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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도서] 씨네21 추천 도서 <미국의 목가1, 2>

어린아이들의 마음속엔 영웅이 살고 있다. 주로 텔레비전과 스크린 속 인물들이 그 주인공이 된다. 하지만 생활 가까운 곳에도 영웅들이 있다. 곁에 두고 거울처럼 자꾸 비춰보는 작은 영웅들. 또래일 때가 많다. 스위드는 마을 청소년들에게 그런 존재다. 타고난 운동 재능, 정직한 말투, 온화한 미소와 황금빛 머리카락. 미국 청년의 이상형이라고 해도 좋다. 네이선의 유년 시절은 스위드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스위드의 동생 제리와 동갑내기였던 네이선은 제리를 만나기 위해 스위드의 집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아주 가끔씩 스위드를 마주치기도 했지만 네이선은 스위드가 자신을 기억해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네이선은 야구장에서 우연히 스위드 가족을 만나는데, 놀랍게도 스위드는 네이선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물론 ‘스킵’이라는 애칭까지 쓴다. 얼마 후, 스위드는 네이선에게 편지 한통을 보낸다. 통찰은 대상에 대한 지긋한 관찰에서 나온다. 이 글의 화자이자 극중에선 작가로 등장하는 네이선 주커먼은 필립 로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의 문학적 자아다. 이 소설은 스위드라는 인물과 그 가족에 대한 네이선의 관찰과 묘사로 전개된다. 더불어 베트남전쟁을 비롯한 근현대 미국의 사회상, 뉴어크라는 지역의 특색 같은 배경들이 담긴다. 작가 필립 로스는 특수한 배경, 소수의 인물에 대한 묘사만으로도 보편적인 깨달음들을 길어올린다. “공격성은 사람을 닦아주고 치유해준다”, “그는 줄곧 밖에서 자기 삶을 들여다보고 있어”, “형은 너무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 그때까지는 그런 질문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거야” 같은 미묘한 깨달음을 던져주는 문장들이 가득하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휴먼 스테인>에 앞서 발간돼 미국 3부작을 이루는 이 작품은 작가 필립 로스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주기도 했다. 이완 맥그리거가 연출과 연기까지 맡은 영화로 개봉을 앞둔 작품, <아메리칸 패스토럴>의 원작 소설이다. 영웅과 비극 우리는 우리의 피상성, 우리의 천박함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 비현실적인 기대 없이, 편견이나 희망이나 오만이라는 무거운 짐 없이, 최대한 탱크와 닮지 않은 모습으로, 대포도 기관총도 15센티미터 두께의 강철판도 없이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우리는 탱크의 무한궤도로 상대의 텃밭을 깔아뭉개는 대신 우리 자신의 발가락 열개로 겁을 주지 않고 다가가며, 동등한 사람으로서, 흔히 말하듯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열린 마음으로 덤벼든다. 그래도 늘 상대를 엉뚱하게 오해하고 만다. 차라리 탱크의 뇌를 갖는 편이 나을 것이다. (중략) 일반적으로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실은 이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지러운 착각일 뿐이며, 오해가 빚어낸 놀라운 소극일 뿐이다.(61쪽)

[스페셜] 현장에서 전하는 70주년 칸국제영화제의 주요 이슈5

“기자만 4500명 이상이 와서….” 저널리스트당 하나씩 배정된 메일박스가 누락된 것을 문의하자 돌아온 영화제쪽 답변이다. 프레스와 마찬가지로 마켓 관계자들도 올해 참가자가 대폭 늘어 혼선이 있다는 뒷이야기를 한다. 1946년 시작된 이래 70주년을 맞은 영화제는 예상치 못하게 증가한 게스트들로 한층 더 북적인다. 집행위원장인 피에르 레스큐르가 “우리는 도널드 트럼프 때문에 매일 놀라고 있는 만큼 북한과 시리아가 (영화제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기를 바란다”는 테러에 대한 우려는, 다행히 아직까지 기우에 불과한 듯 보인다. 영화제 초반을 강타한 이슈는 역시 스트리밍 서비스 기반업체인 넷플릭스의 영화제 수용에 대한 찬반 논란이다. 12일간 매일 밤낮, 극장에 자리를 잡기 위해 기자들이 칸의 뜨거운 햇빛 아래 악착같이 줄을 서는 풍경이 일상인 크루아제트 거리에서 ‘꼭 극장에서 보아야 영화일까’라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라니, 이 또한 아이러니한 일이다. 70주년 영화제의 포문을 여는 데 이보다 더 어울리는 쟁점이 또 있을까 싶다. 70주년 칸국제영화제의 주요 이슈들을 살펴본다. 1 극장에서 볼 수 없는 영화는 수상 불가? 그렇다. <옥자>를 빼고 70회 칸국제영화제를 설명하는 건 불가능하다. <옥자> 포스터가 칸 메인 상영관이 있는 크루아제트 거리에서 두 번째로 크다(첫 번째는 영화제 공식 포스터). 경쟁에 참여한 두편의 넷플릭스 투자·제작·배급작인 노아 바움백의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스>와 함께 <옥자>는 ‘올해의 사건’이다. 마침 심사위원 기자회견에서 심사위원장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대형 스크린에서 볼 수 없는 영화는 황금종려상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을 더함으로써 논란은 좀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앞서 칸 예술감독 티에리 프레모가 “아마존이나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대주주들의 등장을 인정해야 한다”며 새로운 플랫폼에 대한 변화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과 달리 프랑스극장협회(FNCF)가 “넷플릭스가 부가가치세도 안 내고, 텔레비전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칸국제영화제가 안겨주는 혜택만 가져간다”라며 프랑스 내 극장 상영을 불허한 게 불과 며칠 전이다(영화 작품의 배급과 유통과정의 질서와 기일을 규제하는 프랑스 법안, 미디어 크로놀로지(Chronologie des medias)에 따르면 극장 상영 후 3년이 지나면 스트리밍 서비스가 가능하다). 결국 두 작품은 칸국제영화제 70년 역사상 처음으로 영화제 이후 프랑스 내 상영이 금지된다. 넷플릭스 작품 상영을 둘러싼 문제제기는 결국 전통적인 배급방식을 고수하려는 배급망과 새롭게 시장에 진입하려는 플랫폼간의 파워게임이다. 70년 전통과 권위를 가진 영화제가 이 전장에 ‘터’를 제공한 셈이다. 논란이 거세지자 영화제쪽은 “2018년부터는 영화제 경쟁작은 모두 극장에서 배급되어야 한다”며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내년을 장담하기 힘들 정도로 이 문제는 예민한 사항이다. 전세계 최대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인 넷플릭스로서는 경쟁 섹션 초청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이미 마켓에서는 세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또한 새롭게 출범한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의 정책도 변화를 불러올 요인이다. 정체된 자국의 경제 체제를 개선하려는 노선에는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낡은 영상 미디어 분야의 규제 완화 역시 포함된다. 이런 상황에서 <옥자>가 수상까지 한다면 논쟁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것이다. 2 삭제 버전 상영만이 문제일까, 개막작 <이스마엘의 유령> 5월 17일 개막작인 프랑스 감독 아르노 데스플레생의 <이스마엘의 유령>이 공개됐다. <나의 성생활, 나는 어떻게 싸우는가>(1996)로 데뷔 이래 프랑스 누벨바그의 적자로 평가받는 데스플레생의 작품이 개막작으로 선정된 것은 이례적이다. 2006년 개막작 <다빈치 코드> 이후 <로빈 후드> <위대한 개츠비> <미드나잇 인 파리> <문라이즈 킹덤> <카페 소사이어티> 같은 상업성을 겸비한 작품이 주로 개막작으로 선정되어왔다(이는 올해 경쟁섹션에도 워너브러더스, 소니픽처스, 이십세기폭스 등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작품들이 포함되지 않은 것과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개막과 동시에 프랑스 극장에서 개봉하는 <이스마엘의 유령>은 영화제 상영 버전이 극장 개봉 버전에서 20분이 잘린 1시간54분 버전이다. 영화제가 134분의 감독판을 두고도 극장 상영을 위해 편집한 짧은 버전을 선택한 기준도 이해가 쉽지 않다. 영화평론가 장 미셸 프로동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영화제가 지긋한 나이를 축하하기 위해 치르는 행사에서 존경받는 감독 중 한명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삭제된 버전을 상영한다”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비난은 영화가 공개된 후 더 거세졌다. <이스마엘의 유령>은 집을 나간 지 21년 만에 죽었다고 믿는 이스마엘(마티외 아말릭)의 아내(마리옹 코티야르)가 다시 돌아오면서 빚어지는 소동이다. 실비아(샬롯 갱스부르)와 연인관계이자 영화감독인 그는, 자신을 스파이라고 믿는 동생 이반(루이 가렐)의 스토리에 집착한다. 현대가족의 초상을 그린 <크리스마스 이야기>(2008)와 같은 작가적 통찰을 기대했지만 <이스마엘의 유령>은 드라마와 판타지, 코믹을 오가는 사이에 감독이 길을 잃은 게 역력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뒤죽박죽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작가의 도취로 가득 찬 작품에 그치고 말았다. <가디언>은 “마리옹 코티야르도 살리지 못한 영화”라고 말했고, <버라이어티>는 “가짜 베이컨과 마가린, 값싼 치즈와 함께 요리한 크기만 크고 맛없는 고기”라고 비난을 가했다. 안타깝지만, 잘려나간 20분의 문제만이 전부가 아니다. 3 칸은 홍상수를 지지합니다, <그 후> 경쟁부문 진출 홍상수 감독의 21번째 장편영화 <그 후>가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이자벨 위페르와의 두 번째 협업이자 <그 후>보다 앞서 완성한 <클레어의 카메라> 또한 스페셜 스크리닝 부문에서 상영된다. 이로써 홍상수 감독은 이례적으로 두편의 영화를 칸에서 선보이게 됐다. 홍상수 감독과 칸국제영화제의 인연은 <강원도의 힘>(1998)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동안 <강원도의 힘>, <오! 수정>(2000), <하하하>(2010), <북촌방향>(2011)이 주목할 만한 시선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 <극장전>(2005), <다른 나라에서>(2012)가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하지만 칸의 단골 감독치고는 경쟁부문 수상 경력이 전무하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올해의 수상을 조심스레 예측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매체 <알로 시네>는 “티에리 프레모는 영화제 단골 감독들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꺼려한다. 