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위로가 필요해,<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중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였다. 시험이 끝나면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관람을 가던 시절이었다. 일종의 위문공연이랄까. 중간고사가 끝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온 다음날, 교실은 비비안 리의 가는 허리와 클라크 게이블의 콧수염의 매력을 상기하는 아이들로 여느 때보다 부쩍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영화평론가를 꿈꾸던 나는, 아이들의 반응이 그리 마뜩찮았다. 결국 클라크 게이블의 열렬한 팬이던 한 친구와 논쟁이 벌어졌다. 별로 대단치 않은 영화에 뭐 그리 수선이냐는 나와, 그 정도면 대단하지 뭘 더 바라느냐는 친구의 입씨름은, 마침내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착되었다.(아, 용감한 청춘들이여!) 영화가 뭐냐? 친구 왈, 영화는 오락이다. 나 왈, 영화는 교훈이다. 그렇다. 열다섯살에 친구와 나는 영화라는 주제를 통해 자신의 인생관을 피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워터프론트>와 <젊은 사자들>과 <분노의 포도>를 통해 영화의 사회적 가치를 온몸으로 체득한 나는, 영화를 오락으로 격하시키는 친구의 발언에 분노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친구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친구는 교훈을 얻느라 지친 인생에, 영화마저 교훈의 도구여야 한다면 도대체 우리의 삶은 어디서 위로를 얻고 웃음을 찾을 수 있는가, 물었다. 대부분의 논쟁이 그렇듯이, 승자도 패자도 없이 토론은 끝났다. 어쩌면 20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날의 풍경을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나의 쓰디쓴 패배로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성공보다는 실패에 집착하는 법이니까. 아무튼 우리는 서로를 승복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뒤로도 오랫동안 영화는 교훈이라고 믿었다. 당연히 영화를 보면서 존다거나 팝콘을 먹는다거나 어둠을 틈타 옆사람과 손장난을 한다거나 하는 ‘짓거리’는 용납할 수 없었다. 이만하면 가히 영화의 잔다르크라 할 만하지 않은가. 하나 이 순수의 결의를 속절없이 무너뜨린 것이 있으니, 그것은 세월이다. 그리고 무너짐을 부추긴 또 하나의 세력이 있었다. 바로 VTR이라는 흉물스런 기계의 등장이었다. VTR의 발명이야말로 영화를 세속화시킨 가장 큰 전범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다시 돌려보기’가 가능한 마당에 영화에서 더이상 어떤 긴장감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일요일 아침, 단잠을 뿌리치고 일찌감치 길을 나서 조조할인의 보너스와 함께 극장 한켠에 자리를 잡았을 때, 영화는 오직 그 순간 내 눈앞에서 단 한번의 설렘으로 다가온다. 운이 좋아 앉은 자리에서 내처 2회까지 본다 해도, 그것은 이미 조금 전의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발견과 감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단언컨대 이 말이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영화를 한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이니, 어디 가서 취미가 영화감상이니 하고 떠드는 일은 없어야 하리라. 그러나 VTR은 내 이런 도덕적 엄격함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말았다. VTR를 장만한 이후 더이상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VTR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언제라도 ‘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리모컨은 배 밑에 깔고, 손 닿는 곳에 과자 봉지도 잊지 않는다. 화장실엘 다녀오기도 하고, ‘빨리감기’를 누르며 본전 생각을 하기도 한다. 최근엔 잠도 잔다. 이제야 나는, 삶은 위로가 필요하다는 친구의 역설을 이해하게 되었다. 영화는 교훈이 아니다. 나는 열다섯의 믿음을 마흔이 되어 배반한다. 그러나 마흔의 내 안엔 아직도 열다섯의 내가 숨어 있다. 섣부른 위로는 차라리 모욕이 된다고 믿는 내가 있다. 삶은 아직도 내겐 엄숙한 것이어서, 영화도 아직은 완전히 오락이 되지 못하는가 보다. 그런데 오락도 교훈도 어느 편에도 속하지 못한 내 영화, 내 인생이 이즈음 한 소식을 만났다. 일요일 대낮에 우연히 만난 찰리 채플린은 내가 세웠던 모든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돌아봄을 거부하고 오직 나아감만을 생각했던 채플린. 그 떠돌이의 어설프지만 당당한 발걸음에서 나는 내 인생의 영화를 꿈꾼다. 교훈과 오락이 행복하게 해후하는 그의 영화가, 고작 마흔의 나이에 본전 생각이나 하는 나를 일깨운다. 채플린이 일갈했듯, 죽을 때까지 우리는 모두 아마추어이니 무엇을 두려워하랴, 오직 나아감만을 믿을 뿐. 그렇다. 내 영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레디 액션!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스몰 타임 크룩스>

‘새마을운동’이란 것이 있고 <새마을노래>라는 것이 새벽잠을 깨우며 온 나라에 매일처럼 울려퍼지던 시절이 있었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푸른동산 만들어 알뜰살뜰 다듬세.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지긋지긋한 가난을 타파하고자 했던 몸부림으로 “잘살아보세 잘살아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세”라는 노래에 맞춰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새벽별 보기 운동은 북한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우리 어버이들이 허리띠 졸라매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고 죽자살자 악을 쓰고 기를 쓰고 돈을 벌었다. 불과 엊그제 같은 일이다. 그 엊그제와 오늘 사이의 그 짧은 순간에 달라진 대한민국을 보자하니 과연 우리는 팔자를 고치는 데 성공한 듯도 하다. 보릿고개 배고픔의 고통은 비만과 다이어트 문제로 변했다. 외국인들이 일하러 들어오려고 안간힘이니 돈이 있긴 있는 모양이다. 이름하여 코리안드림. 그래, 우리도 이제 좀 먹고산다. 그런데 뭘 먹고 어떻게 뭘 하면서 살아야 잘사는 것일까. 어버이 세대는 돈을 벌 줄만 알았지 쓸 줄은 몰라서 우리에게 잘사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했다. 오직 잘살기 위해서 얼마나 근검절약하고 인내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었을 뿐. 그러고보니 잘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봤어도 ‘잘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런 걸 두고 문화평론합네 하는 양반들이 우리에게는 진정한 귀족문화가 없다 하는 소릴 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한국형 귀족, 혹은 상류층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본 적도 상상도 가질 않는다. 영화 <스몰 타임 크룩스>에서는 천박하고 무식한 태생의 졸부 부부가 물질적 성공 다음에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세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모델이 될 만한 부류가 있을까. 교양과 학식을 갖추고 우아하고 기품있으며 삶의 깊이를 더해주는 예술의 향기를 음미하며 사는 사람들. 그것의 가치를 알아보는 수준 높은 안목과 훌륭한 예술가를 키워내는 재정적 지원까지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채워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본 적도 없고 동경해본 적도 없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우아함’, ‘품위’, ‘ 교양’ 따위의 단어들은 일상용어에서 소멸된 지 오래이지 않은가. 영화 속의 졸부 아줌마는 적지 않은 투자를 해서라도 교양을 쌓으려고 노력하는데 그 모습이 우습기도 하지만 가련하기도 하다. 르네상스부터 현대미술까지 섭렵해야 하고 가만히 앉아서 멀뚱히 듣고만 있어야 하는 클래식 음악도 작곡가와 지휘자를 줄줄이 꿸 줄 알아야 한다. 경박하지 않은 몸짓과 말투도 갖추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다. 기준 모델이 있고 교재도 있고 가이드도 있는 셈이니 열심히 따라하고 연습해서 ‘내면’을 닮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델이 없는 경우는 어떠한가. 교양을 상실한 사회에서는 최대한 부티나게 차려입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과시할 수 있다. 말투나 대화 내용이 한심하고 천박하기는 너나할 것 없으니 그닥 문제되지 않는가보다. 그래서 명품에 환장한다. 카드빚을 내서라도 걸쳐야 한다. 입사시험 인터뷰하러 가는데 수백만원짜리 명품 가방을 들어야 자기를 표현할 수 있단다. 팔자 고치기에는 뭐니뭐니해도 얼굴 뜯어 고치기도 빠뜨릴 수 없다. 아파트 이름이 노블리스 빌이니, 무슨 팔레스니 하는 이름으로 분양을 하니 진주 목걸이를 한 돼지들이 아귀다툼이다. 내면의 바람직한 동경의 대상이 없어 끊임없는 물질의 공급으로 삶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욕망은 브랜드의 먹이이다. 결국 교양도 명품 브랜드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의식주 모든 것을 유명 상표로 세팅하는 일. 그것만이 지금 이 땅에서 삶의 수준을 높여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잘사는(live) 게 아니라 잘 사는(buy) 것이겠지. 김형태/ 무규칙이종예술가 kongtem@hitel.net

영화 <바람난 가족> 인터넷펀드 모집

<바람난 가족>(감독 임상수, 주연 문소리ㆍ황정민)의 제작사 명필름은 다음달 14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원금의 70%를 보장하는 인터넷 펀드를 모집한다. 가장 큰 특징은 원금 회수율이 70% 미만일 경우 투자자에게 원금의 70%를 돌려주는 원금보장성 펀드라는 것. 원금보장성 영화 펀드는 2000년 <해피엔드> 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개인당 투자 금액은 최소 1구좌 100만원. 10구좌 1천만원까지 투자를 받아 모두 5억원의 펀드를 모집할 계획이다. 명필름은 "전국 관객수 90만 명을 손익분기점으로 산정해 수익을 배분해 추가비용상승에 따른 투자자 리스크가 없다는 점에서 기존 네티즌 영화펀드와 차별된다"고 설명했다. <바람난 가족>은 '바람'을 통해 우리시대 중산층 가정의 실체와 개인의 솔직한 삶을 '뻔뻔하고 섹시하게' 그린 영화. 명필름은 2000년 영화 <해피엔드>의 인터넷 펀드를 모집해 45%의 수익률을 올린 바 있다. <바람난 가족> 펀드의 또 다른 특징은 투자자들이 시사회에 참석해 완성된 영화를 본 다음 투자여부를 결정하게 된다는 점. 영화사는 22-24일 저녁 8시 50분 서울 스카라 극장에서 총 3회의 펀드 시사회를 개최할 계획이다. 시사회 참여 신청은 14일부터 명필름 홈페이지(www.myungfilm.com), 팍스넷(www.oaxnet.co.kr), 머니투데이(www.moneytoday.co.kr)를 통해 할 수 있다. ☎(02)3672-1207, 인터넷 www.myungfilm.com/baramnanfund (서울=연합뉴스)

게임 그리고 새로운 세대 [2]

하지만 게이머가 손을 대지 않는 이상 더이상 진행되지 않는다. 가만히 멈춰 있다. 세계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는 온전히 게이머의 몫이다. 선량한 게이머라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내가 죄수지만 그렇다고 탈출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보자. 게임은 멈춰 있다. 조금도 진행되지 않는다. 게이머와 게임 사이에 인내심 겨루기가 시작된다. 아무리 기다려도 죄값을 치르기 위해 교도소로 보내주지는 않는다. 답답해진 게이머가 움직임을 시작한다. ‘이럴 바에야 훔친 차를 몰고, 옆에서 태워다 달라는 다른 죄수나 도와줘볼까?’ 게이머가 움직이는 그 순간, 게임 속 세계도 언제 멈춰 있었냐는 듯 움직이기 시작한다. 게이머는 자신의 행동이 이 세계를 움직이는 방아쇠가 되었다는 걸 느낀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 세계가 원하는 대로 열심히 뛰어다닌다. <투하트> 해석과 참여의 차이는 간단하다. 영화에서의 해석이 눈에 보이는 다른 세계를 지금 살고 있는 세계에 걸맞은 형태로 변형시켜 수용하는 것이라면, 게임에서의 참여는 게임세계가 돌아가는 법칙에 맞도록 게이머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게이머에 대한 설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자기만의 세계 속에서 살아왔던 게이머를 어떻게 게임 속 세계에 맞춰 살도록 설득할 것인가? 게임과의 인내심 대결만으로 몇십 시간씩 플레이하는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게임은 아주 교묘한 장치들을 발전시켜왔다. 흔히 ‘이중적 작가성’(dual authoship)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게임의 작가는 누구냐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과연 게임이라는 이야기를 쓰는 것은 누구일까? 게임제작자인가, 아니면 게이머인가? <파이널 판타지10>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고, 방대한 대사와 컷신을 통해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게임에서 작가는 당연히 게임제작자로 보인다. 반면 <루나틱 돈>에서 게이머에게 주어진 건 세계뿐이다. 거기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으로 성장할지를 결정하는 건 게이머 자신이다. 고독한 헌터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가족을 꾸려 성실한 가장으로 살 수도 있다. 희대의 범죄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지에 따라 다른 삶이 펼쳐져 있고, 다른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렇다면 이제 게임의 작가는 누구일까? 게임 속 이야기를 만드는 건 누구일까? 게임, 당신이 작가다 이중적 작가성은 말 그대로 게임의 작가가 이중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에서 커다란 이야기를 쓰는 건 제작자다. 