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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내 인생의 영화] 한성천의 <스타워즈> 시리즈

어린 시절,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될 때까지 기관지천식을 심하게 앓았으므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부유하지 않은 환경이었지만 내 방엔 다른 친구들 집엔 없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고, 조립해 만들 수 있는 장난감들이 가득했다. 매일 장난감을 조립하고 공상과학 소설들을 즐겨 읽으며 텔레비전에 나오는 <브이>나 <전격 Z작전>을 시청하던 어느 날, <주말의 명화>였는지 <토요명화>였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어디선가 방영한 <스타워즈>를 보게 되었다.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한 지구라는 별은 영화에 등장조차 하지 않았다. 등장했다 치더라도 지구는 작은 변두리 행성 중 하나로 나왔을 것이다. 그 세계 안에선 우주의 다양한 종족들이 거대한 연합을 이루어 살고, 그 연합을 무너뜨리기 위해 제국이라는 또 하나의 집단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자리한 포스라는 신비한 힘. 빛과 어둠의 양면을 가지고 있는 힘. 그리고 그 힘을 가진 제다이 기사들과, 자신에게 전 우주의 균형을 맞출 거대한 포스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살던 주인공. 다음날 나는 일어나자마자 비디오 가게로 달려갔다. 세편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빌려 내리 세편을 다 보았다. 동서양의 철학을 동시에 담고 있고, 부자 관계로 얽힌 출생의 비밀이 존재한다. 평범한 세계에 살던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의 힘을 깨닫는다. 그 힘으로 인해 몸담은 세계로부터 단절되며, 다른 곳에서 능력을 연마하고 돌아와 악을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다. 이 시리즈가 히어로물의 법칙을 완벽히 준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는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영화를 접했기에 충격이 컸다. 지금 생각해봐도 “I’m your father”라는 다스 베이더의 대사에 입을 다물지 못한 내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면서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저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단지 병치레로 인해 집에만 있던 한 아이가 화면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영화에 압도되어 그 영화에 빠지고, 나에게도 그런 포스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했던 날들을 떠올려본다. 어느새 훌쩍 나이를 먹어버린 지금도 여전히 <스타워즈> 시리즈를 사랑하며 다음 시리즈를 기다린다. 포스가 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아직 철이 안 들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시대가 영화보다 더 말도 안 되게 돌아가고 있고, 힘 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농락하며, 드러난 죄마저 부정하면서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에 분개한다. 난세엔 영웅이 탄생하고 정의는 반드시 승리하는 법. 우리나라에도 루크 스카이워커 같은 영웅이 나타나 포스의 힘으로 국민들을 농락한 주범들을 물리쳐주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배우의 길을 열심히 걷고 있고, 미숙하지만 계속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영화인으로서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스타워즈> 시리즈 같은 멋진 영화를 만드는 날이 오길 기대해본다. <스타워즈> 속 대사처럼, 우리 국민 모두에게 포스가 함께하길 기원하며. May the Force be with you. 한성천 배우. <용서받지 못한 자>(2005), <577 프로젝트>(2012), <롤러코스터>(2013), <소시민>(2015), <터널>(2016) 등에 출연했다. 언젠가 시나리오작가로 데뷔할 날을 꿈꾸는 중.

[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와 엘리 슈라키의 <격노의 사나이>

예전에는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의 직업군이 대부분 형사, 군인 아니면 범죄자, 자경단이었다. 그들은 법의 집행자가 아니라면 반대로 범법자였고, 그 공권력마저도 위법하게, 지극히 사(私)적으로 집행하는 일이 예사였다. 그들은 위험한 외톨이들이었다. 생겨먹은 성격이 처음부터 고집불통에 수구꼴통인 그들은 걸어다니는 인간흉기였고, 항상 개인적인 원한과 증오에 불타는 프로페셔널이었다. 나는 그런 영화들을 좋아했고 거기 나오는 그런 남자들을 사랑했다. 사실 지금도 좋아한다. 하지만 솔직히 인정하자. 그들은 모두 각자 나름의 파시스트였다는 걸. 요즘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의 직업은 대체로 무엇일까? 글쎄, 외국은 슈퍼히어로와 스파이라면 한국은 검사와 조폭? 통틀어 직장인 아니면 아빠라고 하면 어떨까. 법이 곧 정의를 상징하던 시대는 지났다. 위험한 외톨이는 주인공쪽에선 사라지는 추세다. 론 울프는 주로 테러범을 칭하는 말이 되었다. 영웅이든 악당이든 남자들은 모두 어딘가 시스템에 소속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만큼 숭고한 직업이다. 그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가정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시스템의 노예가 된다. 남은 외톨이는 시스템에 똑같이 당하기 싫은 소년, 소녀들이다. 은퇴 후 알코올 중독자가 된 특수부대 출신 전직 정부 요원이 어느 부호의 딸을 경호한다. 과거에 자신이 했던 짓들 때문에 번뇌하는 괴물은 천진한 어린이와의 유대를 통해 닫힌 마음을 연다. 하지만 업보 탓인지 씻김은 정녕 불가능하니, 악당이 나타나 그에게서 소녀를 납치하고 부모에게 거액의 돈을 요구한다. 납치범에게 돈을 건네는 일은 중간에 틀어지고, 소녀는 아무래도 죽은 것 같다. 죽다 살아난 이 괴물에게 남은 일은 그의 전공인 파괴와 살육을 통한 철저한 앙갚음이다. 전형적인 어느 남자 영화의 플롯. 온갖 베리에이션이 나온 원형.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2004)를 보았을 때, 나는 이런 식의 남자 영화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세대에 우세했던 종(種)이 이제 멸망, 곧 소멸하게 될 거란 감각이었다. 뤽 베송의 <레옹>(1994)은 돌이켜보면 중년 남자와 10대 소녀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유대도 연대도 아닌 분명한 사랑이다. 소녀는 괴물을 사랑하고 괴물도 소녀를 사랑한다. 그래서 괴물은 소녀 대신 죽는다. 그러나 마지막 보이스카우트 토니 스콧은 차마 그런 사랑을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맨 온 파이어>의 괴물과 소녀는 이상한 부녀 관계에서 머문다. 소녀가 잡혀가자 영화는 본래 목적을 실행한다. 그것은 남자의 파괴와 살육이다. 애초에 소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폭력의 이미지가 부족한 정서 위에 넘쳐흐른다. 복수의 이유인 소녀는 현란한 편집 효과로만 존재한다. 아이의 죽음을 쉽게 소모해서는 안 된다 대중이 이입하기 쉬운 감정 중 하나는 자식 잃은 부모의 원한이다. 자식을 빼앗긴 부모의 분노는 너무 당연하기에 오히려 이야기를 만들 때 의심해봐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우리가 짓는 이야기도 너무 쉽게 아이들을 잡아가거나 죽이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이 잔인한 세상에서 내 자식을 무사히 키울 수 있을지에 대한 공포의 반영이며 남의 자식 역시 귀한 줄 알라는 교훈을 주지만, 그것이 주인공의 폭력을 설명할 막연한 동기로 소모되어서는 위험하다. 사라진 옆집 아이를 구하러 간 아저씨의 회상에 굳이 트럭에 치인 임신한 아내까지 나오는 건 과도하다(<아저씨>). 심지어는 자식 대신 키우던 개 때문에 한 조직을 괴멸시키는 남자도 나왔듯이(<존 윅>), 오로지 필요를 위한 동기는 때론 있으나 마나 한 이유가 된다. 진실 비슷한 것은 결국 진실이 아니며, 패러디는 진실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나 역시 내 영화에서 진실 비스름한 이유를 격렬한 고민 없이 써먹었다. 이 남자를 관객이 알 만큼 고통스럽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식을 죽이자. 맙소사. 이런 식의 창작은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죄스러운 일이다. <맨 온 파이어>에서 남자의 분노와 복수의 명분은 바로 이 지점에서 애매모호하다. 그는 어쨌거나 소녀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의 복수는 엄밀히 말해 부모의 대행이고 애초에 그럴 권리가 없을뿐더러 있다고 한들 지나치다. 물론 어린이 유괴와 살인은 모두가 분노할 일이지만, 공권력이나 자경단이 아닌 남자에게 그 모든 폭력의 이유로는 동기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이 남자도 한때 아빠였다는 식으로 덧붙일 것인가? 주인공의 비등점에 도달해서 선을 넘어야만 이후의 폭력이 용인되는 것은 편협한 남자 영화가 가지는 최소한의 내부 논리다. 그는 왜 선을 넘어버렸는가? 괴물과 소녀의 ‘사랑’은 죽어도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먼저 영화로 만들었던 엘리 슈라키의 <격노의 사나이>(1987)는 그 이유를 ‘우정’ 때문이라고 답한다. 사랑이 아니라 우정 때문에 오프닝에서 이미 시체 자루에 담겨 있는 남자는 “이것이 바로 나의 마지막 모습이다”라고 말한다. 죽은 남자의 무덤덤한 내레이션으로 이어지는 영화는 그가 왜 여기에 죽어 있는지의 이유로 향한다. 우리에겐 FBI 국장급 전문 배우로 낯익은 스콧 글렌이 온갖 전쟁터를 겪은 전직 CIA 요원으로 나오는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이 남자 역시 과거에 얽매여 마음을 닫고 산다. 그가 경호해야 할 소녀는 첫 만남에 대뜸 자신이 제일 좋아한다는 책을 내민다.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에서 소녀가 읽어주는 부분은 이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에겐 가족이 없지. 무슨 일을 당해도 아무도 신경 안 써. 하지만 우리는 달라. 나한테는 네가, 너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우리에겐 서로가 있으니까 괜찮아.” 처음에 남자와 관객은 이 구절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 영화를 따라가다 남자와 소녀를 떠나서 두 외톨이가 만나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에야 이 구절은 가슴을 치는 비등점으로 작동한다. 이 구절은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레니’의 대사다.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이는 법”이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을 연상시키는 레니는 자기 손에 들어온 사랑스러운 짐승들을 쓰다듬다 끝내 죽여버리고 마는, 큰 덩치에 괴력만 지닌 모자란 남자다. 영화 속 소녀는 재미있게도 자신을 경호하는 남자를 이 이름으로 칭한다. <격노의 사나이>는 극중 부모의 비중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를 오로지 남자와 소녀의 이야기로 몰고 간다. 그들이 어떻게 우정을 쌓는지가 중요하고, 소녀가 납치되었을 때 남자가 어떻게 대응하는지만 중요하다. 온몸으로 총알을 맞아가면서 절뚝거리며 소녀를 찾는 남자의 행적은 복수라기보다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무자비하게 악당을 처치하는 통쾌함은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일견 이상할 정도로, 당연히 필요해 보이는 신들을 찍지 않았거나 최종 편집에서 집어넣지 않았다. <맨 온 파이어>에서 남자와 소녀는 죽음 앞에서 다시 만나고 둘이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고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모든 말을 하고 그 모든 액션과 리액션은 영화에 오롯이 담겨 감정의 폭발을 부추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당연한 장면이 없다. 고전을 인용하는 반칙을 써먹은 대신, 관객의 눈물을 짜낼 직접적인 대사 하나 허용하지 않는다. 영화의 절정에는 둘이 시체처럼 나란히 누운 장면과, 처음으로 돌아가는 죽음만 있다. 에필로그의 앵글도 멀리서 잡았다. 그런데 눈물이 흐른다. 나는 이제 어떤 장면을 찍은 영화보다 어떤 장면을 안 찍은 영화에 놀란다. 온갖 장면이 넘치는 영화보다 특별히 선택한 장면만 있는 영화에 경외감을 느낀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였다. 1991년 4월27일 토요일은 한 소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한 텔레비전 편성이 있던 날이었다. KBS2에서 오후에 뜬금없이 이 <격노의 사나이>를 특선영화로 틀어주었다. 이때 제목은 <제2의 인생>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스포일러가 아니라 중의적인, 꽤 근사한 제목을 붙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밤에는 MBC에서 마틴 스코시즈의 <택시 드라이버>(1976)를 방영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이 두 영화 중 한 영화라도 안 보았으면 좋겠다. 아무튼 나는 토니 스콧의 <맨 온 파이어>를 보고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남자 영화가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고,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정말로 한 시대가 끝난 듯 서글펐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마지막 남자 영화를 본 날은 1991년 4월의 어느 날이었는지도 모른다.

