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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베일 대신 수영복을!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의 성적 금기가 허물어지나? 이집트에서 키스장면과 솔직한 성적 토론을 담은 자국영화가 큰 인기를 얻는가 하면, 베일이 아닌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가 등장하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제작돼 방영될 예정이다. 하니 할리파 감독의 데뷔작 <사하르 알라얄리>(한밤의 외출)는 네쌍의 중상층 부부가 겪는 갈등과 그 해소과정을 대담하게 다룬 영화로 관객이 크게 몰리고 있다고 가 보도했다. 남편에게서 성적 만족을 얻지 못하는 여성이 이혼을 원하거나 남편이 정부와 바람피우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싸움이 일어나는 등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최근 몇년 동안 이집트영화에서 섹스에 대한 어떤 언급이나 키스장면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에 비하면 대단한 변화다. 이집트의 영화평론가 올라 샤펠은 “이혼하려던 부인이 결심을 포기하고 또 다른 여성은 간통한 남편을 용서하는 등 결론이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이집트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문제를 대담하게 다뤘다”고 말했다. 살림이라는 30대 남자 관객은 “내 세대의 문제에 대해 말하는 영화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집트는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베일을 쓰고 다닌다. 그러나 이집트판 <배이워치>를 준비 중인 텔레비전 프로듀서 요세프 맨수르는 수영복을 입고 연기할 배우를 캐스팅 중이다. 그는 “드라마에는 어떤 섹스장면도 없다. 다만 부드러운 키스와 사랑에 빠진 인물들이 등장할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모든 `기대`를 한몸에,<원더풀 데이즈>

■ Story AD 2142년 에너지 전쟁으로 파괴된 지구의 마지막 생존자들이 건설한 유일한 청정도시 ‘에코반’의 심장부에 칩입자가 들어온다. 푸른 하늘을 보여주겠다는 어린 시절 첫사랑의 약속을 간직한 경비대원 제이는 침입자가 바로 실종되었던 자신의 첫사랑 수하임을 알게 되고 혼란스러워한다. 한편 제이를 사랑하는 경비대장 시몬도 이 사실을 알고 수하를 제거하려고 한다. ■ Review 126억원의 제작비와 7년간의 제작기간, 그리고 무수한 입소문, <쉬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한국영화를 기사회생시켰듯 한국 애니메이션에서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산업적 기대 등 엄청난 부담감이 87분밖에 안 되는 이 짧은 작품에 얹혀져 있다. <원더풀 데이즈>는 좀 온당치 못하게도 결국 그 ‘기대’에 얼마나 부응했느냐 못했느냐로 감상되고 평가될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그 사실을 갈수록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감독과 300여명에 이른다는 스탭들에겐 가혹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일단 인정하고 시작해야겠다. 기술적으로 <원더풀 데이즈>는 놀랍다. 인물은 2D 셀애니메이션으로 액션이나 메커닉은 3D CG로, 배경 등은 미니어처 실사로 해서 죄다 이어붙인 이 터무니없어 보이는 시도는 경이로운 볼거리이다. 국화꽃으로 확 피어나는 타이틀 앞으로 2142년 지구의 황량한 풍경을 주인공 제이가 오토바이로 통과해 나가는 장면에서부터 이미 <원더풀 데이즈>는 선구자에게 주어진 기술적인 방면의 도전을 거의 성공리에 완수했다는 것을 과시한다. 하나의 사소한 조악함으로도 모든 것이 폄훼될지 모른다는 이들의 완벽주의적 우려는 심지어 잠깐 삽입된 춤 장면의 안무를 위해 기어코 엔딩 크레딧에 안은미의 이름까지 올려놓고 만다. 하지만 아쉽다. 프라하까지 날아가 녹음했다는 원일의 음악과 어우러지는 이 거창한 비주얼에 경탄하면 할 수록 그 느낌은 더해진다. 드라마가 약하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영화를 미장센의 집합’이라고 생각하는 김문생 감독에게 드라마보다 중요한 것이 이미지라는 것은 당연하고 그 이미지의 창조는 확실히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 그것은 원화가 연이어 수정되면서 ‘때깔’은 좋아졌으나 성형미인처럼 맨송맨송해진 캐릭터들 때문일 수도 있고 주연급 성우들의 판에 박힌 목소리 연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2142년의 그 아마득한 미래의 세계를 관객에게 납득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저 ‘오래된 미래’의 세세한 정치사회적 맥락을 오시이 마모루처럼 브리핑하지도 않고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서 경험하며 배우게 하지도 않는다. 견고한 비주얼과 사운드로 관객의 뇌리 속에서 직접 그 세계를 열어젖히려고 한다. ‘영 어덜트’(young adult)를 타깃으로 한다는 말도 비교적 이미지로 인식하는 데 익숙한 세대를 염두에 둔다는 점에서 마찬가지의 뜻이다. 따라서 <원더풀 데이즈>가 많은 성공적인 전범들 속에 있는 이미지들을 세심하게 녹여내는 것은 당연하다. 시실섬이라는 단일 공간에 부유하고 선택받은 계층의 유토피아인 ‘에코반’과 이곳에 진입하지 못한 가난한 이들이 지배와 착취를 받으며 버텨가는 디스토피아 ‘마르’라는 양축을 대조시켜놓고 묵시록적인 이미지를 풍길 때는 오시이 마모루가, 파괴된 생태계의 지옥도와 푸른 하늘의 대조적 이미지를 끌어낼 때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로테스크한 인물들이 넘치는 마르 지역에서의 액션에서는 피터 정이, 수하와 제이가 스테인드글라스 앞에서 대치할 때, <카우보이 비밥>이 떠오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의도했든 아니든, 그 이미지들이야말로 대중적으로 검증된 <원더풀 데이즈>가 당연히 참고했을 이미지들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 이미지들을 성공적으로 때로는 더 월등하게 재현한다. 다만 이 검증된 이질적 잡탕밥들을 2D와 3D, 미니어처의 방식들을 결합할 때처럼 잘 버무리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 매끄럽지 않은 이음새 탓에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만큼만 보게 되고 보이지 않는 부분은 보지 못한다. 그 매끄럽지 않은 이음새 중의 하나가 바로 대사다. 이미지를 중시하고 설명이나 대사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말은 대사가 어떻든 상관없다는 말은 아니다. 대사가 이미지에 봉사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물들이 서로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대화들을 주고받으면서 빛과 공간감으로 풍성한 <원더풀 데이즈>의 완벽한 비주얼의 세계는 갑자기 살아 있는(animate) 것 같지 않게 된다. 그래도 <원더풀 데이즈>의 비주얼은 성급하게 달려가는 클라이맥스의 민망함을 덮을 만큼 압도적인 잠깐 동안의 희망을 보여준다. 마지막 실사로 촬영된 푸른 하늘이 CG의 힘을 입어 활짝 열리는 장관(壯觀)이 그것인데, <원더풀 데이즈>가 한국 애니메이션에 그런 ‘푸른 하늘’을 열어주리라는 약속을 잠시나마 지킬 수 있을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 같다. :: <원더풀 데이즈>에 나오는 공간오염지구 마르는 청계천 모델 약 140년 뒤의 미래, 지구상 마지막 피난처 시실섬은 시실(時失)이라는 말 그대로 시간을 잃어버린 곳이다. 섬의 이름은 지도에서만 잠깐 보이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데 모델은 1940년대 핵실험 기지로 사용되었던 남태평양 마셜제도의 비키니섬이다. 늘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고 수하가 믿었던 이상향 ‘지브롤터’도 실은 이 섬이다. 이 섬 안의 각 지역을 디자인하는 데 있어서 제작팀들에게 영감을 준 것들은 대개 주변의 것들이다. 제이가 비를 맞으며 마르에서 에코반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귀환하는 인상적인 장면에 나오는 황량한 길은 몇번의 터널들의 반복에서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곤 하는데 이유는 양수리에서 팔당으로 넘어오는 6번 국도의 변형이라서다. 김문생 감독이 실제로 양수리 종합촬영소에서 서울로 올라오다가 영감을 얻었다. 에너지 전쟁에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에코반으로의 진입이 거부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염지구 마르(Marr)의 디스토피아적 공간은 브라질 출신 사진작가인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n Salgado)의 사진들에서 가져온 이미지들이지만 최근 공사가 시작된 청계천을 모델로 했다. 오염물질을 먹고 그 에너지원으로 움직이는 인공지능의 유기체 식물도시 에코반은 ‘Eco+Urban’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원래 오염된 지구를 정화하려는 시스템인데 <바람의 계곡의 나우시카>에 나오는 부해처럼 오염물질을 흡수하고 환경을 복원하면 소멸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특권층이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오염물질을 주변에 만들면서 그 명맥을 이어간다. 그 핵심에 있는 델로스 타워의 연꽃 컨셉은 서울 삼성동의 봉은사 연등축제 때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선지 수하가 델로스 타워에 침투해서 주요 정보를 빼내려고 할 때 친 패스워드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를 풀어쓰기 한 문장이다.

