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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신 전영객잔] 강우석 스타일을 지지함

나에게 강우석의 영화는 늘 옛날 미국영화의 무구한 오락적 가치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지만 <공공의 적> 이후, <한반도>를 제외하곤 난 늘 그의 영화를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전설의 주먹>도 마찬가지였는데 이 영화가 예상만큼 흥행하지 못한 것을 두고 놀랐다. 나는 이 영화의 건전한 오락적 가치가 충분히 대중적으로 통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편의 영화의 흥행 여부를 작품 자체의 가치만으로 판별할 수는 없다. 다른 대다수 영화에 비해 긴 상영시간,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한계라는 것도 이 영화의 흥행 스코어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웠던 언론의 호평에 비해 이 영화가 상대적으로 낡았다는 상당수의 비판적 시각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옹호하고 싶다. <전설의 주먹>이 다루고 있는 삶의 남루함이라는 소재에 외면할 수 없는 강우석의 윤리적 정직성이 스며들어 있고 그가 묘사한 인물의 유쾌한 자기 존엄 긍정에 동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 스타일과 영화적 어법의 상관관계 강우석의 현장 지휘는 빠르고 효율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촬영현장을 두세번 방문한 적이 있는데 늘 해가 지기 전에 그날의 촬영분이 끝났다. 그는 촬영을 마치면 배우들과 주요 스탭들을 데리고 어딘가 정해놓은 맛집에서 굵고 짧게 회식을 가진 다음 숙소로 돌아간다.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연출한 존 포드에 관한 다큐멘터리 <디렉티드 바이 존 포드>를 보면, 존 포드가 모뉴먼트 밸리에서 서부극을 촬영할 때 네시나 다섯시에 촬영을 마무리하고 매일 밤 캠프파이어를 즐겼다는 일화가 나온다. 제작부는 촬영 준비만큼이나 매일 바뀌는 캠프 파이어의 놀이 메뉴를 정하는 것이 주요 일과였고 신선한 잔치 코스를 준비하지 못하면 존 포드는 매우 언짢아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강우석과 작업했던 배우와 사석에서 나눴더니 그의 답은 이랬다. “그건 강 감독님 현장과 똑같네요. 우리도 매일 그렇게 놀았어요.” 촬영현장의 작업속도가 빨랐다는 것은 거꾸로 조명 세팅에 들이는 시간이 그만큼 짧고 신속했다는 뜻이다. 강우석의 영화는 빛에 둔감하고 이는 그의 영화가 낡아 보이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는 드라마의 줄기와 등장인물의 감정선만 살아 있으면 다른 것은 크게 개의치 않는 유형의 연출자이다. 스탭들을 자주 바꾸지도 않는다. 류승완은 그의 그런 성향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에 대해 잘 지적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이준익 감독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장의식이 문제다. 그는 헤드스탭들이나 조/단역배우들을 웬만하면 늘 함께하던 충무로 사람들로 쓰려고 한다. 그 사람들의 생활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의식이 그의 영화를 좀 낡아 보이게 한다.” 강우석도 비슷한 말을 사석에서 한 적이 있다. “난 영화작업이 잔치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늘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과 즐겁게 영화 찍으면서 작업이 끝나면 맛있는 것도 먹고 서로 격려하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 그 재미가 없으면 영화할 이유가 없다.” 물론 이것이 강우석 영화의 둔탁한 빛의 질감과 예산에 비해 감각이 떨어지는 듯이 보이는 프로덕션 디자인의 낙후성을 변명해주진 못할 것이다. 나는 거꾸로 이게 강우석이 영화를 대하는 어떤 태도, 이미 1980년대 말에 일찍 감독으로 데뷔한 그가 충무로에서 익힌 영화적 어법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영화적 프레임의 관능을 중시하는 풍토에서 연출을 익히지도 않았고 현장에서 정해진 예산으로 빠르게 영화를 찍는 법을 배웠다. 그가 영화적 앵글을 고민했다기보다 자기만의 호흡으로 비로소 접수한 듯이 보인 것은, 특히 클로즈업 효과의 강렬함 면에서 <공공의 적> 때부터였다. <실미도>에서도 그랬고 <공공의 적2>에서도 그의 클로즈업이나 대화장면 연출은 상투형을 넘어서는 간결한 인상이 진했다. 누아르의 분위기가 강한 원작 만화를 스크린에 옮긴 <이끼>에서도 그는 빛을 다루는 데 무심한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고수했고 대신 몇몇 인상적인 배우들의 결정적 순간을 담아냈다. 정재영과 유해진과 유선과 유준상은 자신들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가장 강력한 외형을 이 영화에 남겨놓았다. 이 남자들의 걸음걸이를 보라 <전설의 주먹>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임덕규를 연기한 황정민의 어중간한 걸음걸이를 좋아한다. 그는 미적미적 걷는다. 황정민이 연기하는 임덕규는 한때 전도유망한 복서였으나 그 전망을 이루는 데 실패하고 아내와 사별한 뒤 손님이 들지 않는 국숫집을 운영하는 가난한 중년 남자로서, 딸아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것을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무기력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최적의 걸음걸이와 미적지근한 태도를 갖추고 있다. 이는 어린 시절의 임덕규를 연기한 (이미 <파수꾼>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던) 박정민의 간결하고 모나지 않은 절도있는 행동과 비교된다. 과거와 현재가 오가는 영화의 구성에서 젊은 임덕규는 민첩하고 군더더기 없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데 나이 든 임덕규는 어딘가 모르게 허술하다. 영화에서 대비해 보여주는 폭력장면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겠다. 임덕규는 고교 시절에 복서로서 또래들의 폭력에는 가담하지 않으려고 한다. 주먹깨나 쓴다고 알려진 아이들이 그의 곁에 모이지만 임덕규는 끝내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가 폭력을 쓰는 것은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부당한 판정패를 당한 뒤 친구들과 밤거리를 배회하면서 건달들과 호기있게 붙어본 것뿐이다. 상당히 양식화된 형태로 진행되는 이 패거리 싸움에서 어린 임덕규는 끝까지 절도있게 자세를 갖추고 싸운다. 여기서 그가 폭력을 행사하는 폼은 남자다운 기개를 유치하게 과시하려는, 링 위에서는 끝내 인정받지 못한 실력을 증명하려는 것이고 이 기개는 아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서둘러 패배로 끝난다. 싸움실력을 과시한 임덕규와 친구들에게 하달되는 바깥세상으로부터의 주문은 폭력 하청배의 일이고 아이들은 그 일에 휘말려 허둥지둥 도망치거나 사로잡혀 인생을 그르친다. 나이가 들어 케이블TV의 격투기쇼 상금을 획득하기 위해 출전한 링 위에서 임덕규는 주먹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마냥 어색해한다. 여기서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쇼로서의 폭력은 어린 시절 호기있게 휘둘렀던 주먹마냥 가볍지 않은 실존적 근심을 임덕규에게 던져준다. 그는 잠깐 동안의 폭력행사로 인생을 그르쳤고 이제 청춘기를 바쳤던 복싱 실력을 돈을 벌기 위해 중인환시리에 써야 하지만 망설일 수밖에 없다. 어른이 된 상태에서 그는 폭력을 통해 존엄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기 위해 주먹을 휘둘러야 한다는 자본제적 폭력적 상황에 대해 맞서지도 못하고 망설인다. 영화의 대단원에서 그가 거북이라 불리는 싸움꾼과 힘겨운 격투기를 벌일 때 정두홍의 무술연출은 다소 억지로 버티고 있는 듯한 배우 황정민의 근육과 뼈가 실제로 훼손당하고 있는 듯한 충격을 관객에게 전해준다. 닭장처럼 조악하게 설계된 격투기장에서 황정민이 연기하는 임덕규가 실전무술의 기술을 조금씩 발휘하며 힘겹게 버틸때 사실상 이 장면들에서 연기하는 것은 배우 황정민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근육과 살들이다. 그는 돈과 명예 사이에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버티는 상태에서 자기 존엄을 걸고 여하튼 싸운다. 이 대단원의 장면과 비슷한 감흥을 주는 장면은 임덕규가 친구들에게 린치당하고 처참한 몰골이 된 딸을 보고 충격에 빠져 있을 때 딸 친구들의 계략에 빠져 한적한 야산 공원에서 불량 학생들과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다. 임덕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풀이하는 듯한 아이들의 객기 어린 가학적 폭력본능을 다스리려 하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른 덕규에게 모욕을 준다. 이윽고 벌어지는 싸움판에서 임덕규는 전광석화와 같은 펀치로 아이들을 다 때려눕히지만 여기서 카타르시스는 발생하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도 때리는 자와 맞는 자의 의미의 맥락화는 이뤄지지 않는다. 임덕규는 이 폭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만 맞는 아이들은 모른다. 그건 마치 격투기쇼가 벌어지는 닭장 같은 결투장에서 돈을 위해, 또는 명예를 위해 대드는 상대방들과 달리 임덕규는 그 폭력의 무의미를 체감하는 것과 같다. 폭력은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으로서만 의미있다. 주인공이 아이들이었을 때 폭력의 행사는 남자다움을 증명하는 자랑스런 표식이다. 그 표식은 유치하고 무의미한 것이지만 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도 가학과 피학이 공전하는 이 폭력의 보여지는 것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격투기쇼를 계속할 것을 망설이는 임덕규에게 이요원이 연기하는 TV 쇼의 연출자는 아버지라면 돈이 되는 것이면 뭐든 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다그친다. 이 폭력은 돈을 벌기 위한 쇼로서의 도구이다. 강우석은 직설적 비유로 이 물리적 폭력의 실세를 자본주의적 위계관계의 폭력과 겹쳐놓는다. 유준상이 인상적으로 연기하는 이상훈은 학창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가 회장으로 있는 대기업의 홍보부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영화 속 우리가 그를 처음 보게되는 장면에서 그는 룸살롱에서 주먹에 피를 흘릴 만큼 기물을 때려부순 회장님의 폭력 뒤처리를 하고 있다. 그는 회장님이 자본제 사회에서의 갑의 권력을 우월하게 행사하는 동안 그 뒤에서 후유증을 처리하고 있다. 황정민의 임덕규가 미적거리는 동작으로 실패자의 존엄을 형상화한다면 유준상의 이상훈은 절도있는 동작으로 겉으로는 성공한 직장인이되 속으로는 끝없이 굴욕을 감수하는 자의 치욕을 감춘다. 