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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듀나의 영화비평] 괴물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

우리가 1세기 넘게 서부극에서 보아왔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존재했다고 해도 아주 잠시만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가 이런 장르를 통해 접했던 전설적인 인물들, 그러니까 와이어트 어프, 애니 오클리, 버펄로 빌, 빌리 더 키드와 같은 인물들 역시 서부극 팬들의 상상 속에 거주하는 캐릭터들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서부극의 원형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어디를 목적지로 삼아야 하는가?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려는 시도는 허망하다. 그 순간부터 장르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 존 포드의 영화들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안전하겠지만 심지어 그의 영화도 시대에 따라 다르다. 수정주의 서부극, 스파게티 웨스턴 그리고 그 밖의 온갖 변종들은 오래전에 장르가 먹어버렸다. <백 투 더 퓨처3>의 마티 맥플라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갈 때 그가 모델로 삼았던 것이 존 웨인이 아니라 클린트 이스트우드였다는 것을 잊지 말자. 어차피 다 거짓말인데 더 오래된 거짓말이라고 나을 게 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점은 존재한다. 역사와 경험과 전통이 어우러져 완벽하게 진짜 같은 가짜 역사. 이런 장르화된 허구 역사의 세계가 서부극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중세 기사 이야기가 그렇고 무협지의 세계가 그렇다. 은근슬쩍 제2차 세계대전도 여기에 편입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들 세계는 그 자신만의 자연스러움을 갖고 있다. 존 포드의 전성기 서부극이나 김용의 무협지가 갖고 있는 언어와 행동의 자연스러움을 떠올려보라. 그들의 세계는 실제 역사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자기만의 깊이와 무게를 갖고 있는 평행우주이다. 이런 종류의 장르물을 만들려면 당연히 실제 역사뿐만 아니라 그 평행우주의 역사에도 익숙해야 한다. 장르 독자들이나 관객이 국외자의 장르 참여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작가는 후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같은 세계 <협녀, 칼의 기억>(2014)은 두 종류의 평행우주를 하나로 합치려 한다. 하나는 한국 사극이고 다른 하나는 무협이다. 그러니까 영화가 그리려 하는 세계는 무협세계의 생물학과 물리학이 작동하는 고려 배경의 한국 사극 우주이다. 여기서 내가 늘 재미있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한국 사극 우주가 고증을 떠나(그러니까 사극 캐릭터에게 굳이 감자를 먹이려는 집요한 집착 같은 것을 말한다) 이상하게 불완전한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과거의 세계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어로 쓰여진 시대물의 전통이 70, 80년을 넘어 가는데도 사극 캐릭터의 행동과 언어에서는 자연스러운 수렴점을 찾기 힘들다. 이들의 행동은 전통에서 일탈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의 부재 속에서 부유하는 것이다. 이건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자칭 전통사극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쓰는 고풍스러운 대사의 상당수는 뿌리가 없고(“경들은 들으세요!”), 일부는 노골적인 번역체이다. 물론 존칭이나 존대어의 상당수도 그냥 틀린다. <협녀, 칼의 기억>의 캐릭터들도 이런 파편화된 행동과 말 속에서 존재한다. “…는 …을 만든다”와 같은 영어 번역체, 현대 청소년의 일상어, 고풍스럽고 사극적으로 들리지만 사극보다는 무협지 번역물에서 따온 것 같은(두 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대사들이 공존한다. 프랑켄슈타인 괴물과 같은 세계인 것이다. 이게 나쁜가? 그렇지는 않다. 여러분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싫어하나? 싫어한다면 도대체 왜? 괴물은 재미있고 멋지다. 단지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려면 그 괴물을 살아 숨쉬게 하는 일관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사극영화의 경우 그 무언가는 세계에 대한 자기확신이다. 적어도 자신이 어떤 전통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있는지는 알아야 한다. 이런 파편화는 이 사극 우주가 무협 우주와 결합하면서 더 심각해진다. 무협물을 이루는 판타지는 한자문화권에서 일반화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고려 말기와 결합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무협소설이나 영화는 현대의 비교적 짧은 시기 동안 급속성장한 장르로, 그냥 생각 없이 고려 역사와 끼워맞추는 건 심장이식수술만큼 어렵다. 당연히 묻게 된다. 그런 이식이 필요했나? 주인공 홍이(김고은)의 사명은 무엇인가. 원수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임무를 수행할 때 과연 경공술이 필요한가? 실제로 반영된 결과물을 보면 더 어리둥절해진다. 시퀀스마다 레퍼런스로 삼은 전혀 다른 영화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대나무 숲 장면은 <와호장룡>에서 따온 것 같다. 복수 장면에는 <킬 빌>도 보이고 <형사 Duelist>도 보인다. 몇몇 장면들은 로마 검투사 영화에서 본 것 같다. 이들 일부는 잘 찍었지만 굳이 하나의 영화여야 할 이유는 없다. 심지어 동일한 캐릭터의 액션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레퍼런스가 있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장르란 것 자체가 누적된 레퍼런스로 구성되어 있다. 굳이 다른 장르에서 레퍼런스를 따오고 싶다면 그래도 된다. 하지만 각각의 레퍼런스가 하나로 녹아들지 않고 따로 논다면 그건 만든 사람들이 장르에 대한 확신이나 이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그냥 장면마다 죽어라 열심히만 한 것이다. 괴물을 구성하는 조각난 몸의 일부는 살아 있지만… 이런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는 것은 <협녀, 칼의 기억>이라는 영화의 매력이 장르의 본류에서 살짝 벗어난 비전형성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서부극 비유로 돌아가는데, 60, 70년대에 할리우드에서 수정주의 서부극이 유행이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석의의 긴 의자에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은’ 카우보이 주인공들에 대해 불평했다. 하긴 그들은 과도하게 예민해서 그들이 속해 있는 단순명쾌한 장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기대하는 장르 세계란 의도적으로 실제 세계의 복잡함을 떨어뜨린 곳이고 실제 세계에서는, 아니 장르 세계에도 카우보이들이 얼마든지 신경쇠약에 걸릴 수 있다. 카우보이들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다 빼버리면 어떻게 <브로크백 마운틴>이 나오겠는가. <협녀, 칼의 기억>은 장르 틀 안에 바로 그런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이들이 장르에서 금지된 인물형이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장르는 자체적으로 캐릭터의 성격을 금지할 능력이 없고 굳이 그럴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이 대나무 숲보다 정신분석의의 긴 의자에 더 어울리는 사람들이라는 건 도저히 감출 수가 없다. 특히 월소(전도연)의 경우는 욕망과 동기가 극단적으로 뒤틀려 있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책 한권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의 행동 역시 복수와 정의실현, 협, 의와 같은 한 글자 한자로 정의되는 장르 공식 안에서 움직이지만, 이들은 사실 사극 복장을 한 현대인에 더 가깝고 막판엔 심지어 그도 넘어선다. 특히 이 영화 결말에서 벌어지는 일은 장르 내에서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심지어 현대 한국 관객 상당수가 “아무리 그래도”라고 멈추는 부분에서 더 나아간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구성하는 조각난 몸의 일부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가 온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부만 꿈틀거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고 기왕 장르를 택했다면 괴물을 일으켜 세우는 방법도 역시 장르에서 찾아야 한다. 등장인물들의 사고방식이 장르의 전형성을 벗어난 경우는 오히려 더 치밀한 장르 지식과 테크닉이 요구된다. 배경을 이루는 세계가 완성되지 않는다면 영화는 가장무도회에서 멈추고 만다. 캐릭터가 반항하고 맞서고 배반해야 할 상대로서 세계가 불완전하다면 영화가 어떻게 온전히 설 수 있겠는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실패

