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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영화제] 제16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는 캐치프레이즈의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16회를 맞았다. 이번 영화제에서는 역사와 동시대의 첨예한 이슈를 다루고 차이와 감성의 영역을 개척하는 총 30개국 99편의 초청작이 상영된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신촌 메가박스에서 5월29일부터 6월5일까지 진행된다. 개막작 <그녀들을 위하여>(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 내전에서 자행된 폭력의 역사를 고발한 <그르바비차>(2006)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았던 야즈밀라 즈바니치의 성찰적 로드무비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학살이 자행되던 곳은 이제 이국적인 풍경을 전시하는 관광지가 되어 외국인들을 불러들인다. 호주의 연극배우 킴은 동유럽의 유적과 풍광을 관조하며 주민들의 선량한 환대 속에서 보스니아를 여행하지만 이상한 불면증에 시달린다. 그녀는 자신이 관광객의 시선으로 경유하던 곳이 보스니아 내전 당시 강간이 자행됐던 호텔과 학살이 자행됐던 유적지였음을 이후 알게 되고 깊은 정서적 고통과 죄책감을 느낀다. 관광객의 시선을 거두고 성찰자의 시선으로 보스니아를 다시 찾아 카메라를 든 그녀에게 주민들은 공격적이고 풍경은 잔혹하다. 주연을 맡은 실제 연극배우 킴 버르코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폭력의 기억을 불러내며 시선의 윤리를 모색한다. 여성주의적 시선에서 연대와 공감, 성찰과 액티비즘을 제시하는 ‘새로운 물결’ 섹션에는 현재 가장 역동적으로 활약하는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포진해 있다. 폴란드 최초로 시집을 낸 집시 여성 브로니스와바 바이스의 실화를 엮어낸 <파푸샤>(폴란드, 요안나코스 크라우제/크지슈토프 크라우제)는 1, 2 세계대전에서의 집시 박해와 사회주의 폴란드에서의 집시의 헐벗은 삶을 매혹적인 흑백 영상에 담아냈다. 파푸샤로 불린 바이스는 후설이 “유럽의 영성”이라고 일컬었던 보헤미안의 영혼을 여성적 언어로 노래한 시인이었으나, 집시 공동체의 관습에 반했기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았다. <어메이징 캣피쉬>(멕시코, 클라우디아 세인트-루스)와 <호텔>(스웨덴, 리자 랑세트)은 상처를 지닌 사람들이 타인의 삶을 공감하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따라간다. 사회주의식 프로파간다 연출법을 배우기 위해 북한으로 간 감독의 엉뚱하고 색다른 체험을 다룬 <프로파간다가 영화를 덮쳤을 때>(호주, 안나 브로이노스키)는 논쟁적인 영화다. 석유 개발에 반대하는 선동적 단편영화를 찍고 싶던 감독은 김정일의 북조선식 영화연출론을 전수받기로 한다. 단편영화를 기획하는 과정에 대한 세미다큐멘터리와 북한식 프로파간다 단편영화가 혼합된 영화적 형식도 흥미롭다. 북한의 영화 자료화면, 영화 제작 실태, 인민들의 실생활 등 박물학적 정보들도 가득한, 맹렬하다기보다 유머러스하고 키치적인 작품이다. ‘쟁점: 사랑과 경제’ 섹션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사랑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동시대의 문제를 다룬다. 중국의 신예 류운문의 데뷔작 <과계>(홍콩, 플로라 라우)는 절제된 정서로 정갈하고도 애잔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홍콩과 중국의 갈등과 차별을 배경으로 하여 가난한 대륙 출신 젊은 가장인 운전사와 정서적/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는 부유층 중년 여성이 겪는 파국과 공감의 과정을 따라간다. 톤과 화면 구성을 통해 고독한 무드를 창출해내는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워크와 중년 여성을 맡은 유가령의 내면 연기가 인상적이다. <경유>(필리핀, 한나 에스피아)는 텔아비브에 살고 있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가족과 육아의 문제를 다루었다. 불법노동자 단속과 이주노동자 자녀 강제 추방령으로 인해 가족은 이산의 위기에 처한다. 불가피한 운명에 처한 이들의 막막한 처지는 엔딩 신에서 오래 관객을 잡아끌 것이다. ‘아시아 스펙트럼’에서는 주변부로 몰린 중국 하층민들의 모습을 담아낸 중국 여성감독들의 실험적인 독립영화들을 소개한다. ‘회고전: 카메라 앞의 삶’에서는 1949년 데뷔하여 1950~60년대 일본영화 황금기에 전성기를 보냈고 이후 독립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활약해온 일본의 여배우 가가와 교코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미조구치 겐지, 구로사와 아키라에서부터 동시대 여성감독 이케다 지히로까지 그녀와 함께했다. <동경이야기>(오스 야스지로, 1953)나 <엄마>(나루세 미키오, 1952) 등 거장과 협업한 걸작을 비롯해 오키나와 전투를 배경으로 청춘과 반전을 내세운 좌파적 영화 <히메유리의 탑>(이마이 다다시, 1953)과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패전과 냉전의 트라우마를 반영한 ‘고질라’식 특수촬영물 <모스라>(혼다 이시로, 1962)도 숨겨진 볼거리다. ‘퀴어 레인보우: 열망과 매혹, 포비아를 넘어’ 섹션은 일상에서 성소수자가 겪는 불안을 담는 동시에 사회적 편견에 맞서는 열혈 액티비즘까지 제시한다. 퀴어영화가 지닌 대중성의 한계를 돌파해내려는 시도는 코미디 장르를 차용한 레즈비언영화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질, 이성애도전기>(미국, 미셸 엘렌)는 이성애자가 되기로 결심한 질이 전 애인이자 레즈비언 단역배우인 제이미에게 엉뚱한 시험을 하는 과정을 유러머스하게 따라간다. <마가리타>(캐나다, 도미니크 카르도나/로리 콜버트)는 멕시코 불법체류 가사도우미가 중산층 가족 및 동성애인과 겪는 우여곡절을 따뜻한 시선으로 품는다. 동성애를 향한 차별과 혐오감은 반동성애법으로 악명 높은 러시아의 호모포비아를 다룬 <영 앤 게이, 푸틴 러시아>(영국, 밀렌 라르손)와 남아공의 인종, 종교, 젠더 차별을 파고든 <레즈모포비아>(스웨덴, 미 발케스탈 외)와 같은 다큐멘터리들에서 가장 쟁점적으로 드러난다. ‘아시아 단편경쟁’ 섹션에서는 재능 있는 아시아 여성감독을 발굴하여 시상하고 있다. <청소시간>(이스라엘, 알라모크 마르샤)과 <말라리아와 모스키토>(타이, 핌파가 토위라)는 아시아 여성의 노동, 경제, 이주의 문제를 다룬다. 고아원에서 성장한 소녀가 난생처음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조부와 치매에 걸린 조모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따라간 <나이아가라>(일본, 하야카와 지에)는 단정한 프레임에 인간에 대한 절제되고 속 깊은 이해를 담아낸 인상적인 단편으로, 올해 칸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되었다. <콩나물>(한국, 윤가은)은 할아버지의 제삿날 심부름을 간 소녀의 경이로운 모험담이다. 독립영화의 흔한 배경인 달동네를 식상하게 만들지 않는 알찬 공간 활용과 아역배우 김가은의 범상치 않은 연기가 돋보인다. 