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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촬영현장 스케치 [2]

동서고금 막론한 욕망의 모습 “다시 현대물을 한다면 펄펄 날 것 같아요.” 이재용 감독은 사극 연출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고 한다. 움직임의 제약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는 꼼꼼함과 섬세함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연배우들에게는 대사의 톤까지, 단역에게는 화면에 들고나는 위치와 타이밍을 정확히 짚어준다. “사람 사는 거나 인간의 욕망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요. 어떻게 내 식으로 펼쳐볼까 하는 게 관건이지. 양반집 깊숙한 곳에서 춘화를 돌려보고 또 조씨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춘화가 문제를 일으키는 건 ㅇ양 비디오 사건과 다를 게 없고, 당시에 집 한채 값이라는 가채에 사대부 아녀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건 이탈리아 가구를 갖고 싶어하는 지금의 욕망과 다를 게 있겠어요?” 감독뿐만이 아니다. 전도연과 배용준은 이구동성으로 <발몽>이나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감독 로저 컴블, 1998)보다 <위험한 관계>가 확실히 인상적이라며 영화 <스캔들…>의 위치를 확인시켜준다. 세실(우마 서먼)의 엄마가 투르벨 부인(미셸 파이퍼)에게 자꾸 경고 편지를 보내며 자신의 ‘작업’을 방해하자 발몽 자작(존 말코비치)은 그 대가로 세실의 처녀성을 가져간다. 메르티유 백작부인(글렌 클로즈)은 처음에 어쩔 줄 몰라하는 세실에게 남편과 맘을 준 연인과 몸을 준 남자를 동시에 갖는 게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라고 조언하며 발몽을 거드는데 그건 일말의 진심이기도 하다. 죄책감이 사라진 세실에게 발몽이 ‘난 한때 네 엄마의 정부이기도 했어’라고 말해주어도 세실은 깔깔거리며 재밌어한다. <위험한 관계>의 이야기 줄기를 거의 따온 <스캔들…>이니만큼 세실의 조선시대 버전 소옥과 소옥어미도 모두 조원에게 ‘정복’당한다. 물론 조씨부인의 지원사격이 컸다. 조씨부인을 이해하고 싶다면 메르티유 백작부인이 정리해주는 ‘인생관’을 참고하면 좋겠다. “처음 사교계에 들어와서 그저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듣고 관찰하면서 사람들이 숨기려는 걸 듣기 시작했어. 그러면서 전문가가 됐지. 도덕가에게서는 외모를, 철학가에게서는 생각하는 법을, 소설가에게서는 불필요한 게 뭔가를 배웠어. 그걸 합해서 한 가지 원칙을 세웠어. 이기지 못하면 죽는다. 남자들을 지배하고 여자들에게 복수하는 거지.” 발몽과 메르티유처럼 조원과 조씨부인도 같은 부류의 인간이다. 사랑 그 자체보다는 권력처럼 위계짓는 사랑 게임을 즐기며 운명적인 사랑에 심취한 인간들을 조롱한다. 이재용 감독도 사랑에 얼마간 냉소적이다. <정사>에서 “결혼에 희망을 갖지 마라. 열정만 갖고 사는 건 아니다”라고 말하던 남편의 말에 동감하던 이 감독은 ‘솔 메이트’(영혼의 짝) 따위의 대사를 편집에서 지워버렸다. <순애보>에 다시 등장한 우인은 아야와 알래스카에서 커플이 되지만 그는 사실상 거세된 남자다. <스캔들…>에선 발정난 조원이 뒤늦게 ‘회개’를 하겠지만 운명적 멜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SF영화 만드는 상상력으로 낯선 곳에서 이야기를 끌어온 영화답게 <스캔들…>은 공간과 디테일에 대한 상상력이 ‘SF적’이다. 이것은 <스캔들…>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아온 기존 사극과 달라지리라고 예상되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조선 시대에는 양치질을 어떻게 했을까까지 고증하려 했으나 남아 있는 게 워낙 없어서 애를 먹었지만 먼저 상상을 해보면 대체로 맞아들어갔다고 한다. 민속촌에 가면 중부 지방과 남부 지방의 집 모양을 개괄해놓았지만 설마 사람들이 그렇게 표준적으로 살았을까 싶었다. 마침 문을 열면 트인 마당이 아니라 벽부터 다가서는 이언적의 ‘은밀한’ 집을 보고 무릎을 쳤다. 내당에 연못을 만들어놓기도 했겠지 싶어 세트를 만드려 하니 ‘그런 집’은 없었다는 반발에 부딪쳤다가 뒤에 ‘그런 집’이 있었다는 걸 찾아냈고, 예절법을 연구하다 식사 때 서양의 냅킨 같은 걸 썼다는 것도 알았다. 지금 서구식으로 방을 꾸미듯 그때는 방을 중국식으로 치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개연성으로 밀어붙인 것도 있다. 상상력이 이런 식으로 자꾸 작동하니 ‘이건 SF영화다’라는 레토릭도 틀린 것만은 아닌 셈이다. “당시에 군자는 스페셜리스트가 되기보다 제너럴리스트를 추구했어요. 스스로 약을 지어 먹을 줄 알고, 운수도 볼 줄 알고, 자기 집은 자기 식대로 짓고 살았다는 거죠. 이걸 알고 나니까 사대부의 일상에 집중하는 데 많이 자유로워지더군요.” 공간에 대한 야심을 가진 사극이라면 미술비의 비중이 높을 것은 불문가지. 순제작비 45억원 중 미술, 의상 등에 들이는 돈이 20억원에 가깝다. 화려한 실내 미장센을 연출하기에 고충이 크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좌식 문화에 카메라를 다양하게 들이대기가 생각보다 갑갑하더라는 것이다. 조금만 움직이면 틀어지는 한복이나 머리, 수염 등도 엄청난 시간을 잡아먹는다. 조원의 잘 다듬어진 수염은 ‘리얼리티’를 위해 한올씩 일일이 붙였다. 그래도 68회차 촬영 중에 43회차를 넘기면서 중요 대목은 거의 다 찍었기 때문인지 야외촬영에선 느긋하게 즐기는 분위기마저 느껴졌다. 요즘 영화계의 한 경향이라 할 여성 스탭들의 파워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분장, 의상은 물론이고 프로듀서, 제작부장, 조명 퍼스트, 붐 마이크 등이 모두 여성이다. “<순애보>처럼 이것저것 살짝살짝 숨겨놓는 재미는커녕 이야기 전달에만도 힘이 많이 들어 한눈 팔 새 없을 지경”이라는 엄살은 이 영화가 매우 촘촘한 스토리 라인을 갖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에로틱함과 멜로, 유머까지 그 어느 때보다 ‘톤’이 다양한 이재용 감독의 신작이 얼마나 ‘비싼’ 결과를 낳을지 아직 알 수 없다. 