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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제2의 <시카고>를 바란다

할리우드에 부는 뮤지컬 제작 바람 할리우드에 뮤지컬영화 제작 붐이 일고 있다. 2002년에 개봉한 <시카고>가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크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르네 젤위거와 캐서린 제타 존스가 출연한 <시카고>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비롯해 여섯개의 트로피를 가져갔고, 1억7천만달러가 넘는 흥행수입을 올린 뮤지컬영화. 는 “다른 감독들도 <시카고>가 요행만은 아니라고 여기는 듯하다”라고 보도했다. 브로드웨이의 작곡가 콜 포터의 생애를 담은 <디-러블리>는 이미 런던에서 촬영을 마친 상태다. 케빈 클라인과 애슐리 저드가 출연하는 이 영화는 포터의 전성기인 1920년대와 30년대를 무대로 하는 뮤지컬. 포터가 작곡한 노래 30여곡을 바탕으로 삼았지만, 감독 어윈 윙클러는 “요즘 관객에게도 충분히 다가갈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그 ‘요즘 관객’을 위해 셰릴 크로와 엘비스 코스텔로, 내털리 콜, 앨라니스 모리셋 등이 참여, 포터의 노래들을 영화 분위기에 맞도록 편곡했다. 이 밖에도 제작을 계획 중인 뮤지컬영화는 여러 편이다. 모건 프리먼과 어린 배우들이 출연하는 <스트레이트 업>은 로스앤젤레스 빈민가 소년들이 갱조직을 떠나 노래와 춤을 배우는 영화. 최근 <폰부스>로 회생한 조엘 슈마허는 2004년에 <오페라의 유령>을 내놓을 계획이다.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유명한 뮤지컬이 원작인 <오페라의 유령>은 10월에 촬영을 시작하며, <툼레이더2: 판도라의 상자>의 제라드 버틀러가 팬텀으로 출연한다. <시카고>의 프로듀서 크레이그 제이단과 닐 메론 역시 미라맥스와 함께 뮤지컬 <댐 양키>의 영화화를 계획하고 있다. <댐 양키>는 로드쇼에서 출발해 브로드웨이에서까지 성공을 거두었던 작품. 미라맥스는 샤를마뉴 대제의 아들이 허술한 모험을 벌이는 뮤지컬 <피핀>의 판권까지 사들였다. 유니버설은 대작 두편을 준비 중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카르멘>이 그 영화들. <카르멘>은 제니퍼 로페즈가 주연과 제작을 맡을 예정이다.김현정

[새 영화] <남남북녀>

바람둥이 대학생, 북한 여대생과 만나 그걸로 끝‥? 고고학과 대학생 철수(조인성)는 바람둥이다. 공부는 관심없고 온통 여자에만 정신이 쏠려있다. 교수가 학점따서 졸업하려면 연변 유적 남북한 합동 대학생 탐사대에 합류하라는 조건을 낸다. 할 수없이 연변에 간 철수의 눈에 북한 여대생 영희(김사랑)가 눈에 들어온다. <남남북녀>의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말하면 충분하다. 북한 여자인 영희는 정절을 소중히 할 것이고, 철수는 애를 먹을 것이고, 그러다가 순정이 생길 것이고, 마침내 영희도…. 문제는 그 공식이 아니라, 공식에 살을 붙이는 데에 정성을 쏟지 않는 안이한 태도다. 영화가 마련한 건 조인성의 과장된 표정 연기와 연변 가이드로 나오는 공형진의 수다, 북한 사투리를 활용한 몇 차례의 개그 정도다. 이렇다할 배경이나 구도가 없는 밋밋한 화면 안에 크게 잡힌 인물들은 어색한 몸짓을 해댄다. 만드는 이들부터가 개인기나 썰렁 개그에 애정이 없이, 그것만 있으면 관객은 웃는다는 생각으로 밀고 간 듯한 의구심이 든다. 세트나 무대도 성의 없다. 남녀 주인공 둘이 유적발굴장 갱도가 무너져 갇히는데, 운동장 바닥을 1m 남짓 파니까 바로 구조된다. 줄거리 설명에서 부연할 게 있다. 철수의 아버지는 국정원 원장이고, 영희의 아버지는 인민무력부 부장이다. 이 설정을 빌어 중반 이후로 철수와 영희를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만들면서 관객에게 슬픔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지난 15일 개봉하려다가, 기자시사회 반응을 보고 2주 미뤘다. 그사이 편집을 새로 했다고 영화사쪽은 밝혔다. 그러나 <자카르타> <몽정기>의 정초신 감독은 상영시간에 맞춰 찍기로 유명한 만큼, 새 편집 때 추가할 필름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임범 기자

내년엔 무대로 돌아가겠습니다,<바람난 가족>의 황정민

양복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영화 <바람난 가족>에서 트렌치코트를 늘씬하게 늘어뜨린 채 뒷모습을 보였을 때도 알아보았지만, 희끄무레한 스튜디오 안에서 짙은 슈트를 입고 곧게 서 있을 때 그의 실루엣은 단 한 가지의 느낌을 뚜렷이 풍겼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건축도면. 소매에 잡힌 주름까지도 미리 계산되어버린.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제까지의 황정민이란 배우가 이 세련된 슈트와 유유상종할 종류처럼 보이진 않았었다 해도, 바람난 변호사 ‘주영작’은 또 다른 황정민 같았으니까.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로드무비>로 넘어갔을 때도 그랬고, <로드무비>에서 으로 건너뛰었을 때도 그랬다. 순박한 드러머 강수, 하염없이 떠도는 청년 대식, 부족함 없이 곱게 자란 착하고 어리숙한 녀석 광태 사이에 고정된 ‘황정민’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스타일이나 수염, 안경 따위의 분장 차이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배우로서 그는, 아무 향도 고정된 자태도 없는 물질에 가까운 듯했다. “이 영화는 또 다른 숙제였어요. 내가 이런 연기도 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주영작이란 캐릭터는 나한테 도전이었죠. 얘는 댄디하지만 난 그렇지 않거든요. 그리고 난 다혈질이고 감정적인데, 영작은 자기 아버지도 그렇고 부부관계도 그렇고, 인생에 불편함이 많은데도 내색을 안 하잖아요. 속내를 알 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한다는 게 제일 큰 어려움이었죠.” 처음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 일단은 거절했던 이유다. “노출도 어려웠고. 