그는 이야기꾼이라기보다는 건축설계사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움직이고,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만일 화장실을 안방을 통해서 밖에 갈 수 없게 만든다면, 그 속에 사는 사람의 의지가 어떻건 안방은 프라이버시가 없는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만들어진 공간에 따라 움직이는 방식이 결정되고, 움직이는 대로 그 속에서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결정된다. 이 커다란 틀을 짜는 것이 작가로서의 게임제작자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완성된 집 속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는 게이머의 몫이다. 주어진 세계 속에서 게이머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미시적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게이머 역시 게임의 작가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다. 물론 제작자와 게이머는 같은 층위에 있는 작가는 아니다. 한쪽은 유도하는 주체고 다른 한쪽은 유도된 행동을 한다. 그래도 게이머는 작가다.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면 이 세계에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게임 속에서 게이머가 주체로 자신을 경험하는 것은 이처럼 게이머 스스로가 게임을 만들어내는 작가라는 환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게임은 이러한 장치를 벌써 20여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발전시켜왔다. 영화와 게임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해석과 참여의 차이는 크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다른 세계를 보면서도 언제나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러나 게임을 플레이하는 게이머는 게임을 하면서 기꺼이 그 세계로 뛰어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간의 표류는 그래서 영화가 아닌 게임에서 가능하다. 참여의 무게 게임의 경험은 독특하다. 자신이 직접 뛰어들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세계는 결코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즐거움도 줄 수 없다. 낯선 세계에 기꺼이 뛰어들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주체성을 놀랄 정도로 고양시키는 경험이다. 그러나 이 주체성은 묘하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돌기 때문이다. 게이머는 게임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스스로 선택해서 뛰어든 것이라도, 재미없으면 부담없이 던져버린다. 앞서 말했던 <루나틱 돈>을 생각해보자. 오랫동안 심부름을 해서 돈도 모으고, 명성도 얻는다. 그동안 언제나 모험을 함께해왔던 그/그녀와 결혼을 하고, 누구라도 부러워할 모험가 커플로 이름을 날린다. 행복한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문득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다고 느낀다. 곧장 게임을 나간다. 그리고 지워버린다. 그 속에서 펼쳐졌던 삶도, 혼자 나가버린 게이머를 기다리며 창 밖만을 바라볼 그/그녀도 한순간에 세상에서 사라진다. 같은 삶은 다시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세상이 없어졌는데도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남은 건 또 다른 게임을 인스톨할 수 있는 하드디스크 공간뿐이다. 언제나 게이머의 참여는 가볍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이뤄진다. 싫증나면 다른 세계에서 다른 삶을 만들면 된다. 버림받은 아내가 식칼을 들고 찾아올 일도 없고, 전에 저질렀던 살인강도가 폭로되어 새로운 세계에서의 생활이 위협받을 염려도 없다. 게임의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 주체성은 그래서 조증 환자처럼 묘한 열기를 뿜는다.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세계를 앉아서 기다리지 않는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나서서 참여하고 즐거움을 얻어낸다. 새로운 세계에 열심히 적응해서 그 세계를 만끽한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과거의 행동은 현재의 삶에서 어떤 의미나 책임도 없고, 지금 하는 행동은 미래의 삶에서 아무 의미가 없다. 행동은 오직 현재 이 순간 자체로만 존재한다. 새로운 게임을 만날 때, 지금까지의 모든 행동은 소멸되고, 완전히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한때 일본에서 ‘리셋주의’라는 용어가 화제가 되었다. 게임을 지나치게 하면 생명의 소중함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마고치>로 열심히 생명체를 키우다가도, 마음에 드는 대로 성장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키우던 캐릭터를 지워버리고, 새롭게 새로운 캐릭터를 키운다. 모든 것을 리셋하면 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한번뿐이기에 소중한 생명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게임의 경험이 삶의 무게, 죽음의 무게를 줄인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리셋주의’는 대상으로서의 생명만 이야기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것은 주체로서의 생명이다. 현실에서 주체란 통시적 존재다. 30살이 되어서도 10대의 기억, 20대의 기억에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가 하면 지금 나의 행동이 앞으로 남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나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나의 인생의 과거, 현재, 미래 모두와 연결되어 있기에 하나의 행동을 하면서도 인생 전체의 무게를 느낀다. 게임 속에서 경험하는 주체는 그렇지 않다. 내가 뛰어들면 세상은 움직이고, 나는 언제나 원할 때 다른 세계로 옮겨갈 수 있다. 내가 이전 세계에서 무엇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게이머라는 주체는 게임을 플레이할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최근 P세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적극적인 참여 속에서 열정과 잠재력을 바탕으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는 세대”가 P세대의 정의다. 현상적으로만 이야기하자면, P세대만큼 게이머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주체를 잘 표현하는 용어는 없을 것이다. 게이머들은 자신이 참여하지 않으면 세상이 1초도 움직일 수 없음을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행동한다. 게임이 만들어놓은 이야기의 장치 속에서, 참여를 통해 세상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환상을 경험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만큼 사람의 열정을 끌어내는 것은 찾기 어렵다. 게임 역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시스템을 통해 게이머의 주체적 경험을 고양시키려고 노력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에는 한 가지가, 아주 결정적인 한 가지가 빠져 있다. 참여와 열정이라는 것이 지니는 무게다. 매번 사건에 참여할 때마다 그들은 새로운 주체를 경험한다. 그 사건들이 서로 모순되어 있는지, 사건들 사이의 비중이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은 게임이 제공하는 세계만큼이나 독립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지 지금 이 자리에서 원하는 만큼 참여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지겹다고 느껴질 때 다른 곳으로 이동해 또 다른 무언가에 참여하고 행동한다. P세대는 게이머만큼이나 떠도는 주체다. 에필로그 _ 분명 모든 것은 변했다 삶의 짐에 눌려서 언제나 과거, 현재, 미래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않는 소외된 삶과 어떤 무게도 지려 하지 않지만 자유로운 주체 중 어떤 것이 더 좋은가를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확실한 것은, 게임이 등장한 이후,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세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경험이 변하고 있다. 그 세계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게이머라는 새로운 주체 스타일이 등장했다. 언젠가 세계가 완전히 게임으로 경험될 때,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배우게 될 것이다. 주체, 참여, 삶의 무게, 이런 가치들이 모두 달라져 있는 삶의 방식이다. 게이머를 사로잡기네 멋대로 해라 게임은 영화보다 더 적극적으로 게이머를 사로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만들어내는 장치들은 다양하다. 가장 많이 쓰이는 장치는 세부적인 측면에서의 인터랙션. 슈퍼 패미컴으로 출시되었던 남코의 <테일즈 오브 환타지아>는 게이머가 물가 근처로 가면 물속에 그림자가 비친다. 지금 수준에서 이런 묘소야 별로 어렵지 않겠지만, 당시로서는 이 장치가 가진 효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모든 그림을 도트로 찍는 상황에서 물 자체를 표현하는 건 어렵지만, 물가로 캐릭터가 지나갈 때, 물에 비치는 그림자라는 건 새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실제로 아무도 물에 비치는 모습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그것을 경험한 게이머들은 지금까지 없었던 것을 보게 된다. 이 세계가 내가 들어감으로써 이렇게까지 움직여지는구나 하는 점이다. 또 다른 방식은 자유도의 문제다. <폴아웃>의 경우처럼 게이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다양할 경우, 게이머는 자기 스타일대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카리스마와 협상력이 높은 경우에는 문을 지키는 경비와 싸우지 않고 문을 통과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전투력이 높다면, 말보다는 무력으로 적을 물리치고 통과하게 된다. 더 재미있는 건 캐릭터의 능력에 따라 그가 구현할 수 있는 말의 폭도 변한다는 것이다. 그게 완전히 자유로운 정도의 변화는 아니지만, 몇 가지만 가지고도 게이머는 충분한 만족을 한다. 는 자유도라는 점에서 가장 새로운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우선 게이머는 도시를 다니면서 원하는 짓이라면 모든 걸 할 수 있다. 게임 내용과 상관없이 길가던 사람을 때릴 수도 있고, 차를 빼앗을 수도 있다. 다만 한 가지 못할 일이라면, 여기서는 착한 일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건 게임 자체의 목적이 나쁜 짓을 하는 데 있어서다. 어쨌든 의 경우 전체적 시나리오의 틀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나쁜 짓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덕분에 게이머는 이 세계에선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된다고 경험하는 것이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즐거움연애… 해보셨나요?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는 말 그대로 연애를 가상체험하는 게임을 총괄해서 말한다. 그러다보니 구체적 장르 형식으로서의 연애 시뮬레이션의 폭은 꽤 넓은 편이다. <두근두근 메모리얼>을 필두로 한 정통 연애 시뮬레이션의 구조는 ‘개인의 수양’이 게임의 핵심이다. 좋아하는 여학생의 마음에 들도록 자신을 갈고 닦는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차츰 여학생과의 만남과 대화를 가지게 된다. 그 과정에서 평소 조사한 대로 여학생의 마음에 드는 대화를 이끈다면 호감도가 높아지고, 최종적으로는 고백을 받게 된다. 이런 스타일이 ‘시뮬레이션’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것이라면, 어드벤처 형식을 띤 경우도 있다. 장면마다 에피소드가 벌어지고, 게이머는 이 에피소드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방식이다. 많은 연애 시뮬레이션이 이런 방식을 택하는데, 적절한 대답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이런 어드벤처 방식에 해당한다. 최근에 많이 사용되는 건 ‘사운드 노벨’ 형식을 띤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투 하트>도 여기에 해당할 텐데, 어드벤처보다도 텍스트성을 강조한 것이 이런 게임들이다. 사운드 노벨은 말 그대로 소설책을 읽는 기분으로 게임을 플레이한다. 어드벤처에서 선택하거나 고민해야 할 것이 많은 반면, 사운드 노벨은 선택의 폭이 좁다. 대신 많은 양의 지문이 나와서 게이머가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동시에 연애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기분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이런 방식의 가장 큰 장점에 해당한다. 연애 시뮬레이션은 게이머가 게임의 주인공이 되는 느낌을 주어야만 연애가 성공했을 때 느끼는 성취감도 크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게임보다도 게임 속 캐릭터와 주인공간의 감정 동화 장치를 많이 만들어냈고, 그것을 표현하는 그래픽적인 연출 기법도 발전시켜왔다. 게임 그리고 새로운 세대 [1] 게임 그리고 새로운 세대 [2]

세계 영화계의 황당한 사건파일 넘버 10 [1]