우아하고 세련된 사극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스탭들이 묵는 안동 시내의 모텔은 여느 도시처럼 술집들로 포위돼 있었다. 밤늦게까지 붙잡아놓았던 감독이 돌아간 뒤 텔레비전을 켜자 한 채널에서 비디오용 에로영화가 줄창 쏟아진다. 이래저래 현실은 ‘싸구려’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치밀어오른다. “성(性)스러우면서도 성(聖)스러움이 깃든” 영화는 그래서 자꾸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편집 이다혜 배용준, 전도연 인터뷰 “용준씨, 러브신 직전까지 운동하더라” 배용준이 맡은 조원은 시, 서, 화에 능하지만 고위관직을 마다하고 뭇 여인들과 풍류를 즐기는 조선 최고의 바람둥이다. 재치있는 유머와 강한 카리스마가 있어야 할 텐데 브라운관에서 굳어진 이미지는 호탕한 남성미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안경을 벗고 8kg을 감량한 얼굴은 날이 서 있다. 공식 인터뷰가 아닌 사담을 나눌수록 ‘터프’하다는 느낌이 더해진다. 배용준은 온갖 스포츠를 즐기고 또 잘한다. 그 덕에 말에서 떨어진다든지 부채를 들고 칼싸움을 하는 장면에선 스턴트맨보다 훨씬 잘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조선 최고의 정절녀 숙부인 역의 전도연은 잠시드라마쪽으로 나섰다가 쪽진 머리로 돌아왔다. 한담을 나누던 이유진 프로듀서는 “슛 들어갑니다”란 소리가 나자 “도연이는 굳이 지켜볼 필요가 없어”라며 연기에 대한 믿음을 표시했다. 러브신 장면은 어떻게 찍었는지. 배용준 >> 한복이 입고 다니기에 좀 불편하잖아요. 그래서 가끔 다 벗고 그랬어요. (웃음)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전 처음이잖아요. 찍고 났더니 전도연씨가 매니저랑 뭘 막 상의해요. 왜 그러냐고 했더니, 이건 너무 야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렇다고 뭐가 많이 나오진 않아요. 전도연 >> 저도 잘 모르고 찍었어요. (웃음) 그런데 용준씨는 그거 찍기 전까지도 분장실에 아령을 갖고 와서 운동을 하더라고요. 유머도 꽤 담겨 있다고 하던데. 전도연 >> 전혀 코믹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대본 리딩에서 웃기는 대목이 많은 거예요. 뭐랄까 너무 진지하니까 오히려 웃기는. 배용준 >> 그런 점에서 기대되는 장면이 몇개 있는데, 아직 찍지 않아서 어떻게 나올지 잘 모르겠어요. 배용준씨는 첫 영화인데다 사극이어서 힘든 점이 많을 것 같은데. 배용준 >> 드라마는 길게 나누어 가고 반응도 바로 돌아오니까 큰 긴장감이 없었는데 영화는 액기스만 가니까, 연기의 호흡이 빠르니까 좀더 죽기살기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솔직히 맘 같아서는 다시 다 찍자고 하고 싶어요. 현대극 같지 않고 대사도 좀 힘들고, 상투 때문에 머리에 피멍이 들기도 했어요. 한복 입고 살다보니 옛날 양반들은 불편해서라도 소식을 했을 것 같아요. 촬영이 힘들어서 빠진 것도 있지만 체중 감량은 잘한 것 같아요. 전도연씨도 사극은 처음 아닌가요? 촬영이 60% 정도 진행됐는데 연기하기가 어떤지. 전도연 >> 벌써 그렇게 됐나. 장르의 변신일지는 몰라도 연기의 변신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지고지순한 캐릭터라는 표현 방식만 달랐지 연기는 결국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평상시 이미지가 워낙 발랄하긴 하지만 막상 해보니까 숙부인의 조용한 성격이 저랑 많이 닮았어요. (웃음) 조씨부인(이미숙) 캐릭터가 워낙 힘있게 보이는데 저는 숙부인에게 또 다른 힘을 주고 싶어요. 자신의 순정이 사랑 게임의 대상이 된다는 게 현실이라면. 전도연 >> 글쎄. 바람둥이라도 그때그때 진심이 아닌 건 아니니까…, 넘어갔을 것 같아요. 여기선 결국 조원의 진심이 있으니까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아요.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촬영현장 스케치 [1]

“성(性)스럽고 성(聖)스러우니, 이 어찌 흥미롭지 않으리오” 배용준-전도연의 발칙한 사극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안동 촬영현장 스케치 안동=글 이성욱 lewook@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hani.co.kr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지금까지 나온 사극 가운데 가장 발칙한 제목을 달고 기묘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의 촬영장을 찾았을 때, 처음 마주친 것은 작은 ‘마찰’이었다. “영화가 하회마을과 맞지 않으면 곤란해요. 내일까지 어떤 영화인지 적어서 제출해주세요.” 옛 풍경이 필요할 때마다 들이닥쳤을 무수한 카메라와의 승강이에 이골이 났을 안동 하회마을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다그침이었다. 여기 화재라도 나면 큰일이다, 나무 한 그루 값이 최소 500만원인데 뭔가 보탬이 되면 좋겠다, 저기 대나무들은 누가 잘랐지…. 집주인의 허락을 받았다고, 대나무와 화단의 꽃들은 서울에서 가지고 온 거라고 제작부에서 고분고분 설명한다. 사극 제작현장이어서 그런가 시대를 거슬러간 듯한 장면부터 보게 되다니. 낯선 시간대가 뒤섞여 공존하는 듯한 이 풍경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라는 이색 사극에 접근하기에 어떤 의미에서 그럴싸한 서두인지도 모른다. #1-<정사>보다 도발적으로 전도연은 이날 촬영에서 실제 나비를 수없이 날려보내야 했다. 길조와 흉조를 동시에 보여주는 호랑나비를 잡았다가 놓아주는 장면이었는데, 번번이 나비가 제대로 날아오르지 못해 NG가 계속됐다. “전 컴퓨터그래픽으로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러면 아무래도 사실감이 떨어진다며 일단 실제 나비로 하자고 그랬어요.” NG가 이어지면서 주변의 스탭들이 큼지막한 잠자리채를 들고 ‘단역’ 나비를 채집해 전도연에게 전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평화’가 회복된 뒤 비로소 촬영지를 롱숏으로 둘러보았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끼고 돌아가는 낙동강, 그 건너편에 부용대라 불리는,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의 왼쪽 끄트머리에 옥연정사(玉淵精舍)가 멋진 자태로 앉아 있다. 