이들에게 특권을 준다는 얘기처럼 들릴까봐서다. 하지만 특권이라는 표현은 한국의 홍상수 감독에게 잘 어울리는 표현 같다”고 전했다. 그것이 특권인지 아닌지는 영화가 공개돼봐야 알겠지만 홍상수라는 시네아스트에 대한 칸의 지지는 여전히 공고해 보인다. 4 니콜 키드먼, 올해의 칸 최다 출연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선 니콜 키드먼의 출연작을 무려 4편이나 볼 수 있다. 배우상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비공식적으로라도 최다 출연상을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우선 경쟁부문 상영작인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에서 기숙학교 교장으로 분했고,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에선 외과의사의 아내로 출연한다. 제인 캠피온이 연출한 TV시리즈 <톱 오브 더 레이크>, 존 카메론 미첼의 <하우 투 토크 투 걸스 앳 파티스>에서도 강렬한 캐릭터를 맡았다. 프랑스가 사랑하는 배우 루이 가렐도 개막작인 아르노 데스플레생의 <이스마엘의 유령>과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리다웃어블> 두편에 출연한다. 특히 <리다웃어블>에선 거장 장 뤽 고다르 감독으로 완벽히 변신했다고 한다. 한편 배우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배우가 아니라 감독으로 칸을 찾는다.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연출한 단편 <컴 스윔>이 선댄스영화제에 이어 칸에서도 상영된다. 5 데이비드 린치와 제인 캠피온을 만나다 70주년을 맞은 칸국제영화제의 서프라이즈는 넷플릭스나 아마존에서 제작·배급하는 작품을 라인업에 추가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TV시리즈와 가상현실(VR) 작품을 특별 초청한 것으로 이어졌다. 70주년 이벤트의 일환으로 올해 칸은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들이 연출한 TV시리즈 두편을 상영한다.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와 제인 캠피온의 <톱 오브 더 레이크>가 그것이다. 티에리 프레모 칸 예술감독은 두 작품의 상영이 “칸국제영화제의 특별한 친구들- 데이비드 린치, 제인 캠피온- 의 새로운 소식을 전하기 위한 의미”도 있으며 이 작품들은 “TV시리즈라 하더라도 고전 예술로서의 영화적 방식을 사용한다”며 영화가 아닌 ‘TV’에 방점이 찍히는 것에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감독과 에마누엘 루베스키 촬영감독이 협업한 VR 단편 작품인 또한 칸에서 만날 수 있다. 국경을 넘는 이민자들의 실제적 상황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임필성의 영화비평] 배타적 공포 다룬 새로운 호러 스릴러 <겟 아웃>의 아쉬운 점

*<겟 아웃>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여년 전, 절친인 선배 감독과 함께 미국 아이오와에 2~3주간 머문 적이 있었다. 강의 등 일 때문에 간 것이어서, 자동차로 불과 2시간 거리인 대도시 시카고도 못 가본 채 여행 기간 내내 꼬박 백인 중심의 중소도시에 머물게 된 것. 그러던 어느 주말, 우리는 초청 대학의 주선으로 미국 전통 스포츠 경기인 ‘로데오’를 참관하게 됐다. 10여명의 기수가 성조기를 흔들며 종마에 올라탄 상태로 미국 국가를 부르는 개막 행사의 생경함은 그렇다치고, 우리를 진실로 경악하게 만든 건 국가 제창 뒤에 이어진 흑인 광대의 기묘한 서커스 때문이었다. 우스꽝스럽게 분칠을 하고 나온 흑인 피에로는 잠깐의 슬랩스틱 개그를 선보이더니 이내 큰 드럼통에 몸을 꾸깃꾸깃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한가롭게 서 있던 백마 한 마리가 그 드럼통을 발로 차며 굴리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흑인 피에로는 드럼통을 빠져나왔다 다시 들어가는 것을 반복했고 백마는 드럼통과 광대의 행방을 따라다니며 계속해서 발길질을 해댔다. 나와 선배 감독은 황당한 표정으로 이 기묘하고 불편한 광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족히 2만석은 될 듯한 야외 스타디움의 모든 관객은 박장대소하며 이 서커스를 즐기고 있었던 것. 우리는 조금은 섬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그제야 중요한 사실을 자각했다. 우리 두명의 동양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객이 백인이란 사실을. 이상한 일은 그 이후에도 계속됐다. 술 취한 ‘레드넥’ 백인 아저씨가 다가와 앉은 좌석이 맞는 자리냐며, 우리에게 괜한 시비와 행패를 부린 후에(지정석이 없는 공연이었음에도) 급기야 대학 관계자가 로데오 경기의 1부가 끝나면 바로 숙소로 돌아가자는 제안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와 선배 감독이 그 경기장을 빠져나올 때, 객석의 수많은 백인 관중이 우리를 힐끗거리며 때론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는데 그 낯설고 기이한 분위기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여행 후 선배와 나는 LA나 뉴욕 같은 대도시는 미국의 진짜 모습이 아닌 것 같다며 우리가 경험했던 그 이상한 로데오의 밤을 간혹 추억했다. 한 흑인 청년의 생생한 지옥도 상황과 설정, 인물, 지역 등 모든 것이 다르지만 <겟 아웃>의 주인공 크리스(대니얼 칼루야)가 백인 여자친구 부모의 서늘한 백인 지인들에 둘러싸여 있을 때의 느낌을 나는 위의 경험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배타적인 집단에 타자가 되어 한중간에 들어선 느낌. 그건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박사모) 집회 한가운데 끼어든 촛불시위 참여자의 공포일 수도, 로데오의 2만 백인 관객 한가운데에 끼어든 내가 받았던 느낌일 수도 있으며, 유난히 빛나는 검은 피부와 사진에 대한 심미안을 가진 건장한 청년 크리스가 타이거 우즈와 오바마를 들먹이며 동물원의 인기 동물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던지는 영화 속 백인들에게서 받았던 느낌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로튼토마토 평점 99점엔 결코 동의할 수 없지만 매우 영리하고 재능 넘치는 감독 겸 배우 조던 필의 영화 <겟 아웃>은 바로 이 진짜 미국의 치부를 장르영화의 관성에 제대로 버무리며 관객을 긴장의 블랙홀, 아니 화이트홀에 밀어넣는다. 조던 필이 참고한 영화의 리스트는 상당하다. 시드니 포이티어 주연의 고전 <초대받지 않은 손님>(1967)부터 이상적인 부인들이 결국 기괴한 사이보그였다는 설정의 <스텝포드 와이프>(1975), 수많은 주말 별장 호러들, 다른 사람의 내면에 들어가 그의 일상을 텔레비전처럼 바라보는 <존 말코비치 되기>(1999), 브라이언 유즈나의 컬트호러 <소사이어티>(1989), 존 프랑켄하이머의 걸작 스릴러 <세컨드>(1966)까지. 특히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초반 설정이 매우 유사할 뿐 아니라 그 영화에 등장했던 백인 여자친구 부모의 외모와 의상까지 노골적으로 참고한 흔적이 역력하다. 더이상 새로운 모티브도 새로운 이야기도 없다는 21세기 장르영화의 아수라장 속에서 제작사 블룸하우스와 조던 필은 익숙한 장르 클리셰와 레퍼런스로 중심을 잡으며, 인종차별과 우생학이란 모티브를주 멜로디로 삼은 새로운 호러 스릴러의 힙합 리믹스를 선보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공포는 호러 장르의 영원한 테마이지만 그 섬뜩한 타자들이 사랑하는 여자친구의 부모와 그 친구들이란 설정. 그리고 그들의 욕망이 흑인의 건강한 육체와 젊음이라는 모티브는 분명 다민족 사회를 살아가는 ‘세계 시민’들의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하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각 인종이 가지고 있는 우생학적 장점을 결합해 ‘영생’을 누리겠다는 욕망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탐욕이자 신기루에 가까운 광기이지만 그걸 실현시키겠다며 과학과 의학, 최면술까지 동원하면서 발버둥치는 자들의 동네는 지옥의 한 귀퉁이일 수밖에 없다. 결국 <겟 아웃>에 열광하는 관객은 한 흑인 청년의 지옥도를 생생하게 체험한 후 극장의 불이 켜졌을 때 자신이 안전한 세상에 있다는 안도와 평화를 느끼게 될 것이다. 장르 흥행작 정도에 그치다 <겟 아웃>이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전복적인 장르영화로 나아가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지점은 바로 그 철저한 상업영화로서의 안정성 때문이었다. 블룸하우스와 조던 필은 좀더 유혈이 낭자하거나 좀더 신랄할 수 있는 지점들을 영리하게 피해나간다. 영화 후반부에 미친 백인들에게서 벗어나 폭주하는 크리스가 그들을 처단하는 묘사들은 엉거주춤하며 공항 안전요원으로 근무하는 그의 친구가 해결사로 등장하는 클라이맥스 부분이 상당히 안일하게 느껴진 건 골수 장르팬의 우매한 기대 때문이었을까. 스파이크 리나 존 싱글턴이 초기작들에서 보여주었던 흑백 갈등의 묵직한 묘사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크리스가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백인 경찰들에 제압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는 오리지널 엔딩을 고수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런 불편하고 서늘한 결론을 내렸다면 과연 500만달러 제작비에 30배 이상의 수익을 낸 <겟 아웃>의 대흥행이 이루어졌을까란 가정은 영화의 결과를 함부로 예측해보는 바보 같은 질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블룸하우스와 조던 필은 충분히 전복적인 장르 걸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작품을 안전하고 재미있는 장르 흥행작 정도로만 안착시킨 과오를 범했다고 감히 트집을 잡고 싶다. 백인들이 열렬히 지지했던 대통령 트럼프가 온갖 기행을 일삼는 현재의 미국에, <겟 아웃> 같은 영화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이 영화가 원용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주었던 강렬한 자각을 관객에게 충분히 경험하게 할 수도 있었다. 부디 영민한 감독이자 작가인 조던 필이 위선적인 미국의 백인 주류 사회에 더 큰 야유와 소란을 일으키는 신작을 선보였으면 좋겠다. 제작자로 참여한 이 영화로 돈은 벌 만큼 벌었을 테니 말이다.

