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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seoul 2003) [2]

4. 반가워, 얘들아! - 전시 8월12일부터 코엑스 태평양홀은 시간을 거스르는 공간이 될 것이다. ‘스머프라는 상상의 나라’는 버섯 모양의 스머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스머프 마을을 재현하는 전시회다. 자그마한 미니어처가 아니라 산책할 만한 공간이라는 것이 SICAF쪽의 예고. 딸기를 좋아하고 모두가 평등하며 단 한명도 비슷한 구석이 없었던 파란 스머프들을 추억하는 이벤트다. 스머프를 보고 자란 이들이라면 누구나 반길 또 하나의 옛친구는 아톰이다. 올해 탄생 40주년을 맞은 아톰은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일본 최초의 TV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주인공. 동그란 눈과 원통형 팔다리, 독특한 머리모양이 귀엽지만, 자주 괴력을 발휘하며, 로봇이라는 아픔도 간직한 캐릭터다. 이 전시회와 함께 1963년과 82년, 2003년 버전 TV시리즈의 에피소드들이 상영될 예정이다. 이곳에서 한 발자국 현재로 걸어나오면 <비천무>의 설리와 진하, <바람의 나라>의 연이와 무휼, 요정 핑크, <리니지>의 반왕과 데포로쥬 등을 만날 수 있다. <만화 속 인형의 집>이 그 전시회. 국내 만화 11작품 36명 인물을 신체가 자유롭게 움직이는 구체관절 인형으로 부활시켰다. 5. 단편애니메이션, 젊은 한국의 힘 <강아지똥> | 감독 권오성 / 30분 / 공식 경쟁부문 단편 <아이 러브 피크닉> | 감독 임아론 / 5분 / 공식 경쟁부문 단편 <인생> | 감독 김준기 / 9분50초 / 공식 경쟁부문 단편 <강아지 똥> 북극곰이 소풍을 나갔다. 이스터섬에선 올라가려고만 하면 바위가 굴러떨어지고, 무인도에선 바다가 자꾸 멀찌감치 달아난다. 후지산에 갔을 때는 우산을 펴면 비가 그치고 우산을 접으면 비가 온다. <아이 러브 피크닉>은 자신을 위한 이벤트를 꾸밀 때마다 머피의 법칙을 겪는 북극곰 이야기 일곱편 중 세편을 골라 묶은 3D애니메이션. 움찔거리면서 눈치를 보는 북극곰과 피해갈 수 없는 그의 비극적 결말이 상쾌한 웃음을 부른다. 감독 임아론은 ‘아시아의 떠오르는 별’ 부문에 초청된 의 감독이기도 하다. 제1회 SICAF에서 단편애니메이션 부문 대상을 탔던 김준기는 <인생>으로 SICAF와 의미심장한 재회를 했다. <인생>은 거슬리지 않는 원색, 풍부하고 정교한 표정, 묵묵한 인내의 태도를 통해 우화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야기를 실어나르는 작품이다. 아기를 업은 아버지가 토템을 오르고 있다. 시간이 지나고, 아이는 청년이, 아버지는 노인이 된다. 시간은 언제나처럼 흐르지만, 토템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왜 그곳으로 가야만 하는지 모르면서도 멈춰설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하는 듯한 애니메이션. 권정생의 동화를 원작으로 하는 <강아지똥>은 이미 인터넷과 TV를 통해 유명세를 탄 클레이메이션이다. 강아지가 길바닥에 누고 간 똥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지만, 민들레를 만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된다. 공들인 수작업을 통해 조그마한 눈과 손, 발그레한 얼굴빛만으로도 수심과 기쁨을 오가는 강아지똥 인형을 만들었고, 수십번 재촬영을 하면서 소박한 감정을 담아냈다. 피아니스트 이루마가 음악감독을 맡았다. <아이 러브 피크닉> <인생> 6. 그곳에 가고 싶다 <오늘이> | 감독 이성강 / 2003년 / 16분 / 아시아 단편 모음전 민화 속에서 길어올린 듯한 파도와 하늘과 나무. <오늘이>는 이성강 감독의 이름과 HD TV라는 형식이 주는 선입견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며 서정적인 이야기의 서문을 내려뜨린다. “계절의 향기와 바람이 시작되는 곳을 사람들은 원천강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여의주와 커다란 학 ‘야’와 살던 소녀는 어두운 밤 침입자들에게 난폭하게 납치당한다. 배가 난파되고 홀로 어딘지 모르는 섬에 떨어진 소녀. 소녀는 행복했던 원천강으로 돌아가기 위해, 40만권의 책을 읽은 소녀와 머리 위에 비구름을 달고 다니는 소년과 아무리 여의주를 모아도 승천하지 못하는 이무기를 차례차례 만난다. <오늘이>는 예쁘기만 했던 <마리이야기>와 달리 자유롭고 거침없는 애니메이션다. 커다란 흰 개와 마리처럼, 야와 소녀는 한쌍을 이루지만, 먼 곳을 떠돌아다니는 소녀를 쫓아가는 <오늘이>는 그림도 음악도 그 길을 따라 변해간다. 귀엽고 유머가 있다는 사실도 눈에 띄는 변화. 원일이 소녀의 방랑길에 함께 울리는 음악을 맡았다. 7. 날마다 날마다 신난다, 재미난다 - TV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 추억의 TV만화 하나쯤 간직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거장들의 예술보다 가까운 건 날마다 TV로 잡아끄는 재미있는 ‘만화영화’다. <뽀롱뽀롱 뽀로로>는 지금부터 10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소년들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을 만한 천진한 TV애니메이션 시리즈. 얼음나라 숲속 마을에 사는 펭귄 뽀로로, 북극곰 포비, 여우 에디, 비버 루피가 짤막한 소동을 엮어간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지만, 캐릭터가 사랑스러운 탓에 바쁜 시간 TV 방영을 놓쳤던 어른들도 좋아할 만하다. 프랑스에서 온 <럭키 루크 뉴 어드벤쳐>는 여러 번 만화와 영화, TV시리즈로 만들어진 만화책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다. “자기 그림자보다도 빠르게 총을 쏘는” 보안관 루크가 애마와 애견과 함께 숙적 달튼 형제들을 상대하는 서부극. 이번에 상영되는 에피소드는 보스 노릇을 하던 달튼 형제의 어머니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랠프, 신기록을 세우다>는 유리컵 높이 쌓기, 풍선 크게 불기 등 각종 분야에서 신기록을 달성하려는 생쥐 랠프가 좌절하고 성공하는 순간을 1분 길이로 담아낸 시리즈다. 역시 프랑스 애니메이션. 기록 달성에 실패할 때마다 씩씩거리는 랠프가 앙증맞다. <랠프, 신기록을 세우다> <럭키 루크 뉴 어드벤쳐> ▶ 제7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seoul 2003) [1] ▶ 제7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seoul 2003) [2]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2]