그건 정말 말 못할 부담감이에요. <로드무비> 때도 ‘남자랑 해서 쉬웠어요’라고, 사람들 앞에서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배우로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어요.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한 걱정도 당연히 되고요…. 그래도 대본은 좋으니까 거절하고 나서도 뒤가 찝찝한 거예요.” 말하자면, 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되묻는 동안에도, 그는 만만치 않은 이 대상을 정복하고 있을 자신의 모습을 또 한편으로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독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자기만 따라하래. 영작이의 좋은 점들은 변호사인 자기 친구(조광희 변호사를 말함)를 닮은 거고, 나쁜 점은 다 자기라고.” 그렇게 해서 그는 <바람난 가족>과 함께 다시 한번 자신의 무형무취적 질감을 시험한다. 성능 좋은 판박이가 살에 붙으면 그럴듯한 문신이 되듯, 그가 캐릭터 살에 달라붙거나 캐릭터가 그의 살에 달라붙어 두 존재는 서로에게 삭아들어갔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한시름 놨어요. 자신감도 얻고. 배운 것도 많아요. 배우라 함은 연기를 할 때 밖으로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게 마련인데,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도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영화가 무난히 흥행 중이라는 사실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 “이 인터뷰 기사 제목은 이렇게 달아주세요. ‘잘린 손가락과 장지진 손가락을 웃으며 찾으러 다니는 황정민.’ 편집 기간 중에 그런 얘기 들었거든요. 이 영화 흥행하면 내 손가락을 자른다,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근데 흥행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찾으러 다녀야지.” 이제는 가속도 기어를 넣어야 할 시점일 텐데, 그는 7∼8년간 머물렀던 연극무대를 여전히 사랑하며 동경하고 있었다. “무대로 돌아가야죠. 올해도 대본이 많이 들어왔는데, 죄송합니다, 못하겠습니다, 하고 정중히 거절했어요. 올해는 좀 힘들 것 같고, 내년 여름이 되기 전에 한편 하려고요.” 그는 다양하지 못한 국내의 공연문화 현실을 ‘개탄’해 마지않으며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관객이 볼 게 연극과 뮤지컬밖에는 없다는 것. 그러니 <델라구아다> 같은 공연이 굉장히 특이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것, 대학로는 갈수록 죽어가고 있다는 것. “관객은 배우 인지도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요. 내가 영화를 열심히 한 다음에 연극을 하면 아무래도 사람들이 더 많이 보러 와주지 않겠어요?” 그는, 둘 중 한 가지를 꼭 선택해야 한다면 충무로보다 대학로에 남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 원석이라고 표현했던 이 무형무취의 배우, 황정민의 맨 얼굴의 느낌을 우린 이제야 알기 시작했고 그 매력을 발견 중이다. 돌아가겠다는 건, 아직 좀 이른 생각이다.

욕하며 살자!<키쿠지로의 여름>

여름도 끝나가고… 놀러도 못 가고… 뒹굴거리며 ‘이쒸… 우라질레이션’ 하면서 선선해진 바람을 저주해본다. ‘바보축구온달똥개’라는 욕을 들어봤는지. 바보, 온달, 똥개는 알겠는데 축구는 뭐지?? 우리 시골에선 바보란 욕과 비슷한 쓰임새로 있는 게 이 ‘축구’란 용어다. 도대체, 왜, 대관절, 무슨 이유로 축구란 구기종목이 우리 시골에선 욕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어린 시절 싸우면 항상 입에 달고 다닌 욕이었다. 그 축구란 욕은 ‘아이고 저 녀석 축구네 축구야’ 하시며 동네 아주머니들도 입에 달고 다닌 꽤 지역적인 욕이라 하겠다. 그래서 지난해 월드컵 당시 축구란 말만 나와도 왠지 모르게 욕을 하는 거 같아서 슬며시 웃곤 했다. 그 다음 최대의 욕이 ‘미천놈’. 아니 미쳤으면 ‘미친놈’이지 왜 ‘미천놈’이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가장 나쁜 욕이라고 생각하며 격앙된 감정일 때 버럭 내뱉던 말이었다. ‘이 미천놈, 죽여버릴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이 욕은 나쁜 게 아니라 바보스럽기조차하다. 그 다음엔 정말 듣기 싫은 욕을 나불대고 다녔는데 바로 ‘에이! 재수없어’다. 이 말은 고등학교 시절 입에 달고 다니다가 급기야 내가 뇌까린 말에 마음 약한 여선생님을 울리기까지 했으니 정말 하면 기분 나쁜 욕이라고 생각된다(그 우는 여선생님을 쫓아 양호실까지 가지 않았던가. ‘젠장’ 하면서). 그리고 이 ‘젠장’이란 말도 참으로 좋아했다. 만화책에 많이 나오는 이 말을 아무도 쓸 거 같지 않고 어쩐지 멋져 보여 ‘젠장할’ 이렇게 내지르며 쏘다닌 것 같다. 그러면 뭔가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대학 시절 정말 대단한 욕들을 알게 되었다. 음음… 지면상 생략하는 게 가슴 아프다만 여러분들이 상상하던 그대로의 욕들을 버럭버럭 내질렀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욕은 주문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므로 상대방을 저주하든 놀리던 입에서 발음하기 쉽든지 아니면 잊지 못할 단어로 되어 있는 거 같다(만화가 김진태의 <시민쾌걸>에 자주 나오는 욕 ‘우라질레이션’도 욕 같으면서도 어쩐지 학구적이면서도 발음하기 좋기까지 하다!! 캬하하하). 이 발음하기 좋은 욕들은 수리수리 마수리 또는 아브라카다브라, 옴마니 반메훔처럼 간절히 원하는 기도문 또는 주문과 욕은 어쩐지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이런 주문과 같은 욕과 달리 또 하나의 욕은 스스로 자신에게 하는 욕이다. 맥락이 없는 욕은 상대방에게 툭 내뱉어도 사실 자신에게 하는 욕이다. 혼잣말하듯이 중얼중얼거리며 욕을 할 때도 있는데 주로 혼잣말하는 사람들이 이런 경우가 많다. 