청각장애 남매의 고달픈 하룻밤을 다룬 <미드나잇썬>(한국, 강지숙)에서는 보이지만 들리지 않는 세계를 사는 사람들의 감각을 잡아내는 시네마틱 터치가 감지된다. <뮤즈가 나에게 준 건 잠수병이었다>(한국, 김세인)는 만듦새는 다소 투박하지만 감성을 구현해내는 직관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올해부터는 아시아 단편경쟁에 10대 여성영화인들을 발굴하기 위한 ‘아이틴즈상’이 신설되어 창의적이고 발랄한 10대들의 영화도 소개된다. 시민의식과 공동체의 공감대가 약해지면서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불합리를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담론 공간에서 논의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강퍅한 경제논리와 동일성의 폭력, 근본주의적 맹신에 밀려 절망하는 이들에게 단편 <탈리타 쿰>(한국, 박헌영)이 제시하는 잠언이야말로 본 영화제의 취지에 맞는 가장 정치적인 슬로건이 될 것이다. 우리가 왜 여기서 절망해야 하는가? 해방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으므로 탈리타 쿰, 소녀여 일어나라!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병에 담긴 시간

*5월16일 일기에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로크>는 매우 독창적인 85분 길이의 캐릭터 스터디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인물 유형에서 벗어나는 주인공(톰 하디)의 성격도 흥미롭고,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장거리 운전의 단일한 설정으로 탐구한 형식도 확신에 넘친다. 한데 승용차 운전석 중심으로 공간이 설계된 <로크>는 적절한 마스킹 시설을 갖추지 않은 상영관에서 훼손되기 쉬운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밤의 고속도로를 배경으로 2.35:1의 비율로 촬영된 <로크>의 구도는, 화면 속 암부(暗部)나 차창의 테두리가 마스킹되지 않은 스크린의 검은 여백과 뒤섞이면 흐트러지기 십상이다. 5/16 7년 만에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연출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보고 뭉클했다. 한 영화의 훌륭함을 판단하는 일과 별개로, 사적으로 소중히 여기게 되는 경우는 해당 영화를 마치 한 사람의 살아 있는 인간처럼 느끼는 과정을 포함하는데, 브라이언 싱어판 <엑스맨> 영화들도 내겐 그렇다. 하지만 왜? 싱어가 연출한 세편의 <엑스맨> 영화와 직접 메가폰을 잡지 않은 프랜차이즈의 나머지 사이의 차이는 뭘까? 엑스맨의 차별성은 타고난 초능력이 수치와 영광, 둘 모두의 근원이라는 설정에 있다. 한데 브라이언 싱어의 연출은 액션 블록버스터에 필수적인 스펙터클과 쾌감을 책임지는 영광의 요소 못지않게, 주류 사회에서 축출된 뮤턴트들의 모멸감에 작가/감독으로서 비상한 관심을 보인다. <엑스맨> 창세기의 1장1절 격인 어린 매그니토의 유대인 수용소 장면은 이 경향을 함축한 예고편이다. 첫 번째 <엑스맨> 서사의 큰 부분은 기댈 사람도 갈 곳도 없는 처지인 울버린과 로그가 눈 덮인 캐나다를 방랑하는 이야기다. <엑스맨2>의 명장면 중 하나는 아이스맨 바비(숀 애시모어)가 가족 앞에서 정체성을 커밍아웃하고 사실상 절연당하는 실내 시퀀스이다. 2편에서 브라이언 싱어는 자연사 박물관에 견학 간 자비에 영재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이 호모 사피엔스 관람객들로부터 받는 두려움과 경멸의 시선 사이를 빠져나오는 일화를 시간과 정성을 들여 만들기도 했다. 달리 말해,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에 있고 다른 <엑스맨> 영화에 없는 요소는 바로 다수자 호모 사피엔스의 시선으로 대상화된 뮤턴트의 이미지다. 싱어의 엑스맨들은, 설정만 마이너리티고 일단 영화 내부로 들어가면 부러운 능력을 뽐내는 우월한 권력자들이 아니다. 다수자의 시선으로 프레임에 갇히는 순간 뮤턴트들은 무서운 괴물 아니면 동정해야 할 존재로 주변화된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파리평화협정 조인식 장면이 눈길을 쓴다. 미스틱(제니퍼 로렌스)의 무기개발자 암살을 예방하려고 달려간 엑스맨들의 시도는 빗나가고, 예기치 못한 소동이 뒤따른다. 창밖으로 탈출한 미스틱은 조인식을 보러 몰려든 기자들과 시민들의 무리 가운데 돌연변이의 파란 몸으로 떨어지고 그녀를 뒤쫓아 뛰어내린 매그니토(마이클 파스빈더)와 비스트(니콜라스 홀트)도 뮤턴트의 모습을 노출한다. 브라이언 싱어는 이 대목에서 옳다구나 앞다투어 뮤턴트들을 촬영하는 70년대 방송 카메라의 4:3 비율 화면으로 스크린 사이즈를 바꾼다. 관객은 갑자기, 신기하고 징그러운 구경거리 앞에 경악하며 웅성대는 군중의 시점숏으로 우리의 주인공들을 쳐다보게 된다. 액션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사실적인 질감으로 흔들리는 뉴스 카메라 화면에 잡힌 엑스맨들은 훨씬 불리하고 연약해 보인다. 겨우 도망친 미스틱은 레이븐의 모습이 되어 파리의 한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는다. 이때 조금 전 우리가 본 뉴스 카메라 화면이 TV에 보도되자 간호사가 동정을 표한다. “저렇게 태어나면 얼마나 끔찍할까요? 그녀에게도 가족이 있을까요?” 브라이언 싱어는 외부자의 시선이 엑스맨들에게 주는 차가운 금속성의 촉감을 안다. 그는 액션 복판에서도, 더 넓은 세계에서 돌연변이들에게 배정된 좌표를 잊지 않는다. 다수자들은 마이너리티와 마주칠 때에만 스스로가 지닌 관점을 깨닫지만 소수자들은 삶의 모든 순간 ‘정상인’들의 시선을 통렬히 의식한다. 싱어 스스로가 게이라는 사실도 이 결과를 끌어낸 하나의 필요조건일 것이다. 그러나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서명이 담긴 <엑스맨> 영화들이, 이야기 밖 연출자의 스토리텔링이라기보다 엑스맨의 일원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세계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영화 내부에 있다. 5/19 브렛 래트너, 매튜 본 감독의 3, 4편보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1, 2, 5편을 선호하는 <엑스맨> 관객 열명 중 일곱명은 ‘우아함’을 거론한다. 새삼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우아(優雅)하다는 표현을 쓰는지 생각해보게 된다. 보다 넓은 의미이긴 하지만 철학자 테오도르 립스는 오래전 ‘우미’(優美)라는 미적 범주를 “딱딱하거나 날카롭거나 거칠지 않은 것”, “숭고를 배척하지 않고 크기와 고요함, 깊이를 갖는 것”과 연관해 설명했다. 반면 더 좁은 의미의 우미, 그러니까 우리가 요즘 흔히 말하는 우아함과 비슷한 아름다움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철학자 E. V. 하르트만은 “숭고와 대립되는 가련함”, “도덕적 의지에 대한 떳떳함”을 조건으로 나열한 바 있다. <엑스맨2>나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우아하다는 전반적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각각의 요소를 전체로 통합하는 방식과 액션 시퀀스의 특징에서 찾아볼 수 있을 법하다. 