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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신 전영객잔] 슬픔은 어디서 보아야 하는가

7년 전 어느 밤에 서간체 형식의 짧은 칼럼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양영희의 다큐 <디어 평양>에 관한 것이었는데 양영희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그려낸 방식에 대해 내가 느낀 감동을 적었고 그 표현 중에는, “당신의 영화가 보여준 만드는 자로서의 ‘나’와 카메라와 대상으로서의 존재 그 사이에서 뛰던 관계의 맥박을 나는 쉽게 잊기 힘듭니다”라는 감탄의 표현도 있었다. 양영희는 왜 아들들을 북송시킨 아버지의 과오를 역사의 자리에서 냉정하게 다시 생각하지 않는가. 그건 일종의 회피가 아닌가, 하고 비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의 칼럼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웬만한 영화평론가보다 뛰어나고 날카로운 영화적 안목을 갖춘 유명감독 한분이 사석에서 내게 위의 칼럼을 언급하며 그와 같이 <디어 평양>을 비판했다. 내게는 그 영화의 어떤 결여된 객관성을 지적하는 말로 들렸는데, 그 비판이 일견 정당하다고는 생각했어도 공감은 끝내 못했던 것 같다. 그 영화의 주관적 특수성을 그 감독은 불편하게 느꼈던 것 같고 나는 용인했던 것 같다. 이런 오래된 기억들을 새삼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된 건 양영희의 첫 번째 극영화 <가족의 나라>를 보고 나서다. 이 영화를 먼저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울음바다가 된 극장 안의 풍경을 전해주었다. 깊은 식견과 섬세한 필력을 지닌 문학평론가 정홍수 선생께서 이 영화를 보고 손수건을 다 적실 만큼 눈물을 흘렸다고 말해주셔서 그 의견이 궁금한 나머지 나는 영화를 보기도 전에 냉큼 평문부터 청탁 드리기도 했다.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많은 이들이 그렇게 이 영화의 감흥을 미리 말해주었다. 그런데 영화를 본 나는 결국 울지 못하였다. 눈물을 흘리고도 욕이 나오는 영화들이 많지만 이 영화의 눈물은 감동과 직결되는 것이라 솟지 않은 눈물이 더 난감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는데 그 뒤에는 궁금했다. 눈물에도 스포일러가 있어서인가. 혹시라도 풍문이라는 예방주사를 너무 맞아 둔감해진 것인가. 혹은 재일 한국인과 북송사업에 관한 나의 역사적 무지나 무관심 때문인가. 그도 저도 아니면 나 홀로 감성의 가뭄에 시달리는 것인가. 역사적으로는 불우하고 한 가족의 일생으로서는 안타깝고 영화적으로는 수준 이상의 격식을 갖춘 이 영화를 말하며 비 공감의 고백을 늘어놓는 건 욕먹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피하지 못할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가운데 내가 신뢰하는 다른 이들의 눈물의 가치를 폄훼하지 않으면서 나의 그 감정적 난처함의 경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다큐 감독이 극영화를 택하는 이유들 다큐를 만들던 감독이 왜 극영화를 만들게 되었을까.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양영희의 차기작이 극영화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반사적으로 들었던 생각이다. 다큐 감독으로 연출 경력을 시작했으나 극영화 감독으로 돌아섰던 폴란드의 거장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다큐에서 극영화로 옮겨가도록 만든 일화 하나를 전하고 있다. 그가 <스테이션>(1981)이라는 다큐를 촬영 중이던 때다. 새벽녘에 그를 찾아온 경찰이 전날 밤 촬영팀이 촬영한 필름들을 무작정 압수해갔고 시간이 지나서야 돌려주었다. 얼마 뒤에야 키에슬로프스키는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들이 촬영하고 있던 그날 그 기차역에서 어머니를 살해하고 토막 내어 가방에 나눠 담은 한 소녀가 시체가 담긴 가방을 그 역의 사물함 어딘가에 넣었다는 것이었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에 그 행각이 담기진 않았지만 그는 카메라가 왼쪽으로 조금이라도 돌아가기라도 했다면 자신의 영화가 범죄행위를 입증하는 경찰의 정보 제공물 신세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에 치를 떨었다. 다큐가 태생적으로 세상의 증인 역할을 한다는 것에 대해 새삼 깨닫게 된 어두운 일화다. 하지만 오로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일화를 전하며 키에슬로프스키는 더 중요한 생각을 밝힌다. 요약건대, 그의 카메라가 누군가에게 더 다가가기를 원할 때마다 대상은 더 멀어지거나 마음을 닫는다며, 그의 기록의 카메라가 사랑을 그리고 싶다고 하여 사랑을 나누는 인물들의 침대에 들어갈 수 없고 죽음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여 누군가가 죽어가게 할 수는 없으니, 그러한 결핍감을 이유로 다큐를 떠나 극영화로 가게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여러 차례 인용된 바 있는데, 다큐 <동>을 촬영하던 중에 극이 필요하다고 느껴 <스틸 라이프>를 연출한 지아장커는 다르지만 또 유사하게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그 사람의 생활을 찍지만 다가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비밀스러운 부분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내가 그의 비밀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야기가 필요해집니다.” 양영희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큐멘터리는 카메라를 대고 찍히는 모습을 보는 과정이다. 섬세하고 미묘한 순간이 있지만, 대상이 마음속에 있는 말들을 꺼내주지 않으면 말로 되어 나오지 않는다. 반면 극영화는 마음속에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놓는 과정이다.” 기록하는 것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그것들을 표현하고 싶어질 때 그 다큐의 감독들은 극영화의 세계로 갔다. 반면에 어떤 위대한 다큐 감독들은 기록할 수 있는 것을 최선으로 기록해내서가 아니라 도저히 기록할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실패하여 인정함으로써 어떤 극영화보다도 위대한 다큐를 만든다. 우린 위대한 다큐 감독 김동원과 <송환>의 예를 잘 알고 있다. 어쨌거나 다큐에서 극으로 옮겨간 이들은 다큐가 할 수 없는 일을 극이 하게 하라는 명제를 신봉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이라면 다큐에서 극영화로의 이런 이동에 관하여 말할 때 사실의 기록을 중시하는 공고한 객관적 세계(다큐의 세계)에서 상상적 허구를 허용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세계(극의 세계)로 옮겨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두편의 다큐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에서 <가족의 나라>로 옮겨간 (그리고 다음 영화도 극영화를 계획 중이라는) 양영희의 경우도 그러한가 생각해보면 이 경우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예컨대 양영희는 지난 두편의 다큐를 만들면서 객관에 의존하는 것을 처음부터 자신의 창작 반경 안에서 주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거나 주관 안에서만 보는 데 몰두한 것 같다. 그 점은 <디어 평양>에서 특히 매혹적인 장점이었다. 양영희의 다큐는 원래부터 강력한 주관성의 힘으로 작동했다. 그렇다면 양영희의 극영화는 어떠한가. <가족의 나라>는 다소 놀랍게도 주관적이기는커녕 자기의 이야기를 매우 객관적으로 그리고자 한 것 같은 인상을 일차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실은 의아하다. 양영희가 다큐에서 극영화로 가면서 그녀 자신이 원했던 것,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 또는 비밀 또는 하지 못한 말들, 그건 객관적 태도로는 얻어지기 힘든 것이라고 그녀 스스로 결론내리고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객관이 아니라 여전히 주관의 문제에서,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다만 그러기 위해 지금으로서는 이 논의를 조금만 더 잠정적으로 끌고 가보자. 카메라가 고수하는 특정 시점에 대한 의문 물론이지만 어떤 극영화는 충분히 사태를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가족의 나라>도 그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 같다. 북송선에 실려 북한에 가서 살고 있는 리에의 오빠 성호는 뇌에 종양이 생겼다. 북한의 의술로는 치료받을 가망이 없어진 성호는 치료를 받기 위해 겨우 당국의 허락을 얻어 일본에 왔다. 하지만 체류 기간으로 허락받은 3개월 중 단 3일 만에 돌아가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이렇게 슬프기 그지없는 이야기이지만 영화는 비교적 차분한 톤으로 진행된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몇 차례 감정적으로 폭발하기는 하지만 대개는 3일간의 일상을 그저 수긍하는 사람들로 그려진다. 그 전반적인 차분함이 양영희가 자신의 이야기를 객관적 태도로 지켜보려 했다는 인상을 주며 한편으론 담백해서 좋다는 감상도 얻어낸다. 영화를 본 동료 기자도 이 영화의 장점은 그런 담백함에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같은 인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서사와 인물을 다 말하고 나서도 <가족의 나라>를 말하기 위해서는 결국에 말해야 하는 것, 그건 영화가 어떻게 이 이야기와 인물들을 보여주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영화에서 어떻게 보여주느냐 하는 문제는 이른바 시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가족의 나라>에는 주요 장면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특정 시점이 있다. 영화에서 인물들의 감정의 격류가 흐르는 몇 장면에서 특히 더 두드러지고 있다. 초반부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우리는 성호가 옛 일본 집으로 찾아드는 걸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성호가 차에서 내려 골목을 따라 집으로 걸어가면 어머니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골목길을 걸어가는 성호를 몇 발짝 거리를 두고 쫓아가던 카메라는 성호와 어머니가 만나는 순간에 성호의 왼쪽 뒤편으로 휙 하고 돌며 모자의 상봉을 그 자리에서 비춘다. 혹은 성호가 여동생 리에에게 북의 공작원이 되어주지 않겠느냐고 넌지시 말한 다음 그에 화가 난 리에가 성호에게 화를 내는 장면에서도 유사한 시점이 등장한다. 카메라는 차마 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무안함과 죄책감을 삭이는 성호의 누운 왼쪽 옆모습을 역시 비슷한 거리에서 담아내고 있다. 한편, 결국에 자신을 북송시킨 아버지에게 성호가 화를 참지 못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결국 하는 말은 그것뿐이로군요”라고 결정적인 대사를 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카메라는 종전의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유사한 자리에서 그를 잡는다. 카메라에 담기는 저 인물들에게서 서너 발짝 떨어진 비스듬한 뒤쪽 특히 왼편에서의 시점이 유독 <가족의 나라>에서는 많이 등장한다. 왼쪽과 뒤편이라는 자리가 중요하기보다는 그와 같은 고정된 시점의 자리가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시점>이라는 개론서를 쓴 조엘 마니는 시점에 관하여 우리의 상식에 준하여 이런 설명을 한다. 가령 죽은 나무나 바위가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보일 때가 있는데 그걸 더 잘 보여주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누군가에게 “이 각도에서, 내 자리에 와서 보세요. 자, 어떤 것이 보이나요? 당신에게도 그 형상이 보이죠?”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그 표현 자체가 시점의 구성 원리를 경험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이다. “시네아스트는 카메라를 단지 가장 좋은 시선의 지점에 위치시킬 뿐 아니라, 관객에게 ‘자신의’ 시각과 ‘자신의’ 시점을 전달할 수 있는 장소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시점이란 물리적 의미의 시점을 뜻하지만, 심리적 의미의 시점, 나아가 정신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의 시점을 가리키기도 한다”고 그는 적고 있다. 