#101 영작네 방 2003년 1월 15일 영작: 고딩이 데꾸 원조교제하는 니 마누라 좀 말려달라는 말 듣고, 난 난 어쨌으면 좋겠니?. 호정: 가르쳐 줘? 응? 신경 꺼. 신경끄구 니 인생이나 똑바로 살어. 영작이 호정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이마를 민다. 영작: 잘났다. 잘났어. 니가 뭐가 그렇게 잘났니. 이 쌍년아. … 갑작스런 사고로 아들을 잃은 영작과 호정이 격하게 싸우는 장면은 4분이 넘어가는 신이었다. 대부분 핸드헬드로 찍어낸 이 영화에서, 이렇게 배우들의 눈높이에 맞춰 기민하게 찍어야 되는 신에서는 김우형 촬영감독의 소박한 키가 여러모로 장애요인이다. 결국 스티로폼 두장을 키높이 구두처럼 신발에 붙이고 촬영에 들어간다. “아, 꼭 가제트 형사 같지 않아요?” 임상수 감독은 이 상황이 재밌는 눈치다. 임 감독의 사악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잘려나간 신 중 “원래 영작이 걔가 좀 정의로운 척하잖아”란 대사가 있는데 문소리가 촬영 들어가기 전 그 대사를 떠올리며 “정민이 오빠가 좀 정의로운 척만 안 하면 이 테이크 빨리 끝나요”라고 농담을 한다. 임상수 감독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쪼르르 달려가 황정민에게 ‘소리가 그러더라’고 전하자 황정민의 얼굴에 ‘발끈’ 하는 기력이 역력하다. 이렇게 전의를 북돋워놓자 상황은 쉽게 풀려간다. 김우형 촬영감독이 요구한 마지막 한번 더까지 포함해 13번째 테이크에 오케이가 나자 오히려 문소리가 휘두르는 주먹에 맞아 황정민의 한쪽 눈가가 티가 날 만큼 부어오른다. 상수 생각: 내 친구가 영화를 보고 영작의 재수없는 대사도 니 말투고, 호정이 대사도 니 말투 고대로더라고 하더라구요. 마치 다중인격자의 인격들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이런 신은 액션의 합을 짜는 것보다 그냥 배우들 감정대로 놔두자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한대 맞고 정신 못차리기에 이 신 좀 힘들겠다 생각했는데 나중엔 소리씨가 더 강하게 덤비더라고. 독한 여자, 배짱있는 배우예요. 소리 생각: 실제로 때리라고 해서 조금 황당했어요. 처음 맞는데 정신이 혼미하면서 눈물이 확 나더라구요. 그런데 내가 18, 19살 먹은 여배우도 아니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쪽팔려서 고개를 못 들겠던데요. 그런데 4, 5테이크가 되자 매맞는 부인들 심정을 알겠더라고,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 할 것 없이 그만 때리라고 싹싹 빌고 싶더라구요. 그 이후부터는 죽기살기로 나도 팼죠. 나중에 모니터 보고서야 알았어요. 내가 정민 오빠 얼굴을 집중적으로 팼다는 걸, 미쳤죠, 배우 얼굴을 그렇게 만들다니. 그 다음날 나도 목이 안 돌아가서 한의원에 가긴 했지만. #25 영작네 거실 2003년 1월 17일 먼 달빛에 실루엣으로 보이는 호정의 나신. 코드리스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튼다. 리듬을 타는 몸. 와인을 마신다. 물구나무를 선다. 문득 얇게 쳐진 커튼 뒤에 숨어서 창 밖 지운이네 집을 본다. …호기심 어린 호정의 표정. 두꺼운 커튼을 친다. 이윽고 그녀는 한 마리 암고양이가 된다. 야참으로 통닭이 배달되어 왔는데 문소리는 입에도 안 댄다. “홀딱 벗는다고 생각해봐요, 뭐가 넘어가나.” 알몸으로 마치 물 흐르듯이 거실을 장악하는 이 신을 앞두고 문소리는 며칭을 생식으로 버텼다. “계속 벗고 찍어요?” 어려운 듯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임상수 감독이 대답한다. “겨우 3분인데….” “3분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거실을 암고양이처럼 휘젓는 장면을 앞두고 이상하게 ‘못 벗겠다, 안 벗겠다’는 식의 대화는 오가지 않는다. 오히려 모니터 앞에 앉은 스탭들이 “카메라쪽으로 돌릴 때 보인 것 같거든”, “모니터상에 확인할 수 없는 1초도 안 되는 거란 말야”, “이런 정도의 앵글이면 마스킹 안 하고 가는 게 심리적 안정감이 들지 않아?” 하며 음모노출에 대해 한참 설전을 벌인다. 갑자기 문소리가 일어서면서 크게 외친다. “야, 야, 빤스 입고 찍자.” 소리 생각: 홀딱 벗는다니까 아버지가 호적에서 판다고 그러던데요. 그래도 강간당하고 이러는 신 찍으면 마음도 무겁고, 기분이 더 더럽죠. 이런 신은 자신의 공간이고 가장 편하고 즐거운 곳에서 하는 일인데 내가 여기서 울고 그러면 되겠어요? 그래도 모르죠, 밤에 자다가 갑자기 눈물이 날지도…. 지난해 12월 말에 무용지도를 도와줬던 안애순 선생님의 무용단에서 올린 <하얀 나비의 비명-아이고>를 보았던 문소리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얇은 팬티 하나만 입은 전라의 무용수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시커먼 무대의 끝에서 끝까지 몸의 모든 근육을 써가면서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몸이 만들어내는 기이한 언어에 빠진 것이다. ‘그 사람의 가슴이 어떻네, 엉덩이가 어떻네 하는 생각이 전혀 안 들던데요. 결국 행동의 주체의 의도가, 마음이, 그 태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가 결정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노출신에 대해 걱정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분명 이 영화를 보는 몇천명은, 몇만명은 그렇게 받아들일 거라고. 그러나 주체의 의도가 분명하다면, 그저 호정의 생활로 받아들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니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고 아무리 하려고 해도 안 되었던 물구나무서기가 벌떡벌떡 되기 시작했다. # 111 무용실 2003년 2월 16일 호정: 천천히 천천히 해…. 지운이 엉거주춤 몸을 든 채로 삽입을 시도한다. 호정: (킬킬대며) 구, 멍, 이, 어디 있을까? 촬영도 어느덧 막바지다. 촬영장에 놀러와서 햄버거를 먹고 있는 영작의 애인 역인 백정림을 보며 문소리는 “좋겠다, 넌 촬영 끝났구나… 나도 내일부터 개도 먹고, 닭도 먹고 다 먹을 거야” 하며 부러운 눈치다. 그러나 이내 가장 클라이맥스라고 할수 있는 이 신을 앞두고 웅크리고 앉아 곰곰이 감독의 설명을 듣고 있는 문소리는 예민하게 촉수를 세운 고양이 같다. 디테일한 섹스신을 앞두고 임 감독은 몸을 던지는 지도와 시범동작을 보인다. 새벽 3시40분까지 조용한 세종대 무용실은 “빤스를 벗길 때는 말이야…” 하는 경험담과 “첫 섹스의 순간은 오히려 진지하기보다는 서툴고 재밌고 그렇지 않나요?” 하는 토론이 이어진다. 결국 임상수 감독은 서부의 보안관 같은 자세로 봉태규 위에 걸터앉아 정신없이 옷을 벗어던지는 문소리의 대역을 해보인다. 갑자기 임상수 감독이 문소리에게 다가가 묻는다. “그러다가 울면 어떨 것 같아요?” “해볼 수 있을 것도 같은데요.” 카메라가 서서히 빠지고 교성이 흐느낌이 되고 결국엔 울음이 된다. 문소리가 흐느낀다. 어린 봉태규의 사타구니에 걸터앉아 온몸을 휘저으며 흐느낀다. 새벽의 무용실이 문소리의 울음소리로 아련하게 덮일 때쯤 조용히 ‘컷’사인이 떨어진다. 촬영을 끝낸 봉태규의 몸이 모니터 앞에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린다. 손에 붕대를 감고, 가운으로 몸을 덮고 물로 입을 헹구는 문소리는 마지막 라운드를 끝낸 권투선수 같다. 그렇게 촬영은 전투구나. 이 발칙한 영상들은 어떤 관객의 말초신경을 자극할는지는 몰라도, 가슴이 크게 작네, 쉽게 떠들어댈지 몰라도, 이들에게 촬영은, 영화는, 연기는 한없이 진지한 전쟁이구나. 소리 생각: 너무나 오랜만에 극도의 오르가슴을 느끼는 게 뭘까? 꺽꺽거릴 수도 있지 않나, 대성통곡을 해야 하나? 그런데 운 게 잘한 걸까? 잘못한 게 아닐까? 혹시 신파라고 느껴지면 어떡하지? 상수 생각: 처음부터 이 신은 두컷으로 찍겠다고 생각했어요. 첫컷은 화끈하고 유머러스하게 두 번째 컷은 세상 어떤 여자라도 부러워할 만큼 격정적으로. 