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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무한 컨티뉴의 유혹,<파이널 판타지> 1편

게임이란 게 원래 놀자고 하는 거지만 마음 편하게 그야말로 ‘놀’ 수 있는 게임보다는 그렇지 않은 게임이 더 많다. <라이덴>이나 <식신의 성> 같은 슈팅 게임을 하자니 정확한 상황 판단과 빠른 반사신경과 과감한 행동력이 필요하다. <데드 오어 얼라이브>나 <철권> 같은 대전 액션 게임은 여기에 상대의 심리를 읽고 순간순간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추가로 요구된다. 복잡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힐 꾸준함 역시 필요하다. <마리오> 같은 액션 게임, <스타크래프트> 같은 실시간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역시 비슷한 능력이 요구된다. 현실 공간이건 사이버 공간이건 운동신경쪽과는 거리가 멀다면 대신 머리를 쓰는 게임을 하면 된다. <삼국지>나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 같은 턴 방식 전략 시뮬레이션도 이쪽 과지만, 역시 골치 썩이는 게임의 대표 주자는 <미스트>를 필두로 하는 어드벤처 게임들이다. 주어진 단서들을 조합해 추리해 나가는 어드벤처 게임은 긴장감이나 호쾌함은 덜하지만 대신 퍼즐을 풀어냈을 때의 성취감이 있다. 한때는 게임계의 맏형 노릇을 하던 어드벤처 장르가 요즘은 눈에 띄게 쇠퇴했다. 틀림없이 점점 머리를 쓰기 싫어하는 세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육체도 두뇌도 자신없는 사람들이라도 실망하기는 이르다. 고맙게도 근성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임도 존재한다. 일명 ‘노가다’ 게임에서는 은근과 끈기, 불굴의 정신으로 다른 모든 능력부족을 메울 수 있다. <파이널 판타지> 1편 같은 오래된 게임부터 <바람의 기사>처럼 비교적 최근에 나온 게임까지 이른바 일본풍 롤 플레잉 게임에서는 대개 레벨 앞에 장사 없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던 적이라도 거듭되는 전투로 레벨을 올려놓으면 결국은 이길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와 모두 거리가 먼 대다수의 사람들은? 놀자고 하는 일에서조차 좌절을 겪을 것인가? 게임 오버 화면을 노려보며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성찰할 것인가?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좀더 말랑말랑하고 편안한 방법도 있다. 바로 무한 컨티뉴다. 무한 컨티뉴 신공, 이것이야말로 게임 인생의 진정한 벗이자 보통 게이머의 희망의 여신이다. 게임 중 죽으면 컨티뉴 화면이 뜬다. 계속하시겠습니까? 물론이다. 집에서 게임하는데 동전을 넣을 필요는 없다. 반복에 반복을 또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클리어한다. 언제까지나 계속 출연해 똑같은 짓을 해야 하는 적들은 지겨워서 죽을 지경일 것이다. 내가 게임을 클리어하기를 가장 애타게 바라는 건 틀림없이 그들일 것이다. 이 좋은 걸 왜 몰랐나 싶다. 하면 할수록 마음에 든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하면, 다음번에야말로 기필코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또 실패다. 집어치우려다가 지금까지 한 게 아까워서 다시 도전한다. 문득 거울을 본다. 눈에는 핏발이 서고 손가락에는 물집이 잡혔다. 시계를 보니 일단 중지했다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어도 충분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러갔다. 더 무서운 건 무한 컨티뉴에 익숙해지다 보면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해볼 의욕이 원천적으로 삭제된다는 것이다. 좀더 노력하면 한번에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떠오르지만 귀찮은데 죽으면 다시 이어가지 하는 생각이 앞선다. 똑같은 플레이를 반복하다 보면 게임 자체가 지겨워진다. 세상의 다른 모든 묘안들과 마찬가지로 무한 컨티뉴는 너무 달콤하지만 그만큼 위험하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2003년 칸으로 부터 온 편지 [1]

칸이여, 대가들의 파티장에여, 왜 새로운 발견을 두려워하는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2002년 칸 리포트에 대한 반성문, 또는 올해의 다짐 칸=정성일/ 영화평론가 우선 먼저 고백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지난해 칸에서 <씨네21> 독자들을 위하여 영화를 보았고, 그리고 새로운 영화를 알리기 위하여 잠을 설치고 남들보다 서둘러 줄을 섰으며 열심히 글을 썼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 아마도 나의 올해 칸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해야 옳을 것이다. 반성1 - 내가 놓친, 혹은 과대평가한 영화들 무엇보다 먼저 지난해 칸에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친애하는 당신>을 놓친 것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주목할 만한 시선’). 타이에서 온 이 미지의 시네아스트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지난해 가장 새로운 발견이다. 매우 느리며, 때로는 거의 정지된 듯한 순간을 발견하는 이 영화는 얼마나 느리냐 하면 영화가 시작한 지 55분 만에 영화제목이 뜬다! 카메라는 마치 장면 나누는 것을 잠시 잊어버린 듯이 그저 무심하게 인물들을 쳐다보고 있으며, 때로는 그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고장난 채 텅 빈 길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를 따라서 언제까지라도 끝나지 않을 듯한 이동이 이어진다. 그 안에서 한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또 한명의 나이 든 여자의 관계는 아무리 지켜보고 있어도 종잡을 수가 없다. 병원에 들렀다가 오전을 보내는 절반의 무료한 이야기와, 그리고 세 사람이 함께 야유회를 떠난 오후 한나절이 이 영화의 전부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알 수 없는 긴장이 감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마지막 자막이 뜰 때까지 그저 남겨진다. 감정의 초(超)슬로모션이라고도 불릴 만한 이 기괴한 영화는 화사한 날씨와 산들거리는 바람의 느낌 속에서 피부 위를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듯한 스멀거림이 밀려오게 만든다. 마치 산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느껴지는 청아함과 온갖 벌레들이 몸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불쾌감이 진절머리치게 만든다. 물론 결국은 비극이다. 하지만 그 비극은 행복을 가장하고서, 현실 안에서 우리를 속인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거의 숨이 멎을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 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이 영화의 시사는 끝난 다음이었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파리에서였으며, 이미 칸발(發) 기사는 서울을 향해 날아간 다음이다. 