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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김소희의 오마이이슈] 이번엔 전투기, 먹튀도 중독인가봐

한 가족의 외식 풍경. 엄마, 아빠, 초등 저학년으로 보이는 형제가 저마다 스마트폰과 게임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직장인들의 점심식사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술집에서도 연출되는 장면이다. (파업 농성 중인 MBC 구성원들이 팻말 들고 앉아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진도 봤다.) 애들 쌈박질, 부부 승강이, 침튀기는 상사 뒷담화… 이거 다 어디 갔어 이거. 게으름 끝에 본의 아니게 저항자가된, 2G폰을 쓰는 나로서는 그리하여 가끔 놀이터에서 엄마들 틈에서도 멀뚱해진다. 다들 뭘 그리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냐면…, 다 알잖아. 기저귀 찬 아이들조차 중독될 정도로 IT기기가 관계와 소통을 과잉 지배하는 상태로 10년, 20년이 가면 어떡하지. 정말 이러다가 스마트(smart)가 아니라 스매시(smash: 산산이 부수다) 되는 거 아니야? 큰맘 먹고 큰돈 들여 떠난 해외 휴양지에서도 스마트폰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밖에 없다며. 에휴. 걱정이 많아진 걸 보니 한살 더 먹긴 먹었나보다. 텔레비전 시청시간과 공격성이 비례하고 지나친 게임기 노출은 튀어오르는 자극에만 반응하는 ‘팝콘 브레인’을 낳는다는 무시무시한 연구 결과도 있지만, 그래도 인간은 자기를 보호하는 쪽으로 본능적으로 진화한다고 믿는다. 자극도 지나치면 피로해지고 욕심도 넘치면 배 터진다는걸 모르나. 끝까지 ‘먹튀’하려는 그들의 ‘본능’은 뭘까. 구매에 8조원 넘는 비용이 드는 차세대 전투기 기종을 공개 입찰도 하기 전에 미국제로 하겠다고 각하가 오바마에게 구두로 약속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지난해 방미길 선물이었단다. 송영선 언니가 한 말이라 믿지 않을 사람도 많겠지만, 올해 10월까지 무려 14조원어치의 무기를 들여오려고 용을 쓰는 와중이니 완전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비용 부담은 다음 정권으로 넘어간다. 두고두고 운영비도 골칫덩이다. 왜 필요한지는 며느리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렇게 줄줄 미국에 상납하는 꼴은 놔두면서 무슨 수로 병사월급을 40만원대로 올리나. 진짜 닭장(새우리) 맞나봐. 한나라당의 새 당명 새누리당을 두고 새비리당 새부리당 비틀기 놀이가 한창이다. 이런 재미있는 놀이의 확산은 IT기기의 순기능이겠다. 중독시대, 거르지 않으면 진짜 새된다.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은 인정하는 지혜와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가 필요한 곳은 예배당이나 투표소만은 아니겠지.

<나를 사랑한 스파이>여 다시 한번

영화로 각색할 만한 스파이 소설의 걸작들을 고르는 건 영화로 각색할 만한 정통 추리소설을 고르는 것보다 백배 어렵다. 왜? 이들은 퍼즐 미스터리와 달리 훨씬 영화화하기 쉬우며 이미 대부분 각색되었기 때문이다. 의심나면 한번 보라. 조셉 콘래드의 <비밀 첩보원>, 존 버캔의 <39계단>, 서머싯 몸의 <어센든>, 에릭 앰블러의 <디미트리우스의 관>,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와 조지 스마일리 시리즈,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렌 데이튼의 해리 파머 시리즈(스파이의 이름은 영화화된 뒤에야 붙은 것이긴 하지만), 프레드릭 포사이드의 <자칼의 날>, 잭 히긴스의 <독수리 착륙하다>, 로버트 러들럼의 본 시리즈, 켄 폴리트의 <바늘 구멍>…. 이들은 스파이 소설의 대표작 리스트지만 첩보영화/드라마의 대표작 리스트에서도 많이 떨어져 있지 않다. 실화로 소재를 돌린다면?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발키레의 히틀러 암살 미수, 에이스 스파이 라일리, 하이드리히 암살, 케임브리지의 5인, 로버트 핸슨 사건…. 이들은 모두 직접 있각색되었거나 다른 소설들의 소재가 되어 영화화되거나 드라마화되었다. 영화판 사람들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만만치가 않다. 그들을 얕보지 말라. 당신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라면 그들은 몇 십년 전부터 알고 있다. 이언 플레밍, 조셉 콘래드… 이들을 다시 보라 그래도 몇편 골라보라면? 우선 난 이언 플레밍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영화화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언 플레밍이 쓴 소설들이 모두 충실하게 영화화된 건 아니며, 일부는 그냥 제목만 빌렸다. 다시 말해 아직 여유가 있다. 이들 중 각색자들의 입장에서 가장 그럴싸해 보이는 건 <나를 사랑한 스파이>. 소설과 영화가 전혀 다르고, 원작은 일반적인 본드 시리즈의 형식에서 과감하게 떨어 져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인 여자주인공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도입부만 읽으면 이게 본드랑 무슨 상관이냐고 따지고 싶을 지경이다. 실제로 본드는 소설이 한참 진행된 뒤에야 겨우 등장한다. 물론 이 영화를 일반적인 본드 영화의 규격에 맞추어 영화화하기는 어렵다. 아마 홍보도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가능성은 있는 이야기다. 게다가 원작이 제목과 더 잘 어울린다. 조셉 콘래드의 <서구인의 눈으로>는 어떤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싫어했던 폴란드 작가가 쓴 가장 도스토예프스키적인 소설이다. 글쎄, 난 이 러시아 혁명주의자들 사이에 엉겁결에 낀 프락치 청년의 이야기를 관객이 그렇게 좋아할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주제가 드러나고 드라마가 완성되는 거의 자폭에 가까운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대부분의 독자는 손발이 저리는 증상을 느낀다. 하지만 그거야 <로드 짐>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스파이들이란 대부분 제임스 본드 같은 영웅이 아니라 <서구인의 눈으로>의 라주모프 같은 인간들이다. <서구인의 눈으로>는 스파이 장르물에서 훌륭한 교정효과를 낼 수 있다. 내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건 영어와 러시아어가 겹치고 혼용되는 모양새인데, 아, 할리우드라면 여기에 전혀 관심이 없을 거다. 에릭 앰블러의 첫 소설 <어두운 국경>은 어떨까. 그렇게 인기있는 책은 아니며, 앰블러의 대표작도 아니다. 소설 자체가 당시 유행했던 싸구려 서스펜스물의 패러디니, 아마 요새 독자들은 시치미 뚝 뗀 유머와 진지한 액션을 구별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이 30년대 소설은 더 그럴싸한 영화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이 작품의 가장 매력적인 면은 핵폭탄을 다룬 최초의 소설 중 하나라는 것. 핵폭탄이 나오는 <풍운의 젠다성>인 것이다! 원작의 과학 묘사는 엉망이지만 이에 대해 보다 상세한 지식을 가진 우리는 이를 개선해서 더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결말은 소설보다 더 애잔하다. 주인공이 핵폭탄의 비밀을 파괴하고 간신히 돌아왔을 때, 라디오에서 오토 한과 프리츠 스트라우스만이 최초의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나오는 엔딩을 생각해보라. 원작에는 없지만 그렇게 만들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엘리자베스 보언의 <한낮의 열기>가 각색된 적 있는지 검색해봤다. 해럴드 핀터가 각색한 TV드라마가 하나 있긴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무대로 두 스파이 사이에 놓인 여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로맨스에 관심있는 사람이 이렇게 적은 건 이상한 일이다. 보언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로널드 커크브라이드의 소설 <짧은 밤>을 각색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라 믿는다. 우선 이중첩자 조지 블레이크의 탈출을 모티브 삼은 이 냉전 첩보소설의 이야기가 시대에 조금 뒤떨어졌기 때문이고(읽어본 적은 없지만 시놉시스만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둘째, 이 작품은 앨프리드 히치콕이 죽기 전까지 계속 영화로 만들기 위해 다듬고 있었던 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짧은 밤>을 거치지 않더라도 조지 블레이크의 이야기는 여전히 영화화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그가 비록 ‘적’이라고 해도, 이미 냉전은 끝났고, 영리한 적군의 탈출담을 그린 영화의 전통이 존재하며, 그와 그의 탈출 공범인 숀 버크와의 관계는 진지하게 파볼 만하다. 참, 역시 읽은 적은 없지만 조지 블레이크가 나오는 한국 소설도 있다. 박영숙의 <더블 크로스>. 한국전 때 당시 주한 외교관이었던 조지 블레이크가 한국 첩보원과 한국 여성을 두고 삼각관계를 벌인단다. 불쌍한 블레이크. 책은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영화보다 극적인 실화들 실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제대로 영화화될 가치가 있는 이야기로, 노르웨이의 중수공장을 폭파하고 나치의 핵폭탄 개발을 저지한 노르웨이 특공대와 레지스탕스 이야기가 있다. 안다. 이미 커크 더글러스 주연으로 <텔레마크의 영웅들>이 나왔다. 하지만 영화는 실화의 박진감의 반의반의 반도 갖추지 못했다. 실제로 일어난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데, 그걸 굳이 각색해서 심심한 멜로드라마로 만들 필요가 있나? 그리고 이번엔 제발 노르웨이인 주인공들 역할은 노르웨이 배우들에게 맡기자. 영화화될 법한데 안 나오는 ‘실화들’은 또 있다. 왜 아무도 알린 그리피스의 ‘회고록들’에 관심이 없는 걸까? 미국인 패션모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에 발탁되어 스페인 사교계에서 돈을 펑펑 쓰는 호사스러운 삶을 살며 스파이질을 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백작부인까지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주장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이 정도면 80년대 미국에서 많이 나왔던 통속적인 미니시리즈의 소재로 충분하지 않나? 실제로 일어난 적은 없지만 일어날 뻔했던 작전들도 있다. 이중 황당한 거 하나. 제2차 세계대전 때 OSS에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납치할 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는 걸 아시는지? 하이젠베르크가 노벨상을 탄 위대한 물리학자이고 독일 핵분열 연구팀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니 얼핏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이 계획을 짤 때, 그가 (위대한 이론물리학자답게) 건전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이해 못하는 기계치였고 엄청난 마마보이였다는 사실은 몰랐다. 한번 시치미 뚝 떼고 이 계획이 진짜로 일어났다고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물론 간신히 독일에 침투해 들어간 주인공들에게 하이젠베르크는 이곳에 남아 연구를 사보타주하는 게 자신의 임무라고 주장하며 (까짓 거 믿어주자) 주인공들을 설득한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들은 보다 충성스러운 나치 과학자가 핵폭탄 제조에 필수적인 연구를 했음을 알게 된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을 제대로 아는 첩보원이 필요하다. 주인공들은 당장 OSS에 연락해서 혹시 물리학에 대해 잘 알면서 금고털이 기술이 뛰어난 첩보원을 파견할 수 있는지 묻는다. OSS에서는 닐스 보어에게 이 내용을 전달하고 보어는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딱 한명 있는데요’라고 대답한다. 그날 밤 OSS는 병든 아내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리처드 파인먼을 끌고 와 스위스행 비행기에 태운다…. 그냥 그럴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김지석의 시네마나우] 지아장커, 왕가위, 허우샤오시엔 신작이 모두?

