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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살인의 추억> 음악감독,이와시로 다로

끊어지는 듯 이어지는 리듬의 기억 봉준호 감독은 배우에게서건 스탭에게서건 100% 신뢰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사람이다. 그것은 제3자가 감히 이해하기 힘든 경지다. 지난 겨울 경남 사천의 굴다리 위에서 하이라이트신을 찍을 때, 입김이 그대로 얼음이 될 것 같은 혹한 속에서도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은 마치 “내 몸의 주인은 (봉준호) 당신이요”라고 외치듯이 몸을 돌보지 않은 연기를 펼쳤다. 음악감독 이와시로 다로(39) 역시 ‘봉 마니아’가 되어 있는 듯했다. 넉넉한 레코딩 기간 동안 그가 봉 감독에게 매료된 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확신에 찬 태도 때문이었다. 머릿속에 음악과 영상의 완성된 조합본을 가진 사람마냥 봉 감독의 어투는 상세하면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와시로가 주문받은 것은 두 가지였다. ‘시대’와 ‘살인’(혹은 살인자)에 대한 기억일 것, 사실적인 음악일 것. 80년대에 실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조금은 시니컬하게 풀어가지 않겠냐(이와시로는 봉 감독의 전작 <플란다스의 개>를 “온통 시니컬함으로 가득 찬 영화”라 평했다)는 음악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는 (조롱과 오해와는 뉘앙스가 다른) ‘폭소’와 ‘분노’ 사이를 오가며 관객의 호흡을 무서운 속도로 몰아붙였다. <살인의 추억>을 맡기 전, 일본에서 서스펜스물인 <어나더 헤븐>(조지 이다 감독)을 맡은 바 있는 이와시로는 암울하고 스산한 80년대 중반 한국의 농촌마을로 별 준비과정 없이 곧바로 미끄러져 들어올 수 있었다. 바쁜 스케줄을 쪼개 한국에서, 일본에서 각각 두번씩 조우한 봉 감독과 이와시로는, 10시간 이상의 미팅에도 전혀 지치는 기색없이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데 몰두했다. 이미 일어로 완역된 시나리오를 받은 바 있는 이와시로는 20개가 넘는 데모 테이프를 한국으로 보냈고, 봉 감독은 모든 곡을 일일이 감상하며 제작된 영상과 짜맞추기를 시도했다. 드디어 그들이 최종 녹음을 위해 이와시로의 스튜디오에서 만난 날, 감독이 준비해온 비디오 자료를 감상하며, 중간중간 봉 감독이 음악의 수정이 필요하겠다고 말하면 그 즉시 이와시로가 일어나서 키보드로 수정본을 들려주는 식의 과정이 계속됐다. 갈대밭에서의 시체 수색장면에서는 음악을 넣을 것인가에 대해 봉 감독이 고민이 많았다. 이와시로에게 ‘여백’을 설명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새 이와시로는 끊어지는 듯 이어지는 리듬의 곡을 들고와 감독의 고민을 말끔히 해결했다. 그렇게 완성된 음악은 <제비처럼>과 <빗속의 여인> <우울한 편지>를 제외하고 29곡의 오리지널 스코어에 달한다. 이와시로를 만나기 전 히사이시 조 등 일본의 유명 음악감독과도 접촉한 바 있는 제작팀은, 혹여 음악이 영상을 지나치게 압도하게 될까봐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러다 이미 애니메이션과 영화음악으로 입지를 굳힌 이와시로를 알게 됐고, 지금은 나중 선택에 100% 만족한다고. 현재 이와시로는 <아마데우스>의 제작자 마이클 하우스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중이다. 4집 싱글 앨범의 녹음이 끝나는 대로 결정할 예정이라고. 글 심지현·사진 조석환 프로필1965년생도쿄예술대학, 동대학원 졸업일본의 각종 TV드라마, CF, 애니메이션, 영화 등의 사운드트랙 작곡알려진 작품은 <바람의 검심>(애니메이션), <11.9.01>(옴니버스 미국영화), <살인의 추억> 등91년부터 지금껏 모두 세편의 싱글 앨범(피아노소곡)을 냈으며, 현재 4집 녹음 중

블랙코미디

얼마 전 한 청년이 가방끈에 목을 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이 나라가 싫고 이 세상이 싫다.” 그가 나라와 세상을 버리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무엇이 이 열아홉살 먹은 청년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이다. 그럼 누가 그런 편견을 유포하는가? 여러 부류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맹렬한 집단이 바로 일부 보수교단의 목사들이다. 동성애자 차별을 이들처럼 사명감 갖고 하는 자들도 없을 것이다. 지난 4월 초 국가인권위원회가 동성애자 사이트를 유해매체로 규정한 것을 인권침해라 규정하고 이의 시정을 권고하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라는 단체의 목사들이 곧바로 규탄 성명을 냈다. “국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동성애’를 ‘정상적인 성적지향’으로 간주했고 (…) 청소년보호위원회마저도 전격적으로 이에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는 데 그 충격이 더 크다.” 한마디로 동성애자 사이트가 “갈등과 혼란으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타락시키는 유해매체라는 것이다. 기가 막힌 것은, 이들이 이런 폭언을 하던 그 입으로 버젓이 “동성애자 등 소수의 인권이 보호받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소수의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방식을 보자. 동성애자는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가정의 붕괴”를 초래하여 “국가와 사회”를 위태롭게 하며, 나아가 에이즈를 전염시키는 주범으로서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권을 각별하게 “보호”하고 유별하게 “존중”해주니, 어찌 가방 끈에 목을 매고 싶지 않겠는가. ‘독사의 자식들’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창조질서에 대한 도전? 이 세상 모든 게 신의 지으심이라면 동성애자 또한 신의 지으심이다. 어디 감히 목사들이 하나님 작품에 시비를 거는가. 가정의 붕괴? 정작 동성애자 가정을 붕괴시키는 것은 자기들이 조장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의 분위기다. 사회적 지탄의 대상? 에이즈를 옮기는 환자는 대부분 이성애자들이다. 그런데 왜 더 많이 에이즈를 옮기는 자신들의 성 취향만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가? 동성애자를 매도하는 근거로 이들은 ‘레위기’와 ‘로마서’를 든다. 주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따르고 싶은가? 그럼 ‘레위기’에 쓰인 대로 동성애자를 돌로 쳐죽일 일이다. 뭐 하는가? 당장 쳐죽이지 않고. 그뿐인가? 죽이는 김에 바람 피운 자도 쳐죽이고, 멘스 중에 섹스한 자도 쳐죽이고, 미아리 점쟁이들은 아예 집단학살을 해버려야 한다. 그뿐인가? 미안하지만 목사님들 중에 눈이 멀거나, 다리를 절거나, 팔 다리가 상한 분들, 그리고 결혼할 당시 처녀가 아니었던 사모님을 둔 목사님들도 조용히 교단을 떠나셔야 한다. ‘동성애자는 죄인이지만, 죄인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 심오한 농담이다. 아무 죄없는 동성애자를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벌써 인권 유린이다. 그래서 독일의 헌법재판소는 동성애자를 죄인으로 규정하는 교회의 입장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동성애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반면 우리 목사님들은 동성애를 죄악시함로써 남에게 해를 끼친다. 아무 근거없이 타인을 음해하고 매도하는 것은 인종차별 못지않은 범죄행위다. 시민사회는 이제 교회 일각에서 저지르는 범죄행위를 법으로 제재해야 한다. 미국에서는 자신의 신앙과 성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던 수많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한다. 이들을 계속 죽게 만들 것인가? 독일의 교회에서는 동성애자들을 신앙공동체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신학적 검토를 하고 있다. 어느 교회에서는 아예 동성애자들의 삶을 성화의 모티브로 연출한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동성애자 부부가 아기를 입양하고 기뻐하는 장면은 성화 속의 예수 탄생의 모티브로, 에이즈로 숨진 아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전통적인 피에타로 연출되어 있었다. 문제는 동성애자 사이트가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것은 한창 자라나는 청소년들 사이에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유포하는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그저 동성애자라는 이유에서 타인을 죄인으로 낙인찍고 차별한다면, 그거야말로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동성애자 사이트는 유해매체가 아니다. 외려 감히 하나님을 빙자하여 편견과 차별을 실천하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야말로 지극히 위험한 청소년유해단체다. 진중권/ 문화평론가

