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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눈물의 추억,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1987년 여름 즈음에 나는 서강대학교 본관의 한 작은 방에서 진행하던 영화상영회를 찾곤 했었다. 어느 날 막 시작하던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첫 장면을 보면서 나는 그대로 울어버린 기억이 있다. 십여년의 세월이 지난 뒤 한분이 내게 물으신다. “자네가 영화를 하게 만드는 원형이 있나?” 누가 그렇게 물어주기를 기다리고나 있었다는 듯, “네… 작은 여자아이가 하염없이 신작로를 바라보고 있어요. 햇살이 따가운 담벼락 아래서, 해질녘의 논둑에서 때로는 늦은 밤에 툇마루에 나앉아… 가끔씩 저 멀리 굽이진 산길로부터 작은 불빛이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가 사라져가곤 해요. 그 불빛이 신작로를 벗어나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와주길 참 많이도 바라면서…그 시간들을 함께했던 담벼락의 햇볕, 논가의 흙냄새, 가끔씩 감당할 수 없이 이상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들던 밤의 바람소리나 흔들리는 그림자들…”. 그 순간 어떻게 이런 대답이 튀어나왔을까. 내가 언제 그런 생각을 했었나? 그분은 왜 또 나에게 물으셨던 걸까. 나의 20대의 주문은 “잊자, 잊자, 생각하지 말자”였다. 무얼 잊으려 했는지, 왜 그랬었는지도 가물가물할 정도로 잊는 것에 익숙해진 지금도 그 순간이 문득문득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면 나는 이런저런 생각의 언저리들을 헤매게 된다. 어둠 속을 달리던 차가 외딴 늪지대를 지나 도착한 곳은 정신병원이다. 힘과 권위로 강제된 생각과 방식, 바라볼 곳도 없고 바라보는 행위도 없는 곳, 기다림도 없고 농담도 없고 슬픔도 없고 그래서 자기도 없는 그런 곳에 던져진 주인공. 그는 타고난 영웅으로 그곳에 던져진 것이 아니다. 그런 그가 계속 움직인다. 세상에는 다른 생각 다른 방식도 있을 수 있고 겪어볼 것도 있으며 기다림도 있고 웃음도 있고 아픔도 있고 그런 속에 자기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움직여 보여주면서. 영웅이 아닌 그는 끝내 만신창이가 된다. 그래서 그를 따라 웃다가보면 어느새 그만큼의 웃음 이상으로 되돌아오는, 옆사람에게 드러내보이기 낯설어 호흡을 고르게 되는 그런 감정의 흔들림을 만나게 된다. 주인공으로 분한 잭 니콜슨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고만 하기엔 뭔가 뒤가 묵직해지는 그런 감정이. 훗날 그 감정이 잭 니콜슨을 바라봐주었던 그 거구의 인디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를 바라봐주고 기다리고 거두어주었던 사람. 내 이름의 ‘자’는 아들 子이다. 위로 딸만 셋을 낳은 맏며느리는 대를 이을 아들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다른 자매들의 돌림자를 쓰지 않고 ‘子’를 쓰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3년 뒤에 아들을 낳으셨고 출산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면서 아직 어린 나를 시골의 할아버지 집으로 보내셨다. 어머니가 건강해지신 뒤에도 나는 자주 시골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만큼 자주 엄마를 기다려야 했다. 다 커서도 가끔씩 혼자 밤길을 걸어 집을 찾아가는 꿈을 꾸었던 것을 보면 기다림이 꽤 깊었나보다. 나의 유년기가 특별히 불행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시골 풍경의 넉넉함에 많은 덕을 입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부터 어딘가를 바라보거나 기다림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에 익숙해졌고 나이 들면서 한동안은…. 영화의 첫 장면, 굽이진 밤의 먼 외딴길로 다가오는 차의 약한 불빛과 마주친 순간은 영화와 내가, 나의 역사가 처음 서로를 통한 내 인생의 첫 경험이었다. 우연히 지나칠 수도 있었던, 특별히 멋스럽지도 않은 그 장면과 내가 만날 수 있었던 그 인연의 실타래를 풀어보려 애쓰던 시간들. 이제 유년 시절의 불안한 기다림은 그리움으로 변해간다. 어머니, 나의 근원을 일깨워주려 하셨던 선생님, 그리고 또 어떤 순간들…. 그 그리움이, 다른 영화 속에서 마주치게 될 무언가에 대한 기대가, 나를 북돋워주고 움직이게 한다.

[인터뷰] 이태원 스크린쿼터대책위 대표

“스크린쿼터 줄이면 국제사회 비웃음 살 것” "스크린쿼터가 조금이라도 축소될 기미가 보인다면 미국은 자국 영화 진출에 걸림돌이 될만한 것을 하나씩 풀라고 집요하게 요구할 겁니다. 극장업자도 직접 들어와 시장을 잠식하고 자기네 영화만 상영하려고 하겠지요. 그렇게 되면 관객의 선택권은 보장받지 못합니다." 2일 출범한 `한미투자협정 저지와 스크린쿼터 지키기 영화인대책위원회'에서 임권택 감독과 공동대표로 추대된 이태원(64) 태흥영화사 대표는 "관객의 선택권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줄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세계 영화업계의 현실을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우리 영화의 관객 점유율이 50%에 육박하다보니 이제는 풀어도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영화인들은 벤츠를 타고 다니면서 스크린쿼터 풀자고 하니 애국심을 들고나온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듣고 있습니다. 맞는 말씀이고 우리도 반성할 대목이 있지만 미국 영화가 제한없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1년에 기껏 50편 만드는 나라가 수천 편의 영화와 어떻게 경쟁을 합니까. 관객의 선택권을 위해 스크린쿼터가 필요한 겁니다." 이 대표는 미국 영화산업의 파괴력을 강조하며 멕시코와 대만 등의 사례를 들었다.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서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매년 쿼터일수를 5%씩 단계적으로 감축, 98년에 완전 폐지에 이른 멕시코는 90년 80편에 달하던 자국영화 편수가 98년 10편으로 감소했다. 대만도 87년 외화 쿼터를 폐지한 후 35%를 유지하던 자국영화 점유율이 98년 5%대로 추락했다. "지난 5월 칸 영화제에서 대만의 세계적인 감독 에드워드 양을 만났는데 저를 붙잡고 울더군요. 외국에서 투자를 하겠다고 나섰는데 정작 국내에 스태프가 없어 찍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도 그런 지경에 빠지면 우리의 역사와 정서가 담겨 있고 우리나라 배우가 우리말로 연기하는 영화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안 봐도 상관없다면 제가 더 할 말이 없지요." 영화인들은 일부 경제관료가 지난 3월부터 "한미투자협정을 위해 스크린쿼터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할 때만 해도 스크린쿼터 유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참여정부와 이창동 장관의 문화관광부를 믿고 일일이 대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곳곳에서 주장과 요구가 터져나오고 있는 시점에서 영화인까지 머리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서는 모습이 바람직하게 비치지 않을 것이라는 여건도 고려했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 영화인들의 의지를 한곳으로 모으고 체계적으로 국민 홍보와 대응책 마련에 나서기 위해 범영화인이 참여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해외의 수많은 문화관련 단체들이 스크린쿼터 지키기 운동을 지지하고 축소 움직임에 항의하는 서신을 스크린쿼터 문화연대와 청와대 등에 팩시밀리와 e-메일 등으로 보내오고 있다"고 소개하며 "문화 선진국들이 스크린쿼터를 성공사례로 꼽고 있는데 이를 줄인다면 국제사회의 비웃음을 살 것"이라고 답답해했다. 이 대표는 74년 의정부중앙극장을 인수해 영화계에 뛰어든 이후 임권택 감독과 손을 잡고 <장군의 아들>, <서편제>, <축제>, <춘향뎐> 등을 제작했으며 지난해 <취화선>의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으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서울=연합뉴스)

영화사 신문 제16호 (1941~1943)

영화사신문 제16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41 ~ 1943 소설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원작으로 한 <강박관념>은 밑바닥 인생들을 주인공으로 해 금지된 소재인 불륜을 다루었다. 카메라, 거리와 현실 속으로최초의 ‘네오리얼리즘’영화 <강박관념> 탄생 드디어 ‘네오리얼리즘’영화가 왔다. 이탈리아 영화인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새로운 영화가 1943년 <강박관념>과 함께 도래했다. 이론 진영이 요구한 이탈리아영화의 혁신에 화답한 영화가 바로 루키노 비스콘티의 <강박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강박관념>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비평가인 안토니오 피에트란젤리는 이 영화를 “네오리얼리즘영화”라고 명명했다. 1943년 이탈리아 영화계에는 ‘네오리얼리즘’이란 신조어가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다. 올해 초 비평가인 움베르토 바르바로는 기존 이탈리아영화의 관습을 비판하고 새로운 영화를 요구하면서 ‘네오리얼리즘’이란 용어를 썼다. 이후 이 용어는 마치 혁명구호처럼 영화저널, 영화클럽, 영화학교로 번져갔다. 바르바로의 이론은 1942년 제기된 자바타니의 주장에 기초한 것으로, 그는 “영화감독은 당대의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인위적인 플롯, 전문배우를 버리고 거리로 나가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강박관념>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제임스 M. 케인의 하드보일드 소설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를 원작으로 한 <강박관념>은 밑바닥 인생들을 주인공으로 해 금지된 소재인 불륜을 다루었다. 이는 파격적인 것이었는데, 범죄와 비도덕적인 것이 영화에 담겨서는 안 된다는 무솔리니 정권하에서 만들어진 이탈리아영화 대부분은 말끔한 중류 계급의 멜로드라마였던 것이다. 반면 비스콘티는 세트를 벗어나 포강계곡 근처로 나아가 메마른 땅, 작열하는 태양, 땀에 전 노동자들을 있는 그대로 담았다. 그곳의 한 선술집에서 매춘의 노역에서 벗어났으나 지긋지긋한 부부생활에 갇힌 여주인공과 떠돌이 노동자가 눈이 맞아 여주인공의 남편을 죽인다는 것이 대략의 줄거리이다. 비스콘티는 장 르누아르의 조감독으로 <토니>(1934) 제작에 참여했던 경험을 되살려냈다. <토니>는 비전문 배우를 기용해 로케이션 촬영으로 하층 노동자들의 삶을 핍진하게 그린 영화였다. 극영화 데뷔작을 준비하는 비스콘티에게 케인의 소설을 권한 것도 바로 르누아르였다. 한편, <강박관념>은 국내외 상영이 모두 금지될 지경에 처해 있다. 국내에서는 영화의 거친 내용에 놀란 정부가 상영금지 혹은 대폭삭제 상영을 명령했고, 판권을 해결하지 않고 무단으로 케인의 소설을 도용한 터라 해외 상영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르보의 시대는 끝났는가 <두 얼굴의 여인> 흥행 참패, 소속사 해고 조치 추락하는 여신에겐 날개가 없었다. 1941년, 여신으로 숭배되던 그레타 가르보가 소속사인 MGM으로부터 해고됐다. 이제 더이상 가르보가 보여줄 것이 없다고 판단한 MGM은 그를 스크린 밖으로 밀어냈다. 최근 몇년간 그는 미국에서보다 유럽에서 더 큰 인기를 누려왔다. 하지만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럽시장이 막히자 그의 효용가치는 바닥을 드러냈다. 