영화의 카메라가 특정한 자리에서의 물리적 시점을 고수할 때 거기에는 그 대상이 이해되기를 바라는 창작자의 이해의 지평이 함께 깃들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양영희는, 카메라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기를 바라면서 극영화를 만들게 된 양영희는, <가족의 나라>에서 우리를 그 자리로 자주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자 여기로 와서 보세요, 제가 있는 자리로 와서 보세요, 그래야 저들의 마음이 잘 보입니다, 저들의 슬픔이 잘 보입니다. <가족의 나라>의 이 특정 시점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거기에는 얼마간의 기원이 있는 것 같다. 가령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한 한 가지 비교대상이 될 만한 영화로 <워낭소리>를 들 수 있다. <워낭소리>는 다큐인데도 불구하고 극화를 강조하기 위해 인위적인 시점숏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감성을 자극했다. 그러니까 다큐의 카메라가 할 수 없는 극적 시점의 구조라는 <워낭소리>의 이 활용을 인정하는 경우에는 공감을 백배 더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 영화를 기만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비교컨대 <가족의 나라>에서의 쟁점은 시점이 놓인 자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가족의 나라>는 <워낭소리>와 반대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워낭소리>가 다큐에 극영화적 시점숏을 도입한 것이라면 <가족의 나라>는 극영화에 다큐적 시점을 도입하고 있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객관적이라는 인상에 큰 몫을 한다. <가족의 나라>에서의 핵심은 시점숏의 교차가 아니라 시점, 언제나 몇 발자국 떨어져 대상과 그들의 무리를 지켜보는 일관된 보기의 자리다. <워낭소리>에서 시점숏의 도입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은 부류와 그걸 느낀 부류가 감동의 크기가 달랐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도 이 시점의 자리에 갑갑함을 느끼지 않는 부류와 그렇게 느끼는 부류의 감상은 차이가 날 것이고 나는 아무래도 후자였던 것 같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 다큐적 시점으로 인하여 <가족의 나라>에 관한 나의 감성적 감상은 오히려 방해 받은 것 같다. (극영화에서) 슬픔은 풍요로워야 더 슬프다 영화의 창작자 중 누구라도 그 자신이 특별히 선호하는 시점의 자리는 가질 수 있다. 그것은 기질과 취향과 사상의 문제인 데다 그 밖에 우리가 더 알 수 없는 요건들에 의해 결정되는 미묘한 문제다. 그런데 그때 핵심이 될 만한 물음은, 특히나 그것이 극영화일 때, 그 시점의 자리로 인하여 저 극화된 서사의 세계가 어떻게 보이게 되느냐는 것이다. 이때 중요한 조건이 한 가지 있다. 극영화에서의 시점은 전적으로 시점 자체의 자리가 강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저 극이라는 세계의 독립적인 소우주를 자율적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암묵적인 자리로 스스로 가야 한다는 점이다. 다큐가 기록을 전제하듯이 극영화는 극의 자율이 기본적 전제다. 그러므로 이때의 시점은 기본적으로는 보여서는 안되며, 아니 그렇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드러내 무언가를 강제하거나 강박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극의 세계를 보장하는 기초적인 극영화 안에서의 시점의 약속이다. 모던 시네마의 시네아스트들이 카메라가 놓인 시점의 자리를 일부러 종종 드러내는 경우는 그 극영화의 약속을 일부러 위반하여 자기반영적 성찰을 얻기 위해서였다. 앞서 말한 <가족의 나라>의 그 시점은 그런 경우가 아닌데도 잘 숨겨지지 않을 뿐 아니라 숨겨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인 양 시종일관 강조되어 드러난다. 나로서는 그 특정 시점이 그렇게 자기의 자리를 계속 고집할 때 개인적으로 저 시점의 공고함으로 인해 극의 세계에 있는 인물들이 어딘가 주눅 들어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인상을 종종 받게 되었다. 그건 극의 인물들이 처한 갑갑함과는 별개의 갑갑함을 불러온다. 그러니까 시점의 자리로 인하여 저 극의 세계가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고 우린 말했다. <가족의 나라>에서는 그 특정 시점의 결과로 마치 무대 위에 올라 있는 배우들이 리허설을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가족이 모이거나 친구가 모였을 때 혹은 오빠와 동생이 모였을 때를 생각해보자. 그러니까 관계가 이뤄지는 중요한 장면에서 카메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무리와 떨어져 자리를 잡고 조망하면서 그들이 대사를 할 때 그 대사의 향방을 따라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며 이 상황을 관찰하고 중계하는 누군가 매개가 있음을 수시로 일깨우고 있다. 이 점을 두고 대상을 다루는 양식은 다큐에서 극으로 바뀌었으나 그 카메라의 존재론적 역량은 바뀌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디어평양>에서 카메라에 들어오는 것은 양영희의 눈을 대신하여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나라>에서 카메라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게 직접 들어오는 것이어야 한다. 다큐가 위대한 것은 거기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만 극영화가 자유로운 것은 거기 카메라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의 나라>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극영화의 이야기가 다큐의 시점에 시종일관 묶여 있다는 인상이다. 카메라가 있지만 그것의 존재는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무매개성이 극영화의 가능성이라고 할 때, 어딘지 모르게 <가족의 나라>는 그 무매개성을 믿지 않고 오히려 매개하려고 하고 있다. 이야기가 지어졌다면 시점도 지어져야 하는데 양영희는 이야기는 짓고 시점은 기록하는 쪽으로 놓아둔다. 이 시점을 관찰과 중계의 시점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관찰과 중계의 시점이 지닌 어떤 거센 힘이다. 이 이야기가 다름 아니라 다큐로부터 그리고 양영희 자신의 실화로부터 파생한 것이라는 점을 이 관찰과 중계의 시점을 빌려서 계속 특권적으로 행사하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너무 지나친 것일까. 그러니 관찰과 중계라고 불렀지만 사실은 그 시점의 자리에서 개입과 권위의 효과를 느끼게 된다. 여기에는 지금 펼쳐지는 이 극이 자기의 극적 세계를 스스로 조직하고 가질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창작자가 갖고 있는 이상한 두려움이 있다. 정작 극을 취했지만 이것이 실화였음을 강조하려는 이 자세는 저 허구의 기적적인 자율성을 다큐적 시점으로 다스리려 하는 것 같아서 나의 사례처럼 몰입되지 않고 완성되지 않는 감상을 낳기도 하는 것 같다. 관찰과 중계의 역할을 넘어 어떤 관할의 무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다. 그 무의식은 사실의 권위로, 다큐의 권위로 극을 관할하려는 무의식이다. 이 점을 두고 양영희가 원치 않았고 의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혹은 다큐를 만든 감독이었기 때문에 극영화로 전환하면서도 바꾸지 못한 단순한 습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나라>에 주관이 작 동하였는데 그 주관이 긍정적 주관으로 이행되지 않고 부정적 주관으로 작동한 결과, 어떤 시각적 법령의 자리가 형성된 것만은 부인하기가 어렵다. 이것이 앞으로 양영희의 극영화를 옥죄게 될 시각적 대타자의 자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양영희만의 긍정적 원근법적 자리가 될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가족의 나라>에서는 이 시각적 법령의 자리가 영화에 가능했을 무수한 조화를 가로막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니까 나의 눈물은 그 조화를 목격하지 못해 실패한 것이라고 지금 이 순간 둘러대고 싶어진다. 양영희가 극영화로 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나. 결국 조화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인물들의 내밀함을 드러내는 극적 기적을 바랐으나 그것이 시각적 대타자의 시선에 붙들려 적당한 격조 안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니 이 영화에 관해서라면 인물들의 마음 상태가 조화롭게 드러났다기보다는 몇개의 감정적 대사가 있었고 그 대사가 발생하는 순간을 포착할 수 있는 가장 특권적인 자리에 카메라가 있었고 그로써 내면의 외화라는 성취를 이뤄냈다고 믿게 하는 최면술이 작동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이 양영희 영화만의 특별한 면모로 승화될 수도 있는 일이겠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다소 메마르며 상투적인 그 인상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연출자의 주관으로 세우되 저 인물들 사이의 물질적 관계 사이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 결국 양영희가 바란 건 이 조화였는데 이 영화엔 그게 없다고 나는 느꼈으니, 다큐에서는 통하지 않을 말이지만 극영화에서는 억지를 부릴 만한 말을 하나 하고 싶다. 슬픔은 풍요로워야 더 슬프다. 영화의 맥박이 다시 뛰기를 몇년 전 어느 주말 아침에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국경의 남쪽>이라는 한국영화를 보았다. 한 남자가 사랑을 약속한 여인을 두고 탈북했고 서울에 정착했다. 남자는 곧 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져 살림을 차렸는데 이윽고 북에 두고 온 여인이 필사적으로 경계를 넘어 남자를 찾아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둘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헤어진다.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남녀의 사랑이라는 큰 차이가 있지만 그 어떤 역사의 가정법도 통하지 않는 임시적 만남과 헤어짐이 주는 슬픔이라는 점에서 <가족의 나라>와 비교 가능한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북에서 온 여인이 남자에게 화가 나서 고작해야 화단의 돌을 몇개 집어 힘없이 던지는 저 순박한 행위를 했을때, 그때 그녀의 다소 굵은 음성과 무표정한 포기와 원망이 돌 몇개 에 실려 그렇게 촌극으로 끝나고 말았을 때, 어마어마하게 큰 감정과 운명의 소용돌이에 대한 극단적 반응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미숙하고 촌스러운 저 행위가 그녀의 마음을 행위로 확 하고 드러낸 것처럼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가족의 나라>가 <국경의 남쪽>보다 뛰어난 영화라고 생각하지만 연출자의 능력 범위를 순간 벗어나 생성되어버린 <국경의 남쪽>의 그런 자율적 기적의 순간이 <가족의 나라>에서는 더 절실했다고 나는 느낀다. 물론 <가족의 나라>에 그런 장면이 하나 있다면 그 시점의 자리를 끊임없이 벗어나 감정을 몰아오는 성호의 얼굴 혹은 배우 이우라 아라타의 얼굴일 것이다. 하지만 와카마쓰 고지의 <11•25 자결의 날>에서는 극단적 우익주의자이며 탐미주의자였던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를 연기하였고 지금 여기에서는 가냘프고 허약한 희생자를 연기하는 아라타의 얼굴만으로는 역부족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디어 평양>을 본 다음 감동에 젖어 “당신의 영화가 보여준, 만드는 자로서의 ‘나’와 카메라와 대상으로서의 존재 그 사이에서 뛰던 관계의 맥박을 나는 쉽게 잊기 힘듭니다”라고 과거에 썼던 건 그 관계의 거리감이나 그 거리를 포착하는 감독의 자리가 정확해서가 아니라 부정확하다 해도 자유롭고 생생하게 느껴져서다. 카메라와 대상의 생생한 거리와 그 거리를 찰나에 뛰어넘는 의외의 기적적인 디테일들이 함께 약동하는 걸 느껴서다. <디어 평양>은 그런 맥박이 느껴졌고 <가족의 나라>에서는 그걸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양영희 영화의 맥박이 다시 뛴다면 그때 또 무엇이라도 감탄을 고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둘러대는 수밖에는 없겠다.