하회마을 안내 팸플릿에는 “서애 유성룡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우고자 했던”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땅은 거유(巨儒)가 구름 같은 문도(門徒)를 양성하기에는 비좁아 보이고 책으로 빠져들기에는 경치가 너무 유혹적이었다. 영화 속에서 이곳은 9년간 수절하며 열녀문까지 하사받은 정숙한 숙부인(전도연)이 ‘국가대표급 바람둥이’ 조원(배용준)의 조직적이고도 압박적인 구애를 피해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 장소다. 수를 놓고, 나비와 노닐며…. 이곳으로 조원이 찾아온다. 카메라는 숙부인의 정절이 최대위기를 맞는 순간을 담는 중이다. “레디…, 액션!”을 외치는 사람은 조감독이었다. 이재용 감독은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나직이 “컷”만 지시할 뿐이다. 가끔 슬그머니 연기자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만 빼놓으면 도통 말이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궁금해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라는 한 스탭의 말 그대로다. 그래선지 카메라, 조명, 분장 등의 스탭 움직임도 조용하고 차분하다. 현장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연출력의 요체인 양 논해지던 시절은 적어도 이 사극의 현장에선 시대착오적이다. “<정사> 촬영 때는 더 심해서 실어증에 가까울 정도였어요.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초조해서 그랬죠. 이거 지금 잘 가는 건가 모르겠어서. 촬영이 70% 정도 진행됐을 때, <접속>의 장윤현 감독이 놀러왔어요. ‘이제 감 다 잡았죠? 난 30%쯤 진도 나가니까 뭐가 뭔지 정리가 되던데’라는 말에 속으로 어찌나 놀랐던지.” 그러나 뭐가 뭔지 모르게 찍었다는 장편 데뷔작 <정사>는 정밀한 호흡조절과 잘 짜인 미장센이 미덕으로 꼽혔던 영화다. 비록 단편영화계의 전설인 <호모비디오쿠스> 시절과는 판이한 스타일과 소재를 선보였지만. <정사> <순애보> 그리고 <스캔들…>로 이어지는 장편영화들은 이재용 감독의 취향과 스타일이라는 측면에서 모종의 일관성이 있다. <정사>에는 그때까지의 불륜영화와 선을 긋는 한 장면이 툭 튀어나온다. 기혼인 서현(이미숙)은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제사를 지내는 동안 집을 빠져나가 동생의 약혼자 우인(이정재)과 숨가쁜 정사를 벌인다. <스캔들…>의 첫 장면도 그렇다. 조씨부인(이미숙)의 사당에서 엄숙한 제사가 치러지는 동안 별채에선 조원이 기생과 질펀하게 놀아난다. 콘티북을 슬쩍 엿봤더니, <정사> 때보다 훨씬 도발적으로 느껴질 만큼 교차편집시키고 있다. 또 조씨부인과 조원은 하필 사촌지간이다. 그들은 정절녀 숙부인과 조씨부인의 남편이 들일 소실 소옥을 놓고 게임을 벌인다. 조원이 두 여인네를 농락하는 데 성공하면 조씨부인의 몸을 그 상으로 받는다. 그들 사이가 예전부터 야릇한 관계이긴 했다. 그렇다고 <스캔들…>이 대단히 전복적인 작품은 아닐 것이다. 외국의 클래식한 영화들처럼 이야기로나 미술적으로나 현대물보다 더 세련되고 멋있는 시대극을 해보고 싶다는 게 출발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또 뭘까 하고 궁금해지는 건 이재용 감독의 장기가 치밀하게 계산한 위반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상업영화의 장르 안에 머물면서도 이제까지의 관습에 살짝 어깃장 놓는 걸 즐긴다. <순애보>가 특히 그랬다. 일견 밋밋하고 자잘한 일상 묘사 위주의 멜로영화인 것처럼 ‘평가절하’당했으나 뜯어볼수록 ‘변태적’이다. 변태적이라서 뭐 어쨌다는 게 아니라 그게 너무 일상성 안에 스며 있어 흥행코드로 작용하기 힘들 만큼 배치해놓는 솜씨가 놀랍다. 짝사랑하는 여인의 주민등록증 사진을 놓고 동사무소에서 자위하는 우인(이정재)이나 자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포르노사이트에서 옷을 벗는 아야(그것도 피천득 수필의 애틋한 주인공 아사코란 이름으로) 등 곳곳에서 증거를 발굴할 수 있다. “전형적인 상업영화와 고독한 작가주의 사이의 어디쯤”이라고 스스로 자리매김하는 이재용 감독은 무관심할 수도 무시할 수도 없는 행보를 걷고 있다. 그런데 이 역시 그의 연출이라면? <스캔들…>은 <정사> 끝낼 무렵 떠올린 작품이었으나 그때만해도 <쉬리>가 나오기 전이어서 큰 예산이 들어갈 영화는 엄두도 내기 힘들었다. 속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부터 하고 <스캔들…>은 세 번째로 해야지 하고 맘먹었다고 하니 이제껏 모든 걸 그의 계산대로 진행해온 셈이다. 의아스럽게도 오랜 시간 뜸들인 작품을 창작도 아니고 200년도 더 묵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 <위험한 관계>에서 끌어왔다. 게다가 스티븐 프리어즈(<위험한 관계>, 1988)나 밀로스 포먼(<발몽>, 1989) 등 쟁쟁한 감독들이 같은 원작을 두고 달려들었던 작품이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감독 · 평론가 8명이 추천하는 단편감독 8인 [7]