나만 즐거웠으면 해,<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

내 인생의 영화? 살면서 두번 이 질문을 받았다. 처음은 오래 전 어느 영화전문지 입사면접 때의 질문 항목이었고, 그리고 수일 전, 김혜리 기자의 청탁 메일을 통해서였다. 그동안 기자라는 직업상의 이유로 만난 많은 사람들, 연기자, 영화감독 심지어 얼마 전에 만난 작가 신경숙(잘 알겠지만 그녀는 바로 얼마 전까지 <씨네21>에 기고했었다)에게도 이 질문을 참 쉽게 던지곤 했다. 때로 상대방의 얼굴에서 곤란한 기색이 떠오르면, 의아했다고 고백해야겠다. 질문자 입장에선 ‘내 인생의 영화’란 싱거운 호기심, 너무 쉬운 답변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엔 서걱서걱 소리가 날 정도로 불편한 인터뷰이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좁혀볼 요량으로 ‘그냥’ 꺼내본 말이기도 했다. 한데 막상 ‘당신 인생의 영화가 무엇이오?’ 하는 물음이 내게 향했을 때 세상에, 이것은 영락없이 엄마가 좋아? 아니면 아빠가 더 좋아? 하는 격이었다! 영사기 과열로 불이 나버린 뤼미에르 형제의 해프닝 같은 사상 첫 영화 시사 이후부터 지금까지, 영화라는 예술 장르는 현대성의 이데올로기 아니, 거창하게 목에 힘주지 않고, 애써 발견하지 않아도 될 생활 그 자체. 언젠가 바람 부는 밤 바닷가에서 한 남자와 그의 선배를 두팔에 끼고 걷다 뛰다 하면서 “꼭 <쥴 앤 짐> 같지 않아?” 했다가 두 남자가 동시에 ‘뜨아’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본 일, <글루미 썬데이>의 피아노 소리만 흐르면 멍해지는 징크스 아닌 징크스. 정확히 다섯번을 시도했으나 결국 엔딩을 보지 못한 <노스탤지어>. 그래도 안개 짙은 날이면 습관처럼 떠오르는 아스라한 안개신. <원스 어펀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벽 틈새로 자신의 훔쳐보는 눈길을 의식하면서 흐트러짐 없이 춤을 추는 한 조숙한 여자아이의 믿을 수 없는 관능과 거울 앞에서 그 소녀의 아라베스크를 따라하는 모습을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조용히 사라진 내 어머니. 한밤중에 선배의 차에 올라 담양으로 내달리면서 떠올린 <강원도의 힘>의 그녀들. 이 밖에 생각나지 않은 영화들 모두 내 인생의 달고 쓴 동반자들이었다. 한 가지 발견이라면, 인생길에 동행한 영화일수록 지극히 개인적인 크고 작은 해프닝, 에피소드가 같이하고 있다는 것. 가까이는 <살인의 추억>이, 멀게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잊었을 <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가 그렇다. 봉준호 감독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그 화성에서 사춘기를 보낸 나로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찾아왔다. 할머니가 선물한 빨간색 재킷을 장롱 속에 고이 보관만 해야 했던(끝내는 한번도 못 입고 버려야 했다) 그 시절, 선정적인 엽기행각이 다시 들춰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안의 저항감은 언제든지 부풀어질 수 있었다. ‘고맙게도’ <살인의 추억>의 카타르시스는 개인적인 어린 시절의 어두운 기억을 총괄적으로 보듬어주는 ‘진혼곡’이었다. 한편, 국내에서 흥행 부진을 면치 못한 <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는 영화의 동시대성을 정말 부담없이, 즐겁게 만끽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약간의 부연설명을 곁들이자면, 이 영화는 사실 너무나 프랑스적인 문화, 역사, 정치, 라이프스타일의 키워드에 충실하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정서와 너무나 다를 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을 내 인생의 영화에 꼭 집어넣고 싶은 이유는, 프랑스 유학 때 부족한 불어 실력을 함양시키려는 ‘교육적인’ 본래 의도를 잊게 한 감독의 능수능란하고 천연덕스러운 ‘요리 솜씨’에 반했기 때문이다. 가끔 영화에서 동시대인의 동질감을 욕설과 은어, 섹스와 폭력의 패턴으로밖에 확인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곤 했다. 아니면 다른 한쪽에선 지금 나와 당신이 결코 입에 올리지 않을 화석 같은 단어와 화법을 구사하든가. 어쨌거나 오래 전, ‘디디에’란 이름의 개가 되어 길가던 여자의 엉덩이에 코를 들이댄 바 있는 감독 알랭 샤바는 영화의 재료를 아주 사소한 현실에서 끌어와 양념을 쳤는데, 난장이 따로 없다. 석달 만에 피라미드를 완공해야 하는 대공사에 동원된 노예들이 대규모 파업 군중으로 돌변해 수당, 휴가, 고용 안정을 외치는 장면은 노동권 보장의 나라, 프랑스에서 툭하면 일어나는 파업, 그 필요악에 대한 감독의 애교 섞인 야유였다. 또 여성 파업 선동자의 말이 툭툭 끊기는 장면은, 전세계 휴대폰 통화자라면 ‘친숙한’ 통화 불량 상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특히 감독 개인적으로 이동통신회사의 부실한 서비스와 폭리에 상당히 불만이 컸던지 이 장면은 서너 차례 등장하고 심지어 “저쪽으로 서봐. 수신상태가 더 나으니” 하는 대사를 아무렇지 않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 버젓이 등장하는 일본인 관광단. 난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들은 파리 샹젤리제 거리의 명품가에 오밀조밀 열지어 다니는 모습 그대로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현란하게 장식하는 중국 권법. 현재 유럽인들이 극도로 열광하는 이소룡과 성룡에 대한 오마주 내지 할리우드식의 특수효과를 야유하며 즐긴 슬랩스틱코미디다. 그러나 <아스테릭스: 미션 클레오파트라>에 비친 시대성의 단편들이 문화적인 한계를 초월하는 힘은 확실히 약했다. 우선, 아스테릭스의 정체, 골루아족과 로마인의 고질적인 다툼, 영화 전편 또는 만화인 원작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하품으로 점철된 영화보기가 될 게 뻔하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늘 부딪치고 한편으로는 투덜거리는 생활의 단편들을 모아 아이러니로 가득 찬 한편의 코미디로 완성한 감독의 안목. 그리고 ‘나도, 너도, 우리 모두 즐거웠으면 해’ 하는 넉살. 상대역으로 출연한 모니카 벨루치와의 애정신을 부득부득 우겨서 애초 예정에 없었던 길고 긴 키스를 성사시킨 것은 감독의 즐거움, 영화를 보며 키들키들 웃을 수 있는 건 나의 즐거움. 내 인생의 영화들은 내 알량한 희로애락의 감정을 떠날 수 없으니, 이제 남은 결론. 어쨌거나 나만 즐거우면 그만. 내 영화보기의 엉성한 원칙이기도 하다.