[스페셜] 이화정 기자의 2017 칸국제영화제 중간결산 리포트

“대피!!!”(evacuation!!!) 5월 20일 경쟁작 미셸 하자나비시우스의 <리다우터블>이 상영되는 칸 드뷔시 극장 앞, 상영관에서 뛰쳐나온 스탭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크루아제트 거리를 울렸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 시간 이상 상영을 기다리던 이들은 대피명령에도 한참 자리를 뜨지 못했다. 급파된 경찰 병력에 이유를 물으니 “폭탄물로 의심되는 물건이 든 가방이 극장 안에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결국 영화 상영은 이 난장이 정리된 지 40분도 더 지나 시작됐다. 장 뤽 고다르의 이야기를 그린 하자나비시우스의 영화가 ‘68년 5월의 우스꽝스러운 순간만을 담은’, ‘쓸모없는 고다르 전기’라는 악평과 함께 영화제 공식 <스크린 데일리> 평점 최하위를 기록하기까지는 테러 소동으로 피곤해진 기자들의 영향도 0.000000001%는 있었던 걸까(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테러의 먹구름으로부터 부디 무사하기를’ 바란 영화제쪽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테러는 그 어떤 영화보다도 강력한 올해의 ‘영화’였다. 강화된 보안검색에 항의하던 기자는 그 자리에서 배지를 뺏기고 퇴장당했고, 시네마테크 프랑세즈 수석 프로그래머 장 프랑수아로제의 시가 커터가 눈앞에서 가차없이 파기됐다. 마침 영국 테러 소식이 전해졌고 영화제 역시 공식적으로 조의를 표했다. 종군기자도 아닐진대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간 그곳에, 70주년 칸국제영화제의 경쟁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네케에겐 없고 즈비아긴체프에겐 있는 것 23일 현재 반환점을 돌아 이제는 총 19작품 중 총 5편의 경쟁작만을 남겨둔 시점. 영국 테러 사망자에 대한 조의로 칸국제영화제 70주년 기념 폭죽도 없었고, ‘영화 폭죽’도 아직까지 없다. 줄이 가장 길었던 작품이자 세 번째 황금종려상 후보에 점쳐졌던 미하엘 하네케의 <해피 엔드>가 평작에 그친 것도 아쉬움 중 하나였다. 상영 후 “하네케는 절대 세 번째 황금종려상이 아니다”라는 찬물세례 트윗 반응이 올라왔다. 가족 삼대의 이야기로, <아무르>(2012)에서와 같이 장 루이 트랭티냥, 이자벨 위페르가 부녀로 출연하며, 하네케 영화의 요약판이자 ‘<아무르>의 속편’ 같은 인상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네케의 작품일까’ 싶을 만큼 한층 가벼워진 터치다. 함께 있지만 서로 무관심한 가족 관계가 그들이 각자 소통하는 스마트폰 영상으로 재기 있게 표현된다. 전작이 담았던 서늘한 서스펜스의 기운, 삶과 죽음을 향한 <아무르>의 극단적 선택은, 이번엔 오히려 가족에 의해 만류되고 유보된다. 대신 하네케의 작품이 올해 ‘빼놓은’ 그 냉기 가득한 현실의 모습은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러브리스>에 모두 전이된 것 같은 기분이다. 첫 공개된 경쟁작이자 지금까지 영화제 공식 데일리 <스크린 데일리> 평점 3.2점을 얻은(4점 만점) 가장 강력한 황금종려상 후보작 중 한편이다. 이혼을 앞둔 부부 앞에 놓인 어린 소년의 황폐한 심리, 실종된 소년이 가져온 파국이 러시아 도심의 삭막한 겨울 풍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67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가져간 <리바이어던>(2014)을 비롯해 줄곧 즈비아긴체프 감독과 함께 작업해온 촬영감독 미하일 크리크만의 촬영이 이번에도 영화의 공기를 만들어낸다. 눈덮인 광활한 숲에서 소년을 찾아 헤매는 수색대의 울림이, <리바이어던>에 이어 또 한번 정체된 러시아 사회를 흔든다. 유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점쳐지는 또 한편의 작품은 로랑 캉테 감독의 시나리오 협력자인 로빈 캉필로가 연출한 <120 비츠 퍼 미니트>이다. 성매매 소년들의 에이즈 운동단체 액트업(ACT UP)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1990년대 초반, 질병의 공포와 차별에 맞서 싸웠던 에이즈 운동의 활동을 통해 당시 사회를 조망한다. 시나리오작가인 필립 망거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프랑스 매체 <텔레라마>에서는 “<텔레라마> 기자들이 이렇게 다수로 만점을 기록한 적이 없다”라며 자신들의 평점에 놀라움을 드러냈고, 미국 <버라이어티> 역시 “섹시하고 통찰력 있고 인간미 넘치는 드라마”라 평했다(지난해 호평일색이었던 평가와 달리 빈손으로 돌아간 <토니 에드만>은 어쩌고). <다른 나라에서>(2012) 이후 5년 만에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그 후>는 평가는 갈리지만, <클레어의 카메라>(특별상영)로 두편이나 초청되는 드문 예로 수상 가능성을 점쳐보게 만든다(자세한 내용은 48쪽 참조). 거장도, 중국영화도,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도 없이 프로그램은 평이했지만, 후반에 이르는 지금까지 인상적인 작품들은 적지 않았다. 영화제 마지막으로 추가 초청된 스웨덴 감독 루벤 외스트룬드의 <더 스퀘어>도 화제의 반열에 올랐다. 전작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2014)이 눈사태에 대처하는 남편의 지질한 자세로 웃음을 이끌어냈다면, 이번 작품은 잘나가는 미술관 관장 큐레이터 크리스천을 통해 예술계의 허세를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침팬지와 사는 여성, 젠체하는 인물들을 위협하는 행위 예술가 등을 통해 곳곳에 루벤 외스트룬드의 코믹 코드와 서스펜스가 잔뜩 살아 있지만 평가는 다소 저조한 편. 특히 스키 리조트라는 한정된 공간, 간결한 형식, 짧은 러닝타임으로 주제에 접근했던 전작의 명성에 못 미친다는 평이다. “2시간22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 덜 효과적인 구성”(영국 <가디언>)이라는 평가가 매체마다 쏟아졌지만 극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작품이라는 점, 또 ‘잘생기고 잘나가는’ 캐릭터를 고스란히 구현한 배우 클라에스 방이 하나둘 망가져 나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토드 헤인즈의 <원더스트럭>은 전작 <캐롤>(2015)의 파격적인 정서를 떠나, 어린아이의 성장담이라는 점에서 보다 대중적 시도를 한 작품이다. 전작 <화이트 갓>으로 2014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한 헝가리 감독 코르넬 문드루초의 <주피터스 문> 역시 흥미로운 지점이 많은 작품이다. 난민 캠프라는 리얼한 현실과 공중부양이라는 판타지한 소재를 접목한 재기 있는 작품으로, 저조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차기작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두편의 영화는 기자회견과 인터뷰를 통해 전한다. 자세한 내용은 50쪽 참조). 이 밖에도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더 킬링 오브 세이크리드 디어>, 가와세 나오미의 <히카리>, 자크 돌란의 <로뎅> 등이 공개됐다. 미하엘 하네케를 제외한 거장감독의 부재, (칸의 초청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 작품의 부재, 중국 자국의 검열 강화(중국광전총국에서 주는 사전검열제도로 용표(용마크)를 받지 못한 작품은 자국 내 개봉이 불허된다. 그간 국제영화제 출품작들은 예외였으나 지난 4월 이후 바뀌었다. 출품작 모집시기에 중국 검열의 직격탄을 맞은 칸국제영화제는 결국 중국영화를 모두 배제한 프로그래밍을 택했다. 이는 한국 작품의 급부상에 대한 이유로 작용하기도 한다)로 인한 중국 작품의 부재 등 올해 칸국제영화제는 ‘부재’를 채울 어떤 대안이 필요했다. <스크린 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음반을 좋아하지만 콘서트에 가서 듣는 걸 더 좋아한다”라며 칸국제영화제를 콘서트에 비유한 예술감독 티에리 프레모도 넷플릭스라는 거대한 스트리밍 서비스라는 ‘변화’를 받아들인 한해였다. 그리고 넷플릭스 작품은 중반을 넘어선 지금까지 이렇다 할 화제작을 생산하지 못한 올해의 영화제에 이슈몰이를 해준 영화제의 ‘선택’이었다. 물론 영화제 초반 봉준호 감독의 <옥자> 소동 이후 후반부에 공개된 같은 노아 바움백 감독의 넷플릭스 작품 <더 마이어로위츠 스토리>는 가족 드라마로 “<옥자>보다 작은 화면에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이변의 영화를 기다리며 칸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한 러시아 기자는 경쟁부문에 초청된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러브리스>를 언급하며 “이번에 러시아 작품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하면 60년 만의 일”이라며, “러시아 예술영화가 힘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한다. 러시아 장르영화가 마켓에서 호응을 얻고, 독립영화 붐이 감지되는 등 최근 새롭게 영화시장에서 러시아영화가 자리매김하는 시기에 칸국제영화제의 트로피가 의미하는 지점은 이토록 크다. 황금종려상만 두번, 칸국제영화제의 트로피는 종류별로 모두 받아본 하네케 감독조차 인터뷰(다음호 기사에 공개할 예정)에서 “세 번째 수상을 기대하냐”는 질문에 “신경 안 쓴다고 말하면 그건 위선적인 것일 테다. 상을 받으면 결국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니까”라는 말을 했다. 영화가 곧 마켓으로, 마켓이 곧 자국 영화산업의 근간과 직결되는, 칸국제영화제에서 트로피의 중요성은 이렇게 다음 영화를 만들어야 할 감독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그래서 트로피의 향방은 어디로? 가와세 나오미 감독과 함께 칸국제영화제는 아직 린 램지, 소피아 코폴라, 두 여성감독의 작품 공개를 남겨두고 있으며, 먼저 공개된 마켓에서부터 호평이 자자한 프랑수아 오종, 세르게이 로즈니차 등의 신작 등 6편의 영화가 남아 있다. 어느덧 폐막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영화제에서, 전세계 4500명의 저널리스트들은 긴 검색대 줄을 지나 마주치게 될 이변의 영화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p.s. 우크라이나 감독 세르게이 로즈니차의 <어 젠틀 크리처>는 투옥된 남편을 찾아 러시아 곳곳을 떠도는 여성 이야기다.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극도의 리얼함이 그 어떤 판타지 장면보다 더 거짓말 같아 보이는, 이 기막힌 사회. 2시간23분 동안 단 세 마디의 대사가 전부. 바실리나 마코프세바의 여우주연상을 점쳐본다. 올해는 첫날 공개된 러시아영화 <러브리스> vs 후반에 공개된 우크라이나 감독(제작 프랑스)의 영화 <어 젠틀 크리처>의 대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크루아제트 대로를 떠들썩하게 하는 중.