추천자 : 김봉석 영화평론가 그는 공포를 안다 <링반데룽>의 박종영 감독 암흑 속에서 세찬 바람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머리 위의 푸른 등불. 도연이 깨어나자 친구들이 반긴다. 벼랑에서 굴렀다가 이틀 만에 깨어난 것이라고 두 친구가 말해준다. 절대 흩어지지 말자고 손목에 끈을 묶어두어, 모두 함께 굴렀다는 것이다. 날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친구들의 말. 다정한 친구들은 발가락 탈골을 맞춰주고, 무릎의 고름을 빨아낸다. 고통을 느끼며 다시 잠든 도연. 그런데 모든 것이 반복된다. 깨어난 도연에게 친구들은 똑같은 말을 한다. 너 이틀이나 혼수상태였어, 헤어지지 말자고 손목에 끈도 묶고, 밤등산은 위험하다고 했지 않니. 어리둥절해 하고, 화도 내는 도연의 말을 무시하고 친구들은 여전히 지난번과 같은 말을 한다. 화가 난 도연은, 눈감고 누워보라는 친구의 얼굴을 본 순간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 발가락을 맞추고, 고름을 빨아대는 친구들을 피해 도망치려는 도연. ‘링반데룽’은 안개, 폭우, 폭설, 피로 등으로 산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같은 지역을 맴도는 현상을 말하는 등산 용어다. <링반데룽>은 똑같은 상황을 두번 반복한다. 도연의 대사만 달라지고, 두 친구의 대사는 똑같다. 하지만 두 친구가 하는 대사의 어감은 미묘하게 달라진다. 어떤 시점에 등장하고, 어떤 투로 말하는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그 반복을 보면서도 그리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기교로, ‘처녀 귀신’의 얼굴을 발간 조명과 함께 잡아내면 조금 섬뜩해지는 정도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거기서 끝났다면, <링반데룽>은 그냥 <전설의 고향> 수준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감독은 대담하게도 첫 반복이 끝난 뒤 크레딧을 올린다. 도연과 두 친구의 이름이 검은 화면 위에 하얗게 떠오른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친구들이 여전히 똑같은 말을 반복해도, 도연은 아무 말이 없다. 네가 발을 헛디뎠잖아,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니, 함께 굴렀다는 것 아니냐, 미안해. 이제 도연은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정말 미안해.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니. 그러나 모든 것은 똑같이, 변함없이 반복된다. 친구들이 귀신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공포는 가중된다. 깨어날 때마다, 도연은 똑같은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것이다. 박종영 감독은 <링반데룽>의 연출 의도를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똑같은 옷만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며,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대화만 나누며 산다면 어떨까? 그렇게 날마다 반복생활을 한다면 권태를 넘어 공포감마저 들것이다. 링반데룽에 걸린 주인공은 일상에서 일탈을 꿈꾸는, 바로 우리 자신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사실 <링반데룽>이 그 연출 의도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그건 내 관심이 아니다. <링반데룽>을 보았을 때 내가 느낀 공포는, 권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옥에 갇힌 인간의 절망이었다. 친구들은 이미 다른 존재가 되었고, 어쩌면 나 자신도 이미 다른 존재가 되어서 그저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의도가 아닌 자신의 실수 때문에, 그들은 함께 결코 헤어날 수 없는 링반데룽에 갇힌 것이다. <링반데룽>은 단 하나의 공간인 좁은 텐트 속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상황조차 반복된다. 하지만 박종영 감독은 세련된 연출로, 한계를 장점으로 바꾸어낸다. 세번이 반복되지만, 상황을 잡아내는 구도와 앵글은 조금씩 바뀐다. 대사도 그렇다. 친구의 ‘나도 그러고 싶어’라는 대사는 첫 번째와 두 번째는 별 울림이 없지만, 세 번째에서 도연의 ‘차라리 죽여줘’란 탄식에 이어질 때는 전혀 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링반데룽>은 모든 것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앞뒤가 꽉 짜맞춰진 공포영화다. 나는 박종영 감독의 장편영화를 보고 싶다. 주제가 현대인의 권태이건 불안이건 상관없다. 공포영화이기만 하면 된다. <링반데룽>은 공포가 어떤 지점에서 발생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괜히 폼을 잡으면서 분위기에 갇혀버리거나, 지나치게 장르를 의식하여 틀에 갇히거나, 공연히 상황을 꼬면서 거들먹거리지도 않는다. 정공법으로, 가장 빠른 길로 공포를 만들어낸다. 단편 안에, 단편이 담을 수 있는 공포를 딱 그만큼만 담았다. 그렇게 딱 들어맞는 공포를, 장편의 틀 속에서 만나고 싶다. 그렇다면 <링반데룽>의 앞뒤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일어나’와 마지막의 ‘계속’이라는 자막도 충실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2003 부산아시아 단편영화제

초여름 부산을 달굴 2003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가 5월15일부터 20일까지 경성대 콘서트홀 등과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열린다. 한국영화인협회 부산 지회와 부산영상위원회가 공동주최하는 이번 행사에는 15개국 136편의 단편영화가 상영될 예정이다. 접수된 473편 중 엄선된 작품들은 한국단편경쟁 부문 46편, 아시아 극·실험영화 부문 38편, 애니메이션 부문 28편(국내 21편, 해외 7편), 다큐멘터리 부문 9편(국내 3편, 해외 6편)이며, 특별전에서 15편이 선보일 예정이다. 올해 행사의 가장 큰 특징은 실험영화에 대한 강조다. 실험적 작품들은 한국 단편 등 여러 부문에 고르게 분포돼 있을 뿐 아니라 특별전을 통해서도 집중적으로 소개된다. 특히 올해 3월9일 사망한 미국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거장 스탠 브래키지의 작품 5편이 소개되는 프로그램인 ‘스탠 브래키지: 빛으로 쓴 시’와 60년대부터 90년대를 아우르는 10편의 실험영화 모음전 ‘프레임의 정신’은 관심을 끈다. 또 하나의 초점은 타이, 이란, 이스라엘 등 아시아 3개국의 작품들이 진기한 빛을 발한다는 것. 