해고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스크루볼코미디 <두 얼굴의 여인>의 처절한 실패였는데, 항간에는 이 영화가 ‘가르보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에서 제작된 영화’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스톡홀름 출신인 가르보는 1925년 모리스 스틸러 감독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MGM 대표 루이스 B. 메이어는 가르보와 스틸러가 만든 <괴스타 벨링의 이야기>를 보고 스틸러에게 계약을 제의했는데, 이때 스틸러는 가르보의 동행을 계약조건으로 제시했다. MGM은 이렇게 해서 할 수 없이 데려온 가르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 ‘스웨덴의 노마 셰어’라는 별명을 붙이고 셰어가 거절한 시시한 멜로드라마 <급류>에 그를 출연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첫 러시 시사 뒤 ‘큰 떡’을 손에 쥐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뒤 가르보는 은막의 여신으로 승승장구했다. MGM은 가르보의 유성영화의 데뷔를 미뤄왔다. 무성영화의 스타가 유성영화에서 깨지는 것을 무수히 보아왔던 탓이다. 하지만 무작정 그럴 수만은 없었다. 드디어 1930년 MGM은 ‘가르보가 말을 한다!’는 홍보카피와 함께 그를 유성영화 <안나 크리스티>에 출연시켰다. 여신으로 우러르던 가르보가 입을 연다는 사실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하지만 새로운 영화, 새로운 스타들이 급부상하는 것과 반비례해 그의 인기는 점점 사그라들었다. 숭배의 불씨를 되살려줄 계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MGM은 1939년 에른스트 루비치의 코미디 <니노치카>에 그를 캐스팅했다. 이번에는 ‘가르보가 웃긴다!’라는 카피와 함께. 이어 가르보는 스크루볼코미디 <두 얼굴의 여인>으로 다시 한번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가르보는 쌍둥이다!’라는 카피가 이번엔 먹혀들지 않았다. 이제 가르보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안 것이 바로 그를 발탁해 대스타로 키웠던 MGM이었다. 영화인 노조의 추락 수뇌부, 파업 막아주겠다며 뇌물 받아 징역형 파업을 막아주겠다며 할리우드 스튜디오 대표로부터 거액을 받아낸 노조 수뇌부에 징역이 선고됐다. 1941년 가을, 뉴욕 대법원은 국제무대기술노동자연맹(International Alliance of Thearitical Stage Employees, 이하 IATSE)의 수뇌부인 조지 브라운과 윌리 비오프에게 사기 혐의로 각각 징역 8년과 10년을 선고했다. 이들은 할리우드 내 파업을 막아주겠다는 조건으로 이십세기 폭스 대표 조셉 센크로부터 모두 100만달러를 받아챙겼다. 이러한 IATSE의 부패상은 조셉 센크에 대한 수사에서 드러났다. 센크는 세금 포탈과 위증 혐의를 비롯, 모두 39개의 사유로 검찰에 기소돼 1년형을 선고받았는데, 조사과정에서 그가 할리우드 제작사 대표들을 대신해 이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건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1893년 조직된 IATSE는 1939년 현재 미국과 캐나다에서 일하는 영화인 4만명을 거드린 막강노조. 할리우드 노동자 3만명 가운데 1만2천명이 여기 소속이다. 그만큼 막강한 조직이나 할리우드 경영진과 유착하면서 어용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런 만큼 IATSE에 반발해 새로운 노조를 건설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대표적인 조직이 스튜디오노조협의회(Conference of Studio Unions). 1941년 디즈니 애니메이터들의 파업이 성공리에 끝난 뒤 조직된 단체로, IATSE 소속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걷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IATSE 수뇌부 구속은 IATSE에 적잖은 타격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 영화산업에 독립제작자 급부상 웰즈, 디즈니, 채플린 등 톱10으로 꼽혀 1942년 2월18일치 <버라이어티>는 ‘독립제작자의 급부상’을 미국 영화산업의 새로운 경향으로 진단하는 기사를 실었다. <버라이어티>는 “앞으로 나올 중요한 할리우드영화는 이들의 손에서 나올 것”이라고 예고하면서, 활동 중인 독립제작자 ‘톱10’을 꼽았다. 이 명단에는 데이비드 셀즈닉, 사뮈엘 골드윈, 세실 드밀, 월트 디즈니, 찰리 채플린 등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 쟁쟁한 이름 가운데 ‘원치 않게’, ‘졸지에’ 독립제작자로 나서게 된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오슨 웰스이다. 이미 연극무대와 라디오 방송에서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입증한 오슨 웰스는 최종 편집권을 포함한 영화제작의 전권을 위임받는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RKO와 계약하고 할리우드로 건너왔다. 영화의 모든 형식을 혁신하기로 ‘맘먹고’ 만든 데뷔작 <시민 케인>은 “천재가 일을 내다”(<할리우드 리포터>)라는 상찬을 들었지만, 주요 배급망을 통해 극장에 풀리지 못했다. 언론 재벌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이 영화가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며, 자기 소유의 신문에 관련 기사가 실리지 못하도록 했고, 할리우드를 향해서는 이 영화를 배급할 경우 보복 조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시민 케인>은 변두리극장이나 독립극장에서만 개봉됐고, 이는 흥행 부진의 주원인이 됐다. RKO 안에서 웰스의 입지는 극히 좁아졌다. RKO는 웰스의 다음 영화 <위대한 앰버슨가>를 마음대로 가위질했고, 급기야 그가 촬영 중이던 다큐멘터리 <잇스 올 트루>의 제작지원을 중단해버렸다. 그를 발탁했던 RKO 대표 조지 셰퍼가 회사를 떠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새로 부임한 피터 라드본은 아예 그와의 재계약을 거절했다. 그 바람에 독립제작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웰스는 RKO로부터 <잇스 올 트루>의 촬영분을 사들인 뒤 자비로 촬영을 계속했다. 또한 웰스는 몇개의 독립 프로젝트를 구상했는데, 그중 프랑스의 악당 앙리 랑두의 실화에 토대한 신작 소재는 5천달러를 받고 찰리 채플린에게 팔기도 했다. 아직까지 웰스의 차기작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호기롭게 할리우드에 입성하던 때와는 정반대의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워너, 험프리 보가트 ‘금이야 옥이야’ 살해 협박에 10만달러 생명보험 가입 <카사블랑카>에서 험프리 보가트는 `여자라면 사랑하고 싶은` 멋진 남자로 완성됐다. 1942년 11월 워너브러더스가 <카사블랑카>의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 사망에 대비해 10만달러짜리 보험을 들었다. 그와 잉그리드 버그만 사이를 의심한 아내 메이요 메소트가 그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자, 그의 사망으로 인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 보험에 가입한 것이다. 아직 보가트는 살해되지 않았고 따라서 워너브러더스도 보험금을 타지 못했지만, 이번 일은 보가트에게 거는 워너의 기대가 어느 정도인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카사블랑카>의 대사를 인용한다면, 보가트는 정말 ‘운명에 따라’ 스타가 됐다. 1937년 워너브러더스와 계약한 그는 주급 1천달러를 받으며 B급영화의 주연과 A급영화의 조연을 오락가락했다. 그에게 스타로 발돋움할 전기를 마련해준 영화는 <시에라 산맥>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워너의 A급배우 조지 라프트가 거절한 로이 얼로 출연해 주목받았다. 그는 1941년 무슨 인연인지 또다시 라프트가 거절한 영화 <말타의 매>의 주인공 샘 스페이드 역에 캐스팅됐다. 라프트는 “중요한 영화가 아니다”라며 <말타의 매> 출연을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 원작인 대시엘 해밋의 소설은 이미 할리우드에서 2번이나 영화화됐지만 한번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터였다. 하지만 “올해 최고의 미스터리스릴러”(<타임스>)라는 평가를 들은 <말타의 매>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대타’로 들어간 보가트 또한 급부상했다. 워너는 그를 갱스터 영웅이었던 제임스 캐그니, 에드워드 로빈슨의 뒤를 이어 워너를 중흥시켜줄 배우로 점지했다. 그래서 제작비 80만달러가 들어가는 A급영화 <카사블랑카>의 남자주인공으로 한때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라프트를 고려했던 제작자 할 왈리스는 이들을 제치고 보가트를 캐스팅했다. 이번에는 보가트가 라프트를 이긴 것이다. <카사블랑카>는 보가트의 매력을 한껏 부풀려주었다. 여기에는 시나리오 작가가 여러 차례 바뀐 것이 주효하게 작용했다. 곧 작가마다 로맨스, 유머, 냉소주의, 액션 등 줄거리와 함께 주인공 ‘릭’에게 새로운 성격을 추가하는 바람에 릭의 캐릭터는 극중 대사처럼 “여자라면 사랑하고 싶은” 멋진 남자로 완성됐다. 단 신 들 독일 영화산업, UFA로 완전 통합 1942년 독일의 영화산업이 완전히 국유화됐다. 독일의 모든 영화사들은 UFA-필름이라는 거대한 회사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나치는 영화산업의 모든 부분을 망라하는 183개 회사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나치의 선전상 괴벨스는 집권 뒤 독일영화를 통제하기 위해 국유화를 시도해왔다. 이에 따라 독일 내 영화사들을 사들여 1939년에는 독일의 영화사 수가 이미 18개로 줄었다. 그리고 이 영화사들조차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스탈린상 수상 1941년 5월15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알렉산더 네프스키>로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유럽 침략자들에게 맞서 러시아 수호 전쟁을 이끈 중세의 왕자 알렉산더 네프스키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당시 점증하던 나치 독일의 위협에 대한 저항을 염두에 두고 만든 애국적 영화로 평가받았다. 영국, 사실 재현한 세미다큐 인기 영국에서 사실을 재현한 세미다큐멘터리가 인기를 모으고 있다. 1942년 데이비드 린과 노엘 카워드가 공동 연출한 구축함 선원들에 대한 영화 <우리가 복무하는 곳에서는>은 상업적인 스튜디오에서 처음 시도한 세미다큐멘터리로, 높은 흥행성적을 올리고 있다. 또한 1941년에는 영국 공군 비행사들이 과거에 겪은 실화를 연기한 <오늘밤 타겟>이 큰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전쟁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합성해 줄거리를 만든 세미다큐멘터리는 기록영화의 진실성과 픽션의 허구가 주는 정서를 결합해 영국 국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캐롤 롬바드, 비행기 사고 사망 1942년 1월17일 할리우드 스타 캐롤 롬바드가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올해 그의 나이 34살. 클라크 게이블의 아내이기도 한 롬바드는 그녀를 태운 비행기가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 부딪치는 바람에 동승한 어머니, 에이전트와 함께 사망했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반나치 풍자극 <죽느냐, 사느냐>가 그녀의 유작이 됐다.