[스페셜] 화제작 가이드 ① 논란 속에 첫 공개된 봉준호 감독의 <옥자> 리뷰

<옥자>는 강원도 산골의 어린 소녀 미자(안서현)가 자신이 키우던 ‘슈퍼돼지’ 옥자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그린 액션 어드벤처물이다. 하마와 돼지를 섞은 듯한 거대한 동물인 옥자는 뉴욕의 미란다 주식회사가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개발한 신품종 가축이다. 다국적 기업 미란다 코퍼레이션의 최고경영자 루시 미란도(틸다 스윈튼)는 친환경 시스템을 내세워 회사를 적극 홍보하고 나선다. 슈퍼돼지는 청정지역인 강원도 산골 같은 농가에서 키워진 ‘싸고 맛 좋은’ 자연산 돼지로 둔갑한다. 교배를 통해 탄생한 26마리의 돼지는 전세계 농가에 보내져서 길러지는데, 옥자도 그중 하나다. 회사는 10년 후, 최고의 품종을 선별하기 위한 콘테스트를 개발하고 옥자를 다시 데려오려 한다. 부모를 잃고 할아버지와 산골에서 사는 미자에게 슈퍼돼지 옥자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다. 루시의 위협 앞에서 옥자의 죽음을 막으려는 미자는 탐욕스런 동물학자 조니(제이크 질렌홀)와 제이(폴 다노)를 필두로 한 동물보호단체(ALF) 등과 엮이면서 쫓고 쫓기는 여정을 펼친다. <이웃집 토토로>와 그리고 <옥자> <옥자>에는 많은 작품들이 엿보인다. 온전히 숲에서 살아가는 미자와 옥자의 우정을 통해 자연과 동물이 함께 어우러져 살던 이들이 도심으로 나와 고초를 겪는 과정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친환경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특히 거대한 옥자와 뒹굴며 노는 미자의 모습은 <이웃집 토토로>에서 본 귀여운 이미지가 자동으로 연상된다. 돈을 좇는 어른들에게서 옥자를 보호하려는 미자의 모험은 스티븐 스필버그의 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인간의 이기심을 대표하는 루시에 맞서는 어린 소녀의 모험은 로알드 달의 동화와도 똑 닮아 있다. 숄더색을 불끈 메며 옥자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유리문으로 돌진하는 미자의 액션 신은, 자본의 탐욕으로 오염된 지구상에 마지막 남겨진 순수하고도 강렬한 몸짓으로 읽힌다. 더불어 봉준호 감독의 작품 안에서 <옥자>는 <괴물>(2006)의 할리우드 버전에 가까워 보인다. <괴물>이 블랙코미디를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한 보다 씁쓸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면 <옥자>는 식량, 가축 문제를 통해 자본주의에 만연해 있는 인간의 욕심, 탐욕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고 있다. 옥자 역시 방사능 실험을 하던 중 독극물의 무단 방출로 태어난 괴물처럼, 인간의 욕심으로 한껏 몸집을 부풀린 변종 생명체다. 옥자가 미란도 일당의 추격을 피해, 동물보호단체와 서울 동대문의 지하상가를 누비는 추격전은 <괴물>의 초반에 등장하는 한강 괴물 습격 장면을 감독이 자기 패러디하고 있는 듯 시종 경쾌하게 구현된다. 옥자를 둘러싼 인간들에게서 봉준호 감독은 무조건의 비난보다는 풍자의 시선을 보탠다. 옥자의 유전자를 이용하려는 루시나 조니, 문도(윤제문) 등의 캐릭터를 악인으로 묘사하지 않고 우스꽝스럽고 어수룩하게 그리고 있다면, 옥자와 미자에게 도움을 주려는 동물보호단체 역시 유연하지 못한 꽉 막힌 행동을 부각시켜 비판의 지점을 안겨준다. 한바탕의 난장 끝에 <옥자>는 후반부에 이르러 톤을 달리하는데, 도축장으로 끌려가는 무수한 ‘옥자들’과 일사불란하게 진행되는 도축장의 압도적인 풍경은 다리우스 콘지의 촬영을 통해 섬뜩하게 화면에 제시된다. <델리카트슨 사람들>(1992),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1996)에서 보았던 다리우스 콘지 특유의 음울한 기운이 맞물리면서, 전반부의 톤에서 벗어난 영화의 비장미를 한층 더해준다. 인간이 먹고 소비하지만 육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마주하는 것은 ‘보기 불편한 진실’과 맞닥뜨리는 체험이다. 마치 한강에서 <괴물>의 은신처를 발견했을 때와 같은 공포가 엄습한다. 그러니 채식주의자건 아니건 적어도 이 영화를 보고 나와서 고기를 먹는 건 당분간은 불가능할 것 같다. 특히 옥자를 단순히 가축이 아닌, 반려동물로 인지하는 어린 소녀 미자의 눈으로 이 모든 광경이 목도됨으로써, 처참한 광경은 더 극명하게 표현된다. ‘칸의 결정’은 어떨까 <플란다스의 개>(2000), <괴물>, <설국열차>(2013)에 이르기까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의 코드를 상당 부분 차용하고 있지만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6번째 작품으로 볼 때 한편으로는 상당히 낯선 톤의 영화다. 제시하는 주제의 심각성에 비해 코믹, 액션 어드벤처,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가 결합된 영화의 톤은 다소 경쾌하게 구축되어 있다. 지향점 자체가 모두가 함께 즐길 만한 할리우드 가족 어드벤처에 맞추어져 있는 듯 보인다. 특히 옥자를 찾아나서기까지 옥자와 미자의 끈끈한 감정선 구축이 다소 헐거운 점, 캐릭터들의 희화화로 인해 설득력이 다소 약한 점 등 드라마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 아쉬운 지점을 남기기도 한다. 공개 후 현지반응은 찬반이 엇갈린다.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영화는 황금종려상에 적절치 않다”는 말로 넷플릭스 영화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수상을 하든 하지 않든 간에 어떤 방식으로든 <옥자>는 이번 ‘칸의 결정’으로 해석될, 뜨거운 선상 위에 놓여 있다.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솜씨는 사라지지 않았다_<옥자>에 대한 외신 리뷰들 <가디언>_ “어떻게 이 영화의 제작자가 조그마한 스크린용 콘텐츠를 선보이는 넷플릭스인가. 디지털 효과는 장관이고 비주얼은 아름답다. 이 작품을 아이패드용으로 줄이는 건 끔찍한 낭비다. <괴물>에 이은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크리처 영화인 동시에 사랑스러운 가족용 액션 어드벤처 영화다. 흥미진진하고 매력적이며 사랑스럽다.” <르 푸앙>_ “확실한 건 <옥자>가 공식 경쟁부문에 진출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걸작이라는 말이 아니다. 영화는 분명 단점도 있고, 불만스런 부분도 보인다. 특히 예측 가능하고 끈적끈적한 감성주의에 호소하는 엔딩이 그렇다. 하지만 어린 소녀와 옥자라 불리는 이상한 동물과의 우정을 다룬 이 웃긴 이야기는 감독의 참신함과 자조적 시선을 충분히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봉준호 감독은 장르의 코드를 능숙하게 차용하고 이들을 전복시켜, 웃기면서도 섬뜩한 동시대의 초상화를 그려낸다.” <텔레라마>_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솜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볼거리가 넘쳐나는 장면들이 많고, 무례한 유머도 그대로다. 영화는 동물 학대와 이를 은폐하는 마케팅 방식을 고발한다. 하지만 이 좋은 의도는 등장인물들을 점점 더 싫증나게 하는 뻔한 존재로 변형시킨다. 우스꽝스러운 캐릭터가 관객의 마음에 모두 들 수는 없다. 하물며 이게 독창성을 잃었을 땐 말이다.” <버라이어티>_ “다리우스 콘지가 촬영한 와이드 스크린 화면 안에서 그 누구도 옥자를 실제 동물이 아니라고 상상할 수 없다. 훌륭한 CG 기술이 의심을 중단시킨다. <옥자>는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과는 완전히 다른 크리처 영화다. 그럼에도 관객은 이 영화를 보고 독극물을 함부로 버리는 것은 나쁘다, 육식은 살인이다, 라고 같은 방식으로 인지할 것이다.”