[must 10] 오랜만이야, 에드워드

1. 오랜만이야, 에드워드 영화도 보고, 전시도 보는 일석이조의 기회. CGV에서는 <가위손> <프랑켄위니> <링컨: 뱀파이어 헌터>를 번갈아 상영하는 팀 버튼 기획전을 연다. 관람 고객 전원에게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9 <팀 버튼 전>’의 초대권을 증정하는 이벤트도 함께한다. 3월15일부터 21일까지는 CGV명동에서, 3월22일부터 28일까지는 CGV명동역에서 만날 수 있다. 2. 전설의 외전 현재까지의 누적 판매량 1천만부. 한국 판타지 소설의 고전이 된 <퇴마록>의 이우혁 작가가 출간 20주년을 맞아 <퇴마록 외전>을 3월28일 출시한다.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는 중/단편 위주의 옴니버스 작품집으로, 본편의 맥락상 제외됐던 이야기들이 공개될 예정이다. 3. 사랑은 미술을 타고 화폭에 수놓인 멜로영화 속 명장면을 감상해보자.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전>을 연다. 영화에 나타난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미술작품을 통해 해석해보는 독특한 전시다. 각각의 내러티브를 갖춘 여섯개 섹션으로 구성돼 있으며, 3월14일부터 6월16일까지의 전시 기간 중엔 초청 강연과 무료영화 상영회도 마련된다. 4. 천천히 부드럽게 재즈 보컬 나윤선이 8집을 발표했다. 제목은 ≪Lento≫. 한국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호평받아, 문화지 <텔레라마>로부터 만점에 해당하는 ffff를 받는 등 필청음반으로 꼽혔다. TV 광고음악으로 쓰였던 <아리랑>도 수록되었다. 5. 봄이 싫은 이유 예년보다 황사가 더 심해질 거란다. 미세먼지 농도도 최고조에 이를 예정이라니 당장 약국으로 달려가 황사 마스크를 구입하자. 가글 용품도 챙기고, 공기 청정기도 다시 꺼낼 때다. 따뜻한 차를 텀블러에 담아 자주 마시는 것도 좋겠다. 흡연자에겐 금연을 권한다. 황사가 기승을 부리는 동안만이라도. 6.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머리 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피판 로드쇼’는 계속된다. 이번에는 지난 1월 개봉됐던 <빨간머리 앤: 그린게이블로 가는 길>이다. 3월29일 롯데시네마 부천역점에서 시민들을 대상으로 무료로 상영한다. 신청은 영화제 홈페이지에서. 7. 떡밥왕의 신작 미드 어느 한날한시에, 지구상의 모든 전기가 끊기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면? 줄거리에서부터 ‘떡밥왕’ 제작자 J. J. 에이브럼스의 취향이 확연히 드러나는 미드 <레볼루션>이 <폭스>에서 3월23일 자정부터 방영을 시작한다. 반전과 플래시백의 묘미, 기대하겠다. 8. 안되면 새로고침하면 되고~ 올해로 <한겨레> 인터뷰 특강이 10회를 맞았다. 올해 주제는 ‘새로고침: F5’이다. 강사로 나선 은수미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사진), 표창원 범죄심리학자, 홍세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전 편집장,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말하는 새로고침은 뭘까? 3월26일부터 4월10일까지 서울 용산 백범기념관에서 듣자. 수강신청은 온라인(hanter21.co.kr 또는 hanedu21.co.kr)으로만 받는다. 9. 뮤지컬영화의 신기원을 찾아 <레미제라블> 다시 보기, 다시 듣기. 블루레이와 O.S.T 앨범을 한데 묶은 한정판 디지북이 발매된다. 배우 인터뷰, 메이킹필름, 비하인드 스토리 등 알찬 스페셜 피처와 24쪽으로 구성된 북클릿이 함께 온다. 4월23일 출시예정으로 예약에 들어갔다. 10. <서칭 포 슈가맨> DVD 발매 음악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 <서칭 포 슈가맨>은 뮤지션이 모르는 새 그의 음악이 국경을 넘어 새 생명을 얻은 실제 사연에서 시작한 영화다. 극장에서 보지 못했다면, 이 DVD만큼은 놓쳐서는 안된다. 예술의 힘을 믿게 하는 영화.

우리의 아픔이자 슬픔이었던 것 <비념>

영화는 김민경 PD의 외할머니인 강상희씨의 개인사로 출발한다. 강상희의 남편 김봉수는 제주시 애월읍 납읍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 4.3 사건의 희생양이 되어 총살당했다. 강상희는 딸과 함께 10년 만에 남편과 시어머니의 무덤을 찾고 이후 카메라는 제주를 돌며 4.3 당시 학살이 일어났던 곳을 찾아가며 그 공간을 화면에 담는다. 돌과 나무, 물, 바람, 곤충 등 자연의 모습과 더불어 제주도가 세계 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는 텔레비전, 자동차, 라틴댄스를 추는 사람들의 모습들도 카메라는 함께 보여준다. 영화는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4.3 사건 전후 제주도에서 이주해 정착한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1949년 이덕구 부대가 토벌대와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인 이덕구 산전을 비롯해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던 곳을 찾아가던 영화는 강정 마을까지 이른다. 학살이 일어났던 그곳에서 영화는 해군기지 건설을 둘러싼 여러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리고 영화는 다시 강상희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비념>은 언급한 줄거리의 요약만으로는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없는 영화이다. 영화는 4.3 사건이나 강정 사태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거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설명하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사용되는 내레이션도 없고 인터뷰도 많지 않다. 인터뷰가 나와도 말하는 사람은 많은 장면에서 보이지 않고 다른 화면으로 대체된다. 영화는 관객의 정서를 인물이나 이야기의 극적 전개로 끌어내지 않는다. 영화가 치중하는 것은 먼저 바위, 숲, 나무, 뱀, 쥐, 떨어진 귤, 눈 위의 발자국과 같은 이미지들이다. 영화는 자연의 정물과 인간의 풍경 사이에서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자연적 존재이지만 자연과 분리되어서 풍경으로밖에 볼 수 없는 인간의 시선 속에서 기억과 흔적을 더듬어간다. 가까운 것 같지만 한없이 멀리 떨어져 우리를 꿈꾸게 만들고 꼼짝 못하게 만드는 권력과 반대로 흔적은 아무리 멀어도 가깝게 느껴지고 우리를 깨어나게 만든다. <비념>은 백 마디의 말을 선택하는 대신 한 할머니에게 새겨진 자국에서 시작해 이 시대의 우리에게 한없이 멀게만 느껴지는 4.3을 풍경의 바깥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비념은 큰 규모의 굿과 다르게 무당 한 사람이 방울만 흔들며 빌고 바라며 기원하는 작은 규모의 무속 의례다. 영화는 제주의 무속 의례로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과 시작이 의미하는 것은 결국 애도이다. 영화는 그것의 방법으로 불편함과 낯섦을 택한다.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영화가 친절하게 제시하는 것 같은 주민들이 희생된 곳의 지도조차 도보여행 코스인 올레길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한때는 우리의 아픔이자 슬픔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낯설게만 느껴지는 그것을 영화는 우리에게 같이 비념하자고 한다.

