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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유운성의 시네마나우] 지금, 이곳에 찾아온 고요한 종말

영화가 종말의 광경을 상상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여기서 종말이란 말 그대로 세상의 끝, 인간이 사라지고 역사가 중단되는 순간이다). 중요한 건 대체 그 종말의 광경을 영화로 불러들이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인류 멸망의 위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목록을 굳이 꼽아보지 않더라도- 만약 그렇다면 제법 긴 목록이 될 것이다- 종말은 대개의 경우 지금/이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범용한 감각을 문제삼기 위해 스크린에 호출된다는 걸 깨닫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즉 ‘종말영화’를 지탱하는 건 무엇보다 현재에 대한 감각의 문제인데- 이런 영화들이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곧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 영화가 경이의 스펙터클로 그려내는 대상(외계인 침공, 소행성, 환경 재해)이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인간관계의 드라마나 그도 아니면 정치사회적 암시(냉전, 포스트 9·11)에 관심을 집중하게 된다. 이는 관객의 탓이라기보다 어느 정도 ‘종말영화’의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한데, 종종 이들 영화는 범용한 감각을 문제삼기 위해 불러온 일련의 특별한 사건들을 영화의 중심에 두고 특별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임박한 종말에 너무 호들갑스럽게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가장 한심한 사례는 임박한 종말에서 인류를 구원하겠다며 달려드는 영웅들이 등장할 때다. 최근 영국영화에 풍성함을 더하고 있는 재기 넘치는 장르영화들 가운데 조 코니시의 <어택 더 블록>(2011)은 그런 식의 종말영화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되었지만 여태 미국에서조차 개봉되지 않은 아벨 페라라의 신작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는, 임박한 103종말을 지금/이곳의 광경을 반추하기 위한 가설적 조건으로 적절히 활용하면서 오늘날의 각종 전자적 스크린의 풍경에 대한 담담한 사색을 가미한 특별한 작품이다. 페라라의 또 다른 SF영화 <바디 에이리언>(1993)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주요 무대는 주인공 연인(윌렘 데포와 페라라의 실제 연인인 섀닌 리)이 거주하는 뉴욕 이스트사이드의 옥탑방에 한정되어 있다. 오존층 파괴로 인해 이튿날 새벽 4시44분이 되면 지구 종말이 예고된 가운데, 영화 속 두 연인은 그 어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들의 외부와의 소통은 거의 전적으로 여러 전자적 스크린에 의해 매개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경이로운 장치들은 아니고 저명인사들의 인터뷰나 뉴스가 방영되고 있는 텔레비전, 아이패드의 유튜브 동영상, 웹캠이 장착된 노트북의 스카이프를 통한 화상통화 등 일상적인 것들이다. 페라라가 이 고요한 종말의 풍경을 관찰하면서 특별히 과거 영화에 대한 향수나 전자적 스크린의 시대에 대한 혐오를 내비치진 않는 것 같다. 다만 세상에 임박한 종말이라는 가설적 상황의 힘을 빌려오되 그것을 철저히 이야기의 배경으로만 삼음으로써 오히려 너무나도 평범하기에 눈에 띄지 않을 법한 지금/이곳의 풍경- 예컨대 여기서 뉴욕은 페라라의 어떤 영화에서보다 더욱 생생한 일상의 풍경으로 다가온다- 에 윤곽과 색채를 더하고 관객에게 그것을 감각하게 만드는 식이다. <4:44 라스트 데이 온 어스>는 페라라가 여전히 자신의 영화적 뿌리를 인디영화에 두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자 현재적인 것에 대한 감각을 소중히 여기는 진정 시네마토그래픽한 종말영화의 드문 사례 가운데 하나다.

