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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칸 리포트,두 보고서 [5]

유령, 섹스 그리고 로드무비 <브라운 버니>(The Brown Bunny) | 감독 빈센트 갈로 | 경쟁부문 빈센트 갈로는 여기서 내기를 건다. <브라운 버니>는 지나치게 야심적이거나, 아니면 과대망상증에 걸린 작가영화이다. 어쩌면 첫 번째 영화 <버펄로 66>이 지나치게 성공했기 때문에 다음 영화를 만드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또는 캘빈 클라인 청바지 광고 모델이 걸작을 찍었다는 사실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빈센트 갈로는 지난 4년 동안 기다렸다. 그리고 21세기의 첫 번째 위대한 로드무비 <브라운 버니>를 만들었다(아니, 첫 번째라는 말은 틀릴지도 모른다. 거기에 구스 반 산트의 <게리>를 더해야 할 것이다).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두 시간의 여행. 혹은 유령과 함께 떠나는 길의 여정. 빈센트 갈로는 여기서 최소 인원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 빈센트 갈로 자신이 제작하고, 감독을 하고, 각본을 썼으며, (자막에 의하면) 촬영도 그 자신이 했다. 그리고 자기가 주연이다. 마치 원 맨 밴드영화라고 부를 만큼 그 스스로가 모든 것을 해낸 이 영화는 그것이 미학적이라기보다는 그 어떤 정신적인 순간의 ‘열반의 경지’(!)에로 이끌기 위한 기다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분명히 35mm로 찍었지만 마치 8mm로 작업한 것처럼 때로 초점이 맞지 않는 장면이 있으며, 마치 아마추어가 찍은 것처럼 화면에서 등장인물을 놓치거나 홈 비디오처럼 찍히기도 한다. 종종 역광을 찍었으며, 그래서 렌즈 안에 들어온 빛이 거친 입자를 만들기도 한다. 부분적으로는 <이지 라이더>를 떠올리게 만들고, 때로는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를 생각나게 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멀리 나간다. 또는 짐 자무시의 <천국보다 낯선>을 연상케하지만, 그보다 훨씬 말이 없다. 거의 모든 장면들은 롱 테이크로 찍혔으며, 그 안에는 아무런 미장센도 없다. 그냥 텅 빈 화면과 공허한 시간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것을 견뎌내야만 한다. <브라운 버니>를 보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 물리적 시간의 고통은 등장인물이 그 자신 혼자이며, 이따금씩 등장하는 사람들이 아주 잠깐씩 나온 다음에 완전히 사라진다. 두 시간에 이르는 영화 내내 1시간20분이 될 때까지 영화 속 인물은 빈센트 갈로와 끝없이 이어지는 고속도로뿐이다. 그러니 아무런 기대도 하지 말고 그저 그 여행길에 몸을 내맡겨야 한다. 첫 장면은 뉴햄프셔에서의 모토사이클 레이스 장면이다. 이미 이 첫 장면에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원형 경기장을 빙빙 도는 모토사이클을 아무 사건도 없이 카메라는 멀리서 따라가면서 끝날 때까지 그냥 쳐다보듯이 찍는다. 버디(빈센트 갈로)는 경기가 끝난 다음 그의 250cc 혼다 모토사이클을 밴 자동차에 싣고 뉴햄프셔에서 오하이오를 거쳐 일리노이, 세인트루이스를 지나 캘리포니아까지 여행할 작정이다. 길을 떠나면서 패스트푸드점 아가씨에게 “부탁이니, 제발 같이 떠나자”라고 말하지만, 그녀를 태우고 가다가 2분 만에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냥 혼자서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제부터 우리는 버디가 가는 길의 풍경을 하염없이, 물끄러미, 지칠 줄 모르고, 그냥 넋을 놓고, 거의 자포자기한 채 바라보아야 한다. 음악도 거의 없고, 대사도 없다. 그저 길을 가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바람 소리뿐이다. 옛날 친구 데이지의 부모의 집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때로 길거리에 서 있는 여자들을 둘러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들과 아무 사건도 생기지 않는다. 또는 그가 왜 캘리포니아에 가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40분. 버디는 싸구려 모텔방에 앉아서 데이지가 오기를 기다린다. 카운터에 이야기해서 몇번이고 데이지에게 전화가 오면 연결해달라고 확인한다. 하지만 데이지의 전화는 오지 않는다. 지칠 무렵 카메라가 화면을 잘못 잡은 것처럼 한쪽 구석이 비어 있는데, 거기에 유령처럼 데이지(클로에 세비니)가 서 있다. 그리고 둘은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포옹하고 키스한다. 버디는 데이지에게 말한다. 자기를 사랑하냐고. 데이지는 대답한다. 물론이라고. 그러자 버디가 묻는다. 그런데 왜 나를 떠났냐고. 데이지가 대답한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그리고 데이지는 버디의 바지를 벗기고 자지를 빤다. 그냥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오럴섹스라느니, 커닝링구스라느니 하는 말로 바꿔봐야 같은 말이다. 화면은 그렇게 아무런 장식도 없이 정색을 하고 보여준다. 버니의 자지가 발기하고, 데이지는 그걸 입에 넣고 빨아준다. 버니는 다른 놈들하고 왜 섹스를 했느냐고 물어본다. 데이지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몇번이고 대답한다. 그리고 말한다. 자지를 빨아준 건 너밖에 없다고. 섹스가 끝나고 모텔방에 있는 사람은 버디뿐이다. 그리고 이어서 홈무비처럼 기억이 흘러간다. 데이지는 버디도 있었던 파티에서 마약을 하고 그 파티에 온 남자들과 돌아가면서 섹스를 한다. 그리고 그녀는 침대에서 죽었다. 버디의 마음속의 유일한 여자. 버디의 여행길은 유령과 함께 한 닷새였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것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다. 버디는 그 어떤 사건이 생기는 것도 원치 않는다. 또는 그 어떤 사람과도 만나기를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옆에는 데이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버디의 마음을 보지 못한 것이며, 이 유령과의 로드무비는 마지막 대목에서 심금을 울린다. 죽은 자와 길을 떠나야 하는 자가 바라보는 저 황량한 풍경들. 아무런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없이 이어지는 텅 빈 장면들. 너무도 고통스러워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은 자의 시선. 한마디로 무모한 영화. 그것이 그렇게 이 영화 안에서 사무치게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고독한 자들의 불면의 밤을 위한 영화, 그래서 언제까지라도 끝날 것 같지 않은 여행길, 유령과의 동침 끝에 영화가 끝날 때 재빨리 처음으로 되돌려서 다시 처음부터 보고 싶은 영화. <브라운 버니>는 영원히 끝나서는 안 되는 영화이다. 세상에서 제일 간절한 목소리 <오후 5시>(Panj e asr) | 감독 사미라 마흐말바프 | 경쟁부문 스위스에 은둔해서 살고 있는 고다르는 그 늙은 몸을 이끌고 18살의 소녀 사미라 마흐말바프가 만든 첫 번째 영화 <사과>를 보러 옆 동네 영화관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마지막 회를 보고 걸어서 돌아왔다. 그리고 감동한 나머지 사미라에게 편지를 썼다. 고다르는 사미라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 말은 여러 가지로 읽혀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미라의 영화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영화이다. 그녀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항상 그 자리에 간다. <사과>는 테헤란의 거리에서 찍었다. 두 번째 영화 <칠판>은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 속에서 쿠르드족의 망명길을 따르면서 이란과 이라크 국경을 넘으면서 영화를 찍었다(우리는 이제 그 국경이 여러 부족들의 긴장관계로 인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 폭격이 이어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강도들이 흥정하고, 소년들은 무리지어서 피난민들을 도둑질한다. 그리고 세 번째 영화 <오후 5시>를 만들기 위해서 그녀의 영화가족들과 주력부대를 이끌고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갔다. 사미라 영화에서 소년들은 숙제를 하기 위해서 언덕을 넘는 대신 살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미라를 통해서 이란영화는 불현듯 동시대성을 획득했다. 또는 사미라의 영화는 말 그대로 전투적인 영화이다. 그것은 네오 리얼리즘의 정신이며, 사미라는 로셀리니의 영화를 오늘 다시 끌어들인다. 또는 사미라 자신의 말을 빌리면 “사타지트 라이와 켄 로치, 그리고 짐 자무시가 자신의 영화 경쟁자”이다. 사미라는 자신의 주인공이 학대받고, 버림받고, 죽어가는 그 자리에 가야만 영화가 된다고 믿는 시네아스트이다. 속삭이는 목소리로, 황폐한 모래언덕을 힘겹게 넘어오는 저 당나귀와 할아버지와 두 여자를 거의 지워질듯하게 희미한 아웃 포커스 망원렌즈로 지켜보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오후 5시, 정확하게 5시에, 죽음만이 남는다.” 아프가니스탄에 살고 있는 노크레는 꿈이 많은 처녀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전통에 따라 살기 바라지만 그녀는 아버지 몰래 여자들에게 글을 가르쳐주는 학교에 나간다. 그날따라 장래 희망을 묻자, 노크레는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일어선다. 차도르를 뒤집어쓰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나라, 여자는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믿는 나라, 거기서 노크레는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고 싶다. 그런 그녀에게 피난을 다니던 한 청년 시인이 다가와서 용기를 준다. 하지만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서 아마도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아들을 기다리는 며느리와 손자와 딸 노크레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먹을 것도 없어서 젖이 마른 며느리는 아이가 더이상 울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하지만 고향 가는 길은 끝나지 않는다. 