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내가 찾는 영화 정보를 손쉽게!

‘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4]

“래커칠 상할까봐 스탭들 양말 바람으로 다녔어”구상에서 시사회까지, 영리한 실험 <도그빌>의 전말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요?” 친구 니콜 키드먼을 위문하기 위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곧장 전용기를 타고 스웨덴의 <도그빌> 세트를 방문한 러셀 크로가 내지른 일성이었다. 그를 특별히 무례하다고 욕할 수는 없다. 그를 맞이한 것은 글씨로 쓴 ‘개’가 짖어대는, 벽도 없는 집들의 마을이었으니까. 사실 <도그빌>의 세트에 처음 도착한 배우들이나 <도그빌>을 처음 본 관객의 머릿속을 지나간 첫마디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러셀 크로의 질문 아닌 질문에 붙일 수 있는 하나의 답은 ‘실험’이다. 실험의 목적이 무엇이건 라스 폰 트리에는 가운을 걸친 실험실의 과학자처럼 영화를 만들어왔고 <도그빌>을 만들었다. 햇빛과 물과 흙이 식물의 생장에 필수적인지 알기 위해 딱 하나씩 조건을 통제하며 강낭콩 싹을 관찰했던 초등학교의 과학 실습시간처럼. “한 가지 방식으로 영화를 낯설게 만든다면 다른 모든 것은 정상적이어야 한다. 너무 층이 많으면 관객은 더 멀어진다.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실행해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라스 폰 트리에의 말이다. 다음은 그가 최근 행한 영리한 실험의 전말기다. Chapter1 : 구상 2000년 칸영화제. <어둠 속의 댄서> 상영이 끝나고 열린 리셉션에서 라스 폰 트리에는 격분했다. 일부 미국 저널리스트들이 다가와 “미국에 가본 적도 없는 당신이 어떻게 미국을 비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알기로는 미국인들도 카사블랑카에 가보지 않고 <카사블랑카>를 만든 전력이 있다. 게다가 남의 나라에 가보지 않고 그 나라에 관한 영화를 찍는 일이야말로 할리우드가 늘 해온 일이다.” 한마디로 긁어 부스럼이었다. 오기가 난 라스 폰 트리에는 <어둠 속의 댄서>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겠다는 계획을 철회하고 미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한편 더 찍기로 했다. 그렇다면 어떤 영화를? 구체적 영감은 라스 폰 트리에가 덴마크 포크송 가수 세바스천의 <히트 송 모음집>을 감상하던 중 찾아왔다. 세바스천의 음반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쓰고 쿠르트 바일이 음악을 만든 <서푼짜리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 <해적 제니>를 새롭게 편곡한 버전이 들어 있었다. ‘해적 제니’의 복수극 내러티브와 브레히트식 연극이라! 1930년대 대공황기의 로키산맥의 외딴 마을을 무대로 설정한 라스 폰 트리에는, 고립된 장소에 관한 영화 <도그빌>의 형식도 고립시키고 싶었다. 로키산맥 따위엔 가고 싶지도 않다. 지도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스토리를 풀어가자. 한대의 카메라 앞에 단순한 회색 배경을 드리우고 배우 둘이서 끌고가는 1970년대 TV 연극에 대한 향수도 끼어들었다. 라스 폰 트리에에겐 극장에서 보는 연극보다 TV나 영화 속 연극이 흥미로웠다. 세트는 극히 연극적이지만 대신 카메라의 클로즈업으로 비쳐질 연기는 미니멀하고 사실적인 영화. 라스 폰 트리에는 모든 것이 기술 덕택에 쉽사리 ‘영화적’으로 둔갑하는 시대에 <도그빌>의 형식이 영화의 돌파구에 대한 한 제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Chapter 2 : 캐스팅 <도그빌>의 그레이스, 니콜 키드먼은 <어둠 속의 댄서>에서 주연한 비욕의 반대말이나 다름없었다. 비욕은 영화에 대해 눈곱만큼도 욕심이 없었지만, 니콜 키드먼은 막 스스로를 예술가로 자부하기 시작한 야심만만한 배우였으며 철저히 준비된 프로페셔널이었다.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빌>의 그레이스를 니콜 키드먼을 염두에 두고 썼다. 냉정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키드먼을 바꿔놓는 일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그야말로 볼거리가 전무한 황량한 영화 <도그빌>에서 할리우드 스타 키드먼은 유일한 스펙터클이 될 것이다. <도그빌>의 캐스팅은 작가로 불리기 원하는 모든 감독들의 백일몽과 같았다. 라스 폰 트리에가 <차이니즈 부키의 죽음>을 보고 매혹된 벤 가자라, <대부>의 제임스 칸, 인디영화계의 신성 클로에 셰비니, <뷰티풀 마인드>의 폴 베타니가 합류했고 원로배우 로렌 바콜은 미미한 극중 비중에도 불구하고 캐스팅을 수락했다. “라스 폰 트리에는 배우를 아주 잘 다루니까”라는 동료배우 스텔란 스카스가르드의 추천에 톰 역을 받아들인 베타니는 얼마 뒤 낙담했다. “배우를 잘 다룬다고? 거의 말도 안 거는데?” 스카스가르드는 태연히 받아쳤다. “그렇지? 배우 참 못 다루지? 같이 해보라고 거짓말한 거야.” 베타니는 기가 막혔지만 8주 뒤에는 자신도 동료배우에게 스카스가르드와 똑같이 조언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45분 동안 계속 카메라를 돌리고 그 가운데 배우가 전혀 의식 못하는 2, 3분을 골라 쓰는 라스 폰 트리에와 일하면서 배우들은 연기 안 하는 법, 이런저런 감정의 조각을 표출하며 완전히 영화의 도구가 되는 법을 발견했다. “<도그빌>은 배우들이 모여 라스 폰 트리에 감독에게 바치는 오마주와 같다.” 