영화사 신문 제15호 (1939~1940)

영화사신문 제15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9 ~ 1940 저주받은 영화 <게임의 규칙> 관객·비평가 모두 혹평, 프랑스 정부 상영금지 처분까지 무려 250만 프랑의 제작비를 들인 <게임의 규칙>은 장 르누아르 감독의 야심과는 달리 관객과 비평가들로부터 비난을 들어왔다. 1939년 말,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의 상영이 중단됐다.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한 뒤, 프랑스 정부는 이 영화가 “국민의 사기 저하를 초래한다”며 상영금지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정부의 처분은 그렇지 않아도 <게임의 규칙>으로 모진 고초를 겪을 대로 겪은 장 르누아르에게 가해진 최후의 일격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게임의 규칙>의 수난은 1939년 6월22일 파리에서 가진 첫 시사회에서 시작됐다. 관객은, 그들을 흥분시켰던 영화 <거대한 환상>의 감독이 만든 신작에 대해 ‘거대한 환상’을 품고 시사회장에 왔다. 하지만 공개된 영화는 그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만족은커녕 관객은 이 어둡고,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에 대한 분노 때문에 야유와 조롱을 쏟아냈다. 극장을 태워버리겠다고 신문지에 불을 붙인 관객도 있었다. 비난일색이긴 비평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장 르누아르는 이러한 관객의 반응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르누아르는 <거대한 환상>의 성공에 힘입어 독립제작사를 차린 뒤 무려 250만프랑의 제작비를 들여 <게임의 규칙>을 완성했다. 그런 야심작이 이처럼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자 르누아르는 어떻게든 영화를 ‘건져볼’ 심산으로 필름의 상당 부분을 들어내 상영시간을 23분이나 줄였다. 또한 영화의 첫 도입부에 ‘이 영화는 사회비판이 아니라 단순한 오락물로 제작된 것입니다’라는 자막을 삽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만들어져 극장에 개봉된 80분짜리 최종본은 관객의 불만을 가중시켰을 뿐이다. 필름이 너무 많이 잘려나가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한편, <게임의 규칙>이 가져다준 좌절로 영화계 은퇴까지 고민했던 르누아르는 1939년 8월, 정부의 명령으로 프랑스를 떠나 이탈리아로 향했다. <거대한 환상>에 감동했던 무솔리니가 프랑스 정부를 통해 르누아르를 이탈리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에서 르누아르는 루키노 비스콘티와 함께 <라 토스카> 제작에 착수할 예정이다. 팥밥 아닌 식은밥이 문제? 오즈, 나루세의 신작, 어처구니 없는 검열에 걸려 일본 정부의 영화검열이 가혹해지고 있다. 1939년 10월1일 영화제작 전 과정을 정부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마련된 새 영화법이 시행되면서 창작의 자유가 극히 좁아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오즈 야스지로와 나루세 미키오의 신작에 가해진 처벌이다. 하사관으로 중국 전선에서 싸우고 돌아온 오즈의 복귀작으로 화제를 모은 <찻물에 만 식은 밥맛>은 시나리오 사전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소집영장을 받은 주인공 부부가 이를 의연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시나리오의 내용으로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요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부부가 출정전야에 식은 밥을 찻물에 말아먹는다는 설정을 크게 문제삼았다. “전쟁터로 남편을 떠나보낼 때 아내가 팥밥을 지어먹이는 것이 일본의 전통인데, 찬밥을 먹어서야 되겠냐”는 것이었다. 한편 나루세 미키오는 가난한 인쇄공 일가를 그린 리얼리즘영화 <일하는 일가>의 호평에 힘입어 다시 가난한 최하위층 노동자들을 취재해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 소재 자체를 기각했다. 국민이 총력을 모아 전쟁에 노력을 집중해야 할 시기에 전쟁수행에 방해가 되는 ‘빈곤’이라는 주제는 허가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나치의 영화법을 참고해 만든 새 영화법은 시나리오 사전검열은 물론, 정부 허가 없이 영화를 제작·배급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고 했다. 또한 공익에 저해된다고 판단할 경우 언제든지 허가를 취소할 수 있고, 감독이든 스탭이든 배우든 시험을 통과해 정부에 등록된 영화인에 한해서만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감독·배우·작가 달달 볶아야 좋은 작품 나오죠” 주목! 이 사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 ‘셀즈닉의 할리우드.’ 요즈음의 할리우드는 정말 이렇다. 데이비드 셀즈닉(David O. Selznik)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할리우드의 정상에 우뚝 섰다. 대릴 자눅, 새뮤얼 골드윈 등 쟁쟁한 제작자들이 있긴 하지만 어느 누구도 셀즈닉처럼 단 한편의 영화로 미국, 나아가 전세계 극장가를 평정하지는 못했다. 데이비드 셀즈닉은 할리우드 밑바닥에서 시작해 32살에 제작사 대표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02년 영화제작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0대 때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DLJ MGM에서 주급 100달러의 스크립터 리더로 할리우드에 발을 들인 뒤 파라마운트, RKO, 장인의 회사인 MGM을 거치며 승승장구했고 1935년에는 소원대로 독립제작사 ‘셀즈닉 인터내셔널’을 차렸다. 셀즈닉은 지독한 완벽주의자, 불같은 고집쟁이, 일벌레로 정평이 나 있으며 어떤 영화든 자신의 의사가 관철되지 않으면 못 참는 인물이다. 배우고 감독이고 가차없다. 오죽하면 “감독, 배우, 작가를 잡아먹는 제작자”라는 수군거림이 있을까. 제작 중에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 영화가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그는 조지 쿠커, 빅터 플레밍, 샘 우드로 세번이나 감독을 갈아치웠다(영화 완성 뒤 셀즈닉은 감독의 지분을 분배했는데, 빅터 플레밍이 가장 많은 45%를 받았다. 그 덕에 플레밍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했다). 속기사에게 받아적게 한 메모 단어가 150만개에 이를 만큼 영화제작에 깊이 관여했던 그는 심지어 새벽 3시에 클라크 게이블을 깨워 연기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차기작인 <레베카>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성공이 그에게 더 큰 자기확신을 불어넣은 탓인지 시나리오의 문제점을 사사건건 따졌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험을 밑천삼아 히치콕에게 ‘소설을 영화화하는 방법’을 가르치려들었다. 히치콕은 이 영화를 유머가 삽입된 심리스릴러로 만들길 원했지만, 셀즈닉이 원작이 지닌 감상적인 로맨스가 그대로 살아나도록 요구했다. 영국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영화를 찍었던 히치콕은 ‘셀즈닉식’ 제작환경에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두 사람의 갈등은 편집이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렇듯 제작진을 ‘달달 볶아가며’ 영화를 만드는 탓에 누구도 그와의 작업을 편치 않게 여긴다. 셀즈닉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셀즈닉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와 일할 때 최고의 결과를 얻으며, 나는 그들을 괴롭히며 많은 걸 가르친다”라고 확신하고 있다. 좋은 영화 놓치기 아까워서… <분노의 포도> 호화 파티 시사회 눈길, 사회비판성 감출 연막작전 영화는 포장해서 팔기 나름. 이십세기 폭스 사장 대릴 자눅은 그렇다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다. 그가 주최한 <분노의 포도> 월드 프리미어 행사를 보면 그런 심증이 간다. 그는 최하층 노동계급의 암울하고 고통스런 삶을 그린 이 영화의 시사회를, 뉴욕 상류층의 파티처럼 치렀다. 1939년 뉴욕 코르넷 시어터. 밤 9시30분에 시작될 <분노의 포도> 상영을 앞두고 극장에는 뉴욕 사교계, 패션계, 예술계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들에겐 아직도 샴페인 냄새가 났다. 감독인 존 포드는 대경실색했다. 누구보다 분노한 것은 시나리오 작가인 누날리 존슨이었다. 술기운 때문에 영화가 끝날 때쯤 아예 잠들어버린 관객이 적잖았고, 이에 존슨은 “절망에 빠졌다”. 그나마 위로가 된 것은 많은 관객이 종영 뒤 박수를 보냈다는 사실이었다. 자눅의 기대대로 다음날 일간지들은 <분노의 포도> 시사회를 지면에 올렸다. 비록 대부분의 기사가 영화내용이 아니라 파티 같았던 시사회 풍경을 다뤘긴 하지만. 사실 자눅이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시사회를 연 데에는 다른 속내가 있었다. 영화에 내장된 사회비판성을 숨기기 위해서다. 공개 전부터 할리우드에는 <분노의 포도>가 정치적인 영화가 될 거라는 소문이 분분했다. 제작자들은 존 스타인벡의 원작을 영화화하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잭 워너는 이 소설을 “순수한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영화화를 검토했던 제작사들도 두손을 들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영화를 만들기엔 시대 분위기가 험악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MPPDA의 검열이 심했고, 무엇보다 세계대전 발발 뒤 미국사회가 급격하게 보수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원작이 마음에 들었던 자눅은 주위의 만류를 무릅쓰고 <분노의 포도> 제작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영화의 쓴맛을 감출 ‘당의정’으로 이색 시사회를 마련했던 것이다. “서부영화에도 이런 스펙터클이” 1939년 모뉴먼트 밸리가 영화의 풍경 안으로 들어왔다. 존 포드는 13년 만에 서부영화로 귀환하면서 미국의 신화가 깃든 듯한 이 광활하고 신비한 유타의 사막을 배경으로 끌어왔다. 그동안 싸구려영화로 인기는 있었으나 대접은 받지 못했던 서부영화는 드디어 존 포드의 <역마차>를 타고 ‘고귀한’ 땅에 도착했다. 단 신 들 캐서린 헵번 <필라델피아…>로 부활 1940년 12월 <필라델피아 스토리>의 대성공으로 캐서린 헵번이 “박스오피스의 독”이라는 오명을 벗었다. 일례로 이 영화는 뉴욕의 대극장 ‘라디오 시티 뮤직홀’의 역대 개봉작 중 최고의 흥행수익을 올리고 있다. <필라델피아 스토리>는 성공한 브로드웨이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 이 연극에 출연했던 헵번은 직접 이 연극의 판권을 사서는 MGM을 설득해 영화화하도록 했다. 헵번으로서는 그간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최근 몇년간 헵번의 출연작이 번번이 흥행에 실패하자 1938년 잡지 <포토플레이>는 그를 두고 “박스오피스의 독”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이 대목은 그뒤 별명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조지 쿠커가 감독하고 헵번과 함께 캐리 그랜트, 제임스 스튜어트가 주연한 이 코미디는 <레베카> <해외공작원> <위대한 독재자> <분노의 포도> 등과 함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장 가뱅, 프랑스 최고의 흥행배우 1939년 3월. 장 가뱅이 프랑스에서 최고의 흥행배우로 선정됐다. 가뱅은 최근 극장주들이 투표로 뽑은 ‘상업적 가치가 가장 큰 배우’ 설문조사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새벽> <안개 낀 부두> <인간야수> 등에 출연한 가뱅은 주로 운명의 덫에 걸린 하층계급 노동자의 비극을 그려왔다. 한편 이번 설문조사에서는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과 그레타 가르보가 외국배우로는 유일하게 10위권에 들었다. 맥다니엘, 아카데미 첫 흑인 수상자 영예 1940년 2월29일 해티 맥다니엘이 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의 유모로 출연했던 맥다니엘은 제1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또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 밖에도 작품상, 여우주연상(비비안 리) 등 8개 부문을 석권했다. 반나치 <어느 나치 스파이의 고백> 공개 1939년 5월6일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반나치영화 <어느 나치 스파이의 고백>이 공개됐다. 에드워드 로빈슨이 주연한 이 영화는 실존인물인 전 FBI 첩보원 레온 G. 투로의 이야기를 옮긴 것. 그는 미국에서 극비리에 독일 스파이의 조직망을 침투시켰다. 제작진은 영화 촬영 도중 익명의 협박편지에 시달렸다. 워너브러더스는 베를린 사무소 대표가 파시스트 자객에게 암살당한 뒤 이 영화기획에 착수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말하는 장철과 그의 순결한 사내들 [2]

