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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클로즈 업] 순자는 벗어나고 싶다 절박했던 나처럼

이상우 감독은 국내의 한 유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자신에 관한 별별 흉측하고 해괴한 말들이 오갔음을 전하면서도 언짢기는커녕 도리어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는다 .“감독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거다 등등 별 얘기가 다 있더라고요.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늘 말하지만 무플보다는 악플이 저는 더 좋아요.” <엄마는 창녀다> <아버지는 개다> 같은 선정성 짙은 그의 영화가 그런 나쁜 소문을 만들었을 것이다. 보통 변태 감독 이상우로 통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 <바비>는 나신 하나 없는 영화이며 게다가 어린 소녀들이 등장하는 영화다. 변태 감독과 입양아 소녀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인가, 궁금했다. -뭔가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영화 한국을 만나다’ 프로젝트 중 한편이었다. 한국의 도시 한 군데를 정해서 그 도시를 배경으로 찍는 프로젝트인데 포항은 아직 안 했더라. 그런데 나 같은 극악무도한 감독이 찍는 바람에 포항이 무슨 불법 입양의 본거지처럼 보이게 된 거다. (웃음) 김새론, 김아론 나오는 영화니까 훈훈한 이야기일 거라고 예상들 했었는지 처음에 시사하고 나서는 관계자들 표정이 안 좋더라. 이탈리아 지포니영화제에서 상을 탄 다음에 그런 분위기가 반전됐다. -주인공이 이천희다. =이천희씨가 어느 날 텔레비전으로 내 영화 <엄마는 창녀다>를 볼까 말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저런 극악무도한 영화가 다 있냐고 생각했단다. 그런데 그 다음날 <바비> 시나리오가 간 거다. 인연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동안 착한 역할만 너무 해서 악역이 하고 싶었고 이 역할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김새론, 김아론, 아역 스타(?) 배우들이 출연한다. 의외다. =처음에는 새론이 어머니가 허락도 안 할 줄 알았다. <엄마는 창녀다> 만든 감독한테 누가…. 그런데 놀랍게도 한다고 하더라. 처음에는 새론이 동생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아론이가 같이 온 거다. 아론이는 원래 배우 할 생각도 없고 걸그룹 되는 게 꿈이라더라. 그런데 같이 하자고 꼬인 거다. 그렇게 해서 언니 순영은 새론, 동생 순자는 아론이 하게 됐다. 친자매이기를 처음부터 원했다. 배우 구인광고 낼 때도 그렇게 냈었고. 내가 만든 첫 번째 연소자 관람 영화가 될 거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등급 받는 날 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청소년 관람불가로 되어 있었다. 왜 그랬을까. 내 생각에는 그동안의 영화 때문에 괘씸죄, 뭐 그런 것에 걸린 것 같다. -감독 본인이 잠깐 출연한다. 아이한테 추태 부리는 남자로. =말도 마라. 그날 새론이가 울고불고 말도 아니었다. 물론 그게 다 내 연기가 훌륭해서라고 생각은 한다. (웃음) 나이 많은 스탭들에게 많이 혼났다. 왜 애를 울리냐고. 실은 새론이가 이 부분 보고 놀랄까봐 미리 정해진 대사 없이 애드리브로 갔다. 결국에는 영화 속 순영이 아버지에게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맞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 세게 맞아서 한 시간쯤 촬영을 못할 정도였다. (웃음) 실은 지적 장애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딸을 지켜주는 장면을 하나쯤 넣고 싶었다. 그래서 그 장면이 꼭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이 가족을 보여줄 때 느낌이 좋은 장면이 하나 기억난다. 카메라가 가족을 전면에 놓고 서서히 뒤로 빠져 집 바깥으로 나가는 장면이다. =환상처럼 찍으려고 했다. 그렇게 카메라가 문을 벗어나는 걸 환상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다 악당인 작은아빠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는 거다. 트랙 아웃해서 찍었는데, 예전에는 트랙을 깔 돈이 없어서 못 해본 거다. 내 돈이 아닌 돈으로 영화를 찍는 행복감을 이번 영화에서 처음 느껴봤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소재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꼭 아메리칸 드림이라기보다는, 그게 순자가 그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고 싶어서 가진 생각 중 하나다. 내가 학교가 싫어서 극장에 간 것처럼 순자의 경우는 그게 미국인 거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각자의 탈출구가 있지 않나. 나도 한국에서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국에 간 거다. 절박했다. 순자도 나처럼 절박하다. 이 영화를 처음 생각했을 때부터 순자가 내 관심이었다. 그래서 실은 새론이에게도 처음에는 순자 역할을 제안했었고. 지금은 아론이의 연기가 나의 후진 연출력을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하는 작품이 많을 거다. 조선시대 성형의사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가제는 <조선 성형의 꽃>이다. 1월부터 시나리오만 10개월째 고치고 있다. 나의 첫 상업영화가 될 거다. 그리고 기존에 촬영한 <지옥화> <나는 쓰레기다>가 있고 <발기의 끝>이라는 영화도 촬영했다. <바비> 끝나면 차례로 개봉해야지. 무엇보다 관객이 많이 보는 영화를 하고 싶다.