[김중혁의 No Music No Life] 뽕끼 한 방울의 환각작용

얼마 전 몇몇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가, 태어나서 처음 본 콘서트가 화제에 올랐다. 그 자리에는 1970년생부터 1981년생까지의 남녀가 모여 있었는데, 처음으로 본 콘서트가 어떤 것인지로 세대와 지역을 짐작할 수 있었다. 1970년생인 친구가 처음 본 공연은 들국화였다. 한살 차이가 나는 후배는 장필순이었고, 더 어린 남자 후배 한명은 이치현과 벗님들이었고(겉늙은 거야!) 가장 나이 어린 여자 후배는 김건모였고, 나보다 두살 어리고- 어리다고 해도 올해 나이 마흔!- 서울 근교에 살던 여자 후배가 처음으로 본 콘서트도 김건모였다. 내가 맨 처음 본 게 어떤 공연이었더라 잠깐 생각하다가 “아마 롤러코스터였을걸”이라고 하자, 1970년생이자 나와 같은 지역에서 태어나 현재는 작가로 활동 중인 친구가 곧바로 수정해주었다. “너 들국화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같이 보러 갔잖아.” 아, 그랬나? 그랬구나. 생각해보니 그랬던 것 같다. 기억력이 형편없는 사람이 기억력 좋은 친구와 함께 있다보면 이런 수모를 자주 당하게 된다. 공연장은 대구의 실내강당 같은 곳이었던 것 같고, 주옥같은 들국화의 히트곡과 함께 ‘홀리스’와 ‘스틱스’의 노래를 들었던 것 같고, 전인권의 목소리가 참으로 찌릿찌릿했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친구는 어찌나 기억력이 좋은지 “그때 앙코르곡으로 <제발>을 불렀어. ‘제발 그만해 둬. 나는 너의 인형은 아니잖니.’ 가사가 앙코르곡으로 딱이잖아.” 들국화는 그때 이미 브로콜리 너마저의 <앵콜요청금지>를 노래로 실천하고 계시었구나. 그 많은 공연을 누가 다 보나 지방에 살면서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지간한 거물급 뮤지션이 아니면 지방 순회 공연에 나서기가 힘들고, 지방으로 온다고 해도 큰 도 시 위주로 열리니 지방의 소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공연을 본다는 건 문화적인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 와서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매주 수많은 장소에서 수많은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는 거였다. 홍대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보면서 저렇게 많은 공연을 누가 다 보러 가나, 싶었는데 막상 공연장에 가보면 늘 사람들이 많았다. 이 사람들은 다들 어떤 이유로 이 공연을 선택하게 된 것일까. 그게 늘 궁금했다. ‘붕가붕가레코드’의 곰사장은 한 강연에서 음악의 세계로 뛰어들게 된 계기가 고향 제주도에서 본 공연 때문이라고 했다. 제주도까지 찾아온 노브레인과 크라잉넛의 공연을 본 중학생은 꿈을 키워 음반제작자가 되었고 ‘장기하와 얼굴들’을 비롯한 수많은 뮤지션들의 앨범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었다. 책 한권이 어떤 사람을 작가로 만들고 영화 한편이 어떤 사람을 감독이나 배우로 만들 듯, 한 시간 남짓의 공연이 수많은 사람들을 뮤지션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 세대가 들국화 공연을 보면서 꿈을 키웠듯 다음 세대는 노브레인, 크라잉넛을 보며 꿈을 키웠고, 또 다음 세대는 새로운 뮤지션들의 공연을 보면서 새로운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고등학생 때 본 들국화 공연은 요즘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장소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서울에서 열린 들국화 공연은 분위기가 달랐을까- 모두들 좌석에 앉아서 사이좋게 박수를 치던 장면을 떠올리면 건실한 종교집단의 부흥회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그런 분위기로 들국화의 노래를 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전인권이 아무리 “행진”이라고 외쳐도 우리는 의자에다 엉덩이를 딱 붙인 채로 박수 치며 따라부르기만 했던 것이다. 요즘 홍대 클럽의 록 공연장에 가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일단 공연이 (어지간히 비트가 빠른 음악을 하는 그룹이라면) 대부분 스탠딩인 데다가 관객의 반응도 격렬하다. 음악에 맞춰 정신줄을 놓고, 정신줄과 함께 관절의 줄도 놓으면서 미친 듯이 흔드는 걸 보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짜릿할 정도다. ‘프레드페리 서브컬처 뷰직 세션 2012’의 2월 공연이었던 ‘텔레파시’와 ‘고고스타’의 공연을 보면서 새로운 세대의 몸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텔레파시의 무대도 좋았지만 (특히 새 보컬 정우진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속에 또렷하다)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고고스타였다. 고고스타의 음악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디스코와 록을 섞은 다음에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기묘한 ‘뽕끼’를 한두 방울 떨어뜨린 게 고고스타의 음악이다. 디스코가 기본에 깔려 있는 그룹이어서 공연장의 분위기는 흥겹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웬걸, 이런 난장판이 없다. 몸을 부딪쳐가며 아슬아슬하게 뛰어노는 ‘슬램’은 기본이고 간단한 원을 만들고 그 안에서 뛰어노는 ‘서클 핏’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리더니 관객 한명을 무대 위로 올리기까지 했다. 이 정도면 거의 헤비메탈 그룹의 공연장이다. 나는 차마 그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들어갔다가는 10분 안에 뼈에 금가거나 코피 흘리면서 끌려나왔을 거다) 맨 뒤에 서서 고고스타의 무대와 슬래머들의 신나는 무대를 함께 보는 게 즐거웠다. 젊음이라는 조커 브이제잉 영상은 플레잉카드(트럼프)의 디자인을 기본으로 한 게 많았는데, 날뛰는 슬래머들의 역동적인 모습과 텀블링을 곁들이며 무대를 뛰어다니는 보컬 이태선의 모습과 플레잉카드의 그래픽은 한 세트처럼 잘 어울렸다. 그 장면은 마치 자신의 패를 믿고 전 재산을 판돈으로 밀어넣는 무모한 카드 게임 같았다. 아니면 자신의 패는 보지도 않고 올인하는 무모한 카드 게임 같았다. 그들이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젊음이라는 조커를 들고 있으니까, 이대로 모든 걸 불살라버려도 다시 땔감을 모으고 불을 지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게 있으니까. 슬램을 하면서 공연장을 누비던 젊은이들 중 누군가는 뮤지션이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작가가 될지도 모르고, 또 누군가는 음반제작자가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슬램을 하다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상실감에 빠지고, 심심해서 잡은 책에 몰두하여 공부에 전념하게 되고, 에잇 이렇게 된 거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생각하고는 계속 공부하다 덜컥 고시에 패스하는 바람에 판사가 될지도 모른다(앗 이것은 ‘비대위’ 김원효식 과대망상!). 한 30년쯤 지나서 우연히 그들이 다시 만났을 때 2012년 고고스타의 공연을 추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 2012년의 공연을 기억할까. 자세히 기억 못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을 테고, 그때가 정말 좋았지 요즘 음악은 전부 이상해, 라며 세월을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시간의 기억 세월을 보내고 나이를 먹으며 우리가 쌓아가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몇 시간의 기억이다. 밤을 꼴딱 새우며 책을 읽었던 시간들, 처음으로 가본 콘서트장에서 10분처럼 지나가버린 두 시간, 혼자 산책하던 새벽의 한 시간. 그 시간들, 그리고 책 속, 공연장, 산책길처럼 현실에 있지만 현실에서 살짝 어긋나 있는 공간에서 우리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그 시간과 공간이 쌓여 우리가 좀더 풍성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고고스타의 <쇼윈도>라는 노래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We are crazy but not rude’. 번역하자면, 아마도, ‘우리는 미쳤지만 무례하지는 않아’일 것이다. 2012년 고고스타의 공연장에서 나는 그 말을 떠올렸다. 그들은 모두 미쳐 보였지만 서로에게 무례하지 않았고, 모두 정신줄을 놓은 것 같았지만 먼 훗날 이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해낼 것이다.