<복수> 나는 이 영화를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때는 아직 지구상에 비디오가 없었다. 영화는 극장에서 사라지고 나면 다시는 볼 기회가 없었다. 그것을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걸 몽땅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월요일부터 학교만 끝나면 미아리극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마지막회까지 내내 보았다. 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보았다. 단 한 장면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두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첫 장면부터 다시 복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날 또 달려갔다. 그렇게 금요일까지 나는 <심야의 결투>를 보고 또 보았다. 그때 나는 알았다. 영화는 숏으로 쪼개지며, 그 숏들은 신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나는 그걸 책이 아니라 영화를 보면서 알았다. 그리고 숏으로 암기하는 것보다 신으로 외운 다음 그 신을 쪼개는 숏으로 기억하는 편이 훨씬 쉽다는 것을 알았다. 토요일에 간판이 바뀌었고, <심야의 결투>는 내 앞에서 사라졌다. 슬픈 일이었다. 물론 신문을 뒤져서 실린 상영극장표를 통해 다른 극장에서 하는 것을 발견했지만, 뚝섬극장은 초등학교 5학년이 가기에는 우리집에서 너무 멀었다. 세트, 벗어날 수 없는 운명 같은 절망의 공간 그러나 여기가 클라이맥스가 아니다. 장철 영화를 기다리는 나날은 계속되었고, <단장의 검>과 <용호의 결투>는 심금을 울린 만했다. 내가 보기에 <철수무정>은 좀 별로였고, 는 장철의 야심적인 시대극이며, 물론 명장면도 있지만(특히 함정에 빠진 성에서 탈출하기 위해 벌이는 질릴 만큼 기나긴 대결의 연속) 산만하다. 그리고 여기에 <수호지>를 더해야 한다. 또는 <권격>(과 그 속편인 <흑객>). 이건 진짜 놓칠 수 없다. 하지만 결국 내 생각에 장철의 최고 걸작은 <복수>이다. 이건 백번을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 영화를 중학교 1학년 때 대지극장에서 보았다. 깡따위와 적룡(그 당시에는 다들 추룡이라고 불렀다) 콤비의 탄생을 알리는 이 영화는 온통 어둠과 음울함으로 가득 차 있다. 대부분의 장면이 밤이거나, 어두운 극장이거나 실내이다. 이 영화는 일종의 아주 나쁜 꿈이다. 아그파컬러의 어두운 감촉은 몽환적이지만, 그것은 악몽이다. 세트장이 너무나도 분명한 장철의 영화는 그걸 일종의 탈출이 불가능한 공간처럼 이용한다. 그래서 시종일관 쇼 브러더스 세트장에서 작업한 그의 공간은 일종의 심리적인 막다른 골목이며, 그 안에서 보는 사람은 숨이 막힐 것만 같다. 그리고 <복수>는 그걸 정말 끝까지 가본다. 베이징오페라극장의 주인공 연기자인 적룡은 예쁘지만 바람난 아내가 있다. 이 아내를 극장주와 사내들이 기웃거리자 적룡은 경고한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다. 항상 그런 것처럼. 음모가 꾸며지고, 작은 새장을 들고 차를 마시기 위해 적룡이 객잔을 찾아온 순간 함정에 걸려든다. 이 2층 객잔에는 모두 악당들뿐이고, 적룡에게 편지를 전달하는 척하던 악당은 그의 등 뒤에서 칼로 찌른다. 그런 다음 수십명이 달려들어서 적룡을 난자한다. 시작하자 10분 뒤에 벌어지는 이 장면은 진짜 명장면이다. 악당들은 칼과 도끼를 들고 사방에서 달려들고 이층 난간에서 아래층으로 떨어지자 그 아래서 기다리던 수십명의 악당들이 달려든다. 그리고는 두눈을 찌른 다음 앞이 보이지 않는 적룡에게 돌아가면서 찌르고, 베고, 찍고, 쑤신다. 이 장면을 장철은 한껏 즐긴다. 적룡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앞이 보이지 않아 적들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순간은 그의 베이징 오페라 무대의 장면과 교차되고, 그 순간을 슬로모션으로 있는 대로 절망의 시간을 늘려놓기 시작한다. <십삼태보> 하지만 이건 시작이다. 이제 형의 죽음을 알게 된 깡따위(나는 이 이름이 주는 어감이 좋다!)가 돌아와 ‘복수’를 시작한다. 여기서부터가 거의 죽음이다. 어둠과 그림자로 가득 찬 이 세트장에서 저 세트장으로 연결되는 장면들은 이제 여기서 누구도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그때 아주 유치한 수준으로 카프카를 읽고 있었는데(그 나이에 뭘 알았겠는가?), 장철의 이 영화야말로 카프카적인 미로라고 내 일기장에 그날 썼다. 물론 마지막 장면은 피가 넘쳐나는 대살겁이 벌어지며, 동생 깡따위는 또 다른 음모에 빠져서 더 끔찍하게 죽어간다. 그런데 나는 그게 그렇게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게 보였다. 칼은 짧아지고, 격투의 거리감은 더욱 가까워지고, 공간은 더욱 좁아져서 피할 데가 거의 없어 보인다. 거기서 칼부림은 마치 내 몸이 베이는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순간 피는 정신의 정화이며, 죽음에 이르는 저 피할 길 없는 운명은 영혼의 순결이었다. 장철은 거기서 어린 중학생에게 세상은 음모로 가득 차 있으며, 배신은 질서이며, 죽음은 곁에 있고, 그 안에서 너는 어차피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복수>가 위대한 것은 폭력이 아니라 폭력적 구조의 필연성을 찍었기 때문이다. 결국 악은 승리하고, 육체는 부서진다. 거기서 영원한 것은 죽음뿐이다. 그 허무주의와 패배주의는 사실상 영웅주의의 부정에 다름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반쯤 넋이 나갔다. 나는 다시 한번 매일같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매일 대지극장으로 달려갔다. 이제는 좀더 체계적이 되어서 노트를 들고 가서 장면을 베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 어찌하랴! 다음주 토요일은 너무 빨리 다가왔고, 나는 이 영화와 작별해야만 했다. 그래서 금요일에 나는 처음으로 학교를 빼먹고 대지극장에 가서 하루종일 이 영화를 보았다. 거기서 도시락을 먹고, 저녁으로 빵을 먹으면서 보고 또 보았다. 나는 그날 텅 빈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면서 슬프게도 작별인사를 하는 자신이 더할 나위 없이 처량했다. 그건 나의 가장 슬픈 하루였다. 그리고 약간의 후일담 그리고 그 이듬해 7월16일 피카디리극장에서 이소룡의 <정무문>이 개봉했다. 이소룡의 첫 번째 한국 개봉작이었다. 나는 그 영화가 (그의 열렬한 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진짜 재수없었다. 거기서 나는 아무런 흥분도 느끼지 못했다. 장철의 저 말할 수 없는 처절함과 육체에 대한 황홀감은 더이상 거기 없었다(더 정확히 말하면 이소룡의 영화는 그 어떤 영화도 액션의 숏감각이 한심하고 따분했다. 장철의 화면들과 편집이 보여주는 저 일사불란한 황홀감이 이소룡 영화에는 없다). 그 이후 진짜 이상하게도 장철의 영화는 개봉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이소룡 때문에 홧병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내 멋대로 합리화했다(장철은 2002년 6월22일에 죽었다). 그리고 다시 그 이듬해 11월 나는 프랑스문화원에서 고다르를 발견하였다. 나에게는 홍콩영화와 작별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때 중학교 3학년이었고, 그 이듬해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패배하고 철수하였다. 나는 온통 폭력과 음모로 넘쳐나며, 침묵을 강요당하면서 지내야 했던 박정희의 시대를 그렇게 살았다. 약간의 후일담. 그리고 난 다음 나는 줄기차게 저 영화들을 다시 보기 소망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장철의 67년에서 73년에 이르는 영화들은 비디오로 볼 수 없었다. 75년 이후 장철이 류가량과 손을 잡고 만든 일련의 소림사 연작들과 ‘상당히 민망한’ 80년대 영화들은 심심찮게 비디오로 구할 수 있었지만 저 기억 속의 위대한 영화들은 결코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살아생전 저 영화들을 다시 볼 것인지 내심 초조하였다. 그런데 드디어 그 영화들을 다시 만난다. 그것도 비디오가 아니라 필름이다. 정말 기쁘다. 그건 달리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나는 장철의 나머지 영화들도 그렇게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막무가내로 기다릴 것이다(나는 이 글을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다. 때로 어떤 글은 평생 쓰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지금 그렇다…). 제7회 부천영화제에서 만날 수 있는 쇼 브러더스의 영화홍콩영화 황금기의 유산 6편 장철, 호금전, 이한상 감독 등의 무협영화를 제작한 쇼 브러더스는 1920년대부터 영화제작과 극장업에 뛰어든 회사로 1957년 홍콩에 대규모 스튜디오를 건립한 이후 홍콩영화의 황금시대를 장식했다. 장철 감독의 시대가 저물면서 무협영화의 주도권은 이소룡과 성룡의 작품을 생산한 골든하베스트로 넘어갔다. 올해 부천영화제의 특별 프로그램으로 마련된 쇼 브러더스 회고전에선 장철 감독 영화 네편을 포함해 쇼 브러더스의 유산 6편을 소개한다. 양산백과 축영태 梁山伯與祝英台 감독 이한상/ 출연 능파, 요체/ 123분/ 1962년 중국 4세기가 배경인 민간설화 <양산박전>을 스크린에 옮겨 당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 ‘중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서극의 <양축> 역시 같은 이야기로 만든 영화다. 남자만 학생으로 받는 서원에 남자로 변장해 입학한 축영대는 그곳에서 양산백을 만나 3년간 함께 공부하며 우정을 나눈다. 어느 날 축영태는 아버지의 급한 부름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고 양산백은 그가 떠난 뒤에야 축영태가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베이징오페라 형식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일종의 뮤지컬로 베이징오페라의 전통에 따라 여배우인 능파가 남자인 양산백 역을 맡았다. 감독 이한상은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홍콩 박스오피스를 휩쓸었던 흥행감독으로 호금전의 영화스승이기도 했다. 대취협 大醉俠 감독 호금전/출연 정패패/ 94분/ 1966년 1967년 국내에서 <방랑의 결투>라는 제목으로 상영됐던 호금전의 첫 번째 무협영화. 지난해 호금전 회고전에서 누락된 작품으로 올해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새 프린트로 상영될 예정이다. <와호장룡>에서 ‘푸른 여우’로 나온 정패패가 도적떼에 납치된 오빠를 구하러 도적떼 소굴로 뛰어드는 여성 검객 금연자로 나온다. 영화평론가 스티븐 테오는 강인한 여성 캐릭터, 고독한 총잡이, 악당으로 나오는 무법자들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니콜라스 레이의 <쟈니 기타>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독비도 獨臂刀 감독 장철/ 출연 왕우/ 111분/ 1967년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로 잘 알려진 영화. 왕우가 외팔이 검객으로 등장, 무협영화의 스타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왕우가 연기하는 주인공 펑강은 아버지가 스승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뒤 스승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스승의 외동딸과 사형들은 그런 펑강을 질투하고, 더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고 생각한 펑강은 아버지의 유품인 부러진 칼을 챙겨 스승의 집을 나온다. 그때 스승의 외동딸이 그를 막으려다 실수로 펑강의 오른팔을 자르게 된다. 