤지션들 각각의 세계에서 쏟아져 나올 노래들, 그 노래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짜릿하다. 옛 노래들을 들으면서 오래전의 시간을 추억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겠지만 아직까지는 내 주위의 수많은 뮤지션들의 새 노래를 기다리는 게 더 큰 즐거움이다.

첫도전, 마음으론 4년 내내 준비했다

전화를 걸어 ‘전세영씨’를 찾았더니 “우리 언니”라며 여동생이 받는다. 동생이 가르쳐준 번호로 연락을 했더니 전세영씨가 아니라 ‘이후경(25)씨’가 받는다. 전세영은 지금은 퇴사한 선배 동료의 이름인데 그냥 예뻐서 썼단다. 젊은 필진의 등장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 이론과 예술사를 졸업했고, 지금은 출판쪽에 몸담고 있지만 영화 글쟁이로 오래도록 일해볼 각오는 되어 있다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해마다 한번씩 내봐야지 했는데 내자 마자 척하니 당선됐다. 젊은 필진이다. 기대된다. -올해 떨어졌으면. =당연하게 생각했을 거다. (웃음) 그런 다음 내년에 또 해봐야지 생각했을 거다. 혼자서 공부하는 건 어렵다. 이런 계기는 공부를 하게 해주지 않나. 처음 내긴 했지만 그래도 마음으론 4년 내내 준비했다. -어떤 기준으로 쓸 영화를 골랐나. =작품비평은 가장 최근에 본 것 중 개인적으로 감동적이었던 것을 골랐다. 남들에게는 덜 훌륭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보면서 울었다. 이론비평은… 학교 다닐 때 친구들에게 의견을 이야기했다가 비판당한 적 있었던 소재를 골랐다. 그때는 너무 나이브하고 허술하다고 비판받았는데. (웃음) 그 뒤로 생각하고 고민한 다음 써봤다. 부끄럽지 않을 정도만 되면 좋겠다. -어떤 영화가 좋나. =로메르!! 그의 영화는 편하고 좋다. 보면 행복하고. 행복해지기 위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떤 평론이 좋나. 어떻게 쓰고 싶나. =내게 솔직한 글을 쓰고 싶다! 그리고 아는 만큼 쓰고 싶다. 나를 아는 주변인들이 봤을 때 그 글이 딱 나처럼 보인다면 좋겠다. 이후경 데이빗 핀처가 테크놀로지를 사유하는 방식 데이빗 핀처의 최근 두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이하 <벤자민>)와 <소셜 네트워크>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외도처럼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비록 다음 영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를 통해 스릴러로 돌아온다고 해도 말이다. 그가 가장 정통한 장르는 흔히 스릴러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일 테다. 그럼에도 이 최근 두 작품과 그 전에 만들어진 <조디악>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친밀감이 느껴진다. 물론 이는 착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테크니션으로서 영화를 만들어 온 핀처의 스타일은 세 영화 모두에서 이어진다. 핀처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그건 과잉된 스타일을 통해 테크놀로지를 동시대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착각의 용기를 엉뚱하게도 <셜록>이란 영국 드라마를 보다 얻었다. <셜록>은 BBC에서 셜록 홈즈 시리즈의 몇몇 대표작들을 묶어 현대물로 번안한 드라마다. 빅토리아시대에서 아이폰시대로 이사한 셜록 홈즈는 아이폰, 블로그, 니코틴 패치에 의존해 문제를 풀어나간다. 그것들은 홈즈의 허기와 나르시시즘을 지탱해주는 현대의 발명물들이다. 그렇다면 탐정소설에 있어 최고의 고전이라 할 만한 셜록 홈즈가 테크놀로지의 시대로 진입했을 때, 고전의 고유한 분위기는 무엇으로 대체될 것인가. 동시대에 대한 코멘트를 하기 위해 드라마는 어떤 스타일을 취해야 하는가. 이는 핀처의 최근작들에 대한 인상을 설명하려 할 때도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드라마가 다듬어진 과정을 살펴보면 <셜록>의 중심 아이디어를 쉽게 알 수 있다. 웰메이드 드라마의 한 계보를 형성하고 있는 BBC는 이 드라마의 정식버전을 내기 전 파일럿 버전을 만든 바 있다. 두 버전의 차이는 바로 속도감이다. 파일럿 버전은 다소 느슨한 리허설처럼 진행된다. 그런데 정식 버전에서는 모든 요소들에 가속이 붙으면서 훨씬 타이트한 구성을 이루어진다. 이 드라마의 극적 완성도는 속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완성된 버전에서 배우들의 대사가 빨라진 것은 물론이고, 편집과 촬영의 양면에서도 속도감이 월등히 향상된 걸 느낄 수 있다. 단순히 극의 전개가 빨라졌다는 말이 아니다. 전체 구성은 파일럿 버전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하지만 영상이 빠른 속도의 리듬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배우의 대사를 포함한 여러 기술적인 측면을 다듬은 것이다. 특히 터치 모바일 유저들이 친숙하게 느낄만한 ‘아이폰스러운’ 줌인과 자막사용, 장면전환에서는 일상적으로 친숙하게 보아온 비주얼 테크놀로지의 운동감과 속도감이 느껴진다. 영상의 그 빠른 리듬감에 시청자들은 감각을 내맡길 것이다. 그리고 그 리듬감이 드라마가 선사하는 재미의 핵심을 이룬다. 시간적 배경이 19세기에서 21세기로 바뀌면서 <셜록>은 동시대를 담아내기 위해 테크놀로지의 여러 속성 중 속도를 선택했다. <셜록>을 본 뒤 뒤늦게 <소셜 네트워크>의 빠른 리듬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핀처 역시 동시대의 테크놀로지를 영화적으로 구현해내기 위해 속도를 끌어들인 것이 아닐까. 또 <소셜 네트워크>에서 <벤자민>, <조디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외도가 아니라 테크놀로지에 대한 각기 다른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셜록>이 탐정 문학을 과학수사 드라마로 번역하면서 동시대의 테크놀로지의 속도를 텔레비전 드라마가 어떻게 체화할 수 있을지 시도해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아예 ‘페이스북 창안자’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셜 네트워크>는 테크놀로지 시대의 속도를 영화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결과물이다. 이 영화를 만들며 데이빗 핀처가 배우들에게 대사속도를 높여달라고 주문한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이 영화의 한글자막은 영화관람을 방해할 정도로 엄청난 양과 속도로 전개된다. 이 영화를 즐기기 위해서는 자막을 통해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 영화가 갖고 있는 빠른 속도의 리듬 그 자체를 느끼는 일이 더 중요하다. 오프닝 시퀀스는 이 영화에서 대사의 속도가 가장 빠른 장면 중 하나다. 술집에서 마크 주커버그와 그의 여자 친구 에리카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광속의 대화를 주고받는다. 주커버그의 대사는 특히 더 빠르다. 이토록 빠른 속도로 영화를 시작하는 건 대중영화로서는 다소 불친절힌 태도다. 하지만 영화는 대중영화로서의 태도에 대한 부담감조차 던져버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속사포로 대사를 쏟아내는 두 인물을 보여주길 계속한다. 그러다가 영화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크레딧 시퀀스에서 갑자기 속도를 늦춘다. 술집에서 기숙사까지 걸어가는 주커버그를 보여주는 비슷한 길이의 쇼트들이 여러차례 길게 이어지는데, 그 느릿함에서 이상한 긴장감이 발생한다. 기숙사로 들어간 주커버그는 곧장 노트북을 펼치고, 다시 영화는 음악과 함께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영화에 다시 속도가 붙기 시작하면 크레딧 시퀀스의 간격이 더 크게 느껴진다. 마크 주커버그는 교정을 통과하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특히 <소셜 네트워크>가 염두에 두었던 테크놀로지의 속도란 인터넷과 모바일 같은 네트워킹 기술의 속도였을 것이다. 영화가 고민했던 것도 넷 상에서처럼 말의 속도와 생각의 속도와 말이나 생각을 실행할 때 발생하는 운동 속도의 삼박자를 어떻게 일치시켜 보여줄 수 있을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빠른 대사 속도는 인터넷 시대의 속도를 물리적으로 전달하기에 좋은 수단이다. 현실은 속도전이다. 모두에게 오픈된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는 가장 먼저 가장 빨리 결승점에 도달해야 이길 수 있다는 경기의 법칙이 더 냉혹하게 작용한다. 이를 마크 주커버그는 너무도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윙클보스 형제는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한다 해도 시대착오적이고 솔직하지 못한데다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현실 원칙에 얽매여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이 영화의 속도는 주커버그가 네트워크 상의 속도를 대사를 통한 물리적인 질감으로 전달하면서 만들어지는데, 윙클보스는 이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 그게 그들이 이 영화에서 우습게 보이는 까닭이다. 윙클보스 형제가 참가한 런던에서의 조정 경기 장면은 이 영화에서 잉여적인 부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조정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를 핵심적으로 요약한다. 