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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CASHFILTER365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trc20전송대행코인현금화수수료' 검색결과

기사/뉴스(2003)

[국내광고] 가짜 유명인 등장시킨 광고 두 편

제작연도 2001 광고주 한국디지털위성방송 제품명 스카이라이프 대행사 제일기획 제작사 KU프로덕션(감독 박대민) 제작연도 2001 광고주 삼성전자 제품명 센스큐 대행사 제일기획 제작사 쥬프로덕션(감독 서정완) 광고계에 ‘가짜’ 유명인이 판치고 있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 할리우드 스타 존 트라볼타와 우마 서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모차르트 등 물 건너온 이국의 스타가 국내 CF에서 활약하고 있다. 이들 ‘별’ 가운데 고인(故人)도 있으니 광고의 실제 출연자는 진짜가 아님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다름 아닌 무늬만 스타인 흉내내기 모델(이미테이션 모델, 혹은 임프레셔니스트(impressionist))다. 사례 하나. 퇴임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의 하루를 그린 스카이라이프 광고다. 보디가드들을 거느린 채 근사한 저택에 들어선 클린턴. 집에 오니 막상 할 일이 없자 하품을 터뜨리는 그가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고 텔레비전을 켠다. 그런데 TV 리모콘을 든 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던 클린턴이 위성방송을 선택하자 열심히 청소하던 가정부가 갑자기 프로골퍼로 변신하는 놀라운 광경을 만난다. 눈을 꿈쩍거리며 정신을 차리는 그가 또다른 위성방송으로 채널을 돌려본다. 이번엔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늘씬한 아가씨가 등장해 서핑보드 같은 스포츠레저용 상품을 광고하고 있다. 상품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검색창이 화면에 나란히 떠 있음에도 그는 온통 미녀의 수영복 몸매를 감상하는 데만 정신을 팔려있다. 이때 뒤에서 한눈파는 남편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전 퍼스트레이디 힐러리가 날 선 목소리로 호통을 친다. 그러자 힐러리의 심기를 이해한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상어가 화면에서 튀어나와 클린턴을 향해 돌진한다. 실감나는 영상 퍼레이드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소파 뒤로 고꾸라지는 클린턴. 멋쩍은 얼굴로 ‘와, 대단한 접시야’라고 한마디를 던진다. 접시는 위성방송 안테나를 지칭하는 말. 즉 이 광고는 디지털위성방송인 스카이라이프가 전직 대통령의 하루를 특별하게 바꿀 만큼 기존 방송보다 한 차원 높게 흥미진진한 영상세계를 선보이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사례 둘. 삼성전자의 노트북 브랜드 센스큐(Q) 광고. 숀 코너리, 마이클 잭슨 등 이름난 해외스타를 시리즈로 내세워온 이 CF는 스타와의 만남 같은 현실에서 쉽게 가능하지 않은 특별한 이벤트를 노트북 센스큐의 다양한 멀티미디어 기능을 통해 맛볼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재 방송을 타고 있는 광고에선 존 트래볼타와 우마 서먼이 ‘V자’ 모양의 손으로 눈가리고 트위스트 춤을 추는 영화 <펄프 픽션>의 한 장면으로 전속모델 김정화가 틈입하는 상황이 나온다. 김정화에게 파트너를 빼앗긴 가짜 우마 서먼이 김정화를 밀어내겠다고 몸싸움을 벌이는 상황이 웃음을 자아낸다. 대통령을 비롯한 유명인의 말투 등을 모사하는 ‘캐리커처’ 스타일의 코미디가 일상의 유머로도 일반화한 현재, 유명인을 닮은 그들의 광고계 습격은 아주 새로운 사건은 아닐지 모른다. 이미테이션 모델이 진짜를 그럴듯하게 가장하는 이들 광고는 유명인의 지명도와 특별함에 기대 극적인 재미를 추가하고 메시지의 파워를 높이겠다는 노림수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같은 광고는 익숙한 히트작의 한 장면을 차용해 코믹하게 제품 메시지를 전달하는 패러디 CF보다 한술 더 뜬 노골적인 희화화의 재미를 함축하고 있다. 가짜를 통해 진짜에 근접하겠다는 립싱크 같은 효과나 참과 거짓의 혼란을 유도하는 ‘감쪽같은 속임수’가 아니라 명백히 가짜임을 드러내며 원전에 대한 익살스러운 변주를 함께 즐기자고 제안하는 ‘속보이는 거짓말’을 구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귄위주의의 상징인 대통령을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한 웃기는 중년남성으로 표현한 스카이라이프 CF는 주목할 만하다. 대통령이라고 특출나게 근엄할 필요는 없겠지만 무게를 벗어던진 채 호들갑을 떠는 클린턴의 모습은 거칠 것 없는 유머의 지평을 보여주며 유쾌한 기분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진짜 클린턴이 재임 시절 성 스캔들로 곤욕을 치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가짜 클린턴이 미녀에게 넋을 빼는 모습은 그럴듯한 설정이었다. 가짜 유명인을 앞세운 광고는 정색하면서 진실되게 브랜드의 가치를 설파하고 자랑하는 직접적인 방식과 거리를 두고 있다. 광고도 어차피 허구와 연출의 산물이라는 관점에서 가짜의 ‘쇼’를 질펀하게 펼쳐놓으며 전달하고 싶은 얘기를 간적접으로 밀어넣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들 CF의 전략은 등을 느슨하게 기댄 채 거리를 두고 가볍게 즐기기에 적합한 것인지 모르겠다. 판단의 몫을 시청자에게 돌린다는 점에서 주입식 보다는 부담스럽지 않은 장점도 있다. 조재원/ 스포츠서울 기자 jone@sportsseoul.com