기대하라 <해리포터>의 왕좌를 탈환하리니

예년이라면 평범한 수준의 애니메이션 혹은 중박을 기대하는 액션 스릴러를 개봉하며, 곧 시작될 블록버스터 시즌을 위해 숨고르기 중이었을 3월 넷쨋주 극장가를 두고 할리우드는 지금, 촉각을 곤두세우는 중이다.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이하 <헝거게임>) 때문이다. <헝거게임> <캣칭 파이어> <모킹재이>로 이어진 수잔 콜린스의 3부작 소설 중 첫편을 영화화한 <헝거게임>은, 2009년 라이온스게이트에서 4부작 프랜차이즈로의 제작을 발표했을 때부터 쏟아진 관심과 열기를 2012년 영화의 개봉까지 고스란히 끌고 온 화제작이다. 원작이 2300만부 이상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라는 점도 기대의 주범이었지만, 그보다 독자의 대부분이 젊은 여성층이며 소설에서 여주인공을 사모하는 두 남자가 있다는 점 때문에 <헝거게임>은 처음부터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빈번하게 비교됐고 그러한 비교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데 단단히 한몫했다. 쏟아지는 기대로만 따져도 <헝거게임>은 제2의 <트와일라잇>은 물론이고, 한동안 번성했던 프랜차이즈 영화가 소강상태에 이른 지금, <해리 포터> 시리즈가 비운 왕좌를 노리는 신성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SF장르로 분류되겠지만 액션, 어드벤처, 드라마,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된 이야기에, 리얼리티 TV쇼에 대한 현대인의 과도한 애정과 99%와 1%가 대립하는 미국, 혹은 전세계의 현실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현실적인 면모도 가지고 있다. 영국의 <텔레그래프>가 <헝거게임>을 “우리 시대를 위한 단 하나의 SF영화”라고 호평한 데에는 현실과 공명하는 이야기의 매력이 클 것이다. <헝거게임>은 미래의 디스토피아 판엠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반복된 전쟁을 마치고 마침내 독재정권을 통해 안정에 이른 이 나라는 해마다 ‘헝거게임’이라는 이름으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행사를 벌인다. 수도인 캐피톨을 제외한 12개 구역에서 12살 이상 18살 이하의 남녀를 1명씩 제비로 뽑아 게임에 출전시키는데, 이 게임에 출전하는 24명의 트리뷰트들은 단 한명이 살아남는 그 순간까지, 다시 말하면 23명이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사투는 텔레비전을 통해 판엠의 구석구석에 24시간 생방송된다.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은 제비뽑기에서 뽑힌 여동생 프림로즈를 대신해 12구역의 트리뷰트로 자원한 소녀다. 캣니스와 함께 12구역에서 뽑힌 소년은 피타(조시 허처슨)라는 동갑내기로, 둘은 캐피톨로 불려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상식을 배우고, 전투훈련을 받으며 출전을 준비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닦여지고 꾸며져서는 자신들을 후원해줄 사람들에게 매력을 발산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보여지는 트리뷰트들의 정보를 수집해 승부에 베팅을 하고 후원금으로 비상식량이나 물 등을 보내줄 수 있다. 인기가 많을수록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확률의 신이 언제나 너의 편이기를.” 영화에서 헝거게임에 출전하는 트리뷰트들에게 캐피톨 사람들이 후렴구처럼 덧붙이는 말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신의 가호라기보다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에 가깝게 들릴 것이 분명하다. 라이온스게이트가 <헝거게임> 3부작을 영화화한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같은 마음으로 행운을 빌었을지 모른다. 원작을 각색해 영화로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경기장에 갇혀 서로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절대로 각색되거나 윤색될 수 없는 원작 속의 기본 설정은 첫 번째 관건이었다. 영화에서 그려낼 폭력의 수위에 따라, PG-13등급에서 멀어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PG-13등급이 보장되지 않으면, 박스오피스에서의 수익도 기대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원작의 인기에서 비롯된 엄청난 관심이었다. “<헝거게임> 초보자를 위한 안내서”, “<헝거게임> 영화에 우리가 바라는 8가지” 등 영화화 소식이 발표되기 무섭게 팬사이트는 기대와 우려로 넘쳐났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걸림돌은 사람들이 이미 <헝거게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실 <헝거게임>의 테마들은 관객 입장에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헝거게임> 속 캣니스와 피타, 게일(리암 헴스워스)이 이루는 삼각관계를 놓고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비교했고,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플롯을 두고는 후카사쿠 긴지의 <배틀 로얄>을, 리얼리티 TV쇼에 대한 접근에서는 스티븐 킹의 <런닝맨>을, 경기장인 숲에서 아이들이 드러내는 잔인성을 두고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을 거론하면서까지 비교를 멈추지 않았다. 캣니스의 시점에서 서사가 진행되기 때문에 두드러졌던 원작의 소녀적인 감성도 영화관을 찾을 다양한 관객층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변형되어야 할 과제로 꼽혔다. 개봉 전부터 달아오른 <헝거게임> 원작 팬들 결과부터 말하면, 영화는 소설을 충실하게 반영했으며 효과적으로 각색했다. 영화의 상영시간은 소설의 전개를 따라 할당되었고, 중요한 대사나 장면들을 생생하게 살려냈다. 각색은 원작자인 수잔 콜린스가 맡았는데, 원작에서는 그려지지 않았던 게임의 통제실 장면이나 대통령인 스노우(도널드 서덜런드)의 장미정원 장면 등이 추가되면서, 다양한 각도에서 이야기를 조명하는 것 역시 성공했다. 또한 생존본능이 투철한 전사와 사랑과 분노의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는 소녀 사이를 오가는 캣니스의 독백에서 벗어남으로써 다양한 관객층이 즐길 수 있는 영화로 탈 바꿈했다. 소설에서 캣니스가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에 어떻게 비쳐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던 장면들이, 영화에서는 실제로 TV화면의 클로즈업이나 그 화면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숏으로 이어지는데, 관객은 그 장면들을 통해 영화가 아닌 헝거게임을 구경하는 관중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고, 영화에 한층 몰입하게 될 것이다. 콜린스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책과 영화는 각각 독립적인 작품인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완성했다”며 흡족한 마음을 전했고, 글로 묘사된 판엠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 제작진에 공로를 돌렸다. 영화의 연출은 <플레전트빌> <씨비스킷>을 만든 게리 로스 감독이 맡았다. 로스 감독은 <헝거게임>의 제작이 발표된 뒤로부터 1년이 지난 2010년에 감독으로 호명됐는데, 그는 영화화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제작자와 연락을 취하고, 영화에 대해 공부하고 준비하는 등 적극적으로 감독 자리를 얻기 위해 로비를 했다고 알려졌다. <헝거게임> 원작 소설을 10대인 그의 두 아이들로부터 소개받은 뒤 이야기에 푹 빠진 로스는, <헝거게임>만큼은 프로덕션 디자인까지 세세하게 설정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오디션을 준비했다. 프로듀서인 니나 제이콥슨의 마음을 움직인 결정적인 계기는 로스 감독이 직접 소설의 팬들과 만나 <헝거게임>에 대해 나눈 대화를 촬영해온 다큐멘터리 영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리는 <헝거게임>의 팬들과 책의 어떤 점이 좋았는지를 이야기하는 비디오를 가지고 왔다. 영화는 이미 그 대화 안에 다 있었다. 게리는 처음부터 캐릭터와 테마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헝거게임>이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이유는 캣니스 에버딘을 연기한 제니퍼 로렌스일 것이다. 스탠리 투치, 엘리자베스 뱅크스, 레니 크래비츠, 도널드 서덜런드 등 화려한 조연 캐스팅도 돋보이지만, 상영시간의 90% 이상 등장하는 제니퍼 로렌스야말로 <헝거게임>의 꽃이다. <윈터스 본>에서 로렌스가 연기한 리 돌리와 여러 면에서 비슷한 캣니스는 지혜롭고 총명한, 최근 영화나 TV에서는 만나기 힘들었던 영웅으로, 그동안 영웅을 기다려온 관객의 목마름을 씻어주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캐릭터다. 제니퍼 로렌스에 따르면,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캣니스가 자신의 남자친구가 누군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생존과 혁명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째서 로렌스만의 즐거움이겠는가? <토털필름>은 로렌스를 두고 “제대로 과녁을 겨냥한 명사수”라고 감탄했으며, 영화에 대해서는 “놀라운 점은, 촌스럽지 않다는 점이다. 싸구려 특수효과도, 군더더기가 많은 대사도, 발연기도 없다. <트와일라잇>이 아니다”라고 평해, 꾸준히 이어진 <트와일라잇> 시리즈와의 비교에 마침표를 찍었다. <스크린데일리>는 “카메라는 로렌스의 표정, 표현, 제스처 하나라도 놓칠세라 접착한 듯 따라다니며, 관객의 시선을 붙든다”고 호평했고, <할리우드 리포터>도 로렌스를 두고 “소설에서 나온 듯”한 “이 영화의 별”이라고 추어올렸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뛰어넘을까 인터넷 뉴스들이 전하는 업계 소식은, <헝거게임>의 첫주 개봉성적을 최소 7천만달러에서 최대 1억달러까지로 예상하고 있다. 이에 더해 온라인 티켓예매사이트 '판당고' (Fandango.com)는 <헝거게임>의 사전 예매율이 <트와일라잇: 이클립스>가 2010년에 수립한 최고 사전 예매기록을 경신한 83%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상영횟수로만 따지면 2천회에 이르는 영화표가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매진된 것이다. 뜨겁게 달아오른 기대에 발맞추어 프랜차이즈 제작 계획도 순풍을 만났다. 현재 2편인 <캣칭 파이어>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127시간>의 각본을 쓴 사이먼 보포이가 각색을 맡아 작업 중이며, 게리 로스 감독도 2편의 메가폰을 잡기로 결정했다. 이에 앞서 제니퍼 로렌스, 조시 허처슨, 리암 헴스워스, 우디 해럴슨 등 주요 배우들이 앞으로 만들어질 세 영화에 모두 출연하기로 도장을 찍은 것은 물론이다.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탄생이고 영리한 엔터테인먼트의 귀환이다.