※<판타스틱4>와 <오피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침묵의 시선>에서, 50년 전 인도네시아 민간인 학살로 형을 잃은 아디는 가해자와 방조자들을 방문해 왜 그랬는지 묻는다. 누구 하나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는 가운데 유일하게 사과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잔혹 행위가 금시초문인 여인이다. 아버지를 평생 존경해온 효녀의 얼굴은 대화가 진행될수록 굳어가고, 아디가 피살자 유족임을 밝히는 순간 쩍 하고 금이 간다. 아버지의 체면을 지키려는 안간힘 와중에도 그녀의 눈은 충격과 연민을 감추지 못한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이제부터 우리 가족처럼 지내요.” 둘은 포옹하지만 떠나는 아디는 씁쓸해 보인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어떤 부피의 고통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아디가 좀더 머물길 바라지만 차마 붙들지 못한다. 08/17 <판타스틱4>에 대한 혹평은 일약 에스컬레이터를 올라탄 느낌이다. <뉴욕타임스>의 A. O. 스콧은 “인비저블 우먼(케이트 마라)의 남을 투명하게 만드는 파워를 본 영화에 행사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안 그래도 1, 2주면 저절로 안 보이게 될 영화지만”이라고 썼다. 평소 호평을 퍼주는 편이던 <롤링 스톤>의 피터 트래버스도 “차원이라고 할 만한 걸 갖지 못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극중에서 다른 차원으로 텔레포트되는 원숭이가 부러워진다”라고 악평했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에 비하면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은 <다크 나이트>”라는 일타이피성 독설도 어디선가 읽었다. <판타스틱4>는 제작과정부터 잡음이 꾸준히 흘러나오다보니 부정적 기대가 미리 형성된 블록버스터다. 몇해 전 <월드워Z>도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비슷했지만, 하향 조정된 기대에 비해 완성된 영화가 그럭저럭 즐길 만해, 결과적으로 가산점을 얻기도 했다. 불운하게도 오늘 확인한 <판타스틱4>는 특이한 관점으로라도 부각시킬 만한 장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나 <주피터 어센딩>처럼 철저히 허술하거나 뒤죽박죽이라 아이로니컬하게 즐길 수 있는 부류도 아니다. 어느 쪽으로도 비상구가 없어 보이면 평 쓰는 사람들은 영화의 어디가 어떻게 미비하고 역기능을 일으켰는지 상술할 의욕을 잃고, 영화가 실망스러운 정도를 개성 있게 표현할 문장을 구상하는 방향으로 에너지를 돌리는 경향이 있다. 08/18 이십세기 폭스는 2005년작 <판타스틱4>와 2007년작 <판타스틱4: 실버 서퍼의 위협>과 차별화되는 비주류 감성을 리부트에 끌어들이겠다는 목표로 <크로니클>의 조시 트랭크 감독을 선택했다. 그러나 완성된 <판타스틱4>는 허망하게도 기성 슈퍼히어로영화의 단골 블록으로 조립돼 있다. 부당하게 학교에서 따돌림당하는 소년, 직접 연구한 신기술의 피실험자로 나섰다가 입는 부작용, 좌절한 이상주의를 인류멸망론으로 비화시키는 악역 등이 등장한다. 웬만한 히어로물이면 하나씩 돌려쓰는 클리셰지만 <판타스틱4>는 개수가 많다. 얄궂은 점은, 그러면서도 서사 장르의 훨씬 유서 깊은 공식인 3장 구조나, 발단-전개-절정-결말 구성은 포기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판타스틱4>는 영화 전체가 100분짜리 발단처럼 보인다.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를 보며 액션 클라이맥스가 너무 길다고 투덜거리긴 여러 차례였지만, 액션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나서야 클라이맥스인 줄 깨닫기는 <판타스틱4>가 처음이다. 그러나 진짜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세부가 독창적이라면 상투성이나 구조의 미비함에 대해 히어로물 관객은 상당히 너그러워질 수 있다. 한데 <판타스틱4>는 에피소드와 대사도 연방 빗나간다. 주인공 리드(마일스 텔러)와 벤(제이미 벨)의 고교 시절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당황했다. 무려 순간 차원 이동 테크놀로지를 개발하는 연구자들이 비책을 찾아다니는 곳이 고등학교 과학경진대회장이라니! 소싯적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했던 <엑설런트 어드벤처>(1989)류의 청소년 모험물을 추억하게 만드는 설정이다. 리드가 박스터 연구소에 발탁된 이후 전개도 김이 빠진다. 일종의 과학 영재 호그와트라고 할 수 있는 특별한 배경에서 청춘영화로서, SF로서 개발할 수 있었던 풍부한 드라마와 유머는 잠재성으로만 남았다. 고작 오가는 말이 “너, <해저 2만리> 읽었니?” 운운이다. 말난 김에 대사를 돌아보자면 <판타스틱4>의 언변은 <허큘리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의 그것만큼 둔탁하다. “과거를 바꿀 순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어”, “그는 우리보다 훨씬 강하지만, 우리를 전부 합친 것보다는 강하지 않아!” 