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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전영객잔] 무엇이 영화입니까

세상에서 가장 게으르고 한가한 자세로 텔레비전 뉴스를 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경기도 부천시에서 일어난 어떤 좀도둑의 범죄행각이 단신으로 보도되고 있었습니다. 중대하기보다는 황당무계하다는 이유로 그날의 단신으로 채택되었을 이 사건을 접한 날, 저는 그만 더 황당무계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건이 저에게 무언가 영화에 관한 단상을 줄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빠져버렸던 것입니다. 저의 머릿속은 마치 단관 개봉관의 극장처럼 하루 종일 그 사건이 상영되고 또 상영되었습니다. 사태는 급기야 불어나더니, 올해 초에 인상적으로 보았던 어느 영화 한편까지 불러들이게 됩니다. 처음 볼 때는 의심스러웠으나 두 번째 볼 때는 신기했고 세 번째 볼 때는 탄복하게 된 라스트 신을 지닌 그 영화가 앞선 사건과 뒤엉키며 머릿속은 이제 동시상영관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니 무언가라도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 이것이 저의 올해 첫 번째 흥미로운 영화 체험이었다고 전하려는 것입니다. 부디 이 체험이 새롭고 아찔한 영화 생각으로 합체하고 변태하기를 스스로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린 그 허술한 범죄극의 내용부터 밝혀야겠지요. 어떤 중년의 여인이 빵집에 빵을 사러 들어옵니다. 이 여인은 9만8천원어치의 빵을 계산대 앞에 가져간 다음 1만원권 열장을 손에 쥐고 계산을 요구합니다. 당시 가게에 손님이 많아 바빴기 때문인지 혹은 그것조차 이 여인의 계략의 일종이었는지 알기란 어렵지만 여하간에 점원은 10만원을 받기도 전에 이미 거스름돈으로 건네줄 2천원을 손에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원과 여인은 동시에 서로의 돈을 건네려 합니다. 자, 그때 사건이 일어납니다. 여인은 순간 점원의 눈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는 동시에 속사포처럼 말을 붙여 정신을 흩뜨려놓은 다음, 순식간에 손에 들고 있던 10만원을 손 안에 숨깁니다. 점원은 돈을 받았다고 착각하고 이렇게 계산은 어처구니없이 끝납니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가게 안을 잠시 서성이던 여인은 잠시 뒤 계산대 앞으로 돌아와, 마음이 바뀌어서 빵을 사지 않겠다, 9만8천원을 환불해달라고 합니다. 점원은 요구대로 돈을 내줍니다. 믿기지 않지만 이런 방법으로 이 여인은 하루에 세건을 성공시켰고 30만원을 가져갔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나다니요. 아니나 다를까, CCTV를 판독한 한 마술 전문가는 그 여인의 손 기술이 마술사가 돈이나 카드를 조작하여 숨기는 기술, 즉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마술입니다. 때문에 이 사건은 일명 ‘마술 절도녀’ 사건으로 이름 지어졌습니다. 초기 영화사의 저 유명한 감독 조르주 멜리에스가 마술사 출신이라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습니다. 뤼미에르 역시 영화의 마술성과 함께 말해지곤 합니다. “동시대인들은 뤼미에르를 마술가로 여겼지 리얼리스트로 여기지 않았다”(토마스 엘새서)라고도 합니다. 둘은 영화가 착시의, 착각의 예술이라는 변치 않을 사실을 입증해줄 기원자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영화의 기원에 있어 마술사와 마술이 중요한 몫을 했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에 거꾸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니며 거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사건 자체를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사건을 전하는 뉴스들은 하나같이 ‘마술의 손 기술이 범죄에 쓰였고 그것은 현란했다’라는 점에만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반문하고 싶습니다. 정말 그것이 핵심일까요, 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여인의 머니-매니풀레이션 이라는 기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최종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좀도둑의 듣보잡 영화, 뇌에서 교묘히 상영되다 이 사건의 핵심은 그러므로 손 기술이 아니라 뇌 기술이며 손 조작이 아니라 뇌 조작입니다. 그리고 더 핵심은 이 뇌 조작이 단순한 눈속임을 넘어 ‘이미지’의 주입과 저장과 활동과 혹은 오작동을 통해 가능했다는 사실입니다. 계산이라는 실제 행위가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계산이라는 이미지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것은 저 여인이 점원의 뇌에 주입하고 투사하고 활동시킨 그녀의 이미지 연출법에 의해 가능했습니다. 물론 이건 마술의 일종에도 적용되겠습니다만 만약 이와 같은 유사한 체험을 안겨주는 매체나 예술이 있다면 그건 또 무엇이겠습니까. 가령 이미지의 조작과 조정과 연출과 연쇄와 활동과 지속으로서의 그것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지금 어느 좀도둑에게서 듣보잡 영화 한편이 막 연출되었고 한 점원의 뇌에서 그것이 교묘하게 상영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제목도 없고 가치도 없지만 일면 영화의 경험을 껴안은 채로 당사자들의 뇌에서 상영된 그 수상한 영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 여인은 나쁜 범죄자이며 뛰어난 마술사이고 동시에 본능적인 영화감독입니다. 우스꽝스러운 과장이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태야 우스꽝스럽고 비도덕적이지만 그 작동에 대한 생각은 신중하고 모험적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늘 말해져왔거나 시도되어온 영화의 중요한 일면이기 때문입니다. 현세와 전생을 오가며 어느 쪽이 어느 쪽을 투사하는 것인지 궁금하게 만들었던 영화 <엉클 분미>의 감독 아 핏차퐁 위라세타쿤은 문득 이 영화의 영감에 관하여 말하다가 “명상 자체가 곧 영화 만들기”라는 말과 함께 “우리의 뇌는 최고의 카메라이며 영사기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걸 적절하게 작동시키는 방법을 찾을 수만 있다면 말이지요”라고 고백합니다. 혹은 그렇게 뇌가 저절로 카메라와 영사기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아핏차퐁이 “저 사람의 머릿속이 정말 궁금하다”라며 가리킨 감독은 홍상수입니다. 홍상수는 우리의 뇌를 훔칩니다. 그의 영화를 본다는 건 때로 우리의 뇌가 너무 왕성해지는 자극을 받는 바람에 오히려 정신줄을 놓는다는 뜻입니다. <북촌방향>에서 술집 여주인이 눈앞에 있는 손님을 향해 평소와 다르게 “오빠”라고 호칭을 바꿔 부르자, 그 순간 그 인물의 존재감과 앞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와 그들 장면 앞에 펼쳐졌던 다른 장면들과의 관계가 순식간에 얽히고 흔들려서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았습니까. 혹은 그런 홍상수 영화에 관한 가장 뛰어난 논평자이자 동반자인 허문영이 ‘아덴만의 여명’, 즉 영화 같다고 칭해진 한국 정부의 살육 작전을 두고 “김선일 사건, 연평도 사건으로 집약되는 현실의 불안과 두려움을 달래주는 국가적 반격의 시뮬라크르”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그 자체가 액션영화가 아니라 그 사건에 관한 시청각적 정보를 우리가 액션영화의 틀로 받아들였다거나, 우리의 뇌가 그것을 액션영화로 재상영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 것”이라고 마침내 통찰력있게 설명해낼 때, 우린 저 먼바다에서 벌어진 살육이 우리의 뇌에서는 어떻게 한편의 액션영화로 변모하는지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들뢰즈는 더 간단히 자기 식대로 말했습니다. “뇌는 스크린이다.” 그리고 덧붙이지 않았습니까. “스크린,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은 창조적인 뇌일 수 있는 만큼이나 백치의 결함있는 뇌일 수도 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부천의 어느 빵집에서 벌어졌던 그같은 뇌의 체험과 영화의 체험에 관하여 저는 저의 영화적 이해로써 일단락지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알고 보니 마술 절도녀가 연출한 이 영화는 그녀가 잡히기 전까지 전국 각지에서 100회 이상 순회 상영하였으며 회당 대략 수10만원의 상영료를 챙겼고 도합 2700만원이라는 흥행 수익을 냈다고 하니 그 백치의 뇌(영화)는 한두 사람의 무지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마술 절도녀의 흥행 신화를 가능하게 한 요소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입니다. 역시 첫 번째는 ‘시선’의 활용입니다. CCTV 안의 그녀가 1만원권 열장을 차례로 착착 세거나 혹은 톡톡 건드리는 것을 보십시오. 그녀는 그때 영화적으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요. 시선이 발생하기를 바라는 것일 겁니다. 관객(점원)의 시선이 그 열장의 1만원권에 고정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의 눈이 돈을 보고 그의 뇌가 돈을 알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서의 시선이란 종종 앎이라는 문제 혹은 착각으로 이어지니까요. 마술 절도녀가 영화사의 중요한 시선의 역사를 알지는 못했겠지만 그녀는 이미 뇌를 촉진하는 시선의 기능을 몸소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저 시선이 무언가 의미를 동반하는 표현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더 중요해 보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시선을 잡아둘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그 표현법으로 이른바 제유법이 쓰였다고 생각합니다. 제유법이란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비유법”이며 왕관을 보자 왕을 떠올리고 왕의 권력까지 떠올리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시선을 휘어잡아 점원의 인식을 돈에 잠시 묶어둘 때, 점원은 단지 10만원이라는 ‘돈’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 돈을 봄으로써 결국 ‘10만원을 지불하다’라는 전체의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유사한 경험을 고백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자크 랑시에르는 니콜라스 레이의 <그들은 밤에 산다>의 한숏을 논평하는 것이 필생의 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논평을 꿈꿨던 그 숏은 그 영화에 애초부터 없는 것이었고 그의 상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때 그의 착각을 불러온 제일의 이유로 그는 그 영화에서 얻은 어떤 제유법의 경험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랑시에르의 어려운 분석을 더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일부를 보고도 전부를 알았다고 생각되는 이 상황의 돈의 제유를 이해하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마침내 결정적인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그건 청각적 요소, 말의 사용입니다. 이것이 이 범죄의 내러티브를 더욱더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마술사들이 관객의 시선을 뺏기 위해 가장 손쉽게 하는 술수가 잡담과 수다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술 절도녀는 범죄 행각 내내 쉬지 않고 말을 시켜서 점원의 혼을 빼놓았다고 합니다. 공회전하는 말이 가세하여 시선이 짜놓은 내러티브를 인정케 하는 것입니다. 그건 영화적 마술이 가장 잘하는 것이기도 한데, 어떤 영화는 시각과 청각의 조화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둘의 부조화로서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애초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그 기술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최종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이 영화의 기술은 혼자 기능하지 않고 반드시 다른 것들과 함께 가동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현실에 등장한 한편의 기이한 영화가 마침내 그런 식으로 상영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화란 늘 시청각의 감응을 재배열합니다. 우리의 뇌도 늘 시청각의 감응을 재배열합니다. 마술 절도녀가 연출하고 관객인 점원이 인지한 신종 영화의 전말이란 그런 것입니다. 점원은 10만원이라는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10만원이라는 이미지를 받은 것이고 10만원의 이미지라는 활동하는 영화를 건네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영화라도 이미 그건 성사되었고 상영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이 영화의 활동에 대한 이러한 이해가, 제가 말하려는 다음 영화에 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매니풀레이션’ 기술로 우리를 조작한 다르덴 형제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 마술 절도녀와의 동시상영작이라 말씀드렸던 바로 그 영화입니다. <로나의 침묵>까지 다르덴 형제 영화의 미학은 크게 변한 바가 없습니다(적어도 제가 본 <약속>부터는 그렇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한 가지 곤궁을 겪어야 했는데 이제는 그들의 영화도 매너리즘에 빠진 게 아니냐는 일각에서의 질타였습니다. 그런데 <자전거 탄 소년>으로 다르덴 형제는 전에 없이 다른 영화적 방식을 도모한 것 같습니다. 놀랄 정도로 말입니다. 변화란 무엇일까요. 그들이 처음으로 따뜻한 동화를 만들었다는 그 사실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또는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그들 영화에 처음으로 음악이 본격 사용됐다는 점일까요. 그것도 얼마간은 맞을 겁니다. 