모자를 눌러쓰고 이름도 없는 갱스터로 출연한 우도 키에르의 말이다. Chapter 3 : 세트 + 촬영 프리세일을 위해 찍은 테스트 촬영분을 본 사람들은 <도그빌>이 상당히 특이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화면에 잡힌 <도그빌>의 세트라는 것이, 마치 교통사고 현장에 흰색 스프레이로 그린 테두리마냥, 백묵으로 거리와 집터를 그려놓은 것이 전부였으니 무리도 아니다. <도그빌>은 ‘트롤리우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스웨덴판 할리우드’의 일부인 트롤해탄 지역의 사운드 스테이지에서 6주(31일) 동안 촬영됐다. 스칸디나비아 역사상 가장 비싼 영화라는 <도그빌>의 세트는 몇몇 소도구를 제외하면 벌거벗은 상태에 가까운 가로 30m 세로 60m의 플랫폼이었다. 배우를 제외한 스탭들은 세트장에서 검은 래커칠을 한 바닥이 상할까봐 양말 바람이나 슬리퍼를 착용하고 다닌다고 <사이트 앤 사운드>에 실린 현장방문기는 전하기도 했다. 덕분에 <도그빌> 제작진은 우천시 촬영 연기를 걱정하거나 좋은 광선을 포착하기 위해 하루종일 해바라기만 하는 수고는 면할 수 있었다. 한때 감독이란 모니터 뒤에서 배우와 멀찍이 떨어져 일하는 편이 영화를 위해 이롭다고 주장했던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빌>에서 직접 카메라와 장비를 메고 배우들에게 바짝 붙어 필요하다면 그들의 몸을 손으로 밀고 다니기까지 하며 세트를 누볐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앤서니 도드 맨틀 촬영감독은 HD카메라를 선택했다. “<어둠 속의 댄서>는 근사한 풍광을 흐릿한 해상도로 찍었으니, 감상할 경치라고는 전무한 <도그빌>은 고해상도가 필요하다”는 원칙이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워낙 무겁다보니 소소한 장면에서는 소형 디지털카메라가 동원됐다. 꽉 짜인 <도그빌>의 촬영 스케줄에도 청천벽력이 하나 있었다. 베라 역을 연기한 카트린 카트리지(<네이키드> <웨이트 오브 워터> 등에 출연)가 발작을 일으킨 아버지를 간호하러 가서 돌아오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카트리지 자신도 6개월 뒤 폐렴 합병증으로 사망하는 비운을 맞았다). <도그빌>의 스탭과 배우들은 패트리샤 클락슨을 새로운 베라로 맞아 카트리지의 촬영분을 몽땅 새로 찍어야 했다. <도그빌>의 배우들은 세트에서 수킬로미터 떨어진 장원의 저택에서 촬영 이외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니콜 키드먼은 “호주에서 찍은 데뷔 초 영화 이후 이런 친밀함은 처음”이라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키드먼의 숙소 입구에서는 파파라치들이 “키드먼의 새로운 스웨덴 연인”이라는 기사를 터뜨리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짧은 촬영은 긴 후반작업으로 이어졌다. <도그빌>의 포스트 프로덕션에는 9개월이 소요됐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배리 린든>에 대한 열광을 여러 차례 피력한 바 있는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도그빌>의 음악으로 당대의 악기로 연주한 비발디를 비롯한 바로크 음악을 선곡했고 <배리 린든> 스타일의 점잖지만 어딘가 빈정거림이 묻어나는 내레이션을 깔았다. Chapter 4 : 에필로그 2003년 5월 칸영화제. 니콜 키드먼은 러닝타임 178분으로 완성된 <도그빌>이 상영되는 도중 뤼미에르 극장의 좌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거대한 이미지와 음향으로 재현되는 자신의 수난극을 차마 견디기 힘들었던 탓이다. 이튿날 기자회견장에서 니콜 키드먼은 기자들에게 해명했다. “솔직히 어젯밤 영화를 보고 있기가 힘겨웠어요. 스크린이 어찌나 거대한지. 게다가 그 사운드와 끔찍한 상황이라니. 앉아서 보다가 이건 너무 심하다라는 생각에 자리를 떴어요. 감독은 제 뒤에서 ‘그렇지만 곧 다시 돌아올 거죠?’ 이런 식이더군요.” 하지만 동석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은 그럼 어찌하면 좋았겠나, 상영을 멈출 수도 없는 일이고 하는 식으로 태평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기자들이 그득한 회견장에서 공개적으로 미국 삼부작의 2, 3편에서 계속 그레이스를 연기하겠다고 서약하라고 닦달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장 밖에서는 이미 논객들이 거품을 물고 있었다. 당초 400만달러 선이었던 북미 배급권의 가격은 시사 뒤 600만달러로 치솟았다(7월23일치 <스크린 데일리>는 젠트로파 스튜디오가 니콜 키드먼의 바쁜 일정을 기다릴 수 없어 2, 3편의 그레이스 역에 새로운 배우를 캐스팅하기로 결정했다고 보도했다).정리 김혜리 vermeer@hani.co.kr ■■ 이 기사는 덴마크 영화연구소가 발행한 , <도그빌>의 프레스북, , <사이트 앤 사운드> 등의 관련 기사를 종합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1]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2]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3] <도그빌>로 돌아온 문제적 감독 라스 폰 트리에 [4]