나는 좀더 부지런해야만 했다! 그 다음. 지난해 칸에서 68편의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뽑은 10편의 영화 중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스파이더>와 지아장커의 <임소요>, 그리고 엘리아 슐레이만의 <신의 간섭>에 대한 나의 지지는 철회할 생각이 없다. 그 반대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과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의 방주>에 대한 나의 실망은 여전히 숨길 수 없다. 그들이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나도 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들이 위대한 시네아스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디지털영화와 위험한 불장난을 벌이는 중이다. (왕가위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은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 영화들은 좀더 진지하게, 시간을 갖고, 몇번이고 거듭해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벌써 더이상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 끔찍한 소비의 가속도. 저 가공할 만한 시네필들의 흡혈귀 같은 탐욕은 쉴새없이 새로운 영화에 갈증을 일으키고, 그리고 새로운 영화 명단을 제공하기 위하여 영화 저널들은 온갖 영화제를 뒤져야만 한다. 새로운 스타들이 탄생되어야만 하며, 물론 여기에 반성이나 성찰 혹은 사유는 없다. 현대의 예술이 점점 더 아방가르드해지는 것은 쉽게 소비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이지만, 자본주의는 그 아방가르드한 것을 물신화시키고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구경하게 만들어서 소비의 속도를 오히려 가속도 안으로 몰고 간다. <친애하는 당신> <돌이킬 수 없는> 무엇보다 먼저 지난해 칸에서 아팟차퐁 워라세타쿤의 <친애하는 당신>을 놓친 것은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다. ('주목할 만한 시선'). 타이에서 온 이 미지의 시네아스트 아팟차퐁 위라세타쿤은 지난해 가장 새로운 발견이다. 하지만 여기에 그것을 이용하는 속임수도 벌어진다. 이를테면 가스파 노에의 <돌이킬 수 없는>이 그러한 예일 것이다. 칸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의 음란한 쇼이다. 여기서는 영화와 연애를 하기보다는 섹스를 하는 것 같은 즉각적이고, 무분별하며, 무언가 서둘러서 결판을 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여기서 이성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돌이킬 수 없는>은 단 한번의 시사. 그것도 밤 12시. 그리고 영화제 시간표에는 “이 영화에는 당신을 심히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대목들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유의하실 것”이라는 경고를 빙자한 유혹까지 담고 있었다. 이제는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내기가 된다. 그러니 시키는 대로 달려가서, 소리치고, 흥분하고, 그 안에서 허망함을 느끼는 일만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10편의 목록에서 제외시킬 생각이 없다. 물론 나도 안다. 이 영화는 속임수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영화의 하나의 경향인 것을 부정하면 안 된다. <돌이킬 수 없는>은 한마디로 뻔뻔한 영화이다. 이 말이 그저 단 한숏으로 정지한 채 강간하는 장면을 보여주거나, 혹은 나이트클럽에 뛰어든 채 사이키 조명 속에서 날뛰면서 달려가는 카메라의 비윤리적인 태도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진짜 가소로운 것은 그저 한 일이라고는 신의 순서를 뒤집고서 마지막 순간 거기서 마치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있다는 듯이 “시간은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라고 말할 때 진짜 웃기는 일이 벌어진다. 또는 매우 역겨운 순간과 마주친다. 현대영화는 점점 더 영화가 사소한 주제를 다룰수록 진지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반대로 정말 다루어야 할 주제에 대해서는 부담스러워하거나 무관심한 척한다. 그래서 영화의 영혼은 점점 더 유치해지고, 세상에 대한 통찰은 점점 더 희미해져간다. 세상을 보는 영화의 시력이 떨어지는 것은 갈수록 인공조명이 휘황찬란해지고, 말이 많아지고, 눈앞에 벌어지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만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가스파 노에는 그것을 장엄하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 웃기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시간의 이미지? 또는 수정(水晶)화된 시간? 천만의 말씀. 그것은 영화의 늘어질 대로 늘어진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기 위해서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잠시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이다. 매우 역설적이긴 하지만, 시간이 뒤집힌 채 갈수록 점점 더 영화는 산문적이고 설명적이 되어간다. 앞의 장면이 뒤의 장면을 설명하는 대신, 뒤의 장면이 앞의 장면의 설명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이 영화의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거의 할말이 없어진다. 왜냐하면 그건 이미 모두 말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할말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난데없이 거창한 말이 나온다. 시간을 뒤집은 영화들이 대부분 악한 것에서 선한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그 영화들의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들은 대부분 시간을 아주 진부하거나 도식적으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숨기려 하는데, 가스파 노에는 그 진부함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자해활극을 벌인다. 말하자면 가스파 노에는 영화에 매너리즘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이 나를 슬프게 만드는 것은 그 대목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충무로의 ` 50대 청춘 ` 김유진 감독 [3]