그들 위로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의 <오후 5시>가 속삭이듯 들린다. 그들은 정말 고향에 갈 수 있을까? 아니, 고향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미라는 아버지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칸타하르> 작업을 도우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여자들과 처음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 모흐센이 찍은 <칸타하르>에 이미지는 있지만, 삶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녀는 <오후 5시>를 자기 영화에 등장한 아프가니스탄 여자들과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모든 등장인물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직접 선택했으며, 대사는 그들 자신의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여행을 하면서 <오후 5시>를 만들었다. 여기서도 여전히 사미라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동시에 오간다. 노크레가 살고 있는 세상에 사미라가 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대부분의 장면을 거리에서 찍었으며, 종종 드라마는 예기치 않은 사건과 마주치면서 이야기를 더해가기도 한다. 이를테면 다른 지역에서 온 피난민들이 무단으로 집에 들어와서 내쫓든지 같이 살든지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고 ‘절망적인’ 배짱을 부릴 때 집주인의 난처함. 여기서 카메라는 다큐멘터리처럼 그저 쳐다볼 뿐이다. 거기에 사미라는 드라마를 붙여나간다. 그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기 위한 드라마.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는 사미라의 메시지이며, 희망이며, 세계관이다. 또는 인물이 살아가고, 숏이 삶을 얻는 집이다. 대부분의 장면은 간결하게 찍었으며, 거의 기교가 없는 편집은 인물만을 쫓아간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사미라 영화의 함정이 있다. 저 참혹한 현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는 사미라의 호소가 노크레의 삶을 감상적인 것으로 만들어도 희망의 이름으로 참아야 하는 것일까? 사미라는 그녀와 동갑내기인 노크레 역의 아크엘레 레자이에에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전이되어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그녀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우스꽝스러운 연애극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녀의 사진을 찍어서 거리의 기둥마다 그녀의 얼굴을 알리는 포스터를 붙이며 시인이 ‘정치적 활동’을 할 때, 거기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감상적인 동화이다. 시인은 현실을 아름답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 순간 현실은 아무것도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후 5시>에서 심금을 울리는 대목은 그네들이 집을 떠나서 고향으로 가기 위해 황량한 벌판을 헤맬 때이다. 그러나 그 장면의 이미지가 주는 육체적인 추위와 배고픔의 감각이 보는 우리의 고통으로 넘어오지 않는 것은 거기에 노크레의 고통만이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거기서 중요한 것은 고향에 가야하는 할아버지의 믿음이다. 사미라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23살의 사미라는 아버지의 아버지인 할아버지들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들의 종교적 선택이 지닌 간절함을 우매함으로 제쳐놓을 뿐이다. 사미라가 자기 또래의 고통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함께 살아가야 할 가족들의 서로 다른 세대의 서로 다른 아픔을 이해하려들지 않는 것은 그녀가 아직도 어리기 때문이다. 그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차도르 안의 여성들의 각성을 호소하지만, 그녀들은 세상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사미라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노크레는 시인을 만나서, 그 남자의 언어를 통해 자기의 마음을 연다. 그런 의미에서 <오후 5시>는 사미라의 첫 번째 연애극이다. 물론 아주 따뜻하며 몇몇 장면은 매우 아름답게 찍혔다. 또 고향으로 향하는 고통스러운 여정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직접 찍어낸 그 전투성이 주는 진정성의 순간이 느껴진다. 하지만 <오후 5시>는 지나치게 감상에 빠져든다. 물론 사미라에게도 연애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연애를 하기에는 삶의 무게와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무거운 곳이다. 그녀는 연애할 장소를 잘못 찾았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순풍‥>에서 <똑바로‥>까지,`작가` PD 김병욱 론 [6]

5월이었다. 만물이 푸른 빛을 틔워야 당연한 계절이지만 황사로 뒤덮인 을씨년스런 홍은동의 하늘은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는 듯했다. “아∼ 짜증나∼ 짜증나. 이 동네 진짜 후진 거 있죠. 아이씨, 이제 동욱이 오빠도 없고…. 어떻게 재밌는 일이 없어도 이렇게 없냐….” ‘주현정형외과’에 옹기종기 모여 햄버거를 씹어대던 간호사 려원과 물리치료사 흥수는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턱’이 있나. 미친 매미만이 날짜 계산 못하고 튀어나와 울어젖히는, 초여름의 한가로운 오후일 뿐이었다. “정 간호사! 이게 무슨 소리야?” 골룸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던 흥수의 긴 몸이 한순간에 쭉 펴지면서 창문가로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창문 너머 북서쪽 방향에 먼지를 동반한 강한 회오리바람이 인다. “아! 뭐야? 짜증나…. 또 공사해? 또 공사해?” “잠시만 조용히 있어봐, 정 간호사. 이건 공사장 먼지바람이 아니야.” 순간 바람이 잦아들 때쯤 태양을 뒤로 하고 한 여자가 등장했다. “다… 당신은….” 흙먼지에 뒤덮인 얼굴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 손, 그 손에서는 누구도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을 한번 잡으면 절대 놓지 않겠다는 욕심과 집착으로 똘똘 뭉친 강인한 손을 가진 여자. 3년 전 홀연히 자취를 감춘 뒤 전설이 돼버린 사람. 그렇다. 그녀가 돌아온 것이다. 박· 미· 달. 홍제동의 핵,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던 사악한 어린이. 박미달이 ‘탄알일발재장진’한 상태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를 이제 미달 리로디드(Midal Reloaded)라고 불러라!” 미달 리로디드 한때 박미달이라는 아명(兒名)으로 불렸지만 3년간의 와신상담 끝에 여전사 ‘미달 리로디드’로 재탄생했다. 노구 | 매일 장롱에 다리 올리고 누워 있는 자세를 선보임으로써 허릿병이 생겨 주현정형외과에 입원 중. 몸에 좋은 거라면 사족을 못 쓰는 영감으로 땡깡에서는 미달과 막상막하. 노민정 | 무슨 일이 있어도 눈을 반달로 만들며 웃는다. 가끔은 형욱과 장소팔·고춘자 같은 2인 만담조로 변신한다. 올드보이? 헤헤헤, 알려줄까? “나를 이제 ‘미달 리로디드’라고 불러라!” 풍문을 통해 익히 미달의 괴력을 들어왔던 흥수는 이제 겨우 한입밖에 못 먹은 햄버거를 먼저 테이블 밑으로 숨겼다. “저… 그런데 저희 병원엔… 무… 무슨 일이세요? 어디 디스크라도….” “어이, 흥수씨, 왜 그렇게 쫄고 그래? 저 여자 누구야? 와! 되게 못생겼다. 옷은 덥게 저게 뭐야, 공짜로 얻어입었나봐. 진짜 깬다….” 미달 리로디드가 쫑알거리던 려원을 한번 무섭게 노려보자 려원은 그 자리에서 녹아버렸다. “허걱!… 장난이 아닌데….” 그때 갑자기 문을 열고 발랄한 발걸음으로 민정이 들어온다. “어! 민정스∼.” 반가워하던 흥수의 얼굴이 이내 굳어진다. “야! 빨리 돌아가, 여긴 위험해.” “헤헤헤, 왜 이려셔, 뭐가 위험해. 나 놀리려는 거지? 어? 근데 누구세요?” “산만한 것들! 시간이 없다. 어서 빨리 나를 도와라.” “어머 이 말투는… 혹시 성유리 아냐? 아니다 아니다. 성유리가 이렇게 생겼을 리 없지. 헤헤헤.” “나를 삼년 동안 어둠의 세계에 가둔 건 K란 자라고 들었다. 이제 복수만이 남았을 뿐이야!” “복수? 복수는 양동근 아닌가? 아닌가? 아니다. 그러면 박찬욱 감독 인가? 아닌가? 그러면 <올드보이>인가? 아닌가? 올드보이? 아하! ‘노구’(老軀)할아버지구나. 그 할아버지 121호 방에 누워 있는데. 헤헤헤….” 민정의 부친인 노주현의 친아버지인 노구는(아… 복잡하다) 매일 장롱에 다리올리고 누워만 있던 버릇 때문에 1년 전 허릿병이 생겨 주현정형외과에 입원했다. “니들이 양갱맛을 알어?” 이 영감은 문병객들이 사다주는 백도, 황도통조림과 복숭아 넥타, 그리고 미니약과와 양갱을 얻어먹는 재미에 홀딱 빠져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입원 중인 문제환자다. 특히 과거 미달이 사용했던, 떼쓰기, 고래고래 고함치기, 엉덩이 쑤시기, 독기 품고 달려들기, 발기발기 찢어대기 등의 비법이 담긴 비서(秘書)를 발견해 사람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고 말았다. “할아범, 할아범이 내 지난 3년에 대한 단서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소.” “아! 시끄러, 이리줘, 내 양갱. 뭐 이렇게 생긴 애가 다 있어. 내 참 살다보니 이렇게 못생긴 여자애도 다 보네.” 남들 눈 아랑곳없이 먹는 데 집착하는 그를 보고 있으려니 미달은 흡사 과거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떤 아이들인지 저런 사악한 영감을 조부로 두고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불쌍타.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인자한 분이셨는데….” 