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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시간을 포착하는 두 가지 방법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스페셜 포커스 섹션에서는 왕빙의 다양한 작품들을 독특한 방식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준비되어 있다. ‘왕빙: 관찰의 예술’이라는 부제하에 진행될 이번 프로그램은 왕빙의 최근작 다큐멘터리 세편과 각각의 촬영현장에서 왕빙 자신이 찍은 40점의 사진들이 함께 상영, 전시된다. 왕빙의 사진 작품들은 이미 지난해 프랑스 파리의 퐁피두센터와 파리-베이징 갤러리(Galerie Paris-Beijing), 스페인 등지에서 몇 차례 소개된 바 있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실험영상작가 전하영이 큐레이터로 참여했다. 세편의 다큐멘터리 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작품은 <아버지와 아들>이다. 중국의 시골 마을, 어린 두 아들을 키우며 석공으로 일하는 아버지 카이의 일상을 담은 이 작품은 이제껏 왕빙이 주목해왔던 ‘관찰의 시선’을 좀더 극단까지 밀고 나간다. 카메라는 침대 한개가 겨우 들어갈 좁은 방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는 두 아이의 지루한 일상을 지켜본다.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쉴 새 없이 만지작거리거나 텔레비전에 텅 빈 시선을 던진다. 영화는 이들에게 더 다가가지도, 무언가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해가 저물어 방 안이 깜깜해져도 아이가 일어나 불을 켤 때까지 카메라는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그저 기다린다. 무엇보다 인물들의 움직임조차 거의 없는 고정 숏들을 수분간 지켜보고 있노라면 영화에서 ‘시간’이라는 문제에 대해 자연스럽게 다시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올해 로테르담국제영화제 스펙트럼 섹션에 초청된 바 있다. <흔적>은 왕빙 영화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짧은’ 상영시간(29분)을 가진 다큐멘터리로, 실험적인 성격이 좀더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다. 1957년 중국의 반우파투쟁 당시, 강제노동수용소에 교화의 명목으로 잡혀왔던 수천명이 굶어 죽는 사태가 발생한다. 이 작품은 이제는 사라진 수용소 터에서 과거의 ‘흔적’들을 찾는다. 이를 위해 왕빙은 자신이 즐겨 사용해온 고정 카메라 대신 핸드헬드 방식을 택한다.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진 황량한 벌판을 이리저리 헤매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유골들과 작은 소지품들을 화면에 담는다. 흑백으로 기록된 이 영상은 많은 부분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적이 드문 산속, 원시인처럼 동굴에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담은 <이름 없는 남자>는 2010년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몇 차례 소개된 적이 있다. 영화는 어떠한 대사나 부연설명도 없이 주인공 남자의 동선을 따라 농사를 짓고, 물을 길어 밥을 하고 동굴에서 잠을 청하는 반복적 과정에 동행한다. 동굴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촬영하다 보니 카메라는 의도치 않게 종종 대상에게 가까이 다가서 있지만, 심정적으로 동요되지 않고 적정한 수준의 대상과의 거리를 찾아내는 왕빙의 직관적인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시간을 멈추어 세운 사진보다 움직이는 이미지인 영화에 훨씬 더 많이 매혹된다는 왕빙이지만, 그가 이 세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함께 촬영한 40장의 사진은 현실을 바라보는 왕빙의 시선을 영화보다 좀더 명확히 보여준다. 인스톨 형식으로도 상영될 영화와 함께 감상한다면 영화에서 왕빙이 담고 싶어 했던 시간을 사진이 어떻게 포착해내는지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줄리언 무어] <스틸 앨리스>

“내가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 조발성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에게서 사라지고 있는 건 몸이 아닌 기억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곧 지나온 시간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를 막을 방법이 없다. 그저 자신이 쌓아온 시간이 무너져내리는 걸 허망하게 바라볼 뿐. 앨리스는 유능한 언어학자로서 누구보다 언어의 조탁에 관심을 기울여왔고, 남편과 세 아이를 둔 엄마로서도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불행은 앨리스를 비껴가지 않았고 되레 그녀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간다. 처음에는 저녁 약속을 깜빡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지 못하게 됐고, 마침내 가족과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누구인지도, 무엇을 더 잃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 앨리스는 이 말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잘 안다. 하지만 머지않아 앨리스는 자신이 이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될 것이다. 기억의 삭제, 자아의 상실이란 얼마나 비극적인가. 앨리스의 처연함은 줄리언 무어를 만나면서 그 비극성이 배가 된다. 잘 정돈돼 있어 쉽게 헝클어질 것 같지 않은 여자가 서서히 붕괴해가는 과정을 그녀만큼 잘 보여주는 배우가 또 있을까. 겉으로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중산층 가정의 안주인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비통함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되는 경우는 줄리언 무어의 연기 세계가 일궈온 핵심이다. 줄리언 무어의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렸던 토드 헤인즈의 <파 프롬 헤븐>(2002)의 케이시는 그 시작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평범한 가정에서 전업주부로 살던 케이시는 남편의 성정체성을 뒤늦게 알고 혼란에 빠진다. 그 순간, 줄리언 무어는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되돌릴 수 없는 케이시의 삶의 균열을 절묘하게 포착해냈다. <디 아워스>(2003)의 로라도 마찬가지다. 남편과 아들과 함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가정주부 로라는 문득 고요한 일상에 염증을 느끼고 집을 나선다. 안정과 불안정이라는 이분법 속에서 줄리언 무어는 늘 후자의 세계로 떠밀려 가거나 그 세계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는 쪽을 택하곤 했다. 여기에 더해 <스틸 앨리스>는 줄리언 무어가 가지고 있는 격조 있고 우아한 이미지를 역으로 이용한다. 비극과는 절대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줄리언 무어의 그 우아함이 앨리스를 만나면서 허물어져갈 때 슬픔은 더 커진다. 자신이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있다는 걸 직감하며 앨리스가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눈빛은 <스틸 앨리스>의 모든 순간을 통틀어 가장 쓸쓸하다. 이런 감정 표현은 <매그놀리아>(2000), <디 아워스>, <세비지 그레이스>(2009), <클로이>(2010) 등에서 줄리언 무어가 능숙하게 표현해낸 불안과 음울한 기운의 연장선상에 있는 동시에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애처로움이다. 앨리스의 초점을 잃은 눈빛을 볼 때면 마치 그녀 내부에 커다란 구멍이 만들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헛헛해진다. 줄리언 무어를 보고 “캐릭터가 느끼는 내적인 감정의 혼란을 마지막 순간까지 끌고 가는 능력이 탁월하다”라고 한 <가디언>의 평은, 그러므로 절대로 과장이 아니다. 올해 아카데미가 줄리언 무어에게 생의 첫 오스카를 안겨준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신기한 건, 줄리언 무어가 표현하는 그 불안과 슬픔의 정서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 안에는 놀랍게도 용기나 결기와 같은 종류의 정조가 켜켜이 쌓여 있다. <스틸 앨리스>에서도 앨리스는 마냥 좌절의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앨리스는 어떻게든 계속해서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기억하는 앨리스로 남아 있고자 한다. 알츠하이머가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도 알츠하이머 학회에 나가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 있기 위해서 애쓴다. 순간을 살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는 말로 스스로를 독려할 때가 그렇다. 슬픔과 좌절로 신음하면서도 애상에 젖어 있지만은 않는, 기어코 그 좌절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다. 비극 앞에서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앨리스의 결연함은 줄리언 무어의 연기로 비로소 완성된다.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는 앨리스가 미래의 자신에게 보내는 영상을 찍을 때도 그녀가 보여주는 침착하고 단호한 태도는 줄리언 무어의 다부진 말투와 표정 위에 자연스레 포개진다. 이처럼 줄리언 무어에게서는 도도함이나 고집스러움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자신에 대한 굳은 믿음과 강한 자존감이 엿보인다. <눈먼 자들의 도시>(2008)에서도 그녀가 맡은 의사의 아내 역은 극 안에서 유일하게 책임감을 느끼는 인물이었고, 다소 황망한 결말로 이어진 <포가튼>(2004)에서조차 외부의 침입에서 아이를 구하려는 강인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스틸 앨리스>로 마무리된 2014년은 줄리언 무어에게는 기념비적인 한해였다. 앨리스를 연기하기 전, 그녀는 이미 세편의 영화 작업으로 평단의 지지와 상업적 성공을 두루 맛보고 있었다. 시작은 <논스톱>(2014)이었다. 비록 평단의 반응은 냉랭했지만 나쁘지 않은 흥행 성적을 거뒀고 곧이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맵 투 더 스타>(2014)를 통해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맵 투 더 스타>에서 줄리언 무어가 맡은 하바나 시그랜드는 영화의 등장인물 중 가장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캐릭터였다. 한때는 잘나갔지만 지금은 캐스팅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는 여배우 하바나는 거의 신경쇠약증에 걸린 사람처럼 행동한다. 죽은 엄마의 혼령에 시달리며 지칠 대로 지쳐 흐느끼거나, 할리우드에서 ‘퇴물’ 취급당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면 줄리언 무어의 진가가 발휘된다. 거칠 것 없어 보이는 하바나의 기운을 줄리언 무어는 자신의 왜소하지만은 않은 체구와 평소보다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떡하니 받쳐낸다. 줄리언 무어 하면 곧바로 떠올려지는 초조하고 불안한 눈빛이 이번에도 빛난 것은 물론이다. 이후 그녀는 <헝거게임: 모킹제이>(2014)에 합류해 프랜차이즈영화에서도 무게감 있는 조연으로 극을 이끌었다. 데뷔 때부터 쉰살을 넘긴 지금까지 줄리언 무어는 독립영화와 블록버스터, 장르물과 정극 사이에서 경계를 두지 않고 거침없이, 또 쉼없이 연기 지평을 넓혀왔다. 