[신 전영객잔] 이런 무력함이라니

9.11 테러 이후 빈 라덴을 사살하기까지 CIA의 비밀활동을 다루며 여전히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건드린 탓에 <제로 다크 서티>는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은 <허트 로커>에 비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에 따라오기 마련인 불평들, 이를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왜곡했다며 온갖 증거들을 나열하는,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와 별 관계가 없는 비평들은 열외로 두자. <제로 다크 서티>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문제를 삼는 지점은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장면에 대한 영화의 태도이다. 빈 라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으므로 결국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한편에, 오히려 현실의 고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다른 한편에 있다(“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 21> 894호). 캐스린 비글로는 이런 논쟁에 대해 <제로 다크 서티>는 판단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라 현장감을 중시하는 영화라는 식으로 에둘러 방어하고 있지만, 고문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사안일 수 있냐는 비판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혹은 영화적 입장 앞에서의 지나친 신중함이 오히려 영화를 오해하기 쉽게 만들었거나 고문의 도덕성과 유효성에 대한 보다 심도 깊은 논의들을 가리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JonathanRosenbaum.com’, 2013년 2월 13일). 현장감이라고? 그런데 정작 내게 흥미로웠던 건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입장을 선택한 다음, 영화 안과 밖을 혼란스럽게 오가며 결국 논리를 단순화하는 미국 평단의 반응이 아니라, 이 영화가 한국에서 받아들여지는 방식이다. 이 영화를 보고 쓴 비평가들의 평이나 일반 관객의 단상은 대체로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이라는 단서를 달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 장르로서 영화가 주는 쾌감, 특히 그 현장감에는 매혹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를 공유한다. 말하자면 캐스린 비글로가 성취한 영화적 야심을 즐기면서 그 영화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는 불편해한다는 것이다. 그 태도를 문제 삼고 싶은 건 아니다. 어쩌면 이 간극은 모든 전쟁‘영화’들을 보면서 관객인 우리가 언제나 느낄 수밖에 없는 모순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고문을 옹호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으로 <제로 다크 서티>를 판단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라면, 나는 망설인다. 이 영화에는 그보다 복잡한 쟁점들이 있거나, 질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고문을 방관하거나 자행했던 요원들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대담을 보는 장면이 있다. 그는 미국은 그 어떤 고문도 도덕적으로 용인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데, 영화상 이미 수많은 고문장면들이 지나간 뒤이며, 요원들은 그 단호한 주장을 무감한 응시로 쳐다보고 일순간 정적이 감돈다. 매우 짧게 스쳐가지만, 이 순간의 모호함이 이 영화가 머뭇거리는 지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이들이 지적하듯, 그 모호함이 결국 영화의 위험한 태도라고 하더라도 나는 위와 같은 이분화된 입장 중 하나를 택하는 것보다 이 위태로운 지점에 머무르며 영화를 보려고 한다. 이 영화가 결국 고문을 정당화하고 말았다고 비판하는 견해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지점은 고문장면 자체가 재현되는 방식의 윤리는 아닌 것 같다. 비판의 초점은 빈 라덴 사살작전을 위해서 고문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으며, 고문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지 않는 상황에 맞춰진다. 말하자면 이들은 고문이 등장하는 시점이 아니라, 빈 라덴 사살작전이 완료되는 장면들이 지난 뒤, 즉 이 영화의 현장감이 클라이맥스에 달한 장면들을 즐긴 다음, 영화가 이 지점에 이르는 데 고문이 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을 문제 삼는다. 여기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는데, 그건 빈 라덴 사살장면의 영화 내외적인 함의를 일단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좀 거칠게 말해, 이들의 질문은 선한 목적(악의 축을 제거)을 위해 악한 방법(고문)을 동원해도 되는가, 에 있지 그것은 과연 선한 목적인가, 그 목적이 은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에 있지 않다. 9.11 테러 이후 나돌던 음모론을 새삼 꺼내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나는 영화 속 고문의 쓰임새에 대한 문제제기 이전에 먼저 말해져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이 전투장면에서 영화가 취하는 입장의 층위 혹은 정치성을 따지지 않고서, 이 영화의 고문에 대한 태도를 단정짓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 전투장면의 목적이 많은 사람들의 지적처럼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면, 전쟁영화에서 현장감이란 관객인 우리로 하여금 무엇에 반응하도록 하는 것인지, 그때 우리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후반부의 전투장면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그와 일종의 짝을 이루는 영화의 도입부를 경유해야 한다. 암전된 화면 위로 9.11 테러 현장에서 실제로 녹음된 다급한 목소리와 아수라장이 된 상황의 노이즈가 파편적으로 흩어진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서사를 불러일으킨 현실의 결정적 사태가 초반의 검은 화면에 압축되어 있다. 십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이미지로 생생하게 각인된, 우리가 이미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시청한 현실의 그 순간을 영화는 스펙터클화하지 않는다. 재난영화의 한 장면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어서 우리를 섬뜩하게 끌어당겼던 현실의 그 이미지가 정작 영화 안에는 지워져 있고 대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음을 보증하는 현실의 목소리만이 거기 있다. 이와 달리 빈 라덴의 사살작전이 펼쳐지는 후반의 전투장면에서 우리는 특수 제작된 야간 투시경이 잡아낸 이미지와 개별 군인들의 숨소리에 포위된다. 현실에서 빈 라덴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지 못한 우리는 영화가 현장감의 구축을 위해 과잉되게 배치한 이미지와 사운드(실은 현실에서 우리의 자연적인 눈으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기계의 눈으로 접근되는 ‘과도한’ 현실)에 밀착되어 마치 그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말하자면 도입부와 이 후반의 전투장면은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는 것 같다. 영화가 현실에서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의 공백으로 만들고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이미지의 과잉으로 살려내며 그 둘을 한줄로 엮어 마주보게 할 때, 우리에게는 몇개의 질문이 가능하다. 둘의 관계는 시각적 체험의 무기력한 자리로부터 최전선에서의 신체적 체험으로의 전환인가? 관객인 우리가 매혹되고 감독이 의도한 현장감이란 그 전환의 쾌감인가? 가상처럼 현실을 찢고 들어온 테러의 충격에 대한 영화적 대답이 후반부의 전투장면, 즉 현장감에 몰두하는 가상일까? 9.11 테러가 우리에게 안긴 무력감과 두려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었던 시각적 쾌감, 즉 현실의 언어로 설명 불가능한 사태의 구멍, 영화에서 암전된 화면으로만 접근된 그 심연을 빈 라덴 사살작전에 돌입한 후반의 시퀀스, 실은 우리로서는 허구로만 접근 가능한 과정들이 (정치적으로든 장르적으로든) 메워주고 있는가? 이 질문에 간단히 대답하고 말기에 빈 라덴의 은신처에 잠입하는 후반의 전투장면에는 좀더 들여다봐야 할 것들이 있다. 녹색 화면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이유 전쟁영화가 현장감을 강조할 때, 그 효과는 대개의 경우 시점의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영화가 우리를 양 진영 중 어느 쪽의 시점에 더 동일시하게 만드는지, 혹은 어느 개별 인간의 시선으로 상황을 겪게 하는지에 따라 우리가 느끼는 현장감의 쾌감은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어떠한가? “요원들이 야간 습격 당시 투시경을 끼고 봤던 그 모습 그대로, 야간 투시 렌즈를 카메라에 장착해 화면 전체를 녹색 빛으로 채운”(“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21> 894호) 이 장면을 통해 캐스린 비글로는 관객에게 “당신이 거기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캐스린 비글로가 말하지 않은 건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당신이 점유하는 시선은 미군의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 안에서 그 시선은 일방적이다. 실제 현실에서는 어떤 식으로 빈 라덴이 제압되었는지 모르지만, 영화에서 우리는 빈 라덴쪽 사람들의 시선을 감지하지 못하고 저항의 움직임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다. <허트 로커>에서 폭발물 처리반뿐만 아니라 관객을 불안하게 하는 건 미군을 쳐다보던 저항군의 시점숏, 혹은 파편적으로 흩어진 그들의 끈질긴 응시다. 아니, 영화는 그 시선의 주인이 저항군인지 민간인인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존재하게 두었고, 심지어는 폭발물이 터진 다음에도 이것이 그들의 소행인지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미군을 숨어서, 혹은 드러내놓고 응시하고 있는데, 영화가 그 시선을 테러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아서 그 간극에서 종종 불길함과 두려움이 양산된다. 누군가에게 바라보인다는 사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사실 자체가 공격받을 가능성을 전제한다는 이 간단한 논리로 영화는 총과 폭탄에 의한 신체 절단이 주는 공포보다 더 지독하게 인간의 심리를 괴롭히는 불안을 보여준다. 그러나 <제로 다크 서티>에서 요원들이 상대 진영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장면은 거의 없다. 물론 마야가 집 앞에서 공격을 받는 장면이 있고, 요원들의 신원이 노출된 위험에 대해 말하는 장면들이 있지만, <허트 로커>에 비한다면 상대 조직의 시점은 거의 제거되어 있거나 무력하다. 특히 빈 라덴의 은신처를 습격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제로 다크 서티>는 폭발물 처리반의 이야기가 아니니 영화가 시선을 운용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시선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마지막 전투장면에서 우리가 느낀 현장감이란 관객의 시선과 미군의 시선, 그리고 카메라의 시선이 동일시된 결과로 받아들여도 될 것인가? 이 전투장면의 대부분이 미군이 낀 투시경의 녹색 빛 시야에서 진행되고 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그렇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관객인 내가 영화 속 요원들의 시점으로 그 시공간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무언가에 의해 그 시선과의 동일시에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다. 나의 시선과 현장에 투입된 미군의 시선과 카메라의 시선이 하나로 통합된 이 완벽한 환영 속에서 빈 라덴을 찾아 사살하기까지의 스릴, 긴장, 해소의 쾌감에 완전히 몰입할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여기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영화이론가 피터 월렌은 ‘응시 이론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카메라와 등장인물, 그리고 관객의 3중적 동일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과의 동일시를 유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편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고 말한 적이 있다. 관객인 우리가 등장인물의 생각, 동기 같은 것들을 공유하지 않으면서 단지 그의 지각만 공유할 때 동일시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등장인물에 대한 외부 시선을 통해서만 라캉이 ‘타동성’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서만 심리학적으로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의 논리를 전적으로 이 영화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위의 장면이 주는 이상한 느낌에 대해 중요한 힌트 하나를 얻을 수는 있다. 상대의 시점이 무력화되거나 아예 삭제되고 모든 상황이 투시경 속 ‘우리의’ 시선으로 봉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 ‘우리’ 안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이유는 놀랍게도 거기 ‘우리’를 응시하는 상대의 시점이 없기 때문이다. <허트 로커>에서 여기저기 잠복한 타자의 응시가 우리의 불안을 자아냈다면, 여기서는 반대로 우리의 시선이 투시경의 시야를 벗어나 상대의 응시에 닿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불안이 나온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제로 다크 서티>의 전투장면이 미군의 시선으로만 진행된 데 대해 마치 과거 할리우드의 베트남전 영화들이 서구 중심적인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본 것과 무엇이 다르냐고 비판한다면, 그 비판은 틀렸다. 이 영화들이 타자를 편견어린 시선 속에 가두고 자신의 시선에 우월성을 부여한다면, 캐스린 비글로는 적어도 이 장면에서만큼은 타자의 시점이 삭제된 상태에서 내가 점유한 시선이 실은 얼마나 불안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그것이 캐스린 비글로의 의도는 아닐지라도 이 녹색 빛의 세상은 <허트 로커>에서 마약에 취한 듯 전쟁에 중독된 군인들처럼 병적으로 흔들린다. 우리는 모두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게 <제로 다크 서티>의 클라이맥스인 이 전투장면은 마침내 빈 라덴을 사살하여 이 길고 지난한 서사를 끝내는 장면, 혹은 우리에게 그 현장에 입회하게 해서 쾌감을 선사하는 장면으로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는 뭔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스며 있다. 그건 앞서 말한 것처럼 장면 내의 일방적인 응시가 주는 불안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가 9.11 테러에서 시작된 이 긴 서사의 종결 앞에서 머뭇거리거나 두려워하고 있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2011년 5월, 우리는 미군 특수부대에 의해 오사마 빈 라덴이 사살되었으며, 오바마 대통령이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빈 라덴의 시신이 공개되지 않은 까닭에 그의 죽음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지만, 결국 알카에다의 인정으로 그의 죽음은 받아들여졌다. 그러니까 현실의 우리는 빈 라덴의 시신을 실은 직접 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 군인들은 빈 라덴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쏴 죽이고 나서 얼마간 그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한다. 그들의 카메라 렌즈에 잡힌 시신은 얼굴이 뭉개지고 흐릿한 형체로 보일 뿐인데, 그때 한 군인이 가족으로 추정되는 소녀에게 죽은 자가 누구인지 묻는다. 그러나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더는 아무도 묻지 않으며, 그 숏은 이상하게도 그냥 지나가버린다. 이후 마야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빈 라덴의 죽음을 공식화하는 장면에서도 영화는 시신의 정면을 찍지 않는다. 우리는 마야가 본 것을 보지 못한다. 아니, 마야는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영화는 그 시신이 빈 라덴이라고 확언할 수 있는 몇몇 순간들을 이처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지나쳐버리고 만다. 빈 라덴의 은신처에 대해 100% 확신을 말했던 마야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남겨진 그녀의 얼굴은 확신의 희열이 아니라 불확신의 피로로 뒤덮인다. 그러니 <제로 다크 서티>가 고문을 필요악으로 인정하거나 고문으로 이룬 성취를 옹호하는 영화라고 단정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이것은 고문과 복수라는 행위로도, 인간의 눈을 넘어서는 지각체계로도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이 세계의 어떤 지옥 앞에서 공허와 불안에 시달리는 영화에 가깝다. 이것은 적확한 행위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차라리 그 모든 것을 늪에 빠뜨리는 무력한 시선에 대한 영화다.