그런데 당장 눈에 보이는 그런 것들이 다르덴 형제 영화의 가장 큰 변화일까 생각해보면 그다지 결정적이라는 생각이 영 들지 않습니다. 혹은 말해지지 않은 중요한 무언가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말하는 라스트 신으로 생각을 한번 돌려보면 어떨까요. 영화의 가장 육중한 감동이 서린 장면, 그렇다면 거기에 무언가 결정적인 변화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요. 먼저, 다르덴 형제 영화의 리얼리즘에 관해 잠깐 우회적으로 말해야 할 겁니다. 이때 그들의 리얼리즘이란 소재적으로 비슷한 켄 로치나 로랑 캉테의 리얼리즘과는 다른 것이라 생각됩니다. 켄 로치의 리얼리즘이란 극의 리얼리즘입니다. 켄 로치는 극화된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인물의 이야기를 최대한 리얼하게 그리려는 영화적 목표를 갖고 있습니다. 로랑 캉테의 리얼리즘이란 상황의 리얼리즘 혹은 중계의 리얼리즘이라고 부를 만한 것입니다. <클래스>가 확실히 그 점을 보여줍니다. 그는 교실 안 풍경이라는 상황을 마치 중계하듯이 리얼하게 포착합니다. 여러 대의 카메라로 숏과 리버스 숏과 인서트를 오가며 전체를 꼼꼼하게 조망하려 합니다. 다르덴 형제의 리얼리즘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리얼리즘은 카메라에 한계를 부과하고 고스란히 인정하는 리얼리즘입니다. 그들은 카메라 한대에 핸드헬드를 써서 인물을 쫓으며 (로랑 캉테라면 포착하고야 말) 그 나머지 풍경과 상황은 수시로 놓쳐버립니다. 그걸 보충하기 위한 숏과 리버스 숏과 인서트 등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세계를 그럴싸하게 담아 보여주겠다는 인상을 애당초 포기하고 있으며, 그 보완으로써 필요한 시각적 보완 장치들도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그들의 리얼리즘은 오로지 인물과 카메라 사이의 물리적 거리감이 팽팽하게 느껴지는 그런 것입니다. 이때 영화가 스스로 정서적 효과를 높이는 방법은 그 인물과 카메라의 일대일의 ‘물리적 전압’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로써 그들이 저항감이라고 말하는 대상과의 그 마찰력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떠한 다른 조작도 기술도 거의 쓰지 않으려는 이 감독들의 미학입니다. 저는 그런 그들의 리얼리즘을 마찰의 리얼리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하게도 이 마찰의 리얼리즘의 핵심은 지금까지는 적어도 그 어떤 영화적 조작이나 장치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자전거 탄 소년>에서 바뀐 것 같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자문해보겠습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라스트 신도 그와 같은 리얼리즘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인가요.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며 이 라스트 신에서 놀란 것은 시릴이 일어났다는 점 때문이 아니라 시릴을 쓰러뜨리고 일으키는 그 방식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새로운 조작이 있습니다. 부디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여기서 제가 조작이라 쓰는 표현은 그들의 영화가 사기꾼의 영화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럴싸하게 꾸며냄’이라는 사전적 용어 그대로, 어떤 가치 훼손의 뜻 없이, 무언가 다른 인공적 영화 화법을 도입했음을 말하기 위한 표현입니다. 시릴은 사만다의 심부름으로 바비큐 파티에 필요한 숯을 사러 갔다가 그만 신문 판매상 부자(父子)를 만나게 됩니다. 영화를 본 당신이라면 시릴이 동네 나쁜 형의 꾐에 빠져 한때 그들 부자를 방망이로 때려눕히고 돈을 갈취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겁니다. 물론 법적으로는 용서 받은 다음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시릴을 본 상점주인 아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시릴을 쫓아가 때리고 시릴은 도망가고 그러다 숲의 나무 위로 시릴이 올라갔을 때 상점주인 아들은 시릴에게 돌을 던집니다. 한번 던지고 두 번째 돌을 던졌을 때 시릴이 별안간 그 돌에 맞아 퍽 하고 땅바닥으로 추락합니다. 자, 이때의 솔직한 심정을 당신께 질문하고 싶습니다. 시릴이 그렇게 추락하여 땅바닥에 누워 있을 때 그걸 본 당신도 역시 저처럼 소년의 죽음을 떠올린 것 아니었습니까. 말하자면, 그때 이미 ‘저 소년은 단지 돌에 맞았을 뿐 잠시 뒤에 깨어날 것이다’ 하고 알아차린 사람은 몇이나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의 궁금증은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시릴의 상태에 관하여 아직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습니까. 엄밀히 말해 시릴은 그때 돌에 맞아 ‘쓰러진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시릴이 죽었다고 미리 생각한 것일까요. 무엇을 근거로 말입니까. 왜 우리의 뇌는 먼저 움직이고 확신하여 시릴의 죽음이라는 판단을 먼저 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러니까 우리는 착각을 했던 것이고 그 착각이 이 라스트 신의 역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과정 때문에 우리의 그 착각이 생긴 것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 반전이 사실 처음에는 좀 의심스러웠습니다. 억지로 신적인 것을 개입시키기거나 잠시 뒤에 뒤집힐 반전에 두배의 감동을 느끼기를 바라는 다르덴 형제의 꼼수로 느껴졌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쇼크 효과로 보였고 다르덴 형제 영화 미학의 위험한 수신호라고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마술 절도녀와의 영화를 함께 생각해보니 다르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것이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자전거 탄 소년>에 앞서 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선 <자전거 탄 소년>의 이 라스트 신을 ‘인간-매니풀레이션’ 기술이 작동한 장면이라고 부르려 합니다. 마술 절도녀의 그 기술이 머니-매니풀레이션 아니었습니까. 머니-매니풀레이션이 돈으로 우리를 조작하였다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지금 저 시릴로 우리를 조작하고 있습니다. 마술 절도녀가 머니-매니풀레이션이라는 기술로 점원에게 돈을 받았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다면 이 장면에서 다르덴 형제는 인간-매니풀레이션으로 우리에게 시릴이 죽었다는 착각을 심어주었습니다. 당연히도 여기에는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매니풀레이션과 함께 작동하는 몇 가지 요인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시릴의 추락입니다. 즉 육체의 추락입니다. 시릴의 몸이 땅바닥으로 고꾸라지면서 영화적으로 무엇이 발생했는지 우리는 묻지 않아도 앞선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돈에 꽂혔던 점원의 그 시선처럼 시릴의 추락을 따라 여기서는 깜짝 놀란 시선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실은 두 번째 단계도 유사합니다. 제유법이 발생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겠습니다. 시릴의 추락하는 몸을 따라, 그리고 쓰러져 있는 시릴을 두번이나 보여줌으로써, 즉 ‘추락과 쓰러짐’이라는 사태의 일부분으로써 이 장면은 시릴의 죽음이라는 전체를 착각하도록 우리를 유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때 신문판매상의 부자는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까. “저 아이가 죽었다면…”이라는 대화를 나눕니다. 그 부자의 말들이 마침내 ‘시릴은 죽었다’는 내러티브를 그 순간까지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를 혼선에 빠뜨리는 청각적 정보들입니다. 물론입니다만 이 장면의 압권은 그 모든 걸 걷어 치우고 사만다의 사운드(전화벨 소리)가 시릴을 일으킨다는 데 있을 겁니다. 가짜 청각의 정보를 진짜 청각의 정보가 밀어내고 소년을 일으키는 것 말입니다.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 우리는 앞서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예제로 지금 <자전거 탄 소년>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해본 것입니다. <자전거 탄 소년>의 라스트 신에 관한 감상들은 대개 차이없이 부활과 면죄와 구원과 기적 등등의 낱말로 추려집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을 받아들이기 전에 뇌의 조작과 착각이라는 영화적 과정이 먼저 작동하였음을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르덴 형제의 숨겨진 가장 큰 변화점입니다. 그러니 <자전거 탄 소년>에서 가장 크게 주목해야 할 궁극적 변화 지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그건 그들의 완강한 물리적 활동으로서의 영화에 뇌의 활동으로서의 부분적 개입이 영화의 정점을 통해 허용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 그들은 지금까지 손대지 않았던 뇌의 조작을 그리고 활동을 허용한 것일까요. 저는 오히려 이것이 리얼리티의 약화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서 리얼리티 감각을 강화하기 위해서라고 느낍니다. 문제는 언제나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리티 아니겠습니까. 이 장면의 경험으로 적어도 우린 한 가지를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확실한 건 없다는 확실함 말입니다. 소년은 죽은 줄 알았지만 쓰러졌던 것이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떤 일이 다시 일어나도 그건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가 알려준 삶의 리얼리티의 확실성입니다. 그렇다면 저 멀리 자전거를 타고 프레임을 벗어난 소년이 사만다를 향해 가다가 다시 한번 후유증으로 쓰러질 것인지, 사만다에게 잘 돌아갈 것인지, 우린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게 이 영화의 진짜 리얼리티이기 때문입니다. 다르덴 형제가 다큐에서 출발한 감독들이라는 사실을 저는 기억하고자 합니다. 고다르는 연극과 극영화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 연극에서 사람이 죽으면 극이 끝나고 그가 다시 살아난다고 관객이 당연히 믿지만, 극영화에서 사람이 죽으면 때로 그는 그 죽음으로 남는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 대한 저항적 인용인지 혹은 우연한 조응인지 알 수 없으나 다큐 감독 김동원은 극영화와 다큐의 차이를 지으며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게 극영화이고 사람이 죽었을 때 정말 죽는 것이라면 그게 다큐라며 극영화와 다큐의 차이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삶에서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단 하나의 진실에 가까운 리얼리티이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을 겁니다. 다르덴 형제 영화 중 가장 순진해 보이는 이 영화의 에필로그에 이렇게 다큐적 세계관이 뇌의 활동 이후에 새겨져 있습니다. 결국 이 장면의 조작은 그 삶의 리얼리티를 역설하기 위한 조작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제 생각에 <자전거 탄 소년>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한 소년의 동화라기보다는 한편의 영화가 어떻게 삶의 리얼리티를 순간 체험케 되는가를 질문으로 삼은, 리얼리티에 관한 동화처럼 보입니다. 세계에는 무수한 영화의 계열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뇌를 조작하고 활동시키는 것으로 보이는, 그러나 외양적으로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두편의 영화를 한 계열 안에서 말해보고자 했습니다. ‘마술 절도녀’와 <자전거 탄 소년>의 계열화 말입니다. 물론 마술 절도녀 사건은 실화일 뿐 실제 영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제게 두개의 양상은 서로의 거울이자 서로의 영화적 현실로 보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술 절도녀를 예제로 놓고 <자전거 탄 소년>을 겹치면서, 동일한 분석법으로 두 영화의 몸통을 거치면서, 그럼에도 다른 결론에 이르려고 애쓴 이유입니다. 이것을 영화에 관한 두 가지 우화라고까지 말씀드리고 싶어집니다. 하나는 현실에서 어처구니없이 상영되었고 또 하나는 영화에서 기어이 현실성을 강화하려고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술 절도녀는 감옥으로 갔고 다르덴의 영화는 우리를 감동으로 이끌었다는 차이가 있을 겁니다. 마침내 하나는 ‘현실 안에서의 영화(마술 절도녀의 영화)’이고 또 하나는 ‘영화 안에서의 현실(<자전거 탄 소년>)’인 것입니다. “예술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다. 반영이라는 현실이다.” 고다르는 그 명제를 믿는다고 강고하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줄곧 이 문장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이 순간의 저에게는 현실의 반영과 반영이라는 현실, 그 둘 다 중요해 보입니다. 조금 비틀어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자전거 탄 소년>을 현실의 반영으로 놓고 마술 절도녀의 영화를 반영이라는 현실로 놓고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반대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위대한 영화평론가의 질문, 영화란 무엇인가 하는 그 대전제가 저는 늘 힘겨웠습니다. 그래서 종종 그걸 뒤집어 비추어서 ‘무엇이 영화인가’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그 예로서 뇌를 활동시키는 영화의 어떤 계열에 관하여 잠깐 탐색해보았습니다. 그저 이렇게 한번 질문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영화입니까, 아니 무엇들이 영화입니까, 어떻게 서로 영화입니까.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말 많은 오빠, 나쁜 오빠야

