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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그 속에 다른 세상이 있었다

1981년 5월의 어느 날. 나는 고등학생 주제에 뻔뻔하게 생맥줏집에서 프라이드 치킨을 앞에 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내 앞에는 점심시간에 피아노 레슨실로 숨어들어 나를 위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월광>의 세 번째 악장을 헤비메탈처럼 연주를 해 나를 숨넘어가게 만든 친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하운드 독>을 부르며 엘비스의 성적 자극이 넘쳐나는 춤을 춰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고, 자기 집으로 데려가서는 당시 소장한 것만으로도 국가보안법에 걸렸을 소련 멜로디아 레이블에서 나온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독주곡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을 찬양한 노래라며 들려주었다. 그는 딥 퍼플, 블랙 사바스 같은 하드록에 빠져 있던 나에게 음악의 바다가 얼마나 넓고 매력적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친구였다. 그는 들라크루아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를 보여주며 쇼팽의 불안과 히스테리를 이렇게 잘 표현한 그림은 없다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과는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종류의 이야기가 장래에 피아니스트가 되려는 친구의 입에서 나왔다. 그는, 자신의 손이 너무 작아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되기는 틀린 몸이라고 짐짓 어른처럼 말을 해서 나를 홀딱 반하게 만들었고, 나의 그림이 너무 어두워 친구들 중 내 그림을 제일 좋아한다고 해서 뭘 그려도 어둡기만 해서 콤플렉스였던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이 대단한 친구를 앞에 두고 맛있는 생맥주와 프라이드 치킨을 먹던 나는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술집의 냉장고 위 선반에 놓인 텔레비전에서 만화영화 한편이 방영되고 있었다. 컬러였다. 이전 해 겨울, 방송사에서는 컬러로 방송을 시작했지만 우리집에는 아직 컬러 텔레비전이 없었기에 처음 보는 컬러 방송이었다. 동생들이 컬러 텔레비전을 사자고 어머니에게 졸라대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별 관심이 없었던 나에게 술집의 컬러 텔레비전에서 방영되고 있는 만화영화에서 뿜어내는 색깔이 너무나 아름다워 내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친구의 목소리가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화면에서 소년과 아기 표범이 해변을 달리고 그들 뒤로 코발트색 바다와 물비늘이 반짝였다. 소년의 기쁨이 넘쳐나자 화면은 바로 정지되고, 죽죽 내리그은 힘찬 펜 선으로 그린 채색화로 그림이 바뀌었다. 만화영화 속에 한장의 그림이 있었다. 만화영화는 항상 움직여야 했다. 달랑 한장의 그림을 그려놓고 움직이는 척 꼼수를 부리며 시간을 때우거나 앞에서 한번 쓴 장면을 또다시 사용하는 한국 만화영화를 보고 투덜거린 기억이 있는 나는 움직이지 않는 그림을 당당하고 멋지게 사용하는 만화영화에 입이 벌어졌다. 게다가 화면은 온통 울트라마린, 프러시안 블루, 코발트블루, 아름다운 블루의 향연이었다. 게다가 추악한 해적, 음흉한 배신자 외다리 실버가 너무나 멋지게 그려져 있어서 더욱 놀라웠다. 만화영화의 제목은 <보물섬>이었다. 방영이 끝나고 나서야 친구의 말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친구는 자신의 말보다 만화영화에 정신이 팔린 나에게 삐치고 말았다. 누구도, 무엇도 말해주지 않던 시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집은 괴상한 동네로 이사를 했다. 그 동네에는 헌책방도, 만홧가게도, 튀김집도, 시장도, 술집도, 극장도 없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없었고, 도로에는 노선버스 몇대와 승용차들이 드문드문 다니고 있었다. 죽은 개가 떠내려 오는 개천도 없었고, 간밤에 술에 취해 굴뚝을 부여잡고 얼어죽은 술주정뱅이를 보았던 좁은 골목길도 없었다. 앙상한 어린 나무에 각목으로 보호대를 만들어놓은 가로수가 띄엄띄엄 있었고, 누런 먼지가 날리는 공터와 비닐하우스, 그리고 아파트밖에는 없었다. 하루가 지나면 공터였던 땅은 파헤쳐져 공사장이 되었고, 어느 날인가 보면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시끌벅적한 번화가였던 신촌과 홍대 앞을 쏘다니던 나에게 그곳은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괴상한 동네였다. 그런 곳에서 살면서 고등학생이 된 나는 헌책방도 만홧가게도 가지 않았고,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친구들과 어울려서 보거나 여자친구와 보았다. <소권> 같은 <취권> 짝퉁 영화를 보러 갈 때에만 혼자였는데 그 이유는 아무도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세상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늦가을의 아침. 등교하는 버스 안에서 대통령의 죽음을 알리는 뉴스를 들은 이후, 대기업에 취직해 가문의 영광이 된 삼촌은 자주 우리집에 와서 어머니에게 중요한 부분이 검열에 걸려 찢어지지 않은 <타임>과 <뉴스위크>를 어머니의 직장을 통해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고, 80년 5월에는 더욱 심하게 어머니를 보챘다. 어른들도 고등학생인 나만큼이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해 봄날, 텔레비전에서는 서울역 앞 도로를 가득 메운 시위대를 매일 보여주었다. 어느 날인가는 하굣길에 한남 교차로 앞에서 버스가 멈춰선 채 갈 줄을 몰랐다. 도로에는 탱크가 서 있었고, 하얀 완장을 차고 총을 멘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길을 막고 있었다. 한참을 도로 위에 서 있던 버스는 멀리 이태원 길로 돌아서 잠수교를 건너 나를 집 앞에 내려주었다. 그해 봄날의 늦은 밤, 창밖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깬 나는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그것은 내가 보면 안 될 것이란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달빛과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철모와 탱크. 통행금지여서 고양이 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고요한 도로에 열을 맞춰 어디론가 이동하는 군인들이었다. 탱크의 캐터필러 굴러가는 소리와 군화 소리가 음산한 저음으로 낮게 울렸다. 너무 놀라 창문을 닫고 얼굴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 비슷한 시기, 비가 내리는 어느 하굣길에 버스는 성수동을 지나 성동교 앞 사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성수동 공장지대쪽에서 스크럼을 짠 내 나이 또래의 어린 여공들이 비를 맞으며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 뒤에 바짝 따라붙은 그녀들의 머리카락과 푸른 작업복은 비에 젖어 있었다. 그녀들의 볼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젖은 머리카락과 옷에서는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버스 안의 어른들은 혀를 차며 그녀들을 욕했지만, 나는 비슷한 나이 또래인 주제에 편하게 공부하고 버스를 타고 있는 것이 미안해서 그녀들을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사이 그녀들은 버스의 속도에 밀려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학교 밖에서는 수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어른들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5월 중순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농구대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며 하찮은 농담을 하던 우리의 이야기가 텔레비전에서 본 광주의 폭동에 대해 옮겨갔다. 누군가는 폭동자 중에는 북한 간첩들이 있다고 했고, 또 누군가는 전쟁이 일어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욕했다. 그때 한 친구가 우리를 향해 아주 심각한 얼굴로 “씨발. 광주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라고 말했다. 그는 평소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고 학교 밖의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는 다른 세계의 학생이었다. 그는 폭동이 아니라고 했다. 종종 가장 믿음이 안 가는 자의 입에서 진상이 밝혀지는 순간이 있다. 그의 말은 우리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우연찮게 우리 옆에 서 있던 국사 선생님은 진상을 알려달라는 우리의 눈길을 피하고는, 친구에게 “허! 그 자식” 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교무실쪽으로 가버렸다. 그때 우리는 친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모두 모른 척하거나 무서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 시간 광주에서 우리 또래 소년들은 교련복을 입고 총을 들고 있었다. 어른 중 누구도 우리에게 광주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를 윽박지르는 어른이 대부분이었고 그중 그나마 괜찮았던 어른은 우리가 물어보면 우리의 시선을 외면하거나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이 흘러갔다. 집에 일찍 돌아오는 날이면 어느새 우리집에도 놓이게 된 컬러 텔레비전 앞에 앉아 <보물섬>을 보았다. 자신이 믿었던 세상에 배신당한 짐을 보며 감정이입을 했는지도 모른다. “실버, 나를 기억하나요?” 70년대 말 일본에서는 만화영화란 단어가 사라지고 ‘아니메’란 단어가 새롭게 태어났다. 아니메 전문 잡지가 생겼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그들은 그렇게 이름지었다. 90년대, 내 동생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나오자 열광했고, 나의 동참을 원했다. 내가 시큰둥해하자 영화를 볼 줄 모르는 놈으로 치부하고 다시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도미노 유시요키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도 훌륭하고 <아키라>도 훌륭했지만 나는 데자키 오사무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을 더 좋아했다. 고등학생 때 수업을 땡땡이치고 숨어든 미술실 안에는 이미 먼저 자리잡은 땡땡이 일당이 있었다. 중학생 소녀들이었다. 그녀들은 두편의 만화책을 돌려가며 읽고 있었는데, 만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나는 중학생 소녀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같이 땡땡이친 고등학생 오빠라는 연대감을 호소하며 그녀들이 보는 만화를 한구석에서 빌려보는 은혜를 입었다. <올훼스의 창>과 <들장미 소녀 캔디>였다. 그때 보았던 만화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소녀만화였던 나는 <에이스를 노려라> 애니메이션을 보고 놀랐다. ‘70년대 중반 가지와라 잇키가 유행시킨 터무니없는 소년 근성물이 소녀만화에까지 영향을 미쳐 아름다운 소녀만화의 세계를 오염시킨 것 아냐?’ 하면서 보다가 ‘데자키 오사무는 격렬하게 움직이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그리고 싶어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사람이군!’ 했다. 소년만화와는 다르게 은하수가 흐르는 눈동자를 가진 길쭉길쭉한 여자와 남자들이 테니스 코트에서 기다란 팔과 다리를 격렬하게 움직인다. 중요한 시합을 위해 주인공 오카 히로미가 테니스 코트에 들어선다. 그녀의 테니스화가 코트의 흙을 밟는다. 짧은 순간 푹신한 흙의 감촉이 테니스화의 바닥을 통해 전해진다. 그렇게 테니스의 세계로부터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고 테니스를 하기 정말 잘했다고 코트의 흙이 주인공을 반기는 것 같다. 소년들의 근성 스포츠만화와는 다른 감수성의 세계였다. 데자키 오사무는 원작 만화에서 모두가 다 대단하다고 알고 있는 것들 중에서 자신만이 주목한 것에 좀더 포커스를 맞춰 데자키 오사무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다. <보물섬>은 어떤가? 짐과 실버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을 보자. 소설에서는 실버를 두려움에 떠는 외다리 해적이라 확신한 짐이 실버의 술집으로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술집 안에는 해적 검둥개가 있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 커다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외다리 사나이가 등장한다. 실버다. 그는 검둥개가 짐을 보고 도망치자 술값을 떼어먹고 도망치는 놈이 있다고 소리를 지르며 외다리로 그를 쫓다 포기하고 만다. 술값을 안 낸 비열한 녀석이라며 검둥개를 욕하는 실버를 보며 짐의 의심이 서서히 녹아내린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술값을 떼어먹고 도망치는 놈을 못 잡은 한심한 외다리이며 자신은 늙어빠진 바다표범이 되었다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릴 때, 짐도 실버를 따라 같이 커다랗게 웃는 것으로서 짐이 의심을 거두고 실버에게 호의를 갖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데자키의 애니메이션에서 둘의 만남은 한층 격렬하다. 의심을 하는 짐은 실버의 술집으로 순순히 들어가지 않고 골목에서 감시한다. 그때 해적 검둥개가 실버의 술집으로 들어간다. 짐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한다.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던 것. 실버를 해적이라 확신하는 짐의 등 뒤로 포도에 나무막대기가 부딪치는 일정한 소리가 난다. 짐이 뒤돌아보면 엉덩이 아래부터 몽땅 사라져버린 외다리 사나이가 서 있다. 실버다. 실버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칼을 든 검둥개와 추격전을 펼친다. 실버의 주먹도 대단하지만 검둥개의 칼솜씨도 만만찮다. 검둥개의 칼날을 막아내다 실버의 지팡이가 부러지고, 검둥개는 도망친다. 실버는 자신에게 한방 먹인 놈을 끝까지 외다리로 껑충껑충 뛰어 쫓아간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짐의 의심은 사라진다. 게다가 지쳐 쓰러진 실버가 어린 짐에게 손을 내밀어 부축을 해달라고 하고, 술집까지 짐은 실버의 지팡이가 되어준다. 짐은 거대한 몸의 사내를 부축하고 땀을 줄줄 흘리며 술집을 향해 간다. 짐은 자신의 손이 그의 등에 닿았을 때의 따뜻한 감촉을 마음에 새긴다. 짐은 그런 따뜻한 등을 가진 사나이는 악당이 아니라고 믿는다. 실버가 우정의 표시로 술을 권하자 짐은 냉큼 받아 마시고는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린다. 짐은 절대로 죽은 아버지를 대신할 아버지를 얻은 것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의 친구를 얻은 것이다. 짐은 나의 실버를 사귄 것이다. 소설에는 없는 애니메이션 <보물섬>의 라스트. 스무살 청년이 된 짐이 어느 항구의 술집을 찾는다. 그는 이제 믿음직한 뱃사람이다. 술집 한구석이 떠들썩하다. 그곳에는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중년의 실버가 술내기로 팔씨름을 하고 있다. 한눈에 실버를 알아본 짐은 실버에게 팔씨름을 청한다. 짐도 훌륭하지만 아직도 실버에게는 안 된다. 내기에 진 짐이 술 한잔을 사고 그 술을 맛있게 들이켠 실버가 몸을 돌려 술집 출입문 앞에 선다. 짐이 소리친다. “실버, 나를 기억하나요? 짐입니다.” 실버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지막이 웅얼거린다. “과거 이야기 하지 마라. 방금 마신 술맛 떨어진다.” 그러고는 술집을 훌쩍 나가버린다. 짐을 슬쩍 바라보며 웅얼거릴 때 실버의 얼굴은 명연기였다. 자신의 악행을 포함한 온갖 회한과 반가움. 그리고 비웃음. 그것이 실버의 얼굴에 녹아 있다. 데자키 오사무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내일의 죠>도 대단하다. 데즈카 오사무의 무시 프로덕션 저예산과 살인적인 마감 일정 때문에 만들어낸 궁여지책이었던, 정지 화면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려 하던 얕은 수작을 그는 대담하게 적극적으로 활용해 애니메이션의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고 인물들의 감정까지 극대화한다. 저예산 프로덕션 출신의 위대한 승리였다. 90년대 말. 그의 야심작 <백경전설>이 을 통해 방영되었다. 당시 불법 위성 안테나로 1회부터 보았던 나는 흥분하고 말았다. 실버가 에이허브로 출연하여, 우주 속을 떠도는 거대한 악마 모비딕을 쫓는다. 에이허브는 수배 중인 우주 해적이고, 뭔가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안드로이드 듀오가 모비딕 추격의 일원이 된다. 이 장대한 드라마는 회를 거듭할수록 초라해졌다. 인기가 없어서였는지, 초반부의 암울한 우주의 풍경은 사라지고 온갖 성희롱이 난무하는 저질 개그로 한회, 한회 근근이 이어져가다가 26회에 서둘러 종영하고 말았다. <아키라>와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안노 히데아키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세상에서 포악하고 비열한 악당 사나이들을 멋있게 그리려 했던 그의 <백경전설>은 시대착오적이고 퇴행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낸 실버는 짐의 실버이기도 하지만 1980년대 초 소년이었던 나의 실버이기도 했다.