<올드보이>의 박찬욱,최민식,유지태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 에로 코미디를 기대하시라.”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다기에 그럼 하겠다고 했죠.” “전 최민식 선배가 출연한다기에 그럼 내가 감독하겠다고 했어요.” 박찬욱 감독과 배우 최민식은 이렇게 만났다. 지난 4월29일 열린 <올드 보이> 제작발표회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는 마치 신혼부부가 언제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됐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상대방 몰래 서로 사랑하던 이들이 마침내 약혼발표를 하며 그들의 만남을 추억하는 듯한. 듣기에 따라 낯간지러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감독과 배우의 친밀감이 관객에게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박찬욱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찰떡궁합이 입증한 대로다. <올드 보이>는 여기에 한 사람을 더한다. 최근 캐스팅이 확정된 유지태, 그는 최민식과 대결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유지태의 마음이 <올드 보이>에 끌린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박찬욱, 최민식이라는 이름이 주는 두터운 신뢰감을 따라 한자리에 앉은 그는 여전히 맑은 얼굴로 “이런 기회가 연기생활에 흔하겠나”고 반문한다. 널리 알려진 대로 <올드 보이>는 동명 일본 만화를 원작삼은 영화다. 만화는, 영문도 모른 채 사설 감금시설에 10년간 갇혀 있던 남자가 세상에 나와 누가 왜 자신을 감금했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었다. 영화는 남자의 수감기간을 15년으로 늘렸고 남자를 감금한 의뢰인의 정체를 바꾸었다. 만화와 영화의 차이에 대해 박찬욱 감독은 “사설 감금시설에 갇혀 있다 복수를 계획한다는 설정만 같고 나머지는 전부 다르다”고 말한다. 여기서 최민식은 15년간 갇혀 있다 나온 오대수로 등장하고, 유지태는 오대수를 감금시킨 이우진이 된다. 처음부터 ‘누가’ 범인인지 밝히고 들어가는 이 영화는 이우진이 ‘왜’ 오대수를 감금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이 정도 정보만으로 <올드 보이>에 대한 궁금증을 일소하기는 불가능하다. 영화가 숨기고 있는 카드가 ‘왜’라면, 최민식과 유지태가 숨기고 있는 카드는 무엇일까?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 최민식과 유지태의 내면에서 꺼내 보이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4월29일, 제작발표회가 끝나고 <올드 보이>의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다. -박찬욱 감독은 최민식씨가 한다더라는 얘기를 듣고 그럼 내가 연출하겠다고 했다는데, 최민식씨와 같이 작업하고 싶다고 생각한 계기가 있나. 박 | 몇달 전 영화잡지 <키노>에서 최민식 선배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서 한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인터뷰 끝나고선 왠지 하게 될 것 같다는 감이 왔다. 예감. -그런 예감이 든 이유는. 박 | 글쎄, 뭐 구체적인 이유가 없으니까 감이지. (웃음) -그때 최민식씨도 그런 예감이 들었나. 최 | 인터뷰한 그날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편집이 안 된다. (웃음) 나도 감으로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언젠간 우리가 만나리라… 내가 졸라야겠다! 그런 생각했었다. (웃음) 박 | 그때 인터뷰 기사는 특별했던 것이, 질문도 내가 했지만 원고도 내가 썼다. 그래서 그 기사 쓰느라고 녹취한 내용을 다시 듣게 됐는데, 현장에서 들었던 말을 다시 들으니까 더 깊은 뜻을 알게 되더라. 그런 점에 매료됐던 것 같다. -최민식씨는, 이 작품에서 감독과 마찬가지로 ‘패키지’ 제안을 받고 준비과정부터 함께했던 걸로 알고 있다. 시나리오가 완성된 상태에서 일한 것과는 분명 다른 식으로 작품에 접근했을 것 같다. 최 | 물론 그렇다. 그리고 배우로선 그 과정이 좋고, 매우 중요하고, 고맙고,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어차피 각본은 작가와 감독이 쓰는 것이지만 중간중간에 토론하면서 배우나 PD, 작가의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는 과정이 좋았다. -최민식씨는 <올드 보이>의 오대수란 인물이 어떤 매력으로 다가왔나. 최 | 사람에 대한 연민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아, 이 자식 진짜 멋진 놈이다, 아니면 나쁜 놈이다, 그런 게 아니라. 오대수는, 결함을 가진 인물이고, 그저 세치 혀 잘못 놀렸다가 그 놀린 것에 비해 너무나 큰 피해와 고통을 당한다. 이 작품에선 그 피해와 고통이 극대화되고 영화적으로 표현됐지만 누구나 그런 경험은 있다. 뻐꾸기 잘못 날리다가 개박살난 경험. (웃음) 이 친구는 좀 심하게 당한 경우다. 대수는 감금 시설에서 나올 때도 그렇지만 들어갈 때도 자기 의지로 들어간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망가진 인간이 돼서는 터미네이터 같은 복수심을 품고 나온다. 그렇지만 복수하는 모습을 보면 서투르고 여리다. 끝까지 평범한 사람이다. 상황은 드라마틱하지만 인물은 현실적이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의 원작을 대할 때와 막상 작업할 때 받은 매력이 다르다고 했는데, 본인도 그랬나. 최 | 별로 그렇진 않았다. 원작만화를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3권까지만 딱 재미있고 나중엔 지루해서 안 봤다. (웃음) 그래도 더 읽으려고 했는데 PD도 재미없다고 보지 말라더라. 어차피 결말도 달라진다고. 만화에서 설정만 따오긴 했지만, 출발도 거기서 한 거니까 크게 달라진 느낌은 없었다. -유지태씨는 상대적으로 늦게 이 작품에 합류했는데 어떻게 출연을 결정하게 됐나?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는지 궁금하다. 최민식 선배와 박찬욱 감독이 하는 작업이다, 라는 점도 있을 테고, 극중 우진이란 인물이 악역이고 강한 남자의 모습이라는 점도 있을 텐데. 유 | 지금 말한 그런 점들이 이유가 됐다. 그러나 ‘악역’이란 표현에서, 이 영화의 악역은 기존 영화들이 보여주던 악역과는 분명히 다르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모습들을 신마다 진정 어리게 하고 싶다. 화낼 땐 정말 내가 화가 나고, 슬퍼할 땐 정말 내가 슬프고. 꾸민 듯한 느낌으로는 그 캐릭터가 가진, 복수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나오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은 두 배우의 앙상블에 대한 생각을 언제쯤, 어떻게 떠올리게 됐나. 박 | 원래 캐스팅할 땐 여러 사람들과 상의를 많이 하는 편이다. 그만큼 갈등과 고민이 많은 작업인데, 처음에 유지태는 실제 나이가 극중 나이보다 어리다는 점 때문에, 안타깝지만 안 되겠다, 포기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곧 그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면 나이가 뭐 그렇게 문제가 되나, 하는 깨달음이 온 거다. 극중에서 오대수의 캐릭터가 원한에 가득 차서 아주 공격적이고 저돌적이라면, 우진은 태풍의 핵처럼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오대수를 약올리고 조종하는 인물인데, 이런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데에 유지태가 최민식의 상대 역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유지태가 그동안 부드럽고 섬세한 역할들을 주로 해왔다면, 이번 역할은 그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모습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이 보기에 흥미로울 것 같다. 어쨌든 근본적으로 뛰어난 배우라면 뭘 해도 잘한다. 그런 점에서 두 배우의 역할을 바꿀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엉뚱하게 나가는 게 더 재밌기도 하다. 한때 최민식 선배가 자기가 우진을 하겠다고, 역할 바꿔 달라고 어찌나 조르던지. (웃음) 유 | 우진 역은 나에게 정말 중요한 역이 될 거 같고, 이 영화는 내가 배우로서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잘해야지. -유지태에 대해 칭찬을 좀 하자면, 본인도 아는 사실이긴 한데, 우진 역을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다른 몇몇 배우들에게도 시나리오가 갔다. 원래 배우들은 배역이나 작품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기준이 참 다양한데, 그 기준이라는 게 예를 들면, 제작사가 어디고, 개런티는 얼마고, 감독은 누구고, 상대역은 누구고, 대사는 얼마나 되고, 등장횟수는 몇번이고…. 박 | 배급이 어디냐, 이런 것도 따지지, 요즘은. (웃음) 최 | 하여튼 뭐, 그런 것들을 따지게 된다. 그런데 이 양반은 그런 사심이 전혀 없이 날것 그대로 ‘작품과 나’를 고민한다. 박 | 유지태가 만든 단편영화도 봤다. 잘 만들었다. 최 | 마인드가 순수하다. 그건 바람직한 거다. 나도 젊었을 적엔 그랬었나 하는 걸, 이 친구 보면서 돌아보게 됐다. 많은 점을 배운다. 고맙다. 유 | 칭찬해주셔서 감사하다. (웃음) 개인적으로 지금 이때가 정말 행복하다. 존경하는 선배와 감독을 만나 함께 작업하는 이런 기회가 연기생활 하면서 흔하겠나. 이 시간들을 잘게 쪼개서 하나하나 다 먹고 싶은 심정이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떨린다. 첫 리딩 전날엔 잠도 못 잤다. 그래서 리딩을 잘 못했다. (웃음) 지금 이 떨림과 긴장이 영화에 잘 반영됐으면 한다. 내가 있어서 좋은 앙상블이 나왔으면 좋겠다. 선배님과 감독님께 누가 안 되게. -박찬욱 감독은, 최민식과 유지태씨에 대해 그냥 이전에 느낌으로만 알았던 모습과 직접 작품을 하면서 느끼는 차이가 있나. 아니면 이번 영화에서 이 배우를 어떻게 해봐야겠다, 라고 염두에 두고 있는 점은. 박 | 다른 거 못 느끼겠다. 오히려 일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과 비슷하다고 느낀다. 좋은 배우들이 가진 공통점이랄까, 그런 걸 느꼈는데, 말하자면 작품에 대한 탁월한 해석력이나 작품에 대해 보이는 성의, 독창성, 그런 것들. 실은 어제도 콘티작업 하다가 최민식 선배한테 어떤 얘기를 듣고 오늘 아침에 그 말대로 콘티를 고쳤는데 결과적으로 더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감독들은 항상 좀더 새로운 표현을 위해서 고민하고 대본과 콘티를 수정하지만 보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좋은 배우들은 그 지점들을 발견한다. 각본에 대한 집중력을 갖고 단 한줄에 담긴 표현이나 의미까지 생각하면서 독창성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훌륭한 배우들의 공통점인 것 같다. -전에 했던 인터뷰에서 최민식을 송강호와 비교하면서 온도 차이, 즉 송강호가 차갑다면 최민식은 뜨겁다고 표현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박 | 그거는 그냥 재밌으라고 한 건데. (웃음) 그렇게 정확히 나뉘는 건 아니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당연히 송강호에게도 열정적인 면이 있고 최민식에게도 냉정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지만, 내가 송강호에게서 매력을 느꼈던 순간을 생각하자면 그런 냉정한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일단 그 생김새가…. (웃음) 그, 특히 눈… 최민식은 눈이 귀엽잖나. 근데 송강호는 눈이…. (웃음) 최 | 일전에 차 타고 지나가다가 <살인의 추억> 버스 광고를 봤는데 송강호랑 김상경이 이렇게 딱 노려보고 있는 거라. 놀라 갖고, <조용한 가족>에서 나오는 송강호 대사 ‘뭘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나?’ 이 말이 딱 생각나더라니까. (웃음) -작품 성격도 그렇게 대비되는 것 같다. <복수는 나의 것>이 차갑고 건조하다면, <올드 보이>는 뜨겁고 격렬할 것 같다는. 박 | 뜨겁다. 뜨겁고, 표현이 풍성하다. -그럼에도 닮은 듯하다. <복수는 나의 것>을 만들면서 하드보일드란 장르를 취했었는데, 이 영화도 외적으로 봐서는 하드보일드의 느낌이 있다. 박 | <복수는 나의 것>이 ‘하드’에 강세를 두고 있다면, <올드 보이>는 ‘보일드’에 강세를 두고 있을 거다. 그렇지만 내가 만약 평론가로서 이 영화를 객관적으로 말한다면 하드보일드 장르로 분류할 것 같진 않다. -주인공이, 누가,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을 벌이고 있는지를 추적해가는 내러티브 구조가 탐정 이야기 같다는 인상을 줘서 그런 거 같다. 박 | 하지만 표현 양식은 다르니까. -그건 아까 말한 스타일면에서 풍부하다는 얘기인 것 같은데, 어떤 점들이 그러한가. 박 | 일단 대사가 <복수는 나의 것>보다 50배는 많을 거다. 음악도 많이 사용할 생각이고, 멜로디도 선명히 들리게 할 거다. 그래서 짧게 들어도 쉽게 기억할 수 있게. 악기 음색도 잘 드러나도록 할 생각이고. 숏 수도 900개 정도 될 것 같다. 카메라 움직임도 많다. 색깔도 강렬하게 간다. 미술팀이 당황할 정도로. 연기도 모노톤이 아니라 진폭이 크고 변화가 많은 쪽에 초점을 둔다. 한신 안에서도 그런 변화들이 뚜렷이 보일 거다. 특히 우진의 캐릭터는 분노와 조롱과 상대에 대한 연민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순간순간 드러난다. 실내세트 촬영도 훨씬 많다. -그래도 여전히 <복수는 나의 것>과 연장선상에 있어 보인다. 복수가 생존의 이유가 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 비클처럼 강박관념을 지닌 인물이다. 작업을 준비하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다시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순간이 있었을 것 같은데. 박 | 전혀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딴 영화 하는 기분이었다. 물론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이해는 한다. 겉을 보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여줘야 설명이 되겠지만 아주 반대다. <복수는 나의 것>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는 영화다. 하지만 <올드 보이>는 밀착해서 보는 영화다. 그리고 난 영화를 선택할 때 이번 영화는 전 영화와 분위기와 얼마나 다른가, 하는 걸 기준으로 삼는다. 했던 거 또 하면 재미없다. 난 싫증을 잘 내는 편이고, 그런 반작용선에 있어 왔다. 최 | 진짜 다르다. 박 | 이번 영화의 스토리보드 아티스트가 <복수는 나의 것>을 작업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조차 당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수의 바스트숏을 간다고 하면 그 사람은 나랑 한번 작업해본 경험이 있으니까 나름대로 생각해서 뭔가를 그린다. 그럼 내가 그게 아니라 이렇게 갈 거다, 라고 말하고 그 사람은 무척 당황한다. -지난번 인터뷰에서 <올드 보이>의 최민식씨에 대해 ‘<파이란>의 강재로 등장해서 <쉬리>의 박무영으로 퇴장한다’로 표현한 적이 있다. 박 | 그거 웃자고 한 소린데. (웃음) 최 | 아니 사실은, 강재로 등장했다가 그냥 강재로 나간다. (웃음) 중간에 <조용한 가족>의 삼촌으로 잠깐 가고, 다시 강재로 돌아오고. 완전히 망가져가지고는.(웃음) -대수는 포스터에 나온 저 헤어스타일(흑인처럼 위로 잔뜩 부풀린 헤어스타일)로 가나. 박 | 저게 포스터로 보니까 저렇게 멋진데, 실제로 보면 되게 웃긴다. (웃음) -포스터로 봐도 웃기다. (웃음) 최 | 처음에 저 머리 스타일 제안받고, 야, 내가 무슨 양동근이냐, 그랬다.(웃음) 저건 요즘 젊은이 컨셉인데, 난 염색도 안 해본 사람이다. 너무 작위적인 거 같기도 하고. 근데 막상 해보니까 우리 작품 스타일과 크게 다르지 않더라. 실제 영화에 들어가면 좀더 다듬고 자연스럽게 하긴 할 거다. 15년 동안 감금당한 사람이 그 사이에 미용실 가서 단장할 것도 아니고. (웃음) 박 | 머리만 봐도 캐릭터가 변화하는 걸 알게 된다. 네번 정도 바뀐다. -체중 감량도 많이 했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영화 끝까지 유지되나. 최 | 감금 시설에 들어가기 전엔 그저 퉁퉁하고 평범한 인물인데 15년 동안 감금당해 있으면서 변화가 생기는 거다. 처음엔 더 살이 쪘다가 그 생활에 적응하면서 정신도 차리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복수를 결심하면서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신체를 단련한다. ‘어느 놈인지 몰라도 느그들은 다 죽었다’ 이러는 거지. (웃음) 가능한 한 대본이 원하는 선에 맞추려고 노력 중이다. 박 | 의상, 헤어스타일, 특수분장… 어쨌든 여러 가지를 동원해서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게 될 거다. -체중은 진짜 많이 줄였나보다. 최 | 안 그러면 명백한 계약 위반이 돼버리니까. (웃음) -이번에 <지구를 지켜라>에 관한 대담을 할 때, 투자사에서 전작이 흥행 안 됐던 감독들이니까 이번엔 될 거라고 말한다고 했는데…. 박 | 그것도 웃자고 한 소린데. (웃음) 농담을 심각히 받아들이는 통에…. 그건 공교롭게도, 쇼이스트에서 작품 준비 중인 나, 곽경택 감독, 박기형 감독이 모두 그런 케이스라 그런 거였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내가 크게 충격을 받아서 대단한 결심을 했다, 그런 얘기는 아니다. 최 | 하지만 개인적으로 <올드 보이>가 대박났음 좋겠다. 진짜로,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 물론 어떤 배우도 본인이 하는 영화를 ‘망해라’ 이러지는 않겠지만, 박찬욱 감독뿐 아니라 곽경택, 허진호, 그리고 <장화, 홍련> 준비 중인 김지운까지 이른바 모두 선수들이잖나. 선수들 작품은 다 대박났음 좋겠다. 그게 우리가 같이 먹고살 수 있는 공생의 길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대박을 위해 우리가 의도적으로 특별한 버전을 준비한다는 건 아니다. 박 | 몇년 사이, 인터뷰를 당하면서 영화가 잘되든 못 되든 흥행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런 걸 왜 물을까, 하고 감독들끼리 얘기하다 보니 우리도 어느새 흥행에 관심이 많아져 있었다. 시사회 갔다와서는 그거 몇만이나 들 거 같냐, 이러고, 개봉할 때쯤 되면 그거 예매 얼마나 됐냐, 그러고. 최 | 제작사와 투자, 배급사 그리고 작가(감독) 사이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결정적인 지점이 흥행인 것 같다. 냉정한 현실이다. 좋은 작가들이 단순히 흥행이 안 된다는 이유로 자본이나 기회에서 멀어지고, 배우들도 대박이 나야 좋은 캐스팅 제안이 들어오는 상황이 안타깝다. 그러니까 선수들 작품이 대박나야 더 좋은 의사소통을 유지할 수 있다. -<올드 보이>는 장르로 정의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박 | 홍보하는 쪽에선 ‘미스터리 액션 드라마’라고 하긴 했는데, 그것도 틀리진 않은 것 같다. 근데 스토리보드를 만들면서 뜻밖에 만화적인 면들이 보이긴 했다. 최 | 미스터리 액션 스릴러 에로 코미디. (웃음) -에로가 있나. 박 | 있다. 최 | 당연히 있다. 박 | 포스터 보고 느껴지는 거 없나? (모두 웃음) 우진이가 오대수만 만나면 벗어, 아주…. 유 | 아, 진짜네. (웃음)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완성됐을 때 어떤 모습이었으면 하는지, 세분의 바람을 말해달라. 박 | 이 영화가 가진 독특한 세계가 잘 반영됐음 좋겠다. 우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렇게 오랜 세월 갇혀 있었다는 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선 그 심정을 모른다. 그건 누구도 경험하기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대수가 조금 심하게 극단적인 행동들을 많이 보여도 그런 걸 관객이 보면서, 아, 저런 경험을 한 자라면 저러고도 남음이 있어, 라는 마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우진도 마찬가지다. 우진은 어릴 때 받은 상처가 평생 지속되고 그것에 집착하고 그것으로부터 고통받는 캐릭터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보여주는 이해 안 가는 행동들도, 같은 식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유 | 영화를 하는 맛은,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깨질 때 온다. 인생도 그렇듯이. 고여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어느 순간 흘러가 있는. 지금은 정확하게 형용할 수 없지만 그런 느낌이 있다. 최 | 이번 작품에도, 감독 전작들이 그랬듯이 박찬욱 특유의 유머가 있다, 아주 기기묘묘하고 포복절도할 만한. 그런 유머가 이 영화의 전부가 아니지만, 어쨌든 재미있게 봐줬으면 좋겠다. 아주 재미있게. 정말 재미있고 스타일리시한 영화가 될 거다. 정신없이 웃다가, 어느 순간 욱, 하다가, 결국 다 보고 극장을 나가면서 ‘아, 정말 인생 똑바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웃음) 가슴속에 뭔가 생각할 여지를 남겼으면 좋겠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잔인한 복수극이 될 거다. 여기서 잔인하다는 건, 골이 쪼개지고 내장이 나오고 사방에 피가 튀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극한의 심리가 드러난다는 의미다. 물론 그것이 극대화되고 영화적으로 표현되긴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결함과 감정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무섭고 슬픈 것인가가 보여진다. 그런 점들을 재미있게 봐주고 또 연민을 품어주길 바란다. 그리고나서 아, 이 영화가 장난이 아니구나, 이 영화가 말하고 있는 이야기에 뭔가 있구나, 하는 점을 느껴주길 바란다.