텔레비전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언제부터 가사를 보여주기 시작했을까. 자막처럼 가사를 보여주는 건 반대지만 (전 음악도 못 듣고 춤도 못 보고, 자꾸 그걸 읽고 있단 말예요! 음악을 자막으로 배운단 말예요!) 아이돌 그룹들의 현란한 노래와 랩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가사의 내용이 어찌나 ‘아스트랄’ 하고 괴이하고 직설적인지, 자막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노래와 퍼포먼스와 가사의 불일치 때문에 배꼽을 잡는 경우도 많다. 걸그룹들의 노래는 대부분 ‘너는 정말 나쁜 남자다’라거나 (그래서) ‘남자와 곧 헤어질 예정’이거나 (아니다) ‘내가 오히려 나쁜 여자다’라거나 (이럴 바엔) ‘다 싫어, 전부 꺼져버려’(라며 ‘멘붕’의 극단을 보여주는) 가사들이 많은데, 이토록 가사는 슬프고 비트는 살벌하게 빠르고, 춤은 몸살나게 애크러배틱한 이유에는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빠른 음악 속에서 너의 몸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이겨내도록 하여라”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걸그룹들의 무대가 슬프다. 관심이 깊어지고 있는 걸그룹(이라고 말하기엔 모호하지만 장현군이 입대하는 바람에 이제는 진정한 걸그룹) ‘써니힐’은 ‘아스트랄 걸그룹’의 한 극단에 있다(반대쪽엔 에프엑스?). 써니힐의 가사를 보고 있으면 정신줄을 놓은 멍한 모습의 누군가가 보인다. 3인조였을 때나 <최고의 사랑> O.S.T <두근두근>을 부를 때만 해도 멀쩡한 사람들로 보였는데, EP 《Midnight Circus》에 든 을 들으면서 이들의 남다른 해괴함을 눈치채고 말았다. 은 미성과 코타가 작사에 참여한 곡인데, 노래 중에 갑자기 연기를 한다거나 내레이션을 한다거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구어’를 끌어들여 노래를 풍성하게 만드는 솜씨가 놀랍다. 써니힐은 해괴함을 숙성시키더니 결국 다음 앨범에서 <나쁜 남자>라는 불세출의 괴작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이 곡 역시 미성과 코타가 참여했다). 2012년을 사는 한국 사람이라면 <나쁜 남자>를 듣는 순간 자동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리게 된다. 가사가 이렇다.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오빤 말이 많아… 남들의 시선 따윈 눈이 작아 안 보여요 (우리 오빤) 남들의 의견 따윈 귀가 잘 안 들려요 (우리 오빤).’ 물론, 그분을 직접적으로 ‘디스’하려는 목적은 아니었겠지만 (설마, 그랬어?)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전해지는 ‘어떤 통쾌함’은 숨길 수가 없다. 2012년의 한국을 이런 식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 거구나. 써니힐이 신곡 <백마는 오고 있는가>를 발표했다. (히트메이커이자 계속 함께 작업하고 있는) 김이나 작사, 이민수 작곡의 노래지만 이젠 뭘 해도 써니힐만의 색깔이 묻어나고 있다. 시원하고 통쾌하다. 써니힐, 이대로 쭈욱, 앞으로!

대신 웃어드립니다

‘하이킥’ 시리즈 중에서 가장 문제작이지만 그에 합당한 주목을 덜 받은 것이 바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짧은 다리의 역습>)이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지목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리즈가 노골적으로 블랙코미디를 표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거보다도 더 정공법을 택했다고 할까, 그래서 시청자에게 현실에 대한 위트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위트는 현실에 대한 재치있는 비틀기인데, 약간의 냉소가 묻어 있는 유머의 기법이다. 전작에 비해 <짧은 다리의 역습>은 이런 위트의 특성을 많이 살려서 코미디는 코미디이되 상당히 뒤틀린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전 시리즈에서 ‘하이킥’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라는 것은 현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다르게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극중 캐릭터는 현실의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형이기도 하다. 전형은 현실을 비례적으로 재현하는 지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전 시리즈에서 현실은 상당히 추상적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짧은 다리의 역습>은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암울한 취업준비생이 나오고, 우울한 청소년 교육현장이 그려진다. 또한 부도를 맞아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되는 중소기업 사장과 그 가족이 등장한다. 이런 설정과 어울리지 않게 규범적인 ‘의사들’이 과장되게 그려진다. 익숙한 현실이 되풀이되는데, 어딘가 이상하게 경직되어 있다. 극중 한명은 나와 겹친다 이런 방식은 확실히 베르그송이 언급한 웃음의 원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짧은 다리의 역습>은 자연스럽지 않은 뻣뻣한 제스처를 보여줌으로써 웃음을 자아내는 희극의 본질을 구현한다. 슬랩스틱은 아니지만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가 담고 있는 정서를 이 시리즈에서 느낄 수 있는 것도 흥미롭다. 채플린 영화에서 프롤레타리아는 부랑자와 겹치면서도 헤어진다. <짧은 다리의 역습>도 마찬가지로 심각한 사회문제를 두 갈래로 나눠서 보여준다. 이런 까닭에 한참 웃다가도 뒤끝이 남는다. 극중 캐릭터 중 한명과 자신이 반드시 겹치기 때문이다. <짧은 다리의 역습>이 환기시키는 현실은 이렇게 웃음 뒤에 남겨지는 ‘씁쓸한 실감’이다. 물론 코미디이기 때문에 상황은 슬픔을 극대화하지 않는다. 슬픔이 발생할 지점을 웃음으로 대체하는 것이 전략이다. 시청자가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발견하는 것은 웃지 못할 현실이지만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웃을 수 있다. 바로 아이러니의 상황이다. 웃기지 않은 현실이 웃음의 소재로 바뀌는 순간을 곳곳에 숨겨뒀다.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고 호흡을 따라가면서 웃음보가 터진다. 그러나 삽입되는 웃음소리는 웃어야 할 지점을 시청자에게 알려준다. 웃음은 처음부터 극을 구성하는 요소로 설정되어 있다. 시트콤이라는 장르의 논리가 작동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웃음의 지점들을 정해놓음으로써 시청자를 유도하는 장치를 만들어놓은 것이기도 하다. 평등의 실현을 논의하며 소통하기 ‘웃음의 유도장치’ 덕분에 하이킥 시리즈는 시청자와 호흡하는 통로를 설치할 수 있다. 현실을 대신 웃어주는 것이 하이킥 시리즈의 역할이다. 현실에서 ‘이게 사는 건가’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탄식할 때, 하이킥이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이들을 대신해서 웃어준다. 이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시청자는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누구도 혼자 웃을 수 없다. 모두가 웃는 것이다. 웃고 싶지 않더라도 웃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이킥 시리즈가 평등주의를 설파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평등주의에 집착했다면, 하이킥의 결론은 훨씬 윤리적이었을 것 같다. 이렇게 쉬운 길을 택하기보다 복잡한 공리주의의 논쟁을 택하는 것이 하이킥 시리즈의 특징이다. 결국 평등은 실현되는 것이지 원래부터 그렇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평등을 실현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는 것이 이를테면 하이킥 시리즈가 시청자와 소통하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하이킥 시리즈는 누구의 편도 들어주지 않는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구분되지 않고, 도덕과 비도덕이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마치 ‘바보들의 배’처럼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군상이 각자의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현실에 대한, 방향성 없이 무질서한 묘사들을 보고 불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짧은 다리의 역습>의 경우는 현실에 대한 풍자의 기능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에 무질서한 현실성을 그려내는 것이 무책임하게 느껴져서 거부감을 줄 수 있다. 특정 현실의 거울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 웃고 즐겨야 할 코미디가 갑자기 심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맞지 않은 옷을 걸친 형국이 되어 외면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딜레마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짧은 다리의 역습>은 하나의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보여주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한계를 여유롭게 넘어서고 있다. 상호 참조를 통해 이야기들이 서로 교직되게 만드는 독특한 구조가 돋보인다. 예를 들어, 전작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카메오로 등장하는 장면은 <짧은 다리의 역습>이 시청자에게 말을 거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하이킥 시리즈를 봐온 이들에게 이런 카메오 출연은 이전 시리즈에서 <짧은 다리의 역습>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들을 찾게 한다. 대중문화 내에서 참조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장르화를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이킥 시리즈가 단순한 연작의 수준을 넘어서서 하나의 코드로 독특한 장르의 논리를 형성할 수 있는 가능성이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자가 발전의 형식을 갖추었다는 점에서 하이킥 시리즈는 일종의 문화코드로서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해당 시리즈마다 시시각각 변해온 정서들을 담고 있기에 하이킥 시리즈는 특정한 시기를 이해할 수 있는 거울이기도 하다.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 백진희 20대의 표상 <짧은 다리의 역습>에서 가장 흥미를 끄는 캐릭터는 백진희이다.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백진희가 극중에서 가장 ‘현실’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캐릭터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지만 대체로 ‘다른 세계’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백진희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실체적으로 재현되지 않는 20대를 대표하는 캐릭터이다. 고시원에 살고, 밥을 굶고, 온갖 사회의 협잡에 휘말려 좌충우돌하는 모습은 이 사회에서 20대가 처해 있는 상황을 암시한다. 백진희가 특히 ‘궁상맞은 느낌’을 주는 이유이다. 그는 악역이다. 캐릭터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역할이 그렇다. 공중으로 떠오르는 열기구를 붙잡아두는 모래주머니 같은 존재가 백진희이다. 신세경이 시리즈 전체를 주도하던 관찰자였다면, 백진희는 가끔 등장하는 주변인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당신의 3일은 어떤가요?