특히 개막작 3편을 모두 타이 감독들의 영화로 선정한 데서 알 수 있듯, 이번 행사는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 맹주로 떠오르는 타이의 젊은 영화인들의 약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한편 최우수 작품에 상금 500만원 등이 주어지는 이번 행사에서 심사위원은 오기민 마술피리 대표, 김인식 감독, 홍효숙 부산영화제 와이드앵글 프로그래머, 일본 히로시 오쿠하라 감독 등이 맡을 예정이다(문의: 051-744-1978, http://www.basff.org). 개막작 5월15일 오후 7시 경성대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개막식 직후 상영될 2003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의 개막작은 젊은 타이 감독들의 작품들이다.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했다는 아딧야 아사랏 감독의 <기다림>은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한 여인을 찾아나선 중년 남성 쿤의 쓸쓸한 여행길을 좇아가는 일종의 로드무비다. 올해 방콕영화제, 싱가포르 단편영화제 등에서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전작 <모터사이클>은 2001년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된 적도 있다. 타베봉 프라툼웡 감독의 <키작은 아빠>는 키가 작은 아버지와 그보다 성장해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라타폴 자나라루안통 감독의 <오토바이쇼와 풍선>은 유원지에서 상연하는 오토바이쇼를 보고 싶어하는 풍선 파는 소년의 이야기다.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이들 영화는 타이영화의 미래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한국단편경쟁 부문 지원작 265편 중 선정된 46편은 최근 수년 사이에 단편영화의 기술과 미학의 수준이 큰 성장을 보이고 있음을 입증한다. 특히 실험영화의 강세는 김동우 감독의 <나무>, 위준석 감독의 <나쁜 여자의 최후>, 문제용 감독의 등 실험성을 표방한 영화들뿐 아니라 이나 <기억, 발꿈치를 들다> <머리에 꽃을> <빛속의 휴식> <미소의 유일성> <머리가 아프다> 등 극영화들에서도 드러난다. 이들 작품은 호러영화의 문법을 차용해 대상물을 낯설게 보이게 하거나(<기억, 발꿈치를 들다>), 제한된 공간과 반복성을 통해 주제의식을 증폭하기도 하며(<미소의 유일성>), 편집을 통해 의도적으로 내러티브를 파괴(<머리가 아프다>)하기도 한다. 신비로운 소녀와 그녀를 관찰하는 한 남성의 이야기 <시즈쿠>나 관계의 단절과 고통의 전이를 미장센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사이에 두고> 또한 실험성이 두드러진 영화들. 일상에 대한 관심도 여전하다. 대학원생 남성과 직장여성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밀착해서 보여주는 <선재네 집에서 하룻밤>, 시부모님의 제사를 준비하는 며느리의 현실과 머릿속을 그리는 <이효종씨 가족의 저녁식사>, 앵벌이 소녀와 조깅하는 남자의 순간적 만남을 보여주는 <갈치> 등은 이런 영역에 속한다. 불법운전교습소를 배경으로 사장과 여직원의 팍팍하고 미묘한 관계를 매우 섬세하게 묘사하는 이하 감독의 은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또 탈북자가 한국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리는 <여기가 끝이다>, 갑갑한 일상에서 탈출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나타나는 한 여성의 이야기 <쥐구멍은 어디에 있나?>, 비 오는 날의 분위기를 경쾌한 리듬으로 묘사하는 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다. 배우 유지태의 ‘감독 데뷔작’ <자전거 소년> 또한 풋풋한 유년의 감성을 전달한다. 올 부산 아시아단편영화제는 개막작 3편 모두 타이 감독들의 영화로 선정됐다. 아딧야 아사랏 감독의 <기다림>과 타베퐁 프라툼웜 감독의 <키작은 아빠>, 배우 유지태의 감독 데뷔작인 <자전거소년> (맨 왼쪽부터). 아시아 극.실험영화 부문 이스라엘 마이클 페레츠 감독의 <손목시계>는 아버지의 유품인 손목시계를 잃어버린 소년의 이야기로 올해 베를린영화제에 출품되기도 했다. 이란 샤람 알리디 감독의 <끝까지 셀 수 없는 마을>은 쿠르드의 어느 산속 마을의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길을 나선 국세청 직원의 험난한 여정을 담았다. 일본 마사카주 사이토 감독의 실험영화 <햇살 한 조각>은 편집기법을 통해 일상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려는 작품. 타이 송요스 수그마카난 감독의 <나의 코끼리>는 재미난 상상력을 가진 한 소년의 깜찍한 이야기. 다큐멘터리 부문 박효진 감독의 는 아이디어가 참신한 개인적 다큐멘터리. 감독은 오래 전부터 짝사랑한 남성 ‘그’에게 인터뷰를 청하고, 그동안 묵혀뒀던 이야기를 나눈다. 카메라의 ‘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라 할 만하다. 이정민 감독의 는 황신혜밴드 멤버였던 조윤석의 지방의원 출마기를 담았다. 최진성 감독의 <그들만의 월드컵 Ver.2.0>은 지난해 각광받았던 ‘버전 1.0’을 재편집한 작품이다. 월드컵에서 소외됐던 ‘대한민국’ 사람들을 보여준다. 애니메이션 부문 이성강 감독의 <오늘이>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작품. 계절의 향기와 바람이 시작되는 곳 원천강에 살던 야라는 소녀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그린다. 이효정 감독이 만든 는 사진을 찍는 이와 그 대상간의 관계를 고찰하는 작품이며, 임아론 감독의 은 북극에서 살던 백곰이 소풍을 가서 겪는 일을 그리는 3D 디지털애니메이션이다. 머리에 휴대폰을 달고 태어난 소년의 슬픈 이야기인 싱가포르 라이 제이슨 감독의 <가까이하기엔…>도 관심을 끈다. 특별프로그램 ‘스탠 브래키지: 빛으로 쓴 시’에서는 새로운 시각체험을 제안하는 스탠 브래키지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대표작인 <독 스타 맨>은 필름 위에 색을 입히거나 렌즈를 왜곡해 만들어낸 이미지 등을 신비롭게 보여주며, <생명의 빛>은 카메라 없이 필름에 나방의 날개 등 다양한 물체를 콜라주한 영상이다. ‘프레임의 정신’은 실험영화계에서 유명한 피터 휴튼, 마틴 아놀드, 루이스 레코더 등의 작품을 소개한다.