이것은 또래의 여배우들, 아니 후배 여배우들까지 포함해 누구도 쉽게 이루지 못한 성취다. 그녀는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고 비전이 분명하다면 그가 누구든, 규모가 어떻든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유일한 원칙만을 고수한다. 그녀가 신인감독 시절의 토드 헤인즈와 저예산영화 <세이프>(1995)를, 할리우드에 막 발을 들인 폴 토머스 앤더슨과 <부기 나이트>(1997)를 찍으며 그들의 성공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시나리오를 보는 그녀의 탁월한 안목이 크게 작용했다. 이처럼 매 순간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길 주저하지 않는 줄리언 무어의 과감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스코틀랜드 이민자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란 유년의 경험 속에서 체득한 삶의 지혜가 큰 이유일 것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그녀는 “여러 곳을 이주하면서 알게 됐다. 내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이 변한다는 걸. 캐릭터를 이해해야 하는 배우에게는 큰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받아들인 이 배우는 지금도 자신의 변화 가능성에 제약을 두지 않는다. 올해 개봉을 기다리는 <헝거게임: 모킹제이-파트2>(2015)의 출연을 비롯해 폐암으로 죽음을 맞이한 여형사의 실화를 다룬 <프리헬드>, 에단 호크와 호흡을 맞춘 <매기스 플랜>도 이미 촬영을 끝낸 상태다. 게다가 어린이 동화책 작가로도 성공적인 활동을 보이고 있다. 주근깨투성이인 얼굴 때문에 어린 시절 놀림거리가 됐던 자신의 경험을 살려 <주근깨투성이 딸기>(Freckleface Strawberry)라는 연작 동화를, 이민자 가정에서 겪은 본인의 일화를 옮긴 <우리 엄마는 외국인>(My Mom Is a Foreigner)을 발표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텔레그래프>에 따르면 줄리언 무어는 앞으로도 다섯권의 동화책을 더 낼 예정이라고 하니 그녀의 자전 동화를 기다리는 팬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다. 믿음직한 배우이자 작가인 줄리언 무어를 올해도 계속해서 만나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충분히 기쁘고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Magic hour 여배우의 사자후 마음 수련을 하면 좀 나아질까. 풍경 소리를 들으면 좀 안정이 될까. <맵 투 더 스타>의 하바나는 지금 자기와의 싸움 중이다. 결과는? 대실패다. 하바나는 재기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평생 짐인 엄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맡고 싶었던 배역이 있었다. 하지만 마음 수련 중에 전해들은 결과는 비보뿐. 결국 그 자리는 다른 여배우의 차지가 되었다. 눈을 내리깔고, 코를 벌름거리며 숨을 고르던 하바나는 그 순간 제대로 폭발하고야 만다. 불안과 초조, 울분과 분노가 마구 뒤섞인 하바나가 된 줄리언 무어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격한 사자후를 내지른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하고 강력하게 줄리언 무어는 감정을 분출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현재를 의심해야 하고 “그 애보다 내가 더 예쁘지? 내 피부가 더 곱지?”라며 자격지심에 똘똘 뭉쳐 있는 하바나. 성형수술과 보톡스를 싫어하고 자신은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한명의 인간일 뿐이며 그래서 가장 자연스럽게 사는 걸 지향한다고 말하는 줄리언 무어. 두 인물 사이의 간극을 알고 보면 훨씬 흥미로운 장면이다. 할리우드의 어두운 그림자, 그 야릇하고 치졸한 속내를 여지없이 까발린 <맵 투 더 스타>에서 과연 줄리언 무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현지보고] 제68회 칸국제영화제 개막

금빛 칸 백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68회 칸국제영화제가 5월13일 개막했다. 메인 상영관인 팔레 드 페스티벌 지붕에 탄생 100주년을 맞은 잉그리드 버그먼 포스터를 걸어놓은 올해 영화제는 새 시대를 열었다. 질 자코브 전임 집행위원장이 은퇴하고, 피에르 레스퀴르 새 집행위원장이 합류해 티에리 프레모 예술감독과 함께 투톱 체제를 이뤘다. <카이에 뒤 시네마> 장 미셸 프로동 전 편집장은 “피에르 레스퀴르는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이었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측근이라 정치적인 수완이 좋다. 그의 프로페셔널하고 정치적인 관계가 영화제에 큰 힘을 불어넣어줄 것”이라고 힘을 실어주었다. 프랑스 시사주간지 <누벨 옵제바퇴르>는 “올해 라인업 발표 장면은 눈에 띄게 달랐다. 질 자코브가 사용했던, 소르본대학의 강의실 탁자와 비슷한 느낌을 주었던 딱딱한 가구를 치우고, 영화제 로고를 새롭게 입힌 새 책상에 앉아 경쟁부문 라인업을 발표하는 레스퀴르와 프레모는 TV 속 우스꽝스러운 인형 같았다”며 “어쨌거나 경쟁부문 19편 중 9편이 처음 선정된 감독들의 작품이다. 이것은 새로운 피를 수혈하고자 하는 쇄신과 노력을 상징한다”고 전했다. 새로운 출발을 염두에 둔 까닭일까. 올해 경쟁부문 라인업은 그 어느 때보다 고심의 흔적이 엿보이는 동시에 선정 결과를 둘러싼 말들이 많았다. 가장 눈에 띄는 건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포함한 유럽영화의 초강세와 아시아영화의 약진이다. 유럽과 영미권이 적절하게 양분해오다가 지난해부터 무게중심이 유럽쪽으로 살짝 기운 경쟁부문은 올해 그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경쟁부문 총 19편(미셸 프랑코의 <크로닉>과 귀욤 니클로스의 <더 밸리 오브 러브>가 뒤늦게 추가됐다.-편집자) 중 무려 5작품(<디판> <시장의 규칙> <마그리트 & 줄리앙> <나의 왕> 등)이 프랑스영화다. 이를 두고 프랑스 언론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누벨 옵제바퇴르>는 “프랑스 영화의 새바람이 불었다. 지속적으로 경쟁부문에 이름을 올렸던 아르노 데스플레생 대신 발레리 도난젤리와 스테판 브리제, 마이웬 르 베스코 같은 신선한 얼굴이 들어간 것도 인상적이다”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반면, 장 미셸 프로동과 <텔레라마>는 “칸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영화제가 되려면 왜 다양한 나라에서 온 훌륭한 영화들을 소개하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영화제 심사위원들과 프랑스 영화산업이 너무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영화제의 미래를 위협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티에리 프레모는 <텔레라마>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제는 절대로 작품을 국적으로 분류해서 선택하지 않는다. 물론 프랑스영화가 많긴 한데, 경쟁부문에 이탈리아영화 역시 세편이나 있다. 과거 미국영화가 5편이나 포진한 사례도 있어 큰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티에리 프레모의 말처럼 프랑스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초청받은 나라는 이탈리아다. 매년 이탈리아영화 지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도 칸은 난니 모레티의 <내 어머니>, 파올로 소렌티노의 <유스>, 마테오 가로네의 <테일 오브 테일즈> 등 세편을 선택했다. 이밖에도 2009년 <송곳니>로 주목할 만한 부문 대상을 수상한 그리스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더 랍스터>를 들고, 2011년 <오슬로, 8월31일>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노르웨이의 요아킴 트리에는 <라우더 댄 밤즈>를 가지고 다시 칸을 찾았다. 아시아 거장들도 칸을 찾았다. 지난해 칸에서 상영될 거라는 소문만 무성했다가 불발됐던 허우샤오시엔의 첫 무협영화 <섭은낭>이 드디어 정체를 드러낼 예정이다. 장편 연출은 2007년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상영됐던 전작 <빨간풍선> 이후 8년 만이며, 감독의 2005년작 <쓰리타임즈>의 두 주인공이었던 서기와 장첸이 다시 호흡을 맞췄다. 매 작품 꾸준하게 이름을 올린 중국의 지아장커와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역시 각각 <산허구런>과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공개할 예정이다. 한국영화는 <무뢰한>과 <마돈나> 두편이 주목할 만한 시선에, <차이나타운>은 비평가주간에, <오피스>가 미드나이트 스크리닝에 초청받았다. 차고 넘치는 유럽영화와 달리 영미권 영화는 단 두편이다. 토드 헤인즈가 <밀드레드 피어스> 이후 5년 만에 내놓은 신작 <캐롤>과 2003년 <엘리펀트>로 황금종려상을 거머쥔 구스 반 산트의 신작 <씨 오브 트리스>가 그것이다. 모두 미국 감독 작품인데, 고작 두편이라고 해서 칸에서 할리우드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고는 볼 수 없다. <더 랍스터>에 콜린 파렐, 레이첼 바이스, 벤 위쇼가, <라우더 댄 밤즈>에 가브리엘 번과 제시 아이젠버그가 출연한 것을 보면 할리우드가 유럽예술영화에 얼마나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영국영화는 단 한편도 없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칸 경쟁부문에 선정될 거라고 기대를 모았던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의 <선셋 송>과 벤 웨틀리 감독의 <하이-라이즈> 모두 후반작업을 끝내지 못해 불발됐다”고 아쉬워했다. 티에리 프레모 역시 “칸은 준비된 영화만 선정한다”면서 앞의 두편을 제외한 이유를 설명했다. <롤링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는 “저스틴 커젤의 <맥베스>,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랍스터>, 파올로 소렌티노의 <유스>, 토드 헤인즈의 <캐롤> 등 4편이 영국 제작사 필름9으로부터 투자받은 작품”이라며 어떻게 해서든 칸과의 연관성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이 업계에 성차별이 내재한다고 본다. 칸영화제 출품작 1800여편 중 여성감독의 작품은 오직 7%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여성적인 관점을 좀더 알아야 한다.” 지난해 심사위원장이었던 제인 캠피온의 충고를 귀담아들으려는 의도일까. 올해 각 부문에서 눈에 띄는 점은 여성감독들의 작품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에마뉘엘 베르코가 연출한 개막작 <라 테트 오트>는 1987년 이후 첫 여성감독 개막작이다. 경쟁부문에는 발레리 돈젤리, 마이웬 르 베스코 등 2명의 여성감독들이 포진해 있다. 주목할 만한 시선 개막작으로 선정된 가와세 나오미 역시 여성이다. 경쟁부문을 제외한 주요 부문 심사위원장 역시 여성들의 차지다. 주목할 만한 시선의 이자벨라 로셀리니, 황금카메라상의 사빈 아제마, 비평가 주간의 로니 엘카베츠, 퀴어 종려상의 데지레 아크하반이 그들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시상식에서 여성감독의 수상 가능성이 좀더 높아지는 건 아닌지 조심스레 점쳐볼 만하다. 올해 작품 경향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원작이 있는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다. 