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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 신문 제12호 (1932~1933)

영화사신문 제12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32 ~ 1933 영화 학살자로부터 도피하라프리츠 랑 등 유대계 독일 영화인들, 나치 피해 엑소더스 시작 프리츠 랑이 파리로 떠난 다음날인 3월29일 괴벨스는 대변인을 통해 “<마부제 박사의 유언>은 국민에게 반사회적 행동과 국가에 대한 테러를 선동하는 영화”로 규정하고 상영금지를 천명했다. 1933년 나치의 집권 뒤 독일 영화인들의 엑소더스가 시작됐다. 영화팬인 히틀러와 그보다 더 영화에 광분한 선전국장 요셉 괴벨스가 영화를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길들이기 위해 영화에 대해 강력한 통제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영화인들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취임 초기 괴벨스는 독일의 위기가 물질과 경제만이 아니라 문화에도 만연한 것으로 보면서 “독일영화를 그 뿌리부터 개혁할 용기가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다. 탈출 행렬의 선두에 선 인물은 독일의 대표적인 감독인 프리츠 랑. 그는 나치 제국의 선전국장 괴벨스로부터 UFA 수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던 3월28일 밤, 독일을 떠났다. 이날 괴벨스는 랑에게 UFA 수장이 되어 그 첫 번째 영화로 <윌리엄 텔>을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제안이 놀라웠는데, 며칠 전 괴벨스는 랑의 신작 <마부제 박사의 유언>의 프리미어를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랑은 “외조부모가 유대인”임을 들어 고사했으나, 괴벨스는 “누가 유대인인지는 우리가 결정할 것”이라며 그의 허락을 재촉했다. 이에 랑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그날 밤 파리로 떠났다. 유대인인 영화인들이 독일을 떠나기 시작했다. 괴벨스가 모든 유대인들을 영화산업에서 쫓아내도록 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영화기구, 심지어 외국회사가 차린 독일 지사에서 일하는 것까지 금지됐다. 이에 감독인 막스 오퓔스, 로베르토 시오드막, 시나리오 작가인 빌리 와일더, 칼 메이어, 의 명배우 피터 로레가 독일을 떠났다. 또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출연배우인 콘라드 바이트는 아리아족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독일을 벗어나야 했다. 폭력적인, 너무나 폭력적인 총격과 유혈사고가 난무하는 <스카페이스…>, 수정 후 2년만에 햇빛 1932년 5월19일 하워드 혹스의 갱스터영화 <스카페이스, 국가의 수치>가 ‘드디어’ 개봉한다. 영화가 완성된 지 2년 만이다. 그동안 <스카페이스> 제작진은 검열에 걸려든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일부 장면은 추가하면서 영화의 내용을 순화시켜왔다. MPPDA는 제작자인 하워드 휴스에게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를 직접 연상시키는 영화제목(‘스카페이스’는 알 카포네의 별명이다)을 바꿀 것과 주인공인 토니 카몬테가 결국은 죄의 대가로 처벌되고 토니의 어머니가 그를 ‘나쁜 아들’취급하는 장면을 추가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에 휴스는 원래의 영화제목에 ‘국가의 수치’를 덧붙였다. 그럼에도 <스카페이스>는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영화보다 폭력적인 영화로 기록될 것 같다. 이 영화에서는 ‘화면 위’에서 28명이 죽고, 19번의 차사고가 일어나며 영화사상 처음으로 기관총이 등장한다. <스카페이스>는 1931년 탈세 혐의로 구속된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와 갱들간에 벌어졌던 밸런타인데이 대학살 사건 등을 소재로 한 영화로, 시카고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갱들을 지켜봐온 벤 헤크가 아미타주 트레일의 소설 <스카페이스>를 토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한편 시카고시를 비롯한 일부 주들은 이 영화의 개봉을 금지한다고 밝혔다. 버스터 키튼 ‘끝없는 추락’ 별난 행동과 잦은 이탈에 MGM 계약 취소 1933년 2월2일, 찰리 채플린과 함께 ‘코미디의 왕’으로 군림했던 버스터 키튼이 MGM으로부터 해고됐다. 그의 별난 행동과 잦은 세트장 이탈로 제작을 지연시킨 것이 화근이 됐다. 이를 보다 못한 MGM 대표 루이스 메이어는 <뭐! 맥주가 없어?>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그와의 계약을 취소했다. 버스터 키튼의 내리막은 1928년 <스팀보드 주니어 빌> 등의 흥행 실패 뒤 그의 독립영화사가 MGM에 흡수되면서 시작됐다. 버튼은 MGM에 들어간 뒤에도 자율적인 영화제작이 가능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현실은 그의 기대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의 감독 필모그래피는 1928년에서 뚝 끊겨버린다. 스튜디오 시스템에 대한 부적응과 아내 나탈리 탈머그와의 이혼으로 실의에 빠진 그는 술에 절어살았고, 그러는 동안 유성영화가 보편화되면서 그의 재능은 한물간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에게 남겨진 유일한 영역이 연기였으나, 이번 해고로 버튼은 그 기회마저 잃게 되었다. 불운의 스타, 패티 아버클 떠나다 1910, 192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미국의 코미디언 패티 아버클(Fatty Aburckle)이 사망했다. 1933년 6월39일 아버클은 잠을 자던 도중 사망했다. 향년 42살. 이날은 그가 워너브러더스와 장편영화 출연계약을 맺던 날. 아버클은 몹시도 기다려온 재기의 날을 눈앞에 두고 그만, 영영 눈을 감아버렸다. 아버클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이었다. 그는 버스터 키튼을 발탁하기도 했는데, 키튼은 1917년 아버클의 영화 <푸줏간 소년>의 조연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하지만 1921년 9월 그의 화려한 시절은 갑작스럽게 끝난다. 신참 여배우 버지니아 라프에 대한 강간 및 살해 혐의로 고소된 것이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기 전 언론은 마구잡이식으로 아버클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언론은 아버클을 당시 비난의 대상이었던 할리우드의 방종과 타락의 상징인 양 다뤘다. 1923년 아버클은 세번에 걸친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살인혐의를 벗는다. 하지만 파라마운트는 여론에 밀려 그를 해고한다. 이후 그는 보드빌 등에 출연하며 근근이 생계를 연명해오다 워너브러더스가 제작한 코믹 단편에 출연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이 단편들이 흥행에 성공하자 워너브러더스는 그에게 장편 계약을 제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계약을 맺던 날 아버클은 세상을 떠났다. 주목! 이 사람/ 칼 프로인트(Karl Freund) 카메라를 공중에 날리는 촬영의 마술사 공포영화 <미이라>로 감독 신고식 과거에 ‘그’없이 독일 표현주의영화를 논할 수 없었던 것처럼 현재에는 그 없이 할리우드 공포영화를 말할 수 없다. 그는 독일 표현주의영화의 대표작인 <골렘> <메트로폴리스>, 역시 카머스피엘의 대표작인 <미카엘> <마지막 웃음>에서 수준 높은 볼거리를 창조했고, 공포영화 <드라큘라>의 화면에 괴기스런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그가 바로 독일 출신의 촬영감독 칼 프로인트다. 