미니어처 모드로 촬영된 이 장면은 말 그대로 속도전의 재현이다. 조정 같은 스포츠 경기만한 속도전이 또 있을까. 선수들이 직접 노를 젓고 관람객들이 육성으로 응원하는 이 스포츠는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전쟁과는 다른 차원에 있다. 그러나 그 차원이 반드시 상위의 질서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 조정 경기 장면에서는 스포츠 경기와 인터넷 상에서의 속도전, 둘의 위상이 뒤바뀐다. 인터넷이야말로 그 자체가 속도전이고 스포츠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마크 주커버그가 고안한 페이스매쉬는 스포츠 경기처럼 진행된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냉혹한 속도전이 스포츠 경기에 비유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현실에서의 스포츠 경기에서는 냉혹함이 증발해버린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속도전쟁에 비하면 신사적인 예절을 지키며 경쟁해야하는 스포츠는 진짜 스포츠, 인터넷이라는 더 현실적인 스포츠를 흉내 낸 미니어처일 뿐이다. 페이스북을 누가 더 빨리 만들어 더 빨리 보급하느냐가 진짜 스포츠다. 윙클보스는 속도만 느린 게 아니다. 그들의 미숙함은 무엇이 더 현실에서 의미 있는 경기인지, 진짜 스포츠에서는 어떤 무질서함과 살벌함이 통용되는지에 대해서마저 무지한 데서 드러난다. 그렇다면 속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속도 자체는 어떤 물리적인 속성을 명시하는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속도에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소셜 네크워크>에서 속도는 인격의 일부분이다. ‘실시간 블로깅’은 주커버그의 일부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연애상태를 실시간으로 게시할 수 있는 사용자들에게도 신속함은 곧 그들의 인격과 직결된다. 그들은 인터넷의 속도를 빌어 자신의 인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공유하고, 인정받는다. 다시 말해 인정투쟁이 곧 인터넷의 속도전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커버그가 에리카와 헤어진 뒤 기숙사에 도착하자마자 에리카에 대한 험담을 블로그에 올릴 때, 또 술집에서 재회한 에리카에게 보기 좋게 당한 뒤 기숙사로 돌아와 페이스북의 신속한 확장을 주장할 때, 주커버그는 속도가 인정투쟁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요소가 되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상대보다 빨리 상대보다 먼저 결승점을 통과해야 우승을 하듯이, 상대보다 빨리 실연을 고백하고, 상대보다 빨리 상처를 극복하고, 상대보다 빨리 복수하고, 상대보다 빨리 더 나은 사람을 만나고, 상대보다 빨리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게는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속히 선전해야 한다. 속도전이 되어버린 인정투쟁이야말로 스포츠가 되어버린다. 문제는 인정투쟁이 속도전이 되어버렸을 때, 우리는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가이다. 이 영화가 단순히 테크니컬 하지만은 않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인정투쟁이란 것 자체가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것이란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어떤 감정을 오래 지속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속도전의 인정투쟁에 대한 반응으로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자문할 때, 영화는 주커버그의 표정으로 답한다. 제시 아이젠버그의 연기는 최소한의 근육들로 감정의 신속한 순환과 소비를 표현해내는 데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계속해서 누르는 ‘새로고침’ 버튼처럼, 그의 얼굴도 계속해서 새로 고쳐진다. 하지만 유일한 친구, 자신의 재능을 알아봐주었던 사람들, 돈을 받고 자신을 옹호해 준 변호사, 그리고 마지막까지 호기심어린 친절을 베풀었던 변호 참고인마저 방을 나간 뒤 홀로 남은 주커버그의 얼굴은 텅 비어버린다. 그의 눈빛은 노트북 화면 너머의 어떤 지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에리카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주기적으로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는 모습은 크레딧 시퀀스의 리듬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주커버그가 만든 ‘페이스매쉬’나 페이스북이 모두 에리카를 향한 인정투쟁이었다면, 그 인정투쟁을 어떤 속도로도 쟁취할 수 없을 때 정지된 얼굴에는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 헛걸음질치는 욕망만이 남아있다. <소셜 네트워크>는 새로운 속도의 시대 속에서 인정투쟁이란 고전적인 주제를 새로운 속도로 풀어낸 셈이다. 얼굴은 그러나 <벤자민>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어진 요소다. <벤자민>은 테크놀로지를 사유하기 위해 얼굴을 끌어들인다. <소셜 네트워크>의 오프닝 만큼이나 <벤자민>의 오프닝 역시 이 영화의 탐구의식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벤자민>은 클로즈업 화면에서 시작한다. 나이 든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눈 클로즈업에서 서서히 줌 아웃하면서 얼굴 클로즈업까지 한 쇼트로 끌고 가는 오프닝 쇼트는 곧장 이 영화가 얼굴을 중요하게 다루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벤자민>에서 브래드 피드의 얼굴은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어떻게 배우의 얼굴이 갖고 있는 고전적인 아우라를 유지할 수 있을지를 시험해 보기 위한 섬세한 시험장이다. <벤자민>의 편집이나 촬영은 사실 평범한 편이며, 내러티브에도 소설에 비해 풍부함이 축소된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배우의 얼굴의 배합 비율에 대해 심하게 파고든 영화도 드물 것이다. 많은 애니메이션과 3D 영화들이 기술을 전달하기 위해 플롯과 표정을 쉽게 포기해 버릴 때, <벤자민>은 애니메이션 기술이 얼굴의 표현력을 얼마만큼 강화하거나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한 인물을 모든 나이에 걸쳐 묘사하기 위해 이 영화가 들이는 노력은 어마어마하다. 영화의 특수효과팀은 주름의 정도, 피부의 질감, 머리카락 색의 농도, 검버섯의 면적 등 사소한 세부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서 벤자민이란 인물을 재현했다. 그것도 한 시기의 얼굴만 만들었다면 좀 더 쉬운 일이었겠지만, 나이가 바뀔 때마다 계속해서 좀 더 변형된 막을 사용해야했다. 주름을 표현하기 위해 브래드 피트에 씌운 멤브레인 막은 조금만 잘못 손대도 망가질 정도로 섬세해 정밀한 분장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런 고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벤자민 버튼의 얼굴은 지나치게 사실적이다. 방금 말한 것처럼 벤자민의 얼굴에는 어딘지 지나친 면이 있다. 이 지나침은 과하게 섬세한 얼굴표면의 변화에서 비롯되는데, 관객이 육안으로는 짚어낼 수 없는, 거의 무의식적으로만 느껴지는 수준이다. 이는 말하자면 잉여다. 영화는 거의 리얼리즘의 강박에 붙들린 것처럼 노화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단순히 나이의 변화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정말 그 나이를 살고 있는 인물의 느낌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늙은 벤자민의 몸은 브래드 피트의 몸이 아니라 어느 노인의 몸을 빌려와 합성한 것이다. 이는 영화적으로 필요한 묘사의 수준을 넘어선다. 하지만 핀처의 영화들에서는 이 잉여가 영화의 키를 쥐고 있을 때가 많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조정 경기 장면이 인터넷에서의 속도전이 사실상의 현실 감각을 지배해 가고 있음을 상기시켰다면, <벤자민>에서는 벤자민의 얼굴이 애니메이션 테크놀로지의 시대로 진입했을 때 배우의 얼굴과 표정이 어떤 기술적 변화를 겪게 되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 변화란 그렇게 암울한 것만은 아니다. 배우의 얼굴이 테크놀로지에 모두 자리를 내어줄 필요는 없으며, 결코 그렇게 될 수도 없다. <벤자민>에서 벤자민도 브래드 피트라는 실제 배우의 존재를 빌려서야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다. 영화 속 캐릭터란 허구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어떤 배우의 물리적인 몸을 빌려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캐릭터란 배우와 허구적인 것이 만나 발생하는 효과 같은 것이다. 벤자민 역시 컴퓨터 그래픽과 배우의 얼굴과 대역배우의 몸과 관객의 심리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만들어진 하나의 효과로서 존재한다. 