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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훨씬 즐겁고 귀엽고 밝게∼ <타마마유 이야기> 2편

폭력과 섹스로 얼룩진 왜색 문화.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대해 극도로 저항감을 가지는 사람이라도 지브리 여자아이들의 매력에 저항하기는 어렵다. 그 애들은 모두 강하고, 아름답고,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 소녀가 바람을 타고 텅 빈 하늘을 가로지른다. 빗자루를 타고 우편 배달에 나서는 꼬마 마녀에 스스로 돼지가 되는 것을 선택한 파일럿이 뒤를 잇는다. 피칠갑을 한 공주가 있지만 친 환경적이기에 괜찮다. 지브리 애니메이션들은 아름답고 흥미로울 뿐 아니라 안전하기까지 하다. 98년 출시된 <타마마유 이야기>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스탭이 참여해 만든 게임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의 원화를 그리고, <마녀의 우편배달>에서는 캐릭터디자인과 작화감독을 했던 곤도 가쓰야까지 나섰다. 이례적인 것은 캐릭터디자인뿐 아니라 전반적 게임 디자인을 총괄했다는 것이다. 국적이 불분명한 에스닉 의상 디자인이나 전체적으로 사용된 색조는 전형적인 지브리풍이다. 특히 자연의 표현은 기존 게임에서는 경험할 수 없던 느낌이었고, 역시 지브리니까 가능했다는 얘기들이 나왔다. 유명 애니메이션 감독이 참여한 게임은 많다. 하지만 캐릭터 몇명을 디자인했을 뿐이지 게임 비주얼 전체가 일관되게 하나의 색깔을 유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의 화해, 마을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주인공 등 게임의 테마와 세계관도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오랫동안 다뤄왔던 것이다. 싸웠던 몬스터를 죽이는 게 아니라 고치로 담아두는 시스템도 어딘지 지브리적 느낌이다. 일본에서 2001년 출시된 <타마마유 이야기> 2편이 이제야 한글화되어 정식 출시되었다. 지브리 스타일이 여전한 건 물론이다. 그리고 한발 더 나갔다. <타마마유 이야기>는 1편부터 3D로 출시되었다. 그런데 플레이스테이션이라는 기계의 한계상 2D애니메이션의 아름다운 그래픽을 3D로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다. 색의 이미지나 디자인으로 약점을 메우긴 했지만 불만족스러웠던 건 사실이다. 이제 플레이스테이션2로 출시된 2편은 하드웨어의 표현능력 한계를 벗어났다. 3D그래픽으로도 2D애니메이션만큼 아름다운 표현이 가능하다. 그래도 부족한 건 2D 캐릭터의 대화 화면으로 보충한다. 달라진 것은 기술적 측면만이 아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그랬듯 <타마마유 이야기> 1편에는 밝고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많은 고민과 아픔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전체적으로 무거워졌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훨씬 즐겁고 귀엽고 밝다. 가능한 한 많은 몬스터를 모아 성장시키고 합성해서 다른 몬스터를 계속 만들어내는 시스템은 어딘가 <포켓 몬스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런 변화가 바람직한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는 스타일이 달라진 것은 분명하다. 게임과 애니메이션은 원래 다른 매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과 게임을 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반영한 것인지, 게임은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상업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장르인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새로운 분야에 진출한 중압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게임이 1편을 즐겁게 플레이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지브리 애니메이션 팬과 포켓몬 팬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줄 것은 분명하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

<오! 브라더스>, <캐리비안…> 선두다툼

추석 연휴 극장가의 흥행 순위가 관심거리이지만, 통합전산망이 안 갖춰진 탓에 객관적인 집계가 힘들다. 특히 5일 계속된 연휴의 순위가 이후 흥행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만큼, 다른 때보다도 영화사들 사이에 내세우는 수치가 많이 갈리고 있다. 크게 구별해서 <오! 브라더스>(사진)와 <캐리비안의 해적> <조폭 마누라 2> 등 세 편이 상위 1~3등을 다투고 있고, <불어라 봄바람>이 낙차 큰 4등을 했으며 <주온 2> <패스트 앤 퓨리어스 2> <바람난 가족>이 뒤를 잇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폭마누라 2>를 배급한 CJ엔터테인먼트가 상위 세 영화의 13~14일 주말 이틀 동안 서울 관객 수치를 집계한 결과는 <오! 브라더스> 1위, <캐리비언의 해적> 2위, <조폭마누라 2>가 3위였다. 눈길을 끄는 건 하이퍼텍 나다 극장에서 단관개봉한(13일부터 ‘씨어터2.0’과 함께 두곳에서 상영) 다큐멘타리 <영매>가 개봉일인 5일부터 16일까지 4천명을 넘는 좋은 성적을 냈다는 사실. 또 13일부터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열리고 있는 로베르 브레송 특별전도 주말 이틀 동안 거의 전회가 매진되는 이변을 낳고 있다. 관객층은 다양해지는데, 일반 극장들이 이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이 확연해 보였던 연휴였다. 19일부터 시작되는, 돌아오는 주말 영화들의 예매현황을 보면(맥스무비 집계) <오! 브라더스>와 <캐리비언의 해적>이 여전히 강세로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3위는 새로 개봉하는 대니 보일 감독의 공포영화 , 4위 초유윤파(주윤발) 주연의 <방탄승>, 5위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순으로 나타났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