누가 더 센 놈인지 알려주마

영화 <전설의 주먹>을 봤습니다. 영화는 말 그대로 강우석표 영화였습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한줄로 요약 가능한 캐릭터였고 배우들은 그걸 충실히 연기했습니다. 뭐, 그렇다고 재미없는 영화는 아닙니다. 복잡다단한 캐릭터가 등장한다고 해서 영화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요. 영화는 두 시간 넘게 남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한 가지. 과연 그들은 ‘전설의 주먹’이었을까요? 다시 한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봅시다. 과연 덕규(황정민), 상훈(유준상), 재석(윤제문)은 주먹도 셌을까요? 격투기 해설자이자 프로레슬러 입장에서 고찰을 해볼까 합니다. 먼저 누가 센지를 알기 전에 고등학교 다닐 때 일어나는 무력 충돌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짱’은 어떻게 결정되나 대개 학교에는 대가리, 짱, 통이라 불리는 주먹이 센 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누가 싸움을 잘하는지 어떻게 정했을까요? 일반적으로 권투나 격투기 시합이라면 챔피언과 도전자가 있고, 이때 벨트가 오가면서 강자와 약자의 서열이 만들어집니다. 또는 토너먼트로 16강, 8강, 4강, 이런 식으로 예선을 통과해서 마지막 승자가 월계관을 머리에 씁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통’이 이렇게 결정이 된 적 있습니까? 드라마 <응답하라 1997> 기준으로 봤을 때 한 학교에서 한 학년에 속하는 300여명 중에서 정말 이렇게 토너먼트 또는 그에 합당하는 공정한 룰로 ‘통’이 선발되었나요? 아닐 겁니다. 대개 반마다 왈패가 몇명씩 있고 이들은 자기들끼리 서열을 정한 것뿐입니다. 대개의 학생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거나 마지못해 이 서열을 인정했을 뿐이지요. 물론 이 왈패 무리에서도 그들끼리의 충돌, 즉 싸움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때 공정한 룰이 있었나요? 정말 선수들끼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을까요? 일요일 오전 케이블TV에서 중계되는 UFC 경기를 보면, 선수들이 입장할 때 양옆의 주홍색 재킷을 입은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주(州)체육위원회에서 파견된 이들로 선수들이 대기실에서 나와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동행하면서 행여 경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감시하는 일을 하지요. 싸움은 매우 정서적인 행동이면서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상대편에서 잘나가는 선배를 뒤에 세운다거나 무리의 수가 더 많다거나 한다면 위축이 될 수밖에 없고 경기력에도 분명 영향을 끼칩니다. 자, 이제 한명씩 살펴보지요. <영웅본색>을 좋아하는 재석은 깡은 좋지만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패닉상태에서 흉기를 휘둘러 교도소에 갈 정도로 판단력이 부족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던진 왼손 잽은 재앙의 시작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재석은 친구들을 몰고 다니면서 겁을 주고 압박을 할 수는 있어도 실제 싸움에서는 섣부른 행동으로 인해 자멸할 공산이 큽니다. 덕규는 권투를 오랫동안 수련했기에 분명 뛰어난 신체능력을 갖고 있었을 겁니다. 권투선수답게 타격에 대한 면역 또한 가장 뛰어났을 겁니다. 그러나 고교 시절의 키와 덩치를 보면 통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김광선 선수는 88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땄습니다. 체급이 플라이급으로 당시 그의 체중은 51kg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주력 체급이 경량급인 것을 감안한다면 올림픽 무대를 꿈꿨던 51kg 언저리일 확률이 큽니다. 51kg이면 웬만한 여자 연예인보다 가벼운 체중입니다. 이런 하드웨어 사이즈와 근력을 가지고 정말로 ‘체급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주먹 실력으로만 승부를 봤다면 덕규가 상위 클래스에는 속하더라도 정말 1위까지 했을지는 의문입니다. 그럼 이제 딱 한명 남습니다. 바로 상훈입니다. 상훈은 하드웨어로 봤을 때 가장 가능성이 있는 후보입니다. UFC 톱클래스 파이터인 김동현 선수처럼 큰 키에 긴 팔과 다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스타일은 운동하면 운동하는 대로 몸에 근력이 붙으며 지구력 또한 좋습니다. 영화 중간에 계단 난간을 밟고 점프하는 것을 보아 운동신경도 좋아 보입니다. 그럼 상훈이 과연 통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 상훈이 톱 파이터까지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럴 가능성이 적다고 봅니다. 영화를 보면 상훈이 아이들의 돈을 뺏는, 속칭 삥 뜯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성격을 가지고 최상위 클래스로 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인성론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수준을 벗어나서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갖기 위해선 파트너와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주먹에 일부러 맞아주고 샌드백을 붙잡고 무지막지한 파운딩 세례를 견뎌낼 파트너가 필요합니다. 또 때에 따라선 자신이 그런 인간 샌드백 역할을 해야 합니다. 효도르를 비롯해서 이 세계에서 이름을 날렸던 또는 날린 선수들은 그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훌륭한 인격을 갖춘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체 남자들은 왜 저러고 사는 걸까요? 왜 저렇게 쌈박질을 좋아하는 걸까요? 영화에서는 성년이 된 주인공들이 ‘돈’ 때문에 싸우는 것 외엔 특별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잠깐 보조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제 직업은 프로레슬러, 그리고 격투기 해설자이기도 하거든요. 아무래도 현장과 가까운 입장에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그들이 링에 서는 이유 먼저 링 위의 세계를 동경하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링 위의 박진감 있는 삶에 영혼이 눈먼 것이지요. 내 손이 상대방의 얼굴을 때릴 때 느껴지는 둔탁한 타격감. 왼쪽 허벅지에 상대방의 로 킥을 맞고 그 고통을 이겨내며, 붙잡고 쓰러뜨리고 올라타고. 우리가 인생에서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기 위해선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학에 떨어지는 것도 적어도 1년(고3 기간)이란 시간이 필요하지요. 링은 그것을 압축시켜줍니다. 5분 3라운드. 15분 동안 승과 패, 둘 중 하나는 필히 찾아옵니다. 이 완벽한 귀결에 혼이 빨려들어간 것이지요. 또 한 부류는 링 밖을 피해 링 안으로 도피한 경우입니다. 링 안에는 오직 두 주먹만 있으면 됩니다. 챔피언이든 도전자이든 오직 두손 또는 룰에 따라 두 다리를 가지고 승부를 봅니다. 하지만 링 밖은 그렇지 않습니다. 동네 구멍가게는 이마트와 싸워야 합니다. 동네 커피집은 스타벅스와 싸워야 합니다. 수빈이네 국숫집도 프랜차이즈 국숫집과 싸워야 합니다. 이 경쟁이 말이 됩니까. 그래서 그 경쟁을 피해서 링 안으로 도피하는 것이지요. <전설의 주먹>에 나온 이들도 아마 이 두 부류 중 한곳에 속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링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방송국, 주최사, 스폰서의 피라미드 서열 안에서 가장 약자라는 것을 말입니다. 저도 몇해 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두른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 주최사로부터 가장 먼저 들었던 말은 ‘벨트를 직접 보관하려면 300만원의 보증금을 지불할 것’이었습니다. 지난여름, <전설의 주먹> 조감독에게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화에 출연해 달라는 것이었는데요. 강우석 감독이 텔레비전 고발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저를 보고 직접 픽업을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약 일주일 뒤, 시나리오가 바뀌어서 분량이 많아진 까닭에 전문 연기자로 대체됐다는 통보를 받았는데요. 제 배역은 무엇이었을까요? 독자 여러분은 누구였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당신에게 로즈버드는 무엇이었나요?