1932년, 그가 마침내 공포영화 <미이라>로 감독 데뷔했다. 1890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자란 그는 파테의 뉴스릴 카메라맨을 거쳐 1911년 독일 UFA의 카메라부 부장으로 임명됐다. 카메라맨으로 그는 새로운 형태의 렌즈와 필름, 조명 기술을 개발하며 끊임없는 실험정신을 보여줬다. <메트로폴리스>를 찍을 때는 확대 거울을 통해 미니어처를 배경에 비춰, 마치 이 배경에서 실제 행동이 이뤄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속임수 기법인 ‘슈프탄 프로세서’를 개발했다. <마지막 웃음> 첫 장면에서 카메라를 자전거에 싣는 ‘원시적인’ 수법을 이용해 엘리베이터에서, 호텔 로비, 문 밖으로 이어지는 화면을 한 호흡으로 잡아낸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마지막 웃음>에서 카메라의 고삐를 완전히 풀어놓았다. 카메라는 공중을 날아다니고 주인공과 함께 빙글빙글 돈다. 이러한 촬영기법은 이후 다른 영화들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언제나 새로운 촬영기법에 목말라하던 칼 프로인트는 컬러필름 제작과정을 익히기 위해 독일을 떠났고 런던, 뉴욕을 거쳐 할리우드로 갔다. 그는 유니버설과 계약을 맺고 1931년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를 촬영했고, <미이라>로 감독 데뷔했다. <미이라>는 1920년대 초 투탕카멘의 묘 발굴 이후 풍문으로 떠돈 미라의 저주를 소재로 한 공포영화. 8시간이 걸린 보리스 카를로프의 미라 분장과 연기가 돋보이며, 흥행에도 성공해 ‘감독 데뷔’라는 프로인트의 새 실험이 도박이 아님을 증명했다. 영국 영화 ‘신 르네상스’ 스크린쿼터제로 체력 회복, <헨리 8세…> 등 대작 제작도 <헨리 8세의 사생활>은 전세계적으로 50만파운드를 벌어들여 대성공을 거뒀다. 1933년, <헨리 8세의 사생활>이 대대적인 흥행 성공을 거두며 영국영화의 부흥을 가시적으로 드러냈다. 헨리 8세의 개인사를 그린 이 영화는 전세계적으로 50만파운드를 벌어들였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일찍이 어떤 영국영화도 누리지 못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에 미국쪽 배급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제작자인 알렉산더 코다와 16편의 추가 배급계약을 맺었다. 현재 영국 영화산업은 스크린쿼터제 덕에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1927년 극심한 침체에 시달리던 영국영화를 회복시키기 위해 쿼터제를 도입, 상영업자로 하여금 전체 상영일수의 5%는 영국영화로 채우도록 했다. 여기에는 영국 영화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위기감과 함께, 할리우드영화를 통한 미국의 상품과 문화 침입에 대한 경계심이 함께 작용했다. 이어 영국 정부는 이 비율을 점차 늘려왔다. 쿼터제 실시 이후 영국영화 제작 편수는 쿼터를 상회할 만큼 크게 늘었다. 물론 쿼터 채우기용 날림 영화가 양산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확장된 산업 기반 위에서 <헨리 8세의 사생활> 같은 대작의 제작도 가능해졌다. 한편 영국 정부는 “영화예술의 발전을 격려하기 위해” 1933년 9월1일, 영국영화연구소(The British Film Institute, 이하 BFI)를 설립했다. 영화 문화를 보호하고 널리 보급한다는 취지다. BFI의 설립은 영국의 성인교육기구가 지난해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러한 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성사됐다. BFI는 정부의 재원으로 운용되며, 영화월간지를 발행할 예정이다. 단 신 들 “영화가 아이들을 만든다” 1933년, 영화가 청소년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돼 충격을 주고 있다. 페인기금연구회가 발표한 보고서 <영화가 아이들을 만들었다>에 따르면, 아이들은 세계의 해석이나 일상의 행동거지, 특히 성적 행동에 있어서의 도덕적 기준을 마련하는 데 영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있다. 이같은 연구 결과는 앞으로 할리우드 영화제작에 적잖은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페인기금연구회는 심리학자, 사회학자, 교육전문가로 구성된 사설 연구단체로 1929∼32년까지 미국 전역에 걸쳐 영화가 청소년에게 끼치는 영향을 조사해왔다. 괴벨스-에이젠슈테인 설전 독일 나치제국 선전국장 요셉 괴벨스와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다. 괴벨스가 <전함 포템킨>을 극찬한 데 대해 에이젠슈테인은 야유로 응수한 것이다. 1933년 3월28일 나치 제국 선전국장 요셉 괴벨스가 연설에서 <전함 포템킨>을 ‘감동적인 영화’로 꼽으면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이 없는 사람조차 이 영화를 보고 볼셰비키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은 예술작업이 선전적일 수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에이젠슈테인은 ‘괴벨스에게 보내는 공개장’에서 “거짓된 허섭쓰레기 속에 진실이 있을 수 없듯 사실주의 예술은 진보적 혁명사상과 사회주의적 구조에 의해서만 탄생한다”라고 밝혔다. 자니 와이즈뮬러, 6번째 타잔 1932년 3월 올림픽 수영선수 자니 와이즈뮬러가 영화사 통산 6번째 타잔으로 출연한다.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수영부문에서 5개의 금메달을 딴 와이즈뮬러는 1929년 수영에 관한 단편영화들에 출연해왔다. 이를 본 MGM이 그에게 새 영화 <타잔, 원숭이 인간> 출연을 제안하면서 전업배우로 나서게 됐다.

[현지보고2] <캐리비안의 해적 : 블랙 펄의 저주> LA 시사기

내가 비치 보이스였대도 서핑하러 가자는 노래만 불렀을 것 같았다. 데이비드 호크니가 물방울 튀는 수영장 그림을 그린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장마가 시작된 서울에서 12시간, LA의 쨍쨍한 태양과 건조한 공기 아래 물살을 가르고 시원한 액션을 선보인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와 그 출연진들을 만났다. 올랜도 블룸 “성년식 치른 기분” <마우스 헌트> <멕시칸>의 감독 고어 버빈스키와 <더 록> <나쁜 녀석들>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 그리고 <가위손> <길버트 그레이프>의 배우 조니 뎁이 뭉친 1억2500만달러짜리 블록버스터 <캐리비안의 해적…>은 쉽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영화였다. 브룩하이머는 “조니가 출연한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지금까지의 디즈니 영화와 구별짓는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지금까지의 디즈니 영화와 차별점을 두었다. 실제로 <캐리비안의 해적…>은 디즈니 이름 아래 개봉하는 영화로는 최초로 13세 관람가 등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외신이 전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출연진이 탄탄하다. <샤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제프리 러시가 악당 바르보사 역을 맡아 조니 뎁과 팽팽한 긴장을 유지한다. 또한 <반지의 제왕>에서 레골라스의 은빛에 가까운 금발머리와 활을 벗은 올랜도 블룸의 앞으로의 연기 행방을 추측할 수 있는 기회. 올랜도 블룸은 이 영화를 통해 “성년식을 치른 기분”이라고. <슈팅 라이크 베컴>에서 열혈 축구소녀 쥴스를 연기한 키라 나이틀리는 극중 역할인 엘리자베스를 “해적 그루피(추종자)”라고 소개하면서, 상당부분의 액션을 직접 소화한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해적선 ’블랙 펄’의 선장인 해적 잭 스패로(조니 뎁)는 자신의 배를 바르보사(제프리 러쉬)에게 강탈당하고 배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그렇게 십여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 바르보사는 ’블랙 펄’호를 타고 영국 함대가 주둔한 진지를 습격, 총독의 딸 엘리자베스 스완(키라 나이틀리)을 납치한다. 