세 얼굴을 가진 사나이,<청풍명월>로 돌아온 조재현

프 롤 로 그 조재현이라는 이름이 뿜어내는 향기는 독특하다. 피와 땀이 범벅된 듯한 이 야성의 살내음은 조재현을 다른 배우들과 구별하게 하는 징표다. <악어>부터 <나쁜 남자>까지 김기덕 감독 영화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내 안에 부는 바람>(내 안에 우는 바람???) 등 저예산 작가영화에서 진동했던 그의 냄새는 TV드라마 속의 상반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쇄되지 않는다. <청풍명월>에서 풍기는 향기 또한 영락없이 그의 것인 듯 느껴진다. 인조반정이라는 역사의 급류 속에서 우정과 대의, 그리고 자존을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규엽 또한 거친 향을 발산한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부터 나름의 사연이 있고 굴곡이 많은 규엽쪽이 인간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기꺼이 선택은 했지만 처음 접하는 정통 무협 액션영화이다 보니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 3개월간 승마와 검술을 익히고 체력 특훈도 했건만, 그늘도 없는 뙤약볕 아래서 20kg이 넘는 갑옷을 걸치고 10kg짜리 칼을 휘두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양수리촬영소 운당의 아찔한 기와지붕을 뛰어다니는 일이나 칼싸움 과정에서 손이 해질 정도로 부상을 입은 것, 수일 동안 벌어진 수중촬영 또한 만만치 않았다. 워낙 스케일도 크고 액션장면에 공을 들이다보니 “한신을 찍는 데 평균 3∼4일 정도, 어떤 경우는 10일 정도” 걸렸고, 60억원에 달하는 순제작비를 조달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 촬영이 중단된 적도 여러 차례였다. 하지만 조재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체력의 한계나 늘어지는 촬영기간이 아니었다. “돈없이 몸으로 때우는 일은 계속 해왔던 것이고, 더위야 참으면 되니 견디려면 견딜 수 있지만 가장 큰 걱정은 촬영이 자주 중단되다보니 감정의 흐름이 잘 이어질까 하는 것이었다.” 액션에서도 그는 감정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칼의 움직임 자체보다는 정서의 흐름을 담아 칼 놀림을 하는 게 중요했다.” 그는 액션장면마다 나름의 컨셉을 부여하고 이를 철저히 연구했다. ‘잔인함’으로 컨셉을 설정했던 첫 장면의 검술 액션이 생동하는 것은 감정과 동작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청풍명월> 속 조재현의 느낌은 이전의 그것과 미묘하게 다르다. 강렬한 야성이 느껴진다는 데선 매한가지지만, 이전보다 세련되고 화려해진 것 같다. 향수 몇 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그 차이는 이 영화가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초대형 상업영화라는 점에서 생긴 게 아니다. 오히려 변화는 그 자신 안에서 일어난 것 같다. 7월13일 크랭크인하는 코미디 <목포는 항구다>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것 또한 그런 변화의 결과물로 보인다. <청풍명월>을 기점으로 이제껏 접할 수 없었던 세명의 ‘또 다른 조재현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상업적인 배우 조재현 나는 철저하게 상업적인 배우가 되고 싶다. 그동안 저예산영화에 출연하다보니 제작비가 많고 시간도 많이 들이는 영화에 대한 갈증이 생겼다. <청풍명월>에 출연한 것도 그런 차원이다. 옷을 바꿔 입고 싶었달까. 그동안 작업복을 입었다면, 지금은 맞춤옷, 명품옷을 입은 셈이다. 한국영화가 산업적 기반을 닦는 단계에 나 또한 영화를 상승시켜주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일단 그런 자리를 굳힌 다음에 다시 저예산영화도 넘나들고 싶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를 ‘김기덕의 페르소나’라고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렇게 굳어져 가는 것 같았다.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면도 있었다. 물론 김기덕 감독이 내게서 새로운 면을 뽑아내준다면 언제라도 기꺼이 함께 작업할 거지만. 자유로운 배우 조재현 나는 자유로운 배우가 되고 싶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 연극도 자유로이 넘나들 거다. 최근의 <눈사람>까지 내가 방송에 자주 나가는 이유는 단순하다. 드라마를 통해 대중에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중성을 얻었는데, 이젠 영화만 하겠다고 한다? 내게 이건 기회주의 같다. 또 내년에는 꼭 <에쿠스>로 연극무대에 오를 거다. 백상예술대상을 받게 한 연극이라는 의미보다는 나로 하여금 다시 배우의 길을 걷도록 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연기한 27살 때, 나는 레스토랑을 경영하면서 그냥 아저씨가 되어가고 있었다. 몸도 불어나고 얼굴, 그리고 정신도 무뎌지고 있었다. 그때 예리하고 솜털처럼 가벼운 정서의 17살 소년 앨런 역을 몸으로 표현하다보니 자연 얼굴, 몸, 정신에 날이 섰고, 자극이 됐다. 이제 내 나이 마흔을 바라본다. 더 늦기 전에 꼭 다시 해보고 싶다. 사실, 내가 자유로운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여러 분야를 넘나들겠다는 외형적인 차원만을 가리킨 건 아니다. 그보다는 실패와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무엇을 하든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가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는 거다. 그래서 배우의 길을 마감하는 순간, ‘저 배우가 걸어온 길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나 항상 도전하고 호기심 많아했던 배우였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 프로듀서 조재현 나는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배우는 내 머릿속의 것을 실현한다기보다는 주어진 시나리오를 선택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있다. 한번쯤은 내 것을 해보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제작이나 연출은 못하겠지만, 그동안의 배우 활동을 통해 프로듀서는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구상 중인 작품은 교통사고를 당해 실의에 빠진 남자와 여성음악치료사의 진실된 사랑을 그린 멜로영화다. 그러니까 ‘잘 나가던 남자가 모든 것을 다 잃고 결국 사랑 하나를 얻는다’는 거다. 내가 주연도 맡을 생각이다. 아마 내년 후반쯤 구체화될 거다. 에 필 로 그 세명의 조재현, 또는 기존의 그를 포함해 네명의 조재현은, 이제 고정관념을 작파하고 성큼성큼 새로운 영역을 향해 발걸음을 내뻗을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식으로 말하면, 그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다른 얼굴로 만나더라도 가끔씩 옅어지거나 더 짙어질지언정 특유의 원초적인 향기만큼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펄떡거리는 야성의 심장이 존재하는 한 말이다.

판오디콘,소음의 원형 고문실

얼마 전에 경주에 갈 일이 있었다. 그곳에는 불국사도 있고, 석굴암도 있고, 그 밖에 여러 유적이 도처에 널려 있어 도시 전체가 곧 박물관이다. 하지만 내가 이 도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고층빌딩이 없어서 도시에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것, 이게 경주의 매력이다. 하늘을 가리는 잿빛 고층빌딩 대신 조그만 가옥들 뒤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만들어내는 것은 여기저기 솟은 초록빛 고분군이다. 짧은 여정에 잠시 시간을 내어 천마총 공원에 갔다. 물론 발굴이 끝난 자리에 정교하게 만들어놓은 가짜 모델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천년의 세월 동안 이 도시의 풍경을 만들어온 고분들 사이로 조용히 산책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고분의 무거운 침묵을 바탕으로 하여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 스치는 소리. 거기서 나는 이런 것을 기대했다. 이 기대는 공원 입구서부터 무참히 짓밟힌다.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대신하여 나를 맞아준 것은 황당하게도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 둘러보니 바로 옆의 가로등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다. 더 끔찍한 것은 그 레퍼토리였다. 폴짝폴짝 발랄한 서양의 무도곡과 닐리리 늘어지는 중국풍 경음악. 이런 끔찍한 음악들이 졸지에 신라 고도의 분위기를 만드는 재료로 사용되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 머리에서 나온 발상일까? 입구서 잡친 기분은 천마총으로 이어진 산책길에서는 아예 분노로 변한다. 스피커에서 멀어져 그놈의 음악소리가 안 들릴 때쯤 되면 또다시 어디선가 그 소리가 들려온다. 디크레센도, 크레센도, 디크레센도, 크레센도. 그제야 입구만이 아니라 공원 전체의 가로등에 수많은 스피커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 끔찍한 음악은 이렇게 고분 공원 전체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주책을 부리고 있었다. 천마총 안에 들어가니 안내원이 서 있다. 알알이 맺힌 분노와 울분을 애꿎은 그에게 터뜨린다. 대답이 걸작이다. 사람마다 취향은 다른 게 아니냐, 관광객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틀어주는 음악이니, 그냥 ‘감수’하란다. 하긴 감수하지 않으면 어쩔 건가. 공원의 후미진 구석구석에까지 스피커가 달려 있으니. 도대체 어느 무식한 관료의 머리에서 나온 그 엽기적 망발의 씁쓸함을 왜 세금내는 우리가 달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모든 유적은 제 아우라를 품고 있다. 그 천년 고도(古都)의 그윽한 분위기를 기껏 기계 복제된 음향으로 무참히 깨야 할 필연적 이유가 있을까? 왜 국민의 혈세를 써서 기껏 제 나라 유적의 분위기를 훼손하는 걸까? 관광객을 보니 의문이 좀 풀리는 듯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 끔찍한 레퍼토리는 아마도 서양과 중국에서 온 관광객의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각별히 선곡됐나보다. 친절도 하셔라. 음악이 그치니 새로 방송극이 시작된다. 내용도 알차다. 주변 명소를 소개하겠단다. “‘계림’은 김알지가 탄생했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순간, ‘응애, 응애’ 하는 애 울음소리가 효과음으로 끼어든다. 분노가 지나치면 허탈해지는 법. 이 대목에서 참았던 분노가 실없는 웃음이 되어 ‘피식’ 새어나온다. 밖에 주변 명소 안내 게시판을 세우거나 안내서를 비치해놓으면 될 일. 왜 듣기 싫은 사람의 귀에 괴상한 방송극을 강요하는가? 미셸 푸코는 근대사회를 거대한 판옵티콘에 비유했다. 한 사람의 간수가 모든 감방의 죄수를 감시할 수 있는 원형감옥. 천마총을 돌면서 여기는 판옵티콘이 아니라 판오디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이 틀어주는 방송을 누구나 강제로 들어야만 하는 곳.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피해 도망갈 곳이 없는 완벽한 원형 고문실. 듣자 하니 이곳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심지어 조용한 산사로 올라가는 숲길에도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아예 대한민국 전체가 ‘판오디콘’인 모양이다. 이 나라에서 도대체 소음을 안 들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 비싼 돈 들여 기껏 제 나라 유적의 분위기나 파괴하는 무지와 몽매, 그 야만과 원시. 이게 대한민국 관료들의 문화적 마인드다. 이런 분위기에서 장관이 된 이창동씨는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손쉽게 성공한 장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문화유적지 돌아다니며 분위기 깨는 이 괴물 스피커만 철거하시라. 그것만으로도 문화적인 선조를 모신 이 야만적인 후손들의 교양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다. 제발 우리를 이 문화적 고문실에서 해방시켜 주시라. 진중권/ 문화평론가