[박시후] 아직 잘 모르는 사내

영화배우 박시후라니. 낯설었다. 지난해 겨울 <내가 살인범이다> 영풍문고 시퀀스 촬영현장에서 박시후를 만났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잠깐. 오해하지 말자. 그가 스크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한 생각은 절대 아니니까. 박시후 하면 드라마 <역전의 여왕>(2011)이나 <공주의 남자>(2011) 등 텔레비전 화면 속 그가 익숙한 게 사실이다. 그 역시 자신의 첫 영화 출연이 다소 낯설게 느껴지나보다. 스튜디오의 벽에 붙은 여러 배우들의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사진기자가 찍은 테스트 컷을 꼼꼼하게 확인하는 등 난생처음 경험한 표지 진행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이다. “홍보 활동도 시작됐고. 거리에 영화 광고도 많이 하더라. 관객 반응도 궁금하고. 첫 영화라 그런지 무척 설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남자. <내가 살인범이다>에서 박시후가 연기한 이두석은 이상한 연쇄살인범이다. 공소시효가 지난 뒤 자신의 살인 행각을 담은 <내가 살인범이다>라는 제목의 참회록을 들고 대중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돈방석에 앉고 싶어서? 아니면 대중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싶어서? 그의 속내를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이두석이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배우로서 이두석은 날마다 만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 건 분명하다. 박시후가 자신의 첫 영화로 <내가 살인범이다>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라고 한다. 그러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 출연이 썩 내키진 않았다고. 당시 막바지 촬영 중이었던 사극드라마 <공주의 남자> 종영 이틀 뒤가 영화의 크랭크인 날짜였기 때문이다. “말이 안되는 상황이었다. (웃음) 보통 크랭크인 한두달 전에 캐릭터를 준비하잖나. 드라마 때문에 체력도 바닥났던 터라 쉬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고사하려고 했다. 그런데 슬쩍 흘려준 영화의 줄거리를 듣고 시나리오를 읽어봤다. 재미있더라. 실제로 그런 살인범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이야기 안에서 캐릭터에 공감이 많이 갔다. 또 정재영 선배도 하신다니까 그분께 살짝 묻어갈 수 있겠다 싶기도 했고.” 다소 무리한 촬영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과감하게 모험을 택했다. 대사와 행동을 밖으로 내지르는 모습이 특징인 최형구(정재영) 형사와 달리 이두석은 외부의 자극에 거의 반응을 하지 않는 포커페이스 같은 역할이다. 이두석이 거의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평소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 무표정일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사실 멍때리고 있는 건데. (웃음)” 평소 자신의 습관 혹은 얼굴이 이두석의 얼굴을 만드는 데 반영이 된 것이다. 캐릭터도 캐릭터이지만 한편의 영화를 경험했다는 사실이 배우로서 큰 공부가 됐다고 한다. “드라마와 많이 다르더라. 드라마는 빨리 찍는 반면 영화는 한 신을 몇 시간씩 촬영하더라. 감정과 호흡을 계속 유지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몰랐다.”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첫 작품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뿌듯함이 더 많이 느껴진다. “물론 일정 때문에 미리 준비하지 못해 아쉽기도 하다. 그럼에도 고생도 많이 했고, 첫 작품이라 애착도 많고. 솔직히 만족스럽다. (스크린의 자신의 모습이 낯설진 않더냐고 묻자) 잘 나오던데? 안 낯설더라.” 그의 차기작은 12월 방영예정인 SBS 주말드라마 <청담동 앨리스>로, 세계적인 명품유통회사 회장을 맡아 문근영과 호흡을 맞춘다. 캐릭터가 재벌이라 ‘엄친아’ 같은 이미지가 떠오르던 중, 박시후가 “망가지는 모습이 많을 거”라고 성급한 추측을 막는다. 12월은 아직 멀었다. 어쨌거나 TV 스타의 곱상하고 작은 얼굴이 큰 스크린으로 옮겨가 희대의 살인마가 된 건 흥미로운 변화인 것 같다. <씨네21> SNS를 통해 받은 독자들의 질문 -사이코패스를 연기할 때 롤모델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있었다면 누구였고, 왜? _ yodnic22(트위터) =없었어요. 