그런데 우는 건 혹시 오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소리씨에게 편집은 울기 직전 오르가슴에 오른 상태쯤에서 잘라낼 수 있도록 찍겠다고 했고 촬영감독에게는 혹시 소리씨가 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빠지지 말고 조금 지켜보고 있다가 빠져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런데 소리씨가 연기를 끝내는 순간 나는 모니터를 보지 않아도 이건 오케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편집에서 리듬상 덜어낼지도 모르겠다는 불안함은 여전했지만, 이렇게까지 배우가 꼭 보듬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에필로그 2달 반, 46회차 촬영이 모두 끝났다. 그러나 영화는 한참 동안 그들의 손을 떠나지 않았다. 몇번의 모니터를 통해 프린트를 뽑고 다시 편집한 적이 있었다. 하루는 임상수 감독이 황정민, 문소리와 함께 술 한잔 하는데 기분이 진짜 꿀꿀했다. “투자자도 없지, 배급도 없지, 개봉날짜도 안 잡혔지. 힘날 게 하나도 없더라구요” 게다가 갑자기 술자리에 나타난 김인식 감독이(임상수 감독과 개인적으로 매우 친하다) “야, 충무로에 이 영화 잘되면 눈알 판다고, 손에 장지진다고 하는 사람들 많더라”는 정말 심장 후벼파는 소리를 하는 거였다. 문소리는 그 자리에서 속상해서 엉엉 울었다. “그땐 다 내 책임 같은 거예요. 배우의 임무가 현장에서 열심히 하는 것만이 아니구나, 내가 별로 유명하지 않으니까 투자·배급에 다 영향을 끼치는구나.” 임상수 감독 역시 “누가 눈알을 판대? 내가 확 파버릴까보다” 하고 농담을 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지만 해보자, 시간도 많은데, 후시(녹음) 백번이라도 하자. 편집 만번이라도 하자. 투자·배급 될 때까지, 개봉하는 그날까지 끝까지 할 때까지 해보자. 지난 7월31일, 임상수 감독과 문소리는 <바람난 가족>이 오는 8월27일부터 열리는 베니스영화제의 경쟁부문인 ‘베네치아60’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원래 겸손하지 않은 임상수 감독의 어깨는 더욱 으쓱해졌고 문소리는 2년 연속 베니스를 가는 행운의 배우가 되었다. ‘마지막 연애의 상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8월엔 충무로 안과가 바빠질지도 모를 일이다.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제공 명필름 ▶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1] ▶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2]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1]

감독 임상수 배우 문소리의 싸우며 영화찍기 5막7장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촬영장 잠입 취재기 영화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본다는 것은 이후 얼마나 완성도 있는 결과가 나왔는지를 떠나, 그 자체로서 경이로운 경험이다. 관객은 체에 잘 걸러진 빛나는 장면의 이음들만을 보게 되겠지만, 스크린 뒤에서 만나는 일들은 상상, 그 이상의 천태만상이다. 화장기 없는 배우의 부스스한 등장과 개봉쯤엔 평상심의 귀재인 척하는 감독들의 감정의 수위가 하늘끝 땅끝까지 널을 뛰는 국면들, 순간의 아이디어가 영화 전체의 색을 바꾸는 운명적인 모멘트, 그러나 무엇보다 빛나는 순간은 저마다 다른 임무에 여념이 없던 스탭들이 ‘액션’이라는 구령을 시작으로 온전히 한 목적만을 위해 동시에 몰입하는 몇분간이다. 마치 단체오르가슴이 터져나오는 난교의 장 같은, 그러나 흔한 교성조차 뱉을 수 없는 정적 속에, 몸을 뒤척이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경직 속에 비로소 신성해지는 촬영장이야말로 영화라는 세공품의 제조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단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올해 초, 찬바람이 살을 에는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 ‘빤스 벗고 덤비는’ <바람난 가족>의 촬영장을 누비며 퍼담은 이 기록들은, 우리 이렇게 고생했어요, 혹은 우리 이렇게 재밌었어요, 식의 따뜻한 제작기가 아닐는지도 모른다. 한편의 영화가 마침내 시작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에 대한 그리고 마침내 관객의 망막에 잡히기까지의 긴 기다림에 대한 짜증나는 일기일는지도, ‘한성깔’ 한다는 임상수 감독과 ‘한고집’ 한다는 문소리라는 배우의 아슬아슬한 전선을 따라가는 기자의 주관적 관음의 기록일는지도 모른다. 임상수 감독과 배우 문소리를 만나 검증받은 뒷이야기를 더해, 평론에 난도질당하고 홍보에 유린당하기 전, 날것 그대로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그 펄떡이는 생선에 대한 좌충우돌 어획담을 풀어놓는다. 바람이 모이다 <마지막 연애의 상상>이란 임상수 감독의 시나리오가 문소리의 손에 떨어진 건 <오아시스>로 한참 정신이 없었던 지난해 8월이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르지만 알 수 없는 매력을 지닌 ‘호정’이라는 캐릭터에 욕심이 생긴 문소리는 “책임을 못질까봐 걱정이지만 꼭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명필름의 이은 대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번엔 사정상 좀 힘들게 됐지만 다음엔 꼭 작품 한번 하자”는 거였다. “뭐 캐스팅 상황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크게 실망하지도 않았어요.” 이후 <바람난 가족>이란 조금은 노골적인 제목으로 탈바꿈한 이 영화의 ‘호정’ 역은 김혜수로 결정되었고 그동안 실제적으로 벗어보인 적이 없었던 ‘글래머 스타’ 김혜수가 ‘벗는다’는 것만으로도 이 캐스팅 뉴스는 세간에 꽤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러다가 알려졌다시피 크랭크인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태에서 김혜수는 드라마 <장희빈>의 출연을 결정하게 되었고 김혜수와 명필름 사이의 공방은 법정까지 갈 위기에 처했다. 문소리가 급하게 만나자는 명필름의 전화를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앞뒤 사정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도 아니고, 못하면 비교당할 게 뻔한데 선뜻 하겠다는 생각은 안 들던데요.” 임상수 감독은 “하든 안하든 한번 보자”고 “당신 아니면 안 된다”라고 설득했지만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부분을 지지하지만 이번엔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거절의 대답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3번쯤 거절의 뜻을 밝혔던 어느 날, 문소리는 종이를 반 접어서 이 영화를 해야 할 이유와 안 할 이유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아시스>고 베니스영화제 신인상이고,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내가 과연 이 영화를 거절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앞둔 여진이 언니라면 어땠을까? 이런 제작사에, 감독에, 시나리오에 내가 안 했을까? 그간 상받은 거에 대해 아무런 의미를 안 둔다고 말하면서도 나 지금 뭔가 계산하고 있지 않나? 