연극과 영화의 아름다운 만남

대학로에서 대박을 터뜨린 연극 <늘근 도둑 이야기>가 지난 4월27일 막을 내렸다. 마지막 공연에는 노짱이 관람을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혹자는 구시렁댈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소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는 세상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다. 연극 역시 신나고 웃음으로 넘쳐났다. 1989년 동숭아트센타 개관기념으로 첫 공연을 할 때만 해도 사회적 부조리를 신랄하게 헤집던 ‘풍자’가 지금은 ‘개그’로 희화화되어 사람들을 마구마구 그냥 웃게 만든다. 연극을 보러 간 날 명계남, 박철민, 최덕문 등 주연배우들과 조촐하게 맥주을 한잔 마셨다. 모처럼 대학로에서 흥행연극이 나와서 모두들 신나했다. 한편으론 연극판이 옛날 같지 않아서 전반적으론 매우 힘들다는 푸념도 늘어놓았다. 함께한 일행 중 연극 출신의 유명 배우에게 몹시 궁금한 게 있었다. 최민식, 조재현, 송강호, 유오성 등 연극계 출신의 스타 연기자들을 떠올리며 질문을 던졌다. “당신들의 고향은 연극인데, 스타가 되고 나서는 왜 연극을 하지 않나요?” <늘근 도둑 이야기> 첫회 공연 때 수사관으로 문성근이 출연했고, 두 번째 공연 때는 수사관으로 유오성, 박광정이 교체 출연했다. 이번 공연은 극단 차이무와 동숭아트센터가 올 연말까지 이어지는 <生연극시리즈>로 기획한 연극제의 두 번째 작품이었다. 더늙은 도둑 명계남, 덜늙은 도둑 박철민, 수사관 최덕문의 연기는 빛나고 재미있었다. 그동안 연극를 통해 배출된 걸출한 연기자들은 연극계의 희망일 뿐만 아니라 한국영화 발전의 큰 견인차였고, 지금은 많은 대중의 스타이며 충무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명계남은 제작자로서 연기자로서 이미 거목이 되었고, 박철민, 최덕문은 선배들의 뒤를 잇는 훌륭한 배우가 될 것을 확신한다. 이처럼 연극과 영화의 만남은 하나의 핏줄로 이어지는 생명체이며,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 운명체이다. 언젠가부터 문화권력의 중심이 영화로 급격하게 이동하면서 대학로의 역동적인 현장이 점점 맥을 잃어가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리들이 들린다. 대학로에서 공급되는 동맥의 한줄이 끊긴다면, 한국영화의 미래도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살인의 추억>이 작품성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낚아채며 충무로에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이 영화는 너나 할 것 없이 기대를 모았고, 모두들 정말 잘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이는 봉준호 감독 개인에 대한 기대뿐만이 아니라 한국 영화계 전체를 위한 소원이었다. 가벼운 코미디 일색의 영화들이 흥행의 주류를 이루면서 앞으로 작품성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충무로를 휘감고 있는데, 우리는 <살인의 추억>이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주길 바랐던 것이다. <씨네21> 8주년 기념 행사장에서 배우 이미연이 송강호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내가 이 영화 홍보팀장인 거 몰랐어? 나중에 한턱 내야 돼! 정말, 축하해!” 많은 영화인들이 스스로 홍보를 자임했고, 이미연의 따뜻한 마음처럼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연극이 원작인 <살인의 추억>은 이처럼 우리에게 소중한 영화이며, 연극과 영화의 만남이 출발한 작은 결실이다. 우리는 앞으로 명계남, 문성근, 최민식, 조재현, 방은진, 송강호, 설경구, 유오성 등 연극 출신 스타들이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기하는 모습들을 보고 싶다. 이들을 영화뿐만이 아니라 대학로에서도 계속 볼 수 있다면, 내일의 스타를 꿈꾸는 많은 연기 지망생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것이며, 그들을 사랑하는 대중은 연극과 영화를 함께 즐기고 기뻐할 것이다. 모 스타 배우가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선배들이 먼저 나서서 모범을 보이고, 후배들이 계속해서 연극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도록 앞장선다면 모두가 환영할 일이다. 우리는 하루빨리 그들의 모습을 대학로 소극장 무대에서 보고 싶다. <살인의 추억>이 준 희망을 계기로 더이상 한국영화의 위기를 말하고 싶지 않다. 나 역시 그동안 투자를 제대로 받지 못해서 끙끙대오던 작품들을 위해서 더욱 노력할 것이다. 잘 만든 영화는 결코 대중이 외면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된다. 최근 몇년간 급격히 성장한 한국영화는 조정기 국면을 맞이하는 느낌이다. 이것은 위기라 아니라 새로운 성장을 위한 다지기라고 본다. 이른바 엔터테인먼트 시대라고 하지만, 갑작스럽게 문화권력의 중심이 영화로 집중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문화예술의 모든 장르는 함께 공존해야 하며, 특별히 연극과 영화의 만남은 운명적으로 함께해야 한다. 이승재/ LJ 필름 대표