자책하듯이 자신에게 욕을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요즘 많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귀를 귀울여보라. 혼자서 속삭이듯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욕하는 친구들이 꽤 있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런 부류….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아침에 세수할 때부터 자신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며 욕하는 친구들인 것이다. 지난밤의 행동들을 후회하거나 미안해할 때, 또는 퉁퉁 부어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얼굴의 자신을 볼 때도, 계절이 바뀌는 것조차도 욕하고 싶은 것이다. 마치 주문처럼 말이다. 같이 작업하는 후배가 타이 여행 중 만난, 어린 시절 해외(스웨덴)에 입양된 청년이 한국말을 딱 하나 기억난다고 이야기했단다. 그게 바로 ‘얼레리 꼴레리’. 어감도 희한하지만 그 어린 소년이 한국말 중 유일하게 안 잊고 기억하는 게 ‘얼레리 꼴레리’라니…. 그 말을 들으며 씁쓸하면서도 한국어도 모르는 자신을 기억 속에서 맴돌게 하는 유일한 모국어가 자신을 ‘놀리는 욕’이라는 생각에 어쩐지 욕도 경우에 따라선 사랑스런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며시 드는 것은 왜일까? 이런 욕! 영화에도 있다. 미워할 수 없는 욕. 이거 “빠가야로, 내 이름은 키쿠지로다”. <키쿠지로의 여름>(1999년,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란 영화의 마지막 대사. 기타노 다케시 특유의 썰렁함과 뭔가 아무렇게나 주물럭주물럭 만든 것 같아도 내공이 보이던 그 영화가 기억난다. 어벙한 50대 건달 아저씨와 어린 소년의 엄마 찾아 삼만리 같은 이야기. <키쿠지로의 여름>은 소년의 여름이 아니라 이 아저씨의 여름이라는 게 마지막 대사에서 알 수 있다. 참내… 헤어지기 전 이름을 물어보는 소년에게 냅다 바보라고 욕하긴…. 눈물나면서도 이 퉁명스러움이 사랑스럽다. 여기서도 기타노 다케시 최고의 욕이 나온다. 바로 ‘빠가야로’. 바보란 일본말이지만 어쩐지 기타노 영화에선 ‘빠가야로’만한 대사가 없는 듯하다. <키즈리턴>에서도 나오지 않는가. 툭 내던지듯 하는 그 말. “빠가야로, 우린 시작도 안 했잖아.” 살다가 욕 나오는 것 참거나 막으면 안 된다. 병난다. 쳇!김정영/ 영화제작소 청년 회원·프로듀서 sicksadworld@orgio.net

[인터뷰]<영매-산자와 죽은자의 화해>의 박기복 감독

"진도의 당나무를 붙잡고 신을 불렀지요" 박기복(38) 감독은 다큐멘터리나 독립영화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 다큐멘터리 제작사 푸른영상에 들어가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를 만든 것이 1994년이니 그의 감독 이력도 10년째를 맞는다. 지상파 방송사와 함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도 했고, 99년 <냅둬>로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에서 대상도 받았다. 그가 이제 처음으로 일반 관객과 만난다. 지난해 완성한 <영매(零媒)-산자와 죽은 자의 화해>가 9월 5일 마침내 개봉된다. "10년 꿈이 이뤄졌습니다. 95년 <낮은 목소리>(감독 변영주)를 극장에서 보면서 나도 내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반드시 극장에 걸겠다고 다짐했지요. 기록영화와 극영화는 서로 영향을 주면서 함께 가야 합니다. 미국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콜럼바인>이 던져준 감동을 우리도 줄 수 있도록 기회가 마련돼야지요." 그가 무당을 주목하기 시작한 꽤 오래 전의 일이다. 대학 전공으로 철학을 택한 것도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 성철 스님의 일상을 찍어볼 생각도 했으나 93년 입적하는 바람에 포기하기도 했다. 그는 2000년 초 민속박물관에서 무형문화재 씻김굿 보유자 김대례 씨의 기록영화를 보고 무당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큐멘터리를 찍겠다고 결심한 뒤 2000년 6월 진도에 내려가 사전작업에 들어갔다. "진도에 머문 것이 1년 정도 됩니다. 처음에 5명의 스태프가 꾸려졌으나 열흘이 멀다 하고 바뀌다보니 제가 모든 일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돈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상황에 치이다가 하루는 진도의 당나무를 붙잡고 신을 불렀지요. 그런데 정말 어느 순간 섬뜩한 기운이 내 정수리를 타고 엉덩이 뼈까지 내려오더라구요. 해남의 한 무당한테서는 '당신도 우리처럼 신기(神氣)가 장난이 아니요, 당신도 우리 밥 먹을 거인데…'라는 말까지 들었지요." <영매…>는 무당의 일상을 담는 다큐멘터리. 그러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굿판을 찍는 일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작두를 갈 때 부정한 소리가 나오지 않기 위해 흰 천을 입에 물기도 하는데 마이크를 달고 조명을 비추고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이 수월할 리 없었다. 제갓집(의뢰인)의 따가운 눈초리도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멀찌감치 떨어져 굿판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망원렌즈를 써서 찍지도 않았고요. 오랜 시간 대화를 하다보니 무당이 먼저 `왜 주저하느냐'고 묻더라구요. 무당이 마음을 여니 그를 믿는 제갓집의 시선도 누그러졌지요." 제작비는 1억5천만원 가량 들었는데 주변에서 공짜로 해준 후반작업 비용까지 합치면 2억원이 넘는다. 연세대 철학과 2년 선배인 조성우 M&F 사장이 기꺼이 제작자로 나섰고,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사전제작비와 배급비용을 지원받은 것도 큰 보탬이 됐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될 때는 해설을 모두 자막으로 처리했는데 극장 상영을 앞두고 톱스타 설경구의 내레이션으로 바꿨다. "영화를 만들고 난 뒤 어머니가 `철이 많이 들었다'고 그러세요. 얼마 전 딸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거든요. 돌아가시고 나면 사소한 일로 섭섭하게 해드린 것도 모두 한으로 남을 것 같아 될 수 있으면 어머니 말씀을 따르려고 합니다. 이 영화를 보신 분들도 가족에게 서로 상처를 주지 말자고 다짐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가 다음번에 하려고 마음먹고 있는 작품은 식물에 관한 다큐멘터리. 서정주의 시 `문 열어라 꽃아'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삼아 `죽은 나무 살리기' 전문가의 이야기를 엮어볼 생각이다. (서울=연합뉴스)