총선이 있던 4월11일에 홍대 근처에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서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고 볼일을 보러 나간 것이었는데, 모임이 저녁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한 클럽에서는 ‘우리 모두 모여서 총선 개표 방송을 보아요’라는(설마 지기야 하겠어, 싶은 마음의) 긍정적인 문구를 내걸고 조촐한 행사를 만들었다. 나도 그 자리에 가게 됐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무거울 수밖에 없지, 우리 모두 이제는 선거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지만 투표함 뚜껑을 막 열었을 때는 우리 머리 뚜껑도 함께 열린 상태여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울어, 말아? 홍대를 포함한 마포 구역을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는 고소 전문 후보가 참담한 득표율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몇몇 지역구에서 예상외의 선전을 하는 후보들을 보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숨을 쉴 때가 더 많았다. 트위터에서는 진보신당이 여당이고 녹색당이 제1야당이었는데, 새누리당 이야기는 욕밖에 없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이게 뭐냐며 모두들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트위터의 그 많은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이며, 저 이상한 결과는 어떻게 나온 것이냐며 모두 눈을 의심했다. 심상정을 비롯한 몇몇 후보들이 살떨리는 각축전을 벌이지 않았다면 진작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술이나 마시러 가자며 일어나려는데, 아, 내 고향 김천의 선거 현황이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잠깐, 이것만 보고 나가야 하는데 떠밀려 계단을 올라가다가, 아, 나는 그 놀라운 수치를 보고야 말았다. 83.5%. 내 고향 김천에서 야당 국회의원이 선거 대혁명을 일으켰을 리 만무하니, 그렇다면, 저 수치는…, 아니나 다를까,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득표율이었다(83.5%는 최종 득표율이고, 내가 텔레비전을 보았을 때는 득표율이 더 높았던 걸로 기억한다. 83.5%는 결국 전국 최고 득표율이 됐고). 나는 83.5라는 숫자를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선된 의원을 비난하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워낙 여권이 강세인 지역이었지만 83.5%는 이해가 되지 않는 숫자였다. 나는 그 숫자를 보다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래, 어머니와 아버지를 잊고 있었네. 오늘, 김천에서 투표하셨겠구나. 포맷의 승리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넓고 별일이 많다. 홍대에서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들은 우리가 응원하는 정당이 당연히 선거에서 이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트위터 밖에도, 컴퓨터 밖에도 많았다. 그 평범한 사실을 자주 잊는다. 평범해서 잊게 되는 건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그런 깨달음이 퍼뜩 떠오를 때가 많다. 내가 뭘 잊고 있었는지,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이 무엇인지. 요즘 가장 즐겨 보는 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이하 <다큐 3일>)에도 그런 ‘퍼뜩’ 하는 순간이 자주 나온다. <다큐 3일>은 ‘포맷’의 승리다. 어떤 삶이든 3일만, 72시간만 졸졸 따라다녀보면 그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는, 야심차고 건방진 기획인데 프로그램을 보다보면 그 기획에 설득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삶과 인생은 반복이고, 기껏 변주돼봐야 3일의 패턴 속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잔인하고 섬뜩한 진실이다. 방송의 제목 리스트만 봐도 프로그램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그들만의 여행-환경미화원 3일’, ‘생존의 방법-대구 곱창골목’, ‘엑스트라, 그들이 사는 세상-드라마 촬영장 3일’, ‘공존의 방법-성남 기름골목’ 등 이른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좁은 지역에서의 지속적인 삶을 보여주는데, (제작진에는 미안한 얘기지만) 프로그램을 날로 먹을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획이다. 얼마나 할 게 많을까. 얼마나 찍고 싶은 3일이 많을까. 물론 알맞은 소재 선정에 고충이 따를 테고, 사전 대본 없이 ‘완전 리얼’로 카메라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찍어야 하니 민감한 문제가 많겠지만 이 정도로 딱 떨어지는 기획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소설가의 3일은 고작 10분? 좋은 기획은 파급력이 크다. 아마 내 생각엔 프로그램을 본 사람들 모두 ‘자신만의 3일’을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주인공이 된다면, 내 삶의 3일을 찍는다면 어떨까. 나도 생각해봤다. 만약 찍게 된다면 제목은 ‘3일을 찍어도 분량이 모자라요-소설가의 3일’. 소설가 마을이 있어서 함께 소통하는 장면을 찍기도 힘들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많지 않고, 작업도 ‘액션’이 적으니 참으로 심심한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술 마시는 장면만 자주 나오려나. 3일 찍어도 한 10분이면 방송 끝나겠지. 소설가를 촬영할 순 없겠지만 소설가에게 이보다 더 좋은 프로그램이 없다. 소설 속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생활’과 ‘반복’이 필요한데, <다큐 3일>에는 수많은 생활과 생활에 녹아든 캐릭터가 무수하게 등장하니, 이런 산삼밭이 또 없다. 세상엔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들의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그 힘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구나 생각하면 가끔 콧날이 찡할 때도 있다(솔직히, 자주 울었다). 개표 방송을 보다가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처럼 <다큐 3일>을 보면서 자주 어머니, 아버지를 떠올렸다. 반복을 인정하고 즐거움을 찾는 일 프로그램에 등장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결국 인생이란 반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다음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일이라는 걸 (나만 뒤늦게) 깨달았다(다들 진작에 알고 있었던 거야!). 때때로, 삶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건 아직 반복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투표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투표 이야기로 끝내자면,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다큐 3일>에 등장하는 저 사람들, 자신의 삶이 반복되는 건 상관없지만 자식들에게 자신의 반복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야 할 것이다. 저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아서,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는 일은 막아야 할 것이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74회 '인생 만물상, 고물상' 인생의 한계선 아래에 있는 사람들 주옥같은 에피소드가 많지만 최근의 개인적인 관심사 때문에 ‘인생 만물상-고물상 72시간’을 재미있게 보았다. 고물을 주워다 팔고 돈 몇천원을 받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고물을 팔아서 번 돈으로 기부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2500원을 벌어 끼니를 때울 라면을 사는 사람도 있었다. 73살 안막내 할머니를 보다 울컥했다. “허리는 꼬부라지고 다리는 힘도 없고, 안 죽으려면 부지런히 해야죠”라며 구형 폴더폰처럼 접힌 허리를 펴면서 “아이고, 아버지, 아버지”라는 신음소리를 내뱉는데, 울컥하고 말았다. 뒤이은 고물상 사장님의 말이 프로그램을 요약한다. “인생을 알려면 어느 한계선이 아니라 그 밑을 봐야 해요. 밑을. 우린 항상 위만 보면서 살잖아요. 인생이 무엇인가. 여기 있어보면 그냥 눈물이 나올 거예요.”

[SO WHAT] TV를 켜면 욕이 나온다

인디 밴드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우정 모텔≫ 앨범 속에 수록된 <생두부>라는 곡이 있다. 최근에 내가 가장 열광적으로 좋아한 가요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는 느릿한 곡조의 유장한 매력이 있는 데다가 가사가 압권이다. 특히 이 부분이 그렇다. ‘내 방의 고요, 동네의 정적, 우주의 큰 침묵 속에서, 나만 떠드네. 우~ 난 언발란스!’ 그럴 때 없나? 나 혼자만 떠들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외로워질 때. ‘문명의 실어증’ 앞에서 나 혼자만 ‘언발란스’하게 떠들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슬퍼지는 때? 내 경우 일방통행 매체인 텔레비전 앞에서 다들 과묵하게 앉아 있거나 좋다고 박장대소하며 웃고 있는데 나 혼자만 씨부렁씨부렁 불만을 토해낼 때 그런 느낌이 든다. 텔레비전을 보며 혼자 욕을 하는 여자라니. “야, 야, 입 닥쳐. 너도 아나운서냐? 그걸 뉴스라고 내보내? 무슨 놈의 아나운서가 존심도 없이 만날 버라이어티쇼 재탕하는 얘기만 그렇게 나불나불하냐고? 아으 무뇌아.” 정말이다. 언제부터인가 TV를 켜면 절로 나왔다. 욕이 KBS, MBC, SBS, YTN(종편은 아예 채널 신호를 지웠다!) 어느 채널을 틀어도 저절로 튀어나왔다. 특히 정부의 대리인들이나 다름없는 낙하산 ‘새끼’가 방송국을 점령하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자기들은 공영방송이라고 우기며 꼬박꼬박 시청료를 전기세에 포함시켜 영악하게 챙겨가는 KBS를 볼 때 특히 더 ‘된 욕’들이 마구 튀어나온다. “공영방송? 아주 지랄하고 자빠졌네. 차라리 개구리 옆구리에 날개를 달지 그래.” 총선 전후 거의 모든 방송사에서 김형태나 문대성 의원의 추문에 대해선 침묵하고 ‘김용민의 막말 파문’ 뉴스만 연일 지겹도록 반복하고 있을 땐 “이걸 돈까지 내면서 보는 내가 병신이지… 안 본다, 절대, 앞으로 눈깔이 다섯개라도 안 볼 거다. 정말. 이런 개…, 아니 이 개떡들아”, 했다. 우리 오빠 말이 맞다. “시청료, 흥 내가 왜 내? 받아야지. 얼어죽을 텔레비전을 왜 사? 지들이 줘야지. 자동차를 껴주든지.” 농담 아니다. 얼마 전 MBC <뉴스데스크>에서 앵커가 클로징 멘트를 하기 전 ‘까르띠에’ 광고가 3분 정도 방영되는 사고가 발생했을 땐 입으론 “이게 무슨 병신 짓이야?” 하면서도 머리로는 혹시 방송 사고마저도 수익성 광고로 이용할 만큼 장삿속이 점점 더 대범영악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또다시 쌍욕이 돋았다. 과장 아니다. 어느새 텔레비전은 ‘우리의 수령, 통령, 우리의 갑’으로서 일상과 사고를 통제한다. 철저히. 그러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시청자라면 돈 받고 보거나, 그게 아니면 아예 거부하거나, 둘 다 안되면 최후의 방법으로, 하는 수 없이 보게 되더라도 소신껏 욕을 해주면서 봐야 한다. 웬일인지 요즘은 소로가 세금 납부를 단호히 거부해서 감옥에 갔던 일이 자주 생각난다. 노예제도와 전쟁을 반대해서 미국 정부가 새롭게 인두세를 제정하자 그 돈이 노예를 사는 데 쓰이는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총을 만드는 데 쓰이는지 알 수 없다며 세금 내기를 거부했던 그다. 그 때문에 감옥에 가게 된 소로를 찾아와 에머슨이 물었다고 한다. “자네는 왜 이곳에 있는가?” 소로가 대답한다. “당신은 왜 그곳에 있습니까?” KBS, MBC, YTN 등 방송 3사가 역사상 처음으로 합동 최장기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전 국민을 기만하기 위한 땜빵용 방송을 만들고 있는 방송인을 볼 때마다 내가 묻고 싶어지는 말이다. “당신은 왜 그곳에 있습니까? 자동차를 껴줍니까?”