고독한 제왕,영화배우 최민수 [2]

#5. 연기에 대한 치열한 고민에 비해 배우 최민수가 점유한, 그리고 90년대 한국영화가 그에게 허락한 영역은 넓다고 보긴 어렵다. <테러리스트> <유령> <리베라 메>로 대표되는 강한 남성의 이미지, 반대로 <결혼이야기> <미스터 맘마> 등에서 보여준 ‘대발이’식 코미디. 그가 보여준 것이 또 어떤 것이 있을까. 상업적인 장르영화의 틀 안에서 그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던 것일까. 연기에 대한 욕심을 상업영화의 룰에만 쏟아부었는데. 관객이나 평자들 중에 최민수가 하면 60밖에 못한다고 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 입장에선 애초 20밖에 안 되는 것을 끌어올렸을 수도 있어요. 전에 임권택 감독님이 <백치 아다다>를 제의하셨는데, 세상을 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건방지게. 그래도 후회는 없어요. 그때부터 했다면 탄탄한 연기자로 인정을 받았을 텐데 그건 내가 찾은 게 아니라 배운 거니까. 전 전수한다, 승계한다 하는 말들이 참 무서워요. 그건 일방적인 지식일 뿐인데. 혹시 배우가 카메라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영화적 흐름 안에 스며들어야죠. 배우 혼자서 나대는 건 하는 입장에서도 지겨운 일이에요. 니가 그러지 않았냐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제 입장에서도 그건 바라는 게 아니었죠. 세팅이 안 된 상황에서 앵글 앞에 나서야 했던 때도 있었고.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대근 선생님도 그런 케이스잖아요. 천재라 할 만한 분인데 주위에서 안 받쳐주니까. 물론 비판은 비판으로 새겨들어요. 집에서 유성이 엄마도 간간이 모니터 해주는데 내 연기 보고서 성을 쌓는 것도 좋은데 가끔은 열려 있으면 좋겠다고 그래요. 전 그러면 나도 그러고 싶다고 해요. 근데 성 열쇠를 바다에 빠뜨려서 잃어버렸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해서 그렇지. 흐흐하. 연기론이 있다면. 주문진의 한 식당에서 매니큐어 독이 오른 손을 불어가며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던 식당 아주머니의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그게 가슴에 박히는데. 최상의 연기도 어쩌면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청풍명월>에서 대사없이 3∼4분을 가더라도 드라마가 읽혀지는 연기. 무엇을 취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버려야 하는 연기를 보여주려고 했는데. 지금 뭐라 하긴 그렇고, 현재 난 어쩌면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는 것 아닌가 보여져요. #6. 최민수는 자신에게 냉혹하다. 스스로 몸뚱이 관리 못하는 것 같으면 자신이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할 정도다. 정지영 감독의 <블랙잭>을 찍을 당시, 그는 갈비뼈가 두대나 부러졌지만 촬영을 강행했다. 깁스를 못하는 부위라 완치하려면 두달이나 걸리는 중상이었는데, 그는 진통제 맞고 이틀 동안 참고 다 찍었다. 연기생활하면서 눈에 다래끼 한번 난적 없도록 몸관리 했다는 완벽주의자, 그는 혹시 괴물 아닌가. 촬영장에서 사고가 많았을 텐데요. 액션장면도 많고. 많죠. 뼈 부러진 건 벌써 7∼8번은 돼요. 그래도 아프다고 쓰러질 수 있어요? 스탭들은 한 장면 찍겠다고 앞뒤로 준비하고 정리하고 그러는데. 사극은 특히 그래요. 그러니까 제 몸뚱이 관리를 잘해야지. 그게 내 불찰 때문이라고 판단이 서면 제 자신이 용서가 안 돼요. 제가 지금까지 갖고 있는 마인드인데. 밥도 배부르게 먹으면 날 통제 못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빠요. 담배도 현장에서 많이 피우잖아요. 그러면 내 자신을 혼내요. 담배를 일주일 동안 못 피우게 한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냉혹하게 나를 다루죠. 숙소에 링거 준비 다 해놨는데 맞을 수가 없어요. 이거 맞고 자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긴장 늦추면 쓰러지거든요. 지나치게 꼼꼼하다는 말도 있는데요. 배우로선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좋죠. 그런데 배우가 이것도 찾아야 하고 저것도 찾아야 하고 그러게 만드니. 특히나 현장에서 ‘없으면 다른 걸로 커버해서 찍자’, 그러는 소리가 나오곤 하는데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징그러운 장난들이에요. 나보고 완벽주의라고 하는데. 노. 그게 어떻게 완벽주의가 될 수 있어요. 기본을 하자는 거지. 내 입장이 아니면 ‘재는 왜 저렇게 맛탱이가 가 있을까’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 입장에선 그렇게 해야 해요. 힘들어 죽겠는데도 한번 더 가자고 해서 갔는데 모니터 봤더니 원하는 대로 안 나오면 속이 턱 막히기도 하지만. 요즘 감독들 중 같이 작업해보고 싶은 분이 있나요. 음… 아마, 학교 후배일 텐데. 2년 후배던가. <장화, 홍련> 찍은 김지운인가 하는 친구. <반칙왕> 봤는데 캐릭터라든지 리듬이라든지 잘 살리고 있더라구요. 안 놓치고. 강호가 마스크 쓰고 있다가 아부지한테 두들겨맞는 장면도 좋고. 무엇보다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은 것 같아요. 감독이. 박자 개념이 작품에서 잘 드러나고. 범상치 않은 연출감각이에요. 반대로 <나쁜 남자> 만들었던 감독의 작품은 좀 꺼려져요. 인간의 추함을 지나치게 극화하는 것이 좀 걸리거든요. 물론 감독 개인이 싫거나 나쁘다는 건 아니고. 개인적인 의견을 말하는 거예요. 누군가 내게 저 새끼는 연기가 껍데기야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근데 좋은 영화 봐도 감독들이랑 편안히 만나서 이야길 잘 못해서. 워낙 최민수에 대한 선입견이 굳어져 있을 것 같기도 하고. #7.최민수에게 ‘모델’은 없다. 로버트 드 니로나 알 파치노를 그는 ‘존경하는 배우’라고 부르는 대신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파트너’라고 강조한다. 연기 색깔이 예쁜 공리도 그가 언젠가는 한번쯤 함께 영화를 찍고 싶은 배우 중 한명이다. 최민수식 연기에는 눈빛이 꽤 비중이 크잖아요. 알 파치노나 로버트 드 니로 같은 시실리쪽 배우들처럼 우리나 일본 배우들도 눈빛 장악력이 크거든요. 할리우드 배우들의 초록색 눈빛은 좀처럼 강한 감정을 뿜기 힘들어요. 그건 눈을 부라린다고 되는 건 아닌데. 물론 언론에서 매번 내 연기를 두고 하는 말이 어깨에 힘이 빠졌다, 눈에 힘을 뺐다 뭐 이러고 쓰는데 해석이 참 빈약하다 싶을 때가 있어요. <청풍명월>에서 좀 아쉬운 건 (조)재현이한테도 눈빛이 너무 강하지 않니 그랬는데. 원래 재현이가 맡은 규엽이라는 역할은 제가 상상하기에는 새하얀 선비 같은 모델이었거든요. 부초처럼 살았지만 눈썹도 손도 하얀 그런 사람. 대신 비장의 칼을 지니고 있다가 슥 베어버리는 감정이 없는 인물. 그런 이미지가 규환(규엽?????)을 만나 주춤거리고 깨져나가고 해야 대비가 된다 싶었는데. 뭐, 본인의 판단이니까, 뭐라 할 수 없지만 좀 아쉬워요. 아,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는 너무 좋아요. 눈빛 하나로 숨결 하나로 공포를 보여주니까.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가나요. 어떨 때는 대본을 펼치지 않은 상태에서 배역을 느끼고 싶을 때는 무형의 존재하고 이야길 해요. 미친놈처럼 에헤헤헤 하는 건 아니고. 대사 외우기보다는 이 캐릭터에 맞는 어울릴 만한 음악을 듣기도 하고. <백야 3.98> 할 때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띠리링’ 하는 음악 들었고. <유령> 할 때는 <한오백년>이나 오래된 퉁소소리 같은 거 듣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과연 그들이 가고 싶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떠올리기도 하고. 꿈을 통해서도 캐릭터를 느낄 때가 있어요. 그래서 유성이 엄마한테도 잠꼬대 한다고 핀잔듣기도 하고. 앞으로 뭐 할 거예요. 미래 계산은 안 해요. 데뷔 때부터 앞으로 뭐 할 거다 한 적도 없었고. 이번 작품 끝낸 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소중한 친구 아니 애인을 떠나보냈는데 곧바로 채울 순 없잖아요. 작품 만나는 것이 운명이니 어쩌면 평생 못 만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배우가 직업이 아니라 인생이 직업이니까. 아. 이런 건 있어요. 최민수라는 아이, 정상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지금 보면 전구 갈아끼우는 것도 못해요. 오죽했으면 주민등록증을 안 만들고 사니까 동사무소에서 직접 와서 해줄게 하더라고. 어렸을 때는 어른 되면 하겠거니 했던 것들인데 못하더라고. 그런 일은 외면하고 살았는데, 그래도 이제는 하려고 해요. 배우가 뭔데, 네 인생이 뭔데, 이젠 남들 다 하는 거 너도 좀 해야 하지 않겠니 싶어요. 이번에 캐나다 가서도 설거지도 하고 그랬어요. 오늘은 제 넋두리만 한 것 같네요. 배우가 말 많으면 안 되는데. 연기가 모자라서 말로 채운 거 아닌가 몰라. (웃음) 아, 그런데 혹시 최민수 시리즈 중에 알고 있는 것 있어요. “니네가 마시는 건 술이고, 내가 마시는 건 인생이야.” 제가 현장에서 술먹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 <백야 3.98> 촬영 때 새벽에 (신)현준이하고 (이)병헌이하고 술 먹고 온 거예요. 술 마셨냐 했는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하기에, 술 마시지 마라고 했어요. 그러고나서 며칠 뒤에 또 마신 거야. 근데 그날은 나도 현장에서 한잔 했거든요. 근데 얘들이 그 정보를 듣고 온 거지. 그래서 내가 딱히 할말이 없어서 그런 건데. 여기저기서 회자되는 바람에. 하하. 제가 굉장히 고딕적이고 강한 이미지로 알려졌잖아요. 근데 그런 유머를 통해서 어떤 아버지 같은 인물에 대한 애증을 드러낸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런 식의 유머시리즈가 박정희 대통령한테 가해졌다면 혹시 알아요. 정치가 바뀌고 나라가 바뀌었을지. 글 이영진·사진 정진환 고독한 제왕,영화배우 최민수 [1] 고독한 제왕,영화배우 최민수 [2]