[스페셜]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지석을 추모하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소식이었다. 한국시각으로 5월 19일 아침, 수많은 영화인들이 프랑스 칸에서 들려온 비보에 눈시울을 적셨다. 출장차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 프로그래머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지난 22년을 함께하며, 국내에 국제영화제라는 영화적 토양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장본인이기에 영화인들이 느끼는 상실감 또한 크다. 고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을 추모하며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들을 다시금 돌아보는 지면을 마련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의 일화로 이 글을 시작하려 한다.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와 인터뷰가 예정되어 있던 날 아침, 초유의 태풍이 해운대에 들이닥쳤다. 그날은 영화제 개막식 하루 전이었다. 호텔 프런트 문이 부서지고, 파도에 휩쓸린 물고기가 인도에서 파닥거릴 지경이었으니 해운대 바닷가에 설치한 영화제 컨테이너의 상태가 온전치 못할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그런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김지석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 점퍼를 입고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그의 얼굴은 몹시 침착했다. “준비는 다 했는데 태풍 때문에 타격이 좀 있네요. 빨리 복구해야죠. 허허. 올해는 삼재가 아니고 십재는 되는 것 같아요. 뭔가가 끊임없이 닥쳐오네요.” 이상하게도,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건 함께 대화를 나누는 상대방으로부터 전해지는 어떤 기운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부산시와의 갈등으로부터 빚어진 업무 공백, 이용관, 전양준 등 오랫동안 뜻을 함께했던 영화제 동료들의 불명예스러운 퇴진, 영화인들의 보이콧, 그리고 태풍이라는 자연재해. 그야말로 끊임없는 시련의 한가운데서도 중심을 단단히 지키고자 하는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결연함과 의지를 그날의 만남에서 실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새로운 시작”은 지금부터라며, 영화제가 끝난 직후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조직의 나아갈 방향을 본격적으로 고민해보는 자리를 만들겠다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라는 하나의 세계 속에서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실행해나가는 사람이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이유다. 지난 5월 18일 저녁(프랑스 현지시각 기준),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겸 수석 프로그래머가 프랑스 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7살,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매년 5월마다 전세계 영화인들이 모여드는 거대한 영화축제의 한복판에서,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영화와 함께였다. 칸국제영화제 티에리 프레모 예술감독은 전세계 기자들에게 보내는 보도메일을 통해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 비극적인 소식은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절친한 친구, 봉준호의 영화가 상영되는 날 알려졌다. 우리는 칸국제영화제의 가장 소중한 멤버 중 한명을 잃었다.” 5월 22일 영화진흥위원회의 주최로 열린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서는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강수연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지아장커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등 600여명의 국내외 영화인들이 검은 리본을 달고 30초간 고인을 추모하며 묵념하는 시간을 가졌다. 국내에서는 5월 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부산 광안리에서 부산국제영화제장으로 고인의 장례를 치른다. 29일 오전 11시 발인 후에는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의 영결식도 예정되어 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부재와 더불어 부산국제영화제 역시 하나의 챕터를 마무리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제의 시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순간을 함께한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이용관 전 집행위원장, 전양준 전 부집행위원장과 더불어 부산국제영화제의 밑그림을 설계한 핵심 멤버였다. 1980년대 이용관, 전양준과 함께 계간 영화평론지 <영화언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1991년 일본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참석한 뒤 문화적 충격을 받고, 자비를 들여 홍콩국제영화제, 싱가포르국제영화제 등을 다니며 한국에서의 국제영화제 개최를 꿈꾸기 시작했다. 국제영화제라는 문화적 토양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던 1990년대 중반, 부산시와 언론, 스폰서와 문화예술인 등을 설득해가며 영화제 프로그래밍은 물론이고 “5분 대기조”처럼 영화제의 궂은일을 도맡았던 (김지석을 비롯한) 초기 멤버들의 노력은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적인 개최로 빛을 발하게 됐다. 이후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2007년부터 수석 프로그래머를, 지난 2015년부터는 부집행위원장을 겸하며 부산국제영화제의 22년을 함께해왔다. 무엇보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업적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아시아영화에 관한 한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영화제로 성장시켰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6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칸과 베를린 등의 국제영화제, 이미 아시아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해나가고 있던 홍콩, 도쿄 등의 국제영화제와 부산이 차별화될 수 있는 지점은 아시아영화의 라인업을 강화하고, 아시아 영화인들과의 굳건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그는 믿었다. 2002년 아시아프로젝트마켓을 통해 지금은 아프가니스탄영화의 대부가 된 시디그 바르막(<천상의 소녀>)을 발굴하고, 모스토파 파루키의 <텔레비전>을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해 방글라데시영화계에 뉴웨이브의 물결을 불러일으키는 등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아시아 지역 미지의 영화들에 주목하고 그들의 정제되지 않은 재능을 알아보는 것 또한 그의 역할이었다. 중요한 건 변방의 지역에서 온 영화인이든, 영화 선진국에서 온 영화인이든, 그들을 대하는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태도는 한결같이 다정다감했다는 점이다.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가 “부산영화제 패밀리”라 부르는 아시아 영화인들이 함께했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와 사석에서 술잔을 기울일 때면 다양한 아시아 영화인들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광견병에 걸린 이란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의 치료제를 찾기 위해 서울의 종합병원까지 수소문해 항공 택배로 주사약을 공수했던 경험, 리안 감독의 <음식남녀>에 출연했던 대만의 유명 여배우 양궤이메이를 집에 초청해 미역국을 만들어줬던 기억, 장준환, 유키사다 이사오와 함께 옴니버스영화 <카멜리아>를 부산에서 촬영했던 타이 감독 위시트 사사나티앙에게 한국의 찜질방 문화를 알려줬다는 경험담을 그는 즐겁게 얘기하곤 했다. 그렇게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파트너 이전에 친구이자 형으로, 가족 같은 다정함으로 아시아 영화인들을 감싸안았다. 때문에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입장하는 게스트를 호명하는 역할은 언제나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몫이었다고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소회한다. “지금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님 입장하십니다. 지금 아딧야 아사랏 감독님 입장하십니다…. 이런 멘트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김샘’이 유일했다. 왜냐하면 일반인이 아닌 영화인 가운데도 이런 아시아 영화인의 이름을 정확히 알고 부를 수 있는 분은 김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략) 지금 누구나 안다고 말하는 그 거장들이 거장이 되기 전에 그들의 이름을 불러 세계영화의 지도에 자리를 잡아주고 한국에 그들을 알린 사람은 김샘이다. (중략) 김지석, 말고 누구도 그런 일은 한 사람이 없고 앞으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 지난 2015년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부산국제영화제 20년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묶은 <영화의 바다 속으로>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의 부고를 접하며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직접 집필한 이 책의 프롤로그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글의 서문에서,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생각할 때마다 ‘테세우스의 배’와 관련된 신화를 연상하게 된다고 말한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아테나로 돌아온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사람들은 그가 타고 돌아온 배를 영원히 보존하기로 하지만 세월이 지나 배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어느덧 테세우스의 배는 새로운 나무 판자로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영화제를 만들어가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떠날 것이고, 그 자리는 새로운 사람들로 다시 채워질 것이다. 나는 아테네 사람들이 ‘테세우스의 배’를 기억하듯, 부산 시민과 영화인, 영화제 팬들이 부산영화제를 기억해주기 바란다.”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부재를 아파하며 이 글을 떠올리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의 빈자리를 언젠가 새로운 누군가가 대신하게 되더라도, 김지석이라는 이름은 테세우스의 배처럼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제는 그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때다.

[듀나의 영화비평] <원더우먼>과 제1차 세계대전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나에게 원더우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었다. 린다 카터 주연의 텔레비전 시리즈도 방송국을 옮긴 시즌2부터는 70년대로 건너뛰었고 이후 코믹북 시리즈도 윌리엄 몰턴 마스턴의 시절 이후 그 시대에서 점점 멀어졌지만 어린 시절 한번 각인된 이미지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아무리 <저스티스 리그> 시리즈가 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원더우먼> 영화는 무조건 40년대가 배경이어야 한다고 내가 아무도 안 들어주는 허공에 대고 혼자 외쳤던 것도 이해해주셔야 한다. 그만큼 TV시리즈 시즌1과 골든 에이지 코믹북 시절의 고풍스러우면서도 천진난만하고 낙천적인 분위기를 사랑했다. 그 뒤로 나는 꾸준히 가까운 미래에 만들어진다는 <원더우먼> 영화의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망해버린 에이드리언 팔리키 주연의 TV시리즈 파일럿에서는 무대가 현대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원더우먼> 시나리오를 영화사에서 사들였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후 소문을 들어보면 나중에 판권 문제가 생길까봐 미리 대비한 것이란다. 그럼 시대배경은 2차 세계대전이 될 수도 있는 것인가? 그런데 엉뚱한 소문이 들린다. 패티 젠킨스가 감독하는 <원더우먼>의 시대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이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당황하기 시작한다. 이해는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슈퍼히어로영화는 최근에 하나 나왔다.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2011)와 <원더우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두 영화의 분위기가 겹치지 않길 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속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은 할리우드에서 비교적 다루기 쉬운 시대이다. 선악이 분명하고 당시에 대한 향수와 자부심도 강하다. 성조기 색깔의 유니폼을 입은 미국의 슈퍼영웅이 나치와 싸우고 있는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라? 어느 전쟁이라고 선악으로 단순하게 나뉠 수 있겠냐만, 이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만큼 명확해 보이지는 않는다. 젠킨스의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도 제2차 세계대전과 똑같았고 독일군은 모두 그냥 독일군일 뿐이라고 주장할 것인가? 걱정은 기우로 끝났다. 패티 젠킨스의 영화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정공법으로 치고 나가는 영화였고 시대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젠킨스의 제1차 세계대전은 차선책으로 선택한 ‘위장한 제2차 세계대전’이 아니었다. 그냥 제1차 세계대전이었고 영화는 아주 사실적이지는 않더라도 이 시대를 있는 그대로 이용한다. 영화 속 상황을 보자. 미군 파일럿 스티브 트레버가 아마존들이 사는 숨겨진 섬 근처에 추락하고 앞으로 원더우먼이라고 불릴 다이애나가 그를 구출한 뒤 바깥 세계의 전쟁에서 싸우기 위해 같이 바깥 세계로 나간다는 설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간 세상은 사악한 나치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팔을 벌리고 있는 40년대 초반이 아니라 수년 동안 끌어온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전쟁’에 양쪽 모두가 지쳐 있는 1918년 가을이다. 이 영화의 최종 악역처럼 보이는 인물은 실존 인물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전혀 상관없는 악당인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인데, 그는 닥터 포이즌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이자벨 마루가 발명한 독가스로 이미 다들 끝났다고 생각하는 전쟁에서 이기려 한다. 그리고 다이애나는 루덴도르프 장군이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전쟁의 신 아레스의 현신이고 그를 죽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는다. 제1차 세계대전을 경유하여 획득한 보편성 가장 먼저 건드려야 할 것은 페미니즘이다. 사실 이 영화의 다이애나는 골든 에이지 원더우먼과는 달리 바깥 세계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아레스를 죽여 영원히 전쟁을 끝내고 인류를 구해야 한다는 더 큰 목표가 먼저다. 하지만 영화는 다이애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본다. 남자들만의 성스러운 영역에 눈치 없는 젊은 여자가 들어왔을 때 발생하는 긴장감, 20세기 초 서구 여성들이 막 벗어나기 시작한 구시대 복식의 갑갑함 등등. 영화는 고정 캐릭터 에타 캔디를 영국인 서프러제트로 만드는데, 에타는 이 영화에서 다이애나의 존재를 처음부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당연히 동시대의 여성권리쟁취 운동은 원더우먼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물론 여성 진출이 이를 통해 확대되었던 제2차 세계대전도 잘 어울렸지만 기왕이면 진짜 초창기로 가는 것이 더 신화적인 시작이 아닐까. 하지만 스토리 면에서 영화가 더 구체적으로 집중하는 것은 전쟁 자체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호평을 받는 액션 신이 있는 벨드 전투를 보자. 신선하면서도 그만큼이나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제1차 세계대전 전장에 나타난 고대의 초자연적인 존재가 독일군을 때려잡고 승리를 안겨다준다는 이야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유명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설인 몽스의 천사들이다. 아니면 그 이야기와 연결되었다고 믿어지는 아서 매켄의 단편 <사수들>을 예로 들어도 좋고. 이 부분은 코믹북 슈퍼 히어로 액션보다는 죽어가는 병사들 사이를 떠도는 전장의 전설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약간의 귀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다이애나가 보는 전쟁과 스티브 트레버를 포함한 전쟁은 다르다. 다이애나의 전쟁은 옳고 그름과 목표가 분명하다. 과정도 마찬가지여서 마치 체스게임의 킹을 잡듯 최종 보스인 아레스를 제거하면 끝이 나는 게임이다. 이 관점은 아직 20세기 현대전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없는 구세대의 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이애나 주변의 군인들은 참호전과 셸 쇼크, 대공습, 기관총과 탱크를 모두 겪은 사람들이다. 전쟁은 더이상 구식 영웅담의 재료가 아니고 전투는 영예를 잃었으며 선악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처럼 선명한 미국의 성공 신화를 제공해주지 않으며 영화는 이 흐릿함을 일부러 노출시킨다. 전쟁광 루덴도르프 장군도 여기에 분명한 선명성을 더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대량살상 무기를 만들면 필연적으로 닥칠 수밖에 없는 자연적인 사고에 가깝다. 그 와중에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과는 다른 보편성을 확보받는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제 그냥 ‘전쟁’이 되고 원더우먼은 절대 악 나치와 싸우는 애국적인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현대전과 현대 정치의 잔인한 난장판에 버려진 옛 시대의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된다. 성장물로서 <원더우먼>은 환상과 이상으로 구성된 이 과거의 유령이 (그리스 신화에 기반한 캐릭터의 배경은 여기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불완전하고 더러운 동시대와 불안한 화해를 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으로 첫걸음을 디디면서 끝이 난다. 그러는 동안 영화는 굉장히 잔인한 수를 둔다. 앞에서 다이애나가 신화적인 전투 끝에 구출한 벨드의 주민들을 루덴도르프 장군의 독가스로 날려버리는 것이다. 이 영화의 아레스가 코믹북의 아레스보다 훨씬 설득력 있게 발전한 존재이며 최종 전투 직전까지 상당히 인상적인 존재감을 과시함에도 불구하고 다소 잉여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주제만 본다면 아레스는 이 영화에서 얼마든지 잘라낼 수 있는 불필요한 방정식과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원더우먼>은 전쟁에 대한 영화인 만큼 신화적 영웅이 신화적 악당과 맞서 싸우는 신화적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언제까지 이 인물을 현대의 현실적인 역사에만 남겨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아레스와 마찬가지로 원더우먼 역시 잉여의 존재가 될 테니까.

