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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9404)

오해도 실수도, 내 웃음의 재료, 마틴 로렌스

는 외설스런 농담 때문에 NC-17 등급을 받은 전설적인(?) 작품으로, 마틴 로렌스가 <빅 마마 하우스> 등에서 화장실 유머를 천연덕스럽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일러준다. ‘판에 박혔다’거나 ‘경박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후 미국 극장가에서 ‘마틴 로렌스 효과’는 만만찮은 흥행으로 이어져왔다. 95년 풋내기 감독 마이클 베이와 가수로 더 유명했던 윌 스미스의 <나쁜 녀석들> 팀에 힘을 실어준 이는 자신의 이름을 건 코미디쇼에 출연 중이던 마틴 로렌스였다. 친근한 용모에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던 마틴 로렌스는 여러모로 위험한 프로젝트였던 <나쁜 녀석들>의 유일한 안전판이었다. 8년 뒤, 이들이 속편으로 돌아왔을 때 상황은 달라진 듯 보였다. 편리하게도 언론은, 마이클 베이와 윌 스미스는 할리우드의 특급 스타가 됐고 마틴 로렌스는 그간 제자리걸음만 했다는 ‘상대 비교’ 평가를 앞다퉈 내놓았다.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보자. 그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굳이 지난 8년을 짚어올라가지 않더라도, <나쁜 녀석들 2>의 마틴 로렌스는 조금도 녹슬지 않았으니까. 폼생폼사 사고뭉치인 파트너 어르고 달래서 사건도 해결해야 하고, 아내와 아이들, 말만한 여동생까지 바람 잘 날 없는 가정도 돌봐야 하고…. 돌아온 ‘나쁜 녀석’ 마틴 로렌스는 각양각색의 정신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패닉상태에 빠져 있다. 시종일관 쿨한 파트너 옆에서 주절대고 방방 뛰는 그의 모습은, 숨가빠진 <나쁜 녀석들2>의 유쾌한 쉼표다. 살짝 내려온 눈꼬리, 동그란 콧구멍, 뾰족 솟아나온 귀마저 저마다 익살을 떨어보이지만, 마틴 로렌스의 무기는 외모가 아니라 입담이다. 신경쇠약 직전의 수다쟁이. 경찰이든(<나쁜 녀석들>), FBI든(<빅 마마 하우스>), 강도든(<경찰서를 털어라>), 건달이든(<내쇼날 시큐리티>), 역할은 상관없다. 마틴 로렌스의 분신들은 언제나 원치 않은 소동에 휘말리고, 때마다 너무 뻔뻔해지거나 소심해져서, 보는 사람의 정신을 홀딱 빼놓는다. 그런 순발력과 ‘말발’로 치면, 그는 파트너인 윌 스미스보다 서너수 위일 것이다. 마틴 로렌스의 ‘입심’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80년대 중반. 돈도 연줄도 없던 그는 TV 코미디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몇편의 시트콤에 조단 역으로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그의 코미디 감각이 진가를 발휘한 것은 TV시리즈 <마틴>과 콘서트영화 를 통해서였다. 특히 는 외설스런 농담 때문에 NC-17 등급을 받은 전설적인(?) 작품으로, 마틴 로렌스가 <빅 마마 하우스> 등에서 화장실 유머를 천연덕스럽게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이 우연이 아님을 일러준다. ‘판에 박혔다’거나 ‘경박하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후 미국 극장가에서 ‘마틴 로렌스 효과’는 만만찮은 흥행으로 이어져왔다. 늘 같은 것을 보여줘야 하는 데 대한 갑갑증 때문이었을까. 마틴 로렌스는 지난 8년 사이 수렁에 빠졌다 나오길 반복했다. 마약과 총기를 소지해 구설수에 올랐고, 폭행과 성추행 의혹을 받았다. 한여름 무더위 속을 겨울 옷차림으로 달리다가 쓰러져 사흘간 코마에 빠지기도 했다. 긴 무의식 뒤에, 그는 ‘새 삶’을 얻었다고 믿었고, 달라졌다. 지난해 마틴 로렌스는 “마음속의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 자기 고백적인 라이브코미디 <마틴 로렌스 라이브:런텔댓>을 내놓았다. 그가 저지른 실수, 세상의 오해마저도 코미디의 재료로 둔갑시키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이제 그의 남은 야심은, 짐 캐리와 로빈 윌리엄스의 뒤를 따르는 일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그 하나를 즐기기 위해서는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울리는 것보다 웃기는 게 바람직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스마트 머니’를 베팅한 누군가는, 나의 변신을 목도하게 될지도 그럴지도 모른다.” 웃기지 않는 마틴 로렌스. 상상하긴 힘들지만, 불가능할 것 같진 않다.

[주말TV] 살인을 엿보는 피핑 톰, <죽음의 카메라>

죽음의 카메라(Peeping Tom) 1960년 감독 마이클 파웰 출연 모이라 시어러 8월17일(일) 낮 2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욕망>(1966, 이 영화는 <확대>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진다)은 어느 카메라 사진기사에 관한 영화였다. 어느 공원을 찾은 이 사진사는 카메라 셔터를 누르면서 풍경을 찍는다. 나무들과 바람, 그리고 조용한 정적. 사진작가에게 당시 풍경은 어느 한낮의 일상일 뿐이다. 그런데 사진을 현상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사진사는 의도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촬영했음을 뒤늦게 안다. 누군가의 살인사건을 카메라에 담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 <욕망>은 미스터리 구조가 흥미로우면서 카메라의 시선과 권력의 문제를 다뤘다. <죽음의 카메라> 역시 유사한 점을 공유한다. 원제인 <피핑 톰>(이는 엿보기 좋아하는 호색가를 뜻한다)으로 알려진 영화는 스릴러의 고전으로 대접할 만한 가치가 있다. <죽음의 카메라>는 어느 불행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어린 시절 학대를 받으면서 성장했고 지금은 영화사 촬영기사로 일한다. 마크는 이따금 아르바이트로 여자들의 누드사진 찍는 일을 한다. 마크는 어린 시절 불행하게 자랐는데 심리학자인 아버지의 실험대상처럼 키워진 것이다. 이후 그는 카메라 앞에서 여성을 살해하면서 피해자가 느끼는 극도의 공포심에 집착한다. 희생자에게 자신의 최후를 미리 알리고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다. 헬렌이라는 여성과 가까워지면서 마크는 갈등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에 대해 회의한다. 그뒤 경찰이 마크의 행방을 추적한다. 관음증, 다시 말해서 타인을 엿보면서 흥분을 느끼는 성도착증에 관한 영화로 <죽음의 카메라>는 자주 언급된다. 영화의 서사는 단순하다. 타인을 죽이는 일, 그중에서도 살인을 하면서 같은 장면을 촬영하는 것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의 범죄행위를 나열하는 것이다. 마크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누군가를 촬영하면서 어느 순간 삼각대에서 날카로운 칼날을 노출한다. 그리고 상대를 찌른다. 여기서 영화는 마크의 시점으로 이동해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 피해자가 어떻게 희생당하는지 보여준다. 이후 장면은 마크가 촬영한 장면을 작은 스크린으로 감상하는 모습으로 바뀐다. 이러한 장면의 연속은 영화의 제작과정과 동일하다. 즉 카메라-인물-관객으로 이동하는 하나의 경로를 그대로 밟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제작과정이나 영화적 자기반영성의 영역에서 볼 때 <죽음의 카메라>는 컬트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다. 마이클 파웰 감독은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보다 이후 후배감독에게 칭송받았다. 마틴 스코시즈 같은 영화감독은 존경하는 선배 중 한 사람으로 파웰 감독을 지목할 정도다. <검은 수선화>(1947)와 <분홍신>(1948) 등 파웰 감독은 색채가 화려하고 비주얼 감각이 예민한 영화를 만들었다. <죽음의 카메라>는 파웰 감독의 대표작이자 페미니즘 이론진영으로부터 호된 비판과 공격을 받은 불운한 영화이기도 했다. 여성을 관음의 대상으로 격하시켰다는 비판이었다. 영화에서 살인자 마크의 변태스런 아버지로 잠깐 출연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마이클 파웰 감독이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