춤추듯 연기하기, 흐르듯 살기

갓 태어난 것 같은 얼굴. 스크린에서 한예리를 처음 보았을 때 속으로 메모했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림엽서 세트를 모았던 일본 작가 이와사키 지히로의 일러스트에 등장하는 발그레한 뺨의 소녀가 애틋하게 떠올랐다. <푸른 강은 흘러라>(2008)에서 연변 학생을 연기한 한예리는, 놀라운 배우인 게 분명한 동시에 계속 배우로 살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영화에는 그녀가 음악을 들으며 교실 창가에 가만히 서 있는 짧은 숏이 있다. 아무것도 호소하지 않으면서도 영화의 뉘앙스를 풍성하게 만드는 이런 정경을 대뜸 만들어내는 배우는 개기일식만큼 귀하다. 독립영화의 그녀가 담백하고 맑았다면 몇해 후 대중에게도 한예리의 이름을 알린 <파주>(2009)와 <코리아>(2012)에서 그녀는 강렬하고 분방했다. 친구를 태운 바이크를 몰고, 온몸을 던져 탁구를 쳤다. 2014년 동양화풍의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 붉은 치마를 휘날리며 질주하는 주인공의 마력에 찬탄하다가 나는 다시 한예리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지를 휘둘러 세상을 헤쳐가고 아름다움의 기준이 오직 자기 안에 존재하는 젊은 여자의 이미지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투명한 동시에 지형에 따라 고요히 괴어 있을 수도, 급류로 소용돌이칠 수도 있는 한예리의 물 같은 매력은 대중보다 감독들에게 먼저 소구했다. 한예리를 무술 고수 척사광으로 캐스팅한 <육룡이 나르샤>의 신경수 감독은 TV 단막극 <연우의 여름>(2013)에서 한예리를 우연히 보고 매료된 기억을 이렇게 들려주었다. “너무나 신선한데 배우가 뛰어난 건지, 연출자가 사람 자체를 잘 포착한 건지 혼동되는 연기였어요. 생생한 나머지 생경하기까지 한 자연스러움이었습니다.” 외모와 연기에 대해 사람들이 입 모아 감탄하는 한예리의 자연스러움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도화지의 순백과는 다르다. 그녀의 담백함은 자기주장이 강하다.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로 쉽게 트렌드를 덧씌울 수 있는 아시아계 슈퍼모델들과는 차별되는 한예리의 색깔은, 배우로서 그녀의 저력이자 허들이다. 반면 그녀의 자그마한 몸은 무한히 유연하고 유능하다. 독립영화를 오랫동안 소개해온 상상마당 전 프로그래머 진명현 대표(무브먼트)는 한예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대다수 독립영화 배우들이 화보를 찍으러 가면 경험 부족으로 손을 어디다 둘지 어색해하는데 한예리 배우는 무용을 해서 그런지 몸 쓰는 데에 거침이 없었어요. <환상 속의 그대>(2013)를 봐도 이희준 배우한테 업히는 모습이 뭔가 모르게 자연스럽죠.” 한예리는 세살 때부터 춤을 춰온 단련된 무용수로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재학 시절 영상원 동기들의 졸업작품을 품앗이로 도와주다 연기에 입문했다. 시작은 오직 즐거움에 이끌린 아마추어의 열정이었지만, 신체 연기의 강점은 물론 안무부터 공연 제반작업까지 혼자 힘으로 기획하고 준비하는 데에 평생 단련된 한예리의 다재다능함과 직업적 규율은 프로 배우로서 큰 강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에서 여배우란, 온전히 재능으로 자아를 지키며 삶을 돌파하려는 젊은이에게 얼마나 위태로운 직업인가. 서른까지만 연기를 하고 무용에 정진하리라 작정했던 한예리의 인생 계획은, 무용과 연기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 활동일 수 있다는 희망으로 4년 전 급커브를 틀었다. 지난 2년간 한예리는 로맨틱 코미디 <극적인 하룻밤>에서 주연을 맡는 한편 무용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지금까지 그녀가 연기한 여자들은 영화가 여성 캐릭터에게 즐겨 취하는 섹시한 매력이나 모성적인 미덕 바깥에서 개성으로 호소했다. 한예리에겐 좋은 여배우에 민감한 한국 관객을 지난 10년간 행복하게 했던 배두나의 담담함과 김민희의 대담성, 임수정의 사색적인 면모와 더불어, 아직 출구를 만나지 못한 잠재력이 있다. 남은 것은 한국영화가 이 배우에게 어떤 길을 열어줄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그녀의 경력은 어쩌면 한국영화가 여성을 바라보는 관점과 다양성의 현재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종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해에는 상업영화 투톱 주연을 처음 맡은 <극적인 하룻밤>이 중요한 행보였는데 올 들어서는 다방면의 활동이 눈에 띕니다. TV 대하서사극 <육룡이 나르샤>에 출연했고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여자>가 공개를 앞두고 있고,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도 맡았어요. 드라마 <상상 고양이>에서 목소리 연기도 했고 오락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도 있었죠.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네요, 제가. (웃음) 올해는 들어오는 걸 마다하지 말고 아무 생각 없이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러고 나니 공교롭게 예능 프로 제의도 들어오고 <필름 시대 사랑>에서 만난 장률 감독님도 <춘몽>을 다시 제안하셔서 일이 많아졌어요. -그런 결심은 한 선택이 어긋나도 큰 낭패는 아니라는 여유가 생겼을 때 가능하지 않아요? =한 가지 일의 결과가 내 인생을 바꿔놓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게 돼서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경험이 늘고 주변의 사례를 보면서, 설령 좋은 일이 있어도 다음에 이어지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시도가 실패했다고 갑자기 일을 못하게 되는 것도 아님을 알았거든요. -얘기 듣기 전에는 30대 초반 배우로서 매니지먼트쪽에서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보려고 하는 시기일까 짐작했는데요. 매니지먼트로부터 좀더 신경 쓰라고 조언받는 부분이 있어요? =음, TV드라마에서는 그래도 예뻐야 된다는 것? (웃음) 헤어나 메이크업, 의상에 더 신경 쓰자고 했어요. 그날의 의상을 피팅하면 사진으로 회사 스탭들이 공유하고 의견을 제게 전했어요. <육룡이 나르샤>에 첫 등장한 회에 윤랑이 입은 흰옷도 처음 선택했던 붉은옷에서 바뀐 거예요. -본인의 외모를 두고 여러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기분은 어때요? =“이것도 되게 중요한 거야”라고 자꾸 생각하죠. (웃음) 확실히 영화보다 TV 화면이 작다보니 눈에 담은 감정이 전달되기 더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제가 눈두덩이가 두터운 편이라 덜 표현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어요. 간혹 표정이 없어 보일 때도 있다는 걸 알았고요. 영화보다 좀더 많이 표현해야 된다는 걸 배웠어요. -얼마 전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전통 무용 미니 쇼케이스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리는 프로그램이라 조금이라도 낯설거나 지루한 내용은 면박당하기 쉬운 포맷이잖아요. 예를 들어 한예리씨가 승무를 시연하는데 “비트 좀 빨리요” 하고 리플로 채근하는 걸 보며 괜히 속상하기도 했는데, 어떤 의도로 출연에 응했나요? =목적은 딱 하나였어요. 전통 무용이 단지 접할 기회가 적어 지루하다고 인식되는 현실이 아쉬워서, 공연에서 관객 반응이 좋았던 작품들을 골라 소개하고 싶었어요.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는 지난 해 <극적인 하룻밤> 홍보를 위해 처음 출연했는데 전공인 한국무용을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보여주면 어떻겠냐는 얘기를 들었어요. 당시엔 아무래도 오락 프로그램에서는 웃음을 요구할 텐데 자칫 전통 무용이 웃겨 보일까봐 싫었어요. 첫 예능 출연인데 3시간쯤 혼자 쇼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도 겁이 났고요. 그런데 올해 다시 섭외가 들어왔을 때는 겁내지 말고 해보자 싶었어요. 새벽 1시에 <육룡이 나르샤> 촬영 끝나고 무용하는 친구들과 회의하고 연습해서 준비했죠. 긴 전통 무용 작품을 1분30초 분량으로 장단에 맞춰 자르고 영상을 찍어 작가님들한테 보내서 컨펌을 받았고 의상 대여까지 직접 진행했어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 제게 남긴 뜻밖의 효과는 한예리의 성숙한 면모를 여태 몰랐다는 각성이었어요. 전통 무용을 설명하고 가르치는 모습을 보며 저런 야무진 선생님이 어린 이미지 뒤에 숨어 있었네, 하고 놀랐죠. 혹시 가르쳐본 적이 있나요? =대학 시절부터 무용학원 강사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입시 레슨도 했고요. 실제로는 방송보다 훨씬 호되게 가르쳐요. 스무살 때 가르쳤던 초등학생들이 <마이 리틀 텔레비전> 보고 잘 봤다는 문자도 보냈어요. -가르치는 일이 잘 맞아요? =맞지 않기 때문에 배우를 하고 있어요. (웃음) 잘 맞았다면 엄청난 입시 교사가 되어서 학교에서 일하고 있었을걸요. 제가 봐도 잘 가르치는 교사였어요. 그런데 제가 영화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더 힘들어진 일 중 하나가 정형화된 패턴대로 뭔가를 하는 것이었어요. 입시 무용 교육은 목표로 하는 학교마다 틀이 있어 학생마다 분명히 장기가 있고 자기만의 선이 있는데 그걸 입시에 맞춰 바꿔줘야 해요. 영화는 A가 연기하면 이런 좋은 점이, B가 하면 저런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해주는데 무용 교육은 그럴 수 없으니 괴로웠어요. -고향 제천에서 놀이방 대신 무용학원에 맡겨지면서 만 세살 때부터 무용을 자연스레 습득했다고 들었어요.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무용을 전공했는데 도중에 한번도 다른 길을 생각한 적이 없었나요? =한번도요. 전 공부에 취미도 별로 없는데 춤을 추면 행복하고 남들도 잘한다고 말해주니까 딴생각 말고 평생 이걸로 먹고살아야지 했어요. 국악예술학교 시절에는 학교 군기도 굉장히 세고 순탄치만은 않았지만 그저 무용실에서 춤추는 걸로 족했어요. 