사심이 생긴 게 아닌가? 하는 반문이 들더라구요.” 그런 생각에 이르니 모든 게 명료해졌다.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기류가 엉키다 “시나리오를 읽은 모든 사람들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은 다 알겠는데 호정이는 잘 모르겠다는 거였어요.” 결국 작품에 들어가기까지 이들에게 화두는 ‘도대체 호정이 누구냐’였다. 그러나 시나리오에 대해 세세하면서도 나긋나긋하게 질문을 던졌던 김혜수와 달리 문소리는 괴상하고 관념적인 질문들로 임상수 감독을 괴롭혔다. “쿨한 게 도대체 뭔데?, 당신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쿨한 여자의 정체가 뭐냐?, 혹시 호정이란 여자 당신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여자들 조합해놓은 거 아니냐?”(문소리) “아, 그런 토론 저 정말 싫어하거든요. 뭐가 나올는지는 찍어봐야 아는 거죠. 나 역시 잘 모르면서 찍는 거거든요. 그런데 모호한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아마 영화가 끝나도 호정이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는 안 나올 거라는것도 알았구요.”(임상수) 임 감독은 소설책, 비디오도 권하고 호정의 모델이 될 만한 여자도 만나게 했지만 그 어디에도 호정은 없었다. “임 감독은 이창동 감독과 정말 다르죠. 이창동 감독은 내가 뭔가에 대해 반문하며 ‘내가 너를 끝내 설득하고야 말리라’는 자세로 밤이 새도록 이야기를 하는데 임상수 감독은 그런 걸 되게 귀찮아해요. 그게 중요해?, 당신 왜 이렇게 관념적이야? 아, 좀 구체적으로 시나리오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 좀 하자, 고 하거든요.” 그때, 두 사람의 격렬한 대화를 한참 지켜보던 황정민이 한마디 건넸다. “소리야, 캐릭터를 자꾸 니쪽으로 끌고 오려고 하지마. 그냥 니가 캐릭터를 저기에다 놓고 그쪽으로 다가가려고 해봐.” 결국 며칠간의 토론 끝에 ‘쿨’한 호정에 대한 정의는 “뜨거움을 가지고 있되 마지막의 태도를 세련되게 하는 여자”로 나름대로 결론지은 상태에서 촬영날은 다가왔다. 도대체 이 감독과 이 배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나 별 도리없다. 임상수 감독의 말대로, 어떻게 될지 다 알면 왜 찍나, 뭐가 될지 모르는 거니까 일단 한번 가보는 거다, 찍어보는 거다. 바람이 분다. 동쪽으로 혹은 서쪽으로 ‘레디, 액션!!!!!’ 같은 우렁찬 구호 대신 ‘시∼작!”이라는 경쾌한 말로 슛을 시작하는 이 촬영장은 이상하게 조용하다. 감독이 배우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도, 스탭들끼리도, 늘 조용조용한 목소리를 유지한다. 우리가 익히 들어왔던 ‘성질 안 좋은’ 임상수는 도대체 어디로 갔나? 그 사이 득도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나 속지마라. 문제는 소리의 고저가 아니라 찌르는 깊이였다. #71 창근씨 댁 안방 2002년 12월 8일 병한: 나 요새 생전처음 오르가슴이란 걸 느껴… 내가 이 나이에 이럴 수 있다는 거. 니들은 이해가 안 되지? 얘야 인생 솔직하게 살아야 되는 거더라. 솔직하게, 자기 느낌대로… 그렇지 않음 그게 사는 게 아냐… 하루를 살아도 사는 듯싶이 살아야지, 응? 호정: 그럼요. 첫 촬영에도 불구하고 이 노련한 윤여정이란 배우는 감독의 요구를 한눈에 읽어낸다. 문제는 네명이 한숏에 잡히는 이 신에서 젊은 두 배우의 리액션이다. 황당하다, 기가 차다, 듣기 싫어 죽겠다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황정민의 리액션은 감독의 마음에 쏙 드는데 문소리의 리액션은 어째 좀 맘에 안 드는 모양이다. “어이, 소리씨 그런 리액션은 술집 작부 같지….” 얌전하고 착한 촬영감독 김우형의 가슴은 콩당콩당 뛴다. ‘허허헉… 저 감독이 미쳤나… 배우한테 저게 뭔소리야.’ 촬영이 끝나고 술자리에서 문소리가 한마디 한다. “이거 보세요! 당신 그러면 안 돼. 배우한테 술집 작부가 뭐야, 술집 작부가! 똑바로 하세요!” 상수 생각: 제 말하는 방식이 사람 기분 별로 안 좋게 만든다는 건 알거든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그렇게 말해선 안 된다는 것도 반성하는 부분인데, 사실 그 이상으로 적확한 표현을 찾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말이 고급스럽게 조금 안 천박하게 할 수는 없을까?’ 이러는 것보다 가장 정확하고 빠른 디렉션이니까요. 그래도 그날 이후엔 조심하려고 노력했다구요. 소리 생각: 이창동 감독은 뭐가 맘에 안 들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짓고만 계세요. 결국 배우가 자진해서 감독님 이렇게 해볼까요? 뭐 이렇게 눈치를 보는데 임상수 감독은 바로 튀어나오거든요. 대부분의 대화가 이런 거였어요. “소리씨, 이거 너무 어벙한 거 아냐?” “허 참, 주연 여배우가 어벙하게 나오면 이 영화 참 잘도 되겠네요.” 처음엔 감정 많이 상했죠. 갈수록 적응이 좀 됐지만. 12월 중순,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문소리는 술을 먹고 펑펑 울었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엄청 헤매고 있는데 큰일났다, 끝장났다, 진짜 이 사태를 어떻게 돌파해야 하냐’는 거였다. 그 동안 장편 두편과 여러 편의 단편을 하면서 모든 영화들의 카메라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해 있었다. 그러나 11월 한달 동안 찍었던 <바람난 가족>의 카메라는 오히려 자신의 시각이 되어 주변을 지켜보는 식이었던 것이다.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지금 이 영화에서 뭘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문소리의 불안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한 것은 평창동 대저택에서의 촬영부터였다. #49 영작네 거실 2003년 1월 8일 호정: “처녀 때야 인제 결혼하면 섹스는 좀 맘껏 하겠구나 하고 기대 하잖아… 근데 결혼하고 좀 지나면 어디 그러니? 여자도 아니구, 무슨 중성적인 취급 받잖아. 솔직히 얘기해서 난 결혼하구나서 오히려 섹스를 더 안 하는 것 같애… 처녀 땐 그래구 유부남에 총각에 숫총각에… 그래, 약혼녀 있는 놈, 다양했잖아….” 어두운 거실에서 친구와 아슬아슬한 통화를 나누는 이 장면을 찍으며 임상수 감독은 문소리에게 요구하는 게 유난히 많아진다. “나는 더 아줌마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고 봐, 점잖게….”(임상수) “점잖은 아줌마가 어딨어요?”(문소리) “그 말이 아니라 지금 대사는 좀 학생스럽다고, 꼭 처녀가 말하는 것 같거든….” 다음 테이크에서 문소리가 목소리 톤을 좀 낮추자 이번엔 악센트가 잘못 가서 붙었다고 한마디 한다. 상수 생각: 배우들은 뭔가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신이 주어지면 잘하고 싶어하는 속성이 있거든요. 까불면서 하고 싶었던 거죠. 물론 유머러스한 대사지만 나는 어른이 국어책 읽듯이 하는 대사를 좋아하거든요. 예뻐보이게 대사를 하는 것보다 우아하고 점잖게 하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문제로 배우들하고 싸웠어요. 이번에도 원하는 게 잘 안 나오니까 자꾸 이상한 트집만 잡다가 잠시 사라져 버렸는데 ‘화나서 사라졌구나’ 눈치를 챘나 봐요. 