그럼, 이만…

그럼, 이만… 기원전의 중국 사람 장건이 생각난다. B.C. 2세기 한때 흉노족(저들 스스로 불렀던 다른 이름이 있겠지만, 한족이 그들을 얼마나 미워했으면 匈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이 맹위를 떨쳐서 주변의 한나라와 월지국이 시달림을 받았다. 한나라는 월지국과 손잡고 흉노를 치기 위해 월지에 사자(使者)를 보냈는데 이 일을 자청하고 나선 사람이 장건이다. 한나라에서 월지로 가려면 사막을 가로지르고 설산(雪山)을 넘고 흉노의 땅을 통과해야 했다. 장건은 B.C. 139년 장안에서 출발했는데 도중에 흉노에게 잡혀 10년 남짓 포로로 있다가 탈출해서 월지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 사이 월지국은 나라가 커져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고 전쟁을 원치 않았다. 장건은 군사동맹을 맺는 데 실패하고 돌아오던 길에 또다시 흉노에게 잡혔다. 그는 1년간 갇혀 있다 내란을 틈타 탈출해서 한나라로 돌아왔다. 장건이 돌아온 게 126년이었다니까 13년에 걸친 긴 여행이었다. 그런데 그사이 한나라도 월지국 도움없이 흉노를 칠 만큼 강성해져 있었다. 재미있는 건, 중국사에서 장건이 서역의 문물을 처음 중국에 알린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다. 월지국은 서역지방이었고 그는 군사동맹에는 실패했지만 서역에 관한한 전문가가 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아이러니다. 불확정성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삶에서, 결과가 동기를 배반하는 일은 결과가 동기에 부응하는 것만큼이나 흔하다. 바로 이 칼럼의 제목이기도 한 히치콕 영화 <이창>(裏窓)에 주연한 할리우드 스튜디오시대의 미남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가 나오는 <셰넌 도어>라는 영화가 있다. 1860년대,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던 남부의 셰넌 도어가 무대인데, 농장주인 찰리는 열여섯살 난 막내 아들이 동네에서 놀다가 북군에게 잡혀가자 아들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이 여행에서 찰리는 막내 아들은 못 찾고 뜻밖에 북군의 포로가 된 사위를 구출한다. 또 귀향길에 전선을 넘다가 둘째 아들을 잃었고 그사이 집을 지키던 맏아들 부부는 북군 패잔병에게 살해당한다. 돌아오는 일요일, 찰리가 예배를 보고 있을 때 막내 아들이 마을로 돌아온다. 그러니까 막내는 제발로 돌아오게 돼 있는데 찰리는 아들 하나 찾으러 나섰다가 두 아들과 며느리를 잃고 사위를 얻는다. 이상한 산수다. 영화 마지막에 찰리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는데, 대략 “아들을 잃었으면 찾으러 나갈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부조리극에 대한 적절한 해설이다. 나중에 그 모든 것이 말짱 꽝이 된다 해도 우리는 바로 지금의 진실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기야 지금의 진실에 충실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미래의 결과적 진실까지 책임질 수 있겠는가. 지금 의미있다면 그걸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모든 중요한, 또는 사소한 결정들이 다 그렇다. 몇해 전 딸아이가 토끼를 사달라고 졸라서 퇴계로에 진출했다가 토끼는 끝내 못 찾고 대신 강아지 한 마리를 사가지고 돌아온 일이 있다. 사실이지, 토끼를 사러 나갔다가 토끼를 사오는 것보다는 토끼를 사러 나갔다가 강아지를 사오는 편이 조금은 드라마틱하고 조금은 덜 지루한 측면이 있다. 나도 훌륭한 저널리스트가 되겠다는 청운의 뜻을 품고 신문사에 들어왔다가 거기서 엉뚱하게도 문학을 발견하는 바람에 소설가가 되어 신문사를 나섰다. 예전에 소설책 날개의 작품연보들을 보면서 ‘무슨 소설책 한권 나오는 데 삼사년씩 걸린담?’하고 생각한 적 있다. 내가 이제 소설을 써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모두들 ‘알바’를 뛰는 틈틈이 본업을 영위했던 것이다. 작가 나름이겠지만, 소설 쓰는 건 경제행위로서는 부실하기 짝이 없다. 돈 벌자고 소설 쓰느니 가스배달 하는 편이 훨씬 낫다. 나도 일주일에 이틀은 가족에게 헌납하고 삼사일을 알바에 투자하고 하루나 이틀 정도 소설을 쓴다. ‘이창’을 쓰는 것도 알바의 일환이다. 물론, 동시에 내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는 소설가이기 이전에 작가(writer)이고 모든 글쓰기는 내 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좋은 소설가로서 독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이쯤에서 그만 쓰기로 했다. 지금 나의 가장 절실한 희망은 좋은 소설을 쓸 수 있게 되는 일이다. 그동안 <씨네21> 독자들과 다시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독자 여러분. 저, 분위기 다운되면 다시 돌아옵니다.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조선희/소설가

<여우계단> 음악 ‘공명’

“악기를 직접 만들었어요” ‘공명’은 창작타악그룹이다. 98년 결성된 이 그룹의 멤버는 조민수, 박승원, 송경근, 강성일(사진 왼쪽부터)씨로 모두 국악과 출신이다. 매년 한회씩 꾸준히 국내 공연을 가져온 이들의 명성은 오히려 해외에서 더 높은 편이고, 8월에도 베이징 공연이 잡혀 있다. 늘 새로운 소리와 악기를 고민하는 이들의 음악은 ‘여우계단’에 서서 완전(完全)함을 소망하는 여고생들의 심장에 불온한 혈기를 불어넣는다. “하나, 둘…스물일곱…스물아홉! 여우아, 여우아∼ 내 소원을 들어줘.” 오프닝신은 소희가 여우계단에서 소원을 비는 장면이다. 포커스가 흐려지면 뭉크의 그림이 될 것 같은 계단장면은 귀에 낯선 음악으로 더욱 몽환적이다. 나뭇조각들이 바람에 한데 쓸리며 두런거리는 소리, 쇠막대가 활털에 긁혀 내지르는 비명소리, 유리로 된 모빌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맑은 울음소리들이 소희의 발걸음을, 창백한 계단을 감싸고 돌면, 이제 비릿한 기도가 시작된다.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은 우화다, 슬픔을 빙 돌려 얘기하는. 여우에게 소원을 빌고 대신 목숨을 내어주는 네 소녀의 이야기는 처연한 악몽이기보다는 예쁘장한 동화에 가깝다. 윤재연 감독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리듬감을 공명에게 요구했고, 그들이 만들어낸 음악 가운데 아름다운(!) 곡만 엄선했다. 선이 거칠고, 듣는 즉시 공포영화를 연상시키는 리듬은 차곡차곡 리스트에서 제외됐다. 윤 감독이 원한 건 소야곡이지 장중한 진혼곡이 아니었던 셈이다. 시나리오가 영상으로, 다시 97분짜리 편집본으로 다듬어지는 동안, 굵직한 에피소드만 덩그러니 남은 영화는, 한 다리로만 춤을 추는 발레리나 같다. 아슬한 불균형을 그나마 지켜주는 건, 귀를 묘하게 거스르는 소리들. 가야금 소리, 대금, 유리병, 쇠, 진동하는 공기…. 공명은 샘플을 가져다 쓰는 편리함엔 철저히 고개돌린 채 모든 음향과 음악을 직접 만든 악기 소리로 채웠다. 새벽 산사에서의 신선함도 이만 못하다. 스튜디오를 방문한 날, 경근씨가 녹음에 쓰였던 악기들을 하나하나 꺼내 구경을 시켰다. 미국에서 어렵게 구했다는 워터폰(가운데 홈에 물을 넣고, 겉에 있는 쇠막대를 활로 진동시켜 소리를 얻는 악기. 흐느끼는 소리를 낸다)과 천둥소리 효과를 내는 선더 드럼, 직접 나무를 잘라 엮어 만든 짤랑이는 그 어느 악기보다 독특한 음감을 자랑했다. 영화를 보며, 비주얼에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새로운 경험을 톡톡히 하게 될 것 같다. 조성우 음악감독이 있는 M&FC에서 O.S.T 발매를 서두르고 있다. 데뷔 앨범 <통해야> 이후 2집 앨범 발표를 서두르는 가운데, 10월 혜화동 콘서트 준비 중.글 심지현·사진 이혜정 공명 | 4명 모두 1974년생·2000 유네스코 페스티벌 초청·김대중 전 대통령 노벨평화상 기념음악회 초청· 디지털 스타디움 위성방송 참여·싱가포르 아트페스티벌 초청·호주 시드니페스티벌 공연·2001 호주 페스티벌 참여·독일 피나바우쉬 페스티벌 초청 공연·2002 레이디 맥베스 음악감독 및 출연·영화 <반칙왕> <여고괴담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O.S.T·KBS 부산방송 개국 64주년 음악회·부산국제영화제·아태영화제 초청연주·중앙대 85주년 기념축제 초청 콘서트·쌈지 Rock Festival(연세대, 성균관대) 참여·2회 정기 콘서트 <통해야>(문예회관)