[스페셜] 아버지와 딸의 가면놀이 <토니 에드만>

독일의 여성감독 마렌 아데가 연출한 <토니 에드만>의 주인공은 괴짜 아빠와 워커홀릭 딸이다. 독립한 딸의 집을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부녀지간의 이야기는 농담과 장난이 몸에 밴 아버지의 예측 불허 행동으로 점점 우스꽝스러워진다. <토니 에드만>의 특별한 농담과 극단적 장난이 왜 이토록 웃픈지 생각해보았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유력한 수상 후보였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수상작으로 강력히 점쳐졌던 독일영화 <토니 에드만>은 결국 양쪽 모두에서 수상에 실패했다. 칸국제영화제는 켄 로치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에 황금종려상을 안겼고 오스카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세일즈맨>(2016)에 영광을 안겼다. 물론 <토니 에드만>은 그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넘치도록 상을 받았지만 왠지 저 두번의 수상 실패가 영화 자체와는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무엇 하나 뻔하지 않은 이 영화가 끝까지 특별하게 남은 느낌이랄까. <토니 에드만>은 모두가 같은 타이밍에 박수치고 웃음을 터뜨리며 신나게 관람할 수 있는 코미디 영화가 아니다. 인생의 무수한 실패들을 모아놓았는데 결국엔 희극이 되고 마는 우리의 삶을 이네스와 빈프리트 부녀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이 영화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을 떠올리게도 한다. 가장 미지의 존재, 가족 가족의 굴레, 가족 안의 역할놀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모는 부모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역할을 꿋꿋이 수행할 때 가족 내 분란은 줄어든다. 하지만 자식이 성인이 되고 독립을 하고 나면 부모와 자식의 삶에는 점차 공통의 분모가 줄어들기 마련이다. 가장 가까운 관계이기에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던 가족의 존재가 어쩌면 가장 미지의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 <토니 에드만>의 이야기는 거기서 출발한다. 농담과 장난이 일상인 은퇴한 피아노 교사 빈프리트(페테르 시모니슈에크)는 기업 컨설턴트로 일하는 성공한 딸 이네스(산드라 휠러)를 만나러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간다. 이 즉흥적 방문으로 빈프리트가 확인하려 했던 것은 그저 딸의 안부였을지도 모른다. 반면 계획에도 없이 아버지를 맞이한 이네스는 역할놀이에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업무와 관계된 자리에 동석한 아버지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장난을 칠 땐 난감하기까지 하다. 빈프리트 입장에선 직업인으로서의 딸의 모습이 오히려 당황스럽다. 중요한 사업 관계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언제든 상대가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네스의 모습은 자신이 상상하던 딸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내심이 바닥난 두 사람은 결국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냐!” “인생에 방귀 쿠션 장난 말고 다른 계획은 있어요?”라는 말들을 날리며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뿔난 말들을 뱉고 난 뒤 찾아온 죄책감은 다시 부녀지간을 (일시적으로) 봉합한다. 결국 빈프리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싸고 이네스는 아버지를 배웅하며 베란다에서 눈물을 훔친다. 그때부터 어색한 가면놀이가 아닌 진짜 가면놀이가 시작된다. 성공한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하고 싶고 착한 딸 노릇에도 충실하고 싶은 이네스는 그러한 관계의 봉합에 만족하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빈프리트는 딸과의 진짜 소통을 위한 충동적 계획을 실행한다. 그것은 토니 에드만으로의 변신이다. 빈프리트는 토니 에드만이 되어 이네스 앞에 나타난다. 뻐드렁니 모양의 틀니를 끼고 덥수룩한 가발을 얹어 완성한 토니 에드만의 외형은 누가 봐도 우스꽝스럽다. 테니스 선수 티리악의 매니저라느니 독일 대사라느니 하는 신분 위장도 허술하긴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속을 헤아리기 힘든 이네스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버지이지만 아버지가 아닌) 토니 에드만을 상대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겐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음지의 삶들을 꺼내 보인다. 아버지와 딸이 아닌 이네스와 토니 에드만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빈프리트의 변신은 영화 내내 특정한 웃음 효과를 자아낸다. 토니 에드만으로서의 역할놀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빈프리트는 이미 수시로 틀니를 꺼내 끼며 혼자만의 가면놀이를 즐겼다. 앞니가 드러나 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조금은 멍청해 보이는 뻐드렁니의 위장 효과는 상당하다. 빈프리트가 언제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도 가상의 인물 토니를 소환하는 빈프리트의 장난인데, 빈프리트는 택배 기사로부터 물건을 받는 일조차 평범하게 넘어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가상의 존재인) 동생 토니가 물건을 주문한 것 같다며 문 앞에서 사라진 빈프리트는 분장을 마치고 돌아와 토니인 척하고 물건을 건네받는다. 택배 기사는 나이 지긋한 고객의 장난에 어떻게 맞장구쳐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다가 화면에서 퇴장한다. 대개 빈프리트의 농담과 장난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듯 불발되기 일쑤다. 때와 장소는 물론이고 상대의 의중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 장난이 대부분이라서 그렇다. 빈프리트가 회사 로비에서 이네스를 기다리다 그녀가 등장하자 슬쩍 틀니를 꺼내 끼고 무리의 일원인 것처럼 합류해 걸어가는 것도 불발된 장난이었고, 파티에서 마약을 한 딸에게 다음날 수갑을 채운 것도 상대를 곤란하게 만든 장난이었다. 결정적으로 장갑을 끼지 않은 시추공에게 장난을 쳤다가 일자리를 잃게 만드는 장면은 빈프리트가 사는 농담의 세계와 딸 이네스가 사는 현실 세계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유머를 잃지 마세요”라는 빈프리트의 말은 진심이 담긴 위로이기도 하지만 이네스에겐 가혹한 말처럼 들린다. 이처럼 모든게 의도와는 무관하게 빗나가는 농담과 장난은 연쇄 부작용을 일으킨다. 하지만 소통의 실패는 불통이 아니라 단절이다. 그러므로 빈프리트의 농담과 장난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도된다는 점에서 더없이 낙천적인 소통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중했던 순간들은 붙잡을 수 없다 빈프리트가 토니 에드만을 창조한 것은 마렌 아데 감독의 말처럼 “절박함” 때문이었다. “유머는 종종 현실을 감당하는 도구가 되는데 그 말은 곧 유머가 언제나 고통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빈프리트는 그 방법 외에는 딸에게 다가갈 방법이 없다. 유머는 빈프리트의 유일한 무기이고 그걸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유머가 유일한 무기인 아버지는 또한 쉽게 패배감에 젖지 않는다. 극단적 선택을 한 마당에 물러날 곳도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딸의 불편한 동행이 지칠 만큼 반복되던 때, 남의 가족 잔치에 찾아간 빈프리트는 환대에 대한 답례로 노래 선물을 하겠다며 피아노 앞에 앉아 휘트니 휴스턴의 을 연주한다. 물론 그 노래를 불러야 할 사람은 휘트니 쉬눅으로 소개된 이네스다. “난 아이들이 우리의 미래란 것을 믿어요.… 가장 위대한 사랑을 하는 게 어려운게 아니에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게 가장 위대한 사랑이에요.” 어쩌면 아버지가 딸에게 해주고픈 말이 담긴 노래, (가사를 모두 외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어쩌면 이네스가 어릴 적 아버지와 자주 불렀을 그 노래는 빈프리트가 꺼낸 비장의 카드였다. 이네스는 열창하는 것으로 그 자리에서 예의를 다하지만 “요란한 방식으로 손을 내미는” 아버지의 손을 끝내 맞잡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네스에게 토니 에드만의 존재는 무용했을까. 마렌 아데 감독은 안일하게 관계의 회복과 소통의 가능성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냉소적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지도 않는다. 우리의 삶이 이별과 실패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하더라도 그 인생이 희극이길 바라며 꿋꿋이 유머를 이어갈 뿐이다. 영화에는 여러 이별의 순간이 등장한다. 빈프리트는 함께 살던 늙은 개 빌리와 노모의 죽음을 맞고, 먼 도시에 사는 딸과도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다. 뜨거운 작별 인사도 없이 사랑하는 존재들을 떠나보내는 빈프리트는 그래서 유머의 힘에 인생을 맡긴다. 의 열창을 시작으로 영화의 마지막 30여분은 거대한 농담들로 채워지는데, 빈프리트가 절박함에 토니 에드만을 창조했듯 이네스의 절박함은 즉흥 나체 생일파티를 여는 것으로 발현된다. 불가리아의 전통 탈 쿠케리를 뒤집어쓰고 거대한 털북숭이가 되어 나타난 빈프리트는 마치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난 듯 알몸을 하고 있는 이네스와 마주한다. 전에 본 적 없는 딸의 모습이고 아버지의 모습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이네스는 진작 모든 것을 내려놓은 아버지가 얼마나 절박하게 소통하려 했는지 알게 된다. 그제야 이네스는 아버지의 품에 안긴다. 부쿠레슈티에서 벌어진 아버지와 딸의 극단적 가면놀이는 그렇게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꼴로 마무리된다. 