다행히 소리씨와는 그게 촬영 중 마지막 의견 충돌이었어요. 그리고 소리씨에게는 집에서 찍은 신들이 큰 의미로 다가온 것 같아요. 이 집의 주인은 자신이고 작품의 주인도 자신이라는, 그래서 집 촬영이 끝나고 나서는 완전히 작품에 대해 감을 잡은 것 같더라고. 집 나오면서 술을 엄청 먹었는데 술먹고 “감독님, 나 이 영화 찍기로 한 거 정말로 잘한 일 같아요” 그러던데요. 소리 생각: 나는 그때 이 여자가 내뱉는 전화내용들이 진심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니까 뭔가 그 대사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거구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 이건 그냥 친구한테 우아한 척하는 허풍이거나,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결국 감독님이 맞았던 거죠. 그런데 그날 감독님이 사라졌대요? 난 전혀 몰랐는데요? ▶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1] ▶ 백은하 기자의 <바람난 가족> 현장 관찰기 [2]

무라카미 하루키 신작 <해변의 카프카>

하루키의 위대한 선물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데뷔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2002년,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를 발표했다. 7년 만의 신작에서 하루키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있으면 돼… 너는 귀를 기울이고 그 메타포를 이해하면 돼’라고 말한다. 그 세월 동안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일까? 그건 전혀 아니다. 여전히 하루키는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라고 말하지만, 그 의미는 미세하게 변화했다. ‘사물이 계속 훼손되고, 마음이 계속 변하고, 시간이 쉬지 않고 흘러가는 세계’에서 도망치기를 원하는 심정은 동일하지만, 결국은 돌아간다. 세계의 폭력성은 여전하지만, 돌아가서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된다. <해변의 카프카>는 15살 생일을 맞은 소년의 가출에서 시작한다. ‘세계에서 가장 터프한 15살의 소년’이 되기를 원하는 그는, 자신의 이름을 카프카라 짓는다. 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라는 뜻이고, ‘부조리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을 방황하고 있는 외톨이인 영혼’을 의미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내기 위한 강함.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 - 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나가기 위한 강함’이다. 카프카는 증오하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시코쿠의 한 사립도서관에 기거한다. 어린 시절 사고를 당해 과거를 잃어버린 나카타는 고양이를 찾아주다가, 조니 워커라는 고양이 살해범을 만난다. 사악한 조니 워커를 죽인 나카타는 입구의 돌을 찾기 위하여 시코쿠로 향한다. <해변의 카프카>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두개의 상황이 번갈아 전개되는 형식이다. 나카타는 조니 워커를 죽였지만 실제 죽은 사람은 카프카의 아버지이고, 그 순간 시코쿠에 있던 카프카의 몸은 피로 얼룩진다. 그들의 현실은, 꿈은 서로 이어져 있다. ‘꿈속에서 책임은 시작’되고, 카프카는 아버지의 저주를 실현하게 된다. 그리스 비극은 ‘인간이 운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인간을 선택한다. 그 비극성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당사자의 결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당사자의 장점을 지렛대로 해서 그 비극 속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아버지에게 들었던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간음한다’는 저주는, 카프카의 현실이 된다. 하지만 카프카는 세계의 끝에서 안주하지 않는다. 카프카는 세상과 거리를 두는 방법이 아니라 돌아가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는 길을 택한다. 마음속의 공포와 분노를 극복하고, 거기에 밝은 빛을 넣어 차가워진 부분을 녹이는 길을. <해변의 카프카>는 그리스 비극과 일본의 고전문학 <겐지 이야기>의 생령(生靈) 등 다양한 모티브를 끌어들이며 풍성하게 진행된다. 하루키의 투명하게 울리는 문체는 더욱 깊어졌고, 환상과 현실을 유려하게 엮어내는 솜씨도 여전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23년 동안, 마라톤 코스를 달리는 것처럼 꾸준하게, 성실하게 전진해왔다. 그 성과가 <해변의 카프카>다. 혹시 전작들과 비슷하지 않을까, 라는 예단은 철저하게 무시해도 좋다. 나선형의 발전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해변의 카프카>는 그동안 하루키의 작품을 읽어온 독자에게 주는, 위대한 선물이다. ‘인간의 모든 선악과 더불어 그 신성(神性)과 수성(獸性)까지도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하루키의 야망을 즐겁게 확인할 수 있다. 김봉석/ 대중문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올 여름은 공포가 접수한다

지방에서 강세 보이는 <여고괴담3>, 블록버스터 제압 2003년은 호러영화의 해인가. 여름 시즌에 맞춰 개봉한 호러영화들이 계속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운데, 이번엔 여고생 귀신들이 미래에서 돌아온 기계전사와 쭉쭉빵빵 미녀 탐험가를 제압했다. 8월1일 개봉한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은 주말 사흘 동안 전국에서 68만여명을 동원하며 8월 첫주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다. 개봉 직전까지 예매 성적에서 2∼3위권을 맴돌았던 이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무서운 현장 판매를 기록하며 관객몰이에 성공했다. 8월7일 전국 100만명을 돌파한 이 영화는 평일에도 서울 3만5천∼4만명, 전국 10만∼12만명 선을 극장에 불러들이며 흥행의 고삐를 한껏 당기고 있다. <여고괴담3>는 주로 지방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으며, 연령대로 치면 10대층에 압도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방학 시즌에 개봉한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는 것이다. 배급사인 시네마서비스 관계자는 “예매를 가장 많이 하는 연령층은 20∼30대인데, 예매율이 낮은데도 흥행이 잘된다는 건 관객 대다수가 예매를 즐기지 않는 10대라는 사실을 역증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10대 여학생 관객이 ‘단체관람’ 수준으로 몰리고 있다는 게 제작사 씨네2000의 전언이다. 