<바람난 가족>의 문소리, 독하게 욕망을 구(求)하다

<바람난 가족>은 배우 문소리에게 독립의 영화다. 충무로 한복판의 극장 벽면에, 지하철 대합실과 버스 옆면에, ‘덤빌 테면 덤벼봐’ 하는 표정으로 알몸에 가랑이를 쩍 벌린 채 앉아 있는 문소리를 보면서 세상은 파격적 ‘변신’을 이야기하지만, 그보다 우리는 그녀의 ‘독립’에 주목해야 한다.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박하사탕을 내밀던 들꽃 같던 순임씨. 문소리가 처음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건 아련한 첫사랑의 초상으로 출연했던 <박하사탕>을 통해서였다. 면회를 거부당하고 모랫바람 속에 긴 치마를 휘날리며 사라지던 그 뒷모습, 세상의 똥물에 손 담근 애인 앞에서 끔뻑끔뻑 눈물을 퍼올리던 그 막막한 표정, 꼼짝달싹 못하고 병실에 누워 카메라를 전하던 그 안타까운 손. 달려가지도, 터트리지도, 뻗지도 못했던 문소리의 모든 것은 <오아시스>로 이어지며 더욱 갑갑하게 안으로 파고들었다. “<오아시스>를 본 해외 관객이 <바람난 가족>의 예고편을 보고 저 장애인 배우가 그 사이 저렇게 상태가 좋아졌느냐”며 놀랐다던 말이 과장처럼 들리지 않을 만큼 <오아시스>의 문소리는 웅크린 손과 찌그러트린 얼굴 속에 고통과 욕망을 꽁꽁 가두어놓았다. 그랬던 그가 <바람난 가족>에서 나신으로 춤추고, 사랑을 유혹하며, 주먹을 휘두른다. 욕망을 소곤대고, 자위를 하고, 분노를 터트린다. 그렇게 문소리는 ‘순해도 너무 순하게 생겼다’던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 순할 수도 독할 수도 있는 유연한 표정과 움츠릴 수도 뻗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팔과 다리를 얻었다. <바람난 가족>이 세 번째 영화인 문소리 필모그래피의 2/3는 이창동 감독과 함께였다. 설경구를 이야기함에 있어 이창동 감독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문소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이창동 감독은 늘 함께 가는 수식어였다. 하여 ‘은근고민’형인 이창동 감독에게서 트레이닝된 이 신인배우에게 ‘명쾌속결’형 임상수 감독의 스타일은 처음부터 쉽게 적응할 것이 아니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처음엔 탐색기를 가졌던 것 같아요. 그러나 서서히 이 감독의 스타일을 파악하게 된 거죠.” 일단 모든 것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인 뒤에 타협점을 찾아가는 방식을 택했던 문소리의 선택은 임상수와의 불안해 보였던 동거를 결국 잘 어우러진 하모니로 마무리짓게 했다. ‘그동안 보여줬던 연기가 사실 연기였나, 동물적인 반응이었다’, ‘이창동 없이 문소리는 한낱 미숙한 신인배우일 뿐이다’라는 주위의 우려는 <바람난 가족>의 당돌하고 자신감 넘치는 연기와 함께 쑥 들어가버렸다. 문소리의 부모님은, <박하사탕> 오디션을 보고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없어도 정직하게 살아온 집안이니 이상한 신문에만 나지 말라”며 술 한잔에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바람난 가족> 때는 달랐다. 그러나 이 독한 딸은 “호적에서 파겠다”고 노발대발하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후루룩 짐을 싸, 눈물을 머금고 대문을 넘었다. 지난해 베니스영화제에서 신인여배우상을 받고 돌아온 문소리는 관객에게 “수상 사실을 잊어달라, 상은 뒤로 묻어두고 더 겸손하게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수상의 기쁨은 잊을 만하면 또 찾아왔다. 이후 각종 연기상을 받느라 바빴던 그에게 ‘겨우 2번째 영화로 받은 상들로부터 벗어나라’는 주문은 좀 무리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많이 혼란스러운 때였어요. 내가 해놓은 게 뭐가 있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상만 받나….” 공허한 명예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자고 몇번을 다짐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람난 가족>의 출연을 놓고 고민하는 나를 보면서 순간, 정신차리자, 고 생각했죠.” 그렇게 수많은 트로피들을 침대 아래로 밀어넣은 문소리는, ‘남이 하려다가 그만둔 역할’이라는 오명을 가진 호정이란 여자에게 순수하게 접근해나갔다. 그리고 한바탕의 소란이 끝난 그곳에, 베니스행 두 번째 티켓이 개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난 가족>의 촬영을 앞두고, 문소리는 서른해를 키워주신 부모님의 품을 떠나 홀로 조그만 원룸에 둥지를 틀었다. 교육학과를 졸업해서 교사가 될 줄로만 알았던 당신의 딸이 서울예대에 들어가 배우공부를 한다고 했을 때도 그저 묵묵히 지켜만 보시던 문소리의 부모님은, <박하사탕> 오디션을 보고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없어도 정직하게 살아온 집안이니 이상한 신문에만 나지 말라”며 술 한잔에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바람난 가족> 때는 달랐다. 그러나 이 독한 딸은 “호적에서 파겠다”고 노발대발하는 부모님을 뒤로 하고 후루룩 짐을 싸, 눈물을 머금고 대문을 넘었다. “아무래도 노출이 많으니까 걱정이 많이 되셨겠죠. 저 역시 다른 사람들은 아무 걱정 안 되는데, 부모님은 늘 신경쓰였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고민에 싸여 있으면 뭐해요. 이미 결정한 영화인데. 결국 계속 얼굴 보고 있으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나오게 되었죠.” 촬영장에서 혼자 살게 된 이야기를 씩씩하게 말하던 그였지만, 그의 얼굴엔 생전처음 홀로 떨어진 생활에 대한 외로움의 기운이 역력했다. 그러나 영화가 완성되고, 결과에 만족하고, 여기저기 좋은 평가와 좋은 소식들이 이어진 지금, 문소리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다. “요즘엔 부모님이 ‘소리야, 너는 어쩌면 그 세계를 몰라도 그렇게 모르냐’고 나무라신다니까요. 배우가 인기니, 관리니 이런 것에 너무 무덤덤하다고 야단치세요.” 인간에게 독립은 늘 강한 유혹이자 두려움이다. 모두들 갑갑한 과거의 공간을 떠나는 꿈을 꾸지만, 막상 허허벌판에 홀로 서면 편안했던 옛날이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모두 고개를 내젓는다. 독립은 그런 것이다. 두렵고 막막하지만 그를 통과했기에 미래가 있는 것이다. 순박한 첫사랑의 초상으로부터, 큰오빠 같던 이창동 감독으로부터, 쏟아지던 트로피로부터, 따뜻한 부모님의 품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배우 문소리. 이제 비로소 그는 주체적인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 바람난 아줌마 만세, 문소리, 독립만세!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4]