연습실에 있는 한 성적, 선후배 관계, 선생님 등등 모든 문제를 잊고 오로지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어 행복했어요. 바깥이 아니라 내부로 도피한 거죠. 기숙사 생활을 해서 아예 밖에 나가기 힘든 시스템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중•고교 6년 동안 4인실에서 합숙생활을 했기 때문에 남자들이 2년 군대 이야기 꺼내면 “그게, 뭐?” 하고 받아요. (좌중 폭소) 1학년 때 들어가면 언니들이 엎드려뻗쳐 시키고, 밤 11시 딱 치면 점호를 했거든요. 내내 빡빡하게 살아서 그런지 오히려 지금은 농땡이치며 사는 기분이에요. (웃음) -내키면 학교수업도 빠지고 자기만의 시간을 누리며 성장한 인상인데 정반대네요. 딱딱하거나 초조한 분위기가 없어서 짐작도 못했어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일 거예요. 중•고교 시절에는 고정관념도 강했고 친구들과 저지른 최대의 나쁜 짓이 한예종 합격 후 몇몇이 학교 담을 넘은 사건이에요. 막상 담 앞에 섰는데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담도 넘어봤어야 넘죠. 모두 얼어 있는 와중에 용감한 한 친구가 담에 접근하긴 했는데 또 가방을 어쩔 줄 몰라 먼저 던지자, 누가 집어가면 어쩌냐며 난리도 아니었어요. (웃음) -중학생 이후로는 내내 예술가 지망생 내지 예술가인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성장기를 보낸 셈입니다. 눈에 가까이 보이는 친구들과 직접적인 경쟁을 하며 살아왔다고도 할 수 있고요. 이 경험이 성인이 된 모습이나 세상 보는 관점에 영향을 준 면이 있을까요? =아주 많죠. 전 무용을 할 때만 해도 무대에 적합한 신체조건과 얼굴이 아니면 예쁜 것이 아니고, 옳은 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조건이 미흡하면 노력해도 안 되는 영역이 있으니 힘들었죠. 만약 딸이 태어났는데 날 닮아 키가 작다면 무용을 좋아해도 전공하겠다면 말려야지 했어요. 그런데 영화를 하면서 누구나 장점이 있고 다름에 매력이 있다는 걸 배웠어요. 뭐랄까, 예전에는 무용을 하니까 제게 뭘 좋아하냐고 묻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죠. 그러다보니 영화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제게 질문을 해준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웠어요. 자꾸 나를 찾는 연습을 하게 되는 것 같아 감사했고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었어요. 무용할 때는 누구도 “너 연습복 뭐 맞출 거야?”, “버선 어디서 할 거야?”만 물었지 넌 누구를 좋아하냐고 소설은 뭘 즐겨 읽느냐고 묻지 않았거든요.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특별전을 할 만큼 독립영화에서 중요한 배우로 꼽혔습니다. 독립영화는 자유롭지만 반드시 완성도가 높지는 않잖아요. 출연작을 다시 보니 각본이 인물을 충분히 구체화하지 않고 미더운 배우에게 설득을 맡겨버린 경우도 없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글쎄요. 그런 예가 있었다 해도 어렵게 느끼지 않았던 건, 무용으로 추상을 표현하는 습관이 배어서인가봐요. 말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그리는 일에 익숙한 편이에요. -실제로도 촬영에 돌입하면 캐릭터의 동기나 감정에 대해 질문이 많지 않다고 들었어요. =단편영화로 시작해서인지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커서 그런지 촬영하는 순간에는 내 생각이 어떻건 감독님의 오케이가 맞다고 생각해요. 연기하기 불편한 점이야 말씀드리지만 오케이에 대한 의심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봐요. -그래도 의아한 오케이를 받으면 이후 연기의 일관성을 위해 이유를 알 필요가 있지 않나요? =“방금 테이크의 어떤 점이 좋으셨어요?”라고 간단히 여쭙고 답을 들으면 더 묻지 않고 바로 넘어가요. 연기하는 제가 불안을 품고 있으면 영화의 다음으로 진전되기가 감정적으로 힘들어지거든요. 불안함이 남는다 해도 그건 제가 아니라 감독님 몫이라고 봐요. 무용에서는 안무가의 과제고요. -정신 건강에 좋은 태도네요.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기린과 아프리카>(2007)로 받았던 연기상이 배우 일을 계속하는 데에 얼마나 영향이 있었나요? =사실은 좀 무서웠어요. 바로 영화제 뒤풀이 자리에서 이제 연기 그만하고 무용할 거라고 말했죠. 일단 몸이 고됐거든요. 4학년인데 수업 끝나면 졸업작품 제작비를 마련하려고 아르바이트 두개를 했어요. 공연을 위한 음악, 무대 디자인, 조명, 의상, 분장, 팸플릿, 포스터까지 혼자 준비해야 하거든요. 거기다 단편영화 출연 제의까지 응하니 하루 두세 시간밖에 못 잤어요. 그 극한 상황에서도 무리할 만큼 영화가 좋았나봐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즐거워서 하는 일이니 서른까지만 하고, 나도 미래와 생계가 중요하니까 무용에 집중해야지 싶었죠. 내내 그런 입장이다가 스물여덟살에 현재 소속사 이소영 대표를 만나서 생각을 바꿨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입장 전환을 불렀나요? =당시 <귀>라는 단편에 함께 출연했던 이제훈씨가 계속 영화할 거냐고 물었어요. 아니라고 했죠. 이소영 대표님이 물어봐달라고 부탁하셨나본데 전 몰랐어요. 그 후 미팅을 가졌는데 제가 배우로서 아주 좋은 얼굴을 갖고 있고 연기를 그만두기 아깝고 앞으로 예리씨 인생에서 좋은 경험일 거라는 말을 해주셨어요. 그때까지 전 제가 배우로서 좋은 자질을 갖고 있다고 믿지 않았어요. 일은 계속 있었지만 상업영화는 다른 영역으로 본 거죠. 어쨌든 돈 버는 배우가 되진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텔레비전에도 어울리지 않고 외모를 잘 꾸미는 편도 못 되니까요. 그런데 이 대표님이 그런 걱정들은 배우 몫이 아니라고, 회사가 고민할 문제라고 말했어요. 둘째로는 소속사가 생기면 무용을 버릴 각오 없이는 연기를 못한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배우에게 다른 표현 창구가 있는 건 훌륭한 일이고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대표님의 말이 제 생각을 바꿨어요. -그런데 매니지먼트가 생기기 훨씬 전인 2009년 <귀향>을 같이 찍은 안선경 감독은 당시에도 한예리씨가 완전한 프로페셔널이었다고 기억하던데요? 혼자 가방 메고 와서, 혼자 아이 낳는 미혼모의 힘든 연기를 하고 끝나면 혼자 돌아갔다고요. =거꾸로 긴 계산이 있었다면 못했을 역인지도 몰라요. 좋아서 한 일이라 열심히 했고, 원래 무용하는 사람들은 의상을 직접 다리고 직접 가방을 꾸려 다니니까 별스럽지 않았어요. 오히려 현장에 가면 의상 챙겨주는 사람, 분장해주는 사람, 밥 제때 주는 사람이 따로 있어 제가 다 하지 않아도 되니 편했어요. -두 번째 장편 <푸른 강은 흘러라>로 거슬러 올라가보죠. 극중 연변 소녀 연기를 보고 현지인이라고 착각한 관객도 많았을 거예요. 한예리씨의 조선족 연기가 진짜처럼 느껴지는 건, 억양을 잘 모방해서가 아니라 같은 한국어 뒤에 깔린 다른 정서와 사회 관습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어요. =제가 말을 배운 동갑내기 미령이를 비롯해 급우로 나온 연변 친구들과 넉달 정도 함께 생활했거든요. 남한 사람과의 차이라면, 중국인이라는 정체성도 강하고 공동체 의식이 훨씬 끈끈해요. 남녀를 불문하고 의리가 엄청나서 친구끼리 어딜 가려다가도 누구 하나 빠지면 취소해요. 못 간 친구 한명이 속상할까봐서요. 빵이라도 사 먹으면 그 자리에 없는 친구 몫을 꼭 남기는 걸 봤어요. -장•단편영화에서 북한과 연변에서 온 인물을 네 차례 연기했습니다. 한국영화가 그들을 그리는 상투형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 =북쪽 사람들은 아주 순박하고 젊은이들조차 요즘 세대 같지 않을 거라고 짐작해서 때묻지 않은 모습으로 그리는 것 같아요. 좀더 순박한 건 사실이지만 영화가 그리는 만큼 다르진 않아요. 특히 연변은 실시간으로 한국 드라마도 보고 문화적으로 친밀한데 우리쪽에서는 그걸 몰라요. 사실 <푸른 강은 흘러라>를 찍는 동안 연변 친구들이 나이 들면서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겪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기우 같기도 해요. 중국은 워낙 소수민족이 많은 나라라 조선족도 그중 하나임을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 -북한, 연변 캐릭터로 거듭 캐스팅된 사실은 어떻게 보면 영화계가 한예리 배우를 인식하는 스테레오 타입과도 연결될 것 같아요. 담백한 이미지를 순박하고 착해서 손해 보는 인물로 해석하는 경향이랄지. =제겐 네 인물이 모두 북쪽 말투를 쓰지만 전부 판이했어요. 예를 들어 <해무>의 홍매와 <코리아>의 순복의 공통점은 언어뿐이에요. 가령 부산 출신 배우가 작품마다 사투리 억양은 유지하며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잖아요. 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정작 제 고향은 충청도인데 충청도 인물은 없었네요. 감독님들이 의외로 충청도 사투리를 잘 못 쓰시나 봐요. (웃음) -하긴 타이프캐스팅은 배우 본인이 아니라 감독이 고민할 과제죠. =예, 만약 저와 한번 더 작업하신다면! (웃음) -필모그래피를 보면 공교롭게도 독립영화는 대부분 여성 감독과 작업했어요. 반면 상업영화는 <파주> <남쪽으로 튀어>를 제외하면 모두 남성 감독 연출작이었네요. =정말 그 많은 독립영화의 여성 감독들은 다 어디 가신 건지 많이 아쉬워요. 제 독립영화 출연작이 여성 감독 작품들 위주로 기록된 것은 일부러 제가 여성과 작업해서가 아니라 남성 감독과도 작품을 했지만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완성도가 높아 많이 회자됐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현장 분위기를 말하자면 감독의 젠더나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차이보다 개인차가 결정적인 것 같아요. <극적인 하룻밤>의 경우는 여주인공 시후에 대해 제가 남성 감독님께 이해시키려고 한 부분이 있긴 했어요. 베드신 말고 일상적인 세부들이요. -<파주>의 조연 이후 첫 상업 장편인 <코리아>에서 북한 대표 류순복 선수 역 연기는 카메라에 얼굴이 찍힌다는 생각을 전혀 안 하는 듯 보였어요. 팔다리를 최대한 늘여서 공을 치고 말겠다는 의지만 남아 있는 모습이랄까. 