05 감독들이여, 은근과 끈기를 가져라 -- “그래도 우리 세대가 보여줄 수 있는 거라면, 굶어죽어도 엄살부리지 않고 자존심 지키는 것 아니겠냐. 유진이나 나나 노선은 이거다. 서두르지 말고 쉬지 말자는 것.” - 씨네2000 이춘연 대표 <약속>이 대성공을 거둔 뒤 흥행 비결을 묻는 한 기자에게 김유진 감독은 “버티면 다 산다”고 답했다. 숱한 흥행 실패와 온갖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김유진 감독이 현재까지도 충무로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뭐니뭐니해도 영화에 대한 열정이었다. “영화에 들어온 이후 하나 확실한 것은, 한번도 영화 이외의 것을 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그의 고백은 괜한 힘이 들어간 말은 아닌 듯 보인다.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오뚝이처럼 계속 일어나 자신의 지위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에겐 비교적 탄탄한 가업(家業)이 있어 경제적으로 극한 상황에 몰린 적이 없긴 하지만, 한때는 그 역시 생계를 꾸리기 위해 “영화 만든다고 친구들 등쳐먹은 적”도 있었다. 이춘연 대표는 김유진 감독이 그런 상황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영화에 대한 열정과 함께 정도(正道)를 걸으려는 의지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엄살부리지 않고 여유있게 기다릴 줄 안다. 한번 고민하기 시작하면 집요하게 파들어가지만 무리하게 일을 벌이지는 않는다.” 결국 장수 감독으로 가는 데는 왕도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1991년 | 감독 김유진 | 제작 고규섭 | 출연 원미경, 이영하 김유진 감독의 존재는 9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 영화계의 급속한 세대교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장급들이 해줄 몫이 풍부함을 보여준다. 그의 지속적인 도전은 분명 한국영화가 장르적 다양성, 미학적 다양성과 함께 패기와 관록이라는 연륜의 다양성을 갖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런 강렬한 바람을 담아 김유진 감독이 동료 감독들에게 부치는 메시지. “부디 지치지들 말고 잘 버텨달라!”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편집 권은주 kez77@hani.co.kr Self Biography 1950년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남.“…(서울 출신이라는 데 왜 의외라는 반응일까?)” 1970년 중앙대 연극영화과 진학. “뭐 살다보면 그냥 흘러흘러 가는 게 있는 것 아니겠어요? 어떤 사람은 공부 못해서 갔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확실한 뜻이 있어서 갔을 수도 있고. 나는… 음….” 1974년 대학 졸업. 해병대 장교로 입대. “대학 다닐 때는 줄곧 연극 연출만 했어요. ‘극회 동인무대’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거기 나중에 유인촌씨도 들어오고 그랬어요.” 1977년 군대 제대. 오퍼상에 취직하다. “사실, 4학년쯤 됐을 때부터 연극을 왜 했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먹고사는 것도 걱정이 되고. 그리고 내게 과연 순수한 열정이 있을까, 자신이 없더라니까.” 1985년 회사 퇴사. 이춘연과 함께 영화사 대진엔터프라이즈 설립. 데뷔작 <영웅연가> 준비. “직장 오래 다녔죠. 나중에는 형님 회사에서 일을 도와드렸어요. 그 와중에 아마추어 극단 것 한편, 프로극단 것 한편, 이렇게 연극 연출도 했어요. 그러다가 84년 12월에 영화업을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꾸는 영화법 개정이 발표됐고, 춘연이와 함께 회사를 만들기로 했죠.” 1986년 <영웅연가> 발표. “비디오테이프도 구하기 힘들 거야. 그런 명작도 드물 텐데 말이지…. (웃음) 원래 훌륭한 영화란 게 묻히곤 하니까. 아무튼 그 영화 만든다고 검열쪽이랑 많이 싸웠어요. ‘영웅’란 것도 ‘전통’을 연상케 한다고 쓰지 말라고 난리치고, ‘재벌’이란 단어가 불순하다며 ‘그룹’이라고 하지 않나. 우리 스탭들은 준비된 빨간색 플래카드도 일부러 파란색으로 바꿨을 정도였다니까. 어떻게 연출부 경험 하나없이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냐고?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죠.” 1988년 <시로의 섬> 발표. “이것도 훌륭한…. 우리끼리는 프랑스영화가 이것 보고 베껴야 한다고 큰소리쳤죠. (웃음) 아무튼 그렇게 두편 연달아 까먹고 나니까, 아이고, 집장사나 할걸, 카페나 할걸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1990년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발표. “이 영화를 기획한 신씨네의 신철이라는 친구는 명보극장 기획실에 있을 때 만났는데, 어느 날 그 사건의 자료를 엄청나게 주더라고. 그걸로 상도 많이 받고 했죠. 그때 서울에서 10만 들면 성공하는 거였는데, 5만6천인가 들었어. 아무래도 오락성이란 기준에서는 한계가 있더라고.” 1993년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 발표. “<단지…> 끝난 다음에 태흥영화 이태원 사장님이 부르더라구. 언제 한번 영화 같이 하자고 하시대. 그때가 <나 홀로 집에>가 괜찮은 성적 올릴 땐데, 가족영화가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초등학생 4, 5, 6학년들 만나서 너희들 왜 싸우니, 월경은 언제 하니, 시시콜콜 인터뷰하면서 기획을 했어요. 여름방학 때 개봉했는데, 가족끼리 손 붙잡고 올 줄 알았건만 썰렁하더라고. 그땐 아직 한국영화에 대한 신뢰도가 낮고, 가족끼리 삼겹살 먹기 바빴던 시대였나봐. 그래도 <서편제>로 돈 많이 벌 때여서 이태원 사장님은 아무 말도 안하대.” 1995년 <금홍아 금홍아> 발표. “이상(李箱)과 구본웅 얘기를 금홍이 중심으로, 여성의 시각으로 엮어보려 했는데,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출발해 가장 힘들었던 작품이에요. 아, 그때 김홍준이랑 육상효가 시나리오에 참여했었죠.” 1998년 <약속> 발표. “헤어짐이 안타까워 눈물이 나는 영화를 만들려 했는데, 누가 이만희의 <돌아서서 떠나라> 희곡을 추천하더라고요. 몇번 읽어보니까 좋더라고. 그래서 이만희에게 그랬지. 이거 영화하자, 당신이 각본 써라. 근데 정경순이 나오는 연극은 나중에야 봤는데 연극이 더 좋대. 영화는 그런 얘기예요. 깡패짓을 해도 정도를 가자, 잡놈은 되지 말아라.” 2003년 <와일드카드> 발표 “일단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선 형사들 만나서 봉급에 만족하냐, 마누라랑 뭐 하냐, 범인 잡을 땐 무섭지 않냐 등등 물어봤죠. 24시간 추적? 그런 거는 게을러서 못하고…. 이 영화 찍으면서 카메라 감독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이 영화는 사람 이야기니까 괜한 욕심부리지 말자고, 나대지 말자고. 그냥 배우를 죽 따라가기로 했죠.”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칸의 한국영화, 원더풀 세일즈