듀나의 비교론 반지의 제왕 vs 해리 포터

드디어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과 <반지의 제왕>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같은 주에 개봉되는 영화들은 아니지만 이 두 시리즈는 여러 가지 면에서 비교 대상이 된다. 둘 다 모두 경악스러울 정도로 성공적인 환상문학 작품이 원작이라는 것, 둘 다 시리즈물이며 앞으로 한동안 일년에 한편꼴로 개봉되어 계속 경쟁상대가 될 것이라는 것, 둘 다 원작의 명성이 불러들인 참견꾼들로 가득하다는 것…. 기타등등 기타등등….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표면상의 유사점일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숫자와 레벨들을 모두 떼어낸다면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을 1대1로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다. 도대체 환상물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이 두 작품을 직접 비교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둘 사이에 무언가 더 있는 것일까? <반지의 제왕>, 장르팬들의 집단의식적 이미지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의 장르는 무엇일까? 가장 손쉬운 답변은 ‘둘 다 환상문학(또는 영화)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이의도 제기될 수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에는 호빗 같은 종족들은 살고 있지 않으며 마법사 아이들을 교육하는 호그와트와 같은 학교는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작가의 머리 속에서 나온 환상이다. 그러나 쉬운 답변이 대부분 그렇듯 이 답변도 그렇게까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여기서부터 답변을 조금 세분화시켜야 하는데, 그러기 전에 일단 단어 정리가 필요하다. 우선 종종 오용되는 ‘환상문학’과 ‘판타지문학’ 문제부터 처리하자. 번역처리하면 동의어가 되어버리는 이 두 단어를 전혀 다른 의미로 따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 ‘환상문학’은 말 그래도 환상적인 설정을 다루는 모든 문학작품을 총칭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판타지문학’이라고 불리는 장르는 영어권에서 ‘칼과 마법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장르이다. ‘판타지문학’을 ‘환상문학’에서 분리시켜,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얄팍한 이야깃거리 정도로 정의하려는 시도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먼저 밝혀야겠다. 늘 하는 말이지만 장르는 작품의 질을 제한하지는 않는다. ‘칼과 마법사’ 장르를 정의하는 것은 작품의 질이 아니라 규격화된 설정이다. <반지의 제왕>은 쉽게 ‘칼과 마법사’ 장르 안에 안착된다. 문제는 톨킨이 이 작품을 ‘장르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드거 앨런 포가 <모르그 거리의 살인>을 추리소설로 쓰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톨킨이 쓴 <호빗>과 <반지의 제왕>은 장르의 시조이다. 그가 자신의 작품을 위해 창조한 세계는 그뒤로 끝도 없이 모방되고 변형되어 장르를 형성하게 된다. ‘칼과 마법사’ 장르가 당연하다는 듯 ‘판타지’로 총칭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직까지 ‘환상문학’의 세계에서 이처럼 성공적으로 장르화가 성공한 예는 없었다. 톨킨이 ‘칼과 마법사’ 장르 팬들에게 그처럼 열정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 때문이다. 톨킨 애호는 일종의 조상숭배다. 여기서 영화화와 관련된 재미있는 현상이 일어난다. 장르 애호가들은 개별 작품을 장르의 렌즈를 통해 바라본다. 그리고 그 렌즈는 장르 탄생부터 조금씩이지만 꾸준히 변형되어 고정된 것이다. 하지만 톨킨은 장르물을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장르 애호가의 고정된 시선은 톨킨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오히려 억제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만약 그 장르 애호가가 숭배하는 소설을 시각적인 매체인 영화로 각색하려는 감독이나 작가라면 어떻게 될까? 이런 세세한 질문에 답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다음 구체적인 문제점을 한번 생각해보길 바란다. 컴퓨터 게임이나 던전 앤 드래곤 게임의 이미지에 물든 피터 잭슨 버전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장면들은 비교적 ‘칼과 마법사’ 장르가 덜 고정된 시기에 발표된 랠프 박시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장면들과 상당히 다르다. 그렇다면 그건 잭슨 개인의 개성일까? 아니면 21세기 장르 애호가의 시선이 고정된 결과일까? 만약 톨킨 팬들이 잭슨의 비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 과연 그것이 긍정적이기만 한 걸까? 롤링의, 롤링에 의한 <해리 포터…> <해리 포터…>는 톨킨의 대척점에 서 있다. <해리 포터…>는 철저한 장르물이다. 장르의 기초를 다졌던 톨킨과는 달리 J. K. 롤링은 <해리 포터…>를 처음부터 기성품으로 만들었다. 단지 <해리 포터…>에서 주목할 것이 있다면 롤링이 기존의 장르 안에 얌전히 포섭되는 대신 몇몇 독립된 장르를 가져와 한데 묶었다는 데 있다. 적어도 <해리 포터…>에는 다음과 같은 장르들이 동시에 존재한다. 기숙학교물, 어린이 추리소설, 빅토리아 시대풍 멜로드라마, 영국식 판타지, 호레이쇼 앨저식 성공담, 기타등등 기타등등… <해리 포터…>가 ‘아동문학’이라는 사실은 종종 이상할 정도로 무시되고 있다. <해리 포터…>를 진지하게 비평하려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아동문학이라는 스티그마타를 뜯어내 이 작품을 ‘진지한 작품’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의무감에 젖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해리 포터…>가 아동문학이며 환상문학이라는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아동문학만큼이나 환상문학을 장르화시키고 지속적으로 보존한 장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트래버스의 <메리 포핀스> 시리즈, 캐롤의 <앨리스> 시리즈, 어슐러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를 보라. 심지어 톨킨의 장대한 세계도 <호빗>이라는 아동문학 작품에서 시작했다. 이런 작품들이 롤링의 <해리 포터> 시리즈에 끼친 영향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해리 포터…>의 창의성은 잘못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우린 <해리 포터…>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구체적인 선례들을 쉽게 끄집어낼 수 있다. 특히 질 머피의 <워스트 위치> 시리즈는 중요하다. 롤링은 마녀 기숙학교를 다룬 이 시리즈에서 호그와트의 기본 아이디어를 거의 그대로 끌어오고 있다. 80년대 중반에 텔레비전 영화로 제작되었고 최근 들어 미니시리즈로 제작된 이 작품의 각색 버전과 <해리 포터…>를 비교하는 것은 여러모로 유익하다. <해리 포터…>를 평가하면서 ‘칼과 마법사’ 물과 ‘마법학교 이야기’를 비교하는 것은 두 장르를 비교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대로 된 평가는 아무것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서툰 꼬마 마녀 밀드레드와 이마에 벼락 마크가 있는 운명의 영웅 해리 포터의 비교를 통해 얻어진다. <해리 포터…>의 영화화를 간섭하는 사람이 <반지의 제왕>의 간섭자들과 정반대인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반지의 제왕>은 수십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작품이 형성하고 다져놓은 장르와 장르 팬들의 소유가 되었다. <반지의 제왕> 영화화는 한 작가의 작품을 영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년 동안 조금씩 발전한 한 장르에 대한 집단의식적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는 작업이다. 