부가판권 판매없이 극장 흥행만으로 따져도 전국 100만명선이면 손익분기점에 도달하는 이 영화의 성공으로 씨네2000은 오랜만에 환한 분위기를 맞고 있다. <여고괴담3>의 흥행을 보며 밝은 표정을 짓는 건 이들만이 아닐 것이다. 8월8일의 이나 14일의 <거울속으로> 등의 호러영화를 개봉할 영화사 관계자들도 올 여름 유난히 강한 공포바람에 고무받은 분위기다. 8월1일 개봉한 <툼레이더2: 판도라의 상자>는 주말 동안 전국 46만여명을 동원했다. 평일에도 전국 7만∼8만명의 관객이 드는 가운데 8월7일까지 전국 관객 72만명을 기록하고 있다. <여고괴담3>에 10대 관객을 빼앗겼지만, 의외로 20대 초·중반 여성 관객의 반응이 뜨거워 비교적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7월25일 개봉한 <터미네이터3>는 200만명을 돌파했지만, 서서히 힘이 떨어지는 분위기다. 한편, ‘잠재력 있는 복병’으로 주목받았던 <갈갈이 패밀리와 드라큐라>는 8월7일까지 20만 가까운 관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대다수가 어린이와 보호자로 구성된 관객층은 평일 1, 2회 객석을 매진시킬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1, 2회 이후 오후부터는 관객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점. 오후 시간대에 다른 영화로 교체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과 전체 스크린 80개 중 서울에서 18개만을 확보했다는 것이 이 영화 흥행의 장애요소다. 한편, 8월8일 <나쁜녀석들2> <고양이의 보은> 등이 가세하면서 8월 둘쨋주 극장가는 여름 시즌 최대 격전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이들 작품은 각각 남성관객, 호러영화팬, 어린이 및 애니메이션 마니아 등 단단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어 기존 영화들과의 대충돌이 확실시된다. 여기에 8월14일 <바람난 가족> <거울속으로> <젠틀맨리그> <남남북녀> 등이 개봉하면 스크린을 확보하기 위한 배급사간의 경쟁은 극한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달아오르는 한여름의 열기만큼이나 여름 특수를 노리는 극장가도 점점 뜨거워지고 있는 것이다. 문석

인터넷 펀드, 투자의 새 길 트나?

<바람난 가족>의 3차 인터넷 펀드 공모가 단 3분 만에 마감되었다. 8월8일 오전 10시부터 명필름의 홈페이지를 통하여 10억원을 모집한 이번 공모는 1차 공모의 5억원, 2차 공모의 5억원에 더해지면서 총 20억원 규모의 인터넷 펀드를 탄생시켰다. 이 영화의 총제작비 규모가 28억5천만원(순제작비 18억5천만원, 마케팅비용 10억원)임을 감안할 때, 인터넷을 통한 20억원의 투자유치는 순제작비를 훨씬 상회하는 액수다. <바람난 가족>은 애초 기관투자자를 상대로 투자제안도 하고 투자시사회도 열었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고, 결국 제작사가 영화의 100%를 투자하는 방식을 택하게 되었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첫 공모의 가장 큰 목적은 홍보, 마케팅 기능이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 2, 3차에 걸친 공모를 시행하게 되었다”며 “특히 70%의 원금 보장조건과 완성된 영화에 대한 신뢰, 평단의 긍정적인 반응과 베니스영화제 진출소식도 투자심리를 자극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또한 “이미 모든 리스크를 제작사가 안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투자 규모가 늘어나도 70% 원금 보장에 대한 리스크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간 인터넷 펀드가 투자 뒤 피드백이 부실했던 것에 비해 명필름은 제작비 상세내역, 수익계산방법, 예상수익 등에 대해 투자자들에게 지속적인 메일링 서비스를 제공한 것 역시 이후 입소문의 공신이라고 볼 수 있다. 명필름쪽은 이번 공모의 결과를 통해 “일반관객이 투자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며 이후 작품에서도 시나리오 단계에서의 투자유치 등, 여러 가지 투자방식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투자는 입금확인과 함께 투자완료가 되는 방식을 택하고 있어 이미 명필름은 현금 20억원을 확보하게 된 셈. 돈가뭄에 시달리는 충무로에서 인터넷 펀드가 새로운 투자유치 방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에 귀추가 주목된다. 백은하

서늘한 붕괴가족의 앙상한 기운,<바람난 가족>

■ Story 입양한 아들 수인과 나름대로 정의로운 변호사 남편, 까탈스러운 시어머니(윤여정)와 병상에 누운 시아버지(김인문)를 둔 가정주부 호정(문소리). 얼핏 평범해 보이는 집안이지만, 남편 영작(황정민)은 젊은 애인 연(백정림)과의 섹스에 탐닉해 있고, 시어머니는 초등학교 동창과 바람이 나서 “생전처음 오르가슴을 느꼈다”고 고백하며, 호정 역시 옆집 고등학생 지운(봉태규)과 심심풀이 ‘찐한연애’를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차 안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던 영작의 차가 술취한 우체부 지루(성지루)의 오토바이를 들이받으면서 이 가족은 아슬아슬한 균열을 넘어 붕괴의 순간을 맞는다. ■ Review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을 잇는 임상수 감독의 세 번째 영화 <바람난 가족>은 대한민국 남성들의, 혹은 감독 스스로의 ‘고해성사’ 같은 영화다. 사회적 우위를 계승받아 고의적이든 고의적이지 않든 폭력의 역사에 동참했던 ‘미성숙’의 남자들이, 길게는 60년 짧게는 30년을 참고 살아온 ‘성숙한’ 여자들에게 바치는 반성문인 것이다. 하여 이 영화 속 남자들은 등장부터 구덩이에 빠지거나, 무력하게 자기 뒤도 못 닦고 손발이 묶여진 채 마지막 기운을 뿜어대다가 걸레질로 ‘아웃’당한다. 쌍욕을 하며 아내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손가락을 부러뜨린 뒤에도, 여자는 훌훌 털고 가벼워지는데 남자는 끝내 쏟아버릴 수 있는 순간을 저지당한다. 그러나 이 성실한 ‘자진납세’는 때때로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그랬던 것 처럼) 여성들을 지나치게 솔직하고, 이성적이고, 쿨하게만 그려내면서 현실과의 거리를 떨어뜨린 채 우상화시킨다. 하여 <바람난 가족>은 여성들의 전복성이나 도발 정도를 측정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해방감과 동시에 막막함을 주는 이 영화의 결말이 아프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죄 많은 남자요, 라고 말할 수 있는 형량의 바로미터다. 감히 “배우의 영화”라고 부를 만한 <바람난 가족>은 <박하사탕> <오아시스>를 거친 문소리의 자신감에 <와이키키 브라더스> 을 거쳐오며 중량감 있는 주연으로 성장한 황정민의 호연이 더해지는 가운데 윤여정, 김인문, 봉태규, 성지루, 백정림 등의 탄탄한 조연들이 극에 무게감과 안정감을 더한다. 김우형 감독의 촬영은 슈퍼 35mm 시네마스코프 화면에 실려 뼈대를 드러낸 붕괴가족의 앙상한 기운을 서늘하면서 과장되지 않게 그려낸다. 오는 8월27일부터 열리는 2003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베네치아60’에 선정되었다.

