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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가장 스펙터클한 속편 VS <에이리언>의 빈곤한 친족

<프로메테우스>는 지금 한국의 리들리 스콧과 <에이리언> 시리즈 팬들, 심지어 비평가들 사이에서도 찬반양론이 격돌하는 영화다. 영화가 먼저 공개된 영미권 매체들 사이에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다. 외신들의 반응을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 정리했다. 찬성 <가디언> “혼란스럽고, 번잡하고, 스펙터클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그 모든 정신나간 요소들을 잘 통제하는 영화이며, 매우 볼만한 경험이다. 물론 여기에는 <에이리언> 1편이 가졌던 결정적인 한방이 부족하다. 또한 <에이리언>이 지녔던 풍자적인 번득임과 인간 존재와 죄의식을 공격하는 합리주의자적인 면모도 부족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에는 강력하게 굴러가는 내러티브의 추진력이 있으며, 순결해 보일 정도의 이상주의가 있고, 지구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존재와 접촉했을 때의 흥분감을 잡아채는 감각이 있다.” <옵서버> “리들리 스콧은 건실하게 긴장감을 쌓아올린다. 그는 오리지널 <에이리언> 시리즈로 귀환해서 생겨난 막대한 기대감을 반드시 충족시키되 똑같이 반복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에이리언>이 던져둔 의문점들에 해답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 에일리언이 존 허트의 가슴을 뚫고 나오는 그 장면에 상응하는 장면이 있어야 하되 똑같은 방식으로 되풀이하면 안된다는 소리다. 그리고 리들리 스콧은 압도적으로 그걸 해낸다. <프로메테우스>는 거대한 종교적, 우주적, 목적론적 이슈를 불러일으키려 노력하지 않았던 존재론적 호러영화인 <에이리언>보다 무거운 영화다. 어떤 사람들은 이걸 허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박스오피스 매거진> “무시무시한 하이프와 기대감을 생각한다면, <프로메테우스>가 그저 평균 이상의 좋은 영화라는 사실은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보통의 스펙터클 블록버스터보다 더 똑똑한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은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앞으로 30년간 SF 장르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정도는 아니라도 말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에이리언>의 ‘우주 공간의 유령의 집’ 테마를 그저 반복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이 영화는 비슷비슷한 장르영화들을 앞서 나간다. 우리는 마이클 베이의 교조적인 로봇 트럭에 관한 바보 같은 판타지가 SF로 간주되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니 <프로메테우스>가 천국으로부터 훔쳐낸 불꽃의 빛과 열기에 대한 지적이고 격조있는 진짜 SF 장르의 시작이 되도록 허하자.” 로저 에버트 “<프로메테우스>는 경이로운 SF영화로,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던져놓고는 답변을 내놓지 않기 때문에 더욱 흥미진진하다. <에이리언> 1편을 되풀이하면서도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SF 황금시대의 고전적인 전통에 위치한 영화. 솔기없이 봉합된 이야기와 특수효과, 완벽한 캐스팅, 관람을 방해하지 않도록 만들어진 분별있고 효과적인 3D 효과까지. 나는 이런 영화 앞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반대 <빌리지 보이스> “<트리 오브 라이프>의 생명의 창조 장면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 서곡을 연상시키며, <프로메테우스>는 지구의 유년기에 대한 독자적인 프롤로그로서 시작한다. 리들리 스콧은 여기서 장벽을 흔들고 있다. 그는 76살이며 아마도 삶과 우주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어떤 경력상의 유산이 될 만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지난 10여년간 서서히 무뎌져왔다. 이 지나치게 야심이 큰 <프로메테우스>의 스콧은 마치 영화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피터 오툴을 흉내내는 로봇 데이빗처럼 보인다. 스콧은 여전히 에픽의 외양을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외양만 존재한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유령의 집 장르를 우주 공간에 옮겨 심고 H. R. 기거의 악몽 같은 프로덕션 디자인으로 우리를 놀라게 하면서 <프로메테우스>는 가슴을 뚫고 에일리언이 튀어나오는 그 유명한 장면의 충격효과를 또다시 우리에게 안겨준다. 이건 <에이리언>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DNA를 결합한 영화이며,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에 해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용두사미고 끔찍할 정도로 이야기가 울퉁불퉁하다. 끝내주게 만들어진 장면들은 결국 클리셰로 귀결되고, 멀쩡하게 생겨먹은 캐릭터들은 도무지 사리분별에 맞지 않는 행동만 계속한다.” <엠파이어 매거진> “축적되어가는 공포가 없다. 뼛속 깊이 스며들던 <에이리언>의 귀신 들린 듯한 고요와 원초적인 불안감도 없다. <프로메테우스>는 너무 바쁘고 수다스럽고 시끄럽다. 대단원으로 모래알처럼 날아가던 영화는 결국 B급영화적인 신체훼손의 난동 속으로 굴러들어간다. <에이리언>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품고 있었다. 서스펜스 부족과 진부한 캐릭터와 빈약한 대본 때문에 압도적인 비주얼과 질척한 광기와 마이클 파스빈더의 연기조차 <프로메테우스>가 <에이리언>의 빈곤한 친족처럼 느껴지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무비라인> “<프로메테우스>는 싸구려 오락거리는 아니다. 리들리 스콧은 그를 추종하는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는 <에이리언>이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SF영화 중 한편을 우리에게 선사한 바 있다. 최근에 <에이리언>을 다시 보고 우아할 정도로 천천히 흘러가면서도 모든 순간에 긴장감을 집어넣는 솜씨에 감탄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이 시끌벅적한 블록버스터 시대에 도전해야만 하는, 훨씬 만들기 힘든 영화다. 당신은 <프로메테우스>가 야망의 무게에 깔려 신음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소리는 리들리 스콧이 원했던 소리와는 아마도 거리가 멀 것이다.”