오직 탁구를 치는 것만 중요해 보였어요. =정말 여기서 연기를 잘하는 길은 탁구를 잘 치는 것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라켓을 휘두를 때 어설프면 연기도 무너지고 관객이 인물을 못 믿을 테니까요. 마치 무용처럼 원래 불편한 동작을 백번, 천번 연습해서 관객의 눈에는 쉬워 보이도록 자연스럽게 다듬는 과정이었어요. 그래서 매일 웨이트트레이닝을 한 시간 반 하고 현정화 감독님이 짠 네 시간 탁구 훈련을 받고 몸풀기까지 하루 여섯 시간 연습했어요. 체대 다닌다 치고 이래야만 태릉선수촌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죠. (웃음) 제가 30, 40분 러닝을 하고 있으면 현정화 감독님이 와서 옆에서 같이 뛰어주셨던 기억이 나요. 대단한 분이세요. -<해무> 개봉 무렵 인상적인 인터뷰가 있었어요. <해무> 전까지는 그냥 배우였는데 최초로 내가 여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얘기했어요. 좀 구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나요? =주로 영화를 홍보하는 동안 느꼈어요. ‘우리 여배우’라고 불린다거나, 그때까진 한명의 배우로서 영화를 소개하러 갔다면 <해무>에서는 여배우로서 예쁘게 잘 차려입고 가는 자리도 많았다거나. 연기에서도 “전 이렇게 아름답게도 표현할 수 있어요” 하는 점을 플러스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전작에서 예쁘게 보이기보다 해당 캐릭터로 보이는 데 집중했다면 <해무>에서는 “홍매는 이런 식으로 여성스럽고 예뻤으면 좋겠다. 이런 모습에 상대역 동식(박유천)이 끌렸으면 좋겠다”라는 식의 설명을 많이 들었어요. 예전에는 별로 듣지 못했던 형용사를 많이 접했죠. -홍매가 굳이 치마를 입고 밀항해서 무척 고역스러워 보이기도 했어요. =치마를 입고 밀항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지 여쭤보았는데 여성적으로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치마가 맞다고 판단하셨던 것 같아요. 찍으면서도 맨다리에 물이 닿을 때 무척 차가웠고 멍이 끊이질 않았죠. (웃음) -KBS 단막극 <연우의 여름>에는 직접적으로 “목소리가 좋아요”라고 칭찬하는 상대방 대사가 있어요. 한예리 배우의 음성은 동글동글한 볼륨감이 느껴져요. 특별히 또박또박 말하지 않는데도 대사가 확실히 전달되는 신통함이 있고 음역도 넓어요. =저는 딕션이 부정확한 배우에 속해요. 아버지 목소리가 무척 좋아서 통화한 친구들이 다들 놀라는데 제가 닮았나봐요. <해무>의 홍매를 할 때는 사투리 코치를 맡은 분의 나긋나긋한 말투를 아예 배웠어요. 연변 말은 억세다는 선입견과 달리 아주 나긋나긋하게 풀어 말하는 투였어요. (홍매 목소리로) “아이 어떡하니, 이거 다 젖었구나.” “이게 지금 날 어떻게 해보자는 겝니까?” 이렇게 소리가 코 위쪽에서 동그랗게 울리는 느낌으로 했어요. 여성스러운 뉘앙스를 홍매 본인은 모르지만 상대는 느낄 수 있는 톤으로 갔어요. 너무 노골적이면 순수한 측면이 사라질 것 같아서요. -<환상 속의 그대>의 기자회견 중 슬픈 분위기도 아니었는데 불쑥 울음을 터뜨려서 좌중이 놀란 일이 있었죠? 한예리 배우의 연기를 보면 안에서 솟구치는 감정 덩어리는 큰데 표현은 작게 가는 쪽이 많아요. 연기를 위해 감정을 끌어올린다기보다 시나리오의 설정보다 배우가 느끼는 감흥이 더 강해서 도리어 절제하는 인상을 거듭 받아요. 한편 현장에서는 그날그날의 컨디션을 티내지 않고 기복이 없다고 들었어요. =무용은 매번 연습을 공연처럼 통째로 하거든요. 컨디션이 매일 오르락내리락해도 여럿이 하는 퍼포먼스에서 내 상태를 상대에게 전달하는 건 좋지 않다고 배웠어요. 아파도, 힘들어도 내 책임인 거죠. 연기는 무용과 달리 연습을 많이 못해요. 무용이 폭발 지점까지 에너지를 착착 쌓아가는, 말하자면 집 짓는 과정이라면, 연기는 ‘나’라는 집을 부수고 치워서 타인이 들어오게 만들고 보다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과정 같아요. -하긴, 부수는 일을 연습하긴 어렵겠네요. (웃음) =사실 어떻게 연기를 연습해야 좋은지도 아직 모르겠어요. 연극을 경험하면 알 수도 있겠죠?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에너지를 주면서 하면 관객이 벅찰 것 같지만, 대극장 무대는 워낙 크니까 뒤쪽 객석까지 전달되려면 계속 100%를 발휘해야 하죠. 영화와 무용에서 제 표현에 차이가 있다면 감정의 크기라기보다 표현 매체의 조건에서 오는 걸 거예요. -<극적인 하룻밤>은 청소년 관람불가 로맨틱 코미디인데 섹스 신의 노출이나 야한 정도를 떠나서, 섹스에서 여성이 갖는 느낌을 흔한 신음이나 표정 말고 배우의 몸짓으로 표현했다는 점이 신선했어요. =제목대로 주인공 시후에게 정훈과의 첫 섹스가 정말로 ‘극적인 하룻밤’이었음을 감독님도 저도 표현하고 싶었어요. 전에 몰랐던 특별한 감각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에 정훈과의 관계에 더 많이 호기심이 생긴 경우니까 쾌감의 묘사를 구체화하고 싶었어요. -갑자기 <춘향뎐>의 사랑가 장면이 떠오르네요. 한예리씨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어울렸겠어요. 전공과 연관돼 언급되는 장르로 무협이 있을 텐데 <육룡이 나르샤>에서 척사광 역할로 처음 액션을 했어요. 신경수 감독은 한예리 배우가 연기하는 무술의 척사광다운 느낌을 스턴트 더블 대역에서는 받을 수 없었다고 말씀하시던데요. 본인이 와이어 타는 모습도 그려본 적 있겠죠? =춤추듯 물 흐르듯 움직이면 어떨까 생각해봤어요. <와호장룡>의 빠르고 부드러운 선 같은 무협을 해보고 싶어요. 방어적이면서도 물 같은 흐름이 멈추지 않는 느낌을 만들어봤으면 해요. -인터뷰를 위해 미개봉 신작 <최악의 여자>를 미리 봤습니다. <비포 선라이즈>나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엮여 언급될 법한 워킹 앤드 토킹 계열 영화던데요. 로맨스의 전말보다 주인공 은희가 세 남자를 만나는 동안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태도가 흥미로웠어요. 포털의 영화 소개에는 가면을 바꿔 쓰는 못된 여자처럼 표현돼 있지만, 누구나 앞에 있는 사람에 따라 성격의 다른 측면을 드러내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특히 통념의 제약을 많이 받는 여성들이 연애에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보편적인 태도가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어떻게 태도를 조율할까 고민했을 텐데요. =김종관 감독님과 이야기해서 만들어갔어요. 여자들이 별로 안 좋아할 듯한 여자를 연기해보자는 거였죠. 본인도 어디선가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다른 여자들이 그러는 걸 보면 싫어하는, 여러 얼굴의 여자죠. 워낙 남성 인물 셋이 극명히 달라서 그것에 맞춰 상대적으로 연기하면 태도의 편차를 쉽게 만들 수 있었어요. 예컨대 이와세 료는 처음 만났는데도 사람을 무척 편하게 해줬어요. 이 장점을 잘 받아서 연기해야지 싶었어요. 한편 이희준 오빠가 연기한 인물은 캐릭터적으로 제가 들었다 놨다 해야 하는 상대였어요. 본인이 비련의 남자주인공인 것처럼 행세하니까 은희도 거기 맞춰 비련의 여자주인공 연기를 하는 거예요. (웃음) 어쩌면 그래서 은희가 이 남자를 사귀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은희는 직업배우지만 현실에서는 칭찬받는 연기를 못하잖아요? 그런데 실제 삶에서는 능동적으로 연기를 잘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가정해봤어요. -정신혜 무용단과 공연한 <찰나-소나기를 품다>와 <굿+Good>을 동영상으로 뒤늦게 봤습니다. 내러티브가 강하고 대사도 있더군요. 피나 바우쉬의 탄츠테아터도 떠올랐어요 무용가로서 이런 유의 작품에 관심이 있나요? =서사에 집착하진 않지만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활발한 쪽에 흥미가 있어요. 부분적으로 안무도 하는데 언젠가 제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상상도 해요. 소극장에서 20, 30분 길이의 짧은 독무부터 시작해서 듀엣이건 군무건 늘려보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롤모델이란 말은 과하고, 행보를 눈여겨보는 다른 여배우가 있어요? =문소리, 전도연 선배님 작품은 빼놓지 않고 보려고 해요. 얼마 전 문 선배님 연극도 봤어요. -문소리 배우와는 한 회사에서 일한 시기도 있었죠? 선례들을 보면서 앞으로 극복할 어려움도 예상하나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여배우의 고민일 거예요. 꼭 여배우가 중심이 아니더라도 여성 캐릭터가 제대로 등장하는 시나리오가 적다보니 선택의 여지 자체가 없어요. 작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상태가 안타까워요. 저를 비롯해 이제 시작하는 친구들에게도 기회가 많이 돌아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기회의 총량 자체가 부족해요. -연기도 많이 할수록 잘할 수밖에 없는데 여배우들은 시행착오를 통해 향상될 기회가 남배우들에 비해 현저히 적어서 커리어가 도중에 끊어지기 쉽죠. =남자배우들이 연기 발전 가능성에 있어서 유리한 것 같아요. <동창생>의 최승현씨, <해무>의 박유천씨와 일하면서 제일 부러웠던 점이 그거예요. 선배들과 붙어서 계속 ‘힘겨루기’하는 장면을 찍고 그것으로부터 배우고 함께 호흡하는 것. 제가 너무 바라고 목말라하는 경험이거든요. 여배우는 작품에서 홍일점이기 쉽고 팽팽하게 에너지를 주고받는 신이 드물어요. 여배우들이 연기를 못하는 게 아니라 치열하게 보여줄 작품이 적은 거죠. 그래서 이정현 언니도, 제가 좋아하는 천우희 배우도, 비교적 작은 규모의 영화를 통해 상을 받았지 않았나 싶어요. 저예산 작품이 그래도 여배우에게 연기를 펼칠 기회를 주니까요. -장률 감독의 <춘몽> 촬영에 곧 들어갑니다. 연기 경험이 있는 박정범, 양익준, 윤종빈 감독 세분이 배우로 캐스팅됐는데, 무엇을 기대하면 될까요? =극중 세 남자는 모두 거리의 인생이고 빈틈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이야기는 봄날의 꿈 같기도 하고 처절한 면도 있어요. 지금 세 감독님이 옷이며 머리며 너무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시대요. (웃음) 배우가 감독보다 연기 못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죠? 큰일 났어요. -음, 아무튼 화면에서 한예리 배우가 굉장히 돋보이지 않을까요? (웃음) =하하! 저도 더불어 칙칙하게 나오면 어쩌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좌중 폭소)