이상훈이 어느 언론사 편집국장과 접대 술자리를 가졌을 때 상대방 부장은 독한 소맥잔을 연거푸 이상훈에게 강제로 권하면서 회장의 수하인 그의 지위를 조롱한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술잔을 다 받아마신 이상훈이 회사로 돌아올 때의 걸음, 성큼성큼 한 발자국도 멀쩡한 자의 자세를 잃지 않겠다는 듯이 걷는 반듯한 걸음은 유준상의 늘씬한 양복 매무새에 드러나는 육체적 존엄과 잘 어울린다. 그는 끊임없이 모욕받는 직장인이지만 그 모욕을 자신의 정중한 동작으로 감추고 승화한다. 유준상이 사내에 들어와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걷다가 치밀어오르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우억거리고 난 다음에 재빠르게 자세를 추스르며 다시 씩씩하게 걸어가는 자세는 아름다웠다. 존엄, 순정, 그리고 다짐 <전설의 주먹>은 결국 인간의 자기 존엄 회복에 관한 이야기이고 사나이들의 순정에 관한 이야기이며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고 하는 다짐에 관한 영화이다. 아빠의 순정이 영화의 전면에 주제로 제시되고 있지만 동시에 격투기장의 난잡한 세트모형이 암시하는 우리 삶의 누추한 실상에 관한 영화이고 그것과 평행을 이루며 제시되는 대기업 회장과 조직폭력배 두목의 갑질하는 삶의 모욕에 관한 영화이다. 나는 이런 것들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보조 장치로 깔려 있다는 식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사회적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을 뿐이고 그것에 반응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담는 것에 영화가 주력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임덕규와 이상훈과 윤제문이 연기하는 유치한 마초 신재석은 그들의 경직된 육체들이 속절없이 허물어져가는 유사 스펙터클의 진경을 통해 그들의 마음까지 비춰 보여준다. 그들의 육체와 동작, 표정들은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만큼의 탱탱한 긴장을 갖고 관객의 시선을 버티어낸다. 이것은 영화감독 강우석의 오랜 연륜이 해낼 수 있는 인상적 고정점이며 따라서 텔레비전 스타일로 퇴화했다거나 낡은 스타일의 효과라고 보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강우석은 삶의 누추함을 담는 한편으로 그것과 맞먹는 인간들의 존엄과 자존심을 자기 스타일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았다. 평자에 따라 의견이 엇갈리겠지만 나는 <전설의 주먹>이 좀 더 많은 관객과 행복하게 만나지 못한 게 애석하다. 강우석은 우리에게 무구한 오락적 가치를 보여준다. 그는 우리 삶의 상처와 증상을 세밀하게 파헤치는 대신 그걸 견디어내는 인간의 시각적 인장을 묘사하는 중견감독의 재능을 증명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강우석이 이 영화로 상처 입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할 것 같다. 그가 새 영화로 관객과 행복하게 만나길 바란다.

[영하의 날씨] 기묘한 우회 현명한 트릭

놀라운 일을 겪은 뒤에 그 놀라운 일을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는 아랍 세계와 중국을 다녀와 <동방견문록>을 구술했지만 끝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금까지도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가 뱃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이리저리 조합하고 윤색한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꽤 있고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트로이 전쟁이라는 당대 최대의 이벤트를 소재로 <일리아드>를 지었다. 이게 워낙 반응이 좋았던지 일종의 속편인 <오디세이아>도 만들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리아드>의 스핀오프인 셈이다.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길고 긴 트로이 전쟁을 목마 하나로 승리로 이끈 꾀 많은 인물이다. 아킬레우스에게 무용에서는 뒤졌고 권세에서는 아가멤논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그를 사랑했다. 호메로스와 그의 동시대 이야기꾼들은 이 사랑스러운 영웅의 천신만고 귀향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여러 버전이 있었겠지만 현재까지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호메로스의 버전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오디세이아>를 어린이를 위한 축약본으로 처음 읽었다. 서사시가 아닌 소설풍으로 개작된 이 <오디세이아>에도 있을 것은 다 있었다. 뱃사람들을 홀리는 사이렌, 바위를 집어던지는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 등. 그런데 얼마 전에 완역 <오디세이아>를 읽게 되면서 몇번이나 놀랐다. 어린 시절에 읽은 축약본과 지금 읽고 있는 이 <오디세이아>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서사시 <오디세이아>는 우선 오디세우스가 전쟁이 끝난 트로이를 출발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영웅 오디세우스가 포세이돈의 미움을 받아 끝없이 바다를 떠돌고 있는데 이 문제를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라고 항의하는 아테네로부터 막을 연다. 그 자리에 없었던 포세이돈을 제외한 뭇 신들의 묵인을 얻어낸 아테네는 행동에 나선다. 아테네는 오디세우스의 심약한 범생이 아들 텔레마코스를 찾아가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먼저 행동할 것을 촉구한다. 텔레마코스는 어머니 페넬로페를 노리는 구혼자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배를 빌려 항해에 나선다. 그러니까 이야기 초반에 항해에 나선 사람은 우리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그의 듣보잡 아들이었다. 외로운 섬에서 오랫동안 요정 칼립소에게 붙들려 있어 이제는 고향에 돌아갈 꿈조차 잃어버린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와 아테네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파이아케스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서사시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 등장한다. 잔치에 초대받은 오디세우스가 한 유명한 가객이 오디세우스 자신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장면을 직접 보게 되는 장면이다. 데모도코스라는 이름의 이 가객(어쩌면 이 가객은 호메로스 자신일지도 모른다)에 대해서 오디세우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좌중에게 소개되었을 때 (아직 정체를 밝히지 않은) 오디세우스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데모도코스!… 나는 모든 인간들 중에 특히 그대를 사랑하오. 그대는 아카이오이족의 불행을 그들이 행하고 당한 모든 것과 그들의 모든 노고를 마치 그대가 몸소 그곳에 있었거나 그곳에 있던 누군가에게 들은 것처럼 그야말로 제대로 노래하기 때문이오.” 그러면서 오디세우스는 ‘신청곡’을 내는데, 바로 자기 자신이 고안해 트로이성을 함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목마 얘기를 해보라는 것이었다. 가객이 이에 호응하여 트로이 목마 에피소드를 풀어놓자 당사자 오디세우스는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어 울음을 터트린다. 그것을 보고 파이아케스의 왕 알키노오스는 그가 조금 전 이야기의 주인공 오디세우스임을 알아차린다. 이때부터 오디세우스는 데모도코스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아 자기가 직접 자기 고생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이야기의 저자가 데모도코스였다면 이 순간부터는 오디세우스 자신이 저자로 나서는 것이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방식인가.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가 ‘상연되’는 현장에 갑자기 등장해 자기 입으로 자기가 겪은 이야기를 전해준다는 것.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이야기들, 예컨대 사이렌이나 키클롭스,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니’오” 등은 모두 이 부분에 들어 있다. 만약 <오디세이아> 축약본을 만들어야 하는 편집자라면 이 부분만 들어내 책으로 엮어도 된다. 그러나 호메로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디세우스가 자기 입으로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당대의 독자들에게도 믿기 어려운 것들이었을 것이다. 호메로스는 일련의 정교한 서사적 장치를 통해 이 믿기 어렵지만 매력적인 오디세우스의 모험담을 매우 부드럽고 능란하게 의심 많은 독자들에게 제시한다. 서두에서 벌어진 신들의 회의는 바다를 떠도는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오디세우스 자신에 의해 제시된 신비로운 고생담은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중층적 구조 안에 위치하게 되면서 그 진실성을 따질 필요가 없는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트로이의 목마를 구상해낸 그 ‘꾀바르’고 ‘지략많’고 ‘임기응변에 능’한 오디세우스가 하는 말 아닌가. 전부 꾸며낸 것이라 해도 좋고 전부 사실이라 해도 좋은 것이다. 어쩌면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머물게 된 어떤 섬에서 여자 만나고 애 낳고 그럭저럭 진부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갑자기 돌아와서는 제 과거를 근사하게 꾸며내고 있다, 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오디세우스 자신의 입으로 전하는 이 신비로운 전설들의 환상성 덕분에 아테네와 제우스, 오디세우스의 아들과 페넬로페가 등장하는 서두는 상대적으로 마치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마치 20세기의 포스트모던 소설가들처럼 이야기 구조를 중층적으로 배치해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면서도 굉장한 설득력을 덤으로 확보하고 있다. 마르코 폴로가 거듭하여 <동방견문록>에 수록된 모든 얘기가 다 진실이라고 주장했음에도 그 진위를 오래도록 의심받는 것과 비교해본다면 <오디세이아>라는 텍스트가 가진 이 기묘한 핍진성과 설득력은 참으로 놀랍다. 작가의 역량은 여러 가지로 평가될 수 있겠만 그중 하나는 그가 말하는 이야기를 독자로 하여금 얼마나 그럴듯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느냐일 것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오디세이아>와 유사한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항해 도중 지난한 고생과 신비로운 모험을 겪은 주인공은 먼 훗날 자신을 찾아온 한 소설가(그들은 만나기 전에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에게 자신의 신비로운 고생담을 말해준다. 풍랑으로 부모를 잃고 호랑이와 구명보트에 올라 대양을 가로지르고 미어캣으로 가득한 식인의 섬에 기착하기도 한다. 이 믿기 어려운 전설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작가는 흥미롭게도 2800여년 전 호메로스의 트릭을 채택했다. 현명한 선택이었고 이 부분은 리안 감독의 각색 과정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진심’을 담아 전하기만 하면 상대에게 전달되리라는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호메로스는 이미 2800여년 전에 그런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심은 진심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진심 역시 ‘잘 설계된 우회로’를 통해 가장 설득력있게 전달된다. 그게 이 세상에 아직도 이야기가, 그리고 작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모험을 택하기보다 안정을 고수하다