[클로즈 업]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전기현. 이 사람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듣기 시작한 게 벌써 10년째다. <세계음악기행>이라는 월드 뮤직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처음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12시에서 1시 사이에 <전기현의 음악풍경>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한편 라디오 전문 DJ이지만 그가 중요하게 하는 일이 또 하나 있다. OBS 경인TV에서 방영되는 영화 음악 프로그램 <전기현의 씨네뮤직>이다. 이 프로가 방영 일주년을 맞았다. 영화와 음악이 동등하게 존중받는 독특한 프로그램이다. 토요일 밤 현란하고 산만한 방송들이 많은 시간대에 휴식 같은 영화와 음악과 목소리를 듣고 싶은 당신이라면, 그와 금방 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를 만났다. -월드 뮤직 라디오 프로그램 DJ로 유명하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파리에서 유학할 때 더 폭넓게 듣게 됐다. 처음부터 라디오 DJ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라디오 세대이기 때문에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한 것 같다. 결국 많이 모아둔 음반들이 빛을 보게 된 거다. (웃음) 월드 뮤직 전문가를 찾다가 친구 소개로 내게 연락이 왔고, 하게 됐다. 그런데 라디오는 처음 할 때부터 낯설지가 않았다. -방송 출연을 한 적도 있다. =귀국 직후 음반 사업팀에 있었다. 그렇게 음반들을 내다가 회사에서 “네가 샹송도 하나 불러서 넣어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렇게 했고 어쩌다 사진도 나가게 됐다. 또 어쩌다 광고까지 찍게 된 거다. 의류 광고, 남성 화장품 광고 등이었는데, 카피가 대강 이런 거였다. “프리랜서는 프리랜서를 입는다”, “남자가 여자보다 아름답다”. <컬러>라는 윤석호 PD의 드라마에도 출연한 적 있다. 그런데 배우로서는 소질이 없었다. (웃음) -파리에서는 음악이 아니라 영화를 공부했다던데. =파리 7대학에서 영화방송학을 공부했고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뭐 특별히 연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고 영화가 좋았고 궁금하고 알고 싶었다. 영화는 실컷 본 것 같다. -<전기현의 씨네뮤직>이 1년 됐다. 어떻게 맡게 됐나. =<울림>이라고 가수 김현철씨가 진행하던 OBS 경인TV 콘서트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프로 중 일부로 5분짜리 새 코너를 만들었던 게 지금의 전신이다. 그걸 내가 맡아 했었다. 그런데 반응이 좋았었나 보더라. 지금 <전기현의 씨네뮤직>으로 확장된 거다. -매회 테마별로 진행된다는 게 특이하다. =우리는 오히려 개봉작은 피한다. (웃음) 계절도 생각하고 그달의 이슈도 생각하고 또 중요한 배우나 작곡가들 위주로도 고른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전쟁이라는 테마라고 한다면, <디어 헌터> <지중해> <특전 U-보트> 등 영화 클립과 함께 음악을 들려준다. 그리고 되도록 음악을 끊지 않으려고 한다. -다룬 테마 중에서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이 있나. =영화로 치면 스탠리 큐브릭의 <배리 린든>이 있고, 작곡가별로 본다면 엔니오 모리코네, 프랜시스 레이, 모리스 자르, 존 베리 등이 좋았다. <대부> 시리즈는 내가 우겨서 했고. 왜냐하면 그건 파리에 있을 때 특별한 경험을 해서다. 밤 10시에 시작해서 다음날 아침까지 영화를 보고 나왔더니 문 앞에서 빵을 나눠줬던 기억이 난다. 아, 그리고 조르주 들르뤼, 92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 영화음악 작곡가인데, 음악이 참 좋다. 장 뤽 고다르의 <경멸> 음악을 했었다. -개인적인 취향이 많이 반영되나. =음악에 관해서는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할 거다. 좋은 영화도 골라야 하겠지만 좋은 음악이 우리로서는 더 중요하다. 영화까지 좋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음악에 중점을 두고 그다음에 영화를 고른다. 텔레비전 프로지만 라디오하고 유사한 프로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처음에 내가 기획 제안을 받을 때도 그렇게 받았다. 라디오를 듣는 것과 같은 방송 프로그램을 하고 싶다고 기획자가 말했고 그래서 나도 무조건 하기로 했던 거다. 라디오가 좋은 건 영화가 좋거나 나쁘거나와 무관하게 음악이 좋으면 그 영화의 간단한 시놉시스만 들려주면 그 영화에 대해 궁금해한다는 것이다. 우리 프로그램이 독특한 게 그런 거다. -소개하고 싶은 소재들이 분명 많을 텐데. =작곡가로 치면 조르지오 모로더, 헨리 맨시니를 하고 싶고 배우는 알랭 들롱을 한번 다루고 싶다. 그가 출연한 영화들 중 음악이 좋은 영화들이 많으니까. 그리고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메릴 스트립을 주제로 한 방송이 나갈 거다. 감독으로 치면 제임스 아이보리, 그리고 누구보다 니키타 미할코프의 영화들. 가을쯤에 꼭 한번 해보고 싶다.

할리우드 드림 <디디 할리우드>

우리가 비가스 루나라는 이름으로부터 절로 떠올리는 영화가 하나 있다. 하비에르 바르뎀과 페넬로페 크루즈를 전세계에 소개한 1994년작 <하몽 하몽>이다. 비가스 루나는 이후에도 <골든볼> <달과 꼭지> <밤볼라> 등 가히 스페인적으로 섹시한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어떤 면에서 비가스 루나의 대표작들은 순결무구한 에로스의 동화라고 부를 만하다. 조금 덜 고상하고 조금 더 상업적인 페드로 알모도바르라고나 할까. <디디 할리우드>는 2002년작 <마르니타> 이후 10년 만에 복귀한 비가스 루나의 신작이고, 무대는 스페인이 아니라 할리우드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바텐더 일을 하는 다이아나 디아즈(엘사 파타키)는 스타가 되기 위해 미국 마이애미로 무작정 떠난다. 마이애미에서 입에 풀칠도 못하며 고생하던 다이아나는 조감독으로 일하는 로버트(루이스 하차)와 사랑에 빠져 할리우드로 향하고, 거기서 공격적인 에이전트 마이클(피터 코요테)을 만나 할리우드 스타 스티브(폴 스컬포)와 결혼한 뒤 ‘디디’라는 이름으로 스타가 된다. 그러나 디디는 스티브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디디 할리우드>는 순진할 만큼 직설적으로 할리우드 드림의 과정을 펼쳐내는 드라마다. 여배우의 할리우드 진출기를 다룬 일본 순정만화를 텔레노벨라로 각색하면 딱 이런 영화가 나올 것이다. 더 재미있는 건 노골적으로 실제 할리우드를 반영하며 만들어낸 캐릭터들이다. 디디는 라틴계 여배우로서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페넬로페 크루즈에 다름 아니고, 스티브로부터 톰 크루즈를 떠올리지 않는 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피터 코요테의 냉혈한 에이전트 연기도 재미있지만 <토르: 천둥의 신>의 주인공 크리스 헴스워스의 아내인 엘사 파타키의 매력은 스페인산 하몽처럼 쫄깃하다.