[베를린] “모든 영화의 진짜 근본은 관객”

독일 68혁명의 전조는 영화계에서 먼저 일어났다. 50년 전 ‘오버하우젠 선언’이 ‘뉴 저먼 시네마’의 물꼬를 텄던 것이다. 1962년 독일 오버하우젠단편영화제는 새로운 영화적 세대의 데뷔 무대였다. 26명의 영화인이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했고, 전후 향토영화가 주류를 이루던 독일 영화계에 반기를 들며 혁신을 불러일으켰다. 이제 이 젊은이들이 팔순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 세대는 세계대전 당시엔 너무 어렸고, 청년기에 접어들어서는 서독과 동독 분단과 재건의 시대를 맞아 군대의 의무를 면한 행복한 세대다. 그런 시대를 발판으로 새로운 세대의 영화인들은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지원해줄 진흥 시스템을 새로이 재구성해냈다. 오버하우젠 선언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알렉산더 클루게와 서면 인터뷰를 나눴다. 올해 80살을 맞은 그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제작자로, 작가로, 영화감독으로, 또 독일 지성계를 대표하는 원로로서 지치지 않고 새 작품을 내놓고 있다. 2008년부터 클루게는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10시간짜리 연작영화를 제작 중이고, 그중 <마르크스-아인슈타인-자본론>(Nachrichten aus der ideologischen Antike-Marx/Eisenstein/Das Kapital, 2008), <신뢰의 결실>(Fruchte des Vertrauens, 2009)이 이미 DVD로 출시되었다. -올해 80살 생일을 맞이했다. 정기적으로 텔레비전과 인터넷 방송의 문화프로그램에 출연하고 거의 매년 책 한권은 출판하고, 거기다 가끔 영화도 만든다. 고령임에도 많은 창작을 해내는 비결은 무엇인가. =내 속엔 아직도 6살짜리가 들어 있다. 또 이미 돌아가셨지만 활기를 주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내 속에 아직 살아 계신다. 그래서 스스로 내 나이를 속일 수 있다. -1962년 오버하우젠 선언에 대해 개인적으로 어떤 특별한 기억이 남아 있는가. =그해는 독일의 전환기였다. 그해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른바 ‘슈피겔 위기’와 연관있었다. ‘슈피겔 위기’는 당시 서독에서 가장 힘있는 시사잡지 중 하나인 주간 <슈피겔>의 편집장과 발행인이 체포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통해 서독 총리 아데나우어로 대표되는 전후 재건시대가 끝나고, 그 자리에 새 세대가 들어섰다. 68학생운동이 터지기 6년 전 일이다. 1962년 오버하우젠 선언에 서명했던 26명의 영화인들은 선언 뒤 서둘러 자신의 장편 극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데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를 비롯해 베르너 헤어초크, 폴커 슐뢴도르프, 에드거 라이츠,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이 많은 영화를 찍었다. 이들과 함께 하나의 원칙을 세웠는데, 각자 자신의 영화를 책임져야 하고 독일 관객에게만 통하는 대중영화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 선언은 시작일 뿐이었고, 실제로 그 뒤 20년을 거치면서 서서히 우리의 선언이 실현되었다. 따라서 오버하우젠 선언에 참여했던 생존하는 모든 이들에게 ‘우리는 62세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현 독일영화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는가. =몇명을 예로 들자면 톰 티크베어, 로무알트 카마카르, 크리스티안 펫촐트와 같은 감독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해볼 때, 영화뿐만 아니라 인터넷, 텔레비전까지 아우르는 전체 동영상 미디어의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예술영화 말고 대중에게 어필하는 영화에도 흥미를 느끼는가. =모든 영화의 진짜 근본은 관객이다. 이 사실을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절대 이들이 대중소비물의 수용자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최고의 작품이야말로 관객에게 환영받는다. 사람들은 최고의 작품을 이성으로가 아니라 감정으로 구분해낸다. 이 사실에서 작가주의 영화인과 관객의 의견이 일치한다. 작가주의영화는 반아카데미적이지만 고분고분하지는 않다. 관객이 이런 영화에 도전하게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2009년에 나온 금융 위기를 다룬 <신뢰의 결실>이 가장 최근 만든 영화다. 새 작품 계획은 없나. =<신뢰의 결실>과 <마르크스-아인슈타인-자본론>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러닝타임 10시간짜리 연작에 속한다. 앞으로 <1차 세계대전, 한 세기가 탈선하다>와 세계에 추위가 닥친다는 내용의 <용기있는 자는 말에서 추위를 떼어낸다>가 연이어 나올 예정이다.

봄날이 가는 이야기 <블루 발렌타인>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기념비적인 대사를 던지던 순간, 몇몇 관객은 철없는 질문이라는 듯 코웃음을 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처럼 쉬이 변한다. 수많은 멜로영화들이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변해가는 사랑을 탐구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 뒤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happily ever after)로 끝나는 디즈니의 고전 만화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블루 발렌타인> 역시 봄날이 가는 이야기다. 신디(미셸 윌리엄스)와 딘(라이언 고슬링)은 부부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지만 불꽃이 점점 꺼져가는 것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관계의 종말을 직감한 딘은 억지로 신디를 데리고 교외의 모텔로 간다. 마치 1970년대 텔레비전용 SF시리즈의 싸구려 세트처럼 생긴 모텔 방의 이름은 ‘미래’다.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란 그토록 보잘것이 없다.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봄날이 가는 과정 사이사이 봄날이 시작된 과정을 삽입한다. 둘이 처음 만났을 때 신디는 의대생이었고 딘은 다정한 이삿짐 센터 직원이었다. 둘은 열정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신디는 전 남자친구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까지 품어주겠다는 딘의 사랑에 감화된 신디는 두려움 없이 결혼을 선택한다. 그러나 그녀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의 말을 기억했어야만 한다. “얘야, 나는 한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단다. 주의하거라. 사랑에 빠지는 남자가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신중해야만 한단다.” 어떤 면에서 <블루 발렌타인>은 사랑에 관한 가장 비관적인 멜로드라마인 동시에 무계획적인 임신과 결혼에 관한 섬뜩한 경고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부모의 이혼이 <블루 발렌타인>의 씨앗이 되었다고 말한다. “부모가 이혼했을 때 내게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되는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산이 어떻게 조약돌로 침식되는지, 작은 씨앗이 어떻게 삼나무가 되는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다루는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 시엔프랜스 감독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관계의 변화를 보다 확연히 보여주기 위해 현재와 과거를 형식적으로 분리한다. 과거는 슈퍼 16mm로, 현재는 HD로 촬영됐다. 질감이 전혀 다른 장면의 대비는 다소 불친절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영화의 이야기를 명확하게 관객에게 전해준다. 영화적 형식이 서사의 결을 풍요롭게 만드는 사례로도 <블루 발렌타인>은 근사하다. <블루 발렌타인>은 관계의 종말에 관한 가장 고통스러운 영화 중 하나지만, 역설적으로 고통의 아름다움이라 불릴 만한 순간들로 가득하다. 그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공신은 미셸 윌리엄스와 라이언 고슬링이라는 훌륭한 배우들이다. 두 사람은 상황에 대한 간략한 지침만 있는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많은 장면을 즉흥적으로 창조했다. 라이언 고슬링이 우쿨렐레를 연주하고 미셸 윌리엄스가 탭댄스를 추는 장면 역시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순간들이다. 두 배우의 동물적인 화학작용은 영화의 매 순간을 살아 있게 만든다. 특히 미셸 윌리엄스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에 앞선 지난 2011년 <블루 발렌타인>으로 이미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바 있는데, TV시리즈 <도슨의 청춘일기>에서부터 계속해서 삶의 바퀴에 치여 쓰러지는 캐릭터만을 고르는 경향이 있다.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쩐지 미셸 윌리엄스의 지치고 피로한 소녀적 얼굴은 점점 우리 시대의 아이콘에 가까워지고 있다.