장인의 싹수가 자란다,<오늘이>

사람의 마음은 의외로 사소한 부분에서 움직인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관객이 완전히 넘어간 건 스스와타리의 먹이로 별사탕이 뿌려지면서부터였고, <날아라 슈퍼보드>의 전설적인 시청률을 이뤄낸 건 조연에 불과했던 사오정의 엇박자였다. 아귀가 좀 맞지 않아도, 어딘지 어색해도 그냥 마음을 주기로 작정하게 만드는 어떤 것. SicAF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성강 감독의 단편 <오늘이>는 그 ‘어떤 것’이 유기체처럼 살아 숨쉬는 작품이다. <마리이야기>를 끝낸 감독이 어느새인가 조용히 만들어낸 16분짜리 2D애니메이션에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다. 이 세상일지, 저 세상일지, 옛날인지, 요즘인지 모를, 아니 애초 구분도 필요없는 그런 곳이다. 궁중 병풍이나 자수에 등장할 법한 산과 바다 문양이 넘실대는 그곳에 작은 여자아이가 학과 여의주와 더불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사실 이곳은 계절의 향기와 바람이 시작되는 원천강. 거기 살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오늘이’가 도대체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평화롭게 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어른들이 몰려와 엄마처럼 품어주던 학 ‘야’를 죽이고 오늘이를 잡아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다. 우리 인생이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을 겪고, 마침내 자유로워진 오늘이는 그때부터 원천강을 찾아 이곳저곳을 다닌다. 도중에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싶어 책만 읽어대는 안경 소녀도 만나고, 자기 뿌리에서 겨우 한 송이 꽃만 피는 것이 슬퍼서 우는 연뿌리도 만난다. 그뿐 아니다. 머리 위에 비가 내리는 구름을 달고 다니는 소년, 여의주를 수없이 모아도 승천이 안 되는 이무기…. 모두 오늘이에게는 신기한 존재들이다. <오늘이>는 보는 순간부터 마음을 빼앗기는 작품이다. 먼저 아름다운 그림체. 전통적인 문양으로 구성된 산수와 색상은 압권이다. 박제되지 않은 생생한 색상과 화풍에서는 조선 후기 민화를, 이무기가 변한 용에서는 역시 민중의 자유로운 창작력이 생동하던 조선 후기 청화백자의 용 문양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보는 이를 한번에 사로잡는 <오늘이>의 매력은 이런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등장인물과 이야기 전개다. ‘전통과 현대의 절묘한 결합’ 하면 떠오르는 진중한 이미지의 선입견을 깨고, 등장인물의 행동거지는 가볍고 부담없다. 먼저 이들이 툭툭 내뱉는 대사가 살아 있다. 흐느끼는 연꽃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높은 톤으로 “넌 왜 그렇게 구시렁대는 거니?” 하는 오늘이의 생생한 대사를 들으면 박장대소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모든 이의 예상을 깨고 안경 소녀와 구름 소년이 러브러브한 관계로 발전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만만치 않은 저력을 느끼게 된다. 원일 음악감독의 음악은 또 어떤가! <오늘이>에서는 신비로움과 흥이 함께 느껴진다. 전통과 현대가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구나, 납득하게 된다. 무엇보다 <오늘이>는 감독의 익은 손이 그간 세상살이를 통해 일궈낸 지혜를 버무려서 빚어낸 작품이다. 자기를 버리는 순간 행복해진다는, 세상과의 조화를 말하고 있지만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빈틈없이 고안된 서사구조가 아니라 분청사기의 자유분방한 문양처럼 열린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보여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만든 사람이 노심초사하며 끝까지 지켜보지 않아도 저절로 자기 혼자 굴러가는 작품이다. 장인의 익은 손! 김일림/ 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illim@korea.com

<거울속으로>가 이미지로 설명하는 이승,저승,그리고 욕망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야" 명상을 통해 도달한, 어느 경지에 이르러 던지는 진리의 말씀 같은 이 대사는 영화 <거울속으로>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시각적 해석과 내용의 이해를 돕는 결정적인 열쇠말이다. 이 말은 또한 약 500년 된 회화사에서 영원한 화두처럼 사용되면서 때로는 사실보다 더 사실답게(간혹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도록) 그림이라는 형식으로 붙잡아두는 역사를 만들게 했다. 친절하게도 영화는 이런 회화와 이 영화의 핵심적 대사의 친밀성을 강조하기 위해 한컷에서 재빠른 속도로 몇 회화작품들을 도판으로 넘겨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영화에서는 우영민(유지태)이 사건(?)