하지만 아직 장르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적 없는 <해리 포터…>는 아직 이미 존재하는 조각들을 모아 재편성한 작가의 입김이 더 셀 수밖에 없다. J. K. 롤링이 엄격하게 영화의 충실도를 검사했던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해리 포터…>의 개성은 기존 조각들을 조립한 방식에 숨어 있으므로 영화감독의 자유를 허용한다면 결국 롤링을 떠난 전혀 다른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좋은 장르 영화대신 ‘J. K. 롤링’ 원작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직까지 작품을 소유한 작가가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작자와 팬들 사이에서 감독의 균형잡기 팬의 소유인가, 작가의 소유인가라는 차이는 <반지의 제왕>과 <해리 포터…>라는 두 시리즈를 갈라놓는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반지의 제왕>과 피터 잭슨쪽이 유리하다. 우선 아무리 수십년 동안 고정된 이미지라고 해도 미들어스의 이미지는 여전히 표현 폭이 넓다. 결국 톨킨이 창조한 것은 이야기라기보다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세상은 이야기보다 몸을 펼 구석이 넓기 마련이다. 피터 잭슨이 만든 미들어스는 분명 몇몇 관객의 맘에 들지 않겠지만, 그건 힐데브란트 형제가 그린 미들어스의 그림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피터 잭슨의 버전은 여전히 인정받을 수 있다. 그건 결국 자잘한 취향의 문제이다. 캐스팅 역시 마찬가지이다. <반지의 제왕>에서는 리브 타일러의 기용이 팬들의 분노를 일으켰는데, 일단 영화를 보면 리브 타일러도 꽤 괜찮다. 타일러의 엘프어 발음이 얼마나 좋은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여기서도 관객이 타협해야 할 것은 배우가 가진 기존 선입견이지 신성 모독 따위는 아니다. 사실 잭슨은 톨킨의 세계를 재창조하기 위해 열성팬들의 눈치를 봐야 할 이유도 없다. 이미 그 역시 수십년 동안 삭은 톨킨 팬이므로, 그가 창조하는 이미지는 어쩔 수 없이 일반 톨킨 팬들이 맘속에 품고 있는 이미지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 결과는 상당히 ‘주류적’이어서, <데드 얼라이브>의 감독에서 느낄 수 있는 팽팽한 개성은 느끼기 힘들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감독이 자신의 개성을 일부러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이 가진 비전을 구현하는 것이다. 잭슨은 그럴 수 있는 환경에서 작업하고 있다. 결과가 비교적 덜 개인적이라고 해도 그는 여전히 자유로운 예술가다. 하지만 <해리 포터…>의 영화화에는 그런 자유로움이 없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J. K. 롤링은 영화의 모든 면에 사사건건 간섭했다. 이런 간섭이 나쁘다고 만은 하지 않겠다. 크리스 콜럼버스의 <해리 포터…>가 지금만큼 유쾌한 판타지영화로 남을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는 롤링의 간섭 때문이다. 거의 그대로 사용된 롤링의 이야기는 여전히 흥미진진했고 영국인 배우들만을 기용하라는 것과 같은 고집스러운 요구의 결과도 상당히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사실 롤링의 야무지고 종종 냉정하기까지 한 유머는 할리우드식 가족영화와는 쉽게 융화되지 않는 것이어서 롤링이 사사건건 참견한 것도 이해가 가기는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간섭은 영화 자체의 힘을 어느 정도 빼놓고 만다. <해리 포터…> 원작의 진짜 매력은 찰스 디킨스가 썼을 법한 노골적인 멜로드라마에 영국식 메마른 위트를 뒤섞는 특유의 수법에 있었다. 영화는 줄거리나 대사 상당수를 그대로 가져왔고 할리우드식 감상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 냉정한 위트는 놓치고 만다. 위트와 유머는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어서 그냥 원작의 스토리만 가져와서는 잡아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베토벤의 7번 교향곡을 메트로놈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는 연주자, 이 경우는 최종 각색자와 연출자의 재량이 마음껏 발휘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최종 각색자와 연출자가 서슬이 퍼런 원작자의 감시 아래에서 작업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결국 자기 해석을 넣은 여유가 줄어들고 영화는 어느 정도 김이 빠질 수밖에 없다. <해리 포터…>는 훌륭한 어린이영화지만 최상의 각색은 아니다. 영화가 날아가기 위해서는 소유자가 어느 정도 굴레를 풀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J. K. 롤링에게 그런 여유를 바라는 건 지금으로서는 무리인 것 같다. 장기전의 개막, 누가 판타지의 절대강자가 될것인가? <반지의 제왕>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미 우리는 원작의 내용을 다 알고 있고, 잭슨이 삼부작의 세 작품을 하나의 영화로 취급하며 촬영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잭슨이 1편의 수준만 유지한다면 <반지의 제왕> 삼부작은 흥미로운 수작으로 남을 것이다. 문제는 연결되는 스토리의 장편영화를 상업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가이다. 과연 열린 결말로 끝나는 엄청 긴 장편 액션영화에 관객이 제대로 호응해줄 것이가에 따라 영화사의 운명이 결정되니까. 하지만 이건 영화사 사람들이 머리를 굴려야 할 부분이지 우리 같은 관객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장기 예측이 쉽고 단기 예측이 어려운 <반지의 제왕>과는 달리 <해리 포터> 시리즈는 단기 예측이 쉽고 장기 예측이 어렵다. 1편이 대단한 흥행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마 2, 3편까지도 마찬가지 호응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해리 포터> 시리즈는 아직도 미완성이다. 과연 롤링이 남은 세편도 같은 수준으로 유지시켜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배우들이 7년 동안 성장하면서 그만큼 성장을 보여줄지도 우리는 모른다. 관객이 거의 10년이 넘어가는 요란한 마케팅과 하이프를 견뎌낼 수 있을지도 우리는 모른다(이 점은 <반지의 제왕>이 유리하다. 유보되는 결말이 계속 우리를 기다리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다 고려한다고 해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앞길은 <반지의 제왕>보다 훨씬 험난하다. 대부분이 영화 자체보다는 영화사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3년 동안 우리는 이 두 작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하며 경쟁하는 것을 봐야 할 것이다. 그동안 두 영화를 비교하는 소리들도 끝도 없이 들어야 할 것이다. <반지의 제왕> 마케팅부에서는 이미 <해리 포터…>를 겨냥한 끝도 없는 홍보 문구를 뿌려대고 있다. 다음해에는 아마 <해리 포터…>가 비슷한 방법으로 반격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그런 비교에 말려들어야 할까? 지금까지 쓸데없이 긴 문장을 낭비해가며 두 작품들의 차이점을 비교해봤지만, 둘은 결코 이런 식으로 묶여 다루어져야 할 작품들이 아니다. 두 영화(또는 소설)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감상되고 비판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 영화사나 홍보사가 둘을 아무리 그럴싸하게 엮으려고 해도 그걸 무시하는 게 우리 같은 관객에게는 이득이 된다. 듀나 www.djuna.org▶ 듀나의 비교론 반지의 제왕 vs 해리 포터 ▶ <반지의 제왕>의 지난날, <해리 포터...>의 앞날