[로베르 브레송 특별전] 금욕의 모더니스트를 만나자

로베르 브레송 특별전이 하필 한여름에 열린다. ‘위대한 시네아스트’라는 부담감을 안고 보더라도, 희한하게 그의 영화는 피서용으로 안성맞춤이다. 이건 흔히 ‘초월적’ 또는 ‘금욕적’ 등의 수식어로 묘사되는 브레송 영화에 대한 모욕이 아니다. 물론 브레송 영화는 호러 장르와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 관습적인 내러티브와는 담을 쌓은 듯 보이는데도 더위를 싹 잊게 할 만큼 시선을 끌어당기는 이상한 흡인력, 인물의 심리가 아니라 행동의 표면만을 툭툭 늘어놓는 듯한데도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에 관한 섬뜩한 진실을 순식간에 깨닫게 해주는 오싹함 때문이다. 브레송 영화는 난해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분해해서 그의 영화는 이러이러하다고 늘어놓는 건 어쩐지 무모해 보인다. 브레송이 세상을 뜬 1999년, <필름 코멘트>가 36쪽을 할애해서 꾸민 브레송 특집에서 총론을 쓴 켄트 존스는 “카메라, 사운드, 테마, 내러티브, 액션, 색채, 연기 등 모든 영화요소의 정교한 협력, 그리하여 완벽한 리듬감과 명확성을 가지고 기능하는 것, 그것이 브레송 영화다”라고 했다. 그는 브레송 영화에 등장하는 대상, 액션, 감정 사이의 공간에 주목했다. 그 ‘사이의 공간’에서 보여지는 것과 느껴지는 것, 그리고 이해되는 것과 정의할 수 없으나 분명히 현존하는 것 사이의 긴장이 흘러나온다고 봤다. 그로 인해 브레송 영화는 굉장한 지적 쾌감을 안겨준다. 관능적인 형이상학과 차가운 리얼리즘의 묘미를 동시에 세례받는 듯한. 이런 관람 태도는 또 어떨까. <무셰트>에서 성장영화 <정복자 펠레>의, <당나귀 발타자르>에서 동물영화 <꼬마돼지 베이브>의, <사형수 탈주하다>에서 수용소영화 <대탈주>의 장르적 쾌감을 색다르게 느껴보는 것. 브레송 영화는 이런 엉뚱하기 그지없는 기대감조차 만족시켜줄지 모른다. 브레송의 마지막 그림자를 보는 것 역시 오싹하다. 50년대의 <사형수 탈주하다>와 <소매치기>에서 희망과 구원을 보였던 그가 70년대 말의 <아마도 악마…>와 80년대 초의 <돈>에서 지독한 염세주의를 드러내며 절망한다. <돈> 이후 은둔자가 돼버린 그의 서늘한 기운이 독한 여운으로 다가올 것이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일관한, 무표정하게 등장하는 인물의 얼굴을 통해서 말이다(8월16∼31일 시네마테크 부산(월 휴관), 문의 051-742-5377, 5477, www.piff.org/cinema).이성욱 lewook@hani.co.kr 죄지은 천사들 1943 | 96분 | 35mm | 흑백 극작가 장 지로두가 대사를 쓴 브레송의 첫 장편영화. 양식화한 정교한 대사가 특징적이다. 영화평론가 조르주 사둘은 “브레송이 창조한 폐쇄공간은 흑과 백으로 이뤄진 하나의 교향곡”이라고 평했다. 도미니크 수녀회의 수녀 안느 마리는 전과자 테레즈를 만난 뒤 구원하기 위해 애쓴다. 테레즈는 연인이 저지른 죄로 감금돼 있다 풀려나서는 남자친구를 살해한다. 볼로뉴 숲의 여인들 1945 | 90분 | 35mm | 흑백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를 기초로 만든 작품으로 앙드레 바쟁은 브레송과 장 콕토의 각색을 높이 평가했다. 연극적 전통은 이후 작품에서도 여전하지만 양식적이고 우아한 대사는 여기서 그친다. 또 마리아 카사레스 등 직업 배우들의 연기는 뛰어나지만 브레송은 이후 작품부터는 훈련되지 않은 비직업 배우를 기용해 작업한다. 엘레느는 연인 장이 자신을 멀리하자 그에게 복수할 맘으로 매춘 경력이 있는 아름다운 여인 아네스를 소개해준다. 장과 아네스는 사랑에 빠지고 결혼으로 행복에 젖어 있을 즈음 엘레느가 장을 찾아가 아네스의 과거를 폭로한다. 사형수 탈주하다 - 바람은 불고 싶은 곳으로 분다 1956 | 95분 | 35mm | 흑백처형되기 직전 리옹의 한 감옥에서 탈출한 앙드레 데비니의 실화에 기초해 만들었다. 2차대전 중 10개월 동안 독일군 포로였던 브레송 자신의 실제 경험에 바탕을 둔 작품이기도 하며, 이후 되풀이되곤 하는 ‘감옥’ 혹은 ‘감금’의 이미지가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데이비드 보드웰이 교과서적이라고 평가한 사운드의 활용은 그 자체만으로 놀라운 서스펜스를 만들어낸다. 레지스탕스 퐁텐느가 수용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탈출을 시도하나 실패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감옥에 갇힌 퐁텐느가 아주 치밀하고 집요하게 탈출 준비를 시작하는데 그 과정 역시 대단한 스릴을 맛보게 한다. 칸영화제 감독상. 소매치기 1959 | 75분 | 35mm | 흑백폴 슈레이더는 이 작품을 보고 자기 영혼이 처음으로 처녀성을 빼앗긴 것 같았다고 했다. 또 영화평론가 르네 프레달은 이 작품이 레네의 <히로시마 내사랑>, 안토니오니의 <정사>,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더불어 현대영화를 잉태한 4편의 영화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모두 과장이 아니었을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모티브를 지독하리만치 ‘모던’하게, 또 소매치기의 범죄 현장을 긴박감 넘치는 속도로 이끌어간다. 미셸은 사회가 부조리하기 때문에 자신의 범죄가 정당한 것이라고 믿는 소매치기다. 한 차례 경찰에 체포돼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난 뒤 그는 자신의 범죄에 사회적 성찰을 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문가로부터 전수받은 범죄 기술의 묘미에 빠져든다. 잔다르크의 재판 1962 | 65분 | 35mm | 흑백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수난>과 달리 브레송은 실제 재판 기록에 근거해 제한적인 카메라 움직임으로 미니멀리즘적 스타일을 탁월하게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삶을 바꿀 만한 영향을 준 작품”이라고 했다. 영화는 법정과 감옥을 오가며 심문자의 질문과 잔다르크의 답변을 번갈아 보여준다. 은총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는 잔다르크의 재판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당나귀 발타자르 1966 | 95분 | 35mm | 흑백브레송은 배우의 얼굴에서 섣불리 심리를 드러내는 표정을 걷어낸다. 표정없는 얼굴로 움직이는 배우는 브레송의 손발이 되어 정교한 표현기계가 된다. 그런데 애초에 표정이 없는 동물마저 그의 손에서는 인간과 다름없는 배우 기능을 수행한다. 고다르가 “가장 완벽한 브레송 영화”라고 극찬한 건 이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새끼 당나귀 발타자르가 인간이라는 끔찍한 굴레에 갇혀 숨을 거두기까지 일련의 시간과 사건이 물 흐르듯 흘러간다.