클수록 짧게

블록버스터는 ‘짧고 굵게’. 대규모로 개봉해서 단시간에 돈을 긁어모으는 블록버스터영화들은 요즘 이런 전략을 제목에도 적용하고 있다. 5월2일 전세계 개봉한 <엑스맨2>(사진)가 대표적이다. 영화사이트 IMDb에 올라 있는 이 영화의 공식 제목은 . <엑스맨2>는 라는 제목 아래 촬영을 진행하다가 개봉 몇주 전 라는 새로운 제목을 공개했지만, 스크린 위에 복잡한 부제는 떠오르지 않는다. 감독 브라이언 싱어는 “이런 제목을 사용하면 속편이라도 그 자체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관객은 반드시 1편을 보아야만 할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만족을 표했다. 짧고 인상적인 제목은 만이 아니다. <인디펜던스 데이>의 , <미션 임파셔블2>의 라는 성공적인 전례가 있고, <터미네이터3>는 , <젠틀맨 리그>는 라는 제목으로 홍보를 진행 중이다. 박스오피스 전문가 로버트 벅스봄은 “인터넷에선 누구도 완전한 제목을 말하지 않는다. 약자로 대화하는 것은 네티즌들이 선호하는 쿨한 방식”이라는 말로 유행을 설명했다. 처음 이런 제목을 내세운 영화는 12년 전 <터미네이터2>. 라는 제목으로 전세계를 휩쓸었던 이 영화의 프로듀서 마리오 카사르는 “우리는 중요한 무언가를 시작했던 것이다. 내 영화사 이름도 C-2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도 2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런 흐름은 대부분 블록버스터에 해당하지만,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로 부르거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로 부르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짧은 제목은 누구나 좋아하나보다.

90년대식 사랑법 보여주는 <내인생의 콩깍지>

운명의 연인이 따로 있나요? <내인생의 콩깍지> MBC 매주 월·화 밤 9시55분1992년에 우연히 만난 남녀가 이후 10년 동안 펼치는 연애담. MBC 월화드라마 <내인생의 콩깍지>를 이처럼 간단히 설명하면,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진부해진다. 그들은 사소한 오해와 성격차이로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엔 상대가 자신의 ‘콩깍지’라는 사실을 깨닫고 결혼에 골인할 게 뻔하니까. 자신에게 걸맞은 남자가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집안 좋고 직업 좋은 남자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 은영(소유진)과 만나는 여자들 모두에게 껄떡대며 수작을 거는 모양새가 마초 바람둥이의 전형인 경수(박광현)는 각자 몇 차례의 이별과 인생의 쓴맛단맛을 경험한 뒤 최근에야 서로의 ‘가치’를 깨달았다. 호감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단계에서 번번이 사건이 터지는 것도 예상했던 대로다. 그럼에도 <내인생의 콩깍지>는 그렇게 간단한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아내>와 <야인시대>에 밀려 낮은 시청률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정도로 구석구석 새로운 시도가 돋보인다. 우선 199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사랑법을 ‘쿨하게’ 묘사했다는 점. 경수가 은영의 연락처를 적은 만원짜리 지폐를 찾으러 백화점에 갔다가 되레 백화점 직원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나 낙도로 성민을 찾아간 은영이 돌아오는 길에 성민의 또 다른 애인과 마주친 뒤에도 절망하지 않고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은 ‘운명적인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 신세대 사랑법의 전형이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랑을 고백하는 데 망설임이 없고 일단 시작하면 열정적으로 빠져들지만, 헤어지고 난 뒤에 ‘너 없으면 세상도 없다’ 식의 신파를 읊지는 않는다. 이별은 고통스럽지만 과거에 연연하는 건 바보같은 일일 뿐. 일상의 흔들림 없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서는 경수와 은영의 산뜻함은 삼각관계와 눈물, 죽음에 이르는 사랑으로 점철된 최근 트렌드드라마들을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뮤지컬을 끌어들인다. 뮤지컬은 방송 드라마보다 훨씬 많은 실험이 펼쳐지는 영화에서도 거의 시도되지 않는 ‘위험한’ 장르다. 매회 3분 정도로 비중이 작고 생뚱한 구석도 있지만, 뮤지컬 장면은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그저그런 연애담’을 즐겁고 유쾌한 쇼로 바꿔놓는다. 은영은 경수가 어떤 남자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무매너 무교양”이라며 그와의 연애는 당치도 않다는 태도를 보이지만, 잠시 뒤 펼쳐진 뮤지컬에서는 그에게 조금쯤 호감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은영이는 문제가 많다”며 내키지 않는 태도를 보이던 경수도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은영이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뮤지컬영화 <그리스>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대목은 <내인생의 콩깍지>에서 뮤지컬의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들이 선택의 기로에 놓이거나 갈등에 직면했을 때 그 사람의 ‘속내’를 살짝 엿볼 수 있게 하는 것. 회가 거듭될수록 뮤지컬의 비중이 조금씩 줄어드는 게 그래서 아쉽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건 10년에 걸친 남녀의 연애담에 시대상황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경수와 은영이 처음 만난 것은 92년 총선 때였고, 은영이 첫사랑에 빠진 것은 94년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이며 취업을 못해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경수가 은영과 재회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이었다. 