영화가 끝나고도 문득문득 생각나는 장면 중 하나는 자신의 집 마당에서 잠들었다 깬 빈프리트가 마당 한구석에 죽어 있는 빌리를 발견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아침마다 혼자 눈을 뜨고 밤이면 혼자 눈을 감는다. 언젠가 다시는 아침에 눈뜨지 못할 날이 올 테고, 그러기 전까지는 아등바등 살아갈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빈프리트는 인생에서 중요한 게 뭐냐는 딸의 질문에 미뤘던 대답을 한다. 대답은 평범하다. 이것저것 하다보면 인생이 훌쩍 흘러가고 소중했던 순간들은 붙잡아둘 수 없다는 얘기들이다. 아버지는 딸에게 농담으로 포장하지 않은 진담을 담담히 전한다. 하찮은 농담과 불발된 장난들로 쌓아올린 이야기는 결국 거창하지 않은 진담과 평범한 진심에 가닿는다. <토니 에드만>의 위로는 그렇게 영리하고 따뜻하다. 독일영화의 현재 마렌 아데 감독을 주목하라 독일의 여성감독 마렌 아데는 매 작품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빛나는 코미디 감각을 보여주었다. 1976년 독일에서 태어나 뮌헨 텔레비전필름스쿨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2003년에 첫 장편 <나만의 숲>(2003)을 완성한다. 도시의 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한 멜라니가 새로 사귄 친구 티나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인 <나만의 숲>은 2005년 선댄스영화제에서 월드시네마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두 번째 장편 <에브리원 엘스>(2009)는 휴양지의 커플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사랑에 빠진 주인공 커플은 자신들보다 더 행복하고 완벽해 보이는 커플을 만나면서 혼란스런 감정에 휩싸인다. 영화는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그 감정의 본질을 정곡을 찌르듯 묘사한다. <에브리원 엘스>는 2009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과 여우주연상(버짓 미니크마이어)을 수상하는데, 이 수상으로 마렌 아데 감독은 독일 영화의 새로운 기대주로 부상한다. 7년 만에 선보인 <토니 에드만>은 2016년 칸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는 등 전세계 영화인들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다. 그로써 마렌 아데 감독은 명실공히 독일영화의 현재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댓글뉴스] <닥터 두리틀>에 캐스팅 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닥터 두리틀> 시리즈에 캐스팅됐다 =영국 작가 휴 로프팅이 탄생시킨 캐릭터 ‘닥터 두리틀’을 주인공으로 한 새 시리즈영화에서 그는 닥터 두리틀을 연기할 예정이다. 각본과 연출은 최근 <골드>를 연출한 스티븐 개건 감독이 맡는다. 원작에서처럼 1920년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질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미국작가조합(WGA)이 또다시 파업 위기다 =영화 및 텔레비전 제작자협회(AMPTP)가 미국작가조합과 새로운 계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최근 넷플릭스, 훌루, 아마존등 스트리밍 서비스 플랫폼은 급성장하고 있지만 작가들과의 수익 배분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한 데 따른 조처다. 언론에서는 작가조합과 5월1일까지 합의가 되지 않으면 2007년 파업 사태가 재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매트릭스> 시리즈, 다시 만들어진다 =워너브러더스가 SF 걸작 <매트릭스> 시리즈를 다시 만들 기획 개발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제작자 조엘 실버가 초기 아이디어를 개발하다가 판권을 스튜디오에 넘긴 이후 본격적인 기획이 시작된 것. 리부트나 리메이크 제작은 아니고 다른 형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리지널 시리즈의 연출자 워쇼스키 자매의 참여 여부는 미정이다.

[한유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기억하리라, 이 모든 것을

나는 주로 새벽에 밀린 집안일을 해치운다. 바닥의 먼지를 닦거나 수건을 개는 동안의 적막이 싫어서 대개 노트북으로 전날 저녁의 뉴스를 틀어둔다. 그러다보면 자연히 어떤 목소리는 흘려듣게 된다. 탄핵정국과 관련된 뉴스들도 대개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가끔, 나도 모르게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노트북 화면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어떤 소리가 들려서다. 그 소리가 들리면 나는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화면만 바라볼 뿐이다. 그때 화면에는 보통 위에서 내려다본 배와 바다가 나타나 있다. 자막 영역에는 ‘팽목항’이나 ‘7시간’ 등의 단어가 지나가고 있다. 몇번이고 본 장면이다. 그러나 늘 똑바로 볼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모든 동작을 멈추고 그 장면을 보도록 하는 소리가 헬리콥터의 소음이라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늦게야 인지하게 되었다. 물론 헬리콥터 소음이 세월호 관련 뉴스가 나올 때만 들리지는 않는다. 고속도로 귀경길 정체나 강의 녹조류 관련 뉴스를 보도할 때도 대부분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작은 노트북 화면을 메운 영상이 배나 바다와는 전혀 관계가 없을 때에도, 나는 어김없이 배와 바다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이 지나가고 다음 뉴스가 이어지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그러모으고 수건들을 차곡차곡 접으면서 이처럼 하찮지만 소중한 일상을 잃어버린 상태를 감히 상상하고, 곧 실패한다. 그리고 세월호가 다시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세월호 인양과 맞물려 전직 대통령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이 과정들을 지켜보면서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난다”는 표현을 생각했다. 나는 가끔 내가 굳이 소설을 쓰게 된 이유가 궁금했고, 법과 같은 언어로 밝히기 힘든 애매한 것들을 소설로 쓸 수 있기 때문일 거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2주 전에 있었던 헌법재판소 판결전문을 읽을 때는 법의 언어로만 밝힐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라는 접속부사가 어떤 서사적 장치 못지않게 긴장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도. 이제 진실이 인양되었으니 그것을 명확하고 빛나는 언어로 밝혀야 할 것이다. 이 말들은 잊히지도, 다시 가라앉지도, 사라지지도, 어두워지지도 않을 것이다. 텔레비전이든 노트북이든 화면에서 헬리콥터 소음이 들려오면 반사적으로 3년 전의 그날을 생각할 것이고, 소리가 들려오지 않더라도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내게 민주시민사회의 구성원이 할 수 있는 일들의 가장 작은 한 부분이다.

[스페셜] 오는 6월, 여섯 번째 신작 <옥자> 공개하는 감독 봉준호

<옥자>를 찾아서 -<옥자>를 자꾸 ‘봉자’라고 잘못 부르게 됩니다. 저만 그런가요? =많아요. ‘봉자’, ‘영자’, ‘순자’ 등등. (웃음) -캐릭터 작명 과정을 즐기시는 걸로 알아요. <옥자>에는 동물 옥자와 소녀 미자가 나오고 <플란다스의 개>에서는 실종된 반려견 이름이 순자였는데요. <옥자>(OKJA)라고 하면 미국 관객은 이름인 줄도 모르겠어요. =영어권에선 재미있어해요. ‘오케이 자’라고도 읽고 틸다 스윈튼을 비롯한 출연배우들도 “억자”라고 발음하며 신기해해요. 최고로 촌스러운 일제강점기 작명 패턴의 이름이라고 설명했는데 미국에서도 마거릿 같은 이름이 도시 여성들이 질겁하는 구식 이름이라고 하더라고요. -티저 예고편에서 옥자는 거대한 돼지로 보이는데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동물인가요? =유전자 조작은 아니고 친환경 육종이랄까, 자연적 돌연변이를 교배해서 태어난 돼지죠. -미자가 가족 같은 옥자를 찾아 나선다는 전제만 들으면 ‘플란다스의 돼지’가 될 것도 같고 <괴물>의 후속 ‘애물’이 될 것도 같아요. 또 언론 플레이를 하는 자본의 모습이 언뜻 예고편에 스쳐가는 걸로 봐서는 <설국열차>를 넓게 펼쳐 놓은 이야기인가 싶기도 하고. =‘괴돈’인가요? (웃음) <옥자>에서 틸다 스윈튼의 캐릭터 루시 미란도는 옥자를 태어나게 한 다국적 기업 CEO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설국열차>의 윌포드(에드 해리스)와 비슷한 면이 있어요. 한편 미자 입장에서 <옥자>의 스토리는 강원도에서 맨해튼까지 가는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와 비슷한 여정이니 <설국열차>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가 꼬리칸부터 머리칸까지 가는 경로와 유사하죠. -동물 찾는 모험은 <플란다스의 개>, 자본과의 싸움은 <설국열차>, 가족 재회 프로젝트로 보면 <괴물>이군요. =의식한 건 아닌데 엮여든 거죠. (웃음) <괴물>만큼 가족이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고 사랑 이야기입니다. 저의 첫 사랑영화. 근데 상대가 동물이야. (웃음) -미자와 옥자의 멜로드라마군요. 보통 할리우드영화에 나오는, 가족의 일원으로서의 반려동물을 넘어서는 끈끈하고 본능적인 관계로 보면 될까요? =소녀와 동물 하면 디즈니적 그림을 연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또 저의 과거 영화를 보셨다면 그런 기대는 없겠죠. -<설국열차>의 메이슨에 이어 틸다 스윈튼에게 나치 선전상 괴벨스를 연상시키는 역할을 주신 것 같은데, 배우에 대한 애정과 별개로 “인간 중에 나와 가장 이질적인 존재”라는 인상을 받으시는 걸까요? =이번에도 ‘여자 허문도’죠. (웃음) 아, 최근 작고하신 걸로 아는데 유가족께는 죄송합니다. <설국열차>와 차이라면 메이슨 역은 틸다를 캐스팅하기 전부터 존재했고 캐스팅 과정에서 남성 중년 배우들을 만나기도 했어요. 그러다 도중에 젠더가 바뀐 경우라면 <옥자>는 처음부터 틸다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본인과 의논하며 쓴 캐릭터예요. 한국으로 치면 송강호 선배처럼 언어의 뉘앙스와 즉흥대사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탁월한 배우라 대사를 함께 만들고 다듬고 후시녹음 중에도 상의해서 추가했어요. 