드라마가 끝나자마자 바로 촬영 들어가야 하는 일정이라 롤모델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다만, 사이코패스와 관련한 인상적인 배우는 있어요. <프라이멀 피어>의 에드워드 노튼. 영화 내내 속내를 감추고 있다가 한순간에 돌변하는 연기가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언젠가 저도 그런 연기를 해보고 싶어요. -입술색 관리 방법이 따로 있나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붉고 매혹적인(!) 입술색을 가질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_ 밀티크(미투데이) =(정재영이 박시후의 입술을 잠깐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한데, 입술을 따로 관리를 받거나 그러진 않아요. (웃음)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로이킴, 데프콘 혹은 김건모

로이킴의 인기가 나날이 치솟고 있다. 데미안 라이스의 노래를 불렀던 예선전 때부터 그를 점찍었던 사람으로서 지금의 인기가 반갑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주목을 끌 만한 폭발적인 가창력은 없지만, 목소리가 좋아서 어떤 노래든 잘 소화해내는 것 같다. 결승전을 앞둔(이라고 쓰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3강만 확정된 상태다. 당연히 결승으로 가겠지!) 지금까지의 베스트는 <서울의 달>이었다. <서울의 달>이 이렇게 달착지근한 노래였던가, 새삼 감탄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의 달>을 부른 또 한명의 가수가 있다. <황금어장-라디오스타>에 출연해 군입대를 앞둔 ‘마이티 마우스’의 ‘상추’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해야 한다는 본분을 망각하고 오로지 김건모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절실한 마음으로 <서울의 달>을 부른 ‘데프콘’이다. 서울에서의 힘든 시절 얘기를 한참 하다가 <서울의 달>을 부르는데 음정은 어찌나 오락가락이고, 돼지 멱 따는 소리는 얼마나 처절하던지, 아, 이런 것도 <서울의 달>의 또 다른 맛이구나 싶어 마음 한켠이 찡했다. 로이킴의 노래가 와인을 마시며 바라본 서울의 달이라면 데프콘의 노래는 소주를 두병 정도 마시고 바라본 서울의 달이랄까. 원곡을 부른 김건모는 딱 중간 정도였던 것 같고…. 서울의 달 아래에서는 참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서울의 달’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노래보다도 김운경의 드라마가 먼저 생각난다. 이른바 ‘본방사수’를 하면서 본 첫 드라마가 <서울의 달>이었고, 홍식이와 춘섭이의 인생 드라마에 깊이 감화돼 드라마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최근에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는데, 역시 재미있더라). 아무리 우물을 파도 재능이 드러나지 않아 드라마작가가 되는 길은 포기했지만, 드라마를 쓰는 게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소설에서도 인물이 중요하지만 드라마는 인물로 시작해서 인물로 끝나는 장르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그리지 못하면 드라마는 실패로 끝날 확률이 높다. 드라마를 쓰기 위해서는 인물을 이해해야 하고, 그 인물에 공감해야 하고, 그 인물을 살아야 한다. 아집과 오기와 패기와 객기가 이상한 비율로 혼합믹스돼 단단한 돌덩이 같았던 이십대의 내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도 좋은 드라마를 보고 나면 좋은 사람을 만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이야기의 본질은, 어쩌면 사람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고 소설을 읽고 연극을 보고 영화를 보고 수많은 이야기들을 찾아 헤매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해해야 다른 사람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 거울인 셈이다. 서울의 달 아래에서 각자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텅 빈 가슴 안고 살아가지만’ 때로 서로의 거울이 되어, 함께 살아가고 있다.