마테오 가로네의 <테일 오브 테일즈>는 17세기 잠 바티스타바실레의 동화모음집이 원작이며, 토드 헤인즈의 <캐롤>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프라이스 오브 솔트>를 각색했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요시다 아키미의 동명 만화를 각색했고 저스틴 커젤 감독의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정치, 사회적 소재가 많았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정치, 사회적 문제를 다룬 작품이 다소 줄었다. 5월12일 현재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스리랑카 타밀 반군 출신 경비원의 사연을 다룬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과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대인의 시체를 태우는 유대인을 그린 라즐로 네메즈의 <사울의 아들> 정도만 있다. 특히, <텔레라마>는 “벨라 타르의 조감독 출신인 라즐로 네메즈가 논쟁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영화에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는 데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있어 심사위원단 사이에서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다”고 밝혔다. 개막작 <라 테트 오트> 리뷰 <문라이즈 킹덤>(2012), <위대한 개츠비>(2013),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2014) 등 최근 칸영화제 개막작에 비하면 화려한 영화는 아니다. 화려함보다 내실과 안정을 기하려는 의도였다면 올해 칸의 선택은 현명했다. <라 테트 오트>의 주인공 말로니(로드 파라돗)는 소년 법원을 들락날락거리는 청소년이다. 6살 때 엄마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공격적인 성향을 제어하지 못하고, 사고를 치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회의 문턱은 높지만, 소년 법원 판사(카트린 드뇌브)는 말로니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고 자립할 수 있도록 그를 처벌하는 대신 기회를 준다. 엄격한 교육센터로 보내진 말로니는 그곳에서 또래 여자아이 테스와 사랑에 빠진다. <라 테트 오트>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삐뚤어진 청소년의 반항을 그렸다는 점에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연작을 떠올리게 한다. 말로니를 맡은 로드 파라돗은 히스테리컬하고, 불안한 심리를 가진 청소년을 실감나게 연기해 얄미우면서도 마음이 간다. 에마뉘엘 베르코 감독은 말로니뿐만 아니라 그를 도우려는 주변인들까지도 애정을 듬뿍 담아 묘사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말로니를 지켜보는 판사를 연기한 카트린 드뇌브는 명성에 비하면 아주 작은 역할이지만, 극의 무게중심을 잘 잡아준다. 새로운 소재는 아니지만 극에 무리 없이 감정이입할 수 있는 드라마다. 새 집행위원장 피에르 레스퀴르는 누구? 언론인이자 전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 피에르 레스퀴르는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라디오 , 에서 기자로 활동하다가 1972년 텔레비전 방송국 로 옮겨 뉴스를 진행했다. 기자로서 그가 칸과 처음 인연을 맺은 건 1977년이었다. 당시 그는 채널 에서 장 클로드 브리아리, 에디 미첵과 함께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화를 본 뒤 중요한 게스트를 초대해 얘기를 나누는 방송을 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영화를 봤다”는 게 그의 회상. 카날플뤼스 그룹 회장 시절이던 1996년쯤, 그는 질 자코브로부터 “카날플뤼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칸영화제와 비즈니스 관계를 맺었다. 당시 카날플뤼스는 칸영화제를 보도하고 있었지만 마켓에 관여하진 않았다. “그래서 질 자코브도, 나도 처음에는 겁을 냈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가 영화제의 균형을 파괴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날플뤼스와 칸의 관계는 빨리 자리를 잡았다. 카날플뤼스는 영화제 작품들을 TV에 방영하기 위해 노력했고, 영화들은 성공적으로 브라운관에 방영됐다.” 피에르 레스퀴르는 2014년 1월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최근 영화잡지 <프리미어>가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레스퀴르는 “집행위원장으로서 임무를 얘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신중했다. “집행위원장으로서 아직 영화제를 치른 경험이 없다. 그래서 할 말도 없다. 올해 영화제가 끝나야 재미있는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안다. “칸이 경제적으로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내 역할이다. 질 자코브가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젊은 시절 영화평론가였던 질 자코브와 저널리스트였던 나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여러 이야기에 관심이 많고, 누가 어떻게 만났고, 여러 재능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얘기하길 좋아한다. 문학, 음악, 연극도 좋아한다. 어쨌거나 내 이야기는 영화제가 개막하는 5월13일부터 시작한다.”

프랑스영화에 찬사를

제68회 칸국제영화제가 지난 5월24일 막을 내렸다. 이번 영화제의 가장 극적인 순간은 시상식이 열리는 폐막 당일에 마련되어 있었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디판>의 자크 오디아르가 모두를 놀라게 했고, 강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되어왔던 <캐롤>의 토드 헤인즈는 다소 만족스럽지 못한 마음으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올해 칸을 찾은 수많은 영화인들의 희비가 엇갈렸던, 그 드라마틱했던 순간을 전한다. 시상식에 대한 단상과 더불어 올해 영화제에 대한 전반적인 면모를 살펴보았고, 후반부에 상영된 한국영화 <마돈나>에 대한 현지 반응도 함께 실었다. 영화제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던 다양한 영화인들의 코멘트는 올해 영화제의 흐름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씨네21>이 직접 만난 경쟁부문 감독 네명과의 만남에도 주목해주시라. 이번 지면에서는 유럽•영미권의 거장과 중견감독들과의 인터뷰를 엄선해서 실었다. 미리 예고하자면, 올해의 칸에 대한 리포트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다음주에는 칸영화제 후반부 화제작 리뷰와 아시아 거장 3인방(허우샤오시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지아장커), 주목할 만한 신예(저스틴 커젤과 요아킴 트리에) 감독과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축제는 끝났지만, 12일 낮과 밤 동안 칸에서 목격한 영화에 대해서는 더 오랫동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오늘 저녁, 프랑스영화는 칸과 전세계에서 빛났다.” 프랑스 총리 마뉘엘 발스는 칸국제영화제 주요 부문 수상결과가 발표된 직후, 자신의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디판>의 자크 오디아르부터 여우•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마뉘엘 베르코(<나의 왕>)와 뱅상 랭동(<시장의 규칙>), 그리고 공로상을 수상한 아녜스 바르다까지, 올해의 칸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얻은 프랑스 영화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한마디였다. 다른 해였다면 마뉘엘 발스의 이 말은 자국 문화축제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는 정치인의 의례적인 수사로 들렸을 수 있다. 하지만 칸영화제 시상식이 열린 지난 5월24일만큼은 달랐다. 그 자리는 프랑스 총리의 말마따나 자국영화를 위한 축배의 자리나 다름없었다. 종려나무 무늬가 새겨진 시상식 무대에서, 프랑스 영화인들은 종종 호명되었고 자주 웃었다. 문제는 이 결과를 석연찮게 여기는 수많은 시선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두의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시상이란 없다. 하지만 보다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시상도 있다. 올해의 칸이 내린 선택은 다수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는 얼마간 실패한 것 같다. 제68회 칸영화제 시상식을 지켜본 전반적인 소감이다. “자크 오디아르, 마스터이자 완벽한 감독” 시상식 당일 전세계에서 모여든 영화제 관계자들에게 가장 놀라움을 줬던 ‘사건’은 <디판>을 들고 영화제를 찾은 프랑스 감독 자크 오디아르의 황금종려상 수상이었다. 지난 5월21일 기자시사에서 첫 공개된 이래, <디판>은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황금종려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지는 않았다. 자크 오디아르의 이 신작은 난니 모레티의 <내 어머니>나 토드 헤인즈의 <캐롤>처럼 영화제의 큰 흐름을 주도한 작품도 아니었고 라즐로 네메즈의 <사울의 아들>처럼 뜨거운 논쟁 거리를 내포하고 있지 않았으며 허우샤오시엔의 <섭은낭>처럼 미학적 성취를 거둔 작품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황금종려상 예측의 중요한 기준이 되곤 하는, 경쟁부문의 다른 영화와 차별화되는 특별한 매혹의 요소가 <디판>에는 부족했다. 외신들이 <디판>의 황금종려상 수상에 놀라움과 아쉬움을 동시에 표하는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가디언>은 “자크 오디아르는 마스터이자 완벽한 감독이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의 가장 훌륭한 영화라고는 볼 수 없다. 그 점이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전했고, <버라이어티>의 저스틴 창 평론가는 이 영화의 능숙한 장르 운용과 뛰어난 연기를 장점으로 꼽으면서도 “우리가 칸에서 목도하길 원하는 뛰어난 예술성은 부족한 작품”이라는 평을 남겼다. 프랑스 주간지 <레 인로큡티브르> 또한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이야기가 너무 설명적이고 단순한 논리를 따르고 있다”면서 <디판>이 “절반의 설득력을 지닌 영화”라는 점을 지적했다. 한편 독일일간지 <쥐트도이체차이퉁>은 “<캐롤>이 아닌 <디판>에 황금종려상을 안긴 코언 형제의 선택을 보면서 우리는 심사위원들이 같은 나라에서 온 감독들에게 상을 주는 걸 피하려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는 말로 심사위원단의 선택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올해 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은 코언 형제는 “<디판>에 황금종려상을 주겠다는 결정은 매우 빨리 내렸다”면서 “우리는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황금종려상 선정 이유에 대한 코언 형제의 이 답변은 자크 오디아르의 범작 <디판>이 왜 올해의 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한 상을 안게 되었는지에 대한 일종의 힌트가 되어준다. <디판>은 스리랑카에서 정부군에 맞서 전쟁을 치르다 프랑스로 망명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디판’이라는 이름을 지닌, 수년 전 죽은 외국인의 여권을 통해 프랑스에 왔고 안면도 없는 사람들과 ‘가짜 가족’이 되어 그곳에서의 위태로운 삶을 이어나간다. 