[스페셜] 현실의 불의한 질서를 거역하려 애쓴 <대립군><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노무현입니다>의 아쉬운 점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가 끝난 후 지난 몇달간 보지 못했던 한국영화들을 몰아보았다. 대다수 영화들이 재미가 없었다. 한국의 상업영화들은 여전히 감독보다는 스탭과 배우들이 만드는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흐름이 극장 흥행으로 검증되는 것이라면 모르겠는데 순제작비 평균 60억원 이상인 상업영화들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얻는 걸 투자 관계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지금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이 나같은 평자들에게만 지루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내 주변의 보통 관객도 한국영화가 이제 별 볼일 없다고 말하는 경우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최근 개봉한 세편의 한국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노무현입니다> <대립군>에 대해 써보려 한다. 이 영화들은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들인데도 현실의 불의한 질서에 거역하고 공격적인 메시지를 화면에 심어놓으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타일에 관한 자의식이 없는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을 놓고 볼 때 이들 영화는 뭔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가장 안타깝고 충격적인 사례는 정윤철 감독이 9년 만에 만든 신작 <대립군>이었다. 내가 아는 감독 정윤철은 화면에서 벌어지는 것을 관객이 감각하게 하는 데 상당한 재능을 지닌, 좋은 의미에서 대단한 테크니션이었다. 그의 장편 데뷔작 <말아톤>(2005)에서 조승우가 연기한 주인공이 마라톤 달리기 연습을 하는 범상한 장면에서 그는 장애인 주인공이 느끼는 세밀한 신경의 흐름을 포착해냈다. 주인공들이 집단으로 나오는 <좋지 아니한가>(2007)에서도 다른 영화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각도의 촬영으로 관객의 의표를 찌르면서 상투적인 가족의 의미를 전복시켰다. 불운하게 흥행에 실패한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7)에선 저 혼자 망상에 빠진 남자의 삶의 트라우마를 초현실적 묘사로 초월 상승시켜 묘사할 수 있었던 능력의 소유자였다. 극적 맥락을 완전히 잃어버린 <대립군> <대립군>에서 정윤철은 이전 영화들에서의 연출 전략과는 정반대의 것을 시도한다. 그는 아마도 역사적 정황에 기초한 이 영화를 어떤 과시적 수사도 배제한 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고 결심했던 것 같다. 이런 연출적 결단은 하등 이상할 게 없지만 그게 뚝심과 간결함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투박하게 거듭 강조되는 정서적 과잉으로 귀결된다는 게 유감이다. 이 영화는 어린 광해(여진구)가 선조의 명을 받아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이끌게 되는 역사적 팩트에 기초해서 소수의 대립군 병사들과 궁궐 식솔들, 대신들의 호위를 받으며 광해가 임지로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을 일종의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리고 있다. 로드무비에서 당연히 강조되는 풍경은 광해 일행의 이동경로를 따라 다양하게 자주 바뀌는데 이상하게도 이 로드무비에서의 다양한 풍경들은 어떤 의미와 감정의 지배소로서의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감독과 제작진이 자랑스럽게 제작 후기에서 밝힌, 고단하게 실제 장소에서 촬영한 허다한 장면들은 이 영화의 장점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좀더 편집되었어야 할 장면들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풍경 장면들이 꾸준히 나열되는데 이것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덧대는 효과 이상의 것을 겨냥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지루한 느낌을 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장면들은 기이하다. 앞서 등장인물의 감정을 덧대는 배경막으로서의 풍경 효과를 언급했지만, 실제 이 풍경들이 등장인물들의 감정적 상황과 긴밀하게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실제 장소에서 있는 그대로 찍어야 사실적인 효과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극적 맥락 속에서 어떤 기능을 발휘해야 관객에게 사실적으로 다가간다. 나무와 풀이 거센 바람에 움직인다고 하면 그것이 광해 일행의 이동 행렬이 주는 정서적 느낌과 조응할 수도 있다. 산세가 험하다고 하면 그것이 광해와 민중이 처한 상황을 시각적으로 웅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또는 풍경 그 자체가 배경에서 튀어나와 화면의 지배소가 되면서 왜소한 인간적 드라마를 거대한 운명의 소실점 안으로 수렴시킬 수도 있다. 이 영화의 풍경 사용법은 그 어떤 것도 아닌 기능에 머물고 있다. 실제 자연의 장소 안에서 등장인물들은 격심한 물리적 고통을 겪으며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적으로 가리킬 뿐 그 이상의 연출적 개입을 자제하고 있는 상태의 화면들이 나열된다. 이것은 정서적 과잉을 의식적으로 누른 연출의 패착이 아닐까. 정윤철은 그가 잘해낼 수 있는 것을 굳이 스스로 억압하면서 극적 맥락의 전개에 꼭 필요한 대화 장면에만 집중하는데, 이게 영화적 묘사를 위한 더 큰 그릇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하고만다. 이정재가 연기하는 대립군 대장 토우의 감정묘사가 전해주는 파토스는 그리 과한 것이 아닌데도 이 영화에서는 과잉으로 보인다. 그의 거센 눈빛, 얼굴 표정의 변화가 토해내는 감정묘사가 이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다른 부분과 달리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극적 맥락 속에서 드라마를 운반하는 예를 들어보자면, 강가에서 광해 일행이 야영을 할 때 어디선가 빗살같이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모두 당황하는 사이에 광해의 처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토우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광해에게 달려가 그를 구출하려 하자 광해가 공포에 떨면서도 토우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장면은 이들 사이에 놓인 계급적 간극을 필연적으로 드러내는 한편, 어린 세자와 어른 군사의 기량 차이를 보여주고 전반적으로 무능한 이 집단의 상황대처 능력을 시각적으로 그려내면서 토우가 처한 감정적 딜레마를 거의 완벽하게 전달한다. 각본에서 이미 직설적으로 명기된 주제는 말하는 인물의 헤드숏을 통해 전달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간접적이고 세련된 방식을 필요로 한다. 그게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의 매체적 차이일 것인데, 아쉽게도 이 영화는 위에 언급된 묘사방식을 일관되게 추구하지는 못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 묘사된, 광해 일행이 의주에 도착한 후 허름한 성에서 왜군들의 공격을 막아내는 대규모 전투 장면에서도 감독의 연출적 관점은 인물들의 피와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는 사실적 전투 묘사에만 몰두한다. 이것 역시 액션 안무의 장르적 쾌감을 배제하고 사실적 느낌만 부각하려는 의지의 결과물인데 전투의 경과에 따라 강도가 높아지는 잔혹한 묘사들 외에 과연 더 보여줄 게 없었는가라는 의문이 남는다. 극적 맥락에 따라 관객이 화면에 보여지길 원하는 것은 변변히 지휘할 장수도 없는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왕세자 일행과 백성들이 처한 절박한 처지와 그에 따른 교감의 농도다. 이편과 저편의 전략 전술을 관객에게 알려주고 전투 전에 상황을 예측한 것과 전투 발발 후에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의 간극에 따라 이야기의 맥락이 피말리게 흘러가는 걸 보여주는 것은 사실적인 묘사의 기준과는 별개의 문제다. 정보의 배분과 그에 따른 극적 맥락의 교집합이 없으니 화면에 전해지는 건 죽어가며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시하는 것뿐이다. 이 전투의 무모함과 백성들의 희생이 맺는 상관관계를 축으로 놓고 광해라는 왕세자와 중간자인 대립군 일행, 백성들 사이에 오가는 시선의 교차와 접합이 이 장면에는 적절히 배분되지 않는다. 꼭 있어야 할 묘사가 없음으로 해서 <대립군>에는 직설로 강조되는 좋은 리더의 조건과 민중의 불우한 처지를 보여주는 숏들만 돌출된다. 이것이 미진하다 여겼는지 영화의 맨 마지막 부분, 토우 일행이 왕세자와 백성들의 피난을 열어주기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바치는 장면은 강가에서 장렬한 분위기로 펼쳐진다. 갑자기 묘사가 종결되는 의주성에서의 전투 다음에 오는 이 장면은 관객을 믿지 못하는 초조한 묘사의 산물이자 우린 좋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제작진의 자기도취를 드러내는 징표이다. 이 영화가 선의를 갖고 제작된 영화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서둘러 주제를 드러내는 강박적인 인물 헤드숏들을 가급적 배제하고 묘사하려는 침착함을 갖추지 못함으로써 이 마지막 장면에서 묘사되는 대립군들의 장렬한 최후는 고통의 퍼포먼스 이상의 기능을 갖지 못한다. 나는 현재의 버전보다 훨씬 더 간결한 이 영화의 편집버전이 가능했을 것이라고 본다. 필요 이상으로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는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관객을 못 믿어 자꾸 화면에 대사를 밀어넣으면서도 이렇게 늘어놓는 것이 관객의 아드레날린을 더 활발히 분비시킬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의 자기최면이 초래한 최악의 결과가 아닐까 의심이 간다. 고유의 시각적 스타일을 어느 정도 성취한 <불한당> 정윤철의 <대립군>이 사실적인 묘사에의 강박과 주제 전달에의 과신이 결합한 화면 남용의 결과물이라면, 변성현의 <불한당>은 장르 픽션의 상투형을 과신함으로써 실패한 정반대의 사례다. 특히 이 영화의 초반부는 최근 몇몇 영화들에서 허투루 묘사된 교도소 감옥 설정의 안일함 면에서 최절정을 보여주는데 이게 과연 한국의 교도소에서 가능한 상황설정인지를 관객 스스로 자꾸 되묻게 만드는 개연성 무시의 극치다. 교도소 간부들의 묵인 아래 죄수들이 그들만의 세상을 꾸리는 걸 이해한다고 해도 이 영화는 그 묘사 한계를 한참 넘는다. 공권력의 허술함과 무능을 소재로 삼는 건 대다수 한국영화의 특징이긴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현재의 한국은 공권력의 지칠 줄 모르는 집요함에 지쳐 있던 사회이기도 하다. 