등의 하나마나한 회화 예문이 결정적 순간 주인공들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쓰고 보니 후자의 대사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주제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차이는, 조스 웨던 감독은 같은 메시지를 기승전결이 있는 액션과 이미지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텔레포트 기계를 완성한 리드와 조니(마이클 B. 조던) 일동은 본인들이 아니라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전문 파일럿들이 장치에 탑승할 거라는 말에 펄쩍 뛴다. 고생은 우리가 하고 유명세는 비행사들이 누린다고 분노하며 술김에 텔레포터를 작동한다(그러면서도 여성 동료 개발자인 수에겐 아무도 연락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만든 자가 반드시 장치를 운행해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세계에서 제일 똑똑한 청년들의 발상이라기엔 부연 설명이 필요한 응석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런 유치함과 객기는 <판타스틱4>를 조시 트랭크 감독다운 영화로 차별화할 스프링보드가 될 수도 있었다. 우연히 얻은 초능력을 지리멸렬한 현실을 달래기 위해 오남용하다가 피투성이 파국을 맞는 <크로니클>의 안타까운 소년들을 회상해보라. <판타스틱4>의 대리 보호자인 프랭클린 스톰 박사(레그 E. 캐시) 역시 “그들은 겁먹은 어린아이들일 뿐이야”라는 대사로 4인조의 미숙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판타스틱4>의 네 주연배우는 사춘기 소년, 소녀로 보이진 않는다. 결정적으로, 인물들이 돌연변이 능력을 얻은 시점부터 영화는 급격히- 이 시점에 감독이 배제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정도로- 캐릭터의 속성을 외면한 선악 대결 노선으로 달려간다. 젊은 주인공들의 미성숙과 더불어 <판타스틱4>가 발전시켰으면 어땠을까 싶은 두 번째 계기는, 신체 호러로서의 가능성이다. 특히 바윗덩이 괴물로 영영 변해버린 벤과 고무처럼 몸이 늘어나게 된 리드는 그들에게 닥친 변화를 혐오한다. 침상 위 리드의 늘어난 다리를 하염없이 훑어가는 숏은 <판타스틱4>에서 거의 유일하게 잊을 수 없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부적응, 그리고 적응의 시간을 생략하고 이들을 액션에 투입함으로써 벤의 광물성 피부와 리드의 고무 사지를 그저 우스꽝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무기로 활용하는 데에 그친다. 여기서 엄한 상상 하나. <판타스틱4>에 스튜디오가 재도전한다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에게 전화라도 한번 넣어보는 것이 어떨지? 08/19 <오피스>는 “사표를 칼처럼 품고 다닌다”라는 관용어에서 비유를 지워버린다. 정말 칼 한 자루를 안주머니에, 사무실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다니는 샐러리맨들이 나온다. <숨바꼭질> <소셜포비아>도 그랬지만, 개인과 조직을 불문하고 능동적 목표보다 낙오의 공포가 행위의 큰 동기로 작용하는 한국 사회 양상에 잘 착안한 장르영화다. 동시대 집단이 현실에서 겪는 고역에 기초한 호러는 쇼크와 무서움도 중요하지만, 히스테리와 노이로제의 뿌리를 드러낼 때에 긴 전율을 남긴다. <오피스>는 이 대목에서 미흡하다. “고위 간부들은 가혹하다”, “동료들은 이기적이다”, “인턴은 착취당한다”, “중간관리자는 고독하다”는 만인이 동의할 만한 정서에 호소하지만, 여러 인물의 스트레스와 폭력 충동이 어떻게 맞물리고 전이되는지 회로를 그리지는 못한다. 존속살인부터 사내 연쇄살인까지 초래하는 ‘몬스터’가 초자연적 힘인지, 사람인지 혹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양자가 접속했는지 종장 이전에 명백히 하고 밀어붙였다면 <오피스>는 끝까지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아무튼 <오피스>는 다시 확인시켜준다. 소재만 따져도 한국 공포영화는 훨씬 무서워질 여지가 무궁무진하다. 좋아요 모녀의 화해 EBS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몽테뉴와 함께 춤을>은, 몽테뉴를 번역하는 불문학자 어머니(심민화)의 현지답사 여행에 카메라를 들고 동행한 이은지 감독의 기록이다. 자연히 영화의 토픽은 양 갈래다. 어머니의 어깨너머로 엿보는 번역이라는 작업의 정체가 하나, 그리고 모녀관계에 대한 사색이다. 세상 모든 가족여행이 그렇듯 감독 모녀도 길 위에서 다툰다. 단, 푸는 장면이 특별하다. 딸은 아이처럼 엄마 무릎을 베고 문제를 지적하고, 엄마는 정면의 공중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을 정확히 전할 단어를 고른다. 내 마음은 연약해졌는데 너는 날 여전히 노인으로 여기지 않아 부딪치는 것 같구나. 모녀 대화라기보다는 어쩌다가 먼저 늙게 된 친구가 배려를 청하는 말로 들린다. 가장 가까운 남편과 딸에게도 평생 완전히 이해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60대 여성의 불안, 인생의 다음 단계를 잠시 유예한 채 엄마의 삶을 견학 중인 딸의 불안이, 두 사람의 자세가 만든 삼각 구도 안에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trans × cross] “무대에 올라 연기하는 내가 가장 나답다”