[김소희의 오마이이슈]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이혜훈 언니가 여성할당이 아닌 선출로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됐다. 2등으로. ‘박근혜 아우라’를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결과일지 모르나, 경제 문제에 집중해온 것이나 친박으로 일관되게 처신해온 것도 언니의 정치력이라면 정치력이다. ‘잡음없는’ 새누리당 전당대회를 보며, 이 사람들 참으로 담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줄로 줄 잘 서고 잘 세운다. 불법사찰의 ‘머리’인 VIP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고 VIP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이들이 줄줄이 쇠고랑 찼지만, 당명과 잠바 색깔을 바꾼 새누리당에는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줄도 잘 서고 편도 잘 나눈 덕이다. ‘돈으로 뭉친 사익집단’인 ‘친이’ 따위는 개가 물어간데다(무는 척만 하나?), 충성도에 따라 ‘친박’, ‘범박’, ‘비박’ 가르마 타고 이익을 배분하면 되니, 정책이나 명분, 철학 따위로 다툴 필요도 없다. 어쩌면 새누리당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운 때인 듯하다. VVIP 1인 치하의 이런 깔끔 담백함과 지금이 21세기라는 것이 참으로 엇박자라는 것 외엔. 동네 건물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눌 일이 있었는데, 이분은 박근혜 지지자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고단해서란다. 박정희 시대에는 그래도 열심히 일하면 생활이 나아졌는데 지금은 한치 앞이 안 보인다고 했다. 최근 <한겨레> 창간 24돌 기획 ‘가난한 민주주의’를 보면, 경제적으로 하층에 속한다는 사람일수록 새누리당 지지세가 강했다. 빈곤층일수록 정보도 빈곤했다. 대부분 텔레비전을 통해 얻는다. 한달 2만~3만원의 인터넷 사용료도 큰 부담이 되는 탓이다. 정보 격차의 현주소다. 무엇보다 하루 벌어 하루 먹느라 정보를 취사선택할 시간도 기력도 없다. 박근혜 시대가 된들 생활이 나아지리라 믿진 않지만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게 아주머니의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한때는 일하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겠다던 정당이 묵은 고름 짜내듯 극심한 진통을 하고 있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낀다. 이 정당의 시즌2를 도모하며 당원 가입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지는 먹고 튀어도 VIP는 침묵하는 나라에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이익과 정반대의 선택을 하는 것을 보며, 소신 때문이건 절박함 때문이건 깃발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앞서서 가지 않아도 된다. 부디 제대로 가자.

[SO WHAT] 장님이 눈먼 말을 탄다면?

간만에 버스 안에서 <나는 꼼수다>를 들었다. ‘봉알단, 정우택 음모, 터널 디도스’라는 부제를 단 ‘봉주 22회’였다. 듣다보니 뭐랄까? 수업 중에 멍때리고 있다가 담임한테 분필로 마빡을 맞은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 돋는다. 터널 디도스라니? 난 처음엔 또 무슨 새로 나온 악성코드 같은 건가 싶었다. 알고 보니 지난해 4.27 국회의원 재/보선 때 새누리당 김태호 후보쪽이 유시민에게 날린 1억원짜리 하이킥이었던 거다. 나 참, 이걸 이제야 주워듣다니. 오만상을 찌푸려가며 생각해보니, 가만 이거 참 절묘한 말이다. 디도스, 분산공격과 좀비 PC, 그리고 비정상적인 트래픽의 폭주로 인한 마비. 누가 지었는진 몰라도 천재다 천재. 낮에는 카니발로 고령의 유권자들을 실어나르고, 저녁에는 창원터널의 교통 체증을 유발해 젊은 유권자들이 제 시간에 투표장에 도착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공작. 그래서 ‘터널 디도스’. 이 희한하고 뻔뻔한 사건에 대부분의 언론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사실에 울화통이 터진다. 이런 뻔뻔함은 도대체 어디서 파나? 돈 있으면 나도 좀 사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뉴스는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인데, 세상 참 속 편하게 살았다. 얼른 집에 가서 텔레비전을 발로 차버려야지. 이놈은 다름 아닌 내 눈을 가린 헝겊이고, 이거야말로 병신이 따로 없는 세상을 위한 혓바닥 아닌가? <남영동1985>에 이런 장면이 있다. 고 김근태 의원을 모델로 한 주인공에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고 있는 현장에서 형사들이 태연하게 야구 중계를 듣는 장면. 움찔했다. 화사한 태양 아래 환호하는 관중은 바로 나의 모습. 모르긴 몰라도 그 시절 수많은 국민이 나만큼이나 평온하기 짝이 없는 일상을 보냈을 것이라 위안도 해보지만, 영문도 모른 채 야만을 향해 달려갔던 건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 민주화를 열망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남영동1985>나 <26년>을 극장에서 보는 나는 참 다행일까 수치일까? 