벤자민을 탄생시킨 건 방대한 양의 정교한 그래픽 기술이기도 하지만, 벤자민을 연기하는 배우이자 개별적 인격체로서의 브래드 피드 덕분이기도 하다. 배우를 어떤 역할이나 캐릭터로 기억할 수 있듯이, 역할이나 캐릭터 역시 배우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육체나 태도를 통해 기억될 수 있다. 관객은 벤자민이 가상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한편으론 브래드 피트라는 배우임을 전제하고 그를 바라본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대역의 몸과 그래픽 기술을 버무려 만든 벤자민이 진짜 존재하는 인물처럼 실감되는 것이다. 여러 조각들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게 배우의 존재감이다. 관객은 브래드 피트라는 하나의 배우를 관찰하듯이 벤자민 버튼을 관찰한다. 특히 영화에서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그 인물이 잡지 사진에서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고 계속 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령 광고 지면에서는 배우의 유명세만 필요 없다면 얼마든지 그래픽으로 완벽한 얼굴을 찍어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운동성을 갖고 있는 영화에서는 배우의 얼굴은 여전히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아무리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영화의 표정은 배우의 얼굴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나 <벤자민>과 달리 그보다 일찍 만들어진 <조디악>은 핀처의 필모그래피에서 테크놀로지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유일한 영화다. <세븐>의 소재가 된 사건으로 돌아간 핀처는 모든 테크놀로지를 걷어내고,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온갖 기교들도 덜어내고, 157분에 걸쳐 단순히 사건을 나열한다. 하지만 이 영화마저 테크놀로지를 또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고 있다. 이제까지 얘기한 두 영화가 테크놀로지의 속성을 하나는 리듬으로 다른 하나는 얼굴이란 표면으로 끝까지 밀어붙여 본 것이었다면, 이 영화는 테크놀로지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억제하고 다른 방향을 택한다. 테크놀로지와 속도의 측면에서 <소셜 네트워크>가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매체와 어느 정도 친밀성을 갖는다면, <조디악>은 그와 반대로 드라마들에 반작용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안정적인 장르로 자리 잡은 과학수사물들은 첨단의 테크놀로지를 전시하거나, 의사, 검시관, 과학자, 심리학자 등의 주인공들을 앞세워 고도의 기술적 전문성을 표방한다. 반면 <조디악>은 근대적 합리성을 지닌 과학적 도구들을 은근 슬쩍 옆으로 치워버린 채 단지 퍼즐 때문에 사건에 매달리는 만평가 로버트 그레이스미스를 등장시킨다. 그레이스미스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신문을 스크랩하고 먼지 쌓인 창고를 뒤져가며 범인을 좇는다. 2010년 버전의 홈즈보다도 더 오래된 방법으로. 물론 이는 1970년대에 일어난 사건을 거의 고증하듯이 충실하게 재현하려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학수사물이 넘쳐나는 지금의 세기에 삼십 년이 지난 사건을 크게 윤색하지 않고 그대로 놓고 보여준 까닭은 무엇일까. <조디악>은 사건들에 무리한 논리를 부여하려하지 않는다. 대신 단지 사건들을 늘어놓는 방식을 통해 사건과 사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보가 이동하는 방식, 사건들의 점과 점이 이어지는 방식이 드러낼 뿐이다. 어차피 어디까지가 조디악이 저지른 살인이고 어디까지가 아닌지도 여전히 논란거리인 실제의 미제 연쇄살인사건을 토대로 한 영화가 사건들을 질서정연한 이야기로 억지로 정리해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2002년에는 DNA 분석까지 했지만 조디악 킬러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사건의 점들을 이어보는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는 폴 에이버리와 데이빗 토스키가, 후반부에서는 그레이스미스가, 사건의 점들을 잇는 역할을 한다. 그레이스미스가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후반부의 리듬감은 특히 훌륭하다. 조디악의 편지가 대중으로부터도 잊히고 조디악 사건이 관계자들로부터도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뒤, 그레이스미스는 각 관할 조사관들, 필적감정가, 옛 동료 기자, 담당 검사를 찾아다니며 직접 단서들을 조합해 나간다. 이런 그레이스미스의 영화적 운동은 점들 사이에 벌어져있던 거리를 조금씩 좁혀나간다. 하지만 토스키도 강력반에서 쫓겨난 상황에서 필적감정가도 불명예퇴직자였던 것을 알게 된 그레이스미스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살인마 조디악이 아니라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다. 바람에 날려 보내듯 과거의 흔적을 서서히 조금씩 지워나가는 시간. 그러한 시간을 물리적으로 감각하게 만드는 이 영화의 긴 러닝타임은 그러므로 당연하게 느껴진다. 속도와 기술의 시대에 이런 느린 속도로 범죄 사건을 늘어놓은 대로 보고만 있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인터넷이나 게임, 모바일의 시대에 영화는 즉각적인 내비게이션의 기회가 적기 때문에 다른 매체와 비교해 수용자의 인내심을 더 많이 요구한다. 유혹적인 스펙터클 없이 두 시간이 넘는 영화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조디악>은 그런 물리적 조건 아래에서도 지루하게 사건을 서술하는 방식을 밀고 나간다. <조디악>에서 핀처의 과잉적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시간을 곧이곧대로 나열하는 방식일 것이다. 마치 <벤자민>에서 얼굴의 주름을 하나하나 세공하는 방식을 선택했던 것처럼, <조디악>은 수십년의 시간을 시간 단위, 주 단위, 연 단위로 쪼개어 늘어놓는다. 단순히 서사적 흥미나 스펙터클의 유혹을 넘어서 물리적인 시간을 강조하는 것이 <조디악>의 가장 영화적인 면모다. 리얼타임을 표방하는 <24시> 같은 드라마도 드라마틱한 극적 구조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시간의 탑을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조디악>이 롱테이크로 시간을 지탱하는 예술 영화는 아니다. 쇼트도 많고 편집도 느리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조디악>이 나름의 리듬을 통해 시간의 무게를 전달하는 게 더 신기해 보인다. 한 가지, 범인의 심리에는 별다른 관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에는 무심한 구석이 있다. 영화는 범인을 좇는 이들의 욕망, 특히 그레이스미스의 욕망에만 약간의 관심을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 무심함 때문에 영화가 더 사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 영화는 사건의 표면의 아래 있는 것들을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범인의 욕망,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 그런 것들을 굳이 영화 속에 정서로 끌어들여 보는 이에게 억지로 심어주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어떤 과학적 수단과 근대적 질서와 법적 정의를 동원해서도 풀 수 없는 심원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조디악>은 마치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정서를 조작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는 실재를 전달하기 위해 그냥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만들어졌다. 말하자면 테크놀로지의 시대에도, 혹은 테크놀로지의 시대일수록, 테크놀로지로도 접근할 수 없는 심연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핀처의 최근작들은 테크놀로지의 효과에 대해 사유하면서도 끝에는 테크놀로지로도 어쩔 수 없는 허무한 지점에서 멈춰 선다. <조디악>의 서행하는 리듬은 <소셜 네트워크>의 초특급행의 리듬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의 속도는 완전히 반대다. 하지만 전혀 다른 속도의 두 영화에는 모두 어떤 공백,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다. 멍한 눈으로 모니터 너머를 응시하는 주커버그와 비로소 범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그레이스미스. 두 사람을 비추는 각 영화의 마지막을 지배하는 정서는 허무함이다. 너무 멀리 와버린 이 자리에서, 그들은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기서 멈춰서는 핀처의 영화들은 앞으로 무엇을 더 보여줄까. 잔혹한 스릴러로 돌아갈 그의 다음 영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궁금해진다.