대니보일, 할리우드에서 길을 잃고 런던에서 답을 찾아 돌아오다 [2]

실패 케이스 2 과욕 그리고 뜬금없음 - <비치> 알렉스 갤런드의 소설을 각색한 2000년작 <비치>는 <이완 맥그리거의 인질>보다 더 시끄러웠다. 첫 번째 뇌관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캐스팅이었다. 알렉스 갤런드의 원작소설에서 주인공 배낭족은 격렬한 생의 체험을 구하면서도 감정을 잘 표출하지 않는 영국 청년이다.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것이라고 당연히 믿고 있던 이완 맥그리거는 디카프리오에게 밀려났다는 사실을 제3자를 통해 듣고 대니 보일 팀과 불편한 사이가 됐다. 디카프리오가 분한 미국인 청년은 기본적으로 관찰자라기보다 정복자에 가깝다. 그는 <지옥의 묵시록>의 마틴 신처럼 선풍기가 돌아가는 지저분한 호텔방에서 미션을 받고 미지의 신세계로 잠입한다. (왼쪽부터) <트레인스포팅> <비치> 영화 <비치>가 가진 결함은 <시카고 선 타임스>의 로저 에버트가 명쾌히 요약한 대로다. 프랑스 소녀와의 삼각 로맨스, 정글과 고독한 인간의 대결, 문명의 전말에 대한 우화, 순수의 상실, 전체주의로 변질되는 유토피아니즘 등등, <비치>는 너무 많은 실마리를 늘어놓는 동시에 그중 어느 것도 매듭짓지 않음으로써 관객에게 좌절을 안긴다. 숲에 홀로 버려진 디카프리오가 돌연 전자오락 캐릭터로 변해 뜀박질을 하는 시퀀스는 대니 보일의 절박한 몸부림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트레인스포팅>에서 변기 속으로 다이빙하는 판타지신은 주인공이 마약의 위안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더러워질 각오가 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극적 필연성이 있기에 명장면이다. 반면 <비치>의 게임 화면이나 <인질>의 갑작스런 뮤지컬 댄스는 단지 황당하다. <비치>는 제작비 5천만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미국 박스오피스 수입 3977만달러의 재앙이 되고 말았다. 대니 보일 감독 역시 <비치>를 일종의 자연재해처럼 회고한다(실제로 타이의 폭우와 바람은 제작과정의 가장 큰 스트레스 중 하나이기도 했다). 대니 보일은 <비치>를 통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을 안고 영화를 만드는 일에 피로와 깊은 두려움을 갖게 됐다. 그는 한동안 <비치>에 관한 악몽을 꿨다. 비행기에 탄 <비치>의 전 스탭이 다음에는 뭘 할까요라고 다그치는데 대답할 말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꿈이었다. “<비치>의 가장 큰 짐은 기대였다. 압박감이 너무 커 마비가 올 것 같았고 몹시 외로웠다. 나는 다시는 자연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런던을 사랑한다. 시골에 가면 하룻만에 몸이 완전히 뻣뻣해진다. 내가 다음 영화를 찍는다면 여행도 해류도 몬순도 야자수도 없는, 어딘가 통제할 수 있는 장소일 거다. 도시이고 밤장면이 있는.” 영국으로 돌아온 대니 보일은 디지털카메라로 TV영화 <스트럼펫>과 <천국에서 누드로 진공청소하기>를 찍었고 런던과 몇몇 로케이션에서 를 찍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비치>에서 받은 개런티의 절반에 해당하는 제작비(약 600만파운드)로. 시행착오의 교훈, 종말의 폐허 위에서 시작하는 는 대니 보일 감독의 고유한 장기와 시행착오의 교훈을 종합한 하나의 대답이다. 대니 보일은 조지 로메로의 <시체들의 새벽> 시리즈의 외형과 알레고리를 계승함으로써 <쉘로우 그레이브>로 감각을 입증한 스릴러호러 장르 속으로 한발 더 들어간다. 그리고 좀비호러라는 50년 묵은 장르를 거리를 두고 인용하거나 아이러니로 응용하지 않고, 21세기 사회의 현실을 파고드는 직접적 도구로 쓰는 정공법을 취했다. 뉴스릴 도입부와 전장에서 타전된 9시 뉴스처럼 보이는 디지털카메라의 화면이 시사하듯 는 21세기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에서 공포의 근원과 양상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실제로 는 제작기간 동안(시간순서대로) 9·11 테러, 이라크전, 사스 히스테리의 반영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았다. 