엘리자베스의 어릴 적 친구이자 그녀를 좋아하는 윌 터너(올란도 블룸)는 잭 스패로와 함께 영국 함대의 배를 훔쳐 엘리자베스와 블랙 펄 호를 찾아 나서는데, 엘리자베스의 약혼자인 노링턴 제독(잭 다벤포트) 역시 엘리자베스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잭 스패로와 바르보사, 그리고 블랙 펄 호를 둘러싼 저주가 그 실체를 서서히 드러낸다. 시대극답게 등장인물들의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으며, 해적선이 유령선으로 변하는 달 밝은 밤장면의 특수효과가 인상적이다. ‘해적스럽지 않은’ 해적선장의 매력 정작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액션보다 돋보이는 점은, 해적들이 뒤쫒는 대상이 보물이 아닌 저주를 푸는 데 있다는 것, 그리고 해적선장을 연기한 조니 뎁의 캐릭터가 우리가 알던 해적 캐릭터와 다르다는 것이다. 조니 뎁이 등장하는 첫 장면, 그는 다 가라앉은 배의 돛 꼭대기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항구로 들어온다. 걷는 폼도, 몸짓도 말투도, 어느 것 하나 ’해적스러운’ 데라고는 없다. 보물이 있는 곳을 아는가 했더니 숨겨놓은 럼주를 마시고 늘씬하게 취해 뻗어버리고, 여자와 단둘이 남아 로맨스가 펼쳐지나 했더니 잠만 잔다. 피터팬이 네버랜드에서 그대로 나이를 먹은 것처럼, 말썽쟁이 소년 같은 매력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보여주는 조니 뎁의 슬랩스틱 연기는 다시 보기 힘든 명장면. 어쨌건 극중 인물들이 ‘최악의 해적’이라고 부르는 잭 스패로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배 블랙 펄을 되찾는 것이고, 그 블랙 펄을 강탈한 해적 바르보사 일행이 원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걸린 저주를 푸는 것이다. 그래서 해적들은 보물을 마지막 한점까지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아야’만 한다. 시대극답게 등장인물들의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기울였으며, 해적선이 유령선으로 변하는 달 밝은 밤장면의 특수효과가 인상적이다. 해골들이 바다 아래를 떼지어 몰려가는 모습은 진혼곡이 따로 필요없을 정도의 을씨년스러움을 자아낸다. 고어 버빈스키 감독은 모험담과 액션, 로맨스, 그리고 코미디를 고르게 영화에 버무려넣었다. 시사회가 끝나고 배우들의 이름이 차례로 스크린에 나타났다. 조니 뎁과 제프리 러시의 이름에 박수를 보내던 관객(기자시사와 동시에 관객 반응을 모니터하기 위한 일반시사가 함께 진행되었다)이 올랜도 블룸의 이름에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니 뎁이 올랜도 블룸에게 넘겨주어야 했던 것이 아리따운 소녀와의 로맨스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싶었지만, 동시에 우리가 알아온 조니 뎁의 컬트 히어로적인 모습을 곧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니 뎁 인터뷰“스패로 캐릭터 설정 위해 많이 싸웠다” 어두운 피부색과 수염, 그리고 해골무늬 반지를 낀 긴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입담배를 마는 조니 뎁(40)은 마치 강령(降靈) 의식을 앞둔 인디언처럼 보는 사람을 말없이 빨아들였다. 그러나 반항아적인, 도발적인 그의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당황스럽게도, 흑진주처럼 반짝이는 두눈은 다소 수줍은 듯 좀처럼 취재진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 대답하며 영화를 잘 봤다는 말에도, 마지막 인사말로도 정중하게 “감사합니다”라고 대꾸하는 성의를 잊지 않았다. 잭 스패로 캐릭터 설정을 직접 했다고 들었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나. 주로 록밴드 ‘롤링 스톤즈’의 키이스 리처드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만화의 스컹크 캐릭터에서도. 스컹크는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그런 캐릭터였다. 파티에서 맨 마지막에 떠나는 캐릭터랄까. 끝없이 마티니잔을 기울이며 비틀대는. 키이스 리처드를 모방하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다만 그가 사는 방식에서 아름답기까지 한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아하고, 재치있고, 현명한. 올란도 블룸이 당신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와 일하면서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았나. 나는 요즘의 신작영화들을 많이 보지 않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잘 모르는데, 올란도를 만나 잘 알게 되면서 뭔가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배우로서의 열망이 강한 동시에 스타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에게 내가 거쳤던 싸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얼마나 힘든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어렸을 때 해적이 되고 싶었나. 그랬다면 어렸을 때 꿈꿨던 해적의 모습이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 펄의 저주>에서 연기한 해적의 모습과 비슷한가. 잭 스패로는 일반적인 해적과 다른 모습인데. 내가 어렸을 때, 나는 해적에 매료되었었다. 바다에서 머리는 바람에 나부끼고, 모험과 로맨스, 그리고 보물이 있는 로맨틱한 이미지에. 하지만 배우로서 내가 해적영화를 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잭 스패로 선장이 내가 어렸을 때 봐온 해적이냐고? 그렇지 않다. 5∼6살 때, 나는 <검은 수염의 유령>라는 제목의 디즈니 레코드 앨범을 가지고 있었는데, 영화를 본 적은 없었지만 늘 레코드를 통해 피터 유스티노프의 연기를 들었다. 어찌나 많이 들었는지, 레코드의 대사를 모두 외울 정도였다. 그의 이미지가 바로 ‘위대한 해적’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였다. 아이가 둘 있는데, 그 아이들이 이 역할을 맡는 데 영향을 끼쳤는지. 물론. 나의 다른 영화들,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 같은 영화는 15년이나 20년은 지나야 볼 수 있을 테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으니까. 하지만 캐릭터와 관련해서는, 물론 재미있기를 원했다. 아이들이 좋아할 수 있고 함께 웃을 수 있는. 하지만 동시에 막스 브러더스의 막내였던 하포 막스 같은 캐릭터를 원했다. 그는 어린아이들부터 지적인 성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지층을 가지고 있었다. 블록버스터로서는 처음인데, 이전 영화들과 작업과정에서의 차이점은 없었나. 내용이나 캐릭터 측면에서 보면 차이는 없다. 다른 점이라면, 이 정도 규모의 프로젝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끼어들기 때문에, 캐릭터의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좀더 열심히 싸워야 한다는 것 정도. 사실, 처음 그들은 내가 영화를 망치지나 않을지 꽤 걱정을 했다. 나는 무언가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결국은 모두가 행복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영화에서와 달리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는데. 아… 꼭 지푸라기 같지? 스티븐 킹 원작을 영화화한 <시크릿 윈도, 시크릿 가든>이라는 다음 작품을 위한 것이다.