김병욱 | ‘시스템’이라고 불린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이상야릇한 인물들의 창조주로서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한때 ‘세친구군단’ 등의 강한 도전을 받았으나 결코 시스템의 자리를 뺏기지 않았다. 웬만해선 그 순풍을 똑바로 막아낼 수 없는 무서운 인물. 오지명 | 미달의 회상과 판타지에 등장. 미달의 기억 속에는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진짜 성격과 다르게 착하고 용돈 잘 주는 자상한 할아버지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용녀 | 간간이 등장해서 특유의 콧소리 섞인 “아이∼몰라 몰라 몰라아~”를 선보이고 사라진다. “우리 할아버지는 정말 인자한 분이셨는데….” 미달 리로디드의 눈이 어느새 촉촉해지면 즐거웠던 과거로 돌아간다. “용녀! 용녀! 용녀! 하… 그거 무지하게 빠르네.” “아이∼몰라 몰라 몰라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판에서 노닐 때 미달과 영규, 미선은 나무그늘 아래서 피크닉바구니를 안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오지명은 지갑을 꺼내 1만원짜리 한다발을 미달에게 건네고 볼에 뽀뽀를 한다. “아껴쓰지 말고 펑펑 써~.” “… 펑 펑 써, 펑 펑 펑….” 그러나 미달의 따뜻한 환상은 ‘펑’하는 소리와 함께 깨진다. “속지마! 그건 시스템이 니 머리에 저장시킨 외곡된 기억이야! 오지명 영감은 너를 미워했어!” “넌 누구냐?” 바바리코트와 선글라스 속에 자신을 감춘 남자는 안타까운 눈으로 미달을 바라보았다. “정배? 정배로구나!” 심히 소심한 어린이로 기절을 즐겨하던 소년 정배는 “맙소사“라는 감탄사와 함께 이마를 한번 치고 넘어지는 것으로 동네 아줌마들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으나 미달에게만큼은 늘 뒷전이었다. 늘 의찬만을 바라보던 미달의 시선 뒤에는 그녀만을 응시하던 정배의 안타까운 시선이 엇갈리고 있었다. “미달, 앞으로 니 눈에 보이는 것, 니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아무것도 믿지마, 아무도 믿지마.” “시스템? 시스템이 뭐야? 넌 뭔가를 알고 있는 거지?” 그러나 정배는 순식간에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 모든 광경을 반달눈으로 바라보던 민정이 끼어든다. “저기요, 제가 혼자서는 좀 도와드리기가 힘들구요. 제 동생들이 좀 잔머리를 많이 굴리거든요. 걔들이라면 뭔가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거든요….” “뭐냐? 죄수방이더냐?” 미달은 나무문에 교도소 감방처럼 작은 들창이 달려 있는 형욱의 방문을 열였다. 노주현의 눈을 피해 인터넷 음란사이트에 접속 중이었던 형욱과 영삼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게 아니구요, 제가 원래 이걸 볼려던 게 아니라, 민정이란 이름으로 이메일이 와서 누나가 보냈나보다 하고 열어보려는데 이게 갑자기 창이 계속 뜨는데 계속 닫아도 또 나오고 닫아도 또 나오고…그런데… 누구세요?” 그때 미달의 몸은 부웅 날아올라 360도 회전을 해 컴퓨터 모니터를 창문 저 멀리로 날려보냈다. “이런! 아이들이 보아서는 아니 될 것들을 보다니, 이런 건 싹부터 잘라야 해!” 순간 형욱과 영삼의 입은 떡 벌어졌다. 지금껏 고작 매트 위에서 엉덩이로 뛰어다니는 공중부양 2단계만을 보아왔던 형욱에게 아무런 도구없이 공중부양을 선보이는 미달 리로디드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비추어진것이다. “당신이 말로만 듣던 그 미달 리로디드! 그래! 이제 히딩크가 아니라 당신을 위해 내 인생 후반전을 바치겠어요!” “앗싸! 나도 내 진정한 스승을 찾았어! 아뵤오오~~.” 미달을 향한 형욱과 영삼의 눈은 ‘하늘만큼 땅만큼’ 넘치는 존경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정배 |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비밀요원. ‘맙소사’라는 감탄사를 주로 사용한다. 노형욱 | 히딩크의 열성신자. 뭐든지 축구에 빗대어 표현함. 그러나 미달 리로디드의 카리스마에 빠져 결국엔 히딩크를 버리게 된다. 노영삼 | 상하가 붙은 노란색 이소룡 체육복과 쌍절곤을 달고 산다. 이후 이복형제인 형욱, 민정과 합체, ‘바보 3인방’을 이루어 미달 리로디드의 심복이 된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순풍‥>에서 <똑바로‥>까지,`작가` PD 김병욱 론 [2]

02. 김병욱은 집요하다 “장인어른,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순풍 산부인과> 미달이 아빠) “아버님,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박정수) “아빠, 너무 해요.”(<똑바로 살아라> 형욱) 김병욱의 인물들은 “너무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들은 정말 너무들 한다. 노구와 노주현, 노주현과 형욱 같은 부자지간에 두드러지는 특징이지만 장인과 사위, 시아버지와 며느리처럼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입장이어도 별로 다르지 않다. <똑바로 살아라>의 이응경과 리나 자매를 보라. 억척스런 아줌마 이응경은 동생 리나에게 수시로 돈을 빌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쇼핑 가면 계산하는 쪽도 리나인데다 자기 화장품을 사면서 카드로 사면 5% 할인된다며 동생의 지갑을 열게 한다. 그런데 정작 기가 차는 일은 그 다음이다. 리나가 백화점 카드로 계산하면서 받은 사은품까지 자기 것이라 우기는 이응경. ‘동생은 영원한 내 밥’이라는 그녀의 신념에 찬 행동은 진정 웬만해선 막을 수 없다. 기실 김병욱의 시트콤은 그들이 ‘너무한다’는 사실에서 빚어지는 소동이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 극작의 기본이지만 김병욱의 작품에서 이런 소동은 일회적인 해프닝이 아니다. 캐릭터와 인간관계를 설명하는 한편으로 김병욱은 누군가 너무한 짓을 했을 때 그 상황의 끝까지 가본다. 보는 이가 “저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말할 때까지 극단으로 밀고가면서 코미디는 비등점에 이른다. 일정 온도까지 계속 불을 때면 물이 끓듯 힘없이 피식 웃다가 폭소를 터트리고 만드는 질적전화의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어이없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순간이. 돈 1만∼2만원과 라면 한 그릇에 울고 웃는 상황을 유치한 설정이라 비웃다가도 끝내 배를 부여잡게 만드는 힘은 결국 ‘김병욱이 너무 하기’ 때문이다. 그는 적당히 타협하지 않는다. 아마 김병욱 시트콤을 본 시청자들의 공통된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집요하다”일 가능성이 높다. 캐릭터의 특징이든 사건의 연쇄작용이든 김병욱은 일단 물면 놓치질 않는다. 때문에 그의 시트콤은 종종 캐릭터 연구 사례집처럼 보인다. <똑바로 살아라>에서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박영규와 안재환이 실은 같은 종류의 인간임을 보여준 에피소드는 캐릭터 탐구의 심층까지 가닿지 않고선 발굴할 수 없는 이야기다. 김병욱은 양파껍질을 까듯 캐릭터의 표피를 하나씩 벗긴다. 양파를 깐다고 무슨 심오한 양파가 발견되겠냐마는 그 과정 자체의 집요함으로 말미암아 김병욱 시트콤의 맵고 달콤한 맛이 우러난다. 사소하게 시작해 나중까지 창대하지 못한 채 마무리되는 소동이 웃음을 자아내는 이유다. 03. 김병욱은 슬픈 코미디를 만든다. 김병욱의 인물들은 지지리 궁상이다. <순풍 산부인과>의 박영규는 그중 대표선수다. 엄청난 식탐의 소유자 영규는 절대로 돈내는 법 없는 잔똘이기도 하다. 인색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돈에 쪼들려 눈칫밥 먹는 풍경은 가관이다. <똑바로 살아라>에서도 영규는 비슷한 인물로 나온다. 그가 우연히 옛사랑을 만나 양수리에 놀러갔다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김병욱 시트콤의 명편 가운데 하나다. “돈있는 놈들이 바람 피운다”며 설움과 울분을 토하는 영규를 보노라면 웃기는 한편으로 가슴이 아프다. 김병욱이 만드는 비애가 있는 코미디는 종종 캐릭터의 약점을 매력으로 바꿔놓는다.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의 며느리 박정수는 무뚝뚝하기 이를 데 없다. 시아버지의 호통을 귓등으로 흘리는 며느리가 어느 날 둘째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애교떠는 모습을 보며 따라한다. 콧소리를 섞어 “아버님” 하고 부르는 박정수의 안간힘은 폭군 같은 시아버지한테도 사랑받고 싶은 며느리의 간절한 마음이 들어 있어 코끝이 시큰해진다. 김병욱은 웃음이 슬픔을 머금을 때 아름다워진다는 걸 안다. 그래서 그의 시선은 언제나 상반된 가치가 부둥켜 안고 있는 기괴한 풍경에 머문다. 형부의 돈을 떼먹고 딸의 컴퓨터를 사주려는 이응경의 모습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뭉클해지기도 한다. 여기서 가족 이기주의와 지극한 자식 사랑은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하다. 김병욱 시트콤에는 사람들의 속물근성과 이중성을 조롱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하지만 이야기가 시청자의 폐부를 찌르거나 양심을 일깨우는 식으로 진행되는 법은 별로 없다. 당연히 개과천선하는 인물도 없고 갈수록 미운 짓만 하는 인물도 없다. 그는 다만 우리 중 누구도 잘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만든다. 김병욱의 인물들은 속물근성과 이중성을 골고루 나눠갖고 있다. 김병욱이 스스로 “냉소의 코미디, 아웃사이더의 코미디, 힘이 없는 코미디”라고 부르는 대목은 여기일 것이다. 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지켜본다. 오해가 녹아 화해하는 과정을, 웃음이 녹아 슬퍼지는 풍경을. <똑바로 살아라> Best 에피소드너 자꾸 그러면 커서 흥수 된다! ‘생활영어’ 편 두 인물이 부딪힐 때 발생하는 독특한 양상의 갈등은 현재 140회분을 방영한 <똑바로 살아라>의 주무기다. 영규-재환, 재환-리나, 리나-응경 등 <똑바로 살아라>의 많은 듀엣 중 최강으로 꼽을 만한 커플 중 하나는 노주현-노형욱 부자. 민정에게 영어를 배우는 형욱의 성적이 나아질 기미가 없자 아빠는 폭발한다. 그리고 집에서 형욱과 대화할 때는 영어만 쓰라는 엄명을 내린다. 그러나 긴급조치의 희생자는 노주현 본인. 재떨이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 한영사전을 뒤지고, 전구 갈아끼우라는 말을 “아이 니드 파이어”라고 갖다붙이지만, 결국 의사소통은 몸짓으로 한다. 급기야 남들은 외계인의 대화인가 싶은데 두 사람만 통하는 경지에 이른 부자. 그러나 게임방의 외상값 독촉 전화는 파국을 부른다. “게임룸 콜 미. 와이 유 머니! 