긴 호흡의 감독론 쓰고 싶어

신중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걸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효선(30)씨는 칭찬에 유독 부끄러워했다. 스스로는 시네필보다 문학도에 가깝다고 밝히지만 일단 관심이 가는 영화감독이 생겼다 하면 전작을 몰아 보고 글로 기어이 정리를 해내는 타입이다. 서울대 영문과 박사과정 중이고 이번 학기에 수료한다. 3년 전에는 다르덴 형제 작가론을 써서 최종 심사까지 올랐다가 고배를 마셨고 올해 두 번째 도전 만에 당선됐다. 장기적으로는 좋은 영문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지만 한번 뛰어든 이상 영화평론가의 길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포부를 밝힌다. -언제부터 영화에 관심을 뒀나. =7∼8년 전에 영상제작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비로소 스토리가 아니라 요소별로 영화를 보게 된 것 같다. 하지만 그때 해보고 영화연출에 대한 꿈은 깨끗하게 접었다. 누구도 봐서는 안되는 영화 한편을 남겼을 뿐이다. (웃음) 평론가라는 직함은 아직 부담스럽다. 다만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론은 <안티크라이스트>를 썼다. =다시 볼 용기는 나지 않는 영화지만, 역시나 내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기존의 다른 글들에서 얘기되지 않은 부분들을 쓰려고 노력했다. -이론비평으로 쓴 미하엘 하네케도 라스 폰 트리에만큼이나 쟁점의 작가다. =사실 둘 다 즐겨 보지는 못한다. (웃음) 다르덴 형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를 좋아한다. 그럼에도 하네케와 폰 트리에는 중요하고 또한 이야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평론가로서 장기적으로 활동할 의향이 있나. =물론이다. 두려움도 좀 있지만… 기회가 되면 긴 호흡의 감독론을 써보고 싶다. 다만 내가 이해하지 못했거나 나의 기호에 맞지 않는 글을 쓰는 건 피하고 싶다. 그렇게 쓰면 선정적인 글이 되고 나중에 보면 창피하니까. 영화평도 그걸 유의하며 쓰려고 한다. 김효선 그의 외설적 진실 나는 내 모든 영화가 외설의 한 요소라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미카엘 하네케) 1. 우리는 ‘진실’이 모순어법을 통해서만 통용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불편한 진실’이거나 ‘부끄러운 진실’이다. 적어도 근 몇 년 동안 나는 ‘아름다운 진실’이라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진실은 스스로 현현하는 해석학적 ‘진리’는 고사하고 객관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인 ‘사실’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것은 대체로 감추고 싶은, 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그 추함이 전염이라도 되는 양,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야할 길이 너무 멀고 우리는 기억상실에 능하다. 다행일까, 상처를 가리고 포장하는 기술은 나날이 발달하고 있다. 예술품은 때때로 기억상실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된다. 그것은 상처를 잘 봉합해서는 현실을 낙관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판타지는 붕괴된 현실관계의 틈새를 메우고, 스크린에 펼쳐진 긴박한 몸싸움은 사람들의 지친 영혼을 자극적 이미지로 위로한다. 우리는 영화관을 찾고, 또 치유를 받는다. 상처를 상기하기 위해서 영화관을 찾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예술로 혈서를 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지나치게 퇴행적인 예술가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봉합된 환부를 다시 절개해 뚝뚝 흐르는 핏물에 카메라를 들이댄다.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도 그렇다. 그가 카메라에 담아내는 것은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사회적, 정신적 상처들이다. 그것들은 대개 우발적으로 노출되고 러닝타임 내내 집요하게 전시된다. 그가 카메라를 흔드는 재주를 부리는 것은 아니지만, 관객들은 그의 정적인 구도로부터 흔히 현기증을 느낀다. 하네케는 <피아니스트>(2001)와 관련한 인터뷰(Cineaste, summer 2003)에서, 그의 영화에 드러나는 상처들의 속성을 ‘외설적’이라 설명한 바 있다. 이때 외설은 포르노그래피와는 다르다. 포르노그래피는 관습을 거스르는 삶의 요소들을 소비재로 만든다. 하네케의 초기작들이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이유는, 미디어가 상업논리에 부응해 사회적 환부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매끈하게 봉합하고 있는 모든 예술적 관행들은 포르노적이다. 반면, 제도적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예술적 시도들은 외설의 요소를 갖는다. 그의 관점에서, 외설은 현실에 대한 조작을 이끄는 모든 억압적 논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데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은폐된 상처들을 추한 모습 그대로 드러내 직시하도록 만든다. 때문에 외설은 결국 진실의 문제로 귀결된다. 폭력, 섹슈얼리티, 등 사회적 금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하네케의 모든 도발은 진실을 탈은폐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의 고민은 단순히 상처를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어떻게 관객이 현실에 대한 반성을 회피하지 않고 그 상처를 경험할 수 있는가 하는 방법론적인 문제를 포괄한다. 그의 ‘외설성’은 사회적 환부에 접근하는 일종의 윤리적인 태도인 것이다. 사물에 대한 클로즈업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일곱 번째 대륙>(1989)에서부터 고요한 흑백화면 속에 감정의 소용돌이를 그려내고 있는 <하얀 리본>(2009)에 이르기까지, 하네케의 영화들은 모두 외설로서의 진실을 담고 있다. 관객들은 때로 카섹스 중인 차 옆에서 오줌을 싸고 있는 여자의 뒤통수를 보아야만 하고, 살인을 저지른 뒤 바닥에 흘린 피를 무심히 닦고 있는 소년의 손동작을 감당해야 될 때도 있다. 하네케의 인물들은 줄곧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 놓이고, 그 상황은 순식간에 절대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관객들은 바로 그 통제 불능의 혼란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억압적인 사회 논리를 감지하고 자기기만을 이어가는 인간 존재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얻게 된다. 2. 하네케의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고정된 카메라로 찍는 롱테이크 숏일 것이다. <우연의 연대기에 관한 71개의 단편들>(1994)이나 <미지의 코드>(2000)를 채우고 있는 쁠랑 세깡스는 물론이고, 다른 작품들의 경우에도 영화의 분기점을 이루는 중요한 장면에서는 줄곧 롱테이크 숏이 쓰이고 있다. 게다가 하네케는 이들 숏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을 가급적 자제한다. <하얀 리본>은 돌출된 롱테이크 숏을 찾아보기 힘든 예외적인 경우에 속하겠지만, 하네케는 작품에 관한 인터뷰(Cineaste, Winter 2009)를 통해서 아역배우를 컨트롤해야 하는 상황과 대사 위주의 극적 조건이 해당 기법을 고수하기 힘들었던 이유였음을 밝힌 바 있다. 하네케의 롱테이크 숏은 기본적으로 같은 기법을 활용한 고전 작가들의 취지와 닿아 있다. 편집이 중첩될수록, 관객은 현실을 절합한 왜곡된 이미지에 무비판적으로 끌려가기 쉽다. 이에 반해 편집을 배제한 숏들은 시공간의 연속성 속에서 관객이 프레임 ‘안’을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관객의 몰입은 차단되는 반면, 현실에 대한 사유의 기회는 늘어난다. 이를테면, 하네케는 현실에 대한 인위적인 왜곡을 극소화하려는 바쟁의 윤리적인 태도를 이어받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롱테이크는 일종의 ‘외설’적인 양식인 것이다. 관객들은 그의 롱테이크 숏이 폭력을 다룰 때, 종종 불쾌감을 느낀다. 이 불쾌감은 물론 그가 철저히 의도하는 바다. 폭력은 추한 것이며, 폭력이 남긴 상처는 고통일 뿐이다. 그러나 일부 상업 영화들은 이 끔찍한 상처를 화려하게 포장하고, 관객들은 별 불편 없이 폭력 장면을 소비한다. 그는 이들 관객의 비반성적인 몰입이야말로, 폭력의 실상을 은폐하는 걸림돌이라 판단한다. 그가 “폭력과 미디어”라는 짧은 글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그의 고민은 폭력을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폭력의 묘사와 관련해 관객의 위치를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이처럼 폭력 장면을 다루는 하네케의 집요한 롱테이크 숏은 관객의 거리두기와 반성적인 사유를 위한 것이다. 그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지우고 폭력을 매혹적인 것으로 만드는 모든 스타일리쉬한 폭력물들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의 롱테이크 숏에는, 예컨대 샘 페킨파가 컷을 쪼개고 슬로우 모션을 동원하여 죽음을 즐겼던 식의 가학적인 면모가 없다. 하네케는 폭력 행위 자체를 소비하지 않는다. 하네케의 영화에서 페킨파의 슬로우 모션에 해당할만한 살육 장면은 단 한번 등장한다. <베니의 비디오>(1992)는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때 영화는 테이프를 되감아 도살 순간을 한 번 더 보여준다. 두 번째의 도살 장면은 슬로우 모션으로 진행되어 일종의 비장미를 드러내고, 때마침 흩날리는 눈발이 살육 장면에 서정성마저 부여한다. 물론 이 숏은 베니가 녹화한 테이프 속의 한 장면이다. 비디오광인 베니는 폭력이 주는 쾌감에 경도되어 있다. 원래 속도와 슬로우 모션이 연속된 이 비교 장면은, 폭력의 미학적인 전유가 어떻게 폭력의 잔학성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베니에게 비디오 안과 밖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는 어느 날, 그저 그 느낌을 알아보고 싶어 우발적으로 한 소녀를 살해한다. 그러나 베니가 소녀를 살해하는 문제의 시퀀스에서 정작 폭력 행위는 프레임 밖에 있다. 소녀가 총에 맞아 쓰러지자, 베니는 그녀를 프레임 바깥으로 옮기고는 방을 가로지르며 분주히 움직인다. 시종일관 텔레비전 브라운관만을 비추고 있는 이 롱테이크 숏에서, 소녀는 고통스럽게 울부짖고 관객은 그 울음소리를 통해 화면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실상을 가늠하게 된다. 