실생활에서 틸다의 반려자인 샌드로 콥이 옥자의 컨셉 아트 드로잉에 참여해서, 두 사람은 <옥자>의 공동 프로듀서이기도 합니다. -공동 각본가 존 론슨은 <초(민망한)능력자들>(2009)과 <프랭크>(2013)가 전작인데 한뼘만 비껴가면 굉장히 애처로운 유머를 지닌 작가라는 인상입니다. <옥자>의 분위기와 관계있을까요? =<초(민망한) 능력자들>은 아마 원작만 썼을 텐데, 원래 영국의 르포전문 저널리스트죠. <프랭크>를 배꼽 잡고 웃고 울며 봤어요. 착각일지 몰라도, 저는 프랭크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옥자>에 나오는 영어 쓰는 인물들의 느낌과 통하는 면이 있겠다 싶었습니다. 뭐 그렇게 상태가 좋진 않은 인물들이죠. -넷플릭스가 존 론슨 작가를 추천했나요? =<옥자>는 저와 존 론슨,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 틸다 스윈튼, 폴다노, 제이크 질렌홀 캐스팅에 VFX 회사까지 패키지가 끝난 상태에서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고 그다음에 플랜B의 프로듀서들이 합류했어요. <괴물>의 김태완, <마더>의 서우식, <설국열차>의 최두호 프로듀서가 제작자로서 각각 기획 개발, 한국 제작, 미국 캐스팅과 에이전시 관련 업무를 맡았습니다. 플랜B의 프로듀서는 디디 가드너, 브래드 피트, 제레미 클라이너 세 사람인데 <옥자>의 모든 촬영현장을 함께한 전담은 제레미 클라이너예요. <문라이트> <노예 12년> <월드워Z>에 참여했고 <문라이트>의 오스카 작품상 소감 발표 때 무대에 선 제작진 중 <백 투 더 퓨처>의 조지 맥플라이(크리스핀 글로버) 닮은 사람입니다. -넷플릭스와 아마존이 제작에 적극 진출하며 메이저 스튜디오로 부상하고 있어요. 감독의 입장에서 넷플릭스의 제안이 갖는 매력은 무엇이었습니까? =미국에서는 농담처럼 유니버설, 폭스 등을 올드 스튜디오라 하고 아마존과 넷플릭스를 디지털 스튜디오라고 부르더군요. 넷플릭스와 계약하면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하고 극장 와이드 릴리즈 범위가 제한돼 아쉽긴 하지만 특정기간 극장 개봉을 했다가 오랫동안 블루레이와 VOD로 남고 영화제나 회고전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일생을 한 주기로 길게 보면 큰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4K 화질로 영화를 온라인에 아카이빙해놓고 언제든 원하면 볼 수 있다는 느낌이 있고 광고나 이상한 글씨가 끼어들지 않아 영화 자체를 리스펙트하는 면이 많습니다. 또, 개봉 흥행 압박이 없고 클릭 수도 대외에 공개되지 않아 감독으로선 정성껏 작품을 완성하면 끝이죠. 어찌 보면 약간 사회주의적인 측면이 있어요. 전세계 수많은 가입자로부터 십시일반 돈을 걷어 만든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고 거기에 항상 영화를 걸어놓는 형태니까요. 극장 와이드 릴리즈에만 매달린다면 아쉽겠지만 창작의 자유도 커요. <옥자> 제작비가 5700만달러인데 이 규모면 할리우드에서 대부분 최종 편집권을 감독이 갖지 못해요. 2000년대 중반 파라마운트와 J. J. 에이브럼스가 맺은 계약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시 에이브럼스가 스타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산이 3500만달러 이하일 경우만 최종편집권을 줬다고 해요. 그런데 <옥자>는 명확히 감독의 파이널컷을 보장했고 필요하면 18세 관람불가 등급으로 만들어도 좋다고 명시했어요. -<설국열차>까지 35mm 필름을 고집한 감독님의 첫 디지털영화가 넷플릭스 배급이라니 좀 역설적이기도 한데요. =처음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과 논의할 때는 “35mm 필름으로 찍자!”고 신나서 의기투합했죠. <옥자> 직전에 그분이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로스트 시티 오브 Z>와 전작 <이민자>를 연이어 필름으로 촬영하기도 했거든요. 그런데 투자자로 결정된 넷플릭스가, 35mm 필름을 스캔해서 주겠다는 우리 제안에도 복잡한 이유로 난색을 표해 디지털로 찍게 됐습니다. 대신 다리우스 콘지는 전세계에 열 몇대밖에 없다는 알렉사65 카메라- 디지털 버전의 70mm- 를 예찬하면서 거기 파나비전 렌즈를 결합했어요. 뭐든 스스로를 흥분시킬 거리를 찾아내시는 것 같아요. (웃음) -다리우스 콘지의 <옥자> 참여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생각한 그분의 전작은 마르크 카로,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델리카트슨>(1991)과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5)였는데 <옥자>의 이미지와 관련해 본인 전작을 언급한 예가 있나요? =콘지의 전작보다는 스티븐 쇼어 등 사진가들의 작품을 많이 주고 받았어요. 사진마다 색감, 공간 무드 등 특정 요소만 추출해 보기도 했고요. 한국 촬영에서 다리 형(<옥자>팀이 그를 부르는 애칭이다)이 제일 좋아했던 것은 우리 제작진이 준비한 깊은 로케이션들이에요. 강원도 신은 정선과 춘천 부근에서 찍었고 서울 장면은 서울은 물론 대전과 광주의 서울 대역도 포함돼 있어요. 오픈 세트는 없었고 남양주 세트가 있었습니다. -동물에 대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살아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어려서부터 동물을 좋아해 기억도 많죠. 지금도 쭈니라는 개와 살아요. 학대까지는 아니지만 <플란다스의 개>를 찍을 때 강아지들을 고생시켜서 <옥자>에는 속죄의 의미도 있어요. (웃음) <옥자>를만든 계기 중 하나는 제가 공중파에서 유일하게 꾸준히 보는 인데,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오랫동안 일관된 방향과 관점을 갖고 다루는 뛰어난 제작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옥자> 시사회에 제작진을 모시고 싶어요. 미국으로 이민 간 친척 중에 동물보호협회(Humane Society) 부의장을 지낸 분도 있어 생명권 관련 이야기를 많이 듣기도 했고요. 잠실의 추억 -아버님이 디자인을 하셨고 모계쪽으로 화가(박문원)와 소설가(박태원)가 계십니다. 책과 그림이 흔한 가정이었습니까? =엄청 예술적인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아버지 방에 외국에서 사온 디자인책과 화집, 사진집이 가지런히 진열돼 있었어요. 못 보게 하진 않으셨지만 보다가 침흘릴까봐 조심스러웠죠. 컴퓨터가 없던 시대라 아버지가 포스터컬러와 물감으로 작업하시는 모습도 많이 봤어요. 부모님은 뭘 하라고도 하지 말라고도 말씀하지 않는 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권위적인 면이 전혀 없어서 혼자 이상한 유머를 하며 텔레비전 보시고 맛있는 음식 나오면 좋아라 하는 분이 었어요. 딱 하나 영향이 있다면, 아버지 직장이었던 서울 디자인포장센터에 5공 시절 퇴역군인이 대표로 부임했을 때 퇴근 후 한 시간씩 한탄하셨던 일이에요. 그런 아버지를 보며 군사독재에 대한 반감을 키운 게 아닐까 합니다. (웃음) -영화 이전에 만화 그리는 걸 좋아하신 걸로 압니다. 한장의 그림이 아니라 최초부터 컷을 나누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식이었나요? =미술은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 만화가 그림을 흉내내면서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도라에몽> 아류작 같은 걸 그리고 자가발전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콘티죠. -콘티에 촬영 가이드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도 같은데요. =즐길 때도 있지만 불안을 해소하는 기능이 커요. 감독 17년째지만 여전히 현장이 무섭거든요. 돌발변수뿐만 아니라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사람이 많으면 일단 무섭죠. 불안 증세가 심한 사람치고는 사회생활을 제법 잘해내고 있지만, 어쨌든 남이 없을 때 혼자 조용히 그린 결과물을 들고 와글와글 사람 많은 곳에 가서 그대로 하면 되니까 콘티의 존재가 의지가 돼요. 머릿속으로 한번 영화를 찍어보고 다행히 만화 훈련이 돼 있으니 내 손으로 그려서 나눠주는 거죠. 한때는 제 영화가 콘티와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에 만족했는데 요즘에는 이게 문제는 아닐까, 내가 짠 콘티인데 내가 파괴하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성격적으로 용이하진 않네요. <옥자>콘티는 아이패드 프로로 그렸고, <설국열차>는 마카펜으로, 그 이전 작품들은 연필을 썼습니다. -콘티가 자연스럽게 영화에 흘러드는 우연을 막기도 하지 않나요? =카메라의 위치와 숏 사이즈, 움직임 등 공간적 설계는 정해져 있는 대신 배우에게는 최대한 자유를 주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제반 요소가 모두 복잡하게 설계돼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배우의 자유와 마찰을 일으킬 때가 있어요. 송강호 선배를 봐도 테이크마다 계획되지 않은 느낌을 찾으려고 분투하고 저 역시 다큐멘터리처럼 그런 모멘트를 찍고 싶기 때문에 많이 고민합니다. -만화 애독자이지만 미국 코믹스에 대한 언급은 접해본 기억이 없네요. =DC나 마블의 그림체에는 시각적으로 집중을 못하겠어요. 미국에 가면 포비든 플래닛 같은 숍을 찾아 구석의 얼터너티브 만화 서가를 뒤져요. <프롬 헬>이나 <쥐>처럼 재미있는 그래픽노블도 있고 캐나다 작가 중에도 재밌는 사람이 많아요. 한국에서도 <염소의 맛> <폴리나>의 바스티앙 비베스는 인기 있잖아요. <폴리나>의 인체 라인을 굉장히 좋아해요. -학창 시절 그림 잘 그리는 아이들은 친구들을 위해 주문생산하기도 하잖아요? =남학생들은 야한 만화를 주문하는데 저는 그쪽으로 재주가 없었고 고등학생 때 뜻맞는 친구들 서너명을 모아 학급신문을 낸 적이 있어요. 제가 카툰, 레이아웃, 타이틀, 일러스트를 맡았죠. 전두환 집권기에 제가 다니던 공립고등학교에 육사로부터 낙하산 교장이 부임했거든요. 주 2시간 교련수업에 추가로 보충수업을 넣어서 방과후 한두 시간씩 제식훈련을 하고 사열을 시켰어요. 수업 시간 중에도 교장이 복도를 걸어다니며 교실 뒷문에 낸 조그만 창으로 1분씩 들여다보곤 했는데 그 모습을 한컷 만화로 그렸어요. 학생들이 창에 검은 리본을 달아 영정사진처럼 만드는 내용이었죠. 100원씩 받고 복사해서 뿌렸는데 담임선생님이 불러서, 잘했는데 날 봐서 이번만 하고 참아달라고 하셨어요. 프랑스어 담당 선생님은 편집팀을 따로 불러서 네루의 <세계사편력>을 선물해주셨고요. -공교롭게 저도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감독님과 같은 잠실 장미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TV영화를 제외하면 영화를 처음 집중해서 본 경험이 동네의 ‘대원비디오’라는 대여점을 통해서였는데 감독님은 극장에 많이 다니셨나요? =대원비디오 알죠. 영화관은 엄마손극장과 호수극장이 기억나네요. 야하다고 해서 버트 레이놀즈, 레이첼 워드의 <샤키 머신>(1981)을 호수극장에서 봤었죠. 그러나 무엇보다 전 TV영화를 병적으로 챙겨봤어요. KBS <명화극장>과 MBC <주말의 명화>에서는 할리우드 고전을, 일요일 낮 교육방송에서는 펠리니, 트뤼포 같은 감독들의 유럽영화를 봤죠. 