지나가던 여인에 의해 목숨을 건지는 펑강, 시간이 흘러 스승의 집에 위기가 닥치자 외팔이 검객이 나타난다. 금연자 金燕子 감독 장철/ 출연 정패패, 왕우/ 108분/ 1968년 국내 개봉 제목은 <심야의 결투>. <대취협>의 속편격으로 <대취협>과 마찬가지로 정패패가 금연자라는 이름의 여성 검객으로 등장한다. 강호를 떠나 산속에서 한타오와 함께 평화로운 삶을 살던 금연자는 누군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곳곳에서 도적을 죽이고 시체 옆에 금연자의 비녀를 놓고 가는 사내 은붕, 그는 자신의 사매이자 사랑하는 여인인 금연자를 강호에 끌어내려 한다. <독비도>의 왕우가 은붕으로 등장, 혼자 수십명을 쓰러뜨리는 절세무공을 보여준다. 그리고 비장미 넘치는 결투장면은 오우삼 영화의 근원을 짐작게 한다. 십삼태보 十三太保 감독 장철/ 출연 강대위,적룡/ 125분/ 1970년 국내 개봉 제목은 . 무협영화이자 전쟁스펙터클로 <삼국지>를 연상시키는 영화다. 당 말기, 지방 제후인 리계영에겐 뛰어난 무공을 가진 13명의 무사가 있다. 반역자의 무리가 장안을 점령하자 그들은 장안에 잠입해 반역자의 우두머리를 처치하는 계략을 세운다. 제후는 총애하는 막내에게 작전을 지휘하도록 명령하는데 넷째와 열두 번째가 이에 반발해 작전 수행 도중 대열을 이탈한다. 왕우 다음에 등장한 장철 영화의 스타, 강대위와 적룡이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영웅본색>의 적룡이 다리 위에서 펼치는 일당백의 액션과 강대위의 사지절단 장면은 대단히 충격적이다. 복수 報仇 감독 장철/ 출연 강대위, 적룡 / 98분/ 1970년 1970년에 같은 제목으로 국내 개봉했던 <복수>는 장철 영화의 지지자들에 의해 최고작으로 손꼽히기도 한다. 1925년 중국. 경극배우 관유로우(적룡)는 자신의 아내를 희롱한 극단주에게 경고를 보낸다. 그러나 오히려 앙심을 품은 극단주는 관유로우를 살해한다. 동생 관샤오루(강대위)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극단에 위장잠입하고, 복수의 액션이 펼쳐진다. 강대위는 <십삼태보>에서 연기한 리춘샤오 역과 상반되는 냉철하고 무표정한 캐릭터로 등장하여 피의 복수극을 이끌어간다. 검술영화에서 쿵후영화로의 이행과정에 놓여 있는 장철 감독의 과도기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

제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추천작 35편+∝ [4]

환상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바라보는 9편의 드라마 동정 없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두려움과 떨림 Fear and Trembling 감독 알랭 코르노/ 프랑스, 일본/ 106분/ 월드 판타스틱 국내에서도 인기를 누리는 작가 아멜리 노통의 체험 소설을 영화화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5살까지 살았던 벨기에 여자 아멜리는 일본 문화를 향한 향수와 매혹에 떠밀려 각고 끝에 대기업 유미모토의 1년 계약 사원으로 취직한다. 그러나 골프 약속을 승낙하는 간단한 영문편지를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하고 수십 차례 퇴짜맞는 첫날부터 그녀는 개인의 능력을 합리적으로 이용하기보다 하급자의 두려움과 떨림어린 복종을 요구하는 일본 조직문화에 느린 고문을 당한다. 게다가 아멜리의 눈에 일본적 미의 화신처럼 보였던 직속상사 미스 모리는 극악한 네메시스가 되어 그녀를 무의미한 단순노동의 노예로 전락시킨다. ‘사무실 호러’라 불러도 무방할 만큼 숨통을 죄는 불합리한 관행의 묘사가 신경증 상태에서도 적수 모리의 미모에 대한 매혹과 피학적인 쾌감을 떨치지 못하는 아멜리의 심리와 묘하게 뒤섞인다. 알랭 코르노 감독의 전작 <세상의 모든 아침>을 상기시키듯 바흐의 음악이 쓰인 이 영화는 극중에 언급되는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의 괴이한 변주, 또는 안티테제로 느껴진다. 헐리우드 북쪽 Hollywood North 감독 피터 오브라이언/ 캐나다, 영국/ 90분/ 월드 판타스틱 영화산업 현장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영화제작기’. 누군가 말했었던가, ‘카메라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뒤에 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할 뿐’이라고. 뜬구름 잡는 사람으로 가득한 영화계를 통렬히 비판하는 코미디이자 영화 만들기의 고충을 털어놓는 고백 같은 영화. 엔터테인먼트 변호사인 주인공은 모두가 탐내던 소설 <랜턴 문>의 판권을 구입해 직접 영화제작을 해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투자자의 요청으로 캐스팅한 주연배우는 캐릭터를 ‘람보’처럼 바꾸어놓고,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를 오토바이 브랜드로 여기는 상황에서 작품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다. 스턴트맨의 소송에, 주연여배우는 조연배우와 스캔들을 일으키고, 메이킹 팀은 필름을 빼돌려 자신들의 영화를 찍고 있다. 이런 소동 속에 원작자가 촬영현장을 방문하려 하고 바비는 이 방문을 막아보려 하는데…. 엘리나 Elina 감독 클라우스 해로/ 핀란드, 스웨덴/ 80분/ 패밀리 1952년 랩랜드. 깊이 사랑한 아버지를 결핵으로 잃은 가난한 늪텃집 소녀 엘리나는 병치레를 하느라 1년 뒤처진 학교로 돌아간다. 그러나 규율을 중시하고 스웨덴어를 전용해야 한다고 믿는 완고한 교사 홀름은, 핀란드어밖에 모르는 급우를 도우려던 엘리나와 충돌한다. 틈만 나면 혼자 늪으로 가 아빠와 대화하고 “아빠처럼 바른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긍지 높은 엘리나는 아빠를 ‘말썽꾼’이라고 은근히 질책하는 홀름 선생에 대한 저항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생활고에 짓눌린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매일 점심을 굶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되는 스킬을 가르치려는 교사와 거기에 속박되기에는 너무 자유롭고 고집 센 정신을 가진 조숙한 소녀의 대결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듀바리 부인의 갈등 못지않게 숨막히는 긴장을 불러일으키며 이 성장영화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하늘을 나는 교실 The Flying Classroom 감독 토미 비간트/ 독일/ 114분/ 패밀리 가난한 시인 마르틴, 선장 계부를 둔 조숙한 음악가 요니, 심약한 귀족 꼬마 울리와 그를 애틋하게 돌보는 주먹 소년 마티아스를 기억하는지? <하늘을 나는 교실>은 에리히 케스트너의 명작 아동소설을 현대화한 경쾌한 학원물이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심지 굳고 의리 깊은 우리의 주인공들은 학생들의 친구가 되고자 하는 교사 유스투스의 속깊은 보살핌 속에 모험과 도전으로 가득 찬 1년을 보내게 된다. 집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의 패거리와 ‘세력다툼’ 속에 크리스마스 연주회의 악보를 잃어버린 소년들은 자작 뮤지컬 공연에 재주와 힘을 모은다. 현대판답게 마르틴의 가난은 부모의 이혼문제로 대체됐고 베를린 장벽이 존재하던 시절의 이념 갈등, 랩송과 브레이크 댄스가 드라마의 요소로 끼어든다. <품행제로>식의 베개싸움, 소년합창단의 보이 소프라노는 원작을 읽고 자란 어른 관객의 막연한 향수를 자극할 법하다. 웃는 개구리 A Laughing Frog 감독 히라야마 히데유키/ 일본/ 96분/ 월드 판타스틱 무한반복되는 하루에 갇힌 여자의 사랑을 그린 <턴>으로 제5회 부천영화제를 방문했던 히라야마 히데유키 감독의 2001년작이다. 바람을 피우고 공금횡령으로 도피한 이페이는 장인의 별장에서 생활하며 새로운 구애자와 재혼을 고려하고 있는 아내 료코에게 불쑥 나타나 도피처를 요구한다. 이혼에 합의하는 조건으로 은닉에 동의하는 료코. 그러나 벽장에 숨어 숙식과 배설을 해결하며 조그맣게 뚫린 구멍으로 아내를 방문하는 경찰, 처갓집 식구들, 새 애인, 자기의 정부를 관찰하던 이페이는 질투와 반성을 거쳐 다른 관점으로 자기의 과거와 미래를 생각하게 된다. 시퀀스가 바뀔 때마다 전지적인 관찰자처럼 꾸륵거리는 개구리의 모습이 암시하듯, 은신한 남자가 언제 어떻게 발각되느냐보다 평범한 생활인의 욕망이 얽히고 헛다리를 짚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허무한 유머가 영화의 초점이다. 짤 없는 운명 Destiny Has No Favorites 감독 알바로 벨라르데/ 페루/ 90분/ 베타 컬러/ 월드 판타스틱 신분상승, 금지된 사랑, 배신, 결혼과 임신. 연속극의 세계가 보여주는 운명은 ‘짤 없다’. 페루영화 <짤 없는 운명>은 남편이 여행간 사이에 저택 정원을 TV 연속극 촬영장으로 빌려준 상류층 사모님 아나가 점점 연속극의 세계에 말려들어 빚는 소동을 보여준다. 안주인의 신분을 숨기고 오디션장에서 조연 배역을 따낸 아나는 진부한 각본에 지친 감독과 로맨틱한 관계를 발전시키고, 진작에 연속극에 매료돼 있던 두 하녀도 아나를 협박해 단역을 따낸다. 작가는 아나를 경쟁드라마의 스파이라고 의심하지만 감독은 “만날 똑같은 얘긴데 스파이는 무슨 얼어죽을!”이라고 일축한다. 아나의 연기와 그녀가 제안한 플롯의 변화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아나에 대한 작가와 다른 여배우들의 적개심은 높아지고 연속극의 내용과 아나의 현실은 경계를 알 수 없게 뒤섞여버린다. 연기를 빙자해 심리적 복수를 행하는 하녀를 통해 페루 사회의 계급적 긴장을 읽을 수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미들랜드 Once upon a Time in the Midlands 감독 셰인 메도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 100분/ 월드 판타스틱 <로미오 브라스의 방>을 통해 노동계급의 현실과 감정을 다뤄온 셰인 메도스 감독의 신작으로 그의 영화 중 가장 균형잡힌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서부극을 좋아한 아버지에게서 ‘셰인’이라는 이름을 지어받은 감독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미들랜드>를 웨스턴 구도를 차용한 코믹한 멜로드라마로 연출했다. 12살의 딸 말린을 키우는 독신모 셜리는 다정한 성격의 남자친구 덱과 유사가족을 이루고 살아가지만, TV 토크쇼에서 덱이 불쑥 내민 공개 구혼반지를 거절한다. 그러나 어릿광대의 밴이나 터는 덜떨어진 범죄자로 살아가던 말린의 생부 지미가 TV를 보고 발끈해 ‘가족 되찾기’에 나서면서 이들의 일상은 작은 폭풍에 휘말린다. <트레인스포팅>의 벡비 로버트 칼라일이 섹시한 건달 지미로, <노팅힐>의 라이스 아이판스가 소심하고 자상한 덱으로 분한다. <로열 테넌바움> <풀 몬티>식의 유머가 있는 ‘영국인의 사랑’. 콜드 썸머 A Cold Summer 감독 폴 미들디치/ 호주/ 82분/ 월드 판타스틱 알코올로 죽을 각오를 한 듯한 남자 바비는 어느 날 가방을 도둑맞고 분노한 여자 티아와 마주친다. 술 이름인 ‘티아 마리아’를 별명으로 지닌 화려한 그녀는 자신을 유부녀이자 재즈가수라고 소개하고 바비와 즉흥적인 섹스를 나눈다. 얼마 뒤 티아는 버스정류장에서 5년간 보지 못한 옛 친구 페드라와 만난다. 헤로인 중독으로 죽은 남자친구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페드라는 꽃가게에서 일하며 시와 노래를 쓰지만 티아와 마찬가지로 자신감 결핍에 시달린다. 배우들의 자기고백적인 대화를 디지털 비디오로 녹화한 테이프에서 대사를 뽑아내고 핸드헬드 카메라로 엿새 동안 게릴라 스타일로 촬영한 <콜드 썸머>는 세 남녀가 술과 섹스와 거짓말의 힘을 빌려 망각하고 싶어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천천히 드러낸다. 시드니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본 한 관객은 “빈속에 털어넣는 보드카 같다”고 평했다. 마지막 한걸음까지 As far as My Feet Will Carry Me 감독 하디 마틴스/ 독일/ 158분/ 월드판타스틱 시네마 영화를 보노라면 이것이 단지 상상력의 산물임을 믿기 힘들다. 전쟁과 탈출, 그리고 인간 의지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마지막 한걸음까지>는 클레멘스 포렐이라는 인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세계대전 당시 포로가 되었다가 10여년 뒤에 다시 가족의 품에 안긴다. 이 시간의 공백 동안, 그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던 셈이다. 세계대전 중 포로가 된 포렐은 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탈출한다. 그는 수용소 소장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 달아나고 스파이 혐의를 뒤집어쓴다. 영화는 포렐이라는 인물의 내적 갈등을 부각한다. 시베리아의 서늘한 풍광과 함께, 역사적 시련에 처한 인물의 드라마를 구성하는 것. 감독인 하디 마틴스는 재미있는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스턴트맨으로 영화계에 입문했고 이후 연출분야로 발을 옮겼다. 상영시간 2시간30여분에 이르는 대작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김혜리, 김현정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비틀어 본 3대 흥행장르 - 장르야 놀자 똥침놀이하며 [4]