독일 영화학자인 토마스 엘새서에 따르면 과거 세계영화는 ‘할리우드와 유럽 그리고 기타’로 분류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할리우드와 아시아 그리고 기타’로 분류된다. 아시아영화가 세계 무대에서 미학적으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산업적으로는 전세계 영화 제작 편수 중 50% 정도가 아시아에서 제작되고 있고(2007년 2406편, 2010년 2191편), 2010년 기준으로 국가별로도 인도(1위), 중국(3위), 일본(4위), 한국(7위) 등 아시아 대륙 국가들이 영화산업 규모 10위권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검열과 통제(이란, 중국, 싱가포르 등), 영화산업의 전근대화, 천재지변으로 인한 산업의 위축 등 아시아영화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요소들은 여전히 넘쳐난다. 이는 곧 2012년 아시아영화가 극복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거장과 베테랑 감독들의 귀환 일반 관객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거장들이 내놓는 신작이다. 두기봉은 올해 두편의 영화를 내놓는다. 오는 밸런타인데이에 개봉하는 정수문, 고천락, 고원원 주연의 멜로드라마 <고해발지연2> 이후에 제작비 1억위안의 대작 <마약전쟁>을 제작 중이다. 콤비인 위가휘가 시나리오 를 쓰고, 중국 본토의 하이룬영화와 TV그룹이 제작비의 대부분을 투자하고 있다. 고천락, 손홍뢰, 엽선 등이 주연을 맡았고, 영화의 내용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중국, 홍콩, 대만의 거장 3인이 만드는 무협영화는 오래전부터 많은 팬들의 기대를 받아왔지만 진척이 더뎌 아쉬움이 컸다. 두기봉이 제작을 맡은 지아장커의 <재청조>는 드디어 2월에 촬영에 들어간다. 왕가위의 <일대종사>는 여전히 안개 속이다. 상당 부분 촬영이 진행됐지만,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몇 가지 이유로 완성이 지연되고 있다. 왕가위 감독이 설립한 젯톤의 한 관계자는 올 칸영화제 상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켜봐야 할 듯하다. 알려진 대로 <일대종사>는 전설적인 무예인 엽문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인데, 먼저 제작된 견자단의 <엽문> 시리즈가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투자자로부터 흥행에 대한 압박도 받고 있다고 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섭은랑> 역시 촬영일자가 미정이다. 이미 여러 차례 촬영이 연기되었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올봄에는 반드시 촬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당나라 시절의 여검객 섭은랑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에는 서기, 쓰마부키 사토시, 장첸 등이 출연할 예정이다. <재청조>와 <일대종사> <섭은랑>이 올해 안에 모두 완성 된다면 그야말로 기록적인 한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주성치는 세 번째 <서유기>로 다시 돌아온다. 직접 시나리오, 주연, 연출(<타뢰대>의 곽자건 감독과 공동연출)을 맡았으며, 서기도 출연한다. 중국과 홍콩의 개봉예정일은 8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도 신작을 내놓는다. 일본에서 제작 중인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이 그것이다. 그로서는 옴니버스영화 <티켓>과 <사랑을 카피하다>에 이어 세 번째로 해외에서 찍는 작품이다. 우리 나이로 올해 73살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스타일은 변함이 없지만, 20대의 콜걸과 만나 사랑을 나누는 80대 노교수의 이야기는 새롭다. 프랑스의 오랜 파트너인 MK2가 일본과 공동투자와 배급을 맡고 있어, 칸영화제 진출이 유력하다. 바흐만 고바디의 신작 <리노의 계절>도 주목 대상이다. 이슬람 혁명기를 배경으로 한 러브 스토리를 담은 이 작품은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됐다. 현재 준망명 상태인 바흐만 고바디는 터키에서 모든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이다. 최근 작품 활동이 뜸했던 또 한명의 거장인 아볼파즐 잘릴리도 2007년 <하페즈> 이후 신작 <개구리>를 내놓는다. 빚쟁이들의 돈을 대신 찾아주는 해결사 일을 하는 청년의 시선을 통해 이란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현재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이다. 그의 작품이 늘 그랬듯이 이번에도 비전문 배우를 기용하여 만들었다. <천국의 아이들>의 마지드 마지디는 이란영화 사상 최대 규모의 대작 <무함마드>를 찍고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이란은 물론 범이슬람권의 프로젝트로 진행되고 있다. 이란의 연기자들이 크고 작은 역을 맡아 출연하고 있으며, 전세계의 이슬람권 국가에서 투자를 하고 있다.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2011년을 최고의 해로 보냈던 아쉬가르 파라디는 8월에 신작 <벽이 곧 우리>의 촬영에 들어간다. 일정상 올해 안에 완성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는 소노 시온과 구로사와 기요시, 이시이 가쿠류, 오기가미 나오코, 아오야마 신지의 신작이 눈길을 끈다. 2011년을 화려하게 보냈던 소노 시온은 지난 1월13일 <희망의 나라>의 촬영을 시작했다. 전작 <두더지>에 이은 ‘3·11 대지진’에 관한 두 번째 영화다. 대지진 이후 고향 땅을 떠나기를 거부하는 세쌍의 부부와 연인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칸영화제 진출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일본 개봉은 가을로 예정되어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위성TV 채널 <와우와우> 제작으로 TV영화 <속죄>를 이미 완성했고 방송도 탔다. 미나토 가나에(영화 <고백>의 원작 소설가)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딸의 살해현장을 목격한 딸의 친구들을 만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다룬다. 고이즈미 교코, 아오이 유우, 고이케 에이코, 안도 사쿠라 등 호화 캐스팅으로도 주목을 끌었다. 문제는 극장 개봉. 미니시리즈 형식에다가 극장판으로 편집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라 극장 개봉 계획은 아직 없다. 다만, 영화제에서는 상영할 가능성이 남아 있다. 2003년 이후 장편극영화를 발표하지 못했던 이시이 소고는 이름을 이시이 가쿠류로 바꾸고 오랜만의 신작 <살아 있는 사람 있나요?>를 2월18일 개봉한다. 초창기의 펑크 스타일로 다시 돌아간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독특한 감성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 오기가미 나오코는 신작 <고양이 대여>를 이미 완성하였고,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초청을 받았다. 많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독신 여성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고양이를 대여해주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마이 백 페이지>로 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야마시타 노부히로는 <고역열차>를 만든다. 중졸에 전과 기록도 가지고 있는 니시무라 겐타의 2011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동명 소설을 영화화하는 작품으로 모리야마 미라이, 고라 겐고가 주연을 맡았다. 일본에서는 7월14일 개봉예정이다. 다작하는 감독들의 신작 올해 3편의 영화를 동시에 발표하는 감독이 있다. 와카마쓰 고지다. 그는 올해 <해연호텔 블루>와 <11·25 자결의 날> <천년의 유락>를 발표한다. 후나도 요이치의 원작을 영화화한 <해연호텔 블루>는 5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한 남자가 배신한 친구에게 복수하기 위해 쫓다가 한국에서 밀입국한 여자를 만나고, 점점 광기에 사로잡히며 파멸의 길로 빠져드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3월24일 개봉예정이다.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연대기적으로 고찰한 <11?25 자결의 날>은 여름에 개봉할 예정이다. 두편 다 완성되어 시사회까지 마쳤다. 나카가미 겐지의 원작을 영화화한 <천년의 유락>은 일본의 하층민 계급인 부락민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현재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이다. 와카마쓰 고지가 이처럼 한꺼번에 세편의 영화를 만드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의 건강 때문이다. 지난 몇년 사이에 그는 암 진단을 받고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현재는 작품 활동을 할 만큼 회복되었지만, 그로서는 오히려 영화 만들기에 더 몰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이케 다카시도 두편의 영화를 개봉한다. 이번에는 인기 게임과 만화를 영화화한다. 인기 게임을 영화화한 법정스릴러 <역전재판>은 2월11일 일본 개봉에 앞서 1월15일 개막한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었다. 1970년대의 가지와라 이키의 동명의 청춘 만화를 영화화한 <아이와 마코토>는 6월16일 개봉한다. 최근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는 기복이 좀 있는 편이라, 결과는 두고 봐야 할 듯하다. 최근 홍콩에서 가장 중요한 감독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소이청 감독도 올해 두편의 영화를 발표한다. 손오공 이야기를 3D와 아이맥스 버전으로 만드는 대작 <대료천궁>과 카 체이스 영화 <차수>다. 견자단, 주윤발 주연의 대작 <대료천궁>은 소이청의 첫 중국 본토 촬영 작품이며, <차수>는 뛰어난 운전 실력을 보유한 탈옥범을 잡으려는 신참 경찰의 고군분투를 그린 액션영화다. 동남아영화의 일취월장 올해 동남아시아영화는 주목할 만한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필리핀. 필리핀은 최근 수년간 독립영화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지역이었다. 그런 흐름을 이어 최근 각 ‘지역’으로 독립영 화 제작이 확산되고 있다. 즉, 전혀 새로운 독립영화가 탄생할 가능성이 많다는 뜻이다. 세부, 일로일로, 루손, 비사야스, 민다나오 등이 대표 지역이다. 필리핀영화개발위원회는 지역영화 제작을 장려하기 위해 필리핀의 각 지역을 돌며 영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해는 잠보앙가, 바키오, 일로일로, 산페르난도, 라나오 델 수르 등에서 영화제가 개최되었다. 