그러다 형이 “저건 실존의 어쩌고를 표현한 거지” 하고 옆에서 아는 체하면 뭔 소리야 쳐다보고. (웃음) 의 금요일 미드나이트 영화에서 강렬하게 본 작품들이 알고보니 존 카펜터, 브라이언 드 팔마, 샘 페킨파 작품이었고, 키스 신 구경하려고 남학생들이 많이 봤던 <제너럴 호스피털>이나 토요일 오전의 코믹 서커스 만화도 열심히 시청했어요. (시그널 음악을 흥얼거린다) 대사를 못 알아들으니 이미지를 보면서 내러티브를 막 구성했죠. ‘아까 걔가 한 말이 그거겠지?’ 하면서. 공간의 변태 -이제 감독님이 좁고 긴 공간을 선호한다는 사실은 작품을 통해 널리 알려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광장공포증이 있으신지요? =넓은 장소 자체보다 사람 많은 장소가 두려워요. 영화 작업은 일이라고 생각하니 괜찮은데 제일 힘든 경우가 연말 시상식이에요. 1, 2부 사이 광고 시간에 화장실 갈 때 애매하게 아는 영화인들 마주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제일 불안해요. 그래서 화장실 칸에 문닫고 들어가 15분 동안 문자하고 인터넷 보다가 나오기도 하고요. (웃음) 공연을 가도 조용히 싹 보고 싹 나오죠. 비행기요? 창가 자리를 선호해요. -그런 성격인데 왜 집이나 작업실을 이용하지 않고 카페를 전전하며 시나리오를 쓰세요? =<플란다스의 개>와 <살인의 추억>까지는 카페에서 쓰지 않았는데 고립된 공간에서 쓰다보니 자꾸 텔레비전을 보거나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자는 거예요. 아시겠지만 쓰다보면 등이 아프잖아요? <어댑테이션>(2002) 보다가 니콜라스 케이지가 바닥에 등대고 누워 있는 장면 보고 데굴데굴 굴렀어요. 역시 찰리 카우프먼이 글을 써봐서 아는 거죠. 아무튼 그래서 다른 감독처럼 콘도나 여관에서 일할 수가 없어요. 카페에 가면 바닥에 눕진 않을 거 아니에요? (웃음)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를 함께한 류성희 미술감독에게 감독님의 공간접근법을 여쭤봤습니다. 뉴욕을 영화에 담을 때 우디 앨런처럼 정확한 로케이션에서 샅샅이 대리체험하게 하는 방식과 마틴 스코시즈처럼 LA 세트를 포함시키더라도 ‘뉴욕’이라는 아이디어를 재구성하는 방식이 있는데 감독님 경우는 후자라고 하시더군요. <살인의 추억>의 화성을, <마더>의 마을을 전국의 많은 로케이션을 종합해 재현했고 <괴물>도 한강 다리의 실제 위치와 동선이 일치하진 않으니까요. =익숙함과 낯섦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괴물>의 한강이나 <플란다스의 개>의 아파트처럼 익숙한 공간을 낯설고 신기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동시에 누가 봐도 한강처럼, 서울의 아파트처럼 보여야 하거든요. 결국 이건 장르를 대하는 법과도 관련이 있어요. 장르적으로 친숙한 공간-조폭영화의 폐공장이나 직장 선후배가 맥주 한캔 마시고 화해하는 장소로서의 한강 둔치가 있는 반면, 장르 맥락에서 낯선 공간이 있죠. 또한 (<괴물>의 모티브가 된) 맥팔랜드 독극물 유출사건처럼 실화지만 몬스터영화 도입부와 같은, 현실 속의 장르성이 있어요. 말하자면 실재와 장르의 경계를 이상하게 비트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 영화 속 공간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아요. <괴물>에 해석된 한강은 실제 한강을 몬스터 무비와 링크시킬 때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인 거죠. 사실 한강은 카메라를 대면 찍을 게 별로 없어요. 밋밋하고 심심해서 서스펜스나 긴장감 있는 이미지를 만들긴 쉽지 않아요.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교각 밑의 공간이나 원효대교 아래의 우수구, 괴물의 은신처를 쓴 거죠. -한강을 수평적 공간이 아니라 층이 있는 수직적 공간으로 바라본 점이 <괴물>의 포인트인 것 같습니다. =투신 자살자가 나오는 프롤로그부터 그렇죠. 현서(고아성)가 괴물의 둥지에 갇혔는데 기어 올라오지 못하는 설정도 그렇고요. 화면비율을 1.85:1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고 <괴물>은 버티컬한 강(江)영화라는 점이 핵심이었어요. -달리 말하면 봉준호 영화는 장르가 회수를 ‘제대로’ 건너면 변태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입증하는 시도로 보이기도 해요. 주인공과 적대자의 자리에 그 나라의 영웅과 악당을 바꿔넣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거죠. =티 안 나게 장르를 스리슬쩍 해체시키고 싶었어요. 왜 그랬을까는 모르겠어요. <설국열차>가 그나마 제 영화 중에는 장르가 확실하죠. 뭘 했건 SF니까. <옥자>는 앞서 말한 대로 사랑영화이고 도입부는 2007년 본론이 시작되면 2017년으로 자막이 나오니 완전히 동시대가 배경인데 장르는 뭐라 해야 할지 몰라서 늘 그랬듯 마케터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어요. -감독님에게 영화는 애초에 콘티로서 머릿속에 존재하고 시나리오는 비즈니스 절차를 위해 글로 옮긴 서류로 보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장르도 분류를 위한 편의적 라벨일 뿐 발상은 그 구획에 기초하지 않는 걸까요? =실제로 프랑스 DVD 업체 홈페이지에는 드라마로 분류된 제 영화가 미국에서는 액션 어드벤처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기도 해요. 그런 식으로 분류되는 게 싫지도 않고요.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하자면, 괴이하게도 <설국열차>가 영국 개봉을 못 했는데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모두 개봉했는데 영국은 극장들이 원했다는데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못했죠. 우리의 막연한 추측은 저와 웨인스타인의 대립 구도에서 디렉터스 컷을 공개적으로 열렬히 지지한 영국의 배우 틸다 스윈튼과 존 허트에게 보내는 웨인스타인의 대답이 아닐까 정도예요. 지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틸다와 하비 웨인스타인이 마주쳤는데 묘한 긴장이 있었다는 후문도 들었고요. -그동안 길리엄 역의 존 허트가 고인이 되었습니다. =영국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해 프로모션 투어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가까워졌던 부인 앤웬 리스 메이어스에게 긴 편지를 드렸어요. <설국열차>에서 처음 확정된 캐스트였고 “에일리언이 내 배에서 나왔잖아!” 하면서 SF에 대한 애정을 밝히며 제작초창기에 힘을 많이 불어넣어줬어요. 돌아가신 후 더블린영화제에서 존 허트 회고전 중 <설국열차>가 상영됐고 부인이 관객 앞에서 고인이 얼마나 이 영화를 사랑했는지 전한 스피치를 답장으로 보내왔어요. 깽판의 레이어 -취조 상황의 대화를 유난히 즐기며 쓰시는 인상이에요. 어떤 재미인가요? =취조 신은 쓸 때도 찍을 때도 너무 좋아요. 취조 당하는 입장, 하는 입장 양쪽을 왔다 갔다 하면 쓰는데 모두 흥분돼요. 변태인가봐요. <살인의 추억>에 네개 이상의 취조 시퀀스를 각각 달리 찍다가 <마더>에서 오랜만에 다시 취조 장면을 하는데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취조란 전혀 바람직한 대화 방식이 아니고 두 인간이 최악의 상황에서 만나는 것인데 왜 좋을까요? 제가 거짓말을 좋아하나봐요. 취조는 하는 쪽도 함정을 파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당하는 쪽도 거짓말을 하잖아요. (1997)에 보면 잘 나와 있죠. -그러고보니 영화에 항상 약간 진짜처럼 들리는 거짓말을 넣는 습관이 있으시죠. <마더>에서 허벅지 혈자리에 침을 놓으면 망각이 촉진된다거나, <설국열차>에서 산업폐기물이 환각작용을 일으킨다거나. =한 인물이 ‘썰’을 푸는 장면도 반드시 나오죠. <옥자>에서도 폴 다노가 할 거예요. (웃음) 잉마르 베리만의 <화니와 알렉산더>(1982)에 나오는 거짓말의 의미가 생각나네요. 그 영화에서는 창작의 다른 이름으로 거짓말을 이야기하잖아요. -연출 외에 영화계에서 가질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어떤 일이 떠오르세요? =스틸 사진작가, 사운드 믹싱이요. 눈을 혹사하다가 귀로 넘어가면서 사운드를 디자인하고 배치하고 밸런스 맞추는 작업이 제일 행복해요. 촬영은 그날 나가서 못 찍으면 끝이고 다시 하려면 돈과 사람이 많이 필요한데 사운드는 모든 걸 다 해볼 수 있잖아요. 데이비드 린치나 마틴 스코시즈 영화를 보면 사운드 자체가 엄청난 뭔가를 만들어내죠. -저는 감독님이 단편영화에서 직접 카메라도 잡았고 관심 있는 분야로 알고 있어서 촬영일 줄 알았습니다. 지금은 감독님 영화 규모가 커서 불가능하겠지만 스티븐 소더버그처럼 직접 카메라를 잡고 싶은 생각은 없나요? =제 눈에 자신이 없어요. 신체검사에서 적록 색약판정을 몇번 받아서 색에 관련된 작업을 할 때면 불안해져요. 남의 눈에는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마더> 흑백판을 내고 큰 안도감을 느꼈죠. (웃음) 물론 홍경표 촬영감독님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고 흑백영화만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색보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신다고 들은 터라 좀 의외인데요. =촬영감독, 컬러리스트와 많이 의논하죠. 또 색보정은 색만의 문제가 아니고 날씨, 콘트라스트, 입자, 스토리텔링 등이 결부된 작업이니까요. -최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대담을 가지셨습니다. 지역 정치학과 사회풍경을 담은 호러색이 짙은 장르영화를 만든다는 점이 두분의 공통점 같아요. 감독님 영화 중에 딱히 호러는 없지만 제가 원동력이라고 느끼는 감정은 분노보다 두려움이에요. 다만 구로사와 기요시의 영화는 적막하고 봉 감독님의 영화는 매우 시끌시끌하죠. =둘 다 공격당하는 자의 시각에 입각해 만드는 새가슴 감독들이죠.(웃음)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는 가장 정적인 롱숏에서 물처럼 스며나오는 공포가 매력적이고 제 영화는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깽판’이죠. 카오스를 연출할 때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즐거워요. 깽판을 내가 통제하니까 마음이 편한가봐요. (웃음) “깽판의 레이어를 한번 일곱개까지 가볼까? 저기 뒤에 저분 넘어지시라 그래!” 하면서 흥분하죠. 이병우 음악감독님과 예전에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어요. “봉 감독은 아름다운 것, 고운 걸 보면 그걸 부수려고 해.” “저도 아름다운 거 좋아해요.” “아니야 파괴해.” “뭐 그 자체가 아름답지 않은가요?”라고. -본인이 창조한 인물에게 관심은 있지만 애정을 품고 연연하는 인상은 받은 적이 없어요. 