[SO WHAT] 고뇌의 벗들에게

답답하다. 오늘날의 실업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버트런드 러셀이 이미 50여년 전에 제시했다고 생각하는데 별로 주목하는 이들이 없는 것 같다. 아주 간단하다. 회사에 다니는 인간들은 너무 오래 일해서 불행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문제다. 그렇다면 러셀이 말한 대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만약 사회가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하게 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했던 것처럼. 물론 순진한 생각하고 자빠졌네, 하고 딴죽을 걸 사람들이 많다는 거 안다. 그 문제에 대해서도 미리 짚어보자. 첫째,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고도 모두 만족스럽게 살 수 있겠냐는 거다. 예컨대 4시간만 일하면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들 거다. 그러고도 괜찮겠냐는 거다. 괜찮다. 내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어서 안다. 너무 당연해서 입에 담기도 민망하지만, 수입이 줄어들면 지출을 줄이면 된다. 식료품비를 줄이기 위해 텃밭에서 각종 야채를 키워 먹고, 외식을 거의 차단 수준으로 줄이고, 가까운 거리는 무조건 걷다 보니 지난 20여년 동안 애물단지처럼 달고 다니던 뱃살이 쏙 빠지고 얼굴색까지 환해졌다. 또 전기료를 줄이기 위해 촛불을 켜고, 수도료를 아끼기 위해 한 욕조에서 둘이 같이 목욕을 하니 삶이 더 우아하고 섹시해졌다. 게다가 있는 옷으로 어떻게 하면 멋지게 입을까 고민하다 보니 스타일마저 좋아졌다(톰 포드가 그랬다. 같은 옷도 더 멋있게 입을 궁리가 필요없는 부자들이 더 스타일이 없다고). 물론 줄일 수 없는 지출이라는 게 있다는 거 안다. 예를 들면 대출금이라든가 월세 혹은 대학등록금 같은 거. 그래서 정부가 필요한 거다. 강력한 의지로 이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해줄 정부. 서민 편에서 전국의 은행과 집주인, 땅주인, 그리고 부동산업자들을 압박하고 통제해줄 위대한 정부 말이다. 두 번째는 여가와 권태의 문제다. 그러니까 하루에 4시간만 일하면 나머지 시간은 뭘 하며 보내야 할지 몰라서 괴로워하는 권태로운 인간들이 많아질 거라는 지적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러셀은 “교육의 목표는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이제라도 배우면 된다. 주로 텔레비전을 보고 술집에 가고 간혹 야구장이나 공연장을 찾아다니던 수동적 여가 말고 금속이나 나무를 다루고, 도자기를 굽고, 악기를 연주하고, 길거리 축구를 하고, 연극배우로 무대에 오르고, 화초를 가꾸고, 집수리를 하는, 생산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너무 이상적인 생각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럼 세상은 개성적인 사람들이 더 많은 무척 재미난 곳이 될 텐데 하고 어리석을 정도로 순진하게 바라게 된다. 예컨대 아침에는 악보 베끼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점심 먹은 뒤엔 철학적인 저술 활동을 좀 하다가 오후 다섯쯤 되어 가재를 끌고 산책을 나갔던 루소처럼 말이다. 내가 그의 이웃이었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루소가 말한다. “인사하게. 보다시피 가재일세. 식용은 아니고 내 절친이지.”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인간이 불행해지는 두 가지 방식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가?” 고(故)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전에 남겼다는 24개의 종교적 물음 중의 하나다. 차동엽 신부는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죄’는 히브리어로 ‘하타’(hata), 그리스어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과녁을 빗나간 상태’란 뜻이다. 과녁이 뭔가. 기준이다. 어떠한 기준을 벗어난 상태가 죄라는 얘기다. 우주에 깃든 섭리, 그런 섬세한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다.” 과녁을 빗나가다 최 신부의 말대로 그리스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다’(hamartanein)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신약에서 이 말이 ‘죄’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게 흥미롭다. 고전기의 그리스에서는 ‘하마르티아’가 ‘단순한 실수’를 가리키는 데 쓰였다. 사실 과녁을 맞히지 못한 것은 ‘죄’(sin)보다는 ‘실수’(error)에 가깝지 않은가? 그러던 것이 헬레니즘 시대에 들어와 ‘죄’를 가리키는 도덕적 어휘로 전의(轉意)된 모양이다. 미학에서 ‘하마르티아’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관련하여 논의된다. <시학>은 비극의 주인공을 이렇게 정의한다. “덕과 정의에서 월등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 이는 물론 ‘공포’(phobia)와 ‘연민’(eleos)이라는 비극의 효과와 직접 관련이 있다. “연민의 감정은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며, 공포의 감정은 우리와 비슷한 자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환기”되기 때문이다. 위에 인용한 정의 속에서 ‘과실’로 번역된 것의 원어가 바로 ‘하마르티아’다. 연민의 감정은 주인공이 “부당하게 불행에 빠지는 것을 볼 때” 발생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하마르티아’란 도덕적 ‘죄’가 아니라 악의가 없는 ‘실수’,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새에 저지른 과오를 가리킬 거다. 주인공이 도덕적으로 악한 짓을 하다가 불행해졌다면, 주인공의 불행에 연민을 느끼기는커녕, 외려 그의 몰락에 통쾌감을 느끼지 않을까? 비극적 결함 ‘비극적 결함’이냐, ‘비극적 오류’냐? 이 구절의 해석을 둘러싸고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어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하마르티아’가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을 가리킨다고 본다. 가령 오이디푸스는 성질이 너무 급하고, 맥베스는 야심이 너무 크고, 오셀로는 질투가 너무강하고, 삼손은 아내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쓴다. 이 성격의 결함, 이른바 비극적 결함(tragic flaw)이 주인공들을 불행에 빠뜨린 하마르티아라는 것이다. 한편, 다른 이들은 ‘하마르티아’에서 도덕적 의미가 없는 단순한 과오를 본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로 드는 <오이디푸스>의 경우를 보자. 거기서 불행은 주인공의 성격적 결함보다는 단순한 오인, 즉 친부를 잘못 안 데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모르고 행하였다가 행한 뒤에야 알게 되는 경우”야말로 비극에 적합한 상황이다. “이 경우 불쾌감을 자아낼 게 아무것도 없고, 발견이 우리를 놀라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14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예로 드는 상황들은 대부분 오이디푸스의 경우와 비슷하다. 가령 아스티다마스의 작품에서 알크메온은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모른 채 에리필레를 살해한다. 소포클레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부상당한 오디세우스>에 나오는 텔레고노스도 자신의 아버지인 줄도 모르고 한 사내를 살해한다. 비극의 주인공은 이렇게 “자기의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행위인지 알지 못하고 행한 뒤에 나중에 가서야 근친관계를 발견한다”. 시학에 나오는 ‘하마르티아’의 개념은 아마 윤리학과 연관돼 있을 거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위의 책임을 물으려면 그 행위가 ‘자발적’ 선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자발성’의 경우로 ‘강제’와 ‘무지’를 든다. 강제적 힘이나 무지로 인한 악행은 용서받거나 심지어 동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행위의 비자발성이야말로 비극이 가진 ‘연민’의 효과의 전제가 되는 셈. 사실 <오이디푸스>에는 연민을 자아내는 계기가 두개 존재하는 셈이다. 하나는 물론 자신이 상대하는 자가 제 아버지임을 모르고 살해한 것이다. 이는 ‘무지’로 인한 비자발적 행위라 할 수 있다. 또 하나는 그가 하는 모든 행위가 사실상 신들에 의해 ‘강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신탁은 이미 오래전에 그가 제 아버지를 죽일 것이라 예언한 바 있다. 그는 이 예언을 피하려 했으나, 운명을 피하려는 그 행위로 인해 예언을 실현하게 된다. 플롯의 핵심은 역시 ‘발견’(anagnorisi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발견’을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변화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여기서 다시 한번 ‘하마르티아’가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비자발적 행위임이 드러난다. 언뜻 보기에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자발적 선택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신이 정한 운명이라면, 오이디푸스의 행위는 사실상 강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죄’가 아니다. 신약성서에서 말하는 ‘죄’에 가까운 것은 차라리 ‘휘브리스’(hubris)가 아닐까? ‘휘브리스’는 감히 신에 도전하거나 감히 그의 율법을 파괴하는 교만의 과오를 가리킨다. 그리스 비극의 바탕에 깔려 있는 또 하나의 모티브가 바로 ‘휘브리스’다. 가령 <안티고네>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테베의 왕 크레온은 서로 싸우다 전사한 두 형제 중의 한 사람은 정중히 매장하되, 다른 사람의 사체는 들짐승에 뜯어먹히도록 들판에 내버려두라고 명령한다. 죄와 벌 원래 ‘휘브리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포로, 혹은 그 밖의 희생자를 그저 재미로 모욕하며 괴롭히는 행위를 가리켰다. 가령 전사한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다니던 아킬레스의 행동을 생각해보라. 크레온이 사체를 매장하지 않고 들판에 방치한 것 역시 ‘휘브리스’의 이 야만적 어원에 잘 어울린다. 물론 이 불필요한 잔혹함이 신들의 마음에 들 리 없다. 그런 의미에서 크레온의 행위는 신의 계율을 파괴하는 ‘휘브리스’라 할 수 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폴리네이케스의 사체를 매장하고 동굴에 밀봉된 안티고네를 풀어주지 않으면 아들을 잃을 것이며, 신들도 테베의 공물을 받지 않을 것’이라 경고한다. 하지만 그 충고가 교만한 크레온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이 또한 휘브리스다. 겁에 질린 합창단이 그 예언자의 말이 이제까지 틀린 적이 없음을 상기시켜주자 크레온은 비로소 고집을 꺾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동굴을 다시 열었을 때 안티고네는 이미 목을 맨 뒤였다. 안티고네의 죽음을 본 아들 하이몬은 자결을 하고, 이 소식을 들은 왕비 에우리디케마저 그 뒤를 따름으로써 왕은 아들과 아내를 모두 잃게 된다. 물론 그는 제 행위가 이런 결과를 낳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 행위는 ‘하마르티아’, 즉 무지로 인한 비자발적 과오가 아니었다. 죽은 사람은 묻지 않고, 산 사람을 묻는 것은 어디까지나 ‘휘브리스’, 즉 피할 수도 있었기에 또한 책임도 져야 할 죄다. 죄에는 당연히 ‘벌’(nemesis)이 따른다.