21세기 프랑스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이민과 망명의 이슈를 조명하는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는 이 문제를 등장인물 간의 러브 스토리와 후반부에 장전된 강렬한 액션 시퀀스에 접목해 보다 보편적인 단계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영화적 선택은 올해의 칸이 가장 주목하는 테마 중 하나였던 ‘동시대 유럽 사회가 직면한 문제에 대한 영화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다. 프랑스 잡지 <슬레이트>는 “코언 형제를 앞세운 칸의 심사위원단이 프랑스 대도시 근교의 폭력을 다룬 영화(<디판>)와 끔찍한 경제 상황을 다룬 영화(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시장의 규칙>), 사회가 버린 미성년자들이 겪어야 하는 사법제도에 대한 작품(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에마뉘엘 베르코가 연출한 개막작 <라 테트 오트>)에 손을 들어주었다”면서 “우리는 <디판>이 숀 펜이 뽑은 로랑 캉테의 <클래스>, 스티븐 스필버그가 손을 들어준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 더불어 할리우드 출신 심사위원장이 세 번째로 뽑은, 프랑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작품임을 환기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황금종려상과 더불어 여우주연상의 향방 또한 논쟁의 중심에 놓였다. 올해의 여우주연상은 <캐롤>의 루니 마라와 <나의 왕>의 에마뉘엘 베르코가 공동으로 가져갔다. 2년 전 압델라티프 케시시와 더불어 황금종려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던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두 여배우, 레아 세이두와 아델 엑사르코풀로스와 달리 <캐롤>에서 레즈비언 커플을 연기해 뜨거운 찬사를 받았던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는 반쪽짜리 상을 받게 되었고 이는 그녀들을 지지한 많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올해의 여우주연상 결과는, 그야말로 케이트 블란쳇에게 대놓고 욕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에서 열연을 펼친 두 배우 중 루니 마라는 상을 받고, 케이트 블란쳇은 받지 못했다. 이건 용서를 구하지도 못할 모욕을 이 여배우에게 준 것이다. 루니 마라와 함께 에마뉘엘 베르코에게 상을 준 것은 정말 황당한 실수다. 베르코는 훌륭한 감독이지만 배우로서는 영향력이 없다. 마이웬의 <나의 왕>에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 연기하지만 매우 서툴다.”(<텔레라마>) “<캐롤>에서 두 여배우의 연기는 마치 카드 놀이를 하듯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공동 수상자가 되는 건 매우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을 거다.”(<플레이스트>) 케이트 블란쳇의 수상 불발에 대한 아쉬움은 이처럼 영미권 매체와 프랑스 매체가 한목소리로 전하고 있는 부분이며 <씨네21> 또한 그 견해에 동감한다. 올해의 심사위원단은 시상식 무대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을 영화 속 레즈비언 커플들을 갈라놓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게이 감독으로 유명한 자비에 돌란이 에마뉘엘 베르코를 밀었다는 소문이 영화제 후반부 크루아제 거리를 떠돌았다는 점이다.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시장의 규칙>의 뱅상 랭동과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사울의 아들>의 라즐로 네메즈, 감독상을 받은 <섭은낭>의 허우샤오시엔과 심사위원상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랍스터>), 각본상의 미셸 프랑코(<크로닉>)에 대해서라면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사울의 아들> 또는 <섭은낭>이 황금종려상을 받았다면, 올해의 영화제가 훨씬 흥미로운 결말을 맞이했을 거라는 지적이 많은 매체에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큰 이슈나 논쟁 없이 흘러간 이번 영화제 최대의 화젯거리가 시상식의 몇몇 이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2015년 칸에 대한 씁쓸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그리고 남은 이야기들 “<샤를리 에브도>의 비극이 올해의 칸영화제에 기나긴 그림자를 드리웠다”고 <버라이어티>의 평론가 저스틴 창은 말했다. 이슬람 테러리스트가 풍자 칼럼으로 유명한 프랑스 신문사에 총기를 난사해 12명이 숨진 이 비극적인 사건이, 칸영화제 조직위원회를 비롯한 프랑스 영화인들에게 자국의 현재- 사회적, 제도적, 윤리적인 부분에서- 에 대한 성찰의 순간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이전 리포트에서 전했던 대로 풍성한 합작영화 제작과 여성 영화인에 대한 조명, 상영부문간의 경쟁적 분위기 조성 등 수많은 이슈로 무장했던 올해의 영화제는 다소 지엽적인 끝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그것 역시 매년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는, 세계에서 가장 성대한 영화축제의 풍경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짐작을 위안 삼아 이 글을 닫으려 한다. 이어지는 다음호의 결산 기사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이의 오감을 자극하는, 올해의 칸에 당도한 매혹의 영화들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허우샤오시엔의 <섭은낭>과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광의 무덤>, 지아장커의 <산허구런> 등 영화제 후반부 상영작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마돈나> 현지 반응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신수원 감독의 신작 <마돈나>는 올해 칸영화제에 초청된 한국영화 4편 가운데 가장 늦게 공개됐다. 프랑스와 북미 매체 모두 언급한 <마돈나>의 장점과 단점은 공통적이었다. 프랑스의 <아르테TV>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는 사건, 진짜라고는 믿기 어려운 장소와 강한 인물들, 흥미진진한 줄거리, 그리고 거의 판타지나 저승에 가깝다고 봐야 할 어두운 분위기를 통해 19세기 프랑스의 광기 어린 소설의 위엄 있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고 인상적으로 보았다. 칸 공식 데일리지 <할리우드 리포터>는 “플롯을 완벽하게 컨트롤했다. 연출이 촬영과 프로덕션 디자인과 맞물려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태연자약함을 실감나게 표현했다”고 전했다. 반면, <리베라시옹>은 “영화는 타락이 보여주는 마력 속으로 들어가지만, 영화의 이미지들은 설득력이 없고, 너무 텔레비전의 이미지 같아서 마돈나나 혜림에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도록 한다”고 비판했다. <버라이어티>는 “끊임없이 고통을 쌓아가는 방식이 관객을 너무 지치게 한다”고 했으며 <할리우드 리포터>는 “캐릭터가 플롯의 척추이지만, 긴 플래시백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들었던 흥분을 점점 약화시킨다”고 언급했다.

“군인들이 게이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캐나다 출신의 드니 빌뇌브 감독의 촉수는 전세계 분쟁지역을 향해 쫑긋 세워져 있는 듯하다. 전작 <그을린 사랑>(2011)이 중동의 한 가상공간에서 벌어진 민족간의 갈등과 종교 분쟁을 정면으로 바라봤다면, 칸 경쟁부문에서 첫 공개된 신작 <시카리오>는 미국 텍사스와 멕시코의 국경지역에 현미경을 들이댄 작품이다. FBI 요원 케이트(에밀리 블런트)가 멕시코 마약조직 카르텔을 소탕하기 위해 멕시코 국경지역으로 잠입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시카리오>는 그곳에서 얼마나 많은 폭력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그곳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만이 정답인지 되묻는다. 갑자기 생긴 감독의 개인 사정 때문에 예정된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긴 뒤 우여곡절 끝에 만나 나눈 드니 빌뇌브 감독과의 대화를 전한다. -영화는 미국 텍사스와 멕시코의 국경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이 지역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척 슬프다. 사회의 여러 제도들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힘을 잃게 되고, 범죄조직이 큰 권력의 핵심이 되면서 자본주의가 인간을 지배하고, 정의가 무너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테일러 셰리던 작가와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무엇인가. =텍사스 출신이기도 한 그와 함께 멕시코 국경지역에 가서 13개월 동안 취재했다. 미국마약단속국(DEA)과 CIA 스파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작전에 투입되고 있는지를 취재한 기자들도 만났다. -남성이 주인공인 기존의 범죄영화와 달리 <시카리오>는 여성 FBI 요원 케이트가 주인공이다. 전작 <그을린 사랑>이 그랬듯이 이번에도 여성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DEA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요원을 모델로 했다. 여성으로서 끊임없이 권력과 마주해야 하며, 남성들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세상과 맞닥뜨려야 하는 것에서 강한 이미지를 느꼈다. 케이트는 기성세대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다음 세대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촬영이 매우 사실적이다. 촬영감독 로저 디킨스와 함께 세운 촬영 원칙은 무엇인가. =실제 사막이 배경이라 조명을 거칠게 표현하는 게 원칙이었다. 어두운 그림자를 활용해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다. -영화의 후반부, FBI 요원들이 멕시코 마약조직에 잠입하는 시퀀스는 비디오 콘솔 게임을 보는 느낌이었다. 관객이 게이머가 된 것처럼 느끼게 찍은 이유는 무엇인가. =군인들이 게이머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기밀 정보를 가지고 막후에서 조종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전투 신을 비디오 게임처럼 촬영한 것도 그래서다. -헬리캠과 와이드숏 같은 촬영방식을 통해 넓은 공간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사실 헬리캠 사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헬리캠을 사용한 건 고가도로 촬영 허가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텍사스와 멕시코의 경계를 한눈에 보여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헬리콥터를 띄워야 했다. 와이드숏을 사용한 이유는 간단하다. 텔레비전 화면과 다르게 보여야 하니까. -<블레이드 러너> 시퀄의 연출을 맡았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학생 시절,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배웠다. 시퀄을 연출하게 돼 아주 영광이다. 아직 자세한 얘기를 할 순 없지만 현재 나온 시나리오는 무척 좋다. -차기작은 파라마운트가 제작하는 <스토리 오브 유어 라이프>로 알려져 있다. =한 여성 언어학자(에이미 애덤스)가 외계인들을 만나 그들의 사고방식을 습득하고, 그렇게 얻은 능력을 자신의 딸을 위해 이용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제를 얘기하는 작품이다.