올해는 이들 지역영화를 한자리에 모아 시상하는 영화제를 출범시킨다. 시넹 팜반사 컴페티션(Sineng Pambansa National Film Competition)이 바로 그것. 각 지역을 대표하는 장편극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을 대상으로 한 영화제로, 오는 6월 다바오에서 첫 행사가 열린다. 그리고 이 행사에서 브리얀테 멘도자의 신작 두편(<포로>와 <자궁>)이 상영될 예정이다. 제62회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처음 소개되는 <포로>는 외국인 국제구호원이 민다나오의 반군에 납치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이자벨 위페르가 주연을 맡아 이목을 끌었다. 칸 혹은 시넹 팜반사 컴페티션에서 최초로 공개될 영화는 <자궁>. 이제 막 촬영을 시작한 <자궁>은 ‘바하우’라 불리는 바다집시에 관한 영화다. 필리핀 남부해안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바하우’는 특히 배를 만드는 기술로 유명하다. ‘레파-레파’라 불리는 배는 그들의 집이기도 하다. ‘레파-레파’를 타고 이 섬, 저 섬을 떠돌며 생활하는 것이다. <자궁>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남편에게 두 번째 부인을 구해주면서 벌어지는 질투와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필리핀 남부의 타위-타위 지역에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다. <자궁>은 브리얀테 멘도자의 이전 작품들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작품이 될 것이며, 필리핀의 ‘지역영화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가 <자궁>을 시넹 팜반사 컴페티션에서 공개하는 것도 그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멘도자는 이밖에 두편의 다큐멘터리를 더 만들고 있다. 필리핀의 소수부족을 탐구하는 <트리부>, 필리핀의 가톨릭 신앙심에 대한 고찰 <크리스토>가 그것이다. 7월의 시네말라야영화제에서 공개될 신작 리스트도 주목해야 한다.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의 <야생의 삶>, 메스 데 구즈만의 <디아블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수상 감독인 로이 아르세나스의 두 번째 작품 <레퀴엠>, 레이먼드 레드의 <카메라 옵스큐라>, 제프리 제투리안의 <포사스> 등 기대작이 수두룩하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에드윈과 가린 누그로호를 주목해야 한다. 에드윈의 신작 <동물원에서 온 엽서>는 인도네시아영화 사상 처음으로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특히 에드윈은 2005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아시아영화아카데미 1기 출신이며, 장편 데뷔작 <날고 싶은 눈먼 돼지>가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서 처음 소개되었는가 하면, <동물원에서 온 엽서>는 2009년 아시아프로젝트마켓(구 부산프로모션플랜) 초청작이다. 기린 사육사인 할림의 보살핌으로 동물원에서 자라난 처녀 라나가 사랑에 빠져 동물원을 떠나서 많은 일을 겪은 뒤에야 할림과 동물원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로써 인도네시아영화는 가린 누그로호, 리리 리자와 더불어 에드윈이라는 젊은 피를 수혈받아 국제무대에서 인도네시아영화의 존재가치를 더욱 부각하게 됐다. 현재까지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감독으로 손꼽히는 가린 누그로호는 최근 작품 활동이 드물었지만, 올해 두편의 작품을 발표한다. 로테르담영화제에 초청된 <눈가리개>는 종교적 신념과 종교적 근본주의가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고찰한 작품이다. 현재 그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원주민 주교의 네덜란드·일본 투쟁기를 그린 <소에기자>를 만들고 있다. 타이도 기대작들이 많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아르테TV>에서 제작하는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으며, 4월에 공개될 예정이다. 메이저 회사와의 작업에 염증을 느낀 위시트 사사나티앙은 독립영화인 <수리아>를 들고 다시 돌아온다. 킥복서로서는 천하무적이었지만 개인적 삶은 처절했던 전설적인 타이 킥복서 수리아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은 스릴러영화 <왜곡>을 선보인다. 연쇄살인과 그로 인한 트라우마를 다룬 작품으로, 이미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 중이다. 말레이시아에서는 독립영화그룹에 속한 핵심 감독들의 신작 소식이 별로 없다. 탄추이무이, 우밍진, 호유항 감독의 신작 준비작업이 더디게 진행 중이고, 리우성탓의 <어디에 살고 있니?>가 9월 이전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아미르 무하마드는 최근 작품 활동을 잠정 중단한 상태이고, 제임스 리는 주류 영화계에 들어가 다작 활동을 하고 있다. 2007년 데뷔작 <주머니 속의 꽃>으로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로테르담국제영화제 타이거상을 수상하며 단번에 주목할 만한 신인으로 떠올랐던 리우성탓의 <어디에 살고 있니?>는 말레이시아의 한 가난한 농부가 병석에 누운 장모를 돌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집을 처갓집 근처로 옮겨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타이 애니메이션 <야아크>에 주목 아시아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강세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한국을 비롯한 몇몇 아시아 국가에서 의미있는 장편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지고 있다. 올해는 특히 타이의 <야아크>(Yaak)가 기대작이다. 타이는 ‘칸쿠웨이’ 시리즈로 이미 애니메이션 제작 역량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바 있는데, 600만달러 규모로 만들어지는 <야아크>는 타이 애니메이션 역사에 새로운 한획을 그을 작품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인도의 <라마야나>는 타이에서도 널리 읽히는 대서사시인데, 여기에 로봇 이야기를 입힌 작품이다. 제작기간만 5년으로, 4월에 개봉할 예정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올해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많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잘 알려진 호소다 마모루가 <늑대아이 아메와 유키>를 7월에 개봉한다. 늑대인간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흥행에서도 기대가 되는 작품이다. <공각기동대> <동쪽의 에덴>의 가미야마 겐지는 <009 리: 사이보그>를 가을에 개봉한다. 이시노모리 쇼타로의 60년대 원작 만화를 영화화한 작품으로, 3D CG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명가 프로덕션 I.G와 CG 전문 스튜디오 ‘삼차원’이 힘을 합쳐 만드는 작품이다. 또 다른 애니메이션의 명가 스튜디오 4°C는 <베르세르크>를 개봉한다. 미우라 겐타로의 동명 원작 만화를 3부작으로 만들 예정이며, 그 첫 작품인 <황금 시대편: 패왕의 알>(구보오카 도시유키 감독)이 2월4일 공개된다. 사토시 곤의 미완성 유작 <드림 머신>은 완성이 미지수다. 사토시 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매드하우스 전 사장인 마루야마 마사오가 완성을 약속했지만, 매드하우스가 <니혼TV>에 매각되고 마루야마 전 사장도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완성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도의 지역영화들, 그리고… <루나 파파>를 기억하고 사랑했던 분들께 기쁜 소식. 바흐티아르 후도이나자로프 감독(타지키스탄)이 신작 <바다를 기다리며>를 거의 완성했다. <탄케르 탱고> 이후 6년 만이다. 황량한 모래사장에서 바다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선장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루나 파파>에서 보여주었던 중앙아시아 특유의 신비주의가 빛을 발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2월 중 완성 예정. 방글라데시의 새로운 영화운동 ‘차비알’을 주도하고 있는 모스타파 파루키의 신작 <텔레비전>도 기대작. 생명체를 사진으로 재현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하람’의 관점에서 텔레비전을 버리려는 이맘과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을 사람들간의 우스꽝스러운 싸움을 그린 작품으로, 현재 촬영을 마치고 후반작업 중이다. 이라크에서는 모하메드 알 다라지의 신작이 주목을 끈다. 2008년 <바빌론의 아들>로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다라지는 현재 이라크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손꼽힌다. 그의 신작 <기차역>은 바그다드역에서 자살테러를 기도한 스물세살의 젊은 여성에 관한 이야기다. 그녀가 자살테러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이라크가 안고 있는 사회·정치적 문제를 하나하나 밝혀나갈 예정이다. 인도는 필리핀과 마찬가지로 지역영화가 올해의 화두로 대두될 것이다. 전통적인 작가영화의 산실인 콜카타, 케랄라 지역 외에도 펀잡, 고아, 푸네 등지에서도 새로운 작가영화가 나오고 있고, 앞으로도 줄을 이을 것이다. 주류 영화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작품은 발리우드 뉴웨이브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누락 카시압의 <와세이푸르의 갱>이다. 탄광 지역에 산재한 마피아들의 치열한 영역다툼과 복수를 그린 대작으로, 감독은 부인하지만 인도판 <대부>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현재 촬영을 마쳤으며, 5월과 12월에 1, 2부로 나눠 개봉할 예정이다. 인도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제작자 겸 감독과 당대 최고의 배우가 만나는 특급 프로젝트도 진행 중이다. 야쉬 초프라와 샤룩 칸이 바로 그들이다. <넘버 원>이라는 제목의 이 특급 프로젝트는 야쉬 초프라의 8년 만의 연출작이며, 그의 영화인생 50주년 기념작이기도 하다. 샤룩 칸 외에도 현재 인도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카트리나 카이프도 출연할 예정이며 A.R. 라흐만이 음악을 맡았다. 제작사인 야쉬 라지 필름은 <넘버 원>을 9월에 완성할 예정이며, 토론토영화제나 부산영화제에서 최초로 공개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주인공의 올곧은 마음이 전염된다 <나루토 질풍전 극장판: 블러드 프리즌>