조선희, 최보은, 임상수, ’여성적 바람’의 위력을 따져묻다 투정만 하는 페미니스트? 최보은/ 문소리씨가 그런 얘길 했거든요. 찍고 보니까 이 영화는 부계 가족의 비극을 얘기하는 영화더라. 여자의 역할이 대안적으로 설정됐지만 잘 살아 있지는 않은 것 같고, 부계의 비극성은 잘 설명됐으니 그게 주인공이다. 나도 그래요. 여성들에게 억압적인 가족제도에 관한 영환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그리고 그걸 잘 알지도 못하더라. 감독이 생각하는 여성의 쿨함도 딱 그 정도더라. 그런 게 실망이라는 거고, 이른바 리버럴리스트 감독들이 꿈꿀 수 있는 한계도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임상수/ 저한테 그렇게 큰 기대를 하신지 몰랐습니다. (웃음) 저 나름대로는 노력을 했는데 안 됐으니까 앞으로 여자문제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해주세요. 최보은/ 그건 다분히 감정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이죠. 임상수/ 논리적인 반응이죠. 아까 장애인 얘기 하셨듯이, 장애인이 아닌 사람은 장애인들에 대해 잘 모르니까, 잘 아는 당사자들이 해야죠. 최보은/ 나도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감독이 아니니…. 임상수/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감독이었던 사람은 없어요. 내가 답답한 건 페미니스트들이 계속 투정만 한다는 거예요. 넌 여성을 모른다는 거죠. 그런데 내가 언제 여성을 안다고 그랬냐구요. 최보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아는 게 아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게 당연한 거잖아요. 임상수/ 그러니까 투정하지 마시고, 자기 얘길 하세요. 최보은/ 왜, 자꾸 투정이라고 말 하시나요? 임상수/ 그런 말 쓰면 안 되나요? 나는 나 나름대로 관찰하고 취재하고 연구해서 표현했는데 본인들이 모른다니까 할말이 없는 거죠. 왜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 얘기를 해서 밥 벌어먹고 있냐 그거니까…. 조선희/ 임 감독의 대응은 문제가 있다고 봐요. 댁들이 찍으쇼, 난 모르니까. 그건 다분히 감정적인 반응이죠. 또한 최보은씨가 제기하는 문제방식 역시 그렇고. 나도 작품을 써봐서 아는데 비평가들이 그러는 걸 담담하게 바라봐주면 좋은데, 자기 자식처럼 여기다보니까 맘이 아픈 거지. 임상수/ ‘투정’이라는 표현을 썼던 게 불편하셨으면 제가 사과는 드리는데, 그동안 세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느낀 건 때론 근거없는 반박을, 단순히 내가 남성이기 때문에 받는 납득할 수 없는 평가들이 있었다는 거예요. 최보은/ 그래서 제가 논리적 근거없이 이런 말을 한 건가요? 임상수/ 아닌가요? 자기의 기대에 맞지 않기 때문에 불평을 말하신 게 아닌가요? 최보은/ 문소리의 역할이 주체적이지 않다고 이야기한 게 비논리적이라고요? 임상수/ 지금 계속해서 최보은씨가 이야기하는 논조는 기대했던 것에 제 영화가 못 미친다는 식으로 얘기를 끌어가고 있잖아요. 최보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불만을 이야기하자면 아이를 집어던지는 신은 너무 느닷없지 않냐는 거예요. 성지루는 소심하고 모자란 우체부고, 자기 잘잘못도 못 가려서 변호사 찾아가서 빌고 그러다가, 갑자기 복수하는 상태가 돼 가지고 애를 던지는 거. 쇼크요법적인 게 있다고 보거든요. 그게 얘기하고자 하는 게 뭘까. 가족의 대안을 찾자는 것과 그게 무슨 관곈가. 임상수/ 영화를 50% 정도 찍었을 때 편집기사가 와서 그러더라구요. 당신 무슨 영화를 수제비 끓이듯이 이렇게 던지기만 하냐. 매끄럽게 좀 찍지. 그 말이 지금 이야기의 맥락과 닿아 있다고 봐요. 그게 제 스타일이거든요. 이야기를 수제비 던지듯 던지는 거. 살갑게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못한다는 건 감독으로서 상업성이 없는거라 문제긴 하지만,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그 극은 흘러가요. 집중력 있게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보면 흘러가는 장치들이 보인다고 생각해요. 쇼크요법이라는 지적은, 왜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들 보면 어렵사리 악당을 잡았다가도 꼭 쓸데없는 얘기를 하느라 놓쳐서 한방에 쏴죽이고 말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서라고 봐주시면 될 거 같네요. 조선희/ 성지루 캐릭터는, 알코올 중독이라 절제가 안 되고, 자기 스스로 너무 비굴했다 싶어서 반작용으로 그럴 수는 있다고 보는데, 아이를 던져서 죽이는 건 위험부담이 있는 신인 건 틀림없어요. 애들 교육에 미친 사회 임상수/ 프로듀서도 그 부분에 대해 지적했어요. 문제가 있는 신이다, 유럽이나 해외에서는 더욱 혐오스럽게 받아들일 거다. 그런데 한국사회를 보세요. 부부들이 애들 교육에 거의 미치고 있잖아요. 오로지 애를 위해 가족관계, 부부관계 다 사라지고, 자기가 물려받은 것보다 더 좋은 걸 물려주고 싶어서 그 난리를 피우는데 그렇게 난리 피워서 물려준 게 정말 좋은 것들인지를 회의하는 것이고, 또 이런 일들이 실제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이 영화에서 그 장면이 충격적으로 찍혔다고 호들갑떠는 건 좀 오버라고 보는 거죠. 최보은/ 그 신이 극중에서 유기적으로 연결이 안 되잖아. 조선희/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면 애가 죽는 게 당연한 거지. 그래야 둘 사이의 균열이 증폭되고 나중에 문소리가 다 털어버리고 애를 낳고 만세를 부르지. 임상수/ 그런 약점이 있긴 해요. 내가 얘기하기 위해서 필요했다는 장치라는. 조선희/ 아, 참 난 마지막으로 그런 게 궁금했어요. 임상수가 아주 참을 수 없는 게 무엇일까가. 그게 행태든 관습이든. 임상수/ 다 참을 수 있죠. 충무로에서 걸레질부터 시작했는데… 다 참고 살아왔어요. 조선희/ 그래도 뭔가 타격의 대상이 있지 않아요? 예전에 어디선가 강의했을 때 그런 얘기를 했었잖아요. 잘 나가는 꼰대들도 못 말리지만 잘 안 나가는 꼰대들은 더 못 말린다. 나이든 주차요원들이 다짜고짜 신경질내고, 막 반말 하고 그러는 거 예로 들면서, 그 얘기 듣고 재밌었거든. 임상수 감독 영화들을 보면 어른들이 뼈도 못 추려. <눈물>에서도 어른은 항상 험한 꼴을 당하거든. 그렇게 감독이 깨나가는 대상이 뭐냐는 거죠. 임상수/ 제가 파악하는 한국 남자들은, 일단 패배자. 일단은 2등. 그게 아시아 남자들의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인 남자 앞에서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예요. 거창하지만 근세 이후 모든 아시아 남자들이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남자의 문화는 승부의 문화고 대결의 문화지만 여자들의 문화는 그렇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거기서 여자들은 좀더 자유로울수 있는 거고 그런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 거죠. 오히려 서양 여자들이 아시아 여자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도 그런 거겠죠. 결국 문제는 열등감을 느끼고 안에 들어와서는 말도 안 되는 폭력적인 전횡을 휘두르면서 다 털어내는 아시아 남자들인 것 같아요. 그 콤플렉스가 계속 대물림되는 것이고 그러니까 탈출구가 없는 건데, 그런 탈출구의 하나가 여성적인 거라고 생각했구요. 조선희/ 음… 그 얘길 들으니 좀 설명이 되네요. 임상수가 여성적인 걸 생각한다는 게 결국은 얼터너티브한 기질인 거야.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모두가 세계화된 지평에서 사는 건 아니니까. 근데 권력지향적인 사람들은 다 2등 콤플렉스를 느낄 수밖에 없어. 그런 생각을 버리면 2등도 아니고 꼴찌도 아닐 수 있는데, 권력지향적이라 항상 2등이 될 수밖에 없는 거야. 여성적으로 탈출하자 최보은/ 사실 평소 여성문제에도 관심이 많고, 여성캐릭터에 집착하는 임상수란 젊은 감독이 ‘바람난 가족’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니까, 오히려 내가 더 기대를 했던 건지도 몰라요. 물론 그만큼 실망한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내가 이 사악한 <씨네21>의 전략에 맞추어 악역을 도맡긴 했지만, 분명 이 영화 자체의 만듦새를 가지고 뭐라고 하는 부분은 아니라는 걸 아셔야 해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있겠지만 명백하게 잘 만든 영화인 것도 사실이거든. 여자를 잘 모른다고 아예 등장시키지 못하는 감독들도 많은데 말이죠(호호, 우리 다시 안 만날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헤어질 필요가 뭐가 있겠어. 호호호). 조선희/ 아까 유골 발굴신이 튄다는 얘기도 했지만, 임 감독 연세대 사회학과 81학번이죠? 이른바 그 386세대의 강박관념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정치사회적 맥락을 도려내고는 내러티브를 만들 수 없다는. 그래서 다음에 만든다는 <그때 그사람(들)>처럼 12·6사태에 대한 영화 같은 게 오히려 자기의 본고장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거든요. 임/ 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되게 유머러스하고 괴이한 총격전인데, 재미있게 찍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최보은/ 그나저나 조선희씨. 이 영화를 보고 주변 여러 사람하고 토론을 해봤는데, 당신처럼 신나게 영화를 본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던데? 조선희/ 이상하다. 교우관계가 요즘 어떻게 되는 거야? 혹시 최보은씨 당신하고 똑같은 사람을 오십명쯤 찾았어? (웃음) 인터뷰 진행·정리 백은하 lucie@hani.co.kr, 박혜명 na_mee@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1]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1]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3]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4]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3]