[김호상의 TVIEW] 집밥으로 가는 머나먼 여정

준비할 재료는 간단하다. 계란 1, 2개, 그리고 전기밥통의 묵은밥, 진간장, 식용유. 굳이 더하자면 양파 반개 정도일까.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양파를 볶고, 계란을 풀어 볶은 후 밥을 투하해 잘 버무려주면 완성이다. 잘만 보관하면 두끼도 먹을 수 있다. 일명 ‘계란밥’. 어머님은 집 떠난 아들딸을 위해 바리바리 반찬을 싸다 나르시겠지만, 결국 반복되는 일상의 무게가 우리에게 허락하는 것은 계란밥이거나 그 변종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매일 진화하는 각종 배달음식과 냉동음식의 촘촘한 사이를 뚫고 ‘집밥’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다. 최근 프랜차이즈 요식업계 최선두에 서 있는 셰프이자 기업인인 백종원이 집밥 전선에 나섰다. tvN에서 매주 화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집밥 백선생>. 예전부터 요리 프로그램 또는 식당 개조 프로그램에 간간이 모습을 보이며 존재감을 알렸던 그인데, 최근 <마이 리틀 텔레비전>을 통해 예능감까지 장착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가 네명의 제자를 거두어 진정한 집밥, 쉬운 요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주려고 나섰다. 김구라, 윤상, 손호준, 박정철. 무협지에서라면 ‘집밥 사협’이나 ‘집밥 사인’ 정도 되려나. 아직은 각각의 캐릭터가 정확하게 정립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대부분, 찌개조차 한번도 제대로 끓여본 적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계란밥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집밥 사협’의 사부가 되는 백 선생이 유행어처럼 내뱉는 말이 있다. “난 그렇게 어렵게 안 하지.” 부침가루의 성분을 묻는 김구라에게 ‘부침에 필요한 가루’라고 대답하더니, 도마에다 김치를 가지런히 써는 손호준을 보고, “그냥 김치를 그릇에 넣고, 가위로 잘라요”라고 조언한다. 툭, 툭 편하게 ‘계란밥’의 레벨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다. 자신이 요리할 때도 숙련된 손놀림을 제외하고는 그의 지론을 실천한다. 그러면서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던진다. ‘이미지를 상상하라.’ 음식을 만들 때 음식의 맛을 상상하지 말고 그 모양을 떠올려 보라는 것이다. 자신이 먹어보았던 음식들을 가만히 떠올려보고,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었는지를 상상해보면 자신만의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나 할까. 결국은 호기심이다. 그리고 그 호기심을 실천에 옮기는 방식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매일 적어도 두끼, 세끼를 먹으며 살아간다. 김치찌개도 식당마다 방식이 다르고, 계란말이도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하다. 집밥을 만들어 먹는 길은 멀고 험하다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SNS의 음식 사진과 댓글이라기보다는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점일 것 같다. 아 맛있겠다, 어떻게 만들면 될까. 이건 비단 음식에만 통용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 α 상상의 힘 십년쯤 지난 듯싶다. ‘백 선생’ 백종원씨가 이렇게까지 유명해지기 전에, 방송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상상’과 관련해 그때 그가 한 말이 아직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각국을 여행하며 요리책을 사들이는데, 그 책의 글자는 보지 않는다고 한다. 요리를 찍은 사진만을 보며, 어떤 재료가 들어갔을까, 어떻게 조리했을까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방법대로 그 사진의 요리를 만들어본다고 했다. 상상의 힘은 위대하다.

[신 전영객잔] 남는 것은 제스처뿐

나는 10여년 전 <무뢰한>의 시나리오를 읽었다. 모니터를 부탁한 오승욱 감독에게 뭔가 얘기를 해줬겠지만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살인범을 쫓는 형사 얘기에 최소한의 액션은 필요하다는 따위의 철없는 충고가 기억날 뿐이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내가 무슨 말을 했어도 다 괜한 헛소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가 쓴 시나리오 행간에서 이 영화의 무드와 제스처를 떠올리지 못했다. 핏빛 잔상을 남겼던 <킬리만자로>(2000)와는 반대 방향에서 강박적으로 적요한 분위기에 매달리는 것으로 의심했을 뿐이다. 오승욱이 오랜 기다림 끝에 스크린에 구현한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 그들을 감싼 공간의 분위기는 오승욱이 구상한 스토리가 근사한 맥거핀이었음을 알려준다. 오승욱은 형사 누아르물의 외피를 두른 이 영화에서 ‘억압의 미적 제스처’라고 할 만한 것들을 허다하게 만들어낸다. 그것들이 스토리의 인과를 빼곡 메울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이미 이 영화의 스토리가 시작되기 전에, 스토리가 끝나고도 지속적으로 이어질 제스처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혹 알맹이 없는 퇴행의 제스처라고 해도 상관없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에는 우리가 허위로라도 채워넣고 싶은 그런 가치의 알맹이가 없기 때문이다. 결핍과 억압의 담지자 김남길이 연기하는 형사 정재곤이 터덜터덜 살인현장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의 영화 도입부는, 남자의 정체를 이 영화가 묘사하는 방식의 시각적 신호이다. 좀 가냘픈 몸매에 나사가 빠진 듯 발길을 내딛는 순간, 단호해 보이는 그의 걸음걸이는 장차 보게 될 그의 삶의 행보와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직업적 삶에 이물이 나있으며 그 직업적 삶을 잘 수행해야 하는 의무와 그 직업적 삶에 따르는 윤리의 준수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에 지쳐 있다.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는 형사가 자신의 직무에 충실한 나머지 그가 검거해야 하는 범죄자들과 닮아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물이다. 완벽한 전문가주의와 그에 따르는 윤리의 마비 사이에서 그는 답을 찾지 못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일상적 삶은 당연히 행복하지 않다. 그는 아내와 이혼했으며 가끔 연락을 주고받긴 하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내가 읽었던 이 영화의 10년 전 초고 시나리오에는 정재곤과 전처와의 관계가 비교적 상세히 묘사돼 있지만 완성된 영화 버전에선 그들의 관계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형사의 직업적 일과도 마찬가지다. 아마도 최근까지 그는 꽤 훌륭한 업적을 거뒀을 테이지만 발정제로 용의자의 애인을 고문하는 것과 같은 유형의 비인간적 취조방법 끝에 남은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도입부에 정재곤을 소개했던 화면은 다소 난폭하게 한 여자의 집에 들어온 남자를 소개한다. 그는 살인범 박준길이다. 그는 정재곤이 수사하게 될 살인사건의 가해자다. 그는 자신을 마중하는 한 여자를 품고 섹스하며 그녀를 위해 살인했노라고 고백한다. 풀기 없이 지친 기색으로 살인현장을 살펴보는 형사 남자와 그 현장에서 빠져나와 맹렬하게 짐승처럼 섹스하는 살인범 남자를 교차편집하는 이 도입부의 연결고리는 여자다. 정재곤은 현장의 사체를 보며 죽은 남자의 사나운 애인이 현장 보존을 무시하고 죽은 남자 몸에 강제로 이불을 덮어줬다고 하는 순경의 말을 듣는다. 정재곤은 밖으로 나와 순경이 말한 사나운 여인을 바라본다. 그녀는 사납게도 보이지만 애인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가련한 여인이기도 하다. 정재곤이 죽은 남자의 애인과 대화하고 있을 때 살인을 저지른 박준길은 그의 애인과 섹스하고 있다. 박준길의 애인은 (전도연이 연기하는) 김혜경이다. 그녀 역시 겉으로는 사나운 여인이다. 그녀 역시 나중에 정재곤의 앞에서, 애인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가련한 여인이 될 것이다. 이 도입부는 각운을 맞춰 정재곤과 김혜경의 운명을 암시하고 있다. 이 도입부에서 보게 되는 정재곤은 순전히 외형적인 인상으로만 판단하더라도 결핍과 억압의 담지자다. 전문가로서 완전한 어른이 되고 싶었으나 그럴수록 자신 안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재곤은 퇴행적인 문제적 개인이다. 박준길은 정반대 방향에서 퇴행적인 인물인데, 그는 도박하고 섹스하고 싸움질하는 깡패이며 애인을 등쳐먹고 사는 데 거리낌이 없는 철부지다. 그는 정재곤보다 훨씬 더 어린애 같은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을 묶어주는 공통분모는 그들이 자기존엄의 표식으로 그나마 완강히 행세하려고 하는 육체적 강건함이다. 영화 초•중반, 이들이 형사와 범인으로 인적 없는 아파트 야외 주차장에서 뼈가 으스러져라 싸우는 장면은 몸은 어른이되 마음은 어린애인 이들의 짐승과 견주어도 꿀릴 것 없는 야수성을 드러낸다. 그들의 싸움은 공허하지만 동시에 치열하다. 따지고 보면 정재곤은 굳이 자고 있는 김혜경을 깨우지 않은 채 박준길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박준길을 밖으로 나가게 한 뒤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허영심이다. 그때까지 지켜본 김혜경을 염두에 둔 질투심도 있었을지 모른다. 또는 애인이 오길 기다리며 음식을 만들었다가 애인이 오지 않자 그걸 남김없이 버리는 김혜경에 대한 연민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 선배 형사가 차 안에서 잠복할 때 농담처럼 던진 과거의 에피소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재곤이 과거에 업적을 올리기 위해 여인들에게 했던 악행에 대한 죄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박준길에게 완력으로 지고 난 뒤 유유자적 사라지는 박준길을 보며 정재곤이 느꼈던 감정은 죄의식의 일시적인 해방감이다. 