올해 칸영화제 수상 총평에 관련해서는 두 가지 소문부터 전하는 게 좋겠다. 심사위원들이 명확하게 두파로 갈렸다는 말이 떠돌았다. 하지만 프랑스의 주간지 <누벨 옵제바퇴르>는 심사위원 중 한명이었던 프랑스 배우 다니엘 오테유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전했다. “맹세하건대 심사위원들이 두파로 나뉘었다는 소문은 허위이다. 심사위원들간에 화합이 잘됐다. 우리는 공식적으로는 네번 모였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상영이 끝났을 때마다 만나서 토의했다. 이게 바로 우리가 아무 문제없이 원활하게 의견을 나누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무언가 내막을 자세히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할 수밖에 없다는 뉘앙스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 화요일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쉬가르 파라디의 <과거>를 선호한다는 소식을 전한 바 있다. 그리고 폐막 당일인 일요일 오후 5시쯤에는 이 이란 감독에게 황금종려상이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전세계 기자들 사이에서 돌았다. 하지만 2명의 심사위원은 이 소문을 듣지 못한 것 같다. 루마니아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와 영국 감독 린 램지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두 사람의 설득력이 나머지 심사위원과 스티븐 스필버그를 움직일 만큼 대단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심사위원들 모두가 원만하게 합의한 결과인지 혹은 영화나 인터뷰로 짐작하건대 고집이 보통이 아닐 두 감독의 뒤늦은 설득이 전체 심사의 향방을 갈랐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매년 수상에 관한 소문이 그러하듯 그 진위를 따지기 어렵다. 다만 결과적으로 튀니지 출신의 프랑스 감독 압델라티프 케시시가 쟁쟁한 다른 감독들을 물리치고 가장 높은 영예의 자리에 오른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케시시의 영화 <아델의 삶-1&2>가 제66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심사위원 대상에 코언 형제의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 감독상에 아마트 에스칼란테의 <헬리>, 심사위원상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여우주연상에 <과거>의 베레니스 베조, 남우주연상에 <네브래스카>의 브루스 던, 각본상에 지아장커의 <천주정>, 신인감독에게 주어지는 황금카메라상에 앤서니 천의 <일로 일로>가 호명되며 각각 올해의 영예를 안았다. 프랑스의 대표 일간지 <르몽드>는 <아델의 삶- 1&2>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것과 관련하여 “‘문화적 예외’(프랑스 문화부가 자국의 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정해둔 문화정책안이다.-편집자)는 시네아스트들의 독창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고 한 스필버그의 말을 인용하며 이 수상의 의미를 문화적 차원에서 해석하는 걸 잊지 않았다. “우리는 최근 두번의 황금종려상을 잊을 수 없다. 팀 버튼이 심사위원장이었던 2010년에 수상한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영화 <엉클 분미>와 올해 스필버그가 수상한 <아델의 삶-1&2>다. 현재 우리는 미국과 유럽연합이 문화적 법규를 두고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협상기간을 지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필버그가 용감하게 해낸 ‘문화적 예외’ 보호에 대한 발언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르몽드>)라고 썼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감독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 하지만 ‘문화적 예외’를 보장하기 위해 꼭 <아델의 삶-1&2>를 선택했어야만 하는 건 아니므로 이 의견은 다소 아전인수 격으로 들린다. 이 영화의 작품성이 끼친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 더 핵심일 것이다. 공개된 직후 이 영화는 프랑스 현지 매체들 사이에서 실제로 뜨거운 반응을 끌어냈다. “형식 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다면 케시시의 사실적인 실험주의영화 <아델의 삶-1&2>일 것이다.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방식은 마치 감독 잉마르 베리만이나 화가 마네의 영향력 아래서 이 감독이 영화를 찍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인록>)거나 “<아델의 삶-1&2>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만들어졌으며 특히 여배우들의 역할이 돋보였다”(<텔레라마>)는 칭찬이 뒤따르고 있다. 대체로는 받을 만한 작품이 받았으므로 불만이 없다는 분위기다.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에 대해서도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논란의 여지를 가장 크게 남긴 건 감독상이다. “아마트 에스칼란테는 폭력적인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사실주의는 폭력성을 고발하는 데 힘을 실어주기보다 그 효과를 반감시키고 있다”(<텔레라마>)는 평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칸 수상작 중 가장 큰 논란을 일으킨 건 감독상을 수상한 멕시코 감독 카를로스 레이가다스의 <포스트 테네브라스 럭스>였다. 칸의 심사위원단은 두해째 멕시코의 문제적 감독에게 연이어 감독상을 안겼고 그 결과 반론의 포화도 피해가지 못했다.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에 대해서도 적잖은 반론이 있다. <누벨 옵제바퇴르>의 기사가 두 가지 양상을 전부 포괄하는 대표적인 의견이다. “<과거>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베레니스 베조는 두 가지 이유로 이 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본다. 첫째, 작품 자체가 심사위원단이 호평한 작품이므로 어떤 의무감이 작용했을 수 있다. 둘째, 여배우들의 열연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 <아델의 삶-1&2>가 황금종려상을 받을 때 감독과 두 여배우의 이름이 함께 호명되었다는 사실이다”라고 쓰고 있다. 여우주연상을 <아델의 삶-1&2>의 두 여배우 아델 에그자르코풀로스와 레아 세이두가 받아야 했지만 작품이 황금종려상을 받아 다른 배우에게 갔다는 뉘앙스다. 그건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게다가 지난해 루마니아의 젊은 소녀 배우 두 사람이 공동으로 여우주연상을 가져간 것이 어쩌면 올해 똑같은 방식의 결과를 내놓지 않으려는 심사위원단의 선택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이번 시상식의 진짜 오점은 남우주연상의 브루스 던이다. 그의 연기에 반기를 들 이유는 없지만 <비하인드 더 칸델라브라>에서 게이 커플로 열연한 마이클 더글러스와 맷 데이먼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좀 불쾌할 정도다”라고 <누벨 옵제바퇴르>는 이어서 쓰고 있다. 남우주연상으로 마이클 더글러스와 맷 데이먼이 부각되었던 건 사실이어서 현지에서 브루스 던의 수상은 대체로 올해의 깜짝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르몽드>는 그 밖의 작은 수상작들 혹은 수상 불발에 그친 작품들을 거론하며 총평에 나서고 있다. “지아장커의 영화는 각본상보다 더 나은 상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에 대해서 사실 몇몇 평론가들은 심사위원상보다는 더 좋은 상을 예측했었다. 특히 소더버그 영화에서 열연한 마이클 더글러스와 맷 데이먼은 남우주연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고 본다. 짐 자무시의 영화도 충분히 좋은 상을 받을 만했고 <지미 P>와 <이민자>도 흠잡을 데 없는 연출이었다고 본다.” 문병곤 감독의 <세이프>, 단편부문 황금종려상 수상 한편, 한국영화도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올해 칸 영화제에는 기성 한국 감독들의 장편영화가 없었다. 하지만 신예 감독들이 만든 세편의 단편영화가 있었다. 공식 경쟁 단편부문에 초청된 문병곤 감독의 <세이프>, 공식 경쟁 시네파운데이션 부문(대학 재학생들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경쟁부문)에 초청된 김수진 감독의 <선>, 비평가 주간에 초청된 한은영 감독의 <울게 하소서>다. 이중에서 문병곤 감독의 <세이프>가 단편부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1999년 송일곤 감독의 <소풍>이 같은 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영화는 불법 게임장 환전소에서 일하는 여직원과 그곳을 드나드는 도박 중독자 사내의 이야기다. 문병곤 감독은 2년 전에도 비평가 주간에 단편 <불멸의 사나이>가 초청된 바 있으며, 당시에도 마지막까지 강력한 대상 수상작으로 점쳐졌던 실력파다. 프랑스의 문화지 <인록>은 올해의 칸영화제를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한다. “2013년 칸에서 자주 거론되었던 테마와 단어는 사회적 폭력, 빈부 대립, 동물 학대, 동성애 등이다. 반대로 그동안 많이 보아왔던 형식과 스타일은 버려지지 않았다”라고. 사회적 주제가 다양하게 등장했지만 형식적으로는 평범한 한해였다는 뜻일 것이다. 그건 어쩌면 모험보다는 안정을 중시하는 칸의 장기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은 경향일 것이다. 제66회 칸영화제는 올해도 이렇게 역사의 또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됐다.