[김소희의 영화비평] <크로닉> 둔탁한 충돌음이 남기고 간 에너지

※결말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크로닉>은 무시무시한 충돌 이미지로 끝나는 영화다. 결말을 언급하며 시작하는 것을 양해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크로닉>은 결말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다. 결말의 충격적 이미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곧 이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호스피스 간호사 데이비드(팀 로스)의 조깅 장면은 예기치 않은 사고로 끝맺는다. 데이비드를 마주 본 자리에서 그가 다가오는 만큼 후진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카메라는 데이비드가 화면 오른쪽에서 나타난 차에 치여 프레임 밖으로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멈춘다. 그와 함께 관객의 사유 역시 그 순간에 붙박인다. 이것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의 흐름을 일거에 무너뜨린 뒤 결말 그 자체에 모든 것을 수렴시켜버리는 무책임한 마무리가 아닌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강렬한 결말이라고 해도 그 강렬함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왜 그런 충돌 이미지가 필요했는가를 살펴보려 한다. 그것만이 이 단순해 보이는 결말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꼼꼼히 들여다보자. 이 장면에서 데이비드의 충돌은 그의 선택인가 사고인가. 조깅 장면에서 데이비드의 시선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집중해보면 데이비드는 차가 오는 쪽으로 시선을 움직이며 차에 부딪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채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가 자동차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 시선을 돌리는 것인지, 부딪히기 위한 정확한 타이밍을 보고 있는 건지는 다른 문제다. 차에 부딪히기 직전 데이비드의 시선이 차가 오는 쪽을 향해 있었던 바, 충돌은 그의 선택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그러나 사고인가, 선택인가가 이 영화에서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결말이 충격적인 것은 데이비드의 사라짐(죽음)이라는 서사의 맥락에서 오는 게 아니라 강렬한 충돌 그 자체에서 비롯된다. 이때 충돌은 서사적 맥락을 벗어나 충돌 그 자체를 감각하게 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사는 서사적 맥락이 아니라 충돌 그 자체에 두어야 한다. 충돌의 몽타주 결말의 충돌을 기점으로 삼아 다시 극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충돌 이미지는 단지 결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연결하는 방식 속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숏과 숏을 충돌시키는 충돌의 몽타주는 데이비드가 첫 번째 환자인 새라(레이첼 피컵)를 돌보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영화는 의자에 가만히 앉은 새라의 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숏 사이에 운동하는 데이비드의 모습을 끼워넣는다. 숏의 배치로 인해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데이비드의 운동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음향은 대립을 더욱 강조한다. 소리가 거의 없는 정적인 숏으로부터 기계음, 투박한 발소리, 숨소리가 뒤섞인 숏으로의 점프는 공포영화에서 갑자기 나타난 귀신처럼 관객을 각성시킨다. 그러나 단순히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이 이 충돌 몽타주의 목적은 아니다. 영화는 달리는 데이비드의 몸을 오랫동안 전시하면서 몸에 대한 사유를 강요한다. 이때 데이비드의 몸은 새라의 몸과 대조적인 동시에 어딘가 비슷한 연결점을 지닌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몸을 가눌 수 없는 새라의 몸과 마찬가지로 러닝머신 위에서 데이비드의 몸은 기계의 흐름에 의지한 무력한 몸으로 드러난다. 데이비드의 몸은 마치 재활 훈련을 하는 또 다른 환자처럼 보인다. 이렇듯 충돌의 몽타주는 서로 대립하는 몸을 부딪치게 하는 동시에 그 둘을 연계시킨다. <크로닉>의 충돌 몽타주는 정확히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을 가리킨다. ‘A+B=C’라는 공식으로 요약되곤 하는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은 풀어 말하면 대조적인 이미지를 충돌시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는 뜻일 텐데 이 공식은 중요한 지점 하나를 생략하고 있다.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은 단순히 대조적인 숏을 충돌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돌을 통해 대조적인 숏이 공유한 기반을 드러낸다. 에이젠슈테인은 그것이 변화하고 생성한다는 의미에서 숏을 하나의 세포로 인식한다. 연결된 숏은 대립과 충돌을 통해 서로를 변화시키는 두항이다. <크로닉>은 충돌되는 것이 공유한 기반과, 충돌된 숏이 어떻게 서로를 재인식하게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 이론을 소환한다. 정적과 움직임은 피로감이라는 기반을 공유하며, 이 둘의 충돌은 서로에게 움직임과 부동성을 각각 선사한다. 충돌은 같은 대상에 대해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대상과 다른 방식을 거치며 분화한다. 영화는 환자의 몸과 데이비드의 몸을 만나게 할 뿐만 아니라 환자들의 심리를 충돌시킨다. 두 번째 환자인 건축가 존(마이클 크리스토퍼)의 가장 큰 특징은 포르노에 탐닉한다는 것이다. 존의 성적 욕망은 생(生)의지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반면 뒤늦게 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 세 번째 환자 마사(로빈 바틀릿)는 오랜 치료 기간을 견디는 대신 죽음을 원한다. 이들의 대조적인 반응은 죽음에 맞선 신체와 정신의 분리된 욕망을 그려보게 한다. 사람을 서서히 죽여가는 불치병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처럼 보였던 신체와 정신을 돌연 충돌시킨다. 신체는 죽어가고 있다. 하지만 정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존은 신체와 정신이 서로 화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공존을 선택한 경우다. 신체는 자신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성욕을 정신이 여전히 갈망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정신 역시 신체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욕망을 살게 한다. 반면 마사는 신체에 맞춰 정신 역시 죽음을 욕망하는 것으로 급격히 변해간다. 충돌한 신체와 정신은 하나가 다른 쪽의 에너지를 흡수하면서 공존하거나 공멸한다. 충돌은 숏과 숏, 인물과 인물뿐만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충돌의 흔적은 이를테면 데이비드와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마사가 구역질 소리와 함께 입에서 뿜어낸 토사물 같은 것이다. 인물 내부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은 외부의 충돌만큼이나 강력한 내부의 충돌을 가리킨다. 배변 활동을 가리지 못하는 상황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작용했던 내부 기관들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다. 그 순간을 일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데이비드의 존재는 순간의 충격을 흡수하는 동시에 강화한다. 그러니까 충돌의 강렬함은 강렬한 이미지가 아닌, 무력한 이미지와 다른 무력한 이미지의 충돌로 인해 발생한다. 죽음은 부동의 정적이 아니라 뒤흔드는 충돌이다. 숏이 다른 숏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는 세포분열 방식이 이 충돌 몽타주에 깃든다. 멕시코식 삶과 죽음의 논의 말년을 멕시코에서 보낸 에이젠슈테인은 멕시코에 대한 찬가인 다큐멘터리 <퀘 비바 멕시코>(1979)를 만들었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미지의 장소인 멕시코를 신비화하는 경향이 다분한 <퀘 비바 멕시코>는 명백한 한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에 대한 통찰을 지닌 다큐멘터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에이젠슈테인은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을 죽음으로 장식하며 멕시코인에게 죽음과 삶이 얼마나 가까운지를 말한다. 내겐 <크로닉>이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비밀스러운 답가라고 여겨진다. 미셸 프랑코는 에이젠슈테인이 지적한 멕시코식 삶과 죽음의 논의를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에 되돌려준다. 영화에서 부딪히는 것은 삶과 죽음이 아니라 삶과 삶, 즉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삶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존재해야지만 지탱 가능한 피로한 삶이다.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누군가의 부재를 드러내는 삭막한 풍경을 헤아리기보다 둔탁한 충돌음이 남기고 간 에너지가 여전히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음을 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culture highway]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

새로운 영웅은 언제나 환영 향후 블리자드를 먹여살릴 기대작 <오버워치>가 5월24일, 드디어 출시된다. 블리자드가 처음 시도하는 미래형 FPS <오버워치>는 영웅 캐릭터별로 개성 넘치는 전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신개념 FPS다. 발매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5월5일부터 9일까지 오픈베타 테스트가 진행되니 관심 있는 사람은 미리 체험해봐도 좋을 것이다. 자막 및 성우 음성까지 완전 한글화를 거친 <오버워치>는 온라인 게임치고 드물게 패키지로 발매되며 일반판은 4만5천원, 소장판은 6만9천원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얼마나 풍성할지 기대해보자. ‘찰리 푸스’를 아시나요? 미국의 젊은 싱어송라이터 찰리 푸스가 8월18일 오후 8시 예스24 라이브홀에서 첫 내한공연을 갖는다. 그는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주제곡 을 불러 빌보드 싱글 차트 12주 연속 1위에 오른 놀라운 신예다. 이 곡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영화의 주연배우 폴 워커를 위한 추모곡이기도 하다. 지난해 데뷔 싱글 로 영국, 아일랜드, 프랑스, 뉴질랜드 등에서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올해 1월 발매한 데뷔 앨범 《Nine Track Mind》에서는 재즈와 솔풍의 음악부터 피아노 선율의 발라드까지 소화했다. 찰리 푸스의 재능을 확실하고 싶다면, 4월26일 화요일 정오부터 인터파크에서 티켓 예매가 가능하니 참고하시라. 아시아의 실험영화 실험영화. 말로만 들었지 직접 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아시아의 실험영화’를 위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실험영화의 저변 확대를 위해 다양한 행사를 준비 중이다. 그 첫걸음으로 5월14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2에서 열리는 이번 포럼에서는 아다치 마사오 감독의 1967년작 이 16mm 필름으로 복원되어 최초 공개된다. 실험영화 보존의 타당성과 미래의 실험영화를 위한 가능성을 논의하는 이번 포럼을 통해 영화와 예술에 대한 그동안의 갈증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것이다. 넬의 월드 프리미어 밴드 넬이 콘서트 로 2016년 활동을 시작한다. 이번 공연에서는 히트곡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그들의 독립 레이블 ‘스페이스 보헤미안’을 통해 발매될 새 정규 앨범의 트랙들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공연이 진행되는 6일 동안 매회 다른 신곡을 하나씩 공개한다고 하니 넬의 새로운 노래를 세상에서 가장 먼저 듣는 호사를 누리려는 팬들은 모든 공연에 참석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5월6일, 7일, 8일, 13일, 14일, 15일 블루스퀘어 삼성카드홀에서 열린다. 온전한 빨강머리 앤 2014년 방송 35주년을 기념해 제작된 DVD 세트가 국내 정식 출시됐다. 35mm 네거티브필름 원판을 텔레시네 보정을 거쳐 복원한 HD 리마스터 기념판이다. 방영 당시에 삭제된 120여분 분량까지도 추가로 우리말 녹음작업을 거친 오리지널 무삭제 완전판이다. 중국 작가 탄쇼유의 멋진 아트워크가 그려진 케이스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다. The Illusionist 최연소 프로 마술사, 최초 국제대회 수상 및 최다 그랑프리, 최대 규모 마술 공연, 한국인 최초 라스베이거스 공연… 이 모든 수식의 주인공, 마술사 이은결이 20주년 공연을 갖는다. ‘매직 콘서트’라는 장르를 만들어낸 공연 을 통해 마술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그의 마술 세계를 총정리하는 자리다. 그동안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퍼포먼스와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간 국립극장 규모에 맞춰 특별히 제작된 무대까지, 이은결의 또 다른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5월4일부터 15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부코스키가 쓴 성장소설 U2, 톰 웨이츠, 본 조비 등 미국 대중문화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이 오랜만에 한국에 발간된다. 부코스키의 분신인 캐릭터 헨리 치나스키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생생하게 그린 1982년작 <호밀빵 햄 샌드위치>가 그것. 떠돌이, 주정뱅이, 호색한, 도박꾼 등 밑바닥 삶 자체를 표상하는 헨리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추적할 수 있는 소설이다. 국내에 나온 그의 다른 소설 <우체국> <여자들>을 우리말로 옮긴 박현주가 이번에도 번역을 담당했다. 신중현 SOUND 한국 록의 가장 거대한 이름 신중현의 LP 박스세트 《신중현 사운드》가 발매된다. 그의 전성기를 엿볼 수 있는 시리즈 《신중현 사운드》는 신중현 사단의 신인 여가수들 컴필레이션, 토종 사이키델릭의 여제 김정미의 앨범, 1972년 당시 신중현이 이끈 그룹사운드 ‘골든 그레입스’의 앨범으로 이루어졌다. 골든 그레입스 앨범의 마지막 트랙 <즐거운 Go Go>는 한국 록 사운드의 정점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 앨범 모두 각기 다른 컬러 바이닐로 제작되고 포스터, 스티커, 인서트 등이 포함돼 소장가치를 높였다. 350매 한정 발매되니 예약을 서두르자.