잠시나마 얻어터지고 난 뒤, 여인을 다치게 하지 않은 채, 그 자신만 얻어터지고 끝난 싸움의 결실로 얻는 대속의식 비슷한 것이다. 대속의식은 정재곤의 행동을 관통한다. 영화에서 그가 보이는 모든 행동의 신호들은 다 이에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무의미하고 유치하다. 사춘기 남성들이 멋있다고 여기는 공허한 제스처의 연장선상에 있을 만한 것들이다. 이 공허를 지탱하고 보완하고 조금이라도 유의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전도연이 연기하는) 김혜경의 존재감이다. 그녀는 우리가 숱한 삼류영화나 소설에서 튀어나올 법한 캐릭터의 전형이다. 한때 텐프로 룸살롱의 잘나가는 여급이었으나 이제는 퇴물 새끼마담으로 빚만 잔뜩 안고 사는 여자, 남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이미 불행해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그녀는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의 연약한 상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겉으로 보기엔 함부로 다가설 수 없을 듯한 암표범 같은 자태이다. 진실/허위 게임의 연속 중뿔나게 잘난 것 없으면서도 대속의식에 가득 차 있는, 육체적으로 강인하지만 속은 빈약한 형사 남자와 상처받기 쉬운 내면을 지녔으면서도 더이상 다치고 싶지 않아 세게 내지르는 여자와의 만남은 각자 서로 연기하는 행위들로 점철된다. 정재곤이 김혜경이 일하는 단란주점의 영업부장 이영준으로 위장해 취직한 뒤 시작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진짜가 아니라는 걸 의심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주고받는 진실/허위 게임의 연속이다. 김혜경은 정재곤의 정체를 신뢰하지 않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정재곤이 보여주는 진실한 단면의 흔적들에 혼란을 느낀다. 정재곤/이영준의 서툰 연기 덕분에 흔들리는 김혜경의 모습은 관객에게 압도감을 준다. 몸의 잔근육까지 세세하게 느껴지는 김혜경의 자태와 표정은, 영락없이 그녀를 연기하는 전도연의 존재감을 지울 수 없게 하지만, 동시에 전도연의 김혜경은 스크린에 그대로 살아 있다. 정재곤/이영준의 일관되지 않은 연기력을 관찰하듯이 보는 김혜경이 문득 “진짜 같애”라고 중얼거릴 때 정재곤의 가슴에 통증으로 꽂혔을 상대의 진심에 대한 절실함은 관객에게도 이입된다. 김혜경을 가두고 있던 캐릭터의 상투형을 전도연이 당당히 뚫고 나와 속죄의식과 연민과 사랑이 한꺼번에 합쳐지는 맹렬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정재곤이 시도했던 게임은, 그가 처음부터 예감하고 있었듯이 그 자신을 구원하는 결말로 향하지 않는다. 정재곤은 아주 먼 길을 돌아 자신이 징벌당하는 길을 택한다. 박준길이 검거되는 현장에서 굳이 나서지 않았던 정재곤은, 박준길이 칼부림하며 형사들에게 저항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지자 어쩔 수 없이 김혜경이 보는 앞에서 그를 사살한다. 취조 심문실에서 김혜경은 망연자실한 채 정재곤에게 묻는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정재곤의 거짓 연기에 속지 않은 채 그가 연기의 마디마디 보여줬던 진심을 끝까지 믿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정재곤에게 강하고 무심한 척 연기하지 않았던 자신을 책망한다. 두 사람은 연기하는 데 실패했고 동시에 파멸했다. <무뢰한>의 많은 장면들에서 극적으로 사소한 순간들은 기능적인 왜소함의 굴레를 벗어나 그것 자체로 둔중하고 외면할 수 없는 동요를 만들어낸다. 그중에서도 특히 김혜경 앞에 정재곤이 이영준으로 위장하고 처음 나타난 날 해장국집 장면이 나는 가장 좋았다. 해장국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있는 김혜경 앞에 정재곤이 나타난다. 그는 대각선 식탁에서 김혜경을 마주 보고 있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옮겨 김혜경을 등지고 앉는다. 소주를 주문한 김혜경의 요청에 주인이 응답하지 않자 정재곤은 재빠르게 냉장고에 다가가 소주 한병을 꺼내 들고 냉큼 김혜경의 식탁 맞은편에 앉는다. 이 영화에서 드물게 보는 경쾌한 무드 속에 가벼운 선의를 우겨넣은 이 장면은 불투명하지만 농도가 짙은 다른 허다한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정체를 함축한다. 서서히 다가설 수밖에 없는, 그러나 끝내 도달하는 데는 실패하는 관계의 서막으로 이 장면은 산뜻하면서도 조금 슬프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정재곤과 김혜경이 어스름한 새벽 거리를 걸으며 시시한 말들을 주고받을 때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아내는 외로움과 그에 따르는 절박함의 기세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어떤 수다한 말들보다 더 강렬하다. 이 영화 속 대화 장면들은 어느 것도 서투르지 않다. 예를 들어, 영화 중반부에 김혜경이 단란주점의 텅 빈 방에서 얼음을 안주 삼아 양주를 마시는 장면에서 정재곤이 합류하고 그들이 서로 위로할 말을 찾다가 상대의 아픔을 건드리는 말들을 주고받는 장면은 말들의 내용보다 인물들의 반응과 어두운 실내 공간의 가냘픈 빛들이 조응하며 오케스트라의 화음과 같은 시청각적 공명을 자아낸다. 영화의 긴 에필로그에서 정재곤은 기어코 김혜경을 찾아내 뒤늦게 자신의 본명을 밝힌다. 요리하는 평범한 아내로 살고 싶다고 했던 김혜경은 마약중독자를 간병하며 살고 있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박복한 운명에 따라 연기를 그만둔 채 살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그녀 앞에 정재곤이 실명을 밝히고 그가 박준길을 죽인 것은 그녀에 대한 감정과 무관하게 직업적 선택이었다고 말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영화 중반, 정재곤은 김혜경과 동침하면서 상처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상처 위에 또 상처를 입는 것이 인생이라면서 체념할 줄 알았던 김혜경과 달리 정재곤은 그의 의식 속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간직하고 살며 끝내 치명상을 입는 인물이다. 남는 것은 제스처뿐이다. 정재곤은 김혜경이 자기 배에 박아넣은 칼을 그대로 둔 채 걷는다. 피가 밴 배의 상처를 보며 정재곤은 허탈하게 웃는다. 그리고 ‘무뢰한’ 제목 타이틀이 뜬다. 이것 역시 글 서두에 언급한 억압의 미적 제스처로 손색이 없었다. 오승욱은 ‘영화감독’이다. 자명한 이 명제를 증명하는 감독들은 많지 않다. 그가 앞으로 더 자주 영화를 만들기를 바랄 뿐이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테마파크의 절기

<밤을 걷는 뱀파이어 소녀>는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흑백 그래픽 노블 같다. 소녀(실라 밴드)는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살며 너무 많은 것을 본 뱀파이어다. 차도르를 두른 소녀는 이란 어디쯤인지 미국의 이란계 이민공동체인지 모호한 ‘악의 도시’에서 무감동한 사냥을 이어간다. 검은 차도르는 소녀의 생을 휘감은 작은 적막처럼 보인다. 소녀는 사냥할 때 상대와 비슷한 속도와 자세로 다가간다. 이때 차도르는 그림자놀이의 ‘코스튬’으로 변한다. 스케이트보드를 탄 소녀가 밤거리를 미끄러지면 바람을 품은 차도르는 돌연 슈퍼히어로의 날개가 된다. 사물은 주어진 용도를 배반할 때 송곳니 같은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굴레가 무기로 변하는 경우야 말할 나위도 없다. 06/20 스티븐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 개봉을 둘러싼 시끌벅적함을 지금도 기억한다. “공룡이 살아 움직여!”라는 탄성이 우선 전 지구적으로 울려 퍼졌고, 곧이어 사운드가 이미지 못지않은 스릴의 원천임을 입증하는 영화로 꼽혀 5.1채널 홈시어터 장만을 부채질했다. H자동차의 150만대 수출 수익과 등치로 인용되며 문화를 이윤으로 환원하는 비창조적 ‘창조경제론’의 논거로 변질돼 두고두고 우리를 괴롭힌 사태는 그다음이다. 개중 예나 지금이나 귀담아듣는 사람이 제일 적은 평단의 반응도 생각난다. “놀랍다. 게임의 규칙을 바꿀 영화다. 그러나 스필버그의 고전 <죠스>에 비하면 특수효과에 크게 기댄 이벤트다”라는 의견이 꽤 많았다. 시리즈 네 번째 영화인 <쥬라기 월드>를 보고 나오는 길에 1993년 당시 평에서 <죠스>를 <쥬라기 공원>으로, <쥬라기 공원>을 <쥬라기 월드>로 바꿔 넣어도 곧장 통하겠다 싶었다. <쥬라기 월드>는 제공하겠다고 공약한 오락을 안전히 배달하는 무난한 여름영화다. 그러나 스릴의 내역은 <쥬라기 공원>, 심지어 스필버그의 2편 <쥬라기 공원2: 잃어버린 세계>와도 좀 다르다. 티렉스의 지프차 습격, 랩터의 주방 침입 시퀀스가 보여주듯 몬스터로서 공룡의 소름끼치는 특성은 강력한 발톱과 하악골이 아니라 어느 육식동물과도 닮지 않은 특유의 움직임이며 이 영화의 아드레날린 펌프는 공룡에게 쫓기는 장면의 횟수나 폭력의 세기보다 숏으로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솜씨에 있다. 스릴만이 아니다. 스필버그는 감정을 능란하게 다루고 어린 배우를 연출하는 데에 탁월하다. 공포, 유머, 경이를 한 장면 안에서 서걱거리지 않게 굴리는 기교는, 대중영화감독으로서 스필버그가 보유한 유용한 도구다. 구사일생으로 티렉스의 공격에서 살아난 <쥬라기 공원>의 어린 남매는 나무 위에서 불안한 하룻밤을 보내는 와중에도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브라키오사우루스들의 노래에 매료된다. 영화 도입부에서 쥬라기 공원에 처음 입성한 세 과학자(샘 닐, 로라 던, 제프 골드블럼)도 마찬가지다. 신의 영역에 개입해 생명을 지어낸 인간의 월권 행위에 죄책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어린애처럼 무책임한 흥분도 미처 감추지 못한다. 말하자면 스필버그는 공룡이라는 아틀란티스 같은 생물을 향한 우리의 불가해한 매혹을 블록버스터로 만들었고 <쥬라기 월드>의 제작진은 <쥬라기 공원>이라는 블록버스터를 향한 매혹을 블록버스터로 만들었다. 06/21 가끔 생각한다. 