2013년 4월4일, 미국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갑상샘암 재발로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이 날아든 지 하루 만이었다. 누가 뭐래도 대중과의 소통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영화평론가였기에 유독 그의 죽음을 서글퍼하는 이들이 많았다. 갑상샘암과 침샘종양 수술로 아래턱과 목소리를 잃은 뒤에도 평론을 멈추지 않았던 그로부터 우리도 적지 않은 위안을 받았었다. 이 불굴의 ‘신문장이’에게 뒤늦게 어떤 헌사를 바치면 좋을까를 고민하다 2007년 그를 ‘내 인생의 영화평론가’로 꼽았던 송효정 영화평론가에게 이별의 편지를 청했다. 더불어 <씨네21>이 2002년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그와 가졌던 인터뷰 중 일부도 발췌하여 싣는다.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여긴 4월인데 여전히 춥습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다니, 그리울 정도로 오랜만의 일이군요. 벚꽃이 피고 있고요, 4월인데도 날씨는 괜스레 쌀쌀맞아 옷깃을 동동 여미게 됩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설핏 당신이 암 치료를 위해 당분간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말을 들었어요. 다음날 독감의 몸살로 뒤척이다 당신의 사망 뉴스를 들은 것도 같은데, 미열 속에서 꿈인지 생시인지 했습니다. 잘못 들었겠지, 어제 치료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그보다 내 몸을 일으켜 병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에만 골몰했죠. 누군가 세상을 떠나도, 미열로 몽롱해도 목련은 피고 극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할 테죠. 4월이잖아요. 봄이거든요. 왜인지 실시간 뉴스로 올라오는 당신의 부고 단신을 애써 외면했습니다. 그렇게 일상은 여전히 지속되었을 텐데요. 문득, 몇년 전 당신의 책을 읽고 당신에 대한 글을 썼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신참 평론가 시절에 당신의 책을 읽고 나는 소소하고도 진지한 힘을 얻었던가 봅니다. 한 네티즌의 말처럼 당신의 죽음이 그렇게 많이 회자되었던 것은, 아마도 당신이 이웃집 아저씨 혹은 할아버지 같은 친근함을 주었기 때문이겠죠.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와 그들의 거리를 보다 친밀한 것으로 만들어주었으니까요. 당신은 아마 가장 유명한 미국의 영화평론가일 것입니다. 가장 권위있는 평론가라고 단언하긴 힘들지만 말이죠. “한 사람의 일생을 말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당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영화 <시민 케인>에서 케인의 보물창고를 헤집던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로즈버드가 케인의 모든 것(everything)이자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인 것처럼, 엄지손가락과 별점은 당신을 그 자체로 설명하지만 동시에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테죠. 1. 오늘의 당신을 있게 해준 것은 1967년 입사하여 46년 동안 직업 기자로서 영화평론을 해온 <시카고 선타임스>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10년 전인 고교 시절 지역 신문사에서 기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것으로부터 계산하면 장장 56년 동안 현업 기자로 활동했던 셈이네요. 미국 최고의 영향력을 지닌 평론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영화평론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영화평론가. 이러한 수식 속에서 에버트 당신은 철저하게 미국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시스켈과 에버트>라는 장수 프로그램을 이끌고, 시스켈의 사망 뒤에는 <에버트와 로퍼>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당신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듀나씨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것처럼 당신은 영화평론가인 척하는 재담꾼이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별점이란 때론 우스꽝스러운 것이긴 하죠. 하지만 당신이 영화 <선셋대로>를 두고 “사랑이야말로 이 영화가 밀랍인형이나 싸구려 서커스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주는 요소다”라고 했듯이, 영화에 대한 진지한 애정이야말로 당신의 대중비평의 품격을 지켜주고 있던 건 아닐까요. 당신은 10대 시절 SF(Skin-flick)광이었고, 전설적인 B급 감독 러스 메이어의 <인형의 계곡 너머>의 속편 및 섹스 피스톨스의 영화인 <누가 밤비를 죽였나>의 공동 각본가이기도 합니다. 미국영화협회(MPAA)의 등급심사제도에 공식적으로 반대하며, 별점 2개 이하의 이른바 ‘저질’영화에 대한 책을 내는 일에도 적극적이었죠. 사실 당신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영화 별점이지만, 당신 스스로는 그것이 참 멍청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독자와 소통해야 하는 기자로서의 입지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요. 별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별점 아래에 꾸준히 진지하고 아름다운 평론들을 썼습니다. 편견없이 공평하게 많은 영화들을 잡식성으로 탐식했습니다. 고급에서 저급까지, 가장 대중적인 미국영화에서 가장 주변부 세계의 영화까지 말이죠. 아래턱을 잃은 이후에도 당신은 여전히 성실하고 열정 넘치는 영화평론가였습니다.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고요. 역설적인 말이지만, 당신이 목소리를 잃은 지난 6년간, 목소리를 대신하여 당신의 별점과 리뷰가 전세계 영화애호가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으며, 당신의 SNS 메시지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텔레비전과 신문이 올드 미디어로 밀리고 인터넷과 SNS가 뉴미디어가 되는 시대였죠. 목소리를 잃은 뒤, 당신의 블로그와 이메일,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대중과 대화하는 소통의 장소가 되었던 것이죠. 문자의 시대였으니까요. 테드닷컴에 올라왔던 당신의 영상을 기억합니다. 당신은 암으로 아래턱을 잃었지요. 말을 할 수 없었고, 음식을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습니다. 세번의 턱뼈 재건수술을 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2006년에는 재발하기조차 했죠. 당신은 잃어버린 목소리를 매킨토시 컴퓨터의 알렉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되찾았습니다. 그 목소리의 부자연스러움을 없애기 위해(기계음은 뭔가 기묘하게 낯설거든요) 당신은 예전에 당신이 녹음한 영화평 파일을 재료로 삼았죠. <카사블랑카>와 <시민 케인>을 코멘트하던 당신의 목소리가 알렉스를 통해 재현되었습니다. 이 목소리는 가상의 것이지만, 어찌 보면 필멸의 에버트와 불멸의 영화를 연결해주는 오묘한 것이기도 하네요. 2. 당신이 미국 내에서 유명하게 된 것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때문이었고,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인터넷이 상용화되면서였죠. 자신의 블로그에 별점과 리뷰를 올렸고, 2주에 한편씩 올곧은 고전영화 비평을 실어서 <위대한 영화>의 단행본을 3권까지 만들었습니다(한국에서는 현재 2권까지만 번역되어 출판되었고요). 한국에서도 많은 영화기자와 평론가들이 새로운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당신의 영화평을 찾아보곤 합니다. 근래 들어 신문 저널리즘의 힘이 약해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그래서 그런지 46년간 전문 기자로서 평론해온 당신의 죽음을 주류 저널리즘 비평의 종말로 판단하는 의견도 있는 듯합니다. 신문과 텔레비전 영화비평의 종말이라고요.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당신이 어디선가 말한 것처럼 영화평론의 시대가 가고, 연예 가십의 시대가 왔습니다. 2008년에는 많은 저널 영화비평이 사양길에 접어들어 <빌리지 보이스>에서 영화필자를 반 이상 감원했고,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가 영화평론가를 모두 해고하며 조너선 로젠봄, 스탠리 카우프만 같은 저명한 평론가들이 지면을 잃어갔죠. 이 시기부터 이미 영화평론의 종말이 성급하게 선언되곤 했습니다만, 요즘에는 그 상황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일찍이 에서 영화평 및 인터뷰 기사를 500자 이내로 제한했던 조치가 있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종이잡지보다 접근이 용이하고 부담이 적은 포털사이트를 선호하는 관객의 성향 때문이기도 합니다. 월간지에서 주간지로, 주간지에서 실시간 업데이트되는 포털로 속도는 점점 아찔하게 빨라져갔고요. 그래서인지 관객은 이제 우리 평론가의 글들을 잘 읽지 않습니다. 때로는 평론가들의 글에 짜증을 내기도 하죠. 관객과 평론가들은 서로 다른 대상을 두고 말하고 있기에 그 대화가 어긋나는 듯해요. 시네필을 대상으로 한 글인가,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한 글인가에 따라 평론이 달라질 텐데요, 영화평론가들은 대체로 시네필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쩐지 한국사회에서 요즘 시네필이라 하면 좀 올드스쿨처럼 여겨지는 인상도 있고요. 일반적으로 대중 관객은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에 올라오는 별점평으로 영화를 판단하지요. 잘 쓰인 평론보다 스타의 내한이나 스캔들이 영화를 더욱 유명하게 하기도 하고요. 에버트 당신이 말한 것처럼 당신은 아카데믹한 교수가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신문장이입니다. 하지만 몇몇 일간지의 문화면 기자와 이제 하나 남은 영화잡지의 전문기자를 제외하고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프로페셔널한 전업 평론가로 산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이기에, 대부분은 없는 지면과 생활난을 고려하여 투잡을 하거나 강의를 하거나 대학에 자리를 잡으려고 하는 등 현실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에버트 당신이 떠난 이후에 포스트 로저 에버트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합니다. 인터넷을 맴도는 익명의 전체가 IMDb나 포털사이트의 별점을 부여할 테니까요. 당신은 한해에 250편가량의 리뷰를 쓰며, 아마도 그중 200편 이상은 자신이 죽기 전에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죽기 직전까지 글쓰기를 지속한 당신은 테렌스 맬릭의 <투 더 원더>에 별점 3개 반을 매겼지요. 당신이 떠난 지 이틀 뒤에 올라온 리뷰였습니다. 여기서 당신은 테렌스 맬릭의 배우 활용법을 로베르 브레송의 모델론과 연관시켰지요. 리뷰 아래 한 네티즌이 언급한 것처럼 다소 멜랑콜릭한 어조였던가요.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영화 <시민 케인>과 <이키루>는 모두 어떠한 존재의 사라짐에 대해 말합니다. 당신은 말했죠. 1960년인가 1961년에 처음 이 영화를 본 뒤 5년에 한번은 다시 보곤 했다고. “나는 <이키루>를 볼 때마다 감동에 젖고, 깊은 생각에 잠긴다. 나이를 먹을 수록 와타나베가 측은한 늙은이 같다는 생각은 점점 줄어들고, 우리 중 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점점 많이 든다”고. 아 참, 그리고 마틴 스코시즈 감독과 <갱스 오브 뉴욕>의 각본가이기도 한 스티브 자일리언이 제작에 참여하고 스티브 제임스가 연출하는 로저 에버트 다큐멘터리는 당신의 생전부터 기획되었다고 하더군요. 에버트 당신도 2009년에 <에버트가 본 스코시즈>(Scorsese by Ebert)라는 책을 쓰기도 했지요. 저는 아마도 이 영화가 이탈리아 모던시네마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나의 이탈리아 여행기>(1999)와 영화의 초창기 역사를 판타지 장르로 다룬 <휴고>(2012)에 이은 스코시즈식 ‘영화사 3부작’이 될 것이라고 예상해봅니다. 마지막으로 근 5년 전에 당신에 대해 썼던 글의 마지막 부분을 똑같이 인용해봅니다. 그때 저는 건강해진 당신의 육성을 듣고 싶다고 했었지요. 당신이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엔딩 대사가 등장하는 <선셋 대로>에서입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우리와 카메라들과 저기 어둠 속에 있는 경이로운 사람들. 좋아요, 난 클로즈업 준비가 됐어요.” “내 인생의 영화는…” 2002년 로저 에버트와 <씨네21>의 인터뷰 #커리어의 시작 / “시카고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 선타임스>에 들어가 일했는데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평을 담당하던 전임자가 은퇴하는 바람에 영화평을 쓰라는 제의를 받게 됐다. 나로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전에 영화평론가가 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를 좋아했기 때문에 하겠다고 했고, 그 결정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그뒤로 35년간 영화평을 썼다.” #<시스켈과 에버트> 쇼 / “나는 <시카고 선타임스>의 영화평론가였고 시스켈은 <시카고 트리뷴>의 영화평론가였다. 말하자면 나의 적이었다. TV에서 우리 둘을 불렀을 때도 역시 상대에 대한 견제가 만만치 않았다. 예를 들면… 시스켈은 <지옥의 묵시록>을 좋아하지 않았고 나는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는 내 견해에 동의했다.” #별점에 대하여 /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별점은 지나치게 단순한 것이다. 신문사에서 시켜서 하는 일일 뿐이다. 미국의 수많은 신문이 별점을 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최근엔 별점을 좀 보완하려고 별의 개수를 5개로 늘렸다. 3개가 정확히 중간점수가 되게끔…. 어찌됐든 멍청한 짓이다.” #내 인생의 영화 / “<시민 케인>이다. 17살 때 이 영화를 보고… 감독의 존재를 알았고 영화의 내면에 감독의 비전과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영화를 든다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다.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위대한 작품 가운데 하나다.” #나는 신문장이다 / “나는 신문장이다. 그건 내가 매일 기사마감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어떤 영화든 대체로 한번밖에 볼 수 없다는 뜻이다. 두번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나도 두번 보고 쓰고 싶다.”“글을 쓸 때 이 글을 읽을 독자가 알 수 있는 말로 써야 한다. 신문을 사서 읽는 사람들이 글을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면 소용없는 것이다.”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어금니 꽉 깨물고 스마일

벚꽃 소식이 한창이던 지난주. 21세기인 지금과는 이미 세기부터 차이가 나는 1999년, 제가 처음 서울에 올라와 직장생활을 할 때 동료였던 이가 참 안타까운 나이에 세상을 먼저 떠났습니다. 장례식장이란 곳은 참 신비로운 곳입니다. 고인에 대한 애끊는 이별이 있는가 하면 그런 때 아니면 못 만나는 이들과의 반가운 해후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테마인 장례식장에서 산 자와의 만남을 향유한다는 것 자체가 나이를 먹었다는 증거이겠지요. 현역 프로 레슬러이자 격투기 해설위원이며, 종종 라디오와 텔레비전에 얼굴을 들이미는 저에게 서로 안부를 물으며 근황을 이야기하다보면 99% 듣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말을 들을까요? 대화의 흐름은 대략 이렇습니다. 요즘 한국에선 프로 레슬링 경기가 별로 없어서 주로 일본에서 경기를 한다고 하면 여비는 어떻게 충당하냐고 묻습니다. 주최사에서 파이트머니 외에 비행기표값과 호텔비를 따로 지급한다고 하면 하는 말이, “참 재밌게 사네”입니다. 이젠 제법 귀에 인이 박여서 그러려니 하고 넘길 법도 한데 그날따라 500번 사포처럼 저도 까칠해지더군요. 아는 형네 집에 얹혀살면서 한솔엠닷컴 018 휴대전화를 쓰던 시절의 지인. ‘오래된 인연이니까 날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내 기분을 망치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라는, 저도 모르게 내심 기대를 한 게 있었나 봅니다. 세상을 떠난 고인이 계신 곳이니만큼 그리고 이젠 햇수로 두 자릿수를 훌쩍 넘긴 사회생활 경력의 중요한 득템인 포커페이스로 표정과 내면을 격리시키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재밌게 산다는 말은 분명 그 문장만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생산직이나 사무직 노동자에게 사용하지 않습니다. 친숙하지 않거나 또는 간단명료하게 정리가능한 영역의 직업이 아닌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 프로레슬러, 만화가 또는 영화평론가 같은 사람들 말이죠. 재밌게, 라는 말은 사전적으로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지 않지만 이런 경우 이 문장의 청자가 별다른 노력없이 색다른 취향과 행운을 버팀목 삼아 세상을 즐기고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결코 그런 것은 아닌데 말이죠. 현역에서 활동 중인 프로 레슬러 수가 지리산의 야생반달곰 수보다 적은 나라에서 활동하면서 이웃 나라에서 항공비와 호텔까지 제공받으며 원정경기를 하기까지, 제가 얼마나 링 위에서 많이 거꾸로 박히고 철제의자로 두드려 맞았을까요. 얼마 전까지 만화책을 공터에 쌓아놓고 화형식을 했던 나라입니다. 출판만화시장은 거의 궤멸됐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만화가들은 어떤 생존철학을 갖고 있어야 할까요. 영화평론가요? 지금 독자가 보시는 이 글이 실린 이 잡지가 1천만 영화가 뻥뻥 터지는 이 나라에서 유일한 인쇄매체 영화잡지입니다. 참 재밌게 사네. 이 말이 제 머릿속에서 계속 빙빙 돕니다. 그러면서도 저부터 타인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의미없이 격하하지는 않았는지 반성해봅니다. 참, 그리고 저는 재밌게 사는 게 아닙니다. 엄청나게 치열하게 사는 겁니다. 어금니가 빠개지도록 꽉 깨물고 사는 겁니다.

혼자가 되고 싶니? 라디오를 켜!