[김영진의 인디라마] 화면에서도 인과의 틀을 부쉈더라면

조영찬은 시청각장애인이고 김순호는 척추장애인이다. 나이는 김순호가 훨씬 연상이다. 두 사람은 부부다. 이들은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의 주인공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두 사람은 시골에서 연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김순호가 다 준비해주고 조영찬은 기다린다. 이들의 일상은 대개 이런 식이다. 김순호가 조영찬의 수발을 들어준다. 흔하게 표현하자면 두 사람의 밀착된 관계의 힘을 사랑이라고 해야겠지만 나는 그들의 관계에 그 이상의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엇이 두 사람을 저토록 한몸처럼 묶여 있게 하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은 부부라고 하지만 김순호가 조영찬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그녀는 조영찬을 사랑해주고 보호해준다. 그녀의 그늘 아래서 조영찬은 당당하다. 그는 시를 쓰는 예술가이다. 눈과 귀가 막힌 상황에서도 그는 다른 수단으로 세계를 감각하며 자작시에서 자신을 ‘우주인’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한다. 눈과 귀가 달린 것이 보편적 인간의 물리적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에게 조영찬의 신체적 결함은 결핍이겠지만 그는 두 눈 다 뜨고 보며 두 귀로 듣는 우리가 비정상은 아닐까, 라고 그의 자작시에 쓴다. “사람의 눈 귀 가슴들은 대부분 지독한 최면에 걸려 있거나 강박에 사로잡혀 있거나 자아의 깊은 늪에 빠져 세계를 전혀 모른 채로 늙어간다. 그런 눈과 귀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나처럼 우주인이 되면 된다.” 이 글자들이 조합된 문학성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나로서도 거기 진실이 있다는 걸 안다. 영화를 보는 우리 대다수의 감각이 일정하게 불구라는 걸, 조영찬의 시는 지적한다. 그리고 <달팽이의 별>을 연출한 이승준의 카메라는 조영찬과 김순호가 서로를, 세상을 감각하며 충만하게 사는 삶의 행복을 일방으로 쭉 펼쳐놓는다. 드러내지 않는 장애인 부부의 현실 육체적 불구로 인한 결핍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그 결핍을 어떻게 극복하는가를 보여줄 줄 알았던 관객에게 이 영화는 거꾸로 그런 것은 있지도 않다고 아예 봉합해버린다. 주인공 부부의 지인들인 장애자들이 집에 놀러와 주인공들의 삶을 부러워하는 장면에서 조영찬과 김순호는 예외적 개인들이라는 게 드러난다. 그들의 지인들은 이들 부부의 행복을 부러워한다. 결혼하고 싶어 하는 동료에게 조영찬은 자신은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었노라고, 그것은 외로움이라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었느냐는 현실적 속인의 질문에 그는 외로움이 준비였다고 시치미를 뗀 답을 한다. 사소한 장면이지만 자신의 현실적 생활의 어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그의 캐릭터가 묻어난다. 다른 지면이나 이 영화의 극장 GV 현장에서도 곧잘 나오는 질문이지만 이승준 감독은 주인공 부부의 생활에서 드러나는 어려움이나 그들의 속내를 굳이 드러내지 않았다. <달팽이의 별>에는 주인공 부부의 행복한 모습만 나온다. 김순호가 몸이 아파 혼자 병원에 가서 애로사항을 의사에게 상담하는 장면도 있고 방 안의 형광등 전구를 갈아 끼우기 위해 꽤 번거로운 절차를 두 사람이 낑낑대며 해결하는 장면도 있지만 여기에 무게중심이 있는 건 아니다. 영화 후반, 조영찬이 김순호의 도움 없이 혼자 차를 타고 외출하는 장면도 있으나 이 장면에 서 강조되는 건 둘이 한몸처럼 다니는 그들의 일상이 언젠가는 종결될 것이라는 데 대한 아쉬움이다. 조영찬이 외출해 있는 동안 김순호는 혼자 밥을 먹는데 반찬이 거의 없이 맨밥을 먹고 있다. 조영찬과 함께 식사할 때면 나름 짜임새있는 식탁을 차려놓고 그에게 밥을 먹여주던 그녀는 조영찬이 없을 때 빈약한 식사를 한다. 그 빈약한 식사는 조영찬이 없음으로써 오히려 더 외로워지는 그녀의 마음상태의 반영처럼 보였다. 굳이 잘 차려먹고 싶지 않은, 파트너가 없으면 대충 끼니를 때우는 어머니나 아내의 마음을 드러낸다. 이런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내 김순호의 마음의 심연이 궁금했다. 그녀는 의심할 나위 없는 천사다. 그녀는 조영찬의 눈과 귀를 대신하며 문학수기 공모에 떨어지는 서투른 문학가 조영찬의 가장 성실한 애독자이고 그가 자신의 일상 삶에서 그녀와 함께 누릴 것을 제안하는 감각적 삶의 충일함을 받아들여 만끽하는 짝이다. 그렇다 해도 그녀의 삶의 피로는 화면에서 감춰져 있다. 내 눈에는 조영찬보다 김순호의 피로가 더 많을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눈과 귀가 다 보이긴 하지만 척추장애자이며 그다지 몸이 튼튼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녀는 남편의 일상을 위해 헌신한다. 그런 것이 조영찬의 외로움을 메워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로움도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녀의 피로와 곤궁만큼이나 예술적인 삶을 사는 남편의 우주인다운 감각적 기개가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을 것이다. 배리어프리 버전이 궁금한 이유 이 글을 쓰면서 새삼 그녀의 천사 같은 행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근원적 트라우마를 끝내 건드리지 않은 이승준 감독의 윤리적 선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우선, 당사자인 김순호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카메라를 껐다고 말했다. 사석에서 들은, 그녀가 장애자가 된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은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호소력이 있었다. 스스로 진정한 외로움을 절실하게 느껴봤다면 타인의 외로움도 잘 공감할 수 있을 거라는 전제에 동의한다. 이 영화는 그 전제에 기대어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고 있다. 그다음, 감독 스스로가 과거의 어떤 트라우마나 동인을 캐내어 현재의 행동을 설명하는 인과적 논리의 전형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야기로 드러내든, 화면으로 드러내든, 인과적 설명의 논리는 강한 설득력을 지니게 되지만 동시에 우리가 기대하고 쳐놓은 어떤 틀에 갇히게 된다. 인과적 논리의 표피적 설득력을 우리는 지금 숱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보고 있다. 감동하게 되지만 또한 구경거리로 즐기는 소모의 함정을 피하지도 못한다. <달팽이의 별>은 명확한 인과적 논리를 거스르면서 등장인물의 심리학을 배제한 채 줄기차게 그들 행동의 표면만을 반복하며 우리를 설득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보는 것과 듣는 것을 통해 공감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우주인이라고 자부하는 아마추어 문학가 조영찬과 그의 아내이자 공동 삶의 설계자이자 어머니이자 연상의 아내인 김순호가 자잘하게 일상에서 만드는 감각의 무늬를 전시하는 것이다. 확실히 극장에서 보면 보고 듣지 못하는 남자주인공을 대신하여 그가 감각하려 애쓰는 공기가 영화라는 시청각적 공명의 통로를 통해 더 확대되어 우리에게 전달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감독 이승준의 윤리적, 미학적 선택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연출을 삼갈 수밖에 없는 다큐멘터리의 특징을 그가 너무 과신한 건 아닌가라는 의심도 거둘 수 없다. 내레이션이나 고백적 장치를 통해 등장인물을 설명하는 것은 촌스럽고 전형적일 뿐만 아니라 때로 등장인물에게 폭력적인 장치가 될 수도 있지만, 이 다큐멘터리에서처럼 대체로 극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의 일상에서 거대한 감정의 무늬를 찍어내려 한 감독의 야심은 지나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실제로 수영을 즐긴다는 조영찬이 몸에 끈을 묶고 바다를 수영하는 모습을 찍은 카메라는 시적이며 적당한 울림을 주지만 연출하지 않고도 화면에 감각의 무늬를 띠게 하려는 감독의 무모한 야심이 읽힌다. 조영찬의 시는 선언적이다. 그는 자신을 당당하게 비장애인이 느끼지 못하는 걸 느낄 줄 아는 사람으로 선포한다. 그와 김순호가 꿈꾸고 만끽하는 감각의 충만함은 대다수 우리에게 결핍된 것이지만 그걸 화면에 보여주는 것도 사실은 엄청난 관념이다. <달팽이의 별>은 우리에게 결핍된 것을 일깨운다. 행복의 상태에 대해서도 재정의한다. 감독 이승준은 명시적인 설명 없이 그걸 해냈다. 그런데도 약간의 불균형이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화면에 보여지는 것만으로 감각의 충만함이 설명될 수는 없다. 스토리의 인과를 무시한 것처럼, 보여지는 화면의 논리에서도 인과의 틀을 좀더 과감하게 부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정해진 틀대로 설명하느니 생략하는 것처럼. 아니면 더 많이 설명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의 (김창완의 자세한 내레이션이 들어간) 배리어프리 버전이 궁금하다.