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구하는 단서로서 얀 반 아이크의 회화작품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소품으로. 회화작품에 대한 집착 같은 것은, 아마도 직업병 같은 것인데, “어 저 그림은 그 내용과 관계가 없는데”라든지 “어떻게 저 그림을 알았을까?” 하는 잘난 체까지 포함해서 소품으로 등장하지만 영화의 속내용을 그림이 간섭하여 전개되는 것은 관계자(?)에게는 좀더 흥미있게 영화를 바라보게 만든다. 사실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의 회화사적 해석은 영화에서 다루는 ‘아!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이곳에 있었군!’ 하는 것과 사뭇 다르긴 해도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보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만지는 것까지 몸이 체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이 경험하지 못한 바깥의 존재가 또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마련이다. 그래서 내 몸이 미처 알지 못하는 미지의 어떤 존재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경외심을 가지고 산다. 우리는 누구의 말씀 이전에 보이는 것이 ‘다-존재’의 끝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영화를 단 한번만 보고 장면을 기억해내며 사설을 달기란 말같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난 뒤 세개의 장면은 마치 그림을 보고 난 뒤의 잔상처럼 여러 가지 말을 달면서 몸에 붙어버렸다. 감독이 원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이 기억되는 장면들은 결국 내게 <거울속으로>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하나는 영화 들머리에 해당되는데, 매장에서 쓸데없는 물욕을 부려 피자 커터기를 슬쩍한 여직원이 화장실에서 목을 쓱 그어가며 죽게 되는 일련의 연속적인 장면들이다. 두 번째는 우영민이 어찌어찌하여 쌍둥이 동생 집을 무단침입하여 커튼을 들추어내면서 짠하고 드러나는 ‘거울의 방’ 장면이다. 이 방이 주는 느낌은 분명 영화라기보다 어느 설치미술가의 작품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래서 머릿속의 고장난 태엽장치가 작동하는 바람에 이지현-이정현의 방은 마치 루이 14세가 만용을 부려 만들어놓았다는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과 겹쳐지면서 영화의 흐름을 놓치고 미술사의 한 장면을 읽어내도록 만들었다. 세 번째는 영화 마지막 장면이다. 우영민이 죽었다는 암시를 세심하게, 꼼꼼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이미지로 설명하는 긴 연속 장면들인데 갑자기 거울이 아니라 유리 속에 갇혀버린 우영민의 제일 마지막, 끝장면의 우아한 색감이 주는 몽상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감독에게 불만을 가질 뻔했다. 이미지의 아름다움 화장실에서 죽어가는 여직원을 보여주면서 그리고 첫 장면에서 이 영화가 설정한 사건의 공간이 그녀가 슬쩍한 하찮은 물건과 꽤 값어치를 하는 유행상품까지 아우르면서, 현대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백화점을 염두에 둔 것은 우리가 가지는 근원적 공포의 실체를 보여주는 데 적절하다고 찬성하게 되었다. 거울에 반사되는 내 모습이 가지는 근원적 공포란 사실 “내가 더이상 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생각인지” 탄식했던 어느 소설 속 주인공의 독백처럼 긍극적으로 소유에 대한 욕망의 흔들리는 좌표가 일으키는 불안이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정현이 결국 소유에 대한 욕망의 희생물이었고 또 다른 욕망의 희생물로서 그녀가 선택한 희생자들과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을 보고는(다 보고 나서 다시 재구성하며) 나의 이 탁월한 ‘노가리’가 가지는 억지가 왠지 더 마음에 들었다. 감독의 의지와 관계없이 말이다. 첫 희생자로 등장하는 여직원의 화장실 장면에서 거울 속의 또 다른 존재가 드러나는 그 한컷은 시각적으로 빛의 음영을 이용하여 드라마틱한 연출을 강조했던 카라밧지오의 회화작품을 떠올리게 했는데, 이 시각적 즐거움은 최소한 나에게 줄곧 이 영화의 미덕이었다. 여직원이 갑자기- 스르르- 이유를 알 수 없이 직원 패찰을 떨어뜨려 몸을 숙일 때, 거울 속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또 다른 바로 그녀의 모습은 찰나를 정지시켜놓으면 훌륭한 하나의 회화작품처럼 보였다. 깊은 공간감을 가진 거울 속에서 그녀의 눈과 눈빛 그리고 하얀 셔츠는 명도에 의해 흐물거리며 앞으로 튀어나와 실재감을 주어 잠시 살아 있는 다른 그녀보다 더 사실적인 존재감으로 부각되어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목에 피자 커터기를 그어대는 동안에도, 거울을 따라하는 그 모순의 순간에도, 나는 그녀가 거울 속의 그녀보다 약화된, 가벼워진 존재라고 혼자 믿어버리는 혼돈을 즐기고 있었다. 영화가 그걸 원했던 걸까? 이미지의 반란은 사실 이 장면의 모순관계에서 시작된다. 모든 상업광고가 이미지를 통해 호도하며 매진하는 결과란 이 장면처럼 우리가 믿어 의심하지 않으려는 시각적 결과에 대한 혼란이다. 그 사이에 어쩌고 저쩌고 하는 메시지를 살짝 덧입히는 것인데, 그 내용이란 늘 현실적 욕망의 현실적 부재를 이미지가 위로한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 여직원의 욕망은 이 장면 앞에서 우리가 훔쳐보았기 때문에 그녀의 죽음에 대해 그다지 놀라게 되지 않는다. 그리고 유지태가 커튼을 들추어보게 되는 거울의 방은 나를 도취되게 만들었다. 사실 거울을 그렇게나 많이 벽에 달고 산다면 다음 다음 장면에 같은 방을 보면서 형사가 던진 대사처럼 ‘미친 사람의 짓거리’로 단박에 판단하겠지만,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 같은 방을, 미술가의 상상력을 탐험하기 시작할 거다. 늘 그랬듯이. 