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2]

저 깜찍한 얼굴 속에 누가 들어있는 걸까. 사람인데 사람이 아니예요_둘리와 공실이 세탁소에 갔던 둘리와 공실이가 개막식 전날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개막식 때는 게스트들을 맞이하는 호스트 중 일원으로, 패밀리 섹션 상영기간 동안에는 행사장 내외곽을 돌며 어린이들의 상상을 넓혀줄 친구로, 둘리와 공실이는 여러모로 이번 영화제의 일꾼이다. 그런데 이 둘리와 공실이에게는 몇 가지 철칙과 어려움이 있다. 그러니까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 안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해야 한다. 홍보팀 윤동희씨의 진땀나는 경험담 몇 가지. 둘리 인형과 함께 인근 거리홍보에 나섰을 때 등 지퍼가 열린 걸 본 아이들. “저거 사람이죠?” 놀란 윤동희씨. “아니야~, 사람 아니야.” 또는 “안녕!”이라고 예쁜 목소리로 인사해야 하기 때문에 공실이(둘리의 여자친구) 안에는 여자요원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 부천영화제 팀원들의 운동회 때 잠시 출연했던 공실이, 그 인형을 입고 있던 남학생은 짜증난 나머지 달려드는 아이들에게 굵은 목소리로 “저리 가, 저리 안 가”라고 협박해 아이들의 마음에 상처를 줬다고 한다. 그래서 영화제 기간 동안에는 자원활동가 중 마음 넉넉하고 “율동이 좋은 남녀 친구들”이 둘리와 공실이 인형을 쓰게 될 공산이 크다. “이거 앞뒤 없어요?” “둘리는 손가락이 네개라 잘 넣어야 하는데….” 비록 처음에는 좀 헷갈렸지만, 이날 즉석에서 둘리 인형을 써본 윤강로씨는 “대단한 율동”이라는 칭찬을 받으며 사무국을 잠시 유치원으로 만들어버렸다. 이해광 팀장과 오승환씨의 “야, 동물은 나가!” “더운데 뚜껑 벗고 담배나 한대 펴라”라는 무시에도 불구하고 “예쁜 짓! 귀여운 짓!”이라는 대다수 여성스탭들의 요구에 매력만점의 율동을 선보인 둘리/윤강로. 혹시 지금 어디선가 둘리와 공실이를 만난다면 그 안에서 땀흘리는 자원활동가의 노동을 순진한 동화로 아름답게 바꾸어 아이들에게 설명해주시기를. 프로그램 교체로 정신없던 김홍준 집행위원장. 그래도 인터뷰할 때는 힘있게. 박윤교 감독님, 내년에 만나요 “집에 가봤자 잠도 안 와요. 내일부터 게스트들이 들어오고. 이제 진짜 시작이거든요.” 오랫동안 영화제 야전사령관직을 수행하고 있는 김홍준 집행위원장도 슬슬 ‘긴장 모드’로 돌입하는 것 같다. 아침 일찍 모 케이블TV의 한 프로그램과 영어 인터뷰를 해야 하는 일정에도 불구하고 김 위원장은 차디찬 김밥을 뜨거운 라면 국물로 중화하면서 기꺼이 새벽을 맞이할 태세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거 다 올릴 수 있겠지?” “얼마나 되는데요?” “A4 2장.” “당연히 안 되죠.” 이해광 팀장은 올해 한국영화걸작 회고전으로 1980년대 박윤교 감독이 만든 공포영화 4편을 선정했지만 결국 무산된 것에 대해 김홍준 집행위원장이 직접 쓴 장문의 사과문을 보고서 투덜거린다. “뭐 이렇게 할말이 많으시냐”는 눈치지만, 그의 빠른 손놀림은 이미 김 위원장의 마음을 헤아린 지 오래다. “머피의 법칙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죠.” 김 위원장은 이번에 상영하기로 한 작품 중 <춘색호곡>을 제외한 나머지 3작품이 프린트 수급에 차질이 있었다고 털어놓는다. “영화제에서 이전 한국영화 상영이 불가능한 경우는 판권자가 해외에 있어 연락이 어렵거나, 판권을 주장하는 이가 여럿이거나, 판권자가 출품을 거부하는 이 3가지인데, 3작품이 이들 경우에 모두 하나씩 들어맞게 된 거죠.” 혹시 해서 대체할 작품을 찾기 위해 매일 한국영상자료원에 출근하다시피한 김 위원장은 “걸작 회고전의 경우,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것이 발굴이고, 기록인데…”라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상영 취소로 인해 관객이 항의하면 달게 받아야죠. 그래야만 내년에 다시 추진할 힘이 생기거든요.” “웰컴! 웰컴!” 손님맞이도 초청팀의 빼놓을 수 없는 일정이다. 모기의 위협, 카레의 압박 주로 밤에 출근하여 모기와의 싸움에 가장 많이 시달리는 집단, 그래서 잠이 모자란 사람들의 집단, 초청팀. 심사위원 얀 할란을 맞이하러 갈 계획이던 초청팀 김성해씨는 게스트의 숙소 예약과 거주 중 예산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메이필드호텔로 동선을 재조정했고, 공항에는 김홍준 집행위원장과 수행 자활만 가게 됐다. 이날의 입국 게스트 순서는 같은 비행기로 도착하는 얀 할란 부부와 피에르 뤼시앵, 다음이 고드프리 레지오, 그리고 극적으로 게스트 초청을 받아들였던 정패패. 게스트들의 초청과정이 척척 계획대로 진행만 되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정민아 팀장, (문서를 해외 초청 팀원에게 보여주며) “이걸 뭄바이로 보내면 되는 거야? 공문은 한글로 쓰면 되는 거지?” 올해 정 팀장을 비롯한 초청팀을 가장 괴롭힌 이들은 바로 인도 배우들. 참석여부를 알려온 것이 영화제 시작 1주일 전. 인도 사람들 성향이 짠돌이, 짠순이라(여기에 집요하기까지 하다. 인도 사람들의 경우, 미국에 있을 당시 반짝이 하나라도 떨어지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세탁소에서도 기피하는 국적 1호였다는 것이 정 팀장의 말) 참석하겠다는 뜻을 밝혀온 이후에도 비자 수수료를 면제해달라, 대사관쪽에 연락을 해달라는 등 각종 민원을 요구해 가뜩이나 바쁜 초청팀을 괴롭혔다고. 이번 경우, 현지에서 영화 1편당 30억원씩 받는 1급 스타는 못 부르고, 악역 전문 엑스트라를 불러 모시는 데도 이 정도니, 원. 와서도 숙박문제를 비롯해 각종 의전문제로 영화제를 압박할 것이 분명해 보임. 그래서 초청팀에서도 일부러 통역하는 친구를 대가 센 언니로 배치했다고 함. Epilogue 영화제 개막 하루 전, 장대비가 쏟아진다. 미디어콘텐츠팀장에서 개막 뒤 상황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이해광 팀장과 김홍준 집행위원장의 어느 대화. 이: 내일까지 비온다는데요. 어떡해요. 김: 오전에만 온다던데. 그리고 지금까지 개막식에 단 한번도 비 안 왔잖아. 이: 하긴…. 일기예보보다 정확한 부천영화제 희망 징크스. 비는 오지 않았다. 글 이영진 anti@hani.co.kr, 정한석 mapping@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편집 권은주 자원활동팀 사전자원활동가 최윤호·전혜린도우미들의 도우미예요 부천영화제 사무국 방문기간 동안 유독 자주 마주치던 두명의 호남호녀. 동분서주 짝지어 뛰어다니던 그들이 바로 자원활동팀 소속 사전자원활동가 최윤호(25)씨와 전혜린(22)씨. “전혜린이요. 아빠가 워낙 좋아하셔서.” 현재 국문과 3학년 휴학 중인 전혜린씨는 아버지 덕에 그 유명한 이름을 얻었다. 외모는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 보이지만 업무처리는 바지런하기만 하다. 이미 올해 여성영화제에서 자원활동가를 경험한 바 있는 전혜린씨는 “한번 영화제를 경험하고 나니까 다시 한번 해보고 싶어졌고, 같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일하는 것이 좋다”고 참여의 의의를 설명한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휴학 중인 최윤호씨는 원래 기술팀 자원활동가를 지망했다가 “여기에 딱 맞을 것 같다”는 자타의 평가에 의해 자원활동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연신 싱긋벙긋 웃고다니고, 술도 좋아하고, 일도 좋아하는 그에게 사람 많이 만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6월 초부터 영화제에 합류한 두 사람은 소소한 문건정리에서부터, 자원활동가 면접 및 교육준비, 집기 옮기기, 물품 챙기기까지 자원활동팀의 사전업무뿐 아니라, 손 가는 일이라면 부서를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도우미 역할을 자처한다. 기술팀이 자막작업을 하는 동안 어깨 너머로 본 영화만으로도 그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영화마니아들이 영화제 동안 영화는 못 보고 일만 해야 하는 심정이란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가끔은 “괜히 했어, 영화나 볼걸” 하고 서로 푸념도 늘어놔보지만, “영화제를 만들어보는 사람의 입장에 직접 서보는 일”이라는 신명 하나로 후회를 날린다. “기획팀은 남자가 많아서 동동주 분위기고, 홍보팀은 여자가 많아서 스테이크 써는 분위기고, 그리고 후원회팀은 식도락가 분위기고….” 이렇게 각팀의 취향까지도 정리해낼 만큼 이 두 사람은 여기 사람이 돼버렸다. 당연히 자원활동팀의 특색을 피력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자원활동팀이고, 또 “그 많은 자원활동가들을 다루려면 당연히 서로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 좋고, 영화 좋아서” 영화제 일에 동참하게 된 두 사람에게는 앞으로도 “영화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 살지는 않겠다”는 바람이 있다. 그들의 소망이 부천을 밑거름으로 이뤄졌으면 좋겠다. 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1] 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2]

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1]