[스페셜] 할리우드, 중국과 합작한 <드라마월드> 제작기

“이건 내 이야기야.”(coco_luke) “클레어가 K드라마를 볼 때 하는 행동이 나랑 똑같아. 아하하.”(lananix15_558) “‘폰 금지, 드라마 시청 금지, 진짜 인생을 살자’라니. 하하. K드라마 팬들은 재미있게 볼 듯. K드라마 속 로맨스의 일부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cgwm808) <드라마월드> 시청 소감 게시판에는 K드라마 신도들의 ‘덕후’ 간증이 줄을 잇고 있다. 이 드라마를 본 사람들마다 “꼭 나를 모델로 만든 작품 같다”는 공통된 반응을 보였다. <드라마월드>는 지난 4월17일 동영상 스트리밍 웹사이트인 비키(VIKI, www.viki.com, 아직 한국은 감상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편집자)에서 방영을 시작한 10부작 웹드라마다. 비키는 일요일마다 에피소드 두편씩을 공개하기로 했다. 시리즈가 이제 막 출발했는데 “다음주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팬들의 성화가 빗발치는가 하면, 한편에 10분 남짓한 러닝타임을 두고 “좀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건설적인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또, 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자막만 무려 10억여개인 사이트답게 <드라마월드>는 업로드되자마자 영어자막이 뚝딱 제작됐다. 대체 이 드라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각기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는 K드라마 팬들이 목이 빠지게 일요일을 기다리는 걸까. K드라마 팬이라면 빠져들지 않을 도리가 없는 “너, 사람들과 대화는 하니?” <드라마월드>의 주인공 클레어 던컨(리브 휴슨)은 아버지가 걱정할 정도로 K드라마에 빠진 여대생이다. 일하고 있을 때조차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아 아버지에게서 ‘폰 금지, 드라마 금지, 진짜 인생을 살자’라는 내용이 적힌 쪽지를 받았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녀가 K드라마를 즐겨보는 이유는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인생은 즐겁고, 누구나 예뻐질 수 있으며, 또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드에서는 개나 소나 키스하지만, K드라마에서 첫 키스는 사랑의 증표”라고 생각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녀가 꽂힌 K드라마는 <사랑의 맛>. 사랑에 빠진 두 남녀주인공인 박준(숀 듀레이크)과 서연(배누리) 그리고 둘 사이를 방해하는 가인(김사희)의 삼각관계를 다룬 사랑 이야기다. 아버지의 가게를 보던 어느 날, 클레어는 아버지 몰래 <사랑의 맛>을 보기 위해 휴대폰을 꺼낸다. 가인이 박준을 유혹하기 위해 키스하려 하고, 서연은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며 안타까워하던 중, 클레어는 어떤 사고(?)를 겪으며 드라마 <사랑의 맛>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사나이 세스 고(저스틴 전)로부터 자신이 드라마월드에 들어왔고, 세스 고와 함께 조력자가 되어 박준과 서연의 사랑이 이루어지게 해야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누구나 자신이 즐겨보는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는 상상을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드라마월드>는 드라마 팬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작품이다. K드라마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도 있다. 세스 고가 드라마월드에 들어온 클레어에게 K드라마의 공식을 얘기하는 장면을 보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첫 번째 법칙, 모든 드라마는 진정한 사랑의 키스로 끝난다. 두 번째 법칙, K드라마 속 남자주인공은 자신감, 외모, 약간의 오만함, 여자주인공을 배려하는 신사 등 네 박자를 갖춰야 한다. 세 번째 법칙, 남자주인공의 샤워 신은 필수다. 네 번째 법칙, 훼방꾼과 장애물이 많을수록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 다섯 번째 법칙, 진정한 사랑이 이루어지면 드라마가 초기화된다 등등. 엔터미디어 콘텐츠 이동훈 대표는 <드라마월드>가 K드라마 팬들의 판타지를 충족시키고, 보편적으로 공감할 만한 이야기라고 판단했고, <드라마월드> 시나리오를 쓴 크리스 마틴 감독, 조시 빌릭 작가, 두 사람과 함께 진행하기로 했다. 엔터미디어 콘텐츠는 한국과 할리우드를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제작사로, 한국 드라마 <굿 닥터> <별에서 온 그대>의 미국 드라마 리메이크 작업을 진행하고 있고, 미국 드라마 <슈츠>의 한국 드라마 리메이크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동훈 대표는 “전세계 2천만명이 비키라는 사이트에서 한국 드라마를 감상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숫자 아닌가. 그들이 주인공 클레어를 통해 자신을 마주할 수 있는 스토리가 매력적이었다”고 설명한다. 다양한 지역에서 확장 가능한 이야기라는 점도 이 대표를 포함한 투자자들의 구미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엔터미디어 콘텐츠와 함께 이 드라마를 공동 제작한 서드컬처 콘텐트의 숀 듀레이크는 “드라마 광팬이라는 설정은 보편적인 소재다. 그게 클레어라는 소녀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라고 말했다. <드라마월드>가 K드라마를 좋아하는 미국 여성팬의 이야기이듯 나중에 K드라마를 좋아하는 중국 여성팬이나 남미 드라마를 좋아하는 미국 여성팬의 이야기로도 확장 가능하다. 크리스 마틴 감독과 주인공 클레어를 연기한 리브 휴슨이 경력이 많지 않은데도 비키, 엔터미디어 콘텐츠, 서드컬처 콘텐트, 제타바나 엔터테인먼트 등 네 회사가 손을 맞잡을 수 있었던 건 <드라마월드>가 가진 설정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동훈 대표는 “아직 자세하게 공개할 수 없지만, <드라마월드>에 중국과 관련한 설정이 전혀 없음에도 중국 투자자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중국 팬의 이야기를 기획하기로 했다. 그건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설명했다. <드라마월드>가 기존 드라마와 다른 건 러닝타임이 길어야 15분을 넘지 않는 웹드라마라는 사실이다. 편당 한 시간 가까이 되는 한국 드라마나 40분쯤 되는 미국 드라마에 비하면 호흡이 무척 짧다.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주요 관객층이 휴대폰을 항상 손에 쥐고 다니고, 휴대폰을 통해 30분이 훌쩍 넘는 영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습관을 고려해 가볍게 감상할 수 있는 웹드라마로 만든 것이다. 크리스 마틴 감독은 “이야기를 쓰는 과정에서 2시간짜리 영화와 15분짜리 영화는 확실히 달랐다. 15분짜리 영상은 그것 자체로 관객에게 재미를 줘야 하고, 그러면서 시즌으로서 완결성 있는 구조를 갖춰야 한다. 그게 감독으로서 큰 도전이었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에서 많은 웹드라마가 제작되고 있듯이, 할리우드에서도 웹드라마 제작 붐이 일고 있다. 지난 3월 북미 최대 TV쇼인 에미상은 러닝타임이 15분 정도 길이인 쇼트폼(Shortform) 부문에 코미디 혹은 드라마, 버라이어티, 리얼리티 혹은 논픽션, 애니메이션,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 6개 상을 신설했다. 에미상을 주관하는 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NATAS, National Academy of Television Arts and Sciences)의 브루스 로젠블럼 회장은 “에미상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창의적인 프로젝트에 상을 주는 것이다. 길이가 무척 짧은 디지털 프로젝트가 상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나”라고 쇼트폼 부문을 신설한 이유를 전했다. 게다가 <드라마월드>처럼 짧은 길이는 아니지만, <하우스 오브 카드>나 <못말리는 패밀리> 같은, 넷플릭스가 제작한 많은 웹드라마의 등장 역시 사람들의 드라마 관람 방식이 브라운관에서 웹으로 이미 옮겨갔음을 뜻한다. 쇼트폼인 <드라마월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산업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이동훈 대표는 “웹드라마나 <드라마월드> 같은 쇼트폼이 에미상에 출품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다. 지금 같은 분위기라면 웹드라마 시장은 더욱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얼마든지 리메이크가 가능하다 K드라마 팬이 자신이 좋아하는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다는 설정이 독특하고, 다른 국가에서도 충분히 리메이크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데다가 언제 어디서나 모바일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모바일 시대가 열린 덕분에 엔터미디어 콘텐츠, 서드컬처 콘텐트, 제타바나 엔터테인먼트, 플랫폼인 비키 등 네 회사는 <드라마월드>를 함께 제작해 내놓을 수 있었다. 첫 시즌 에피소드 열편을 완성하는 데 27회차 촬영이면 충분했다. 시나리오와 CG 작업은 미국 LA에서, 촬영과 후반작업은 서울에서 진행됐다. 지난 4월17일 열렸던 <드라마월드> 프리미어 상영 행사도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동훈 대표는 “소니, 넷플릭스, ABC 등 할리우드 스튜디오 관계자들이 많이 봐주셨는데, <구니스>(1985), <백 투 더 퓨처>(1985) 등 1980년대 할리우드 코미디영화 같다고 칭찬해주셨다”고 전했다. 첫발을 무사히 내딛은 덕분에 시즌1.5, 시즌2 제작도 긍정적으로 논의 중이라고 한다. 그나저나 한국은 비키를 감상할 수 없는 지역인데 <드라마월드>를 어떻게 하면 볼 수 있냐고? 아직은 자세한 내용을 밝힐 수 없지만, 5월23일(예정)쯤 한국 관객도 <드라마월드>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더이상은 쉿. 어둡지만 재미있는 한국영화 좋다 크리스 마틴 감독 -감독(오른쪽)이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과정에서 한국 드라마와 미국 드라마의 차이점을 느꼈을 것 같다. =최근 미드는 어둡고 절망적이며 안티히어로가 주인공이다. <매드맨> <브레이킹 배드> <하우스 오브 카드> 같은 시리즈들 말이다. 반면 한국 드라마는 가볍고, 좀더 순수한 의미에서 즐거운 분위기다. 주인공은 당당하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좇고, 종종 사랑에 빠진다. 로버트 저메키스와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들을 보며 자랐다. <백 투 더 퓨처>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인디아나 존스> 같은 작품들을 좋아했고. 이후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등 한국 거장 감독들과 사랑에 빠지게 됐다. 어릴 때 가볍고 재미있는 모험물을 보고 자랐다면, 커서는 어둡지만 재미있는 한국영화들에 매료된 셈이다. <드라마월드>를 구상하게 된 건 어릴 때 취향과 한국영화, 두 가지 특징이 잘 버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고민했던 건 뭔가.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구조가 가장 어려웠다. 드라마 속 인물들과 현실 속 인물, 두 종류의 캐릭터를 통해 삼각관계, 서스펜스, 일상을 표현해야 했다. -당신은 드라마, 독립영화, CF 등 다양한 장르에서 경력을 쌓은 신인이다. 영화감독이 된 계기가 뭔가. =어릴 때 <캘빈과 호브스>, <반대편>(The Farside) 같은 만화를 즐겨보면서 자랐다. 또, 비디오게임을 좋아해 비디오게임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어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 일은 항상 혼자서 일해야 하는 까닭에 너무 외로울 것 같았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보기 전까지 영화감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친절한 금자씨>는 매우 창조적이었고 힘이 있었으며 영화가 가진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줬다. 만화, 비디오게임, 스토리 같은 다양한 취향이 영화를 만드는 데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다. -클레어처럼 드라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무슨 작품에 들어가고 싶나. =영화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 그 영화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새로운 환경을 사랑하게 됐다 리브 휴슨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클레어가 어떻게 다가왔나. =금세 클레어를 돌보는 데 빠져들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는 친구다. 클레어라는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는 게 정말 어렵고 당황스러운 일이지만, 이야기 속 그녀의 결정은 대체로 옳다. 나와 클레어 모두 다소 서투르고, 뜻하지 않게 잘못된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언제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이 드라마에 출연하기 전, 한국 드라마는 즐겨보는 편이었나. =평소 한국 드라마를 조금 알긴 했다. 열성적으로 챙겨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배역을 준비하기 위해 가능한 한 많은 한국 드라마를 찾아봤고, 그 숙제는 즐거웠다. 호주 출신인 내게 한국 드라마와 미드 모두 각기 다른 문화적인 경험이었다. 다만, 미드가 조금 더 어둡고 시니컬한 것 같다. -신인으로서 촬영을 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했던 것은 무엇인가. =나 자신을 현장 상황에 내던지려고 애를 썼다. 이 드라마를 찍기 전에 한국에 와본 적도 없고, <드라마월드> 같은 작품에서 많은 스탭들과 작업해본 적도 없었다는 점에서 나나 클레어나 비슷한 처지였다. 물론 둘 다 새로운 환경을 사랑하게 됐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클레어처럼 들어가고 싶은 드라마 세계가 있나. =드라마보다는 만화에 들어가고 싶다.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으니까. 실제로 SF나 판타지 장르를 좋아한다. 트레키(<스타트렉> 팬)이기도 하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사랑한다. -배우로서 이제 겨우 첫걸음을 내딛었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케이트 블란쳇이나 타티아나 마슬라니(드라마 <오펀 블랙> 시리즈에 출연했다.-편집자) 같은 다양한 역할을 완벽하게 오가는 다재다능한 배우가 되고 싶다. 호주 단편영화 와 미드 <톱 오브 더 레이크> 두 번째 시즌에 출연하기로 했다. 어쨌거나 드디어 <드라마월드>가 관객을 만나게 되어 기쁘다. <모래시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저스틴 전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당신이 맡은 세스 고는 어떤 남자던가.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세스 고를 사랑하게 됐다. 그게 이 프로젝트에 사인한 이유다. 모든 에피소드를 다 보고 나면 왜 이 캐릭터를 사랑하게 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클레어와 함께 드라마 속 주인공 커플의 사랑을 이루게 해줘야 한다. 그 점에서 클레어 역을 맡은 리브 휴슨과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다. =리브 휴슨은 굉장히 재능 있는 배우다. 촬영이 끝난 뒤, 우리는 소주를 함께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호흡을 맞췄다. -한국계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계 배우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드라마는 색달랐을 것 같다. =한국어 대사가 아닌 영어 대사를 한다는 점에서 <드라마월드>가 특별하긴 했다. 물론 참여한 다른 작품들도 다 좋긴 했지만, 한국 스탭들과 함께 촬영하게 돼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클레어처럼 드라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떤 작품에 들어 가고 싶나. =단 한 작품, <모래시계>. -지난 3월 국내 개봉한 다큐멘터리 <트윈스터즈>에서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다고 들었다. =프로젝트 초기부터 참여했었다. 투자금을 모으고 프로덕션을 꾸렸다. 내가 연출했던 <맨 업>(2015)이라는 영화에 사만다 푸터먼이 배우로 출연한 적 있다. 그때 그녀는 자신이 받은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여주었고, 그걸 보낸 사람이 그녀의 쌍둥이 자매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배우로서는 라는 작품을 촬영하고 있다. 올해 가장 신경쓰고 있는 작품은 <국>이라는 제목의 연출작이다. LA 폭동이 일어났던 1992년이 배경으로, 여성 신발가게를 하고 있는 부모를 둔 한국계 형제 이야기다. <씨네21>이 투자자로 참여하고 싶지 않나. 하하하.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켜주세요] 한국인들의 지혜를 믿습니다

<씨네21>은 1049호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지지 캠페인을 매주 게재하고 있습니다. 이주의 지지자는 방글라데시 감독 모스토파 사르와르 파루키입니다. 그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영화펀드의 지원을 받아 완성한 작품 <텔레비전>은 지난 2012년 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며 각종 국제영화제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방글라데시의 젊은 감독들에게 일종의 롤모델로 자리잡은 모스토파 사르와르 파루키는 아시아의 새로운 재능을 발굴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역할을 보여주는 좋은 선례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매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부산 시민의 영화에 대한 사랑을 보며 떠오르는 경외감입니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 만든 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물론 영화 선정이라는 지난한 과정을 담당하는 프로그래머들의 고유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영화제의 성장과 명성은 영화제의 선정작들과 관련이 있죠. 하지만 영화제를 활기 있게 만드는 것은 관객이며, 영화제에 참가하는 게스트들을 환영하는 것은 그 도시의 시민입니다. 영화제가 선별한 작품들과 열정적인 관객이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비로소 영화제가 빛을 얻고 완성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지금의 상황을 보면 슬픈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를 배신하고 있는 일군의 무리에게 유감을 표하고 싶습니다. 부산 시민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지금의 위치에 있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지난 20년간 그들이 구매한 티켓 하나하나, 그들이 받은 사인 하나하나, 그들이 전세계 영화인 그리고 게스트들과 주고받은 미소 하나하나가 지금 세계 최고 영화제 중 하나로 인정받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부산국제영화제는 불확실성과 창의성의 부재로 몰락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쌓아올린 공든 탑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저는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도 슬픕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이 세계영화계의 중심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를 했고 존경받아온 영화제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아시아의 영화 제작자, 프로듀서, 영화인들을 생각하면 슬픕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그들에게 이제껏 희망을 선사해왔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영화계에 절실했던 그 희망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 창구를 잃는 게 너무 슬픕니다. 북미권과 유럽권으로 양분되어 있는 세계영화계에서 아시아의 정체성과 예술적 아름다움을 대변해온 부산국제영화제를 잃는 건 너무 크고 아쉬운 손실이 아닐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전히 희망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과 그들의 지혜에 대한 믿음이 있으며, 결국은 강인하게 버텨낼 것이며, 파괴적인 힘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파괴할 수 없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좋은 기운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여러분이 희망의 빛을 비춰주기 바랍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자유와 독립성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세요.