[신 전영객잔] 돈의 맛도 결국 관념이고 허상일 뿐

나는 직업이 평론가니까 임상수의 <돈의 맛>을 봤다. 평일 조조 상영을 보는데 다른 관객은 뭘 기대하고 보는 것일까 궁금했다. 주부 관객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개 서너 사람씩 동네 주민들끼리 온 것 같았다. 수다로 시끄럽던 객석은 영화가 시작되자 이내 조용해졌다. <돈의 맛>의 첫 장면, 주인공 주영작(김강우)이 윤 회장(백윤식)의 지시로 비밀금고에 들어가 돈뭉치를 담을 때 굉장한 스펙터클이 나오기 때문이다. 영작은 돈다발 더미를 보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카메라가 그의 넋나간 모습에서 뒤로 빠진다. 시야가 넓어지면 엄청난 돈다발들이 쌓여있다. 관객이 보고 싶은 스펙터클의 기대치를 처음부터 만족시키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에서 윤 회장은 영작에게 몇 다발 넣어두라고 충고한다. 맛 좀 보라고, 다들 그렇게 한다고 말이다. 영작은 돈다발의 냄새만 맡고 주머니에 넣지는 않는다. 냄새를 맡을 수 없는 관객은 그저 눈요기만 한다. 우리의 관음증은 이런 천문학적 돈을 쌓아두고 사는 부자들의 집안 내부 얘기를 궁금해한다. 임상수는 정확히 그렇게 한다. 예상할 수 있는 순서대로, 차근차근 그들의 욕망과 결핍을 그린다. 다분히 멜로 드라마틱한 공식을 따르며 종종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인물의 입을 통해 직설로 던진다. 관음증과 교훈극의 접합을 겨냥한 임상수는 이 영화에서 돈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재벌가의 디테일을 볼거리로 묘사한 다음, 직설적으로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맞서는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자존을 따뜻하게 보여주려 한다. 이것은 기존의 임상수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장치였다. <바람난 가족>의 마지막 장면에서 황정민이 연기하는 변호사 주영작이 아내에게 최종적으로 결별의지를 재차 확인받고 돌아서는 김에 살짝 두발을 공중으로 들어올리며 짝짝거리는 정도가 가장 산뜻한 임상수식 긍정의 표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그사람들>은 처절한 비극을 블랙코미디의 감성으로 중화시킨 영화였고 <오래된 정원>은 멜로드라마였으나 다음 세대의 무심한 시선을 통해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불행을 희망으로 순치시킨다. <하녀>에서 은이(전도연)는 자존을 지키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의 고용인들인 재벌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불태운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울어줄 리도 없으나 그것조차도 거부한다는 듯이. 그런데 <돈의 맛>에선 주인공 주영작을 단단한 자기 긍정을 회복하는 인간으로 그린다. 심지어 그의 점진적인 변화 궤적 속에선 재벌가 따님 나미(김효진)와의 동지적 관계가 연애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임상수의 예술, 소통에 성공했을까 관객은 부잣집 내부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통속극을 보고 싶어 했는데 주인공들은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려 한다. 그 세계 안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또는 그 세계에서 멜로드라마틱한 과장법으로 치장된 패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은 그 세계를 부정하고 비판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위엄을 지킨다. 주영작과 나미는 평생 재벌가 리더로 살았던 윤 회장에게서 그 탈주를 위한 지침을 받는다. 유산을 물려받은 아내 백금옥 여사(윤여정)에게 얹혀살면서 부와 권력을 누린 윤 회장은 영화 중반, 필리핀 하녀 에바와 사랑에 빠져 가문을 등지기 직전에 주영작과 나미에게 평생 원없이 돈을 써봤으나 얻은 건 모욕감이라고 말한다. 그와 에바의 사랑은 지속되지 못하고 그는 비극의 장엄한 주인공이 되는데 그때가 되어서야 영화 속 어느 인물보다 행복해 보인다. 주영작은 윤 회장을 모방한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또는 윤 회장과 백금옥 여사 등과 대결 할 수 있었다. 이런 것도 클리셰지만 대중 관객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상수는, 그리고 그의 의중이 반영된 주인공 캐릭터 주영작은 백금옥 여사가 제안한, 윤 회장의 삶을 흉내내는 삶의 길을 거절한다. 더이상 모욕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며 <하녀>의 은이와 달리 당당하게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걸어나온다. 돈의 맛을 느끼는 주인공을 보고 싶었던 관객에게 그는 돈의 맛을 보기를 거절한다. 첫 장면에서 윤 회장이 맛 좀 보라고 권할 때 주영작이 실컷 돈냄새를 맡은 뒤 호기있게 돈뭉치를 던져버리는 건 결말에 대한 복선이자 그의 본성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두 차례 반복되는 장면, 주영작이 방 모서리에 세워둔 거울을 치우면 뇌물 상납 때마다 챙겨놓은 돈다발들이 쌓여 있는 화면은 이 상승하지 않는 드라마의 알맹이를 표상한다. 돈의 맛을 본다 해도 그들에게 속하지 않은 우리는 찔끔 볼 수 있을 따름이다. 주영작의 방 안 모서리 거울 뒤에 숨겨둔 돈무덤처럼. 그것도 굉장하긴 하지만 이미 도입부에 산처럼 쌓인 돈더미를 본 우리에게 주영작의 방구석 돈다발들은 초라하다. 게다가 그걸 보기 위해서는 주영작이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을 우리도 봐야 한다. 간단하고 직설적이지만 이 두 장면은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거울 속 나를 보고 거울 뒤 돈다발을 챙겨야 한다. 돈다발이 쌓이는 정도만큼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라고 주영작은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성찰의 과정이 직설적인 화면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동시에 매우 공격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내가 본 극장의 객석 분위기는 초·중반의 관음증을 즐기던 온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느꼈다. 한국 관객 대다수가 그렇긴 하지만,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은 조용히 서둘러 빠져나갔다. 노골적으로 불평을 늘어놓는 대신 조용히 빠져나가는 옆자리의 관객을 보고 나는 임상수의 예술이 소통에 성공한 것인지 아닌지 자문했다. 적어도 나는 <돈의 맛>에 감동했던 관객이다. 직설적이고 교조적이며 삐딱한 유머로 덧칠된 비극이라 정이 가지 않는다고 주변에서 비판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나는 <돈의 맛>이 잘된 영화라고 생각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읽은 것들이 떠오르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임상수는 비교적 대자본이 들어간 주류 영화산업 복판에서 돈의 흐름을 관장하는 지배 엘리트들을 이렇게 맨 얼굴로 드러내 공격할 수 있는 예술적 호기의 소유자이다. 관음증의 충족과 그 죄의식을 덮어주는 말랑말랑한 멜로드라마의 수식을 원했던 관객의 요구를 의식하면서도 끝까지 우리에게 죄의식을 환기시키는 배짱의 소유자이다. 주영작과 나미가 필리핀 에바의 본가에 찾아간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는 하늘을 보며 주영작과 나미가 서 있는 비교적 감상적인 이미지들 사이에 끼어들어간, 매우 임상수적인 이미지가 있다. 관 속의 에바가 갑자기 눈을 뜨며 영작이 넣어둔 돈다발을 보는 숏이다. 이미 죽어버린 불행한 멜로드라마의 히로인인 필리핀 여성은 우리에게 시위라도 하듯이 눈을 부릅뜨고 돈다발을 쳐다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우리 대다수는 돈의 맛에 환장해 있다. 더 많은 돈이 우리 수중에 들어올 수 없는 걸 아는데도 언젠가는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억지로 믿는다. 그 강고한 억지 환상이 우리 삶의 불우를 지탱해주고 있다. 완만한 멜로드라마 교훈극에 삽입된 악몽의 시연으로서 이 장면은 이어지는 이미지의 감상적인 선의를 왜곡하지 않으며 그 의미를 입체적으로 보태준다.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 인물들 <돈의 맛>은 임상수의 반골적 태도뿐만 아니라 화면의 물성을 통제하는 그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도 잘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하녀>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공적으로 꾸며진 재벌가 저택 내부는 인물들만큼이나 중요하다. 임상수는 대저택의 공간적 질감과 소품들을 인물들과 유리해놓는다. <하녀>에서도 그랬다. 리메이크라고 홍보됐지만 임상수의 <하녀>는 김기영의 <하녀>와 거의 관계가 없었다. 김기영의 <하녀>에서 일층과 이층의 공간, 그리고 일층과 이층을 이어주는 계단, 모든 방의 미닫이문들은 침입과 점거라는 모티브로 집요하게 사용됐다. 특히 이은심이 연기하는 주인공 하녀는 주인 부부의 집 내부 공간을 자기 것으로 전유하기 위해 공세적인 몸짓을 한다. 거기서 공간은 그곳을 점유하는 이들의 표정과 겹친다. 그러나 임상수의 <하녀>에서 공간은 그냥 액세서리이거나 실용적 기능을 위해 있을 뿐이며 그 결과 인물들과 유리되거나 심지어 밀쳐내는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계단을 활용한 미장센은 김기영의 영화에서만큼 의미와 정서를 가진 표정을 지닐 기회를 아예 박탈당하고 있다. 아주 살짝 침입과 점거의 모티브가 있지만(은이가 주인의 욕실에서 목욕하는 장면이 일례다) 내러티브 깊숙이 들어오진 못한다. 임상수의 <하녀>에서 은이가 주인 훈과 관계를 가진 뒤 처음으로 조찬을 갖다주는 아침의 일과 장면에서 은이는 남자의 몸을 가졌다는 여자의 심리로 표나지 않게 으스대지만 피아노를 장중하게 치고 있는 훈은 그런 은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다. 은이는 모욕감을 넘어 패배감을 느끼는데 피아노 위에 수표가 든 봉투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몸의 소통으로 심리적 소통관계에서 대등한 위치에 올라섰다고 느낀 은이는 훈의 태도와 돈봉투의 권위적인 메시지 앞에서 다시 열등한 위치로 내몰린다. 우아하게 클래식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재벌 총수는 그의 교양을 시위하고 있고 돈봉투는 그의 권력 앞에서 굴종을 요구한다. 이것으로 임상수의 <하녀>에서의 은이는 김기영의 <하녀>에서의 여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다. 그녀는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 <돈의 맛>에서도 주영작은 당연히 공간의 지배권을 갖지 못한다. 그가 백금옥 여사의 지시를 받아 일상적인 잡무를 처리하기 위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그의 뒤와 곁에서 그를 쫓는 카메라는 그가 이 공간을 활보하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남의 집처럼 대하는 것을 공들여 묘사한다. 그는 곧잘 복도에서 방 내부로 들어가지만 그의 시점은 대체로 엿보는 자의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영작이 의도하지 않은 채로 윤 회장과 하녀 에바의 애무장면을 목격했을 때 주영작은 보지 말았어야 한다고 자책한다. 주영작은 이 부잣집 저택을 겨우 엿볼 수 있을 뿐이고 엿보는 것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느낀다면 백금옥 여사는 자신의 침실 내부에 설치된 폐쇄회로 화면으로 집안 곳곳을 보고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므로 집안 공간을 장악하고 있다. 주영작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백금옥이 그를 폐쇄회로 화면이 설치된 방으로 불러들이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주영작은 공간 깊숙이 들려오는 백금옥의 목소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백금옥의 사적 공간으로 살짝살짝 발걸음을 옮기며 들어온다. 투명 유리관을 걷는 것처럼 노출이라도 된 듯이 위축된 그는 이 공간에 대한 지배권을 가질 의욕조차도 박탈당한 사람 같다.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위계 주영작이 걸으면 걸을수록, 그의 곁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표상하는 것은 그가 좀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덩달아 그의 시점에 포착되는 다른 피고용인들, 여러 하녀들과 경호원들의 존재도 영혼을 박탈당한 인형들처럼 보인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주영작이 퇴근할 때 왕회장의 비서가 그런 주영작을 지켜보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고 그런 비서의 행동을 의아하게 나미가 바라볼 때 카메라는 감시하는 자와 감시당하는 자의 위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이동화면을 연출한다. 이 화려한 공간에서 주영작은 겉돌거나 때로는 감시당하는 자이며 공간을 장악하고 감시하는 자의 편에 섰을 때 비로소 그들처럼 내려다보는 시점을 부여받는다. 고가의 장식품들로 꽉 차 있는 이 화려한 공간이 주인공과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는 임상수의 연출은, 그러나 그 공간의 주인들 입장에서도 똑같은 암시를 던진다. 윤 회장이 집을 나가기 직전 자신의 이층 서재를 정리하며 일층에 있는 주영작과 나미에게 돈을 맘껏 쓴 자의 모욕감을 얘기할 때 카메라는 그의 곁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주영작을 비추고 있으나 여기서도 물리적 공간의 수직적 위계는 역설로 작용한다. 윤 회장조차도 그 공간의 지배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꽉 찬 서재에서 자신의 것이라곤 고작 책 몇권만 챙길 뿐이다. 이는 윤 회장이 변심한 뒤 그가 드나들던 돈다발 창고가 텅 빈 것을 보고 허탈해하는 이전 장면과 조응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머무는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이 유체이탈된 듯한 이 역설은 심지어 이들 공간을 장악하는 것으로 보이는 백금옥 여사에게도 해당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돈의 맛도 결국 관념이고 허상이며 욕망의 가상대상일 뿐이고 누구도 그 돈으로 처바른 공간 안에 안착하고 있지는 않다. 결국 다 공허한 껍데기이므로. 임상수의 비관주의는 쓴맛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이 영화에는 요즘 유행하는 텔레비전 드라마와 같은 권력쟁탈의 드라마가 펼쳐질 여지가 없었다. 나는 그의 도저한 비관주의를 지지하며 그걸 화면의 번들거리는 물성에 비춰 보여준 영화감독으로서의 재능에 고개 숙여 경례한다.