지난해 ‘당신의 TV는 텍스트다’ 특집에서 <다큐멘터리 3일>에 대한 글을 썼는데, 1년 사이에 많은 게 바뀌었다. 대통령도 바뀌었고, 내 나이 뒷자리도 바뀌었고, <씨네21> 편집장도 바뀌었고, 꽃잎이 떨어지는 자리도 바뀌었고, 그리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게 바뀌었을 것이다. 도도한 시간의 물살이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어가고 있는데, 같은 컨셉의 원고를 2년 연속 같은 필자에게 청탁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곁들여 달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겠지(아니면 편집부가 게으른 건가, 하하하, 저야 좋습니다만). 1년 사이 즐겨 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도 많이 바뀌었다. 바뀌었다기보다 요즘엔 텔레비전과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내가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 텔레비전이 내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인지,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것인지, 아무튼 좀 데면데면한 사이가 됐다. 즐겨 보던 예능 프로그램도 이젠 좀 지지부진하고 내 마음을 확 잡아 끄는 프로그램도 없다보니 텔레비전 켤 일이 줄어들고 있다. <무한도전> <썰전> <인간의 조건>이 그나마 챙겨 보는 프로그램이다. 그리고, 내 마음속의 영원한 1등 프로그램 <황금어장-라디오 스타>(이하 <라디오 스타>)가 있다. 지난해 ‘당신의 TV는 텍스트다’의 청탁을 받고 곧바로 <라디오 스타>를 떠올렸지만, <라디오 스타>는 ‘물’ 같은 프로그램이고 <다큐멘터리 3일>은 ‘탄산수’ 같은 프로그램이다보니 좀더 쓸 얘기가 많은 ‘탄산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물’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어졌다. 라디오의 원리로 만든 TV 프로그램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나만의 방이 필요할 때마다 책상 위의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내 주위의 커튼이 되었고, 나는 언제나 혼자있을 수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싸울 때도, 밖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떠들 때도, 내 주변의 소리들이 지옥의 비명처럼 느껴질 때도, 수학책으로 몰입해 들어가고 싶을 때도(이건 좀 효과가 없더군)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는 다른 차원으로 나를 데리고 가는 웜홀이었고, 투명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망토였고, 외부로부터 나를 방어해주는 보호막이었다. 현실이 불쾌하고 사는 게 고역이던 한 예민한 아이는 라디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거기서 들었던 음악을 다 기억하고 있다. 거기서 들었던 말을 지금도 가끔 떠올린다. 유머도 거기서 배웠고, 책도 거기에서 알았다. 라디오 속에 등장하는 사연들을 들으며 그런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다. 라디오가 없었다면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라디오 스타> 소개에서 ‘라디오’ 얘기를 이렇게 길게 쓰는 것은 프로그램 제목이 ‘라디오 스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라디오 스타>가 ‘라디오’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라디오 스타>가 첫 방송을 시작할 때는 좀 어이없어 보이긴 했다. 보이는 라디오와 다를 게 없었다. 2인자들로 구성된 진행자들은 일어나기도 귀찮아했고, 앉아서 떠들기만 했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메인 DJ’라는 말도 안되는 설정부터 게스트를 불러놓고 자기들끼리만 떠들고 있는 황당무계한 진행 방식까지, 텔레비전에서 방송하는 프로그램치곤 모든 게 낯설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 낯섦이 매력으로 변했다. <무릎팍도사>에 밀려 때론 5분 방송의 굴욕도 당하고, 때론 통편집의 수모도 겪었지만 이제는 당당히 독자적인 프로그램이 됐다. <라디오 스타>는 무리해서 많은 걸 보여주려고 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이지만, 보여주기보다는 들려주려고 한다. 예쁜 풍경도 없고 화려한 세트도 없다. ‘고품격 음악방송’이라고 말도 안되는 주장을 매주 하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언제나 조촐하고, 옹색하고, 소박하다. 공연 세트 한번 만들어놓고는 오랫동안 생색을 낸다. 그렇게 보는 사람들의 긴장을 풀어놓은 다음 네 검객들의 본격적인 쇼가 시작된다. 다른 예능 프로그램의 진행자들이 과도를 들고 게스트들의 껍질을 예쁘게 까준다면, <라디오 스타>의 DJ들은 좀더 큰 칼로 마음을 깊이 찌른다. 게스트들만 찌르는 건 아니다. 옆에 앉은 DJ를 서로 찌르기도 하고, 자신을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누굴 찌르는지도 모르고 찌르기도 한다. 껍질은 진작에 다 벗겨졌다. 상처가 남지만, 이것은 누구의 상처일까. 모르겠다. 때로 <라디오 스타>는 말로 하는 굿판 같기도 하다. 신나게 웃고 떠들고 나면 뭔가 바뀌어 있다. 좋아하지 않았던 게스트인데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싫지 않다. 좋아하기엔 아직은 힘들지만 싫어할 수는 없다. 선을 넘고 도를 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사람을 사귄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닫는다. 말 때문이다. 어떤 말은 너무 부족하고, 어떤 말은 너무 과한 것 같다. 어릴 때 우리는 몸으로 친해졌지만 이제는 말로 친해진다. 자신과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과 친해지기 힘들다. 때로는 그게 걸림돌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고 싶은 말, 속에 있는 말 다 하고 나서야 친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자신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다. <라디오 스타>를 보면서 (또는 들으면서) 말의 수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라디오 스타>에는 선을 넘어가는 말의 쾌감이 있고, 도가 지나친 농담의 악랄함이 있다. 속이 시원할 때가 많다. 어릴 때 라디오를 들으면서 느꼈던 말의 쾌감을 <라디오 스타>에서 다시 듣고 있다. <라디오 스타> 제작진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나는 주로 <라디오 스타>를 듣는 편이다.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라디오처럼 이용한다. 들으면서 그림 작업을 하거나 영상 편집 작업을 한다. 그러다 가끔 이상한 묘기 자랑 같은 걸 할 때만 영상을 본다. 그렇게 듣기만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들은 내게 진정한 라디오 스타다.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은 내 방도 있고, 작업실도 있지만, 완전한 혼자가 되고 싶을 때 소리로 나를 둘러싼다. 아늑하다. 다음주 방송분이 최고? <라디오 스타> 최고의 에피소드 ‘해돋이 특집’ 단언컨대, 단 한회도 재미없었던 적은 없다. <라디오 스타>는 게스트가 중요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아, 이번엔 정말 내가 싫어하는 게스트네’라고 생각할 때도 재미있고,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게스트네’라고 생각할 때도 재미있다. 김구라가 빠진 게 1년이나 지났는데, 그게 좀 아쉽긴 하다. 진정한 드림팀이 되려면 김구라와 신정환까지 가세해서 6인 체제로 가야 한다(와, 정말 난장판이 되겠구나). “저의 대표작은 지금 쓰고 있는 작품입니다”라고 말하는 대범하고 뻔뻔한 소설가처럼(그게 접니다!) <라디오 스타>의 최고회는 아직 보지 못한 다음주 방송분이다. 그래도 꼭 하나 꼽으라면, 지난 연초에 있었던 ‘해돋이 특집’이다. 예고편을 보다가 그렇게 ‘빵’ 터진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정말 보자보자하니까, 머리카락 없는 것도 서러운데 그걸 이용해서 ‘해돋이 특집’을 기획하다니, 도대체 예의와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야, 라며 박수를 쳐주었다. <라디오 스타>는 프로듀서와 작가, DJ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발 더 나아가는 프로그램이다. 작가들이 챙겨오는 깨알 정보들은 ‘도대체 저런 걸 어디서 캐왔나’ 싶은 것들이 많다. 프로듀서들의 의연한 자막도 많다. ‘레전드’로 꼽히는 것 중에 이런 자막이 있다. ‘신나는 명절/ 정이 넘치는 한가위/ 환상의 연휴/ 정말 꿈만 같으셨죠?/ 신나는 휴일도 오늘로 끝!/ 차분한 일상을 위한 마지막 추석 파티!/ 여기는 고품격 추석 특집 방송’. DJ들의 오프닝을 자막으로 내보낸 것인데, 평범해 보이지만 앞 글자만 추려보면 ‘신정환 정신차려’다. 이런 멋진 사람들 같으니라고.

[영하의 날씨] 지금 누굴 연기하고 있나요?

“다른 사람인 척해본 적 있어요?” 몇년 전 지인과 그의 아내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일이 있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지인의 아내가 되물었다. “살아오면서 자기 정체를 감추고 다른 사람 행세를 해본 적이 있냐고요. 실제 생활에서든 인터넷에서든.” “없는데요.”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일까? 나는 그녀의 즉각적인 부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과연 자기 정체에 대해 늘 진실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공항의 입국 카드나 웹사이트 가입신청서에 언제나 진짜 직업을 적고 칵테일파티장에서 어떤 허세도 부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얼마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 더러 아주 심한 거짓말을 할 때도 있다. 기혼인데도 미혼이라고 한다거나 비정규직인데도 정규직처럼 행세한다거나 출신 학교를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상대방의 오해를 유도하기도 한다. 몇년 전 시끄러웠던 신정아씨 같은 경우는 극단적으로 심하게 정체를 윤색한 경우일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자기가 정말로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땄다고 믿어버린 것 같았다. “제가 예일대학이 있는 뉴헤이븐에 한번도 안 간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학위를 딴 것만은 확실해요.” 이런 말이 얼마나 이상한 말인지 모른다는 것부터가 그녀가 얼마나 자기의 가짜 정체에 깊숙이 빠져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한 경제학과 교수는 택시를 타고 자기가 근무하는 대학으로 가자고 하면 기사가 자꾸 교수냐고 묻고, 그렇다고 하면 무슨 과 교수냐고 또 묻고, 그래서 경제학과라고 하면 내릴 때까지 이 나라 경제에 대한 기사의 강의를 들어야만 하기 때문에 늘 전공을 물리학과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그의 술책은 북한 핵에 엄청난 관심을 가진 택시기사를 만나기 전까지는 잘 먹혔다고 한다. “물리학이라… 혹시 핵물리학자 아니시오?” “아, 아닙니다. 그냥 이론 물리학자입니다”라고 했지만 택시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 핵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인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더란다. 그 뒤로는 천체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한다. 기자들은 곧잘 취재를 위해 직업을 위장하고 작가들 역시 작가라고 밝혔을 때 겪게 될 부작용을 우려해 이런저런 다른 ‘대체’ 직업을 갖고 있다. 10여년 전에 갓 등단한 20대 여성 작가 세명이 인터넷에서 알게 된 남자 셋과 오프에서 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여성 작가들은 인터넷 채팅 때부터 장난 삼아 자신들의 정체를 텔레마케터로 위장했다. 오프에서 만난 회사원 셋과 가짜 텔레마케터 셋은 꽤나 즐거운 술자리를 벌였다. 취흥이 꽤 오르자 여성 작가 한명이 자기의 진짜 정체를 밝혔다. “실은 우리 모두 작가거든.” 남자들은 믿으려 들지 않았다. “그럼 검색해 봐. 진짜라니까.” 결국 남자 한명이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자 셋이 모두 작가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자 남자들은 불같이 화를 내더니 모두 나가버렸다고 한다. 이 얘기를 내게 전하면서 그들은 물었다. “남자들은 우리가 거짓말을 했다는 것에 화가 났던 걸까요, 우리가 작가여서 화가 났던 걸까요, 아니면 텔레마케터가 아니어서 화가 났던 걸까요?” 내가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텔레마케터 연기는 재밌었어?” 그들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의 그들은 성공적으로 공연을 마친 연극배우들처럼 보였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배우들은 모두 중죄를 범한 수감자들이다. 영화에서 이들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를 연기한다. 살인이나 조직범죄에 연루된 수감자들이 브루투스가 시저를 암살하는 장면을 연기한다는 것은 설정에서부터 대단히 흥미롭다. 원로원이 배경이지만 시저의 암살은 엄연한 살인이고, 그것도 조직범죄다. 이들은 대중에게 인기가 높은 독재자 시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모두가 알다시피 <줄리어스 시저>는 영국인 셰익스피어가 중세 말기 영어로 쓴 희곡이다. 그것을 현대 이탈리아어로 다시 번역해 공연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극중 수감자들은 “에이, 그건 나폴리 사투리라고 할 수 없지”라며 다툰다. 배경은 고대 로마이고 원작은 셰익스피어이며 공연장은 다시 현대 로마의 감옥이다. 영화는 수감자들이 연극을 제작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실은 일종의 페이크다큐에 가깝다. 그러니까, 수감자들은 ‘교도소에서 <줄리어스 시저>를 무대에 올리는 수감자들’을 연기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수감자들이 극중극인 <줄리어스 시저>의 장면들을 연기할 때는 대단히 그럴듯한데, 오히려 자신들의 일상생활을 연기할 때는 매우 어색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연기 연습을 마치고 자기 감방으로 돌아와 “예술을 알고 나니 이 작은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 같은 대사를 치는 장면은 브루투스와 시저, 안토니우스를 연기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부자연스럽다(대사 자체도 일부러 저런 것을 넣었을까 싶게 오글거린다). ‘극중 인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혹은 ‘극과 현실을 혼동한 나머지’ 수감자들이 서로 다투거나 불화하는 장면 역시 어설프기는 마찬가지다. 수감자 배우들은 시저와 브루투스 역할은 멋지게 해내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의 역할은 잘해내지 못했다. <시저는 죽어야 한다>를 보고 나오면서 떠올린 것은 오래전에 한 연극연출가와 나눈 대화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극을 싫어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보는 건 지루할 수도 있지요. 그러나 하는 거 지루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군인이든 학생이든 정신병원의 환자든 막상 연기에 들어가면 바로 몰입하거든요.” “사람마다 연극적 자아라는 게 따로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릴 적 소꿉놀이를 생각해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를 연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기자로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연극은 사람들 내면에 숨어 있는 이 오래된 욕망, 억압된 연극적 본성을 일깨웁니다. 그래서 연기하면 신이 나는 거예요.” 그의 말은 <시저는 죽어야 한다>에서 죄수들이 왜 <줄리어스 시저>의 배역은 태연하게 소화하면서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을 연기하는 일에는 서툴렀는지에 대해 흥미로운 힌트를 준다.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존재,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은 바로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조이스 캐롤 오츠는 마릴린 먼로를 모델로 한 역작 <블론드>에서 조 디마지오와의 결혼 생활, 즉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을 힘겨워하는 마릴린 먼로의 육성을 들려준다. “대디, 난 무서워요. 영화 밖 실제 사람들과 함께하는 장면은 왜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걸까요?…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일상에서는 누구도 ‘컷’이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니 삶은 때로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지는 것만 같다. 그럴 때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주면 참 좋을 것이다. “자, 다시 갑시다.”