아예 합동장례식을 치르지 그래 신파멜로 커플 동호회의 마지막 정모 인터넷 동호회 ‘애죽사모’(애인 두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임)와 ‘시애사모’(시한부 애인을 둔 사람들의 모임)의 회원들이 각각 정모를 가지기로 했다. ‘신파멜로’로 검색하면 결과페이지 거의 끝자락에 뜬다는 이 동호회들은, 40여년 전 ‘미울 때면 다시 한번’ 만나는 커플의 전설적인 명성 이래로 유구한 전통, 강력한 약발을 자랑한다. 이번 정모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음을 느끼는 ‘애죽사모’ 회원들의 건의로 열리게 됐다. 어쩌면 정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나름대로 속사정 많은 신파 커플들의 수다 한판. ‘애죽사모’ 회원 소개 ‘오! 바람’본명 이은주, 커플암호 <연애소설> <하늘정원> 무직. 서간문학창작이란 고상한 취미를 가진 회원. 이메일이 아닌 우편으로만 편지쓰길 고집하고 있다. 카이스트 출신의 지성녀답게 말투와 태도가 똑 부러지고 솔직쾌활하다. ‘내가찾은닭살’본명 손예진, 커플암호 <연애소설> <클래식> ‘바람’의 친구로 역시 무직. 이 ID는, 초창기 정모 때 ‘내가 찾은 아이’를 간드러진 목소리로 불렀다가 얻은 것. 참을 수 없게 민망한 양무릎꺾기춤까지 췄다고. 평소 말수가 적고 얌전하다가도, 뜬금없이 반딧불을 잡아달라고 조르는 버릇이 있다. ‘향기샴푸’ 본명 장진영, 커플암호 <국화꽃향기> 샴푸 잘 써서 남편 잘 만난 여인. 프리랜서 번역일을 한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뒤로 세상에 대해 시니컬하며, 한 남자에게 7년 동안 튕겼을 만큼 자존심계의 절대지존. 임신 8개월째다. ‘사과사세요’ 본명 김정은, 커플암호 <나비> 시골 깡촌 출신. 남자친구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사과를 팔러 다닌다. 기본적으론 툭하면 울어대는 눈치없는 푼수. (왼쪽부터) 이은주, 손예진, 정진영, 김정은 ‘시애사모’ 회원 소개 ‘데스 따블’본명 차태현, 커플암호 <연애소설> ‘바람’과 ‘닭살’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남자. 택시 운전으로 먹고산다. 잠시 밤무대 가수를 뛰었다. 대학 시절 여자친구를 잘못 만나 엽기적으로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ID는, 정든 여인 두명을 한꺼번에 떠나보내야 한다고 한탄하며 지은 것이다. ‘아임 이도령’ 본명 조승우, 커플암호 <클래식> 중학교 때 춘향이라는 여자애를 좋아했다가 얻은 별명에, 채팅할 때마다 “후아유?” 타령해서 생긴 ID. 고등학교 때 만난 첫사랑이 ‘닭살’이다. 썰렁, 진지, 성실 그 자체. 전봇대 전등 스위치를 기막히게 찾아내는 재주가 있다. ‘우울한 PD’ 본명 박해일, 커플암호 <국화꽃향기> 라디오 방송국 PD다. ‘향기샴푸’를 꼬셔내기 위해 7년 동안 비오는 날만 골라 <우울한 편지>를 라디오 프로그램에 죽어라 신청했다. 7년 동안 매달려 얻은 여자가 시한부라는 사실에 늘 우울하다. ‘중국식 정원’ 본명 안재욱, 커플암호 <하늘정원> 그가 운영하는 병원 이름이기도 하다. 한의사를 꿈꿔 중국 유학을 갔으나 거기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아 신나게 즐기다 왔다. 한국의 유명 나이트를 전전하던 중 ‘바람’을 만났다. 냉정과 이성의 화신. ‘폼따구’ 본명 김민종, 커플암호 <나비> 폼나게 돈 벌어서 돌아오겠다고 고향 떠난 청년. 밤무대 가수로 잘 나갔으나 직업을 몇번 바꾸더니 일이 안 풀리고 있다. 편하게 농땡이 부리는 백수이자 몽상가. (왼쪽부터) 차태현, 조승우, 박해일, 안재욱, 김민종 장소는 ‘데스 따블’이 일하던 카페. 두 동호회 회원들이 각각 테이블을 잡고 앉았다. 무지갯빛 찬란한 ‘아기자기 패션’으로 꾸며졌다. 6년 전에 ‘편지’커플이 수목원 한가운데다 만들었던 노오란집의 명맥을 잇는 클래식한 인테리어가 돋보인다. 다들 편안하고 만족스러운 눈치다. 범인들은 접할 수 없는, ‘무지개문’ 너머 ‘하늘정원’에나 있을 법한 세계다. 예쁜 탁자에 둘러앉아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초록빛 싱그러운 자연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다. 그림같다. 속사정 1 : 판타스틱 첫사랑 오! 바람(이하 바람) 우리 다들 여전히 희고 곱네요. 향기샴푸님은 요즘도 밥 대신 요플레? 향기샴푸(이하 샴푸) 네, 하하하. 접때 우리 그이가 동네 가게에서 싹쓸이해온 요플레 무더기가 아직도 반 이상 남았어요. 삼시 세끼 요플레로 때워도 좀처럼 안 없어져요. (한숨) 내가찾은닭살(이하 닭살) 전… 하는 일도 없는데 자꾸 살이 빠져요…. 바람 또! 또! (원망스럽다) 너 정말 왜 그러니! (눈물 그렁) 사과사세요(이하 사과) (엄한 분위기 속에 조심스레) 저어, 그럼… 피부관리들은 다들… 어떻게…. 향기 꾸준히 케어받고 잠 푹 자고 음식 가려 먹고. 멜로드라마의 스펙터클은 딴게 아니고 바로 우리의 보디라인과 새하얀 얼굴이에요. 닭살 실은 제가 무리식이… 뭐더라? 바람 무리식이요법 부작용으로 인한 만성영양결핍 및 대(對) 타인시선과다예민반응에서 오는 신경성위염을 앓고 있대요. 사과 저만 스트레스받고 사는 게 아니었군요. 향기 어쩔 수 없어요. 생존전략인걸요. 남자들의 첫사랑 상대가 되려면. 못말리는 ‘첫사랑의 판타지’ 모르세요? 첫사랑의 설렘과 순수함은 ‘청순하고 맑은 여인’을 통해 완성된다고 하더군요. 바람 내 목표가 바로 그거에요!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대상. 저랑 닭살은 가난해요. 하지만 없는 형편에 쪼개쓰고 아껴쓰면서 가난을 벗어나려고 애쓰느니, 타고난 미모나 살려서 멜로계에 한번 떠보고 말겠어요! 향기 카이스트 나오셨다고 들었는데. 여자들은 배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니까. 속사정 2 : 꼭 죽어야만 해요? 데스 따블(이하 따블) 병원은 잘 되세요? 중국식 정원(이하 중국식) 몰라요. 그것보다도, 댁의 친구한테 자꾸… 정이 들려고 그래요. 마음주기가 두려워요. 내가 마음을 줬던 사람들은 모두 날 떠났어요! 따블 어디서 만나셨다고 했죠? 중국식 나이트. 우울한 PD(이하 우울PD) 허무해요. 7년 동안 매달려서 결혼한 여자가 죽어간다니… 내 첫사랑인데. 지하철 안에서 처음 그녈 봤어요. 착하고 예쁜 여자였죠. 그녀가 실수로 떨어뜨린 동전이 제 앞으로 굴러왔어요. 주워주니까 인사만 하고 가버렸었지만. 중국식 예쁜 여자였겠죠. 일부러 떨어뜨린 동전이고, 여자들은 뒤통수에도 눈이 달렸어요. 아임 이도령(이하 이도령) 어디서 들었는데… 예쁜 여자가 남자의 첫사랑이 되면 죽음을 저주로 맞는다는 설이 있대요. 중국식 우리 병원만 해도, 남자한테 첫사랑 고백 듣자마자 바로 불치병 걸려서 시한부 판정받고 입원 온 예쁜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죠. 따블 잘해주면 더 빨리 죽는다면서요. 중국식 당연하지. ‘남자들의 지고지순한 헌신과 기다림 그리고 다정함’이 심리적으로 그런 여성들의 병을 진척시킨다고 하더군요. 사랑의 완성이죠. ‘죽음으로 봉인되는 사랑.’ 순결한 여인과 헌신적인 남성의 그림 같은 사랑이 신선상태로 영구보존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둘 중 하나라도 죽고 나면 그 사랑은 더이상 오염될 수 없어요. 같이 죽으면 말할 필요도 없죠! 중국식 사실 1년만 사귀어봐도 못된 성질, 별별 희한한 습관이 통제불가능하게 튀어나오면서 환상이 모조리 깨지잖아요? 실체가 드러나기 전에 얼른 마무리하는 거예요. 우울PD 그래서 그런 건가요? 전 아내의 병명을 모릅니다. 따블 저도 닭살과 바람이 무슨 병 걸렸는지 몰라요. 어차피 치료할 것도 아니잖아요. 남자들의 슬픈 첫사랑에겐 불가피한 이별이 운명이에요. 속사정 3 : 사랑 빼면 남는 게 없는 내 인생 닭살 그래서 그런 걸까? 바람 뭐가? 닭살 아무리 내가 하는 사랑이지만, 이런 있을 법하지도 않은 슬픈 사랑에 제약이 너무 많다고 느껴져서 말이야. 사과 맞아요… 그 얘기가 하고 싶었어요… 전, 그이랑 섹스를 안 해봤어요! (처절해 보인다) 닭살, 바람 우리도 그래요! 향기 (불룩한 배를 어루만지며) 나만 해봤군요. (흐뭇해한다) 바람 심지어, 저는 고아예요! 직업도 없어요! 친구도 (닭살을 찌르며) 얘 하나예요! 이렇게 ‘단순한 인생’이 또 있을까요? 사과 저도 부모님 얼굴 몰라요. 향기 울 엄마 아빠는,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더욱 처량해지려면 두분이 죽어줘야 한다면서, 등장하자마자 기꺼이 교통사고를 당해 주셨어요. 그 덕분에 7년을 버틴 그이의 기다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외로움이 완성되었죠. 사과 말도 안 돼요…. 향기 된다고 생각해야 팔자타령도 덜 나와요. (한숨) 닭살 사랑 한 가지만 열심히 하고 살라는 하늘의 뜻 같기도 해요. 거추장스러운 거 다 빼줄 테니 예쁜 사랑만 열심히 가꾸렴…. 누군가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아. 갑자기 닭살이, 벽시계를 쳐다보고 나더니 픽 쓰러진다. 여자들은 비명, 옆 테이블서 놀란 남자들은 벌떡. 사실 여자들은 당황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누가 틀었는지 ‘피아노 선율로 시작되는 슬픈 음악’이 카페 안을 채운다. 따블이 뛰쳐나와 외친다. “닭살!” 하나 깨어날 맘이 없는 닭살. 어제 비를 맞아서 그런 것 같다며 따블이 재빨리 닭살을 들쳐업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음악은 이내 스트링 합주로 변하고 볼륨마저 커진다. 상황을 지켜보던 사과가 목놓아 운다. 바람과 향기도 쉴새없이 눈물을 흘린다. 목을 놓건 흐느끼건 어떻게 울어도 예쁜 그녀들. 사과의 울음소리가 사과조각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신파스러운 장면이 한컷 완성된다. 바람이, 바닥에 떨어진 쪽지를 발견하고 줍는다. 쪽지 겉면에 “나의 첫사랑으로 불어온 바람에게…”라고 쓰여 있다. 펼친다. 한심한 글씨체로 보아 따블이 쓴 게 분명했다. “바람, 사실 내가 좋아한 건 닭살이 아니야. 그동안 혼자 오해하고 많이 힘들었지? 바람,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이럴 수가. 바람이 중얼거린다. “이제야 이 사실을 알게 되다니… 이제야….” 바람의 뺨이 눈물로 범벅이 되면서도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살짝 곁들여진다. “하지만 다행이야…이제라도 니 맘 알게 돼서… 바보…!” 그리고 픽 쓰러지는 바람. 중국식이 뛰쳐나와 정신을 잃은 바람을 안고 바람처럼 카페 밖으로 달려 나간다. 사과가 신파스레 계속 우는 동안 이제사 도착한 폼따구가 다가와 함께 울어젖힌다. “에이씨! 울지마, 울지마아. 우리, 다 벗어나자! 여기서 도망가서 둘이 함께 고기잡으면서 행복하게 살자, 응? 우리 그렇게 하자!” 아기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폼의 품에 폭 안긴 사과. 두 사람은 곧 밖으로 나간다. 그러나 얼마 못가 두 사람은 바로 옆에서 들린 뻥튀기 기계 소리에 놀란 나머지 길바닥에서 심장마비로 즉사한다. 그 와중에 산고인지 불치병 통증인지 모를 뭔가 느끼기 시작한 향기가 끙끙대다가 우울PD에게 업혀 나간다. 홀로 남은 이도령,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금세 음악이 잦아든 카페를 나섰다. ‘시애사모’ 동호회 회원들이 자리한 가운데 합동 장례식이 치러졌다.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어차피, 그들과 그녀들만의 삶이고 사랑이었으니까. 이제 중국식, 따블, 우울PD, 이도령은 그들의 첫사랑을 영원히 가슴에 묻어 두어야할 판이다. 모두들 울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녀들은 떠났고 일편단심 그들은 이 땅에 남았다. 하나 실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다행이었다. 그들은 아름다운 첫사랑을 추억의 책갈피로 꽂아두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 각자의 길을 나섰다. 그런데, 막판에 닭살이 따블의 등에 업혀 나가는 바람에 첫사랑을 빼앗기고 만 이도령만은 달랐다. 어느 쌀쌀한 겨울날, 닭살의 무덤 위로 작은 종이 한장이 날아들었다. “이도령, 첫사랑을 온전히 획득하지 못한 억울함에 화병으로 사망하다.” 박혜명 na_mee@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비틀어 본 3대 흥행장르 - 장르야 놀자 똥침놀이하며 [2]