판타스틱 열흘을 위한 불면의 5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지금 중반에 접어들었다. 관객(독자)의 최대 관심은 무슨 영화를 볼까 하는 선택의 문제일 것이고, 본 영화들과 볼 영화들로 화제를 이룰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막 5일 전부터 개막 직전까지의 그 시간을 다시 헤아려보기로 한다. 객석과 스크린 사이의 충만한 교감의 시간이 아니라, 텅 빈 극장과 그 바깥에서의 분주함으로 이분되어 있는 노동의 시간에 대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사무국을 들락거리며 같이 걸어본 개막 직전 5일간의 동행기. - 편집자 Prologue 장철의 황홀경에 넋이 나가고, <문 차일드>의 발칙함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영화의 신선이 되어 있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하는 영화제 개막 전 사무국 풍경으로의 ‘플래시백’. 190여개의 판타지를 위해 1분 1초도 쉬지 않고 땀흘려 준비하는 현장, 거기에 그들이 있었다. 축제는, 기어이,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자막 삼매경에 빠져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자막 요원. 천줄의 대사, 빨간 눈의 자막요원 “아마 지금 가장 바쁜 건 기술팀일 거예요.” 영화제 방문 첫날 김홍준 집행위원장이 일러준 대로 찾아간 기술팀. 아니나 다를까, “지금 말 걸지 마세요. 바쁘거든요”. 큐타이틀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자막 스포팅 작업을 하는 황균민씨. 몰래 내다보다 잠깐 쉬는 듯해서 한발 내디디려 했더니만, 지금 무슨 짓이냐,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투로 싸늘하게 대한다. <내겐 너무 멋진 서쪽 나라>라고, 영화제목을 불러주는 것을 서둘러 받아 적은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곧장 이어폰으로 귀를 봉하고 온 정신을 모니터에 쏟는 황씨에게 더이상 말을 걸래야 걸 수가 없다. 자막 감수 업무를 맡고 있는 이현정씨는 프리뷰 테이프와 프린트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대사를 끊고 지속 시간을 체크하는 스포팅 작업이 급하다고 설명해준다. 올해 상영작 규모는 지난해에 비해 50편 정도 늘었다. 그만큼 업무량이 많아진 것일까? “그거야 사전에 충분히 예상이 되죠. 자막 업무 인력과 기간을 늘렸기 때문에 밤샘작업은 오히려 줄었어요.” 이현정씨가 덧붙이지만, 영화제라면 언제든 속 썩이는 영화 한편쯤은 있게 마련이다. 전날 새벽까지 작업한 뒤 이날도 밤 10시가 되어서야 모니터에서 눈을 뗀 황씨는 “대사가 1천줄이 넘는 영화라 힘들었다”면서도 “적어도 꼬박 이틀을 투자해야 했던 처음보다는 많이 늘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상영관에서 프로그래밍된 자막을 운용하는 일만 남았다. 릴이 바뀌어 영사속도가 달라지거나 24프레임의 속도로 촬영되지 않은 장면의 경우, 순발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자막을 쏘지 못하면 관객이 당황해하는 건 당연한 일. 황씨의 불안이 영화제 폐막까지 계속되는 건 그런 이유다. 기술시사 일정이 잘못 전달되는 통에 안 그래도 바쁜 기술팀이 더 바빠졌다 이거 百畵百色이니 정신이 없죠 “감독도 안 돼, 프로그래머도 안 돼.” 기술팀에서 필름 담당 스탭으로 일하는 양희찬씨가 스크리닝 매니저인 조해원씨에게 영사실 출입은 누구도 안 된다고 다시 한번 일러준다. 기술팀의 업무를 총괄하는 송미선 팀장에게서 양씨가 국내에서 열리는 여타 국제영화제까지 석권한 일꾼이라는 사실을 듣고 있는 동안 낮지만 위협적인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이해는 하는데 체크할 시간 정말 부족하거든요.” 영사기사를 붙잡고 릴 앞에서 필름을 꺼내들고 있는 상황을 연출하려고 하는 사진기자에게 양씨는 협박에 가까운 양해를 구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개막식이 열리는 시민회관쪽에 기술시사 일정이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1시간 뒤면 리허설을 위해 무대 공사가 진행된다. 이 때문에 어떻게든 그 시간까지 개막작인 <원더풀 데이즈>를 비롯해서 이곳에서 상영될 각기 다른 화면비율(1.85:1, 1.66:1, 1.33:1 등 필름 사이즈뿐 아니라 사운드 녹음방식도 제각각이므로 기술팀은 해당 상영관에서 직접 프린트를 돌려 세팅해야만 한다)의 영화들을 직접 틀어봐야 한다. 그에 맞게 렌즈를 조정하지 않으면 화면의 일부가 잘려져 나가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 사고가 벌어진다. 기술시사는 상영을 위한 최종 단계. 그 전에는 영화제를 도는 프린트들의 상태가 양호한지를 일일이 체크해야 한다(일부 국가에선 영화 프린트가 생선이라도 되는 듯 프린트를 종이에 둘둘 말아 보내는 경우도 있다). 양씨가 수색병처럼 영사실 창에 눈을 바짝 대고 제대로 영사가 이뤄지는지 확인하는 동안 조해원씨는 1층과 2층을 부지런히 오가며 사운드를 체크한다. 1200석이나 되는 대규모 상영관이라 1층과 2층, 그리고 중앙과 주변의 사운드 크기가 달라도 뾰족한 수는 없다. 하지만 조씨는 송 팀장과 함께 조금이라도 균일한 사운드가 울려퍼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느라 정신이 없다. 개막식을 위한 마지막 작전회의가 진행 중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수호천사들이 있잖아요 부천영화제를 수호하는 초록천사들이 모여 축제에 앞서 벌이는 또 하나의 내부 축제, 자원활동가 발대식. 총 216명의 자원활동가들은 6 대 1이라는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부천영화제의 일원으로 참여하기 위해 여기 모인 사람들이다. 그러니 당연히 즐거울 수밖에. 71살의 나이에 올해 최고령 자원활동가로 일본어 통역을 맡고 있는 조연채씨, 올해부터 18살 미만 제한이 풀려 처음으로 고등학생 신분으로 참여하게 된 김가영, 김규석씨, 그리고 자원활동팀장 채홍필씨의 메일함에 무려 세번에 걸쳐 “왜 자신이 부천영화제의 자원활동가가 되어야 하는지를 10페이지 분량의 리포트로 작성하여 협박성 메일을 날렸다”는 김치영씨까지 모두가 즐거운 표정들. 기념촬영을 위해 300명쯤 올라서니 무대가 넘친다. 이해광 미디어콘텐츠팀장의 선창에 따라 울리는 소리. “파이팅!” 영화제 기간 동안 보지 못할 영화 갈증을 사부의 <드라이브> 한편으로 위안받으면서도 이들만큼 행복한 사람들은 여기 없어 보였다. 하지만, 웃고만 있다고 해서 축제가 되겠는가? 저녁 7시가 넘어서 40여명의 영화제 팀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개막 전 마지막 전체회의를 갖는다. 기획팀장 정범씨는 “원래는 하이테크를 이용해서 쏘려고 했지만, 장소가 안 돼서 3년 연속 그림을 그려 설명한다”는 농담으로 부드럽게 회의 시작을 알린다. 보드판에는 개막식 장소인 시민회관의 내부 조감도가 그려져 있고, 각 팀원들에게는 “개·폐막식 인원배치 및 역할”에 대한 일정들이 분배된다. 입장권 미소지자 문제에서부터, 개막식에 들어서는 게스트들의 동선, 그리고 그들을 안내하는 요원들의 자리배치, 개·폐막식의 변수인 취재진들 처리문제(물리적인 행사 이외에 이들을 정돈할 길은 좀처럼 없다고 한다), 셔틀버스 운행, 행사장 외곽 안내에까지 꼼꼼한 마지막 작전회의가 진행된다. 작전은 끝났으니, 능숙한 대처와 수습만이 남았다. 홍보팀의 불꺼지지 않는 밤 옆방에서 모든 스탭들이 참여하는 개·폐막식 시뮬레이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홍보팀 내의 ‘고급 인력’으로 추앙받는 석민내씨는 사무국에 홀로 남아 진땀을 흘리고 있다. “지금 이쯤이면 붙이고 있어야 하는데.” 지하철 역사를 비롯해 각 상영관에 배치될 예정이었던 안내 게시판 스티커 크기에 문제가 생겨서다. 오전에 인쇄작업이 이미 끝난 스티커의 경우, 너무 커서 문구를 잘라내지 않으면 부착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서류를 너무 믿은 게 탈이죠.” 안내판 실측을 꼼꼼히 챙기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면서, 그는 새 시안 디자인을 위해 꼼짝없이 밤을 새워야 하는 처지다. 그 개막식표는 거기 없었다? 자정이 다 되어간 시각. 사무국은 휑하다. 개·폐막식 시뮬레이션 회의가 끝난 뒤 스탭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다들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한 무리는 늦은 저녁식사를 하러 시내 거리로 나들이를 행한 듯하고, 또 한 무리는 기진맥진한 몸을 미지근한 물에 풀어보고자 숙소의 욕실로 향한 듯하다. ‘뭐, 별일 있겠어.’ 고단한 기자(기록하는 이라기보다 기생하는 자에 가까운)는 사무국이 마련해준 숙소로 향하기 위해 뒷걸음친다. 사무국 입구를 빠져나오는 순간, 뒤편에서 ‘뚜걱뚜걱’ 낮지만 빠른 구두소리에 맞춰 뒤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는 모 팀장의 부산 사투리가 뒤섞여 들린다. 긴급상황인가. 그러나 게으른 기자는 숙소의 침대로 향한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뒤늦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채홍필 자원활동 팀장이 침대에 늘어진 기자가 한심해 보였는지 한마디 던진다. “10분 전에 정말 긴박했는데!” 축 늘어진 상태였던 눈꺼풀이 갑자기 팽팽해진다. 이 아무 일 없어 보이는 게시판에서 그런 긴박한 일이 벌어질 줄이야…. 서둘러 3층 아래 현장에 도착(?)하자, 발빠르기로 소문난 이해광 미디어 운영팀장(그는 영화제가 개막하면 온갖 사고를 도맡는 상황실장으로 변신한다)이 티켓 나눔터 게시판에 해명글을 올리기 직전이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재연하면 이렇다. 프로그램팀의 김지연씨는 우연히(처음에는 심심해서라고 했다가 스탭의 의무라고 말을 바꿨다) 영화제 홈페이지를 뒤지다 이상한 글을 보게 됐다. 개막식 좌석표를 팔고 싶으니 연락을 달라는 글이 올려져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 “이게 어찌 된 일인가.”(부천영화제는 올해부터 실명 좌석제를 운영하며, 초청 대상 인사들의 경우 일일이 참석 여부를 확인했다) 배우 방은진씨의 자리가 탈취당할 위기에 처한 것임을 알아차린 옆자리의 정민아 초청팀장은 김 위원장에게 보고한 뒤, 이 팀장과 함께 함정수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표를 사고 싶은데요.” 도둑맞은 초대장의 경위를 알기 위해 메시지를 남겼으나, 범인은 천연덕스럽게 한마디만을 남겼다. “제가 졸리거든요. 내일 통화하죠.” 우편으로 보낸 초대장을 훔쳐 한몫 챙기고자 했던 범인은 이후 편히 잠을 청했겠지만, 그 사이 인터넷의 관련 글은 “선의의 피해자가 없길 바랍니다”라는 내용의 글로 대체됐다. 조율은 피아노만 하는 게 아니죠 “이거 이렇게 나가면 안 돼지.” 큰 목소리는 홍보팀장 김래영씨에게서 먼저 들려왔다. 인터넷에 오른 기사내용에 오보의 여지가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 내용에 협찬사와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에 당연히 동분서주하는 것은 기획팀 마케팅 담당 오승환씨. 기사를 하나 막으니, 다음에 등장하는 문제는 현수막 문구. 표현은 어떻게 할 것인가, 로고는 어디에 넣을 것인가 한참을 밀고 당긴다. 하루종일 누구보다도 전화통을 오래 붙잡고 있는 오승환씨는 협찬사들의 행사부스 설치 일정과 내용을 확인하는 동시에 영화제와 협찬사 사이의 의견을 조율하느라 바쁘다. 때때로 협찬에서 한발 밀린 경쟁사에서 “돈 먹었냐”는 투로 비아냥거리거나, “잘 보여야 할 거”라는 식으로 윽박지를 때는 어이가 없기도 하지만, 영화제 마케팅의 생명은 “영화제의 이미지와 그 협찬사의 요즘 사업성향을 비교분석하여 서로의 이익을 조율하는 것”이라고 일파한다. 연이어 담배 세대를 피운 그 ‘조율사’는 다시 전화를 받으로 성큼성큼 사무실로 향한다. 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1] 2003 부천 판타스틱영화제가 개막하기까지 [2]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4]