가장 미국적인 긍정적 휴머니즘,<브루스 올마이티>

■ Story 뉴욕 버팔로 방송국 리포터인 브루스(짐 캐리)는 맛깔나게 지역 소식을 전해주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앵커 자리를 탐낸다. 그러나 일이 꼬여만 가자 신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는데, 이 때문에 정말로 신(모건 프리먼)과 대면하는 일이 발생한다. 신은 그에게 일주일간 전능을 대여해주며 휴가를 떠난다. 브루스는 보육원 교사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애인 그레이스(제니퍼 애니스톤)의 가슴 확장 따위에 초능력을 발휘하며 즐거워하지만, 점점 부작용이 커져가자 이번엔 신의 도움을 청하기에 이른다. ■ Review 알고보니 ‘성질 돋우기’였던 <성질 죽이기>는 오히려 <브루스 올마이티>의 부제로 적당할 듯하다. 노리던 승진 기회를 경쟁자에게 뺏긴데다 건달들한테 터지기까지 한 날, 브루스는 자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머피의 법칙’을 원망하며 생방송 카메라와 비오는 하늘을 향해 ‘뻑큐’를 연발한다. 이런 투덜이 스머프를 파파 스머프가 교화하여, 마음 떠난 스머페트와 다시 짝지어준다는 얘기가 이 영화의 동화적 골조이다. 어리숙한 순응자가 중재자를 통해 당당한 남자가 되어 여자를 되찾는다는 <성질 죽이기>처럼, 혹은 거꾸로 <브루스 올마이티>에서는 불만 많은 야심가가 중재자를 통해 긍정적인 남자가 되어 여자를 되찾는다. 애덤 샌들러는 소심한 머슴애에서 적극적인 가장으로 거듭나고, 짐 캐리는 이기적인 속물에서 이타적인 시민으로 재탄생한다. 과정상의 차이라면, 전자의 중재자는 일부러 교통체증을 일으키면서 노래나 부르게 하는 비현실적 상황을 기획하는 반면, 후자의 중재자는 막힌 도로를 홍해처럼 갈라놓고 신나게 질주하는 초현실적 상황을 허락한다는 점이겠다. 알고보면 뻔한 휴먼코미디의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브루스가 목매단 그 시청률), 톰 섀디악 감독과 짐 캐리는 쉴새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로 재롱을 떤다. <불의 전차> <타이타닉> <십계> 같은 중후한 대작의 얼토당토않은 패러디와, 신이 된 브루스가 사람들의 기도를 ‘야후’ 아닌 ‘야훼’ 메일로 접수하는 장면 등은 미국적인 장난기로 가득하다. 디지털 시대에 미국적으로 신을 재현하는 세련된 비주얼도 눈길을 끈다. 새하얀 텅 빈 공간에서 신이 “I’m the One”이라 말하거나 호수와 산맥이 포스트모던한 가상공간처럼 갑자기 펼쳐지는 <브루스 올마이티>는 <매트릭스>의 시뮬라크라에 가깝다. 갖가지 마술적 시각 효과와 물 위를 걷는 신의 모습 등은 결국 테크놀로지가 이 시대 신의 현현임을 말하는 듯하다. 이에 대한 성찰인진 몰라도, 브루스의 전능함(을 가능케 한 시뮬레이션)은 사소한 짜릿함이 심각한 폐해로 이어지는 나비효과를 낳는다. 애인한테 선물 주듯 끌어당긴 달 때문에 지구 저쪽에선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모든 사람들 소원에 ‘yes’를 클릭한 대가로 복권 인플레 같은 사회혼란이 초래된다. ‘브루스 올마이티’는 이때 ‘브루스 오마이갓’이 돼버린다. <성질 죽이기>가 양키스 스타디움까지 동원해 9·11 이후 뉴욕의 기를 부추기듯, 버팔로 타운을 세트로 재현한 <브루스 올마이티>에도 시사적 알레고리의 여지는 존재한다. 브루스는 특종을 위해 운석이 떨어지게 하는데, 권능이 미디어화되는 동시에 천체의 질서를 파괴한 재앙이 된다는 점에서 운석 낙하는 미국이 불러일으키고 미국이 보도해댄 테러와 닮아 있다. ‘미스터 특종’(Mr. Exclusive) 브루스의 파워는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미국의 패권과 겹치는 셈이다. 그 가공할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 그는 인류에의 봉사를 들먹이지만 신은 상투적이라고 꼬집는다. 브루스는 잠시 뒤 자기 아닌 다른 남자를 통해서라도 애인이 행복해지길 기도한다. <매트릭스2>에서처럼, 허구적 인류 구원보다 구체적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그것만이 신도 움직일 수 없는 타자의 ‘자유 의지’에 의해 주체가 존중받을 수 있는 길임을, 미국영화가 미국을 대신해, 그리고 미국인을 향해 반성적으로 설파한다. 이런 가르침은 실상 타자들로 구성된 미국의 정치적 기원이지만, 미국이 잃어버린 교훈이기도 하다. 신을 흑인이면서 블루칼라이자 화이트칼라이고 최하층민으로도 설정한 컨셉은 탈권위적으로 인종과 계급을 혼융시키려는 미국성의 뿌리를 새삼 되살린다. <매트릭스2> 전후로 <성질 죽이기>와 <브루스 올마이티>가 미국에서 메가히트를 날린 데에는 상처를 추스르고 자신감을 찾아주는 처세술과 자신의 변화가 타자의 변화를 이끈다는 메시지도 한몫했을 듯하다. 이런 긍정적 휴머니즘은 평등과 조화를 추구하는 미국적 진보인 동시에, 여전히 와스프 남성 위주인 대중적 영웅주의와 중산층 가족주의를 웃음의 당의정으로 감싸는 미국적 보수이기도 하다. 끝없이 리로디드되는 풍성한 디테일로 그 진보성을 재현하는 전능한 기술에 미국 휴먼코미디의 위대함이 있다면, 미국의 변방에서 이런 영화들을 너무 많이 봐버린 관객에겐 그래봤자 보수성의 재연일 뿐이라는 데 이 장르의 초라함이 있겠다. <브루스 올마이티>가 이런 한계까지 깨뜨릴 전능함을 지닌 건 물론 아니다. :: 톰과 짐의 휴먼코미디 방정식들영웅주의와 가족주의 <에이스 벤츄라>에서 만난 톰 섀디악 감독과 짐 캐리는 <라이어 라이어>에서 <브루스 올마이티>의 전례를 창조한다. 출세지향의 거짓말쟁이 변호사가 아들 소원으로 하루 동안 진실만 말하는 마법에 걸린 뒤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때 주인공의 통과의례(입문)로서의 초현실적 상황(마법)을 야기한 중재자(아들)는 잃었던 여자(아내)를 되찾게 한다. 주인공은 아버지라 해도 사실 모성적인 여자(‘은총’을 베푸는 그레이스처럼)의 응석 많은 아들과 다름없다가, 실질적인 아버지(중재자)의 시험을 통해 진짜 가부장으로 성장한다. 이는 곧 아들이 아버지의 법(마법이든 전능이든)을 거쳐 여자 딸린 남자가 된다는 오이디푸스 도식이다. 여기엔 늘 여자 유혹자와 남자 경쟁자가 있는데, 전자는 사라지고 후자는 주인공과 화해한다. 상황은 원래대로 회귀하지만 인물은 영웅으로 변하고, 적대자는 통합되며 조력자들은 박수친다(공통적으로 거지도 포함). 인물처럼 변화를 겪는 디테일의 수미상응은 기본이다. <브루스 올마이티>의 시작과 끝은 쿠키와 헌혈, 두번의 전환은 교통사고로 나타나며, 브루스처럼 개도 권능을 얻었다 잃는다. 섀디악의 <너티 프로페서>와 피터 시걸의 그 속편은 <지킬박사와 하이드>류의 다중인격증을 통과의례로 삼는다. 여자를 사이에 낀 착한 루저와 잘 나가는 터프가이의 대립은 패럴리 형제들의 선호 구도이며 이들 감독에 짐 캐리 주연의 <미, 마이셀프 앤드 아이린>에서도 변주된다. 변신을 통한 여자 유혹의 신화적 원형은 제우스일 텐데, 이 난봉꾼 신이 아내 몰래 바람피울 생각만 했다면 근대 이후의 변신은 왜곡된 욕망으로 단죄되는 보수적 경향을 띤다. 이에 비해 짐 캐리의 <마스크>는 성공적인 욕망 발현과 성격 변신을 신나게 보여준다. 그의 뒤틀리면서도 어둡지 않은 표정은 <브루스 올마이티>까지 이어지면서 진짜 광대가 연기하는 ‘귀여운 마초’의 한 얼굴-가면을 예증해 보인다.