스크린 뒤에 이런 일이!!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 중에 뉴스 가치를 따져서 보도하다보면, 체 밑으로 쏙 빠져나가는 소식들이 있다.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기자들끼리 내막을 읽으며 쿡쿡거리다 한곁으로 치워둔 사건파일들을 여기 모았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모두가 사실이다. 영화계 또한 세상이 늘 그렇듯이, 요지경 속이다. 01 영화평론가, 영화만 평론하나? 아니다. 가끔 극장비평도 한다. <시카고 선타임스>의 유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와 리처드 로퍼는 지난해 6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쇼웨스트 행사에서 미국 멀티플렉스 극장들을 ‘특별비평’했다. 멀티플렉스에서 만날 수 있는 온갖 다양한 토픽을 가지고 최고의 평론가들이 농담처럼 씹어댄 극장문화의 진담 평론. 그중 일부를 간추려 소개한다. “사람 방광이 라지 사이즈 콜라보다 작은 거 아세요?” “그거 다 마시는 사람도 없어요.” “당연하죠. 빨대가 짧아서 바닥에 안 닿거든요.” 에버트의 불평은 이어졌다. 빨대는 더 길어져야 하고, 문 밖에서 엿듣는 사람을 막기 위해 방음시설에 더 신경써야 하고, 상영시간이 지체되는 까닭은 일반광고가 아니라 영화예고편 때문이며, 스크린이 더 커져야 영화 프레임 밖에서 일하는 스탭들의 모습도 관객이 볼 수 있다 등등. 그는 또한 “팝콘과 심심한 음료 종류 외에도 다양한 음식을 팔면 극장이 추가수익을 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영화예고편의 내레이터 목소리는 항상 똑같다는 점도 지적했다. 개봉주 성적이 나쁘단 이유로 좋은 영화들이 무참히 내버려지는 풍토에 대해서는, 개봉 6주 뒤에야 박스오피스 톱에 올랐던 <쇼생크 탈출>의 예를 들면서 배급자들과 극장 관계자들의 인내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어쨌든 두 사람의 결론은 섬 업. “누가 뭐라고 해도 극장에서 겪는 최악의 경험은 영화 그 자체 아니겠어요?” “그렇죠. 일단 자리에 앉고 나면 끔찍한 영화는 도무지 피할 길이 없으니까요.” 02 변기에 들어간 `니모` 들 미국 일부 가정의 변기 배수구에서 다수의 물고기 사체들이 발견됐다. 3D 물고기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가 개봉한 뒤 벌어진 이같은 사태는, 영화를 보고난 아이들이 자기 집 어항 속 물고기들에게 자유를 찾아주려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영화 속에서 니모와 니모의 친구들은 바다로 돌아가기 위해 변기 배수구 구멍으로 탈출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그러나 변기 속에 물고기를 넣으면 그들은 당연히 죽는다. 바다는커녕 하수구에도 닿기 전에 죽는다. 짭짤한 물속에서 살던 물고기들은 변기 속 민물에 노출되는 순간 쇼크 반응을 일으킬 뿐 아니라, 소용돌이치는 변기 물살에 중상을 입게 마련이다. 배수구를 통과한 물고기라도 하수구 시스템에 도달하는 순간 각종 유독성 가스 및 화학물질, 박테리아를 먹고 기절하거나 질식해 사망하는 경우가 다수다. 그래도 살아날 경우 고체덩어리 분쇄기 및 인공비료 제조기를 통과해야 바다로 갈까 말까다. 이 사태를 접한 코미디언 엘렌 드제너러스는 TV프로그램에 나와 “아이들이 물고기에게 자유를 주려는 건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어쨌거나 나쁜 일”이라고 꼬마들에게 설명했다. 03 <브루스 올마이티>, 천국 핫라인 공개 엄청난 핫라인 번호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말았다. 짐 캐리 주연의 코미디영화 <브루스 올마이티>를 본 관객이 브루스의 삐삐를 통해 노출된 하느님의 핫라인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댄 것이다. 이 때문에 미국 플로리다에 사는 여성은 영화개봉 이후 5일간 시간당 20통 이상의 전화를 받았고 조지아주에 사는 한 여성의 집에도 200통이 넘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 여성은 전화기 자동응답 메시지를 바꿔버렸다. “하느님의 메신저입니다. 짐 캐리에게 다시 전화하세요.” 콜로라도의 한 라디오 방송사에도 마찬가지 전화가 쏟아졌고, 수화기 너머 한 여성은 남편 몰래 다섯번이나 바람을 피웠다며 솔직한 ‘고해’를 전하기도 했다. 제작사 유니버설쪽은 이것이 영화촬영지인 뉴욕 버팔로 지역에는 없는 번호라는 걸 확인했다고 열심히 변명 중이다. 그러나 이미 조사된 자료에 의하면 문제의 핫라인과 일치하는 번호가 전세계적으로 30개 이상. 따라서 이같은 사태는 앞으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04 비틀스판 <반지의 제왕> 제작설 30년 동안 감춰졌던 <반지의 제왕>의 ‘비틀스 버전’이 지난 3월 모습을 드러냈다. 캐스팅에는 간달프 역에 존 레넌, 프로도 역에 폴 매카트니로 거의 확정돼 있었다고 한다. 약간 다른 ‘설’도 있다. 프로도 역을 맡기로 한 폴 매카트니에게 직접 들었다는 피터 잭슨 감독은, “조지 해리슨이 간달프였고 존 레넌은 호빗 비스무레한 캐릭터로, 프로도와 그의 친구들을 뒤쫓아 반지를 손에 넣으려는 인물을 맡을 예정이었다”고 밝혔다. 연출자로 물망에 올랐던 인물은 데이비드 린과 스탠리 큐브릭. 그러나 먼저 접촉을 시도했던 데이비드 린 감독은 당시 <라이언의 딸>을 찍느라 바빠서 <반지의 제왕> 프로젝트를 거절했고, 스탠리 큐브릭은 “이걸 어떻게 영화로 만드냐”며 퇴짜를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백발 할아버지 존 레넌과 난쟁이 폴 매카트니? 우리의 상상으로도 부담스럽다. 05 갱스터 버전 <반지의 제왕> 러시아에서 <반지의 제왕> 갱스터 버전이 출시됐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감독인 피터 잭슨도 사전에 몰랐다는 이 버전은 현재 러시아의 해적판 비디오 업계에서 절찬리 판매 중이다. 구입문의는 모스코바시 구석구석에 널린 해적판 비디오 판매점들로 하면 된다. 이 버전은 캐릭터부터 딴판이다. 주인공 프로도는 기존의 선한 성질을 다 버리고 버벅대는 말투 속에 욕지거리를 피워대는 러시아 경찰관 역을 맡았다. ‘나쁜 놈’ 오크는 멋진 러시아 갱스터로 분했으며, 마법사 간달프는 시종일관 칼 마르크스의 심오한 이론을 설파하는 인물로 연기변신을 꾀했다. 이야기의 배경은 물론 러시아. 제작자로 알려진 ‘고블린’은 전직 성페테르부르크 경찰 수사관 출신의 평범한 시민 드미트리 푸치코프다. 본래는 몇몇 친한 친구들에게나 보여주려고 이런 엉뚱한 버전을 만들었던 것인데, 대본이 인터넷상에 뜨면서 예상치도 못했던 호응을 얻게 됐다. 이미 차기작에 들어갔다는 그의 다음 작품은 블록버스터코미디 버전 <스타워즈>. 06 미국 비디오 회사들의 영화 세탁 지난해 9월, 미국의 대형 비디오 대여·판매 회사들이 임의로 영화를 ‘세탁’했다가 법정소송에 휘말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감독조합(DGA)이 제기한 이같은 소송에는 클린플릭스(CleanFlicks)를 비롯, 13개의 영화 및 각종 소프트웨어 대여·판매회사가 연루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클린플릭스사는 철저한 가족영화 가공업체. 어떤 영화든 일단 이곳에 들어가면 각종 신성모독 장면 및 섹스신, 폭력신 등을 제거당하고 ‘온 가족 버전’으로 재편집돼 나온다. 스필버그의 명성도 소용없다. 클린플릭스를 통과한 <라이언 일병 구하기>조차 피 한 방울 튀지 않는 건전 버전으로 재출시됐다. 미국감독조합은 이같은 편집행위가 연방 저작권법을 침해할 뿐 아니라 “작품 소유권과 감독의 창조성에 대한 직접적인 정면 공격”이라고 비난했다. 저작권 전문가들도 DGA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 그러나 소송에 휘말린 대여회사들은 이것이 비행기 기내상영이나 TV방영시 편집하는 수준을 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클린플릭스 고객은 이같은 편집본의 필요성을 실질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온 가족과 함께 영화를 즐기고 싶은 그들의 눈에 <브리짓 존스 일기>의 침대신이나 <늑대와 함께 춤을>의 섹스신, <굿 윌 헌팅>에 등장하는 욕 따위는 불필요하다. 한 소비자는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는 섹스신을 빼고 봐도 재미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영화를 보호하고 싶은 감독들과 자신의 가정을 보호하고 싶은 소비자들 사이의 이해의 간극은 넓기만 하다. 마이클 앱티드 감독은 “이건 빙산의 일각이다. 지금은 멋대로 편집한 패밀리 버전만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포르노 버전, 정치영화 버전 등 정말 맘먹은 대로 온갖 버전을 다 만들어대고 말 것이다”라고 심각하게 말했다. 07 발리우드의 바람난 연인들 발리우드가 바람들기 시작했다. 지금껏 이곳 영화들의 공통유전자는 단조로운 스토리라인과 전통노래를 곁들인 춤. 그러나 요즘 제작되는 영화들은 이 오래된 클리셰를 과감히 벗어던지고 있다. 일각에서 ‘뻔뻔하다’고까지 말하는 최신 경향의 발리우드영화들은 남성 스트리퍼나 강한 커리어우먼, 대담한 성표현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키스신 등의 ‘과감한 섹스 코드’를 두른 저예산 상업영화들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이런 영화들은 지난 몇년간 불황을 못 벗어나고 있는 이곳 업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수익을 내고 있다. 지난해 인도 영화산업이 8천만달러 이상의 손실을 기록하는 동안 200만달러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렸던 영화 <더 보디> 역시 키스신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전통주의자들에겐 이런 변화가 불쾌하다. “이런 식의 상업적인 이용은 우리 문화와 걸맞지 않다. 우리 고유의 성격을 한번 잃어버리면 다시는 회복할 수 없다.” 그러나 남녀가 사랑하되 살짝만 껴안고도 부끄러워 더이상 진도를 나가지 않았던 모습은 옛날에나 통했을 내외. 인도의 한 감독은 “현재 우리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6월 개봉한 인도영화 <욕망>의 광고 멘트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영화, 뜨거울 겁니다. 키스장면 17번에 비키니 입은 여자들이 좌악 등장! 인도 주류 영화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이 영화표는 매진됐다. 세계 영화계의 황당한 사건파일 넘버 10 [1] 세계 영화계의 황당한 사건파일 넘버 10 [2]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3]

한지승 / 영화감독 유영길 감독님이 카메라 뷰파인더 보여줬을 때 유영길 촬영감독님을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라는 영화에서 만났다. 조감독으로서 선망의 마음을 품고 있던 나는 촬영현장에서 유 감독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지. 하지만 평소 농담 같은 건 일절 기대할 수 없는 무뚝뚝함과 차돌 같은 작은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가 만들어내는 범상치 않은 카리스마는, 비록 데뷔를 눈앞에 둔 조감독이라고는 하지만 식당에서 가끔 겸상을 하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촬영현장이 늘 그렇듯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잘 보이기는커녕 거듭되는 실수에 유 감독님의 직격탄도 몇번 맞았고, 이러다가는 감독돼서도 유 감독님과는 일 절대 못한다 싶어 몸사리고 일할 즈음 그분께서 주신 선물 하나가 기억이 난다. 어느 현장에서, 트라이 포트에 세워진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지나가던 촬영부 서드가 멋모르고 들여다봤다가 모모 촬영감독에게 개맞듯 맞고 쫓겨났다는 전설이 면면히 흐르던 시절, 마음 약한 신인감독은 관록있는 촬영감독에게 카메라 뷰파인더 좀 보자고 말 한번 꺼내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이른바 루빼라고 불렀던 촬영 고유의 성역 같던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촬영 막바지인 어느 날 유 감독님이 저를 부르시곤 ‘조 감독, 이거 보고 소품 배치해라…’하시면서 보여주셨다. 순간 귀가 멍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 참 술을 많이 마셨다. 분명 유 감독님이 나의 무언가를 인정하신거다라는 조금은 무리한 상상을 하며 마냥 기뻐했다. 지치고 피곤했던 조감독 시절, 어쩌면 그때는 그런 힘이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록 오해로 비롯된 해프닝일지라도 어떻게든 잘해내겠다는 나의 의지 안에는 존경하는 유영길 촬영감독님이 계셨던 것을 기억한다. 김정은 / 영화배우 라디오에서 내가 부른 노래 들었을 때 <가문의 영광>을 촬영하면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노래’였다. 감독님께 부탁해 이 장면의 촬영을 맨 뒤로 연기해뒀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시나리오상에서 나는 <백만송이 장미>를 부르게 돼 있었다. 그런데 내키지 않았다. 어릴 때 좋아했던 <나 항상 그대를>을 부르고 싶었는데, 우기고 나설 용기가 없었다. 우연히 감독님이랑 사장님께 “부르고 싶은 노래가 따로 있다”고 말했는데, 의외로 선뜻 “그럼 해보라”고 독려해주셨다. <나 항상 그대를>을 부르기로 하면서, 예기치 않은 해답도 나왔다. 원래 시나리오상에서 노래와 상황은 별개였는데, 이 노래말은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군더더기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화하고 교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같이 만들어나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때 절감했다. 그리고 몇달 뒤. 이동 중인 차 안에서 내가 부른 <나 항상 그대를>이 흘렀다. 좀 지겨워져서 “그만 좀 듣자”고 했을 때 매니저가 답하길, “이거 라디오인데”라는 거다. 내 생애 이런 기적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나와 관객의 주파수가 딱 맞았다니! 잊을 수 없는 짜릿한 체험이었다. 장혁 / 영화배우 5m 깊이 풀에 빠져 숨 못쉬고 기절했을때 <화산고>의 보충촬영 때, 5m 깊이의 풀에 빠지는 상황을 찍을 때였다. 카메라가 부감으로 수중촬영을 하고 내가 3m 깊이에 이르렀을 때, 대기해 있던 다이버가 날 잡아주기로 했다. 그런데 다이버에게 어떤 착오가 생겼는지 난 그만 5m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문제는 수압이었다.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고, 고막에선 펑펑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의 공포감이라니. 뒤늦게 달려온 다이버가 구출용 산소마스크를 들이댔다. 단추를 누르면 입 안에 찬 물을 뽑아내고 숨쉴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한데 워낙 긴박한 상황에 당황해서인지 입으로 숨을 쉬어야 할 것을 코로 호흡을 하고 말았다. 