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당나귀 발타자르의 시점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부조리함은 가공스럽다. 무셰트 1967 | 78분 | 35mm | 흑백대체로 5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작품을 만들었던 브레송이 2년 연속 작품을 발표한 건 <당나귀 발타자르>와 <무셰트>의 경우가 유일하다. 그래서 두편은 일종의 자매편으로 여겨지는데, 도리없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생명의 처지가 냉혹하게 펼쳐진다. 14살 소녀 무셰트의 주위는 참혹하다. 병으로 꼼짝할 수 없는 어머니,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오빠, 갓난아기 남동생을 돌봐야할 처지에다 학교에선 따돌림만 받는다. 어느 날 무셰트는 숲속에서 비를 만나 오도가도 못하고, 밤사냥을 마치고 돌아가던 밀렵꾼에게 처녀를 잃는다. 호수의 랑슬로 1974 | 85분 | 35mm | 컬러전후 작품의 정서적 흐름에서 다소 돌출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는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애초 기획했던 시기보다 무려 22년이 지나서야 완성됐다. 성배를 찾으러 떠났던 아서왕의 기사들이 빈손으로 돌아온 시점에서 시작해 한 시대의 몰락과 종언을 독창적인 스타일로 그려낸다. 스펙터클한 대목을 과감히 생략시켜가면서도, 스펙터클의 강렬함을 분출시키는 마술 같은 장면들이 배치돼 있다. 아마도 악마... 1977 | 96분 | 35mm | 컬러<호수의 랑슬로> 이후의 영화에서는, 높은 지성이나 성실은 젊은이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히려 깊은 절망으로 추락시킨다. 세상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자괴감으로 휩싸인 청년들이 일관되게 등장한다. 청년 찰스는 꽤 열성적으로 살았던 지적인 학생이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파괴를 선언하는 급진적인 정치활동에도, 구원을 부르짖는 종교에도, 아늑함을 안겨줄 법한 사랑에도 모두 염증을 느낀다. 도움을 청했던 정신분석은 기계적 해석을 되풀이할 뿐이다. 급기야 그는 친구에게 자신에 대한 살인을 청부한다. 돈 1983 | 85분 | 35mm | 컬러더이상 은총이나 구원은 없다. 교환가치의 기능을 수행하는 ‘돈’의 행적을 따라가보니 현대의 잔인함만 있을 뿐이다.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에 비견될 만큼 격한 어조로 폭력적 사회, 폭력적 인간을 고요하게 보여준다. 장난처럼 만들어졌을 위조지폐의 피해자가 된 청년 이본은 범죄자로 몰린다. 결백을 재판에서 입증하려 하지만 위증으로 패소하고 감금당한다. 딸은 죽고 아내는 떠난다. 그는 이제 살인기계가 된다.

사랑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없는 `사랑`,<남남북녀>

■ Story 연변의 고분발굴 현장, 바람둥이 대학생 김철수(조인성)와 북한 인민무력부장의 딸 오영희(김사랑)는 남북 합동으로 구성한 발굴단의 일원으로 이곳에 도착한다. 철수는 첫눈에 영희에게 반해 꼬시기 위한 수작에 들어가지만 영희는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결국 철수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한다. 먼저 유물을 발굴한 뒤 영희가 발굴한 것처럼 양보하겠다는 철수의 계획은 성공할 것인가? ■ Review <남남북녀>의 주인공은 철수와 영희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책 첫머리에서 따온 이 상징적인 이름은 영화의 지적 수준에 걸맞은 진정 탁월한 선택이다. <남남북녀>는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관객을 초등학생 수준으로 얕보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코미디라는 이유로 용납되는 한계에 과감히 도전하며 <남남북녀>는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 전개의 새로운 전범을 창출한다. <남남북녀>의 과감함은 철수와 영희가 어떻게 만나는지 설정한 대목부터 빛난다. 아마도 양식있는 영화라면 최소한 그들의 만남에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거나 아니면 우연처럼 찾아온 운명적 만남에 대해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남남북녀>는 어떤 선택을 하는가? 영희는 죽은 철수의 어머니가 영희랑 똑같이 생겼다고 제시한다. 그리하여 철수는 천하의 바람둥이였다가 그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남자로 돌변한다. 기가 막힌 건 영희에겐 그만한 이유도 없다는 사실이다. 남한에서 유행하는 랩송에 흥미가 있다고 무조건 남한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는 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남남북녀>의 과감함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인용하면서 한술 더 뜬다. 남한 청년과 북한 처녀의 사랑이 대대로 원수로 지낸 두 집안의 비극을 연상시킨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나 이 영화에서 사랑은 너무 느닷없는 것이어서 좀처럼 감정이입이 어렵다. 영화 후반부, 철수가 영희를 한번 더 보겠다며 처절한 몸부림을 보여줄 때는 갑자기 다른 영화의 롤이 잘못 끼어든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철수와 영희의 사랑은 분단체제라는 장애물을 고발하기엔 너무 보잘것없는 것이다. <남남북녀>는 <자카르타>와 <몽정기>로 일약 흥행감독으로 주목받은 정초신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이다. 이미 2편을 흥행시킨 감독의 영화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엉성하고 느슨한 작품이 된 건 아마 재능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 것이다. <몽정기>에선 최소한 등장인물에 대한 예의가 있었던 반면 <남남북녀>는 어떤 인물에도 인간적인 매력을 발견할 수 없다. 감독 스스로 자신의 피조물에 애정이 없는데 관객이 그들에게 애정을 갖는 건 불가능하다. 철수와 영희의 사랑이야기 <남남북녀>에서 결코 발견할 수 없는 건 바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