[액터/액트리스] 어른아이의 위트 - <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 제이슨 베이트먼

영화 2016 <주토피아>(목소리 출연) 2015 <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 2015 <더 기프트> 2014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2> 2014 <당신 없는 일주일> 2013 <내 인생을 훔친 사랑스러운 도둑녀> 2012 <맨섬> 2012 <디스커넥트> 2011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 2011 <황당한 외계인: 폴> 2010 <스위치> 2009 <인 디 에어> 2008 <핸콕> 2007 <주노> 2004 <스타스키와 허치> 1999 <트러블 앤 섹스> 1992 <살인 본능> 1982 <아빠는 멋쟁이> 감자로 만든 장난감 총을 키득대며 가지고 놀던 벡스터(제이슨 베이트먼)는 잘못 발사된 ‘감자’를 맞아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병원에서 깨어나보니 수년 동안 연락을 끊었던 부모님이 달려오는 중이다. 다급한 마음에 누나 애니(니콜 키드먼)에게 전화한 벡스터는 부모님이 오기 전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집에 못 가겠다고 해. 그냥 당당하게 말하면 되지”라고 퉁명스레 대꾸하는 누나에게 벡스터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언제 그런 적 있어?” <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에서 ‘감독’ 제이슨 베이트먼은 ‘벡스터’ 역에 배우인 자신을 캐스팅한다. 어느덧 중년의 초입에 들어선 벡스터는 꽤 이름을 알린 소설가가 됐지만 행위 예술가인 부모를 따라 온갖 기이한 퍼포먼스를 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부모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는 벡스터는 소년에서 성장이 멈추어버린, ‘덜 자란’ 어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화 속 벡스터의 모습에서 10살, 아역배우로 시작해 35년이라는 경력을 쌓은 노련한 배우 제이슨 베이트먼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케빈 윌슨의 소설 <팽씨네 가족>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 제이슨 베이트먼이 매혹됐던 건 어쩌면, 벡스터의 삶과 자신의 삶 사이에서 찾은 유사성 때문인지도 모른다. 1969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TV프로듀서이자 감독인 아버지와 아역배우인 누나를 보며 자연스럽게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1981년 TV시리즈 <초원의 집>으로 데뷔한 그는 시트콤 <아빠는 멋쟁이>에서 코미디 연기를 선보여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그의 경력에 중요한 전기를 마련한 작품은 2003년 <폭스>에서 제작한 TV시리즈 <못 말리는 패밀리>다(2006년 시즌3까지 이어졌던 시리즈는 긴 공백 끝에 2013년 넷플릭스에서 시즌4로 다시 부활했다). 사기꾼인 아버지가 횡령 혐의로 감옥에 가면서 남겨진 ‘금수저’ 망나니 가족들이 겪는 좌충우돌 사건을 그린 이 작품에서 제이슨 베이트먼은 아내 없이 아들을 혼자 키우며 철없는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둘째 아들 마이클 역으로 출연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2005년 골든글로브 코미디•뮤지컬 부문 남우주연상도 그의 손에 쥐어졌다. TV시리즈에서 얻은 연기의 활력은 1987년 <틴 울프2>로 스크린에 데뷔한 이후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그의 영화 경력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조연에 그쳤던 영화 속 비중은 주연으로 점점 넓어졌고, 영화배우로서의 존재감도 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캐릭터 설정을 반복, 변주해 재미를 만들어내는 ‘TV시트콤 시리즈’라는 형식적 특성상, 제이슨 베이트먼은 영화배우로서 자신의 색을 찾기도 전에 관객에게 (<못 말리는 패밀리>의) ‘마이클’로 각인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제이슨 베이트먼’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당신이 떠올릴 바로 그 이미지,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옷차림에 동네 어디서든 쉽게 만날 것 같은 친숙한 외모, 여기에 반전 같은 어리숙함이 뒤섞여 가족 내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당하지만 한편으론 이유 모를 강박에 시달리기도 하며, 꽉 막혀 소통도 안 되는 고집불통의 냉소적 캐릭터는 이렇게 자리잡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아내와 제대로 된 대화 한번 나누지 못하고 친구들까지 동원해 휴양지로 떠나 우스꽝스러운 심리치료를 받는 남편(<커플 테라피: 대화가 필요해>)이나 뜬금없는 외계인을 잡기 위해 슈트 차림으로 ‘덕후’들을 추적하는, 진지해서 더 바보 같은 비밀요원(<황당한 외계인: 폴>), 혹은 사회에선 잘나가는 변호사지만 집에선 아내와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허점투성이인 남편(<체인지 업>), 자신의 이름을 도용한 사기꾼에 쩔쩔매며 끌려다니는 어리숙한 가장 (<내 인생을 훔친 사랑스러운 도둑녀>) 등으로 이야기에 따라 조금씩 변주될 뿐이다. 이러한 전형성을 가장 잘 포착한 영화 중 하나가 1편에 이어 2편까지 제작된 <스트레스를 부르는 그 이름 직장상사>일 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최악의 상사 때문에 승진의 기회를 잃을 위기에 놓인 대기업 임원 ‘닉’으로 등장한다. 직업은 다르지만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은 세명의 친구는 각자의 상사를 서로 죽여주기로 합의한다. 이때 닉은 이 3인방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척 굴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어눌함과 어리숙함을 드러냄으로써 인물간 균형을 맞춘다. <텔레그래프>는 제이슨 베이트먼이 만들어내는 이러한 웃음에 대해 영국인인 어머니의 유머감각을 물려받은 ‘건조하고 냉소적인 영국식 위트’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하지만 쉽게 변주, 소비되는 자신의 연기 경력에 대해 그 자신이 경계를 늦춘 것은 아니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못 말리는 패밀리> 이후 저에게 들어온 역할은 모두 다 비슷한 것들뿐이었어요. 하지만 전 그런 영화산업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이건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와 같은 문제예요. 제가 먼저 다른 종류의 연기를 보여주기 전에 그들이 먼저 내게 다른 걸 요구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실제로 <못 말리는 패밀리> 이후 제이슨 베이트먼의 필모그래피는 이미 인정받은 연기를 탄탄히 쌓아나가는 한축과 반대로 자신이 쌓아놓은 이미지를 무너뜨리기 위해 싸우는 다른 한축으로 양분되는 듯하다. 친구의 애인과 사랑에 빠져 일주일 동안 비밀데이트를 즐기는 상류층 예술가로 등장한 <더 롱기스트 위크>에서 그가 보여주는 우아하고 능청스러운 연기는 마치 <매직 인 더 문라이트>(감독 우디 앨런)의 콜린 퍼스를 떠올리게 한다. 과거를 숨긴 채 평온한 가정을 지켜내려는 비열한 욕망을 웃음기 하나 없는 스릴러에 담아낸 <더 기프트>도 눈에 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애니메이션 <주토피아>(여우 닉 와일드 역)나 <비욘드 더 브릭: 어 레고 브릭커먼트리> 등에 목소리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새로운 축의 중요한 동력은 그 자신이 직접 연출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TV시리즈로 지명도를 얻어갈 무렵, 그는 몇몇 에피소드를 직접 연출해 미국감독조합에 최연소(18살)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공식적인 장편영화 데뷔작은 2013년 <배드 워즈>이다. 영화에서 그는 초등학생만 참여할 수 있는 단어대회에 우격다짐으로 참가해 우승을 하기 위해 경쟁자인 아이들에게 온갖 치사한 방해 수작을 부리는 아저씨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집불통 아저씨가 대회에 함께 참가한 한 소년과 ‘우정’을 나눈다는 교과서적 스토리라인을 살짝 걷어내면 그 아래에서 우리는 <부모님과 이혼하는 방법>의 ‘덜 자란 어른’, 벡스터의 모습을 고스란히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아역배우로 활동하느라 ‘보통’ 아이들이 겪었을 법한 평범한 일들을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을 제이슨 베이트먼에게 성장의 경험은 TV드라마 속 가족과 재구성된 사건들이 전부였을 것이다. 게다가 아역 시절의 얼굴을 (희미하지만) 아직 가지고 있는 그에게 ‘성장’은 여전히 큰 숙제처럼 보인다. 겉모습만 커버린 난처한 어른, 어른의 모습을 한 소년. 그가 보여주는 위트나 유머는 어쩌면 이 괴리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연약함 인정하기 <배드 워즈>의 괴팍한 남자 가이(제이슨 베이트먼)는 호텔방을 얻어 쓰기 위해 함께 대회에 참가한 소년 차이타냐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없던 둘은 한 멕시코 식당에 앉아 타코를 먹는다. “나는 너보다 4배쯤 나이가 많아 친구가 될 수 없다”던 가이는 어느 순간 소년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리고 앉아 ‘모든 여자가 젖꼭지가 있는 것은 아니라’ 믿는 소년을 더없이 진지하게 설득하기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못 말리는 패밀리>를 통해 배운 것은 고약한 대사를 하거나 못되게 구는 연기를 하면서 어떻게 그 속에서 인물 내면의 연약한 면을 드러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이건 혐오스러운 것과는 다른 거예요.” 중년 남자와 어린 소년이 서로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이 장면, 꽤 근사하다.

프리퀄 3부작 최종장 <엑스맨: 아포칼립스> 관람 포인트 6가지 미리 짚어보기

한때 망가졌던 <엑스맨> 시리즈는 브라이언 싱어의 손을 거쳐 부활했다. 브라이언 싱어는 시간여행을 통해 기존의 시리즈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얼굴, 새로운 뮤턴트들로 팬들을 열광시켰다. 이제 찰스 자비에 하면 패트릭 스튜어트와 제임스 맥어보이, 매그니토라고 하면 이언 매켈런과 마이클 파스빈더의 얼굴이 동시에 떠오른다. 2011년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로 시작을 알렸던 프리퀄 3부작의 최종작이 드디어 공개를 앞두고 있다. 규모를 키웠다는 말에 오리지널 3부작의 엔딩 <엑스맨: 최후의 전쟁>(2006)을 떠올리며 걱정하는 팬들도 있다. 먼저 공개된 북미 평단의 반응이 기대보다 못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브라이언 싱어가 아닌가. 일단 보고 판단할 문제다. 이에 앞서 <엑스맨: 아포칼립스>의 이모저모를 먼저 짚어보자. 기대도 걱정도 그 후의 문제다. 최강의 적, 최강의 뮤턴트 아포칼립스 태초에 그가 있었다. 아포칼립스는 최초이자 최강의 돌연변이다. 5천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태어난 ‘엔 사바 누르’는 미지의 존재들(원작에서는 외계종족 셀레스티얼)에게 힘을 받아 최초의 뮤턴트로 거듭난다. 강력한 능력을 과시하며 신으로 추앙받던 그는 문명사회를 건설해 인류의 야만성을 없애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다. 긴 잠을 자고 깨어남을 반복하며 그때마다 파괴를 통해 인류를 새로운 곳으로 이끌려 하는 그가 처음으로 일으킨 ‘아포칼립토’는 기원전 3100년 이집트 첫 번째 왕조. 아카바 클랜이라는 충성스런 추종자 집단을 선발해 강자만이 살아남은 세상을 만들었다. 이후 기원전 1900년 소돔과 고모라, 1450년 미노스 문명의 멸망, 1200년 미케네 문명의 멸망, 1070년 이집트 문명의 붕괴, 서기 64년 로마대화재, 79년 폼페이 화산 폭발, 서기 800년 마야 문명 멸망이 모두 그와 아카바 클랜의 작품이라는 설명. 1980년에 깨어난 아포칼립스는 인류의 모습에 다시 한번 실망하고 멸망의 칼날을 휘두르고자 하고, 엑스맨이 여기에 대항한다. 오랜 세월 신으로 살아온 아포칼립스는 그저 수사적인 의미가 아니라 모두 힘을 합쳐야 겨우 저항할 수 있는, 말 그대로 최강의 적이다. 팬들 사이에선 (인기 있는 끝판왕이라는 의미에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타노스와도 비견되는 존재로, 강력한 힘과 텔레파시, 사이킥 능력, 자신의 몸을 분자 단위로 조정해 거대화할 수도 있다. 다른 뮤턴트의 힘을 빼앗거나 강화시킬 수도 있다. 파괴를 통해 세상을 정화하는 지고의 존재는 인류가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지 엑스맨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인사이드 르윈> <엑스 마키나>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 출연한 연기파 배우 오스카 아이삭이 배역을 맡아 한층 신뢰를 더한다. 묵시록의 네 기사들 아포칼립스는 본인의 힘도 강력하지만 종말을 몰고 온다는 묵시록의 네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난다. 단순히 묵시록을 흉내낸 것이 아니라 묵시록이 그를 묘사한 것이라는 추측에 걸맞게 아포칼립스는 뮤턴트의 능력을 증폭시켜 네명의 기사로 만든다. 정복의 백기사는 사이킥 에너지를 두른 칼로 물체를 절단하는 샤일록이다. 원작에서부터 인기 캐릭터로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 짧게 등장하기도 했다. 최대한 원작에 가까운 비주얼로 등장할, 팬들을 위한 선물 같은 캐릭터로 올리비아 문이 캐스팅됐다. 전쟁의 적기사는 <엑스맨> 시리즈의 영원한 악역 매그니토다.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 이후 홀연히 사라졌던 그가 뮤턴트들이 인정받은 평화로운 시대에 왜 다시 아포칼립스의 수하가 되어 돌아왔는지가 관전 포인트 중 하나다. 기근의 흑기사는 <엑스맨> 시리즈 최고 인기 캐릭터 중 하나인 스톰이다. 엑스맨 원년 멤버이기도 한 스톰이 적으로 등장할 수 있는 건 엑스맨 결성 이전인 198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꾸준히 스톰 역을 맡아온 할리 베리 대신 신예 알렉산드라 십이 젊은 시절 스톰을 연기한다. 마지막으로 죽음의 청기사는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도 나왔던 엔젤이다. 사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에서 나온 엔젤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브라이언 싱어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를 통해 시간과 역사를 뒤바꿔놓았기 때문에 출연이 가능했다. 격투 중 날개를 잃고 상심한 엔젤에게 아포칼립스가 자신의 권능으로 기계 몸과 강철 날개를 부여해 한층 강력해진 존재로 등장한다. 익숙하고도 새로운 엑스맨들 거대해진 적에 걸맞게 엑스맨 진영도 한층 강화됐다. 엑스맨 결성 이전 주요 멤버들의 젊은 시절을 만날 수 있는 이번 영화에서는 기존에 익숙한 캐릭터들의 새로운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엑스맨의 리더 사이클롭스는 코믹스에 비해 그동안 영화에서는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얼마나 활약할지 기대를 모은다. 할리우드의 주목받는 아역배우 타이 셰리던이 어느덧 훈훈한 청년이 되어 새로운 사이클롭스를 선보인다. 진 그레이는 오리지널 <엑스맨> 시리즈의 핵심을 담당했던 캐릭터로 원작에서는 이후 초월적인 존재인 피닉스 포스로 거듭난다. 프리퀄 3부작 이후 새로운 <엑스맨> 시리즈가 나온다면 핵심이 될 유력한 캐릭터다. <왕좌의 게임>의 산사 스타크 역으로 국내에도 얼굴을 알린 소피 터너가 캐스팅됐다. <엑스맨2>(2003)에서 백악관에 침입해 대통령 암살 직전까지 갔던 순간이동능력자 나이트 크롤러도 새롭게 태어났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은 “아직 어린 나이트 크롤러는 2편보다 좀더 생기 넘치고 영적이며 순수한 캐릭터”라고 밝혔다. 이들은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로 인해 바뀐 시간 축에 있는 캐릭터들이기 때문에 먼저 등장했던 오리지널 속 캐릭터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선보인 퀵실버도 다시 활약한다. 짐 크로스의 명곡