정의를 의심하다

웨스턴 장르 전통과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팀이 고안한 판타지 어드벤처 액션이 뒤섞인 <론 레인저>(2013)는 그냥 봐도 호탕하다. 놀이동산에서 스피디한 기구를 탈 때 느끼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그렇긴 하나 더 즐겁게 보기 위해 장르적인 혈연관계를 추적하고, 당대적인 메시지를 추론해보자. 이 영화는 고전적인 관습 안에 시의성을 녹여낸다. 널리 알려진 바대로 웨스턴은 미국의 건국신화다. 서부 개척, 문명화의 영광과 그늘이 공존하는 스토리와 정의롭지만 외로운 남성 영웅은 웨스턴의 골간을 이룬다. <론 레인저>도 화소나 도상에서 이런 전통을 이어받고 있지만, 건국신화에 질문을 던진다. 고전적 장르로서 웨스턴 쇠퇴 이후 등장한 새로운 웨스턴들이 던진 질문과는 다르다. 흑인이나 여성 영웅이 등장하거나 백인이 인디언 문화에 동화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짐짓 전통의 수호자 같은 포즈를 취하며 한편으로는 한바탕 놀이인 척하며 웨스턴을 뒤흔들고 나아가 미국식 정의를 의심한다. 좀 과민하게 보자면 그렇다. 미국의 정의는 과거형이다 최초의 웨스턴이 에드윈 S. 포터의 <대열차 강도>(1903)라는 점만 보아도 기차(증기기관차)와 거기서 벌어지는 추격전이 웨스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기차-강도는 소떼-카우보이와 더불어 웨스턴의 양대 축이다. 이렇게 중요한 기차에 새겨진 글자는 당연히 간과할 수 없다. <론 레인저>에 등장하는 기차에는 ‘Jupiter’와 ‘Constitution’이라는 단어가 씌어 있다. 그리스의 제우스에 해당하는 로마의 신 주피터는 신들의 제왕이자 국가의 수호신이다. 이 두 단어가 적힌 칸 사이에 지방 검사가 서 있는 화면은 의미심장하다. 불문율 법체계인 미국이라는 국가의 정의는 헌법 정신 아래 실질적인 법의 집행자인 지방 검사에 의해 수호되기 때문이다. 영화에는 ‘정의’라는 말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선량한 시민과 국가가 임명한 레인저(수비대)를 살해하고, 적대적 매수를 통해 철도 회사를 집어삼키고, 이주노동자를 착취해 은을 탈취하려는 악당을 추격하고 퇴치하는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을 정의 구현이라고 말한다. 본래 ‘론 레인저’는 미국 대중서사의 유명한 레퍼토리다. 우리로 치면 ‘암행어사’ 정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1930년대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출발한 <론 레인저> 시리즈는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로 매체를 옮겨가며 재생산되었다. 기본 뼈대는 늘 비슷하다. 악당 손에 형을 잃은 주인공이 눈을 가리는 복면을 하고 ‘실버’라는 이름의 말을 타고 활약하는 내용이다. 인디언 톤토가 주인공을 구해주고 도와주는 것도 같다. 대중매체에서 첫 등장한 것은 1930년대지만 시대적 배경은 1800년대 후반이다. 웨스턴이 성행한 것은 1900년대 초부터이나 서부개척이 이미 마무리되었기에 배경은 1800년대 후반부가 되는 것이다. 제리 브룩하이머와 고어 버빈스키 합작으로 이번에 다시 만들어진 <론 레인저>도 큰 줄거리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액자구조다. 영화 전체의 내용이 톤토가 소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인디언생활박물관처럼 보이는 곳의 전시룸에 들어가 있는 늙은 톤토는 어린 소년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고 있다. 결국, 짤막한 현재가 앞, 뒤로 붙여진 플래시백 구조의 이 영화는 미국의 정의가 과거형임을 보여준다. 달리 말하면, 전시룸에나 존재하는 인디언의 전통처럼 박제되어 명목만 있는 것이 아닐까 반문하고 있다. 플래시백의 엄연한 효과 중 하나가 돌이킬 수 없음과 현존하지 않음이다. 미국식 정의가 회상되지만, 있었다고 한들 돌이킬 수 없고, 있었든 없었든 현존하지 않는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붐은 없어서 갈구하는 현상이 아닐까? <론 레인저>를 너무 심각하게 보는 것일 수 있다. 파란만장하고 박진감 넘치는 모든 이야기가 일장춘몽일 수 있듯 판타지로 보면 간단하다. 그러나 영화는 선명한 글자로 주제를 암시한다. 국가의 수호신과 헌법이란 단어를 단순히 멋부리는 기호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론 레인저>는 웨스턴 장르의 총결산 같다. 이미 <대열차 강도>는 언급했고, 무수한 웨스턴 명작 중 세편만 골라 <론 레인저>와 맥락을 비교 하고자 한다. 1900년대 초반 유행한 웨스턴은 잠시 시들한 시기를 거쳐 <역마차>로 화려하게 부활한다. 웨스턴의 대명사인 존 포드 감독과 배우 존 웨인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실제로 말을 타고 달리며 위험천만한 액션 신을 찍은 영화로 유명하다. <론 레인저> 서두에는 <역마차>에 대한 오마주라 할 만한 액션 신이 등장한다. <론 레인저> 제작팀은 아날로그 액션을 연출하기 위해 8km에 달하는 레일을 깔고 기차도 제작했다고 한다. 주연인 아미 해머와 조니 뎁은 대부분의 신을 직접 연기했다. <론 레인저> 시리즈에서 계속 사용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은 액션에 경쾌함을 증가시킨다. 같은 음악의 사용은 시리즈의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다. 이제 주인공의 외로움으로 넘어가자. 열차 액션물, 버스터 키튼, 그리고… 제목부터 ‘외로운’(lone)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으니 외롭겠지만 <론 레인저>의 주인공들이 그렇게 외로워 보이진 않는다. 주인공 존(아미 해머)과 톤토(조니 뎁)는 모두 원한이 있는 인물이지만 화려한 모험극에서 외로울 시간은 별로 없다. <역마차>의 존 웨인, <황야의 결투>의 헨리 폰다, <셰인>의 앨런 래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명랑하다. 과거의 존과 톤토보다 현재의 늙은 톤토가 더 외로워 보인다. <론 레인저>의 액자구조에서 재현된 과거와 현재 사이의 시간은 증발된다. 악당을 물리친 존은 마을을 떠난다. 그다음 이야기는 알 수 없으므로 시간이 증발된다. 웨스턴의 주인공들은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 영역에서 법과 선을 수호한 뒤에 스스로 황야로 사라진다. 또한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지켜주지만 그녀와 결합하지는 않는다. 그런 비감의 절정이 <셰인>이었다. 석양으로 사라지는 셰인을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는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론 레인저>의 존도 형수를 사랑하지만 그녀 곁에 남지는 않는다. 이건 도덕성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은 정착을 의미하고 문명은 합법적인 틀을 제공하므로 반문명과 외로움을 숙명으로 지닌 웨스턴의 주인공이 살 수 없는 조건이라 떠나는 것이다. <황야의 결투>의 보안관은 소떼를 탈취하고 형제를 죽인 일당을 응징하고, <셰인>의 방랑자는 마을을 습격한 무리를 퇴치하고 평화를 지킨다. 고전적인 웨스턴에서는 재산을 지키는 것이 부각되지는 않는다. 악당들은 늘 가축을 훔치고 곡물을 약탈하지만 조직적인 범죄로 비치진 않는다. 이에 비해 <론 레인저>의 악당들은 상당히 조직적이고 합법과 불법을 모두 동원한다. 철도회사 인수나 은광 채굴은 개인 재산의 탈취 정도가 아니다. 공적 인프라, 국가 자원을 훔치는 것이다. <론 레인저>에서는 이 점이 확연히 느껴진다. 그리고 확대해석하면 현재 미국으로 대표되는 선진국의 다국적 침탈에 대한 은유도 읽을 수 있다. 은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중국인이라는 점도 범상치 않다. 고전 장르로서 웨스턴은 인디언, 멕시칸 정도에 관심이 있었다. <론 레인저>가 보여준 이런 시의성을 평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 글은 평가 이전에 보기, 읽기를 전제로 한다. <론 레인저>를 재미있게 볼 방법은 많다.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와 비교해도 좋고, 열차 액션물들과 함께 보아도 좋다. 멀리는 버스터 키튼의 슬랩스틱 코미디부터 가까이는 김지운 감독의 만주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까지 다양한 열차 액션물이 있다. 물론, 다 필요없고 그냥 <론 레인저>만 볼 수도 있다. 이 글은 웨스턴이란 장르 관습과 전통 속에서 살폈다. 대중서사인 웨스턴은 확정된 텍스트가 없다. 미국의 건국신화인 웨스턴은 만들어지는 시기마다 당대의 정치성을 반영한다. 그런 점에서 <론 레인저>도 시의성을 띨 수밖에 없다. 건국신화로서 웨스턴의 변하지 않는 성격은 이데올로기의 분열이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입체적인 영화