핵무기와 권력의 음모에 대한 1950년대의 신경증에서 태어난 좀비호러 장르를 부활시키면서 장르와 현실이 맺은 예민한 연관도 계승한 셈이다. 작가와 감독은 길거리에서, 교통지옥에서, 쇼핑센터에서 사소한 이유로 촉발되는 폭력사태, 광우병 등의 전염병과 급증하는 엽기적 범죄에 대한 영국 정부의 무능한 대처를 보며 ‘분노’ 바이러스를 착안했다. “수많은 CF가 당신은 중요한 존재이므로 이 물건을 꼭 가져야만 하고 저곳에 꼭 가야만 한다고 속삭이지만 현실은 여의치 않고 분노만 쌓인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폭동의 순간을 1천배쯤 확대하고 단순화한다면 그 파괴력이 바로 호러영화의 괴물이 된다”라고 말하는 보일은 비극의 이미지 역시 중국 대지진, 북아일랜드 테러, 르완다, 보스니아전쟁의 기록 사진에서 따왔다. 다른 나라에 비해 좁은 영국의 시가지가 스크린보다 브라운관에 걸맞다고 토로한 적이 있는 대니 보일은 실내장면의 탁월한 연출에 비해 로케이션 촬영에 불편함을 느껴왔다. 의 전반부를 압도하는 진공상태의 런던 거리신은 그러한 문제를 적절히 극복했을 뿐 아니라 영화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스펙터클을 만들어낸다. 대니 보일에게 친숙할 뿐 아니라 관광사진을 통해 관객에게도 눈익은 빅벤과 밀레니엄 관람차, 세인트 폴 성당이 인적없는 진공 속에 우두커니 서 있고 빨강색 2층버스가 대로에 나동그라진 광경은 절묘한 공간적 공포를 자아낸다. 거대 예산 액션블록버스터라 해도 꿈꾸기 힘든 이 효과는 알려진 대로 디지털카메라 촬영 덕택에 가능했다. 미국과 달리 영화촬영을 위한 교통통제에 야박한 런던에서 보행자와 차량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은 단 몇분. 대니 보일과 도그마영화의 숙련된 촬영감독 앤서니 도드 맨틀은 러시아워 이전의 새벽거리에서 6대에서 10대의 디지털카메라를 나흘 동안 돌려서 결실을 얻었다. 대니 보일은 에서 모든 형식적 기교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켰고 TV영화 두편을 찍으며 터득한 디지털카메라의 기능을 대폭 활용했다. 전통적으로 느린 괴물로 알려진 좀비 역에 운동선수들을 고용해 “일반인이 할 수 있을 듯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동작”으로 빠르게 공격하는 액션을 연출했고, 초당 프레임 수를 변조하는 카메라 메뉴를 이용해 통상적인 깊이감이나 거리감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을 조성했다. 또한 누군가 정체 모를 존재가 지켜보는 CCTV의 느낌을 전하는 거친 입자의 화면은 서정적 아름다움과 도시괴담의 아우라를 동시에 성취했다. 수도 런던과 영국의 전원을 황무지로 둔갑시키며 ‘대영제국의 몰락’을 생생히 그린 는 영국 관객을 소름끼치게 하는 데 성공했다. <트레인스포팅> 같은 센세이션은 아니지만 ‘켄 로치 스타일의 좀비영화’, ‘1970년대 이래 최고의 영국 호러’라는 언론의 찬사에는 한 유능한 감독의 ‘홈커밍’에 대한 반가움이 보인다. 에서 대니 보일은 오랫동안 매달려왔던 테마- “자기 보호본능을 발동한 인간보다 극악한 존재가 있을까?”- 를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도시와 장르, 몸으로 이해하는 공포의 코드를 통해 표현했고 다시 관객과 소통의 길을 텄다. 현재 대니 보일은 파운드가 유로로 바뀌기 직전 주말에 주인없는 100만파운드를 발견한 소년들의 이야기 <밀리언스>를 촬영 중이며 <트레인스포팅>의 속편 <포르노>를 준비하고 있다. 돈가방과 뜀박질이라면 대니 보일이 전문이다. 또 한바탕의 질주가 시작될 모양이다.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편집 권은주 ▶ 대니보일, 할리우드에서 길을 잃고 런던에서 답을 찾아 돌아오다 [1] ▶ 대니보일, 할리우드에서 길을 잃고 런던에서 답을 찾아 돌아오다 [2] ▶ 대니보일, 할리우드에서 길을 잃고 런던에서 답을 찾아 돌아오다 [3]