창작의 주체는? A FIlm By‥ 크레딧을 둘러싼 논쟁

극장에 불이 꺼지고, 영화의 막이 오르면, 이런저런 오프닝 크레딧이 뜨고 사라진다. 그 끄트머리에 긴 여운을 남기며 박히는 크레딧이 있으니, 바로 ‘A FIlm By…’(아무개 감독의 영화) 라는 ‘인장’이다. 그런데 최근 할리우드에는 이런 유형의 크레딧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다. 영화가 공동 창작 예술이라는 인식이 업계 내에, 그리고 감독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나가고 있다는 뜻일까? <버라이어티>가 인용한 통계에 따르면, 90년대까지만 해도 감독 소유 또는 주체를 뜻하는 ‘A FIlm By’의 크레딧을 쓴 감독이 70%에 달했지만, 최근에는 메이저 스튜디오의 영화 중에서도 이런 크레딧을 쓰는 예가 50%를 밑도는 것으로 나타났다.본래 이런 식의 크레딧을 쓰지 않는 감독들도 꽤 많은데, 그중에는 스티븐 소더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샘 멘데스, 조엘 코언, 고어 버번스키, 스티븐 달드리, 롭 마셜, 프랭크 다라본트, 커티스 핸슨, 크리스 놀란, 우디 앨런 등의 스타 작가감독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물론 여전히 이런 유형의 크레딧을 고집하는 감독들도 존재한다. 최근작 중에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스필버그, <피아니스트>의 폴란스키, <갱스 오브 뉴욕>의 스코시즈 등이 크레딧을 통해 ‘내 영화’라는 표식을 했었다. 특히 존 카펜터는 영화 제목에 자신의 이름을 끼워넣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의 최근작은 공식 타이틀이 <존 카펜터의 화성의 유령들>이었다. 그는 최근 감독들이 소유 및 주체의 크레딧을 쓰지 않는 것이 스탭들과의 불화를 피하기 위한 것이지, 어떤 인식의 대전환이 왔기 때문은 아니라고 증언한다. 기원을 따지자면, 그리피스 시절로 거슬러올라가야 할 이 크레딧은 50년대와 60년대로 이어져 내려오며, 앨프리드 히치콕 등 스타 감독들을 부각시키는 마케팅 도구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 크레딧이 상용화되면서, 가장 크게 불만을 드러낸 것은 작가 진영이었다. 그들 불만의 핵심은 그 크레딧이 ‘거짓말’이라는 데 있다. 작가들은 ’필름 바이’의 크레딧을 달 수 있는 자격은 시나리오 집필에 참여한 감독에게 한정해야 하는데, 실상이 그렇지 않다는 데 분노한다. 창작의 단독 주역인 것처럼 스스로를 부각시키는 감독에 대한 배신감, 그 바람에 작가의 위상이 폄하돼왔다는 피해의식이 적잖은 것이다. 크레딧을 둘러싼 미국감독조합과 작가조합의 갈등은 그 뿌리도 깊거니와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다. 66년엔 작가조합과 스튜디오 사이에 작가의 크레딧을 부각시키는 계약이 체결됐다가, 감독조합 주도로 소송과 파업이 시도된 바 있다. 99년엔 작가조합에서 “작가가 영화 창작의 주요한 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파업을 강행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감독조합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작가들이 세트장에 오거나, 촬영분을 보거나, 프레스 정킷에 참석할 수 없게 하는 강수를 쓴 것. 2001년엔 다시 작가조합에서 크레딧 정정 등을 요구하며 파업 경고를 하기도 했다. 크레딧을 둘러싼 분쟁은 과열된 감이 있다. 프랭크 다라본트는 감독 소유 및 주체 크레딧을 쓰지 않는 대표적인 인물인데도, 동료 작가와 감독들이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놀랐다고 증언한다. “내 영화를 한편 이상 본 관계자들조차 그 크레딧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일반 관객 역시 그러할 것 아닌가.” 또한 지금 상황에서 문제의 그 크레딧을 쓰지 않는 감독이 늘어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무리다. 업계의 관계자들은 이를 ‘모피 안 입기 캠페인’과 크게 다를 게 없다며 냉소한다. 영화의 주인은 누구인가. 영화 창작의 주역은 누구인가.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낼 것인가. 아직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범작이 될 수도 없지만 걸작이 될 수도 없는 <살인의 추억>