인터넷 사이트에서 <내인생의 콩깍지> 대본을 보면, 91년엔 강경대가 죽었고, 92년에 총선이 있었으며 94년엔 전·노 태통령이 재판을 받았다는 등 극의 흐름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없는 사실들이 죽 나열돼 있다. 단순히 1990년대를 ‘제대로’ 재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보기엔 성의가 넘친다는 느낌이다. 물론 은영과 경수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았던’ <모래시계>의 주인공들과는 거리가 멀다. “정치의식도 없으면서 왜 선거운동을 하느냐”고 묻는 후배에게 경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한다. “돈 주니까 하지, 괜히 하냐?” 제작팀은 자신들이 90년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왜 이처럼 정치·사회적으로 무관심한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일까? 90년대에는 젊은이들의 인생을 짓누를 만한 ‘역사적 사명’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90년대에 20대를 보낸 젊은이들이 대체로 이러하다고 믿는 것일까. 로맨틱코미디를 보면서 이렇게까지 ‘오버’하는 건, 역시 주인공들과 꼭 같은 세대, 90년대에 20대를 보낸 까닭이겠지.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

김창완 아저씨가 인생 모델입니다,<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박소현

“약 없으면 못 살아요.” 비타민부터 붕어즙까지 몸에 좋다는 건 가리지 않고 먹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못 버틴다는 박소현(32)의 스케줄은 그야말로 살인적이다. TV와 라디오를 넘나들며 고정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만 3개(한때 5개인 적도 있었다)인데다 요즘은 곧 방영될 드라마 촬영 준비까지 해야 하니 ‘숨’ 고르기조차 쉽지 않을 정도란다. 얼마 전, 데뷔 10년 만에 첫 출연한 영화 <화성으로 간 사나이>의 시사회가 열렸지만 참석하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믹싱할 때 모니터로만 봤는데, 극장 가서 스크린으로 다시 봐야죠.” 여의도의 “스튜디오와 스튜디오”를 오가느라 바빴던 그를 강원도 산골로 ‘호출’한 건 극중 승재(신하균)를 짝사랑하는 선미라는 캐릭터. 우편배달부인 승재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기 위해 각종 잡지를 구독하고, 자전거를 끌고 나타나는 승재의 손에 드링크제를 안기는 조금은 “푼수기가 흐르는” 인물이다. “영화하겠다고 맘먹고 덤빈 건 아니고. 시나리오를 받아서 쭉 읽는데 선미가 휴식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방송 일이라는 게 매번 새로운 사람, 사건만을 쫓다보니 저도 여유없이 살게 됐고. 그래선지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는 시골 약사 선미가 돼보고 싶었어요.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들은 대부분 도회적인 이미지였으니까 더 그랬던 것 같고.” 촬영횟수가 많진 않았지만, 그는 현장이 불어넣어준 청량감을 잊지 못한다. 첫 촬영 때, 폭설을 뚫고 당도한 촬영현장에서 “가슴이 확 트이는 기쁨을 맛본” 기억은 쉽사리 잊지 못할 것 같다는 그는 “추위 때문에 피부가 조금 뜨는 걸로도 주위 사람들이 자기 일인 양 걱정해줘서” 황공했다고. “드라마는 때론 오버액션을 해야 할 때가 많아요. 영화에선 시선만으로도 되는 걸 드라마에선 턱까지 움직여야 하기도 하고. 영화가 좀더 디테일하고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이목구비 뚜렷한 얼굴도 아니니, 스크린이 훨씬 유리해요.” (웃음) 사실, 그는 4년 전 한 영화에 출연키로 했다가 제작이 무산되는 바람에 출연이 무산되는 해프닝도 겪었다. “출연료가 얼마였는지는 정확히 기억 안 나는데, 돌려달라고 안 하던데요.” 대학 시절, 박소현의 꿈이 발레리나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 무릎을 다쳐 9살 때부터 시작했던 발레를 중단해야 했던 그는 한 방송사의 리포터 일을 시작한 뒤로도 한동안 무대로 돌아갈 생각뿐이었다. “7개 병원을 돌아다니다 2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발레를 다시 하기 힘들겠다는 진단을 받아들였다”는 그는 그때 이후로 성격이 ‘낙천적’이 됐다. “발레할 때는 쇄골과 척추가 드러날 정도로 삐쩍 말랐었어요. 몸무게가 38kg이었다니까요. 거기다 말수도 없었고. 처음 MC 맡았을 때 친구들이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지금은 10kg이 더 쪘고, 정신도 많이 풍요로워졌죠.” 적응하는 데 걸린 10년에 비해 앞으로 10년은 “좋은 일이 더 많이 일어날 것 같다”는 그의 모델은 ‘김창완 아저씨’. 그처럼 생활도, 연기도 모두 즐길 수 있는 이가 됐으면 좋겠단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정진환

[인터뷰] <영어완전정복>의 김성수 감독