R등급 장르 축제 <캐빈 인 더 우즈>

장르의 가장 뻔한 클리셰를 제목으로 쓰는 사람들의 의도는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이런 뻔한 것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로 애거사 크리스티의 <서재의 시체> 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이렇게 뻔해 보이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어!’로 <캐빈 인 더 우즈>가 여기에 속한다. 제목만 봐도 <캐빈 인 더 우즈>는 슬래셔영화의 가장 고루한 공식으로 시작한다. 다섯명의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숲속 오두막으로 간다. 가는 길에 그들은 음습한 경고를 하는 주유소 노인을 만나지만 그를 무시한다. 도착한 날부터 학살이 시작되는데, 최초의 희생자가 되는 사람은 당연히…. 하지만 영화는 초반부터 이들의 뻔한 이야기 뒤에 무언가 다른 것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예고편에도 나오지만, 이 평범해 보이는 오두막과 평범해 보이는 좀비 살인귀들 뒤에는 최첨단 과학으로 무장한 정부의 특수기관이 존재한다. 이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특수기관과 오두막집 젊은이들의 관계가 호러 작가, 감독, 관객과 호러영화와의 관계와 정확히 연결된다는 것이다. 특수기관이 하는 일은 실제 인물과 괴물을 동원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영화를 만드는 것으로, 영화는 각본에서부터 상영에 이르기까지 호러영화 제작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꼼꼼하게 다룬다. 각본을 쓴 드루 고다드와 조스 웨던은 모두 컬트 텔레비전 <버피와 뱀파이어>의 작가진 출신으로, 영화는 그들이 시리즈를 거치면서 쌓은 장르 해체와 재조립의 경험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단지 영화는 <버피와 뱀파이어>가 TV와 시리즈라는 한계에 갇혀 멈출 수밖에 없었던 선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캐빈 인 더 우즈>의 후반부는 피와 신체손상과 존재하는 거의 모든 장르 도구들이 폭발하는 R등급 장르 축제다.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격, 격, 격하게 아낀다…만

격, 격, 격하게 너희들을 아끼고 있어. 맞아, 블랙홀처럼 빨려들어가, 끝이 안 보여, 라는 새 노래 의 노래 가사에 맞춰 f(x)에 전하고 싶다. 함수 소녀들아, 너희들이 데뷔할 때부터 쭈욱, 격하지만 격조있게 아껴왔단다. f(x)에 마음을 뺏긴 이유는 그들만의 확고한 스타일을 처음부터 강렬하게 눈치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에서 f(x)를 처음 보았을 때가 생각난다.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물음표가 어지럽게 떠 있었다. 저 뜬금없는 가사들은 다 뭐란 말인가. 저렇게 아스트랄한 가사를 저토록 진지하게 발음하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소녀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외계에서 캐스팅한 소녀들일까. 나는 모든 물음표를 거두기로 했다. 물음은 의미없었다. f(x)가 내뱉는 말은 외계어였고, 독해가 불가능한, 운율로서의 말이었다. 어떤 불일치가 소녀들을 아름답게 만들었고, 잦은 과잉이 현기증을 일으키게 했다. f(x) 스타일은 에서 완성된 게 아닌가 싶다. ‘새로운 혈액형’이라는 뜻의 (아냐, 의미가 뭐 중요해! 그냥 예뻐요로 들리는걸!) 제목도 낯설지만 ‘나 어떡해요 언니?’로 시작하는 가사, 꿍디꿍디라는 단어, ‘딱 세번 싸워보기, 헤어질 때 인사 않기’ 같은 사랑법을 듣고 있노라면, 그래, 내가 졌다, 네 맘대로 아무렇게나 하고 싶은 말을 해,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가끔은 이런 가사를 f(x)에게 선사한 유영진씨가 미울 때도 있지만 f(x)만의 스타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상할 바에야 어쭙잖게 유치한 것보다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뜬금없는 게 더 낫다. 인정! 신곡 에서도 가사는 별 의미가 없다. 의미를 해석해보려고 하다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하하, f(x) 팬들이라면 이런 건 아무렇지도 않죠. 한두번 겪는 일도 아니잖아요. ‘격변하는 세계, 그 속에 날 지켜줘’라든가 ‘대체 끝이 없는 게이지’ 같은 문장들을 발음하는, 소녀들은 여전히 예쁘다. 새 앨범을 듣고 좀 갑갑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피로감이 쌓인 걸까. 스타일이라는 건, 말하자면 벽지 같은 거다. 무늬를 정하고 색을 정하고 패턴을 결정하는 거다. 예술가들은 모두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이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다. 벽지를 정하고 나면 그다음에야 비로소 거기에 어떤 가구가 어울릴지, 어떤 그림을 걸어두면 좋을지 고심하며 공간에 깊이를 더하게 된다. 평생 벽지를 고르지 못하는 예술가도 있고, 벽지만 골라놓고 가구를 집 안에 들이지 못하는 예술가도 있다. f(x)의 벽지는 매번 너무 화려해서, 벽지에 색을 너무 많이 입혀서, 도무지 어울리는 가구나 그림을 찾을 수가 없다. 제작자들이 조금은 밋밋한 벽지를 만들어서 이 예쁜 소녀들이 더 아름답게, 더 잘 보일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다.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아직은 없는 노래, 하지만 좋을 노래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서 들었던 최신가요 중 한곡을 고른 다음 내 얘기로 살을 (많이) 붙이고 이런저런 (잘못된) 개그로 양념을 가미하는 것이 ‘최신가요인가요’의 핵심인데, 지난 일주일 동안은 가요를 거의 듣지 못했다. 새 장편소설 쓰기에 돌입했고, 소설 속에 오페라 아리아가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일주일 내내 아리아만 듣고 살았다. 아리아만 듣고 살았더니 대화를 나눌 때도 노래로 말을 하고 싶어진다. ‘오, 편집자님이여, 마감의 경계는 어디까지오! 마감을 지키려 애쓰는 내 마음을 정녕 아시는지. 마감은 멀었건만 까닭도 없이 한숨짓고 가슴 조이는, 이 마음.’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의 연재가 끝나면 ‘김중혁의 최신아리아리오!’로 연재를 이어가자고 제의해봐야겠다. 한주가 끝나갈 때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끝내주는 노래를 발견했다. 