평자들은 물론이고 대다수 관객도 이 점을 그냥 쉽게 넘겨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플롯의 소재가 되는 공간은 사실적 개연성 면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에 따라 등장인물의 동선과 행동도 정해질 것이기 때문에 플롯의 역동성을 예비하는 측면에서 공간을 사실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제작진의 필연적인 의무다. 이 점을 만회하려는 변성현의 연출은, 비록 그가 SNS에서의 말실수로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완전히 성공한 수준은 아니더라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설경구가 그 스스로 잘해낼 수 있는 연기를 무리 없이 해낸 주인공 재호를 묘사하는 여러 장면들에서 감독은 그가 지닌 불안과 그 때문에 지닐 수 있는 강력한 기운을 관객에게 능숙하게 전달한다. 이 영화에서 재호의 클로즈업이 주는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은 단지 그 화면의 효과로만 축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클로즈업의 효과를 가능하게 숱한 배음효과를 냈던 여러 장면들의 축약된 효과이다.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 받지도 않았던 개인사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재호는 언뜻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행동을 하는데 이를테면 자신의 조직과 별개로 마약을 거래하는 다른 조직을 재호의 조직이 습격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그가 다른 패의 조직 폭력배들을 상대할 때 그는 자기 몸의 안위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폭력의 주고받기를 즐기는 광기를 보이며 카메라는 꽤 긴 호흡으로 인물의 동선을 연출한다. 이런 과시적인 호흡의 긴 연출은 영화 초중반 교도소 장면에서 범죄자로 위장한 현수가 재호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 시도도하는 가운데 교도소 내 운동장의 분위기를 살필 때도 보여졌지만 그 장며에서는 일정한 긴장감을 자아내는데 실패했다.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장면들의 축적은 재호와 범죄자로 위장한 형사 현수(임시완), 재호의 동료인 병갑 등의 관계에 초점을 주는 드라마의 감정선을 예리하게 벼리는 데 성공한다. 아무도 믿지 못할 집단 속에서의 불안과 긴장은 이 세 주인공의 내면을 설명하는 주된 감정 통로이다. 변성현은 영화에 허다하게 나오는 몹신에서의 공들인 묘사를 통해 이들 주인공들의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는 감정을 이중, 삼중으로 두르며 겨냥해낸다. 다소 서투르고 산만하지만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고자 하는 스타일에의 야심을 일정하게 성취하면서 이 영화는 호모 소시알의 경계에서 호모 섹슈얼로 나아가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는 남자들의 공생 관계와 상호 연민 그리고 증오를 그려낸다. 이게 가능해진 것은 집단에서의 주인공들의 처지를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감독답게 스타일에의 패기를 보여준 변성현의 재능이 그의 설화로 인해 묻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일회성으로만 유효한 극단적 프레이밍 연출 <노무현입니다> 앞선 두 영화와 다른 다큐멘터리 장르의 영화이지만 이창재의 <노무현입니다>는 어떤 당파적 입장에서는 선의를 품은 의도로 접근한 결과물이다. 이 영화는 아직 중앙무대에 설 위치가 아니었던 정치인 노무현이 새천년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는 과정을 플롯의 주된 축으로 삼았다. 지역감정이라는 망국적 현상에 맞서 동서화합을 내세운 정치인이 색깔론마저 극복하고 대선 후보가 되는 영웅적인 서사가 점차적으로 전개되는 동안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것처럼 주 플롯 사이에는 생전의 노무현의 인간적 면모를 증언하는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끼어든다. 이 인터뷰는 고인이 된 노무현의 삶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영화의 주 플롯인 승리하는 서사와 충돌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비탄의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이창재 감독은 새천년민주당 경선의 실황중계 장면들에서 극영화에서 주로 쓰이는 숏/역숏 문법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노무현이라는 주인공이 고립된 처지를 뚫고 승리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수식한다. 경선에서 상대 후보가 노무현을 비난할 때 노무현이 보이는 반응화면이 실제 맥락에서 따다 쓴 것인지 여부는 우리가 확인할 수 없으나 드라마의 흐름에서 그런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우리는 일단 받아들이게 된다. 이 숏/역숏 문법의 기발한 점은 객관성을 가장한 시점에서 화면의 자연화 효과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극적 동요와 흥분을 느끼는 가운데 관객은 한 정치인이 영웅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경선 과정 단락에 끼어드는 인터뷰 화면의 프레이밍 구성이다. 이창재는 이 화면들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잡는다. 앞서 기록화면들을 재구성한 경선 장면들이 극적 감정을 자연화 효과로 북돋우는 것이었다면 이 인터뷰 화면들은 거침없이 들이대는 근접 프레이밍으로 인해 감독의 주관적 개입 효과를 강화한다. 감독은 이 인터뷰 프레이밍과 관련해 관객과 직접 대면하는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실제 효과는 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이 화면 프레이밍은 지나치게 관객의 이입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도 <노무현입니다>가 흥행하고 있는 것은 노무현의 인간적 면모를 증언하는 관계자들에게 관객이 더 감정이입할 수 있도록 극단적 방법을 쓴 이창재 감독의 프레이밍 연출이 효과적이었음을 증명한다. 미학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이 방법은 평자 입장에서 옹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당파적 입장을 갖고 노무현에 대한 호불호로 진영이 나뉜 한국 사회의 정치 지형에서 이것이 선동적인 효과를 걸고 내건 도박이라는 걸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이창재 감독은 지금과 같은 정치적 상황이 아닐 것을 가정하고 지극히 당파적이고 주관적인 이 수법을 썼다는데, 통념상 객관적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다큐멘터리를 대하는 관객에게 청한 영리한 일회용 파격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시도는 일회성으로만 유효한 측면이 크다. 관객의 개방성을 불신한다면 퇴보할 수밖에 없다 사회가 정치적으로 불우할 때에도 그 사회의 영화는 미학적으로 진취적일 수 있다. 영화역사의 수많은 사례들이 그것을 증거한다. 불행하게도 한국영화는 그 정반대의 길을 최근 몇년간 걷고 있다. 정치적 억압이 내면화되어 직설과 과장, 강조가 아니면 억눌린 관객의 감성과 접속할 수 없다고 하는 제작진의 좌절과 불신과 초조가 미학적으로는 점점 퇴보하는 결과물들을 내놓고 있다. 영화적 성취보다는 데이터를 더 믿고 제작진의 의지보다는 모니터 시사의 설문지를 선호하는 가운데 초래된 한국영화의 획일화는 더이상 감독의 이름으로 영화를 구분짓는 것이 극소수의 영화가 아니면 불가능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관객의 개방성을 믿지 않는 제작진의 협량함은 거꾸로 대다수 관객의 지속적인 불신을 자초할 것이다. 모두 다 이구동성으로 중요하다고 말하는 창의성을 진정으로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어떤 꼴일지 다시 상상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한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노 맨스 랜드

<더 서클>은 이른바 ‘투명사회’를 직격 비판하려는 야심 큰 영화다. 극중 공룡IT기업 ‘더 서클’은 페이스북과 유사한 ‘트루유’ 애플리케이션을 근간으로, 만인이 자발적으로 사생활을 공유함으로써 완벽히 개방되고 연결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니즘을 성공적으로 판다. CEO 에이몬(톰 행크스)이 뽑아낸 슬로건 “비밀은 거짓말이다”가 특히 의미심장하다. “남이 보지 않을 때 인간은 악하고 약한 면을 드러내게 되므로 완전한 사생활 공유야말로 진보”라는 논리에, 젊은 엘리트 사원들이 갈채로 동조하는 광경은 모골이 송연하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들은 세계 최대 기업에 입사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쾌감, 여가와 노동이 하나된 쿨한 기업 문화에 도취돼 있다. 흥미로운 설정을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 각본이 아쉽다. 06/01 20대 말 어느 날 유학 중 영국 하원의 토론을 중계하는 텔레비전을 무심코 틀어놓고 과제를 하던 나는, 불현듯 내 눈앞의 그림이 뭔가 잘못돼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인구의 반이 생물학적 여성인데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의 압도적 다수가 남성인 광경에 대해- 놀랍게도- 처음으로 기괴하다고 체감한 것이다. 어이없게도 공적 영역의 성비가 훨씬 기울어진 한국에서 살아온 27년간은 당연시한 나머지 무감했던 그림이었다. 머리로는 불평등을 인지했지만, 사고를 작동하기 전에 눈이 먼저 소스라친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묵은 기억까지 뒤진 건 <원더우먼>의 어떤 장면들 때문이다. 영화의 장단점을 세세히 따지기 전에 <원더우먼>은 우리가 결여하고 있었으나 결여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던 이미지를 커다란 스크린에 펼치는 것만으로 심박수를 펌프질한다. 주요 액션 시퀀스 중 아마조네스들의 섬 데미스키라의 군사 훈련 및 전투, 그리고 영화 중반 적에게 점령된 벨기에 마을에 다이애나(갤 가돗)가 포화 속을 뚫고 진입해 수복하는 과정이 그랬다. 먼저 관객은 프레임이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인물로만 채워져 있는 광경이 반대 성(性)의 경우와 달리 얼마나 생소한지, 그리고 그들이 목적을 갖고 움직여 공간을 장악하는 모습이 얼마나 장쾌한 감동을 주는지 데미스키라 배경의 1막에서 깨닫게 된다. 말과 무기와 어우러진 그들의 애크러배틱은 여성 전사라는 핑계 아래 제공되곤 하는 남성 관객용 눈요기가 아니다. 패티 젠킨스 감독은 액션의 주체인 아마조네스들의 호흡과 쾌감을 앞세운다. 예컨대 코스튬이 액션 동작에 따라 어떻게 몸을 노출시킬 것인가는 <원더우먼>의 안중에 없다. 활과 창검의 고전적 무기, 강한 콘트라스트, 동작의 속도를 늦췄다 높였다 하는 비주얼은 DC 확장 유니버스에 계속 관여하는 잭 스나이더의 <300> 액션과 스타일을 같이하지만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아마조네스들의 무장은, 적보다 자연에 먼저 다칠 것처럼 헐벗은 스파르탄의 그것과 달리 실용적이다. 