베니는 한참 만에 다시 한 번 총을 쏘아 그녀를 확실히 사살한다. 꽤 긴 시간 동안, 육체에 대한 폭력이 이어지지만, 그 어떠한 가학 행위도 화면 안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퍼니 게임>(1997/2007)의 살인 역시 프레임 밖에서 일어난다. 청년 일행 중 한 명이 어린 아들을 죽이는 순간은, 나머지 한 명이 부엌에서 샌드위치를 만드는 장면으로 대체된다. 그의 손이 빵을 가르고 버터를 꼼꼼히 바르는 동안 한 발의 총성, 자동차 랠리를 중계하고 있는 텔레비전의 소음, 그리고 여자의 비명 소리만이 제시될 뿐이다. 관객이 직접 보게 되는 것은 살인 행위가 아니라, 그 이후의 처참한 광경이다. 카메라는 피범벅이 된 텔레비전을 클로즈업으로 비춘 뒤, 방문자들이 떠난 거실의 전경을 롱테이크 숏으로 담아낸다. 커다란 소파 너머로 남자의 다친 다리가 보이고, 아이의 시체는 텔레비전 앞에 놓여 있다. 랠리의 중계방송이 시끄럽게 이어지는 동안 여자는 몸을 구부린 채 망연히 앉아 있다가, 한참 만에 결박된 몸을 일으켜 텔레비전을 끈다. 그녀가 프레임 바깥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남자의 몸을 부축하는 십 분여의 긴 시간 동안, 카메라는 약간의 패닝을 할 뿐 시종일관 고정되어 있다. 하네케의 카메라는 침착하게 폭력의 잔해들을 응시한다. 이 숏에서 관객이 목격하는 것은 철저히 무력해진 가족의 모습이다. 그들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혀 통제하지 못한다. 인물에 대한 육체적, 심리적 고문을 지켜보며, 관객은 화려한 액션물에서 경험하던 쾌감이 아닌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관찰자의 위치로 멀어져 폭력에 대한 반성적인 사유를 떠안게 된다. 폭력의 실상은 이 장면에서 하나의 외설로서 드러난다. <퍼니 게임은>은 폭력을 포장하는 모든 판타지들에 대한 폭력 자체의 돌발적인 공격을 담고 있다. <히든>(2005) 역시 고정된 카메라에 의지한 롱테이크 숏을 두드러지게 사용한 예다. 주인공 조르주의 두려움은 누군가가 자신의 집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촉발되며, 그 감시의 증거는 건물을 찍은 고정된 롱테이크 숏에 있다. 마지드가 스스로 목을 자르는 아파트 시퀀스에서도 하네케는 정적인 롱테이크를 구사한다. 정면의 낡은 벽지에 마지드의 피가 솟구치고, 그는 바닥으로 쓰러진다. 목에서 핏물이 흐르는 소리와 나지막한 신음이 화면을 채우는 동안, 조르주는 화면 중앙을 맴돈다. 그가 기침을 내뱉고 마침내 숏이 끝날 때까지, 화면은 돌발적인 죽음이 현실로 인식되는 동안의 시간적 추이를 그대로 담는다. 이 숏에서 마지드의 죽음은 명백히 실제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동시에 그의 죽음과 연관된 모든 사적, 사회적 문제들이 탈은폐된다. 하네케의 롱테이크 숏은 윤리를 지향한다. 그것은 진실을 하나의 외설로서 제시하는 방식이다. 진실은 봉합되지 못한 추한 상처의 모습이기에, 관객들은 환부를 들여다보는 그의 롱테이크 숏으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 그러나 관객이 불편함 속에서 인물들의 공포와 혼돈을 ‘관찰’하는 동안 현실에 대한 반성적인 거리가 확보된다. 하네케의 정적인 롱테이크 숏을 감당해 내는 일은, 익숙하지만 우리가 줄곧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진실과 만나는 경험이다. 관객은 그의 롱테이크 숏들을 통해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노출되는 휴머니티의 실상과 그 자체가 폭력의 역사로 이루어진 문명의 위협적인 실체를 조금씩 체감하게 된다. 3. 진실이 규범에서 벗어난 외설로서 성립한다면, 인간 존재를 잠식하고 있는 억압적 규범을 직시하는 일이야말로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조건이 될 것이다. 하네케의 영화는 사회규범에 의해 억압된 일탈적인 문제들이 돌출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일상을 장악하면서, 은밀히 자행되던 억압의 생리가 역으로 노출된다. 때문에 그의 영화는 일정 부분 추리과정을 포함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에서 원인 모를 사건들이 발생하는데, 범인이 누구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네케는 범인을 철저히 은폐함으로써 오히려 책임을 묻게 되는 역설을 구사한다. 하네케의 영화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주로 가정이다. <퍼니 게임>의 가족들은 휴가지에서 몰살을 당하고, <일곱 번째 대륙>의 가족은 집단 자살을 한다. <늑대의 시간>(2003)같은 작품은 가족 구성원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구 문명의 이기와 위선이 그가 다루고 있는 주요 화두인 것을 감안한다면, 가정은 문명의 소우주로서 사회적인 내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작은 틀이 된다. 가정의 붕괴를 통해서 사회제도의 맹점이 드러나는 식이다. 또 한편으로는 가족 이데올로기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각자의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불평등한 권력관계와 각종 갈등을 유발하며, 가정 내적, 외적 폭력을 서슴지 않는다. <피아니스트>의 여성이 갖고 있는 정신적인 상처는 모녀관계의 편집증적인 보존 욕구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히든>의 갈등 역시 가족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동반한다. <히든>은 성공한 TV토론 진행자 조르주가 가족과 명예 등,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어떻게 황폐해져 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린 조르주가 마지드에게 주었던 상처는 자신이 받던 혜택을 빼앗기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인 조르주는 가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다시 한 번 피해자에게 범죄자의 누명을 씌우는 이기심을 보인다. 그는 마지드를 자살로 몰아간다. 자신을 둘러싼 틀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조르주만의 일이 아니다. 조르주의 과오는 1961년에 일어난 파리대학살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 집으로 찾아온 익명의 비디오테이프는 그 자신의 죄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정부가 행했던 끔찍한 역사적 범죄와 이후 벌어진 은폐에 대해 책임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집단 결속을 구실로 전쟁을 정당화하고, 죄의식을 회피하기 위해 또 다른 전쟁을 저지르는 모든 테러리즘을 향한 비판이기도 하다. 하네케는 조르주 부부가 보는 텔레비전에서 중동 연합군에 대한 뉴스가 나오는 장면을 비춤으로써 관객들이 비판의 대상을 놓치지 않도록 유도하고 있다. 마지드의 자살은 일차적으로 조르주를 겨냥한 것이지만, 결국 기만을 통해 유지되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선언과도 같다. 그의 죽음이 담긴 처참한 롱테이크 숏은 사회적 환부가 생생하게 전시되는 또 하나의 외설적인 장소이다. 조르주는 돌출된 외설적 진실에 정신적 외상을 입은 듯하지만, 결국 그는 그 두려움을 가족 이데올로기로 합리화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영화에서 가장 끔찍하게 그려지는 폭력성은 마지드의 목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가 아니라, 수면제를 먹고 난 뒤 안막커튼을 치고 잠을 청하는 조르주의 마지막 움직임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소년 마지드가 고아원으로 붙들려갔던 과거에 대한 꿈을 꾼다. 죄의식은 그의 꿈처럼 일상에 잠재되어 있다. 그러나 가끔씩 고개를 쳐드는 이 명백한 상처들은 결국 가족, 사회, 국가를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힘에 의해 봉합되고 또 다시 은폐될 것이다. 파리대학살이 끔찍한가, 아니면 그것이 20세기 말까지 조직적으로 은폐되었다는 사실이 더 끔찍한가. 하네케의 문제의식은 외설적인 진실 앞에서의 혼란으로부터 점차 그 진실에 직면한 인간의 이기심과 기만의 문제로 옮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하얀 리본>은 진실과 이를 은폐하는 억압적 이데올로기, 그리고 그 이데올로기에 기생하고 있는 휴머니티에 대한 상세한 고찰이라 볼 수 있다.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바대로, <하얀 리본>은 제 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그 나라에서 일어났던 일들’, 즉, 전쟁과 파시즘의 기원을 사유하고 있는 영화다. 그러나 <하얀 리본>이 노출시키는 대상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만이 아니다. 영화는 폭력을 파생시키는 모든 종류의 억압적 이데올로기를 문제 삼고 있다. 청교도적 도덕규범, 가족 이데올로기, 계급 구조를 둘러싼 각종 교리와 원칙들은 개인의 일상을 억압하고 망가뜨린다. 그리고 사람들은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시 특정한 이데올로기에 의존하거나 타인에 대해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그 폭력의 중심에 아이들이 있다. <하얀 리본>에서 일어나는 방화와 린치의 범인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아이들이 일련의 사건과 관계되어 있음은 강하게 암시된다. 바로 그 점이, 범인이 누구고 동기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황을 전제로 한 하네케의 이전 영화들과 <하얀 리본>이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점이다. <히든>에서 비디오테이프를 실제로 보낸 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다. <히든>의 비디오테이프는 죄책감에 대한 알레고리적인 상관물로도 보인다. 그러나 <하얀 리본>에서 폭력 사건의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아이들이 사건의 범인일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가 환기하는 충격과 그 사실에 대한 대응 문제가, 결국 사회 내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히든>에서 어린 조르주는 마지드에게 닭의 목을 치게 하고는 누명을 덮어씌웠다. 성인 조르주는 그 일에 대해 그저 아이들이 하는 작은 거짓말이었을 뿐이라고 둘러댄다. 물론 그것은 누구나 저지르는 어린 시절의 작은 실수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수 때문에 소년 마지드는 고아원에서 ‘증오’를 배워야 했고, 우리는 그가 고아원으로 끌려가는 롱테이크 숏에서 장시간 그의 절망을 지켜보게 된다. 