싱어의 슈퍼히어로영화는 가장 큰 쾌감을 개인 숭배적인 캐릭터 묘사나 최종적인 승리의 후련한 스펙터클에서 구하지 않는다. 재미에 접근하는 스타일이 간접적이어서 덜 아등바등해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다. (좀더 부정적인 관객은 이 특성을 “잔재미만 많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앙상블 영화로서 당연한 요건일 수도 있지만 <엑스맨> 시리즈의 큰 재미는 주요 인물 두셋의 카리스마나 일대일 갈등이 아니라, 사방으로 가지를 치며 사안에 따라 합종연횡하는 인물들의 유동적 그물망에 있다. 예컨대 미스틱은 극중에서 많은 남성 뮤턴트들과 각각 다른 의미로 연결된다. 프로페서 X 찰스는 그녀에게 아빠 같은 오빠고 비스트는 로맨틱한 남자친구지만 생각의 차이로 인해 관계가 답보된 상대이며 매그니토는 연상의 연인 분위기를 풍기는 정치적 멘토다. 울버린과는 국면에 따라 격투를 벌이기도 하고 유혹하기도 하는데, 무정부주의 단독자인 미스틱이 보기에 본인과 닮은 면이 있으면서도 줄곧 프로페서 X 진영에 머무르는 울버린은, 공연히 그냥 도발하고 싶어지는 상대가 아닐까 짐작하게 된다. 한편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는 미스틱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표면적 경쟁 아래에서, 서로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자극하는 친구를 향한 애증 싸움을 전개한다. 인물들의 관계는 좀처럼 고정되지 않는다. 심지어 울버린은 <엑스맨> 1, 2편에서 프로페서 X로부터 배운 지혜를,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 이르러 젊은 프로페서 X에게 거꾸로 가르친다. 멋진 서클이다. 브라이언 싱어는 영화 잡지 <엠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동시에 발생하는 장면을 사랑한다”고 취향을 밝힌 적이 있는데 영화를 보면 수긍이 간다. 브라이언 싱어판 <엑스맨> 영화 세편을 통틀어 최종 액션 클라이맥스를 가장 인상적인 신으로 기억하는 관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는 솔직히 약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싱어는 누가 봐도 최고의 액션감독이 아니다. 다만 싱어의 대표적 액션 신들은, 세부를 소거하고 나면 궁극적으로 ‘주먹 싸움’ 내지는 큰 물리력의 충돌로 수렴되는 여타 슈퍼히어로영화 속 전투와 확실히 구별된다. 예컨대 <엑스맨2>의 오프닝에서 백악관에 침투한 나이트 크롤러(앨런 커밍) 액션에서 무술보다 기억에 남는 요소는, 텔레포트 궤적을 따라 펑펑 터지는 푸른 잔상의 시각효과와 존 오트먼의 유려한 편집, 그리고 관능적으로 꿈틀대던 자객의 꼬리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시간을 미분하는 능력을 지닌 퀵실버(에반 피터스)의 펜타곤 주방 액션은 사실 액션 장면이라고 부르기도 주저된다. <매트릭스> 이후 ‘불릿 타임’을 제일 멋지게 시각화한 이 장면은 그냥 소년의 유희다. 액션은 우리 머릿속에서 비로소 일어난다. 초고속 움직임이라는 점을 공유하는 두 장면을 브라이언 싱어는 전자는 인간의 관점으로 아주 빠르게, 후자는 뮤턴트의 시점으로 아주 느리게 연출했다. 이는 물론 나이트 크롤러의 파워는 텔레포트고 퀵실버의 능력은 “그냥 빠른 것”이라는 차이점과도 맞물린다. 두 장면은 한스 짐머 스타일의 쿵쾅대는 액션영화 스코어와 딴판인 음악으로 반주된다. 아니, 정의된다. 싱어가 두 액션을 위해 고른 모차르트 레퀴엠의 <신의 분노>와 70년대 팝송 <타임 인 어 보틀>은 관객에게 매우 친숙한 곡들로서, 영화 밖으로부터 강력한 정서를 끌고 들어와 두 액션 장면의 목표를 완성한다. 백악관 신의 목표는 비장미이고, 펜타곤의 그것은 유머다. 브라이언 싱어의 야심만만한 액션 신들은 싸움이라기보다 공연이다. 5/20 목적지까지 약 12시간 비행기를 타야 하는 출장길에 올랐다. 연도는 가물가물하지만 항공기 이코노미 클래스에 개인용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 도입된 걸 처음 보았을 때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자못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언제 어떤 영화를 볼지 내가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차하면 착석하자마자 기내지를 뒤적여 나만의 미니 영화제를 프로그래밍할 수도 있지 않은가? 미개봉작도 꽤 있고!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낙차는 여객기 비행 고도 3만 피트보다 크다. 우선, 나이 듦에 따라 장거리 비행의 실체는 돈 내고 자초한 고문과 비슷해지고, 이코노미 클래스 좌석 공간은 어째 점점 좁아진다(고 적어도 체감한다). 겨우 이륙해서 아침부터 공항에 지각하지 않으려고 경직했던 근육이 풀리는가 싶으면, 이내 무릎 밑으로 피가 통하지 않는 시간이 도래하고 안구는 바짝바짝 메말라간다. 재활용 산소를 들이쉬고 내쉬다 보면 정신은 점점 몽롱해진다. 요컨대 도저히 지적, 감정적 도전을 요구하는 영화를 감당할 컨디션이 아니다. 아무리 영화평론계의 태두라 해도 장거리 비행 중에는 가벼운 영화를 고를 게 분명하다고 스스로를 위안한다(게다가 태두의 반열이라면 장년에 접어들었을 테니까). 게다가 손바닥 두개만 한 스크린에 최적화되느라 좌우상하가 잘린 화면과 조악한 화질도 예전과 달리 심각하게 마음에 걸린다. 오로지 새 영화를 공짜로 본다는 사실에 몰입해 눈에 보이는 게 없던 순수의 시대가 내게도 있었건만. 결국 비행기 여행 중 선택하는 영화는 “지상에서는 일부러 보러 갈 일이 없을 듯한, 그러나 향후 업무에는 도움이 될 타이틀”로 귀착되고 만다. 그리하여 최근 끝까지 관람한 영화가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 <리스본행 야간열차> <잭 라이언: 코드 네임 쉐도우> 등이다. 오히려 영화가 훌륭해지려는 조짐을 보이면 좋은 영화의 풍미를 관람의 악조건이 망칠까봐 겁나 창을 닫게 된다. <머드>가 그랬다. 나는 ‘하늘을 나는 멀티플렉스’에서는 영화의 가치가 달라지는 현상을 화장실에 다녀오다 다시 실감했다. 하얗게 빛나는 수십개 스크린의 1/4 정도가 <뽀롱뽀롱 뽀로로>와 <겨울왕국>에 점령돼 있었고, 그들이야말로 어린 승객들의 짜증과 보챔으로부터 우리 비행기의 쾌적함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나만의 작은 영화제’라는 애초의 낭만적 상상 가운데 실현된 대목이 없잖아 있긴 하다. 연속으로 서너편을 꾸역꾸역 관람한다는 것, 졸다가 깨다가 하며 영화를 본다는 것, 한번 그 안에 들어가면 떠날 수 없다는 강제 등이 영화제와 항공기 영화 감상의 공통점이다. 그렇지만 이번 여행 중 개인용 스크린에서 내가 본 가장 감격적인 영상은, 비행기 전방과 하부에 설치된 카메라에 잡힌 창공과 저 아래 펼쳐진 지상의 풍경 이미지였다. 언제부터 시작된 서비스인지는 모르겠지만 폐소공포증 해소에 큰 보탬이 됐을뿐더러 무척 아름다웠다. 내가 죽기 전에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다른 대륙의 나라로 여행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다면 어떤 액정도 스크린도 아닌 차창 밖만 바라보고 싶다. 그 풍경의 띠가 나만의 영화가 될 것이다. 좋아요 <오큘러스>의 훌륭한 누나 마이클 플래너건 감독의 <오큘러스>는 흑마술을 부리는 거울을 모티브로 삼은 오컬트 호러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마음의 균형을 잃어버린 부모와 그들의 불화가 얼마나 거대하고 근원적인 공포가 되는지 생생히 그리는 애절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현재와 과거 시제가 교차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애틋한 인물은, 주인공 남매 중 누나 케일리(아날리즈 바소)다. 이 빨간머리 말괄량이는 동생과 비비탄 싸움에 열중하고 무서운 걸 보면 도망치는 평범한 소녀지만 집안에 위기가 닥치자 가장으로 손색없는 용기를 발휘한다. 동생을 위해 목숨을 거는 희생을 불사하고 참담한 결과 앞에서도 가족의 불명예를 억울해하며 “나중에 커서 강해지면 꼭 우리가 바로잡자”고 다짐한다. 사랑과 논리로 무장한 그녀는 악마의 거울이 수세기 동안 대적한 최강의 적수였을 게 분명하다.