칸영화제에서 한국영화 해외 세일즈 호조, <튜브>는 11개국에 팔려 팔레 드 페스티벌 ‘지하’에 한국영화 바람이라도 불어닥친 걸까. 칸영화제 메인 상영관 지하 1층에 마련된 칸 마켓에서 한국영화들이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영화제 소식을 전하는 각종 데일리에는 공식 경쟁부문과 무관한 한국영화 관련 기사가 연일 실리고 있다. 영화진흥위 관계자는 “지난해와는 확실히 다른 풍경이다. 경쟁부문 라인업이 예상 밖으로 약세를 보이면서 마켓에 볼 영화들이 많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 와중에 한국영화들이 유난히 많은 조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시네마서비스의 문혜주 이사는 “바이어들이 유독 액션과 호러 장르에 관심을 많이 보였고, 몇몇 대작들의 바람을 타고 기존 작품들까지 한 묶음으로 팔려나가는 호조를 보였다”고 말했다. 바람몰이를 일으킨 주인공은 <튜브> <원더풀 데이즈> <태극기 휘날리며> <살인의 추억> 등의 국내 화제작과 미국의 ‘AD Vision’이란 회사. 6월5일 국내 개봉을 앞둔 <튜브>는 5월23일 현재 일본, 미국 등 11개국을 상대로 250만달러의 판매고를 올렸다. <튜브>의 일본 내 배급권을 사들인 회사는 3대 메이저 중 하나인 쇼치쿠. 제작사쪽은 “일본의 메이저 배급사가 한국영화 판권을 직접 구매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영화를 본 지 4일 만에 180만 달러에 사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는 “프랑스에서만 5개 회사가 싸움질에 가까운 경쟁을 벌였고” 결국 3대 메이저에 속하는 ‘파테’가 50만달러에 사들였다. 또 스페인의 망가필름은 16만5천달러에 이 작품을 구매했다. 판매를 담당한 미로비전은 “이 영화에 대한 유럽쪽의 반응은 신기할 정도로 강렬하다. 영국 등 다른 유럽쪽과 계속 협상 중”이라고 밝혔다. 촬영이 한창인 강제규필름의 <태극기 휘날리며>는 유니버설픽처스재팬(UPJ)과 개봉 성과에 따라 수익을 나누는 미니멈 개런티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또 스칸디나비아의 ‘노블 앤 파트너스’와는 20만달러에 판권 계약을 맺었다. CJ엔터테인먼트의 최대 주력상품인 <살인의 추억>은 일본의 한 배급사로부터 100만달러의 구매제의를 받았으나 몸값을 더 올리고 있는 중이다. 미국의 ‘AD Vision’은 한국영화를 ‘닥치는 대로’ 사들여 화제가 됐다. 수많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수입·배급해온 이 회사는 일본과 홍콩영화에 이어 한국으로 눈을 돌린 듯하다. AD Vision은 시네마서비스에서 <광복절특사> <가문의 영광> <마리이야기> <공공의 적> <킬러들의 수다> 등 7편을, 미로비전에서 <오! 수정>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아프리카> <싸이렌> <패밀리> 등 8편을, CJ엔터테인먼트에서 <예스터데이>를, KM컬쳐에서 <품행제로>를 사들였다. 미로비전은 <폰>을 이탈리아 이글픽쳐스와 독일 레이지파라다이스에 판매했는데, 레이지파라다이스는 <폰> 이외에도 <엽기적인 그녀> <텔미썸딩> 등 모두 9편의 한국영화를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켓이 문을 닫고서도 구매를 둘러싼 협상은 계속되기 때문에 당장 모든 성과를 일별할 순 없겠으나 지금의 칸 풍경은 말만 무성했던 예년과는 다른 모습이다.이성욱

<매트릭스2> 주말 흥행 역대 최고

예상했던 대로 <매트릭스 2 리로디드>가 일을 냈다. 연쇄 살인의 바람을 잠재운 <매트릭스 2>는 지난 목요일(22일) 전야제를 시작으로 일찌감치 14만을 불러모았고 여기에 금, 토, 일 3일동안 107만이 더 관람해 총 주말 스코어 121만이라는 대한민국 영화 흥행사상 초유의 기록을 세웠다. 서울 관객이 48만 5천으로 지방 관객과의 차이도 크지 않다는 점에서 일단 장기흥행 관망도 낙관적이다. <매트릭스 2>의 주말 흥행 스코어 121만은 지난 12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이 개봉 3일 동안 세운 서울 23만, 전국 101만 관객, <반지의 제왕: 2개의 탑>이 4일 동안 동원한 서울 35만, 전국 107만 관객을 능가하는 대기록으로 당분간 이 기록을 깨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 320개 극장에서 개봉해 사상 최대의 와이드 릴리즈 효과를 톡톡히 본 <매트릭스 2>는 개봉시기가 대학생들의 축제기간과 겹친데다가 별다른 경쟁작이 없어 때맞춘 개봉전략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한편 씨네21 네티즌 리뷰 게시판에 올라온 <매트릭스 2>에 관한 글은 "액션과 스케일이 전편보다 낫다"는 의견과 "전편의 심오함은 간데 없고 얄팍한 상술만 보인다"는 의견으로 양분되어 초반에 잡은 흥행 기선이 입소문을 타고 얼마나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씨네21 네티즌 리뷰 보기 인터넷 씨네21팀 cine21@news.hani.co.kr

<와일드카드> 배우 이도경

“오호호홍… 행님들 와 연락도 없이 오셨능교.” 김유진 감독의 <와일드카드>를 본 사람이라면, 간드러지게 애교를 떨며 두 형사를 맞이하는 안마시술소 사장 도상춘을 잊지 못할 것이다. 형사들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에 투입돼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는 도상춘은 가끔 얄밉지만 미워할 순 없는, 그렇게 정이 가는 존재다. 영화관을 나가는 관객으로 하여금 “저 양반 대체 어디 있다가 나타난 거냐”는 질문을 던지게 한 이 ‘충무로의 뉴페이스’는 대학로의 흥행배우이자 연출가이며 극단 이랑씨어터 대표이기도 한 이도경(50)이다. 대학로 연기생활 26년째를 맞는 이도경은 1992년 <불 좀 꺼주세요>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고, 97년부터는 현재까지 상영 중인 <용띠 위에 개띠>로 흥행행진을 잇고 있다. 그동안 “극단 대표가 오디션 보러가는 게 좀 그래서” 영화에 출연하지 못하던 그는 <불 좀…>과 <용띠…>의 각본을 쓴 이만희 작가가 <와일드카드>의 시나리오를 쓴 인연으로 충무로에 문턱을 넘었다. 20여년 전 한 사극에 출연한 경력이 있긴 하지만, “순전히 경험 삼아 해본 거고 지금 생각하면 창피한 기억”인지라 그에게 <와일드카드>는 영화 데뷔작인 셈이다. 이도경은 이만희 작가가 그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도상춘이란 캐릭터를 이렇게 해석했다. “악역이라도 미움을 받아선 안 된다. 대신 연민을 느끼게 해야 한다.” 그는 고향인 경주의 사투리를 좀더 세게 발음하고, <용띠…>를 수년 동안 공연하며 익숙해져버린 콧소리를 곁들여 ‘매력’을 가미했으며, 쉽게 이랬다저랬다 하는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의 능력과 노력을 관객이 놓칠 리 없다. “인터넷 게시판에 어떤 젊은이가 나를 ‘늙고 귀여운 악동’이라고 표현했더라고요. 연기생활 이십몇년 만에 귀엽다는 말은 처음이네. 오홍….” 하지만 그가 아무리 대학로에서 소문난 배우라 해도 사실상 처음 접하는 영화현장은 낯설었다. 기자 시사회장에서 그가 “내가 기대했던 것에 비하면 40% 수준”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매체에 익숙지 않은 데서 빚어진 실수가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더 웃길 수 있었는데…. 관객을 완전히 패대기칠 수 있었는데 딴죽밖에 못 건 것 같네.” 그가 시사회장과 개봉관을 모두 8번이나 찾아가며 영화를 보고 있는 것도 영화연기의 호흡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이도경에게 <와일드카드> 출연은 어린 날 꿈의 실현인 셈이다. 극장 영사기사에게 막걸리나 담배 같은 ‘뇌물’을 바치고 영사실에서 영화를 봤다는 그는 <시네마천국>의 토토 같은 유년기 속에서 스크린 배우의 꿈을 키웠고, 서울예대 영화과에 들어갔다가 신구의 연극을 보고 연극과로 전과하며 연극계로 향했다. “연기자가 되려면 우선 연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나서 영화를 해야지, 라고.” 물론 그의 진정한 바람은 영화건 연극이건 좋은 연기자로 남는 것이다. 때문에 이도경은 일단 무기한 상연 중인 <용띠…>에 최선을 다하면서 마음에 드는 영화가 나타나면 기꺼이 참여할 생각을 하고 있다. “사실 나는 아주 지랄 같은 것, 아주 희한한 것, 얄궂은 것, 독특한 걸 해야 직성이 풀려요”라고 말하는 그의 이마에 팬 주름이 실룩거리더니 다시 “오홍…” 하는 웃음이 터진다.