히치콕처럼 인물을 바라보는 어떤 냉혹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옥자>의 미자와 옥자에게는 애정을 듬뿍 줬습니다. 같이 울고 웃으면서. 저도 그들을 사랑하고 자기들끼리도 사랑하고. 특히 옥자가 무척 사랑스러워요. -스토리의 패턴으로 보자면 감독님의 영화는 한점으로 수렴해 달려가는 구조입니다. <플란다스의 개>는 실종된 개 때문에 만날 일 없던 다양한 계급의 인물이 마주치고, <괴물>의 괴물과 현서는 흩어진 가족을 모이게 만드는 점입니다. <살인의 추억>에는 공간으로서 터널이 있고 서사 요소로서는 잡히지 않는 범인이 소실점으로 있습니다. <마더>는 엄마의 눈에서 시작해 엄마의 눈으로 돌아가고 공간적으로는 도준(원빈)이 돌을 던지는 골목의 한뼘의 암흑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확산되거나 축적되기보다 한점을 향해요. 흔히 ‘추격의 영화’로 봉준호 영화를 정리하지만 넓게 말하면 집착의 영화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격이 안 좋아서인가? 앞으로는 더 심해질 것 같아요. <옥자> 다음 영화도 두편 정도 준비 중인데 제작 규모가 작고 좀더 단순한 영화라 더욱 집중된 구조가 될 것 같아요. 기차에 4년, 돼지에 4년, 도합 8년이 가버렸는데 이젠 작은 영화를 더 자주 하고 싶어요. 손에 탁 쥐어지는 딴딴한 돌멩이 같은 영화를. 그러다보면 한점으로 수렴되는 경향이 더 강화되지 않을까요. -같은 맥락에서 봉준호 영화에는 기능 없이 ‘노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장르영화에 대해서는 대단한 칭찬이기도 한데요. 시나리오를 퇴고할 때 어떤 장면부터 삭제하는지 궁금해지곤 해요.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잉여의 숏이 없다는 말씀 같은데, 시나리오 단계에서도 촬영 단계에서도 전 회차를 줄이려고 해요. 예산 문제만이 아니라 제가 힘들어서죠. 러닝타임 긴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어요. 90분에 다가가는 영화가 목표죠. <옥자>도 러닝타임이 1시간55분이고 촬영회차도 77회 정도예요. <설국열차>도 73회? 한 신 안에서 숏도 어떻게 하면 최소의 숏으로 축소할 수 있을까 고민해요. 그래서 <마더>는 600여컷으로 마무리했고 <살인의 추억>과 <괴물>은 800컷 언저리예요. <옥자>도 900여컷이고. <설국열차>만 1100컷 넘게 나왔죠. 최동훈 감독에게 넌지시 물었더니 “당연히 2400…” 그래서 속으로 대단하다고 경탄했어요. 대신 제 영화는 숏안에서 움직임이 많아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면 가장 적은 숏으로 신을 만들까 강박적으로 생각해요. <산딸기>(1957)같은 잉마르 베리만 초기작이나, 로베르 브레송 영화를 봐도 불필요한 숏이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것이 궁극의 리듬을 만드는 거죠. <조디악>(2007)은 긴 영화이고 <펀치 드렁크 러브> (2002)는 짧은 영화지만 영화적 리듬이 둘 다 완벽하고요. 과연 잉여의 숏을 구사해서 그런 리듬이 나올지는 의문입니다. 영화의 리듬 중 숏과 숏의 경계는 일부에 불과하고 숏 내부에 아주 많은 리듬이 있죠. 그걸 딱 손에 넣는 순간 감독으로서 개안할 텐데 전 대체 그날이 언제 올지. -영국 잡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설문조사에 감독님이 베스트로 고른 영화 중 <조디악>이 있어서 좀 놀라기도 했어요. <살인의 추억>과 유사성이 거론되던 영화라서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이 과연 <살인의 추억>을 봤을까요? 직접 말을 나눈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슈퍼 에이트>(2011)와 <클로버필드>(2008) 경우는 J. J. 에이브럼스가 <괴물>의 오마주가 있다고 명확히 이야기를 했고 <클로버필드> 프린트를 스탭들과 보라고 보내주기도 했죠. -데이비드 핀처, 데이비드 린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중에는 누굴 좋아하십니까? =글쎄요. 크로넨버그는 <폭력의 역사> 정도를 좋아하고 핀처와 린치를 좋아하긴 하는데 의미는 모르겠네요. -(웃음) 폴 토머스 앤더슨과 웨스 앤더슨 감독 중에서는요? 웨스 앤더슨은 지금 제작 중인 영화가 퍼펫애니메이션 <개들의 섬>(The Isle of Dogs)인데 개를 찾아가는 일본 배경의 이야기라 개봉되면 아마 <옥자>와 묶여서 논의되지 않을까 상상 중입니다. =아, 제가 제일 좋아하는 웨스 앤더슨 영화가 <판타스틱 Mr. 폭스>(2009)예요. 틈만 나면 반복해서 봅니다. 그 영화의 노란색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러면 여전히 봉준호 감독님이 생각하는 미국영화의 현존 최고봉은 코언형제와 마틴 스코시즈인가요? =개별 작품 말고 필모그래피 전체로 보면 코언 형제가 놀랍다고 생각해요. 타란티노나 에이브럼스, 고어 버빈스키 감독과 대화해봤지만 <설국열차>의 소규모 시사에 틸다 스윈튼이 초대한 조엘 코언 감독을 만났을 때 같은 긴장은 처음이었어요. <설국열차>의 교실칸 장면이 제일 좋았다면서 시끄러운 술집에서 낮은 목소리로 길게 말씀하시는데 도저히 무슨 이야긴지 안 들렸어요. 적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웃음) 대학 영화동아리 시절부터 영화를 봤던 감독이라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타란티노 감독과는 같이 술을 마셔도 “아, 이 형은 말이 정말 많구나” 정도인데. (좌중 폭소) 코언 형제 같은 필모그래피를 쌓을 수 있다면 감독으로선 더 바랄 게 없지 않을까요? 꿈과 악몽 -<씨네21> 창간 22주년 기념호 특집에서 역대 한국영화 베스트 여성 캐릭터 상위권에 <마더>의 도준 모(김혜자)와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배두나)이 자리해 있습니다. 영화에서 젠더 묘사와 영화 밖의 성 정치학적 권력에 대한 최근의 화제를 어떤 생각으로 접하고 계신지요? =여성주의나 젠더의 관점에서 시나리오를 써본 적은 없습니다. 그쪽 논쟁에도 무척 무지하고요. <마더>는 젠더보다 김혜자라는 배우의 존재에서 출발했고 <옥자>의 미자나 <괴물>의 현서나 <플란다스의 개>의 현남을 여성으로 설정한 것은 워낙 시나리오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에 고민해서 결정했다는 의식 자체가 없어요. <옥자>의 경우도 산골 소녀 영자 사건이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소녀를 떠올렸습니다. <괴물>은 가족들의 좌충우돌하는 어리석음을 원하다보니 박씨 부자 2대에 걸쳐 아내/엄마의 존재를 빼버렸어요. 가족 중 시스템을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구성원이 엄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엄마가 완전히 배제된 가정에서 어린 중학생 현서가 더 작은 아이들에게 엄마 역할을 하는 역설도 있었고요. 물론 이것도 직관적으로 쓰고 사후에 스스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직업 감독이 된 후에도 외서를 포함해 영화 서적을 읽으시는 걸로 아는데 추천하신다면? =번역된 책 중에는 일본 영화인들의 추천으로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맨살>을 군데군데 읽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이키루> <라쇼몽> <7인의 사무라이>의 공동 각본가인 하시모토 시노부의 <복안의 영상>이라는 회고록도 좋습니다. 전통 료칸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포함해 세명이 <7인의 사무라이>를 집필하는 과정인데 무시무시하면서 감동적이고 웃겨요. 번역 안 된 책 중에는 라는 빌 크론의 책을 한국어로 자세히 보고 싶습니다. BFI 모던 클래식 시리즈도 좋던데 누가 전질을 번역 출간했으면 좋겠네요. -전작 <설국열차>는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몇달 후 개봉했고 <옥자>를 준비하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국가가 당신을 지켜줄 것 같아요? 천만에요”로 요약되는 남한 시스템의 역기능을 그린 영화를 만드셨는데, 그런 병폐의 응집 같은 세월호 사건도 있었습니다. 잠복기가 있겠지만 많은 영화 만드는 사람들에게 이 사건의 여파가 영향을 줄 거라는 예상을 합니다. 감독님은 영화를 만드는 입장에서 어떤 마음으로 당시를 겪으셨습니까? =<옥자>는 2010년에 시놉시스를 썼는데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자식 있는 사람으로서 뉴스를 보고 화가 나는 차원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이 괴롭고 힘들었어요. 한동안은 구체적으로 책임 있는 사람들을 짚어내 갚아주고 싶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어요. 당시 <괴물>의 장면과 세월호사건을 일대일로 짝지어놓은 블로그 포스팅도 봤는데 해양구조업체 언딘과 “일곱 회사가 돌아가며 작업한다”고 말하는 <괴물>의 방역업체 직원 대사를 연결했더군요. 현서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는 신을 에어포켓에 있던 학생이 문자를 보냈다는 루머와 연결했고요. <괴물>은 당연히 2005년 이전에 한국 사회가 재앙을 맞아 어처구니없는 카오스에 빠진 경험을 반영한 영화였는데 사회가 제자리걸음하고 비극이 반복되다보니 세월호를 예견했다고 읽히는 상황을 보고 더 우울해졌습니다. 제일 섬뜩했던 일은 여관방에서 도주한 선장이 젖은 지폐를 말리고 있었다는 뉴스였어요. <괴물>에서 방역요원이 물에 젖은 만원짜리를 줍는 장면이 있거든요. 그러나 <옥자>에 이 감정들이 투사돼 있진 않아요. 그로부터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썼죠. -이후 작품에도 영향이 없을까요? =많은 감독들이 내가 세월호 영화를 찍는다면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생각해봤을 거예요. 거대한 십자가를 짊어지는 용기가 필요할 거예요. <살인의 추억> 때도 막상 경기남부 연쇄살인사건을 조사하면서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사건임을 깨달았어요. 저 역시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은 책도 사보고 뉴스를 보면서 머릿속에 제정신으로 찍기 힘들 많은 이미지가 떠오르긴 했어요. 시점숏의 이미지와 사운드들이 스쳐가고 꿈도 꿨습니다. 그러나 정리된 생각은 없어요. 누가 하든 엄청나게 힘든 작업일 겁니다. -포장을 뜯지 않은 DVD와 블루레이 중 시간이 나면 1순위로 감상할 작품은 무엇인가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카를로스>(2010)와 정말 오랜 시간 기다려 지난해에 크라이테리언이 출시한 에드워드 양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1991)입니다. 후자는 예전에 에서 좋은 화질로 방영해서 양질의 공테이프로 녹화했는데 워낙 길다보니 중간에 파바박 (전광석화 같은 손동작 재연) 테이프를 갈아끼웠는데 그만 20초가 유실돼 출시를 고대해왔죠. 두 영화 모두 러닝타임이 길어 가장 좋은 컨디션에서 보려고 벼르고 있어요.