내가 오랫동안 꿈꾸던 프로그램을 Mnet에서 막 시작했는데, 라는 랩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오래전 에미넴 주연의 <8마일>을 보면서 영화 속 ‘랩 배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있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직 1회밖에 방송하지 않아서 정확히 어떤 프로그램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 방송이 되든 는 매주 끝내주는 힙합 공연을 보여줄 것 같다. 와우! 프로그램을 보면서 놀랐던 것은 오디션에 참가한 젊은 친구들이었다. 노래 위주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사람들이 몰리는 거야 당연하다고 해도 랩 오디션에 이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참가한 게 신기했다. 우리나라에 힙합을 좋아하는 친구들이 이렇게 많구나, 새삼 깨달았다. 그들이 방에 엎드려 종이에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 다음 라임을 맞추고 플로에 맞게 랩을 하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으면, 어쩐지 가슴이 찡하다. 랩은 절대 노트북에다 쓸 수 없다. 종이에다 쓰고 고치고 지우고 다시 써야 한다. 펜을 들고 종이에다 자신만의 랩을 적어내려가던 그 시간들에 나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화 <8마일>에서 에미넴이 버스를 타고 가면서 꼬깃꼬깃한 종이에다 가사를 적던 장면은 언제 봐도 뭉클했다. 내 마음에 든 두명의 래퍼는 ‘의경 래퍼’ 김정훈과 ‘래퍼 일통’이었는데, 두 사람이 한팀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한 자신만의 리듬으로 랩을 하고 있었는데, 듣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비트로 설득해내는 힘이 있었다. 김정훈과 래퍼 일통이 결합한 내 상상 속 팀 이름은 ‘슬로우 웨일’. 두 사람의 가사를 조합해서 만든 곡은 <육지로 가는 고래>다. ‘내가 내는 판소리 플로우/ 래퍼는 퀵퀵보다는 슬로우/ 힙합영웅의 본색은 타락한 지 오래/ 난 숨쉴 곳을 찾아 육지로 가는 고래.’ 아리아로 시작해서 랩으로 끝난 일주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둘 다 노래로 말을 한다는 건 비슷하다. 다음주부터는 정말 노래로 말을 하려고 들지도 모르겠다. ‘yo, 최신가요인, 가요, 이 칼럼은 왜 핵심이 없을까요, 글 쓰고 있다 매번 약속에 늦어, hey, 그래도 마감엔 절대 안 늦어.’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바이어들은 열정을 산다

<브레이킹 배드>는 장수 TV시리즈가 되기 위한 황금률들을 거스르고도 성공한 희귀한 경우다. 제1황금률: 시청자로 하여금 주인공을 사랑하게 하라. 매주 같은 시간대에 시청자를 TV 앞으로 불러오려면 그건 당연하다. 한데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턴)는 좋아하기 힘든 인물이다. 소심하지만 착한 남자였던 주인공이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고 합리화하는 악당으로 변모하는 걸 보고 있으면, 좋아하기보다 싫어하기가 쉽다. <브레이킹 배드>가 어긴 두 번째 황금률은 레퍼토리 구조를 포기하고 마지막 방영일자를 예고했다는 점이다. <로 앤 오더> 등의 TV시리즈가 20년 동안 시즌을 거듭하며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레퍼토리 드라마가 가지는 반복 구조를 고수하고 캐릭터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다르다. 주인공은 극적으로 변화했고, 해피엔딩은 애초에 배제되었으며, 시즌이 지날수록 드라마 속 소우주는 주인공에게 안겨줄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가속도를 붙여 달려간다. 크리에이터인 빈스 길리건이 직접 지은 제목 ‘Breaking Bad’는 ‘탈선’ 혹은 ‘타락’을 의미한다. 그의 고향인 버지니아를 비롯해 남부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인데, 드라마가 성공한 지금은 미국 전역에서 그 의미가 통할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여러 인터뷰에서 길리건이 말한 <브레이킹 배드>의 시작은 이랬다. 아픈 아이가 사는 낡은 아파트에서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하다가 적발된 남자에 대한 뉴스를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하다, 이동성 있는 RV에서 제조하면 어떨까 농담을 했다. 하지만 이 농담 속 한 장면은 평소 “천국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옥이 없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라는 인과론자였던 길리건으로 하여금 속죄로 끝을 맺어야만 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얻은 힌트에 평소의 철학이 더해졌고, 주인공이 암 진단을 받고, 뉴멕시코를 배경으로 설정하는 등의 세부사항은 그 뒤 여러 사람의 아이디어와 영감으로 채워졌다. 시작은 순조로웠지만 문제는 그다음에 찾아왔다. 의 작가로 7년 동안 일한 경력 덕분에 네트워크를 상대로 피칭할 기회는 종종 찾아왔으나, 실제로 방영하겠다고 나서는 채널은 없었다. 무단횡단도 안 하고 쓰레기도 버리지 않을 모범적인 화학교사가 마약제조를 하는 범죄자로 타락하는 이야기가 공중파 방영에 부적절하다는 걸 알기에, 그가 두드릴 수 있는 문은 등으로 한정됐다. 반응은 좋았지만, 거절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회는 거듭된 고배에 지칠 무렵 로부터 찾아왔다. 지금이야 <매드맨> <킬링> 등을 방영하는 케이블 채널로 성장했지만 당시 는 주로 고전영화를 재방영했고 오리지널 드라마를 만든 적이 없었다. 길리건은 자신의 동의 없이 각본을 보낸 에이전시에게 “왜? <푸드네트워크>에 보내지 않고? 메스암페타민을 굽는 이야기잖아?”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와의 첫 만남은 성공적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브레이킹 배드>는 날개를 달았고, 2012년 7월 시즌5의 방영을 기다리고 있다. 빈스 길리건은 이전에도 히트작은 없었지만 영화계에서는 비교적 고속 성장한 어린 작가였다. 하지만 그는 영화작가의 꿈을 접고 작가실로 들어간 1995년에야 비로소 자신의 경력이 제대로 시작된 걸 느꼈다고 한다. 아메리칸 텔레비전 아카이브는 인터뷰 가장 마지막에, 후학들에게 줄 수 있는 조언을 물었다. 그는 대답한다. “이야기를 팔려고 한다면 실패할 것이다. (네트워크) 바이어들이 사려는 것은 열정이다. 열정은 꾸며낼 수 없다.”