사람은 이성적 존재라고 하지만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다. 사람이 이성적 존재라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겠는가. 아니 차라리 이성적 존재가 아닌 게 나을지도 모른다. 사방에 이성적 존재라면 정말 재미없는 세상일지도 모르니까. 사람이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는 증거를 멀리서 심각한 데서 찾을 필요도 없어 보인다. 별거 아닌 일에 열받고 발끈하고 그것 때문에 인간관계 망가지는 것만 봐도 이성적 존재가 아닌 건 분명해 보인다. 누구를 처음 만났을 때나 누구의 글을 읽었을 때, 그에 대한 호감과 불쾌감은 그에 대한 이성적 판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행동 하나 때문에, 또는 어떤 단어 하나 때문에 그가 보기 싫을 수도 있고, 바로 그것 때문에 그가 엄청 좋아질 수도 있다. 이것이 일관성 있게 적용되면 일종의 취향이겠는데 이 취향을 사람들은 억지로 이성적인 것이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다리를 달달 떨면서 말을 하는 사람과는 그가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향기로운 단어를 쓰고 있고, 무지하게 아름다운 사람이고, 아네트 베닝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눈웃음을 잘 친다 해도 다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취향이 있다. 입과 다리가 따로 노는 꼴이 아무래도 싫어서다. 다리를 떨면서 말을 한다 해서 그가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싫다. 싫은 걸 어쩌리. 글 쓸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문장에서 사용하는 사람도 싫다. 술을 마시고 비틀대다가 무거운 나무 상자가 왼쪽 발등에 떨어져서 뼈가 깨지는 바람에 거기에 석고를 대고 목발을 짚고 6개월을 지낸 적이 있다. 목발을 해보니 무슨 놈의 문턱은 그리 높으며 계단은 왜 그리 많던지. 발을 다치고 보니 새삼 몸이 중요한 걸 알았다고나 할까. 다리 떨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 입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더 커졌다. 그때 잠시나마 모든 걸 발의 관점에서, 몸의 관점에서 본 적이 있다. 뭐 해보자는 말하는 것과 그거 실행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높은 사람들은 ‘이거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하고 지나가면서 슬쩍 말한다. 그 사람들은 그런 말하기 쉽다. 자기 몸으로 하는 거 아니니까. 자기가 안 해봤으니 그거 하다 보면 하루가 가는 걸 모르는 거다. 혀에서 단내 나도록 해봤자 일 열심히 안 한다고 못마땅해 하는 소리만 돌아온다. 그런 작자들을 보면 마치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라고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단두대에 올려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조차 한다. 몸이 아닌 말로 해결하려는 악습은 어디에나 붙어 있다. 학문을 한다는 사람들은 뭐든지 머리로 해결하려는 악습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일반적인 병폐가 바로 이것이다. 몸으로 익히는 학문, 몸으로 알아내는 세상, 이것이 있은 다음에야 제대로 된 학문이 있을 것이다. 굳이 학문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어려운 말을 이리저리 꼬아대서 말하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몸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쓰는 단어 하나하나가 내 몸의 감각 기관에 닿아 오지 않으면 그건 아무짝에 쓸모없는 말이다. 말들끼리 장난치고 놀자고 만들어진 말이다. 몸으로 때워서 알아내지 않은 세상살이는 공허하다. 우리를 조이고 있는 것은 정말로 엄청나게 강한 일상이라는 족쇄인데, 몸으로 때워보지 않은 사람들은 이 족쇄를 좀처럼 알지 못한다. 일상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상상해보라. 예전에 들뢰즈라는 유명한 프랑스 철학자가 아파트 창문으로 뛰어내려 깔끔하게 세상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고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가 그 동네의 일상을 깨뜨렸다는 것이었다. 창문 밖 도로에 피떡이 되어버린 시체가 누웠으니 앰뷸런스가 왔을 테고, 앰뷸런스 오느라 차 막혔을 테고, 차 막혔으니 짜증난 사람 많았을 테고, 시체 치운 다음에 청소부는 피 닦느라 화딱지났을 테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일상사인 것이다. 뭐 잘났다고 투신 자살을 하나, 깊은 바닷물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가 죽었으면 정말 깔끔했을 텐데. 가끔 디지털카메라로 발을 찍어서 혼자 감상하곤 한다. 이 발이 그나마 이 정도여서 멀쩡한 티 내면서 살아갈 수 있으니, 별탈없이 일상을 영위해서 먹고살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은 마음에서이다. 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

내가 원하는 게 이거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나는 여자 예비역이었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중에 휴학했고, 3년 뒤에야 군제대한 남자 동기들과 함께 복학했다. 3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느 순간 돌이켜보아도 후회없을 만큼 그때는 끊임없이 일하고, 여행하고, 고민했던… 그런 시간을 보냈다. 겁도 없이 배낭하나 달랑 메고, 또 배낭만큼 무거웠던 고민을 등에 지고 호주 농장 곳곳에서 하루 일당을 차곡차곡 모으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명쾌한 답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전공이 관광경영이었건만) 유럽 문화 유산을 보면 전공쪽에 좀더 애정이 가려나… 아니었다. 귀국하여 다시 일년을 일했다. 더이상 복학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스트레스와 함께 끝내지 못한 방학숙제를 들고 개학을 하루 앞둔 초등학생처럼 하루하루 우울하게 보내던 때쯤이다. 그 우울증을 영화보기로 풀면서 <씨네21>을 뒤적거리던 어느 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영화의 눈물겨운 제작일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약간 술렁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나게 되었다. 나에게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같은 시절이 있었다. 2년여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얻은 휴우증과 함께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미래를 고민했던 1999년 무더위가 숨죽일 무렵. 밤 9시 코아아트홀에서 혼자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심경으로 이 영화를 대면했던 것이다. 가 흘러나오고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나는 그저 멍하니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다가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십대 시절이 가지기 쉬울 법한 호기를 부리며 건달을 꿈꾸다 칼받이가 되어 쓰러진 상환(류승범)의 마지막 모습에서 뜻대로 되어주지 않는 인생의 수렁이 왜 그리도 절절히 느껴졌는지…. 