가족과도 만나지 않고 이브의 목소리와 제스처 유지했다

이브 생로랑의 전기영화가 만들어진다고 할 때 그를 누가 연기할 것이냐 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을 것이다. <이브 생 로랑>이 프랑스에서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던 걸 감안하면 주연배우 피에르 니네이는 합격점을 받은 것 같다. 2000년대 후반에 배우로 데뷔하여 몇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코미디영화 등에서 재능을 발휘한 그는 마침내 <이브 생 로랑>을 통해 보다 진지하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 영화의 주연을 맡기 전, 당신은 이브 생로랑이라는 ‘사람 그리고 예술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나. =이브 생로랑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알아갈수록 놀라웠다. 개인적인 고통을 위대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브 생로랑 역을 맡은 이유는 무엇이었나. =패션의 역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위대한 예술가 역을 맡게 된 것은 아무리 말해도 행운이다. 이브 생로랑은 다양한 면모를 지닌 성숙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를 연기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지만, 그가 내면적인 고통과 고난을 통해 새롭고 아름다운 것을 창조해냈다는 점에 가장 끌렸다. 한편, 그는 매우 연약하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조울증을 앓았는데 이 점이 연기하기에 가장 힘든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주었으므로 잘 묘사하고 싶기도 했다. -이브 생로랑이 되기 위해 참고한 것이 있나. =많은 리서치를 했다. 촬영 전 다섯달 정도 준비를 했다. 많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관련 서적들을 읽었다. 이브처럼 되려고 항상 노력했다. 3명의 코치에게서 바느질하는 법, 스케치하는 법을 배웠고,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단어들과 움직임과 걸음걸이 등을 공부했다. 촬영 현장에서는 이브의 모습과 의상이 찍힌 사진들을 보드판에 걸어놓고 매일 아침 보았다. 그는 그의 유약한 성격이 그대로 담겨 있는 매우 독특한 목소리를 지녔는데 그것도 그대로 지키고 싶었다. 그런 목소리와 제스처를 잊지 않기 위해 일부러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을 정도다. -당신은 영화 속의 어떤 장면을 연기할 때 가장 짜릿했나. =70년대 모로코 시절. 그 시기는 그의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때였다. 히피 시절이랄까. 디자이너로서도 이전과는 다른 것을 창조해내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이브 생 로랑>은 베르트랑 보넬로가 연출한 <생 로랑>과 다르게 이브 생로랑 재단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으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신의 연기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 건 어떤 것들이었나. =이브의 평생 동반자였던 피에르 베르제가 도와주고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건 우리 모두에게 행운이었다. 피에르와 이야기하면서 그들의 사적인 부분, 그리고 그들이 공유했던 사람들과 장소에 대해 잘 알 수 있었다. 그 덕에 이브 생 로랑의 작업실을 구경하고 오래전부터 함께 작업한 사람들,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다. -당신은 이브 생로랑에게서 연기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대신 피에르 베르제에게서 그들 관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피에르 베르제와 이야기를 나눴다면 주로 어떤 것들이었나.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당신이 알게 된 이브 생로랑의 내밀한 면모는 어떤 것들이었나. =사실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베르제에 관해서 무례한 사람이라는 평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본 피에르는 매우 똑똑하고 명료했으며 도움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이브와 자신 사이에 있었던 많은 사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이브의 유머감각에 대해 강조했다. 이브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것들을 처리하는 것에 매우 힘들어하고 견디기 어려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브에게는 피에르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피에르가 자신이 말하고 싶은 부분만 골라 말한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은 이브 생로랑에 관한 여러 가지 시선 중 중요한 하나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브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베티 카트루스(이브와 절친했던 모델)가 훨씬 더 쉽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는 이브에 관련한 마약, 파티, 섹스, 술 등 어떤 금기사항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말해주었다. -가스파르 울리엘은 베르트랑 보넬로의 <생 로랑>에서 이브 생로랑을 연기한다. 당신은 이 영화를 보았는가. 그의 연기와 당신의 연기가 지닌 차이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영화는 아직 보지 못했다. 아마도 다른 이야기와 출연진과 감독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다른 영화일 것이다. 개봉하면 극장에서 볼 생각이다.