[런던]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난 선호 프로그램 장르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3월 31일 세계 최대 인터넷 기반 TV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자 넷플릭스가 최근 발표한 사용자 조사를 인용해 선호 프로그램의 장르가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났다고 밝혔다. 넷플릭스가 지난 2016년 10월부터 올해 3월까지 영국 내 자사 서비스 이용자들의 스트리밍 서비스 구매 현황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지역에 따라 선호하는 특정 장르가 선명히 구분된다는 것이다. 코미디 쇼는 영국 북부의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 판타지 드라마는 중부 지역 사람들에게 특히 인기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넷플릭스가 2013년 첫 시즌을 선보인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와 레프트 뱅크 픽처스와 소니픽처스 텔레비전이 넷플릭스를 위해 만든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 <더 크라운>을 선호한다면 런던에 거주할 가능성이 크다. 같은 드라마 장르라도 북아일랜드에서는 법정 드라마인 <수츠>와 <굿 와이프>의 인기가 높았다. 반면 뉴캐슬과 요크, 더람 등 영국 북동부 지역에서는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등과 같은 공포물이, 맨체스터와 리버풀 등 북서부 지역에서는 <아만다 녹스> <메이킹 어 머더러> 등과 같은 다큐멘터리와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헬스 키친>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를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같은 날 는 자사의 온라인 서비스 이용자가 2011년 대비 11%가 상승한 52%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9년 전 론칭한 의 스트리밍 서비스인 아이플레이어의 주간 사용률 상승폭은 아직 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는, 전체 성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아이플레이어가 넷플릭스와 동일한 사용률을 보이며 공동 1위를 차지했지만 사용 대상을 16~34살로 한정했을 경우 넷플렉스에 밀려 2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알고 봅시다] <킹 아서: 제왕의 검>과는 또 다르게 변주된 아서왕 이야기

아서왕의 전설은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샘이다. 서구 판타지 문학의 근간을 이룬다고 봐도 좋은 아서왕 이야기는 6세기 켈트족의 영웅담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여러 차례 각색을 거쳐 중세를 상징하는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성검 엑스칼리버와 마법사 멀린의 신비, 랜슬롯, 퍼시발, 트리스탄 등 원탁의 기사들의 무용담, 기네비어 왕비를 중심으로 한 로맨스 등 다채로운 면모를 품고 있는 전설인 만큼 이미 여러 차례 영화화됐다. 가이 리치 감독의 <킹 아서: 제왕의 검>에 앞서 아서왕의 전설을 다룬 영화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몬티 파이튼의 성배>(1975) 감독 테리 길리엄, 테리 존스 아서왕의 전설을 변주한 영화 중 가장 멀리 나간 영화를 꼽는다면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빼놓을 수 없다. 텔레비전 쇼에서 인기를 얻은 코미디 집단 몬티 파이튼팀은 급기야 성배의 전설까지 건드렸다. 시작부터 끝까지 예측을 불허하는 코미디는 금기를 넘나들며 정치, 사회를 풍자해나간다. 신화적인 영웅들이 거침없이 망가지는 모습은 묘한 쾌감을 안긴다. 그 유명한 만렙토끼와의 대결은 명불허전. <엑스칼리버>(1981) 감독 존 부어먼 원작과 기본에 충실한 정석. 손꼽히는 비주얼리스트 중 하나인 존 부어먼의 손끝에서 탄생한 만큼 아서왕의 여정을 어떻게 우아하고 화려하게 보여줄 건지에 집중했다. 역동적인 전투 장면보다는 신화 속 여정의 한순간 한순간을 사진으로 옮기듯 미술과 연출에 공을 들인, 문자 그대로 전설의 재현이라 할 만하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주인공,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인물들이 대서사시에 나올 법한 대사들을 읊조리는 걸 듣노라면 조금 오글거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다보면 이 허세와 과장이 신화와 전설의 아우라로 채워져 가는 걸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CG가 없던 시절이기에 구현할 수 있었던 스펙터클이 있다. 존 부어먼의 큰딸(호수의 정령 역)과 둘째딸(이그레인 역), 아들(어린 모드레드 역)까지 총출동했다. <카멜롯의 전설>(1995) 감독 제리 주커 로맨스의 끝판왕. 숀 코너리가 아서왕으로 출연하고 리처드 기어가 자유기사 랜슬롯, 줄리아 오몬드가 기네비어 왕비 역을 맡았다. 아서왕보다는 랜슬롯과 기네비어의 로맨스에 초점을 맞춰 각색했다. 아서왕의 전설과 모험을 기대한 이라면 다소 당황할 만한 전개를 보여주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변주와 확장이 가능할 정도로 풍성한 캐릭터를 자랑하는 게 아서왕의 전설이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꽃미남 리처드 기어의 리즈 시절을 확인할 수 있다. <킹 아더>(2004) 감독 안톤 후쿠아 신화가 아닌 사실적인 전투에 방점을 찍은 영화. 로마제국이 떠난 5세기 브리튼섬을 배경으로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켈트족의 영웅으로 우뚝 선 아서왕의 이야기를 담았다. 물론 사실감을 강조한다고 했지만 정확히는 시대를 달리했을 뿐 어디까지나 팩션이다.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을 맡은 만큼 색슨족과의 대규모 결투와 검과 검이 부딪치는 사실적인 액션이 포인트. 사실을 강조한 탓에 역사왜곡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고사동 통신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박동현 감독의 <나의 자전거에 대하여>는 세 단락으로 나뉜다. 광주항쟁의 기억을 되짚은 두 번째 장은 감독의 전작 <기이한 춤: 기무>(2010)처럼 풍경과 명상을 결합한다. ‘폐가’가 된 광주국군통합병원을 소요하며 카메라(촬영 박홍열)가 이곳저곳에 시선을 던지는 동안, 사운드트랙은 한 할머니가 회고하는 1980년 5월을 들려준다. 그녀는 혈연 없는 청년들을 도우러 병원으로 찾아가 손상된 시신을 수습하고 씻었다. “보초 서던 군인이 막았어. 병원에 아들이 있어 보러가야 한다고 매달렸더니 돌아서 집들을 타넘어 가라고 했어. 첫 번째 집 담을 넘다 주인에게 한소리 들었어. 아들이 저기 있다고 했더니 받침대를 놓아줬어. 두 번째 집에서는 대문을 열어주었고, 세 번째 집은….” 시냇물처럼 담담히 굽이치는 그녀의 진술을 듣는 관객에게 보이는 광경은 더이상 병원의 깨진 유리창과 갈라진 콘크리트가 아니다. 04/29 16 : 00 용산역을 떠난 지 1시간40분 만에 전주에 도착했다. 여행이 너무 짧아 머쓱했고 내리자마자 여름이라 어색했다. 매미가 울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 택시 타는 줄이 줄어드는 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로마법’을 모르는 타지 사람으로서 “짐은 앞에 실을까요? 트렁크에 실을까요?”라고 택시 기사님께 공손히 또박또박 여쭸더니 “아, 마음대로 허요!” 하는 호방한 답이 돌아왔다. 서울에서 똑같은 대답을 들었다면 퉁명스럽기도 해라 주눅 들었겠지만 여기서는 상관 말고 손님 좋을 대로 하라는 친절한 일축임을 대뜸 알아차렸다. 예전 여행에서 익혔던 ‘전라어’에 대한 감이 슬슬 살아났다. 면박 주는 듯하면서도 늘어지는 말꼬리에 익살이 실리는 시야가 넉넉한 말투. 축제의 주말답게 교차로를 지나는 데에 한참 걸렸다. 에어컨 옆에 꽂혀 있는 지휘봉 모양 막대에 눈길이 갔다. 모양이 신령스러운 것이 덕유산 국립공원 기념품인가 짐작하며 여쭤봤더니 “거 참, 이거 참” 한참을 쑥스럽게 입맛 다시는 주저 끝에 해리 포터 마법 지팡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애들이 여행 갔다가 사온 선물”이라는데 “이것이 원래 벼락 맞은 딱총나무여”라고 부연하시는 걸 보니 분명 책도 읽으신 눈치다. 아쉽게도 길이 뚫려 마법 지팡이에 대한 수다는 포기해야만 했다. 17 : 30 짐을 내려두고, 길어진 해를 다행스러워하며 고사동 영화의 거리로 나섰다. 헤매려고 일부러 계획을 세워도 헤매기 어려울 단순한 경로를 이탈하는 바람에, <나의 자전거에 대하여>의 상영관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내가 어릴 때는 어른들이 전쟁 이야기를 자주 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 2차대전 등등 텔레비전과 극장에서는 전쟁영화를 많이 틀었고 군인이 늘 영웅이었다”라는 서두의 내레이션은, 감독과 내가 동세대임을 알려주었다. 과연 그랬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전쟁의 이미지와 서사는 성장기 내내 일상의 일부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를 합창하며 고무줄을 넘었고 수업 시간에 지명되면 그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철사 줄로 두손 꽁꽁 묶인 채로”라는 가사의 트로트를 구성지게 부르기도 했다. 무찌르는 적군의 정체에 대해, 철사로 결박당한 손목의 통증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이. 하지만 이상하게도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간혹 듣는 전쟁 체험담은 세부를 결여한 채 두루뭉술했다. 지독하게 배고프고 힘겨웠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수난은 사악한 적 때문이었다, 정도였다. 어른들도 당시 너무 어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기억하기 버거운 경험이라 서둘러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나의 자전거에 대하여>는 한국 사회를 옥죄어온 폭력의 역사를 3부 구성으로 돌아보는 에세이필름이다. 박동현 감독은 한국전쟁, 광주항쟁에서 자행된 민간학살을 미국 의회 아카이브 영상과 생존자 증언으로 회고하고, 3부에서는 유구한 폭력의 지류를 본인이 성장하며 체험한 억압에서 찾으려고 한다. 