아무튼 무언가 아찔하다. 표현의 자유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아직 쌩쌩하게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 암살 계획을 실행한다는 내용의 영화가 버젓이 극장에 걸리다니 말이다. 그래서 안심했냐고? 미디어를 장악한 정권이 국민 알기를 뭣같이 알고는 자기들 멋대로 개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이 마당에 무슨. 새삼 70, 80년대가 오버랩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하는 말이다. 흘러간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지 않는다고? 틀렸다. 요샌 기술이 좋아서 얼마든지 돌릴 수 있다. 그래서 생양아치들이 기사를 만들고 뉴스를 편집하고, 아첨에 가까운 논평을 무한 반복한다 해도 이젠 그 꼴을 애잔함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뭐랄까? 솔직히 자기 혼자 거울 보며 가위바위보하는 꼴을 보게 되면 누구라도 아, 쟤가 좀 맛이 갔구나 하지 않겠는가? 자기가 봐도 너무 거시기 하니까. 그나마 양심적인 언론인들이 들고일어나 파업하고 시위하고 저항했지만, 기소되고, 해직당하고, 좌천되고….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까? 참고로 내 주변 사람 중엔 한명도 없었다. 암울하다. 대선이 다가오고 말도 안되는 여론조사를 보면 볼수록 눈먼 말에 올라탄 장님이 천길 낭떠러지를 향해 내달리는 기분. 잠이 안 온다.

부가 판권 시장의 부활 견인차

빠름. 빠름. 빠름. 모 통신사 광고 얘기가 아니다. 극장 상영작이 VOD 서비스를 통해 IPTV(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해 제공되는 쌍방향 텔레비전 서비스. 시청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원하는 시간에 볼 수 있다.)나 웹하드에 선보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극장 상영이 거의 끝날 무렵 IPTV에 개봉하거나 극장과 IPTV에서 동시상영하는 건 기본이다. 아예 IPTV에서만 단독으로 개봉하는 영화도 있다(<피쉬 탱크>는 9월21일 LG유플러스TV에서 단독개봉했다). 물론 스크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보고 싶은 영화를 극장에서 놓치더라도 발을 동동 구르지 않아도 된다. 불법 다운로드를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은 리모컨 하나면 안방에서 원하는 영화를 선택해 감상할 수 있는 시대다. 극장 개봉작이든, 철이 지난 영화든,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은 영화든. 올해 11월 기준으로 IPTV 가입자 수가 600만명을 넘어섰다. KT의 올레TV가 약 365만명으로 가장 많다. SK브로드밴드의 BTV가 약 135만명, LG유플러스의 유플러스TV가 약 102만명의 가입자를 확보해 KT를 뒤쫓고 있다. 디지털케이블TV(사업자의 단말기를 통해 방송을 전송받는 서비스. 쉽게 말해서 지역 케이블방송이 여기에 해당된다.) 가입자 수는 올해 7월 기준으로 467만명 정도다. 그러니까 IPTV 가입자 수와 디지털케이블TV 가입자 수를 합친 1천여 만 명은 VOD 시청이 가능한 숫자다. 지난 10월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발표된 자료 ‘IPTV/디지털 케이블TV 연도별 가입자 현황’에 따르면, IPTV를 비롯한 케이블TV, 위성방송 등 국내 유료방송 가입자 수는 총 2200만명에 이른다. 그중 절반 정도가 VOD 시청이 가능하다는 소리니까 이건 어마어마한 숫자다. 매출액 역시 큰 성장세를 보였다. 지난해 IPTV와 디지털케이블TV의 영화 총매출액은 1014억원 정도(IPTV의 영화 매출액은 760억원, 디지털케이블TV의 영화 매출액은 254억원이다)로, 2010년의 213억원에 비해 무려 476%나 증가했다. 올해는 상반기까지 726억원을 기록했다고 하니 연말쯤에는 지난해의 매출액을 가뿐히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IPTV 가입자 수가 늘어나는 속도도 무시무시하다. 위성방송이 가입자 수 300만명 돌파하는 데 9년, 케이블TV가 400만명 돌파하는 데 6년 걸린 반면 IPTV는 4년 만에 600만명을 돌파했다. IPTV의 성장이 VOD 시장을, 2000년대 초 몰락한 2차 부가판권시장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 따른 VOD 시장 성장 많은 사람들이 VOD를 통해 영화를 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는 쉽지 않다.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달리 던져보자. 어떤 사람들이 VOD를 통해 영화를 보는 것일까. 