경쾌하게 웃다가 그냥 끝나는 영화가 아니었다. ‘삶이 녹록지 않다’라는 진실을 처절하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의 옴니버스가 다른 장르로 전개됨에도 불구하고 맥을 잃지 않고, 통통 튀는 대사와 사소한 디테일들이 살아 있는 이 영화의 캐릭터들이 우리네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는 연유다. 더불어 일전에 읽었던 눈물의 제작일지의 감흥은 이 신선한 영화에 더욱더 깊은 애정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의 홈페이지를 찾아가 박수치는 마음으로 네티즌 펀드에 투자하고, 인츠필름에 류승완 감독 열혈팬 모임 ‘압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나는 지난 3년 동안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부터 나의 영화사랑은 더욱 각별해졌다. 영화 한편한편에 고민하고, 두근거리고, 가슴 아파하고…. 학교 시나리오 수업부터 문화센터 영화강좌를 쫓아다니는 등 영화에 대한 설렘을 거침없이 키워나갔다. 그리고 그 짝사랑은 아직도 여전하다. 영화는 그저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그림처럼 볼 수는 있되 만질 수는 없는, 그러한 막연한 동경의 대상에만 있었다. 질퍽거리는 길을 3년이나 걸어갔는데도 나를 미치게 하고 애타게 할 만한 “내가 원하는 게 뭐야”를 찾지 못한 그 길목에서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만난 건 유행가 가사처럼 행운이었다. 가장 감동스럽게 본 영화 혹은 내 인생의 최고의 영화를 꼽으라면 다른 영화를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나에게 주는 의미는 이 꼭지의 제목처럼 ‘내 인생의 영화’, 바로 그것이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바람은 바람의 길을 가고/ 강은 강의 길을 가는데/ 나는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는지/ 자유롭고 싶다, 이 무거운 몸 벗고/ 저 새들과 같이 저무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다 - -백창우,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되고> 중

<니모를 찾아서>,픽사를 찾아서 [4]

픽사 캐릭터열전내 옛 장난감이 떠올라 픽사의 아이콘 - 룩소 주니어 <룩소 주니어> Luxo Jr. 1986년작. 픽사의 영화가 시작되기 전 나오는 PIXAR라는 타이프 중에서 I자 위에 올라가 퉁퉁 튕기다 찍 밟고 서는 바로 그 램프가 룩소 주니어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램프가 I를 찍 눌러 없애는 장면을 만날 수 있다. 말로 하는 대사는 없지만, 램프를 켜고 끄고, 제자리에서 뛰고, 램프를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보다 내용을 이해하기 쉬울 수 없다. 픽사적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존 래세터가 감독했다. <토이 스토리2> DVD 서플에 담겨 있다. <럭소 주니어> <틴 토이> 괴물아기 남시오 - 아기와 병정 <틴 토이> Tin Toy 1988년작. <토이 스토리>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존 래세터 감독이 만든 <틴 토이>는 괴물(같은) 아기와 양철 장난감 병정의 이야기를 그렸다. 성인의 눈으로 보기엔 앙증맞지만, 장난감 병정의 눈에 아기의 포동포동한 팔은 거의 공사장 굴착기 수준의 공포를 안겨준다. 병정은 아기로부터 도망가보려 하지만 불행히도 움직일 때마다 다리에 연결된 줄 때문에 등에 짊어진 북도 동시에 울린다. <틴 토이>의 아기는 ‘진짜처럼’ 구부러지는 팔과 무릎, 피부와 표정을 디지털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캐릭터이다. 아카데미 단편애니메이션상을 받았다. <벅스 라이프> DVD에 실려 있다. ‘털’을 만나다 - 새들 <새가 되어버린 새> For the Birds 2000년작. 전깃줄에 앉은 새 한 마리, 새 두 마리…. 조류밀도(?)가 점점 높아져가자 새들은 짹짹거리며 눈을 부라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아뿔싸, 저기 대문짝만한 새가 꺽꺽거리더니 전깃줄 한복판에 내려앉는 게 아닌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무줄처럼 점점 늘어진 전선, 마침내 새가 퉁 하고 날아가자 나머지 새들도 허공으로 흩뿌려진다. 그리고 새털이 몽땅 뽑혀 하늘로 날아오른다. 랠프 에글스톤이 감독한 <새가 되어버린 새>는, 2001년, 세계를 경악하게 한 진짜 털 같은 디지‘털’ 미리 맛보기라고나 할까. <몬스터 주식회사>의 DVD 서플에 수록되어 있다. <새가 되어버린 나> <토이 스토리> 장난감의 비애 - 우디와 버즈 라이트이어 <토이스토리> Toy Story 1, 2 1995년, 99년작. 존 래세터가 감독했다. 크리스마스와 생일 파티가 닥칠 때마다 신형 장난감에 밀려날까봐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장난감들의 비애를 그렸다. 만화적 디자인과 색상, 매끈한 질감을 가졌으면서도 양감과 동세가 다채로운 소재인 장난감과 컴퓨터애니메이션의 찰떡궁합을 입증해 보였다. 2편에서는 <스타워즈> <쥬라기 공원> 등의 패러디가 등장, 쏠쏠한 재미를 더한다. 정말 사랑하다 버림받는 편이 아예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행복한가? 장난감들이 던지는 근원적인 질문은 성인 관객까지도 고민에 빠트린다. 마이크로 코스모스의 우화 - 플로와 곤충들 <벅스 라이프> A Bug’s Life 1998년작. 존 래세터가 감독한 픽사의 두 번째 애니메이션으로, 개미사회의 획일성에서의 부적응자인 발명가 일개미 플릭과 그가 겪는 외부세계에서의 모험, 그리고 개미 왕국을 지키려 큰 곤충과 싸우는 이야기를 그린다. 드라마틱한 표현을 위해 최대 120가지 빛을 사용했다는 조명은, 곤충세계를 빛나는 반투명한 질감으로 환상적으로 그려냈다. 98년 개봉 당시 드림웍스가 제작한 디지털애니메이션 <개미>와 소재와 흥행, 그리고 만듦새면에서 비교되기도 했다. <몬스터 주식회사> <벅'스 라이프>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디지‘털’ - 설리와 마이크 <몬스터 주식회사> Monsters. Inc. 2001년작. 왜 디지털애니메이션에는 표면이 반들반들한 주인공들만 등장하느냐는 질문을 불식시킨 털털털. 300만 가닥에 달하는 점박무늬 털을 휘날리며 러닝타임 내내 스크린을 활보하는 <몬스터 주식회사>의 주인공 설리는 세상 모든 애니메이터들의 악몽이 되었다. 추방된 설리가 썰매에 등불을 매달고 히말라야의 눈보리를 헤쳐가는 신은 그늘과 역광, 습기와 바람에 대한 모피의 반작용을 그리는 딥 셰이딩 프로그램과 무드효과 기법의 쇼케이스이다. 피트 닥터 감독의 작품이며, 스피드와 짜임새를 겸비한 코미디로서, 그리고 100% 컴퓨터애니메이션 기술의 첨단혁신이라는 점에서 픽사의 브랜드네임을 굳히는 데 일조했다. 아들 찾아 삼만리 - 니모, 말린, 도리 <니모를 찾아서> Finding Nemo 2003년작. 픽사애니메이션의 모든 장편 작품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던 앤드루 스탠튼이 감독했다. 아내를 잃고 아들 니모를 과잉보호하는 홀아비 열대어 말린은 등교 첫날 니모가 열대어를 수집하는 스쿠버 다이버에게 납치되자 초절정 소심함을 무릅쓰고 3조7천억 물고기들에게 물어물어 시드니의 수족관까지 아들을 찾아간다. 그의 길동무가 되어준 도리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낙천적인데다가 순간기억상실증(<메멘토>가 오버랩되면서 폭소가 터진다!)을 앓고 있다. 6월 개봉예정이다. 윌렘 데포, 제프리 러시 등이 목소리 출연한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2003 칸 리포트,두 보고서 [6]