영화사 신문 제18호(1946~1947)

영화사신문 제18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이유란 1946 ~ 1947 비우호적 증인 19인의 청문회 출석을 앞두고, 험프리 보가트(맨 앞줄 오른쪽)와 로렌 바콜, 존 휴스턴, 빌리 와일더 등 ‘수정헌법수호위원회’ 회원들이 워싱턴 국회의사당 앞에서 이들의 권리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광풍 하워드로슨 등 진보10인 소환되자 제작자들 동조 ‘할리우드 10’이 할리우드에서 설 땅을 잃었다.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1947년 11월25일 발표한 ‘발도르포 선언문’에서 “이들은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제작자들은 11월24일 국회가 할리우드 10을 ‘국회 모독죄’로 소환한 데 동조해 이같은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국회는 반미조사위원회(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이하 HUAC)의 국회청문회에서 반우호적 증인으로 불려나온 이들에게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하자, 국회모독죄를 걸어 이들을 소환했다. HUAC는 할리우드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기 위해 지난 9월, 43명의 할리우드 영화인에게 청문회 소환장을 발부했다. HUAC는 이들을 ‘우호적 증인’과 ‘비우호적 증인’으로 나뉘었는데, 반공산주의자인 잭 워너, 루이스 M. 메이어 등이 우호적 증인으로, 공산당원이거나 동조자라는 의심을 받은 에드워드 드미트릭, 달턴 트롬보 등 19인이 비우호적 증인으로 분류됐다. 먼저 10월20일 잭 워너를 시작으로 우호적 증인이 청문회에 소환돼 ‘그들의 이름을 불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들은 순순히 요구에 따랐다. 하지만 그 다음 주에 있었던 비우호적 증인들의 증언은 달랐다. 이들은 HUAC의 요구에 불응하기로 미리 짜고 HUAC의 질문을 거부했다. 첫 증인인 시나리오 작가 존 하워드 로슨의 증언 때부터 분위기는 거칠었다. 로슨은 질문에 응하는 대신 미리 준비한 선언문을 읽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HUAC 의장인 파넬 토마스가 이를 거절하자 로슨은 HUAC와 토마스를 공격하는 일장 연설을 시작했고 이에 격분한 토마스는 로슨에게 청문회장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로슨은 “당신은 독일의 히틀러야, 이건 히틀러의 모략이라고”라고 외치면서 방을 나섰다. 다른 증인들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10월30일 파넬 토마스는 갑작스럽게 청문회를 중단시켰다. 그리고 11명의 증언자 중 10명에게는 ‘할리우드 10’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나머지 한명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프랑스로 떠났다. 하지만 사태는 그 정도에서 해결되지 않았다. 공사주의자라는 혐의를 찾는 데 실패한 국회는 11월24일 이들을 ‘국회 모독죄’로 소환했다. 같은 날 할리우드 제작자 50인은 뉴욕의 발도르프-아스토리아 호텔에서 비공개 회의를 열고, 다음날 ‘발도르프 선언문’을 발표했다. 한편, 이들에 대한 정식 재판은 1948년 봄에 시작될 예정이다. 제1회 ‘칸’축제 성황리 폐막와일더, 로셀리니 등 공동 그랑프리 11명 1946년 10월5일 칸영화제가 첫 번째 항해를 끝냈다. 전후 침체된 프랑스영화, 나아가 유럽영화를 활성화할 목적으로 개최된 칸영화제는 ‘경쟁’보다는 ‘축제’에 의미를 두었으며, 그에 걸맞게 참가국들이 골고루 상을 나눠가졌다. 어떤 참가국도 수상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애초의 ‘시상 지침’이었다. 이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빌리 와일더의 <잃어버린 주말>, 데이비드 린의 <밀회>,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 장 들라누아의 <전원교향곡> 등 11개 작품에 공동으로 그랑프리가 수여됐다. 남녀주연상은 각각 <잃어버린 주말>의 레이 밀란드와 <전원교향곡>의 미셸 모르강에게 돌아갔다. 칸영화제 개최에 대한 논의는 1938년 두명의 저널리스트에게서 시작됐다. 베니스영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던 에밀 빌레르모(Emile Vuillermoz) 와 르네 장은 프랑스에도 영화제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고 당시 교육예술부 장관인 장 제이에게 영화제 개최를 건의했다. 무솔리니의 주도로 시작된, 그래서 정치색이 짙은 베니스영화제와 다른 성격의 영화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이들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종전 뒤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우방이 된 상황에서 칸과 베니스 사이에 무모한 불필요하다고 판단한 두 영화제 집행위는 해마다 칸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를 번갈아 열기로 했다. 한편, 칸영화제 이외에도 자국영화를 부활시키기 위해 유럽 각국들은 국제영화제를 추진하고 있다. 1946년 로카르노,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가 첫 번째 행사를 치르며, 1947년에는 에든버러영화제가 시작될 예정이다. 코미디 영화의 거장, 루비치 잠들다 1947년 11월30일 에른스트 루비치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살. 신작 <모피코트를 입은 그 여자>(That Lady in Ermine)를 찍던 중이었다. “프랑스의 파리보다 파라마운트의 파리가 더 좋다”던 이 독일인 감독은 바라던 대로 미국 땅에 묻힌다. 부유한 유대인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4년 영화계에 입문한 뒤 1921년 할리우드로 건너왔다. 메리 픽포드가 팜므파탈로 출연한 <로지타>가 그의 할리우드 첫 작품이었다. 그는 주로 사랑을 찾는 상류층의 간통, 속임수, 그리고 자기 기만을 위트와 풍자로 엮어짠 섹스코미디를 만들었다. 그런 그의 영화세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단어가 바로 ‘루비치 터치’였다. 제작사 홍보부서에서 ‘광고용’으로 만든 이 신조어가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 지 모호하긴 했지만, 이 단어는 이후 꼬리표처럼 루비치를 따라다녔다. 여배우의 변신은 무죄?하라 세스코, 전쟁 끝나자 친군부 이미지 벗기 러시 여자의 변신은 무죄? 1945년 일본 패전 뒤 여배우 하라 세스코가 숨가쁘게 이미지를 변신하고 있다. 그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내 청춘 후회없다>(1946)에서 반전운동가의 아내로 군국주의가 패한 뒤 농촌 개혁의 선두에 서는 진보적인 여성으로 나온 데 이어 <안조가의 무도회>(감독 요시무라 고자부로, 1947)에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며 늙은 부친을 격려하는 몰락한 귀족 가문의 딸로 분했다. 이런 하라의 이미지에 관객은 당혹스러워했다. 왜냐하면 전시에 그녀가 맡았던 역할은 주로 군인이나 경관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출세작은 독일 나치와 일본 군부가 합작한 1936년작 <사무라이의 딸>로, 조연에 머물던 그는 괴벨스가 격찬한 이 영화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그뒤 친군부적인 영화에 출연해왔다. 그의 이미지 변신이 급작스러운 것도 이런 이유다. <빅 슬립> 하워드 혹스 감독주제:“아무도 모르니까 더 재밌는거 아닐까” 1946년 하워드 혹스(Howard Hawks)의 필름누아르 <빅 슬립>이 개봉했다. 