올해 눈에 띄는 `조연들`

올해의 스크린을 편안하게 만들어준 `빛나는` 조연으로는 기주봉, 공효진 외에 이원종, 유해진, 김수로, 송옥숙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자장면 배달부, <반칙왕>의 프로레슬러, <달마야 놀자>의 조폭 등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해온 김수로는 <화산고>에서 장혁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해 이젠 `조연 전문'이라는 딱지가 어울리지 않는 경우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형사, <반칙왕>에서 박상면의 연습게임 상대 레슬러로 얼굴이 익은 이원종은 <신라의 달밤>에서 영준(이성재)의 조직에 당한 뒤 치사한 복수를 꾀하는 경주 토착 조직의 보수 마천수로 나온다. 천연덕스런 사투리와 뻔뻔한 표정으로 이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은 그는 <달마야 놀자>에서 스님으로 둔갑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97년 극단 목화의 연극배우로 입문한 유해진은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용가리, <무사>에서 도끼를 잘 쓰는 도충으로 나왔으며, <신라의 달밤>에서는 두 조직을 한 번씩 배신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질박한' 외모가 배역의 특징을 저절로 드러내는 그는 새해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에서 억울한 용의자로 몰리는 용만으로 등장한다. 여자 조연 가운데는 단연 <라이방>의 송옥숙이 꼽힌다. 탤런트 출신인 송옥숙은 <낙지 먹는 여자> 등 텔레비전 베스트 극장에서 친숙한 연기자다. <학생부군신위> <개 같은 날의 오후> <아름다운 시절> 등 이미 숱한 영화에 출연해 주로 억척스럽거나 강인한 30∼40대 여성의 모습을 연기해온 송옥숙은 <라이방>에선 구멍가게 주인이면서 유한마담인 척 택시기사를 유혹하는, 바람기와 아둔함이 섞인 아줌마역을 능숙하게 소화해냈다. 조연들의 연기가 눈에 띈다는 건 작품을 빚는 손맵시가 좋아졌다는 뜻이다. 올해는 조연 배우들의 폭이 한층 더 넓어진 한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

[케이블 영화] 엑스맨

X-Men 2000년 감독 브라이언 싱어 출연 안나 파킨 1월1일(화) 밤 10시 영화 <엑스맨>의 재미는 묘한 곳으로부터 나온다. 초능력을 지닌 인물들은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을까.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예로부터 <슈퍼맨> 등 슈퍼히어로를 등장시킨 만화와 영화는 이 문제에 대해 너무 소홀한 감이 있었다. 초능력을 지닌 자들은 신비로운 출생과정을 거쳤으며 아무 고민없이 인류를 돕고, 막강한 괴력을 자랑하는 것으로 묘사되곤 했던 거다. 그런데 <엑스맨>은 다르다. 영화 속 초능력자는 이른바 ‘돌연변이’로 분류되어 세인들로부터 멸시당하곤 한다. 혹자는 그들을 격리시켜야 한다는 과격한 발언까지 일삼고,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취급한다. <엑스맨>은 블록버스터이지만 원작만화가 갖는 장점을 충분하게 스크린에 살려낸다. 캐릭터들이 갖는 콤플렉스와 자괴감, 그리고 정상적 인간에 갖는 거리감을 놀랄 만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유전자 기술의 거듭된 발전으로 돌연변이 엑스맨이 생겨나자, 상원의원 로버트 켈리를 중심으로 한 무리는 위험성을 주장하며 그들을 격리수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한다. 돌연변이들을 인류의 미래를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찰스 박사, 인간들을 응징하려는 매그니토는 서로 대립한다. 매그니토는 다른 사람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능력을 지닌 로그를 납치하려 들지만, 로그는 엑스맨들의 도움으로 위험에서 벗어난다. 스톰, 사이클롭, 염동력과 텔레파시 능력이 있는 닥터 진 등 엑스맨 무리에 기억을 잃어버린 전사 울버린이 합세하고 매그니토에 맞선다. <엑스맨>의 감독 브라이언 싱어는 <유주얼 서스펜트>와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 등의 전작으로 주목받았던 연출자. 선댄스영화제에서 이름을 알린 브라이언 싱어는 스릴러와 미스터리 등 특정한 장르물에 소질을 보이는 편이다. <엑스맨>은 여느 대작영화에 비해 스펙터클이 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엑스맨을 전혀 ‘황당하지’ 않은 존재로 묘사한 점은 이채롭다. 마치 현실 속 인물처럼 세심하게 캐릭터를 빚어낸 것.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1)