현대적 영웅 신밧드,<신밧드: 7대양의 전설>

■ Story 해적 신밧드(브래드 피트)는 불화의 여신 에리스(미셸 파이퍼)의 계략으로 ‘평화의 책’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게 된다. ‘평화의 책’은 열두 도시를 수호하는 힘을 가진 보물. 시라큐스의 왕자이자 신밧드의 어린 시절 친구인 프로테우스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신밧드의 결백을 보증한다. 처음엔 달아나려고 했던 신밧드는 프로테우스의 약혼녀 마리나(캐서린 제타 존스) 때문에 마음을 고쳐먹고 ‘평화의 책’을 찾으러 떠난다. ■ Review <신밧드: 7대양의 전설>은 아라비아의 선원 신밧드가 겪은 모험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영화다. 주인공의 이름과 섬으로 착각하고 거대한 물고기 등 위에 상륙한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신밧드>는 여러 신화에서 끌어온 캐릭터를 토대로 삼아 새로 만들어낸 모험담이다. <오디세이>의 유혹하는 인어 사이렌과 <일리어드>에서 불화의 씨앗을 내던지는 에리스가 한데 엮이고, 친구를 위해 목숨을 맡긴 그리스 신화의 다몬은 믿음 깊은 친구 프로테우스로 이름을 바꿨지만, 신밧드와 마리나는 어디까지나 현대적인 영웅들이다. 제작자 제프리 카첸버그는 “신밧드는 애니메이션에 등장한 적이 거의 없다. 새롭고 흥미로우며 동시대의 감수성을 지닌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호언은 반쯤은 맞고 반쯤은 빗나간다. 2D와 3D기법을 함께 사용한 <신밧드>는 평평한 TV시리즈를 향수할 겨를조차 없게 만드는, 빠르고 광대한 그림을 펼쳐놓는다. 신밧드의 배 키메라호가 물고기 옆구리에 닻을 꽂고 함께 혼돈의 나라까지 질주하는 장면은 숨가쁘게 변하는 카메라 앵글과 실제처럼 튀어오르는 물보라 덕분에 아찔해질 정도다. 물결처럼 투명하게 부서지는 사이렌과 모두 2D지만 자유자재로 변화하는 꼬리부분만은 3D인 에리스도 관능적이다. 캐릭터도 독특한 면이 있다. 탐욕스러운 신밧드와 남자보다도 바다에 애착을 가지는 마리나는 서로를 인정하면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듯도 하다. 그러나 <신밧드>는 폭풍치는 바다보단 돛을 부풀릴 바람도 없는 맑은 날의 수면에 더욱 가까운 영화다. 한무리나 되는 키메라호의 선원들은 든든한 조연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에리스와의 신화적인 대결도 맥이 빠지며, 신밧드와 마리나는 진부한 로맨스에 다가간다. <신밧드>라는 제목을 듣고 밤을 꼬박 새우며 빠져드는 옛날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법도 하지만, 한여름에는 썩 어울리는 애니메이션이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자원활동팀장 채홍필

초보 관객도 맘껏 즐길 수 있게! 학원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던 90년, 대동제를 맞은 어느 대학 한 강의실에서는 흰 천을 스크린 삼고, 신문지로 자리를 삼은 500여명의 관객이 모여 있었다. ‘바깥 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에 잠시 끊긴 영화의 제목은 <파업전야>. 영사기를 돌리던 공대생 채홍필(34)의 손에는 방금 필름을 자르던 커터칼이 들려 있었다. 조금의 웅성임도 없이 앉아 있던 관객에게 다시 빛이 뿌려지기 시작한 건 10분이 조금 지난 뒤였다. 두개의 롤로 이루어진, 90분 남짓한 길이의 영화는 두번의 긴급 중단과 롤 교체에 걸린 시간을 모두 포함한 세 시간의 상영을 마쳤다. 자리는 한동안 미동조차 없더니, 누군가의 선창에 의해 <철의 노동자>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대학 2학년, 자그마한 영화동아리 회장이던 채홍필은 그 순간 영화가 대중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 두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기계공학과를 중도에 포기하고 16mm 현장에서 뛰어다닌 6개월 동안 그가 확인하고 싶었던 건, 다시 맛보고 싶었던 그런 영화의 힘이었다. 6개월이 10년의 세월로 승화한 지금도 그 갈증은 그대로다. 군대에 들어간 건 16mm를 찍다 충무로 현장에 갓 입성한 직후였다. 작품이 갑자기 엎어지는 바람에 오갈 데가 없던 그는 정해진 수순대로 군대를 택했다. 일, 이등병 시절은 말 그대로 암흑이었고, 같은 시기 입대한 친구녀석과 서신 세미나를 시작한 건 상병이 되면서였다. 원서 한권을 정해 전화로(그는 당시 외부전화를 쓸 수 있는 보직이었다.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편지로 발제를 하고 토론을 하고 반문을 주고받았다. 그렇게 일년을 꼬박 매달리다보니 곧 제대였다. 친구는 한창 문화담론이 형성되던 시기, 뮤지컬 연출에 흥미를 보였고, 채홍필은 여전히 영화였다. 친구의 뮤지컬 작업을 도우면서 틈틈이 현장을 모색하던 중 문승욱 감독을 만나 <나비>의 조감독을 맡기도 했다. 부천영화제에 발을 디딘 건 순전히 경제적 궁함을 타개해보려는 미봉책이라고 말하지만, 역시 영화가 군중에 안기는 그 살떨리게 멋진 경험을 다시 느끼기 위해서일 것이다. 올해는 특히 초보관객이 많을 것 같다는 사무국장의 지적대로 자원활동팀은 바짝 긴장 중이다. 부천이라는 도시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게시판에 물어오는 초보관객뿐만 아니라 그들을 긴장시키는 또 하나의 존재는 올해 부천영화제 최대의 화제작으로 떠오른 <문 차일드>를 보기 위해 몰려들 전국의 팬들이다. 그로서는 관객의 안전관리가 최대한의 목표다. 조용한 성격에 싫은 소리 한번 못할 것 같은 그지만, 공연기획과 연출에서 누구보다 꼼꼼한 조직력을 선보이고 있어 영화제가 처음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 노련한 자원활동가들에게 뒤지지 않는 초보팀장의 활약상을 보고 싶다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7월10일 부천으로!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이혜정 socapi@hani.co.kr 프로필 기계공학과 89학번 · 97년 창작 뮤지컬 연출 · <나비> 조연출 · 전주 소리문화 축제 등 다양한 공연 기획을 해오다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자원활동팀장으로 활동

심장이 먼저 아는 사랑 이야기다,<여름향기> 윤석호 PD 인터뷰

<여름향기> 월·화 드라마 밤 10시 윤석호 PD의 사계절 연작 시리즈 <여름향기>가 오는 7월7일 방송을 시작해 총 20부작에 걸쳐 방영된다. 윤 PD는 지난 2000년, “별 욕심없이, 그저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를 한번 해보고 싶어서” 만든 <가을동화>가 기대 이상의 인기를 모은 것을 계기로 사계절 연작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가 15년간 몸담았던 KBS를 떠나 프로덕션(팬엔터테인먼트)으로 자리를 옮긴 뒤 내놓은 <겨울연가>는, <가을동화>보다 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을 뿐 아니라 해외판매와 O.S.T 같은 관련 상품 판매를 포함해 총 134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KBS 콘텐츠기획실 분석). 세 번째 작품인 <여름향기>가 <겨울연가>만큼 인기를 모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는 건 부질없는 짓인 것 같다. 국내 시청자들이 선남선녀가 빚어내는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열렬히 환호한다는 사실이 이미 전작을 통해 증명된데다 국내 팬보다 더 많은 해외 팬들이 <여름향기>가 방영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향기>의 대만 판권은 촬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팔렸고 중국, 일본, 홍콩, 필리핀 등 아시아 각국 방송사들이 촬영현장을 직접 방문하는 등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꺼이 촬영을 수락한 무주의 한 리조트는 드라마의 설정에 맞춰 리조트 리모델링에 들어갔고, 관련 정부부처에서는 <가을동화>와 <겨울연가>가 한국 관광사업에 기여한 바를 높이 평가하며 <여름향기>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수백억원짜리 사랑 이야기가 될 것으로 전망되는 <여름향기>를 만들면서, 윤석호 PD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세트촬영이 한창인 KBS 수원스튜디오에서 그를 만났다. <여름향기>는 어떤 드라마인가. 