[신 전영객잔] <두 개의 문>은 어떻게 빨간 잉크가 됐나

아우슈비츠 학살에 관한 클로드 란츠만의 기념비적 다큐멘터리 <쇼아>가 개봉했을 때 이 영화에 가차없는 비난을 던진 건 장 뤽 고다르였다. “이 영화는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다르는 그렇게 비난했다. 고다르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학살이 이뤄졌던 가스실의 바로 그 순간의 현장이 독일군의 영화 카메라에 찍혔으며 그것이 세상 어딘가의 기록보관소에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기록물이라고 자처하는 <쇼아>가 그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찾으려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다르는 힐난했다. 고다르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쇼아> 옹호론자 마르그리트 뒤라스와의 논쟁도 불사했다. 훗날 한 평자는 그것이 경험적인 검토와 무관하게 그의 유죄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의 매체인 영화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해내지 못했으므로, 혹은 기록했다 하더라도 사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에 대한 유죄의 강박관념이 작동하여 공격의 대상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영화가 윤리적 파산을 맞은 것이라 믿었던 고다르는 “영화의 촛불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꺼졌다”고 탄식했다. 고다르 특유의 우격다짐이라 할지라도 영화의 존재론에 신중했던 태도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건 경청할 만한 우격다짐이다. 없음이 증언하는 있음 반면에 클로드 란츠만의 의견은 고다르와 달랐거니와 완벽하게 반대였다. “나는 모든 아카이브에 대항하여 <쇼아>를 만들었다”고 그는 말했다. <쇼아>는 학살의 현장에 관계된 기존의 문헌 중 단 한장의 사진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생존자들과 가해자들과 주변인들을 릴레이 인터뷰하고 있으며 때로는 수용소의 인근 장소를 배회하고 그것으로 모자라다고 판단될 때는 재연도 했지만 기록화면은 쓰지 않았다. 란츠만은 설령 고다르가 말한 그러한 영상 자료들을 “내가 발견하게 된다고 해도 없애버릴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보아야 하는 이미지와 보아서는 안되는 이미지를 사이에 둔 윤리적 쟁점의 대립이 있으나 이건 고다르와 란츠만 논쟁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글을 요구할 정도로 복잡한 사안이다. 다만 지금은 란츠만의 다음과 같은 주장에 닿기 위해 배경을 설명하는 마음으로 썼다. 란츠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흔적이 소멸되었다는 사실을 주의 환기시키는 것이 애당초 <쇼아>의 출발점이었다. 바로 그 공허로부터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쇼아란 원래 절멸을 뜻하는 말이다. 그러니 그의 말을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다. 모든 증거가 사라져버린 그 사건의 실체를 제대로 증명할 만한 방법은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형식을 구축하는 것이며 그것만이 오로지 실존했던 역사를 말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고다르는 그 무엇이 있어야 증거가 된다고 탄식하고 란츠만은 그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강력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란츠만이 말한 ‘공허’와 정확히 같은 의미가 되지는 않겠지만 무언가 필시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생명정치에 관한 경청할 만한 정치철학적 개념들을 내놓은 조르지오 아감벤의 생각을 경유할 수 있다. 아감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의 직접적인 증언에조차 공백이 깃들어 있음을 지적한다. 그의 현학적이며 복잡다단한 분석을 요약하는 건 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그 생각을 능동적으로 해석한 슬라보예 지젝의 단언이 더 적절할 수는 있겠다. “아우슈비츠에 대해 직접 증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 존재를 증명해주고 있다.” 증거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정도로 절멸해버렸다는 그 사실이 현실적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비정상적 학살이 실재하였음을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이 곧 역설적으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걸 믿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란츠만과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는 추론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용산엔 없는 빨간 잉크 용산이 ‘광주’ 이후 우리 시대의 쇼아 즉 절멸처럼 보인다. 이 사건은 생명정치의 실현과 유지에 관한 상식이 송두리째 흔들린 예외적 사건이자 거대 체제에 의해 게토화되어 망루에 갇힌 ‘벌거벗은 생명들’에 관한 사건이며 그러나 그 당사자들 대부분은 살아나오지 못하고 증거는 대부분 미궁으로 빠져버린 사건이다. <두 개의 문>에 관한 지난 글들에서 김소영이 국가가 행사한 “비상사태”(예외상태)를 말하고 변성찬이 체제가 만든 “공백”에 관하여 말할 때, 나는 그들이 아우슈비츠를 설명할 때 대두된 정치철학적 개념인 예외상태와 공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미루어 짐작한다. 예외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상시적으로 벌어지는 비상사태가 여기 있고 그 결과로서 사회적 공백, 사법적 공백, 역사적 공백, 현실의 공백이 여기 남겨진 것을 그들은 지적한다. 앞선 평자들의 귀한 의견에 빚지고 도움을 얻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이 정치철학 개념의 복잡한 함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나는 그러한 배경들이 <두 개의 문>이라는 영화와 영화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소멸한 증거들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증거가 될 수 있는가. 혹은 공백은 어떻게 그 영화의 숨은 역학이 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질문이다. 다만 어떤 비상한 개념이라도 그 개념의 엄중함이 현실의 감각적 충격보다 내게 더 가깝지는 않다. 그러니 세속적 윤리와 상식에 기대어 풀어 말하고 싶다. 예외 상태란 설마 그럴 리는 없다고 믿었으나 결국 일어나는 일들이 상시적으로 발생하는 상태라고 불러도 될 것이고 공백은 그런 상태로 인하여 부재나 무지나 무력감 등을 동반하는 가운데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진 상태 즉 ‘없는 상태’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두 개의 문>에는 바로 그런 상태가 기입되어 있다. 그럼 어떻게 기입되어 있는 것일까. 우리는 지젝이 여기저기 인용하기를 즐기는 오래된 독일식 농담 하나를 우리 식대로 지금 반복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로 일하러 가게 된 독일 노동자가 검열관의 우편물 검열을 피해 어떻게든 친구에게 그곳의 실상을 전하려고 고민한다. 그런 끝에 친구와 약속을 한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자신의 편지가 빨간 잉크로 씌여 있으면 그건 거짓말이고 파란 잉크로 씌여 있으면 진실이라고 친구와 약속한다. 마침내 그 친구에게 편지가 날아든다. 그 편지는 파란 잉크로 쓰여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훌륭해. 가게에는 상품들이 가득하고, 음식이 풍부하며, 아파트는 크고 난방도 적절해. 