올레TV, BTV, 유플러스TV 등 IPTV 3사 관계자는 “30, 40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그 연령대는 편당 3500~4천원쯤은 큰 고민없이 지출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리모컨 버튼 몇번만 누르면 영화가 상영되는 IPTV의 시스템만큼 그들에게 편리한 도구도 없을 것이다. BTV 정소연 매니저는 “IPTV가 처음 선보였던 2009년 초, 이들은 성인 콘텐츠 위주로 VOD 서비스를 소비했다”며 “2011년 ‘극장 동시개봉관’이 신설되면서 <방자전> <완벽한 파트너> <후궁: 제왕의 첩> 등 노출 수위가 높은 한국영화를 애용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다가 개봉영화의 IPTV 상영기간이 점점 짧아지게 됐고, 그들은 극장 대신(혹은 극장을 찾지 못한 날에는) IPTV를 통해 가족과 함께 영화를 감상하게 됐다. TV를 통해 원하는 영화를 편리한 시간대에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이 이들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됐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그런데 그게 PC를 통해 원하는 영화를 불법 다운로드해서 보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원리가 비슷해 보이긴 하나 TV와 PC에는 큰 차이가 있다. PC는 매체의 특성상 영화에 집중하기가 쉽지 않다. 쇼핑, 이메일 등 ‘딴짓’ 할 게 많기 때문이다. 반면 TV는 감상을 전제로 한 매체이기 때문에 PC에 비해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국내진흥팀 김현정 과장은 “포털 사이트쪽에서 정확한 매출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같은 영화라도 네이버, 다음의 VOD 다운로드 매출액이 IPTV의 그것에 비해 훨씬 적은 이유가 PC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콘텐츠를 합법적으로 거래하는 영화산업의 분위기 역시 IPTV의 성장에 한몫했다. 올레TV 권용백 과장은 “최근 정부가 불법 다운로드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인 것이 시장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됐다”며 “특히 합법 다운로드 캠페인 덕분에 소비자들이 영화는 당연히 돈을 주고 보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전했다. 콘텐츠 구매가 한국 소비자들에게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TV를 통한 영화 감상이라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적게는 3500원, 많게는 1만원이라는 금액을 영화 감상에 지불하는 소비자의 소비 트렌드 변화, 그리고 불법 다운로드를 규제하는 정부와 업계의 노력 등 여러 요인이 맞물린 결과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엄청난 수치의 반영이다.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이 시급하다 IPTV를 비롯한 VOD 시장은 장밋빛 미래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긴 하다. IPTV 3사, 네이버와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는 정확한 매출액을 공개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매달 정산할 때 수입사는 “해당 영화가 한달 동안 총 얼마의 매출을 올렸는지, 정산된 금액이 과연 제대로 배분된 건지 알기 어렵”다. 수입사의 한 관계자는 “극장 개봉작에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 있듯이 디지털 온라인 시장에서도 매일 매출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행스러운 건 얼마 전 올레TV, BTV, 유플러스TV 등 IPTV 3사가 매출액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3사는 영진위와 함께 “IPTV, 디지털케이블TV 사업자와 문화부, 영진위가 참여하는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 구축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고 한다. 영진위 김현정 과장은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때는 극장을 설득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린 반면 IPTV 사업자 모두 전산망의 필요성을 공감했다는 게 의미있다”며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 시스템은 시스템대로 준비하되 당장 내년부터 IPTV 3사 홈페이지, 영진위 홈페이지, 별도의 보도 자료를 통해 매출액을 공개할 것”이라고 전했다. 영진위가 이 사업에 적극적인 이유는 간단하다. 부가판권시장이 몰락한 이후 한국 영화산업의 구조는 전적으로 극장 매출에 의존하는 기형적인 형태가 됐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의 부가판권시장의 성장은 한국 영화산업의 매출 구조는 물론이고 체질 개선에까지 긍정적 변화를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의 빛을 던져준다. 온라인상영관 통합전산망 구축의 관건은 역시 예산이다. 김현정 과장은 “시스템 구축에 필요한 비용은 내년 영진위 예산으로부터 확보할 계획”이라며 “일단 BK 사업에 21억원을 신청해놓은 상태”라고 밝혔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관객에게는 자유로운 콘텐츠 접근의 기회를 주고, 한국영화산업에게는 작은 숨통을 틔워주는 건 분명한 것 같다.