웃지마, 현실이 될지도 몰라 <엘리펀트>(The elephant) | 감독 구스 반 산트 | 경쟁부문 구스 반 산트의 영화는 결국 미국 십대들을 이해하려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영화이다. 그가 인디펜던트로 만들건(<드럭스토어 카우보이> <아이디호>), 할리우드에서 만들건(<굿 윌 헌팅> <파인딩 포레스터>) 마찬가지이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영화를 만들거나(<카우걸 블루스> <싸이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다루기도 하지만(), 결국은 같은 이야기로 돌아온다. 물론 그의 영화가 점점 나빠진 것은 사실이다(얼마 전까지 나는 <드럭스토어 카우보이>가 그의 가장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굿 윌 헌팅>을 본 다음에 더이상 그의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펀트>로 구스 반 산트는 기적처럼 돌아왔다(아직 나는 <게리>를 보지 못했다). 정말 이 영화는 구스 반 산트의 새로운 경지이다. 이제까지의 그의 영화의 결산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영화의 단계에로 점핑한 것이다. 거의 숨이 멎을 듯한 첫 장면의 아름다움. 그리고 거기서 숨을 들이쉰 순간 마지막 장면까지 홀린 듯이 달려간다. 텅 빈 파란색 하늘. 미국의 평범한 고등학교. 영화에는 일곱개의 자막이 나오고 한명씩 소개한다. ‘존’ 존은 알코올중독인 아버지 때문에 괴롭다. 그는 학교에도 아버지를 차에 싣고 가서 어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내려야 한다. ‘엘리아스’ 엘리아스는 사진 찍는 것이 취미이다. 그래서 학교 미식축구선수 조단과 애인 캐리를 산책로에서 찍는다. ‘조단과 캐리’ 조단과 캐리는 구내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다. ‘에릭과 알렉스’ 에릭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을 몇번이고 반복해서 친다. 알렉스는 그의 친구이다. 알렉스는 컴퓨터 게임에 심취해 있다. ‘미쉘’ 미쉘은 그녀의 체육복 때문에 학교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는다. 그녀는 학교에서 왕따이며, 학교 도서실에서 사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브리트니와 니콜, 아카디아’ 브리트니와 니콜과 아카디아는 단짝이다. 남자애들에게 관심이 많고, 학교에서 재수없는 여자애들을 왕따시키고, 점심을 먹고 나면 셋이서 화장실에 몰려가 다이어트를 하느라 토한다. 그리고 ‘베니’ 이 학교의 흑인 소년. 구스 반 산트는 이들을 돌아가면서 보여준다. 시간은 어느 하루의 오후 한나절이고, 그들이 서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반복된다. 오해하지 말 것. <엘리펀트>는 <라쇼몽>이 아니다. 같은 순간이 반복되지만, 매번 그 에피소드의 주인공의 시점으로 옮겨간다. 이를테면 엘리아스가 학교 구내에서 존을 찍을 때 그 옆을 달려가는 미쉘의 장면은 세번 반복된다. 한번은 존을 따라가다가 엘리아스를 만난다. 다른 한번은 엘리아스를 따라가다가 존을 만난다. 세 번째는 복도를 뛰어가던 미쉘이 사진을 찍는 존과 엘리아스를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거듭 구스 반 산트는 이날이 특별한 날이 아니라고 보여준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하루. 하지만 그가 (영화적으로) 반칙을 쓰는 것은 아니다. 영화가 시작하고 첫 번째 존과 엘리아스와 미쉘이 스쳐 지나가고, 존이 운동장으로 나갈 때 에릭과 알렉스는 총과 탄피로 무장하고, 군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 스쳐 지나간다. 이미 참살극은 예고된다. 구스 반 산트는 이 이야기를 말 그대로 장님들이 ‘코끼리 더듬듯이’ 구성한다. 이 사건의 실체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사건은 벌어지고 만다. <엘리펀트>는 정말 무시무시한 영화이다. 이 영화가 무서운 것은 거기서 구스 반 산트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총기를 들고 학교에 등교해서 친구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는 에릭과 알렉스는 평범한 집 아이들이다. 그 둘이 게이 친구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살해 동기라고는 설명하지 않는다(이 영화는 호모포비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구스 반 산트 자신이 게이이다). 또는 죽어가는 아이들을 위해서도 측은한 마음을 갖게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학교에 등교했고, 그날 거기 있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이들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으며, 이 사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관심이 없으며, 고등학교 폭력을 분석하려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그날 오후가 주인공이다. 화창한 날씨, 기분 좋은 바람, 평범한 고등학교. 구스 반 산트는 거기서 마치 일상생활을 찍듯이 이 끔찍한 학살을 보여준다. 모두 죽이러 떠날 때 에릭은 다짐하듯이 말한다. “제일 중요한 건 말야, 재미있게 해야 하는 거라고.”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의 극영화 버전? 천만의 말씀! 이건 웃자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구스 반 산트는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살인사건을 쿨(!)하게 담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고등학생 등장인물을 뽑은 일이었다. 신문에 광고를 냈고, 3천명의 지원자가 몰렸다. 그중에서 ‘연기 경력이 없는’ 200명을 추려냈고, 그 다음에는 한명씩 모두 비디오로 찍어가면서 오디션을 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뽑아낸 아이들을 한편의 영화에 담아냈다. 이 영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자기의 실명이며, 그들은 자기의 언어와 자기의 표정을 갖고 상황 안으로 들어왔다. 오하이오의 포틀랜드에 있는 (구스 반 산트가 다닌) 고등학교에서 촬영되었지만, 동시에 미국 각지에서 몰려온 고등학생 등장인물들이 자기 자리에서 해내는 그 모습은 미국 고등학교의 풍경이다. 구스 반 산트는 그들을 일일이 인터뷰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물을 어느 자리에 놓아야 할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정말 단숨에 찍었다. <엘리펀트>의 촬영일수는 20일이다. 이것을 신기하게도 구스 반 산트는 스탠더드 사이즈인 1.33 대 1의 비율로 손으로 들고 촬영했다(지금 영화의 대부분은 1.85 대 1이거나 1.66 대 1이다). <엘리펀트>의 미학적 쇼크는 여기서 나온다. 이제는 사라진 사이즈. 오직 폴라로이드 카메라에서 볼 수 있는 그 화면 프레임을 끌어들여서 사진의 일상성의 미학으로 그날 오후를 찍는다. 이 낯선 카메라 프레임은 영화를 마치 사진처럼 보게 만든다. 혹은 그냥 간단히 말하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보인다. 그래서 <엘리펀트>는 영화가 아니라 이미지로 보게 만든다. 또는 총기살인사건을 스틸 사진 찍는 것처럼 촬영한다. 의도적으로 편광필터를 사용해서 반사광을 지운화면은 평면공간처럼 보이고, 망원렌즈와 단초점렌즈, 혹은 약간 굴곡을 만드는 와이드렌즈, 그리고 딥포커스 촬영이 복잡하게 들어가 있지만 거기서 구스반 산트가 노리는 것은 등장인물의 마음이다. 말 그대로 렌즈는 번갈아 등장하는 그 인물들의 마음의 풍경이다. 