김민교는 를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그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 93학번으로 김수로, 이종혁, 임형준 등의 동기들과 대학로 무대부터 차근차근 시작한 배우다. 그런데 아직도 그를 개그맨으로 아는 사람들이 더 많은 듯하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만간 방영을 시작하는 시즌6에서는 아쉽게도 그를 볼 수 없지만 9월1일 막이 오른 연극 <택시 드리벌> 무대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여러 편의 영화 촬영도 겸하고 있다. 연극뿐만 아니라 영화로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그는 이때를 기다려왔다는 듯 꽁꽁 숨겨왔던 배우로서의 에너지를 쏟아내고 있는 중이다. 그의 스케줄이 더 바빠지기 전에 서둘러 자리를 마련했다. 그러자 스튜디오로 배우 김민교가 걸어들어왔다. -어제(9월1일) <택시 드리벌> 첫 공연을 마쳤다. 오랜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했다. = 시작하면서 무대를 떠났다가 3년 만에 다시 컴백했다. 어릴 때 연극 무대에 올라가면 인기 많은 배우가 되어 있는 모습을 혼자 상상해보곤 했다. 그런데 어제 무대 위에 불이 켜지는 순간,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데도 관객 반응이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벌써 웃기 시작하고. (웃음) 내가 상상해왔던 모습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연극 무대를 떠나 있었던 건가. =방송에 올인하기도 했고 사실 그 이전까지는 때가 아니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던 중 수로 형의 설득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재미있는 게 김수로 프로젝트 1탄 <발칙한 로맨스>가 나의 연출작이다. 그때 당시 대학로에서 19금 코미디를 처음으로 시도한 작품이었다. 아직은 한국에서 시기상조라며 아무도 안 될 거라 했다. 이후 가 방영되면서 대학로에 19금 코미디 붐이 일기도 했다. -그때 이미 의 전신을 만들었던 셈이다. = 시즌2에 합류하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장진 감독과 마주쳤는데 지금 뭐하냐고 묻기에 딱히 하는 게 없다고 하니까 오라고 하더라. 여하튼 방송하는 동안 <발칙한 로맨스> 때 축적해놨던 19금 코미디에 대한 아이디어가 제대로 구현된 셈이다. 장진 감독과는 <킬러들의 수다>(2001)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연을 맺은 후 를 거쳐 최근 작업한 TV영화 <바라던 바다>까지 함께했다. -를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어떤 이유로 참여하게 됐나. =(잠시 한숨) 내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신데다 사기를 크게 당했다. 어머니와 아내가 있는 집으로 빚쟁이들이 찾아오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바닥을 쳐보니까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열심히 했다. 오랫동안 연극 무대에 서면서 자존심처럼 지켜왔던 게 하나 있다. 당시 많은 배우들이 아동극을 겸하면서 돈을 벌었는데 나는 고귀한 연기를 배워서 왜 낭비하느냐며 아동극 탈을 단 한번도 안 썼다. 그런데 에 들어가 여의도 텔레토비 탈을 쓰고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거다. (웃음) -얼굴 근육 곳곳을 자유롭게 움직일 줄 안다. 그리고 특히 눈을 즐겨 활용한다. =솔직히 표정 연기를 연습해본 적이 없다. 연극할 때도 큰 눈 때문에 득을 봤다. 남들보다 몇배의 감정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순간 뒤집기, 즉 갑작스런 감정 전환 연기에 굉장히 강하다. 펑펑 울다가 갑자기 웃는다거나, 울면서 웃는 연기 등을 잘한다. 그런 연기를 에서 많이 활용했다. 연극 무대에서는 진중한 연기를 주로 보여주곤 했다. 지인들은 아직도 내가 사람들을 웃게 만들면서 뜰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한다. 스스로 내 얼굴을 한계라 여길 때도 있다. 내가 알 파치노 같은 배우의 표정을 보여줄 수는 없으니까. - ‘GTA’ 코너의 인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누구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나. =종종 배우들이 자신의 게으름을 포장할 때 ‘이게 다 연기인생에 도움이 되는 거야’라는 말을 하곤 한다. 예전에 공연하다가 십자 인대가 끊어져서 1년6개월 정도 쉬었는데 그때 게임에 빠져 폐인 생활을 했다. 같이 살던 친구가 컴퓨터를 부수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심하게 매달려 1년이 지나고 나니 웬만한 온라인 게임에서 죄다 상위권에 올라 있었다. 그때 경험이 코너 짜면서 정말 유용하게 쓰였다. 그 코너로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고 광고도 찍었다. 당시 게임에 빠진 내게 화를 냈던 32년지기 친구는 내 권유로 우리 기획사 매니저로 일하고 있다. -김수로, 강성진, 박건형을 비롯해서 아무리 친한 사이더라도 오랫동안 공적 관계를 유지하며 작업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술을 좋아해서일까? 사실 의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어린 시절, 나를 뒤흔들어놨던 영화가 유덕화, 알란탐의 <지존무상>(1989)이다. 그 영화 때문에 의리 지킨답시고 탈선도 하고 분주하게 살아왔다. (웃음) 아무튼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매니저 친구도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하고 있고. 형들도 마찬가지라서 이제는 웬만한 단점은 그냥 덮어준다. -군대에도 잘 적응했을 것 같다. =생활보다는 배우로서 이 기간 동안 연습을 안 하면 뒤처지겠더라. 정체되는 게 싫은 불안감에 군가를 부를 때나 관등성명을 대는 순간을 발성 연습으로 활용했다. 함께 지내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보이는 모든 것을 연기하는 상황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나왔더니 발성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복학하고 첫 무대에 올랐는데 교수님들이 내 목소리만 들렸다며 칭찬을 해주시더라. 그렇게 자신감이 생기니까 더욱 신나서 연기했던 것 같다. -어제 섰던 무대와 대학 복학 후 섰던 무대는 어떻게 다르던가. =잘난 척은 아니지만 늘 자신감을 가지려고 한다. 이렇게 힘든 환경에서 버티려면 나라도 나를 믿어줘야 하지 않을까? 기회만 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입한다. 어제 섰던 무대는 그동안 갈고닦아왔던 자신 있는 것들을 펼쳐놓았고, 지금까지의 삶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합기도 유단자다. 액션 연기에 대한 욕심은 없나. =제대하기 전까지는 합기도 선수와 사범 생활도 겸했다. 지금은 외모가 액션 배우의 그것이 아니라 불러주지 않는 것 같고. 지금도 내게 여전히 액션 연기를 권하는 딱 한 사람은 <점쟁이들>(2012)의 신정원 감독이다. 우리가 이십대 후반일 때, 그가 처음 사비를 들여 장편독립영화를 찍는다며 나를 섭외한 적이 있다. 좀비영화였는데 내가 무술로 좀비를 때려잡는 주인공을 연기했다. 그때 이후로 아마 20kg 정도 쪘을 거다. 신 감독은 지금도 만나면 언제 한번 액션영화 같이 하자고 이야기한다. -현재 촬영 중인 영화도 간략하게 소개해달라. =박광현 감독의 <조작된 도시>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위기에 처한 게임 마니아 권유(지창욱)를 돕는 게임 모임 회원 용도사 역을 맡았다. 용산 전자상가에서 일해서 아이디가 용도사인데 같이 연기하는 김기천 선생님, 심은경, 안재홍 등 오합지졸 멤버들과 힘을 합쳐 주인공을 돕는다. 일종의 코믹 액션 분위기가 강하다. -아무래도 <조작된 도시>가 본격적으로 스크린에서 연기를 보여줄 첫 영화나 다름없다. =어느 영화든 열심히 해왔지만 이제 조금 뭔가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늘 동경해왔고 기대하던 현장 분위기와 역할이다 보니 초심으로 임하고 있다. 늘 꿈꿔왔던 나의 모습이니 이제 시작이다. -10월에 또 다른 영화 촬영에 들어간다고. =신태라 감독의 신작 <바운티 헌터스>에 출연한다. 얼마 전에 크랭크인했고 나는 10월부터 촬영한다. 한•중 합작 액션 코미디라 규모가 꽤 크다고 들었다. 제주도와 홍콩, 마카오, 타이 등을 오가며 촬영한다. 내가 맡은 역할은 이민호를 옆에서 도와주는 약간 반전 있는 조력자다. -마지막 질문이다. 김민교에게 연기란. =이십대 때는 연기가 숙제나 도전 같았고 잘하고 싶다는 의지가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연기하는 순간에 거짓말을 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니 되더라. 때론 연기할 때가 인간 김민교로 살아가는 순간보다 편할 때가 있다. 현실에서는 고민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 누군가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예의를 차려야 하고 안 아픈 척해야 하는 등 거짓을 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연기할 때는 그 순간만 진실하게 임한다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다. 마치 고등학생 때 어른들이 공부만 할 때가 제일 편한 시기라고 하는 것처럼 딱 그런 편안함을 느낀다. 김수로 프로젝트 12탄 <택시 드리벌> 장진 감독의 오리지널 연극 <택시 드리벌>을 김수로 사단 버전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다. 이야기 골격은 원작을 유지하되 시대상을 반영한 에피소드 등을 덧붙였다. 장진과 김수로의 유머 스타일도 확연히 달라 원작을 본 관객도 새롭게 즐길 요소가 많은 것이 특징. 과거에는 택시를 테이블과 박스 정도로 표현하면서 배우들의 연기에만 집중하게 했다면 지금은 무대 위에 진짜 택시를 올리고 프로젝터를 이용해 배경 영상을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등 마치 영화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효과를 연출한다. 김민교와 박건형, 김도현 등 세 배우가 주인공 장덕배를 연기하고 김수로, 강성진을 비롯해 배우 남보라도 함께 참여한다. 11월2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공연한다.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神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다, 우리처럼