감독만의 해석이 부족하다 <헝거 게임: 판엠의 불꽃>

미국판 <배틀 로얄>. 혹자들은 수잔 콜린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을 이렇게 요약한다. 9년에 한번 소년소녀들을 죽음의 미로로 보내 괴물 미노타우로스와 싸우도록 했다는 고대 그리스 신화 ‘테세우스’를 원형으로 한 ‘헝거게임’은 가상의 독재국가 판엠이 체제 유지를 위해 기획한 서바이벌 게임이다. 12개 구역에서 무작위 추첨을 통해 선발된 소년소녀 24명은 자신에게 주어진 무기를 이용해 1명만 살아남을 때까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한다. 헝거게임의 규칙은 그러나 배틀 로얄의 그것보다 다소 복잡하다. 그 차이는 미디어의 개입에서 비롯된다. 일본과 달리 판엠에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24시간 동안 생중계되는 그 잔혹한 경기를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지켜봐야 한다는 규칙이 추가된다. 이에 <빅 브러더> <서바이버> 같은 영미권의 무수한 리얼리티쇼들이 떠오르는 것도 당연하다. 더불어 인터뷰 진행 방식은 <오프라 윈프리 쇼>를 연상시키며, 온 국민이 스크린 앞에 모여 자기 구역 대표 선수들을 응원하는 광경은 월드컵이나 올림픽 시즌을 상기시킨다. 그러다보니 영화가, 지금 우리가 미디어를 어떤 방식으로 향유하고 있는가에 관한 보고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왕 그럴 작정이었다면 미디어의 양면성을 더 정교하게 드러냈더라면 좋았겠다. 디스토피아를 그리는 데 충실하려 한 의도가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미디어만 강조한 결과를 낳은 것 같아 아쉽다. ‘헝거게임’의 섬뜩함은 칼부림에 있지 않다. 폭력 묘사 수위만 두고 보면 비교적 얌전한 영화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참가자들이 살상무기를 휘두르는 순간에도 자극적인 음향효과보다는 애잔한 음악을 사용하는 등 살육의 쾌락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려고 한 노력이 엿보인다. 헝거게임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게임의 규칙 때문이다. 추첨 현장에 끌려가는 소년소녀들을 홀로코스트영화처럼 찍어낸 초반부 장면이 그 무거운 굴레를 체감케 한다. 비범할 정도의 활쏘기 능력을 지녔다 한들 주인공 캣니스 에버딘(제니퍼 로렌스)의 신세도 마찬가지다. ‘죽이거나 혹은 죽거나’라는 게임의 규칙에 복종해야 하는, 체스판의 말에 불과한 그녀는 판을 흔들어보려고 무진 애를 쓴다. 하지만 그녀가 게임메이커를 기만하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잠시 동안만이다. 현실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게임이나 다름없는 세상, 배부른 자와 배고픈 자의 갈등이 최고의 오락거리로 활용되는 세상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대한 오래 버티는 것뿐이다. 다만 이런 관점이 원작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감독의 창조적 역량의 일부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작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주변인물이나 정치적 배경에 관한 설명을 과감히 생략한 감독의 결단력은 돋보이나, 감독만의 해석은 읽히지 않아 안타깝다.

미아들의 안식처를 창조하다

1961년생이니 적지 않은 나이다. 하지만 작품 수는 그에 비해 적은 편이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영화가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것도 연출이 아니라 연기자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1980년대, 그러니까 20대를 거치며 그녀는 이런저런 음악 방송과 아동용 방송을 기웃거렸지만 끝내 연기자로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진 못한 모양이다. 이후에 그녀는 미국영화연구소(AFI) 등을 거치며 영화연출의 길로 항로를 바꾸었고 몇편의 단편과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든 다음 마침내 2006년에 <레드 로드>로 장편 데뷔하게 된다. 어쩌면 연기 인생에서의 그녀의 불운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2000년대에 데뷔한 유능한 여성감독 중 한명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녀가 주변의 지인들에게 시나리오를 처음 보여줬을 때부터 <레드 로드>는 스릴러로 낙점됐던 영화다. CCTV 오퍼레이터가 직업인 재키는 어느 날 밤 우연히 모니터를 살피다 몇년 전 자신의 남편과 딸을 사고로 치어 죽인 사내를 발견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러나 신분을 감춘 채 사내에게 접근한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그를 향한 복수욕과 성욕을 더이상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보통의 남성 스릴러영화에서라면 침묵에 부쳐졌을 ‘그녀의 목소리’를 경청했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할 만한 데뷔작이었다. 안드레아 아놀드의 두 번째 선택은 의외였다. 그녀는 청춘영화 <피시 탱크>(2009)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마치 영국 특유의 과격한 청춘물 <스킨스>(영국 브리스톨에 거주하는 10대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을 꾸준히 다루어온 그녀의 장기가 나름 살아 있는 작품이다. 안드레아 아놀드의 세 번째 선택은 더 의외였다. 그녀는 세 번째 작품으로 <폭풍의 언덕>(2011)을 골랐다. 저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고전이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지 못한다면 이내 실패작으로 취급받을 위험도 있었다. 그때에 안드레아 아놀드는 과감하게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먼저 히스클리프 역에 흑인 비전문배우를 기용했다. 둘째로 소설의 뒤쪽 절반을 포기하고 앞쪽 절반만 다루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유년기를 최대한 상세하게 재현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섬세한 감수성이 어린 화자를 통해 제대로 빛을 발했으며 이 영화는 역대 어떤 <폭풍의 언덕>에 견주어도 가장 관능적이라 할 만한 장점을 갖게 됐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애초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팔색조의 본능이 있을 것이다. 스릴러, 청춘영화, 시대극을 격하게 오가는 것을 보면 일견 가늠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아놀드의 종잡을 수 없는 관심사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영화적 교집합은 있다. 그녀가 집을 떠나 부유하는 인물들을 시종일관 잊지 않고 다루어왔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아놀드가 만들어온 영화들은 기댈 곳 없는 미아(迷兒) 같은 존재들이 자신의 욕망을 발설할 수 있는 은신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그 미아들을 껴안으며 마침내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다. 그녀의 사소한 비밀◆안무단 안드레아 아놀드는 1980년대 초 영국 의 음악 쇼프로그램 <톱 오브 더 팝스>의 안무단 ‘Zoo’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데이비드 보위와 퀸이 함께 를 부르는 무대에서 흑백 분장을 하고 가만히 서 있는 병풍 중 하나가 그녀다. 자신의 말처럼 “언젠가 유튜브에 올라올지도…”.