이 장면에서도 잘 만들어진, 완성도 있는 작품을 대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디테일이 강조된 텍스타일의 붉은색 벽지 위에 채도 낮은 다양한 색감들의 크고 작은 여러 크기를 가진 액자 속 거울들이 방 하나 가득 있어 거울에 비추어진 사물의 경계를 지워내고 거울 그 자체만 유일한 하나의 사물이 되어버린 밀도 높은 공간의 아름다움이 그 장면에 가득 배어 있었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 거울들이 가지는 회화적 상상력과 관계없이 시간과 사건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나는 <아르놀피니의 결혼식> 작품 도판이 회화적 해석과 관계없이 영화적 소품으로 생명력을 가지듯이 이 장면은 영화와 관계없이 완결된 미술작품으로 생명력을 가진 채 기억되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야”라는 결정적 대사처럼 이 장면은 눈에 보이는 것 ‘다’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다’가 하나로 통합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속성상 시간의 개입으로 인해 장르적 설명이 쓸데없이 장황설이 될 때가 있다. 그러나 미술작품에서 시간의 개입이란 보는 이의 입장일 뿐이어서 작가의 입장에서는 굳이 긴 사설을 붙여 작품을 설명적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따라서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개입이 영화보다 훨씬 크게 작용하기도 한다. 이 거울의 방은 보이는 모든 거울이 실체이며 존재이고 그 거울에 비추어지는 또는 비추어질 모든 사물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반영일 뿐이어서 이미 실체가 아니다. 그러나 함께 존재한다. 하나의 공간에서. 이지현은 그 많은 거울 속에 제 언니 이정현이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존재의 부재감이자 반영된(쌍둥이니까) 실체의 허상이며 사물의 존재 앞에서 왜소해지는 인간의 존재적 상실감이기도 하다. 그녀는 언니를 더이상 소유할 수 없다는, 욕망의 좌표가 상실된 지점에서 이 영화에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거울의 방은 이지현이 상실한 좌표를 시각적으로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니, 이 생각은 영화가 끝나면서 갑자기 그렇게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글을 쓰면서 더 그렇게 확신하게 됐다). 또 하나, 짓궂은 상상력이기도 한데, 거울의 방이 부르주아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는 억측이다. 베르사유 궁전의 낙성이 있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궁전의 ‘거울의 방‘을 보면서 실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금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비싼 거울들을 그렇게 많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과 경제력에 대한 경외심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곤 수많은 촛불이 그 많은 거울에 반사되어 너울거리는 환락의 밤을 영원히 잊지 못했을 터이다. 지금 그곳을 가보면,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 당시 그들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이타성을 보면서 계급에 대한 만족을 만끽했을 것이다. 반사되는 모든 것이 자신의 계급적 정체성을 고스란히 반영했을 것이니까. 아직도 거울을 통한 이타성의 확인과 그로 인한 자신의 정체성을 즐기는 습관은 남아 있어 개업축하, 인사차 전해주는 선물에 유려한(?) 글씨를 새겨넣어 보내는 대형 거울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왜 이 쓸데없는 생각이 영화 속 이지현의 방을 보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을까? 유리/거울/진열장 이지현과 이정현이 부엌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 사진 밖을 바라보며 함께 찍힌 사진이 몇번 반복해서 나온다. 영화 말미에 가서, 병실에서 우영민이 이지현인지 이정현인지 모를 바로 그녀에게 이 사진을 보여줄 때 그녀들의 위치가 바뀌어 있다. 나는 솔직히 옥의 티를 잡아낸 줄 알고는, 전화해주어야지 했다. 그러나 이건 이런저런 단서들을 촘촘하게 배열하며 결국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친절하게 이미지로 설명하고 있었던 거다. 거울의 속성을 매개로. 관객보다 더 놀라고 더 의아해하는 우영민은 극중에서 그 혼돈을 감추지 않는데, 사실 그에게는 존재의 부재감을 느낄 만한 어떤 이유가 영화 내내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총에 죽어간 동료 경찰 때문에 힘들었을 뿐이다. 그것도 악령이 되어 그를 괴롭힌 것도 아니고 자신의 죄책감으로. 그런데 갑자기 그런 우영민이 거울의 안팎 그 사이에 끼어 존재에 대한 괴로움을 보여준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이정현이 되려고 한 것일까? 하여튼 우영민은 거리를 바삐 활보하는 사람들을 거울이 아닌 유리(진열장)에 갇혀 거울(진열장 유리) 밖으로 손을 더듬으며 뻗쳐보려 한다. 우아한 황금색조의 공간 안에서. 이 장면들은 소유의 욕망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현대인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감독의 의도와 관계없이 나는 그렇게 보이고 그래서 영화가 더 좋아졌다). 아마도 그래서 유지태는 진열장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감독은 이 삶의 총체성마저 소유의 욕망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우리의 삶을 희롱하며 한편으로 위무하기 위해 몽환적인 황금색조로 마지막 장면을 수놓듯 아름답게 꾸미기를 결정했는지 모른다. 거울 속에서는 원래 그런가?