그 결과 물을 잔뜩 먹고 무려 30∼40분 동안이나 기절해 있어야 했다. 나의 기절 행진은 여섯번인가 일곱번에 이른다. 지금은 와이어를 기계로 안전하게 움직이지만 그때만 해도 온갖 스탭이 매달려 와이어를 당기고 놓고 했다. 한번은 물통 안에 다이너마이트를 넣고 그걸 터뜨릴 때 와이어를 타고 그 주위를 타고 돌아가는 장면을 찍었다. 그런데 실수로 계산을 잘못해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쪽으로 몸이 다가가고 말았다. 코앞에서 터지는 폭파장면이 어찌나 실감나던지. 비록 기절 행진을 하긴 했지만 줄 잡느라 엄청 고생했던 음향, 조명 등의 스탭들과 술로 날마다 회포를 풀며 정말로 친해져버렸다. 유인택 / 기획시대 대표 석고 붕대 안 감고 분신장면 찍었을 때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빠듯한 제작비로 어렵게 찍은 영화였다. 하지만 전태일이 평화시장에서 분신하는 장면만은 대충 찍을 수 없었다. 그때는 할리우드에서도 사람의 몸에 불이 붙는 장면을 찍으려면 석고 붕대를 칭칭 감고 멀리서 촬영을 하곤 했다. 만약 전태일이 그렇게 붕대를 감고 뚱뚱해진 몸으로 분신을 한다면 영화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났겠는가. 전혀 진실해 보이지 않았을 거다. 어떻게 하나, 한참 고민하고 있는데, 미국에서 공부했던 허창경 프로듀서(<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프로듀서)가 호주에 특별한 기술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피터 그레이를 만났다. 그레이는 처음 한국에 오자마자 긴팔 티셔츠에 바지만 입고선 특수약품을 뿌리고 불붙이는 장면을 보여줬다. 짜릿했다. 문제는 호주 스탭이라 인건비가 비쌌다는 것. 호주 스탭들은 작품당 계약을 하지 않고 일당을 받았기 때문에 딱 5일 만 한국에 머물기로 했다. 그래서… 정작 홍경인이 분신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엔 피터 그레이는 한국을 떠나고 없었다. 홍경인은 엄청나게 불안해했다. 스턴트맨이 호주에서만 나는 어떤 식물로 만든 약품을 받아놨고, 기술도 좀 배웠지만, 당사자가 없었으니까. 다행히 촬영은 무사히 끝났고, 분신장면은 포스터에도 썼다. 이춘연 / 영화인회의 이사장 <영웅연가>에서 헬리곱터 잠자리만하게라도 찍혔을 때 김유진 감독과 의기투합해 대진영화사를 차렸던 1985년. 창립작 <영웅연가>를 촬영 중이었다. 특히 신혼여행 중인 길용우와 송옥숙의 경호를 위해 헬리콥터가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진땀을 뺐다. 김 감독과 신옥현 촬영감독, 그리고 배우들은 10시에 출발하는 부산행 새마을호 탑승을 위해 서울역에, 서정민 촬영감독은 헬리콥터에 오르기 위해 오산비행장에, 그리고 헬기가 기차에 접근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홍재균 제작실장은 평택으로 찢어져 있었다. 작전은 평택 부근에서 헬기가 기차를 따라잡아 저공 비행을 시도하면 평지와 기차 안에서 이 광경을 카메라로 순간 포착하는 것. 서로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눈에 보이면 재빨리 카메라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재촬영할 여력 또한 없었으니 주어진 기회는 단 한번뿐이었다. 드디어 작전 개시. 3대의 카메라가 평택에서 도킹을 시도했고, 얼핏 성공한 듯 보였다. 기차는 부산을 향해, 헬기는 대전을 향해 날아간 것을 확인하고서 한숨을 내쉰 난 돌연, 카메라를 잡았던 홍 실장의 한마디에 억장이 무너졌다. “나타나자마자 휙 지나가버리네….” 나야 그렇다치더라도 비보를 전해 들은 김 감독은 데뷔 준비라곤 영화 촬영현장을 2시간 ‘견학’한 것이 전부였으니 현상 때까지 얼마나 마음 졸였을까. 다행히 잠자리만한 크기의 헬기가 카메라에 포획됐음이 확인됐고, 그때의 해프닝은 이제 현장 외줄 인생 20년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박중훈 / 영화배우 신현준·김승우 <황산벌> 까메오 자청했을 때 영화 만드는 인생은 만남과 이산의 반복이다. 한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은 일정기간 동안 밤낮으로 뒤엉켜 한꿈을 꾸다가 영화가 완성되면 뿔뿔이 흩어진다. 영화를 시작한 지 오래된 내겐 언젠가부터 함께 일하는 사람이 친구가 되고 친구가 같이 일하는 동료가 됐다. 하지만 영화배우란 통합되기 힘들다. 각자 개성도 강한데다가 언론과 관객, 영화 관계자들도 은근히 우리의 경쟁을 즐긴다. 그러다보니 괜한 미움과 질투도 떠돈다. 배우 생활을 하다보니 그것이 허망함을 깨달았다. 선의의 경쟁은 당연하지만 최고의 친구도 서로에게서 찾을 수 있는데…. 안성기 선배와 내가 선후배이면서 속으로는 가까운 친구이듯이. 영화를 주로 하는 형편이 비슷한 남자배우들은 한국에서 고작 20명인데 이 얼마나 희소한 직업군인가. 나중에 후배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다가서기로 결심했고 장동건, 신현준, 김승우씨 같은 후배들과 자주 어울렸다. <황산벌>은 내가 충무로 현장으로 참 오랜만에 돌아온 조심스런 작품이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황산벌> 이야기를 꺼냈더니 내가 수염 달고 상투 튼 모습이 장관이겠다며 허리가 끊어져라 웃던 김승우, 신현준씨가 불쑥 “우리도 한번 출연해야겠다”고 제안했다. 단역 출연을 자청하는 일은 별것 아닌 듯싶지만, 자신의 가치에 민감한 배우로서는 쉽지 않은 결심이다. 결국 두 사람은 경상도 말을 연습해 신라군에 잠입하는 백제군 첩자를 연기했다. 신현준씨는 부산에서 <페이스>를 촬영하고 김승우씨는 <역전에 산다> 개봉 홍보로 바쁠 때였다.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다시 관객과 가까워지는 일을 돕고 싶다는 마음으로 두 사람이 출연을 자청했을 때, 실제로 부여까지 내려와 지저분한 시대극 분장을 하고 촬영장에 섰을 때, 그리고 밤샘 촬영을 마치고 분장을 지운 얼굴로 핸들을 잡고 서울로 촬영지로 떠나가는 뒷모습에 세번 가슴이 뜨거워졌다. 김선아 / 영화배우 파편 튀어 볼살 떨어졌는데 스탭들이 병원 데려 갈 때 부산의 한 폐공장에서 <예스터데이>를 찍을 때였다. 현장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부하들을 이끌고 총을 쏘면서 뛰어가는 촬영에 들어갔다. 리허설했던 대로 동선 그대로 뛰어갔다. 폭파가 있었다. 생각보다 파편이 많이 튄다 싶었다. 유리창이 부서져 온몸이 다 꽂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옷을 많이 껴입어서 다쳤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물론 온몸이 아팠다. 다들 모니터 앞으로 몰려들어, 물론 나도, 촬영된 걸 보면서 ‘와, 잘 찍었다’고 박수치고 있는데 누군가 날보고 피가 난다고 했다. 왼쪽 볼의 살점이 떨어져 나가 있었다. 아찔했다. 몸이 상해서가 아니라 얼굴은 감출 수도 없는데 이러면 앞뒤 장면이 튀지 않겠는가. 그날은 마침 매니저가 현장에 없었다. 다쳤다고 확인되는 순간 놀란 제작부가 급히 병원으로 후송해주었다. 그뒤 일주일간 촬영을 미뤄주고 정성껏 보살펴주는 배려가 베풀어졌다. 밀양의 사자평이란 산꼭대기에서도 그랬다. 2월이어서 무지 추웠는데 촬영공간이 앞뒤로 펑 뚫려 맞바람이 거셌다. 그런데 제작부가 춥다며 비닐로 그 바람을 다 막아줬다. 자기네는 그 바람을 다 맞아가면서. 그곳은 올라가는 데 차로 30∼40분씩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지프 아니면 올라가기가 힘든 곳인데 지프는 두대밖에 없었다. 배우들이 우선이라는 스탭들의 생각 아래 우리는 그냥 편히 그 차로 올라가고 스탭들은 용달에 열댓명이 올라타서 올라오곤 했다. 지금까지도 제작부를 비롯한 그때의 스탭들과 아주 가깝게 지낸다. 나를 나보다 더 아껴준 그들, 너무나 고마웠다. 이건 절대로 빈말이 아니다. 곽재용 / 영화감독 발전차 고장났는데 이동 중인 발전차 소식 들려왔을 때 2002년 9월11일, <클래식> 촬영 3일차 되는 날. 서대전의 반딧불 냇가의 다리장면. 이어 안동으로 이동. 미루나무숲이 남아 있는 하아리에서 쇠똥구리 장면과 준하가 주희를 업고 공갈 안 공갈하며 둑길을 걷는 장면을 찍고나니 벌써 저녁 8시! 다음 촬영은 하회마을. 40분 정도 거리를 이동해서 주희가 몽유병에 걸려 집 앞을 거니는 장면과 준하가 굿을 구경하기 위해 담장을 넘는 장면을 위해 밤샐 각오를 다진다. 미술팀은 낮부터 작업을 하고 있었고, 나머지 스탭들이 식사를 하고 하회마을에 도착하자 이미 밤 10시. 조명부가 선을 깔고 카메라가 준비된 시간이 12시. 겨우 리허설을 하려고 하는데…. 이런! 18kg짜리 대형 HMI 라이트가 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원인을 알아봐도 발전차 고장이란 것 외엔 알 수 없고, 시간은 자꾸 가고…. 애태우는 동안 나는 철수를 할 것인지 발전차가 수리될 때까지 기다릴 것인지 결정을 해야만 했다. 촬영을 개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빵꾸(늘 쓰던 대로^^)가 나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나 있는 일이었다. 잘못하면 이번 촬영취소가 나쁜 소문으로 돌변할지도 모르고 스탭들의 사기에도 좋을 리 없다. 하루를 더 있게 되면 제작비 추가는 물론, 애써 깔아놓은 흙이며 담쟁이, 소품들, 엑스트라들, 모두 헛고생이다. 철수하면 하회마을에 또 올 수나 있을까? 촬영에 전혀 협조가 안 되는 마을인데…. 그리고 새벽 1시.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내게 믿지 못할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현재 부산으로 이동 중인 발전차가 있다는 것! 하회마을에 도착하는 시간이 2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4시. 두 시간 만에 촬영을 끝낼 수만 있다면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두 시간 만에 끝낼 것을 약속했고, 2시30분이 돼서야 촬영을 할 수 있었다. 4시까지 정신없이 촬영을 끝내고 나자 발전차는 달아나듯 떠나버린다. 떠나는 발전차를 보며 나는 ‘이건 정말 우연 중의 우연이야! 아니, 필연인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치 클래식 대사처럼…. 김형구 / 촬영감독 <투게더>의 바이올린 켜는 아들 모습 찍을때 내 영화경력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첸카이거 감독과 함께한 <투게더> 작업일 것이다. 처음 그의 제안을 받았을 때, 나는 영광스러웠다. 영화를 공부하던 시절 <황토지>는 나의 꿈이었고, 첸카이거는 우상이었기 때문이다. 그와의 작업은 즐거웠지만, 그중에서도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던 때는 신비롭기까지 했다. 아들이 베이징역에서 아버지를 만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장면이었는데, 그때 아들이 연주한 곡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 중 하나이기도 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콘체르토다. 영화의 감정이 극대화되는 장면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음악이기도 해서 유난히 신경을 썼다. 내 느낌은 내가 아들이 돼서 바이올린을 켜며, 아니 카메라를 켜며 촬영을 한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팔을 놀리는 리듬에 맞춰 카메라를 움직인다는 느낌으로. 크게 움직일 수도 없고, 고정시킬 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희한하게도 활을 잡은 아들의 손과 내 카메라가 미세한 움직임을 함께하는 듯했다. 최근 DVD로 이 장면을 다시 봤는데, 그 움직임은 나도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더라. 그리고 그 장면을 찍을 때의 감정이 되살아났다. 아들과 아버지의 재회라는 영화 속 격앙된 감정, 추앙하는 감독에 대한 경의, 한때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음악에 대한 향수 같은 게 뒤섞인 것 같더라. 아무튼 그 장면이 내게 불가해한 것만큼은 틀림없다.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1]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2]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3]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2]

심재명 / 명필름 대표 움직이는 차를 몸으로 막으며 프로듀서의 삶 시작할 때 93년 초여름, 잠실 롯데월드 앞 광장. 밤늦은 시각, 김의석 감독의 두 번째 영화 <그여자, 그남자>의 마지막신 촬영이 한창이었다. 그 여자, 강수연과 그 남자, 이경영이 서로를 찾아 서울 도심을 헤매다가 그 광장에서 드디어 만나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 광장엔 반드시 꼭 있어야 할 것이 있었으니 요즘 흔히 보게 되는 ‘영상이동차량’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이 힘겹게 빌려놓은(아마도 당시 최초이자, 유일하게 시험운영되던 차량으로 기억된다) 영상차량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애초의 약속시간을 어겼다며 운전기사와 시스템 운영자가 막무가내로 그냥 가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었다. 앞의 진행이 좀 늦어져서 벌어진 일이기도 했으나, 실은 사용료를 더 벌어보겠다는 심산이었을 터. 이미, 30m 높이의 대형 조명크레인과 대형 촬영용크레인이 와 있고, 수십명의 보조출연자가 대기하고 있었으며, 건너편 아파트 주민들은 어두운 밤을 훤히 밝힌 조명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다고 아우성 중이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신이었는데, 정작 영상차량 문제가 눈앞을 막막하게 했다. ‘부고담당 보도기자’인 이경영이 오드리 헵번의 사망소식을 알리면서, 그가 미리 편집해놓은 그녀의 일생이 뉴스에 담기는 모습을 배경으로(영상차량에) 이 청춘남녀가 만나는 ‘결정적’ 신인데, 기사들의 협박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졌다. 시간이 더 흐르자, 올려주겠다고 약속한 사용료도 싫다며 드디어 막무가내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그들…. 순간, 나와 제작부장은 움직이는 차의 앞과 뒤를 가로막았다. 온몸으로. 그래도 그들은 움직이는 것이었다. 생각해보라, 조금씩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차량의 앞뒤를 남녀 한 사람씩 껌처럼 달라붙어 막고 있는 아니, 매달려 있는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그 승강이가 한참 지난 뒤에 ‘질렸다’며 차에서 내려온 그 사람들은, 마침내 현장에 달려오신 당시 영화사 대표님의 설득으로 잠잠해졌다. 나와 제작부장은 그 신을 그날 밤 찍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심정으로 그들을 ‘온몸으로’ 막았던 것이었다. 