“텔레비전이 우리를 신으로 만든다고 생각해본 적 있어?” 영화 <파이트 클럽>(1999)의 원작자로 유명한 척 팔라닉의 처녀작 <인비저블 몬스터>(최필원 역, 책세상 펴냄)에서 한 캐릭터가 묻는다. 그에 따르면, ‘별별 인간들’이 다 나오는 TV 속엔 채널마다 ‘다른 인생’이 있고, 매 시간 바뀌는 인생들이 ‘생중계’되며, 우리는 그들 모르게 세상을 훤히 ‘들여다본다’. “신은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지켜보고 있다가 지루해지면 채널을 바꾸는 것뿐이야.” 그러니 TV 앞에 앉은 우리도 신과 다를 바 없다는 거다. 백남준의 설치미술 (1974)가 언뜻 떠오르면서도, 지금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듯한 얘기 같다. 전지전능한 신은 그 전능함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세상이 지옥이 되어가는 꼴을 내버려두며 곤궁에 처한 인간들을 절대로 구하지 않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TV 뉴스 속 온갖 병폐와 부조리와 숱한 죽음을 들여다볼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거나 혀를 차고 나면 손에 쥔 전능한 리모컨(‘Remote Control’이라니, 정말 멋진 이름 아닌가!)으로 채널을 돌려 다른 인생을 보거나 혹은 전원을 꺼 무시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 대신에 뭔가를 해야 하는 쪽은 인간이다. 그러나 TV가 제공하는 현실은 인간의 고유한 삶도 대체한다. 의식주부터 연애와 결혼, 출산과 육아, 이혼과 재혼까지도 TV만 보고 있으면 모두 대리체험할 수 있다. 이른바 ‘n포 세대’가 포기한 n을 현실에 잉여된 인간들 대신 ‘리얼 버라이어티’가 채운다. 현실 도피를 위해 보는 예능이 남의 현실이다. TV 속 셰프의 근사한 요리를 맛보고 감격하는 연예인들을 보며, 골방의 시청자가 편의점 도시락 혹은 라면을 입에 넣고 있는 모습은 를 패러디한 퍼포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언젠가 모처에서 열린 시나리오작가 세미나에서 방송국 PD와 의도치 않은 논쟁을 벌인 적이 있다. 호기심에 참관을 왔다는 그는 겨우 영화 한편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시나리오만 붙잡고 있는 작가나 감독들의 노력이 너무 덧없는 모양이었다. 훨씬 거대한 시장에 더 많은 시청자가 있는 TV를 두고, 어째서 영화라는 허황되기 짝이 없는 일에 각자의 귀한 인생들을 거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영화는 결코 TV보다 대단한 매체가 아니라는 그에게, 그래도 영화가 더 의미 있다고 답하는 나는 요령부득의 답답한 영화 근본주의자로 보였을 거다. 실제로 영화의 ‘대중매체’적 기능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다. 열린 매체인 TV에 비해 닫힌 텍스트인 영화는 단품의 그림이나 조각상, 소설, 교향곡에 가깝다. 영화는 관객에게 일방적이고, TV는 실시간으로 시청자와 상호작용한다. 영화가 픽션에 현실을 반영하고 방증하고 반성하려 한다면, TV는 현실 자체를 다루면서 현실에 직접 개입하거나 통제한다. 영화는 재해석한 현실을 보여주지만 TV는 계획한 현실과 계획 밖의 현실 사이에서 포착한 것들 중 보여줄 장면을 선택한다. 영화는 절대 세상을 바꿀 수 없는데 가끔 우연히 바꾸는 것처럼 보인다. TV는 능히 세상을 바꿀 수 있어도 돈이 되는 쪽으로 바꾼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미 세상은 TV 속에 있다. TV에 영화는 프로그램 편성의 수고를 더는 ‘콘텐츠’일 뿐이다. TV 매체의 강력함은 선점하고 있던 ‘볼거리’의 자리를 위협당한 영화의 세계에서 가공할 공포의 대상으로 그려졌다. TV 프로그램이 스폰서의 자본과 대중의 선정주의에 휘둘려 섹스와 폭력, 죽음을 파는 쇼가 될 거라는 예측은 SF 액션의 명분으로 삼기에 좋았다. 제임스 칸이 분투하는 노먼 주이슨의 이색작 <롤러볼>(1975)로부터 국가간 전쟁 대신 기업 주최의 살상 스포츠가 개막하자, 이탈리안 익스플로이테이션의 마왕 루치오 풀치는 거대 방송국이 지배하는 미래 로마에서 콜로세움의 검투사들이 마차 대신 모터사이클을 타고 싸우는 <뉴 글래디에이터>(I Guerrieri Dell’anno 2072, 1984)를 만든다. 스티븐 킹 원작,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 <런닝 맨>(1987)의 인간사냥 쇼 포맷이 이어져 일반인들끼리 생존 경쟁을 벌이는 <시리즈 7>(Series 7: The Contenders, 2001) 같은 영화에 이르면 이런 상상은 실제 TV에서 하고 있던 ‘서바이버’ 같은 리얼리티 게임 쇼보다 시시해진다. 좀더 영민한 작가들은 네트워크와 채널로 이루어진 TV 매체의 형식에 주목했다. 웨스 크레이븐의 <영혼의 목걸이>(1989)에서 악마를 숭배하는 연쇄살인마는 스스로가 TV 전파로 변해 송신탑의 거대 안테나로 뻗어나가면서 “이제 공중파로 진출한다!”고 외친다. 결말부 TV 속으로 들어가 리모컨을 무기로 채널과 채널을 오가며 악마와 싸우는 아이디어는 피터 하이엄스의 가족 코미디 <스테이튠>(1992)의 Hell TV와 666개의 채널로 확장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먼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1983)이 있었기에 가능한 상상들이었다. 마셜 매클루언의 <미디어의 이해>(1964) 시청각 교재로 손색없는 이 영화에서 TV는 현실이고 현실은 TV보다 덜 현실적이다. 실제의 폭력을 넘어 가상과 현실의 본질적인 차이마저 흐리게 만든 미디어는 인간 육체와 기계 기술을 말 그대로 ‘융합’해버린다. 로버트 레드퍼드의 <퀴즈쇼>(1994), 피터 위어의 <트루먼 쇼>(1998), 론 하워드의 <생방송 에드TV>(1999) 등 TV 속 조작된 현실을 다룬 영화의 계보 맨 앞자리에는 시드니 루멧의 걸작 <네트워크>(1976)가 있다. 오랫동안 UBS TV의 간판 뉴스앵커였던 하워드 빌(피터 핀치)은 시청률 저조를 이유로 해고를 통보받자 생방송 도중 다음 뉴스 시간에 권총 자살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오랜 동료인 보도부장 맥스 슈마커(윌리엄 홀든)의 비호 속에 마지막 방송에서 사과 대신 내뱉은 푸념이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자, 시청률 반등에 주목한 프로그램 기획자 다이아나(페이 더너웨이)는 하워드를 진실의 예언자로 내세운 새로운 컨셉의 뉴스 쇼를 사장 프랭크 해켓(로버트 듀발)에게 제안한다. 영화는 시청률과 이윤 창출을 위해서라면 가능한 모든 것을 돈벌이로 삼는 미디어 산업과 그 종사자들의 비인간성을 지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기업과 자본주의의 본질에까지 도달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낡지 않는 영화. TV를 소재로 한 영화 중 단 한편을 꼽는다면 단연코 이 작품이다. 위대한 작가 패디 차예프스키가 쓴 시나리오의 모든 대사가 훌륭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UBS를 합병한 거대 기업 CCA의 회장 아서 젠슨(네드 비티)이 하워드에게 일장연설하는 내용이다. 그 속엔 알 건 다 안다고 생각하는 지금의 우리도 감히 인정하기 두려운, 태초부터 그래왔고 앞으로도 영영 이어질 이 세계의 진짜 진실이 밝혀져 있다. 진실 앞에 큰 충격을 받은 하워드는 “나는 신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한다. 천상에 있다는 유일한 신은 TV 앞의 우리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신은 TV 뒤에서 온갖 일을 하느라 바쁘다. TV 속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이고 실제 나의 인생은 모호한 환상이 된 우리를 위해 <심슨 가족>의 호머가 오열하며 했던 말을 마지막으로 인용해야겠다. 그는 그가 아무것도 안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TV 때문이야. 고품격의 프로그램이 너무 많아 다른 건 할 수가 없어. 새로 나오는 것마다 더욱 신선하고 기발해. 한번이라도 실수해서 우리에게 30분만 준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절대 실수하지 않아! 내가 살아볼 기회를 안 줘!” 어떤가? 남 얘기가 아니지?