나루토가 누명을 쓰고 붙잡힌다. 곧바로 호오즈키성(귀등성)이라는 닌자 감금시설에 갇히는데, 성주 무이는 붙잡힌 닌자들이 차크라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몸에 천뢰를 새긴다. 차크라를 쓸 수 없는 나루토는 한낱 평범한 닌자에 불과하다. 호오즈키성을 빠져나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마을에서 풀어달라는 정식 요청이 있거나 죽어서 나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이를 죽여 천뢰를 풀어야 한다. 나루토는 호오즈키성에서 만난 풀마을의 암부 류제츠의 도움을 받아 무이를 없애려 하지만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한편 무이는 나루토의 인주력을 이용해 ‘극락의 상자’를 열려고 한다. 극락의 상자를 여는 자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 <나루토 질풍전 극장판: 블러드 프리즌>의 초반은 나루토의 결백을 증명하는 이야기처럼 진행된다. 그러나 나루토가 호오즈키성에 갇힌 이유, 그 배후의 인물과 음모를 밝히는 게 핵심은 아니다. ‘극락의 상자’에 얽힌 무이와 무이의 아들 그리고 류제츠의 사연에 이 영화의 주제가 담겨 있다. 눈앞의 소중한 것도 지키지 못하면서 대의를 말하는 태도, 인간의 끝도 없는 욕심을 질타하는 건 포기를 모르는 근성의 소년 나루토다. 나루토는 “천뢰보다 무서운 건 내 마음이 꺾이는 거야”라고 말하는데, 나루토의 그런 올곧은 마음은 자연스레 다른 이들에게 전염된다. 영화 후반부에는 괴물 사토리와 나루토 일행의 전투장면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나루토 질풍전 극장판: 블러드 프리즌>은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반전이 곳곳에 숨어 있는 이야기로 승부하려 한다.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히가시야마 아키라가 각본에 참여했으며, 기존의 극장판 시리즈와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와는 연결되지 않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띠는 작품이다.