1999년 <당신의 나무>란 소설을 읽은 다음부터 필자는 자주 어둡고 흐린 하늘 아래, 거대한 나무와 뒤엉킨 채 서서히 퇴락해가는 앙코르와트의 사원을 상상했다. 그 소설에서 “거대한 석조 불상의 틈새에 뿌리를 밀어넣어 수백년간 서서히 바수어온 나무”를 본 다음이었다. 이 나무는 사원을 허물어뜨리는 동시에 지탱해왔다고 했다. 이 나무가 아니었다면 부서지기 쉬운 돌로 된 사원은 진작에 흙이 되었을 거라고, 나무와 사원은 이렇게 서로 얽혀 900년을 버티어왔다고도 했다. 그뒤 대체 어떤 극중인물이, 왜 그곳에 갔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나무만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비장한 이미지로 고정돼,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 글은 이미지로 남았다. 이 나무의 주선으로 소설가 김영하(33)를 만났다. 흔히 얘기되듯 그는 확실히 우리 문학에 없는 이야기를 풀어냈고, 무엇보다 그의 소설은 읽는 재미가 유별났다. 그리고 그는 올 초 <씨네21>에 ‘이창’이라는 이름의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칼럼은, 소설처럼 기존의 칼럼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감수성을 보여줬다. 그는 자기 주위에서 잡다하고 사소한 일들을 끄집어냈다. 말 그대로 신변잡기(身邊雜記)다. 이건 절대 폄하가 아니다. 이걸 폄하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대 담론이나 도덕적 엄숙주의에 너무 깊이 물들어 있는 자일 거다. 그는 우리 사회를 순식간에 병리적 공황상태로 몰아가는 사건들에 대해 얘기하는 대신, 경쾌하게 일상을 가로지르며 미세한 균열들에 확대경을 들이댔다. 그런 그의 칼럼은 신선했고 흥미로웠다. 나만이 아니라 <씨네21>을 만드는 사람들, 독자들도 그러했을 터이다. 한데 그가 기고 종료를 선언했다. 마지막 칼럼에서 그는 ‘짤렸다’라고 눙쳤지만, 사실 가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어쨌든 그가 <씨네21>을 짜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불러내 그 이유를 따져보기로 했다. 아니, 실은 그라는 사람이 많이 궁금했다. 나는 뽀다구나는게 싫다 왜 이창을 그만 쓰나. 이창 쓴 지 1년 됐는데 이젠 호흡이 긴 글을 쓰고 싶다. 칼럼은 호홉이 짧은데다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건 소설가랑 잘 안 맞는다. 소설은 애미함을 승인한다. 하지만 칼럼은 분명한 태도에서 감동이 온다. 그래서 칼럼은 문학적이지 않다. 재미있는 경험이었으나 오래 쓸 글은 아니었다. 진짜 신변잡기를 썼다. 18세기에 이덕무나 박제가 같은 한학자들이 신변잡기를 썼다. 이덕무의 <첨언소품>을 보면 책 읽다 향(香)자만 갉아먹은 책벌레를 잡아서 정말 그 벌레에게 향기가 나는지 봐야겠다는 얘기가 있다. 이들의 신변잡기 당대로서는 혁명이었다. 공맹, 군신관계, 사대부의 도덕을 논하던 시기에 그들의 신변잡기는 반역과도 같았다. 이덕무는 존재를 걸고 그런 하찮은 글을 썼던 거다. 그게 우리의 90년대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난 사소한 것의 정치학을 말하고 싶었다. 난 큰 이야기가 싫다. 왜 작은 것에서 우주를 본다고 하지 않나. 그러고 싶다. 주변에 대한 관심은 타고난 기질인가. 그렇다. 거창하고 대단하고 ‘뽀다구’나는 게 싫다. 그런 기질 때문에 갈등을 빚은 적은 없나. 많다. 난 여성적이다. 남자들을 별로 안 좋아한다. 정치, 축구, 도박을 싫어한다. 축구를 싫어하는 남자, 처음 봤다. 축구가 굉장히 남성적인 서사다. 11명의 남자들 두팀을 이뤄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한쪽 이기고 한쪽은 지고. 난 여자들 옷 사는데 따라다니길 좋아한다. 아내가 옷 사러 갈 때 몇 시간씩 돌아다녀도 즐겁다. 아내는 그런 내가 여자친구 같단다. 여자친구들은 내가 남자라는 걸 깜박할 때가 있다고들 한다. 난 남자가 많은 곳에 가면 불편하다. 여자들이 관계지향적인 데 반해 남자들은 지배를 원한다. 서열을 정하지 않으면 30분도 그냥 앉아 있지 못한다. 만난 지 30분 만에 선배라고 ‘영하야, 말 놔도 되지’, 이러는 거 너무 싫다. 한국 남성들은 그런 심성을 억압하도록 교육받지 않나. 성장기에는 상처 많이 받았겠다. 그랬다. 운동권 안에서도. 남성적으로 산다는 건 한마디로 정치적으로 산다는 거다. 그건 너무 피곤하다. 90년대 이후 최소한의 사람들과 최소한의 관계만 맺고 산다. 정치활동도 안 하고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고 어디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문단에서도 신경숙, 은희경, 배수아 같은 여성작가들과 더 친하다. “로맨스는 최고의 판타지” 김영하는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발표하면서 신세대 작가군의 대표주자로 주목받았다. 이 소설에서 그는 역사, 시대, 민족을 밀어내고 판타지를 두껍게 껴입은 현실을 빌려 죽음, 섹스, 에로티시즘을 이야기했다. ‘이미지 중심의 서사’ 또한 주목받았다. 기존의 한국문학에서 찾아보기 힘든 감수성의 출현이었다. 그뒤 최근작 <아랑은 왜>까지 그의 소설의 큰 줄기는 꺾이거나 변하지 않았다. 문학평론가 백지연은 그를 두고 “김영하는 영상 문화의 프리즘을 통해 현대적 일상성의 세계를 묘파한 소설들로 주목받는 젊은 작가이며, 이미지로 포착되는 일상 문화의 양상을 김영하만큼 감각적이고 매끄러운 서술기법으로 풀어내는 작가는 드물다”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산문집 <굴비낚시>도 펴냈다. 영화평과 에세이, 일기에 ‘애미하게’ 걸쳐 있는 그의 글을 그는 “자조적으로” 생선도 가공식품도 아닌 굴비에, 자신의 글쓰기를 굴비낚시에 비유했다. 개중에는 영화의 안으로 깊이 들어간 글도 있지만, 영화를 사유의 장으로 들어가는 문이나 삶을 뒤돌아보는 거울로 삼는 경우가 더 많다. 