매혹! “누벨바그의 메아리”

<다른나라에서>의 현지 반응?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일단 영미권 주요 매체들의 분위기는 ‘대체로 호평’이다. <버라이어티>는 <다른나라에서>가 “<밤과낮>의 이면처럼 상연된다”며 홍상수 감독의 전작과 비교했고, <스크린 데일리>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메아리가 이 귀엽고 쾌활한 세개의 로맨틱 익살극을 통해 다시 울려퍼지고 있다”라며 누벨바그와 비교하면서 글을 열었다. <텔레그래프>는 “홍상수의 영화는 로맨스라는 변화무쌍한 자연을, 윤회의 썰물을, 삶의 흐름을 지녔으며, 그것이 머리가 띵할 정도로 즐거운 혼란을 유발한다. 시각적으로 별나고, 당돌할 정도로 재미난 영화, 가장 좋은 종류의 이상함”이라고 호평했다. 본격적인 반응은 프랑스 현지 매체들에서 쏟아져 나왔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프랑스에서 호평 위주였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나라에서>에 대한 지금 분위기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깝다. <르몽드> <리베라시옹> <인록> <누벨옵세르바퇴르> <크로니카르> 등 주요 매체들이 앞을 다투어 이 영화를 다뤘다. 최근 칸에 초대받았던 홍상수 감독의 어느 영화와 비교해도 감탄과 극찬의 물결이다. 이런 본격적인 호평들이 쏟아지자 상영 직후 영화제 데일리인 <필름 프랑세즈>와 <스크린 데일리>에 실렸던 다소 미지근한 별점은 거의 무색해졌다. 홍상수와 이자벨 위페르의 만남이 일으킨 마술이 자주 언급된다. “이자벨 위페르는 이 모험에 자신을 맡긴 나머지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국적을 획득했고, 홍상수에게만 속해 있는 숙취를 맛보게 되었다”고 <르몽드>는 전했고, “이번 영화제 작품 중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재미있는 영화”로 <다른나라에서>를 소개한 <리베라시옹>은 “<다른나라에서>는 에릭 로메르에 비견되는 ‘트릭’ 하나를 공개한다. 홍상수에게 있어 핵심적인 것은 이미 본 것들이 교체된다는 점에 있다. 각각의 숏들은 마치 한 문장 안의 단어들처럼 같은 패러다임 안에서 서로 교체한다. 아마 이는 홍상수 영화의 시적인 면모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아무 말도,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데도 끊임없이 생생한 기다림을 부르고 세상에 대해 호소하는 하나의 목소리가 존재하고 있다”(<리베라시옹>)고 분석했다. 격찬은 이어진다. “<다른나라에서>는 우리에게 영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상기시켜주는 눈부신 기적에 다름 아니다”(문화 격월간지 <크로니카르>)라거나 “이자벨 위페르와 홍상수의 영화로 올해 칸 경쟁부문의 격이 높아졌다”(<누벨옵세르바퇴르>)는 단평도 있다. <인록>은 좀더 긴 찬사를 적었다. “배우 이자벨 위페르, 세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이자벨 위페르는 홍상수의 악보에 몸을 맡기며 특별히 억지스러운 노력 없이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홍상수의 템포, 그러니까 그 굉장한 가벼움과 유연성을 받아 껴안는다. 동시에 홍상수의 영화 또한 이러한 이물성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남아 언제나처럼 사랑의 방황을 예리하게 과시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유희적이고 눈부신 작품을 탄생시킨다. 이번 영화제 초반을 장식한 매혹!” 이런 분위기는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을 지냈으며 홍상수 영화의 오랜 지지자인 장 미셸 프로동에 의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다른나라에서>가 올해의 “칸에 해방적 바람을 불러왔다”며 이렇게 적었다. “이 바람이 지난 금요일부터 칸을 물에 잠기게 하고 있는 이 비까지 쫓아주기를 희망해본다. 엄밀한 수채화처럼 감동적이고 우아한 숏들이 이 영화에 동원된 그 모든 힘들에 그 모든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 어마어마한 자유분방함을 선보인 이자벨 위페르라는 배우의 연기의 힘, 바다의 힘, 바람의 힘, 그리고 웃음의 힘. 우리는 정말이지 많이, 그리고 진심으로 웃었다. 그리고 상영이 끝나자 관객은 감독과 배우들에게 마땅하면서도 기쁜 격찬을 선사했다.” <다른나라에서>의 해변 모항에는 프랑스 여인 안느가 있지만 칸의 해변에는 위대한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있다. 영화제 내내 홍상수와 이자벨 위페르의 협연은 큰 화제가 됐고 그녀의 모험심은 칭송의 대상이었다. 우연과 계산의 조화를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체질부터가 홍상수 배우다.