와이! 와이!”(게임방에서 전화왔다. 너 왜 돈을!) “노 미. 마이 프렌드.”(제가 아니라 제 친구가요) “유 배드 유 베리 배드 보이. 아웃! 유 아 낫 마이 선.”(이 나쁜 녀석, 나가! 넌 내 아들도 아냐) “아임 유어 선.”(전 아빠 아들이에요) “아웃”(나가!) 영어를 활용한 농담은, 이응경의 홈스테이, 노주현의 영어드라마 촬영사건 등으로 이어진다. <똑바로 살아라>에서 영어는, 딱히 외국어라기보다는 개인의 숨은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특별한 한국말 사투리에 가깝다. ‘흥수라는 단어’ 편 캐릭터가 곧 스토리가 될 수 있다는 잠언을 증명하는 에피소드. 20여분 동안 덜렁거리고 실속없고 아는 것 없는 흥수의 면모를 갖가지 사건을 나열하며 보여준다. 일련의 사태를 곁에서 꾸준히 지켜본 혜진은 “흥수 오빠의 이름은 언젠가부터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가진 하나의 단어가 됐다”라고 정리한다. 흥수라는 낱말의 용례를 보여주는 예문은 다음과 같다. 1) “왜 그래, 네가 흥수냐?”(=왜 철없이 그런 장난을 치니?) 2) “어이구 이 흥수야, 그것도 모르냐.”(=너 진짜 무식하구나) 3) “아야! “왜 안 하던 흥수짓을 해?”(=왜 오버하고 난리야?) 4) “킹카가 너 찍었대. 좋겠다.” “혹시 흥수 아냐?”(=키만 컸지 별볼일 없는 애 아냐?) 5) “나 예전엔 사람들 앞에서 말 잘했는데 거의 흥수됐어.”(=긴장하면 버벅거려) “죽어라, 임마.”(<심슨 가족>의 호머 심슨은 한때 사전에서 ‘멍청하다’는 단어의 정의로 사진이 실린 적이 있다) ‘민정의 완전범죄’ 편 노주현의 둘째딸 민정은 팬시상품 캐릭터 ‘타레판다’마냥 대체로 자고 있다. 또한 깨어 있는 시간에도 일반인들과는 다른 세계에서 꿈을 꾸는 것처럼 보인다. 밀림의 왕자가 사자냐 호랑이냐 싸우는 언니와 동생에게 “밀림의 왕자? 아나콘다 아니야?”라고 반문하는 민정의 상식과 반사신경은 정녕 이 세상 것이 아니다. 아빠에게 거짓말하고 흥수와 동해일출을 보고 온다는 완전범죄 계획을 세운 민정. 처음부터 큰소리로 통화를 해 언니에게 들키고 대로에서 택시를 잡아 동생에게 들킨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 꼬리를 밟힐 때마다 민정의 반응은 (여전히 웃으며) “와, 눈 되게 좋다. 쇼킹 쇼킹”이 고작이다. 그러나 신은 그녀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흥수와 큰소리로 경포대 카페 이야기를 할 때는 아빠가 귀에 들어간 물을 빼는 중이고, 낙산사에서 민정이의 태평한 인사를 받은 아빠 친구는 공교롭게도 입을 덴다. 마침내 저녁뉴스에 등장한 민정. “남자친구와 오길 잘했어요”라고 생글거리며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악으로 굳은 식구들이 고개를 돌리면 노주현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영상자료원서 전양자 대표영화 5편 상영

지금은 TV 탤런트로 더 잘 알려진 전양자(본명 김경숙ㆍ61)의 전성기 모습을 스크린으로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한국영상자료원(원장 정홍택)은 `한국의 명배우 초대전'의 네번째 순서로 9∼13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내 영상자료원 시사실에서 전양자 대표작을 상영한다. 진명여고를 졸업한 전양자는 66년 이강천 감독의 <계룡산>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전통적인 한국 여인의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그는 인형처럼 깜찍한 외모로 충무로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종점>, <가슴 아프게>, <빙우>, <엄마의 일기>, <여고동창생> 등 출연작만 해도 100여편을 헤아린다. 70년대 들어서는 브라운관으로도 활동무대를 넓혀 MBC 일일연속극 「새엄마」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고 최근에는 악극과 연극 무대에서도 활약하고 있다. 이번 초대전에서는 이순재와 호흡을 맞춘 78년작 <비목>(감독 고영남)을 시작으로 <해방동이>(67년ㆍ박상호), <낙도의 무지개>(71년ㆍ전지수),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69년ㆍ안현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81년ㆍ이원세)이 차례로 하루 한 편씩 선보인다. 첫날 상영이 끝난 뒤 주인공과 관객과의 대화 시간도 마련될 예정이다. ☎(02)521-3147 (서울=연합뉴스)

아들 찾는 물고기의 액션 모험극,<니모를 찾아서>

■ Story 광대어 말린(앨버트 브룩스)은 아내 코랄과 2세들의 부화를 기다리던 중 상어의 습격을 받는다. 알을 보호하려던 아내는 상어 입속으로 행방불명되고 수백개의 알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기에게 말린은 니모라는 이름을 붙인다. 사건 이후 큰 바다를 무조건 겁내게 된 말린은, 한쪽 지느러미가 부실한 니모(알렉산더 굴드)를 과보호한다. 하지만 니모는 등교 첫날 잠수부에게 납치돼 시드니에 있는 치과의사의 수족관에 끌려가고, 슬픔으로 혼비백산한 아빠 말린은 평소의 심약함을 잊고 ‘니모 찾아 삼만리’ 길에 오른다. 말린이 단기기억상실증을 지닌 명랑한 파란 물고기 도리(엘렌 드제너러스)의 도움으로 상어, 심해어, 해파리의 위협을 뚫고 동호주 해류로 향하는 동안, 니모는 수족관의 새 친구들과 탈출을 모의한다. ■ Review “<해저 2만리>에 나오는 니모 선장의 후일담인가?” <니모를 찾아서>라는 제목이 일으키는 첫 번째 상상이다. 니모가 노틸러스호와 상관없는 조그만 물고기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두 번째 생각이 떠오른다. “자연다큐멘터리가 아닌 다음에야 물고기가 주인공인 영화가 재미있어봤자 얼마나 재미있으랴?” 하지만 그것은 포유류의 오만과 편견이다. 픽사의 다섯 번째 장편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야말로 관객이 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을 보여주는 영화다. 제목이 친절히 예고하는 대로 영화는 열대어를 수집하는 치과의사에게 납치된 니모와 니모를 찾는 아빠 물고기 말린이 겪는 이중의 모험을 교대로 따라간다. 병원 수족관에 끌려간 꼬마 니모를 맞이하는 세계는 <토이 스토리>의 우디와 버즈가 사는 장난감 사회의 수중 버전이다. 통신판매나 애완동물가게 출신인 동료들을 지휘하는 바닷고기 길, 수조 벽에 찰싹 붙어 정보원 역할을 하는 불가사리 피치, 흥분하면 몸이 불어 둥둥 떠다니는 복어 블로트 등은 니모를 갱의 신참으로 받아들인다. 수족관 식구들은 매일 보는 게 그것뿐이라 본의 아니게 치의학에 조예가 깊어지긴 했지만, 늘 크고 푸른 바다를 꿈꾼다. 한편 평소의 심약함을 떨치고 대양을 건너는 장도에 오른 말린의 모험은 픽사의 전작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열린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러나 무대만 넓혀놓고 우왕좌왕하기 일쑤인 액션블록버스터 속편들의 과오는 <니모를 찾아서>의 물을 흐리지 못한다. 배경은 판이하지만, 말린의 모험은 픽사가 애용하는 버디무비의 구조를 재연한다. 말린의 동행은 니모를 잡아간 보트를 목격하는 바람에 고생길에 합류한 파란 물고기 도리. 단기기억상실증이라는 지병이 있는 탓에 끝없이 자기 소개를 하고 주변이 캄캄해지면 옆친구의 말을 ‘양심의 소리’로 착각하는가 하면, 자기가 찾는 물고기가 니모인지 이모인지 잘 모르지만, 놀랍게도 영어부터 고래말까지 언어에 재능이 있어 보탬이 된다. 말린과 도리를 찰떡궁합 콤비로 만드는 힘은 하지만 도리의 외국어 솜씨 이상이다. 아들을 찾는 말린의 절박함은 건망증 탓에 언제나 미아 상태였던 도리에게 목표를 부여하고, 낙천적인 도리는 소심한 말린에게 긍정적인 인생관을 감염시킨다(나쁜 일을 다 까먹기 때문에 낙천적일 수밖에 없다). <니모를 찾아서>는, 최근 몇년간 대작들의 실패로 드림웍스와 디즈니가 머리를 싸매고 있는 장편애니메이션의 성공열쇠가 2D냐 3D냐가 아니라 시나리오임을 시원스레 보여준다. <니모를 찾아서>의 세계는 위험으로 가득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뻔하지 않다. 무시무시한 이빨로 덮쳐온 상어는 “물고기는 친구다. 먹을거리가 아니다”를 복창하며 성격개조에 힘쓰는 채식주의자 지망생이고, 황홀한 등불은 아귀의 미끼로 밝혀졌다가 다시 니모가 끌려간 주소를 해독하는 조명으로 이용된다. 몸이 작고 지느러미가 불균형한 니모, 건망증 심한 도리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그들의 결핍은 어떤 순간 무기가 되고 훈장이 된다. 캐릭터도 절묘하다. 껄렁한 10대마냥 떼지어 다니다가 매스게임으로 의사소통하는 은색 물고기떼, “나줘, 나줘” 하며 몰려드는 치사한 갈매기들, 항상 쌍으로 다니는 천성 때문에 유리벽의 그림자를 동생이거니 믿고 사는 줄무늬 고기, 아부쟁이 돌고래를 미워하는 애정결핍증의 상어, <리치몬드 연애소동>에서 숀 펜이 연기한 얼빠진 서퍼를 닮은 어휘력 짧은 거북이 등등. 종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캐릭터들은 평소 동물들을 바라보며 우리가 뜬금없이 펼쳤던 상상 그대로다. 뭐니뭐니해도 <니모를 찾아서>의 월척은 코미디언 엘렌 드제너러스가 탁월한 대사를 들려주는 건망증 환자 도리. 그녀는 가장 웃기는 조크뿐 아니라 영화의 메시지와 정서면에서도 핵심이다. 말린이 그녀를 떠난 한순간 “내가 누구지? 여기가 어디지?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기억이 안 나”라며 맴도는 도리의 모습은 폭소로 풀어진 관객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아들한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그건 좀 웃긴 약속이지 않니?”라는 도리의 반문은 모든 부모의 교훈이며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헤엄쳐, 계속 헤엄쳐”라고 흥얼대는 도리의 콧노래는 <니모를 찾아서>의 철학이다. 톱스타 캐스팅에 연연하지 않고 캐릭터에 꼭 맞는 배우, 심지어 캐릭터를 잘 이해하는 직원들을 성우로 동원하는 픽사의 전략도 성공적이다. 말의 눈과 입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표정묘사가 어렵다고 한숨을 쉬던 <스피릿> 애니메이터들의 불평이 무색하게 <니모를 찾아서>의 앨버트 브룩스와 엘렌 드제너러스의 개성은 열대어들의 아가미 주름과 지느러미 움직임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컴컴한 심해부터 수족관까지 빛과 수질이 천차만별인 다양한 상태의 물을 그리고, 만화체 캐릭터와 어울리게 리얼리즘의 강도까지 조율한 배경그래픽 기술도 <몬스터 주식회사>의 유명한 털 묘사를 초월한다. 픽사는 이제 솜씨 좋은 프로페셔널들의 전문 스튜디오를 넘어 독자적 스타일을 보유한 작가집단의 풍모를 갖춘 인상이다. 