사람들은 간혹 조르주처럼 충격적인 진실로부터 무지와 순수만을 읽어내는 편의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문제는 순수한 아이들이 과연 폭력을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순수한 아이들도 폭력을 저지르게 만드는 현실을, 과연 어른들이 인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하얀 리본>의 아이들을 둘러싼 혐의가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진실이 된다. 그리고 모든 치명적인 상처들이 봉합과 은폐의 욕구를 작동시키듯이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들에 관한 진실을 회피하려 든다. 목사는 그가 아이들에게 강요한 청교도적인 도덕률이 아이들의 폭력 앞에서 무력해지는 상황과 마주한다. 그는 책상 위에 살해된 새를 보고 절망하지만 이를 발설하지는 않는다. 그는 아이들에게 혐의를 두는 학교 선생에게 도리어 화를 내고, 그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결국 진실을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책임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된다. 아이들의 폭력을 인정하는 것은 이들에게 순수를 강요하고 억압했던 기존 도덕 체계의 모순과 어른들이 자행한 모든 종류의 폭력을 자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정하는 대신 분노하고 기만하는 편을 택한다. <히든>에서 마지드의 아들은 자신을 벌레 보듯 거부하는 조르주에게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하는지’를 묻는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조르주를 또 다시 화나게 만든다. 조르주의 분노는 죄책감의 다른 모습이다. 왜 가해자인 그들이 피해자의 얼굴을 하고 화를 내고 있는가. 왜 명백히 드러난 진실을 감추고 기만하는가. 그들이 정작 두려워하는 것은 곪아터진 환부를 인정하고 책임을 받아들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책임보다는 분노를, 진실보다는 왜곡과 봉합을 택한다. 마지드의 아들이 한 질문은 사실 모든 사적, 정치적 기만의 역사에 가하는 정당한 반문인 것이다. 진실에 대한 위선적인 봉합은 결국 <하얀 리본> 속 아이들의 보복행위처럼 또 다른 폭력행위, 혹은 또 다른 파시즘을 낳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과잉이 폭력을 낳고, 그것이 다시 억압논리를 부르는 악순환의 흔적을 현실에서 자주 목격한다. 이 암묵적인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가려진 상처를 끄집어내어 규범이 낙관하는 세계가 판타지에 불과할 뿐임을 명백히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순수함 속에서 억압의 작동을 발견하는 역설의 형태이건 폭력적 도발을 사유하는 반성의 형태이건 간에, 하네케는 또 다시 통제 불능의 괴이한 상황 속으로 인물들을 몰아넣고, 임의로 봉합된 환부에 상처를 내는 식의 외설, 또 다른 퍼니 게임을 준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2003년 작 <늑대의 시간>은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기차역에 모여들게 된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휴머니티를 사유한 영화다. 물 한 모금조차 마음껏 마시기 힘든 상황에서 사람들은 살인과 폭력을 저지르고 옆 사람을 정신적으로 고문한다. 좁은 장소에 몸을 누인 사람들 중에는 남편을 살해한 남자와 같은 공간을 견뎌야 하는 주인공을 비롯해, 마실 것을 얻기 위해 몸을 판 여자, 자식을 잃고 오열하는 부부, 배척받는 이민자 가족, 그리고 이 와중에 사람들 곁에서 소리를 내며 섹스를 하는 커플까지도 함께 있다. 인간 존재가 어떠한 선의도 행사하기 힘들어진 극한의 상황에서 사람들은 죽음과 같은 하루를 함께 견뎌낸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본능만 남은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고통 받던 아이가 한밤 중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앞에서 말없이 옷을 벗고 뛰어드는 장면을 담는다. 아이는 소년 마지드처럼, 혹은 <피아니스트>의 주인공 에리카처럼 얼굴에 피범벅이 된 채 알몸으로 불 앞에 서 있다. 아이의 멍한 눈과 입가를 흐르는 코피는 인간사회의 가장 슬픈 상처를 경험한 충격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아이가 불구덩이에 뛰어들려는 찰나, 다행히 보초를 서던 남자가 아이를 구해낸다. 그는 아이를 달래며, 이 지옥같은 현실에서 우리는 이겨낼 수 있다고, 내일이라도 기다리던 기차가 오면 문을 열어 마음껏 경치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위로한다. 그리고 영화는 기차 안에서 바깥의 자연풍광을 찍은 롱테이크 숏을 한참을 보여주고는 끝이 난다. 이 마지막 기차 시퀀스는, 마침내 응급상황이 해결되어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아이의 꿈이나 상상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질식할 것만 같았던 기차역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점에서 안도를 주는 숏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이 숏으로부터 마냥 희망을 긍정하기란 어렵다. 관객은 흐르는 경치를 지켜보며 지난 두 시간 동안 목격한 인간들의 추한 자취를 반추하게 된다. 눈앞에 흐르고 있는 경치가 삶을 의미한다면, 이 롱테이크 숏이 상기시키는 것은 희망과 낙관 속에 완전히 포섭될 수 없는 삶의 어지러운 단면들일 것이다. 하네케는 관객이 그의 영화를 통해서 삶의 진실을 들여다볼 것을 원했다. 기차역에 모인 인간 군상의 저열한 실상처럼, 삶의 참모습은 때때로 추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네케는 그의 전 작품에 걸쳐서 사회적, 정신적 상처의 흔적들을 집요하게 탐구한다. 그 상처들은 너무나 끔찍해 대개는 은폐되어 온 것들이다. 그러나 하네케는 그 봉합된 상처마저 다시 절개해 진실의 추한 모습을 결국 직시하도록 만든다. 처참한 삶의 진실 앞에서 하네케의 인물들은 고통스러워한다. 그들은 피를 흘리며 오열하고, 때로는 분노한다. 이들의 몸부림 속에서 휴머니티에 대한 낙관을 이어가기란 힘들 때가 많다. 그러나 어쩌면 상처를 제대로 직시하지 않고 긍정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삶에 대한 가장 위험한 기만일 수 있다. 그것이 하네케의 외설에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다시금 그의 엄격함을 찾게 되는 이유이다.

[유운성의 시네마나우] 그들은 진화한다

(807호에서 계속) 베를린파의 영화적 실험이 주류 독일영화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내러티브영화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져왔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즉 그들의 작업은 (베를린파 1세대의 산실인 독일영화텔레비전아카데미(DFFB) 교수들인) 하룬 파로키나 하르트무트 비톰스키의 아방가르드적 실천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베를린파 영화는 최소한의 플롯을 구실로 삼아 인간과 환경(milieu)이 상호작용하는 비가시적 장(場)의 역학을 탐구해왔다고 할 수 있다. 적잖은 수의 베를린파 영화에서 외국의 도시나 휴양지, 국경지대 등이 무대로 제시되고 집을 떠나 있거나 새로운 장소에 막 도착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그러한 비가시적 장의 떨림을 가장 용이하게 감지할 수 있는 상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분히 안토니오니적인 방식으로 ‘일상을 모험화’하는 방법론이 가장 잘 드러난 영화로는, 마르세이와 베를린을 오가는 과정에서 실존적 궁지에 빠지게 된 한 여류 사진작가가 등장하는 앙겔라 샤넬렉의 <마르세유>(2004)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열망>(2008), 토마스 아슬란의 <그림자 속에서>(2010), 베냐민 하이젠베르크의 <강도>(2010)처럼 (주로 범죄와 관련된) 장르영화의 쇄신에 관심을 기울인 최근 작업들은 오히려 ‘모험을 일상화’하는 쪽에 가깝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공개되어 평단의 절찬을 받은 <드라이레벤>(2011)은 이같은 장르영화 쇄신의 정점에 자리한 작품이자 베를린파의 변모를 예감케 하는 작품이다. 상이한 세대에 속한 세 감독- 도미닉 그라프(1952년생), 크리스티안 펫졸트(1960년생), 크리스토프 호흐호이슬러(1972년생)- 이 연출한 90분 분량의 장편 세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동일한 장소와 시기를 배경으로 한 범죄사건을 매개로 삼아 세개의 (독립적인 동시에 느슨히 연관된) 삶의 양상을 차례로 다룬 일종의 TV용 ‘미니시리즈’다. 이 작품의 기원은 2006년 여름, 세명의 감독이 이메일 교환을 통해 진행한 토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를린파 영화가 내러티브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일을 점점 경시하고 있음을 비판하는 한편 장르영화의 부재에 아쉬움을 토로한 그라프의 이메일로 촉발된 이 토론은 결국 이론적 논의를 넘어 함께 영화를 만드는 작업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드라이레벤>이라는 걸출한 작품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카를로스>(2010), 라울 루이즈의 <리스본의 미스터리>(2010), 그리고 (나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토드 헤인즈의 <밀드레드 피어스>(2011) 등과 더불어 21세기 영화에서 내러티브/장르/텔레비전과 결부된 작가주의의 미래와 가능성에 관한 비평적 고찰을 자극하기도 한다(이에 대해 논하는 일은 별도의 지면을 요한다). 사실 베를린파 영화들이 미니멀리즘적이고 무기력하며 (특히 잡지 <리볼버>를 중심으로) 게토화된 미학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은 끊이지 않았는데, 대개는 그저 피상적인 인상에만 근거한 것이다(예컨대 롱테이크, 롱숏, 절제된 대사가 이들 영화의 특징이라는 지적은 마렌 아데의 <나만의 숲>(2003) 같은 영화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비판들에 맞서 그간의 결과물들을 재검토하고 ‘진화’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이야말로 이들의 작업을 이론적인 동시에 실천적인 ‘기획’(project)으로 간주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고 <드라이레벤>은 그러한 노력이 얼만큼의 창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가를 보여준 드물게 모범적인 사례다.