봉준호가 그려낸 80년대는 죽은 여자들의 질 속처럼 컴컴했다. 범인이 사라지고 난 자리, 텅 빈 터널의 동공의 이미지는 죽은 여자들을 가둔 농수로의 텅 빈 공허와 곧바로 연결되어진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그곳에 무엇이 있었는가? 일종의 구멍으로서 현실을 제약하는 터널로서, 살인의 추억의 80년대 공기는 농수로의 질척질척하고 끈끈한 기운을 타고 죽은 여자의 질 속을 헤맨다. 강간, 연쇄살인, 메뚜기가 노니는 농촌 풍경. 여자들은 죽고 남자들은 죄의식에 빠진다. 이 이형접합의 이미지들 속에서 봉준호의 80년대는 또 다른 주석을 한국 영화사에 보탤 것이다. 그렇다면 <박하사탕>의 손, 고문을 가한 피해자의 똥을 묻히며 잔인한 웃음을 흘리던 영호의 손과 자신이 구타한 그리하여 기차에 치여 죽은 한 백치 청년의 피가 묻은 박두만의 손, <박하사탕>의 80년대와 <살인의 추억>의 80년대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리고 유치하지만 따뜻하게 포장된 <품행제로>의 80년대와 살벌한 사회적 폭압이 두 연인의 욕망의 날개마저 갈가리 찢어놓는 삼청교육대 위에 놓인 <나비>의 80년대는 또 얼마나 다른 장소인가? 그리하여 이 글은 <살인의 추억>이 아직은 아무것도 결코 추억이 될 수 없음을 밝히려 한다. 우리가 그 캄캄한 터널 속 같은 80년대로 다시 들어가봐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려 한다. 서서히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화두로 형성되어가는 80년대와 봉준호의 80년대가 같지는 않지만 결정적으로 다른지 않은 그 지점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물기어린 눈으로 카메라를 직시하는 송강호의 정면처럼, 나 역시 <살인의 추억>이란 텍스트를 직시하고 싶었다. <살인의 추억>이 걸작이 될 수도 없지만 범작이 될 수도 없는 어떤 이유에 대하여. <살인의 추억>은 너무 매끄럽다 <살인의 추억>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서정적인 요소는 농촌이라는 이미지, 모든 전근대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박두만으로 대표되는 그곳에서 출발한다. 아이는 메뚜기를 잡고, 형사는 경운기를 타고 현장에 나간다. 하늘이 한뼘 더 넓어 보이는 화면의 가장 낮은 곳에는 죽은 여자의 시체가 나뒹굴고 있다. 그곳에서 서울 형사 서태윤이 필시 죽었으리라고 짐작한 독고현순에 대해 이야기하자, 박두만은 자신이 알고 있는 현순이의 미모에 대해 수다를 떨며 서태윤의 가설을 뭉개려 든다. 형사가 피해자를 알고 있는 사회. <텔미썸딩> <프롬 헬> <양들의 침묵> <헨리 연쇄살인자의 초상> <쎄븐> 등 수많은 연쇄살인범 스릴러물들이 도시 뒷골목의 살인범을 포획하려 들 때,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익명성을 당연시 여기는 스릴러의 공식을 벗어나 봉준호는 하필이면 화성이라는 특별한 지형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박두만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곳은 근대사회의 특징인 익명성이 부재한 곳이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있고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연쇄살인의 쾌감과 호기심과 미스터리는 철저히 익명에서 시작해서 익명으로 끝나는 범죄이다. 산업화의 태동기, 런던 뒷골목의 창녀들의 내장을 빼내어 포를 떠놓았던 잭 더 리퍼처럼 복수도 돈도 미움도 아닌 오직 순간의 쾌감을 위해 모르는 사람을 살인할 수 있는 익명의 범죄가 가지고 있는 잔인함이 거기에는 있다. 이윽고 연쇄살인이 이 작은 마을을 덮쳤을 때, 바람보다 조금 앞서서 전근대적인 마을에 당도한 근대적 범죄에 대해 봉준호는 농촌스릴러라고 말하지만, 거대한 동심원처럼 확대되는 살인 속에서 박두만과 서태윤이라는 두 형사의 대결로 80년대는 양식화되어간다. 박두만은 합리성과 개인주의에 반하는 직관 혹은 주먹구구식의 전근대적 사고, 아니 중세적 사고를 지닌 형사이다. 그는 ‘범인의 얼굴을 보다보면 감이 딱 온다’며 툭하면 용의자들에게 눈을 마주칠 것을 강요하고, 심지어 거리낌없이 사건을 조작하기까지 한다. 없던 발자국도 만들어놓는 용한 형사. 형사이면서도 수사반장이라는 허구적 실체에 사족을 못 쓰는 형사. 신발을 뺏고 신발을 주는 형사. 박두만은 모든 공적인 관계를 사적화하려 들며 병 주고 약 주는 전근대적 인물을 표상화한다. 당연히 그는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합리성을 믿는, 4년제 대학을 나와 지적 자본이 존재하는 도시노동자, 이 작은 마을에 근대성의 이름으로 당도한 서태윤에게 열등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술 취한 주임이 고꾸라진 사이, 이들 두 형사가 벌이는 옥신각신은 결국 80년대 한국사회에 잔존해 있는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마찰과 갈등을 그대로 드러내는 환부의 역할을 자임한다. 그런데 이들의 갈등은 단지 전근대와 근대의 혼재와 공멸을 넘어 어떻게 보면 지극히 ‘80년대적’이며 ‘한국적인’ 근대성과 전근대적인 마찰이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변주되어진다. <살인의 추억>은 이제 더이상 일본의 식민지주의와 근대적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적 문제 즉 고부간의 갈등, 바람난 아내, 새로운 생산양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퇴되어가는 남성 등등의 아직도 우리의 TV가 부여잡고 있는 60년대식 근대성의 문제를 다루지 아니한다. 사실 80년대에 불어닥친 국민적 성찰 중 하나는 한국이라는 국가가 태생적으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냉전적 대결의 산물이며, 그것은 국민의 자유와 복리라는 적극적 이념에 기초한 국가라기보다는 적대라는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이념에 기초한 국가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깨닫게 된 시기라는 점이다. 봉준호의 <살인의 추억>은 그러한 한국적 근대성이 어떻게 80년대에 이르러 개인에게 폭압적이며 잔인한 방식으로 구현되는지 그 뿌리와 줄기, 가지와 잎새를 아우른다. 그것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의 문제이며, 이름의 문제가 아니라 양태의 문제이기도 하다. 경찰이라는 공공기구가 오히려 폭력기구로서 국가의 이름으로 다른 세력을 억압하는 한국적 근대성이 가지고 있는 모순. 동시성과 균질성이 부재한 이러한 한국적 근대성의 특징은 잡아온 용의자에게 수시로 발길질을 가하는, 그리하여 마치 신체형을 통해서 보복을 가하는 전근대의 형벌제도와 경찰의 취조가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 모순된 지점을 향해 영화를 밀고 나아간다. 민방위 사이렌은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의 수업을 묶어놓고, TV에서는 부천서 성고문 뉴스가 울려퍼진다. 이 가운데 <살인의 추억>은 세심한 방식으로 증언한다. 88년이 지향했던 모든 근대적 성과물들은 박두만이 백치 용의자 백광호에게 선사한 나이스 신발처럼 가짜이자 의사적 근대성이었을 뿐임을. 병 주고 약 주고였을 뿐임을. 나쁜 놈을 잡아내려던 형사는 어느 순간 <빗속의 여인>이란 노래에 맞추어 여학생들의 머리채를 끌고 가고, 이 전도된 폭력성의 실체는 국가가 개인에게 향하는 폭력과 유령의 범인이 여성들에게 가하는 육체적 위해의 핵심 모두에 ‘결박’이란 이미지를 중첩시켜놓는다. <살인의 추억>은 이 지점에서 80년대를 단지 배경으로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의 정치적, 역사적 층위를 새롭게 드러내면서 이를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탁월한 성과를 이루어낸다. 관객을 쥐락 펴락하는 봉준호의 연출력 재미있는 것은 봉준호란 사람이 이미 데뷔작부터 <살인의 추억>처럼 무언가 연쇄실종되어가는 사건, 사고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라는 것이다. ‘연쇄살견사건’이라 불릴 만한 <플란다스의 개>는 기실 ‘애완용 개’에 부여하고 있는 근대적, 서구적 이미지- 기꺼이 개를 위해 돈을 쓰고 한 가족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그냥 ‘개’에 부여하고 있는 전근대적 한국적 이미지- 개는 가축이자 몸보신용이며 언제 잡아먹어도 좋은 짐승의 한 부분일 뿐인 사람들이 충돌하는 과정을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잡아내었다. <살인의 추억>보다 훨씬 아기자기하고 판타지의 요소가 귀엽게 삽입된 <플란다스의 개>는 그러나 <살인의 추억>처럼 끝내 강아지 살해범은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엄한 노숙자가 범인으로 오해되어 잡혀들어간다. 그것은 거대한 무능력의 세상이다. 변변한 분석장비 하나 없어 미국에 결정적 증거를 보내야 하는 시스템의 무능력함이나 끝끝내 범행을 막지 못한 채 데모진압에나 동원되어야 하는 개인의 무능력함. 심지어 아파트에서 발생한 개 도둑 하나 잡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모든 무능력의 축도이다. 봉준호의 영화들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패배주의, 본인이 <살인의 추억>에서 운명적 패배주의라고 이야기했던 이러한 유의 패배는 결국 <플란다스의 개>라는 동화적 우화에서조차 암암리에 봉준호가 사회적 억압과 개인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게 만든다(과연 <플란다스 개>에서 주인공이 애타게 찾아 헤매는 순자라는 개 이름이나 박두만이 퍼질러 누워 있는 책상 위에 있던 이순자의 사진은 아무런 뜻없이 삽입된 것일까? ) . 여기서 더 미세하게 감지될 수 있는 것은, 봉준호가 그려내는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충돌이 지극히 미국적인 혹은 후기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근대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평화로운 농촌을 조금씩 파먹어들어가는 위압적이고 괴물스런 공장의 이미지처럼, 극한의 물신주의와 개인주의로 요약되는 80년대 이후의 근대성은 점차 개인들의 영혼을 파먹기 시작한다. 그 뿌리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개인에 폭압적이며 잔인한 방식으로 구현되는 제도적 행패로 나타난다면, 잎사귀에 이르러서는 개인의 ‘도덕적 위기’가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이러한 도덕적 위기에 직면하여 더욱더 극적인 방식으로 두 형사의 영혼을 착종시킨다.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한다던 서태윤은 엄청난 종잇더미 위에서 망연자실해하고, 끝내 여학교 변소를 탐색하는 비합리성에서 허우적거리다 ‘목격자고 뭐고 다 필요없어. 자백만 받으면 돼’라는 광기의 진공상태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범인이 누구인가라는 호기심보다 더 매력적인 두만과 태윤의 자리바꿈은 송강호, 김상경의 탁월한 연기로 말미암아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엄청난 심리적 긴장과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 데모를 했던 누구도, 그들을 잡으려 했던 누구도, 살아남아 국회의원이 되었고 사장이 되었다. 죽어갔던 것은 힘없는 여자들, 논둑 위를 걷던 아녀자들. 우리 모두의 손에는 그들의 피가 묻어 있다. 그러나 나의 근심은 엉뚱하게도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된다. 대체 단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뿐인 봉준호가 이렇게 세련된 상업영화를 뽑아낸다면, 다음번에는 과연 어떤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영화는 세심하게 관객의 긴장감을 배려하여 배치되어 있을 정도로 장르적 규칙 또한 튼실하다. 범인의 시점숏은 영화 중반부 이후에나 들어가고, 지글지글 익는 고기를 클로즈업하는 시선에는 범인이 피해자에게 가했을 육체적 가학에 대한 충분한 상상력의 동원을 가능하고도 남게 만든다. 특히 관객을 쥐락 펴락하는 봉준호의 연출력과 리듬감각은 엉뚱한 용의자인 조병순을 마을을 거쳐 공장으로 추적하는 씬에서 절정에 달한다. 북소리를 개시로 마스터베이션하던 조병순을 쫓는 세 형사는 각기 다른 방향에서 튀어나와 한 화면으로 합쳐진다. 달리기라는 동력 외에 별다른 탄력이나 움직임을 카메라가 받지 않는데도, 이 추격신은 격렬하게 느껴진다. 숨이 가쁘다. 편집과 속도의 변주 그리고 휴지기와 다시 추격을 반복하는 영화적 리듬감각 덕분에, 마침내 공장에 숨어 들어갔던 조병순의 바지 사이로 살짝 보이는 빨간 팬티를 찍어내는 줌인은 역동적이고 효율적인 연출의 힘이 무엇인지 증거하고야 만다. 확실히 봉준호는 노련해졌다. 등장인물의 앉고 서는 동작만으로도 한 화면 내의 삼각구도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키고, 죽은 여인의 사체를 부감으로 잡아내고는 하늘을 맴도는 까마귀떼와 중첩시키는 장면에서는 연출상의 여유가 풀풀 묻어난다. 결핍이 없는 잘 만든 모범영화 그러나 왜 나는 자꾸 <플란다스 개>를 처음 보고 나서 느꼈던 생뚱맞은 혼란감이 이리도 그리운 것일까?(지난 5년간의 평론가 경험으로 통상 이 생뚱맞은 혼란감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방금 본 영화가 한국영화를 다시 쓸지도 모른다는 설레는 길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나 <복수는 나의 것> <질투는 나의 힘>을 맨 처음 보았을 때 생뚱맞음은 처음 맞이하는 서설처럼 반가웠다.) 왠지 결핍이 없는 잘 만든 모범영화에서 머무르는 것 같은 <살인의 추억>에 비해 그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거칠지만 무척이나 신선한 측면이 있었다. 이성재와 배두나, 두 남녀가 어떤 이성애적 연애담이나 성적 욕망 위에도 존재하지 않고 주인공의 연을 맺을 수 있다는 생뚱맞음. 고작해야 강아지 살해사건을 다루고도 동화의 제목을 빗댄 유머의 생뚱맞음. 현실 속에 판타지를 집어넣고 그곳에서 사회적 은유를 환기시키는 생뚱맞음. 이성재라는 남자주인공이 재현하는 신경질적이고 꾀죄죄한 지적 속물의 이미지와 배두나와 뚱녀 이 파격 커플이 행사하는 탈근대화된 이미지, 담배피우고 술 마시고 하루하루를 그냥 보내도 충분히 자유로운 그녀들과 그 가운데 성찰할 수 있는 주체의 문제. 돈으로 산 교수직에 얽매여 있는 먹물이 자신의 삶의 주인공일 수 있는가? 하는. 반면 <살인의 추억>의 어떤 것은 충분히 예측가능하고 합의가능한 것들이라 재미가 덜하다. 결박당한 여성의 육체가 증거하는 시대와 사회를 은유하는 전술과 그녀들이 근대성의 제단에 받쳐진 제물이라는 공식 말이다. 물론 문제 해결의 단서를 주는 사람이 늘 여성 경관이라는 점은 <공동경비구역 JSA> 때처럼 의도적으로 보이지만, 그녀는 영화의 전방에 나서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의 추억>은 <소름>이나 <에이리언> 등 숱한 영화들이 그러하듯 무너져내리는 아파트를 학대받은 여성의 자궁으로, 타락한 우주를 오염된 자궁으로, 혹은 암흑의 시대를 농수로라는 터널과 질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즉 여성적 기관을 빗대어 사회를 은유하는 고전적인 장르의 규칙들 속에 전진없이 머무르고 만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80년대라는 시대적 공기와 근대적 지층을 만들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의 추억>이라는 제목 안에 담긴 어떤 함의, 80년대란 시간이 역사를 초혼하면서 드러나는 시간적 층위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혹은 착한 제작자와 관객을 배려해 일부러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흑백의 색감은 시간과 연관을 맺기보다, 여성들의 육체에 가해진 살인의 그로테스크함과 이미지의 변조를 통해 그녀의 육체를 물신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단선적으로 흘러가는 이야기 속에 살인이 추억이 될 수 있는 이유, 감독의 변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어쩌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범인도 잡아놓으면 별것도 아닌 그런 놈이었을 것 같다. 언젠가 봤던 소아강간범처럼, 집안 구석에서 그 짓만 생각하며 시간을 죽이는 남성적 정체성이 형편없는 놈. 그런데 다 큰 여자와 여자의 정상적인 그 짓은 너무 무서워하는 그런 쪼다 같은 놈이었을 것이다(소아강간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의 선생님은 환자가 누구이든간에 ‘그의 신발을 신고’ 그의 입장에서 세계를 지각하려 들라고 가르쳐주셨다. 의처증 환자나 정신분열증 환자조차 그러한 방식으로라면 이해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난 그놈, 그 소아강간범을 본 순간, 자기 여편네마저 강간하여 21살의 여자에게 아이 셋을 낳게 한 그놈을 본 순간, 신고 있는 신발을 냅다 벗어 그 인간을 실컷 두들겨패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빠졌다). 원래 대타자의 속성이 그러하듯 <살인의 추억>의 범인은 끝내 유령이고, 살인범의 이야기는 여고를 맴도는 괴담이 된다. 무엇보다도 봉준호는 자신이 그려내고자 했던 운명적 패배주의란 말 속에 숨은 장엄한 숙명의 기운을 완전히 받아내지 못한 채 성급히 2003년으로 점프컷해버린다. 봉준호가 두 작품 모두에서 천착했던 근대성의 문제는 세상을 해석하고 비판하고, 한탄하는 데 머무르는 것만은 아니라고 본다. 진정한 근대성과 전근대성의 충돌이란 세상을 바꿔보려는 자가 그렇지 않은 자와 벌이는 한판의 대결이다. 그러기에 <살인의 추억>은 너무 매끄럽다. 그저 내부의 공동체에서 맴돈다. 가장 중요한 착각은 영화가 함의하고 있는 거대한 무능력은 운명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적어도 무엇이든 운명적인 것이 되려면 그것이 패배할 줄을 알면서도 끝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대상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영화는 스스로 장엄한 숙명의 기운에 도취되고 싶어하면서도 숙명성을 이루는 핵심적인 것들을 누락시킨다. 이건 고의거나 아니면 비겁하거나 장르를 위한 최선의 의도일 것이다. 결국 정치적인 것들이고, 결국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것들, 욕망들, 꿈들인데 감독은 오히려 거기서 발을 빼려 든다. 그래서 <살인의 추억>은 추억보다는 내내 현재진행형의 영화였다. 영화의 마지막, 물기어린 눈으로 카메라를 쳐다보는 박두만의 얼굴은 오히려 화성연쇄살인이 결코 과거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웅변적으로 증거해준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현재를 점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카메라와 관객과 범인과 박두만의 시선 모두가 한 지점의 방향으로만 수렴하게 돼 있었고, 시간의 여백이 부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80년대는 아직은 잊혀지지 않는 그렇게 총천연색의 부정교합으로 거기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의 80년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누가 80년대라는 유령의 실체를 벗겨 그의 가슴에 칼을 꽂을 것인가. 농수로에 앉아 있던 박두만처럼, 나는 그곳에 앉아 다짐해본다. 그날이 올 때까지는, 그때까지는 잊지 않겠다. 잊지 않겠다. 아무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삼차원 입방체의 비의성(秘意性)-그 회화적 해석