오노레 도미에의 <삼등 객차>(1862∼64, 맨 위)와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1808년 5월3일>(1814, 위). <설국열차>가 기억에서 끌어내는 두점의 그림이다. 영화에는 그림으로 설국열차의 역사를 기록하는 화백이 등장하는데 그가 그린 ‘꼬리칸’ 사람들은 특히, 도미에가 즐겨 묘사한 고단한 노동자들을 많이 닮았다. 7/5 일부러 암기하거나 메모해두지 않았어도 개봉연도와 관람한 극장을 대뜸 댈 수 있는 영화들이 있다. 학창 시절 본 영화들이 주로 그렇다. 함께 보러간 친구만 기억나도 바로 학년이 나오니까. <지존무상>은 교실 뒷줄의 키 큰 친구들끼리 어울려 단성사에서, <굿바이 칠드런>은 대학 입시를 마친 겨울에 씨네하우스에서, <미드나이트 런>은 파고다극장에서 두 학번 선배였던 사촌오빠와 봤다.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의 한국 개봉은 1990년 봄이 확실하다. 개봉관은 70mm 스크린을 자랑하던 충무로 대한극장이었다. 확언할 수 있는 까닭은 내가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상영 중인 대한극장에 뛰어들어간 날이 대학 입학한 해의 봄, 처음인가 두 번째 ‘가투ʼ(길거리 시위)에 나간 날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운동권, 비운동권이 나뉘기도 전인 1학년 1학기였다. 시내 중심가로 나선 스무살들에게 장대한 포부는 없었다. 우리는 세상이 짐작하듯 비장하지도 철없지도 않았다. 그저 선거에서 뚜렷이 드러난 국민의 의사를 3당 합당으로 가볍게 뒤집어버린 정치인들에게, “아니오. 우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라는 뜻을 표명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가만히 있으면 국민도 그들의 결정을 지지했다고 멋대로 해석할 일이 싫었고, 생업이 있는 어른들은 바쁘니 기운있고 시간있는 학생부터 목소리를 내는 건 당연해 보였다. 이처럼 나름 논리적인 결론으로 나섰지만, 막상 거리에서 최루탄과 곤봉을 든 전경에게 쫓기기 시작하니 내가 왜 지금 이곳에 섰는지 머리가 하얘졌고 그저 눈물나게 무서웠다. 중등 교육과정 체력장을 통틀어 100m를 20초 안에 주파한 적 없는 내 탓에, 2인1조로 짝이 된 선배가 덩달아 붙들릴까봐 심장은 더욱 쪼그라들었다. 대열은 흩어졌고 도망치던 나와 선배는 여차하면 영화 보러 왔다고 둘러댈 요량으로 대한극장의 옆문을 열고 들어가 비상계단에 숨었다. 숨죽인 정적 속에 상영관으로부터 새어나오는 남자와 여자의 대사 소리가 웅웅 들렸다. 얼핏 본 간판은 야한 영화 같았는데 대사도 많네, 무심코 생각했다. 영원처럼 느껴진 그 10여분 동안 나는 엉뚱하게도 벽 너머에서 영사되고 있는 그 영화가 무슨 이야기인지 너무나도 간절히 알고 싶었다.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가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한편의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객석에서 그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이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인 듯 부러웠던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은 무사히 귀가한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 무렵 자발적으로 극장에 가서 본 영화가 통틀어 스무편도 안되는 ‘영화 냉담자’였던 내가 며칠 뒤 소더버그의 데뷔작을 혼자 보러 간 사연은 그러했다. 완전히 묻혔던 추억이 불쑥 고개 든 까닭은, <사이드 이펙트>를 개봉하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게 보낼 서면 인터뷰 질문을 뽑느라 그의 작품 목록을 되돌아보는 중이어서다. 어쨌거나, 그 시절만큼 내가 본 한편 한편의 영화를 둘러싼 풍경이 선연해지는 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보는 일이 일상인 직업을 가져서이기도 하고. 숫자로 관을 구분한 어슷비슷한 인테리어의 멀티플렉스가 극장이라는 공간의 실물감을 지워버린 탓이기도 하다. 무슨 영화를 어느 극장에서 봤는지 기억하기 어렵고, 영화와 영화 사이에 나만의 스토리가 돋아날 틈도 좁아졌다. 지하철로 연결된 쇼핑몰의 꼭대기로 올라가 우주선 같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출구를 나설 때마다 나는 허방을 디딘 사람처럼 잠깐 방향감각을 잃곤 한다. 7/6 알폰소 쿠아론 감독(<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칠드런 오브 맨>)의 신작 <그래비티> 제작 과정에 3D 기술 자문을 지원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지난 7월3일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한 포럼에 참석해 <맨 오브 스틸>과 <아이언맨3> 같은 경우는 3D영화여야 할 필연성이 없다는 발언을 했다. 카메론은, 비단 스펙터클만 위해서라면 3D가 아니어도 1억5천만달러 제작비를 투자한 것만으로 충분하다면서 3D는 3D 고유의 미학과 효과를 필요로 하는 영화에 쓰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한편의 영화를 3D로 만드느냐 마느냐가 필름메이커의 예술적 선택이 아니라, 티켓 수입을 올리려는 스튜디오들의 상업적 결정 사항이 된 현실을 우려했다. 구구절절이 맞는 이야기지만 <아바타> 이후 지금까지 많은 공적인 자리에서 3D를 영화의 미래로 지목하고 극장주들의 영사 시스템 교체를 부추겼던 카메론의 과거 발언을 돌이켜보면 발뺌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카메론은 본인의 <아바타>처럼 서사 자체가 3D 맞춤형으로 고안된 영화나 <라이프 오브 파이>처럼 스토리텔링의 차원을 시각의 차원에 반영시킬 수 있는 기획이, 상영 인프라의 교체를 정당화할 만큼 자주 나올 거라고 믿었다는 말인가? 일단 입장료가 비싼 3D 스크린이 보급되고 나면, 스튜디오들이 대부분의 블록버스터를 사후적으로 3D로 변환해 파이프라인을 채우리라는 예상을 못했단 뜻일까? 그렇다면 제임스 카메론은 누구보다 순진무구한 예술가다. 공교롭게도 그저께 ‘라디오 타임즈 닷컴’에는 가 올 연말부터 3D 개발 프로그램을 3년간 중지하기로 했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그동안 공룡 다큐멘터리, 어린이 드라마, 런던올림픽 개막식 중계, 여왕 연설 등을 3D로 시험 방송해온 결과, 3D 텔레비전을 보유한 영국 내 잠재 시청자(150만 가구)의 반응이 저조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3D 부서 책임자는 영국의 미지근한 3D 선호도에 관해, 동시에 다른 일을 하면서 시청하는 TV 특성상 입체안경을 찾아 쓰고 정좌해서 몰입하는 과정을 시청자가 귀찮아해서인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이 단순하면서도 납득이 가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리고 침통하기는커녕 자못 홀가분한 말투로 “잠깐 멈추어 서서 사태를 관망하기 적절한 시점”이라며 자기는 원래 일하던 부서로 복귀한다고 밝혔다. 기업이든 공공기관이든 블루오션에 한번 깃발을 꽂으면 우격다짐으로 시장을 만들어서라도 수익이든 명분이든 짜내는 광경만 보고 살아와서인지, 신선하다. 7/8 <미스터 고> 역시 3D가 이야기와 밀착된 영화라고 하긴 어렵다. 공과 배트가 객석쪽으로 날아와 야구장 관중석에 앉아 있는 환각을 안겨주는 깜짝 효과 정도다. 하지만 정작 3D는 <미스터 고>의 성취와 실패에서 결정적 변수는 아니다. <미스터 고>의 최대 강점은 미덥게 구현되고 이물감 없이 인간 세계에 녹아든 디지털 고릴라이고, 최대 약점은 영화 속 인물들이다. 성충수 에이전트부터 고릴라 링링의 단짝 소녀 웨이웨이에 이르기까지 <미스터 고>에는 우리가 마음을 붙일 만한 캐릭터가 없다. (웨이웨이도 엄격히 말하면 링링의 학대자 중 한명이다.) 꼭 호감이 가야만 관객이 극중 인물에 마음을 붙이는 건 아니다. 요는 매력이다. 매력은 캐릭터가 일관성이 있거나, 이해할 만한 과정을 거쳐 변모할 때 발생한다. 영화 속 인물이라고 모두 착하고 옳을 필요가 없음은 말하나마나다. 단, 모든 인물이 예외없이 밉상일 경우 약간 어려워지긴 한다. 더 정교한 드라마와 더 단단히 빚어진 캐릭터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스터 고>의 인물들의 특징은 편의적으로 느끼고 움직인다는 점이다. 극중에서 손쉬운 이익을 보는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스토리의 편의에 따라 성격이 갈지자를 그린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프로야구에 종사하는 극중 인물들은 하나같이 스스로도 돈밖에 모르면서, 남을 공격해야 할 때는 바로 “돈밖에 모른다”는 이유로 비난한다. 눈앞의 이익에 태도가 표변한다는 면에서 그들은 서로 성격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다. 인물들 또한 별로 합리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링링을 포획하러 출동한 경찰은 그물을 쏘아놓고는 고릴라가 그물을 잡아채면 감탄한다. 이름이 주어지지 않는 익명의 관중도 링링에 대해 태도나 ‘여론’을 형성하지 않는다. 홈런을 치면 환호하고 구장 지붕으로 기어오르면 잡히기를 바라고 묘기를 보여주면 다시 즐거워한다. 고릴라의 묘사도 편의적이다. 눈물이 필요한가 스릴이 필요한가에 따라 그들은 존엄한 생명체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영화는 링링과 레이팅을 인간의 말을 잘 듣는 친구와 인간에게 대드는 맹수로 갈라 끝내 그들끼리 혈전을 벌이게 한다. 야구라는 특정 종목의 쾌감과 스포츠영화로서 <미스터 고>의 재미는 깊은 관련이 없다. 중요한 것은 홈런과 점수와 승부다. 감동은 설정만으로 붙잡기에는 너무 미끄러운 목표다. 이기느냐 지느냐, 내 편이냐 아니냐가 시종 가장 강력한 잣대인 드라마가 영화가 끝난 뒤에도 지속되는 감동을 만들 확률은 시즌 꼴찌 팀의 승률보다 낮다. (계속) 좋아요 <더 테러 라이브> 윤영화 앵커의 헤어스타일링 캐릭터의 외양을 발명하길 즐기는 하정우는 머리칼을 가만 못 놔두는 배우다. 우정 출연한 영화들 속 모습이나 <러브픽션>의 구주월을 보라. 차기작 중 ‘앙드레 김’ 전기영화도 있으니 앞으로도 그의 ‘헤어쇼’는 창창하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윤영화 앵커의 헤어스타일은 방송인답게 정석에 가깝지만 상황과 감정을 민감히 반영해 뺀질거림에서 헝클어짐까지 세분화된 단계의 변화를 보여준다.