영화는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가 스턴우드 장군의 두딸 주변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조사하면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리며, 혹스의 42년작 <소유와 무소유>에서 호흡을 맞춘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이 다시 주연을 맡았다. 1945년 완성된 이 영화는, 그러나 다른 워너의 영화들을 다 풀고 난 뒤 개봉하겠다는 잭 워너의 뜻에 따라 개봉이 이듬해로 밀렸다. 그리고 그 사이 제작사와 로렌 바콜 에이전트의 요구에 따라 일부 장면이 삭제되고 바콜과 보가트가 함께 나오는 일부 장면이 추가됐다. 그런데 이 영화, 줄거리 이해가 쉽지 않다. 모두 7명이나 죽는데 그들이 왜, 어떻게 죽는지 암만 봐도 모르겠다. 이럴 때 감독의 설명을 들으면 좀 나으려나 했더니, 이 감독 “나도 모른다”고 말한다. 시치미를 떼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그의 얘기를 좀더 들어보자. 정말 모르나. 나도 줄거리를 다 이해하지 못하겠다. 대시엘 해밋의 원작을 읽고 재미있어서 영화화를 결정했다. 8일 동안 작가들과 시나리오를 쓰는데 줄거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해밋에게 물어봤더니 그도 모른다고 하더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감소되는 건 아니다. 주인공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평론가라고 해서 더 나을 수도 없다. 그러니까 관객 입장에서는 더 재미있지 않겠나? 정말 당신에게 플롯이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다. 원작자도, 작가도, 나도 누가 누굴 죽였는지 모른다. 중요한 건 ‘재미’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영화를 찍으면서 나는 모든 장면을 재미있게 만들려고 애썼다. 영화 완성 뒤 일부 장면들을 추가했는데. 촬영이 끝나고 8개월 뒤에 제작사가 두 사람이 나오는 장면을 추가해달라고 주문했다. 둘의 장면이 충분하지 않다는 거였다. 경마 얘기를 빗대 두 사람이 사랑 싸움을 벌이는 장면도 이때 추가됐다. 그때 마침 내가 있던 산타아니타는 경마 시즌이었고 내게도 말 몇 마리가 있었다. “누가 거기에 탔느냐에 달렸죠”라는 그 장면 마지막 대사는 경마에 대한 내 생각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빅 슬립’이란 영화 제목은 무얼 뜻하나. 잘 모르지만, 죽음을 뜻하는 것 같다. 아무튼 어감이 좋지 않나? 날개 잃은 `순진한 이상주의자`프랭크 카프라, <멋진 인생> 참패 뒤 영화사 매락 `힘겨운 나날` 독립영화사를 팔고 다시 메이저 스튜디오 휘하로 들어간 프랭크 카프라가 힘겹게 신작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 발발 전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던 이 흥행감독은, 단 한번의 실패로 모든 걸 잃었다. <멋진 인생>이 문제였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가, 역시 전쟁터에 돌아온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만든 이 영화는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긴 했으나 흥행에서 실패했다. 그리고 파이낸싱과 배급을 맡았던 RKO는 그의 차기작 <결합의 상태>에 대한 파이낸싱을 거부했다. 이에 돈줄을 찾아 할리우드를 전전하던 그는 파라마운트에 ‘리버티 필름스’를 팔아넘겼다. 창작에서 완전한 자기 실현을 꿈꾸던 카프라는 1944년 말, 전 콜럼비아 이사였던 샘 브리스킨과 함께 독립영화사인 ‘리버티 필름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945년과 1946년 각각 윌리엄 와일러와 조지 스티븐슨이 여기에 합류한다. 창립 초 이 영화사 미래는 밝아보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회사를 “선도적인 진짜 인디펜던트”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버티 필름사 로고를 단 첫 영화 <멋진 인생>이 나오자 상황은 바뀌었다. 이 영화의 실패로 빌리 와일더와 조지 스티븐슨이 리버티 필름사에서 첫 영화를 내놓기도 전에 영화사가 매각된 것이다. 파라마운트는 세 감독에게 ‘3년간, 3편의 영화제작’을 보장했다. 반면 창작의 자유와 저작권은 엄격하게 제한하려 들었다. 무엇보다 제작비 지원이 까다로웠다. 파라마운트는 평균 흥행수익인 300만달러의 절반인 150만달러를 제작비의 상한선으로 묶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카프라가 책정한 제작비는 늘 이를 상회했고, 파라마운트는 제작비를 이유로 그의 기획을 번번이 무산시켰다. 상황은 윌리엄 와일러와 조지 스티븐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제작비를 이유로 파라마운트는 스티븐슨의 신작 <나 엄마가 기억나>의 제작을 거부했다. 카프라는 바로 이러한 스튜디오의 제약없이 마음껏 영화를 만들기 위해 리버티 필름사를 차렸던 것이다. 하지만 독립영화사를 통해 “한 감독, 한 영화”(one man, one film)라는 이상을 구현하려던 카프라의 꿈은 완강한 현실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단 신 들 할리우드 최대 수익 ‘돈방석’ 1946년이 ‘할리우드 최고의 해’로 기록됐다. 할리우드는 올해 1945년의 6330만달러보다 월등히 많은 1억1990만달러의 흑자를 기록함으로써 사상 최대의 수익을 올렸다. 박스오피스 수익은 16억9200만달러에, 주간관객 수 또한 9천만명에 이르렀다. 프랑스 국립영화센터 설립 1946년 10월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국립영화센터(Centre National du Cinema Francais 이하 CNC)를 설립했다. CNC는 앞으로 프랑스 영화제작에 대한 감시와 지원 정책을 동시에 펼치게 된다. 곧 금융 지불 능력에 대한 기준을 확립하고 영화제작 보조금을 지급하고 기록영화와 예술영화를 지원하면서 이를 통해 영화산업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또한 영화학교인 이덱(IDHEC)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도 CNC 휘하에 들어가게 된다. 해롤드 러셀, 최고의 특별한 배우 <우리 생애 최고의 해>에서 전쟁에서 두팔을 잃고 쇠고랑을 단 퇴역군인으로 출연한 해롤드 러셀이 1947년 3월13일 열린 제1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과 특별상을 한꺼번에 받았다. “동료 군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이 특별상 수상의 이유였는데, 실제로 전쟁터에서 영화와 똑같은 부상을 입었던 퇴역군인인 그는 극중에서 부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오랫동안 사랑해온 여인과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그려냈다. 한편, 1130만달러의 흥행수익을 올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밀어내고 할리우드 역대 최고 흥행작의 자리를 꿰찬 이 영화는 감독상과 작품상을 포함, 모두 7개의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클루조 감독, <제니 라모르>로 복귀 1947년 10월 프랑스 감독 앙리 조르주 클루조가 복귀했다. 그를 불러낸 사람은 평소 클루조를 존경해온 배우 루이 주베. 클루조는 주베 덕에 3년 만에 촬영현장으로 돌아와 신작 <제니 라모르>(Quai des Orfevres)에 착수했다. 클루조는 독일 기업인 컨티넨탈의 자금으로 만든 1943년 작 <까마귀>가 반프랑스적이라는 이유로, 1944년 프랑스가 나치에서 해방된 직후 영화제작을 금지당했다. 카잔 연기학교 설립, 메소드 연기법 교육 1947년 10월 엘리아 카잔이 ‘액터스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교육 내용은 스타니슬라프스키의 ‘메소드 연기법’. 카잔은 이미 1930년대 그룹 시어터에서 소련인인 스타니슬라프스키가 개발한 이 자연주의적 연기법을 실험해왔다. 메소드 연기법의 핵심은, 배우의 창조성은 내면에서 나오며 따라서 배우들이 개인적 경험에 기초할 때 사실적인 연기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데 있다.