[해외뉴스] 시상식의 계절이 왔다

바야흐로 시상식의 계절이다. 올해 할리우드 영화계를 한눈에 살펴볼 각종 시상식들이 축제의 개막을 기다리는 가운데 속속 올해를 마무리할 영화계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우선 미국영화의 정서를 대변하는 미국영화연구소에서 제40회 AFI 평생공로상의 후보작을 선정 발표했다. 1973년 설립된 미국영화연구소는 해마다 영화와 텔레비전을 통해 미국 문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평생공로상을 수여해왔다.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작품은 <아르고> <비스트 오브 더 서던 와일드> <다크 나이트 라이즈> <장고: 분노의 추격자> <레미제라블> <라이프 오브 파이> <링컨> <문 라이즈 킹덤>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 <빈라덴 암살작전: 제로 다크 서티> 10편이다. 방송영화비평가협회에서 선정하는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도 후보 선정을 완료했다. 오스카상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크리틱스 초이스 어워드는 올해로 18회째를 맞이하는 가운데 스티븐 스필버그의 <링컨>이 최대 13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는 기염을 토했고, <레미제라블>이 11개 부문에 이름을 올려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골든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함께 오스카상까지 이어지는 메이저 시상식 중 하나인 배우조합상의 후보도 발표되었다. 남우주연상 후보에 <플라이트>의 덴젤 워싱턴, <레미제라블>의 휴 잭맨, <링컨>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 <세션: 이 남자가 사랑하는 법>의 존 혹스,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브래들리 쿠퍼가 물망에 올랐고, 여우주연상으로는 <히치콕>의 헬렌 미렌, <더 임파서블>의 나오미 왓츠, <재와 뼈>의 마리온 코티아르, <실버 라이닝 플레이북>의 제니퍼 로렌스, <빈라덴 암살작전: 제로 다크 서티>의 제시카 채스테인이 경쟁을 펼친다. 내년 오스카상의 어렴풋한 윤곽과 함께 2012년 할리우드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하다.

[김소희의 오마이이슈] 부디 철법통치라도…

퀭한 눈의 좀비로 새벽녘까지 대통령 당선인의 ‘인생역정’을 보았다. 한 인간의 집념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20여년 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만 해도 그녀는 과거의 슬픔과 배신과 고통에 몸을 떨며 그것을 가까스로 견뎌내고 있는 ‘비운의 영애’였다. 수년 뒤 1997년 이회창 대선 후보 지원 연설을 시작으로 정치에 몸을 담고 이듬해 보궐선거를 통해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 그 뒤로는 망설임없이 흔들림없이 (코)앞만 보고 달렸다. 15년 뒤 대통령이 되었다. 그녀가 지닌 여러 자산 중 가장 높이 쳐주고 싶은 것은 특유의 ‘곤조’이다.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비난이든 아부든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에 쉽게 마음이 바뀌지 않는다. 뼈를 깎듯 절치부심의 시간을 보낸 결과이지 싶다. 그것이 종종 불통과 철벽으로 작동하기도 하지만, 나는 ‘어떤 진심’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그 내용이다. ‘곤조’는 인정하지만 그 안에 담길 ‘개념’과 ‘물정’에 대해서는 불안하고 의심스럽다. 그녀를 둘러싸고 밀어올린 세력들이 마땅치 않기도 하거니와, 밑천과 내공이 드러나는 텔레비전 토론에서 자기 정책과 공약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손맛과 조리기구가 좋아도 재료가 부실하면 좋은 요리가 나오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에 그녀의 한계와 가능성이 동시에 있다고 생각한다. 머리는 빌릴 수 있지만 결단은 빌릴 수가 없다. YS만큼만 했으면 좋겠다. 법 위에 군림하는 특권세력에 대해 가차없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철권이 아닌 철법통치 말이다. 