실없는 유머를 천진하게 즐기면서도 자연스러운 정치적 올바름을 잃지 않는 픽사의 다섯 장편은, 벌레도 장난감도 몬스터도 물고기도 함부로 해쳐서는 안 될 존재라고, 가장 폭력적인 힘을 지닌 것은 인간이므로 신중하게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같은 3D 컴퓨터애니메이션으로 오스카를 탄 드림웍스의 <슈렉>이 이미 존재하는 동화의 역사를 언덕 삼아 비비고 일어선 ‘2차적 수작’이라면, <니모를 찾아서>는- 선배 <몬스터 주식회사>도 그랬듯- 누구의 거울도 되지 않으면서 스스로 스토리와 형식의 데코룸(decorum: 고전적 균형)을 이루어낸 클래식이다. 그러나 픽사의 천재적 장난꾸러기들이 원치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어깨에 힘이 들어간 존경일 것이다. <니모를 찾아서>는 심층부터 해수면까지 온갖 유쾌한 물결이 마음의 모든 비늘을 적셔주는 빼어난 여름영화다. :: 앤드루 스탠튼 감독 인터뷰 “진실과 재미에 같은 무게를 두었다” <니모를 찾아서>를 쓰고 연출한 앤드루 스탠튼은 픽사에 아홉 번째 직원으로 <벅’스 라이프>를 감독했고 픽사의 모든 장편애니메이션에 공동작가로 참여했다. 스탠튼은 어린 시절 병원 수족관을 구경하는 재미에 치과를 찾던 추억, 아들과 모처럼 시간을 내도 “이건 하지 마라, 저건 조심해라” 하는 과보호로 만사를 망치는 아빠가 된 자신에 대한 반성이 11년 전 <니모를 찾아서>의 아이디어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니모를 찾아서>의 낙천적인 거북 크러쉬의 목소리는 스탠튼의 것이다. 픽사의 뛰어난 점은 아이디어를 모아 스토리를 만드는 작업에 있는 것 같다. 끊임없이 진실에 대해 생각하며 진실과 재미에 같은 무게를 두려고 한다. <월 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조 모겐스턴의 비평 중 ‘스프레차투라’란 말이 있는데 그 뜻은 ‘아름다움을 숨기는 미학’이다. 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할 때도 어떤 작품이 극도로 단순해 보일 때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피와 땀과 눈물이 있음을 느꼈다. 난 내 자신을 작가라기보다 개작 작가라고 생각한다. 뭐든 한번에 통과하는 건 믿을 수 없으니까. 코미디 감독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앨버트 브룩스를 감독하는 기분은. 사실 연기 수정을 요구할 때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멈칫했다. 하지만 앨버트는 감독 입장을 십분 이해했다. 톰 행크스에게 우디를 부탁했을 때처럼 단순히 웃긴 캐릭터가 아니라 작품의 중심이라고 설명했다. 전체 관람가 등급 영화에서 웃음을 끌어내는 비결이 있다면. 사람들을 웃기는 데 꼭 웃긴 농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실, 캐릭터의 걸음걸이, 두 장면의 연결도 웃음을 자아낸다. 좋은 스토리 안에는 웃을 요소가 많다. 예를 든다면. 도리는 건망증이 심하다. 너무 자주 잊어버리니까 성가시게 느껴지면서 짜증도 난다. 그러므로 그것을 웃음의 도구로 쓰는 것은 아주 조심스런 일이다. 그런데 건망증에 따르는 증세 중 하나는 늘 친절하다는 거다. 괴로운 기억이 없으니 늘 낙천적일 수 있다. 그런 낙천성에 대한 관객의 애정이 관객을 웃게 만든다. 픽사의 캐릭터는 직접 노래를 부르지 않는데. 애니메이션을 성공시키는 데 뮤지컬은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도 뮤지컬을 좋아하지만 그게 필수요소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1980년대 후반부터 애니메이션은 점점 더 큰 성공을 거둔 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애니메이션의 정의가 좁아졌고 나는 그게 실망스러웠다. 애니메이션이 나오면 사람들은 한결같이 “어린이들에게 좋은 작품. 별 넷”이라고 쓴다. 나는 “말도 안 돼! 만약 실사영화가 그런 스토리로 전개됐다면 당연히 F를 받았을 거 아냐?”라고 생각했고, 벽을 넘어보자고 결심했다. 자료제공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제2의 `쉬리`를 꿈꾸며,<튜브>

■ Story 끈질긴 근성만 남은 형사 장도준(김석훈)이 테러리스트 강기택(박상민)의 뒤를 쫓고 있다. 전직 국가정보부의 비밀요원이던 강기택은 권력 상층부로부터 축출당한 뒤 요인을 암살하고 수배 중이다. 신임 시장이 지하철을 둘러보던 날, 강기택이 지하철을 탈취한다. 그 지하철에 탑승하게 된 소매치기 인경(배두나)이 짝사랑하던 장도준에게 연락을 해주고, 장도준은 강기택이 점령한 지하철을 되찾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 Review 할리우드의 유니버설 스튜디오 일부는 다인종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영화를 소재로 테마파크로 꾸며놓은 지 꽤 오래됐는데 그곳의 한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평범해 보이는 지하철역이 등장한다. 갑자기 역이 폭파되는 굉음이 울리면서 천장과 벽이 쩍쩍 갈라지고 비명소리와 함께 물벼락이 쏟아진다. 재난의 한복판에 있는 듯한 착각의 시간은 불과 몇초에 지나지 않지만 스펙터클의 ‘리얼리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충분히 감탄스럽다. 그들의 노하우와 물량은 가뿐하게 역 하나를 부쉈다가 원상복귀시키는 요술방망이 구실을 하지만 한국영화는 그렇게 여의치가 않다. <튜브>의 ‘보물’은 8억원짜리 지하철 2량이다. 사실감을 확보하려 철근 뭉치로 지하철 두칸을 만드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닌 처지여서 컴퓨터그래픽과 미니어처를 이용한 야무진 기술력과 도시철도공사, 김포공항 같은 관계기관의 헌신적 협조가 필수적이다. 모처럼 그 박자들이 맞아들어갔다. 테러리스트 강기택의 가공할 솜씨를 보여주는 첫 장면은 터무니없지만 실감난다. 한번쯤 들락날락해봤을 낯익은 김포공항이 총격전으로 쑥대밭이 되는 건 흥미로운 진풍경이다(운좋게도 공항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전관대여가 가능했다). 터미널 어딘가를 폭파시키는 정도는 아니지만 시커먼 밴이 공항 내부로 거침없이 돌진해 들어오고, 자동차 전복장면이 위험스럽게 펼쳐진다. 모터사이클이 지하철 개찰구를 뛰어넘고 역을 빠져나가는 전철로 돌진하는 것도 황당한 설정이지만 그럴듯하다. 지하철을 볼모로 삼았으니 지하철 내부, 밑, 지붕, 조종실 등 좁은 공간에서 긴박감 넘치는 액션을 만들어내는 게 관건이다. 이것 역시 사뭇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다. 지하 터널에서의 폭발과 옥수역 폭파장면은 눈이 흔쾌히 속아줄 수준이다. 그런데 <쉬리> 이후의 블록버스터 ‘핏줄’을 온전히 이으려면 ‘비주얼’만으론 부족하지 않을까. <쉬리>는 냉전이란 소재를 냉전적으로 잘 활용했고 액션에 로맨스를 속도감 넘치게 갖다붙였다. <쉬리>의 공동각본과 조감독을 지낸 백운학 감독이 캐릭터와 플롯에서 <쉬리> 이상을 해낸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엔 한 가지 감상법이 필요하다. 격정적 캐릭터와 쓸쓸한 사랑이라는 홍콩영화식 스타일을 감상(感傷)적으로 즐기기(이건 조롱이 아니라 장르의 속성을 충실히 따른 오락영화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론일 것이다). 형사 장도준은 경찰청이란 지상에서 지하철이라는 지하로 활약무대를 바꾸고는 거칠 게 없는 인간이 됐다. 강기택도 권력의 수호천사에서 애물단지로 전락하고는 죽음도 불사하는 인간이 됐다. 강등당한 두 인생이 하필 원수지간이다. 잘 나가던 비밀요원은 권력의 횡포로 애인을 잃고 테러리스트가 됐고, 엘리트 경찰은 그 덕에 애인을 잃었다. 꼬리가 꼬리를 무는 형국이 된 그들에게는 복수와 응징이라는 악다구니의 운명만 남았다. 아쉽게도 테러리스트(박상민)에겐 독기는 있되 비애가 없으며 형사(김석훈)에겐 비애가 있되 서슬 퍼런 독기가 부족하다. 할리우드의 가공할 물량이 투입되는 조건이라면 감상적인 혹은 복합적인 캐릭터는 불필요할 것이다. 그것말고도 즐길 게 오죽 많은가. 그러나 비주얼 경쟁력에서 열악한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캐릭터마저 1차원으로 평범화하면 그건 오히려 위험한 선택이다. 독기와 비애를 나름대로 안배한 인물이 형사를 짝사랑하는 소매치기 ‘인경’(배두나)이다. 그는 테러리스트로부터 턱뼈가 부서져라 맞을지언정 고집을 꺾지 않으며, “결국 모든 게 사라져간다. 기억만 남는다. 사는 게 뭐 별건가. 달콤한 기억 하나 갖고 있으면 그만”이라며 절망을 냉소하고 견딜 줄 안다. 그에겐 뭔가 아픈 과거가 있어 보이지만 그걸 드러내진 않는다. 지난해 재난이 됐던 3대 블록버스터에 비하면 확실히 업그레이드된 비주얼과 인경의 쓸쓸한 눈빛은 심상치 않다. 일본의 메이저 영화사 쇼치쿠가 180만달러를 주고 이 영화를 선뜻 산 게 이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적어도 관련은 있어 보인다. 아마도 그들은 제2의 <쉬리> 효과를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예측은 곤란하나 질문은 남는다.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와 한국의 블록버스터는 소재와 이야기 구성에서 어떻게 차별화가 가능한가, 대중성이라는 안전장치가 필수적이겠으나 블록버스터와 사실적인 캐릭터(그리고 내러티브)는 양립불가능한가. :: 컴퓨터그래픽과 지하철 세트전체 10분의 1 분량 CG 처리, 스릴 만점 <튜브>의 또 다른 주인공은 컴퓨터그래픽(CG)과 지하철이다. CG가 쓰인 분량은 전체 2500컷 중 250컷으로 10분의 1에 이른다. 옥수역이 테러로 폭파되는 장면은 미니어처 제작을 기본으로 삼고 CG로 사실감을 부여했다. 미니어처 폭파에 3대의 카메라를 돌렸는데 제작 여건상 고속카메라는 1대만 써야 했다. 고속으로 찍어야 진짜 같은 중량감이 나기 때문에 나머지 두대의 카메라를 고속으로 찍은 것처럼 CG로 새로운 프레임을 만들어넣어주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미니어처 티를 내는 파편들을 화면에서 지워내는 작업이었다. 지하철은 세트촬영용으로 직접 만든 2칸말고도 CG용으로 전량을 다 만들었다. 가방 폭탄이 터널 안에서 터지고 달리는 지하철 뒤로 화염이 쫓아오는 장면이 있다. 화염은 터널 미니어처를 이용해 고속 카메라로 찍었고, 달리는 지하철은 실제로 촬영했다. 하지만 지하철은 실제 찍은 건 버리고 CG로 만든 걸 써야 했다. 전철 뒤에서 화염이 밀려오면서 밝아지는 효과를 내야 하는데 실사로는 그게 불가능했다. 또 잠실철교 위를 위태롭게 달리는 장면이나 차량이 분리되는 장면 등 지상 선로를 달리는 지하철은 모두 CG로 만들어냈다. 2호선 선로를 달리는 7호선 차량을 실제로 촬영할 수는 없었으니까. 지하철 밑에 매달려 이동하는 김석훈은 정지해 있는 지하철 세트에서 촬영하고 굴러가는 바퀴와 바람에 의한 먼지나 연기, 배경 등의 효과를 모두 CG로 만들었다. 5개월에 걸쳐 만든 지하철 세트에는 실제 지하철에 없는 몇 가지 장치를 추가했다. 최후에 극적인 순간을 연출하는 소도구라고 할 주전력 차단 스위치, 김석훈이 테러범이 타고 있는 칸으로 진입을 시도하는 바닥 뚜껑, 박상민 부하가 수동식으로 지하철 운행방식을 변경하기 위해 조작을 가하는 선로 제어기 등이다. 지하철 세트는 현재 양수리종합촬영소에 있다. <튜브>에서 무상기증했고, 촬영소쪽은 보상 차원에서 후반작업비 일부를 지원했다.