요 속물기지배, 꼭 끌어안아주고 싶은 나는 이 여자가 좋다 - <고양이를 부탁해>의 혜주 김은형/ <한겨레> 기자 그녀는(솔직히 그년은) 밥맛이다. 약속에 늦은 주제에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너 이거 집에서 한 거지?” D.I.Y. 방식으로 공들여 물들인 머리꼭지에 재를 뿌리고, 보태주는 것도 없으면서 “유학은 아무나 가니? 돈이 있어야 가지” 염장을 지른다. 게다가 또래의 회사 동료들에게는 만날 튕기면서 상사에게 생글거리는 꼴이라니…. 뒷담화는 지금도 나의 특장이기는 하지만 스무살 무렵 혜주를 만났다면 나는 허구한 날 다른 친구들이나 회사 동료들과 모여 혜주의 ‘뒷담화’를 ‘깠을’ 거다. “쟤 진짜 재수없지 않냐?” “그렇게 잘나서 얼마나 잘되나 보자.” 그러고는 혜주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나 또한 ‘티나지 않게’ 개발에 땀나듯 종종거리고 살았겠지. 그러나 서른살 무렵 우리는 ‘본의 아니게’ 친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고부가가치 인생”과는 상당히, 꽤, 실은 한참 먼 자리에서 말이다. 돈도, 결혼도, 성공도(성공이 무엇이더냐, 새로 나온 과자이름이더냐), 동미나 나난이 가진 한 자락의 자신감도 쥐지 못한 채 오로지 비어가는 술병을 쥐고 차라리 이렇게 외쳤겠지. “아, 밥벌이의 지겨움!! 우리는 끌어안고 울고 싶다.”(김훈, <밥벌이의 지겨움> 중에서) <고양이를 부탁해>의 혜주는 이기주의자에 속물이다. 그에 비하면 태희는 품성도 훌륭하고 이상도 원대한 인물이다. 그런데 왜 나는 혜주를 보면서 더 마음이 짠하고 얄미운 이 친구를 꼭 끌어안아주고 싶었을까. 나에게 태희가 아름다운 꿈이라면 혜주는 고단한 현실이다. “코도 높이고 영어공부도 하고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다짐하는 그는 복사, 팩스, 커피 심부름에 다리가 퉁퉁 붓도록 하루종일 종종거리지만 정작 증권회사에서 하루 중 가장 바쁘다는 파장 무렵에는 ‘엘리트’ 동료들이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봐야 하는 처지다. 운좋게 대학교육을 받고 사회인으로 출발한 나는 혜주보다는 나은 조건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초년생 무렵 “뽀다구 나는 글발로 스타기자가 되겠다”던 나의 야심은 직장생활 8년만에 “어떻게든 살아봐야지”로 대폭 수정됐다. 그리고 내 주변에는 나처럼 전략수정을 한 인간(여성)들이 많이 있다. 물론 니가 못나서 그렇지라고 말하면 달리 할말은 없다. 어쨌든 내가 체감한 세상은 만만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았으니까. 혜주가 코 높이고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나이 사십에 <나 이렇게 성공했다>라는 자서전을 쓰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아이가 앞으로 부딪히고 넘어야 할 벽은 너무나 많다. 골백번 좌절하고 골백번 상처입으며 그는 서른이 되겠지. 할리우드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그녀의 삶 역시 전략수정이 불가피하겠지. 하지만 친구들이 먼 나라로 떠날 때 혼자 남았던 혜주는 그 욕심과 당돌함이 마모되면서도 ‘똥이 되든 된장이 되든’ 버티어나갈 것 같다. 혹시 우리, 스물에 만나 서른에 친구가 됐더라도 여전히 “니가 하는 일이 그렇지 뭐”, “넌 아직도 그렇게 정신을 못 차리냐” 서로를 야리며 다툴 것이다. 그래도 열받는 일 터지면 서로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야, 뭐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다 있니?” 씩씩대며 같이 흥분하고 같이 ‘뒷담화’를 할 친구로 남을 것 같다. 그 뜨거운 삶에의 열망! 나는 이 여자가 좋다 - <사방지>의 사방지 정희진/ 경희대 강사 평소 ‘영화광’ 소리를 듣는 편이지만, 남성감독의 젠더적 상상력 빈곤에 분개해온 탓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문제적인, 정치적인, 감정이 치열한 인물인데 그런 여성 캐릭터는 대단히 드물다. 대부분의 한국영화에서 여성은 몰역사적, 탈정치적 존재로 재현된다. 즉, 고정화된 기표인 경우가 많다. ‘성역할=여성’이라는 남성 작가의 인식 때문에 여성 인물은 ‘어머니’, ‘창녀’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한다. 여성 캐릭터가 역동적으로 묘사되더라도 그들은 대개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섹슈얼리티와 연애, 가족에서만 활약할 뿐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이 글의 가독성(可讀性)에 대한 담당 기자의 당연한 우려를 뒤로 하고, 송경식 감독의 1988년작 <사방지>(舍方知)의 사방지(이혜영)를 내가 사랑하는 ‘여자’로 골랐다. 여성과 남성의 경계 자체를 문제제기하는 그(녀)를 여성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성기는 남성이고 젖가슴을 비롯한 외모는 여성인 양성구유자 사방지는 조선 세조 때 실존 인물로, 이 영화는 지난해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어 새롭게 주목받았다. 제작 당시 ‘사극 에로’로 분류되었던 이 독특한 ‘퀴어’영화는 과부 이씨(방희)와 사방지의 사랑, 매춘, 죽음을 그리고 있다. ‘음양의 섭리’로 포장된 엄격한 성별사회에서 그녀가 겪었던 고통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 그녀의 존재를 설명하는 해석 체계는 부재했을 것이다. 고통받는 여성 캐릭터는 흔하지만, 여성은 생각하는 존재가 못 된다는 고정 관념 때문인지 고뇌하는 여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성별 제도의 억압에 반대하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 아니다. 극단적 하위 주체, 사방지의 스스로를 규명하려는 몸부림, 절망, 투쟁, ‘정상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나는 사랑한다. 인간이기 전에 남성이고 여성이어야 하는 성별 집착 사회는 분명, 성별이 사회를 조직하는 중요한 원리이거나 성의 구분을 통해 여성을 착취하는 사회이다. 그러므로 성의 구분이 ‘자연적’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실증적으로 실존적으로 파열 내는 양성구유자나 트랜스젠더는 ‘체제 전복 세력’인 것이다. 사방지는 사회가 자신에게 가하는 위협과 폭력을 안다. 모든 이로부터 거부당한 사람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사방지는 자신의 존재성에 의문을 품고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욕망과 감정, 생존을 위해 협상과 고투를 거듭한다. 이 캐릭터의 역동성은 상당 부분은 배우 이혜영의 매력에 빚지고 있다. “나는 여자도 남자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짐승도 아냐!”라는 사방지의 대사는 내가 이제까지 본 영화 중 가장 숨막히는 장면이다. 수상한 승리 나는 이 여자가 싫다 - <손톱>의 두 여자 김유리/ <옥탑방 고양이> 원작자 <손톱>은 사이코스릴러다. 정상적이지 않은 성격의 두 여자주인공은 얼핏 비현실적이지만, 둘을 사이코로 만드는 원인들은 사람들이 함부로 입방아 찧는 ‘여성적 습관’에 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난 매우 불편했다. 혜진(인테리어 디자이너)과 소영(조각가)은 같은 미대를 나온 동창이다. 둘은 서로를 미친 듯이 질투하고 경쟁한다. 대학 다닐 땐 실력으로, 사회에 나와선 직업으로, 월수입으로, 사회적 지위로, 경쟁의 연속이다. 둘의 불안한 시선만 카메라에 잡히면 관객은 긴장이 된다. 둘이 서로를 보는 시선도 불편하기 짝이 없고, 서로에게 하는 사소한 행동도 은근히 신경을 긁는다. 하지만 그게 결정적으로 불편한 원인은, 여성 특유의 민감함과 경쟁의식이 지나치게 왜곡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이코들이 나오는 영화인데 과장되는 게 당연하다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싸우고 질투하는 일들은 또 디테일하다. 슬쩍 지나쳐버릴 수도 있는 말이 상처가 되고, 작은 행동 하나도 크게 생각하는 등, 등장인물들은 ‘속 좁은 여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 자세한 부분들에 ‘아 저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공감이 가면, 그땐 ‘여자들이 정말 저런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소영은 혜진과 남편이 자신의 험담을 하는 것을 훔쳐 듣는다. 그리고 혜진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하나씩 빼앗기 시작한다. 혜진은 뺏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친다. 그리하여 그녀들의 경쟁은, 순수한 경쟁의 의미를 벗어나버린다. 처음엔 자신들의 능력으로 경쟁했지만, 점차 남편을 사이에 두고, 아이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것이다. 소영은 혜진의 남편과 자고, 아이를 가진다. 불륜 사실을 알게 된 혜진은 소영과 격투를 벌이고, 소영은 유산하고, 진짜로 미쳐버려 정신병원에 감금된다. 가정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는 평화를 되찾는다. 남편과 화해도 하고, 아이도 가진다. 물론 모든 스릴러영화에 반전이 있듯, 정신병원을 탈출한 소영이 혜진의 집에 불을 질러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정의는 아이 엄마의 편이다. 정신병자는 아이 엄마의 손에 격퇴된다. 누구는 이 영화의 주제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고 했다. ‘남의 흉을 보기 전에는 반드시 주변을 한번 둘러보자.’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수상하다. 여성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은 모습의 질투와 시기와 왜곡된 욕망. 그리고 항상 승리하는 모성.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유쾌하게 볼 수 없었다.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3]

얘, 병든 게 변명이 되니? 나는 이 여자가 싫다 -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주일매 박은주/ <한국일보> 기자 (얼굴 모자이크 처리, 음성 변조) “처음엔 그 여자가 저를 사랑해서 결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체육관에서 결혼한다는 게 제 스타일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참았죠. 그런데 그 여자, 죽을 병에 걸리고도 아무 말도 없이 저랑 결혼을 하려고 했다니 말이 됩니까? 부모님은 그날 충격을 받고 아직도 매일 아침 공복에 우황청심원을 두알씩 복용하고 계십니다. 이거 결혼사기 아닙니까?” “일매는 지가 지키겠심더.” 여자친구에게 손끝 하나 안 대는 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손태일(차태현)이나, “니만 믿는다”는 선생 영달(유동근)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육체와 정신의 합일점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설교하거나 ‘가부장적 틀을 온존시키려는 구시대적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일종의 낭비다. 이른바 ‘대박’영화, 혹은 멜로영화에서 제대로 여성성이 구현된 것이 있었던가. 신세대, 엽기, 발랄, 당대 코드, 당당한 여자 등 수많은 수식어를 남겼던 <엽기적인 그녀>조차 ‘그녀의 엽기성은 알고보니 아픈 사랑의 상처에서 나왔던 것이었다’ 식으로 설명되는 마당에 다른 멜로성 코미디영화가 여성을 표피적으로 묘사한다거나 가부장적 시각으로 여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주장은 철지난 표어처럼 진부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주일매(손예진)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낡고 진부할 뿐 아니라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울며 돌아서는 태일의 뒤통수를 보며 이렇게 말한다. “그는 바람둥이니까. 바람둥이니까. 바람둥이니까.” 무수한 ‘바람남’이 있었으나, 결혼으로 보복당하는 바람남은 영화에 처음 등장하는 것 같다. 게다가 곧 죽게 될 (것이라 믿는) 일매는 대체, 왜, 무엇 때문에 바람남과 굳이 결혼하려 한 것일까. 게다가 그 아버지란 작자는 왜 그런 무모한 시도에 동참함으로써 ‘부녀 결혼 사기단’을 결성하게 된 것일까. 바람남이란 무엇인가. 만나는 여자마다 매 순간 사랑에 빠지며, ‘그걸 거부할 어떠한 물리적 힘도 갖고 있지 않는’ (<세기말>의 차승원처럼) 이가 바로 바람남 아니던가. 더 큰 문제는 수많은 멜로영화 주인공이 그랬듯, 일매 역시 ‘투병권’을 포기하고, ‘그냥 죽는 것이 아름답다’는 그릇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을 뿐 아니라 와중에 대형 결혼 사기극까지 벌였다. 그럼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서 일매가 결혼을 서두른 까닭은 무엇일까? 1. 처녀 귀신이 될까 두려워 2. 아버지에게 결혼 부조금으로 한 재산을 만들어주기 위해 3. 직장의 바람남에게 ‘결혼 잘못하면 신세 망친다’는 교훈을 주려고 4. 체육관에 서 보는 게 꿈이어서. 아무래도 3번 같지만, 그건 불치병에 걸린 일매가 할 일은 아니었다. 병든 여성 캐릭터도 좀 진화하면 안 될까? 