거물들이 몰려온다

제60회 베니스국제영화제 라인업 발표, 개막작은 우디 앨런의 <애니싱 엘스>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고, 그 어느 해보다 치열했다.” 제60회 베니스국제영화제가 공식적인 라인업을 발표했다. 우디 앨런의 로맨틱코미디 <애니싱 엘스>로 수문을 여는 올해 베니스영화제는 지난 칸영화제 출품시기를 놓친 감독들이 대거 몰려올 거라는 예상에 걸맞은 풍성한 면면을 자랑하고 있다. 경쟁부문인 ‘베네치아60’에는 마이클 윈터보텀, 아모스 기타이, 기타노 다케시 등의 신작과 <아모레스 페로스>를 통해 인정받은 멕시코의 신예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작품 등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으며, 좀더 진보적이고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는 경쟁부문 ’업스트림’에는 소피아 코폴라의 <로스트 인 트렌슬레이션>, 펜엑 라타나루앙의 <우주에서의 마지막 삶>, <컵>으로 데뷔한 부탄의 고승 키엔체 노르부의 신작 <여행자와 마법사> 등 18편의 경쟁작이 각축을 벌일 예정이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몽상가들>, 제임스 아이보리의 <이브라힘씨와 코란의 꽃들>, 코언 형제의 <참을 수 없는 잔인함>, 짐 자무시의 <커피와 담배들>, 리들리 스콧의 <매치스틱맨> 등의 화려한 신작은 비경쟁으로 상영된다. 올해로 두 번째 집행위원장을 맡은 모리츠 데 하델른은 “거의 1600편의 영화들을 체크해야 했고, 대부분의 중요한 작품들이 7월15일 뒤에나 도착했다”며 그 어느 해보다 명망있는 작품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드러냈다. 이런 지각 초청작 중에는 현재 후반작업 중에 있는 코언 형제의 로맨틱코미디 <참을 수 없는 잔인함>과 업스트림 부문 스페셜 이벤트작으로 선정된 피터 그리너웨이의 <툴스 루퍼 슈트케이스, 에피소드3: 앤트워프>가 포함되어 있다. 하델른 위원장은 대부분의 미국 프로듀서들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우려해 자신들의 작품을 비경쟁작 부문에 상영하길 원했던 점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올해 ‘베네치아60’에는 6편의 이탈리아 작품이 선정된 것에 비해 아시아영화는 4편에 그쳤다. 임상수의 <바람난 가족>, 맹인 사무라이의 이야기를 그린 기타노 다케시의 <자토이치>, 차이밍량의 <불견불산>, 캐롤 라이의 <꿈꾸는 풍경> 등이 그 4편이며 애초에 큰 기대를 모았던 왕가위의 은 결국 도착하지 못했다. 오는 8월27일 개막하는 제60회 베니스국제영화제는 ‘리도 밖을 떠난다’는 항간의 루머와 달리 리도섬 내 극장에서 모든 행사가 치러질 예정이며 9월6일 폐막한다. 백은하

[장 외스타슈, 필립 가렐 특별전] 누벨바그는 어디로 향했는가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과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공동 주최하는 ‘누벨바그 이후, 뜨거운 영화의 심장- 장 외스타슈, 필립 가렐 특별전’이 오는 8월8일(금)부터 15일(금)까지 8일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 알랭 레네, 아녜스 바르다 등 프랑스 누벨바그 기수들의 영화가 그동안 꾸준히 관객을 만나온 것에 비해, 장 외스타슈와 필립 가렐의 영화들은 각종 영화제를 통해 다소 산발적으로 소개되어왔을 뿐 국내 관객에게는 낯선 편이다. 장·단편을 포함한 장 외스타슈의 영화 7편과 필립 가렐의 영화 6편이 상영되는 이번 특별전은 두 감독의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38년 태어나 시네필 시절을 보냈고, 60년대 초반 고다르의 조감독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장 외스타슈는 주로 파리 젊은이들의 삶을 영화화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으며, 1963년 첫 중편 <로빈슨의 집> 이후, <나쁜 친구들> <산타클로스는 파란 눈을 가졌다> 등에서도 같은 기조를 유지했다. 장 외스타슈는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을 주로 해왔으며 1973년작 <엄마와 창녀>로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얻었다. 장 외스타슈는 지속적으로 자신만의 작업을 이어나가던 중 1981년 권총자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나쁜 친구들>(1963)은 여자를 유혹하려는 두 20대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며 누벨바그 세대들에게 미학적 지지를 얻어냈고, <산타클로스는 파란 눈을 지녔다>(1966)는 누벨바그의 얼굴 장 피에르 레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장 비고에게 오마주를 바쳤다. 10년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만들어진 두편의 연작 <페삭의 처녀>(1968/1979)는 가장 고결한 처녀 선발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장 외스타슈의 대외적인 대표작 <엄마와 창녀>(1973)는 애인 마리에게 얹혀 사는 지식인 알렉상드르와 그가 새롭게 사랑에 빠지는 베로니카와의 관계를 통해 68혁명 이후 프랑스 젊은이들의 공허함과 절망감을 개인의 관계로 전치하여 질문하는 영화이다. 그리고 <알릭스의 사진>(1980)은 그의 유작이다. 장 외스타슈와 함께 포스트 누벨바그 세대에 속해 있으며, 프랑스영화의 랭보라고 불리기도 하는 필립 가렐은 프랑스의 유명배우 모리스 가렐의 아들로 1948년 출생, 열여섯살에 학교를 그만둔 뒤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연출 작업을 시작했다. 16살에 장 뤽 고다르의 <알파빌>을 본 뒤 영화의 길을 걸었고 자전적, 실험적, 시적인 영화를 지향했다. 그의 나이 19살에 연출한 <추억의 마리>는 작가적 통찰력을 예감하게 했으며, 70년대 초반 <내부의 상처> <고독의 높이> 등으로 그 예감을 증명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을 실험적인 형식에 담아내는 필립 가렐의 영화는 오프닝, 엔딩 크레딧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첫 장편 <추억의 마리>(1967)는 사랑하는 두 연인간의 소통문제를 주요한 고리로 삼았고, 무성영화의 형식을 빌려 ‘영화를 본다는 것’에 대해 실험한 <폭로자>(1968)는 부부와 아이를 주인공으로 어떠한 사운드도 없이 영화를 완성했다.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싱어 니코가 여러 명을 동시에 연기하는 <내부의 상처>(1970)는 신화적인 전통을 가져와 만들었으며, 필립 가렐 스스로가 “새로운 출발점의 영화”라고 일컬은 바 있다. 그 밖에도 <사랑의 탄생>(1993)은 고다르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라울 쿠타르가 촬영을 맡았고, <밤의 바람>(1999)에는 카트린 드뇌브가 출연한다(문의: 02-743-6003, 02-720-9782, www.cinephile.co.kr, www.cinematheque.seoul.kr).