얼굴을 마주치면 심장이 먼저 두근거리는 사랑, 그런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첫사랑 여인을 떠나보낸 남자가, 그 여인의 심장을 이식받은 다른 여자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고. 계절이 여름이니만큼 톡톡 튀는 로맨틱코미디가 될 거라는 얘기도 있었는데. 처음엔 1996년에 만든 <칼라-옐로우>처럼 개성있고 속도감 있는 로맨틱코미디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잘 안 풀렸다. 심장이식을 받으면서 그 사람의 영혼을 닮는다는 설정이니까 <번지점프를 하다>의 고은님 작가가 쓰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고은님 작가가 비슷한 얘기를 또 쓰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하더라. 컨셉이 바뀌는 바람에 준비를 많이 못해서 촬영도 늦어졌고, 걱정이 된다. <가을동화>나 <겨울연가>와 비슷한 설정이 아닌가. ‘자기복제’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사계절 시리즈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순수하고 예쁜 사랑 이야기를 담는 쪽으로 가려고 한다. 20부작을 끌고가야 하니까 갈등, 즉 주인공의 ‘족쇄’가 필요한데, <가을동화>에서는 뒤바뀐 운명, <겨울연가>에서는 기억상실증, <여름향기>에서는 심장이식이 족쇄인 셈이다. 시리즈의 테마는 같다. 순수한 사랑, 그 설렘은 무엇보다 아름답다는 것이다. 윤 PD의 필모그래피에는 <느낌>이나 <프로포즈> <순수> 같은 가벼운 트렌디드라마가 있는가 하면, <아들과 함께 걷는 길>이나 <은비령> 같은 묵직한 작품도 있다. <칼라>에서는 드라마 사상 유례없는 영상실험을 했고, <초대>에선 미혼모나 혼전동거 같은 껄끄러운 소재를 다뤘다. 이렇게 폭이 넓은 사람이, 왜 ‘동화’에 집착하는지 궁금하다. KBS에 있으면서 실험을 많이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실험의 종착역은 ‘동화’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가 좋고, 그 이야기를 하고 싶다. <가을동화>에 시청자들이 크게 호응하는 걸 보면서 깨달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동화 같은 순수함이 있고, 내가 진정성을 갖고 만들면 시청자들도 알아봐 준다는 것이다. 혹시 프로덕션쪽에서 ‘안전하게 가자’고 권한 건 아닌가. 아니면 윤 PD 스스로 국내외 팬들의 성원을 너무 의식한 결과이거나. <겨울연가> 때도 <가을동화>만큼 잘될까, 불안해하면서 그냥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지만 그 때문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내가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어야 결과가 좋다고 믿는다. 프로덕션으로부터 간섭을 받지도 않았다. 오히려 큰 조직(KBS)에 있을 때 내가 너무 교만하게 보일까봐, 내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까봐 조심하는 게 힘들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걸 힘들어하는 편이라 작은 조직이 오히려 마음 편하다. 특히 선호하는 배우가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이들은 윤 PD가 그 배우들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비슷비슷한 이미지만 부각시킨다고 불평을 하는데. 나는 착한 눈을 가진 배우에게 끌린다. 원빈, 배용준, 류시원 같은 배우들과 자주 작업을 한 건 그래서인 것 같다. 더구나 사계절 시리즈는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하니까, 그 배경에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사람이 필요했고…. 배용준은 <사랑의 인사>로 내가 데뷔시킨 배우인데 이후 다른 드라마를 하면서 차갑고 독한 역할을 많이 하더라. <겨울연가>를 통해 그의 착하고 여린 부분을 보여주고 싶었다. 반대로 김희선의 경우, 청순가련한 이미지로만 나오기에 <프로포즈>에서 마음껏 놀아보라고 했더니 평소 왈가닥인 그녀의 성격이 나오더라. 어울리지 않는 배우에게 독한 캐릭터를 하게 한다고 그들의 개성을 살려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음 작품 제목이 <봄날은 온다>라고 들었다. ‘봄’을 테마로 한 다음 작품은 제목을 확정한 건 아니고, 봄이 주는 느낌, 설렘과 희망 같은 것들을 듬뿍 담을 생각이다. 그 다음엔… 시리즈의 부담에서 벗어나 예전에 했던 실험을 다시 해보고 싶다. 어쨌든 먼 훗날의 얘기고. 지금은 <여름향기>만으로도 벅차다. (웃음)이미경/ <스카이라이프> 기자 friendlee@hani.co.kr

영화사 신문 제10회(1927∼1929)

영화사신문 제10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27 ~ 1929 <재즈싱어>을 개봉한 워너극장 전경. 최초의 유성영화에 관객들의 발길이 줄을 잇고 있다. 아니, 배우가 말을 하다니<재즈 싱어> 첫 대사 삽입, 시사회 흥분의 도가니 “잠깐, 잠깐만. 아직 당신은 아무것도 못 들었다니까.” 1927년 9월6일 마침내 영화가 말문을 텄다! <재즈 싱어>의 주인공 올 졸슨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시사회장엔 흥분과 놀라움이 출렁거렸다. 지난해 <돈 주앙> 이후 바이타폰영화들이 이어졌지만, 배우가 말을 하기는 <재즈 싱어>가 처음이다. 영화에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단 두 대목에 불과하다. 나머지 장면은 여느 무성영화처럼 자막으로 대사가 처리되었다. 하지만 그 ‘양’은 문제가 안 된다. 중요한 건 배우가 ‘말을 한다’는 것이다. 뉴욕에서 열린 <재즈 싱어>의 첫 시사회 분위기는 제작사인 워너브러더스를 크게 고무시켰다. 워너는 회사의 사활을 걸고 유성영화 개발에 총력을 기울여왔다. 한편 유성영화의 도입여부를 고려하고 있던 다른 영화사들에도 <재즈 싱어>의 성공은 적잖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재즈 싱어>의 첫 공개와 관련된 이모저모를 살펴본다. ○…아깝다, 워너 형제들. <재즈 싱어> 첫 시사회장에도 못 가고. 아니, 불쌍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시사회 하루 전 샘 워너가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바람에 나머지 워너 3형제도 이날 시사회에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이타폰 실험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샘 워너는 옛날에 깨진 코가 원인이 돼 누관이 감염되는 바람에 극적인 순간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떴다. 샘의 죽음을 접한 해리, 알버트, 잭 워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급히 뉴욕을 떠났다. ○…히트한 연극을 원작으로 한 <재즈 싱어>의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펼쳐진다. 5대째 내려온 가업인 유대교 독창자(cantor)가 되도록 강요당하지만 재즈 가수가 되고 싶어하는 올 졸슨과 부모의 갈등, 재즈 가수로 입신하는 과정이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리면서 전개된다. 가출했던 졸슨은 유망한 재즈 가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지만 아버지는 그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아들이 어머니를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는 그 순간 아들에게 ‘멈춰’(stop) 하고 소리친다. 여기에서 졸슨이 노래 부르는 중간중간 어머니와 나누는 간단한 대화, 그리고 ‘멈춰’라는 아버지의 호령이 <재즈 싱어>에 등장하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유성대사’다. 결말에서 졸슨은 재즈 가수로도 성공하고 아버지와도 화해한다. ○…재개봉관 극장주들도 유성영화 시대의 도래를 반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돈 안 주고도’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관객에게 들려주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무성영화 상영의 경우 음악을 들려줄 오케스트라단이 필수적이지만 재개봉관을 운영하는 처지에 제대로 된 오케스트라단의 운영은 큰 부담이었다. 워너브러더스도 이를 공략해 극장주들에게 “이 발명품만 있으면 극장 규모에 상관없이 완전한 오케스트라 반주가 가능하다”라고 선전해왔다. ○…앞으로 할리우드 5대 제작사들의 행보도 귀추가 주목된다. MGM, 유니버설, 파라마운트, 퍼스트 내셔널, 제작자배급협회, 이 5개 회사는 유성영화 도래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지난 2월 ‘빅 파이브 협약’을 체결했다. 