남성 판타지의 복화술 나는 이 여자가 싫다 -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신아 박민희/ <한겨레21> 기자 minggu@hani.co.kr “나는 이물질이 들어오는 게 싫거든요.” 콘돔을 쓰려는 동기에게 신아가 이 말을 하기 전까지 나는 그래도 신아가 ‘당당하고 쿨한’ 여자라는 평론가들의 만장일치 비평에 진도를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임신하면 문제를 공유하지 않을 가능성이 99%인 남자와 섹스하면서, 남자들이 콘돔 쓰기를 거부하면서 가장 흔히 내놓는 변명을 ‘주체적인 현대 여성의 입으로’ 선언하는 장면 아닌가. 나는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곳곳에 그런 위험이 숨어 있다는 혐의를 떨칠 수 없었다. 남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남자들이 당당한 여성이라고 내세운’ 신아의 입을 빌려서 얘기하는 복화술 영화. “당신은 처음 만난 남자와 섹스를 할 수 있습니까?”라는 홍보문구를 내세운 이 영화의 초반부에서 신아는 사뭇 당당한 듯하다. 처음 여관에 같이 간 남자가 속옷을 보고 멋있다고 하자 “비싼 거예요”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애인 있냐”고 묻자 “많아요, 그럼 어쩔 거예요”라고 남자의 소유여부에 대한 질문을 비웃는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점점 이 여자가 아까 그 여자인가 싶다. 아픈지 좋은지 모를 신음소리를 계속 내면서 “싫다 싫다” 하면서도 남자의 무리한 요구는 다 들어준다. 섹스판 <봄날은 간다>를 의식한 듯한 감독은 남자의 무리한 요구 때문에 사랑이 점차 어긋난다는 변명을 마련해두긴 했지만, 신아는 공원의 공중화장실과 시외버스에서 억지로 섹스를 할 때나 항문섹스를 강요당하면서 참고 또 참아낸다. 그리고, 관계가 시들해질 무렵 알아서 떠나준다. 남자들이 원하는 여자의 당당함이란 딱 이런 것 아닌가. 현모양처형 여자는 솔직히 매력없다. 적당히 도도하고 도발적인 여자가, 관계가 시작되면 말로는 싫다면서도 남자 뜻대로 다 해주다가 남자의 마음이 식자 “책임지라”고 구질구질하게 울고 불고 안 하고 알아서 떠나주는 놀라운 판타지 말이다. 주체적인 여자는 ‘Yes’라고 할 자유만 있고, ‘No’라고 말할 자유는 없는가. 섹스에만 국한된 여성의 자유는 여성 삶의 해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결국 남성의 성적 자유를 위한 (대부분의 이성애 섹스에서 꼭 필요한 상대인) 여성의 범위만 넓히게 되는 함정은 없는가. ‘당당한 여자의 조건’마저 남성들에게 전유됨으로써 그런 위험은 한층 커진다. 수천년 동안 몸에만 갇혀 있던 여성들이 다시 성적 욕구와 몸으로만 재단된다. 이 영화는 수없이 반복되는 섹스장면으로 그런 혐의를 증명한다. 여성이 주체가 된다면 당연히 등장해야 할 대화를 통한 소통, 다양한 성감대에 대한 탐색, 충분한 대화나 전희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 초콜릿을 남자의 성기에 바르는 장면이 유일할 뿐이다. 대신 여자는 다리를 벌리고 남자는 삽입하는 남성 중심의 성기 삽입, 후위, 오럴섹스 장면이 영화 내내 지루하게 반복된다. 사랑의 한 단계를 설명하는 소제목으로 감독이 자신있게 붙인 ‘성기로 사과하고 사정으로 위로받는다’는 식의 남성 중심 오르가슴 공식 역시 <맛있는 섹스…>를 맛없게 만든다. 신나는 불경 나는 이 여자가 좋다 - <싱글즈>의 동미와 나난 황진미/ 영화평론가 서른이 되던 해 자작시를 썼었다. “어찌할까// 이토록 막막하고/ (중략)// 영원히 올 것 같지 않던 서른 살의/ (중략)// 여전히 가진 것 없고/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여전히 갈 곳이 없는(후략)….” 그랬다. 좀더 살면 편해질 거라고 누군가 귀띔해주었지만 곧이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살지도 못하고 저렇게 죽지도 못할 때 서른살은 온다”던 최승자의 시구만 떠올랐다. 누구나 그 나이가 그런가보다. 그래서 영화도 많다. 그러나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노총각의 고독감을 그리는가 싶더니 ‘나도 나 좋다고 알짱거리는 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드러내고,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노처녀의 사실감 넘치는 독백으로 시작되더니 ‘알고보니 저 썰렁한 놈이 진국일세!’가 결론이다(집안끼리 아는 ‘오빠’와의 ‘안전 만빵’ 중매! 흉물스런 보수회귀!) 참.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라는 원색적인 제목의 영화도 있었지. 노처녀 앞에 어른거리던 놈의 선문답 몇 마디에 그녀의 고민이 일순간 해결되던… 결혼정보회사 찌라시 같은 영화였지. 그 나이의 막연함을 <오! 수정>의 자막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으로 미봉하려 들지 않는 진지한 영화는 <파니핑크> 정도인가보다. <싱글즈>는 짝찾기 전형을 비껴가며,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이분도식도 피한다. <처녀들…>에서 강수연은 프리섹스주의자이고, 진희경은 결혼에 집착하는 여자였다. 둘의 차이는 경제여건에서 기인한 듯하다. 강수연은 애초에 돈 많은 사업가이고, 진희경은 얹혀사는 호텔직원이었다. 그러나 <싱글즈>의 동미(엄정화)는 자유로운 의식을 지녔지만, 결코 가진 게 많아 누리는 허영이 아니다. 그녀는 일에 재능과 의욕이 있지만,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 부모도 신임하지 않는다. “우리 나이에 목돈 쥘 방법은 결혼밖에 없다… 그래야 노인네들도 돈을 풀고… 그 돈으로 창업이나 할까?” 현실적인 상황인식이다. 나난(장진영)의 상황은 더 미묘하다. 고전 여성영화라면, 나난이 디자이너로 재능과 열정이 있고 인정도 받고 있는데, 조건(만) 좋은 남자가 나타났을 것이다. <물위를 걷는 여자>처럼. 그러나 그녀는 잘 나가지 않고, 그도 조건만 좋은 놈이 아니다. (그녀를 위한 그의 행동들은 충분히 사랑스럽다.) 그의 제안에 “당분간은”이라는 단서를 달며 거절하는 것이 ‘조건은 좋지만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하느니, 일에서 보람을 느끼며 혼자 살겠다’는 정치 선언이 아니다. “내 인생이 똥인지 된장인지 더 살아봐야겠다”는 것은 ‘자기 배려’의 윤리 선언에 가깝다. 그녀는 모호한 의지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호박을 걷어차는 불경(不敬)을 행한다. 불경은 동미의 입을 통해 확장된다. “내 애니까 낳는다.” ‘여성의 신체적 권리로 낙태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사회적 권리로 모성권’을 온몸으로 주장하기 위해 힘든 길을 가고자 한다. 여기에 나난은 “아빠노릇…” 운운하며 레즈비언적(!) 동맹을 선포한다. 가부장제는 엿이나 먹어라. 불경의 극치이다. 흔히들 ‘화려한 싱글’을 논한다. 철든 이들은 싱글이 결코 화려할 수 없다고 진실을 말한다. 요는 “화려한 싱글이면 괜찮다. 그러나 그럴 자신 없으면 관둬라”이다. 그런데 독신으로 살지 결혼할지 여부가 이해득실, 수지타산을 통해 결정되는 문제이어야 할까? “남의 손 빌려 밑 닦는 것”을 괴이하게 여기는 주체적 각성과 ‘내 삶의 결정권을 섣불리 양도하지 않겠다’는 실존적 자각이 더욱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화려할 자신 눈곱만큼도 없고, 실현할 자아를 아직 확실히 찾지도 못했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결국 번번이 호박을 놓치는 우(愚)를 범하더라도 말이다.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2]

화려한 싱글? No, 쿨한 싱글! 섹스를 제대로 알게 되서 쿨해지는 걸까, 쿨해서 섹스를 잘하는 걸까 여성의 섹스에 대한 온전한 성찰은 5년 전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처음 제기됐고, 할 만한 말을 죄다 해버렸다. 이 기념비적 작품에서 연(진희경)은 가장 ‘쿨’하지 못한 캐릭터여서 가장 현실적인 인물로 받아들여졌다. 연은 섹스를 사랑과 분리하지 않으며 당연히 결혼과도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작 그가 섹스를 할 때면 불감증이다 못해 고통스러워한다. 그랬던 그가 비로소 오르가슴에 오른 순간은 그의 꿈이었던 ‘가야금 연주론’(남자를 가야금처럼 눕혀놓고 애무와 삽입의 타이밍과 방식을 주도적으로 펼치는 것)을 실행할 때였으며, 그 시기는 결혼을 전제로 집착했던 남자(조재현)와의 관계에서 ‘쿨’해졌을 때다. <밀애>의 미흔은 쿨해지면서 섹스를 즐기게 된 연의 경우와 반대다. 미흔은 윗집 남자에게 어떤 매력을 느꼈다는 아무런 신호도 주지 않은 채 그가 제안한 게임을 갑자기 받아들인다. 그의 정성스런 애무에 힘입어 미흔의 몸은 흥분하기 시작하고, 미소를 되찾으며, 새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미흔의 변화는 멋진 섹스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나서야 그는 남편에게 “헤어지자”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관계에서 ‘쿨’해지고, 연인이 죽은 다음에도 아픈 과거를 헤집어가며 슬프게 사는 여성이 아닌 ‘쿨’한 싱글로 살기 시작했다. 섹스에 눈뜨기 전, 미흔은 “난 더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 그런데도 왜 난 이 집에서 네 옆(남편)에 붙어 살고 있을까”라며 식물인간처럼 살지 않았던가.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호정(강수연)과 <싱글즈>의 동미(엄정화)는 그 기원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등장부터 ‘쿨한 싱글’들이다. 자유롭게 섹스를 즐기는 건 물론이고 관계(결혼 혹은 사랑)의 자장력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켜놓았다. “벗지 말고 그냥 넣어”, “안에다 하지마”. 태연하게 섹스를 주도하지만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엄정화)는 좀 다르다. 그는 결혼이란 관계에 집착한다. 결혼에 의욕적인 여느 여자캐릭터와 다른 건 결혼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거의 동시에 두집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한다. 이제 두집 살림의 주체는 여자이기도 하다. 연희는 어떤 파국도 응징도 맞지 않는다. ‘쿨한 싱글’을 가장 단아하게 보여준 건 <봄날은 간다>의 은수(이영애)다. 은수는 한번 결혼을 했고, 그게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인지 늘 자기 감정에 솔직하다. 비록 “넌 내가 라면으로 보이니”라고 면박받기는 했으나 “차 마시고 가실래요?”(<싱글즈>의 나난) 같은 표준어법을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응용할 줄 알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를 ‘넌 영원히 내 거 아니었니?’로 즉각 해석해 적절히 대처한다. 비록 감독은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는 상우쪽이 행복해 보인다. 돌아볼수록 은수가, 그 애가 안쓰럽다”고 했지만, 은수가 상우(유지태)와 헤어진 뒤 불행을 느끼며 살았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오히려 불행의 기운은 상우의 닮은꼴 같은 할머니에게서 느껴지지 않는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좋았던 것은, 이 여자가 영악하고 능력있어서 두 남자를 거느리는구나에 대한 부러움이 아니라, 기존의 사랑관과 결혼관을 뒤집었다는 점에 있었다. 보통은 연인과 스테이크를 먹고 집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면서 그게 당연하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연희는 남편에게 케이크를 구워주고 준영한테는 콩나물비빔밥을 해준다. 모두가 생각하는 바람의 기본원칙을 바꾸었다. 