[국내뉴스] 아시아영화의 미래를 지원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2014년 아시아영화펀드(Asian Cinema Fund, 이하 ACF) 선정작 29편을 발표했다. 아시아영화의 우수한 자원을 발굴하고 체계적인 지원을 통해 육성해온 ACF에는 올해 총 52개국에서 565편의 프로젝트가 접수되어 해마다 높아지는 관심과 위상을 증명했다. 이는 지난해보다 30%가량 증가한 수치인데 특히 인도와 중국쪽 프로젝트가 211편이나 된다. 홍효숙 프로그래머는 “단순히 편수가 많은 게 아니라 좋은 프로젝트도 많다는 게 올해의 특징”이라며 지원작 증가에 대해서는 “특별한 홍보의 결과라기보다 전반적으로 아시아권 독립영화제작 펀딩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했다. 시나리오 개발 중인 장편 극영화를 지원하는 ‘장편 독립영화 인큐베이팅펀드 부문’에는 필리핀 한나 에스피아 감독의 <불을 만드는 법>을 비롯해 5편의 아시아영화 외에 신이수 감독의 <이민자들>, 오멸 감독의 <인어전설>, 박이웅 감독의 <용문신을 한 소녀> 등이 기회를 얻었다. ‘다큐멘터리 AND펀드 부문’에는 중국 자오리앙 감독의 <먼지처럼>, 인도의 셜리 아브라함 감독의 <설탕을 좇는 개미처럼> 등 아시아영화 9편과 박경근 감독의 <군대놀이> 외 한국영화 5편이 선정됐다. 그간 쉽게 만날 수 없었던 레바논영화(마리 저마노스 아바 감독의 <파티마>)가 선정된 것도 눈에 띈다. 후반작업 지원으로 완성된 영화를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프리미어 상영하는 ‘장편독립영화 후반작업지원펀드 부문’에는 총 7편의 작품이 뽑혔다. 17회 부산영화제 때는 방글라데시 출신 모스타파 사르와르 파루키 감독의 <텔레비전>이 바로 이 부문의 지원을 받고 폐막작으로 상영되었는데, 올해는 같은 방글라데시 감독 아부 샤헤드 이몬의 <잘랄 이야기>가 선정되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번 영화는 아시아영화아카데미(AFA) 졸업생인 아부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홍효숙 프로그래머는 “아시아의 젊은 감독이 AFA 교육을 받고 ACF의 지원으로 영화를 개봉하는 선순환 구조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고 밝혔다. 이 밖에도 손승웅 감독의 <영도>, 이광국 감독의 <꿈보다 해몽>, 박석영 감독의 <들꽃>이 선정되어 부산영화제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김소희의 오마이 이슈] 4대강 구상권도 청구해야

열아홉살만 되면 동물원에서 먹고 자며 사육사로 일할 원대한 꿈을 꾸고 있는 우리 집 어린이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큰빗이끼벌레만 나오면 진저리를 친다. 보기도 흉물스럽지만 함께 나오는 이야기가 아홉살짜리가 듣기에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유병언 잡아다가 세월호 참사 수습 비용 물릴 생각만 할 게 아니라 4대강 사업을 주도한 일당에게 구상권 청구할 준비도 해야 할 때다. 유병언은 어디 있는지 모르지만 미스터 각하는 어디 있는지 모두 알잖아. 멀쩡한 강을 인공 호수로 만들어 대대손손 가늠조차 어려운 손해를 끼친 건 명백한 범죄 행위이다. 이대로는 국가 재정도 파탄난다. 그런데 4대강 사업으로 이득 본 자가 누구… 지? 건설사? 줄도산이라며. 그럼 몇몇 건설사? 임직원이며 하청 노동자며 수당 올랐다는 소리 듣지 못했다. 굳이 꼽자면 그 건설사에 투자한 몇몇 큰손과 오너 정도? 그리고 찬성한 학자와 관료들? 양심과 영혼을 팔아 알량한 자리보존했다는? 4대강 사업 후유증을 취재하는 지인의 말로는 당시 찬성한 이들 가운데 지금 연락되는 사람 아무도 없다는데. 대체 누가 이득을 봤냐고요. 수자원공사는 빚더미에 앉았고 강은 저렇게 푹푹 썩어가고 있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자전거 거꾸로 타시는 그 한분밖에 안 남는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좀 제대로 했으면 하는 사람들의 마음도 4대강 못지않다. 해도해도 너무한다. 이들에게는 민심도 시류도 스치는 바람일 뿐. 완전히 고인 물이다. 흘러본 지 너무 오래돼 자신이 원래 뭐였는지도 모르는 ‘정신나간 낙동강’에 버금간다. 박원순이 왜 재선에 성공했는지, 권은희가 왜 박수 받았는지, 노회찬에게 왜 미안해야 하는지 도통 모른다. 눈앞의 이익을 좇으면 다행이게. 눈앞의 이익이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부리는 고인 욕심이란, 정치적 큰빗이끼벌레의 토양만 될 뿐이다.