[design+] 궁극의 전쟁기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의 찰스 자비에는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고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의 소유자다. 그는 천재 과학자 행크와 조우하면서 자신의 초능력을 ‘증폭’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의 텔레파시는 레이더 특수 장치, ‘세레브로’의 도움으로, 북미 대륙 전역을 종횡으로 이동하면서 거대한 희로애락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이에 맞서는 세바스찬 쇼우의 방어무기는 소련인들이 선물했다는 특수 합금 투구다. 자비에는 이 투구의 은폐 기능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흥미롭게도 이 투구의 기능은 영화 막바지에 등장해 엑스젯(엑스맨 활동에 필수적인 제트기)을 연기한 전략정찰기, SR-71 블랙버드의 그것과 유사하다. 이 항공기는 자신의 뒤꽁무니를 쫓는 미사일을 마하 3의 속도로 따돌릴 수 있지만 내연기관의 추진력을 극대화한 유선형의 외관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의 것을 욕망한다. 바로 대공 레이더라는 기계 눈 앞에서 투명한 물체로 변신하는 것, 이를 위해 레이더파의 반사를 최소화하는 새로운 조형의 원리를 습득하는 것이다. 이렇게 속도의 미학과 비가시화의 전략을 동시에 추구하다 보니 이 전쟁기계의 몸체는 다소 기형적이었다. 납작한 곡면의 티타늄 동체는 기하학적 형태의 델타익을 장착하고 있었고, 코브라 형상의 기수부는 원뿔 모양의 엔진 공기 흡입구를 좌우 양편에 거느리고 있었다. 유클리드적 형태와 베지어 곡선이 묘한 균형을 이루며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SR-71의 등장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세레브로로 증폭된 자비에의 초능력은,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인 1960년대 초반, 미국과 소련이 동시에 꿈꿨던 궁극의 전쟁기계를 암시한다. 당시 두 나라 모두 인공위성, 고성능 카메라, 인공지능 컴퓨터를 결합해 상대방의 동태를 속속들이 염탐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기계 눈의 개발에 몰두하고 있었다. 동화 속의 수정구슬 같은 장치를 보유한다면 상대방의 선제 핵도발에 대처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자비에는 이런 냉전의 군사적 상상력을 현실화한 존재다. 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다른 돌연변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기술 혁신이 아니라 유전자 변이를 통해 전쟁기계로 진화한다. 이런 측면에서 SR-71을 캐스팅한 것은 ‘신의 한수’라고 할 만하다. 특히 <트랜스포머: 패자의 역습>에서 노구의 제트파이어가 이 비행기로 변신하는 장면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했던 관객이라면 더욱 그렇게 느낄 것이다. SR-71은 10대 남자아이의 눈높이에서 그저 ‘쿨한’ 시각적 오브제로 소비되었던 과거를 뒤로한 채 핵잠수함과 기이한 공중곡예를 펼쳐 보인다. 역사와 허구가 교차하는 쿠바 미사일 사태 한복판에서 냉전의 뜨거운 기운을 스크린 위로 불러들이면서, 엑스맨과 유사한 탄생 비화를 지녔던 변종기계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변승욱] 호흡이 느리다고? 이야기의 힘을 위해!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개의 눈>의 변승욱 감독은 2006년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로 호평을 받으며 데뷔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세밀함이 엿보이는 멜로드라마였다. 2011년, 오랜만에 그가 선보인 두 번째 영화는 예상외로 공포영화다. 장르는 달라졌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존 공포영화의 룰을 따르면서도 전반적인 전개나 감성의 분위기에서라면 차분하고도 세심한 영화적 기질을 갖췄다. 변승욱 감독은 이야기의 힘을 유지하는 공포영화, 현실의 정서를 반영하는 공포영화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야기와 현실과 공포 장르가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지 그에게 들었다.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개의 눈>(이하 <고양이>)의 영화적 포인트를 ‘공포’와 ‘정서’로 나누어 강조했다. =공포의 대상이 고양이인 영화다. 고양이와 같이 등장하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소녀도 있다. 우선은 이 모습들을 어떻게 외양상 무섭게 보일 것이냐의 문제가 있었다.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드러나는 미스터리한 두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었고. 고양이는 두 가지의 이미지가 있다. 물론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가 있다. 반면 고양이가 갖고 있는 반대 이미지는 섬뜩함 내지는 서늘함이다. 공포영화다보니 후자의 이미지를 차용해야 했고 그중에서도 눈빛, 울음소리 등 고양이가 가만히 있어도 풍겨지는 기운이랄까, 그런 것들을 디테일하게 잡아내려고 했다. -정서의 면에서라면. =정서라는 면을 강조한 건 내가 기억하는 공포영화들은 볼 때는 무서운데 보고나면 공허했던 경험이 계기가 된 것 같다. 두 시간 내내 관객을 집중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때, 결국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야기의 힘이다. 공포적인 요소와 이야기의 힘이 같이 섞여서 갈 때 공포도 배가되고 이야기도 더 흥미진진해진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공포의 근원이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보자면 결국은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비현실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한번쯤 느껴볼 수 있는, 그리고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런 부분들, 바로 일상의 정서적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고양이>에서는 공포와 더불어 정서가 균형을 이루었을 때 영화의 힘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인공이 폐소공포증을 앓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살인이 일어나는 장소는 대개 밀폐된 곳들이다. 공포의 효과라는 면에서 이 둘을 짝짓는 게 어떤 점에서 중요하다고 보았나. =일상적인 공간, 익숙한 공간이 두렵고 낯선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이유가 따지자면 주인공이 갖고 있는 폐소공포의 상황과 맞닿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의문의 사건들도 그 어떤 밀폐된 공간과 맞닿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일상적인 공간이 닫힐 때, 관객이 보고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도록 하고 싶었다. 공간적인 개연성이 있다면 관객 입장에서는 더 주의깊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는 계단을 올라서듯 차근차근 전개되는 구조다. 차분하고 꼼꼼하다. 그런 반면에 일련의 사건과 죽음의 연쇄가 어떤 예상 외의 탄력적 긴장감을 일으키기보다는 마치 자기 차례가 되기를 기다렸다 등장한다는 인상도 받았다. =공포의 긴장감이 어떤 방식으로 쌓여가느냐의 문제였던 것 같다. 사건이나 미스터리가 단편적으로 쌓였다가 풀리는 방식보다는 점층적으로 쌓여가기를 바랐다. 공포 장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빠른 호흡을 취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빠른 호흡보다는 결국은 관객이 그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는 그 템포감, 그런 리듬감을 생각했다. 그런 템포, 리듬은 같은 공포영화라고 해도 전부 다를 거라고 봤다. 결국은 공포영화가 원하는 어떤 리듬감이 아니라 <고양이>라는 공포영화가 원하는 리듬감과 템포를 생각해봤다. 그 점에서 긴장과 이완의 적절함을 추구했다. 이야기의 흐름으로 봤을 때 약간 느리다고 느껴지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더 맞지 않을까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호흡이 느린 공포로 볼 소지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있어서는 너무 빠른 게 약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했다. 선택의 문제라고 본다. -공포영화인데 어딘지 모르게 멜로영화의 흐름이라는 인상도 받았다. 이것이 공포영화 <고양이>의 독특한 점인 것 같다. 그건 이 영화의 장점일 수도 있고 단점일 수도 있다. 단순히 감독의 전작 때문에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이 영화의 어떤 흐름이 그런 인상을 전한 것 같다.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그럴 순 있다. 나의 원래 성향하고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무의식적으로 영화를 찍으면서 작용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를테면 후반작업을 하면서 음악감독과 상의할 때도 공포영화에서는 쉽게 쓰이지 않는 음악의 정서랄까, 그런 것들에 관해 말했다. 주인공 소연과 함께 미스터리한 사건을 추적하는 준석이라는 인물이 있지 않나. 이 영화의 메인 플롯은 의문의 사건을 파헤치는 것이지만 서브플롯으로 소연이 준석을 짝사랑하는 관계로 이뤄진다. 