패티 젠킨스 감독이 밝히는 액션 연출의 레퍼런스는 전란을 묘사한 르네상스기의 역사화들이다(아마존족의 탄생 기원을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을 통해 밝히는 설명 플래시백 시퀀스도 같은 양식으로 연출됐다). 한편 <300>이나 아류 영화들과 달리 <원더우먼>에는 사지가 절단되고 두개골이 꿰뚫리는 고어 표현도 없다. 물론 등급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다이애나를 포함한 아마존 전사들의 액션에서 중요한 테크닉은, 먼저 공격하고 때려눕히기보다 상대방의 힘의 반동을 이용하고 정확하게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능력이다. “싸움이 공정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 이모인 안티오페 장군(로빈 라이트)이 방심한 다이애나의 허를 찌르고 경고할 때, 어떤 여성 관객은 이 대사의 중의적 교훈을 새기며 “예, 언니!”라고 속으로 복창할지도 모른다. 영화 중반 마침내 1차대전 벨기에 전장으로 진출한 다이애나가 마을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인지대’(No Man’s Land)를 가로지르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팔찌는 공격을 튕겨내고 정확하게 받아쳐서 길을 연다. 이 대목의 감흥은 일렉트로닉 첼로를 앞세운 한스 짐머/루퍼트 그레그슨 윌리엄스의 스코어에도 적잖이 빚지고 있다. 다분히 관습적일지언정 <원더우먼>은 <슈퍼맨>에 비할 만한 진한 인장의 팡파르를 확보했다. <BBC>와 인터뷰에서 원더우먼의 액션 디자인에 관해 패티 젠킨스는 “최소한 원더우먼은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유형의 히어로는 아니라는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확실했다”라고 밝혔다. 혈혈단신 포화 속을 질주하는 해당 장면의 원더우먼은 확실히 ‘국제경찰’로서 간섭주의를 고수하는 미국의 엠블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새 영화의 코스튬은 더이상 성조기로 만든 속옷처럼 보이지 않는다(거꾸로 다이애나는 런던 백화점에서 코르셋을 무장으로 착각한다). 06/02 단독 영화의 1편이자 기원담으로서 여타 수퍼히어로들과 차별되는 원더우먼의 성격을 정립하는 데에도 패티 젠킨스는 성공적이다. 데미스키라에 불시착한 미군 첩보장교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와 함께 전쟁의 신 아레스를 막고자 1918년 런던에 당도한 다이애나는 물 밖에 나온 인어 같은 처지다. 이웃 마블 유니버스 중 물정 모르는 왕자가 나오는 <토르>와 1차대전 시대극인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도 동시에 연상시키는 2막이다. 다이애나의 선악 개념은 회색지대가 없고 전쟁에 관한 이해는 나이브하다. 어찌 보면 철없는 여성을 합리적인 남성이 지도하는 구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진실과 정의에 관한 다이애나의 천진한 믿음이 뜻밖의 돌파구를 뚫고 경험 많은 남자들을 설복하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리처드 도너 감독의 <슈퍼맨>(1978)을 참조했다는 젠킨스 감독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나이브함은 그 자체로 원더우먼이라는 슈퍼히어로의 태생적 차별성이다. 프롤로그가 예고하듯 다이애나는 변하겠지만 그녀의 뿌리에는 순진한 인류애가 있다. 보다 주목할 점은 DC 트리오의 남성 멤버 슈퍼맨과 배트맨에게 언제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는 자아 집착과 메시아 콤플렉스, 폭력으로 번민을 해소하는 성향을 원더우먼에겐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이애나는 적어도 곤경에 처한 눈앞의 약자의 고통에 당장 감정을 이입하고 돕고자 하는 자연스런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 인간의 도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우리는 다이애나가 끊임없이 눈에 띄는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생동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는 아이스크림 맛에 찬탄하고, 섬에선 볼 수 없던 아기에게 달려간다(모성애 탓이 아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한창인 런던이 배경임에도 <원더우먼>은 다이애나에게 한번도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독백이나 연설을 시키지 않는다. 제작진의 타협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다이애나에게는 성차별의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녀가 금녀 구역인 정치 회합에 끼어들고 다국어 능력을 발휘하고 남자들을 물리적으로 제압할 때 객석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분위기 파악 못한 괴짜 여자가 아니라 개명 못한 당대 남자들이다. 영웅의 로맨스 상대이자 제2주인공으로서 결코 다이애나의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채지 않는 크리스 파인의 스티브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맥스(톰 하디)와 같은 클럽에 속하는 적절한 조력자다. 여성이 비범한 능력을 발휘할 때 “남자인 나보다 낫네?”라는 리액션을 굳이 농담조로 던져 물을 타거나 웃어넘기지 않는 점이 훌륭하다. 심지어 다이애나의 장기를 눈여겨보았다가 전투 중 결정적 디딤돌이 되어주기도 한다. 극중에서 스티브는 당신이 인간 남자의 평균이냐는 다이애나의 질문에 “나는 평균 이상이다”라고 말하는데, 나 역시 큰 이의는 없다. (다음에 계속) 좋아요 거기까지! 기타노 다케시의 <8인의 수상한 신사들>에서 왕년의 야쿠자 류조(후지 다쓰야)는 보이스 피싱 사기에 걸려들 뻔한 사건을 계기로 어찌어찌 7명의 옛 동료를 모아 조직을 재결성한다. 하지만 야쿠자 올드보이들의 몸 상태는 운신하는 게 고작이고 도덕적으로도 그들이 응징하려는 본데없는 양아치들보다 우월할 게 없다. 그들은 관록의 슈퍼파워를 발휘하는 어벤저스도, 강호의 도를 세우는 8인의 사무라이도 되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기타노 다케시는 구식 야쿠자의 가치관에 향수를 보이는 대신, 이 영화를 더이상 원하는 만큼 쿨하거나 위협적일 수 없는 노년에 관한 철저한 농담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설마” 하며 반추의 시간을 기다렸던 관객을 감독은 가차없는 엔딩으로 일축한다. 적어도 그는 아직 그만큼은 쿨하다.

[내 인생의 영화] 권해봄의 <곡성> 최고의 로맨스영화

감독 나홍진 / 출연 곽도원, 황정민, 구니무라 준, 천우희 / 제작연도 2016년 내 인생 영화를 꼽아달라는 요청에 한참 고민했다. <쇼생크 탈출> <포세이돈 어드벤처> <올드보이> <비포 미드나잇> 등 머릿속을 스치는 수많은 영화가 있었지만, 인생에 다시 없을 혹은 인생을 바꿔놓은 영화라고 할 만한 작품은 역시 하나뿐. 바로 <곡성>이다. 배우들의 연기도 경이로웠고, 관객과 놀이하듯 대담하게 미끼를 던지고 현혹하는 감독의 연출도 더할 나위 없이 새로웠지만 <곡성>이 나의 인생 영화인 이유는 따로 있다. <곡성>이 개봉할 무렵 회사 같은 팀에 좋아하는 동갑내기 친구가 있었다. 회사에서는 밥도 자주 같이 먹고 회식도 종종 하는 좋은 동료 사이였지만 사적으로 만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혹여 그런 말을 건넸다가 어색해질까 무서워 만나자고 청하기는커녕 커피 한잔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느 날 둘이 함께 밥을 먹다가 <곡성> 얘기가 나왔다. 그녀는 영화에 반전이 있으니 스포일러를 접하기 전에 후딱 봐야 한다고 했다. 그때 같이 보러 가자는 말만 꺼냈어도 데이트 신청이 좀 자연스러웠을 텐데 나는 우물쭈물하다 물어볼 기회를 놓쳐버렸다. 나중에 <곡성>을 함께 보러 가자는 말을 꺼내려 했지만, 말할 기회가 도무지 생기지 않았다. 어떻게 어색하지 않게 얘기를 꺼낼까 고민하다가 주차장 그녀의 차 옆에 내 차를 대놨다. 그녀가 퇴근할 때 우연인 척 차로 같이 향하면서 문득 생각난 것처럼 얘기를 꺼내면 좀 자연스럽지 않을까 싶었다. 토요일 밤, 방송 준비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녀 옆에 타이밍을 맞춰 같이 걸어갔다. “이번주도 참 힘들었다. 그렇지?” “그러게 말이야.” 이제 영화 얘기를 꺼낼 타이밍인데… 그녀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이번주는 선배들 때문에 힘들었고, 이렇게 편집을 했으면 방송이 더 재밌었을 텐데 하며, 자동차로 향하는 시간을 일 얘기로 채웠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영화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차 있는 곳으로 도착했다. “어? 네 차 내 차 옆에 있네!” “응, 그… 그러게.” “이번주도 수고했어. 잘 가.” 아…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차로 걸어갔고 나는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모든 타이밍을 놓쳤다. 아, 이렇게 기회가 날아가나. “야, 저기….” “응?” “저기… 주말에 나랑 <곡성> 볼래?” “어? 왜?” 왜? 왜냐니, 뭐라고 말하지? 왜 나는 그녀에게 일주일에 하루 있는 휴일을 함께 보내자고 하는 거지? 굳이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어… 나… 무서운 영화 혼자 못 보거든.” “뭐야. 무서운 영화 못 봐?”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래 알았어. 가자” 와! 성공이다. 그런데 무서운 영화를 못 본다는 얘기는 어디서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인지. 그날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손발이 오글거린다. <곡성> 같은 대작을 가벼운 호러영화나 데이트 무비로 만든 것 같아 죄송합니다, 나홍진 감독님. 내가 던진 성긴 미끼를 그녀는 모른 척 물어버린 것일까? 그렇게 주말에 그녀와 영화를 보러 갔고 공포영화를 일부러 찾아다닐 만큼 좋아하는 나지만 괴이한 장면엔 얼굴을 돌려가며 겁이 나는 척 연기했다. 우리는 영화가 끝난 후 스크롤이 다 올라가고 모든 관객이 나갈 때까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자리를 뜨지 못했다. 영화가 끝나면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는 나에게 꽤 신기한 경험이었다. <곡성>은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하고 이야깃거리도 풍부해 심지어 헤어지고 난 후에도 영화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연락이 끊이지 않았다. 영화를 본 지 꼭 1년 후, 우리는 결혼을 했고 부부가 되었다. 그래서 <곡성>은 적어도 내게는, 아니 우리 부부에게는 최고의 로맨스영화다. 캬, 이게 바로 인생 영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여러분, 마음에 드는 이와 함께 영화를 볼 때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영화를 보는 게 좋습디다. 권해봄 MBC 방송 PD. 예능 프로그램 <렛츠고 시간탐험대> <헬로! 이방인> <동네 한 바퀴>등에 조연출로 참여했으며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모르모트 PD’라는 별명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