그때, 신출내기 프로듀서인 나와 함께 뛰었던 송창용, 김근철씨, 잘 지내고 있는지요? 보고 싶습니다. 프로듀서의 삶은,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또는 처절하게 ‘온몸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오정완 / 영화사 봄 대표 동네 떡대들이 횡포 부리다가 나를 보고 그냥 갈때 8년 전 <정사> 찍을 때였다. 성수동의 굉장히 좁은 오락실에서 둘(이미숙과 이정재)의 정사장면을 찍고 있었다. 오락실 밖에는 구경나온 주민들이 한 무리였고, 지나는 차량도 적지 않았다. 그 소음을 막느라 제작부가 무진 애를 쓸 수밖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걸 보고 깍두기처럼 생긴 구형 그랜저 한대가 그 구경 대열에 합류하느라 멈춰 섰다. 제작부 막내가 “지나가십쇼” 하고 차를 툭툭 쳤는데, 갑자기 차문 4개가 동시에 열리더니 덩치 큰 남자들(보통 ‘깎두기’라고 하는)이 ‘연장’을 들고 우르르 내리는 게 아닌가. “어떤 새끼가 내 차를 쳤어?” “죄송합니다. 촬영 중이라서 그랬습니다. 그냥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퍽! 그들은 연장 대신 주먹을 날렸다. 갑자기 얼어붙은 촬영장. 주민들은 멍하니 보고 있고, 그들은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동네에서 누구한테 허락받고 찍고 있는 거야. 책임자 나와!” 그들은 인상을 ‘빡’ 쓰고 있었다. “책임자 나오란 말야!” “제가 책임자입니다.” “아가씨말고 책임자 나오란 말야.” “제가 책임자라니까요.” 물론 다리는 후들후들거리고 있었다. 마침 막내가 맞는 걸 보고 분개한 스탭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자칫 한판 크게 붙을 일촉즉발의 상황이 됐다. 몰려든 스탭들을 추스르는 걸 보고 그들은 내가 책임자가 맞나보다 판단한 듯싶었다.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에이, X발” 하고 한마디하더니 쓱 가버리는 게 아닌가. 현장책임자는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맞장 뜰 상대는 아닌 것 같고. 그리고 촬영은 계속됐다. 문소리 / 영화배우 열심히 춤연습했는데 청소로 바뀌었을 때 감독: 마지막엔 제대로 된 춤을 춰보지? 소리: 시나리오에는 마지막에 이삿짐 싸는 거 아닌가요? 감독: 장소 바꿨어요. 무용실로. 소리: 그럼, 어떤 춤을…? 감독: 그냥 뭐… 멋진 거…. 너무나 갑작스런 주문, 게다가 연습할 시간도 며칠밖에 없고 애타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굴러가며, 무용 선생님 붙잡고 도와달라고 통 사정해가며 정말 피땀흘려가며 연습했는데…. 멋진 거 한번 해보려고 이번엔 진짜 멋진 거 보여주려고, 그런데… 흑…. 소리: (비굴하게) 감독님 오늘은 제발 무용 연습한 거 한번 봐주세요. 촬영이 내일이잖아요, 멋진지 안 멋진지 뭐라고 말씀을 해주셔야…. 감독님: (딴곳 쳐다보며) 네. 한번 춰보세요. 소리: (조금 뻘쭘하다 그러나 힘차게 첫 동작을 시작하려 하는데….) 감독님: (갑자기 구석에서 마대자루를 들고 나타나며) 소리씨. 청소는 어때? 소리: (춤추려다 갑자기 기운 확 빠져서) 네? 감독님: 그래. 우리 마지막에 청소하자. 소리: (펄쩍펄쩍 지랄 발광하며) 악…. 며칠 동안 나 혼자 뭔 짓거리를 한 건지… 낮에도 밤에도 새벽에도… 선생님은 계속 안무 바꾸시고 나는 계속 연습하고… 얼마나 얼마나 공들여 만든 춤인데…. 춤추지 말라니요. 갑자기 청소를 하라니요 멋진 거 하라고 했으면서… 뭐? 청소? 감독은 변덕쟁이야. 너무해. 진짜 허무해. 두 시간 뒤 삼겹살 집에서…. 소리: (소주를 입 안에 털어넣으며) 감독님 <오아시스>도 마지막에 청소했는데… 괜찮을까요? 괜찮겠죠? 감독님: (고기를 마구 먹으며) 네. 소리: (또 털어넣으며) 감독님 청소를 신나게 할까요? 그래야겠죠? 씩씩하게 해야겠죠? 감독님: (또 마구 먹으며) 네. 털어넣는 소주맛. 진짜 짜릿하다. 차승재 / 싸이더스 대표 갈비뼈 부러지고도 `레디고` 외친 유영길 감독님 지켜보면서 쿵 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달려갔을 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농수로 바닥에는 유영길 촬영감독님께서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었다. 내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촬영하던 1994년 어느 날 벌어진 일이었다. 양수리 인근에서 야외신을 찍던 유영길 감독님이 앵글을 잡는다며 뒤로 물러서다가 부감대 위에서 굴러떨어진 것이다. 환갑을 1년 남겨놓은 연세에 낙상을 하셨으니 충격이 얼마나 대단했겠는가. 앰뷸런스를 부른다, 차로 병원에 모신다 하면서 우리가 부산을 떠는 와중, 잠시 옆구리를 붙잡고 있던 유 감독님은 먼지를 털고 일어나 다시 카메라를 붙잡았다. “붕대라도 감으셔야죠.” 간청을 했지만, 당신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자 빨리 찍읍시다” 하고 재촉했다. 여러모로 여건이 안 좋은 현장이었기에 우리는 촬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유 감독님의 갈비뼈가, 그것도 2대나 부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바로 얼마 뒤였다. 감독님의 프로 정신은 놀라운 것이었고, 힘든 상황에서도 영화를 마무리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리고 4년 뒤 유영길 감독님은 영면하셨고, 장례식장에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말리지 못할 정도로 펑펑 눈물을 쏟았다. <나는 소망한다…>에서의 기억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유작이 된 에서 보여주신 모습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기획할 때, 유 감독님을 촬영감독으로 기용하는 것을 반대했었다. 롱테이크 위주로 가는 게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영길 감독님이 우노필름(현 싸이더스) 사무실로 찾아와 “이건 내가 찍어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의 뜻을 저버릴 수 있는 제작자는 아마도 없었으리라. 그렇게 촬영이 시작됐고 잘 마무리되나 싶었다. 그런데 크랭크업 직후 유 감독님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첫 번째 수술을 마친 뒤 유 감독님은 놀랍게도 기운을 차리고 기술시사에도 참석하셨다. 기자시사회에도 참석하셨으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틀 뒤 그는 이승으로 차분히 떠나셨다. 2차 수술을 얼마 안 남긴 상황이었기에 아쉬움은 더했다. 다 나 때문인 것 같았다. 이 작품을 하면서 유난히 고심하셨던 감독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작품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던들 아니 최소한 시사회만이라도 참석하지 못하게 거세게 말렸던들 하며 후회가 밀려왔다. 지금도 를 볼 때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는 것은, 카메라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올곧게 보여준 거장의 기적을 목도한 탓이리라. 정지영 / 영화감독 <낙동강은 흐른다>로 임권택 감독님과 일할 때 76년 여름이었던가. 16mm 단편을 함께 찍기로 했던 동료가 말도 없이 김수용 감독님의 영화에 촬영부 스탭으로 참여하는 바람에 난 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얼마 안 되어 지인의 권유로 임권택 감독님의 <낙동강은 흐른다>에 연출부 세컨드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연출부라고 해봤자 조감독과 나, 그리고 감독님 옆에서 땡볕을 가리기 위해 우산을 들고 서 있는 꼬마가 전부였다. 진유영이 소년병으로 나와 탱크로 무장한 인민군과 맞선다는 내용의 반공영화였는데, 경기도 운천의 한 야산 입구에서 촬영이 진행됐던 그날이 지금도 생생하다. 소년병 분장을 하고 나선 진유영이 인민군의 탱크를 피해 달아나는 장면이었는데, 탱크가 뒤쫓아오면 진유영이 푹 팬 웅덩이에 숨었다가 반대방향으로 도망치면 탱크가 후진(後進)해서 다시 위협하는 설정이었다. 전진과 달리 후진시에 탱크는 시야가 제한되어 있어 탱크의 후진 시점은 배우와 시간약속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몇번의 테스트 끝에 드디어 촬영에 돌입했다.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까진 좋았는데, 아뿔싸. 진유영은 몇 걸음 달리다 이내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탱크의 캐터필더가 되말리면서 모두들 사색이 됐다. 스탭들과 배우들 모두 이 광경 앞에 “어, 어…” 하고 머뭇거리기만 했다. “저러다 죽겠구나.” 돌연, 누군가가 앞으로 뛰쳐나가 진유영의 허리를 낚아채서 길 건너편으로 던져냈다. 임 감독님이었다. 언변은 어눌했지만, 판단은 누구보다 빨랐다(보진 못했지만, 촬영을 끝내고 군 인사들과 피로연을 여는 날도 케이크 점화 도중 갑자기 불이 옮겨붙어 우왕좌왕하는 동안 임 감독님은 성큼성큼 다가가서 발화물을 들고 연회장 바깥으로 내던졌다고 한다). 서른이 넘어서야 충무로에 발을 내디뎠던 늦깎이 내가, 데뷔한 다음 베트남에서 <하얀 전쟁>을 찍는 동안 배우들을 설득하기 위해 수리가 완전치 않은 헬리콥터에 오르는 호기를 부릴 수 있었던 것도, 독이 오를 대로 올라 난동을 부렸던 연기자에게 주눅들지 않고 다가갔던 것도, 돌이켜보면 그날, 바로 그날 촬영현장에서 홀로 번뜩이던 임 감독님의 반짝반짝한 눈빛 덕이 아닌가 싶다. 배창호 / 영화감독 흐린 날씨 고집하다가 맑은 날 고독한 뒷모습 담았을 때 <황진이>를 찍을 때였다. 벽계수에게 자신은 소유욕에서 비롯된 순간의 열정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진이가 텅 빈 들판을 쓸쓸히 걸어가는 장면의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았다는 슬픔과 허무. 이런 감정을 살려내기 위해 우리는 흐린 날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2월은 좀처럼 하늘이 개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이 촬영을 앞두곤 날이 계속 맑았다. 정일성 촬영감독님이랑 반나절 정도 기다리다 결국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했다. 장비를 접고 자리를 정리하는데 의상부 막내 스탭이 황진이의 동선을 따라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 들꽃을 따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맑은 하늘을 마주하고 걷고 있는 그 뒷모습이 그렇게 고독해보일 수가 없었다. 슬픈 감정은 맑은 날의 고요와 평화 속에서 훨씬 더 잘 살아날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래서 서둘러 촬영을 재개했고, 썩 마음에 드는 장면으로 담아낼 수 있었다. 이후로 나는 날씨를 고집하지 않게 됐다. 영화 촬영에 따르는 여러 가지 악재와 변수들은, 때로 영화와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선물들이다. 명계남 / 영화배우·이스트필름 대표 <박하사탕> 마지막 촬영 앞두고 공사 벌어졌을 때 <박하사탕>을 제작할 때였다. 영화의 시간구성이 역순인데 이창동 감독은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는 영화순서 그대로 촬영을 했다. 여느 촬영 스케줄과 다른 방식이었는데, 설경구가 특히 고통스러워했다. 처음에 철교에서 죽는 것부터 찍고, 20년을 거슬러올라가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1979년 야유회 장면은 마지막 촬영으로 미뤄뒀다. 군부대 장면을 어렵게 찍었고 드디어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었다. 충북 제천 백운면 진소천의 그 강가는 지금 관광지 비슷하게 됐지만 그걸 찾느라 연출부가 전국의 교량은 다 뒤져야 했던 곳이다. 쌍철교여야 하고 굴이 있어야 하는 조건을 딱 맞춘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연출부가 준비하러 갔는데 철교에서 한창 공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닌가. 철교 밑으로 조그만 강이 흐르는데 그 물길도 돌려놓고 길도 다 엉망이 됐고…. 완전 공사판이 됐으니 난리가 난 거였다. 그 연락을 밤에 받고 새벽에 달려가보니 아찔했다. 감독과 연출부가 넋을 빼놓고 바라보고 있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 장면인가. 수미쌍관으로 영화를 시작하고 끝내는 건데. 부산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있었고, 각종 해외영화제 일정도 있어서 촬영을 늦출 수도 없는,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공사현장 담당자에게 공사를 중단하고 촬영하게 해달라고 사정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공사 발주처를 찾아 사정한 끝에야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그걸로 다 끝나는 건 아니었다. 물길도 다시 돌리고, 공사용 비계도 다 뜯어내고, 자갈밭도 옛날 모습으로 만들고…. 촬영하고 그 모든 걸 다시 공사판으로 원상복귀했다. 그 비용과 시간이라니….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보강공사도 아닌 공사를 왜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 귀띔해줬다. 남은 예산을 소진하느라 치른 돈쓰는 공사였다고. 그러고 보니 연말이었다. 최민식 / 영화배우 스탭이 손가락 인대 끊어지고도 촬영준비 하는거 봤을때 <올드보이>에서 주인공이 모교를 찾아가는 장면을 찍을 때 일이다. 진주 상록고등학교에서 찍었는데 학교 계단이 아주 가팔라서 얼핏 보기에도 위험했다. 밤에 미술부인 이청미씨가 그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가 났는데 손가락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무척 아프고 고통스러웠을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촬영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탄했다. 배우로서 힘들고 짜증나고 귀찮고 그럴 때 함께 영화를 찍는 스탭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내게 힘이 된다.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가 이럴 때가 아니다 싶고. 그건 새벽에 촬영장에 도착해서 스탭들을 볼 때 느끼는 것이기도 하다. 목장갑 끼고 부지런히 조명기를 옮기고 세트에 칠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 이게 진짜 영화 속 장면 같다는 느낌이 든다. 문성근 / 영화배우 거센 파도, 배멀미도 모른 채 촬영 끝났을 때 전라남도 완도에서 <그 섬에 가고 싶다>(1993) 촬영 때의 일이다. 유영길 촬영감독이 그림이 안 나온다며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야겠다고 선주(船主)에게 요구했다. 