2신: 6월X일, 18시45분 “엽기가 대세다. 그 위에 장사 없다” 장은식/ 아 사투리로 재미본 건 친구파하고 그나마 장씨 가문이 전붑니다. 대한민국에서 경상도, 전라도 해묵었으면 이제 끝이죠. 더이상 사투리를 미끼로 지역적인 거점을 확보하려는 시도로는 유권자를 우리편으로 잡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자, 여기 차트를 보시죠. (장 총장이 광주 지역 출신 네발가락 조직의 계보도를 꺼내어 첫장을 넘긴다. HAITAI라고 적혀 있다.) 장은식/조폭 출신으로 지난해 잠깐 정치권에 얼굴을 들이밀었던 네발가락 조직은 상당한 수준의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했습니다. 하지만 유권자들의 관심 밖이었습니다. 저걸 하이타이라고 읽는 무식함에 이제 넌더리를 낸 거죠. 김지훈/ 하이타이. 맞잖아 x발. 이호창/ 언제부턴가 충무대에 학이 안 보인다더라니. 문리를 깨치지 못한 정치인이 많아져서인가. 박중필/ (이호창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친한 척한다. 그는 평소 모범생에 관심이 많다) 나 문덕고 캡짱 출신 박중필이요. 심심한데 공이나 한번 던져줄라우? 이호창/ 나, 타자올시다. (펭귄 두 마리가 날아오른다) 장은식/ (옆자리 잡담을 자르며) 이젠 유세장에서도 엽기적인 제스처로 승부해야 할 땝니다. 단순히 언변을 꼬는 것만으론 부족합니다. 기억하시죠. 제가 검찰총장 면접 때 정액후라이로 샌드위치 만들어 먹은 거. 시선을 모으려면 그 정돈 해야죠. 이번 총선에서 공천이 된다면 전 대학 시절 차력동아리 활동 때 경험한 바 있는 마우스 생식을 감행할 생각입니다. 박중필/ (피우고 있던 담배를 혀를 내밀어 끄며) 잉글∼리∼쉬. 마우∼스. 아이 쉐끼들. 놀고들 있네. 회동에 앞서 책들 보고 교양을 먹었어야지. 이른바 뒷간 유머라 불리는 할리우드 정치인들의 연설문을 언제까지 써먹을 거여. 장은식/ (끈질기게) 강도를 높이면 됩니다. 유권자들 의외로 가학과 피학을 오가는 거 즐기거든요. 변화에 발맞춰 정치인들도 체통버리고 화끈하게 나서야 합니다. 이호창/ 말세다. 박중필/ 거기 장은식이. 유권자들을 잘 모르나 본데. 우리가 원더우먼과 손오공이 그거 하고 있는 거 보여주겠다고 공약하면 유권자는 밍키하고 바람돌이가 하는 건 없냐고 따져 묻는다니까. 걔들 따라가다간 가랭이 찢어져. 장은식/ (격앙된 표정이다) 박 의원, 법을 모르면 입 닥치쇼. 현행 정치관계법에 따르면 원더우먼과 손오공의 섹스는 수간(獸姦)이므로 재연 불가요. 바람돌이는 요정이니까 상관없지만. 박중필/ (삿대질을 하며) 법 좋아하네. 그럼, 손오공과 바람돌이는 관계를 맺어도 괜찮냐. 3신: 6월X일, 19시25분 “어떻게든 가족을 끼워라” 장인태/ 아. 잣것들. 구라가 징그럽구만. 다른 대책은 없나. 김봉두/ 현재 제가 NEIS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걸 이용하면 어떨까요. 코미디 성향이 아닌 정치 입문자들은 블랙리스트를 따로 만들어 교정작업을 추진하면 되지 않을까요. 이호창/ 그거야 자네가 조직적인 촌지 수수를 위해 만들려던 것 아닌가. 김봉두/ 아, 처음에야 그랬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 큰일에 쓰는 것이 좋을 듯하네요. 장인태/ 그걸 추진했다가 들키믄 밥줄 끊기잖아!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호창/ 요즘 보면 우리쪽 정치인들이 지나치게 학벌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는 듯한데. 박중필/ 다른 쪽에 비해 코미디쪽이 좀 처지긴 하지.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 나온 놈 중엔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놈이 조폭 코미디로 정치 입문하겠다고 설치더라니까. 이호창/ 예전에 나도 글공부를 그리 좋아했던 건 아닌데. 요즘 엘리트 사위 맞으려고 협박까지 하는 세태를 보면 갑갑하기 짝이 없소. 장인태/ (자신을 겨낭한 듯한 발언이 나오자 당황해 하는 눈치다) 이 의원 발언 횟수가 너무 많은디. 나중에 뒷말이 무서운께 내가 털어놓아야겠구만. 가문의 영광을 위해 그동안 숨겨둔 딸 일매 사윗감도 엘리트긴 한디 그놈은 지난번하곤 달라. 워낙 내가 욕을 먹어놔서, 이번엔 내가 직접 공을 들였다니께. 내가 관리 안 했으면 사시미 칼 들었을 놈이라고. 이호창/ 부모는 다 생존해 계시고? 장인태/ 아니, 부친은 일찍 돌아가셨네. 김봉두/ 잘하신 겁니다. 그 녀석과 일종의 부자관계를 맺으시면 되겠네요. 다른 장르에선 가족을 걷어내려고 안간힘인데, 우린 이럴 때일수록 가족관계를 이빠이 강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관객층 확보에도 유리하고, 폭력에 갈취해도 윤리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거든요. 저도 한때 절도죄로 감옥에 있어봐서 아는데 그땐 아무도 면회를 안 와주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비웃기만 하더라구요. 그러다 올해 초에 촌지 수수 사건에 휘말렸을 때는 병상의 아버지 때문에 죄도 감해지고, 여성 유권자들의 눈시울도 좀 붉히게 만들었죠. 이호창/ 아부지가 생각나는구료. 학 같은 분이셨는데. 장인태/ 내 한때 가문의 영광을 얻었을 때 주위에서들 패밀린지 가족인지 모르겠다고들 했지. 그것도 좋은 전략이야. 4신: 6월X일, 20시15분 “난데없는 사랑은 어찌해야 좋단 말이요?” 김봉두/ (빈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나야 자연과 연애했지만, 요즘 우리 성향 의원들 중에 부쩍 여성 보좌관들, 더 나아가 멜로 성향의 여성 의원들과 스캔들이 많아져 정작 코미디 유세에 지장을 초래하는 의원들도 있는 것 같은데요. 유세 시간에도 종종 늦고. 이호창/ 난 아니오. 나도 내 마음을 훔쳐간 도둑이 있었으나 도중에 구국에 대한 일심으로 더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 않았소. 박중필/ 그녀는 날 버리고 누굴 만나 결혼을 했을까. 우이∼씨. 어 근데 스잔이 좋소, 경아가 좋소? 이호창/ 엥? 아. 난 쑥대머리 한 곡조면 그만이오. 김지훈/ 어, 나? 근데 어떠하남. 난, 인기가 많은걸. 이호창/ 자네가 인기가 많은지, 아님 그녀가 인기가 많은지 생각은 해봤나? 김봉두/ 6학년 언어생활 교과서에 보면 나오지. 평강공주와 온달이라고. 요즘 보면 하나같이 그넘이 그넘이야. 공희지/ 이걸 생각해봐요. 그런 짝짓기는 10년 전의 로맨틱코미디나 지금이나 유효해요. 여성 관객이 그걸 좋아하니까. 김봉두/ 에이 씨. 남자 관객은 싫어할 것 아니야. 온달이 바보 짓 하는 것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이호창/ 하긴, 유성룡 선생의 서책이던가, 이황 선생의 그것이던가. 기억은 안 나오만, 현대 남성들의 모성에 대한 향수는 거의 몽유병 수준이라고 들었소. 김지훈/ 뻔하다 뻔하다 하지만 결국 보고 싶어한다고. 일부에선 코미디 성향 의원들과 멜로 성향 의원들과의 잦은 교류가 더이상 지지율을 높이기 어렵다고 하지만 그건 지지층을 넓히면 돼. 아예 투표 연령을 15살이나 12살 수준으로 낮추면 되잖아. 애들은 공약의 현실성 여부는 안 따져. 맺어지면 되거든. 공희지/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군요. 하하하. 김지훈/ 또한 지난해부터 붐이 한차례 일긴 했는데, 앞으로는 각 당에서도 18살 이하 양아치들이 맘편히 웃길 수 있도록 일정 정도 피선거권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박중필/ 그렇지. 옳은 말씀. 근데 내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하는 심정으로 정치계에 일찌감치 입문하지 않았더라면 그게 가능했을까. 장인태/ 막판에 이렇게 많이 쏟아지는군. 어쨌든 총선 일정이 얼마 안 남았는데, 좀더 코미디 표밭 유지를 위해 자주들 얼굴 좀 보드라고. (순간, 짱돌 수십개가 천막 안으로 날아든다. 모두들 몸을 피한 뒤 놀란 눈으로 내다보는데, 현수막이 “웃으면 복이 와요!”에서 “지구를 지켜라!”로 교체되어 있다.) 장인태/ 외계인의 사주를 받은 우리가 인간의 엔도르핀을 저하시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니는 놈들 짓이로군. 뭣들 허는 것이냐. 색출해서 싸그리 잡아넣어! 2J/ 뭘로 집어넣습니까? 장인태/ 아, 그거 있잖아. 새끼야. “진지한 웃음은 당분간 금한다”는 내용의 긴급조치 20호! 이영진 anti@hani.co.kr <<< 이전 페이지 기사처음 다음 페이지 >>>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점유율 연동 검토

스크린쿼터를 일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대신 일정 기간 단위로 국산 영화의 점유율과 연동해 조정하는 방안이 정부내에서 신중하게 검토되고 있다. 또 한.미 투자협정(BIT) 협상 과정에서 스크린쿼터와 BIT 체결이 연계 논의되는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판단 아래 아래 분리 대응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8일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스크린쿼터와 관련된 당사자들의 견해와 연구기관의분석 등을 종합 검토한 방안이 조만간 마련될 것"이라고 밝히고 "쿼터를 일시에 축소하거나 없애기보다 일정 기간을 두고 국산 영화의 점유율과 연동해 신축적으로 운영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일정 기간'과 '점유율'은 각계 의견을 종합해 조정 과정을 거쳐야 하며 현재로서는 일단 3년과 50%선이 검토되고 있으나 점유율 부분은 아직 유동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방안이 시행되면 국산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50%를 넘을 경우 현재 연간 146일인 스크린쿼터를 일정량 축소한 뒤 3년 후의 재점검에서 점유율이 지나치게 떨어진 것으로 나타나면 다시 일부 상향조정하는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올 상반기 국산 영화의 시장점유율은 서울 기준 47%선으로 집계되고 있다. 정부는 또 스크린쿼터와 BIT가 연계돼 스크린쿼터가 BIT의 '걸림돌'로 인식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협상 과정에서 스크린쿼터를 예외로 둔 뒤 도하개발아젠다(DDA) 서비스 협상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한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인들의 모임인 주한 미국상의(암참)도 지난 1999년 스크린쿼터와 BIT를 연계하지 말도록 본국에 요청했다"고 상기시키고 "미국이 스크린쿼터의 폐지나 축소를 요구해도 직접 상관이 없는 부분을 수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두 사안의 분리 대응 필요성과 스크린쿼터가 한국 영화 진흥에 최적의 수단인 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재정경제부 등 경제 부처는 5년 정도 기간을 두고 여러 단계를 거쳐 스크린쿼터를 조정해 73일에 가깝게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며 국내 영화의 점유율과 스크린쿼터를 연동할 경우 확대-축소를 결정짓는 기준 비율을 20∼30%선으로 대폭 낮춰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논의 과정이 순탄하지 않을 전망이다. 재경부 관계자는 "스크린쿼터를 BIT와 연계시키지 않으려면 명확한 축소 일정을미국에 제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두 문제를 분리하기보다 BIT를 추진하되 우리측의축소 일정을 바탕으로 스크린쿼터 문제를 유보 조항으로 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견해를 제시했다. (서울=연합뉴스)

영화사 신문 제14호 (1937~1938)

영화사신문 제14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7 ~ 1938 위대한 애니메이션 태어나다<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 흥행가도, 비평계에서도 높은 점수 월트 디즈니는 1937년 겨울 최초의 컬러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를 개봉했다. 이 작품의 엄청난 성공은 디즈니에 해마다 장편 만화영화 한편씩을 공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1938년 초, 영화 사상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가 개봉 전의 모든 우려를 불식시키며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또한 1937년 12월21일 첫 공개된 이래 비평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은 <백설공주…>를 두고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사실 개봉 전 할리우드 안팎에는 <백설공주…>가 ‘재앙’이 될 거라고 경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까지 애니메이션은 본프로 전에 ‘끼워’ 상영되는 5, 6분짜리 단편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관례를 깨고 장편을 만든다면, 그것도 <백설공주…>처럼 뻔한 이야기를 애니메이션화한다면 대체 누구 돈을 주고 보러올 것인가 하는 회의가 팽배했던 것이다. 더구나 <백설공주…>는 애초의 제작기간과 제작비를 크게 웃돌면서 우려를 부추겼다. 7개월로 예정된 제작기간이 30개월을 끌었으며, 그러는 동안 제작비는 25만달러에서 175만달러로 치솟았던 것이다. 하지만 월트 디즈니는 굴하지 않고 모든 역량을 <백설공주…>에 쏟아부었다. 스튜디오 직원들의 여자친구, 부인까지 동원돼 그림을 셀룰로이드에 옮기고 색을 칠할 정도였다. 