행복한 개인을 목표로 삼는 <바람난 가족>

가정에 개인주의를 허하다 이 영화는 세태고발극이 아니다. 따라서 “현실을 얼마나 그대로 재현하였는가”를 기준으로 어설픈 리얼리즘-전형성 논쟁을 펼치는 것은 소모적이다. 그보다는 영화가 던지는 문제의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얼마나 유효적절한지를 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곱씹는 것은 사실 불편하다. 그러나 “몰랐을 때가 더 행복했던 것 같다”는 아들에게 호정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게 사실이니까, 너만 모르는 것은 불공평하니까.” “입에도 담지 못할 음탕한 소리”를 하리라는 말에,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이 바로 따라붙을 만큼, 이 영화 안에는 성과 정치가 공존한다. 50년간 밀봉되었던 유골을 헤집는 심정으로 가부장제의 유재(遺財)를 까발리는 이 영화의 몸틀은 성정치학적 이슈로 가득 차 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 이후 이렇게 야하면서도 웃기고, 대단히 정치적인 영화가 또 있었던가? 그런데 이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바람난 가족>은 가족의 본질을 규명하며, 이제 가족윤리를 넘어 새로운 개인윤리를 정립해야함을 역설하고 있다. 가족주의와 개인주의 여기 한 사내가 있다. 월급 65만원을 받아 아내와 두 아이, 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진다. 그의 자랑은 “처남”이며, 절박한 사정을 하러 “온 가족”이 우르르 몰려다닌다. 복수를 위해 상대의 “아들”을 죽이고, “엄니…”를 부르며 울부짖는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사죄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이다. 그는 ‘그’이기 이전에 ‘그의 가족’이다. 그가 온전히 개인이었던 순간은 “대학노트 세권에 달하는” 유서를 쓰고 투신하였을 때뿐이었으리라. 여기 또 하나의 가족이 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누가 누구에게 생계를 걸고 있진 않아 보인다. 그들은 말한다. “남의 인생 참견말고, 남의 탓 할 것 없이, 각자 인생 똑바로 살자.” 그들은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을 위해주며” 산다. 남이야 뭐라든 시아버지는 죽기 직전까지 술 담배 끊지 않고, 시어머니는 15년 만에 새 파트너와 섹스를 하며, 남편은 “별 문제될 것 없이” 다른 여자 좀 만난다. 아내 역시 그녀가 원하는 것을 하고 산다(그녀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남편일 필요는 없다). 이들은 한 덩어리로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사안에 따라 ‘따로 또 같이’ 연접하는 독립된 개인들이다. 여기 양극단의 축을 이루는 두 가족이 공존하다, 마침내 기이하게 충돌한다. 길바닥에 늘어진 죽은 개 마냥, 피할 수 없이 직면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며, 상대의 약점을 틀어쥐고선 관대한 척 매끄럽게 빠져나가던 “신원 확실하신” 그가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의 승강이 끝에, 50년 유서 깊은 구덩이에 빠지듯 가부장제라는 허당을 짚고 실족한다. 가족은 무엇으로 구성, 운위되는가? 영작의 할아버지는 처와 딸 여섯을 두고, 아들만 데리고 월남하였으나 이후 그들은 생사조차 모르고 산다. 가부장제의 핵심 요소인 父-子만 추려왔건만 왜 그들은 가족을 이루지 못했을까? 父-子는 가부장제의 핵심이긴 하지만, 가족의 핵심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남녀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성차를 보여줌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족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다. 그녀에겐 있으나 그에게는 없는 것이 있다. 첫째, 자족감이다. 그녀는 자전거를 타고 질주한다. 고양이처럼 알몸으로 카펫을 뒹굴며 자기 몸의 충만감을 즐긴다. 남편 옆에서 자위를 할 만큼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그녀는 자신의 성욕을 중시하지만, 그것을 남편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며, 반드시 타자를 지향하지도 않는다. 영작은 항시 타자를 욕망하고 필요로 한다. 그는 애인에게 “쿨한 척하지만 진짜 외롭죠?” 소릴 듣는다. 아버지의 임종에서도 “간호사년의 치마를 벗기는” 상상을 하고, 할아버지의 죽음을 안 날, 룸살롱 소파에서 바지가 벗겨진 채 눈을 뜬다. 아들이 죽고 나자 애인에게 “내 안의 무언가를 쏟아내고 싶어 미치겠다”고 애걸하고, 애인에게 쫓겨나자 비서를 찾는다. 그에겐 자기 충만감이 없다. 호정의 자족감은 그를 열패감에 빠뜨린다. 그의 실존적 열등감은 아들이 죽자 도덕적 열등감과 결부되어 유치하게 폭발한다. 그가 호정을 때리면서 했던 말은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니?… 내가 용서가 안 되지?”였다. 그가 “자기 생각하며 자위했다”고 말하는 애인, 나아가 더 만만한 비서를 찾는 것은 (유전적 성향일 수도 있지만) 호정에게 느끼는 열등감의 발로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그의 마지막 발 동작 역시 이미 <피아니스트>에서 보았듯, 개망신당한 남자의 무안 수습용 오버 제스처에 불과하다). 남자(들)는 자족하지 못하므로, 욕망이 밖을 향해 발산될 뿐,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둘째, 친밀감이다. 그녀는 시아버지 원대로 술을 사드리고, 토한 피를 닦아준다. 그녀는 병실에서 남편을 다독인다. 시어머니의 새로운 인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듣고 지지하며, 아들에게는 진심이 통하는 엄마였다. 