선주는 ‘지들이 나가면 얼마나 나가겠어’ 하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제작진을 태운 배가 점점 부두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파도는 점점 거세졌고, 선주의 얼굴은 이내 사색이 되어갔지만, 유 감독은 그래도 성이 안 차는지 뱃머리를 돌리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카메라를 잡는 데만 그는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유 감독뿐이 아니었다. 박광수 감독과 다른 스탭들 모두 앵글에 걸리지 않기 위해 때론 모두 갑판에 누워 배 안으로 뛰어들어오는 성난 물세례를 맞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불평이 없었다. 파도에 몸을 맡긴 배가 요동을 치는데도 심지어 주변에 배멀미하는 사람 하나 없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구나, 그래 다들 미쳤구나, 영화에 미쳤구나. 촬영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집단적인 광기에 휘말려 취해 있었음을 문득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열정을 토하던 그때가 몹시 그리워진다. 이미연 / 영화배우 정광석 감독님이 꾀부리는 나를 혼냈을 때 오래된 얘기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벼락스타가 된 뒤에 만난 첫 영화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였다. 그때 많이 어렸기 때문에 강우석 감독님이나 이춘연 상무님이나 모두 날 굉장히 예뻐해줬다. 현장에서 주연배우는 예나 지금이나 다들 유리그릇 다루듯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그래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어느 날 체육시간에 무용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는데, 풀숏 촬영이라는 걸 알고 꾀가 났다. 그래서 대충 해버렸다. 이 많은 아이들 중에 내가 보이겠느냐 싶어서. 그때 어디선가 불호령이 떨어졌다. “야! 너 열심히 안 할 거야?” 정광석 촬영감독님이었다. 나의 불성실한 태도를 참을 수 없으셨던 거다. 울었던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내 자존심에 그 자리에선 의연한 척했을 거고, 아마도 엄마 앞에서 울거나 하소연하거나 했던 것 같다. 현장에서 누군가에게 호되게 야단 맞은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기억 때문에 아무리 작은 신이라도 언제나 나의 100%를 다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곤 한다.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정광석 감독님이랑 작품을 같이한 적이 없었는데, 그분에 대한 고마운 마음만은 늘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1]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2]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3]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1]

영화인 25명에게 듣는다.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The Best Moment‥) “마음 같아선 계속 찍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는 끝이 있어야 했고 결국 칸영화제에 맞춰 촬영을 끝냈다.” <화양연화>의 DVD에 들어 있는 인터뷰에서 왕가위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그가 <화양연화>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랐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왕가위는 “영화를 찍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덧붙인다. 살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을 어떻게 쉽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그는 사라진 사람들, 잃어버린 시간들, 잊었던 감정들이 탄생하는 그곳을 영영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막 해가 떠서 대지의 이슬이 상쾌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아침, 지평선이 펼쳐진 초원에 100명이 넘는 스탭과 연기자들이 촬영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린 시절 꿈이 이뤄지고 있는 걸 실감했다.” 중국에서 <무사>를 찍고 있을 때 김성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사막의 뜨거운 모래바람과 살을 에는 대륙의 한파와 싸우면서도 그때 그는 행복해 보였다. 평생 한번도 찍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장면이 눈앞에 펼쳐질 때 감독이라면 누구나 맥박이 빨라지는 걸 느낄 것이다. 촬영현장의 그런 흥분이 아니라면 육체의 한계를 돌파하는 에너지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 조명기로 환히 밝혀진 현장을 보면 빛이 나를 끌어들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빛에 끌려 지금까지 이 일을 하고 있는 거 같다.” <나쁜 남자> <광복절특사> 등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박민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 빛의 마력이 무엇 때문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못했지만 그를 매혹시킨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나방을 유혹하는 불빛처럼 현장의 조명기는 밤을 낮으로 뒤바꾸고 인물의 표정을 조각상처럼 빚어내는 마술을 부리면서 그의 몸을 전율케 했을 것이다. 영화를 찍는 현장은 묘한 곳이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에 홀려 여기 도착한다. 처음엔 관객의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일단 이곳에 도착하면 또 다른 무언가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건 내가 나오는 혹은 내가 참여한 영화를 보고 싶다는 열망만은 아니다. 또는 빨리 조수를 그만두고 감독이나 기사가 되고 싶다는 바람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현장의 불빛에 이끌리고, 누군가는 그날의 고된 노동에서 성취감을 느끼며, 누군가는 어깨를 다독여준 그 사람을 잊지 못해 다시 이곳에 온다. 열악한 노동조건을 성토하다가도 찍던 영화가 중간에 무산되면 내 아이를 잃은 것처럼 가슴아파하는 사람들, 육체적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요구에도 군말없이 일단 한번 해보는 사람들, 단지 영화 한편을 찍기 위한 한시적 만남인데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들, 촬영현장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헌신성과 자발성을 다른 직장에서도 만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 그들은 마조히스트처럼 더 많은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인다. 피로와 아픔을 참을 수 없던 순간, 심지어 죽음을 넘나든 경험이 별안간 희열과 환희로 돌변해 전설처럼 회자된다. 무엇이 그들에게 자발적 희생을 부추기는 것일까? <씨네21>은 그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영화인들에게 ‘나를 매혹시킨 영화현장의 기억’을 떠올려달라고 했다. 사각 프레임의 바깥에 존재하는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을 엿보고자 함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의 마음과 태도를 보여주는 그 기억들은 교과서나 이론서에 나오지 않는 생생한 체험의 산물이다.글 남동철 namdong@hani.co.kr·편집 심은하 eunhasoo@hani.co.kr 송강호 / 영화배우 <반칙왕> 레슬링 장면 위해 고통 속에서 보낸 열흘 <반칙왕>을 찍을 때 일이다. 열흘간 성남실내체육관에서 레슬링 장면만 집중적으로 찍었는데 (전화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변하면서) 아, 잠깐만요, 저기, 아, 아름다운 아가씨가 지나가는 거 같은데, 아, 아∼, 에이, 별거 아니네요. 하하하. (송강호다운 농담!). 그때 낮에는 자고 밤에 찍었다. 체육관에 햇빛이 들어오니까 낮에는 못 찍고 밤마다 시작해서 동틀 때까지 찍는 식이었다. 낮밤이 바뀌어서 열흘간 찍는데 격렬한 레슬링 장면이다 보니 7일쯤 지났을 때는 옷을 벗어보면 온몸에 멍이 들어서 얼룩덜룩했다. 그러면서도 현장에서 “힘들다”는 소리는 못하던 때였는데 그날 옆방에서 울음소리가 났다. 내게 레슬링을 가르쳤고 스턴트맨으로 상대역을 맡았던 이인섭씨가 그 방을 썼는데 혼자 우는 거였다. 여관방이라 벽이 얇아서 그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날은 정말 힘든 장면을 찍었는데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현장에선 표현을 못하면서 혼자 울고 있었던 거다. 사실 그때는 물어보지도 못했다. 나중에 <반칙왕>이 개봉하고나서 술자리에서 물어봤더니 정말 너무 아파서 울었다고 말하더라. 그날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배우를 해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 친구는 자신이 스턴트맨이라는 프로의식 때문에 현장에선 아무 말도 안 하고 자기 방에 혼자 있을 때 비로소 신음소리를 낼 수 있었던 거다. 그 울음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진정 영화현장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프로다운 열정을 느꼈다고 할까. 엄청난 육체적 고통 속에서 보낸 그 열흘은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이인섭씨는 지금 성룡의 영화에서 스턴트맨으로 일하는데 언젠가 캐나다에서 전화를 해온 적도 있다. 사람들은 촬영현장이 화려하고 평온하고 화기애애한 줄 알거나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기도 하지만 그 안에 남 모르는 고통을 속으로 삼키는 스탭과 연기자가 있다. <반칙왕>의 레슬링 장면을 찍었던 그 열흘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공기가 감싸고 있었다. 영화를 만드는 현장이 어떤 것인지, 그 속에서 함께 호흡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그날의 울음소리엔, 그날의 공기엔 그것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박찬욱 / 영화감독 연출부 시절 D 카메라 맡고 처음 `레디 액션` 외쳤을대 처음 연출부를 한 작품이 이장호 감독이 제작하고 유영진 감독이 연출한 <깜동>이었는데 그때 기억이 많이 난다. 당시로선 하늘 같은 느낌이 들었던 이장호 감독이 어느 날 현장에서 날 보더니 “그놈 얼굴 좋다. 감독되겠다” 하시는데 무슨 근거로 말한 건지 모르지만 기분이 아주 좋았다. <깜동>은 사극이라 산골에서 많이 찍었는데 낮 촬영을 끝내고 철수할 때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 남들보다 조금 일찍 내려와서 다른 사람들이 짐을 들고 철수하는 걸 봤는데 막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을 때였다. 산의 능선에 해가 반쯤 걸린 채 노을이 졌는데 스탭들이 장비를 들고 내려오는 실루엣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카메라를 멘 사람, 조명기를 짊어진 사람, 배터리를 들고 있는 사람 등 일군의 스탭이 내려오는 모습이 그림처럼 예뻤다. 연출부 막내를 하면서 고된 일이 많았지만 그 순간만은 환희를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은 예전처럼 심하지 않지만 <깜동> 때만 해도 연출부 막내는 밥도 빨리 먹어야 했다. 내가 양손잡이라 한손에 숟가락, 다른 손에 젓가락을 들고 밥을 무척 빨리 먹어서 귀여움을 받았던 생각도 난다. 한번은 군중신을 찍느라 카메라 4대를 돌린 적이 있다. 감독이 혼자 카메라 4대를 관장할 수는 없으니까 연출부가 1대씩 책임을 졌는데 내게 D카메라가 맡겨졌다. 엑스트라만 나오는 인서트 장면이고 카메라 앵글이나 연기가 다 정해진 것이었지만 그때 처음 “레디 액션”을 불렀다. 내가 “레디 액션”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감동스러웠던 순간이다. 요즘 내 영화 연출부하는 친구들 보면 옛날 생각이 날 때가 많다. 막내부터 조감독까지 하면서 그때 나는 형편없는 연출부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연출부들은 옛날 나보다 훨씬 잘하는데 그래도 야단을 칠 때가 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옛날 나보다는 훨씬 나은데….’ 정두홍 / 무술감독 뒤통수로 차 앞유리창 깨고도 두발로 병원 걸어갈 때 김성수 감독의 <런어웨이>를 찍을 때였다. 무술감독이라는 직함을 단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맞은 영화였고, (지금이야 가장 좋아하는 영화계 선배지만) 감독이라는 자의 기세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도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차에 부딪쳐 앞유리창이 깨지고, 내가 튕겨져 나가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자동차 유리창이란 게 보통 힘으론 깨지지 않는다. 해서 나는 어깨와 몸통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충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튀어올랐다. 웬걸, 유리창은 보란 듯 멀쩡하다. NG다. 다시 한번. 유리창아,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몸이 솟구쳤다. 유리는 여전하다. 몸을 추스르는데 휘청한다. 어딘가에 있는 뼈 몇개가 부러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자존심도 상하고 오기도 발동해 참을 수가 없었다. 다시 퉁, 퉁…. 감독은 난감한 표정이다. 거듭되는 NG 때문이라기보다는 내가 미친 것 아닌가, 하고 고민하는 것 같다. 다섯 번째던가. 