새로운 이름 아닌 거장의 새로움을 발견하다

폐막식이 있던 날 오후 칸영화제의 전 집행위원장 질 자콥은 열심히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이 회의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 트위터에 올린 다음 거기에 수수께끼 같은 말을 달아가며 심사 과정을 생중계했다. 심사위원장 난니 모레티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민하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결국에는 “빛이여 있으라!” 하고 질 자콥이 멘션을 날리자 그걸 본 사람들이 “이거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라틴어인 이 말을 영어로 옮기면 ‘Light After Darkness’가 된다)가 수상하는 걸 암시하는 말 아니냐”며 다들 웃었다. 설마 그럴 리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수상은 사실이 됐다. 수상 결과에 초미의 관심이 쏠리도록 전임 집행위원장까지 전면에 나서 다각도로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마침내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황금종려상의 주인으로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가 발표되었을 때 대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다. 그럴 만하다 혹은 그럴 수도 있다는 분위기였다. 수상작들에 의문을 제기함 하네케는 주제를 정하면 방식도 극단적으로 실천해야만 선택한 그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다고 믿는 감독이다. <아무르>에서는 일차적으로 노년의 사랑과 죽음이 주제에 해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어떤 극단적 방식이 취해졌을까. 몇편의 전작들에서 하네케가 게임과 쇼크라는 극단성으로 폭력의 세계를 드러내려 했던 것이라면 <아무르>에서는 그 아무것도 장치하지 않고 그저 좁은 실내에서 움직이는 느릿하고 힘없는 노년의 배우의 몸짓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는 극단성을 취한다. 무언가를 결코 하지 않으려는, 하지 못하는 극단성. 카메라는 결코 집 바깥을 벗어나지 않는다. 나이 든 아내가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고 정신을 잃어 병상에 눕자 나이 든 남편은 줄곧 집 안을 서성거리거나 잠시 외출했다 돌아오거나 할 뿐, 힘겨운 간병을 지속한다. 가끔씩 찾아오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딸은 도무지 도움이 되질 않는다. 남편의 눈에는 건강했을 때의 아내의 모습이 종종 상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도 잠시 뒤면 사라지고 만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모두 지난 다음 하네케는 이 남편에게 예의 하네케식 선택을 하게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결정적 선택보다도 그에 이르기까지의 숨 막힐 정도로 느리고 힘겨운 묘사들이 훨씬 더 깊은 슬픔을 자아낸다. 하네케 영화의 의심스럽고 위험한 영화 방식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지만 그의 영화의 새로운 정조가 그 극단의 방식으로 전해진다는 점에서 <아무르>는 확실히 관심을 받을 만하다. 12월에 국내 개봉할 예정이라고 하니 우리는 그때 또 <아무르>에 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올해의 수상작에 관해서라면 그다음부터가 촌극이다. 심사위원 대상은 마테오 가로네의 <리얼리티>, 감독상은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 심사위원상은 켄 로치의 <앤젤스 셰어>가 받았다. 경쟁작 중 가장 무난한 작품과 가장 이해되지 않는 작품과 가장 대중적으로 유쾌한 작품 하나씩에 상을 나눠준 식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문제가 된 건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수상이다. 난니 모레티는 “이 영화의 영화언어에 매우 강한 인상을 받은 심사위원들이 있었다. 이 영화가 다른 감독이나 다른 영화에 비해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고 감행한 연출에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다른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에 빠져들지 못했다”며 심사 과정에서 벌어졌을 논쟁을 시사했다. 프랑스 문화지 <인록>은 이 영화에 관해 “두 시간 동안의 헛소리”라고 무시했고 <르몽드>는 “이 영화를 그냥 못 본 척 지나칠 것인가 아니면 합리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작품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노력해볼 것인가”라고 비아냥거렸다. 우린 이 영화의 형식적 실험이 강렬하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실험이 조화롭지 못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난니 모레티는 영화제가 개막할 때 “세상에서 처음 보는 것 같은 영화”에 상을 주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한 모양새가 됐다. 지난해에 이어 칸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자기가 보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 영화가 좋은 영화라며 상을 주는 이상한 전통을 두해째 이어가고 있다.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가 올해의 <트리 오브 라이프>가 된 것이다. 앤드루 도미닉의 <킬링 뎀 소프틀리>를 기억하라 수상 결과에 관하여 우리만 의아해한 건 아닌 것 같다. 프랑스 현지 매체의 반응도 격렬하다. <텔레라마>는 “(황금종려상을 제외하고) 그외의 수상작 리스트는 완전한 난센스”라고 썼고, <리베라시옹>은 “황금종려상이 구원한 칸”이라는 제목을 달아놓은 다음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 홍상수의 <다른나라에서>,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등 경쟁부문의 몇몇 훌륭한 작품들을 은폐하는 바람에 심사위원장 모레티의 이미지는 손상을 입게 되었다”고 질타했다. <인록> 역시 “모레티는 결국 미학적이며 주제적인 측면에서 동시대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크로넨버그와 카락스를 무시했고 자기의 연출 실력을 과장하지 않는 홍상수와 키아로스타미의 섬세한 작품들도 무시했다”고 평했다. 하지만 이런 결과들에 너무 신경 쓰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영화제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수상작과 그에 관한 의견을 제출했지만 실은 영화제에서의 상이란 단지 심사위원 몇몇의 결정일 뿐 그 영화들에 관한 어느 온전한 증명도 되지 못한다. 혹은 공감과 격려의 목록은 누구에게나 따로 있게 마련이다. 단지 여기가 칸이기 때문에 늘 시끄러운 것일 뿐이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의 관심은 올해 심사위원들이 선택한 영화들에 한정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제 중반 이후 찾아온 우리의 흥미로운 영화 목록을 말할 차례가 된 것이다.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가 특히 공을 들이고 있는 영미권 영화부터 말해보자. 그가 특히 이번 경쟁부문 선정 과정에서 영미권 영화에 자기의 안목이 많이 반영되었음을 과시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칸영화제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영화들은 역시 자국영화를 제외하면 대체로 영미권 영화들이기 때문이다. 칸의 신예 제프 니콜스가 만든 <머드>는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 이야기와 로브 라이너의 <스탠 바이 미>를 참조한 것 같은 영화라고들 많이 말하는데 그 점이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미국 아칸소 지역의 숲속에 살고 있는 두 소년은 옆 무인도에 놀러갔다가 숨어 사는 범죄자를 우연히 만난다. 하지만 그와 친밀해지고 그의 부탁까지 들어주는 사이가 되면서 위험에 빠지게 된다. 제프 니콜스는 한편으로는 범죄영화를 또 한편으로는 성장영화를 만들어간다. <테이크 셸터>로 실력을 인정받아 미국 독립영화계의 총아로 떠오른 제프 니콜스는 무언가 느슨하게 오래 극을 진행하다가 한방에 사건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실력을 지녔다. 다소 성긴 구성과 진부한 결말과 처지는 리듬이 큰 단점으로 보이지만 제프 니콜스의 실력은 아직 한번쯤 더 기대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라면 앤드루 도미닉은 뛰어난 수작 <킬링 뎀 소프틀리>로 완벽하게 자기 실력을 입증했다. 올해 경쟁부문에 오른 대중적 성향의 영미권 라인업 중 가장 뛰어나다. 이른바 얼간이 같은 범죄자 녀석 둘이 모여 어쩔 수 없이 더 얼간이 같은 녀석 하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웠을 때 어디선가 해결자(브래드 피트)가 나타나 그 모든 상황을 폭력적으로 종결해버린다는 이 내용은 조지 V. 히긴스의 70년대 범죄소설에 기초했다. 앤드루 도미닉은 시대를 오바마와 매케인이 경선을 벌이던 2008년으로 그리고 장소를 보스턴에서 뉴올리언스로 옮겨놓는다. 우매한 인물들이 등장하여 어처구니없이 엇갈린 방식으로 서로 난폭하기 짝이 없는 폭력을 휘두른다. 여기에 오바마 시대에 도래한 미국 경제난에 관한 우울한 메타포가 들어 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그런 사회적 해석이 아닌 다른 데 있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는 괴이한 인물, 그들 사이의 긴장감 넘치는 대립 그리고 무엇보다 코맥 매카시 소설에 빚진 코언 형제 영화의 배경에 마틴 스코시즈의 인물들이 결합한 것 같은 그 장르적 비장함과 살벌함 내지 우아함이 매력이다. 운명과 책임이 서로 엇갈리는 비정한 오해의 드라마가 피도 눈물도 없이 펼쳐진다. 브래드 피트의 연기가 뛰어나다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귀엽고, 황당하고, 시원하게 <라이크 섬원 인 러브> 그리고 올해 영화제의 가장 큰 문제아(?)였던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는 뛰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문제작이라는 점에서 건너뛰어서는 안될 것 같다. 첫 장면, 초원에서 어둠을 맞이하는 아이의 길고 긴 이미지는 신기하고 성스럽다. 그다음부터가 문제다. 밀림에 사는 중산층 가족과 하층민 가족의 분절된 일화를 오랫동안 천천히 의미파악하기 어려운 순서로 보여준 다음 영화는 스스로 목을 뽑아버리는 남자(비유가 아니라 실제 자기 손으로 목을 뽑는다)에까지 이른다. 특징이라면 과장되고 과격한 미학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나처럼 레이가다스의 영화를 졸작이거나 걸작으로 만든다. 이번에 그 과장됨과 과격함은 이성으로부터의 탈주를 목표로 두었던 것 같다. 그는 논리적 이야기를 배제하기 위해 철저하게 감각적인 시청각을 추구한다. 전에 없이 좁은 화면비율을 구사하고 화면의 가장자리를 뭉개서 흐릿하게 만드는 난생처음 보는 형식들도 도입한다. 레이가다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이 영화가 “이성이 가능한 한 적게 개입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겨냥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걸작이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작으로 남았고 올해는 유독 형식의 과격함이라는 성깔을 보인 작품이 적었기 때문에 수상의 행운까지 차지했다. 형식의 가장 과격한 끝점까지 나아갔다가 다시 돌아온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그가 만든 소품 같은 극영화 <라이크 섬원 인 러브>를 그다음에 말해야 할 것이다. 노교수의 집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초대받는다. 말하자면 원조교제다. 하지만 그녀는 피곤하다며 이내 잠들어버리고 노교수는 그렇게 아침을 맞는다. 우연히도 노교수는 다음날 그녀의 행적을 의심하는 그녀의 애인까지 만나게 된다. 그녀의 애인은 노교수를 그녀의 할아버지로 착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내 밝혀진다. 여기서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이 창조했던 예의 그 신기한 구조적 다면체를 아예 모르는 척한다. 그 대신 하나의 선으로 얇게 이어지는 섬세한 정서를 붙들어가며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낸다. 구조가 완화되고 감정에 치우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다른 장점이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다. 세밀하고 섬세하게 박자가 맞아가는 그 속도감과 운동성이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정겨운 원조교제 이야기(?)는 그렇게 따뜻한 감정을 갖게 된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때때로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곧 영화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키아로스타미는 차 안에서의 장면을 비상한 앵글로 찍어내기도 한다. 라스트 신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시 구조적 도전이 장면 전체를 감싼다. 사태를 파악한 다음 화가 나서 노교수의 집을 맴도는 여자의 남자친구는 다양한 소리로만 존재하고 집 안에서 그 소리들을 들으며 이렇게도 저렇게도 못하는 노교수는 동선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다 갑자기 발생하는 마지막 ‘봉변’이 사건의 긴장감을 귀엽고 황당하고 시원하게 해소시킨다.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에 놀라다 대부분 예상치 못했고 솔직히 말하면 거의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인데 상영 이후 갑자기 화제작이 된 경우가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다. 개인적으로는 마감일과 겹쳐 보지 못했는데 동료 기자와 현지 평자들의 반응을 모아보면 호평 일색이다. 하루 종일 다른 무언가의 인물로 변신하는, 말 그대로 배우의 삶을 은유하는 어떤 남자를 드니 라방이 연기하는데 그의 변신 자체가 놀랄 만하며 그 변신이 영화와 배우의 존재론적 상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반신반의하지만 어쩌면 레오스 카락스가 정말 수작을 내놓은 건지도 모르겠다. 적지 않은 프랑스 매체들은 레오스 카락스가 수상권에 들지 못한 것을 올해 영화제의 가장 큰 실수로 꼽을 정도다. “레오스 카락스의 <홀리 모터스>에 눈을 감고 듣지 않은 건 이번 심사위원들이 역사에 남을 만한 몰상식한 취향을 드러낸 것이다”(<인록>) 등이 대표적인 평이다. 뒤이어 우리는 마치 <홀리 모터스>에서처럼 리무진을 타고 유유히 나타난, 후반부 최고의 괴작이자 걸작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를 말해야만 한다. 올해 칸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아들 브랜든 크로넨버그를 각각 경쟁부문과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동시에 초대했는데, 두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아들의 영화는 기획상품에 불과했거나 아직 아버지의 영화만큼 되기에는 요원해 보인다. <코스모폴리스>는 또 다른 부자에 의해 기획되었고 크로넨버그의 손에 우연히 들어왔다. 포르투갈의 저명한 제작자 파울로 브랑코와 그의 아들이 직접 크로넨버그를 찾아와 제안하면서 성사된 프로젝트다. 그렇게 크로넨버그는 돈 드릴로의 원작을 2주 만에 각색했다. 머리를 깎고 싶다며 리무진을 타고 뉴욕의 동부에서 서부를 횡단하는 이 괴상한 억만장자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성공한 젊은 억만장자는 대통령의 퍼레이드가 있던 날, 분노하여 들끓는 시민들 사이를 리무진을 타고 유유히 움직인다. 그 와중에 여러 사람을 차 안에서 만나거나 그 주변에서 만나 대화하는 것이 거의 이 영화의 전부다. 아내와 미술상과 또 다른 재정 전문가를 만나고 혹은 한 남자에게 파이로 얻어맞기도 하고 직원이었던 남자에게는 살해 위협도 받는다. 지극히 표면적인 관계 혹은 추상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와중에 크로넨버그의 가장 급진적인 미니멀리즘이 완성되는데, 이 영화는 이상하게도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는다. 액션 페인팅의 미술작품처럼 보이는 오프닝 크레딧으로 시작하여 다시 그와 같은 엔딩 크레딧으로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피로할 정도로 그 대화를 듣고 그 피로한 대화가 걸작이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한다. 미국 젊은이들의 우상이 된 흡혈귀의 왕자 로버트 패틴슨은 여기서 잘생겼다기보다는 창백한 인상으로 피로함을 드러내며 그가 연기를 할 줄 아는 배우라는 걸 입증해 보인다. 그가 타고 다니는 영화 속 리무진이 움직일 때 그 바깥의 공간과 안의 공간은 마치 행성과 행성 사이처럼 멀게 느껴지거나 아무 관계도 없는 사회처럼 느껴진다. 그 리무진을 타고 억만장자는 머리를 깎겠다며 뉴욕을 배회한다. 여기에 궁금증이 더해질 만한 크로넨버그의 말 한마디를 전하려 한다. 크로넨버그는 인터뷰에서 문득 이런 문장을 인용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다름 아니라 이건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이 아닌가. 동시에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영화가 그 문장과 관련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크로넨버그의 그 말은 수사가 아닐지도 모른다. <코스모폴리스>는 다만 유럽이 아니라 뉴욕, 그리고 역으로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유령으로 지금 배회하고 있다. 크로넨버그는 덧붙였다. “저는 마르크스가 이 영화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지 종종 궁금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그가 이미 예견했던 많은 걸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그 말을 전하는 우리는 이 영화를 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궁금하다. ‘나만의 수상작’을 꼽는다면… 2012년의 칸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전반적으로 몇 가지 경향을 제시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새로운 이름의 발견이 전무한 대신(심지어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조차 그러했다) 기존 거장들의 새로운 영화가 많았던 한해라고 표현하는 정도가 맞겠다. 두고 보아야 할 일이지만 마테오 가로네, 세르게이 로즈니차, 크리스티안 문주 등이 칸의 새롭게 부상하는 이름들이라면, 칸영화제에서의 놀라운 발견의 목록은 당분간 작성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니 부정이 되었건 긍정이 되었건 매번 각자의 목록을 정리하는 것이 칸영화제에 관한 마무리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런 때문인지 <인록>과 <텔레라마>의 기자들은 앞다투어 각자의 ‘나만의 수상작’을 가상으로 뽑았고, <인록>의 경우는 집계까지 냈다. 그들은 황금종려상 <홀리 모터스>, 심사위원대상 <다른나라에서>, 감독상 <코스모폴리스>, 남우주연상 장 루이 트랭티냥, 여우주연상 이자벨 위페르를 선정했다. 우리도 그와 같은 목록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상하는 대신 그 명단을 나열하기만 할 것이다. 여기엔 트로피도 부상도 없고 다만 존중과 공감과 경애만이 있다. 2012년 22편의 경쟁작 중 2012년 칸에서 우리가 사랑에 빠진 영화의 명단을 ‘상영순서’대로 작성하면 다음과 같다.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 홍상수의<다른나라에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라이크 섬원 인 러브>,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앤드루 도미닉의 <킬링 뎀 소프틀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코스모폴리스>. 올해의 칸영화제가 뜻깊었다면 그건 그 어느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이 영화들이 바로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