인간이 경험으로부터 도통 배우지 못하는 까닭은 혹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의 스토리를 이어가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만한 인명피해를 냈으면 열두번 폐쇄되고도 남을 텐데 <쥬라기 월드>의 공룡 공원은 성업 중이다. 게다가 전작의 사파리로부터 한 단계 나아간 명실상부 놀이동산이다. 리조트와 식당, 기념품 가게는 기본이고 여느 동물원처럼 어린이들이 어린 동물과 스킨십을 갖도록 꾸며진 놀이터(patting zoo)도 있다. VIP 패스 소지자는 줄을 건너뛸 수 있고 검표 직원은 단순반복 업무에 지루해 죽으려 한다. 그러니까 “공룡은 코끼리만큼 심상해졌다”는 명제가 <쥬라기 월드>의 제법 흥미로운 핵심 설정이다. 공원 운영자들은 투자 유치를 위해 더 무섭고 치아 개수가 많은 신종 공룡을 창조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여차하면 태극 배색의 눈을 가진 펩시사우루스, 삼선 무늬 아디다노돈 같은 브랜드 공룡도 ‘주문생산’될 기세다. 극중에서 군인 빅(빈센트 도노프리오)의 대사가 섬뜩했다. 공룡을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할 궁리를 하는 그는 복종하지 않는 개체는 제거하면 된다고 말한다. 원래 멸종됐던 종을 부활시켰으니 당연히 인간에게 생사여탈권이 있다는 논리다. 반려동물을 유기하거나 입양한 유기동물을 다시 버리는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일까? 영화를 보다 멈칫했다. 06/22 <쥬라기 월드>의 난센스들을 적어보기로 한다. 결코 영화가 미워서가 아니라, 여름 시즌 영화가 주는 재미를 다변화해 보려는 나름의 심심파적이다. 하나. 공룡 테마파크의 소유주 사이먼(이르판 칸)은 매니저 클레어(브라이스 댈러스 하워드)에게 운영 현황을 묻고 그녀가 각종 수치를 보고하자 그런 것 말고 방문객과 공룡들은 행복하냐고 질문한다. 클레어가 머뭇거리자, 공룡의 표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고 현자의 말투로 깨우쳐준다. 기업 오너나 자본가에게 약간의 문화적 ‘허영’이 있는 편이 전혀 없는 경우보다 결과적으로 훨씬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욱했다. 어쩌라고! 사장도 경영 매니저를 고용할 때 공룡 눈동자를 들여다볼 ‘애니멀 위스퍼러’를 구하진 않았을 것 아닌가. 적자 나면 추궁 안 할 요량도 아니면서 실무자를 슬쩍 냉혈한 취급하고 반대급부로 본인의 철학과 감수성을 과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장님의 응석이다. 게다가 이 사장님은 나중에 사고가 터지자 얄짤없이 소리친다. “그 공룡 한 마리에 2600만달러라고!” 다음은 공룡을 최종병기로 쓰겠다는 악역 빅과 관련된 실소다. 우선 오늘날 군이 공룡보다 훈련하기 쉬운 맹수들을 전쟁에 동원하지 않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더욱 이상한 대목은 주인공 오웬(크리스 프랫)이 랩터 우리에 떨어진 동료를 구해내는 광경을 보고, 빅이 공룡의 파병 가능성을 확신하는 장면이다. 해당 장면에서 오웬은 겨우 목숨만 건졌는데 어딜 봐서 랩터들에게 충성스런 병사의 자질이 보인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한편 빅의 부하들은 비상사태가 닥치자 대뜸 쥬라기 월드 통제센터에 들이닥쳐 전문가들을 몰아내고 콘솔을 접수한다. 그렇게 아무나 해도 괜찮은 업무였단 말인가. 셋.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엔지니어링해 탄생한 인도미누스 렉스를 추격한 랩터들이 “오, 우리 같은 DNA를 공유했군. 한편이 돼야겠다”라고 ‘대화’하는 장면이다. 볼 때는 그런가보다 넘어가놓고는, 집에 돌아와서야 수긍한 자신이 어이없어 이불을 찼다(영화의 설명에 따르면 오징어, 개구리의 유전자도 인도미누스 렉스에 들어 있다고 하니 테마파크에 대왕오징어나 황소개구리 떼가 없었던 것이 다행이다). 물론 영화의 영향으로 사자와 아나콘다를 동시에 마주쳤을 때 같은 포유류라고 사자한테 텔레파시를 쏘는 관객은 없겠지만 역시나, 웃음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06/26 옛날 옛적 장 보드리야르는 “디즈니랜드는, 나머지 세계(미국) 역시 디즈니랜드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존재한다”라고 썼다. 그가 살아 있다면 최근 영화에 줄줄이 등장하는 디즈니랜드 모방 공간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하다. <투모로우랜드> 속 유토피아는 제목 그대로 놀이동산 조감도처럼 디자인됐다. <쥬라기 월드>는 현재 흔히 보는 테마파크에 동물원을 결합했다. 그리고 <인사이드 아웃>은 인간의 마음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중앙 관제소와 서로 연결된 여러 개의 테마파크, 그리고 기억 물류 창고로 시각화했다. <인사이드 아웃>에 등장하는 머릿속 테마파크 지도는 한때 유행했던 ‘뇌 구조도’와 비슷하다. 장난, 가족, 정직성, 특기, 우정 등 주인공 라일리(케이틀린 디아스)의 열한살 인생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영역이 각각 놀이동산 섬(island)의 형태로 표현된다. 섬과 섬은 놀이동산으로 치면 모노레일에 해당되는 ‘꼬리를 문 생각 열차’(Train of Thought)로 연결된다. <몬스터 주식회사>의 알록달록한 비명 공장을 설계했던 피트 닥터 감독은- 픽사 프로덕션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하나의 세계를 통째로 디자인하는 데에 유능할 뿐만 아니라 집착한다. 피트 닥터는 픽사 스튜디오 중견 가운데 눈물샘 자극의 최고수이기도 하다. 그가 스토리를 맡았던 <토이 스토리> 시리즈(특히 3편)와 연출작 <업>의 페이소스까지 가미되면 <인사이드 아웃>의 레시피가 완성된다. 침체된 픽사를 부흥시키기에 가장 믿음직한 심폐소생술이다. 그리고 진부한 말이지만 <인사이드 아웃>의 특출함과 한계도 공히 여기서 나온다. (다음에 계속) 좋아요 추상화(抽象化)? 추상화(抽象畵)! <인사이드 아웃>에서 라일리의 정신을 시각화한 공간 중 흥미로운 장소는 ‘추상적 사고의 방’(Abstract Thought)이다. 여기 입장한 캐릭터들은 기하학적 형태로 해체됐다가 납작한 2차원으로 눌리고 이윽고 완벽한 추상이 된다. 피카소, 브라크, 칸딘스키의 스타일이 인용된다. 디즈니의 불운한 수작 <쿠스코? 쿠스코!>가 도전했던 장식적 카툰 스타일의 재시도이기도 하다. 의미도 적절하다. 문 앞의 ‘출입금지’ 경고가 암시하듯, 추상적 사고는 풍부한 현존을 일부 유실할 위험을 수반한다. 동시에 이 방은 극중 정신의 통제본부로 복귀할 지름길이기도 하다. 일단 개념을 수립해야 논증을 통해 결론에 이를 수 있으니 지름길 맞다.

[trans × cross] 이런 인생도 하나 있어야 재밌잖나

배우 겸 방송인 홍석천은 요즘 24시간이 모자란다. JTBC <마녀사냥>, MBC <나 혼자 산다> 출연에 이어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는 요리하랴,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는 인테리어와 패션에 대해 조언하랴, 이태원에서는 외식업 운영까지 하랴, 정신이 없다. 얼마 전까지 TV드라마 <복면검사>(2015)에서 형사로 등장했고 틈틈이 영화의 카메오로도 얼굴을 내비쳤다. 올해 첫회를 맞은 서울국제음식영화제의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했다. 요즘 가장 ‘핫’하다는 분야마다 홍석천의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최근 미국에서 동성결혼이 합법화되며 한국 최초의 커밍아웃 연예인인 홍석천을 새로이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워진 홍석천, 그를 만났다. -매회 게스트가 원하는 요리를 만들고 승패를 가리는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스타 셰프들을 제치고 가장 많은 승수를 챙겼다. 비결이 뭔가. =셰프들은 본인의 자존심을 세울 만한 요리를 내놓는다. 반면 나는 상당히 대중적인 요리를 한다. 되게 셰프들은 맛이 은근히 배어나도록 하는데 나는 은근히라는 게 없다. 자극적이고, 공격적인 맛으로 승부를 본다. 배우도 자기만의 확실한 분위기나 캐릭터가 있으면 무너지지 않고 계속 가잖나. 요리도 마찬가지다. -게스트가 먹고 싶어 하는 요리를 녹화 당일 전달받고 정말 딱 15분 안에 완성하는 건가. =1초라도 넘기면 다들 난리다. (웃음) 나도 한번은 조기를 미처 다 굽지 못한 적이 있다. 처음 사용해보는 오븐이라 예열을 어떻게 할지 감을 못 잡아 그만…. MC와 게스트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머릿속으로 어떤 재료로 어떻게 요리할지 그림을 그린다. 게스트의 냉장고에 들어 있는 식재료라는 게 크게 다른 게 없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연어, 새우라는 기본 베이스를 두고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응용한다. 희귀한 재료가 있으니 꼭 써 달라는 정도의 요청은 미리 받기도 한다. -요즘 부쩍 방송 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 같다. <마녀사냥> 출연이 그 시작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2013년 1월9일 방영한 <라디오스타>가 큰 계기가 됐다. 굉장히 오랜만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었다. 더이상 나는 잃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편하게 했다. 그때 (윤)종신 형이 “그 녹화가 너무 재밌어서 잘하면 2회분으로 나가겠더라. 너 올해 잘될 것 같다”고 했다. 정말 반응이 좋았고 그다음부터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마녀사냥> <나 혼자 산다>에 줄줄이 출연했다. 그러면서 자연히 웃기는 홍석천과 생활인 홍석천이 동시에 TV에 보여졌다. 특히 <마녀사냥>은 아예 나더러 ‘놀아라’ 하고 놀이터를 준 셈이다. 이런 방송의 변화가 내게는 새로웠고 나를 흥분시킬 만했다. -<마녀사냥>을 통해 ‘톱 게이’라는 별칭이 생겼다. 성정체성을 희화화해 웃음의 소재로 삼은 면도 있지만, 방송에서 성소수자의 지분을 갖게 된 면도 있다. =종합편성채널이긴 하지만 대중을 상대로 하는 방송에서 ‘게이’라는 말을 그렇게 편하게 불러준 적은 없었다. 