어떤 음향 시스템이든 다 함께 가장 유리한 것으로 증명된 기계를 도입하기로 결의한 협약이었다. 지난해 워너가 <돈 주앙>을 내놓을 때까지만 해도 이들은 바이타폰 바람이 가라앉기를 바랐다. 새로운 스튜디오의 설립, 극장 상영 기재의 변경 등 유성영화를 만들 경우 제작사들은 많은 것을 바꾸어야 했다. 이는 비용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제작사들은 유성영화가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입장을 바꿔 이 협약을 맺었다. <잔다르크의 수난>, 끝없는 수난흥행실패 이어 재촬영 네거티브 필름마저 불에 타 1929년 <잔다르크의 수난>(The Passion of Joan of Arc)의 수난은 끝이 없어라. <잔다르크의 수난>의 네거티브 필름이 ‘또’ 불에 타 재로 사라졌다. 1928년 12월6일 UFA스튜디오에 불이 나는 바람에 네거티브 프린트가 연소된 데 이어 두 번째다. <잔다르크의 수난>은 판크로매틱(전정색성) 작업을 하느라 그곳에 있었다. 당시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은 편집 뒤에 남아 있던 네거티브 필름와 일부 장면을 재촬영해 새 네거티브 프린트를 만들었다. 그나마 몇개의 복제 프린트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드레이어는 비교적 원본에 가까운 네거티브 프린트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고몽영화사의 작업실에 불이 나는 바람에 그곳에 보관 중이던 새 네거티브 프린트가 화염에 휩싸인 것이다. <잔다르크의 수난>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봉 전부터 프랑스 민족주의자들은 드레이어가 덴마크인이라는 점, 가톨릭 교도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이 영화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왔다. 1927년 1월 장 조세 프라파는 “아무리 재능있는 감독이라도 프랑스인이 아니면 진정한 프랑스 전통 위에 서 있는 잔다르크를 그릴 수 없다”라고 경고했다. 또한 개봉을 앞두고 모욕감을 느낀 대주교들의 반발(<잔다르크의 수난>에 등장하는 가톨릭 사제들은 하나같이 비열하고 탐욕스럽고 신성모독적인, 악의 화신으로 그려진다)과 프랑스 정부 검열관들의 검열로 영화는 상당 부분 수정이 불가피했다. 설상가상으로 1928년 10월 개봉 뒤에는 대중에게도 외면받아 극히 저조한 흥행성적을 기록하고 커튼을 내려야 했다. 제1회 아카데미영화제 작품상에 <윙>, 찰리 채플린 특별상 수상 1929년 5월16일 제1회 아카데미영화제 시상식이 로스앤젤레스 루스벨트 호텔에서 열렸다. 영화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한 이날 시상식에서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초대 회장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가 13개 부문의 수상자들에게 트로피를 수여했다. 남녀주연상은 각각 <마지막 명령>(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의 에밀 야닝스와 <선라이즈>(감독 F.W. 무르나우) 등에 출연한 자넷 가이너에게 돌아갔으며, 프랭크 보르자주가 <거리의 천사>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작품상은 반전을 호소한 <윙>(감독 윌리엄 웰만)이 수여했다. 또한 찰리 채플린은 “<서커스>의 각본, 연기, 연출, 제작에서 보여준 다재다능을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했다. 옛 명성은 어디가고… 전설적 이미지의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파리서 조그만 사탕가게 운영 ‘힘겨운 노년’ 파리 몽파르나스역 인근의 구멍가게에서 사탕과 장난감을 팔고 있는 멜리에스. 1929년 갓 태어난 영화매체가 품고 있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펼쳐보였던 이미지의 마술사, 조르주 멜리에스가 살아 있었다. 멜리에스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가 마지막 영화를 만든 1913년 이래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시네 주르날> 편집장 레옹 드뤼오가 파리 몽파르나스 역 구멍가게에서 그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는 기억의 저 끝을 한참 헤집어야 겨우 생각나는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드뤼오의 손에 이끌려 홀연히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어느 날 드뤼오는 몽파르나스 역을 지나다 작은 가게에서 사탕과 장난감을 팔고 있는 멜리에스를 발견한다. 그 가게는, 잔 달시라는 이름으로 멜리에스 영화에 출연했던 아내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를 발견한 것도 놀라웠지만 그에게서 들은, 영화를 그만둔 뒤의 인생 이야기는 더욱 놀라웠다. 멜리에스는 힘겨운 노년을 견뎌내고 있었다. 1913년 파테영화사가 그에 대해 벌인 법적소송에서 패한 것이 내리막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발발하던 이듬해 그는 몽트뢰이유에 있는 스튜디오 하나를 극장으로 개조하는 것을 비롯해 이런저런 일을 벌였지만 뜻대로 되는 건 없었다. 1923년, 그는 완전히 파산했다. 채권자들의 요구에 따라 법원은 그에게 전 재산을 팔 것을 요구했다. 이때 그의 필름의 상당수는 신발공장 재료로 팔려갔다. 그뒤 멜리에스는 지방 공연으로 근근이 연명하다가 1925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면서 사탕가게에 들어앉게 됐다. 한편, 그날 멜리에스를 발견한 데 감격한 드뤼오는 곧 동료 저널리스트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들은 1929년 12월16일 파리 살 플레엘에서 멜리에스 환영회를 열어 그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기로 했다. 기획비평 <메트로폴리스> 네살짜리 판타지 1927년 500만마르크에 이르는 제작비, 촬영기간 11개월 등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를 모았던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가 개봉했다. 제작사의 기대와는 다르게 극심한 흥행부진을 보이고 있는 이 영화는 평단을 지지와 반대로 나눠놓았다. 논란의 와중에서 프랑스 비평가 장 프레보스트가 혹독한 비판문을 보내왔다. 그는 <메트로폴리스>를 “네살짜리의 판타지”로 깎아내렸다. 그의 글을 발췌해서 싣는다.(여기는 사체로 함이 어떨지...) 이 영화는 내가 본 가장 어리석은 영화들 중 하나다. 영화의 시작, 특히 그 5분은 부인하기 힘든 놀라운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도시와 빌딩의 이미지는 정말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그건 마치 편두통을 앓는 시인이 본 뉴욕 같다. 그러나 영화에 나타난 인간묘사는 너무 실망스럽다. 늙은 과학자는 센티멘털한 칼리가리나 다름없다. 도시의 지배자라는 설정도 진부하다. 상반된 두명의 인물로 나오는 마리아? 동정을 받아야 하는 역할에서는 너무 약하고, 미움을 받아야 하는 역할에서는 너무 멋있다. 단 신 들 할리우드 영화제작 규제안 발표 1927년. 할리우드의 자정과 이미지 혁신을 위해 설치된 MPPDA(의장 윌 헤이즈)가 일종의 영화제작 규제 코드인 ‘하지 말아야 할 것과 주의해야 할 것’(Don’t and Be careful)을 발표했다. 11개 항으로 된 ‘하지 말아야 할 것’에는 ▲신성모독 ▲음란하거나 암시적인 모든 나체 ▲백인 노예 ▲백인과 흑인간의 성적관계 ▲출산장면 ▲불법적인 마약거래 ▲성 위생학과 성병 등이 포함된다. 이 조항들은 그것들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에 상관없이 절대로 스크린에 등장해서는 안 된다. 또한 말 그대로 ‘주의해야 할 것’에는 ▲국제관계 ▲방화 ▲살인기술 묘사 ▲범죄자에 대한 동정 ▲선동 ▲첫날밤 ▲강간 ▲과도한 키스 등 26개 조항이 담겨 있다. “사운드, 몽타주의 예술 파괴” 1928년 8월5일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그의 조감독인 그레고리 알렉산드로프, 푸도프킨이 ‘음향에 관한 선언’(이 선언의 이름은 책에 따라 Statement on Sound, The advent of Sound Film, Sound and Image로 제각각입니다. 