다시 몸뚱이로 받으려고 유리창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충돌의 극히 짧은 순간, ‘불길하다’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쿵. 머리가 유리창에 부딪친 것이다. 그것도 뒤통수로. 그런데 난 죽거나 혼수상태가 되지 않았다. 유리창이 깨졌기 때문이다. 단단한 몸통으로도 안 깨졌던 유리가 말랑말랑한 머리로 바스라지다니. 이건 분명 내 힘으로 한 것일 리가 없었다. 내 발로 병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액션의 신(神)’, 또는 ‘영화의 신’의 존재를 믿게 됐다. 그리고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물론 그때만이 아니었다. 이 정체모를 강력한 힘은 차에 받혀 고꾸라질 때 도로와 인도 사이에 튀어나온 경계석쪽으로 떨어지던 머리를 끌어당겨줬고, 난간에서 난간으로 붕 뛸 때 내 힘이 모자라는 만큼을 비행하게 해줬고, 잡히지 않던 브레이크를 결정적인 순간 작동하게 해줬다. 스턴트는 자기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니, 항상 자만하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도 다 그 거대한 힘을 믿기 때문이다. 박흥식 / 영화감독 내 실수를 껴안아주었던 문성근 선배님과의 술자리 93년 여름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찍을 때 우리는 전라도에 있는 자개도라는 작은 섬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다.그곳은 아름다운 섬이었다. 돈은 못 벌지만 그래도 한 낭만하는 영화스탭들은 밤이 되면 파도 소리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유독 아름다운 밤하늘, 쏟아져내릴 듯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박혀 있는 밤하늘의 별을 안주 삼아 거의 매일 술판을 벌이곤 했다. 문제의 그 전날 밤도 나는 함께 연출부를 했던 허진호 감독, 오승욱 감독 등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영화를 논하다가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날 배우 담당이었던 나는 촬영 내용을 배우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마을회관으로 갔다. 지금처럼 휴대폰도 없고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안내방송을 해서 촬영장소로 모이게 하는 것이 내 임무였다. 숙취 때문인가 좀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마이크를 들었다. “연출부에서 알립니다. 오늘 촬영은 운동장에서 하는 인민재판신인데요 출연하실 배우들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호명하는 분들은 00시까지 학교 운동장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저기…(머뭇) 시간관계상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안성기 선배님, 김용만 선생님, 허준호씨, 문성근.한번 더 안성기 선배님, 김용만 선배님, 허준호씨. 문성근.” 부랴부랴 안내방송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더니 연출부들이 웃고 난리였다. “존칭은 생략한다면서 다른 사람들은 다 선배님, 선생님 붙여주고 왜 문 선배만 빼요?” “내가?” “그것도 두번씩이나.” 정말 몰랐다. 가뜩이나 얼굴이 잘 빨개지는 나는 내가 한 실수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얼마 뒤 학교 운동장에 촬영팀이 전부 모였다. 저쪽에서 안성기 선배님, 문 선배님 등과 이창동 감독님(당시 조감독) 그리고 박광수 감독님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창동 감독님이 나를 보더니 “니 문 선배한테 감정있나?” 그리고 누군가는 “존칭은 생략하겠습니다. 안성기 선배님, 허준호씨, 문성근” 하고 되뇌고…. 그 말에 한바탕 왁자하게 웃고 나는 얼굴이 더 빨개지고…. 그날 촬영이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쭈뼛쭈뼛 문성근 선배님 앞으로 갔다. 사과를 드렸다. 전날 술을 많이 마셔서, 정신이 없는 상태라서 그랬다고. 진심으로 사과를 드렸다. 문 선배님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나를 껴안아주셨다. “자식 소심하긴, 임마 농담이지. 너 놀리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진짜 웃겼어.” 그때 나는 28살. 작은 실수에 전전긍긍하고 농담도 이해 못하는 순진한 나이였다. 그날 밤, 문 선배님과 함께 술을 마신 것 같다. 하늘에선 여전히 별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을 잘 껴안는 문성근 선배님, 작은 일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나를 껴안아줬던 문 선배님이 정말 따뜻하고 고맙다. 지금 준비하는 영화의 헌팅 때문에 섬에 갈 때면 그때 일과 문성근 선배님이 생각난다. 조재현 / 영화배우 물에 빠져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갔던 순간 <섬>을 찍을 때 죽을 뻔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드라마도 찍고 변혁 감독의 <인터뷰>에도 출연하고 있던 때라 정신없이 바빴는데 ‘의리 출연’이라는 명목으로 <섬>을 찍으러 갔다. 전날 밤샘 촬영을 하고 도착해서 몸이 좋지 않았는데 물속에 들어가서 죽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저수지 물이 얕은 곳에서 찍었는데 몸이 자꾸 물에 뜨는 바람에 허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게 됐다. 모래주머니를 두르고 물밑에선 스킨스쿠버 한명이 날 붙잡고 있는 식으로. 물에 빠진 다음 세번 허우적대다가 물속으로 들어가서 속으로 천천히 열을 세고 나오기로 약속했는데 몸이 피곤해서 그랬는지 금방 숨이 차올랐다. 간신히 속으로 10초를 세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스킨스쿠버가 허리를 잡은 채 놓지를 않았다. 급한 마음에 그 친구를 발로 찼는데 발로 차고 나오려고 하는 순간 발밑에 디디고 있던 땅이 사라졌다는 걸 알았다. 아차 싶더라. 단 몇 cm 차이로 저수지의 얕은 지역을 벗어난 것이었다. 허리에 모래주머니를 찬 상태라 수영을 해도 물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면서 밖을 쳐다보니 감독과 스탭이 모두 웃으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내가 연기를 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저렇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싶더라. 자존심은 있어서 그래도 “살려달라”는 말은 안 나왔다. 겨우 나온 소리가 “씨발”이라는 한마디였다. 그제야 사람들이 튜브를 던졌고 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뒤론 물이 너무 무섭다. 죽음이 정말 눈앞에 보이는 걸 경험한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조민환 / 나비픽처스 대표 <무사> 촬영 끝나자마자 스탭들이 와락 끌어안을 때 “스탭들이 우릴 가만 안 두겠지?” <무사>의 마지막 촬영이 있었던 2000년 12월22일 중국 싱청(興城), 지프를 몰아 촬영장으로 가는 길에 김성수 감독에게 말을 건넸다. 장장 5개월 동안 중국 대륙을 누벼가며 그토록 고생을 시켰으니 ‘해방의 날’을 맞은 스탭들이 감독과 프로듀서에게 앙갚음을 하리라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촬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악에 받친 스탭들이 공공연히 ‘촬영 쫑날’을 벼르고 있다는 소문 또한 익히 듣고 있었던 터였다. “아, 뭐 각오해야지. 야, 차라리 얻어맞고 병원에 누워 있는 게 편하기도 해.”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는 김성수 감독에게 나는 말했다. “형, 난 다 좋은데, 만약 바닷물에 빠뜨리면 어떡하지?” 사실, 이 경사스런 날 스탭들에게 고초를 당한들 어떠하리, 하는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한겨울의 차가운 바닷속에 몸을 담근다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해보려는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래 어차피 맞을 매, 할 수 없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각오로 촬영장을 찾은 나는 싱청 토성 앞 이름 모를 이의 무덤 5구와 지신과 천신, 4방위신 등에게 정성들여 제례를 올렸다. 여기에 와서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큰 사고없이 무사히 촬영을 마치게 된 데는 분명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힘의 도움이 있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11월이면 눈이 쏟아진다는 이곳에 그때까지 눈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만약 눈이 내리게 되면 촬영이 무기한 연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은 낮신밖에 없었기 때문에 촬영은 곧 끝날 분위기였고, 우리에 대한 ‘처단’의 순간 또한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기껏 각오를 했건만, 사람의 마음이 간사해서 그런지 점점 맞고 싶지도 않고 물에 빠지고 싶지도 않다는 본능이 울컥 솟아오르고 있었다. 자포자기의 심정과 도망칠 구석을 찾는 마음이 교차하는 순간,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정우성이 전날 찍은 장면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며 다시 찍어야겠다고 자처한 것이다. ‘야호!’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밤장면 촬영을 독려했다. 밤이 되면 최소한 어두운 바닷물에는 안 빠지는 거니까. 결국 여차저차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고 이제 우린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서울행 비행기에 탈 수는 있을까, 아님 중국의 병원 입원실을 예약해야 하나,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기념촬영을 한단다. 경계를 풀지 않고 ‘찰칵’ 포즈를 취했다. 그때 스탭들이 나와 감독에게로 달려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우렁찬 함성과 함께 그들이 나를, 허리가 흐드러지게 끌어안았다. 스탭들은 나에 대한 사소한 감정보다 이 어마어마한 작업을 끝냈다는, 그것도 우리 힘으로 돌파했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 눈에선 하염없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다음날 싱청을 떠나는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서울에 도착한 뒤 중국 스탭들에게 전화를 하니 폭설이 세트장을 하얗게 뒤덮었단다. 하늘이 우리를 위해 하루를 기다려준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1]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2]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3]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감독 봉만대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영화사 기획시대는 충격적인 전단을 뿌렸다. 영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홍보하는 그 전단에는 <맛있는 섹스…>의 감독 봉만대가 나뭇잎 한장으로 가장 중요한 부위만을 가리고선 유혹하는 듯한 나체로 서 있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게 무슨 해괴한 짓거리인가, 탄식할 만도 하지만 봉만대 감독은 “다 벗은 것도 아니고, 잎사귀로 가렸는데, 그런 사진이 이슈가 되는 세상이 우습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 처음 던진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이 튀어나온, 조금은 날카로운 반응이었다. 그러나 민감하게 날을 세우는 듯한 그 마음을 내칠 수만은 없었다. 그의 말대로, 봉만대는 너무 자주 소문을 탔던 이름이다. 그는 영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에로비디오 감독 출신이라는 이유로 언론에 오르내렸고, 영화 촬영 도중에는 온갖 낮뜨거운 에피소드로 화제가 됐으며, 촬영이 끝난 뒤에는 영화 제목에 ‘섹스’라는 단어를 썼다고 시달렸다. 어느 때보다도 곡절 많았던 1년을 보냈지만, 봉만대 감독은 아직 의연하다. “배우들과 함께 호흡하고 싶고, 재미있어서 벗었다”는 그는 에로영화를 만들고 있는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다. 촬영기간만큼이나 길게 자랐던 머리카락을 짧게 쳐내고 나타난 그는 홀가분하게 영화를 털어버리는 대신 여전히 진행 중인 고민, 섹스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에 빠져 있었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은 당신이 만든 첫 번째 극장용 장편영화다. 이전과는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다. 비디오는 만들면 끝이었는데, 이번엔 책임질 게 많다. 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 영화를 보고 판단하고 평가한다. 낯설다. 영화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 영화가 비디오 열다섯편 다음에 만드는 열여섯번째 영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영화를 몰랐던 거다. 혼자서 마스터베이션하다가 갑자기 여러 사람과 함께 마스터베이션하는 기분이랄까. 나쁜 평을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건 괜찮다. 나쁜 이야기를 들으면 코너에 몰리는 기분이 들고, 그럴수록 내가 가진 것 이상을 끄집어낼 수 있을 테니까. 언론이나 평단의 반응은 엇갈리는 편이다. 관객은 어떤가. 성(性)이나 연령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이 영화를 받아들일 텐데. 나를 지지하는 카페 회원들하고 함께 영화를 봤는데, 20대 중반 이상 여성관객이 가장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지난한 사랑을 겪어본 사람들이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남아 있는 어린 관객은 멜로영화를 좋아할 거고. 