그리고 사람마다 비밀이 있다. <엄마에게 새 새인이 생겼어요>라는 영화의 카피를 만들면서 ‘그 여자의 사랑을 인정한다’라고 썼는데 어떻게 그런 말로 불륜을 조장하느냐면서 남자들로부터 항의전화가 왔었다. 정말 놀랐다. 여자들은 숨기는 것뿐이다.”(정승혜 <씨네월드> 이사) 가족은 꾸리기 나름이다 각광받는 싱글맘 섹스의 부산물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임신이다. 이 대목에 관한 한 여성캐릭터들의 입장은 아직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았다. 임신에 대한 예방조처를 뜻밖에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사례(<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신아는 콘돔을 알아서 착용하려는 남자에게 이물감 운운하며 거부하는 놀라운 행태를 보여준다)가 있지만 대체로 무방비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이들은 낙태에 대한 권리를 충분히 부여받지 못한다. 하여 이상한 방식으로 아이를 정리해버린다. <마들렌>처럼 교통사고를 일으키거나 <처녀들의 저녁식사>처럼 등산사고를 내서 자연유산시킨다(그렇지만 <처녀들의…>에서 응급차에 실려가는 순이와 친구들은 유산된 사실을 알고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니 별다른 회의없이 낙태를 선택한 <색즉시공>의 은효(하지원)나 힘들어하는 그를 위해 차력 개그쇼를 벌이며 지원사격을 해준 은식(임창정)은 낙태에 대한 응징으로 얼룩진 <폰>과 의 저주를 받을지 모른다. 처녀의 임신 대처법으로 갑자기 각광받기 시작한 게 싱글맘이다. <싱글즈>에서 동미(엄정화)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임신 사실조차 알리지 않고 아이를 낳기로 한다. 당연히 아이 아버지와의 결혼계획 따위는 없다. 아버지 구실이 필요하다면 여자친구 나난(장진영)이 떠맡겠다고 자처하고 나섰다. <바람난 가족>의 호정(문소리) 역시 비슷한 선택을 한다(비록 그가 처녀는 아니지만). 쿨한 여성 싱글들의 섹스는 일종의 대안가족 만들기에 이르렀다. “자기 욕망에 솔직한 에고이스트가 결혼 자체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결혼 외에도 남녀의 동등한 결합의 형태가 나타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남자가 아니라 연희 같은 발칙한 여성 에고이스트들이지 않을까. 그런데 특히 20대 초반의 여성일수록 이 영화를 불쾌해하기에 의외였다.”(<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유하 감독) 남성 리버럴리스트의 판타지? 여성캐릭터들은 이제 웬만해선 ‘선뜻 자주면 저 남자가 더이상 나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지 몰라, 아마 날 차버릴 거야’라고 두려움에 떨지 않는다. 쿨한 싱글들의 쿨한 섹스는 대체로 파트너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이런 의구심이 고개를 내밀 법도 하다. 쏟아지고 있는 ‘쿨한 섹스를 즐기는 여성캐릭터’들은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는 남성 리버럴리스트들의 판타지가 반영된 산물이 아니겠느냐는. 쿨한 여성캐릭터들이 대체로 개인주의자이고 그들에게 사회적 진보를 꿈꿀 여지가 없다는 점도 의혹을 키운다. 싱글맘이라는 결론에 대해 혼자서 일도 잘해야 하고, 아이도 잘 키우고, 연애도 즐겨야 한다는, 현실적으로 감당하기가 쉽지 않은 또 다른 ‘슈퍼우먼 판타지’로 해석해볼 여지도 많다. 여성의 자기 욕구를 그리는 데 충실한 영화들은 한가롭게 섹스와 연애를 추구하기에는 골치 아프게 쌓여 있는 다른 문제들이 버거워 버둥거리는 현실의 여성들까지 포괄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가능하다(<고양이를 부탁해>가 있지만 그들은 ‘스무살, 섹스말고도 궁금한 건 많다’며 아예 섹스 자체를 추방해버렸다). 이건 과도한 트집일 수 있다. “도대체 형사와 검사들이 언제부터 내 아랫도리를 감시해왔니? 간통죄가 뭐니? 국가보안법도 아니고”라며 한탄하다가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가버린 호정(<처녀들의 저녁식사>)에게 이제 돌아올 때가 된 것 아니냐고 말하기에는 아직 주저함이 앞선다. 성공을 향해 거침없이 치닫는 남성은 야심찬 에너자이저로 수용되지만 돈 밝히는 여자는 싸가지 없는 속물로 치부된다. 무엇보다 간통죄는 여전히 유효하며 호주제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영화가 현실을 앞질러가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호정은 망명 5년 만에 <바람난 가족>을 통해 ‘굉장한 유부녀’로 돌아온다. 어떤 형태의 섹스도, 시어머니와 남편이란 관계도, 멈춰서버린 꿈도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여성캐릭터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하는 유부녀 호정은 험한 현실과 만나 어떤 파열음을 낼까. ‘처녀’씨 가문의 가계도 앞으로 더욱 ‘바람’하시라! 1998년, ‘처녀’씨 성(性)을 가진 세명의 여인들이 이 땅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호정, 연, 순이라고 불린 이들은, 야한 농담과 발칙한 삶을 저마다 특색있게 즐겼다 해서 여성의 성 생활사에 한획을 긋는 인물들로 평가받게 되었다. 여성의 생물학적 기능도 적극 활용, 자손을 퍼뜨리는 의무 또한 다했다. 그 후손들은 부모세대와 같고 또 다른 삶을 각자 영위해 나갔다. 그리하여 이 땅에서 여성의 삶을 다양화하는 데 기여했다고 전해진다. 이제, 이 위대한 세명의 시조가 세웠고 날마다 그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는 ‘처녀’씨 가문의 가계도를 펼쳐보려 한다. 이제 겨우 3대째에 접어든 가문이지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형태의 자손들이 배출되어 조상의 훌륭함을 잇고 모자람을 극복해 나갈 것이며, 이로서 가문의 영광 또한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처녀호정 프리섹스주의자. 간통죄로 고소당함으로서 분방한 자유에 걸맞은 대가를 치렀다. 큰딸/연희(<결혼은, 미친 짓이다>) 어머니의 대담함과 미모를 물려받아 두집 살림을 차렸으나, 결혼 잘할 궁리만 했다는 점이 문제시됐다. 쌍둥이 손녀 동미(<싱글즈>)와 연(<바람난 가족>) 할머니의 배짱이 흐르는 핏대를 세움. 동미는 싱글맘 선언. 작은딸/은수(<봄날은 간다>) 결혼에도 관심없고 매사에 쿨한 것이 엄마를 빼다 박았지만, 섹스 자체를 즐기진 않는다. 처녀연 남자친구에게 몸과 마음과 돈을 바쳐가며, 사랑과 결혼과 섹스의 삼위일체를 추구한 여자. 진정한 오르가슴 획득. 큰딸/정연(<선물>) 가게 운영으로 남편 뒷바라지에 충실, 삼위일체 추구. 엄마와 달리 다른 남자 경험은 없다. 손녀/은효(<색즉시공>) 남자친구 애를 임신, 피임도 안한다고 구박받고 낙태. 그뒤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 품에 안겼다. 작은딸/미흔(<밀애>) 사랑과 섹스를 뜨겁게 일치시켰고 홀로서기에 성공. 손녀/신아(<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엄마처럼 격렬한 섹스를 통해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에 충실했으나, 이별 앞에서 쿨해졌다. 처녀순 싱글맘의 의지를 보인 용기와,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추구하려는 열정이 강하다. 자연히 남자로부터도 독립적이다. 외동딸/금순(<굳세어라 금순아>) 남편을 구출해내는 용기, 일에 대한 열정에서 엄마를 빼박았다. 큰손녀/나난(<싱글즈>) 할머니의 독립심을 물려받아 조건좋은 결혼을 제 발로 찼다. 작은손녀/수완(<동갑내기 과외하기>) 역시 씩씩하고 독립적. 돈 많은 남자친구를 얻었지만 과외로 용돈벌기는 계속된다. 그러나, 세상의 여자들이 어디 ‘처녀’씨 가문 출신뿐이랴. 처녀호정보다도 더 섹스에 미쳐, 일이고 나발이고 그것밖에 모르던 여자가 있었으니 바로 Y다. 두들겨 맞는 재미에서 두들겨 패는 재미까지, 섹스가 주는 순수하고 극단적인 쾌락만을 추구하다 종족번식 시기를 놓쳤다. 이렇게 Y의 가문은 1대에서 씨가 말랐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알게 모르게 남긴 자손들이 음지에서 B급 형태로 융성하고 있다 한다. 그러고도 어디 이뿐이랴. 성경험 없는 처녀순도 호기심은 있었는데, 인천 출신의 고양이 3자매는 호기심조차 없었다. 섹스를 무시한 채 자기 일을 찾는 것만이 생의 중요 과제였던 태희, 혜주, 그리고 지영. 이들 역시 1대에서 씨를 말리고 말았다.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1]

맛있는 섹스를 즐기는 바람난 여자들이 온다 역사와 삶이 일관된 의미나 방향을 갖고 있다는 믿음에 소극적인 시대이지만, 그래도 만약 한국 영화사를 굳이 한줄로 꿰어보자고 했을 때 떠오르는 것은 영화 속 여성들의 모습이다. 남성감독들의 시선을 통해 빚어지고 남성주인공들의 고뇌와 욕망에 따라 부침하면서도, 그녀들은 지금 여기 내 삶의 기원을 서글프게, 때로는 매혹적으로 재구성해준다. 근대 이후, 그러니까 영화 속에 삶이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 여성이 문제적 존재로 되는 것은 늘 육체로부터 비롯되었다. 지적이고 도전적인 신여성의 삶을 살았던 초창기 여배우 복혜숙은 영화 속에 종아리가 노출되고 남자배우와 대낮에 손을 잡는 장면 때문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는 비너스다방의 마담으로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고 일제 당국에 보내는, 말하자면 육체의 욕망을 공인하라는 정치적 청원서에 서명한 사람이기도 하다. 유혹과 봉쇄를 동시에 뜻하는 한복 아래로 그 아름다운 육체를 감추고 있던 최은희는 <지옥화>(1958)에서 몸에 착 달라붙는 검은 드레스를 선보인다. 어느 날 UFO가 떨어뜨린 낯선 세계 같은 미군기지에서 미국 대중문화의 의상과 언어, 사고방식, 특히 섹슈얼리티를 향유하고 표현하는 형식까지도 서슴없이 받아들였던 소냐는 매혹과 저주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며 늪 속으로 가라앉았다. 김지미의 등장은 한국 멜로드라마 속 여성의 역사에 전환적인 의미를 가져왔다고 일컬어진다. <자유부인>(1956)의 주인공이 한복에서 양장 투피스로 갈아입었을 때 경제적인 독립성과 함께 성적인 자유에도 눈을 뜬, 즉 타락이 시작된 이미지로 형상화되었던 것과 달리 김지미는 서양식 의상을 입고도 긍정적인 여성으로 표상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960년대는 그 이전과 다른 새로운 시대라는 사실을 영화 안에서 수긍한 셈이었다. <영자의 전성시대>(1974)는 영자(염복순)의 육체 안에 1970년대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것을 새겨넣었다. 가난한 가족/농촌의 희생적 구원자, 사회적으로 값싸고 유용한 노동수단, 착취적인 남성 성애의 대상, 부도덕하고 폭력적인 국가권력과 자본주의 생산 시스템의 증거, 거기에 해탈과 구원의 모성 이미지까지 중첩되어 있다. 여성의 육체는 이 모든 의미가 생성하고 활동하는 장이었다. 섹스의 해방, 정치적 검열의 지속이라는 반쪽짜리 민주화를 맞이했던 1980년대의 영화는 <애마부인>과 <매춘> 시리즈로 특징지어진다. 관음증과 사회비판이라는, 80년대 남성 자아의 모순된 욕망을 하나로 우겨넣은 이 시리즈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본격적으로 스크린에 도입되는 계기였다. 여성의 삶이 외적인 무거운 의미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순전히 사적인 영역 안에서, 특히 섹슈얼리티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문제화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결혼 이야기>(1992)의 지혜(심혜진)는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유지하고 성적으로도 아무런 억압이 없는 건강함을 능동적으로 추구한 첫 번째 여성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또 다른 10년이 지난 지금, 바야흐로 한국영화 안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만개하고 있다. 