레오스 카락스라는 인물의 본모습 <미스터 레오스 카락스>

퐁네프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건물 창가에, 한 남자의 실루엣이 비친다. 끝까지 명확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그는 바로 레오스 카락스 감독이다. 카락스의 기행적인 언론 기피 습성은 잘 알려져 있다. 영화계에 몸담았던 지난 30년 동안, 그가 직접 참여한 인터뷰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나마 텔레비전 영상인터뷰는 찾을 수 없다. 그 연장선상에 아직도 카락스는 서 있는 듯 보인다. 자신에 대한 내용을 담은 이 영화 <미스터 레오스 카락스>에서도 그는 새로운 모습이나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집을 흔적은 보여주지 않는다. 때문에 다큐멘터리 연출자 테사 루이즈 살로메는 과거 아카이브 영상 자료들을 활용해 그를 간접적으로 설명한다. 최근 촬영한 듯한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여기에 덧붙는다. 과거 줄리엣 비노쉬의 인터뷰 장면이나 <홀리모터스> 상영 당시 칸국제영화제의 반응이 담긴 텔레비전 화면, 그리고 촬영장 메이킹 필름 등이 짜깁기되어 등장하고, 이어서 드니 라방과 하모니 코린, 질 자코브 등 감독이나 배우, 관계자들의 설명이 교차된다. 만일 레오스 카락스의 작품 세계를 한마디로 설명하라면, 미국의 영화평론가 리처드 브로디의 말을 빌리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카락스 영화에는 금기가 있는데, 그건 바로 ‘평범함, 반복, 일상’이다. 1980년대 데뷔한 이 젊은 천재는 빠르게 프랑스영화의 저주받은 시인 자리에 올라섰다. 하지만 30년 동안 그가 완성한 영화는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나쁜 피> <퐁네프의 연인들> <폴라 X> <홀리모터스>, 단 5편뿐이다. 카락스 자신을 대변하듯 주인공은 자기파괴의 욕구로 응집돼 있고, 여자주인공은 시적으로 과장되어 설명된다. “레오스 카락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고다르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미소 지으며 “용기를 주고 싶군요”라고 답한다. 그걸로 충분하다. 영화 <미스터 레오스 카락스>의 구심점에는 분명히 카락스가 서 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마치 무중력 상태에 빠진 내면처럼 비밀스럽게 번지기를 반복할 뿐이다. 마치 수수께끼 같은 신화가 레오스 카락스라는 인물의 본모습이라고 일러주듯 말이다.

[파리] 환경을 생각하는 다큐냐 그린 버스터냐

‘왜 우리는 아직도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지 못하는 것인가?’ 사진작가이자 환경운동가로 세계적 명성을 떨치고 있는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계나 분석 대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찾아내길 원했다. 이를 위해 그는 지난 3년간 60개국을 돌아다니며 2020명의 증언을 63가지의 언어로 2500시간 동안 촬영해 그의 두 번째 장편다큐멘터리 <휴먼>(2015)으로 완성했다. 유엔 창설 70주년 기념행사 때 첫선을 보인 이 영화는,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홈>이 그랬던 것처럼 전통적인 방식으로 개봉하는 대신, 개봉과 동시에 텔레비전 공중파로 대중에게 소개됐고, 동시에 인터넷상에서도 무료로 공개됐다. 상업적인 이윤 추구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환경과 인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라는 감독의 가치관 때문이다. 참고로 2009년 세계 환경의 날에 맞추어 첫선을 보인 <홈>은 지금까지 극장, 텔레비전, 인터넷 그리고 각종 사회단체에서 마련한 무료 상영을 통해 600만명에 가까운 관객과 만남을 가졌다. <휴먼>은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미국 죄수,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일부다처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인 등 다양한 인종, 언어, 문화, 연령대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이야기들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장기인 아름다운 항공숏과 조화롭게 교차되면서 보여진다. 프랑스에선 <휴먼>의 이런 시각적인 아름다움, 친환경적 메시지, 비영리적 배급방식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매체들이 있는 반면, 그의 작업 자체의 모순을 비판하는 매체들도 있다.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 <휴먼> 같은 ‘그린 버스터’ 영화제작을 위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베탕쿠르-슐러 재단(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의 비자금 횡령 사건과 연관된 유대계 프랑스 그룹)과 연계하고 있고, 또 헬리콥터로 촬영하는 그의 장기인 항공숏들은 영화 메시지와 달리 환경을 해치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작품들을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로 볼 수 있을까? 관심 있는 독자들은 유튜브에서 직접 그 답을 찾아보기를 바란다.