그는 새로운 애니메이션 창조를 꿈꿨다. 그래서 풍성한 디테일 묘사를 위해 통상의 셀보다 큰 셀을 이용했고 화면의 전·중·후경을 서로 다른 속도로 촬영할 수 있는 ‘멀티플레인 카메라’라는 새 장비로 입체적인 화면을 만들어냈다. 또한 주연과 조연, 심각한 캐릭터와 웃긴 캐릭터를 골고루 배치하고 번번이 노래와 춤을 삽입했다. 뒤늦게 디즈니호에 승선, 배급을 맡은 RKO 또한 <백설공주…>의 흥행으로 큰 수익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 원래 <백설공주…>의 배급사는 유나이티드아티스트(UA). 하지만 계약이 만료된 1937년 가을, 디즈니가 UA의 계약 연장조건인 ‘텔레비전 방영권 양도’를 거부하면서 계약은 종료된다. 이때 재정압박에 시달리는 디즈니 스튜디오에 유일하게 관심을 보낸 회사가 바로 RKO였다. 한편, 월트 디즈니는 앞으로 해마다 장편애니메이션 한편을 공개한다는 계획 아래, <피노키오> <밤비> <판타지아> 등 세편의 제작을 동시에 진행할 예정이다. 에이젠슈테인, 돌아오다 9년 만에 유성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로 컴백 12세기 게르만족의 침략에 대항해 러시아 민중을 이끈 슬라브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 왕자의 이야기를 다룬 에이젠슈테인 감독의 <엘렉산더 네프스키> 마침내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돌아왔다. 1938년 12월 에이젠슈테인은 그의 첫 유성영화 <알렉산더 네프스키>와 함께 스크린으로 돌아왔다. <낡은 것과 새 것> 이후 무려 9년 만이다. 물론 그 사이에 전혀 영화를 만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1932년작인 <멕시코 만세>는 제작을 맡긴 소설가 업튼 싱클레어가 에이젠슈테인을 불신해 촬영 막바지 단계에서 제작을 중단시킨 뒤 자기 멋대로 영화를 편집했기 때문에, 사실상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라고 보기 어렵다. 또 1935년에는 유성영화 <베진 초원> 제작에 착수했지만, 스탈리의 신임을 받고 있던 국립영화사 소유즈키노의 대표 보리스 슈미야츠키가 딴죽을 거는 바람에 1937년 제작이 중단됐다. 슈미야츠키가 숙청되지 않았다면 <알렉산더 네프스키>도 미완으로 끝났을지 모른다. 슈미야츠키는 집요하게 에이젠슈테인을 물고늘어졌다. 그는 모스크바에 돌아온 에이젠슈테인이 착수하려는 프로젝트마다 트집을 잡았다. 그 트집이 얼마나 집요했냐 하면, <베진 초원>을 찍을 때 <프라브다>를 통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에이젠슈테인이 과거의 오류를 인정했지만, 그와 무관하게 영화를 찍고 있다”고 비난한 적도 있다. 소문에 따르면 슈미야츠키는 괴짜 같은 성격과 불손한 유머감각을 지녔다는 이유로, 에이젠슈테인을 몹시 싫어했다고 한다. 에이젠슈테인은 슈미야츠키가 면직된 이후에야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제작을 허가받을 수 있었다. 대규모의 예산이 들어간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12세기를 배경으로 게르만족의 침략에 대항해 러시아 민중을 이끈 슬라브 영웅 알렉산더 네프스키 왕자를 주인공으로 영화. 에이젠슈테인은 프로덕션 세부는 물론 화장과 의상디자인까지 직접 맡으며, 혼신을 기울여 이 영화를 완성했다. 더러운 나치스트 다큐, <올림피아>히틀러 49번째 생일 축하 상영 레니 리펜슈탈의 <올림피아> 2부작이 1938년 4월20일 히틀러의 49번째 생일 축하 행사의 일환으로 상영됐다. 이는 나치의 선전상인 괴벨스의 아이디어였는데, 그는 <올림피아>를 보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라고 극찬했다. <올림피아>는 리펜슈탈이 <의지의 승리>에 이어 나치의 의뢰를 받아 만든 다큐멘터리로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 대해 담고 있다. 나치는 리펜슈탈에게 “국가 사회주의의 이념을 칭송하는 노래처럼 보이게 올림픽을 찍어달라”고 주문했다. 나치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리펜슈탈은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었다. 2주간의 올림픽 동안 40명의 카메라맨이 동원됐는데, 다이빙 장면을 연속적으로 찍기 위해 카메라맨들은 몇 개월 동안 수중촬영 훈련을 받기도 했다. 또 공중촬영을 위해 비행선을 띄웠다. 그렇게 해서 촬영한 필름이 400km였으며 이를 편집하는 데 2년이 걸렸다. 리펜슈탈은 이 필름을 2부작(총상영시간 225분)으로 완성했는데, 1부가 <민족의 향연>이고 2부가 <미의 향연>이다. 올림픽 경기를 통해 나타난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과 힘에 집중하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에는 아리아족 선수들의 수상을 강조하고 다른 경쟁자들의 인종적 열등함을 보여주려는 정치적 의도가 곳곳에 배어난다. 프랭크 카프라-해리 콘 다시 악수1년간 법적 소송 마무리, 새 프로젝트 협약 프랭크 카프라와 해리 콘이 드디어 화해했다. 오늘의 콜럼비아를 있게 한 주역인 이 사람은 1937년 가을 근 일년을 끌어온 법적 소송을 해결하고, 새 프로젝트인 <당신은 그걸 가질 수 없어>에 착수하기로 했다. 제작자와 감독으로, 10년 넘게 함께 일해온 두 사람이 법정까지 가게 된 사연은 이렇다. 카프라의 1934년작 코미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의 대성공 이후 ‘카프라’라는 이름은 흥행의 보증수표가 됐다. 누구보다 이를 잘 아는 콜럼비아 사장 해리 콘은 B급영화인 <당신이 요리만 할 줄 안다면>를 영국에 배급하면서 제작사를 콜럼비아가 아니라 ‘프랭크 카프라 프로덕션’으로 명기했다. 흥행을 위한 꼼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카프라는 해리 콘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리고 콜럼비아를 떠나기로 결심, 다른 영화사나 독립 제작자들과 협상을 벌여왔다. 하지만 해리 콘으로서는 카프라를 떠나보낼 수가 없었다. 카프라가 누군가? 신문이나 잡지에 리뷰도 실리지 않는 싸구려영화나 만들던 콜럼비아에, 자산 규모가 파라마운트나 MGM의 수십분의 일에 불과한 이 작은 영화사에 명예와 부를 동시에 안겨다준 감독 아닌가? 카프라를 붙잡기 위해 해리 콘은 카프라의 요구대로 20만달러를 주고 <당신은 그걸 가질 수 없어>의 저작권을 사들였다. 콜럼비아로서는 파격적인 액수다. 카프라는 1930년대 초 콜럼비아와 장기계약을 맺었다. “어떤 스튜디오도 줄 수 없는 재량권을 얻기 위해서”다. 그에 대한 대가로 해리 콘은, 카프라가 완전히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카프라에게 상당한 권한을 일임했다. 그리고 카프라는 아카데미상 5개 부문을 석권한 <어느 날 밤…> <디즈씨 도시에 가다> 등 잇단 성공작을 내놓았다. 차기작인 <당신은 그걸 가질 수 없어>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현대판 코믹버전. 두 사람의 ‘애증’관계를 잘 아는 콜럼비아 내부 인사의 귀띔에 의하면, 시나리오를 쓰면서 카프라는 남녀주인공의 결합을 막는 양가 아버지에게 해리 콘의 성격을 절반씩 나눠놓았다고. 곧 한 사람은 저속하고 야비한 사업가인 반면 한 사람은 확고한 이상주의자란다. 이 사실을 해리 콘은 알까, 모를까? <거대한 환상>으로 돌풍 일으킨 장 르누아르 감독“인류의 공통된 인간성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의 1936년작 <인생은 우리들의 것>을 패러디해서 말한다면 ‘1937년은 장 르누아르의 것’이다. 르누아르는 <거대한 환상>의 개봉과 동시에 프랑스 평단과 극장가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나아가 이 영화는 정치·사회적으로도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거대한 환상>을 보고 루스벨트 대통령이 “민주주의자라면 누구나 보아야 할 영화”라고 강추한 반면, 나치 선전상 괴벨스는 “영화 제1의 적”이라고 비난했다. ‘거대한 성공’을 뒤로 하고 그의 두 번째 인민전선영화 <라 마르세예즈> 준비로 바쁜 그의 시간을 조금 빌렸다. 제목이 왜 ‘거대한 환상’인가. 제목도 정하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촬영과 편집이 끝난 다음에야 <거대한 환상>이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달리 마땅한 제목이 없었다. 전쟁영화이지만 전투가 등장하지 않는다. 예외적인 상황을 선택했다. 비행사들은 진흙탕 참호와 포탄에 으깨어진 음식과 거리가 멀다. 보병들의 고생을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 인류의 공통된 인간성을 표현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독일 장교로 출연한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과의 작업은 어땠나. 제작자가 슈트로하임을 캐스팅하자고 제의했다. 그가 수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흥분했다. 원래 그 독일 장교 역은 5분이 안 되는 작은 역이었는데, 그가 캐스팅되면서 시나리오가 크게 바뀌었다. 촬영 초기엔 그와 다툼도 많았다. 하지만 내가 ‘당신과 다투느니 연출을 포기하고 말겠다’고 하자 울면서 노예처럼 나의 지시를 따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라 마르세예즈> 준비는 잘돼가나. <인생은 우리들의 것>을 만들면서 노동자 계층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권력 장악 속에서 우리의 파멸적인 이기심에 대한 해독제 같은 것을 보았다. <라 마르세예즈>는 비관례적인 모금 방식으로 제작비를 모으고 있는데, 미리 표를 구입한 사람은 무료로 영화를 볼 권리를 얻는다.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치에 저항할 책임이 있다. <인생은 우리들의 것>을 찍을 때도 느낀 건데, <라 마르세예즈>는 내게 인민전선의 의기양양한 기운을 숨쉬게 해준다. (이 인터뷰는 르누아르의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장 르누아르>를 토대로 한 것입니다.) 단 신 들 히치콕 할리우드 진출 영국 감독 히치콕이 할리우드로 간다. 1937년 8월 히치콕은 미국에서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을 만나 타이태닉호 침몰에 관한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은 1939년 4월부터 발효된다. 얼마 전 <숙녀 사라지다>을 마무리한 히치콕은 미국으로 가기까지 남은 시간 동안 새 영화 <자마이카인>을 찍을 예정이다. 로마에 유럽 최대규모 스튜디오 오픈 1937년 3월28일 로마 근교에 유럽 최대의 스튜디오인 ‘치네치타’가 문을 열었다. 로마 근교 투스콜라나에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치네치타는 60ha에 이르는 부지에 실험실, 강당, 9개의 사운드 스테이지, 제작진 숙박시설 등을 두루 갖추고 있다. 영화의 선전성에 주목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영화를 활성화하기 위해 치네치타를 설립했다. 무솔리니가 1년 전 직접 건설현장에 와서 첫삽을 뜰 만큼 큰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런 때문. 이러한 그의 관심을 반영한 듯 스튜디오 문의 입구에는 “영화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국제영화자료실 설립 1938년 7월15일 파리에서 국제영화자료실(Federation International des Archives du Film, 이하 FIAF)가 설립됐다. 국제적인 연대와 교류를 통해 영화자료에 관한 보존과 연구를 도모한다는 것이 창설목적이다. FIAF 설립을 주도한 앙리 랑글루아는 “세계 영화유산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국가별 라이브러리간에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다”라고 설립배경을 밝혔다. 스펙터클의 창시자, 멜리에스 별세 1938년 1월25일 영화적 스펙터클의 창시자, 조르주 멜리에스가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향년 78살. 이날 장례식에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와 조르주 프랑쥐 등 많은 멜리에스의 추종자들이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지켜봤다. <안개 낀 부두>에 흔들린 우정 1938년 5월 프랑스, <안개 낀 부두>가 두 친구의 사이를 벌려놓았다. 장 르누아르가 이 영화에 대해 “파시스트 프로파간다”라며 반감을 표시했기 때문. 르누아르는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도덕한 인물들이 “행복하게 독재자의 손을 흔들어주는 파시스트”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스스로를 반파시스트라고 믿는 시나리오 작가 자크 프레베르는 몹시 화를 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