[인터뷰] <역전에 산다>의 김승우와 하지원

"인생은 역전될 수 있다?" 한순간의 선택으로 엇갈린 두 인생을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 <역전에 산다>에서 김승우(34)와 하지원(23)은 1인 2역으로 출연한다. 두 가지 다른 세계에 사는 같은 인물들이니 정확히 말하면 같은 사람의 다른 두 모습을 보여주는 셈. 어리숙한 증권회사 영업사원인 김승우(극중 승완)는 '시간의 터널'을 통해 건너간 다른 세상에서 성공한 골프스타로 인생을 살고 있다. 그곳에서 하지원(지영)은 이 바람둥이 골프스타의 상처받은 아내. '역전'되기 전의 원래 세상에서 그의 직업은 방송기자다. "제 경우는 망가지는 게 더 쉬운 것 같아요. 그냥 있는 대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니까요. 화려하게 사는 모습이 어려워요. " (김승우) 영화의 결말은 '역전'되기 전으로 돌아온 두 사람 사이에 다시 사랑이 싹트는 것. 김승우가 두 인생 중 한심해 보이는 증권회사 직원을 택한 것처럼 하지원도 기자 역할에 애착을 보였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저도 기자역이 편했어요. 말괄량이면서 털털한 성격이 저랑 맞는 것 같아요. 다음 영화에서는 여기자 역을 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하지원) 두 배우가 호흡을 맞춰 본 것은 영화나 드라마 통틀어 <역전에 산다>가 처음이다. 1990년 <장군의 아들>로 데뷔한 뒤 올해로 13년째인 김승우에 비하면 99년 <진실게임>으로 처음 충무로에 얼굴을 내민 하지원은 까마득한 후배. "처음에는 저도 그냥 한참 선배로만 보였어요.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그런데 같이 일해보니 저보다 더 어려보일 정도로 애교가 많으시더라고요. 왜, 우울할 때 보면 괜히 즐거워지게 하는 사람 있잖아요." 김승우가 보는 하지원은 "왠지 강해 보이던 인상과 달리 실제로는 착하고 여린 후배"라고. 이 영화로 데뷔하는 박용운 감독이 김승우를 캐스팅한 이유는 "릴렉스(relaxed)한 코미디 연기가 가능한 몇 안되는 연기자"라는 것 때문이다. 그가 맡은 '승완'은 세계 최정상급의 골프 선수다. 영화 장면으로만 볼 때 그의 골프 실력은 꽤나 수준급으로 보인다. 실제로 김승우는 안성기, 박중훈 등과 함께 연예인 골프동호회 '싱글벙글'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실제로요? 폼만 프로예요. 스코어를 기록 안 하면 꽤 잘 쳐 보이죠. 아마 폼 때문에 캐스팅됐을걸요?" 한편, 하지원이 지영역에 선택된 이유에 대해 박감독은 "긴장이 풀렸을 때 귀여운 모습이 (감독이) 개인적으로 좋아할 만한 스타일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가위>, <폰>, <색즉시공> 등으로 굳어진 흥행배우 이미지도 '선택'에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색즉시공> 이전에 주로 공포 영화의 '호러퀸'으로 불렸던 하지원은 이번 영화에서는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게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눈으로 하는 공포영화의 연기에 견주어 일상적 모습을 보여주는 연기가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그녀는 "데뷔 후 처음 결혼한 여자역을 맡아서 여태껏 남편이나 결혼 혹은 가정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다"며 "승완에게 이혼하자고 말하는 장면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했다. 웰메이드 필름과 에이원 시네마가 공동으로 제작한 영화 <역전에 산다>는 13일 개봉한다.

주연보다 더 빛나는 할리우드 조연 12인방 [1]

톱스타 쓰니가 좋아? 쯧쯧‥ 우리도 없으면서 “아 정말 답답하네. 왜 그 사람 있잖아. <**>에서 !!로 나왔던 배우… 정말 생각 안 나? 얼굴이 어떻게 생겼냐 하면….” 이런 식으로 기억의 물꼬를 트게 되는 배우들이 있다. 우리는 대부분 그런 배우들을 조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말라버린 기억력을 다시 길어올려야 할 만큼 그들이 가치있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를까? 기억을 더듬으며 할리우드의 명조연들 12명을 여기 초대한다. - 편집자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그러니까 그는 출렁거리는 두부살 속에 예민한 촉수를 숨긴 남자 ■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Philip Seymour Hoffman 1967년 생 주요작 1992 <여인의 향기> 1997 <부기 나이트> 1998 <위대한 레보스키> 1998 <해피니스> 1999 <매그놀리아> 2000 <올모스트 페이머스> 2002 <펀치 드렁크 러브> 멍하니 벌린 입, 창백한 흰 얼굴, 근육질 제로의 두부살, 힘없는 금발머리.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모든 것은 ‘무력’이란 말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기 나이트>에서 포르노 스타 덕에게 “제발 키스 한번만…”을 애원하다 거절당한 뒤 “이 좆같은 천치야!”라고 자학하던 포르노 중독자로 나왔을 때도, <플로리스>의 게이 가수 러스티였을 때도, <매그놀리아>에서 죽어가는 톰 크루즈 아버지의 남자간호사로 등장해 전화기를 잡고 울먹거릴 때도, 그는 이보다 더 무력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치 놀이터에서 괴롭힘당하고 동정받는 뚱뚱한 소년 같았다. 게다가 스코티, 더스티, 러스티, 죄다 뚱보 소년의 이름 아닌가!” 또한 그는 <리플리>에서 맷 데이먼을 계속 의심하다 죽음을 자초하는 얄미운 역을 맡아도, <올모스트 훼이모스>의 음악잡지 편집장 같은 시니컬한 역할이 주어진다 해도, 심지어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 애덤 샌들러를 괴롭히는 폰섹스 회사 ‘매트리스 맨’ 같은 악역을 맡아도, 악하기보다는 안쓰럽고, 남성적이기보다는 여성적이고, 즐겁기보다는 슬펐다. 때론 세상사에 전 듯한 얼굴로, 때론 세상의 흐름과는 상관없다는 루저의 표정으로, 어떤 것도 할 수 없고,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는 태도로, 그는 스크린을 휘적거리고 다닌다. 뉴욕대에서 드라마와 연기를 전공했지만 배우뿐 아니라 배우 외의 일자리도 얻기 힘들었던 그는 레스토랑 웨이터도 헬스클럽 경호원도 번번이 잘렸고, 실업수당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향기>는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해피니스>를 함께한 토드 솔론즈나 폴 토머스 앤더슨 같은 독립영화감독들이 앞다투어 그를 원했고, 앤서니 밍겔라, 조엘 슈마허 같은 감독들도 이 독특한 배우를 자신들의 작품에 모셔가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첫 주연작 <러브 리자> 덕에 유명 남성잡지 표지에 실리면서도 “역시 내 머리 크기는 참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자학성 멘트로 날리는 그. “나도 내가 볼품없는 남자란 건 안다. 그래도, 언젠가, 누군가, 최소한, ‘귀엽다’ 정도는 말해주길 기다렸는데 한명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고 한숨 쉬는 그. 혹시 길모퉁이나 버스 한 귀퉁이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힘없는 슬픈 눈으로 앉아 있는 사내와 마주친다면, 꼭 이 말 한마디를 건네길. “아, 당신! 뚱뚱하고 땅딸막하지만, 참 귀엽네요”라고. 그러니까 그녀는 꼬리 아홉 달린 영국신사 ■ 짐 브로드벤트 Jim Broadbent 1949년생 주요작 1985 <브라질> 1990 <인생은 달콤하다> 1994 <브로드웨이를 쏴라> 2001 <브리짓 존스의 일기> 2001 <물랑루즈> 2001 <아이리스> 2002 <갱스 오브 뉴욕> <아이리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탄 짐 브로트벤트가 미국 한 TV쇼 인터뷰장에 당도했다. “여기, 호주에서 날아온 짐 브로드벤트를 만나봅시다. 반가워요. 당신은 호주 사람이죠?” 준비성 없는 무심한 쇼 진행자의 질문에 짐은 당황하지 않고 온화한 미소로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영국사람인데요.” 그를 만나본 기자들이 “한결같고 조용하고 침착한”이라는 수식어를 이구동성으로 붙이는 사람. 그러나 짐 브로드벤트는 그리 일관성 있는 캐릭터를 선보이는 배우는 아니다. 아무리 그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 파티장 뒤켠에서 토끼꼬리를 달고 온 딸 르네 젤위거와 앉아 바람난 아내를 쳐다보며 담배만 뻑뻑 피워무는 신부복입은 불쌍한 가장으로 나왔다고 해도. 아무리 그가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는 동반자 주디 덴치의 곁을 40년 동안 사랑으로 지키는 순애보의 주인공이었다 해도, 그는 어디까지나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비정하게 외치는 <물랑루즈>의 포주 해럴드 지들러였고, 아일랜드 이민자들을 교묘하게 이용하던 <갱스 오브 뉴욕>의 트위드당의 간사한 보스 윌리엄 트위드였다. 런던 음악연극아카데미(LAMDA)를 졸업해 로열국립시에터,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등 ‘영국 연기의 엘리트 코스’를 고스란히 밟은 짐 브로드벤트는 주로 연극계에서만 활동해왔다. “사실 잘생긴 친구들은 TV로 바로 직행했던 시절” 그런 그가 공식적으로 영화계로 발을 옮긴 것은 <시간도둑들> <브라질>을 비롯한 테리 길리엄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면서다. 이후 마이크 리의 <인생은 달콤하다>에서 희망없는 속에서도 희망을 품은 소박한 요리사 가장으로 등장해 국제적으로 이름을 알렸던 그는 결국 우아한 영국의 티 테이블에서 우디 앨런의 수다스런 뉴욕 식탁까지 당도하게 되었다. 수다라면 떨어질 것 없는 마틴 스코시즈가 <갱스 오브 뉴욕>에 자신을 부른 이유를 “싸기 때문에”라고 대답하는 겸손한 사람. 그러나 이런 그를 뻔한 영국 노인네일 뿐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아직까지 올해 쉰네살의 이 배우의 꼬리가 몇개인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백은하 lucie@hani.co.kr 그러니까 그녀는 똑똑하다. 멍청하다. 자애롭다. 