[영화읽기] 모럴의 인플레를 헤집다

노천수영과 산책, 침대에서 혼자 눈뜨는 아침. 작전이 실패하자 요원 스마일리는 은퇴했다. 영화는 이 진부하고 고독한 현실에서 시작한다. 영국 첩보국은 민활하기보다 부패와 반응지체 속에 침체되어 있다. 아마도 금세기 들어 가장 격조 있는 스타일을 보여주었을 오프닝에서 첩보국의 서류함이 서서히 올라가듯, 리프트가 참을 수 없이 느리게 내려가듯 그렇게. 영화는 존 르 카레의 1974년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이야기는 원작보다 10년 정도 뒤인 1970년대 중반의 런던을 배경으로 정보국 내 이중스파이를 색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금속 피로’ 속에서 오래 지속된 냉전은 첩보전의 언저리에 모호한 모럴의 인플레를 만들어놓았다. 영화는 이 침전물을 헤집어낸다. 이 침전물들은 노련한 자의 회고록 문체처럼 낡은 질서와 늙은 유럽에 대한 향수 어린 수사적 은폐 속에 쌓여 있다. 긴장, 의심, 공포, 그들은 피로하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국·프랑스 합작의 첩보영화로 <렛미인>의 감독인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전에 보지 못한 스타일의 첩보물로 연출해냈다. 영화의 제목은 영국과 소련이 벌이는 장기판에서 이중간첩으로 의심되는 자들에게 붙인 닉네임에서 따왔다. 이는 아이들이 숫자를 세며 부르는 영국 동요에서 유래된 것이다. 브리티시 로맨틱코미디로 유명한 워킹 타이틀이 제작사라는 점이 이례적이다. 엘리트 스파이물이라는 수식이 붙을 정도로 영화는 움직임보다 밀도 높은 심리의 흐름을 정교하게 디자인했다. 단서를 주지 않고 현재와 과거를 뒤섞어놓아 사전정보가 없는 관객에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두더지(이중간첩), 서커스(첩보국), 컨트롤(영국 첩보국 전직 국장), 칼라(소련 첩보국 국장) 등의 은어가 이해를 방해하기도 한다. 쉽게 생각해서 첩보국의 전 수장인 ‘컨트롤’이 등장하는 장면이 과거라는 점을 알아두면 이해가 쉽다. 긴장의 연속, 의심의 일상화, 공포의 만성화. 이것이 냉전 질서가 모두에게 만들어낸 피로의 핵심이다. 영화는 바람 없이 탁도 높은 먼지 속에 유폐된 듯한 분위기를 잘 만들어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 스파이고, 바로 옆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 스파이며, 때로는 내 안에 그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체성의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이 스파이다. 이는 냉전의 구성적 요소,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외상적이고 실재적 중핵’이다. 올드유럽의 역사와 전통을 강매하는 방식이, 한편에서 투어리즘이라면 다른 한편에서는 스파이영화다. 냉전은 끝났다. 이후 본 시리즈나 새로운 007 시리즈가 개인의 정체성과 자본의 국경없는 메커니즘을 주제로 삼았으나 이들도 역시 올드유럽의 품격, 저개발국의 엑조틱한 스펙터클, 액션이라는 장르 컨벤션을 보여주고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스파이물의 기원, 즉 조로아스터적인 이원 세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는 점(<무간도> 시리즈가 이에 가까울 것이다)에서 기존의 스파이물과 다른 인상을 준다. 비관적 피로감에 찌든 올드유럽의 도덕적 교착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윤리적이거나 이데올로기적 의도가 희박하다는 점에서 냉전시대 진지한 스파이물 내지 프로파간다 선전영화와도 다르다. 선악, 서방과 동구권, 푸른색과 붉은색 어떠한 대조를 갖다대도 이들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 쌍둥이 반영상이다. 영화는 응징도, 발견도, 성장도, 보상도 없는 세계를 구성해내는데, 아마도 이것이 오늘날 유럽이 지닌 유일한 미덕이자 매혹일 것이다. 영화는 윤리, 지성, 미학의 혼돈 속에서 각자의 편집증에 빠져들어가는 스파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스마일리와 칼라, 바로크적 데칼코마니 스마일리(게리 올드먼), 그는 겉으로 보기에 민첩한 요원은 아니다. 원작의 묘사에 따르면 뚱뚱하고 안경 쓴 그는 말끔한 슈트의 플레이보이형 요원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홈스와 같은 거실형 탐정의 전통에 익숙한 영국인들에게 스마일리 캐릭터는 소설로도, 그리고 텔레비전 시리즈로도 익숙하다. 그는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을 지닌 사람이다. 오랜 연륜에서 오는 심리적 평정, 독문학에 대한 전문가적 관심, 외도와 난교를 일삼는 아내에 대한 애정은 그의 개성의 핵심을 이룬다. 오프닝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한폭의 작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그림을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그가 작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과도 같은데, 그림에는 초상화가 아닌 추상화가 그려져 있다. 그 추상화를 바라보는 것은 앞으로 그가 해결해야 할 미스터리 역시 설명 가능한 구체성을 띤 것이 아님을, 그것이 마치 불투명하고 왜곡이 심한 거울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스마일리는 독문학을 애호하고, 그와 첩보국 내 맞수인 빌 헤이든은 화가이기도 하다. 영화는 벽면 곳곳에 많은 그림들을 채워넣었는데, 이러한 그림들을 추적해가는 것도 영화를 독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 한편 소련 첩보국의 오랜 수장은 ‘칼라’다. 여성형 이름으로 그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연애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하는데, 적성국과의 첩보관계를 은밀한 연애의 관계로 은유하는 것은 원작자인 르 카레의 탁월한 솜씨 덕분이기도 하다. 칼라는 강력하고 교활하며, 당에 광신적인 냉혹한 자로 묘사된다. 그의 정체는 신비에 싸여 있다. 1950년대 중반 스마일리는 숙청의 피바람이 불던 러시아로 귀국하려던 칼라의 전향을 설득한 적이 있다. 스마일리는 과거에 칼라를 만났던 일을 술회하면서 홀로 그 장면을 마치 모노드라마 연기하듯 재연한다. 스마일리는 칼라와 자신이 닮았으나 그의 생김새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평범하고 진부한 스마일리와 신비하고 광신적인 칼라의 조합은 역설적이다. 스마일리가 아내에 대한 충성도를 지키듯이, 칼라는 당에 대한 충성을 지킨다. 스마일리와 칼라는 반영된 짝패다. 칼라는 실재하는가? 칼라로 ‘추정되는’ 인물은 영화에서 얼굴 없는 부분신체로만 등장한다. 원작에서의 묘사가 그러하듯이 마치 신부처럼, 잔혹하고 냉정한 인간의 뒷모습으로. 하지만 혹시 칼라는 영국 정보국이 구성해낸 페르소나가 아니었을까. 스마일리가 재연하는 칼라는 실체가 아니라 강력하다고 오인되는 공허는 아니었을까. 냉전은 실체는 확인되지 않으나 반영물을 보고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기이한 거울놀이를 만들어냈다. 러시아가 영국을 만들고, 적이 나를 만들며, 애국자가 변절자를 반영하고, 평범한 사람이 바로 스파이인 이상한 질서. 다른 한편에는 짐과 빌의 짝패가 있다. 원작에서 빌은 짐에게 ‘제2의 나’라고 하면서, 자신이 그의 메피스토펠리스가 되겠다고 말한다. 스마일리와 칼라, 짐과 빌은 각각 선과 악을 담당하는 듯 보이지만, 추잡한 방식으로 추잡한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닮아가고 더이상 윤리적으로 분리되지 않는 바로크적 데칼코마니를 만들어간다. 원작에서 스마일리가 어렵게 구한 그리멜스하우젠의 초판본은 소설의 시작과 끝부분에 두번 언급되며, 이를 통해 내용이 주인공의 전쟁 편력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영화는 진행되면서 점점 인물의 관계가 정교화되고 복잡해지며 심리는 보다 편집증적이며 기교적이 된다. 그리멜스하우젠의 <짐플리쿠스 짐플리치시무스>와 영화에 언급된 자크 칼로 판화의 배경은 17세기의 30년전쟁이다. 인유된 작품을 통해 작가는 전쟁이 평범한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 폭력이 어떻게 일상화되는지 암시하고 있다. 유럽의 국제관계를 전면적으로 뒤바꾼 30년전쟁은 냉전에 대한 비유가 된다. 그레이엄 그린은 스파이의 일이란 체스처럼 추상적인, 일종의 게임과 같을 때가 있는데 그래서 스파이는 도덕적 가치보다 메커니즘쪽에 더 흥미를 가질 수 있으며, 그 신중한 게임이 매우 정교한 단계에 도달하면 스파이는 본연의 의무를 잊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이 게임의 매너리즘적 단계, 정교화가 그로테스크하고 바로크적으로 변질되어 결국 선의 승리와 악의 발견조차 카타르시스를 주지 못하고 피로해져버리고 마는 그 단계를 보여준다. 스마일리는 이중간첩을 색출했고 첩보국에 돌아와 승진했으며 아내는 돌아왔다. 그렇다면 스마일리는 승리했는가? 엔딩에서 그의 표정은 모호하다. 첩보국의 각자는 자신의 평범한 자리로 회귀한다. 권총과 수영복, 활극과 치정의 시대는 지나갔다. 모두 쓸쓸히 홀로, 무기력하고 고독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여전히 그들은 피로하며 환상은 저 멀리에 있다.