조선희, 최보은, 임상수, ’여성적 바람’의 위력을 따져묻다 매맞는 데도 남성 판타지 최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불쾌했던 장면 중 하나가 호정이 맞는 신이었거든요. 아이가 죽고나서 영작이 술 마신 상태에서 구타하는데, 문소리가 그러잖아요. “자기 술 취했어, 내일 얘기해.” 보통 여자들도 맞으면 남편한테 막 뭐라고 하는데, 그렇게 쿨하게 대하는 건 남성 판타지의 대표적인 거라는 거죠. 임상수/ 그 남자는 그때 취해 있었고 여자가 판단하기엔 여기서 대들었다간 일 크게 나니까 일단 진정시켜보자는 거죠. 근데 진정하지 않으니까 같이 싸우는 거고, 그런 과정의 한 단계인 거죠. 거기서 덤볐으면 더 맞는 거니까. 최보은/ 허, 참 그건 문제적 발언이네. 그럼 임 감독은 남자가 때리면 여자가 지혜롭게 피해야 한다는 거예요? 임상수/ 뱀 같은 지혜로움은 있어야죠. 여자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봐요. 꼭 전복적으로 맞대항하는 게 정답은 아니라는 거죠. 최보은/ 그렇게 맞고 난 다음에 복수하듯이 고등학생 찾아가서 둘이 섹스하게 되는데, 문소리씨한테도 물어봤어요. 그렇게 대성통곡할 수 있을까. 난 그게 억울하고 한심한 울음이라고 봤어요. 조선희/ 그런 것도 깔려 있을 수 있지만, 어떤 해방과 오르가슴에 마침내 도달한 감격과 비애의 양가적 감정 아닐까? 난 그게 극의 클라이맥스라고 봐. 최보은/ 그래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손가락에 붕대하고, 고딩하고 섹스하면서 우는 거. 근데 그렇게 묘사되는 거 자체가 불쾌하다는 거지. 이 여자가 전혀 해방된 캐릭터가 아니라는 증거로 느껴지는 거야. 임상수/ 느끼기 나름인 거 같아요. 그 지점까지 극이 흘러오는 동안에 지금까지의 어리석음 같은 것들에 대한 회한이랄까. 조선희/ 그러니까 뭔가 마침내 터지는 듯한. 최보은/ 그러니까 문소리는 쿨한 캐릭터가 될 수 없다니까. 임상수/ 아, 누가 그렇대요? 최보은/ 감독님이 문소리한테 계속 그러셨다면서요. 넌 쿨한 여자다. 조선희/ 복합적인 거지, 뭐. 사람이 어떻게 셀로판처럼 얇게 한 가지 색깔로 정리될 수 있어? 임상수/ 보충설명을 하자면, 애가 죽고 나서 여자는 산에 가서 다 해소하고 들어왔고 봉태규를 만나러 나가기 전에 아이 방에 들어와서 램프 켜보고 할 때 이미 맞은 것조차 잊어버린 상태였어요. 물론 남편한테 맞고 나서 홧김에 고등학생과 서방질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 여자는 그냥 발정난 날이 돼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부계 가족의 비극 최보은/ 영작이 친구인 ‘마초 의사’랑 술 마시는 신은 극중 필요성이 전혀 없지 않나요? 불편하고 험한 말들만 하잖아. 임상수/ 그게 불쾌하지만 현실이잖아요. 세상 살다보면 마주치는 마초끼 다분한 기분나쁜 놈들. 이 영화는 마초적인 것과 여성적인 게 계속 부딪치는 영화예요. 최보은/ 여성적인 게 뭐예요? 수동적이고 관용적이고 평화롭고? 임상수/ 전후반까지 표현된 건 그런 거였죠. 맞습니다. 최보은/ 오프닝의 유골 발견장면이 차지하는 비중도 꽤 되는데, 임팩트 있게 그것으로 시작한 의도나 그 설정이 그렇게 길게 필요한지가 궁금했어요. 임상수/ 호정의 캐릭터가 납득할 수 있고 매력적이냐가 이 영화의 성패를 결정짓는 한 가지라면, 그 유골신이 어울릴 것이냐가 또 하나의 관건이었어요. 근데 많은 사람들이 안 어울린대요. (웃음) 그런데, 그런 아들, 손자,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로 이어지는 가족사의 이야기는 그 사회 이야기의 축소판이거든요. 종이 변이를 반복하듯 반복하면서. 그런 띄엄띄엄한 시퀀스들이 저한텐 꼭 있어야 했던 거고, 안 어울렸다고 하지만 상관없어요. 영작의 변호사 업무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캐릭터에 보탬만 돼도 좋죠. 영작이 사람들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하잖아요. 그건 일종의 정답 같은 얘기예요. 영작은 정답을 알아요. 어떻게 살아야 나와 주변과 사회가 행복한지. 또 그러고 싶은 사람이에요. 근데 잘 살아지지 않는 거죠. 이중적이라는 건, 누구한테나 있는 것이고 영작은 그 일부예요. 자기가 그렇다는 걸 자기 자신도 알구요.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1]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1]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3]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4]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2]