[culture highway] 다시 찾아온 주원앓이

다시 찾아온 주원앓이 주원의 힘인가, 스토리텔링의 힘인가. KBS 월화 드라마 <굿닥터>가 방영하자마자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3급 자폐증 진단을 받았지만 천재적인 암기력과 공간지각능력을 자랑하는 시온(주원)이 소아외과 의사로 성장해나가는 스토리다. 주원은 장애가 있지만 특정 영역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증상인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인물로 분했다. 애교만점 시온에게 빠질 준비 되셨나요? 이번 휴가는 갤러리로 휴가를 즐기러 부산을 찾는다면? 해운대해수욕장 대신 전시회는 어떨까. 가나아트갤러리 부산점에선 대중을 위한 팝아트 전시 을 마련했다. 현대예술을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길. 텔레비전이나 만화에서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이미지를 재조립해 친숙함을 더한 재미있는 전시다. 9월7일까지 진행한다고 하니 휴가 기간에 가볍게 한번쯤 들러보면 좋겠다. 뉴페이스를 찾아라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가 4번째 시즌을 맞는다. 우승자들보다 프로그램의 혜택을 더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진행자 장윤주의 카리스마는 여전하다. <도전! 수퍼모델 코리아> 홈페이지를 통해서 시즌4에 참여한 후보들의 면면을 살짝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니 궁금한 사람이라면 클릭해보시길. 8월15일 목요일 밤 11시 첫방송. 내 안의 질주 본능을 깨워라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며 달리는 야생 레이스 ‘푸마 나이트런’ 대회가 9월28일 과천서울대공원에서 열린다. 7천명의 참가자가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오후 7시에 총 7km를 달리는 행사다. 장거리달리기라고 지레 겁먹지 말고 매주 월요일마다 진행하는 사전 트레이닝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겠다. 자연과 야생을 느낄 수 있는 새로운 컨셉의 달리기를 경험해보자. 참가 신청은 8월26일부터. 하나의 역사, 70억의 기억 라이프 사진전이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정점의 순간에서 전설이 된 20세기 최고의 사진잡지 . 사진이라는 매체는 를 통해 포토저널리즘이라는 옷을 입게 되었다. 로버트 카파, 앨프리드 아이젠 스타트, 유진 스미스, 유서프 카시 등 당대 최고의 사진기자들이 선택한 위대한 기록을 전시로 만나보자. 9월6일부터 11월25일까지. 연기돌 뉴페이스 가수 기획사들만 아이돌 그룹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니었다. 배우 매니지먼트사 판타지오가 5인조 연기자 그룹 ‘서프라이즈’를 선보인다. 판타지오의 신인 발굴 프로그램 ‘액터스리그’를 통해 선발된 서강준, 이태환, 유일, 공명, 강태오다. 이 샛별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면 9월 초 방영될 드라마툰 <방과 후 복불복>을 주목할 것. 드라마에 웹툰의 요소를 첨가한 색다른 장르물로, 꽃미남 드라마의 1인자 정정화 감독이 연출한다. 음악의 대화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노래를 기다려왔던 기분이 든다. 인디아 아리가 ≪Acoustic Soul≫ 음반으로 데뷔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2년이라니.

[영화제] 충만의 선율, 역동의 리듬

올해로 9회를 맞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가 8월14일부터 19일까지 청풍호반무대 등 제천시 일대에서 열린다. 음악페스티벌 초청 명단에서나 볼 법한 뮤지션들의 이름이 영화의 크레딧을 채우는, 개성있는 음악영화들이 올해도 다수 상영된다. 그중 당신의 눈과 귀를 만족시켜줄 음악영화 10편을 소개한다. <미셸> 그레고리 만느, 슈테판 비야르 / 2012년 / 90분 / 프랑스 / 시네 심포니 샹송가수 미셸 델페슈를 소재로 한 프랑스 독립영화다. 1970년대 전성기를 보냈던 가수 미셸은 90년 이후 잠적해 종교에 귀의하는 등 개인적 암흑기를 보냈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지는 않지만, 그를 대중에 소개한다는 차원에서 의미있다. 주인공은 법원의 채무집행관인 그레고리다.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아 법원 소속 집행관이 된 그는 우연히 가수 미셸 델페슈의 재산을 압수한다. 죽기 전까지 그의 광팬이었던 아버지를 기억하기에, 그는 쉽사리 이 왕년의 스타의 몰락을 지켜볼 수 없다. 때문에 원제가 이르듯 ‘무관심하고 담담하게’(l’Air de rien) 미셸의 재활을 돕기 시작한다. 음악영화인 동시에 주인공의 내면을 비춘 일종의 성장영화다. <팝 리뎀션> 마르탱 르 갈 / 2012년 / 94분 / 프랑스 / 개막작 기타리스트 에릭과 드러머 파스칼, 베이시스트 JP, 보컬 알렉스는 십대 때부터 줄곧 함께 블랙메탈을 해온 친구들이다. 해마다 여름이면 이들은 ‘여름투어’라 부르는 공연여행을 떠나는데, 삼십대가 되자 생계 때문에라도 이제는 곤란하다고 느끼던 차다. 알렉스의 폭군적이고 변덕스러운 기질을 탓하며 세 친구는 합심해 연주를 그만두기로 마음먹는데, 때마침 알렉스가 헬페스트 페스티벌에 초청됐단 낭보를 들고 나타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렇게 공연을 떠나고, 사건이 벌어진다. 영화 <팝 리뎀션>은 신예 마르탱 르 갈 감독의 데뷔작으로, 블랙코미디 요소를 지닌 일종의 뮤지컬 로드무비다. 비틀스의 애비로드 등 다양한 클리셰들이 극을 시종일관 유쾌하게 이끈다. <드럼의 마왕 진저 베이커> 제이 벌거 / 2012년 / 92분 / 미국 / 세계 음악영화의 흐름 기타의 신 에릭 클랩턴과 섹스 피스톨스의 존 라이든, 산타나의 카를로스 산타나와 롤링 스톤스의 찰리 워츠, 그리고 프로그레시브의 제왕 닐 퍼트가 진저 베이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큐멘터리 <드럼의 마왕 진저 베이커>는 인터뷰이들의 이름으로도 충분히 가슴 뛰는 영화다. 진저 베이커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가장 선명한 그림은, 2차대전에서 사망한 아버지의 시신을 따라 기차를 뒤쫓던 때라 한다. 영화는 나치의 폭격이 시작되던 해 런던에서 태어나, 에릭 클랩턴과 함께 전성기를 구가하던 순간을 거쳐, 약물 중독으로 인해 폐인으로 살던 나이지리아에서의 모습, 그리고 현재 남아공에서의 일상까지 진저 베이커의 전 생애를 이야기한다. <엄마에게 바치는 노래> 리안 룬슨 / 2012년 / 109분 / 미국, 캐나다 / 세계 음악영화의 흐름 전설적 포크싱어인 케이트 맥개리글의 지인들이 모여서 고인을 추억하는 콘서트를 연다. 영화 <엄마에게 바치는 노래>는 63살에 세상을 등진 케이트 맥개리글을 기리며, 2010년 6월 런던 로열 페스티벌홀에서 열린 추모콘서트에 대한 ‘기록영상’의 성격을 띤 다큐멘터리이다. 참가한 뮤지션의 면면이 무척 화려하다. 고인의 자녀인 루퍼스 웨인라이트와 마사 웨인라이트를 비롯해 노라 존스, 에밀루 해리스, 지미 펄론, 테디 톰슨 등이 수준 높은 공연을 벌인다. 빔 벤더스가 프로듀싱한 이 영화의 연출은 배우 출신의 감독 리안 룬슨이 맡았다. 1997년 컨트리 가수 윌리 넬슨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로 데뷔한 뒤, 현재 그녀는 연출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마지막 랩소디> 기용교시 벤체 / 2011년 / 75분 / 헝가리, 프랑스 / 시네 심포니 헝가리의 낭만주의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의 이야기를 다룬 전기영화이다. 1911년 헝가리의 연극 무대를 배경으로 극이 시작된다. 작곡가 리스트의 이야기를 준비하던 극단원들은 막바지 리허설 도중에 19세기 옷차림을 한 미스터리한 여인과 조우한다. 그녀는 극의 내용이 실제 자기가 아는 스토리와 다르다며 트집을 잡는다. 이렇게 여인의 내레이션과 함께, 영화는 이야기 속의 다른 이야기로 빠져든다. 1886년 부다페스트에서 시작해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사망할 때까지, 영화 <마지막 랩소디>는 실재했던 리스트의 말년의 역사를 뒤쫓는다. 역사를 다룬 극이지만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됐고, 그의 죽음을 목격했다는 리스트의 뮤즈 ‘리나 슈말하우젠’의 일기에서 힌트를 얻어 구상되었다. <카르수> 메르세데스 스탈렌호프 / 2012년 / 87분 / 네덜란드 / 뮤직 인 사이트 어려서부터 가수를 꿈꾼 카르수 돈메스가 부모 소유의 식당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터키식 레스토랑의 홀 가득히, 17살 소녀의 서정적 음색이 울려퍼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 싱어가 될 때까지, 영화는 그녀의 3년간을 뒤쫓는다. 마침내 가수가 되어 텔레비전 쇼에 초청된 그녀를 사회자는 노라 존스에 비견해 소개한다. 실제로 그녀는 터키의 고유한 문화, 네덜란드의 최신 유행 요소들, 미국의 재즈나 팝이 뒤엉킨 유니크한 자신만의 영역을 지향하고 있다. ‘카르수’라는 이름의 뜻은 ‘스노 워터’라고 한다. 