노장이 돌아왔다

수상 리스트 황금곰상 <시저는 죽어야 한다>(Cesare deve morire)/ 파올로 타비아니 & 비토리오 타비아니 은곰상(심사위원대상) <그저 바람>(Csak a szel)/ 베네덱 플리고프 감독 은곰상(감독상) <바바라>(Barbara)의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 은곰상(남우주연상) <로열 어페어>(En Kongelig Affære)의 미켈 보에 폴스라르 은곰상(여우주연상) <전쟁 마녀>(Rebelle)의 레이첼 음완자 은곰상(각본상) <로열 어페어>의 니콜라이 아르셀, 라스무스 하이스터버그 은곰상(예술공헌상) <하얀 사슴 평원>(Bai lu yuan)의 촬영감독 루츠 라이트마이어 은곰상(특별상) <자매>(L’enfant d’en haut)의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 알프레드 바우어상 <타부>(Tabu)의 미구엘 고메스 감독 노장이 돌아왔다. 제6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금곰상은 80살을 넘긴 노령의 형제 감독 파올로(80)와 비토리오(82) 타비아니의 <시저는 죽어야 한다>가 차지했다. <스크린 인터내셔널 데일리> 별점 4점 만점에 3.3점으로 선두를 달렸던 크리스티안 펫졸트의 <바바라>는 은곰상인 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제 내내 독일영화의 금곰상 수상을 점치며 설렘을 감추지 않았던 독일 언론들의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이번 금곰상 수상에 대해 현지 언론들은 “정치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선호하는 베를린영화제의 기존 이미지에 반하는 보수적인 선택”이라고 평가하는 분위기다. 일간 <타게스슈피겔>은 “심사위원장인 마이크 리는 69살이고, 이번 상은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까지 거슬러 갔다. 이번 베를린영화제는 노장들의 축제인가?”라고 되물었다. 또 주간 <슈피겔>은 ‘성공적 영화제, 잘못된 수상자’라는 자극적인 제목과 함께 “62회 베를린영화제는 영화제가 갖출 수 있는 것은 모두 갖추었다. 젊고 추진력 강한 영화감독들의 강력하고 정치적인 영화들이 경쟁작에 포진해 있었다. 이 정도라면 칸과 베니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크 리가 주도하는 심사위원회가 보수적으로 수상작을 선정한 것은 유감”이라고 썼다. 황금곰상에 대한 독일 언론의 불평 과연 <슈피겔>의 말처럼 올해 베를린은 뚜껑을 열어보니 예년에 비해 수작이 넘쳤다. 특히 후반부에는 가족 갈등, 집시족에 대한 극우 테러,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추억, 전쟁과 테러, 혁명과 계몽을 다룬 역사극 등 다양한 주제의 흥미로운 작품들이 선보였다. 영화제쪽은 ‘아랍의 봄’을 모토로 내걸었지만 정작 경쟁작에선 직접적으로 아랍사회와 관련된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올해 눈에 띄는 걸작들로는 스위스 출신의 위르실라 메이에 감독의 <자매>, 베네덱 플리고프의 <그저 바람>, 포르투갈 미구엘 고메스 감독의 <타부>, 아프리카의 전쟁과 테러를 소녀 군인의 눈을 통해 마술적으로 그려낸 <전쟁 마녀> 등이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젊고 신선한 감독들의 수작이 넘치는 영화제였지만 타비아니 형제의 황금곰상 수상에 대한 독일 언론들의 불평은 온당한가? 그렇지 않다. 황금곰상의 주인공 타비아니 형제는 이미 1977년 칸영화제에서 <파드레 파드로네>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며 명성을 날린 바 있다. 하지만 그들은 5년 뒤 칸영화제에서 <산 로렌조의 밤>으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이후 국제 무대에서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않고 있었다. 황금곰 수상작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세미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영화로 실제 교도소 내 연극 프로젝트를 따라다니며 찍었다. 영화의 대부분이 교도소의 높은 담장 안에서 일어난다. 타비아니 형제는 지난 2월18일 열린 시상식에서 “관객은 중범죄로 갇혀 있는 교도소 수감자들도 인간이고 또 인간으로 남는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영화에서 수감자들이 무대에 올리는 <줄리어스 시저>는 우정, 배신, 권력, 자유, 의심, 살인까지 인간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고뇌와 감정이 집결해 있는 작품이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대사는 거의 대부분 셰익스피어 연극의 대사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영화 속 개개인의 감정상태와 사정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수감자의 개인적 비극과 극중 비극이 겹치면서 전해지는 감정의 깊이와 정도는 대단히 진득하다. 그러니 이 작품에 대한 독일 언론들의 불평은 좀 부당한 면이 있다고 해야겠다. 고전적인 것을 진부하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노거장 형제가 연극이란 매개체를 통해 보여준 인간 본연의 모습은 심금을 울린다. 헝가리 집시족, 아프리카 10대 소녀… 정치적인 수상작들 이번 수상작 중 베를린영화제가 선호하는 정치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는 심사위원대상을 차지한 헝가리 출신 베네덱 플리고프 감독의 영화 <그저 바람>과 비전문 배우인 15살 레이첼 음완 자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쟁 마녀>를 들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비전문 배우를 기용한 꾸밈없는 다큐멘터리 분위기로 생생한 현장감을 전해주는 작품들이다. 특히 현재 극우가 득세하고 있는 헝가리의 정세를 생각해보면 영화 <그저 바람>이 다루는 소재의 시의성은 매우 크다. 지난 2008년부터 2009년 사이 실제로 헝가리에서는 극우테러로 인해 집시인 로마족들이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이웃 가족이 몰살당한다. 카메라는 언제 어디에서 공격당할지 모르는 집시 가족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따라다닌다. 주인공의 표정은 거의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굳어 있다. 새벽에 겨우 잠자리에서 일어난 주인공 버디는 늙고 병든 아버지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에게 등교를 재촉하며 흔들어 깨우고 일을 나간다. 10대 소녀인 딸이 학교에 가는 길, 학교에서의 생활, 아들이 학교에 빠지고 이곳저곳을 헤매는 장면, 버디가 청소부로 고된 하루를 보내는 장면들이 번갈아가며 이어지며 일상 속 차별과 로마족이 처한 빈곤의 실태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영화 속 집시의 모습은 우리의 고정관념에 박혀 있는 춤추고 노래하고 게으른 집시들과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그저 안전하게 살고 싶은 인간일 뿐이다. 일간 <베를리너차이퉁>은 “플리고프 감독은 로마족의 시각으로 삶 속에 내재한 위협을 환기시킨다. 위협당하는 자, 쫓기는 자와 함께 자기 길을 간다. 이는 영화 기술에서 최고의 완성이다”라고 격찬했다. 캐나다 출신 킴 응엔 감독의 <전쟁 마녀>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상황을 겪는 10대 소녀의 극한 삶을 그려냈다. 어딘지 모르는 아프리카의 한 마을에 반정부군이 들이닥치고, 주인공 소녀에게 자신의 부모를 죽이도록 강요하고 납치한다. 영화는 주인공 소녀 카모나처럼 납치된 10대 초반 어린이 군인들의 행보를 좇는다. 죽고 죽이는 전투의 강행군 속에서 카모나는 신비의 나무즙을 마신 뒤 죽은 자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고, 반군 우두머리의 ‘무당’이 된다. 영화는 이미 폭력과 테러가 일상생활이 되어 버린 삶에도 인간이 살아갈 힘을 얻어가는 과정을 담담히 그린다. 킴 응엔 감독은 “영화를 찍으며 다시 청소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일부러 정치적인 요소는 피하고 순수하게 10대의 시각으로만 영화를 찍었다. 그들이 폭력의 실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그렸다”고 말했다.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한 포르투갈 출신 미구엘 고메스 감독의 <타부>도 영화제 후반부에 호평을 받았던 작품이다. 모두 3부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모든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만 펼쳐지는 흑백의 무성영화로, 최근 개봉한 <아티스트>를 연상케 한다. 1부는 정글과 아프리카 식민지 역사에 관한 이야기로 먼 옛날 식민지를 개척했던 남자의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2부는 리스본의 카지노에서 거액을 날리고 숨지는 노파의 이야기다. 3부부터는 점점 더 흥미로워진다. 2부의 주인공인 노파가 젊은 시절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낙원처럼 살았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멜로드라마, 슬랩스틱, 사파리, 60년대 밴드가 눈길을 사로잡는 이 영화에 대해 독일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영화라는 도구에 대한 시적이고 영리한 흑백영화”라고 호평했다. 이해할 수 없는 남녀주연상 선정 다른 수상작들에 대해서는 현지 언론도 관객도 조금 못마땅한 눈치다. 덴마크 니콜라스 아르셀 감독의 <로열 어페어>는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차지했지만 뭔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가깝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20여년 전 덴마크왕 크리스티안 7세의 이야기를 통해 개혁와 반동의 우화를 보여주는데, 그다지 특별한 점이 없어 보이는 이 영화가 두개의 상을 쓸어간 건 미스터리에 가깝다.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에 대한 불평의 소리도 높다. 개막작 <안녕, 나의 여왕>과 <자매>, 두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레아 세이두와 <제인 맨스필드의 차>에서 열연한 로버트 듀발이 유력했었던 탓이다. 특히 <로열 어페어>의 남우주연상 선정은 현지에서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평이 자자하다. 원래 영화제란 그런 곳 아니겠는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는, 어쩌면 영원히 잊히게 될 작품에도 종종 거대한 상이 주어지곤 하는 장소 말이다. 황금곰 파티는 이제 막을 내렸다. 총평을 하자면 전에 없는 성공적인 파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베를린은 젊고 실험적인 감독들의 발굴에 성공했고, 노장의 귀환을 통해 전통적 영화의 영속성도 확인했다. 또한 전례없이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출현함으로써 관객몰이에도 크게 성공했다. 예술도 건지고 대중에게 볼거리도 선사한 제62회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양적으로 성장해도 질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그간의 평을 무마할 수 있게 됐다. 이런 성공이 내년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바르셀로나] 이변은 없다

오스카 시상식과 마찬가지로 큰 이변은 없었다. 지난 2월19일 스페인 시네 아카데미(Academia de Cine)가 주최하는 제26회 고야시상식이 열렸다. 고야시상식은 스페인에서 가장 권위있는 시상식으로, 스페인 영화인의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기도 하다. 엔리케 우르비수 감독의 스릴러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No habra paz para los malvados)가 14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내가 사는 피부>가 16개, 마테오 길 감독의 서부영화 <블랙손>(Blackthorn)이 10개, 그리고 벤디토 삼브라노 감독의 시대극 <더 슬리핑 보이스>(La voz dormida)가 총 9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결국 네 작품이 작품상, 감독상, 주연상 및 신인 남녀배우상까지 골고루 나누어 수상했다.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작품은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였다. 몇몇 영화를 빼고 나면 ‘그들만의 잔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평이한 시상식이었지만 감상 포인트는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우선, 스페인 시네 아카데미에 뿔이 나 2004년부터 시상식을 등졌던 알모도바르 감독이 <내가 사는 피부>로 몇년 만에 시상식에 참가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유이스 오마르는 <에바>로 배우 인생 30년 만에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첫 고야상을 차지했고, 97년부터 알모도바르 감독과 꾸준한 작업을 이어가는 한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오스카 음악상 후보에 오르기도 한 알베르토 이글레시아스는 <내가 사는 피부>로 10번째 고야상을 수상해 최다 개인수상자 기록을 세웠다. 올해 시상식장 안팎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었던 주제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들을 배출해낸 스페인 영화계에 대한 ‘자축’, 그리고 인터넷 ‘배급’문제였다. 특히 배급문제는 레드카펫 패션만큼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시네 아카데미의 회장인 엔리케 곤살레스 마초는 영화제에서 행한 10분짜리 스피치에서 불법 다운로드가 영화 제작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언급하며 “인터넷은 아직 영화계에 경제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창구는 아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하지만 시상식 이후 인터넷 환경과의 ‘공존’을 모색하는 제작사와 미디어들의 움직임은 분주해졌다.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의 제작사이기도 했던 방송사 (텔레싱코)는 자사의 유료 다운로드 웹사이트 ‘미텔레’에서 4.72유로에 고화질로 다운받기 프로모션을 시작했고, 유료영화를 상영하는 <카날 플러스>에서는 <내가 사는 피부>와 <블랙손>의 다운로드용 고화질 영상 링크를 공유해 5유로에 관람이 가능하도록 했다. 한편, 2011년 개봉작이었던 수상작들은 3월부터 스페인 전역의 영화관에서도 재상영된다. 올해의 주요 부문 수상작 작품상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 감독상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의 엔리케 우르비수 여우주연상 <내가 사는 피부>의 엘레나 아나야 남우주연상 <노 레스트 포 더 위키드>의 호세 코로나도 여우조연상 <더 슬리핑 보이스>의 아나 와그너 남우조연상 <에바>의 유이스 오마르 신인여우상 <슬리핑 보이스>의 마리아 레온 신인남우상 <내가 사는 피부>의 잔 코르넷 신인감독상 <에바>의 키케 마이요