조선희, 최보은, 임상수, ’여성적 바람’의 위력을 따져묻다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결말이라고? 임상수/ 음… 두 가지로 대답을 할 수 있을 거 같네요. 우선 호정이가 하기 싫은 가사일에 몰두하고 애 키우고 시댁일에 열중하는 모습과 남자와의 침실에서 자위하는 모습 사이에 일관성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그건 피상적인 이데올로기로만 보는 거죠. 사실 빨래만 하는 여자도 혼자 있을 때 어떤 일을 하는지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그저 빨래만 하던 여자들이 자위를 한다는 게 그냥 이상하게 보이는 거지. 그리고 전복적이지 않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과연 우리가 얼마나 전복적으로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이렇게 하고 이런 영화 만들고 다니지만, 결국 한국의 대중한테 장사를 해야 하는 감독으로 사는 입장에서 내 삶은 전복적인가. 조선희씨가 껄렁한 <씨네21> 편집장 때려치시고 자유인이 되셨지만 그건 또 얼마나 전복적인가, 라고 묻고 싶은 거죠. 최보은/ 그렇게 따지면 상대주의에 빠져서 모든 게 허용 가능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현실에 발 디딘다는 것은 임상수/ 내 말은 일상에 근거해서 나름대로 변화를 추구했다는 거죠. <결혼…>의 연희 캐릭터 얘기는, 그 신 자체가 주는 임팩트는 저도 인정해요. 하지만 그게 얼마나 현실에 발을 디딘 전복성인가 라고 물어보면 달라지죠. 내 영화보다 못하다는 게 아니라, 난 현실에 발을 디딘 입장에서 얼마까지 전복적일 수 있는지를 그리려고 했어요. 최보은/ 그렇다면 왜 이 영화를 찍었는가가 의문이네.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현실에 발 딛고 선 사람들을 그리려면 왜 굳이 이런 이야기를 영화를 만든 거예요. 임상수/ 발을 디뎠지만 그 발을 디딘 채로 어떤 변화를 추구하는 캐릭터라는 거죠. 발만 디디고 있다는 게 아니라. 최보은/ 그건 감독의 판타지가 아닐까 싶은데, 감독한텐 은호정 같은 여자가 매력적인지 몰라도 여자들한테 매력적이지 않거든요. 임상수/ 호정이 캐릭터가 여성에 대해 임상수의 판타지다, 라는 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황정민이 현실적인 것에 비해서 문소리는 판타지고, 내가 원하고 멋있다고 생각되는 여자를 그려넣은 거죠. 그 인물에 대해 여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는 궁금했어요. 조선희/ 그게 정확한 설명인 거 같아. 호정과 영작 두 캐릭터를 보면, 영작은 자기 욕망을 따라가는 속물 변호사로, 아주 리얼해. 그런데 문소리는 최보은씨가 말한대로 감독이 만들어간 인물이란 말야. 이 영화에서 어떤 도덕적 정당성과 휴머니티의 기준, 모든 게 다 호정에게 있어. 그렇지만 그건 당연한 거야. 드라마든 소설이든 범상한 악역들은 정말 리얼하게 만들지만 작가 자신의 이데올로기나 이상이 투사된 인물은 그 틀 안에서 움직이게 되니까 부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거든.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문소리 캐릭터는 즐겁게 느껴졌어. 특히 이 영화의 마지막신은, 한국 영화사 전반으로 볼 때도 굉장히 특징적이라고 생각해. 보통 이렇게 바람난 유부녀의 행로를 다룬 멜로의 엔딩은, 70년대까지는 가정으로 회귀하는 게 당연했고 <밀애>만 봐도 여자가 사고를 당한단 말야. 작가의 도덕적인 자의식, 자기 검열이 작용을 해서, 바람을 피운 만큼 깔끔한 해피엔딩을 허용하지 않는 거야. 그게 관습이란 말야. 그런데 여기서는 그게 깨졌잖아. 바람은 났지만 비극적이지 않고, 해방감을 던져주고 끝나. 스튜디오에서 대걸레를 밀 때 문소리는 비전을 찾은 것 같은 분위기라구. 황정민도, “내가 잘할게” 이 말 세번쯤 쿨하게 하다가 문소리한테 “아웃이야”라는 말 듣고 나서는 처음엔 어깨가 축 처지는 것 같다가도 갑자기 따닥, 두발을 공중에서 탭하잖아. 너무 좋지 않았어? 성기중심주의가 싫다 최보은/ <눈물>이나 <처녀들의 저녁식사>나 <바람난 가족>이 페미니즘적 혐의를 받고는 있지만, 극중에서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았다고 보거든요. 여자들이 남자 보는 앞에서 그렇게 자위하지는 않아요. 임상수/ 그건 견해차예요. 섹스를 성기 중심으로 봤을 때는 그게 도발적이지만 비성기 중심적으로 섹스를 하는 관계에서는 남성 손으로 할 수도 있고 여자 손으로 할 수도 있죠. 최보은/ 걔넨 그런 게 아니잖아요. 영작이 그러잖아. “에, 왜 그러실까.” 혐오스런 표정으로. 임상수/ 에이, 농담조였죠. 리얼리티를 위해 그 정도 비아냥은 했지만 결국엔 쿨한 남편이라는 거죠. 조선희/ 나도 리얼하게 받아들였어. 남편은 마음이 콩밭에 가 있어서 마누라한텐 흥미가 없는데 마누라는 더 하고 싶은데 남편이 빨리 끝내는 거야. 그래서 러닝타임을 채우느라고 혼자 자위를 하는 거지. 다만 내가 의구심을 가졌던 건, 남자들이 섹스를 오랜 만에 할 땐 빨리 사정을 하지만 그렇게 자주하는 사람은 빨리 사정이 안 되거든요. 임상수/ 그건 제 실수였네요. (웃음) 조선희/ 임상수 감독의 영화들을 보고 이 사람이 페미니스트인가도 생각한 적이 있지만 지금 생각은 ‘내추럴 본 얼터너티브’라고 할까. 기질적으로 그런 게 있는 거 같아. 임상수/ 영작이 제 또래 나이고, 대학을 다니면서 페미니즘 세대를 이론적으로 접한 첫 번째 세대가 우리 또랜 거 같은데, 주변 친구들을 보면 결혼생활에 문제 많은 경우가 많거든요. 우리 윗세대는 접해본 적이 없지만, 우린 페미니즘을 이론적으론 아니까 연애할 때는 잘 써먹다가도, 결혼하고 나면 옛날 버릇이 사라지지 않는 거야. 거기서 여자들 배신감이 증폭되는 거고. 저부터도 여기서 많이 벗어나 있진 않다고 생각하죠. 저는 이즘이나 이스트에는 관심이 없어요. 조금 폼나게 얘기하자면 저는 영화감독이고, 영화 카메라는 구체적인 물질만 찍을 수 있는 거니까.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1]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1]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3]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4]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1]