올 베니스영화제 조촐할 듯

초청작품 발표 결과, 경쟁 부문은 "화려하지 않아", <바람난 가족> 각광 기대 오는 27일부터 내달 6일까지 열릴 6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의 작품들이 지난달 31일 발표됐다. 올 칸 영화제에 거장들의 신작이 일정 문제로 대거 빠지면서 “올해의 진정한 승자는 베니스가 될 것”이란 소문이 자자했던 것과 달리, 막상 드러난 메인 경쟁부문(베네치아60)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한국영화론 유일하게 이 부문에 초청된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사진)이 황금사자상을 노리는 데는 더 유리한 조건일지 모른다. 지난해 <오아시스>에서 신인상을 거머쥐었던 주연 문소리가 또다시 상을 안을지도 관심거리. 전체 20편의 작품 가운데 눈길을 끄는 작품들은 97년 <하나비>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가져갔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신작 <자토이치>, 대만 차이밍량 감독의 <루 산>을 비롯해 마이클 햄튼 감독-안토니오 반데라스·엠마 톰슨 주연의 <아르헨티나 상상>, 마누엘 데 올리베이라 감독-존 말코비치·카트린느 드뇌브 주연의 <말하는 영화>, 마이클 윈터바텀 감독-팀 로빈스 주연의 <코드 46> 등 정도다. 모리츠 데 하델른 집행위원장은 이번 작품선정이 “유럽영화의 힘과 사스의 여파로 투자가 위축된 아시아 영화계를 고려한 것”이라 말했다. 상대적으로 비경쟁부문엔 화제작들이 많다. 우선 우디 앨런 감독의 신작 <에니씽 엘스>가 개막작으로 축제의 문을 연다. 또 코엔 형제 감독-조지 클루니·캐서린 제타 존스·빌리 밥 손튼·제프리 러시 주연의 <참을 수 없는 잔인성>, 로버트 벤튼 감독-앤서니 홉킨스·니콜 키드먼·에드 해리스 주연의 <인간의 오점>, 짐 자무시 감독-로베르토 베니니·케이트 블랑쳇 주연 <커피와 담배>가 비경쟁부문에 초청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 영화제의 60돌을 빛낼 예정이다. 김영희 기자

<살인의 추억>의 4人4想

글쓴이: 집주인* 제목: 요즘 기다리는 것 날짜: 2003년 4월19일 단연 <살인의 추억> 영화가 개봉되길 기다려본 건 처음이 아닌가 싶다(휘발성 기억인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안 믿겠지만). 예전에 <지리멸렬> <플란다스의 개>를 워낙 재밌게 본데다, 송강호도 막 좋아하는데다(박찬욱 감독의 그에 대한 마지막 한마디, “지능이 높은 사람인 것 같다”), 시나리오에 대한 소문(베스트 오브 베스트네, 충무로의 젊은 감독들이 봉준호 타도를 외치며 분발을 결의했네 뭐네, ‘치밀한’, ‘꽉 짜여진’- 우린 이런 단어 들어가면 흥분하기 시작함), 몇주 전 나붙기 시작한 포스터(송강호의 때묻은 운동화, 아저씨 허리띠, 기지바지, 꼬질한 잠바때기, 결정적으로 두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도 좋아지고, 시사회 다녀온 사람들의 일갈, ‘맘껏 기대해도 괜찮아’. Red Block**: 살인의 추억은 나두 볼까 생각 중임. 씨네에 칼럼을 쓰기 시작하면서 억지로라도 영화를 자주 보게 되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다른 걸로 땜빵하는 게 영 민망. 쩝…. 글쓴이: 집주인 제목: 살인의 추억 날짜: 2003년 4월27일 언제나 그렇지만 정리할 시간이 없으니 단편적인 것들부터 나열하면…. - 강 박사님, 송강호가 강 박사님 따라다니면서 캐릭터 연구했나 의문스러웠습니다. 고대로 스크린 속으로 걸어들어가시면 되겠습니다. 특히 초창기에 뵈었던 모습 그대로. -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영화감독, 할 만한 일이구나’를 아주 오랜만에 다시 느낌. - 머리가 좋은 사람이 만든 걸 감상하는 일은 정말 흐뭇하다. - 봉준호, 송강호, 김상경, 박해일, 이름 순서대로 할말없음. - 여기 읽으러 오시는 분들 기대만 잔뜩 부풀려도 되나 싶지만(아직까지 본인만큼 오버해서 기대하는 인간들을 본 적이 없는데) 여긴 개인 홈페이지니, 알아서들 하시길. 사실, 보증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흥행보증’이란 단어 어감이 갖다쓸 만큼 좋진 않아서… 그리고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보는 건 왠지… 약간 짜증남. - 나도 범인이 무지하게 궁금한데다 무지하게 잡고 싶어졌음. - 지나간 시대를 상품화한 것 중 가장 세련됐고, 가장 거부감 없음. 심지어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기까지. Red Block: 기어이 봐야겠네. Han***님이 모니카 나오는 영화를 배신 때리시는 바람에 이번엔 내가 배신 때릴까 궁리 중. ㅋㅋ. 글쓴이: 강유원 제목: 살인의 추억 날짜: 2003년 6월1일 송강호가 날 닮았다고. 맞는 거 같기도 하고. 송강호와 전미선, 잘 어울린다. 그들의 주고받음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남녀는 그렇게 사는 거다.봉준호(맞나?), 뭘 아는 거 같다. 영화의 나머지들은 생각 안 남. 신경 써서 안 봤음. 9****: 미국 전쟁영화 같지 않나요? 남성들의 시선에 의한, 남성들을 위한, 남성들의 영화인 듯. 강유원: 글쎄요. 누구의 시선인지는 모르겠군요. 무슨 영화든 그걸 보면서 ‘시선’에 신경을 써본 적이 없어서. 단지 영화의 한컷 같은 것만 볼 뿐이어서. 한마디로 영화는 총체적으로, ‘역사철학적으로’ 보지 못하니까요. 비디오나 디브이디로 되풀이해서 본다면 모를까. 책을 읽을 때는 앞뒤로 뒤적이거나, 다 읽은 다음 곧바로 또 볼 수 있어서 그런 ‘시선’을 잡아낼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워낙 찰나적 텍스트라서 단 한번 보고 그 영화 전체에 대해서 뭐라고 쓰는 게 위험한 짓 같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평론가들은 용감한 듯합니다. 그것도 대개 공짜로 시사회에서 보면서 말이죠. * 집주인: 최근 사랑에 관한 죽이는 소네트로써 강유원의 가슴을 찢은 적 있음. 퇴근 뒤 박물관 등지에서 공부를 함. ** Red Block: 강유원의 별명. 우리말로 ‘빨간벽돌’. 줄여서 R.B. ‘R.B.’라 쓸 경우 다양한 상상이 가능함. 예를 들면 Rolling Bed 등. *** Han: 강유원의 연상 친구. 험악하게 생겨서 택시운전사도 얼굴을 기억할 정도지만, 심성테스트에서는 여성지수가 가장 높음. **** 9: 가끔 우주인적 통찰력을 발휘해 상대를 한방에 보냄.강유원/ 회사원·철학박사