내게는 굉장히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그전까지는 ‘게이’라고 하면 꼭 ‘새끼’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성소수자를 비하하거나 터부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제는 거리에서도 사람들이 날 보면 “톱 게이”라고 부른다. 굉장히 즐거운 경험이고 잊지 못할 별칭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그 말이 붙었다면 굉장히 질투났을 거다. (웃음) -그동안 방송에서 성소수자로서 다른 성소수자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해왔다. 그때마다 “소명”, “책임감”이라는 말을 꺼냈다.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상담을 많이 해왔다. 누군가는 그런다. ‘왜 잠도 못 자가면서까지 그렇게 하느냐’고.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친구들이 누구를 붙잡고 말하겠나. 구체적인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다. 힘들고 괴롭고 죽고 싶고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을 때 내가 그들의 창이 돼주고 싶다. 잘난 것도 없는 내가 뭐라고 그 친구들을 외면하나. 물론 그만큼 내 것을 많이 내려놔야 한다. 또 주변 사람, 애인한테도 서운한 짓을 많이 해야 하고. 그래도 계속 한다. -과거에 비해 자신을 좀더 친숙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 것 같은가. =요즘 모두가 힘들잖나. 그 와중에 시청자들이 내가 차근차근 일궈둔 것들이 하나씩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는 걸 지켜보면서 궁금해하는 것 같다. ‘홍석천은 세상 사람들한테 거의 밟혀 죽을 뻔한 사람인데 어떻게 그걸 이겨냈지?’ 한편으로는 그런 나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나를 질투하는 묘한 감정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게 아닐까. 10년 넘게 버티며 쌓은 내 노하우로, 여러 제약으로 미처 보여주지 못했던 내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주게 됐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 보니 누구 눈치 볼 것도 없더라. 그저 내 행동과 말에 책임만 지면 된다. -최근 성소수자 운동이 주목받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뿐 아니라 요리하는 싱글 남성들에 대한 방송가의 관심이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트렌드에 잘 묻어가고 있다. 지난해는 (신)동엽의 19금 섹드립에도 얹혀갔다. 동시에 동성애 인권 문제에도 계속 관심을 갖고 있다. 문어발처럼 여기저기 걸치고 있지만 나름 잘 통제해오고 있다. 이런 인생도 하나 있어야 재밌잖나. 나는 1등 하는 것에는 관심 없다. 3등이 딱 좋다. 여러 군데에서 3등을 하다보면 한 군데에서만 1등 하는 사람보다 더 나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한번 일을 벌이면 오랫동안 한다. -그러고 보니 1995년 KBS 대학개그제로 데뷔한 이후 계속 활동 중이고 2002년에 시작한 외식 사업도 10년을 넘겼다. =부모님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다. ‘사람이 무슨 일을 했다고 말하려면 10년은 해봐야 한다, 그전에 뭔가를 했다고 말하는 건 네 욕심이고 사기일 수 있다.’ 19살에 서울 와서 연기자가 되고 싶어 10년 동안 별의별 걸 다 했다. 내 나이 서른이던 2000년, 커밍아웃을 했고. 그 후 10년간은 ‘내 정체성은 이렇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를 설명하며 살았다. 그렇게 하다보니 2010년쯤부터 방송이 좀 편해졌다. 외식업도 마찬가지다. 2002년 시작해 13년째다. 처음 개업할 때는 모든 게 힘들었는데 그걸 10년 넘게 하니 이제는 그림이 그려진다. 지난했지만 오다보니 길이 좀 보인다. 예전부터 프랜차이즈를 해보자는 제안은 많았지만 매번 거절했다. 10년은 채워야 뭘 해도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사업 수완도 생겼다. 하반기에 스시와 타이 요리로 프랜차이즈를 낼 계획이다.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분들이 5천만원에서 1억원 사이의 작은 규모로 창업할 수 있도록 하고 싶다. 그러면서 나도 이태원을 좀 떠나보려고 한다. -‘홍석천 하면 이태원’이 떠오를 정도로, 이태원에서만 9곳의 식당을 운영 중이다. 그곳을 떠나겠다고 말하는 데는 사업 확장의 의미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내 마음속 제2의 고향이 이태원인 데는 변함이 없다. 다만 이태원을 향한 나의 맹목적인 사랑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 이태원에 대기업이 치고 들어오면서 건물주들이 임대료를 턱없이 올리고 있다. 자영업자들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내가 처음 이태원에 자리 잡을 때는 ‘이태원을 홍콩의 란콰이펑이나 미국의 소호처럼 만들 거야’라는 사명감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내가 마치 이태원의 임대료를 올리는 데 일조한 사람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어 배신감을 느낀다. 새로운 연애 상대를 찾고 싶다. 이런 마음을 먹었다는 것 자체가 내겐 굉장한 변화다. -올 상반기에 <오늘의 연애>(2015), <연애의 맛>(2015)에 우정 출연했고 드라마 <복면검사>로도 연기 활동을 펼쳤다.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면서도 연기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연기는 계속 하고 싶다. 드라마가 들어오면 하던 예능 프로도 많이 줄일 만큼 집중한다. 하반기에도 드라마를 한편 더 할 것 같고 나중에 공연도 해보고 싶고. 헤어스타일이 역할에 제한을 준다고? 사극이 있잖나. 가발을 쓸 수 있으니까 굳이 기르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래서 지금 사극을 노린다. (웃음) 노래가 당신을 위로하리라 “석천아~ 질겨~.” <냉장고를 부탁해> 35회에 출연한 이문세의 이 한마디에 모두가 쓰러졌다. 그동안 출연한 게스트 중 가장 강렬하고 솔직한 맛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이문세는 “어떻게든 끝까지 맛을 내려 도전하는” 홍석천을 이날의 승자로 꼽았다. 그때 눈시울이 붉어진 홍석천. “성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 숨고 싶고, 죽고 싶었던 내 10대, 20대 내내 이문세 선배님의 라디오 <별이 빛나는 밤에>와 선배님의 노래를 들으며 위로받았다. 선배님은 언제나 내 우상이다. 그분이 건강히 우리 곁에 계시고 내 요리를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험난했던 옛 생각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지금에 홍석천은 또 한번 울고, 또다시 웃는다.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말만 쓰면 아프다

골프의 ‘골’자도 잘 모르지만 곧잘 골프 프로를 보곤 한다. 골프 전문 채널이 여럿이니 작정하고 텔레비전을 켜면 재방송이든 생방송이든 하루 종일 골프 치는 남과 여를 골라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 내가 클래식 음악 듣듯 골프 경기를 보게 된 건 필드 위에서 펼쳐지는 놀라운 적막, 그 ‘침묵’이란 먹먹함을 눈으로 확인하게 된 후부터다. 공이 홀 안으로 완벽하게 빨려들기까지 요구되는 고도의 집중력이 어떤 힘인지 한 선수가 품어내 보이는 어떤 자세로부터 확실히 알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학적 화두로 자주 쓰이는 테마이니 그 침묵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많이 쏟아져왔다. 그러나 막 짜낸 젖소의 젖처럼 그 침묵이 바로 구현되는, 그 침묵의 생짜를 경험하기란 쉽지 않은 터. 골프를 대표로 예를 들긴 했지만 인간들의 스포츠야말로 그 침묵의 다양한 민낯을 엿보게 해주는, 무수히 많은 그 침묵들의 바로미터가 아닐는지. 다이빙보드 위에 한 선수가 몹시도 신중히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물속으로 뛰어드는 동작의 기술과 미를 겨루는 다이빙 경기에서 보다 아름답게 입수하기 위해서는 더한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테니스 코트에서 팽팽히 맞선 두 선수 가운데 한 선수가 라켓을 힘껏 휘둘러 서브를 넣고 있다. 상대로부터 넘어오는 공을 보다 강하게 되받아치기 위해 한 선수에게는 더한 침묵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격이나 양궁처럼 분명한 표적을 목적으로 하는 스포츠의 경우 침묵이 전부라서 덤덤하기도 하거니와 동시에 승부차기 시 골키퍼와 마주선 스트라이커의 침묵에는 안쓰러움을 느끼게도 된다. 페터 한트케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에 암묵적으로 깔려 있을 침묵의 전제는 그러다 어느 날 저마다 제 안에 잘 싸매둔 슬픔의 감정까지 죄다 꺼내 풀게 만든다. 울게 만든다. 산다는 일이 그렇지, 어차피 죽어가는 일이지. 이 빤한 사실을 제대로 맞닥뜨리면 사는 데 여러모로 불편하다는 걸 너나 할 것 없이 아주 잘 아는 까닭에 오늘도 우리는 그 침묵의 순간을 견디지 못한 채 말에게 애걸복걸이다. 통화만 간단히 그렇게 시작했던 전화기를 ‘가짜 팔’이 아닌 ‘진짜 팔’처럼 제 귀에 매단 것도 우리다. 들리지는 않으나 보여지는 말로 말의 알을 무수히 낳고 있는 말의 산란 장소 SNS를 만든 것 또한 우리다. 어젯밤에 열 시간 넘게 잤는데도 잔 것 같지가 않아요. 후배가 벌게진 눈으로 내게 답답함을 호소했을 때 나는 더 뻘게진 눈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있지, 잠의 그 침묵을 영영 잃어버린 것 같아. 나는 잠도 밤도 다 까먹었어. 수면제가 떨어져 병원에 전화를 하니 일주일 전부터 예약 스케줄이 꽉 차 있다고 했다. 간호사는 내주부터 시작되는 병원 여름휴가 전에 약을 처방받으려는 환자들이 몰린 탓이라 했다. 몸은 안 쓰고 말만 쓰니 이렇게들 아픈 걸까. 침묵이고 나발이고 나는 일단 텔레비전부터 꺼야 살겠다.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