저는 보드웰의 책을 따랐습니다)을 발표했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유성영화는 양날의 칼”이라면서, “사운드의 사용으로 자칫 영화가 고급문학을 각색한 드라마로 전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계했다. 그럴 경우 사운드가 몽타주의 예술을 파괴하리라는 것이 이들의 우려다. 그러면서 이들은 “사운드는 오직 시각적 몽타주에 대위법적으로 결합될 때라야 그 가능성을 획득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곧 사운드와 이미지가 충돌을 일으킬 때라야 그들이 추구하는 감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렇게 사용되기만 한다면 사운드는 지금까지 풀지 못했던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것"이라며 사운드를 통한 혁신을 기대했다. <조개와 승려> 시나리오 작가 시위 “제르맹 뒬락은 암소다!” 1928년 2월9일 초현실주의 여성감독 제르맹 뒬락의 신작 <조개와 승려>(The Seashell and Clergyman)가 상영되던 파리 우르술린 극장에 때아닌 시위가 벌어졌다. 시인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는 뒬락이 자신이 쓴 시나리오의 의도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일군의 초현실주의자들을 동원해 위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난동을 부린 것이다. 시나리오상의 에로티즘을, 뒬락이 꿈이라는 장치로 희석화했다는 것이 아르토의 불만이다. 한편 이를 보다 못한 극장 관객이 시위대에 맞서는 바람에 소동은 더욱 커졌다. 관객의 한 사람인 르네 클레르 감독은 “양쪽을 중재해 소동을 진화하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독일 UFA, 위겐베르크가 이끈다 1928년 1월2일 앨프리드 위겐베르크가 재정 책임을 물어 경질된 에리히 폼머에 이어 독일 UFA의 수장에 임명됐다. 위겐베르크는 1912년 독립제작사인 델리그를 설립한 이래 프로파간다 영화를 전문으로 만들어왔으며, 우익 정당인 국가사회주의당의 주요 당원으로 활동해왔다. <메트로폴리스> <파우스트> 제작과 흥행 부진으로 파산 직전에 이른 UFA의 재정 위기를 해결하는 일이 그의 첫 번째 임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실컷 망가져볼까요? <영어완전정복> 촬영현장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아아~.” 신나는 노래방 반주에 맞춰 이나영의 노래소리가 울려퍼진다.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싶더니, 이나영은 이내 얼굴 근육에 힘을 잔뜩 불어넣으며 나름의(!) 브레이크댄스를 춘다. 수십명의 배우들과 보조연기자들이 함께 춤을 추고 있지만, 스탭과 취재진의 시선은 오로지 이나영의 ‘망가진’ 모습만을 좇았다. 잠시 뒤 감독의 컷사인이 나자, 이들은 꾹 누르고 있던 폭소를 일제히 터뜨렸다. 지난 6월29일 김성수 감독의 로맨틱코미디 <영어완전정복>의 촬영이 이뤄진 곳은 경북 예천군 용문면의 한 농가. 문수(장혁) 등 영어학원 수강생들이 영주(이나영)의 외가를 찾아 잔치를 벌이는 밤신을 찍고 있었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이나영의 <달타령> 장면. 서서히 호흡을 고르며 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와중, 작은 사고가 발생했다. 오전 8시부터 촬영에 임했던 이나영에게 갑작스런 알레르기 증상이 생긴 것. 목 주위에서 시작된 붓기가 얼굴로 번지며 촬영이 어려워졌다. 장마철이라 비오지 않는 날 제대로 촬영을 못하면 제작일정이 하염없이 늦춰질 수 있는 탓에, 김성수 감독의 얼굴에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다른 장면을 찍으며 이나영의 상태를 기다리던 제작진이 쾌재를 부른 것은 새벽 3시 무렵. 눈에 띄게 상태가 좋아진 이나영이 다시 촬영장에 나왔다. 촬영이 시작되자 그녀는 언제 아팠냐는 듯, 쌩쌩한 모습으로 다양한 ‘댄스’를 선보이며 스탭들을 즐겁게 했다. 7번째 테이크만에 결국 감독의 입에서 ‘오케이’라는, 만인이 갈망했던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행히 날이 밝기 전에 밤장면을 마무리한 것이다. 새벽 5시, 어둠에 가려져 있던 조용한 마을 모습이 안개 속에 드러나는 신비로운 광경을 뒤로 하고 스탭과 배우들은 잠자리를 찾아갔다. ‘깡다구’ 하나로 버티던 이나영도 코디네이터에게 몸을 기댄 채 자동차로 향했다. “아깝다… 연습한 것에 비하면 춤은 절반도 못 보여줬는데….”예천=사진 손홍주·글 문석 ♣ “두 병만 더!” 영주 외할아버지 역을 맡은 김인문이 외친다. 얼떨결에 문수 역의 장혁도 따라한다. 김인문은 바람둥이 문수를 짝사랑하는 외손녀를 위해 연신 막걸리잔을 기울였다. 영주를 ‘폭탄’으로만 생각하던 문수 또한 서서히 영주의 내면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 “김성수 감독님 말에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요?” <달타령> 편곡을 위해 촬영장을 찾은 조성우 음악감독(뒤편 왼쪽)은 김성수 감독의 지시에 제깍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촬영 중 그는 열심히 춤을 안 춘다며 감독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 불같은 성격으로 촬영장에서 욕설을 서슴지 않았던 김성수 감독은 “이번만큼은 자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코미디영화답게 화목한 분위기를 연출해야 좋은 장면이 나올 거라는 판단 때문이란다. 이날도 “조감독 튀어나와, 이 섀꺄”라는 정도의 가벼운(?) 욕설만을 했을 뿐이었다. 김성수 감독의 오랜 파트너 김형구 촬영감독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스타일인지라 게슴츠레한 눈으로 촬영장을 응시했다.♣ 동사무소의 말단 직원인 영주는 나사 하나가 풀린 듯 맹한 성격의 소유자. 이나영은 이를 표현하기 위해 양갈래 머리와 꺼벙한 안경을 동원했지만, 신비스런 매력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이나영은 이날의 연기를 위해 노래방에서 <달타령>을 100번쯤 부르며 ‘특별훈련’을 했다고 한다.

진짜 60년대 러브스토리,해외신작 <다운 위드 러브>

<다운 위드 러브>는 도리스 데이와 록 허드슨이 주연한 60년대 코미디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리겠다고 선언한 영화다. 1960년대 초반 뉴욕, 바바라 노박은 <다운 위드 러브>를 발표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여자도 사랑에 얽매이지 말고 섹스를 즐겨야 한다고 설파하는 이 책 때문에, 바람둥이 저널리스트 캐처 블락을 비롯한 남자들은 곤경에 처한다. 이 난국을 헤쳐나갈 방법은 단 하나. 캐처가 바바라를 유혹해서, 그녀도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폭로하는 것뿐이다. 작가 이브 알러트와 데니스 드레이크는 데이와 허드슨의 <필로우 토크>를 모델 삼아, 공격과 역습이 반복되는, “대사로 성적 긴장을 조성하는” 시나리오를 썼다. 르네 젤위거가 “읽는 동안 내내 깔깔댔다”니 두 작가가 힘을 모은 결과는 믿어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달라진 점도 있다. 알러트와 드레이크는 “여주인공이 처녀성을 잃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순수하고 이상한 섹스코미디”에 이제는 당연해진 진짜 섹스를 추가했다. 마치 자료보관소를 뒤져서 건져낸 듯한 이 복고풍 영화는 “60년대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진짜 60년대에 만든 영화”를 원했던 프로듀서 브루스 코언의 의도에 따라 세심하게 제작됐다. 지나치게 화려한 테크니컬러의 느낌을 살렸고, 배경은 실제 풍경 대신 그림으로 대체됐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르네 젤위거의 패션. 의상을 담당한 대니얼 올랜디는 분홍색 체크 원피스와 실크 장갑, 화려한 가운, 커다랗고 동그란 핸드백 등을 준비해 “르네 젤위거는 단 한벌의 의상, 단 하나의 소품도 두번 사용하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상큼한 젊음의 기운을 그려낸 <브링 잇 온>의 페이튼 리드가 연출한 이 영화에는 데이와 허드슨 주연의 코미디 세편에 모두 무게있는 조연으로 출연했던 토니 랜달이 25년 만에 모습을 보여준다.김현정 이완 맥그리거와 르네 젤위거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의 분위기를 충실하게 되살렸다. 그러나 바바라는 도리스 데이보다 “관능적이고 유머있는 캐릭터”가 됐으며, 바바라와 캐처의 관계는 “여자도 남자처럼 권력을 가질 수 있는 현대의 분위기”를 반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