[culture highway] <터널 3D>와 호랑 작가의 무서운 콜라보

<터널 3D>와 호랑 작가의 무서운 콜라보 방심하면 당한다. 여름이 되면 찾아오는 공포웹툰의 정석, <옥수역 귀신> <마성터널>로 유명한 호랑 작가가 개봉을 앞둔 공포영화 <터널 3D>의 콜라보 웹툰으로 돌아왔다. 특유의 플래시 효과와 오싹한 사운드로 완성한 생생한 공포는 <옥수역 귀신> 이상이라는 반응. 생각 없이 스크롤 막 내렸다간 심장도 함께 덜컥 내려앉을지도 모르니 전후좌우 잘 살피고 경건한 마음으로 접하도록! 반드시 PC로 볼 것. 삶과 춤이 하나되는 순간 중력을 거스르는 춤꾼들의 몸짓, 삶과 춤이 하나되는 순간을 포착해온 사진가 조던 매터의 신작이 한국을 찾는다. 사진전 <매지컬 모먼트: 우리 삶의 빛나는 순간들>에서 공개되는 63점의 신작엔 태양의 서커스 출신의 폴 곡예사 에두아르 두와예, 헝가리 국립서커스단에서 활동한 공중곡예사 빅토르 프라뇨 등과의 협업 작업들이 포함되어 있다. 10월26일까지 서울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에서 마법과도 같은 순간과 조우할 수 있다. 하늘과 닿은 호수의 선물 체 게바라를 낳은 뜨거운 땅에서 그의 어머니는 감자를 캤다. 박노해 시인이 혁명의 역사를 안고 흘러온 볼리비아의 삶과 사람을 카메라에 담았다. 박노해 시인의 <티티카카>전은 부암동 라 카페 갤러리에서 7월25일부터 11월19일까지 넉넉히 진행된다. 무료관람이며 매주 목요일은 휴관한다. 엔니오 모리코네의 창작의 비밀 속으로 세계 영화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 엔니오 모리코네는 지금도 매달 영화음악을 작곡하고, 세계 각지의 공연 스케줄로 1년이 꽉 찬다. 뉴욕대학 영화과 안토니오 몬다 교수와 그가 함께한 인터뷰집 <엔니오 모리코네와의 대화>는 창작을 둘러싼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계 인사들과의 우정,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까지 들려준다. 지금도 그는 자기만의 ‘절대음악’을 꿈꾼다. 마스무라 야스조 ‘아내 삼부작’ DVD 발매 일본 전후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과 심리를 심원하고 세련되게 파헤쳤던 일본영화의 거장 마스무라 야스조의 대표작들이 DVD로 출시됐다. 이른바 ‘아내 삼부작’이다. <아내는 고백한다>(1961), <세이사쿠의 아내>(1965), <하나오카 세이슈의 아내>(1967)다. 와카오 아야코가 연기하는 기이하고 섬뜩한 아내들을 당신은 만나게 될 것이다. 영화의 전당이 발매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엄격하고 무거운 미술관은 가라! 서울시립미술관이 스토리온에서 방영했던 아트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트 스타 코리아>와 콜라보 작업을 진행 중이다. 최종 톱3에 오른 구혜영, 신제현, 유병서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나는 3인전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바로 그것. 실험정신과 유희로 가득찬 젊은 작가들의 번뜩이는 재치를 확인할 수 있다. 6월10일부터 8월3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3층에서 열린다. 눈물을 머금은 피아노 진도 앞바다에서 아이들이 돌아오지 못한 지도 벌써 100일이 되어간다. 전 국민이 느끼는 상실의 감정을 위로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나섰다. 7월24일 오후 7시30분, <백건우의 영혼을 위한 소나타> 독주회가 열린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사람들이 도착해야 했을 제주항, 바로 그곳에서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 2악장으로 시작해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의 죽음’으로 끝날 이번 연주회는 제주방송이 녹화해 SBS에서 방영할 예정이다. 돌아온 전설의 디바 김추자 컴백 최근 가요계에 가장 큰 이슈이자 가장 조용한 이슈는 아무래도 김추자의 컴백인 것 같다. 33년 만의 귀환은 시끌벅적한 반응을 일으켰지만 정작 앨범이 나온 뒤에는 큰 반응이 없는 것 같다. 왜일까. 일단 이 음악이 라디오나 텔레비전에 나오지 않는다. 음원 시장의 경우에도 아이돌 이슈에 가려져 별 반향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앨범을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김추자의 컴백은 앨범 판매와 다른 맥락에서 봐야 하기 때문이다. 김추자는 컴백 기자회견에서 공연 중심으로 활동하겠다고 했다. 왜일까. 2013년 기준으로 한국 공연 시장은 뮤지컬과 대중음악 콘서트의 규모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체의 50.6%는 뮤지컬이고, 31.6%는 대중음악 콘서트다. 특히 콘서트는 2012년 기준으로 1839억원을 기록했는데 2010~12년의 연평균보다 55.5%나 증가한 액수다. 이런 현상의 근원은 2011년 영화 <써니>가 700만 관객을 기록했던 데에 있다. 요컨대 영화를 소비한 중•장년층이 공연시장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김추자의 컴백은 이런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음반 판매는 공연을 위한 것이다. 이런 구조는 1980년대 미국 음악 시장에서 흔한 것이었다. 한국의 음악 시장도 바야흐로 어떤 지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런던] 극장에서 만나는 새 닥터

‘변화’에 유독 둔감한 탓일까. 영국에는 30여년 이상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드라마 시리즈가 특히 많다. 1960년 12월 첫 방송을 시작한 <코로네이션 스트리트>는 올해 55번째 시즌을 내놓았고, <이스트 엔더스>는 1980년대 방송을 시작해 현재까지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국의 장수 드라마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하는 작품으로 1963년 시작해 2005년부터 시즌제를 도입한, 기네스북이 ‘역대 가장 성공적인 SF 시리즈’로 인정한 <닥터 후>를 빼놓을 수 없다. 영국의 공영방송 는 지난 7월25일, <닥터 후>의 ‘12대 닥터’ 피터 카팔디가 출연하는 8번째 시즌의 첫 번째 에피소드를 과 더불어 영국 전역의 영화 상영관에서 동시 상영할 예정이라는 뉴스를 내놓았다. 이는 지난해 11월23일 <닥터 후> 탄생 50주년을 기념한 에피소드, <닥터의 날>의 성공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는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등 전세계 95개국 1500개 이상의 상영관에서 <닥터의 날>을 15개 언어로 동시 방영했고, 이 기록은 기네스북에서 다시 한번 세계기록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셜록> 시리즈의 성공으로 재능을 다시 한번 인정받은 <닥터 후>의 총괄감독 스티븐 모팻은 “지난해 11월 우리의 닥터는, 텔레비전만 점령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닥터의 날>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다!”라고 회상하며 “다시 한번, 극장에서 우리의 새 닥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고 이번 이벤트에 대해 설명했다. 구체적인 예매 방법이나 참여 극장에 대한 정보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첫 에피소드의 제목은 로, 닥터 후가 동행자 클라라(제나 콜맨)와 함께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으로 시간여행을 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을 예정이다. 피터 카팔다는 <선데이 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클라라와 닥터가 결코 로맨스로 엮이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닥터의 관심사는 결코 연애가 아니”라는 것이다. 는 이번 에피소드가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가는 만큼, 팬들이 과거 닥터에게 목숨을 빚진 적이 있는 패터노스터 갱- 마담 바스트라, 제니 플린트, 스트렉스- 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김중혁의 바디무비] 먹는 것이 곧 나라면, 나는 누구인가?