영화가 개봉한 주말엔 극장에 무대인사도 나갔는데, 토요일 낮인데도 여성이 많았다. 차마 “<맛있는 섹스…> 주세요”라고 말 못하고, “맛있는… 그거 주세요” “2관이요” 그러더라. 심지어 “자기야” 그러면서 남자친구 부르는 사람도 있고. (웃음) 농담처럼 “벌건 대낮부터 이런 영화 보세요. 영화 보고 나면 뭐 하시려고”라고 인사했지만, 이젠 여자들도 당당하게 섹스영화를 본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 내 모토가 그거 아닌가. 남자랑 여자랑 손잡고 볼 수 있는 에로영화를 만들겠다는 거. (웃음) 반대로 생각하면 남성에겐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실제로 <맛있는 섹스…>가 기대보다 야하지 않다거나 에로영화의 상상력을 넓히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나도 남자니까, 남자들이 뭘 원하는지 안다. 봉만대가 에로비디오를 만들었다니, 에로비디오보다 더 심한 영화나 화면 사이즈만 커진 에로비디오를 보고 싶어했을 거다. 안 좋은 기억을 잊으려고 했는데,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일깨우는 이 영화가 불쾌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힌 존재라 여자들보다 훨씬 현실도피적이니까. 하지만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남자들끼리 둘러앉아 보는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맛있는 섹스…>가 두고두고 떠오르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연애할 때나 헤어질 때, 원 나잇 스탠드를 할 때 한번쯤 생각나는 그런 영화. 그래서 <맛있는 섹스…>가 한번에 확 타오르기보다 조금씩 관객이 들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제작자가 들으면 열받겠지만. (웃음) 제작사와 충돌는 없었나. 당신이 만든 에로비디오를 보고 기대한 부분이 있었을 텐데. <이천년> <아파바>처럼 드라마가 있고 노골적인 섹스도 있는 영화를 바랐던 것 같다. 만약 그때 나를 충무로에 데려왔다면, 나도 그런 영화를 찍었을 거고. 하지만 그 영화들은 내 초기작이다. 나는 변했다. 10대 때 알았던 성과 20대, 30대에 이르러 알게 된 성이 다른 것처럼. 50, 60이 되면 나는 또 다른 섹스를 찍고 있을 거다. 섹스에 관해서라면, 나는 100명과 맞붙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 프로듀서도 아트하지 말라고 해서 많이 싸웠지만, 도대체 아트는 뭐고 상업영화는 뭔가. 다만 기획시대의 유인택 대표는 제작자라기보다 기획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잘 모르는 내게 도움되는 충고를 많이 해줬다. <맛있는 섹스…>는 섹스를 위해 드라마를 깔아놓기만 하는 대신 드라마와 섹스가 맞물렸던 봉만대의 전작과는 많이 다른 영화다. 한 여자 신아가 있다. 막 애인과 헤어진 그녀는 하룻밤을 함께했던 남자 동기에게서 전화를 받는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나 사랑하고 동거하고 이별한다. 이것이 전부다. 범죄로 내몰린 청춘들의 사연을 재구성한 <이천년>이나 가난한 젊은이들의 짓눌린 꿈을 아파하는 <아파바>, 범죄영화의 형식과 결합한 <모모>처럼 섹스와 드라마가 함께 심한 굴곡을 오르내리지 않는다. 키스하는 입술의 마찰음이나 젖은 성기가 부딪히는 질척한 소리가 그대로 들린다고는 해도, 관음의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니다. 담담한, 그러면서도 필연적인 일상. 누군가 농담과 진담을 섞어 “에로판 <봄날은 간다>”라는 별명을 붙였을 만큼, <맛있는 섹스…>는 봉만대의 에로영화를 기대한 관객에겐 배신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러나 봉만대는 어쩔 수 없다는 태도다. 영화과의 수업이나 충무로의 실무를 거쳐보지 않은 그는 그 자신만의 방법으로 영화를 바라본다. <맛있는 섹스…>는 드라마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단조롭다. 시나리오를 여러 차례 수정했지만, 그 점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섹스도 드라마다. 섹스가 그저 헐떡거리거나 뒹굴어다니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뭔가 이야기를 한다면, 그게 드라마 아닌가. <리쎌 웨폰>을 보면 멜 깁슨이 전부 벗고 어떤 여자와 자는데, 영화는 거기에서 멈추고 다시 액션으로 넘어간다. 그 영화는 형사가 어떻게 범죄자를 잡는지 보여주는 게 중요한 목적이니까. 결국 뭘 보여주려 하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점도 있다. 한 영화에서 폭력이 전부가 될 수 없고, 섹스가 전부가 될 수 없듯, 이야기도 전부가 될 수 없다. 멜로영화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동기가 신아에게 오럴섹스를 해달라고 할 때, 둘이 나란히 앉아 왜 지금 오럴을 할 수 없는지 이야기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로영화는 몸으로 말하는 거다. 생각해보자.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사건이 있다면 어느 한 사람의 마음이 변한다는 건데, 마음이 변하려면 상대방이 싫어져야 한다. 그리고 상대가 싫어진다는 것은 몸으로 느끼는 거다. 그런데도 굳이 한 가지 방식의 드라마만 고집해야 하나. 하지만 영화 중간중간 ‘니꺼 귀여워. 내꺼랑 사이좋게 지내서’, ‘성기로 사과하기. 사정으로 위로받기’ 같은 자막이 끼어들어 영화를 직접 설명하기도 한다. 감독이 참 할말이 많았다는 느낌을 주는데. 맞다. 감독은 강박관념이 없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 관계, 헤어짐을 디테일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는데 90분 안에 모두 담기는 힘이 들었다. 그래서 단락을 지어보는 게 어떨까 싶었다. <맛있는 섹스…>는 이야기가 너무 산만하고 대사도 없으니까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감추기만 하면 관객이 영화를 보고 나서 바보가 됐다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뭔가 있긴 한데, 나만 이해하지 못했다는. 상영시간을 늘릴 수도 있었지만, 영화를 처음 본 사람이 그러더라. 너무 길다, 우리 일상도 느슨한데, 영화까지 그래야 할 필요가 뭐 있느냐.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를 너무 몰라서 저지른 실수였다. 비디오를 만들던 때는 시나리오대로 연기가 안 나오면 고치고 그때그때 편집하고 그랬었는데, 상업영화는 시나리오대로 찍어야 하는 것 같다. 제작비가 부족해서 촬영이 중단되기도 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고 들었다. 상업영화 제작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도 고충의 하나였을 것 같다. 촬영이 중단됐을 때는 화가 먼저 났다. 하지만 시나리오도 고치고 촬영한 필름을 보면서 부족한 점을 찾다보니까 오히려 초심으로 돌아가 많은 도움이 됐다. 전에 에로비디오 만들면서 친구들과 ‘진정한 에로영화란 무엇인가’ 고민하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어했는데, 잊고 있었던 거다. 그 아끼던 친구들이 곁에 없어서 많이 외롭고 힘이 들었다. 기껏해야 4, 5일 만에 영화를 완성하다가 몇 개월씩 촬영을 하는데, 감독만 혼자 여관방에 가두어두는 거다! 너무 외로워서 포스트잇에다가 사람한테 하고 싶은 말을 끼적이기도 하고(웃음), 연출부, 촬영부 막내들하고 배우들을 불러다가 촬영 전에 회의도 했다. 한명씩 한명씩 회의 나오는 사람이 줄어들더니 나중엔 아예 아무도 안 나왔다. (웃음) 감독은 작품하고만 씨름해야 한다지만,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주위를 다독이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엔 무조건 잔인해지자 했는데, 잔인함도 나중엔 많이 걷어냈다. <맛있는 섹스…> 촬영과 조명감독은 모두 광고하던 시절 만났던 친구들이다. 촬영이 중단되고 제작기간이 길어지면서, 촬영감독 최선묵은 다음 계약 때문에 현장을 떠나야 했다. 그에게 돌아올 때까지 자리 비워놓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다. 최선묵이 빠진 부분은 내가 직접 찍었다. 워낙 6mm카메라를 직접 들고 찍었었으니까. 그런데 필름카메라는 너무 무겁더라.(웃음) 찍으면서 내가 뭐하고 있나, 6mm를 찍을 때 자유롭던 내가 한번에 돌릴 수 있는 필름 400자라는 한계에 갇혀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이 들어서 카메라를 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다. 촬영이 끝나갈 무렵 친구들이 떠나서 마치 눈과 귀가 없어진 것 같았다. 배우들과 의견을 맞추는 과정도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특히 여배우인 김서형은 이 영화 때문에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김서형과 김성수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 배우 모두 적극적이고 용감했는데.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하도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 순간 섹스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그리고 그뒤엔 배우들이 감독의 섹스관을 이해하는 과정만 남아 있었다. 서로 진심을 털어놓은 마당에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서형은 에로배우처럼 생기지 않은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강해 보이고 도발적이었다. 여러 번 만나다 보니 그것말고도 여러 가지 얼굴이 있어서 신아에게 그런 점을 녹여냈다. 김서형이 신아를 만든 거다. 김성수는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한번 더 보자고 했는데, 그땐 오히려 기억에 안 남는 그 얼굴이 굉장히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게도 베드신을 원신 원컷으로 찍는 바람에 침대에서 한바탕 뒹굴고 나면 김성수 몸에 한 보디메이크업이 몽땅 지워졌다. 예쁘게 못 찍어줘서 지금도 미안하다. 처음 시나리오보단 완성된 영화가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동기와 신아가 오럴섹스와 애널섹스를 두고 다투는 장면이나 공중화장실에서 섹스하는 문제를 두고 싸우는 부분은 공감할 만하다. 경험인가. 나는 뜨거운 사랑도 해봤고 밋밋한 사랑도 해봤다. 여자를 잘 안다고 자부할 순 없지만, 그런 것 같다. 남자는 섹스, 여자는 사랑. 또 남자들은 성기만 가져도 될 것을 전체를 가지려 한다. 만약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무인도에서 평생을 보낸다면, 남자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십년이 지나서 남자가 바로 옆마을에 여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치자. 남자는 땅을 치고 통곡할 거다. 남자란 그런 존재다. 그리고 그런 남자들 때문에 여자들은 맛있는 섹스를 하고 맛없는 사랑을 한다. 정말 솔직한 사랑이란 뭘까. 나는 잠시 잠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남자들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 한다는 환상을 일깨우기 때문에 쓸쓸하고, 여자들에겐 사랑의 판타지를 부수기 때문에 슬프다. 나는 어떠냐고? 지금 동거하고 있는 여자친구와는 뜨거운 사랑은 하지 말자고 약속했다. 절제하자고. 그래서 미지근하지만 생명력이 길다. 몇년을 만나고서도 마주앉아 있으면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 그런 느낌을 아는가. 광고일을 한 적도 있고, 충무로에서 조감독을 한 적도 있다. 이젠 다른 영화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건방지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서 에로영화를 만든다. 요즘은 잔혹한 영화나 포복절도하는 코미디영화가 대부분이다. 슬픈 시절인데 왜 그런 영화만 보고 살아야 하나. 난 아직도 에로티시즘이 뭔지, 섹스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내가 만드는 영화는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아니라 보고 싶은 영화다. 나는 로베르토 베니니의 <인생은 아름다워>를 참 좋아한다. 슬픈 코미디다. 인생은 어차피 슬픈 거다. 사람들은 슬픔을 덜어내려 애쓰지만, 아직 준비도 안 돼 있는데 슬픔이 찾아오기 때문에, 더욱 슬프다. 그래서 내 영화는 항상 비극이다. 하지만 한 사람과 파트너로 함께하면서 성에 대한 느낌과 경험을 쌓아가면 계속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보고 결정하시라니깐요

가랑비에 옷 젖는다. ‘충무로 돈가뭄’이라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가운데 8월14일 개봉을 앞두고 있는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의 제작사 명필름이 ‘70% 원금 보장’을 내세운 인터넷펀드 모집에 나섰다. 이미 99년 영화사에서 직접 <해피엔드>의 인터넷펀드를 모집하여 45%의 수익률을 올린 바 있는 명필름의 이번 인터넷펀드 모집은 제작단계에서 투자를 받던 기존 사례들과 달리 투자 전에 완성된 영화를 직접 보고 투자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존 인터넷펀드와 다르다. <둘 하나 섹스> 등 몇몇 독립영화의 경우, 시사회를 통해 투자자를 모집한 전례가 있지만 명필름 같은 메이저제작사가 이런 식으로 제작비를 모은 경우는 없었다. 상업영화에서 기존 투자 시스템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내놓은 새로운 시도로서 주목할 만한 일이다. 계좌당 100만원씩 총 5억원을 모집하는 영화 <바람난 가족> 인터넷펀드는 투자손실을 투자자가 모두 감수해야 했던 기존 인터넷펀드와 달리 원금 회수율이 70% 미만일 경우 투자자에게 원금의 70%를 돌려주는 원금보장성 펀드. 또한 기존 인터넷펀드는 추가비용 상승에 따라 투자자의 수익률이 영향을 받지만 <바람난 가족> 인터넷펀드는 28억원의 제작비에 따른 전국 관객 수 90만명을 손익분기점으로 산정하여 수익을 배분함으로써 추가비용 상승에 따른 투자자 리스크를 감소할 예정이라고. 명필름은 오는 7월25일부터 진행될 <바람난 가족> 인터넷펀드 모집을 위해 7월22일부터 24일까지 3일에 걸쳐 총 3회의 펀드시사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7월14일부터 명필름 홈페이지(http://www.myungfilm.com), 팍스넷(http://www.paxnet.co.kr), 머니투데이(http://www.moneytoday.co.kr)를 통해 참여신청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