과거의 청산대상이 군부였다면 오늘의 청산대상은 국민을 협박하고 사리사욕을 채워온 특권세력과 그 마름들이다. 범죄를 저지른 이는 전임 대통령이라도 죗값을 치러야 한다. 국록을 먹으며 국물도 챙기려는 자들, 불로소득자들, 재벌 총수 일가와 대기업 집단, 대통령 주변, 검찰 등이 떠오른다. 그들은 특히 지난 5년 동안 신호등도 브레이크도 없이 지나치게 질주했다. 저질로 찍힌 언론은, 낙하산만 안 내려보내도 된다. 법대로. 동토의 왕국이 될 것인가 선군의 시대가 될 것인가. 둘 다 시대착오적일지언정 후자쪽을 간절히 바란다. 털어야 할 먼지라면 털고 거쳐야 할 시대라면 거쳐야 하는 거니까. 이상, 급 샤머니즘 신봉자가 된 이의 자체 힐링 일기이다.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꽃게잡이 배를 타봤습니다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여주인공 수정은 부잣집 아들 재민과 동거하는 중에 그의 약혼녀가 일하는 곳이자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화랑에서 일한다. 재민은 물론, 수정을 좋아하는 인욱도 그녀에게 “거기 꼭 나가야겠어? 오기야 자존심이야”라며 그만둘 것을 종용한다. 수정은 두 남자가 화를 내건 달래건 듣지 않는다. 재민의 재력도 인욱의 학벌도 갖추지 못한 그녀에게, 팁으로 먹고사는 노래방 도우미 같은 아르바이트가 전부이던 그녀에게, 전화받고 청소하고 은행 심부름이나 가끔 하면서 한달에 백만원이 보장되는 일자리는 자존심 ‘따위’로 그만둘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을 읽다가 그 장면이 생각났다. <인간의 조건>은 단순히 일이 힘드네 박봉이네 하는 표현으로 묘사될 수 없는, 드라마 속 수정의 일자리와도 퍽이나 다른 몇몇 일자리에 관한 체험보고서다. 진도에서 꽃게잡이를 한 것을 비롯해, 서울의 편의점과 주유소, 아산의 돼지농장, 춘천의 비닐하우스, 당진의 자동차 부품 공장 등이 그의 일터가 된다(6장만이 그가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타인의 삶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꽃게잡이 배에 탄 그는 미쉐린 타이어의 마스코트가 지명수배자로 분장한 모습 같은 남자로부터 “너 깨끗하냐?”는 질문을 받는다. 전과가 있느냐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원래 내가 속해 있던 세상에서 ‘전과가 있다’는 말은 F학점을 받은 수업이 있다는 의미였다”. 취향이나 이상으로 선택할 리 없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남자들은 새로 온 남자에게 ‘어쩌다’ 바다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은 것이었다. 돼지 똥을 푸는 일을 하는 대목을 따라가다보면 그 지독한 피로를 잊기 위해 새로운 피로를 더해 피로에 마취되는 수밖에 없다는 문장에서 절로 힘이 쭉 빠져버린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이런 일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는 안된다. 게다가 그들이 힘든 만큼 돈을 받는다면 우리는 이제 삼겹살을 쉽게 사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안심하시라. (쓴웃음) 한승태는 이 책 속의 그들보다 쉬운 방법으로 돈을 버는 우리를 비난할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자신의 경험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그의 유머감각은 발군이다. 고시원 방에서 폐소공포증과 아늑함을 동시에 느껴본 사람이라면 “나는 어느 전자제품 매장에서 이 방 크기만 한 벽걸이 텔레비전을 본 적이 있다”는 말에 한숨을 토해내고 말 것이다. 같은 방을 쓰는 남자가 괜찮은 사람 같다는 판단 기준은 이렇게 제시된다. “그는 열한시쯤 불을 끌 때까지 한 문장 안에 ‘사랑해’와 ‘씨발’을 함께 사용하며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다.” 마지막으로, 초현실적으로 유머러스한 동시에 살풍경한 이 책에서 가장 애절한 대목은 책 제목을 출판사의 권유로 바꾸어야 했던 일을 구구절절이 적은 서문이다. 그가 원했던 제목 <퀴닝>은 그 뜻풀이를 보면 참 멋진데, 그렇게 긴 설명이 없이 이해 불가한 제목이라니 출판사가 만류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