탈색되고 흠집난 미군의 전쟁 기록 필름 위로, 구덩이에 파묻힌 시체 더미에서 가족을 끝내 분별하지 못했던 이의 증언이 흐른다. 퇴락한 광주 국군통합병원의 내부를 카메라와 함께 서성이는 동안 시민군에도 경찰에도 밥을 지어 먹였던 시민이 회상한다. 왕빙 감독의 <중국 여인의 연대기>(2007)가 그랬듯, 효율적인 ‘스토리’로 재단되지 않은 구구절절한 진술에서는 희로애락마저 씻겨나가 있다. 마치 무수히 두들겨 빤 광목천의 두루마리 같다. 1, 2부의 화자들이 모두 여성임은 우연이 아니다. 관객과의 대화에 나선 박동현 감독은 성별을 한정할 의도는 없었으나 증언을 찾아듣는 동안 남성들의 회상은 자신이 당시 무엇을 했고 어떤 피해를 당했는가에 집중되는 반면 여성들의 그것에는 타인과 주변에 일어난 일에 대한 관찰이 포함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분명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나의 자전거에 대하여>는 3부에서 실패한다. 한국 현대사와 감독의 개인사를 연결하려는 노력이 요령부득이기 때문이다. 3부의 소재인 어른에게 속아 자전거를 도둑맞거나 교사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받은 감독의 기억은 역사적 폭력이라기보다 세상의 부조리를 직면하는 보편적 성장 서사에 가깝다. 그러다보니 구조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는 설명자막(intertitle)이 구구해진다. 19 : 00 동네 공터에서 절룩거리며 혼자 사는 백구의 사연을 탐문하는 행위로 시작하는 김보람 감독의 <개의 역사>는 <나의 자전거에 대하여>보다 훨씬 미숙한 장편이다. 하지만 영화를 장편으로 성립시키는 개념 혹은 질문이 허약하다는 단점은 근본적으로 비슷하다. 모든 주민이 알고 있지만 누구의 책임도 아닌 개 한 마리는, 지역 스케치의 절묘한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지만 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끝난다. 이웃 아저씨에게 “아가씨”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감독의 카메라는 아무한테도 권력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약점처럼 보이지만 거꾸로 착안하면 강점이 될 수 있는 대목이다. 감독은 온화하지만 끈질기게 이웃과 대화를 시도하고 그렇게 얻은 결과물 중에는 반짝이는 순간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흩어져버린다. 디지털 시대에는 문학적 내레이션을 쓰고 영상을 편집할 수 있다면 다큐멘터리나 에세이 필름의 기본 외형을 갖추기 쉬워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런 까닭에 관객은 이 영화가 존재하는 불가피한 이유를 찾게 된다. 그것은 통찰이거나 질문이다. 확고한 사전 기획 의도나 주제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시나리오가 없으므로 다큐멘터리는 도중에 생성되는 영화다. 통찰과 질문은 미리 확정되는 것이 아니라 취재하고 결과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발견되고 진화해야 한다. 관객이 계속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하는 힘은 정답이 아니라 목적지가 있는 여정에 동행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04/30 13 : 00 검증된 이력, 기획을 지닌 3인의 감독에게 영화제가 제작비를 지원해 완성된 장편을 매년 최초 공개하는 ‘전주시네마프로젝트’는 해외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의 중요 관심사다. 올해는 세편 모두 한국 감독 작품으로, 극영화 <시인의 사랑>과 <초행>,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가 월드 프리미어를 가졌다. <시인의 사랑>은, 투박하게 소개하자면 <베니스의 죽음>을 만화체로 제주도에 옮겨놓은 것 같은 줄거리의 희비극이다. 토박이로 설정된 인물들이 사투리를 쓰지 않는 <시인의 사랑>은, 오멸 감독의 제주영화와는 궤를 달리하지만, 그렇다고 제주에 관광 삼아 잠깐 머물다가는 영화도 아니다. <시인의 사랑>에서 제주는 여행지가 아니라 주소지다. 마흔줄에 접어든 무던한 성격의 시인 현택기(양익준)는 생활력 강한 아내(전혜진)와 평탄히 살아가지만 이중의 스트레스 아래에 있다. 하나는 자기가 쓰는 시에 절실함이 없다는 예술적 고민이고, 나머지는 시인이라는 직업을 한량 내지 사내답지 못함의 다른 말로 여기는 주변의 인식이다. 후자에는 만성이 됐지만 그는 종종 문학과 생활의 괴리에 한숨 짓는다. 오줌 마렵다고 뛰쳐나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의 마음에서 헤엄치던 날이 있었지”라고 뇌까리는 식이다. 시인의 회의는, 임신을 원하는 아내에 떠밀려 시작한 인공수정 시도를 겪으며 깊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앞에 오픈한 도넛 가게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소년(정가람)에 눈길이 머문 순간 택기는 시와 삶을 일치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달콤한 흥분에 휩싸여 호머 심슨처럼 도넛을 폭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시인의 사랑>의 이슈는 중년에 각성한 성 정체성이 아니라 범속한 현실과 초월적인 이상의 대립에 초점을 맞춘다. “당신 게이였어?”라는 질문에 택기는 “바이겠지”라고 주섬주섬 우물쭈물 정정한다. 극중에서 ‘커밍아웃’이라는 단어는 통상적 의미 외에 정신적으로 문학 소년에 머물러 있던 택기가 정념으로부터 시를 짓게 됐을 때도 등장한다. 이 멜로드라마에서 아내는 진정한 사랑을 훼방놓는 세속의 굴레로 단순화되기 십상인 캐릭터지만 전혜진의 해석은 이 인물을 언어가 아닌 행동으로 사랑하는 법에 통달한 성숙한 여인으로 그린다. 반면 소년의 동선과 감정선은 택기의 방황을 위해 편의적으로 설계된 인상이다. 톤의 측면에서 비극과 코미디의 불균질한 융합은 <시인의 사랑>의 단점이다. 동시에 결과를 떠나 이 영화에 내가 호감을 품는 대목도 어느 한쪽의 정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감독의 고집에 기인한다. 나는 이 영화가 시를 물정 모르는 이의 도락, 우스갯거리로 삼지 않는 점이 좋았다. 감독은 영화 내내 깔리는 현택기의 쑥스러운 문어체 내레이션과 그 언어들로 구성된 그가 보는 세상을 진심으로 존중한다. 21 : 30 영화제에서 동물 학대 장면을 포함한 영화를 고르고야 마는 나의 징한 징크스는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원더즈>(The Wonders, 2014)로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알리스 로르바셔의 초기작 <천상의 육체>을 보러 갔다가 자루에 든 아기 고양이들이 겪는 난데없는 재앙에 진저리를 쳐야 했다. 마음을 달래려는 사리사욕으로 고른 반창고는 멕시코영화 <다른 모든 것들>(Todo Lo Demas). 생활에 환멸을 느낀 공무원이 수영장에서 돌파구를 찾는다는 시놉시스에 혹했다. 수영장은 무취미한 내게도 몇 안 되는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른 중력과 물질에 둘러싸여 매번의 날숨과 들숨을 생생히 의식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는 큰 위안과 해방감이 있다. <다른 모든 것들>의 주인공 도나 플로르(아드리아나 바라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을 안 하기 위해 일을 하고 있는 듯한” 공무원의 부정적 스테레오타입이다. 한국으로 치면 주민증 갱신 업무를 담당하는 35년차 공무원 도나는 민원인의 서류를 검토해 접수 불가한 이유를 짚어내는 업무로 하루를 보낸다. (졸음 많은 관객에겐 불운하게도) 나탈리아 알마다 감독은 관객이 인물의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직접 체감하도록 도돌이표 시나리오를 썼다. 도나는 매일 만원 전철을 타고 청소부만 출근한 이른 시각 사무실에 도착해 종일 시민들에게 욕을 먹은 다음 귀가해서 고양이를 쓰다듬고 그날 처리한 일에 관해 장부를 쓴다. 요컨대 도나에게는 생활이 없다. 어디 사는 누구의 서류를 반려했다는 기록만이 그녀가 존재했다는 증명이다. 영화가 3/4 지점에 이르렀을 즈음 <토니 에드만>의 아버지 빈프리드가 그랬듯이 유일한 커뮤니케이션 상대인 반려동물을 잃은 도나는 비로소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수영장에 등록한다(그렇다. 다시 고양이가 변을 당한 것이다). 심지어 나의 긴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수영장에 발가락도 넣지 못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인물 안에 축적된 무기력의 중량을 표현하기로 결정하고 만다(난 대체 왜 이 영화를 봤단 말인가!). 다큐멘터리가 고향인 나탈리아 알마다 감독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에게 영감을 받아 <다른 모든 것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마 관료 전범의 예를 통해 주체적 사고와 공감 능력을 잃어버린, 그러나 매우 근면성실한 개인을 양산하는 관료제의 폭력성을 지적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같은 책이 영감이었나 보다. 물론 이 영화의 도나는 누구도 죽이지 않는다. 관료주의와 수세적 삶의 태도로 최대의 피해를 보는 인물은 주민증 발급을 거절당하는 민원인들이 아니라 본인이다. 결국 이 영화는 내게도 불편한 물음을 던졌다. 나는 꼬박꼬박 영화의 출납부를 쓰는 데에 게으르게 자족하고 있는 것 아닐까? 글을 통해 영화에 요구하는 능동성과 용기를, 나는 얼마나 유지하고 있나? 좋아요 부모 만나기 전주시네마프로젝트 중 한편인 <철원기행>의 김대환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초행>은 6년간 사귄 수현(조현철)과 지영(김새벽)이 둘의 동거 사실을 모르는 양가 부모를 차례로 방문하는 이야기다. 조건은 달라도 한국의 모든 커플이 경험할 법한 흔한 통과의례를 따라가는 <초행>의 눈은 흔치 않게 예민하다. 이들의 여정은 세상 유일하고 특별한 존재였던 연인이, 그를 닮았지만 ‘평범한’ 일족의 구성원이었음을 확인하는 절차다. 또한 파트너의 가족을 만났을 때 본인의 부모 앞에서는 저항했던 관습에 타협하는 희생의 체험이다. 함께 산책을 나가도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도 이들의 공간에는 수시로 블록이 발생한다. 들리지만 모른 척하는 투명한 벽이 이리저리 세워지고 여자의 아버지와 남자, 남자의 어머니와 여자 사이에는 미묘한 일시적 연대가 맺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