서문에서 밝힌 대로 “무중력에 상태에 비견될 만한 무억압 상태에서” 그는 자유롭게 상상한다. 신창원 검거 사건에서 <쇼생크 탈출>를 떠올리고, <부기 나이트>를 보고선 “텔레토비와 포르노는 한 배에서 나온 이란성 쌍생아”라는 다소 엉뚱한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그의 행보 때문에 제작자들은 시나리오를 맡길 소설가로 제일 먼저 그를 떠올렸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그는 <컷 런스 딥>의 이재한 감독과 함께 <개와 늑대의 시간>의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돼가나. 거의 끝나간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다. 한-미관계를 배면에 깐 정치적 액션영화라고 할 수 있다. 좀더 좁혀 말하면 탐정 누아르에 가깝겠다. 인간의 죄의식, 무기력, 사랑의 파멸적 속성에 관한 이야기다. 소설 쓰기는 혼자 하는 작업이라 외롭고 고독한데, 이번 시나리오 작업은 공동창작이라 즐거웠다. 평론가들은 ‘이미지 중심의 서사’를 당신 소설의 핵으로 꼽는다. 많은 사람들이 내 소설이 영상적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내 소설은 오히려 문학적이다. 96년에 <나는 나를…>의 판권을 동아수출공사에 팔았다. 그런데 결국 시나리오가 안 나왔다. 막상 그 소설엔 영화화할 요소가 많지 않다. 에세이의 성격이 강하고 사건이 많지 않아서 시나리오로 옮기면 재미가 없다. 사실 영화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말하지만 당신 소설은 쉽게 영화로 상상이 된다. 게다가 시나리오까지 써서 한국의 폴 오스터를 꿈꾸는 건 아닌가 했다. (웃음) 어휴, 내 소설을 시나리오로 각색하는 건 재미없다. 장편 쓰느라 일년을 고생했는데 시나리오 쓴다고 그 고생을 또 해야 하나. 내 소설은 의외로 고전적이다. 죽음, 질투, 분노 등 그리스극에나 나올 법한 고전적 주제를 다룬다. 히치콕도 그런 주제를 다루었다. 그래서 난 히치콕이 좋다. 영화가 싫다고 말은 하지만 실은 영화를 꽤 많이 본 것 같다. 당연히 봤으리라고 생각하는 영화들을 안 봤다. 예를 들면 <포레스트 검프>. 아직까지는 소설이 훨씬 좋고 매력적이고 재미있다. <스크린>에 글 쓰기 전에는 일년에 두편 봤다. 비디오도 보기 싫다. 대신 TV에서 하는 주말의 명화를 잘 본다. 그것도 채널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는 것이어서 영화 앞부분 내용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보면서 말도 많다. 그냥 영화려니 하고 봐줘야 하는데 ‘저건 말도 안 돼’ 하고 따진다. 그래서 영화광인 아내는 내가 영화를 싫어하는 사람 중의 하나에 들 거라고 핀잔준다. 영화는 2차원이고 소설은 3차원이다. 소설은 우리가 화면을 만들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지만 영화에는 우리가 개입할 차원이 없다. 감정이입할 여지도 별로 없다. 정우성처럼 잘생긴 배우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나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이겠나.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영화적인 소설이 나올 수 있나. 내 소설 보고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그건 순전히 텍스트가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다. 어렸을 때부터 이미지 떠올리기를 좋아했다. 영화학도들이 애기하듯 영상이 영상을 만들지는 않는다. 영상으로 영상을 사고할 수는 없다. 복제를 할 수 있을 뿐이다. 그건 잘해봐야 타란티노다. 거장들이 거장인 이유는 묵직한 주제와 그걸 밀어붙이는 힘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란>을 만들었던 것도 셰익스피어를 열심히 읽어서가 아니었을까? 영화평론을 글로밖에 할 수 없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나. 그건 영화로 영화를 평할 수는 없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영화엔 비판 기능이 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화 하는 사람들,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한다. 부인이 영화광이니까 아무래도 부인 따라서 극장에 가거나 비디오를 보게 될 텐데. 아내도 결혼 뒤에는 영화보다는 책을 많이 본다. 영화 보는 취향도 다르다. 아내는 공포영화나 엽기적인 영화를 좋아하는데 난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한다. 멕 라이언이 나오는 영화, 너무너무 행복하게 본다. 반면 신체훼손형 영화는 맘 편히 못 본다. 당신은 판타지 성격이 강한 소설을 쓰는 작가이고, 영화에서 호러는 판타지의 대표 장르인데, 모순 같다. 로맨스야말로 판타지다. 해피엔딩이야말로 가장 원초적 행복 아닌가. 내가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하는 건 어렸을 때 겪은 분리불안 때문인 것 같다. 엄마가 무서워서 그랬는지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있었다. 그런데 로맨틱코미디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지만 끝내 행복하게 결합하는 남녀를 보면 분리불안이 해소된다. 로맨틱코미디를 좋아하는 남자들, 영화 보면서 심리치료를 하는 거다. 그런 남자를 유치하다고 공격하면 안 된다. 나 같은 사람은 김기덕 영화 보면 안 된다. ▶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1) ▶ 쾌락주의자 김영하와의 잡담, 농담, 진담 (2)