거칠다 ■ 다이앤 위스트 Dianne Wiest 1948년생 주요작 1985 <카이로의 붉은 장미> 1986 <한나와 그 자매들> 1990 <가위손> 1991 <꼬마 천재 테이트> 1994 <브로드웨이를 쏴라> 1998 <프랙티컬 매직> 2001 <아이 엠 샘> 다이앤 위스트는 <뉴욕 소나타>(1980)라는 소품 수준 로맨틱코미디의 조연으로 영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우디 앨런이 미아 패로, 다이앤 키튼만큼 사랑한 여배우이다. 우디 앨런의 영화 <카이로의 붉은 장미> <라디오 데이즈>에 조연으로 출연했으며 <한나와 그 자매들> <브로드웨이를 쏴라>를 통해서 두번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미아 패로, 바버라 허시와 함께한 <한나와 그 자매들>에서 다이앤 위스트는 병적으로 강박증을 앓고 있는 텔레비전 프로듀서 미키(우디 앨런!)와 사귀는 여배우로 등장한다. 신경쇠약 직전의 지식인 세계에서 그녀는 충분히 미쳐버릴 만큼 ‘지적이다’. 그런데 웬걸. 8년이 흘러 <브로드웨이를 쏴라>의 다이앤 위스트는 백치와 자아도취로 무장한 한물간 늙은 여배우 헬렌 싱클레어를 연기하여 보는 사람이 미칠 만한 ‘무식함’으로 다시 한번 오스카를 가져갔다. 하여간 다이앤 위스트는 그 지성과 무지의 극단적인 간극을 지금까지도 힘들이지 않고 오간다. 이상하게도 그녀에게는 그런 둘 중 하나의 성격이 자주 맡겨진다. 그리고 대부분 성공한다. <가위손>의 착하지만 어딘가 비어 있는 화장품 외판원 펙 보그 부인, <첩보원 가족 로버슨>의 얼렁뚱땅 로버슨 부인. 또는 <아이 엠 샘>의 착한 아줌마 애니. 또는 영재 출신으로 특수학교를 운영하는 <천재소년 테이트>에서의 제인 그리어슨과 <미스터 커티>의 능력있는 여성 샐리. 그런데 이상한 건, 그녀가 한쪽으로 나아가려고 작정만 하면 우리는 속절없이 바보라고 놀리며 손가락질을 하거나 혹은 반대로 무슨 눈빛을 짓든지 믿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올해로 55살이 된 이 ‘할리우드 아주머니’는 여전히 우리를 헷갈리게 한다. 한순간 세상에는 없는 듯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주다가도, 또 언제 말 안 되는 대사를 내뱉을지 모를 일이다. “돈 스피크! 돈 스피크!” 정한석 mapping@hani.co.kr 명조연들을 한꺼번에 감상하는 방법우리는 패밀리, 감독-배우군단 합종연횡 <오션스 일레븐> <위대한 레보스키> 폴 토머스 앤더슨이나 코언 형제, 스티븐 소더버그 등은 알려졌다시피 특정 배우들을 ‘군단’으로 묶어서 편애하는 감독들이다. 일명 ‘패밀리’로 불리는 이 배우집단은 감독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하면서 그 감독의 영화가 가진 연기력의 퀄리티를 보장한다. 물론 ‘패키지’로 이동하기 때문에 양적 보장은 기본이다. 이미 언급된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 <매그놀리아>와 코언 형제의 <아리조나 유괴사건> <바톤 핑크> <파고> <위대한 레보스키>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거기에 없는 남자> 등의 작품들, 그리고 소더버그의 <조지 클루니의 표적> <트래픽> <오션스 일레븐>은 그들 가문에서 개성으로 승부하는 배우들을 한번에 여럿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황금맥, 말하자면 매력배우 노다지땅이다. 열두명의 리스트에서 아깝게 탈락한 필립 베이커 홀과 윌리엄 H. 메이시, 토머스 제인은 앤더슨 가의 또 다른 대표 멤버들이며, 코언 가에서는 존 굿맨, 존 터투로, 스티브 부세미, 프랜시스 맥도먼드와 같은 일원들이 이 리스트에 합류하는 데 실패했다. 소더버그가 아끼는 흑진주 돈 치들 역시 근소한 차이로 제외된 경우. 어쨌든 이들은 어느 한 캐릭터를 대표적으로 집어내 말하기 어려울 만큼 다채로운 역할과 연기력의 폭을 자랑하는 특급 연기자들이다. 항간에 ‘이것이야말로 감독 자신의 성격이 여러 개로 분열돼 있어 불가피하게 다수의 페르소나를 필요로 하는 데서 오는 현상’이라는 비전문적인 분석 견해가 나돌고 있지만 아직 증명된 바 없다. 또 패밀리 멤버십 서비스는 받고 있지 않지만 회원들과의 충분한 팀워크를 과시한 베니치오 델 토로, 엘리엇 굴드 등도 외면할 수 없는 매력적인 배우들. 가이 리치 감독 역시 <록 스탁 투 스모킹 배럴즈>와 <스내치>를 통해 이전까지 조연 역에 한정해 있던 배우들을 주연급으로 끌어올린 케이스다. 제이슨 플레밍과 비니 존스, 제이슨 스태덤 등이 그의 손에서 컸다. 특정 배우들을 꾸려 가족화하지는 않았지만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과 <저수지의 개들>도 조연열전무대. 아만다 플러머, 빙 레임즈, 로잔나 아퀘트가 <펄프 픽션>에 출연했고 이 영화에 등장한 팀 로스는 하비 카이틀, 스티브 부세미, 랜디 브룩스 등과 함께 <저수지의 개들>에도 출연한다. 노장감독 로버트 알트먼의 작품들 역시 여러 인물들이 한 영화 속에 모여 균형있게 조율된 점에서 탁월하다. <숏컷>은 앤디 맥도웰을 위시해 매튜 모딘, 제니퍼 제이슨 리, 구스 반 산트의 <싸이코>의 앤 헤이시, <저수지의 개들>의 크리스 펜 등이 주요 출연진. <고스포드 파크>는 매기 스미스와 마이클 갬본 등과 같은 명노장배우들을 중심으로 이미 여기저기서 소개된 바 있는 연기파 배우진들이 문자 그대로 ‘한떼’ 등장하는 영화다.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와 줄리엣>, 테렌스 맬릭의 <씬 레드 라인>, 존 매든의 <셰익스피어 인 러브>, 샘 멘데스의 <아메리칸 뷰티>와 <로드 투 퍼디션> 등도 인상적인 조연배우들을 만날 수 있는 통로다. 박혜명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장화,홍련> 제작기 [3]

# 2002. 12. 07 <살인의 추억> 현장에 놀러갔다. 송강호와 김상경이 취조실에 있는 한컷을 봤는데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앵글, 연출, 연기의 삼박자가 완벽한 호흡을 이루며 전율을 느끼게 했던 경험은 <복수는 나의 것> 현장 이후 처음이었다. 봉준호의 눈빛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좋은 스탭과 훌륭한 연기자와 호흡을 맞춘 봉준호의 치밀함이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이거 분명히 우리랑은 적어도 한달 정도 차이나게 개봉하는 거지?” 촬영 전까지만 해도 한달 이상 사이를 두고 서로의 영화를 개봉하는 일정으로 촬영을 하자는 약속을 했던 봉준호. 그런데 봉준호의 태도에 싸늘함이 느껴졌다. “글쎄 잘 모르겠네요. 좀더 늦춰질 것 같기도 하고…. 김무령 PD한테 물어보세요.”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배… 신… 자.” 나는 김무령에게 뛰어가(물론 바로 앞에선 여유있는 폼으로 걸어갔다) 개봉일이 우리랑 부딪치는 거 아니겠지? 하고 물었다. “<장화, 홍련>이 뭐가 걱정이에요?” “무슨 소리야? 이건 완전히 레알마드리드랑 강북조기축구회와 붙는 거나 다름없지.” “네? 여보세요? 감독님 잠깐만요. 여보세요. 아… 어디라구요?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후보 추천위원회라고요?” 내 말을 완전 무시하고 휴대폰을 들고 나가버리는 김무령. 그날 밤 정말 무시무시한 꿈을 꾼다. <살인의 추억>과 <장화, 홍련>이 나란히 개봉했다. “안 돼!”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깬다. # 2002. 12 .21 조명부 막내 귀염둥이 선희 사고 일어남. 천장에 조명기를 설치하려다 발을 헛딛는 바람에 떨어짐. 긴급후송. 오랜 시간 동안 답답한 세트 안에서 촬영을 강행했기 때문에 모든 스탭들이 지치고 집중력이 떨어져 있다. 세트장 분위기가 조금씩 흉흉해졌다. 편하게만 생각했던 세트 촬영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 게다가 너무나 큰 세트였기 때문에 감당해내기가 정말 어려웠다. 더욱이 이렇게 큰 세트 안에서 엔비언트 조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은 일반 조명환경의 촬영 때보다 배 이상 걸렸다. 이렇게 힘드니까 알면서도 실험을 안 하는 것이군 하고 생각했다. 나도 순간적으로 ‘에이 확 무시해버리고 그냥 일반 조명으로 가버릴까? ’ 하고 되뇌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꿈에 장화, 홍련 두 자매가 원귀가 되어 나타났다. “우리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니? 우리의 원을 풀어주는 영화를 만든다면서 그 정도도 안 하려고 그런 거야? ” # 2002. 12. 24. 41회차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다들 섭섭해하면서 촬영을 함. 아침에 세트장 안에 큰 크리스마스 트리와 빨랫줄에 제작부에서 스탭들을 위해 준비한 양말 선물들이 카드와 함께 걸려 있었음. 오늘은 다른 날보다 O.K를 빨리 불렀다. 모처럼 신 누끼도 찍고 3신을 소화했다. 그러나, 무현 욕실장면을 찍을 때 호스가 잘 안 맞고 수증기를 만들어내는 부분 때문에 촬영이 새벽에 끝남. 제기랄, 그럼 그렇지. # 2003. 01. 12∼13 에필로그 세트분량 촬영을 시작함. 염정아. 임수정. 문근영이 다른 헤어스타일로 나타나 촬영을 함. 뒤에 들어오는 촬영팀이 거의 밀고 들어오는 상황이라 며칠째 강행군을 해야 했다. 그래도 단 며칠이라도 봐준 그 회사가 고맙다. # 2003.01.15. 56회차 세트 마지막이어서 다들 수십 시간 잠을 못 자고 촬영을 강행했다. 역시 이렇게 쫓기듯 찍은 장면들이 좋게 나올 리 없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철수할 수밖에…. 마지막 장면에서 소수정예의 잠없는 스탭들이 남아 끝까지 촬영을 함. 몰려오는 잠을 이겨내는 방법은 틈날 때 눈을 감고 있는 방법밖에 없었다. “감독님, 일어나세요.” 세트 바라시하는 데도 이틀이 걸렸다. 영화를 잘못 찍고 두 다리를 쭉 펴고 자기란 쉽지 않다. 나는 오늘도 다리를 오므리고 잔다. # 2003. 01.27. 60회차 수연이가 생리하는 장면 촬영. 어린아이여서, 피묻은 팬티가 나오는 장면이어서 남자스탭들의 출입을 삼가고 촬영기사와 감독님을 제하고 모두 여자스탭들이 들어가 진행함. 문근영은 이렇게 여자스탭들만으로 영화를 찍는 것이 너무 멋있다고 한껏 들떴고, 촬영감독은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눈감고 찍었다고 했다(이동컷인데…). 나도 눈감고 모니터를 봤다는 말은 차마 못했다. # 2003. 01.29. 62회차. 수미 방 세트 마지막. 에필로그 장면을 촬영하고 엄마귀신이 나오는 장면을 촬영. 와이어를 설치하고 천장을 막고 붙이고 하느라 세트팀이 고생함. 세트팀 오 차장님이 명언을 남김. “뜯어요? 환장하겄구먼.” “붙여요? 환장하겠네.” 여러 번의 NG 끝에 20번 만에 귀신걸음 성공. 여전히 다음날 낮까지 촬영함. # 2003. 02. 04. 63회차 정신병원 촬영. 꽤 고급스러운 정신병원으로 모든 스탭들이 조심조심하면서 촬영을 함. 