<비트>, <태양은 없다>의 김성수 감독이 <무사> 이후 2년만에 복귀한다. 김 감독이 지난달 차기작으로 촬영 중인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영어 완전정복>. 잘게 쪼개진 쇼트와 저ㆍ고속촬영, 스텝프린팅, 극단적인 앵글 등 감각적인 비주얼로 많은 팬들을 확보하고 있는 그의 새영화로는 다소 의외다. 14일 오후 서울 강남구 논현동 호텔 아미가에서 열린 영화의 제작발표회에서 김감독을 만났다. 그는 코미디 영화를 차기작으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그동안 본의 아니게 남성영화나 액션영화를 만들게 됐을 뿐 사실 코미디 영화를 좋아한다"며 "나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이제야 적성에 맞는 장르를 찾아간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완전정복>은 부족한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려는 두 남녀가 영어학원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의 영화로 김성수 감독이 <무사>의 프로듀서 출신 조민환씨와 함께 설립한 나비픽쳐스의 창립작이다. 그는 영어 콤플렉스를 소재로 한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관객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영어 공부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못나고 가진 것 없는 두 남녀의 러브스토리를 그려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나영을 여주인공 영주역으로 선택한 이유는 "영주가 바로 이나영"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 단순하고 덜렁거리면서도 엉뚱한 영주가 실제 이나영의 성격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설명이다. 한편 구두매장에서 일하는 바람둥이 문수역으로 출연하는 장혁에 대해서는 "밉지 않은 바람둥이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서 캐스팅을 결정했으며 현재까지 시나리오 상의 캐릭터를 그대로 재현해내고 있어서 대만족"이라고 말했다. 비주얼 스타일리스트 김성수 감독이 만들어내는 로맨틱 코미디는 어떤 색깔일까? 김 감독은 "현재까지의 김성수는 기능적 감독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며 "전작들과의 연관성을 배제해달라"고 당부했다. "성격이 급해 커트 수가 많을 뿐이지 아직 내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전달하려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찾으려고 애쓸 뿐입니다." 그는 "오히려 캐릭터나 관객들의 웃음에 방해되는 것을 경계해 화면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영화 속의 CG, 플래시, 말 풍선을 이용한 자막 등은 기존 코미디와 차별화되는 새로운 스타일로 사용할 계획이다. 감독이 자신의 첫 코미디 영화에서 스타일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캐릭터. 사실, 애매한 캐릭터는 그의 전작들에 쏟아진 수많은 찬사에도 불구하고 지적되던 약점이다. "재미있는 코미디 영화는 캐릭터가 상황을 유발해내는 즐거움을 주는 영화입니다. 관객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오려면 우선 캐릭터에 동화돼야 하죠. 코미디 영화는 주인공들이 관객들과 나누는 대화거든요." (서울=연합뉴스)

[인터뷰] <영어완전정복>의 이나영, 장혁

이나영과 장혁이 영화 <영어완전정복>에서 호흡을 맞춘다. 두 사람은 2년 전 콘서트장을 배경으로 하는 모 핸드폰 CF에서 연인으로 출연한 바 있다. 이나영과 장혁을 영화의 제작발표회가 열린 서울 강남의 호텔 아미가에서 14일 만났다. 부족한 영어실력을 향상시키려는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인 <영어완전정복>에서 두 사람이 맡은 역은 동사무소 여직원 영주와 백화점 구두매장 직원 문수. 영주는 민원처리를 요구하며 찾아온 외국인에 곤란을 겪으면서, 문수는 해외로 입양간 동생과의 만남을 위해 '영어 완전정복'에 나선다. 촬영현장에서 '영주'로 불리고 있을 만큼 캐릭터와의 유사성을 인정받고 있다는 이나영은 "별나고 평범하고 못생긴 데다 세상을 오직 자기의 눈으로 바라보는 탓에 엉뚱한 행동만 한다"고 영주를 설명했다. 영주는 TV드라마 「네멋대로 해라」나 최근작 <후아유>에서 그녀가 맡았던 역할과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지만 '네 멋대로'의 정도가 좀 더 심해진 느낌의 캐릭터다. 그녀는 코미디 연기에 대해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전 코미디 영화의 여주인공과는 다른 모습의 연기를 보여주겠다"며 "진지하게 행동하지만 상황을 '확 깨는'데서 웃음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바람둥이'로의 '변신'을 위해 최근 한 달 간 탭댄스 연습에 열중하고 있는 장혁은 "원래 성격과 너무나도 다른 바람둥이역을 맡아 애먹고 있다"며 너스레를 떨며 말문을 열었다. "문수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는 바람둥이에요. 가족들과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며 밝게 살아가려고 노력하죠." 그는 "강함과 약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문수역에 푹 빠져있다"며 "바람둥이임을 보여주는 다양한 방법들을 주변의 모습에서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정글쥬스>나 드라마 「명랑소녀 성공기 등에 이어 다시 망가지는 배역을 맡았다는 말에 대해서는 "망가지기보다는 멋있는 역이라는 생각에서 출연을 결정했다"며 "망가지는 여부보다는 관객들을 웃기기도 울리기도 할 수 있는 매력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영어 콤플렉스를 다룬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두 사람의 영어실력은? 김성수 감독의 평가대로 하면 이나영의 판정승이다. "영주나 문수나 영어는 완전 초보거든요. 영어 수업 장면을 촬영한 후 감독님이 그러시더군요. (이)나영씨는 영어실력을 좀 '다운'시키고 저는 그냥 하던 대로 하라고."(장혁) 반면, 이나영은 영어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스태프들의 영어 발음을 녹음해 반복해 듣는 것으로 영어 실력을 깎아내리는 연습하고 있다. '솔직히 (영어를) 잘은 못한다"고 겸손해하는 그녀는 "초보자처럼 끊어읽는 연습에 열중하고 있다"고. 두 사람 외에도 <영어완전정복>에는 호주 출신 연기자 안젤라 켈리가 영주와 문수의 영어 정복을 도우며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영어강사 캐서린으로 출연한다. 지난 달 16일 크랭크인해 현재 20% 가량 촬영이 진행 중인 <영어완전정복>은 7월말까지 촬영한 뒤 10월 중 개봉될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