part2 유운성이 건진 아까운 걸작

섹슈얼 이노센스 The Loss of Sexual Innocence 감독 마이크 피기스 주연 줄리언 샌즈, 새프론 버로즈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크림 마이크 피기스의 영화를 볼 때엔, 조금쯤은 의혹의 시선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영화는 뭔가 실험적인 것 같기는 한데 어딘지 모르게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다. 아마 이런 느낌이 가장 덜한 영화는 <브라우닝 버전>이었을 테지만 그건 또 지나치게 평범하고 점잖은 이야기였다. 라틴어를 가르치는 노교사와 그의 어린 제자간의 따뜻한 우정. 짐작건대 스스로의 유년 시절에서 소재를 끌어온 것인 듯한 <섹슈얼 이노센스>는 아예 거의 스토리는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이미지들의 흐름을 따라 자유로이 전개되는 영화다. 성적 모험기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펼쳐지는 한편, 아담과 이브의 우화가 지극히 탐미적인 영상을 통해 재구성된다. 결국 신화의 인물들은 점점 현실적 공간으로 이동해오고 현실의 인물들은 너른 사막을 배경으로 한 신화적 공간 속에서 파국을 맞이한다. 일디코 엔예디의 <나의 20세기>와 키에슬로프스키의 <베로니카의 이중생활>이 적절히 섞인 듯한 한 쌍둥이의 이야기가 갑자기 개입해 들어오면서 우리를 의아하게 만드는데, 결국엔 하나의 내러티브 안으로 무리없이 통합되는 걸 보면 피기스의 재능이 그래도 범상치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넬리 앤 아르노 Nelly & Monsieur Arnaud 감독 클로드 소테 주연 에마뉘엘 베아르, 미셀 세로, 장 위그 앙글라드 제작연도 1995년 출시사 엠브이넷 영화를 좋아하는 주변의 친구들과 이야기하면서 단 한번도 클로드 소테에 관한 언급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영화는 골수 작가주의 영화광들에게는 영 밋밋한 것일 터이고, 영화란 자고로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썰렁하기 그지없는, 그야말로 오갈 데 없는 프랑스영화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본 그의 멜로드라마 몇편은 개인적으론 최고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막스 오퓔스의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데이비드 린의 <밀회>, 그리고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 등과 함께 그의 영화는 영화를 보는 내내 줄곧 공감의 끈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소테의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낭만주의가 완전히 거세된 모더니즘 이후의 멜로드라마이다. <금지된 사랑>의 주인공 스테판은 사랑이란 없으며 오직 게임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금지된 사랑>처럼 <넬리 앤 아르노>에서도 이른바 비극적 사랑이라는 낭만적 유희란 존재하지 않으며, 사랑의 도피란 말 그대로 영화에나 나올 법한 것이 된다. 또한 해피엔딩도 비극적 결말도 없으며 오직 관계의 재구성만이 있을 뿐이다. 무언가 놓쳐버린 것, 지나간 것을 아쉬워하지만 결코 크게 동요하지는 않는 인물들을 엄격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룸으로써 소테는 역설적이지만 진정 ‘즐거운 인생’을 느끼게 해주는 감독이다. 혐오 Repulsion 감독 로만 폴란스키 주연 카트린 드뇌브, 이언 헨드리, 존 프레이저 제작연도 1965년 출시사 9FILM 올해 출시된 영화 가운데 가장 반가운 영화. 대학 시절 나로 하여금 감탄을 내뱉게 만들었던 두편의 폴란드영화는 안제이 바이다의 <재와 다이아몬드> 그리고 폴란스키의 <물 속의 칼>이었다. 폴란스키는 초기에 만든 영화들에서 인물들을 부조리한 상황으로 내몰고는 거기서 묘한 웃음을 끌어내는 재능- 이 점에선 <궁지>가 단연 압권이다- 을 선보였는데, <혐오>는 이런 그가 정색하고 달려들 때 영화가 얼마나 소름끼치는 것이 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영화다. 최근작 <나인스 게이트>는 그 강도는 덜하지만 그래도 초반 30분간은 훌륭하다. 원 프롬 더 하트 One from the Heart 감독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주연 프레데릭 포레스트, 테리 가, 나스타샤 킨스키, 라울 줄리아 제작연도 1982년 출시사 파워 오브 무비 발표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영화가 왜 갑자기 출시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반가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 시리즈나 <지옥의 묵시록> 정도의 영화를 기대하면서 <원 프롬 더 하트>에 접근한다면 낭패보기 십상이다. 이 영화는 코폴라가 80년대에 만든 자잘한 범작과 실패작들의 첫머리에 놓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하지만 돌이켜보면 <아웃사이더>나 <터커> 등은 그리 나쁘진 않다). 오히려 코폴라보다는 음악가 톰 웨이츠의 팬들이 더 반길 만한 영화라는 생각이 드는데, 소주 한두어병 걸치고 나면 나올 목소리로 묘하게 심금을 울리는 웨이츠의 광팬이라면 만사 제치고 봐도 괜찮을 영화. 인페르노 Inferno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 주연 이렌느 미라클, 레이 매클로스키 제작연도 1980년 출시사 빅스 몇몇 사람들이 그토록 무섭다고 말한 <서스페리아> 같은 건 사실 어이가 없다 못해 낄낄거리며 봤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를 보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게 웬만한 코미디영화보다 더 우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리오 바바의 <사탄의 마스크> 같은 영화가 소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르젠토의 이 영화는 제법 볼 만한 고딕호러 가운데 하나다. 양식화된 세트와 조명- 광원이 무엇이냐 따위는 절대로 묻지 말 것- 을 통해 잔뜩 분위기를 고조시키다가는 난데없이 잔혹한 난도질을 선보인다. 아나모픽 렌즈를 이용해 촬영한 영상을 그대로 텔레시네하는 바람에 화면이 위아래로 길게 늘어져 보이니 이를 감수하고 볼 것. 치즈케, 블랙커피 No Looking Back 감독 에드워드 번즈 주연 에드워드 번즈, 로렌 홀리, 존 본 조비 제작연도 1998년 출시사 폭스 원제 ‘No Looking Back’을 이렇게 바꿔놓은 이유가 궁금해지는 영화. 여주인공이 식당 웨이트리스라서? 영화를 잘 보다보면 전개방식이 꽤 흥미롭다는 걸 알게 되는데, 처음엔 고향에 돌아온 한 남자의 연애담처럼 보이다가 점점 그의 옛 애인인 여자의 자아발견에 관한 이야기로 옮아가는 것이다. 즉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가 주인공을 달리하는 셈이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소도시 공동체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다룬 미국영화들이 꽤 재미나게 다가온다. 존 본 조비가 남자 주인공의 친구이자 연적으로 등장한다. 스크리머스 Screamers 감독 크리스천 더과이 주연 피터 웰러, 로이 듀피스 제작연도 1995년 출시사 SKC 우연히 보게 된 B급 공상과학영화. 극중에서 스크리머스란 사람이 가까이 가면 갑자기 튀어올라 공격을 가하는 무시무시한 대인지뢰의 이름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기계장치가 자가 진화를 거듭하여 인간과 완전히 똑같은 외양을 갖추게 됨으로써 인간들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점. 특히 주인공이 소년의 모습을 한 변종 스크리머스를 만나게 되는 장면은 정말이지 섬뜩하기 짝이 없다. 사실 영화가 지닌 흥미의 대부분은 원작소설에서 연유한 듯한데 원작은 필립 K. 딕-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자- 의 단편 <두 번째 변종>으로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바 있다. 에디 머피의 라이프 Life 감독 테드 드미 주연 에디 머피, 마틴 로렌스, 네드 비티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콜럼비아 여기서 같이 소개하는 에드워드 번즈의 <치즈케, 블랙커피>가 마음에 든 사람들이라면, 그보다 훨씬 매력적인 테드 드미의 <뷰티풀 걸> 또한 반드시 한번 보기를 권한다. 재미로 따지자면 <라이프>는 <뷰티풀 걸>에 한참 못 미친다. 다만 여타의 영화들에서 엄청나게 빠른 수다로 우리의 넋을 빼놓았던 두 흑인배우가 여기선 적절한 수준에 머물면서 제법 연기자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기서 제목 <라이프>는 두 주인공의 인생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극중의 그들이 처한 상황 즉 ‘종신형’을 지칭하는 것. 뛰는 백수 나는 건달 Office Space 감독 마이크 저지 주연 론 리빙스톤, 제니퍼 애니스톤 제작연도 1999년 출시사 폭스 정말이지 제목 죽이는 영화다(새삼 출시사들의 유머에 감탄하는 바이다). 이것도 제목이 하도 괴상해서 호기심에 빌려본 비디오 가운데 하나이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영화는 <비비스와 버트헤드>로 이미 우리에게 소개된 바 있는 마이크 저지가 만든 극영화이다. 여기서 마이크 저지는 다분히 상황에 기댄 유머를 선보인다. 흡사 만화책의 컷 구성과 유사하다고 해야 할까. 굉장히 느린 페이스의 영화인데 어느 순간(약간은 어이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폭소를 터지게 하는 힘이 있다. 직장생활에 지친 이들을 위한 영화판 ‘무대리’. 철십자 훈장 Cross of Iron 감독 샘 페킨파 주연 제임스 코번, 맥시밀리언 셸, 제임스 메이슨 제작연도 1976년 출시사 영화랑 물론 이 영화는 국내에서 개봉되기도 했고 오래 전에 비디오로 출시까지 되어 잘 알려진 영화다. 하지만 굳이 여기서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철십자 훈장>이 올해 새로 출시된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금쯤 다시 한번 페킨파의 영화들을 되씹어볼 것을 권유하기 위해서이다. 페킨파의 영화는 <고원을 달려라>와 <케이블 호그의 발라드> 등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출시되어 있다. <메이져 던디> <와일드 번치> <어둠의 표적> <게터웨이> <관계의 종말> <가르시아> <킬러 엘리트> 그리고 <오스타맨>까지(모두가 출시된 지 상당기간 지난 것들이라 미처 리스트에 포함시키지 못한 영화들임). 유운성/ 영화평론가▶ part1 김봉석이 뽑은 B급영화 ▶ part2 유운성이 건진 아까운 걸작 ▶ part3 손원평이 사랑하는 드라마

[파리통신] 2001, 좋았던 마지막 해?