그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인물들과 함께 걸어다니거나, 앉거나, 뛰거나, 멈춰서면서 함께 숨을 쉰다. 하지만 구스 반 산트는 결코 폭력(의 상황)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래서 총격전의 순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그 어떤 흥분도 피한다. 그는 정작 총격전 장면이 벌어질 때 단초점렌즈로 총을 쏘는 알렉스와 에릭만을 보여주고, 그들의 총에 맞아 쓰러지는 친구들을 모두 아웃 포커스시키거나 프레임 아웃해버린다. 총소리와 복도에서 울려퍼지는 비명소리. 그 위에 너무나도 아름답게 에릭이 늘 연주하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이 흐른다. 에릭의 말을 빌리자면 재미있자고 한 일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죽고, 학교는 피바다가 된다. 이제 그날 하루가 끝나고 저녁이 찾아온다. 그러면 우리는 간단한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는다. 죽은 아이가 죽은 아이들을 기리는 연주. 구스 반 산트의 말을 빌리자면 "영원히 그날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만든 그날의 영화. 그래서 영화로 끝나길 바라는 영화". 칸 최고의 막가파 영화 <극도공포대극장 소 대가리>(極道恐怖大劇場 牛頭) | 감독 미이케 다카시 | 감독주간 누구도 처음에는 이 영화가 무슨 영화인지 몰랐다. 미이케 다카시가 막 가는 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막 갈 줄은 정말 몰랐다. 그냥 소개된 줄거리에 의하면 ‘똘마니’ 야쿠자 미나미는 그가 모시는 ‘형님’ 오자키가 좀 미쳤다는 사실을 ‘오야붕’이 알게 되어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미나미는 ‘형님’ 오자키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준 이후로 ‘형님’과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로 맹세했기 때문에 조직을 배신해야 할지 ‘형님’을 버려야 할지 결심해야 한다, 라고만 되어 있었다. 당연히 <극도공포대극장 소 대가리>(이하 <소 대가리>)가 야쿠자영화인 줄 알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정리된 줄거리는 영화가 시작한 지 고작 10분 만에 상황종료이다. 상식적으로도 이런 이야기는 여기까지 보여주고 나면 더이상 할말이 없다. 나도 야쿠자 영화를 한두편 본 게 아니다(이하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미이케의 열혈 팬들께서는 훗날 감상하실 예정이라면 ‘제발’ 여기까지만!). 오자키는 애완견을 보고 야쿠자 살상전문견(殺傷專門犬)이라고 부르는 지경에 이른다. 걱정이 된 두목은 미나미에게 ‘안 보이게 좀 해달라고’ 메시지를 전하고, 이제 미나미는 형님을 죽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만 교통사고로 예상치도 않게 오자키는 간단하게 죽는다! 만사통과? 그게 그렇지가 않다. 미나미가 오자키의 시체를 두고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상부에 보고를 하는 동안 갑자기 시체가 사라진 것이다. 미나미는 레스토랑에 돌아가서 혹시 형님 시체가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냐고 묻는데, 이 레스토랑은 여장 남자 주인과 기괴한 두 여자가 운영하고 있다. 영화는 공포영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냥 웃자고 만든 영화 같기도 하고, 아니면 부조리극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잔혹극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어쩌면 세 가지 모두 다일 것이다(여기까지 쓴 다음 줄거리를 ‘자랑스럽게’ 정리 하다가 모두 지워버렸다. 볼 때는 정신없이 따라가는데, 써놓고보니 정말 말이 안 된다. 거의 정신나가서 대여섯편의 영화를 되는 대로 이어붙여 아무 데나 뒤죽박죽으로 쓴 것 같은 이야기가 태연자약하게 전개된다!). 우리는 항상 미이케 다카시의 영화를 보면서 걱정하는데, 그건 다작중심주의라고 부를 만한 그 놀라운(정말 미칠 듯한!) 편수 앞에서 완성도의 기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도대체 한 사람이 만든 것이 맞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그의 필모그래피의 난조). 하지만 걱정 마시라. <소 대가리>는 그의 걸작의 한편이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기에(그의 모든 영화를 다 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진행 중인 그의 영화목록 앞에서 그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소 대가리>는 미이케 다카시의 가장 좋은 영화 중 한편이다. 그는 여기서 자기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는다. 그래서 이게 모두 꿈일지도 모른다고(<오디션>) 피해가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소 대가리>는 울트라-쉬르리얼리즘의 끝까지 가본다. ‘형님’ 오자키를 찾으려는 미나미는 거의 편집광적인 지경에 이르는데도, 주변에서는 오히려 그를 능가하는 기괴한 일이 줄을 지어 벌어진다. 그게 정도를 넘어서서 보다 말고 내가 지금까지 영화를 잘못 본 게 아닐까, 라고 불안해질 지경이 된다(처음에는 낄낄대고 영화를 보던 칸의 ‘악동’ 영화광들조차 절반을 넘어서도 점점 더 강도가 높아지는 이 영화 앞에서 마침내 오! 노! 하는 탄식이 터뜨렸다). 그리고 오자키를 찾아주겠다고 레스토랑 주인이 벌이는 혼백(魂魄) 되찾기 무당주술에 이르러서는(사람이 분장을 한 것이 아니라) 진짜 소 대가리가 등장해서 혀로 미나미의 얼굴을 에로틱하게 핥기까지 한다. 점입가경! 절망한 미나미 앞에 웬 여자가 나타난다. 그러더니 자기가 ‘형님’ 오자키라고 태연자약하게 말한다. 믿어냐 하나 말아야 하나? 야쿠자영화가 공포영화와 뒤섞이더니 퀴어시네마로 어느새 슬그머니 옮겨간다(트랜스젠더?). 미이케 다카시는 <소 대가리>를 꼬리 아홉 달린 여우처럼 둔갑에 둔갑을 거듭시킨다. 그리고 이 ‘여자’ 오자키는 미나미와 섹스를 하고, 섹스를 하던 도중 ‘여자’ 오자키의 성기를 열고 그 안에서 ‘형님’ 오자키가 기어나온다(으악! 말 그대로 환골탈태의 경지). <소 대가리>에서 가장 신기한 것은 이 황당무계한 이야기가 도대체 성립이 될 것인지 의아할 지경인데도, 보는 동안에는 정말 주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믿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미이케 다카시는 조금도 웃지 않고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미나미의 자리에서 정신을 차리라고 뺨을 때려가면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빠져들어 헤어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루이스 브뉘엘과 일본 B급영화의 정신착란에 가까운 리믹스 버전. 혹은 괴수영화. 게다가 이 막 가던 영화가 마지막에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올해 칸에서 이보다 더 막 가는 영화는 없었다. 추신: 칸 감독주간 공식 카탈로그에는 이 영화의 불어 제목 옆에 한자 원제가 달려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승두>(升頭)로 되어 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화면으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소 대가리>(牛頭)가 맞다. 카탈로그가 오자이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