1mm의 산전수전 지루하다. 뭔지 모를 12개의 입방체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렇다고 색깔이 강렬한 것도 아니다. 자세히 보니 입방체가 하나씩, 둘씩 움직인다. 팸플릿에 소개된 러닝타임은 12분. 설마 12분 동안 입방체가 조금씩 움직이는 모양새만 바라보라는 건 아닐 테지. 그러나 기대를 무참히 저버린 채 영상은 성실하고 꾸준하게 비슷한 운동을 반복한다. 솔직히 말하면 김재관의 <삼차원 입방체의 비의성(秘意性)-그 회화적 해석>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 주최한 특별전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에 소개된 11편의 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재미없는 작품에 속했다.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지루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했던 작품이 울림을 준 이유는…. 정해진 프레임 안에서 추상적인 입방체들이 일정하게 운동하다가 여러 개로 분열하고 서로 겹치기도 하는 영상은 충격적이지 않다. 재미도, 서사구조도 없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 있다. 바로 소리다. 처음에 들리는 것은 이상한 나라 말로 염불을 외는 듯한 소리. 중세 수도사가 신을 숭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느 밀교의 기도문 같기도 하다. 꽤 오랫동안 의미 모를 소리가 들리는 듯했는데 정신차려 보니 다른 소리가 들린다. 입방체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어지는 건 파도소리, 바람소리다. 그러고보니 소리에 따라 입방체들이 운동하는 게 아닌가. 이제 소리에 주의를 기울인다. 파리가 날아다니는 소리, 화장실에서 오줌누는 소리, 물 내리는 소리도 들린다. 창 밖에서는 사이렌이 울리고 화장실을 다녀온 누군가가 물을 따라 마신다. 뭔지 모를 소리와 함께 운동을 시작한 삼차원의 입방체들은 이제 일상을 말하고 있다. 불도 나고, 바람도 불고, 산전수전이 다 지나간 듯하다. 오호라, 발견했다. 울림의 정체. 저 12개의 입방체는 마치 우리 인생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것 같았는데 조금씩 변한다.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1초 전과 지금은 다르다.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밥을 먹고 배설하고…. 1초 전과 지금이 다른 이유는 여러 가지다. 전체가 움직이고 부분이 움직이고 그러다가 다시 전체가 된다. 작가 김재관은 화가에서 출발해서 지금도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1947년생의 중견작가는 ‘움직임이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고민을 3D애니메이션으로 실험했다. <삼차원 입방체의 비의성(秘意性)-그 회화적 해석>은 ‘액자 속 그림이 움직인다면 어떨까?’ 하는 발상을 했던 수많은 작가들의 상상을 실현시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중성과 서사구조를 담보한 작품을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애니메이션’이라고 규정한다면, 그의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 회화 작업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실제 작가는 그저 회화와 움직임을 결합하는 것에 치중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을까? 인생에는 클라이맥스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재미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저 12개의 입방체들처럼 자기 내부의 질서도, 세상의 질서도 덤덤하게 조금씩 변해간다고 이 작품은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답은 제목 그대로 ‘숨겨진 의미’(秘意)가 아닐까.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다. 전시는 오는 6월30일까지(http://museum.ewha.ac.kr/).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