뭇 여성들이 가정을 떠나거나 이중 살림을 하거나 아예 가정 꾸리기를 포기 혹은 유보한다. 그녀들의 여정은 늘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러저러한 경험과 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여성의 삶에 동반자적 시선을 유지하려는 남성 필자가 쓴, 집을 떠나 길 위에 선 여성들의 오디세이를 일별하면서, 우리가 쪼개진 진실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이제 진정으로 단독자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맞아봐야 내가 누군지 안다” 연인(아버지)을 향해 곡괭이 자루를 휘두르다 또 하나의 군홧발이 광화문을 점거했던 1980년대 초 배우 정윤희는 연거푸 새가 되어 뭇 남성의 맘을 뒤흔들었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에 이어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정윤희에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이 영화들은 그러나 에로영화가 아닐 수 있다. 정진우 감독은 <앵무새…>를 “반체제영화”로 만들었다고 한다. 모종의 영화를 촬영하던 그는 야외 로케이션 현장에서 기관원들에게 연행돼 몹시 곤욕을 치렀다. “청와대에서 쓰라는 여배우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정 감독은 군부 정권을 응징하고자 <앵무새…>를 기획했다. 그에 따르면, 얻어다 키운 ‘가짜 남매’ 문이(정윤희)와 수련의 애절한 사랑을 강압적으로 저지하는 홀아비 최 영감은 군부를 상징한다. 최 영감은 한국전쟁 때 참전했다가 폭탄 파편으로 성불구가 됐고, 그뒤 ‘제복’을 입고 철도청의 선로반장으로 일한다. 과연 <앵무새…>를 반체제영화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문이가 여성캐릭터의 퇴행성을 온몸으로, 에로틱하게 보여주는 건 분명하다. 문이는 틈만 나면 수련과 몸을 섞지만 길러준 아버지의 지엄한 분부에 따라 자기 욕망을 놀랍게 억제해버린다. 그토록 사랑하는 수련이 아무리 ‘여기서 탈출해야 한다’고 설득해도 소용없다. 그리고는 늘 얼굴에 구슬픈 표정을 유지하면서 ‘한맺힌’ 한국의 여인상을 체현한다. 그에게는 자기 주장이 없다. 아니 할 수가 없다. 벙어리로 만들어버렸으니까. ‘기필코’ 그는 강간당하고 만다. 그 ‘죄진 몸’으로 인해 연인과 아버지를 코앞에 두고 일말의 회의도 없이 스스로 생명을 거둔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났으나 ‘문이’는 계속 부활한다.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일매와 태일이는 문이와 수련 같은 ‘유사 남매’로 아버지의 지엄한 분부에 따라 입맞춤조차 지연하며 비극적 사랑을 만들어간다. 태일과 아버지의 연합작전에 부응하는 일매의 주체성은 문이보다 못하면 못했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성에게 원죄처럼 ‘한’을 부여하는 보편적 기제는 뒤틀린 가정이거나 강간이다. 가족사의 굴곡이나 강간의 기억이 어떤 콤플렉스를 만들어내는지 그 심리적 과정을 현미경처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게 김형경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다. 장선우의 <거짓말>에서 Y(김태연)는 그 두 가지 기제에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도전했다. Y가 아버지뻘의 J와 사도마조히즘적 섹스에 빠져드는 계기는 언니들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 큰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살했고, 둘째언니는 강간당한 뒤 자신에게 그 짓을 저지른 남자와 결혼해서 브라질로 이민가버렸다. “난 내가 스물살 되기 전에, 강간당하기 전에 (섹스를) 하고 싶었어.” 주목할 만한 건 Y가 자기를 감시하며 아버지 노릇을 하는 오빠를 계획적으로 제거한다는 점이다. “드디어 보내버렸어. 나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오빠,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대.” 오토바이 사고는 Y의 유인작전으로 벌어진 것이었다. J의 성기가 때리거나 맞아야 단단해지는 이유는 J가 아버지로부터 ‘밧따’를 맞으며 성장했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어렴풋이 설명된다. 군홧발에 짓밟혀온 남자(아버지)들은 대체로 그 운명을 여자(어머니)에게 되풀이했다. 어느 순간, 일방적으로 맞던 Y는 맞기를 원하는 J에게 몽둥이를 든다. “내가 너 만나서 안 때리면 무슨 재미냐. 마치 엄마가 된 기분야.” 이혼할 테니 자기하고 결혼하자는 J에게 Y는 단호하게 말한다. “너 이혼하면 안 만나. 언니(J의 아내)한테 그러듯 나한테도 그럴 수 있어.” 영화 끝, Y는 브라질의 언니에게로 가면서 파리의 J에게 들러 곡괭이 자루로 마지막 쾌락을 안겨준다. 아마도 Y는 J와의 관계에서 어떤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다. 그가 브라질의 언니와 형부에게 날아가 어떤 ‘가르침’를 전수했는지 알 수 없으나 Y의 자아찾기 방식에 우리 사회는 펄쩍 뛰었다. 두 차례의 등급보류가 보여주듯. 아버지의 또 다른 얼굴은 남편이다. 남편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여성은 대체로 바람을 피운다. 한국영화에서 바람피우는 여자는 응징당해왔고, 남편으로부터의 탈출은 번번이 좌절했다. <밀애>에서 미흔(김윤진)의 결말은 시간제 일용직, 싸구려 음식, 단칸방 신세이지만 그는 성공했다. 미흔은 “당신 살도 먹을 수 있을 것” 같던 남자를 어이없게 잃었지만 홀로 독사진을 찍으며 활짝 웃는다. “과거 어느 때보다 살아 있는 것 같다. 활력은 불행으로부터 시작한다.” 왜 그가 굳이 누군가로부터 처절하게 배반당하고서야, 누군가로부터 뜨겁게 사랑받고서야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됐는지 따진다면(충분히 따져야겠지만) 이런 답변도 가능할 듯싶다. “맞아봐야 내가 누군지 안다.”(<파이트클럽>에서) 어쨌든 미흔은 바람을 피우면서 비로소 자신을 찾았다. <정사>의 서현(이미숙)이 그랬듯이. 비록 “바람피웠으니 죽어도 싸지”란 소리를 듣긴 했으나 <해피엔드>의 최보라(전도연)도 바람피우는 아내의 새로운 캐릭터를 열어 보였다. 그는 자기 일에 당당하며, 남편과의 관계에서도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일관되게 주도권을 행사했다. 심지어 아이와의 관계에서 희생 일변도였던 질긴 모성애를 과감히 떨치고 자기 욕망을 더 앞세웠다(비록 이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바람피우는 건 이제 응징의 대상이 아닌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됐다. <거짓말>은 단순히 새로운 세계를 봤다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내 상식의 경계선을 확 허물어뜨리는, 삶이 확장되는 듯한 경험을 줬다.”(심보경 <명필름> 이사) <처녀들의 저녁식사> <바람난 가족> 감독 임상수 인터뷰 “‘바람난 처녀’도 ‘바람난 유부녀’의 경지에 오르길”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바람난 가족>에 이르기까지 섹스, 특히 여성의 섹스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좀 상투적이지만 꼭 필요한 질문이라서. 대답도 상투적이라 미안하다. 기왕에 어차피 하고 살아야 하는 섹스라면 잘(!) 하고 살자는, 정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룬 영화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만큼 신선하고 명쾌하게 여성의 성을 다룬 작품은 없다고 보여진다. 여기에는 여성의 성만을 다루느냐 아니냐의 차이점이 있겠지만, 한국영화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 문제가 특별히 진전되고 있지 않은 까닭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지. 한국 관객의 삶, 감독들의 삶, 비평자들의 삶이 그만큼 진전되지 못하고 서성대고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리하여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건 나에겐 즐거운 일이지만. <바람난 가족>의 화두는 섹스가 아니라 몇 가지 섹스의 풍경을 통해 우리의 삶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주는 일종의 보조수단으로 쓴 듯한데. 친구들에게 난 ‘떡감독’으로 통한다. ‘떡감독’이라는 지위를 즐긴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솔직히 지겹다. ‘떡신’ 찍기도 징글징글하고. <바람난 가족>은 내 일련의 ‘떡영화’의 완결편이다. 이제 ‘떡감독’의 지위를 반납한다. <바람난 가족>에서 바람난 처녀 김연(백정림)은 섹스를 주도할 뿐 아니라 충분히 즐기고 있고, 또 굉장히 쿨하다. 이런 캐릭터는 이제 한국영화에서 새롭지 않다. 그러나 호정(문소리)은 좀 다르다. 섹스에 대해 쿨할 뿐 아니라 섹스에 ‘해탈’한 듯한 모습까지 보인다. 섹스를 삐딱하게 보거나 거부하지 않지만(심지어 남편의 바람도 네가 즐겁다면야 얼마든지 봐줄 수 있다는 태도) 내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 건 다른 데 있다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건 입양아와 친아들처럼,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에서 드러나는데, 호정의 시야는 어디에 닿아 있는 걸까? 바라건대 ‘바람난 처녀’도 언제가 ‘바람난 유부녀’의 경지에 오를 수 있기를. 사실 ‘바람난 할머니’를 포함한 이 세 여자의 삶은 경로는 달라도 모두 한길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단 하루를 살아도 솔직하게 살아야지, 그렇지 않은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야!’ 싱글맘으로의 결말이 마치 유행처럼 쓰이고 있다. 혼자서 일도 잘하고, 아이도 키우고, 연애도 즐기는 건 자유로워 보이지만 가혹한 판타지를 주입하는 건 아닐까. 인생은 원래 가혹한 거다. 일 하면서 먹고살기도, 가족을 꾸리며 애를 키우기도, 연애를 즐기며 살기도, 다 가혹하다.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그만큼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을까? 홍상수 감독의 신작 제목도 그렇지만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가치를 공공연히 밝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임상수 감독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왜 그런가.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여자가 남자의 미래다’라는 얘기를 할 거라고 보이지는 않고…. 내게 한국 남자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며 불안하고 허세투성이며 유치하게 보인다. 마치 바깥 세상을 두려워하는 우물 안의 깡패 개구리처럼. 한국영화의 여성캐릭터는 이제 또 다른 질적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섹스에 쿨한 여성캐릭터는 긍정적이지만 여기에는 남성 리버럴리스트의 판타지가 반영돼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그게- 남성 리버럴리스트의 환상이- 남성 마초나 남성 쇼비니스트의 환상보다는 여전히 나을 것이다. 그런 환상 속에서 어떤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면, 그 환상 속에서 얼마간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