영작은 아비의 몸을 닦다가도 아비의 허세에 짜증을 내며, 피를 토하자 “호정아!”를 찾는다. 어머니 이야기가 듣기 싫어 이불을 파고든다. 거짓말하는 그는 아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다. 그는 성적 관계가 아닌 사적 친밀감을 나누는 관계에 무력하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사적 친밀감은 가족을 운위하는 핵심요소이다. 영화에서 보듯이 남자는 친화력이 떨어지며, 친밀감의 담지자는 여자이다(애인 왈, “남자는 나이든 유부남이라도 미성숙하다” 인정?) 셋째, 재생산 능력이다. 부부는 불임이었으나, 둘 다 다른 상대와 임신이 가능했다. 호정의 아이는 태어나 호정과 가족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영작의 아이는 제거되고 만다. 왜? 남자는 여자의 몸을 통해서만 아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생물학적 재생산의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고, 남자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셈인데, 생산수단은 항구적이고, 노동력은 일회적이다(생산수단을 가진 여자를 남자가 전유할 때만이 남자의 욕망과 의지대로 재생산이 가능하다. 여자를 전유하기 위한 인위적 장치가 바로 노동시장에서의 축출을 통한 경제적 박탈과 가부장 이데올로기이다). 이렇듯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가족의 물적 토대를 이루는 핵심은 여자에게 있다. 영화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가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이 가족을 통해, 성인남성 취업노동에 전 가족의 생계가 달린 자본주의적 압박과 가족주의의 이름을 단 가부장-이데올로기가 소거된 상태에서, 여전히 가족을 구성하고 운위시키는 본질이 무엇일지 보여준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성인남성 노동의 세가 약화되고, 호주제 폐지 등 가부장-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이 점차 줄어드는 시점에서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관계가 아닌 새롭게 재편되는 가족관계를 상상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호정과 아들의 관계에서 보듯이 생물학적 토대를 차치하고서라도 가족 내부의 친화력은 여자에 의해 담지됨을 알 수 있고, 이를 통해 ‘여성이 중심이 되어 친밀감을 교류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그려볼 수 있다. 문제는 개인윤리이다 호정은 기존의 바람녀들과 다르다. 최악의 캐릭터인 <밀애>의 ‘미흔’과 비교해보자. 그녀는 혼전에도 남편밖에 몰랐고, 남편의 외도를 알고 하늘이 무너진다. 옆집 남자에게 찍혀서 순전한 성관계를 시작하고, 들키자 변명 지껄이다 찍소리 못하고 두들겨맞는다. 빈 몸뚱이로 쫓겨나, 아이마저 포기하고 질질 운다. 남편에게 그랬듯이 새 남자를 철석 같이 믿다가 혼자가 되자 그를 ‘특별히’ 그리워한다. 호정은 다르다. 혼전에 놀 만큼 놀아봤으며, 남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바람 피운다고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일과 취미를 즐기며, 아들과 시부모에게 자기희생이 아닌, 친밀감과 신뢰감을 교환한다. 그녀는 훔쳐보는 옆집 고딩에게 따라가서 먼저 말을 건다. 그와 다짜고짜 성관계만 가진 것도 아니다. 아무도 안 보는 괴로운 고딩영화 <눈물>을 같이 보고, “술 마시고 개길 수 없는” 곳에 서서 고기 먹고, 밤 등산가서 야경보고, 책과 영화 이야기를 하며, 그의 성적 호기심에 응해주는 등 사랑을 했다기보다 우정을 나눈 셈이다. 그는 그녀가 믿고 따를 일종의 ‘아버지’가 결코 아니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제 와서 비열하게 그런 말 할 수 있냐?”며 ‘적반하장론’을 펴고, 시아버지 유품인 피아노 하나만 덜렁 남기고, 짐 챙겨서 집 나와 남편과 무관하게 아이를 낳고 살 것이다(혹자는 그녀가 만만한 고딩과 사귀므로, 섹시한 의사를 사귄 ‘미흔’처럼 제대로 바람이 난 것이 아니라고 하였는데, 그거야말로 남자의 시각이다. 상대가 남편이 보기에 그럴듯한 놈인지 아닌지는 남편의 시기심과 관계가 있지, 그녀의 해방과는 무관하다. ‘남편->애인’으로 의존상대를 바꾸는 것은 해방이 아니다). 호정이 지금까지의 불륜영화 속의 여성캐릭터와 다른 점은 남편과 남자를 자신의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구원자로 생각하지 않기에 그녀는 단죄되지도 처벌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이 영화 속 여러 인물들에 의해 돌림노래처럼 말해지던 “내 몸 원하는 대로 내 몸 위해주며 살기”, “몸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내 인생 내가 책임지기”, “인생 맨 정신으로 살기”, “내 인생이나 똑바로 살기” 등의 정언 명제들을 상당히 체현한 듯 보인다. 이 영화는 가족의 본질을 보여주며, 나아가 ‘화목한 가정’을 목표로 삼는 외재적 가족윤리에서, ‘행복한 개인’을 목표로 삼는 내재적 개인윤리로, 윤리의 단위가 바뀌어져야 함을 제안한다. 진짜 어떻게 살아야 ‘내가’ 행복해질 것인가? 연애가 답이면 연애를 하고, 가정이 답이면 가정을 꾸려라. 그러나 남에게 “재수없게 연설”하지 말고, “네 아버지 탓”도 하지말고, 오지말라는 애인에게 “내가 미쳤었나보다”며 우격다짐으로 들이밀지도 말고, “내 인생 내가 책임지며, 맨 정신으로, 솔직하게 사는 것”이 “이제 짐승의 시간은 관두고, 사람답게 사는” 최소한의 개인윤리이지 않겠냐고 감독은 ‘바람’을 빌려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대답은? 야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