영화관에서는 서양영화를 보여주고 관심을 끌 만한 아가씨도 많아. (그런데) 자네들이 얻을 수 없는 것 단 하나가 있다면 그건 빨간 잉크야.” 그 독일 노동자는 빨간 잉크를 구하지 못했거나 구할 수 있었더라도 빨간 잉크로 편지를 쓰는 대신 그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지금 이 편지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진실을 말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이리라. 영화에 관한 지젝의 의견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나 시대를 평론하는 그의 수사학은 효과적이라고 느끼는 나는 이 빨간 잉크의 일화가 용산을 다룬 <두 개의 문>의 영화적 상태를 과장되게나마 효율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란츠만이 말하는 공허, 아감벤이 말하는 공백, 용산에 관하여 우리가 느끼는 없는 상태 혹은 없는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고 직감되기 때문이다. 용산에 관한 영화들은 대개 빨간 잉크로 직접 쓰인다. 즉 용산 사태의 법적 모양새가 거짓임을 밝히기 위해 가장 직접적인 진실의 도구를 골라 쓴다. 이를테면 철거민 생존자의 증언을 담아내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개의 문>은 우리에게 지금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친구, 지금 여기 용산에 없는 것은 빨간 잉크야, 라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용산의 법적 모양새가 실은 거짓이라는, 그 진실을 말하기 위해 여기 무엇이 없는지를 말한다. 알려진 그대로 <두 개의 문>에는 철거민 생존자의 증언이 등장하지 않고 혹은 등장하지 못한다. 대신 무엇이 없는지 말해지고 또한 구조화된다. 이 비유가 다소 과장으로 비친다 해도 나는 이 과장됨이 지금 필요하다고 느낀다. 바깥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없는 것들 혹은 없는 상태의 층위는‘용산’이라는 사건 그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건 당일에 부검을 명목으로 사라져버린 시신, 경찰쪽을 가해자로 두고 수사를 벌였으나 수사의 방향이 바뀌면서 사라져버린 3천쪽의 초동 수사 기록 등 김형태 변호사가 지적하고 있는 것들이다. 영화는 초반부터 이 사건에 관련하여 있어야 할 무엇이 여기 어떻게 없는지 설명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구조는 알려진 것처럼 스릴러 구조가 아니라 없는 것들과 없는 상태를 의문시하는 구조라고 좀 엉뚱하게 풀어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인다. 이렇게 상상해보자. 시신이 사라지지 않아 사체 파악이 가능하고 3천쪽의 초동 수사 기록이 진작부터 밝혀졌다면 이것들의 행적을 두고 일종의 의문 구조로 이끌어가는 <두 개의 문>의 초반부는 성립 가능한 것인가. 꼭 필요한데 정작 없는 이미지도 있다. 2차 화재 발생과 연루된 경찰의 중요 채증영상이다. 경찰쪽의 말을 믿자면 이건 원래 찍히지 않았던 것이고 농성자 변호인단의 말에 기대자면 이건 찍었으나 없어졌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현실적으로 엄연한 공란이며 제약이다.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두 부류다. 그 안에서 잡혀갔거나 죽은 사람들, 이 사람들만 진실을 보았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끈은 영상이다. 감사한 일이기는 하지만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가 가질 게 너무 없다는 무력함의 증거이기도 했다”고 박진 활동가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감사하지만 무력한 영상은 칼라TV, 사자후TV, 경찰의 채증영상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의 입장에서 그것들은 다양한 화법의 가장 기초적인 요건들이 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이들이 영화적으로 보자면, 전부 이 이미지에 대한 해설자들이라는 사실도 이때 중요하다. 물론 다양해지는 화법의 과정 속에서 실패한 것도 있어 보인다. <두 개의 문>의 영화 형식 자체에 관한 한 가장 꼼꼼하게 들여다본 건 <프레시안>에 글을 쓴 이동연(문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인 것 같다. 그의 생각에 대체로 공감하지만,‘인터-픽션’이라는 개념으로 이 영화의 재연을 칭찬하는 부분에는 좀 다른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우선 재연은 일반적으로 보통의 시사 프로그램에서뿐 아니라 연예뉴스 프로그램에서도 흔히 쓰이므로 그 자체로 특별하지 않다(손문권 프로듀서 유가족과 임성한 작가쪽의 법정 공방을 보도하던 중, 한 연예뉴스 프로그램은 임성한 작가쪽의 변호사의 부탁으로 그를 모자이크 처리하고 목소리를 연기로 재연했다). 재연은 어떤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인가. 재연이야말로 무언가 없는 상태를 적극적으로 메우는 화법이 아닌가,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메우고 덧붙인다는 그 효과가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 같다. 재연으로 공백을 보충하는 순간 본래 그 개인의 개별성은 지워지고 식별 불가능한 상태로 이끌릴 뿐만 아니라 보는 우리로 하여금 보편적이며 불특정한 상태로 그 대상을 느끼게 한다. 소재에 따라 재연은 대상을 무디게 한다. 재연된 주체의 개별적 육화는 사라지고 그래서 우린 종종 긴장감을 잃는다. 서술상 필요했겠지만, 그럼에도 <두 개의 문>에서 경찰 특공대의 재연 장면은 가장 안이한 부분으로 남는다. <두 개의 문>의 다양한 화법은 대개 공백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공백을 드러내는 구조로서 활력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때 지적할 수밖에 없다. 재연보다 더 나은 다른 방식을 추천하기란 어렵지만 이것보다 더 나은 방식이 지금 영화 속에 이미 많다는 사실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특공대원들의 서면 진술서를 클로즈업한 것과 육성을 녹취한 것의 효과는 재연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생생하며 또 독창적이다. 특공대원들이 쓴 진술서는 활자를 크게 잡은 것에 불과하지만 그 행간에는 심리적 침묵이 있다. 그렇다면 육성은 더할 것이다.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 같은가, 라는 검사의 질문에 “농성자에게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하기까지 그 특공대원이 지켰던 몇초간의 침묵을 변성찬은 이미 지적했다. 인물의 증언 속에 자리한 침묵이다. 게다가 법정에서의 진술을 녹취한 그 장면에는 그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으므로 여기엔 목소리가 있지만 표정이 없다. 란츠만은 육성 증언을 기반으로 한 자신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얼굴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두 개의 문>은 그 특공대원의 얼굴을 보여줄 수 없고 그 때문에 영화에는 새로운 긴장이 흐른다. 게다가 재판과정의 육성이 들려올 때 거기 사람의 표정 대신 망루의 농성자들이나 특공대원들의 당시 모습을 흐릿하고 음침한 흑백장면들로 처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불투명한 이 사태에 대한 탁월한 선택이다. 한편 법정의 육성 진술 중에서도 피고인(농성자)으로 참여한 이들의 진술을 영화가 넣지 않았음을 우린 인식해야 할 것이다. 2009년 11월21일 용산참사재판 피고인 최후 진술에서 이충연씨는 “제가 바라는 세상은 더불어 사는 세상입니다. 역사에 남을 정의로운 판단을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영화는 그 내용을 넣지 않고 있다. 전략적 편집의 선택이 수행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게 하여 <두 개의 문>은 처음 시작했던 장면으로 다시 돌아온다. 영화의 도입부에 잠시 등장했던 2차 화재 장면은 결말부에 다시 등장하여 “화재 발생 2분 전”이라는 자막과 함께 말 그대로 2분간의 지속시간을 버틴다. 여기에는 눈을 찌르고 들어오는 끔찍한 장면들이 있다. 