[칸 스페셜] 칸에서 첫 공개된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연상호 감독의 데뷔작 장편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은 선명한 주제와 만듦새를 갖춘 영화였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이 남았다. 이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할 필연성이 있을까? 반대로 말하면 <돼지의 왕>은, 연상호 감독이 연출한 실사영화는 어떨까 절로 상상하게 만드는 애니메이션이기도 했다. 그리고 <부산행>은, 긴 시간이 흐른 다음 그 물음에 대해 마침내 돌아온 대답이다. <부산행>은 좀비 바이러스로 점화되는 재난 스릴러다. 아내와 별거 중인 펀드매니저 석우(공유)는 일에 바빠 소원하게 지낸 딸 수안(김수안)의 생일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아내가 사는 부산으로 향하는 KTX에 오른다. 그러나 열차는 좀비의 침투와 연쇄 감염으로 이내 아수라장으로 화한다. 전국을 초토화한 재앙의 뉴스를 차내 방송으로 접한 승객에게 남은 희망은, 유일하게 초기 대응에 성공한 도시 부산까지 살아남은 채 도착하는 것뿐이다. 좀비 호러는 언제나 인간의 이기적 본능과 군중심리에 대한 통찰을 내포한다. <부산행>은 그러나 메타포로 만족하지 않는다. 좀비 바이러스의 연원과 재앙에 대한 정부와 시민들의 대처 방식을 통해 지금 자본주의 한국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요약해 보이고자 한다. 이 영화의 좀비는 ‘괴물2’라는 별명을 주고 싶을 만큼 봉준호 감독의 그것과 극적 기능이 유사하지만 연상호 감독은 직설화법을 택했다. <부산행>의 주인공도 <괴물>의 박강두(송강호)가 그랬듯, 자기 먹고살기 바쁜 평범한 시민이지만 끝내는 내 아이뿐 아니라 이웃의 아이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설국열차>가 계급에 따라 승객이 탑승할 칸을 배정했다면 <부산행>에서는 좀비와 얼마나 떨어진 칸에 있느냐가 인물들의 태도에 작용한다. 영화의 중심은 열차가 출발하기 전부터 관객이 지켜본 석우 부녀지만, <부산행>이 그리려는 사회적 축도와 장르적 쾌감은 다양한 인물로 완성된다. <반지의 제왕>의 김리처럼 완력과 귀여움을 겸비한 남자(마동석), 그가 유일하게 쩔쩔매는 쿨한 성격의 아내(정유미), 막 사랑을 시작하려는 해맑은 10대 소년과 소녀, 결코 손해보지 않는 ‘갑’의 자리가 익숙한 중년 남자가 <부산행>의 동승자들이다. 요컨대 <부산행>이 그리려는 것은 개인의 초상이 아니라 군상이다. 극중 인물들은 주로 타인과 공동체를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단정하고 치밀하게- 어쩌면 지나치게 일사불란하게- 빚어져 있다. 이중에서도 <부산행>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을 배우는, 매력을 발산하기 좋은 역할을 얻은 마동석으로 보인다. 할머니부터 소녀까지 여성 캐릭터들은 주어진 설정 안에서는 충분히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그러나 설정 자체가 구조받는 입장에 치우쳐 있다. 액션 스릴러로서 <부산행>은 열차와 철로라는 길고 좁은 공간을 활용한 동선과 안무, 좀비들의 생태에 부여한 몇몇 설정에 기초한 세트피스를 보여준다(극중 사건이 열차 안에서만 일어나는 영화는 아니다). 이야기도 잘 갈무리된 편이다. 액션은 물론 감정과 관련된 복선들도 방치되는 가닥 없이 제대로 매듭지어진다. CG 효과와 군중 신 연출은 세련된 편이 아니지만 <부산행>에는 그것을 문제삼지 않도록 만드는 에너지가 있다. 무엇보다 연상호 감독은 좀비 바이러스를 그저 괴물을 불러낸 원흉으로만 쓰지 않았다. 좀비로 변태해 에고를 잃어버리고 식욕만 남은 사람들은, 이성적 자아로 통제해 온 마음 깊은 곳의 감정을 노출한다. 좀비에게 아직 물리지 않은 사람들도 대처 방식에 따라 성격의 일단을 드러낸다. 이런 섬세한 연출에 비하면, 절절한 가족애를 강조하는 장면의 과한 감상성은 다소 의아하다. 배우의 표현이나 장면의 지속시간이 관객이 느끼는 감정보다 길게 늘어진다. 제69회 칸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페셜 부문에서 상영된 <부산행>에 대한 반응은 감독과 배우가 참석하지 않은 언론시사에서 기자들이 박수로 의사를 표시할 만큼 호의적이었다. 어떤 조건의 관객으로부터도 웃음과 비명을 끌어내는 흥행성을 지닌 스릴러지만 <부산행>을 보면서 유독 종종 눈물을 참지 못할 관객은 한국에 있다. <부산행>의 바이러스 재앙을 암시하는 첫 에피소드가 사슴의 로드킬이라는 점은, 이 영화의 동력이 약자를 보호하지 못한 슬픔과 분노에 있음을 짐작게 한다. 전국이 혼란에 휩싸인 상황에서 “정부가 잘 대응해서 수습하고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메시지가 방송될 때, 주인공이 “다 구할 수도 있었잖아요!”라고 분노할 때, 우리의 마음은 도리없이 영화를 통해 4월16일의 차가운 물속으로 돌아간다. 연상호 감독은 배의 자리에 기차를 놓고 물의 자리에 좀비를 놓고 픽션을 지어올림으로써 분노하는 동시에 자성하고 위안하는 듯하다. 세월호를 한국영화의 스크린이 거듭 소환하는 것은 앞으로 불가피한 수순일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고 중요한 사태였기 때문이다. <부산행>은 아직 식지 않은 마음으로 직사(直射)한 그 신호탄처럼 보인다. <부산행> 현지 매체 반응 <부산행>이 공개된 뒤 해외 매체들은 “단순한 좀비영화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생생하게 풍자하는 작품”이라는 공통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조연인 마동석이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라고 특별히 언급한 반응도 많았다. 프랑스와 북미 매체 반응을 각각 두개씩 소개한다. <텔레라마>_“영화를 보기 전까지 우리는 살아 있는 시체를 소재로 한 영화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믿었다. 한국 좀비들이 서양의 동족에 비해 우세한 점이 있다면, 그들은 ZGV(프랑스의 KTX 열차.-편집자)처럼 아주 빠르다는 사실이다. 조지 A. 로메로 영화에서 찢어진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얼이 빠진 듯한 얼굴로 느리게 이동하는 좀비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국 좀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먹이의 뒤를 전속력으로 쫓아가는 굶주린 쥐떼 같다. <부산행>은 이같은 공포를 레일 위에 올려놓는다. 로메로 영화가 그렇듯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살육 게임의 환희는 정치판의 작은 콩트다. 이것은 단순히 전염병의 원인이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와 신뢰할 수 없는 생화학 공장의 투기로 인해 생겨난 부작용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좀비들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 돕는 것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유머러스하면서도 아주 폭력적인 방법으로 전달하고 있다.” <아르테TV>_“한국 블록버스터 <부산행>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다르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만든 이 대형 프로젝트는 B급영화의 다이내믹한 완성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동시에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정치•사회적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전달해내기까지 한다.” <트위치필름>_“전형적인 캐릭터 사이에서 인상적인 인물은 헤라클레스 같은 ‘몸짱’ 마동석이다. 거칠면서도 순수해 입체적이고, 또 유머러스한 그는 액션 시퀀스에서 가장 눈에 띈다. 영화를 보면 마동석이 주인공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길 것이다.” <버라이어티>_“<설국열차>가 그랬듯이 <부산행>도 계급 차이에서 오는 윤리와 계급적인 반란을 잘 풍자했다. 애니메이션 연출작들에 비하면 좀더 많은 관객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연출했지만 말이다. 아시아 장르영화를 찾는 바이어들은 <부산행>에 탑승해야 할 것이다.”

최초의 돌연변이 아포칼립스가 깨어난다 <엑스맨: 아포칼립스>

매그니토(마이클 파스빈더)와 미스틱(제니퍼 로렌스)이 돌연변이로서의 능력을 세상에 공개했던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2014)의 ‘워싱턴 사건’으로부터 10년이 흐른 1983년. 고대 이집트에서 신으로 숭배받았던 최초의 돌연변이 아포칼립스(오스카 아이삭)가 오랜 잠에서 깨어난다. 초능력을 흡수해가며 수천년을 살아온 아포칼립스는 스톰(알렉산드라 십), 사일록(올리비아 문), 아크엔젤(벤 하디) 그리고 매그니토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준 뒤, 그들과 함께 현재의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려 한다. 찰스 자비에(제임스 맥어보이)와 미스틱은 아포칼립스의 지구 종말 계획을 알아채고, 진 그레이(소피 터너), 사이클롭스(타이 셰리던), 퀵 실버(에반 피터스), 나이트크롤러(코디 스밋 맥피) 등 젊은 돌연변이들과 함께 아포칼립스에 대항한다. <엑스맨: 아포칼립스>는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2011),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 이은 <엑스맨> 프리퀄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데, 사실상 프리퀄 이후, 다음 시리즈를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매그니토와 프로페서 X, 울버린과 미스틱의 이후를 고려한 듯한 영화는 돌연변이들의 세대교체로 다음편을 예고한다. 이번 영화에선 강력한 텔레파시와 염동력을 지닌 진 그레이의 활약이 돋보이며, 나이트크롤러와 퀵 실버도 계속해서 눈여겨봐야 할 캐릭터다. 약점 없어 보이는 강력한 적과의 막판 대결이 조금은 허무하게 매듭지어지는 느낌이지만, 엑스맨의 세계를 확장해가는 브라이언 싱어의 태도는 여전히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