※ 소설 <언더 더 스킨>과 영화 <언더 더 스킨>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의 달인을 소개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수십년간 산속에서 혼자 살며 생활하는 사람이 나온 적이 있다. 마당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지은 다음, 텃밭에서 갓 뽑아낸 오이와 고추와 방울토마토 등을 함께 먹는 게 주식이었다. 다른 반찬은 아무것도 없고, 소금이나 간장, 고추장도 없이 밥과 채소만 먹으며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제작진이 희한한 행동을 했다. 달인에게 작은 선물을 해주고 싶다며 라면을 끓여준 것이었다. 과연 그게 옳은 일이었을까, 고개를 갸웃거릴 새도 없이 화면 가득 환하게 웃고 있는 달인의 표정이 보였다. 눈물이라도 곧 흘릴 것 같았다. 라면은 10년 만이라고 했다. 라면을 맛있게 먹은 달인은 취재진에게 삶은 감자를 내주었다. 취재진의 기습 질문. “라면이 좋아요, 감자가 좋아요?” 달인은 멋쩍은 얼굴로 대답했다. “옛날에는 몰랐는데요, 지금은 라면이 좋네요.” 아마도 달인에게 라면은 특별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달인은 라면만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대해 잠깐 얘기했다. 라면을 보는 순간 그 시절이 떠올랐을 것이고, 라면을 먹는 순간 그 시절의 공기를 함께 마셨을 것이다. 음식에는, 특히 라면과 같은 자극적인 음식에는 맛과 함께 추억을 밀봉하는 특별한 기능이 숨어 있게 마련이다. 외할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면 나는 돼지고기가 떠오른다. 외할머니의 장례 때 외갓집 마당에서 숯불에다 구워 먹었던 삼겹살의 쫄깃한 맛이 떠오른다. 외할머니의 죽음이 슬펐지만 고기는 달고 달았다. 불고기만 보면 나는 고향집이 떠오른다. 대학 때 대구에서 자취를 했는데 일주일에 한번 김천 고향집에 갔다. 기차역에서 내려 집으로 갈 때면 늘 불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매일 밥을 거르고 다닐 게 뻔하다는 어머니의 판단 때문에 (정확하십니다!) 거의 매주 불고기를 해놓으셨다. 삼청동에만 가면 닭고기가 생각난다. 삼청동의 친구 집에 얹혀살던 시절, 나는 집에 들어가기 전이면 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뭐 필요한 거 있냐?” 친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프라이드치킨.” 동네의 닭집은 하나뿐이었고, 집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나는 얹혀산다는 미안함을 늘 프라이드치킨으로 보상했다. 도대체 닭을 몇 마리나 먹었을까. 육식은 자극적이다. 씹고 뜯기 때문에, 우리와 비슷한 어떤 동물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한달 동안 채식을 해본 친구가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채식의 좋은 점이 뭔 줄 알아? 채식을 하고 나면 고기가 훨씬 더 맛있다는 거야.” 웃자고 하는 말이겠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는 농담이다. 육식이냐 채식이냐는 어려운 문제다. 비참하게 사육되는 동물들의 모습을 볼 때나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동물들을 알게 됐을 때, 당장 육식을 끊고 싶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육식의 시간에 길들여져 있고, 고기의 맛에 중독돼 있다.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육식과 채식을 나누기 전에 과연 ‘동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해결해야 된다면서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사례를 소개한다. 사회 문화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심리학, 철학, 기호학을 공부하는 각각의 집단들과 다양한 학자들에게 ‘동물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모든 집단을 충족시켜줄 만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모든 학자들이 ‘동물’이라는 단어를 파고들수록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민감한 소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과 동물을 구별짓기 위해서 ‘짐승’이라는 말을 만들어냈고,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살생을 저지르고 있다.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한 미헬 파버르의 소설 <언더 더 스킨>은 (조금 과장하자면) 육식 외계인과 채식 외계인의 대결을 다룬 소설이다. 과연 인간이란 무엇이며, 살아 있던 동물의 고기를 먹는다는 게 어떤 일인지 일깨워주는 소설이기도 하다. 외계인들은 포획해온 인간들을 (마치 우리가 푸아그라를 먹기 위해 거위를 사육하는 것처럼) 집중 사육한 다음 스테이크로 팔아치우는데, 재미있는 건 소설에서의 호칭법이다. 외계인들은 자신을 인간이라 부르고 기존의 인간을 보드셀(vodsel)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네덜란드 사람인 점을 감안했을 때 보드셀은 아마도 네덜란드 말 보드셀(voedsel)을 가리키는 것일 테고, 이 단어의 뜻은 ‘음식’이다. 그러니까 외계인들은 걸어다니는 인간들을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주인공 이설리는 걸어다니는 ‘음식’들을 자신의 커다란 가슴으로 유혹한 다음 납치하는 일을 맡고 있다. 이설리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장면에서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진열대에서 먹을 것을 골라보았다. 종류는 ‘핫도그’, ‘치킨 롤’, ‘비프 버거’ 등 세 가지였다. 세 가지 모두 하얀 종이로 포장되어 있어 내용물이 보이지는 않았다. 이설리는 치킨 롤을 골랐다. 텔레비전에서 쇠고기는 위험하다, 심지어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보드셀이 죽을 정도라면 자신은 어떻게 될지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핫도그는… 불과 며칠 전에 개 한 마리를 살리려고 상당한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개를 먹는다는 건…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소설에서는 사육된 인간을 도축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이 장면이 너무나 끔찍해서 도저히 영화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읽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영상으로 보면 열배는 끔찍할 것 같았다. 그래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흠, 스칼렛 요한슨이 전라 연기를 감행했다고 해서는 절대 아니고, 외계인들의 묘사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 기대를 무참하게 무너뜨렸다. 무섭기는커녕 아름다웠고, 한없이 느릿느릿했다. 마지막에 아주 잠깐 외계인의 모습이 등장하긴 하지만 내 기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소리에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다. 영화 <언더 더 스킨>은 소설 <언더 더 스킨>보다 훨씬 청각적이다. 이상한 말 같지만 영화 <언더 더 스킨>은 소설의 사운드트랙 같은 모습이다. 소설에서 외계인이 ‘바라보는’ 지구를 강조했다면, 영화에서는 외계인이 ‘듣는’ 지구를 강조했다(수많은 뮤직비디오를 만든 감독이었기에 이런 영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 외계인들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다. 지구상에도 보는 것보다 듣는 게 중요한 동물들이 많으니, 외계인들 역시 그럴지도 모른다. 어떻게 먹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문제다. 나 역시 그렇다. 살아 있기 위해 살아 있는 것을 먹지만, 잘 살아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언더 더 스킨>의 영화 버전과 소설 버전은 무척 다르지만, (당연하게)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메시지는 비슷하다. 소설 속 한줄의 대사가 그 메시지를 압축하고 있다. “한 꺼풀만 벗기면 모두 다 마찬가지예요.”