[박해천의 design+] 최익현씨의 그때 그 시절

해운대 마린시티의 주상복합 아파트 62층, 1940년대 중반 부산에서 태어난 경주 최씨 충렬공파 35대손 최익현(최민식)씨는 거실 창 너머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지난해 부산에 들이닥친 부동산 열풍 덕분에 또다시 자산 목록을 늘릴 수 있었다. 생애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라 악착같이 달려들었고, 그만큼의 수익을 챙겼다. 그런 그가 지금 아들의 검사 임용 소식을 전해 듣고선, 자신이 경험했던 가난과 궁핍의 기억 맨 끝자락을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는 영도 달동네의 방 한칸짜리 집이 버티고 서 있다. 그의 유년기는 6·25 전쟁의 소용돌이가 비켜나갈 정도로 구김살이 없었다. 그의 가족이 거주하던 일식 적산가옥은 외부의 불행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든든한 성채였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아버지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다. 자유당 시절, 야당도 아닌 무소속 간판을 달고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연전연패. 땅 문서가 하나둘 사라지더니, 마침내 집도 빚쟁이들 손에 넘어갔다. 그 이후 익현씨의 청춘은 가파르게 내리막길을 걸었다. 영도의 집은 익현씨가 결혼 뒤 처음으로 장만한 것이었다. 이삿짐을 옮기는데 리어카 한대로도 충분했던 부실한 세간이었다. 하지만 익현씨가 밑돈을 꽂아주며 세관에 취직하면서 살림살이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한쪽 벽면에 허리 높이의 자개농, 덩치만 큰 목재장, 그리고 다리가 달린 캐비닛형 텔레비전이 차례로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던 붙박이장의 미닫이문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앉은뱅이책상 두개와 책장을 놓았다. 책장에는 어린이용 전집류 책들이 빽빽하게 꽂혔고, 영어회화 카세트테이프가 담긴 가방도 놓였다. 그리고 때묻은 벽지가 드러나는 빈 공간마다 가족사진과 함께 상장들도 줄줄이 붙여졌다. 그 시절 익현씨는 퇴근 뒤 그 상장들을 바라볼 때면 하루의 피로가 일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한편, 이런 집안 풍경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행색의 전자제품들도 있었다. 익현씨가 세관에서 빼돌린 턴테이블, 포터블 컬러텔레비전, 비디오플레이어, 카세트라디오 등. 이 갖가지 세간들 중 아내가 가장 애지중지한 것은 국산 꽃무늬 전기밥통이었다. 다른 집 부인네들이 환장한다는 코끼리표 밥통을 구해준다고 해도, 한사코 반대였다. 그녀는 스테인리스스틸의 금속 질감이 두드러진 일제 밥통보다는 꽃무늬가 그려진 국산 밥통이 더 정감이 간다는 것이었다. 하긴 지금, 아들 명의로 구입한 이 주상복합 아파트의 주방도 온통 꽃무늬투성이다. 아무튼 영도에 살던 시절, 익현씨는 얼마 뒤 자신이 일확천금의 기회를 잡게 될 것이라는 사실, 가족을 위해 번듯한 이층양옥과 피아트 132를 구입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 뒤로 인생의 반전이 찾아왔고, 지금 그는 부와 권력으로 쌓아올린 조망의 자리에 서서, 옛 기억을 떠올리며 행복감에 빠져들고 있다.

[타인의 취향] ‘퍼펙트 샤인’한 그의 취향

취향은 나의 의지나 의도와 상관없이 다른 이의 영향을 받아 생겨나기도 하는데 나의 경우가 그러하다. 나의 취향은 순전히 ‘퍼펙트 샤인’(perfect shine)한 그의 취향에 맞춰졌다. 그에게 당신의 취향에 대해 조금 설명해달라 했더니 너무 긴 글이 왔다. 먼저 DP 익스트림 폼으로 거품을 만들어 먼지나 때를 불려 부드러운 양모 미트를 이용하여 전체를 닦아낸다. 이때 최대한 깨끗이 닦아야지 잔여물이 남게 되면 나중에 트러블을 일으킬 수 있다. 물로 깨끗이 거품을 씻어내고 Ps21 클렌저로 유분도 제거한다. 톤이 어둡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푸어보이즈 블랙홀을, 밝은 톤이다 싶으면 화이트다이아몬드를 추천한다. 바를 때는 퍼프에 물을 살짝 적시고 손톱만큼 덜어내 펴 발라준 뒤 가볍게 극세사 타월로 닦아낸다. 이제 기본적인 것은 마쳤다. 꼼꼼한 마무리를 위한 다음 단계는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카우나바 성분의 도도쥬스 슈퍼내추럴을 바르는 것인데….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는가? 그는 자신의 몸은 3분 만에 닦으면서 차 닦는 데는 3시간도 모자란 세차 마니아다. 도통 알아듣을 수 없는 약제들과 이해할 수 없는 물품들(플라스틱 광택제- 플라스틱도 광택이 나긴 해?, 타이어 광택제- 차라리 신발 밑창을 닦지 그래?), 종류별 스펀지와 극세사 타월들은 네 박스가 넘는다. 대체 왜 이렇게 많은 게 필요한지 물어보는 나에게 여자들이 화장하는 것과 똑같다는 눈높이 설명을 해줬다. 그래 뭐 우리도 아이크림, 영양크림, 수분크림, 핸드크림, 풋크림을 바르니까 이해해줘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오늘도 밤 12시 가까운 시간에 그는 주섬주섬 세차 바구니를 챙긴다. 이젠 주차장에서 우리 차가 제일 깨끗한데 왜 또 세차를 하러 가느냐고 잔소리하지 않고 그냥 책 한권, CD 하나 챙겨 따라나간다. 세차장에 도착하면 그는 그의 취향대로 세차를 하고 나는 나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튼다. 밖에서 쏴아~ 하고 물을 뿌리면 꼭 비오는 날 같아 음악이 더 맛있게 들린다. 차 안이 주는 아늑함을 느끼며 그동안 인터넷과 텔레비전에 치여 읽지 못했던 책을 펴들고 있노라면 이런 시간도 꽤 즐겁다. 느긋하게 앉아 차닦느라 고군분투하는 그를 관찰하는 것까지.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젠 나도 타르 제거에 대해 물어보는 팀장에게 어느 브랜드가 좋다며 가격과 사용법까지 설명해주는 수준이 되었다. 운전면허조차 없는데 말이다. 가끔 남편의 유별난 취향에 대해 얘기하면 대체 차종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데 우리 차는 지금은 단종된 3년 된 국산차다. 아직도 가끔 주유하러 가면 “아이고~ 새 찬가 보네~”란 소리를 들으니 그의 취향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다. 덧붙이며 ‘퍼펙트 샤인’은 그의 세차동호회 이름이다. 이름 한번 기막히지 않은가?