병원에 있는 수미를 만나러온 은주와 무현의 장면을 촬영. 정신병원이어서 다른 소품이나 물건들이 없어 모두들 정말 세트 같다는 말을 했다. 너무 세트촬영에 길들어 있어서, 촬영감독이 벽을 ‘댕강’할 수 없냐는 말이 나옴. 병원촬영을 하다, 예민한 환자들의 항의 때문에 복도신을 찍지 못하고 철수. 환자 왈, 스탭들 중 누군가가 자기 보고 미쳤다고 했다고 한다. 확인했지만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 환자의 말을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음….” # 2003. 02.14. 70회차 며칠 동안 소리지르고 많이 울어서 그런지 계속 감정이 나오지 않아 수정이와 근영이가 많이 힘들어 함. 둘다 거의 탈진상태. 안쓰러웠지만 여기서 약해지면 오히려 나중에 수정이와 근영이한테 원망을 들을 것 같았다. 좋은 장면이 나올 때까지 더할 수밖에. TV촬영과 영화촬영을 동행해서 잠을 거의 못 잔 근영은 최후의 발악을 하듯, 현장에서 더 활발하게 뛰어다니고 떠들다가 촬영이 끝나자마자 쓰러져 잠. 그런 근영이를 보고 웃는 수정이를 보며 진짜 자매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 2003. 03. 02. 마지막 촬영 촬영을 끝내고 그러니까 마지막 컷을 부르고 나오면서 스탭들과 하나씩 악수하고 포옹했다.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모두들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눈이 온다. # 2003. 04 지나던 길이라며 편집실에 들른 홍상수 감독님이 편집된 것 좀 보자며 들어오기에 등을 떠밀어냈다. 개봉하기도 전에 망신당하고 싶지 않았다. 편집을 하도 붙였다 떼었다 하니까 고임표 편집기사가 이 컷은 다시 붙이거나 떼지 않겠다고 서약함이라고 아예 신 제목을 붙여 아비드편집기에다 입력했다. # 2003. 05 이병우 음악감독 스튜디어에서 음악작업 중. 내가 하도 이 음악 만들어 달랬다가 저 음악 만들어 달랬다가 하니까 이병우 음악감과 피아니스트 신이경이 건반 자리를 내주며 한번 쳐봐 한다. 하라면 못할지 알고? 하면서 건반을 마구 눌렀다. 소리에 감동먹고 있는데 둘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라이브톤에서 믹싱 중. 소리를 하도 이것 넣었다 저것 넣었다 하니까 라이브톤 최태영 기사가 아예 여러 소리를 만들어놓았다. 편집이 늦어진데다 개봉이 예상보다 일주일 정도 일찍 잡히는 바람에 사운드작업이 중요한 이 영화의 후반 일정이 너무 빡빡해졌다. 이 영화가 정말 무섭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가 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정말 두 자매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순간의 참혹한 마음의 공포를 그려낼 수 있을까?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어왔는데…. 정말 상상력이 진정성이란 게 가능한 걸까? 오 하느님 제발 저에게 일주일만 시간을 더 주세요.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장화,홍련> 제작기 [2]

# 2002. 08.25 아버지 역에 김갑수 선배를 만나 제의를 했다. 연극 <길 떠나는 가족>에서의 너무나도 훌륭한 연기로 감동, 감화받은 나는 언젠가 저분과 꼭 작업을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던 차였다. 시나리오를 읽으시고는 아버지 캐릭터의 어려움을 정확하게 짚어내었다. “시나리오에서 모자란 부분, 선배님께서 채워주세요.” 이런 말을 하는 내가 꼭 장사꾼 같았다. # 2002. 09. 07 극중에선 항상 반듯한 이미지로 나온 염정아씨를 만나다. “장화 역 때문에 만나자고 하신 거죠?” 하며 혼자 깔깔거리며 웃는다. 항상 쾌활하고 털털한 모습이다가 순간순간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어쩐지 재밌는 새엄마의 캐릭터가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2002. 09.09 ∼10. 06 1차 테스트 촬영 양수리 6세트에서 연기자 한명을 두고 인물, 엠비언스 조명과 벽지를 가지고 테스트 촬영을 함. 밤샘 촬영을 함(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렇게 수많은 색깔의 천을 많이 봄). 2차 테스트 촬영 보성 율어 외부세트장에서 촬영을 함. 조감독과 김정화 실장, 이모개 촬영감독, 연출부 이안규가 <살인의 추억> 촬영장을 방문. 오는 길에 안개에 휩싸여 길을 잃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이게 내 모습이 아닐까? 작은 일에도 불길한 징조로 생각하는 내 모습에 겁이 났다. 혹시 이게 내 모습이 아닐까? 깊은 밤에 숙소 도착. 촬영감독이 안개장면을 직접 찍고 싶다고 해서 새벽부터 서둘러서 부지로 올라가 촬영. 안개 지긋지긋하다. 보성 차밭에서 리버설 필름 테스트도 하고 밤 늦게 서울로 출발. 3차 테스트 촬영. 양수리 2세트의 내부세트를 짓는 곳에서 주연배우들과 함께 테스트 촬영. 실제 세트와 비슷한 느낌의 임시 세트를 지어 벽지와 가구 등으로 전체 분위기를 테스트함. 테스트 촬영결과물을 보고 애초에 디지털 색보정 기획을 안 해도 좋은 색감과 톤을 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 2002. 10. 21 보성 율어세트장에서 #9신 촬영. 고사도 함께 지냄. 오전에 비가 조금 내리다 고사를 지내고 날씨가 갬. 계속 그럴 줄 알았는데 해가 구름에 들어갔다 나갔다 해서 그림이 영 신통치 않음. 그래도 첫날부터 허탕칠 수 없어서 밤늦게까지 촬영을 강행하고 훤한 보름달이 떠서 달CG소스 촬영.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오늘 처음으로 큰소리로 O.K사인을 냈다(첫날 유일하게 건진 O.K컷. ㅜㅜ). # 2002. 10. 24. 4회차 40신 그네에서 수미와 무현이 대화하는 장면 다시 찍음. 원신 원컷으로…. 영화를 하면서 정말이지 해도해도 안 나오는 신이 꼭 한개씩 있다. 딱히 어려운 것도 아닌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이 안 잡히는 신들. 아마 40신 그네신이 그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밤에 첫 레커신을 찍는데 너무 추웠다. 10월에 입대해서 깊은 산속, 부대에서 찬물로 머리를 감던 그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내 기억 속엔 10월이 가장 춥다. # 2002. 10. 27. 5회차 저수지 선착장신. 집에 도착한 두 자매가 집으로 들어가기 전 선착장에 들렀다 들어가는 장면이다. 아직 영하는 아니지만 바람부는 저수지의 체감온도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수미, 수연이 맨다리로 저수지 물에 발을 담구는 장면을 찍는다. 아이들 다리에 붉은 반점의 알레르기 같은 것이 일어나 다시 다리를 따뜻하게 하고 메이컵한 뒤 촬영재개. 그걸 보고 있던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고 함. 바람이 너무 많이 부는 관계로 지미집 컷을 찍는 데 고생했다. 최상의 장면을 잡기가 너무 어렵다. 지미집은 바람에 흔들리고 수미, 수연의 다리는 물에 퉁퉁 불기 시작하고…. 결국 신을 다 찍지 못하고 철수. 악몽을 꾼다. 촬영감독과 조명감독이 테스트 촬영을 해야 하는데 연기자가 아직 도착 안 했다며 나보고 저수지에 들어가 있으라고 한다. 분명히 수미, 수연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 2002. 11.01. 10회차 변덕 심한 날씨와 일광조건 때문에 아직도 집으로 못 들어간 두 자매, 계속 선착장장면을 찍고 있다. 스탭들이 도대체 아이들이 언제 집에 들어가냐고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집에 도착한 지 9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집에 못 들어가고 있다. 이러다가 스탭들이 들고 일어날 것 같아 할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O.K사인을 냈다. 그리고 다시 밤촬영. 화순에서 촬영을 하던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감독, 송강호, 김무령 PD가 촬영장을 방문. 봉 감독인지 송강호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여기는 여배우들이 많아 좋겠네. 우린 현장은 여배우가 없어!” 하며 탄식한다(어쩐지 말투로 보아 송강호 같다). 그 말을 들은 김갑수 선배가 “여기도 뭐 마찬가지야. 한 사람도 정상적인 여자는 없어” 한다. # 2002. 11. 04. 12회차 조금 안정된 날씨 덕에 촬영 재계. 최고의 압권은 쥐새끼의 목이 서랍에 끼는 장면. 몸을 사리지 않는 쥐새끼의 열연에 노고를 치하. 이에 자극받은 다른 쥐새끼가 농약 먹은 쥐연기를 실감나게 열연. 마취에서 깨어난 쥐들을 다시 연구실로 돌려보냈다. 떠나는 쥐들에게 전 스탭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냄. # 2002. 11. 14. 16회차. 양수리종합촬영소 2스튜디오. 이틀 뒤에 이모개 촬영감독 결혼식이어서 촬영 빨리 끝나고 집에 가서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데 진행은 더디어만 간다. 나도 빨리 O.K사인을 내고 싶은데 만족스런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가 오승철 조명감독이 이모개 촬영감독 빨리 가시라고 열심히 조명을 한 덕분에 새벽 1시에 촬영이 끝남. # 2002. 11. 22. 20회차 수미가 수연의 소리가 난다는 말을 듣고 1층에 내려오는 장면을 돌리 이동장면으로 촬영. 카메라 동선을 말해주니까 촬영감독과 영상시대가 난감해한다. 거의 돌리 위에서 360도를 돌아야 했다. 가능한지 아닌지 일단 테스트는 해보자고 합의한 뒤 모니터를 보니까 만족스런 이동이 나왔다. “좋은데…” 하는 말을 하려고 세트 안으로 들어갔더니 촬영감독이 360도를 돌아서 모니터 라인과 배터리 라인에 감겨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 다른 스탭들은 웃음을 참느라고 컥컥거렸고 이모개 촬영감독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 2002. 11.30 26회차 우리 세트장의 여배우들이 예쁘다는 송강호의 소문을 듣고 <살인의 추억>의 김상경과 김뢰하가 옆 세트장에서 놀러옴. 여배우들과 인사를 나눔. 그뒤로 틈만 나면 세트장에 놀러오는 송강호와 김상경. 그리고 김뢰하. 송강호가 “감독님이 계시나?” 하면서 팀들을 몰고 들어온다. 촬영장에 당연히 감독님이 계시지. 김상경은 아예 나를 보고 의자왕이라고 놀린다.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