[김중혁의 바디무비] 여름의 한가운데, 뜨거운 운전석에서

※ <모스트 원티드 맨>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올여름, 나는 어딘가 구멍이 나 있는 자전거 타이어 같다. 펌프로 열심히 바람을 집어넣어도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쭈글쭈글한 상태로 변해 있다. 전부 새고 있는 것 같다. 구멍이 하나뿐이라면 찾아서 메우면 될 테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언제부턴가 타이어에 공기 채우는 일도 그만두고 말았다. 펌프를 움직일 힘도 없다. 시작은 아마도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고 소식이 더해지고, 더이상 생존자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그 위에 얹히고, 이 모든 일들이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는 소식이 다시 들려오고, 충격이라는 단어를 끝내기도 전에 또 다른 충격이 덮쳐와서 도대체 어떤 일이 더 큰 충격인지도 셈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건의 갈피를 잡고 싶었지만 사건은 생각보다 거대했고, 배후는 예상외로 많았다. 누가 누구의 배후이고, 누가 누굴 비호하는지는 여전히 정확하지 않지만, 모든 일들은 이미 일어났고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세월호의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데, 계속 사고가 벌어졌다. 잠에서 깨면 뉴스가 떴고, 대부분의 뉴스는 끔찍했다. 지하철이 충돌하고, 가까운 곳에서 불이 나고, 불이 계속 나고, 누가 누군가를 기묘한 이유로 죽이고, 이유 없이도 죽이고, 해외에서는 무차별 폭격이 벌어졌다. 확실한 이유를 대며 무차별 폭격을 자행하지만 대부분은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들이고, 그래서인지 때로는 어떤 사람들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른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 군에서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졌고, 총기를 난사하고, 때리고, 예전에 벌어진 사건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2014년 여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거대한 상처에서 끝없이 고름이 터져나오는 것 같다. 올여름, 나는 매사에 의욕이 없고 힘이 잘 나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잘 웃고 떠들지만 혼자 있을 때면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 인터넷 브라우저 창을 열어둔 채 관심도 없는 문서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기도 했고,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을 멍하니 보고 나서는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한 적도 있고, 술을 마시고 기분이 조금 좋아졌지만 깨고 나면 더욱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스스로를 책망하기도 했다. 모든 게 다 귀찮게만 느껴졌다. 힘을 내려고 안간힘을 써보는데도 손끝과 발끝으로 힘이 다 빠져나갔다. ‘그래도 힘을 내야지’ 머리로는 생각하는데 몸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걸 무기력증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런 무기력증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틀비를 떠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틀비와 나는 질적으로 달랐다. 허먼 멜빌의 명작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 바틀비는 매사에 “안 하는 쪽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안 하는 것’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게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선택’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바틀비와 달리 ‘어떤 일을 할지 안 할지를 선택하는 것도 뭔가 하는 것이니까 선택조차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는 밑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진 것일 뿐이다. 어째서 이런 무기력증이 생긴 것일까. 나이 탓일까,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단순한 권태일까, 나도 모르는 스트레스로 탈진해서 그런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별다른 대답을 찾지 못했다. 분노하고 싶었지만 대상을 찾지 못했고, 치료하고 싶었지만 병의 실체를 알 수 없었다. 무력하고 또 무력했다. 현재를 알 수 없고, 미래가 불투명할 때 ‘절망의 마음’이 생겨난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한다. 마음의 무게가 몸으로 이어져 무기력증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무기력증에 그나마 좋은 약은 영화와 소설이었다. 다른 세상을 둘러보고 나면 현실이 잠깐씩 낯설어졌고, 절망의 마음이 아주 조금 줄어들었다. 올여름엔 영화를 자주 보았고 소설도 많이 읽었다. 얼마 전 별다른 기대 없이 <모스트 원티드 맨>을 보다가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았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팬으로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챙겨보자는 마음이었지만, 작품을 보는 내내 그를 향한 원망이 더욱 커졌고 그가 그리웠다. <모스트 원티드 맨>의 주인공 귄터 바흐만(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한때 독일 최고의 스파이였으나 상부 조직에 이용당하며 작전을 망친 이후 현재는 정보부 소속 비밀조직을 이끌고 있다. 대충 빗어 넘긴 머리카락, 밤송이처럼 까칠까칠한 턱수염, 불룩하게 솟아 있는 배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귄터 바흐만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캐릭터의 설정 때문이었겠지만,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자의 고단한 피로감이 온몸에서 느껴졌다. 귄터 바흐만이 자신의 비밀정보원 ‘자말’과 이야기를 나눌 때, 블랙커피를 시킨 다음 거기에다 위스키를 부어 마실 때, 펍에서 술을 마시다 여자를 괴롭히는 녀석을 한방에 때려눕힐 때조차 그의 몸에서는 이상한 피로감이 느껴졌다.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만 문득 내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막막함과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봤자 내가 저항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나를 짓누르고 말 것이라는 무력감이 결합된 총체적 피로였다. 중요한 작전 전날, 위스키를 마시다가 그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짧고 굵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누르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의 옆모습을 보면서, ‘아, 저 배우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 피아노 연주는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다. 지금부터 스포일러가 시작되므로 <모스트 원티드 맨>을 보려는 사람들은 여기서부터 글 읽기를 멈춰야 할 테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나는 이 작품이 눈물나게 좋았다. 귄터 바흐만 때문이기도 했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때문이기도 했다. 귄터 바흐만의 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작전의 클라이맥스에서 또다시 상부 조직은 그를 배신했고, 마지막 먹잇감을 그에게서 빼앗아갔다. 그는 철저하게 이용당했고 그가 지키려던 선의는 비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는 도로 한복판에서 버림받은 뒤 큰 소리로 욕을 한다. 영화 내내 흥분하지 않았던 그가 울부짖으면서 욕을 해댔다. 무기력했던 그에게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는 동료들을 놓아둔 채 차를 타고 어디론가로 향한다. 그가 어디로 가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술집으로 가는 것인지, 자신의 비밀정보원 자말을 만나러 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엿먹인 상부 조직을 박살내러 가는 것인지, 작전을 어떻게든 끝까지 수행하려 하는 것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귄터 바흐만이 떠난 빈 운전석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떠났고, 텅 빈 운전석만이 남았다. 나는 그가 어디로 갔을지 생각해보았다. 귄터 바흐만은 어디로 갔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어디로 갔을지 생각해보았다. 귄터 바흐만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곰곰이 생각하다보면 무기력증이 조금은 낫지 않을까 싶다. 지금 나는 무덥고 기나긴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엉덩이가 얼얼할 정도로 뜨거운, 운전석에 앉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