[design+] 아파트를 가지고 싶었던 여자

날것의 폭력이 지배하는 무법의 폐기물 매립지, 여자는 그곳에 ‘쓰레기’로 내동댕이쳐졌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하긴 했지만 여전히 그녀는 쫓기는 몸이었다. 사채업자들이 언제 다시 들이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불안과 공포는 그녀의 일상을 잠식했고, 밤마다 악몽의 연속이었다.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 질질 끌려가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여자는 거처만 알아낼 수 있다면 자신을 빚쟁이로 만든 아버지를 정말 죽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살 유혹에 시달리던 시점, 여자는 뜻밖의 만남 덕분에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을 수 있었다. 화장품 회사에 입사한 그녀는 그 회사의 계열사인 건설업체의 모델하우스로 견학을 갔고, 구원의 손길과도 같은 하나의 장면과 마주쳤다. 그것은 분양을 앞둔 아파트 모델하우스의 거실 풍경이었다. 젊은 중산층의 눈높이에 맞춰 차분하고 단아하게 정리된 중형 평형대의 공간, 그곳에 놓인 모든 사물들은 봄 햇살을 닮은 조명 아래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행복이라니. 그것은 여자가 IMF 외환위기 이후 단 한번도 체감해보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여자는 잠시 주방의 식탁 의자에 앉아 흰색 가죽 소파와 벽걸이 텔레비전이 놓인 거실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 자리라면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여자는 확신했다. 그녀는 휴대폰카메라로 거실 풍경을 찍었고, 그 사진을 액자에 담아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 이후 여자는 사진을 볼 때마다 다짐했다. 언젠가는 그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그녀의 인격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차경선’이라는 이름은 욕망의 대리인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지 오래였다. 여자는 다른 이름이 필요했다. 여자는 용의주도하게 살인을 저질렀고, 자신이 죽인 ‘강선영’이 되었다. 변신의 결과가 성공적이었던 것일까? 때마침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자가 아파트를 원한 것처럼, 남자는 사랑을 원했다. 여자가 원하는 아파트는 실물로 존재하는 지상의 아파트였고, 남자가 원하는 사랑은 첫눈에 반하는 낭만적인 사랑이었다. 다행히도 남자는 여자가 원하는 것을 사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여자는 사랑과 아파트가 등가로 교환될 수 있다고 믿었다. 액자 속의 사진을 남자와 함께 찍은 사진으로 바꾸면서, 이전 사진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였다. 여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실히 연인의 배역을 수행했다. 남자는 자신이 꿈꾸던 사랑의 환상이 실현되자 한없이 행복해했다. 이제 그녀가 아파트를 선사받을 차례였다. 남자는 프러포즈를 했고, 그녀는 희미하게 번지는 미소로 화답했다. 남자의 아버지가 반대하고 나섰지만, 아들의 결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혼 일정이 잡히자, 남자는 여자가 선택한 신도시의 아파트를 구입했고, 여자는 새집을 꾸밀 준비를 시작했다. 외견상, 남자와 여자간의 거래는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전화 한통이 걸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아는 남자, 아는 여자 이렇게 웃긴 사이