“모바일 이후 상황을 준비한다”

2005년 실시간 개인방송 서비스 ‘W’ 베타 서비스를 시작했고, 2006년 멀티미디어 개인방송 서비스 ‘afreeca’를 정식으로 오픈한 ‘아프리카TV’는 이제 10년의 역사를 채웠다. 초창기엔 “방송을 놀이로 접근”했다면 지금은 플랫폼 사업에서 나아가 양질의 콘텐츠 제작에도 집중하고 있는 상황. 1인 미디어가 올드미디어를 대체하고, 새로운 미디어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는 상황에서 라이브 소셜 미디어 플랫폼 아프리카TV의 차별화된 전략과 계획은 무엇인지 살폈다. -1인 미디어의 성장과 발전에 아프리카TV 같은 동영상 플랫폼이 끼친 영향이 크다고 보나. =블로그, 트위터, 페이스북이 활성화됐을 땐 텍스트 기반의 1인 미디어가 많았다. 지금은 텍스트에서 영상 중심으로 변했다. 그 과정에서 유튜브 등 10년간 꾸준히 사업을 이어온 글로벌 플랫폼 사업자들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본다. 아프리카TV의 경우 BJ (Broadcasting Jockey)를 중심으로 한 팬 커뮤니티 형성에 집중적으로 신경을 써왔다. 현재는 플랫폼 사업에서 나아가 BJ들이 어떤 방송, 어떤 콘텐츠를 만들면 좋을지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 콘텐츠 제작과 관련한 다양한 지원을 펼치고 있다. -이른바 스타 BJ들은 회사에서 따로 관리를 하는 건가. =MCN은 콘텐츠 크리에이터들을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사업인데, 최근 우리도 윤종신씨가 속해 있는 미스틱엔터테인먼트와 함께 프릭(Freec)이라는 MCN 벤처사를 세웠고, 영상 제작 스튜디오를 마련했다. 물론 차이는 있다. 기존의 MCN 사업자들이 유명 크리에이터들을 영입해 관리하고 육성해 수익을 창출하는 개념이라면, 아프리카TV는 수익창출을 위해 크리에이터들을 영입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프리카TV에서 한달에 활발하게 방송하는 BJ 수가 30만명이 넘는다. 그 인력을 모두 관리할 순 없다. 대신 내부적으로 BJ 관리 시스템을 만들었고, 베스트 BJ 등급이 되면 여러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게 했다. -네이버TV캐스트, 카카오TV, CJ E&M의 다이아TV 등 다양한 동영상 제공 플랫폼들이 생겨나고 있다. 창작자들이 자신의 콘텐츠 특성에 맞는 플랫폼을 고민하는 추세에서 아프리카TV는 어떤 차별화된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유튜브가 VOD, 즉 이미 만들어진 콘텐츠인 RMC (Ready Made Contents)에 특화된 서비스라면, 아프리카TV는 라이브가 중심인 플랫폼이다. 창작자와 시청자는 실시간 채팅으로 의견을 교환하고 소통한다. 시청자의 채팅은 콘텐츠에 그대로 반영된다. 실시간으로 참여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게 아프리카TV의 특징이다. 채팅 자체가 또 하나의 콘텐츠이며, BJ의 팬 커뮤니티는 또 다른 크리에이터인 셈이다.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는 것보다 스타 크리에이터의 확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스타 BJ를 만드는 건 우리의 지향점이 아니다. ‘아프리카TV’라는 사명에서도 알 수 있듯, ‘Any Free Casting’, 즉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 수 있게끔, 누구나 하나씩의 개인방송을 가질 수 있게끔 환경을 제공하는 게 아프리카TV의 역할이다. 현재 아프리카TV는 게임 방송, 보이는 라디오 형태의 토크 방송, 스포츠 방송이 활성화되어 있는데, 그외에 메이크업 방송, 웹드라마 제작 등 여러 분야에서 좋은 콘텐츠가 제작될 수 있도록 콘텐츠 다양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플랫폼 및 인프라와 관련해 연구개발 중인 것도 많은 것으로 안다. =모바일 이후의 상황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최근 뜨겁게 떠오르고 있는 VR(가상현실)이라든지, 드론 방송,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2013)에 나오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같은 것도 연구개발 중이다. 인공지능을 가진 3D 아바타가 시청자와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방송을 하고, 거기에 가상현실을 접목하는 일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충분히 실현될 것이다. -최근 ‘미디어, 콘텐츠, 플랫폼으로 본 1인 창작자의 미래’ 컨퍼런스에서 “아직까지 1인 미디어의 갈 길은 멀다”고 얘기했다. =미디어의 형태, 콘텐츠의 특성, 서비스 플랫폼 등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고, 변화의 속도도 빠르다. 앞으로 미디어 산업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그 변화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의 1인 미디어가 단기적인 트렌드는 아니라고 본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처럼 기존 방송사들도 새로운 포맷을 받아들이는 시도를 하고 있다. 올드미디어와 뉴미디어의 콜라보레이션도 활발히 일어날 것이다.

중산층의 자화상, 도시의 자화상

부동산과 흥망성쇠를 함께한 한 가족의 일대기와 현재를 그려낸 <버블 패밀리>는 피칭작 중 유일한 사적 다큐멘터리다. 마민지 감독은 부동산 브로커인 아버지와 부동산 텔레마케터 어머니, 감독 본인의 삶에 주저 없이 카메라를 밀어넣었다. 집 안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카메라에 담겼고, 어색하게 브이를 그리던 부모님은 나중엔 카메라가 있다는 사실을 잊기 시작했다. “촬영 중반까지는 관찰자 입장에서 촬영하려 했다. 그런데 점점 거리가 좁혀지면서 나 역시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게 되더라. 급기야 경계가 없어져 촬영 중에 싸우기도 했다. (웃음)” 그러나 <버블 패밀리>는 단순히 한 가족의 자화상에만 머물지 않는다. 잠실 토박이인 마민지 감독은 1970년대 섬이었던 잠실이 개발된 과정과 그에 따른 부동산 열풍, 중산층의 모습을 다면적으로 그려낸다. 가족의 자화상은 곧 중산층의 자화상이자 도시의 자화상이 됐다. “공간과 지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그녀가 태어나고 자라온 잠실을 탐구의 공간으로 삼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잠실은 신도시 개발의 초기 모델이 되는 상징적 지역이다. 지방에서 상경해 잠실에 자리잡은 부모님은 건축사업을 해 건물만 서른개 이상 보유했고, 부동산 열풍으로 단번에 중산층의 지위에 올랐다. 잠실 개발사를 찾아보면 토지구획 자료들이 있는데, 부모님이 집을 지었던 위치, 시기와 일치한다.” 잠실 개발사 한복판에 있었던 생생한 증인을 확보한 그녀는 1970, 80년대 잠실 풍경을 담아낸 파운드 푸티지 영상들을 구입해 잠실의 지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녀의 탐구는 부동산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종로의 땅을 매입해 건축사업을 하셨다. 그런데 법규가 바뀌면서 건물을 못 짓게 되어 돈을 날려버렸다. 사업을 접고 건물도 팔고 월세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부모님은 지금도 부동산 한방을 꿈꾸신다.” 그녀가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그 욕망의 근원이다. 공간과 지역사에 대한 마 감독의 호기심은 문화연구를 공부하면서 시작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그녀는 문화연구 수업에서 공간성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됐고, 졸업작품으로 다큐멘터리 <성북동 일기>를 찍으며 방향성을 전환해 전문사에는 다큐멘터리 전공으로 진학했다. <성북동 일기>에서도 공간성과 지역사에 대한 그녀의 비판적인 시선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성북동의 북정마을은 도시 재생사업을 통해 마을이 관광화되는 과정을 거쳤다. 공간을 자본화하는 젠트리피케이션(특정 지역이 주목을 받으면서 중산층이 유입되며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은 떠나고 기존 지역색을 잃는 현상을 이르는 용어)에 관심이 많다.” 풍자적 내용의 사적 다큐멘터리에 가족이 부담을 느끼진 않았을까. 처음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던 부모님은 두 차례의 피칭상 수상 후 영화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영화 촬영을 지지해줬다(<버블 패밀리>는 전주국제영화제의 프로젝트마켓에서 다큐멘터리 피칭 최우수상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치&캐치에서는 더펙&기록문화보관소상을 받은 바 있다). 이번 인천다큐멘터리포트는 부족한 제작비를 충당할 마지막 피칭의 기회다. “신인의 패기로 임하겠다”는 그녀의 마음은 벌써 단단히 여물어 있다. <버블 패밀리>의 결정적 순간 “어느 날 아버지가 영화 제작비를 부동산에 투자하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어머니는 딸이 영화 찍는 돈까지 쓸 작정이냐며 역정을 내셨지만, 다음날 전화로 그 부동산 수익률을 묻고 계셨다. (웃음)” 그녀는 안타까우면서도 웃긴 이 상황을 영화의 하이라이트로 꼽았다. “<버블 패밀리>는 욕망을 풍자적으로 드러내는 블랙코미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웃픈’ 감성을 관객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김민정의 디스토피아로부터] 빗자루와 삽이면 충분하다