비방디 유니버설, 합병통해 메이저로 부상할 가능성 높아져 작가영화 제작에 적신호 2001년은 프랑스영화 재생의 한해였다. 1986년까지 40%를 상회하다 이후 27%까지 떨어졌던 프랑스영화 시장점유율이 처음으로 다시 40%를 넘어섰고 1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프랑스영화가 19편이나 됐다. 극장을 찾은 관객 수도 2000년에 비해 11%가 늘어났고 프랑스영화를 본 관객의 80% 이상이 만족감을 표시했다. 지루하고 말 많은 영화로 소문나 외국시장에서 경쟁력이 없던 프랑스영화가 <아멜리에>를 선두로 미국시장에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물론 축제 분위기 속에서 우려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대성공을 거둔 영화들의 대부분이 프랑스영화 평균제작비인 1500만∼4천만프랑을 훨씬 넘어서는 블록버스터 오락영화인지라 중소규모 작가영화들의 제작여건은 더 악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 또 프랑스 오락영화의 대성공에 밀려 외국의 작가영화들은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 점을 들어 앞으로 이런 영화들의 배급시장이 더욱 축소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렇지만 들뜬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깨놓은 것은 지난해 12월17일 비방디 유니버설이 미국 USA 네트워크의 일부를 합병했다는 소식이다. 이 합병으로 비방디 유니버설은 미국에서 영화와 방송의 새로운 메이저로 부상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게 됐다. 프랑스의 문화적 예외주의의 종언을 선언하며 세계화를 부르짖는 비방디 유니버설과 프랑스영화계의 이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은 프랑스영화의 가장 중요한 투자자인 유료채널 카날플러스가 지난 2000년 비방디 유니버설에 합병됐기 때문이다. 84년 설립된 첫 유료채널인 카날플러스는 프랑스 방송위원회(CSA)와 영화진흥위원회(CNC)의 조정 아래 결정된 협정에 의해 방영영화의 60%를 유럽영화(이중 40%가 불어권 영화)로 채우고 총사업액의 20%를 영화에 투자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이 공생관계 덕에 다양한 프랑스영화, 특히 중소예산의 작가영화들이 꾸준히 제작될 수 있었던 것. 영화관계자들의 걱정은 협정이 만기되는 2004년 이후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세계화를 꿈꾸는 미디어제국의 한 계열사가 된 카날플러스가 지금과 같이 프랑스영화에 투자할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와 문화예술지 <텔레라마>는 최신호 표지로 <아멜리에>의 주인공 아멜리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담았다. 더없이 좋았던 2001년 프랑스영화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사족처럼 웃는 모습 옆에 `혹시 좋았던 마지막 해?`라는 질문이 붙어있는데, 이건 많은 영화인들의 의구심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파리=성지혜 통신원

[로마 리포트] 15년간의 꿈, TV로 실현하다

타비아니 형제 TV용 영화 <부활> 방영, 비평·흥행 모두 성공적 <빠드레 빠드로네>(1977)로 이탈리아영화를 세계에 알린 거장 파올로·비토리오 타비아니 형제의 신작이 공개됐다. 그들의 새 영화가 주목을 끄는 것은 작품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이 영화가 텔레비전 자본으로 만들어져 극장이 아니라 TV를 통해 개봉됐기 때문이다.지난해 12월26일 프랑스 텔레비전으로 처음 공개된 <부활>(Resurrezione)은 타비아니 형제의 말처럼,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아끼듯 우리가 애정을 갖고 있는`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의 소설인 <부활>을 영화화한 것이다. 영화는 원작에서처럼 순수한 여인 카추샤가 귀족 디미트리와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서 잊혀진 뒤 결국 윤락녀로 좌절하며, 살인누명을 쓰고 선 법정에서 디미트리를 다시 만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이탈리아 국영방송에 속한 라이(Rai)픽션이 60억리라를, 그리고 프랑스의 팜파프로덕션과 독일의 바르바라필름이 50억리라를 대는 등 총 110억리라의 공동투자를 통해 제작됐다. 3시간2분짜리 이 작품은 4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촬영됐다.파올로·비토리오 타비아니 감독은 “15년간 <부활>을 영화화하길 원했다. 하지만 기획단계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부담이 됐던 것이 바로 상영시간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TV픽션을 선택했다. 텔레비전용 영화를 만드는 것을 절대 양보나 외도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우리가 간직했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큰 가능성이라고 여겼다. 또한 시간이 충분하다는 것을 느끼며 촬영할 수 있다는 점이 만족스러웠다. 관객이 작가들을 이해할 수 있는 큰 장점을 TV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매우 큰 만족감을 표시했다. 또 이들은 “<부활>은 톨스토이 작품 중 최고는 아니다. 완벽하지 않은 작품이기에 더욱 애착이 갔고, 그렇기에 우리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부담없이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영화`라는 악평을 받았던 99년작 <너는 웃지>(Tu ridi)와 달리, 비평계 역시 타비아니 형제의 이번 작품에 대해 큰 호응을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비평뿐 아니라 흥행에서도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라이방송사는 1월14일과 15일 황금시간대인 저녁 8시50분에 이 영화를 방송했는데, 이틀 동안 688만7천여명이 시청하는 성공을 거뒀다.영화에 대한 방송사의 지원은 현재 이탈리아 국영방송을 중심으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번 작품 역시 라이방송사가 기획안을 받은 뒤 2년 동안 준비해 발표된 것으로,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을 위해 많은 시간과 진행비를 투자하는 유럽 방송계의 흐름을 보여준다. 타비아니 형제 역시 이번 TV와의 공동작업이 성공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들은 차기작 역시 라이방송사와 함께, 나폴리의 여성 혁명가 루이사 산펠리체를 소재로 한 두바스의 소설을 영화화할 것이라고 발표해 많은 기대를 받고 있다.로마=이상도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