조선희, 최보은, 임상수, ’여성적 바람’의 위력을 따져묻다 이것만큼은 먼저 짚고 가자. 그가 먼저 원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을 잇는,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3번째 떡영화” <바람난 가족>의 개봉을 앞둔 임상수감독은 “점잖게 앉아서, 영화 좋네, 빨아주는 시시한 대담 같은 건 하지 말죠?”라며 좀더 날선 대담자들을 갈구했다. 결국 <씨네21>은 소설가이자 전 <씨네21> 편집장이었던 조선희씨가 이 영화를 매우 좋게 보았다는 정보와 월간 <프리미어> 편집장인 최보은씨가 이 영화를 매우 불쾌하게 보았다는 정보를 취합해 이 마조히스트 기질이 다분한 감독과의 미팅을 주선했다. 둘도 없는 친구 사이지만 의견대립을 보일 때면 원수 못지않은 스파크를 내는 최보은, 조선희. 이 두명의 ‘애증의 친구들’과 다분히 위악기 있는 그러나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한 감독과의 막막한 3시간. 혹은 소독약 바를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사상자가 속출했던 피 튀기는 한 전장에 대한 보고서. 편집자 임상수/ 영화를 그렇게 재수없게 보셨다면서요? (웃음) 최보은/ 아니에요, ‘재수없다’라고 말한 적은 없는데. <프리미어> 후배들이 내 말을 정리하면서 좀 세게 쓴 거지. 조선희/ 사실, 최보은씨하고 나하고는 벌써 한바탕 했어요. 두달 전에 모니터 시사를 보고온 나한테 어땠냐고 묻기에 거품 물고, 여자와 가족을 다룬 최고의 영화다. 문소리도 최고다 그랬거든요. 그런데 정작 본인이 보고 와서는 역시 남자가 만든 영화란 생각이 들더라, 임상수가 남자라서 한계가 있더라면서 막 씹더라고. 최보은/ 나보고 그렇게 말하면 사회에 매장될 수 있다고 협박했잖아? 조선희/ 공개적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말아라 그랬지. 그러고 다니면 ‘독야청청 오불관언 막가파 페미니스트’가 되니까. 최보은/ 내 말은 진정성 같은 게 안 보인다. 너무 작위적이다. 진실로 바람이 난 가족이 아니다. 바람나지도 않았는데 바람난 척하는 거다, 이런 거지. 조선희/ 뭐가 진정성인데? 호정은 정말로 바람이 났나? 최보은/ 미래의 희망이 여기에 있고 가족제도의 현실이 이렇다, 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라면 영화를 그렇게 끌고 가면 안 된다는 거지. 이 영화에서 리얼한 캐릭터는 오로지 황정민이 연기한 영작이 하나잖아. 그런데 정작 제대로 바람이 나야 할 호정이가 바람이 안 났다는 게 문제야. 문소리의 캐릭터는 일관성도 없고 수동적이고 방어적이면서도 적극적으로 자기 쾌락을 찾아나서는 형도 아니니라는 거야. 밀려서 밀려서 대응하고 방어하다가 결국 선택한다는 게 고딩 애랑 한번 하고 임신하고, 그 애 낳겠다는 결말조차도 그래. 조선희/ 당신의 21세기적 기준으로 보면 그게 19세기로 보이겠지만 리얼리티라는 면에서 나한텐 그런 게 리얼리티야. 남자들이 그렇게 바람 피우고, 여자가 그렇게 대응하는 거. <밀애>에선 여자가 훨씬 세게 나가잖아. 남자는 회개하고 돌아오는데. 그런데 그 경우가 리얼리티가 있어 보여? 그냥 비장한 불륜이라는 느낌만 들지 않아? 임상수/ 아, 이제 저도 말 좀 할까요? 일단 <바람난 가족>이 어떤 영화일 거다, 임상수가 어떻게 만들었을 것이다, 라는 걸 전제하지 말고, 영화의 텍스트만 가지고 이야기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최보은씨의 말을 정리하자면 남자캐릭터는 현실성이 있고 이해가 가는데 여자캐릭터는 누군지 모르겠고 일관성이 없다는 거죠? 최보은/ 문소리는 남편의 바람에도 무관심, 비아냥으로 일관하는 것 같으면서 그렇다고 자기 즐거움을 찾아나서는 캐릭터도 아니잖아요. 발정났으면 그걸 밖으로 발산해야지 집에서 몸이나 비비 꼬고, 옆집 고등학생 관음의 대상이 되고, 패팅 정도의 대상으로 몸이나 내주고. 그러고나서 남편이랑 한바탕 싸우고 나더니 고등학생 몸 위에서 통곡을 하잖아. 고딩과 관계하는 걸 보면 사랑도 없고 섹슈얼리티를 추구하지도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유기하는 거 같아. 즐기지도 않으면서, 남편이 안 먹는 거 너한테 한번 줘볼게, 그런 거지 뭐. 즐거움을 얻는 표정도 없고. 그러면서 얻는 게 뭐야. 그냥 깨지기만 하잖아. 남자애 아버지한테 개망신당하고. 그게 뭐냐는 거지, 배운 여자가. 조선희/ 중산층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사회제도의 주류 이데올로기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고 호정도 그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성적으로 해방될 때는 원래 그렇게 어색하고 자신없는 상태에서 시작해. 최보은/ 내가 ‘남자영화’로 느껴진다 그랬더니, 우리 <프리미어> 남자 차장이 왜 그런 잣대로만 보느냐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내가 장애인인데, 장애인에 대한 묘사가 이상하게 나오면 신경이 안 쓰이겠냐. 그리고 그걸 얘기 안 하는 게 솔직한 거냐. 이 영화의 홍보가 어땠든 간에 영화 자체에는 도발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는 거지. 도발적인 순간이 몇 군데 있긴 있어. 문소리가 자위하는 장면이나 윤여정의 오르가슴 대사 같은. 그런데 그런 게 유기적으로 녹아들지 않고 튀어. 현실에서 보이는 권력관계가 그대로 재연돼고 있고, 캐릭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영작의 캐릭터는 이해가 가고 페이소스도 있지만 여자캐릭터가 너무 매력이 없고, 뜬금없다구. 문소리는 바람둥이도 아니고 중산층의 얌전한 여자고, 발정난 암코양이처럼 고등학생이랑 놀아보려고 그러는 여자인데, 왜 남편 옆에서 자위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영작의 애인인 연이도 즐기고 놀면서 자기 쾌락을 추구할 줄 아는 캐릭터로 묘사되는 듯하다가, 자기 몸에 기스가 났는데도 유산하고 나서도 희희낙락하잖아. 다들 가공의 인물 같고, 매력없게 다가와. 진짜 이 영화가 관객한테 뭔가 느낌과 울림을 주려고 하는 영화였다면 아무리 도발적인 캐릭터라도 매력적으로 그려졌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게 나한테 걸리는 구석이라는 거죠. 임상수/ 캐릭터가 매력적이냐 아니냐는 보는 사람이 판단해야죠. 저는 만든 사람이기 때문에 잘 모르겠구요. 그런데 보는 사람이 그랬다면 나로선 실패작인데… 혹시 관객한테 매력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최보은씨한테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거 아닌가요? 조선희/ 그러게,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라구. 내 취향엔 그런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와닿았어. 최보은씨가 말하듯 아이디얼한 타입의 영화를 바랐다기보다는, 지금 한국에서 만들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여성에 대한 시각이 균형잡혀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이 영화는 그런 면에서 지난 2, 3년 동안 나온 영화 중 최고라고 보고 싶다는 거야. 최보은/ 문소리 캐릭터가 쿨하다고 설정돼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거지. <결혼은, 미친 짓이다>처럼 희화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의 연희 캐릭터가 정말 쿨했다고 생각해. 여성의 허위의식을 뒤집었잖아. 자기 신혼 침대에 애인을 끌어들인 단 한 신만으로도 충분히 전복적이고 충격적이었다고. 그런데 <바람난 가족>이 2, 3년 사이에 나온 것 중 여성을 가장 잘 그렸다고 말하는 근거가 뭔지 모르겠어. 영화가 현실을 복사하는 건 아니잖아. 조선희/ 당신이 리얼리티를 따졌잖아. 당신 말하는 대로 내가 ‘제도권 정실 부인’으로서 느끼는 리얼리티는 그거야. (웃음)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1]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1]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3]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4]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2]