아버지는 딸의 목소리가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레 피아노와 뒤섞인다고 소개하는데, 그래서인지 우리 귀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꽤나 친숙하게 다가온다. <폴 사이먼, 그레이스랜드 그 이후> 조 베링거 / 2012년 / 101분 / 미국 / 뮤직 인 사이트 70년대 전설적 포크록 듀오인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폴 사이먼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앨범 ≪그레이스랜드≫의 발매 25주년을 기념해 사이먼이 직접 남아공을 방문한다. 앨범의 제작 당시 그는 자신의 노래에 아프리카 음악을 도입했는데, 이 때문에 극 사이사이에 남아공 뮤지션들과의 매력적인 합동공연 클립들이 더해진다. 영화 <폴 사이먼, 그레이스랜드 그 이후>에는 당대의 인종차별과 관련해 그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도 함께 담는다. 음악과 함께 이 사회적 경향들을 되돌아보는 것 역시 의외의 즐거움을 선사할 것이다. 오프라 윈프리, 폴 매카트니를 비롯한 유명인들의 인터뷰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조 베링거 감독은 이 작품으로 에미상에 노미네이트됐다. <문글로우> 장해랑 / 2013년 / 102분 / 한국 / 한국 음악영화의 오늘 베니 골슨의 <블루스마치>가 연주되는 가운데, 대한민국 재즈 1세대라 불리는 ‘The lives’의 원년 멤버들이 소개된다. 클라리넷의 이동기와 색소폰의 김수영, 재즈 피아니스트 신광웅과 트럼펫의 최선배, 퍼커션 류복성과 드러머 임헌수, 보컬 김준 등은 스승도 없고 악보도 없던 시절을 거쳐 지금까지 스테이지에 남은, 한국 음악계의 진정한 승자들이다. 다큐멘터리 <문글로우>는 작은 무대에서 거대한 음악을 창조하는 이들을 비추며,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를 진솔하게 답한다. 재즈 1세대들의 원숙한 연주를 듣는 것도 충분히 즐겁지만, 올해 3월 재정 문제로 문을 닫은 홍대 재즈클럽 ‘문글로우’를 기록한 것으로도 충분히 가치있는 음악영화. <우드스탁의 추억> 바버라 코플 / 2009년 / 87분 / 미국 / 주제와 변주 오스카 수상 경력을 가진 여성 감독 바버라 코플의 다큐멘터리이다. 알려졌다시피 우드스탁은 미국의 보이지 않는 대중문화 흐름을 주도한 최대의 음악축제다. 때문에 영화는 다양한 푸티지 필름들을 재활용한다. 제목처럼 우드스탁을 소개하지만, 1998년 동일한 감독이 만들었던 <우드스탁 ’94>와 다르게 이번에는 40주년을 맞아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축제의 이면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 특색이다. 당시를 떠올리며 <뉴욕타임스>의 버나드 콜리에는 “아름다운 사고”란 표현을 썼는데, 영화를 보다보면 이 역설적 표현에 동조하게 된다. 울타리를 넘어 ‘사랑과 평화’를 외치는 대중들, 경제적 손실에도 행사를 감행했던 프로모션의 기록이 우아하게 담긴다. <안전불감증> 프레드 뉴마이어, 샘 테일러 / 1923년 / 73분 / 미국 / 시네마 콘서트 할리우드 고전영화 <안전불감증>은 찰리 채플린과 당대를 함께 풍미한 배우 해롤드 로이드의 대표작이다. 주인공은 시골에서 직장을 찾아 대도시 LA로 떠나온 해롤드다. 그에겐 시골에 두고 온 약혼자 밀드레드가 있는데, 성공해 도시로 부르겠다고 공언한 상태이다. 어느 날 그가 보낸 선물을 받고 그녀가 오인해 혼자 도시로 찾아오고, 해롤드는 자신의 가난을 숨기기 위해 좌충우돌하다 여러 소동을 벌인다. 1923년 완성된 무성영화인 까닭에 사운드트랙은 오직 경음악뿐이다. 해롤드 로이드는 1919년에 있었던 사고 때문에 손가락 두개를 잃었다고 하는데, 이 영화를 찍을 당시 4, 5m 높이의 건물 벽에 실제로 매달렸다니 새삼 영화에 바친 그의 열정에 감탄하게 된다.

[영화제] 괜찮아 얘들아

일찍이 엥겔스는 가족해체의 무의식이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적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역설적인 역사의 장난’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오늘날 ‘사생아, 불륜, 가족의 해체’ 등 자극적 소재들이 스크린을 넘나드는 것을 보면서, 유독 그의 말이 떠오른다. 어쩌면 올해 15회째를 맞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가 이 과격한 서구화의 출구를 제시할지 모르겠다. 지난 15년간 청소년을 위한 다양한 문화 인프라 개발에 기여한 이 행사는 어느덧 40개국 142편에 이르는 다양한 영화들을 선보이는, 서울 최대 규모의 영화제로 성장했다. 올해는 8월22일부터 29일까지 일주일간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과 아리랑시네센터, 성북천 바람마당과 성북아트홀, 한성대학교 등 성북구 일대에서 영화제가 진행된다. 개막작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 개막작은 스콧 맥게히와 데이비드 시겔이 연출하고, 줄리언 무어가 출연한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이다. 헨리 제임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는 부모들의 양육권 다툼을 소재로 해 7살 메이지가 겪는 일화를 담는다. 도입부의 설정은 원작을 그대로 따른다. 하지만 10년간의 성장 기간을 다루는 소설과 달리 영화는 시간을 압축해 각색됐다. 배경 역시 센트럴 뉴욕으로 바뀐다. 아이의 시선을 중심으로 한 카메라의 움직임이 특히 인상적인 영화로, 아역 오나타 에이프릴의 연기가 관객의 공감을 끌어낸다. 연출자의 연령대에 따라 분류된 단편영화 상영작들은, 영화제 유일의 ‘경쟁 섹션’에 속한다. 올해 초청된 작품은 총 56편이다. 9∼12살 어린이들이 만든 영화를 소개하는 ‘경쟁 9+’ 부문에는 김준영 감독의 <지우개>를 비롯해 각국의 다양한 단편영화 10편이 초대된다. 청소년이 제작한 영화를 선정한 ‘경쟁 13+’ 부문에는 핀란드의 유호 카리알라이넨이 연출한 <눈먼 사랑> 등 26편이 초청되었고, ‘경쟁 19+’ 부문에는 일본의 다자와 우시오의 <다루의 여행기> 등 20여편의 영화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섹션마다 대상을 비롯한 예술실험상 등 10개 부문의 시상이 따로 마련돼 있다. 세개의 섹션, 두개의 특별전으로 나뉜 비경쟁부문의 프로그램 또한 풍성하다. 어린이들을 위한 ‘키즈아이’ 섹션에서는 9월 개봉예정인 <괜찮아 3반>이 포함돼 있다. 소설 <오체 불만족>의 저자로 알려진 오토다케 히로타다가 주연을 맡은 영화로, 원작 역시 그가 직접 겪은 일들을 바탕으로 했다. 팔다리가 없는 선천적 장애를 안고 태어난 주인공이 초등학교 담임으로 부임하면서 겪는 일화를 담는데, 소재의 강렬함은 히로키 류이치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력으로 상쇄된다. 한편,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이들을 다룬 노르웨이영화 <캐스퍼와 엠마>는 어린이영화 특유의 발랄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관객을 사로잡는 수작이다.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알록달록한 분위기 속에서 엠마와 캐스퍼, 그리고 그들의 봉제인형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담는다. 동화와 뮤지컬 방식이 가미된 연출이 인상적으로, 다수의 텔레비전 시리즈로 인정받은 아르네 린드너 네스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청소년을 위한 최신 영화를 소개하는 ‘틴즈아이’ 부문에서는 독일의 베른트 샬링이 연출한 <업사이드다운>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평범해 보이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열살 소년 사샤이다. 아이는 나쁜 손버릇과 거짓말 탓에 엄마의 신뢰를 잃은 데다 또래에 비해 글을 읽고 쓰는 것까지 느린 편이다. 때문에 사회복지사무소에 위탁되고, 그곳에서 복지사 프랑크를 만난다. 집중력 장애 치료를 받으며 변화하기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 관객은 사회화의 의미와 그 반작용을 생각할 수 있다. 이어 켄 로치 감독의 <랜드 앤 프리덤>으로 이름을 알린 배우 출신 톰 길로이가 연출 데뷔작 <낯선 땅>을 들고 관객을 찾는다. 베를린영화제 청소년부문에 초청돼 눈길을 끈 이 영화의 주인공은 십대 소년 아티커스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엄마와 함께 숲속 통나무집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전반부에, 엄마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아이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후반부에 소개한다. 올 베를린 청소년 대상작 <쇼핑> 등 주목작 다수 성인을 위한 성장영화를 소개하는 ‘스트롱아이’ 섹션에서 돋보이는 작품은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언급된 카시아 로수아니에츠 감독의 <베이비 블루스>다. 급부상한 폴란드의 신예 여성감독이 선정한 주인공 나탈리아는 17살 소녀로, 이제 막 7개월 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담지만 그렇다고 우울한 영화는 아니다. 동시대 폴란드 청춘들의 이미지를 대변했다는 감독의 말처럼 이는 패셔너블한 동시에 혼란스러운 이미지로 뒤덮여 있다. ‘블로그 형태’의 편집방식으로 화제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야기는 종종 연속적으로 이어지지 않거나 정지되며 간혹 검은 화면으로 절단되기도 한다. 구성의 특이성에 있어서는 레하 에르뎀의 <진> 역시 뒤처지지 않는다. 주인공은 마찬가지로 17살이다. 그녀는 터키 군대와 쿠르드 반군간의 전쟁을 피해 홀로 숲속에서 지내는데, 감독은 자연의 정경이나 거북, 곰과 같은 피사체들을 통해 소녀의 심경을 반사해 비춘다. 