병가. 몸이 아파서 얻는 휴가. 직원 수가 200명에 육박해가는 우리 회사만 봐도 연중 전 직원이 몽땅 다 출근해 있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어디가 아플까. 물어보면 병명 한번 가지가지다. 허리가 아프대요. 목 디스크래요. 엄지발톱이 뽑혔대요. 며칠째 못 자고 있대요. 장염이래요. 이명증이래요. 대장에 용종이 생겼대요. 안과에 다녀온대요. 그런데 참 특이한 건 연차가 보통 10년이 넘은 직원들은 웬만해서 아프지 않고 한 2년이나 3년쯤 되는 직원들의 병가 횟수가 가장 빈번하다는 사실이다. 경력이 좀 되었다고, 후배들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을 의심쩍어해서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 아니다. 나 역시 그런 시절을 같은 마음으로 경험하고 겪어왔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이 한때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지만, 직장 초년병 시절의 나는 일상이 환자였던 것 같다. 쓰고 싶은데 벌리는 돈은 없고, 놀고 싶은데 나이 먹어감이 두렵고, 어쩌다 일은 하게 되었지만 그 미래가 너무 빤하고, 그런 만큼 막막해서 살기 싫어지는 하루하루가 심장을 압박해오곤 했던 것이다. 마음의 병은 우리의 몸을 쉽게 무너뜨린다. 우리는 누웠다 일어나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달궈진 숯불처럼 뜨거웠던 마음의 혈기에 약으로 분무를 해가며 겨울 절벽의 돌들처럼 차갑게 늙어가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이 땅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지 않고 신문을 사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무식함을 자랑하는 게 아니다. 그런 나를 스스로 비난하지만은 않는 것은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럴까 하는 사람들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에 꼴도 보기 싫은 마음이 너무 커져버려서다. 나도 안다. 내가 얼마나 비겁한 사십대인지. 후배들을 위해 이 사회의 정의와 선의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뒤로 물러나 팔짱을 낀 채 말만 씨불이는 내가 얼마나 한심한 선배인지를. 국정화 교과서 반대 시위로 주말에 10만명이 운집할 거란 뉴스가 일찌감치 보도된다. 그 10만명은 어디에 기본을 두고 계산한 숫자일까. 경찰 동원력이 최고에 이를 거라는 뉴스도 함께 보도된다. 이 시국에 분노는 하지만 이 시국에 함께 시위 대열에 뛰어들지 않는 이들의 대부분은, 우리가 힘을 합한다고 무언가 바뀔까 하는 패배주의에 만연한 사고가 분명 팽배해져 있기도 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역사를 거슬러보면 합해진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며 보다 간절할 때 우리는 우리의 뜻한 바를 이뤄왔던 것 또한 사실 아닌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런데 피해봤자 냄새는 점점 더 심해지고 부패는 더 더럽게 진행될 것이니 방법은 하나, 누군가는 빗자루를 들고 누군가는 삽을 들고 여기저기 곳곳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똥을 치워야 할 것이다. 후배들에게는 보다 가벼운 빗자루를 쥐어주고 선배들은 보다 무거운 삽을 들자. 일단 아프지 말자. 아프지 않아야 똥도 안 밟는다.

감각적인 영상과 다채로운 사운드 <위아 유어 프렌즈>

콜(잭 에프런)은 야심찬 아마추어 DJ다. 마약과 술로 뒤범벅된 파티를 즐기는 게 그와 친구들의 일상이지만 콜은 음악 작업 또한 게을리하지 않는다. 무대 뒤에서 보조 DJ로 일하던 그는 파티의 메인 DJ이자 유명 DJ인 제임스 리드(웨스 벤틀리)를 만난다. 제임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콜은 함께 작업할 기회를 얻으며 조금씩 자신의 꿈에 다가선다. 문제는 콜이 제임스의 조수이자 연인인 소피(에밀리 라타이코프스키)에게 끌린다는 점. 이기적인 제임스에게 지쳐가던 소피도 콜에게 마음을 열면서 둘은 짧은 밀회를 즐긴다. 그러나 제임스에게 이 사실을 들킨 콜은 작업실에서 쫓겨난다. 설상가상으로 절친한 친구 스쿼럴이 마약을 과다 복용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절망에 빠져 있던 콜은 그동안 만들어놓은 트랙들을 모아 다시금 제임스를 찾아간다. TV 카메라맨, 광고 기획자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감독의 작품답게 감각적인 영상들이 돋보인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 초반, 환각제를 복용한 콜이 마주하는 환각을 영상으로 표현한 장면이다. 몸속에 환각제 기운이 퍼지자 콜이 보고 있던 미술작품은 물감으로 분해되어 사람들을 뒤덮는다. 그래픽으로 변한 사람들이 춤을 추는 장면은 팝아트 작품을 연상케 한다. 이외에도 지도나 위성사진을 비롯한 자료가 빈번히 삽입되고 화면 위로 글자가 새겨지는 등 독특한 아이디어가 담긴 영상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영화의 방점은 쉴 새 없이 흐르는 일렉트로닉 댄스음악(EDM)에 찍힌다. 영화는 콜의 입을 통해 EDM이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방식까지 설명하며 관객이 음악을 즐기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환락에 취한 파티 장면을 배경으로 흐르는 EDM이 관객의 심박을 제대로 자극할지는 의문이다. 영화는 콜을 비롯한 네 청춘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파티가 있는 화려한 밤에 비해 생활비를 벌고자 사기성 짙은 텔레마케팅을 하는 이들의 낮은 보잘것없다. 대책 없이 살던 네 청춘은 친구의 죽음을 통해 마침내 각성한다. 감각적인 영상과 다채로운 사운드에 비해 스토리와 결말은 평이하다. 워킹 타이틀사가 제작을 맡았으며, 맥스 조셉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