장진 감독이 <아는 여자> 개봉을 앞두고 썼던 제작기를 인터뷰 전에 다시 읽었다. 그는 대략 다음과 같은 대화를 글의 한쪽에 옮겨놓았다. 장진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정재영 헤헤 왜 이래… 술 먹었어요? 이나영 감독님, 술 잘하세요? 근데 우린 왜 회식 같은 거 안 해요? 장진 십년 동안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여자는…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랑을 하는데 말이야…. 자신의 사랑에 대해 어떤… 희망을…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이나영 우리 밥 안 먹어요? 정재영 시켜먹자 그냥…. 이나영 난 짬뽕… 오빠 짜장 시켜요… 갈라먹게…. 장진 살면서 어느 순간엔가 누군가에게 ‘아, 이게 바로 사랑이구나’라는 확신을 느낀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더라도 그 사랑을 잡을 수 있을까? 정재영 헤헤, 왜 그래 자꾸? … 나 결혼했어…. 이나영 오빠 애가 몇살이랬죠? 정재영 네, 네살이던가? …가만,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전화 끊으며) 우리 아들 네살 맞대. 이나영 우리 강아지는 열두살인데…. 읽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다. 하하, 이분 글을 참 재미나게 쓰셨어. 이 엉뚱한 찰떡궁합 짝꿍의 성격을 단숨에 드러내주셨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했다. 그래도 그렇지 꼭 저렇게 말했으려고. <아는 여자>의 정재영과 이나영을 동치성(정재영)과 이연(이나영)으로 다시 만났을 때 깨달았다. 그때 정말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추억을 더듬고 말을 주고받자, 엉뚱 발랄 코믹한 커플 동치성과 이연이 이미 거기 돌아와 있었다. -<아는 여자>라는 제목이 재미있습니다.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을 들었을 때 두분은 어떤 느낌이었나요? =정재영_제목만 보고는 모르겠더라고요. 무슨 가요 제목 같기도 하고. 시나리오 읽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그제야 제목이 너무 기가 막힌 거야. 극장에서. “(저 여자) 누구야?” 그러면…. 이나영_(말을 받으며) “아는 여자야”, 그러잖아요. 지금도 <아는 여자> 말씀하시는 분들 많아요. 개봉 때 못 보고 나중에 본 다음 좋다고 말씀해주는 분들도 많고요. 사실 저는 그때 포스터가 좀 아까웠어요. 더 멋지게 찍을 수도 있었는데. 아 맞다, 그때 우리 희한한 홍보도 했잖아요. 극장 객석에 앉아 있다가 우리쪽으로 조명 들어오면 영화 속 극장 장면하고 똑같이 퍼포먼스도 하고. 정재영_언론시사하고 나서 분위기는 좋았지. 다섯 중에 네 사람은 좋아했던 것 같은데? 이나영_대중은 이 영화를 나중에야 더 좋아한 것 같아요. 근데요, 궁금한 게, 남자들이 이 영화에 되게 로망이 있나봐요. 정재영_야, 당연하지. 너처럼 예쁜 여자가 짝사랑해주는데. 이나영_저 의외로 영화에서 짝사랑하는 역할 되게 많아요. 영화에서 왜 짝사랑만 하느냐는 질문도 많이 들을 정도예요. 정재영_실제로도 짝사랑하는 스타일이야? 이나영_그런 것 같아요. 정재영_오오. 누구냐 그놈은? 그러고보면 하느님이 있긴 한 것 같아. 공평해. 이나영_음… 조니 뎁? 조니 뎁 싱글이라던데. 정재영_뭐야, 그런 애 좋아하는 거야? 흰 수염에 주름, 아이고, 젊은 역할은 못하겠구나 -상상입니다만, 혹시 장진 감독이 <아는 여자>의 속편을 만들 계획이 있다고 하면 두분은 다시 응할 생각이 있나요? =이나영_아무래도 스코어는 잘 나오지 않았어도, 이 영화는 명작이잖아요. 재미나게 소소하게 면 또 다른 맛이 나올 것도 같고.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요? 정재영_원본의 이미지가 훼손되는 모험이 따르겠지만, 뭐 단순하게 생각한다면 나쁠 건 없지요. 이나영_다른 것보다 저희 둘의 호흡이 재미있을 것 같네요. 정재영_뭐 꼭 할 필요도 없지. 아, 벌써 8년이 됐어. 얘는 그대로인데, 나만 늙었어. 난 목소리도 변했고 생각도 변했고. 흰 수염도 많이 나고. 이나영_오빠, 저는 요즘 생각이 만신창이에요. 어, 근데 흰 수염 나면 좋을 것 같다. 정재영_야, 그럼 너도 한번 나봐라. 그거 매일 자라서 염색도 못해. 젊을 때는 내가 개성이 없는 얼굴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빨리 나이 들어서 로버트 드 니로나 숀 펜처럼 인생이 묻어나는 역할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흰 수염 나고 주름 생기고 하니까 인생 묻어나기는 개뿔. 내가 늙어가는구나, 젊은 역할은 못하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어. 이나영_(진지하게) 우리는 벤자민 버튼이 될 하수는 없는 걸까요. 아니면 냉동인간이 되어야 하나. -음… 잠깐… 영화로 되돌아가… 볼까요. 장진, 정재영, 이나영의 조합은 당시에는 굉장한 모험으로 여겨졌습니다. 처음 제안받았을 때 두분은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나요. 정재영씨는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16시간 만에 승낙했고 반대로 이나영씨는 90일 넘도록 길게 고민하셨는다는데요. =이나영_정말 석달 고민했어요. 제가 그때 제 역할에 대해서, 연기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시작할 때였거든요. 더 시간 끌었으면 감독님이 제 안티 사이트 만들려고 하셨대요. (웃음) 일단은 장진 감독님 대본이 이해가 안 가더라고요. 저에게 <아는 여자>는 찍으면서 더 좋아진 영화예요. 처음에는 감독님의 코미디를 글로 이해하기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시나리오 보고 이 캐릭터는 왜 이러고 있나, 싶었거든요. 그래서 찍으면서는 감독님이 귀찮아할 정도로 많이 물어봤어요. 그런데 현장편집 보니 차근차근 그 디렉션을 이해할 수 있겠더라고요. 정재영_저에게는 제일 재미있었던 영화 중 한편이에요. 제가 그때까지 <실미도> <귀여워>, 이런 마초적인 역할을 많이 했잖아요. <아는 여자> 한다고 하니까 괜찮겠느냐고 주위에서 내 걱정을 막 하더라고. 하긴, <피도 눈물도 없이> 찍을 때도 내 걱정 해주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작품 걱정이더라고. (웃음) 여하튼 전 새롭지 않으면 안 했을 거예요. 저한테 처음 들어온 제안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거든요. 난생처음으로 제가 먼저 해보고 싶다고 제안했을 정도였어요. 물론 나영씨는 상대배우 때문에 고민 많이 했겠다, 그치? 상대배우가 정재영이었으니까. (웃음) -서로에 대한 인상은 어떠했나요? =이나영_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일단 정재영 선배님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어서 좋았고요. 요즘에도 오랜만에 오빠 뵈면 그냥 편해요. 별로 안 어색하고요, 계속 보아왔던 사람 같고요. =정재영_나는 사실 그때 나영씨가 좀 어려웠어요. 내가 주로 남자들만 많이 나오는 영화에 나왔잖아요. (웃음) 그러다 이나영이라는 당대 스타 여배우를 만난 건데 그게 되게 어렵더라고. 일부러 그렇지 않은 척, 담담하고 대범한 척한 거지. 그런데 작품할 때 영화 속 인물 대 인물로 일해보니 호흡 잘 맞는 사람끼리 탁구 치듯이 아주 잘 맞더라고요. 이나영이라는 배우, 본능적으로 솔직하구나 -기억에 남아 있는 상대방의 연기가 있나요? 정재영_이나영이라는 배우에게 느낀 점은 이 배우가 연극을 하거나 연기 수업을 오래 받은 것이 아닌데 본능적으로 솔직하구나, 하는 거였어요. 몸에서 우러나는 대로 하는 그런 능력이 뛰어나요. 영화에서 동치성이 술 먹고 주정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이연이 귓속말로 “사랑해요”라고 말해주는 건데 그때 나영이가 막 울더라고요. 그런데 그 수위가 장진 감독이 의도한 정도가 아니었나봐요. 되게 당황스러워하더라고. 장진 감독이 나한테 와서 이거 지금 이상하지 않냐, 자기가 원했던 장면의 감정이 아닌 것 같다, 그러더라고요. 이나영_제가 리허설대로 안 한 거죠. 그때 많이 혼났어요. 리허설에서 감정을 드러내 보이면 현장에서 좋은 감정이 나오지 않을까봐 제가 일부러 마음을 닫고 있다가, 그래서 감독님이 말 시켜도 벽만 보고 저 혼자 감정에 집중하고 있다가 찍은 거거든요. 감독님께서는 그렇게 갑자기 톤을 올리면 상대배우가 놀라지 않겠느냐고 하셨고요. 그래서 제 연기 수위에 맞게 오빠가 리액션을 한번 더 찍는 수고를 하셨잖아요. 정재영_그런데 나는 그게 오히려 좋았어. 호흡이 처음에 안 맞을 수는 있지. 하지만 리액션이야 거기 맞춰서 다시 찍으면 되는 거잖아? 그런 부분을 상대배우가 고려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든. 저 배우가 왜 사전 약속대로 안 하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잘못된 거지. 나는 그때 나영이 느낌이 훨씬 좋았어. 동치성의 느낌으로 말하자면, 주사를 부리다가 갑자기 술이 확 깨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장진 감독님은 정재영씨의 코믹 연기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 “절실함과 품위에서 출발하는 코미디”라고 했습니다. =정재영_에? 뭐요? 절실… 품… 위요? 야아, 장진 감독이 포장을 엄~청 했네. 난생처음 들었네. 처음 듣는 얘기예요. 그 양반이 남의 칭찬도 흉도 앞에서는 안 해요. 다 뒤에서 하지. 이나영_(고개 끄덕끄덕) 정재영_그래도, 코미디란 게 원래 절실함과 품위가 있어야 나오는 거니까 그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네요. -동치성과 이연은 지금 생각해보니 어떤 인물인 것 같나요? =정재영_이연? 이연? 야 지금 들으니까 꼭 욕 같은데? 이나영_어, 정말, 욕하는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생각해도 이연은 괴짜예요. 혼자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 외로움을 자기만의 엉뚱한 형식으로 삼고 살아갔던 아이인 것 같아요. 그래도 이연이 참 좋았던 건… 뭔가 거창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정재영_나는 개인적으로 영화 첫 장면 기억이 많이 나. 내가 골덴 의상을 진짜 싫어하거든. 어렸을 때 하도 입어서. 그런데 그걸 갖고 왔더라고. 내가 이걸 입어야 하나, 그랬지. 그 장면에서 애드리브한 것도 생각나네. 옷까지 벗어던지고. 별걸 다 했네. 하루 종일 그렇게 찍었는데 그걸 점프컷으로 처리했더라고. (웃음) -<아는 여자> 이후 두분이 같은 영화에 출연한 적은 없습니다. 서로 연락은 하고 지내는 사이였는지요. 서로의 근황에 대해 알고들 계셨는지. =정재영_연락요? 잘 안 하는데… 하면 이런 걸로 해요. 전화해서 “야, 시사 와라”. 이나영_(말 받아서) 그러면 제가 “아니요, 저 바빠서 못 가요. 다음에 봐요”, 그래요. (웃음) 정재영_최근에는 (송)강호 형하고 나영이가 <하울링> 같이 하니까 그거 계기로 술자리에서 자주 봤네. 시시껄렁한 이야기 하고 놀았어요. 야, 술 사라 하면서. 같이 촬영하는 사람들 이야기도 하고. 그런데 여배우하고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고 지내기는 어려워요. 수다 떨고 할 내용도 실은 별로 없고. 따로 만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뭐, 개인적으로 만나면 나야 좋지만(웃음), 쉽지 않지요. 여배우들 만나는 게 일반인만 어려운 게 아니라니까. 이나영_(새삼 진지하게) 근데 여배우의 기준이 뭘까요. 까칠하고 말 잘 섞지 않고 하는 그런 모습을 여배우의 모습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시던데… 여배우는 여배우다워야 한다고요. 폼도 좀 잡아야 한다고요. 그런데 그것도 하는 사람만 하는 거지. 저 같은 사람은 잘 못해요. 필요할 때가 있긴 하겠지만… (기자를 쳐다보며) 근데 정말 여배우의 기준이 뭘까요? 가장 웃기게 나온 사진 실어주세요! -(우물쭈물 넘기며 급격하게 마무리하는 분위기로) <아는 여자> 이후의 행보에 대해, 서로의 연기에 대해 해줄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서로 덕담이랄까요. =정재영_다른 것보다 대한민국에서 이나영이라는 배우가 오랫동안 연기했으면 좋겠어요. 세월이 더 흘러서 <씨네21>이 17주년이 아니라 27주년이 되었을 때 다른 영화로 또 이런 자리에 나오는 배우로요. 그때 저 역시 다시 한번 함께 나올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겠지요. 이나영_에이 쑥스럽게. 저는 뭐 감히 드릴 말씀이 없어요. <아는 여자> 이후에 오빠는 배우로서 너무 자리를 잘 잡으셨잖아요. 정재영_야, <아는 여자> 같은 작품, 나하고 한번 더 하고 싶다고 그래. 그래야 나한테도 시나리오 들어와. 이나영_오빠는 <아는 여자> 이후 최고의 배우가 되셨고요. 건강만 잘 지키면 될 것 같아요. 정재영_야, 나하고 드라마 하나 같이 하고 싶다고 그래. 네가 한다고 그래야 나한테도 들어온다니까.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두분이 성별은 다르지만 성격은 비슷하다는 인상을 갖게 됩니다. =정재영_저는 낯가림이 심할 때는 되게 심한데요,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또 잘 어울려요. (그러다 문득) 그런데 배우들은 보면 다 정신병자 같아. 이나영_그러니까 배우 하는 거 아닐까요? 정재영_어떨 때 보면 나도 정신병자 같다니까. 그래서 그런가. 요즘은 나보고 자꾸 4차원이라고 해. 이나영_저한테도 그러는데요, 저는 정말 4차원이라는 기준을 모르겠어요. 4차원은 뭐고 2차원은 뭐죠? 정재영_나는 4차원 아니야. 2차원이지. 단순하니까. 가만, 2차원은 철이 없다는 건가?v 이나영_철없는 게 좋은 거예요. 정재영_철은 있었다 없었다 해야지. 사이코가 돼야 해. 이나영_맞아요. 왔다갔다해야 돼요. (진지하게)제가 얼마 전에 텔레비전을 보다 문득 생각난 건데요, 모든 인간은 코믹 본능을 전부 갖고 있는 것 같아요. 그걸 얼마나 표출하느냐가 문제인 거고요. 코미디를 할 때 굉장한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술을 먹거나 할 때 그런 걸 개발하기도 하는 것 같고. 저도 코미디 엄청 좋아해요. 루저 코미디를 주로 좋아해서 그렇지…. (사진기자의 말에 따르면, 이나영은 이날 찍은 사진 중 가장 웃기게 나온 사진을 실어달라며 특별히 부탁했다고 한다.) 정재영_아! 근데 내가 <언터처블: 1%의 우정> 봤거든? 재밌더라. <아는 여자>가 그런 과의 영화 아니었을까. 이나영_그러게요. 정재영_우리 <아는 여자> 속편 찍으면 프랑스에서 하면 좋겠다. 이나영_그래요, 프랑스에서 바바리 입고 우리 속편 찍어요. (갑자기 기자쪽으로 고개 돌리고) 근데 오늘 저희 찍은 거 표지 아니에요? (아니라고 하자) 에이, 사진 예쁘게 나오면 그래도 표지해주실 거죠? -…. 후기 종종 산으로 향했던 대화를 마치고, 인터뷰가 끝나 유쾌하게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는 여자>의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오른다. 동치성과 이연이 과일을 깎아 먹으며 다정하게 야구 중계를 보고 있다. 타자가 쳤고 수비가 공을 잡은 모양이다. 이연 방금 저렇게 친 볼을 잡아가지고요…. 동치성 수비가? 이연 예… 수비가 잡아서…. 동치성 땅볼로…? 이연 예, 땅볼로요. 잡아서 관중석으로 던지면 어떻게 돼요? 동치성 1루로 안 던지고요…? 이연 예, 그냥 확 관중석으로 던지면…. 동치성 (순간 이연의 뒤통수 치는 시늉을 지었다가)… 왜 거기다 던져요? 이연 재미있잖아요! 그런 거 보고 싶은데… 재미있겠다! <아는 여자>에서 동치성은 날아오는 공을 잡아 끝내 관중석으로 던진다. 이연 보고 재미있으라고. 우리는 산으로 가는 대화를 집어서 지금 당신에게 던진다. 역시 재미있으라고. 그게 <아는 여자>의 사랑법이고 대화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정신을 다잡고 영화의 장점을 말하려 애쓰는 개봉 시즌 때의 강박은 이날의 대화에 없었다. 따뜻한 봄날, 그냥 한나절, 편하고 나른하게 어울려 놀았던 한쌍의 이야기를 지금까지 전했다