영화 중반부 이후 소녀가 사회에 편입되어 도리어 상처받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미학적으로 완성도 높은 ‘누아르풍의 동화’가 된다. ‘다문화’와 ‘청소년 성폭력’을 다루는 특별전 섹션에서 눈여겨볼 작품으로는 마크 알비스턴과 루이스 서더랜드 감독이 공동 연출한 <쇼핑>을 들 수 있다. 1981년의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해 다문화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무기력한 사모아인 어머니와 폭력적 기질의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윌리와 솔로몬 형제가 주인공이다. 형 윌리가 일하는 대형 상가에, 어느 날 배짱있는 도둑 베니가 출현해 단번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아이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올해 베를린영화제의 청소년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당시 심사위원단은 “아역들의 연기가 돋보이고, 날카로운 편집과 강력한 시각적 효과, 가족의 모순이 끌어안은 고통과 사랑의 마음을 잘 표현한 영화”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외에도 청소년 영상문화 저변의 확대에 기여할 다수의 수작들이 관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평생의 영웅, 그의 단점까지 전부

평범한 로맨틱코미디나 그보다 좀 못한 액션 장르물에 자주 등장하며 대단한 연기파 배우들의 계보와도 거리가 있는 애시튼 커처가 스티브 잡스의 파란만장한 젊은 모험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기영화 <잡스>의 주인공으로 정해졌을 때 그가 정말 이 입지전적인 인물의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내기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을 법도 하다. 결론. 커처가 갑자기 위대한 연기를 펼치진 못한다. 하지만 보론. 그는 누가 보아도 대단한 열정을 쏟아내고 있으며 혼신의 힘으로 잡스가 되고자 한다. 연상의 전 부인(데미 무어)과 엄청난 액수의 재산 분할을 놓고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는 영화 바깥의 얼룩진 그의 모습이란 여기 없다. 오로지 <잡스>의 잡스가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강력한 최면을 걸고 있는 배우 커처가 있을 뿐이다. 그 이상으로 움직이기, 그의 모든 것을 공부하기 아직은 트위터가 모든 이들의 것이 되기 이전, 커처는 이른바 최초의 트위터 스타에 속했다. 그는 트위터를 누구보다도 먼저 받아들였고 그 가능성을 믿었으며 그것으로서 자기의 사회적 위치를 설정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2009년에 있었던 과의 한판 대결이었다. ‘과 나 둘 중 누가 먼저 100만 팔로워를 모을지 승부를 벌이자’며 그는 거대 미디어를 도발했다. 대결의 승자는 그였다. “거대 미디어가 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한 사람도 많은 사람들에게 방송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그 이벤트의 목적이었다. 그가 쇼에만 능했던 건 아니다. 커처의 또 다른 직업은 사업가인데 그것도 아주 유능한 사업가다. 그는 2000년에 디지털 미디어, 텔레비전, 영화 등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회사 ‘카탈리스트’를 공동 창업했고 2011년에는 벤처 투자 회사인 ‘A-Grade’를 공동 창업했다. 커처는 2010년 미국 잡지 <타임>이 뽑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0위’ 안에 들었고 각종 경제지가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기업을 선정할 때마다 그와 그의 기업은 늘 명단에 올랐다. 잡스의 몸에 흘렀던 기술적 진화에 대한 직감과 애정과 관심 그리고 야심적 사업가로서의 피가 커처에게도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니 잡스가 커처의 평생의 영웅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으며 수년간 애플의 주식을 갖고 있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잡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자신에게 닥친 기분에 관하여 커처는 이렇게 회상한다. “아주 기묘한 감정적 반응을 느꼈는데 그 실체는 잘 몰랐다. ‘나는 그의 죽음에 왜 이렇게 충격을 받은 걸까?’ 그러자 나는 이 사람에게 영향받은 내 인생의 모든 점들에 관하여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무엇이라도 그에 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잡스는 내게 토머스 에디슨이나 헨리 포드와 같은 천재였다. 그는 정말이지 형식과 기능을 함께 녹인, 아름답고도 실용적인 생산물을 만들어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 두 분야를 다 해낸 사람은 <모나리자>라는 그림을 그리며 비행 장치도 함께 만들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정도랄까.” 평생의 영웅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자 커처는 일단 외양적으로 완벽해지는 게 필요했다. 이 부분에는 그다지 반론의 여지가 없다. 원래부터 닮은 눈매에 그럴듯한 몸의 패턴까지 입혀지자 영화 속 커처는 영락없이 잡스처럼 보인다. 커처가 특히 신경 쓴 것은 잡스의 걷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어깨를 약간 구부리고 앞으로 쏟아질 듯이 몸을 기울이는 동시에 무릎은 제자리걸음을 하듯이 허공에서 휘적거리는 그 특유의 걸음걸이 그리고 프레젠테이션 때마다 청중의 귀를 사로잡은 잡스만의 말투를 커처는 거의 상징적일 정도로 강조한다. 잡스의 생각과 체질과 취향을 섭렵하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생전에 잡스가 남긴 방대한 연설과 인터뷰를 찾아 읽은 건 물론이며 그가 일생을 살며 경험한 몇몇을 커처도 경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가령 그가 먹었던 것들 먹기. 당근 주스, 포도, 팝콘. 그가 읽은 책들 읽기. 요가와 힐링에 관한 책들. 그가 좋아했던 음악 듣기. 밥 딜런. 그가 존경한 사람들 공부하기. 에디슨. 에드윈 랜드. 그가 좋아한 예술사조나 예술가 이해하기. 바우하우스. 장 미셸 폴롱, 안셀 애덤스. 그리고 그가 알고 지내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 만나기 등. 단점을 감추지 않는다 커처가 잡스가 된다는 건 심지어 생전의 잡스가 남긴 그의 단점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었다. 잡스는 인간적인 결함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화에서도 그 점은 도드라진다. 영화 속 한 장면. 애플이 성공을 거두고 주가를 올리던 그 때, 잡스는 회사의 수익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현재 공헌도가 적다는 이유로 과거에 창립을 도운 친구들을 모두 배제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커처의 답변이 무척 인상적이다. “이 영화에서 궁극적으로 나의 목적은 내가 존경했던 누군가에게 경외를 바치는 것이다. 경외를 바치는 가장 좋은 방식은 그의 재능과 단점 모두에 대해서 정직해지는 것이다.” 커처는 이렇게도 말한다. “나는 그 장면에서 잡스의 위치를 정당화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잡스가 그들에게 보상하는 게 옳다고 본다. 하지만 누가 우리의 성공에 여전히 핵심적인가. 이 어려운 질문은 마치 풋볼팀을 관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예전에 공헌한 선수라고 해도 지금 그렇지 않으면 그를 붙잡을 수만은 없는 거다.” 커처는 잡스의 단점에 정직해지는 것을 넘어 아예 그 단점을 단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마치 잡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최신의 것들에 늘 호의적인 사람답게 커처는 <잡스>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최근에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지식 검색 사이트인 쿼라(QUORA)를 통해 공표한 적이 있다. 그중 인상 깊은 말이 있다. “그냥 살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시대정신에 관여하며 살아 있는 누군가를 묘사할 기회란 일생에 단 한번뿐인 도전”이라는 것이다. 실은 그런 게 잡스의 정신으로 알려진 것들이기도 하다. 잡스의 어록 중 하나. “최고의 부자가 되어 무덤에 묻히는 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 ‘오늘도 무언가 멋진 걸 해냈구나’ 하고 말하며 밤에 잠자리에 드는 것. 그게 바로 내게 중요한 것이다.” 성공이냐 실패냐는 결론과 무관하게 커처도 뭔가 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