히사이시 조 음악의 정점,<모노노케 히메> OST

그런데 하나의 영화는 누구의 것일까? 모든 스탭들의 이름은 기억에서 지워지고 주인공, 또는 감독의 이름만이 남아 영화의 제목과 함께 세월을 유영한다. 그렇다면 영화는 감독의 것, 주인공의 것인가? 사실, 도대체 이름으로 남는다는 것은 때로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가. 하나의 영화는 어느 누구의 것이 아니기도 하다. 내가 잘 아는 어느 영화감독은 “사람들은 모른다. 감독조차 모른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황야의 무법자>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것인 줄 알지만 사실 그 영화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것이라는 것이다. 부당한가. 모리코네라는 이름이 또 다른 하나의 이름일 뿐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 영화는 그 ‘음악’의 것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1997년작이다. 하야오가 ‘은퇴작’이라고 선언했던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장 전형적인 구조물로 꼽을 만하다. 일본 특유의 토속신앙과 결부된 ‘정령숭배’에서 비롯하여 환경주의까지를 아우르고 있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던 ‘숲 숭배주의’와 그 대립항인 인간의 (파괴적) 욕망, 그리고 그 대결과 해소의 열망 같은 전형적인 구도가 아름답고 음습하고 깊고 박진감 넘치는 그림과 치밀하게 짜여진 내러티브를 통해 펼쳐진다. 너무나 전형적인 하야오의 것. 더는 갈 곳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은퇴를 선언한 것은, 이쯤 되면 동어반복이라 생각해서였을까. 그러나 그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약간 다른 구도를 가지고 컴백한다. 이 영화 역시 하야오와 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름 히사이시 조가 음악을 담당했다. 히사이시 조의 활동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거의 음악을 ‘쏟아낸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양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심지어 영화감독으로 메가폰을 쥐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작품마다 어느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유지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이 업계에서 그의 ‘신용’을 유지하게 하는 키 포인트일 것이다. 특히 하야오의 만화들에서는 그의 영화음악 중에서도 가장 심혈을 기울인 티가 나는 작품들을 영상에 붙여주고 있다. 그중에서도 <모노노케 히메>는 하나의 정점을 표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그의 음악은 서양 악기편성을 중심으로 한 오케스트레이션을 쓴다. 그것이 바탕색이다. 그러나 히사이시 조는 늘 그 가운데에 두 가지를 더 섞는다. 하나는 전자음악적 사운드의 도입이다. 그렇게 곧이곧대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의 음악에는 늘 새로운 전자 사운드의 요소가 추가된다. 그만큼 그는 새로운 사운드를 향해 늘 마음을 열고 있다. 이 요소는 깊이라든가 신비, 혹은 공포 등을 표현하는 데 보이지 않는 재료로 동원된다. 그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혼합은 일본 특유의 토속적인 분위기를 첨가하는 일이다. 그가 첨가하는 토속적인 요소는 서양 사람들에게는 ‘이국취향’의 요소로 작용하고 자신들에게는 역시 일본 특유의 ‘퓨전 아이덴티티’를 확인케 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는 실제로 ‘숲’의 항목에서 이러한 토속성이 잘 기능한다. 결국에는 잘 짬뽕된 통속성을 발휘하고 있는 그의 기능주의는 그의 성공을, 나아가 일본 문화의 세계적 성공을 압축하고 있다. 그리고 <모노노케 히메>는 그러한 히사이시 조 식의 음악 생산법의 가장 세련된 결과물이다.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사는 숲의 정령처럼, 이 영화는 정작 그의 음악이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짜 주인공은 보이지 않는 법이다.

현정이의 전주 다이어리 [3]

메인 상영관인 전북대 문화관 앞은 늘 관객으로 북적댔다. 4월 27일부터 29일까지는 `희망시장`이라는 이름의 아트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했다. <일곱 명의 발레리나> <야간 경비원의 시선> <첫사랑> 세편을 묶은 키에슬로프스키의 다큐멘터리는 부문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극영화로 착각했을지도 모를 영화들이었다. <첫사랑>은 임신 때문에 서둘러 결혼한 열일곱살 소녀와 스무살 청년의 1년 가까운 시간을 관찰한다. 학교에 다니면서 돈을 벌고,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부부에겐 일상이 드라마다. 사회주의 국가에선 허가를 받지 않으면 할머니집 빈방 한칸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혼인신고를 기다리는 부부가 많아서 빈틈이 날 때까진 결혼도 못한다. 그래도 씩씩하게 살길을 찾아다니는 두 사람은 귀여운 딸을 낳지만, “이 아이는 우리보다 현명할 테니까 우리처럼 되진 않을 거야”라고 다짐한다. 신기했던 것은 결혼식장에 온 부모가 “너는 나보다 행복할 거야”, “넌 나와는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한다”라는 말로 축하해주는 풍경이었다. 딸들이 “엄마처럼 살진 않을 거야!”라고 발악하는 것보단 훨씬 괜찮은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첫사랑>은 아래위가 눌린 채로 상영돼 열일곱살밖에 안 된 야드비가가 엄마가 돼 마땅한 나이처럼 보이는 약점이 있었다. <야간 경비원의 시선>은 권력에 복종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권력은 야비하게 휘두르는 야간 경비원이 설명하는 인생관이다. 그는 규칙을 잠옷처럼 편하게 대하고 좋아하는 것 같지만, 감독의 시선은 경비원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내면을 살짝 드러내면서 흝어내린다. 키에슬로프스키 다음날 선택한 장 외스타슈의 은 외스타슈가 그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며 앉혀놓고 찍은 다큐멘터리다. 외국관객은 이 영화를 읽어야만 한다. 이야기를 그치지 않아 자막을 읽다보면 할머니 얼굴도 제대로 못 보기 쉽기 때문이다. 외스타슈의 할머니는 어려서 계모에게 구박을 받았고, 집에서 나오고 싶어 서둘러 결혼한 남편의 바람기에 시달렸고, 4남1녀 중 아들 넷을 모두 앞세워 보냈다. 아이들이 죽은 이야기를 할 때,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이 다 떨어진 것 같단 느낌이었다. 불행했어, 아팠어, 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쓰던 할머니는 “손자 외스타슈가 일은 그만하고 함께 살자”고 했다면서, 이젠 괜찮을 거라고, 십년만 더 살고 싶다고 이야기를 끝낸다. 포스트 누벨바그 최고의 감독으로 추앙되는 장 외스타슈는 을 찍은 십년 뒤인 1981년 자살했다. 그의 할머니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을까. 쓸데없는 걱정이 떠나질 않았다. <루이즈가 본 미오뜨>와 <긴 여정의 엘레지>는 그런 걱정 근심을 잊고 하염없이 바라보게 되는 영화들이었다. <긴 여정의 엘레지>는 이름이 주는 범상치 않은 느낌 때문에 평소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다큐멘터리다. 제목과 달리 여정은 별로 길지 않지만, 시간은 물리적인 의미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바다와 들판과 하늘과 버려진 마을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소쿠로프는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누구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그가 마지막으로 담는 회화들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라고 외치고 싶었던 관객에게 답을 주는 듯했지만, 이미 엘레지에 지쳐버린 뒤라 곰곰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루이즈가 본 미오뜨>도 제목이 주는 연애영화 같은 느낌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영화다. 라울 루이즈는 3년 동안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현대 추상화가 미오뜨가 작업하는 모습을 기록했다. 추상화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카메라는 힘차게 캔버스를 휘젓는 붓을 그대로 따라가면서 거침없는 작업을 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캔버스를 한참 내버려두는 미오뜨는 “삶을 가져오고 싶다. 그것은 갑자기 다가올 것이다”라고 여백의 시간을 설명한다. 추상화가는 붓질 몇번으로 엄청나게 비싼 그림을 그린다고 믿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훈적인 영화였다. 아직도 많이 남았다 기사 마감이 닥친 날, 글라우버 로샤의 영화 두편을 봤다. 브라질 시네마노보의 기수였다는 로샤는 외스타슈처럼 요절했고, 블랙스플로이테이션처럼 노래가 설명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바라벤토>에선 두 남자가 싸움을 시작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말리는 것 같더니, 자리를 장만하고 악기를 두들기기 시작한다. 그들은 춤추는 것처럼 싸움을 했다. <검은 신, 하얀 악마>에선 느닷없이 죽은 노파가 나오는데, “나의 형제여, 당신의 어머니는 하나님 손에서 죽은 게 아니에요. 당신의 어머니는 오지에서 총에 맞아 죽었어요”라는 노래를 듣고서야 그녀가 주인공 마누엘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휙휙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금씩, 군대를 끌고 산적을 잡으러다니는 안토니오 다스 모르테스, 로샤의 또 다른 영화 <안토니오 다스 모르테스>의 주인공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한번 들은 것 같은 멜로디에 가사만 바꾼 듯한 노래가 듣고 싶어지기도 했다. 장면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분석하는 일보단 그 영화 자체를 좋아하는 일이 더 쉬울 것이다. 거장의 영화란 무조건 지루할 거라며 피해다니는 건 지루한 영화를 예술이라며 재미있다고 우기는 일 못지않게 편협한 행동일 것이다. 기사를 쓰는 지금, 전주영화제는 사흘이 남았다. 도전해볼 영화가 그만큼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글 김현정 parady@hani.co.kr·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전주영화제의 말, 말, 말 ‥ “영화가 너무 길었다. 반성했다” 일본엔 정신대에 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정신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우길 수 있는 거다. 아프가니스탄에 잠깐 존재했던 민주공화국 역시 마찬가지여서, 나는 아프간 민주정권에 관한 다큐를 꼭 찍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영화를 보니까 너무 길었다. 반성했다. ◆ ◆ ◆ 쓰치모토 노리아키, 다큐멘터리 <아프간의 봄>을 찍은 동기를 설명하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 세이는 나 자신과 많이 닮았다. 영화를 보면 세이가 교실에서 국어책을 읽다가 정액이 터지는 경험을 하는데, 내가 바로 그랬다. ◆ ◆ ◆ 도가시 신, 성장영화 <미안해>에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아침 상영이라 관객이 열명도 안 될 줄 알고 선물을 준비했다. <침묵의 외침> 자료가 된 비디오 화면을 스틸로 찍어 만든 사진집인데…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에게 주겠다. ◆ ◆ ◆ 안해룡, 다큐멘터리 <침묵의 외침> 무대인사 때 관객이 의외로 많은 걸 보고 인권영화 프로젝트에 늦게 합류해서 주제를 고민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박찬욱 감독이 먼저 선택했다고 해서, 쉽게 내 문제를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 ◆ ◆ 임순례, 몸무게와 외모 때문에 고민하는 여고생을 다룬 <그녀의 무게>(개막작 <여섯개의 시선> 중 한편)를 떠올린 계기를 설명하면서 내가 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나는 내 영화가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 ◆ ◆ 헤르츠 프랑크, ‘다큐멘터리, 오늘’ 부문 상영작 <플래시백> 감독, ‘다큐비엔날레 포럼-다큐멘터리를 넘어서’ 자리에서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