[도서]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노라

이 책의 표지에 실린 사진을 보자. 처음에는 어떤 노년의 부인이 웃고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턱 아래쪽이 제거되고 얼굴 하단이 홀쭉해지면서 그런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일흔살이 되기 직전에 에버트는 갑상선암에 걸렸고 세 차례의 수술 끝에 입으로는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할 수 없게 됐다. 에버트가 심각한 병에 걸렸고 그 때문에 은퇴했다고 몇년 전에 들었다. 하지만 2012년 4월26일 현재에도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에버트는 하루 전인 25일에 존 쿠색이 주연을 맡은 <더 레이븐: 에드가 앨런 포의 사라진 5일>에 관하여 리뷰를 쓰고 별 두개를 주었다. 그는 영화에 관한 글을 멈추지 않고 있다. <로저 에버트: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는 그의 자서전이다. 그러고보니 영화평론가의 자서전을 읽어본 기억이 없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의 한 필자는 이 책의 서평을 쓰며 “에버트보다 훨씬 더 자기도취적이고 준유명인사인 평론가 폴린 카엘조차도 감히 자기의 자서전을 쓰지는 못했”음을 지적한다. 오로지 에버트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1967년부터 영화평론 book을 시작한 이후 미국에서 가장 손꼽히는 대중적인 영화평론가이자 텔레비전 영화 프로그램(<에버트&시스켈>)의 인기 진행자였고 또한 영화평론가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인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는 거동조차 불편한 상황에서도 영화평 쓰기를 멈추지 않는 인물이다. 에버트는 꿈 많던 청년기 시절을 되짚는 동시에 리 마빈, 잉마르 베리만, 마틴 스코시즈, 로버트 알트먼 등에 대한 단상과 일화로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이야기꾼의 기질을 발휘한 다음 현재의 상태로 다시 돌아와 말한다. “나는 내가 이보다 더 나쁘게 보이지 않아서 행복하다. 나는 삶을 계속 살아가기 위해 간단한 결정을 내렸다. 나는 글쟁이였다. 다른 외과적 시도를 제의받았지만, 나는 싫다고 말했다. 할 만큼 했다. 나는 내 지금 모습처럼 보일 것이고 나 자신을 활자로 표현할 것이다. 그리고 만족할 것이다.” 에버트를 위대한 영화평론가로 말하는 건 망설여진다. 다만 한 인간으로서 그는 위대하다. 결코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