해체된 가족들, 쿨하게 살아가다 김소영/ 한국종합예술학교 영상이론과 교수 2. 여성의 성을 다시 포획하다 더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이 영화에서 역사는 좋든 싫든 남자들의 것이다. 그러면 역사의 비주체로서의 여성? 그러나 이 도식적 성 정치학은 조금 더 꼼꼼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가족과 민족의 혈연, 피로 얽힌 관계는 사실은 현재로선 가족주의와 민족주의라는 경계경보를 발생시킨다. 예컨대 이민과 이산과 혼혈이 세계화된 시대, 순수 혈연과 민족은 더이상 좋은 대상만은 아니다. 예컨대 영작과 호정이 사랑하는 아들 수인은 입양아다. 그 수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입양 사실을 놀릴 때 남들은 엄마가 배가 아파 나았지만 자신은 엄마가 마음을 앓아 태어난 아이라고 응수한다. 혈연으로부터도 벗어나 있고, 어린이며 돌연 비극적 죽음을 맞는 수인은 이 영화에서 가장 소수자이며, 문제가 많은 재현을 포함한다. 영화 초반부부터 자신의 의견을 정확한 언어로 전달하는 어린이 수인은 통상대로라면 미래를 알리는 목소리다. 그러나 그 수인이 자신을 납치한 지루- 아버지 영작에게 원한을 품은- 에게 예의 명석한 어투로 “던지지 않을 거지요?”라고 묻는 순간, 지루는 그를 밑으로 던져버린다. 떨어진 아이의 머리 주변에 고인 선명한 피는 이전 영작의 아버지가 뿜어내는 “더러운 피”와 더불어 이 텍스트가 가족 구성과 관계해 제시하는 두개의 담론- 부계적 혈연과 입양- 의 자기소멸을 암시한다. 부계적 혈연과 입양이 실패한 상태에서 영화의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전적으로 호정의 혼외임신에 달려 있다. <바람난 가족>에서 여자와 남자라는 성을 중심으로 냉전의 유물인 아버지를 축으로 한 무거운 과거와 다소의 낙관적 미래를 포함하는 현재로 나뉘는 것이다. 그러나 죄의식 없이 가볍게 아이를 임신해 다시 행복해진 호정이 물론 여성주의적 꿈을 실현시키는 것은 아니다. 세대가 다른 여자들의 성을 처벌하지 않고 다루고 있고, 그들이 어딘가로 향해 가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만, <바람난 가족>은 이상한 방식으로 이성애와 가족 혹은 유사가족의 규범을 확인하게 해주는 영화다. 즉, 여자들은 남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이를 낳거나 다른 애인을 얻거나 하는 등의 대안을 찾는다. 그래서 그 대안은 규범 속에 존재하는 잉여다. 이러한 문제는 텍스트의 플롯이 전개되는 방식과도 일치하는데 모자이크식 방사형으로 이야기를 짜나가는 영화는 성과 세대가 다른 사람들을 다층적으로 보여주면서도 사실은 결국 중심으로 환원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영작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피를 토해내는 장면을 전후해 영작은 아들 수인의 타살로 이어지는 자동차 사고를 낸다. 또 아들 수인이 죽은 뒤 호정을 구타하고 욕을 해 그녀가 집을 나가는 데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다. 그래서 텍스트의 무거운 중심은 여전히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부계의 죄의식, “더러운 피”의 문제다. 북에 남은 할머니와 여자 형제 6명은 다 죽었고, 할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살고 있고 아버지는 아내를 잃을 참이고 아들 영작 역시 아내와 아들 수빈을 잃을 것이다. 호정의 상대인 지운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읊조릴 때 관객은 문득 카라마조프의 남자들에게 어린 나쁜 운명 같은 기운을 영작네에게 느낀다. 아버지와 아들을 무의식적 중심으로 설정해 드라마를 정점으로 끌어올리며 파국을 보여주는 이 영화가 섹슈얼리티를 바라보는 방식 역시 이성애/성기 중심이다. 페니스가 아니라 클리토리스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남성 상위 체위에서 여성 상위의 그것으로 바뀐 것이다. 거기에 삽입을 통한 오르가슴이라는 클라이맥스는 과대평가된다. 15년 만에 섹스를 하고 오르가슴을 느끼는 순간 60살의 여성은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호정은 임신한다. 남자가 여자에게 오르가슴을 줄 수 있는가, 없는가와 같은 남성중심적 성 시혜주의 그리고 남성이 여성을 성 도구화하는 방식이 역으로 적용된 여성이 남성을 도구화하는 방식은 이 영화가 문제화하는 결혼과 가족으로 유지되는 이성애 제도와 또 그에 수반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해체를 어렵게 만든다. 호정과 미성년 남성과의 ‘원조 교제’는 평등한 관계라고 보기 힘들다. 즉 기혼녀가 바람난 것이 스캔들이라기보다는 그 미성년인 상대와 맺고 있는 관계 자체가 더 윤리적 문제로 보인다. 성적 도착성이 전복적이 되는 경우는 그것이 옛 섹슈얼리티 체제에 대한 통렬한 뒤집기를 감행할 때다. 그러나 바람난 가족이 섹슈얼리티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도착적, 전복적이라기보다는 정상성을 참조하는 거울 이미지와 같은 두쌍을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남자와 여자의 성 행위 중의 역할을 바꾸어놓고 거기에 약간의 사도마조히즘을 덧붙인 것이지 근본적 변태(보통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변하는 일)는 아닌 것이다. 영화의 도착성은 성행위의 재현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언어적 수행성을 통해 더 강하게 드러난다. 일종의 발화 효과행위인 셈이다. 영작이 아들 수인을 잃은 아내 호정이 옆에 있는데도 연에게 강렬한 섹스를 요구하는 (실제로는 좌절될) 언어를 구사한다든가, 호정이 지운(봉태규)에게 클리토리스를 보았느냐고 묻는 등이 그렇다. 또 위에서 잠깐 이야기한 황석영 소설 에피소드와 섹스장면의 결합은 이탈리아 감독 마르코 벨로키오식의 섹스와 레닌을 결합시키는 혹은 섹스와 정치를 결합시키는 빌헬름 라이히의 방식이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를 구타하며 쌍X욕을 퍼붓는 장면은 벨로키오도 라이히도 아닌 영락없는 <바람난 가족>에서부터 존재해온 그리고 김기덕의 영화에서 발견되는 나쁜 남자들이다. 3. 마녀 날아가다 <바람난 가족>은 한국전쟁과 분단, 역사 그리고 성을 영화의 바탕에 놓으면서 <처녀들의 저녁식사>보다 훨씬 더 두터운 정치적 무의식을 텍스트의 육체에 통합시켰지만, 여성의 성을 이성애 관계 속에서만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성 정치 측면에서는 후퇴다. 저녁식사를 나누며 작은 공동체로 함께 살면서 마스터베이션을 영화 초반부터 이야기하던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처녀들의 모습은 여기에 없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호정은 임신했으나 가벼운 몸짓으로 넓은 댄스 스튜디오를 청소하고 있다. 그런 호정에게 집으로 돌아올 것을 부탁하던 영작은 거절당하자, 마치 무용수처럼 가볍게 뛰어오르는 몸짓을 코믹하게 남긴 채 사라진다. 원했던 대답을 들었다는 듯. 그리고 마침내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양. 그뒤를 이어 호정이 마치 마녀처럼 대걸레를 들고 스튜디오를 날아다니듯 청소한다. 앞에서 지적했던 죄의식과 무거움이 날아가는 순간이다. 곧 어어부밴드의 스타일로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의 역설적인 음악이 흐를 장면이다. 또 영화에 흐르던 “더러운 피”를 마녀가 씻어내는 순간이다. 임상수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섹스 삼부작의 마지막이라고 했다. 다음 삼부작은 마녀 혹은 뱀파이어 시리즈? 나쁠 것 같지 않다.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1] ▶ <바람난 가족>이 이룬 비약과 후퇴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1]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2]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3] ▶ <바람난 가족>을 둘러싼 3각혈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