화면상으로 망루 왼쪽에 놓인 창문으로 사람이 들락거리는 장면과 화면상 정면으로 무언가 불길에 닿으면 안되는 것들이 밖으로 던져지는 장면을 볼 때, 이 영화의 정점에 놓인 이 장면은 처음 볼 때와 좀 다른 강도로 느껴진다. 이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은 최후의 호소로서 강력해진다. 우리가 이 장면을 보는 경험은, 지금 무엇인가를 놓치지 않고 보고 있지만 지금 저 안의 무엇은 보지 끝내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는 것인 동시에, 그 때문에 지금 이 사태를 일으킨 거대한 바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직감하게 되는 경험이다. 보고 있으나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이미지, 시각적 증거이나 인식론적 공백인 이 이미지가 영화의 정점이 되면서 결국 ‘용산’이라는 사태의 그 바깥에 놓인 체제를 우린 생각하게 된다. 무언가‘없는 상태의 구조화’ 혹은 ‘공백의 구조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두 개의 문>의 성취는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은 것, 농성자와 특공대 혹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원적인 대립 구조를 벗어난 역설이라는 관점에 놓인 것이 아니다. 그걸 가능하게 한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얼마나 예외상태의 상황이었는지를 밝히는 것, 즉 예외 적으로 가해자들조차 공포에 싸여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며 그 점을 위해 증거의 공백을 받아들인 다음 그 공백을 역으로 형식으로 구조화하고 화법화한다는 사실에 있다. 영화의 첫머리에 등장하는“경찰 진술과 증거 동영상을 바탕으로 용산참사와 재판 과정을 재구성한 것”이라는 머리말은 그렇게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두 개의 문>은 애당초 두 감독이 말했던 것처럼 국민참여재판의 상연이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실은 공공연한 증거물, 법질서보다 중요한 윤리적 질서의 회복을 요구하는 윤리적 증거물로서 기능하고 있다. 그러니 ‘증거가 없음을 증거하기 위한 증거가 되기’라는 동어반복의 구조가 이 영화의 운명이며 다음과 같은 문장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 이 영화의 운명이다.“법의 유일한 목표는 판결이며 그것은 진실과 정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조르지오 아감벤)” 윤리로만 접근 가능한 영화 앞에서의 두려움 <두 개의 문>을 보고 나면 국가의 폭력이 문제라고 입을 모아 말하게 된다. 한치도 틀리지 않은 말이다. 다만 이 영화의 영화적 전략을 통과하고 나면 국가폭력이 문제다, 라고 단지 되풀이하는 것은 조금 힘 빠지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문장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끔찍한 일들과 관련해 제기되어야 할 정확한 질문은, 어떻게 이토록 잔인한 범죄들이 인류를 대상으로 자행될 수 있었는가라는 위선적인 질문이 아니다. 인간존재로서의 권리와 특권들을 어쩌면 그토록 완벽하게 박탈했는지, 그들에게 자행된 어떤 짓도 더이상 위법이 아닌 것처럼 (그러니까 사실상 모든 것이 정말로 가능해지게) 보이도록 만든 법적 절차와 권력 장치들을 주의 깊게 탐구하는 것이 보다 정직하며 또 무엇보다도 보다 유용할 것이다”라는 말이 <두 개의 문>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현명한 정치철학자 아감벤은 그렇게 말했지만 영화에 관한 글을 쓰는 나는 그저 그 말을 받아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두 개의 문>이라는 영화는 인간존재로서의 권리와 특권들을 완벽하게 박탈하고 자행된 어떤 짓도 더이상 위법이 아닌 것처럼 보이도록 만든 법적 절차와 권력장치들을 어떻게 주의 깊게 영화적으로 탐구했는가, 하고. 이 영화가 한국 다큐멘터리사에 획을 긋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망설여진다. 다만 여기 용산에 빨간 잉크가 없다고 말하려고 애쓴 이 영화는 능숙하게 그걸 말한 다음 그 법적 절차와 권력장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남기고 있다. 하나의 일화로 그걸 정리하는 게 좋겠다. 그러니까 지젝이 소개한 일화로 시작했으니 다시 지젝이 소개한 일화로 그 생각을 정리해도 되겠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의 첫장에 있는 우화다. “물건을 훔쳐낸다는 의심을 받던 일꾼이 한명 있었다. 매일 저녁, 일꾼이 공장을 나설 때면 그가 밀고 가는 손수레는 샅샅이 검사를 받았다. 경비원들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손수레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졌다. 일꾼이 훔친 것은 다름 아닌 손수레 그 자체였던 것이다”<두 개의 문>은 손수레가 비어 있다는 걸 충분히 알렸다. 그리고 손수레가 비었으니 거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빈 손수레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었음을 충분히 알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작품이 됐다. 객관적 폭력 그 중에서도 구조적 폭력이라고 불릴 만한 그 빈 손수레가 <두 개의 문>이 겨냥하고 있는 국가 폭력의 실체다. 버튼 하나로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폭력, 전화 한 통화로 수명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폭력. 두 개의 문이 조준하고 있는 폭력의 진상은 실은 눈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국가의 주관적 폭력이 아니라 그 안존하고 평안한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상위적 국가의 구조적 폭력이다. 이 영화는 그 실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을 빨간 잉크의 화법으로 말하는 것이다. 빨간 잉크로 빈 수레와 그 도둑을 말하는 것이다. 적어도 현장의 특공대장은 물로는 소화할 수 없다고 다급하게 말하지만 지휘본부의 무전기 넘어 목소리는 사법처리 할 수 있도록 증거를 채집하라고 평온하게 말한다. 그 상위의 체계는 더 평온하게 말할 것이다. 국가폭력이 어떻게 예외상태를 자기의 것으로 권능화하고 동시에 공백을 법적으로 유용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바로 <두개의 문>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건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말은 너무 유명하다. 그리고 아우슈비츠 이후에 영화의 촛불이 꺼졌다고 탄식한 고다르의 생각은 이미 전했다. ‘용산’ 이후에도 무언가는 야만이며 무언가는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나는 이들의 과장된 절절함을 흉내내어 용산 이후에 무엇이 야만이고 무엇이 불가능한지 당장에 선언하고 싶지 않다. 용산 이후에 어떤 예술적 행위가 야만이 될 것인지 혹은 무엇이 불가능한 것인지 나는 선언할 위치에 있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다만 미학이라는 범주로 말하는 게 불가능한 창작물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을 뿐이다. 적어도 이 영화를 생각하며 오로지 윤리를 통할 수는 있으나 미의 기쁨을 말하는 건 불가능한 어떤 창작물을 대할 때의 괴로움을 실감했다. 어떤 형식을 통해 윤리를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형식을 통해 아름다움을 말할 수는 없는 운명의 영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던가. 그럼에도 사람이 여기 있어요라고 말했는데도 거기서 사람이 타죽은 사건을 지금 이 영화는 다루고 있지 않은가. 미학을 말하는 것이 봉쇄되고 윤리학으로만 접근 가능한 영화의 출몰은 실은 두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지금이 예외 중의 예외 상태이며 공백 중의 공백 시대라는 걸 그런 고통으로 어렴풋하게 감지하기 때문이다. 실은, 아름다운 것들과 더 오래 많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