그러다보니 두 사람이 있을 때는 음악도 그런 정서적 부분들을 고려해서 쓴 것이 있다. 그런 건 확실히 의도된 것이다. 그런 것들 때문에 받은 느낌 아닐까? -박민영은 ‘CG를 상대로 혼자 연기하는 것의 어려움’에 관해 토로한 적이 있다. 그걸 듣다가 그렇다면 이 영화의 감독에게는 ‘CG를 상대로 혼자 연기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배우를 연출하는 어려움’은 없었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해 봤다. (웃음) =고양이들을 상대할 때는 대부분 상대가 없다보니 박민영씨는 그냥 상대가 있다 치고 하는 연기를 많이 해야 했다. (웃음) 그러다보니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혼란스러워 많이 힘들었을 거다. 온전하게 상상력을 동원하면서 해야 하는 입장이라 고충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감정 표현에서 박민영씨가 생각했던 것과 내가 생각했던 것의 차이가 난 장면도 있었다. -어떤 장면인가. =소파에서 소연이 실수로 손을 베고 피를 흘릴 때, 그녀가 다가오는 고양이를 확 밀쳐내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박민영씨는 조금 더 차분하게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소연의 행동 수위를 높여서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실제 고양이를 놓고 촬영할 수 없는 부분들이라 좀 애매했다. 그 장면에서 나는, 고양이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소연이 그걸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하는 상황을 맞이했기 때문에 감정 수위를 높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영화 완성 마지막까지 CG 작업에 공을 들였다. 어떤 부분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나. =CG를 하기 어려운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물’하고 ‘털’이다. 그런데 고양이들이 떼로 등장하지 않나. (웃음) 3D로 고양이를 구현할 때 동작은 제대로 나오더라도 털이 부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다. 물론 그 부분은 프리 프로덕션 때부터 나온 이야기이긴 하지만 개봉이 당겨지면서 CG팀에서 절대적으로 시간이 좀더 필요했다. -고양이를 실제로 조련한 부분도 있을 텐데. =고양이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조련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조련이 전혀 안되는 동물이라고 보는 게 더 맞는 말이다. 그래서 고양이 나오는 장면을 찍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우선 원하는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기다려야 했다. 먹이로 유도해보고 그것도 안되면 소리를 사용했다. 고양이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고양이들이 기분에 따라 내는 소리가 다르다. 기분이 나쁠 때, 좋을 때, 졸릴 때, 다 다르다. 그래서 미리 녹음해둔 고양이 울음소리를 현장에 가서 틀어줬다. 전문 조련사를 쓰려 했으나 국내에는 고양이의 동작을 유도할 만한 전문 조련사가 없었다. 일본영화 <구구는 고양이다>에는 독보적인 고양이 조련사가 촬영하는 동안 내내 함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에게 연락까지 취했지만 일단 장기간 한국에 체류하는 게 어려웠고, 더 중요하게는 그 사람도 자신이 오랫동안 키웠던 고양이를 제외하고 새로운 고양이를 조련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할 수 있는 방법은 연출부와 제작부가 고양이를 데려다 기르면서 지속적으로 돌보는 것뿐이었다. 정을 붙이는 거라고 해야 하나? (웃음) 연출부와 제작부 중 일부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 준전문가 수준의 조련사가 됐다. 이건 정말 농담이 아닌데, 심지어 우리 영화에 고양이들을 공급했던 업체에서 진지하게 그 연출부와 제작부에게 자기들 회사의 직원으로 올수 없겠냐고 제안할 정도였다. (웃음) -동물과 아이를 연출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둘 다 나온다. (웃음) 아이로는 김예론이 나오는데, <여행자>에서 주목을 받은 김새론의 동생이다. =8살 예론이는 좋아하는 스탭과 싫어하는 스탭이 분명하다. “저 아저씨 있으면 촬영 안 해”라고 해서 그 스탭이 잠깐 빠져 있어야 할 때도 있었다. 머리를 길러서 묶은 남자 스탭이었는데 그게 이상하게 마음에 안 들었나 보더라. 처음에 캐스팅할 때는 우려가 많았다. 예론이 나이 또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이가 더 많은 아이들도 오디션을 많이 해봤는데, 그 친구들은 이미 연습으로 틀이 박혀 있었다. 100명도 넘게 오디션을 봤는데도 마음에 드는 아이를 못 찾았다. 그러다 우연히 새론이, 예론이 어머님이 세 자매가 노는 걸 휴대폰으로 찍은 동영상을 보게 됐다. 어머니 말씀으로는 세명이 자주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따라하면서 노는데, 그중에서도 막내 예론이가 제일 잘한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오디션을 한번 보자 싶었다. 처음에는 카메라 앞에 서니까 낯설어서 울어버리더라. 그래도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에 어울릴 거다 싶었다. 가능성을 본 거다. 잘한 것 같다. 이미 훈련은 잘되어 있지만 본능이 떨어지는 게 보통인데, 예론이는 훈련이 없었는데도 상황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본능적인 표현에 능숙했다. -오랜만의 연출작이다. 장르도 달랐다. 어떤 경험이었나. =솔직히 첫 영화보다는 몇배 힘들었다. 그리고 공포 장르라는 것이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있는 상태에서 유지해야 해서 매 장면 집중력과 밀도가 요구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랬다. 그것들을 촬영 내내 끌고 가야 하는 것이 어려웠다. 다뤄야 할 대상이 고양이라는 점도 어려웠고. 공포영화라는 장르를 좋아해서 그 장르에 매료되어서 만드는 감독이 있다면 공포영화를 보면서 즐기기는 하면서도 그만큼 무서워하는 부류가 있지 않나. 나는 사실 후자에 속하는 편이다. (웃음) 물론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나 자신이 경험한 바가 있기 때문에 관객의 공포영화에 대한 무의식을 어떻게 건드릴 것인가를 생각하게 되니까. 내가 영화를 보면서 무서워하니까 내가 왜 무서울까를 생각하게 되지 않나. 단점이라면 오랫동안 공포영화를 연구한 감독보다는 기술적인 문제에서는 조금 약할 것이고. 그런 두 가지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전작에 비해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새로운 작업이었다.

[타인의취향] 웃통 벗을 때의 자신감이란

“오늘 뭐 하냐? 약속 있다고? 술 한잔 하려고 했지!” 괜스레 여기저기 전화 걸어보고 없는 약속도 만들 판이다. 귀찮은 마음에 나 자신과 한없이 타협하려고 하지만 끝내 발걸음은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발길이 닿는 곳은 웨이트 훈련장. 흔히들 하는 표현이 헬스장, 조금 더 고급스럽게 포장한다면 fitness, gym이라 표현하는 그곳이다. 왜 사진 찍는 사람이 웨이트를 하냐고 반문을 많이 하지만, 그건 큰일날 소리이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처럼 절대 화려하지 않은 것이 포토그래퍼니깐 말이다. 잘 알고 지내는 포토들과 주고받는 농담 중에 우리는 포토가 아니라 포터(자동차 1.5t 트럭)라는 표현이 있다. 그만큼 고되고 힘이 필요한 일이라는 말이다. 사진 장비 하나가 웬만한 아령에 버금갈 정도로 무게있고, 장시간 고된 자세로 촬영에 임하다 보면 여기저기 뼈마디와 관절에서 신호를 보내온다. 치열한 현장이나 기자회견장에선 이종격투기 못지않게 몸싸움이 일어나는 곳이니깐 말이다. 체력과 힘은 좋은 포토그래퍼의 첫 번째 조건이다(필자 기준). 내가 운동을 한 지도 15년 정도 되는 것 같다. 물론 그 사이사이 쉬기도 하고 게으름도 피우고 했지만 그래도 살아온 세월 동안 1년 이상 운동을 쉰 적 없으니 15년이라 표현을 하고 싶다. 처음 운동을 시작한 게 16살 되던 해로 그 이유가 형한테 맞기 싫어서가 첫 번째요, 여린 성격을 고쳐보는 게 두 번째요, 강한 남자가 되고 싶은 욕망이 세 번째며, 남보다 조금 더 특색있는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게 네 번째요, 이성에게 인기 많아 보고 싶은 게 다섯 번째다. 다섯 가지 이유 중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인생을 살면서 내 복근을 봤다는 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몸을 만들고 나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 여느 남자들과 다를 바 없이 사우나 갈 때나 상의를 탈의할 때다. 뭐 꼭 이런 이유로 운동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니까, 자랑하고 싶고 누군가가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겠는가. 어떤 때는 내가 조금이라도 자극적인 음식이나 술 마시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먹어도 되냐고, 걱정을 해준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들 때문에라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어찌보면 또 다른 스트레스지만 또 한편으로는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귀차니즘에 빠져 매일 나 자신과 타협하고 있지만 그래도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이러다가 또 필 꽂혀 변신모드 들어갈지 모르니깐. “오늘도 운동 가야겠지…. 가기 싫은데….” 투덜대며 어느덧 발걸음은 헬스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