파운드 푸티지가 슈퍼히어로를 만났을 때

<크로니클>은 지금 영화를 만드는 세대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봤을 아이디어로부터 시작된 영화다. 만약 <클로버필드>와 <블레어 윗치 프로젝트> 같은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형식을 지금 할리우드를 휩쓸고 있는 슈퍼히어로물과 접목한다면? 이 아이디어를 실현시킨 사람은 스물일곱 동갑내기인 감독 조시 트랭크와 각본가 맥스 랜디스다. 조시 트랭크는 <스타워즈>의 제다이와 스톰트루퍼가 십대들의 파티에 갑자기 나타난다는 내용의 파운드 푸티지 단편 <레아의 22번째 생일날의 칼부림>(Stabbing at Leia’s 22nd Birthday)으로 유튜브에서 돌풍을 일으킨 바 있다. 다큐멘터리 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난 조시 트랭크는 “실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아주 평범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이야기로 시작하다가 갑자기 엄청난 일이 일어나는 영화 말이다. 어느 날 여객기를 타고 날아가다 창밖을 봤는데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생각했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내가 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닐 수 있다면 어떨까? 친구들과 같이 구름 위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나는 그 모습을 촬영하는 거다. 그러다가 비행기 한대가 날아와 그중 한명을 치고 날아가는 거다. 그리고 문득 나는 그게 영화의 줄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실제 인물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편집해서 보여준다는 형식의 파운드 푸티지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하는 장르다. <파라노말 액티비티>가 이 장르를 시리즈화하면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파운드 푸티지 영화는 일회성 이벤트에 가깝다. 하지만 파운드 푸티지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는 장르다. 특히 조시 트랭크처럼 적은 예산으로 장르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감독이라면 파운드 푸티지는 값싼 특수효과를 살짝 가리면서 장르의 관습을 비트는 재주를 발휘하는 데 제격이다. 게다가 유튜브 시대의 젊은 관객에게 파운드 푸티지는 어떤 실험이 아니라 매일매일 눈으로 목도하는 일반적인 영상에 가깝다. 조시 트랭크는 “우리 세대에서만 솟아오르는 뭔가 예술적인 느낌 같은 게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역사상 자기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그런 세대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감을 받는 영화들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쯤 되면 이 영화의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영어사전에서 가장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있을 거다. ‘크로니클’은 ‘기록’이라는 의미이며, <크로니클>은 일상을 기록해야 한다는 유튜브 세대의 강박관념에 대한 슈퍼히어로 영화다. 그런데 <크로니클>이 지금까지의 파운드 푸티지 장르영화들과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 역시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한다. 물론 영화는 앤드류가 들고 다니는 HD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을 주요 소스로 활용하고,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CCTV 화면과 TV 뉴스 화면을 함께 버무려넣는다. 그러나 <크로니클>에는 <클로버필드> 같은 영화들이 유튜브 시대의 리얼리티에 다가가기 위해서 구사한 거친 핸드헬드의 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감독은 영화의 주인공인 앤드류가 염력의 소유자라는 걸 장르적으로 활용한다. 앤드류는 염력을 이용해 24시간 내내 카메라가 자신의 주위를 맴돌면서 모든 상황을 기록하게 만든다. 특히 시내 한가운데서 빌딩과 빌딩 사이를 날아다니며 벌이는 클라이맥스의 카메라 움직임은 <크로니클>이 파운드 푸티지 영화라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할 정도로 안정적이다. 조시 트랭크 감독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빌린 일반적인 영화들과 많이 다르다. 정교하게 계산된 방식의 촬영을 원했다”고 말한다. 주인공이 염력으로 카메라를 움직이며 모든 장면을 기록한다는 설정 자체는 작위적이지만, 클라이맥스로 가면서 관객은 작위적인 설정 자체를 잊어버리고 전통적인 액션영화처럼 <크로니클>을 즐기게 된다.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 수법 같지만 의외로 효과는 자연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이걸 파운드 푸티지 장르의 새로운 진화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네필 세대와 유튜브 세대의 근접조우 재미있는 건 <크로니클>이 유튜브의 시대정신을 슈퍼히어로 장르와 결합하고 파운드 푸티지 장르 자체를 비트는 이중의 서커스를 벌이면서도 동시에 꽤 고전적인 장르영화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크로니클>은 70∼80년대 할리우드 선배들의 장르영화에 꽤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장르 팬이라면 이 영화를 보면서 브라 이언 드 팔마의 <캐리>(1976)와 <전율의 텔레파시>(1978),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캐너스>(1981)를 거의 본능적으로 떠올릴 게 틀림없다. 슈퍼히어로 장르가 지금처럼 발화하기 이전, 70년대와 80년대 장르영화들이 ‘슈퍼파워’를 다루는 방식은 훨씬 더 어두침침하고 무시무시했다. 드 팔마와 크로넨버그가 염력을 가진 주인공들을 다룬 방식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시절 엑스맨들은 블록버스터의 병기가 아니라 호러장르 속 괴물이었다. <크로니클>의 감독 조시 트랭크와 각본가 맥스 랜디스는 자신들이 쓰고 연출한 영화가 어떤 선배들의 유산으로부터 출발했는지 잘 이해하고 있으며, 선배들의 유산을 이 새로운 형식의 영화에 적절하게 집어넣는 데도 근사하게 성공한다. 특히 각본가 랜디스가 <애니멀 하우스>(1978)와 <런던의 늑대인간>(1981)을 만든 존 랜디스 감독의 아들이라는 걸 한번 생각해보시라. 두 사람은 ‘스필버그 제너레이션’이라 불릴 법한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이다. 블록버스터 시대가 개막하면서 모든 게 PG13등급의 공장생산 오락거리로 추락하기 전, 70년대 중반과 80년대 초반까지의 할리우드 장르영화들은 아메리칸 뉴시네마 이후의 이글이글한 에너지를 여전히 품고 있었다. 그런 영화들을 어린 시절부터 몸으로 체득한 세대가 지금 막 할리우드의 중심부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조시 트랭크의 말을 들어보라. “내가 큰 영향을 받았던 <스타워즈>와 <에이리언>, 그리고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들에서 보았던 모든 것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고 이렇게 말하는 거다. ‘좋아. 이제 이 모든 것들이 진짜 내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되는 거야!’라고 말이다.” 어쩌면 <크로니클>은 스필버그와 동료들이 쏟아냈던 장르영화를 바이블로 삼는 80년대생이 내놓은 첫 번째 스튜디오 장르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66년생인 J. J. 에이브럼스보다 훨씬 더 젊은 세대가 발화를 시작한 것이다. <크로니클>을 설명하면서 한 가지 더해야 할 키워드는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다. <아키라>는 <공각기동대>와 함께 서구의 팝컬처에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80년대 일본 만화다. <아키라>의 오토모 가쓰히로는 당시 아즈마 히데오, 다카노 후미코 등의 새로운 작가군과 함께 일본 만화계에 등장했다. 이 새로운 세대는 당대의 유럽과 미국 코믹스로부터 받은 영향력을 전통적인 일본 만화의 문법과 버무림으로써 일본 열도에 머무르던 ‘망가’를 국제적인 예술로 진화시켰다. 특히 오토모 가쓰히로의 <아키라>와 (일종의 <아키라> 프롤로그라고도 할 수 있는 단편) <동몽>은 제임스 카메론 같은 할리우드 감독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크로니클>은 사실상 <동몽>, 혹은 <아키라>의 첫 번째 실사 극장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능력을 갖게 된 평범한 인물이 결국 힘을 이기지 못해 폭주하자 같은 능력을 가진 인물이 이를 막아세우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당대 젊은이들이 사회에 느끼는 근원적인 분노를 초능력이라는 매개를 통해 표현하는 방식도 <아키라>를 쏙 빼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주연배우 중 한명인 마이클 B. 조던은 “촬영 전 조시 트랭크 감독이 <아키라>를 권했다”고 말하고, 조시 트랭크 역시 주인공인 앤드류를 “나의 미국판 데츠오(<아키라>의 주인공)”라 불렀다고 고백한다. 어떤 면에서 <크로니클>은 일본 만화의 영향력 속에서 태동한 거대로봇물을 최초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이식했던 <트랜스포머>를 떠올리게 만드는 데가 있다. 지금의 할리우드 시스템은 젊고 재능있는 감독이 자신의 비전을 당차게 밀어붙여 SF, 판타지영화를 만드는 걸 거의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계획되고 검증되어 마모된 채 시장에 나온다. 가끔 극적인 일도 생긴다. 젊은 감독의 1200만달러짜리 저예산 장르영화가 스튜디오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세상에 나와 관객과 평론가들을 동시에 매혹시키는 그런 일 말이다. 조시 트랭크의 <크로니클>은 (신성모독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냥 말해보자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스물여덟살에 <죠스>를 만들었을 때, 제임스 카메론이 서른살에 <터미네이터>를 만들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어리고 야심만만한 감독들이 익숙한 장르의 법칙 속에서 이야기, 캐릭터의 힘과 아이디어로 불멸의 상업영화를 만들었던 옛 시절 말이다. 파운드 푸티지와 슈퍼히어로 장르를 결합하고 70~80년대 장르영화의 유산과 일본 팝컬처의 영향력을 버무려넣은 <크로니클>은 시네필 세대와 유튜브 세대의 제3종 근접조우다. 그리고 조시 트랭크는 이제 겨우 스물일곱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