[현지보고] 익숙함 속에서 빛나는 영화 길어올리기

지난해 황금종려상을 가져간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사랑’이라는 뜻)가 영감이라도 제공한 걸까. 5월15일 개막한 제66회 칸영화제는 핑크빛 무드로 가득하다. 시각적으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사랑의 이미지는 영화제가 열리는 팔레 드 페스티벌 외벽을 둘러싼 공식 포스터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입을 맞추는 포스터 속 두 남녀는 칸이 사랑한 미국인 배우 부부, 폴 뉴먼과 조앤 우드워드다. <뉴 카인드 오브 러브>(1963)의 현장 사진을 기반으로 한 이 포스터가 우연히 만들어진 것 같지는 않다. 올해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인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해 수많은 미국 감독들이 프랑스의 작은 소도시 칸의 품에 안길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미국 작가주의 감독의 귀환 66회 영화제 개막에 앞서 칸을 뜨겁게 달군 이슈는 미국 작가주의 감독들의 화려한 귀환이었다. 코언 형제, 스티븐 소더버그, 제임스 그레이, 알렉산더 페인, 짐 자무시 등 다섯 미국 감독들의 신작이 올해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경향이 새삼스럽진 않다. 지난해에도 제프 니콜스의 <머드>, 앤드루 도미닉의 <킬링 뎀 소프틀리> 등 다섯편의 미국영화가 경쟁부문에서 자웅을 겨뤘으니까. 하지만 올해의 이름들이 훨씬 더 묵직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해 영화제가 독립 제작사를 주축으로 경쟁부문에 처음으로 진입한 미국 인디 감독들의 신작을 선보였다면, 올해는 파라마운트, 웨인스타인 등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손길을 거친 노련한 미국 작가들의 영화들이 경쟁부문에 포진해 있다. 과연 “올해의 경쟁부문은 아메리칸 시네마의 강렬한 힘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술감독 티에리 프리모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더불어 66회 영화제의 개막작인 <위대한 개츠비>(바즈 루어만)와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개막작 <더 블링 링>(소피아 코폴라)이 미국영화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칸과 오스카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두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와 리안이 올해 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았다는 점도 미국에 열렬한 러브콜을 보낸 올해 칸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현지 언론과 미국 매체들은 앞다투어 칸과 할리우드의 밀월 관계가 본격적으로 재개됐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미국 작가들이 황금종려상에 한발 더 다가섰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그들과 더불어 경쟁부문에 무게감을 더할 이름있는 감독들이 이번 영화제엔 가득하기 때문이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로만 폴란스키, <천주정>의 지아장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이 칸 경쟁부문에 이름을 아로새겼다. 그런데 바꾸어 말하면 올해 칸의 경쟁부문은 대개 익숙한 감독들의 차지다. 19명의 경쟁작 감독 중 13명이 이미 같은 부문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으며, 그중 세명- 코언과 소더버그, 그리고 폴란스키- 은 황금종려상 수상자다. 이외의 감독들도 신선하다고 보긴 어렵다. 칸의 다른 부문에 초청돼 이미 영화제와 인연을 맺은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 스테판 들로름은 칸영화제 특별판 에디토리얼을 통해 올해 경쟁부문에 저예산영화와 젊은 감독들이 부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무엇이 작가영화의 입지를 어렵게 만드나? 우리의 삶을 주시하고, 열정적이고 섬세한, 어느 감독의 첫 영화 혹은 저예산영화는 대중의 관심을 끌 수는 없는 걸까? 왜 이런 영화들은 칸 경쟁작에 출품할 수 없나?” 그의 말대로 확실히 올해 칸의 경쟁부문은 새로운 발견보다 안정적인 이름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세계를 확립한 감독들이 고유의 자장 안에서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변주해나가는지에 주목하는 것도 오래전부터 칸이 해왔던 역할이다. 성과 가족, 관계에 대한 드라마의 강세 개막 이틀째를 맞이한 영화제의 메인 거리인 크루아제의 분위기는 차분한 편이다. 마치 영화제가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갑자기 퍼붓는 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올해의 칸엔 극장에서 뛰쳐나가 구호를 외치고 싶은 충동을 유발하는, 사회/정치적 메시지로 가득한 영화가 없다. 오히려 극장 의자에 몸을 맡긴 채 영화 속으로 끝없이 침잠해 들어가고픈 내밀한 테마의 작품들이 눈길을 끈다. 마조히즘과 성의 역학 관계를 다룬 동명 소설이 원작인 폴란스키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 10대의 성을 다룬 프랑수아 오종의 <영 앤드 뷰티풀>과 압델라티브 케시시의 <라이프 오브 아델>, 미국 뮤지션 리버레이스와 동성 연인의 삶을 조명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비하인드 더 칸델라브라>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하지만 티에리 프리모는 이들 영화 중에서 올해 칸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킬 작품이 반드시 있으리라고 장담한다. 몇몇 작품의 감독들은 “섹슈얼리티라는 테마를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 실험하는 듯 보인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올해의 경쟁작들을 가로지르는 또 다른 테마는 ‘가족’이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많은 감독들이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의 이면을 탐구하려 한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오직 신만이 용서한다>는 가족의 죽음에 복수를 다짐하는 모자의 이야기고, ‘어반 웨스턴’을 표방하는 미이케 다카시의 <짚의 방패>는 손녀딸을 죽인 남자의 머리에 어마어마한 상금을 거는 백만장자 아버지에 대한 영화다. 알렉산더 페인의 로드무비 <네브래스카>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카메라를 놓는다. 전반적으로 2013년의 칸영화제는 관계에 대한 드라마들이 강세를 보인다.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나 테렌스 맬릭의 <트리 오브 라이프>처럼 추상적이고 거대한 개념을 좇는 영화들은 올해 경쟁부문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 아마 2013년 칸에 당도한 예술가들은 우주와 지구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데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황금종려상의 향방을 점치는 이들의 의견이 올해만큼 분분했던 적도 없다. 무엇보다 심사위원 아홉명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고 달라 도무지 그 속을 가늠할 길이 없다. 역사드라마부터 장르물까지 드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다양한 스타일의 영화에 관심을 표해온 스필버그의 한표는 어느 작품으로 향할 것인가. 진지한 루마니아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와 쉽게 타협하지 않는 일본 감독 가와세 나오미, 예리한 감각을 지닌 영국 감독 린 램지의 선택은 어떻고. 프랑스 잡지 <텔레라마>와의 인터뷰에서 스필버그는 “민주주의!”라는 말로 심사위원장으로서 자신의 나아갈 길을 설명했지만 역시 부담을 느끼는 모양인지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는 “마지막 결정의 날을 준비하며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살인사건에 판결을 내리는 배심원들의 이야기다-편집자)을 봐야겠다”는 말로 기자들을 웃게 만들었다. 이렇게 성대한 영화 축제의 막이 올랐다. 지금은 극장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제66회 칸영화제 심사위원 기자회견 “영화제, 경쟁은 없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소감, 그리고 심사의 기준을 말해달라. =크리스티안 문주_영화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건 정말 힘들다. 나는 감독이 진솔함과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볼 거다. 감독으로서의 첫 의무는 그가 원하는 걸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고. 리안_진솔함은 정말 필수다. 그 점을 본 뒤 우리는 의심의 여지없이 미학과 정치, 사회적인 관점에 대한 숙고를 거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말도 못 이을 만큼 마음에 와닿는 작품이 있을 거다. -스필버그에게 묻겠다. 당신이 등의 영화로 칸을 찾았을 때 주로 비경쟁부문에 초청됐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며 느낀 소감을 말해달라. =스티븐 스필버그_나는 우리가 판단을 내리고, 영화에 대해 개인적으로 평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관객의 이목을 끄는 좋은 경쟁이 존재한다는 점을 안다. 엄선된 관객의 취향을 놓고 경쟁하는 영화들도 있다. 그러나 사과와 오렌지의 차이점을 말하는 건 나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영화제를 경쟁으로 보지 않는다. 이건 영화를 축하하는 2주간의 행사지 한 영화를 다른 영화들과 비교하며 경쟁하는 2주가 아니다. -스필버그와 리안에게 묻는다. 당신 둘은 올해 오스카를 앞두고 <링컨>과 <라이프 오브 파이>로 캠페인을 벌인 라이벌이었다.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다시 만난 소감을 말해달라. =리안_스티븐과 나는 좋은 친구다.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는 나의 영웅이다. 스티븐 스필버그_우리는 경쟁자였던 적이 없다. 우리는 항상 동료였다. 나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리안도 존경한다. 칸의 심사위원이 되어 좋은 점 중 하나는 여기에 캠페인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