거짓말의 대가,<컨페션>의 주인공 척 배리스

<오스틴 파워>에 등장해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알려진 <제리 스프링거쇼>는 그야말로 ‘역겨움의 극치’다. 자신의 아버지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악당이라고 생각하는 아들 스콧과 그 아버지인 닥터 이블이 등장하는 영화 속의 내용은 오히려 애교라고 볼 수 있을 정도. 동생의 애인과 섹스를 한 언니가 등장해 동생과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정도는 기본이고, 10대 딸의 남자친구와 잔 엄마가 딸에게 ‘너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거나, 신혼의 남편에게 실은 자기가 트랜스젠더라고 말하는 신부 등이 매번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날마다 그렇게 충격적이고 엽기적인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정상적인 사람들은 한 가지 의구심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공격을 당하는 입장의 출연자의 경우 <제리 스프링거쇼>에 나와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뻔히 엽기적인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으면서도, 모두가 마치 전혀 몰랐다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해답은 스티븐 스탁이 쓴 <오늘의 우리를 만든 것은 60년대 TV쇼들이다>(The 60 Television Shows That Made Us Who We Are Today)라는 책에 잘 나와 있다. 바로 ‘TV에만 나올 수 있다면 사람들은 무엇이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그것을 지켜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록 <제리 스프링거쇼>라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이라면 TV에 출연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컨페션>의 주인공인 척 배리스는 오늘날 TV에 매몰되어 살아가면서, 언젠가 TV에 출연할 것을 꿈꾸는 우리를 만들어낸 창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 그려진 것처럼 그가 미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반인 대상의 게임쇼의 원형을 처음 브라운관에 선보이고 또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비록 그 때문에 ‘저속함의 왕’, ‘악취미 남작’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를 빼 놓고는 오늘날의 <제리 스프링거쇼> <서바이버> <오프라 윈프리 쇼> 등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게 사실이다. 영화의 개봉과 함께 출시된 척 배리스의 음반 <컨페션 오브 데인저러스 싱어> 촬영현장에 나온 척 배리스(오른쪽) 척 배리스 팬사이트 재미있는 것은 그가 그 유명한 <데이팅 쇼> <신혼부부 쇼> <땡쇼>(Gong Show) 등을 만들어 성공한 대목을 제외하고는, 영화 <컨페션>이 보여주는 척 배리스의 삶은 실제와 상당부분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일단 척 배리스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설정 자체에서부터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 일찌감치 CBS방송 창업자의 딸인 린 레비와 결혼생활을 시작했던 것이 그와 TV산업간의 끈을 이어준 단초가 되었기 때문. 심지어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델라가 훗날 <전국노래자랑>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땡쇼>에 보조진행자로 출연하기도 했고, 척 배리스가 제작한 <땡쇼>의 영화판에 출연하기도 했을 정도다. 물론 레비와의 관계는 영원하지 않았고 척 배리스는 그뒤로 두번이나 더 결혼을 했다. 그러니 영화 속의 패니(드루 배리모어)와 같은 멋진 여성과의 관계 같은 것은, 그가 잠시 바람을 피웠을 가능성을 제외하면,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없었던 것이다. 한편 그가 TV프로듀서로 일하면서 동시에 CIA요원으로 암약했다는 설정은 100% 허구다. 자전적 소설이자 1984년 자신이 직접 쓴 첫 번째 책인 <컨페션>(Confession of a Dangerous Mind)에서 그는 자신을 CIA 요원으로 암약해온 인물로 그럴듯하게 묘사했었지만, 그렇게 믿은 독자는 없었다. 그가 진짜 CIA요원이었다면 자신의 활약상(?)을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TV프로듀서로 일하던 중간에 공개석상에서 10년간 완전히 사라진 경우가 있었던 것은 사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CIA요원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등 유럽에서 숨어지내며 재충전을 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 때문이었는지 1993년 출간된 또 다른 자전적 소설 <게임쇼의 왕: 컨페션>(The Game Show King: A Confession)에서는 CIA라는 단어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도 CIA가 등장하기 때문에 내용면에서는 훨씬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는지, <컨페션>을 영화화하겠다는 시도는 80년대 후반부터 계속 있어왔다. 그러나 다른 할리우드 프로젝트가 그렇듯이 매번 엎어지고 또 엎어졌다. 이미 1980년 <땡쇼>의 영화판을 쉽게 감독·제작했던 경험이 있는 척 배리스는 그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화하겠다고 달려드는 이들이 마이크 마이어스를 비롯한 스타급 감독과 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조지 클루니가 직접 감독을 하면서 영화화를 끝냈고, 그 결과물에 대해 척 배리스도 대단히 만족한 것으로 전해졌다. <엔터테인먼트 투나이트>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영화의 전반적인 완성도도 완성도지만, 내 CIA 판타지에 조지 클루니와 줄리아 로버츠가 등장한 것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라며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은 사진으로 봤을 때는 건강한 얼굴 위에 ‘대가’의 풍모를 가지고 있는 그가, 실은 얼마 전부터 암으로 투병을 해왔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회복단계에 접어들기는 했지만, 암투병 환자의 얼굴이라고는 알아채기 힘들었던 것. 그런 그가 ‘아직도 조명 아래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은, 일종의 경외감을 자아내게 만들기 충분했다. 비록 일부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은 삶이기는 했지만, 그 삶에 대한 그의 애정이 그대로 묻어나왔기 때문이다.이철민/인터넷 칼럼니스트 chulmin@hipop.com 척 배리스 팬사이트: http://chuckbarris.thegongshow1976.com <컨페션> 공식 홈페이지: http://vgn.ifilm.com/confess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