관객도 무대의 일부인 듯,연극 <한여름밤의 꿈>

<한여름밤의 꿈> 무대는 텅 비어 있다. 나뭇잎 사이에 요정이 몸을 숨기는 오래된 나무도 없고, 요정의 왕과 여왕이 부딪치는 화려한 궁전도 없다. 생나무 결이 그대로 남아 있는 틀 몇개와 광목천, 악사들을 위한 조그만 자리가 전부다. 극단 여행자가 2002년에 처음 무대에 올린 <한여름밤의 꿈>은 한껏 비워낸 이 무대처럼, 셰익스피어의 희극에서 인물과 그들의 관계만 남겨놓은 채 모든 것을 쏟아냈다. 그리고 그 여백을 채우는 건 전혀 우아하지 않고 솔직한 대사와 온몸으로 무대를 휘젓는 배우들, 동양적인 리듬, 부담없는 춤과 노래다. 도깨비불이 객석의 어둠을 타고 내려오는 처음부터 <한여름밤의 꿈>은 자신이 고전의 사생아에 불과하진 않으리라고 자신있게 선포한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한여름밤의 꿈>은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로 사랑하는 벽과 항은 벽의 결혼식 전날 숲속으로 야반도주하고, 벽의 정혼자 루와 루를 짝사랑하는 익이 그뒤를 쫓는다. 그 숲은 돗가비(도깨비) 무리가 살고 있는 터전. 우두머리 돗은 밤마다 여자를 찾아나서는 바람둥이 남편 가비를 혼내주기 위해 두 마리 두두리에게 사랑의 묘약인 은방울 독초를 따오라고 지시한다. 그 순간부터 한여름밤 깊은 숲속에서 요란한 소동이 일어나게 된다. 극본까지 직접 쓴 서른여섯의 젊은 연출가 양정웅은 원작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대담한 각색을 시도했다. 네 청춘남녀의 이름을 28수 별자리에서 따오거나 하늘거리는 요정을 걸쭉한 입담의 돗가비로 바꾼 것은 얼핏 부담스러울 수 있었던 시도. 그러나 <한여름밤의 꿈>은 단순히 우리 옛것에 대한 애착이라고만 한정할 수 없는 넓은 품을 지녔다. 가늘고 높으며 끝부분을 올리는 돗가비의 말투는 경극을 떠올리게 하며, 네 젊은이의 대화는 현대극과 시대극이라는 구분을 무색하게 한다. 대사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유머, 몸을 꼭 붙이고 한 마리처럼 행동하는 두 마리 두두리의 익살, 눈과 입술을 강조한 분장에 힘입어 더욱 다채로워 보이는 표정, 굳이 동양의 정취만을 고집하지 않는 자유로운 춤은 조금 산만하기도 한 대본의 틈을 메워주는 귀여운 접착제다. 어느 예술에서나 형식적인 실험은 대부분 대중을 멀리 쫓아내는 효험이 있다. 그러나 <한여름밤의 꿈>은 마당극이나 연극, 뮤지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형식을 창조하면서도 객석을 무대로 당겨오는 듯 사랑스러운 리듬을 탄다. 배우가 객석을 향해 말을 거는 것은 낯선 모습이 아니지만, <한여름밤의 꿈>은 관객 스스로 목소리를 내 대답하고 싶어지는 것. 배우들은 자신이 연기하는 부분이 끝나면 뒷부분 악사 자리로 물러나 박자를 맞추기 때문에 끊임없이 같은 무대에서 호흡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돗가비들이 나무처럼 네 젊은이 주위를 둘러싸고 장난을 치는 장면 역시 배우들의 신체만으로 무대에 활기를 부여하는 인상적인 대목. 9월5일 학전블루에서 공연을 마친 <한여름밤의 꿈>은 9월27일과 28일 과천 마당극 축제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김현정 parady@hani.co.kr

한국영화 회고록 신상옥 12

<성춘향>은 한국영화에 무엇을 제기했나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열다 활동 초기부터 제작, 기획, 감독을 겸해온 신상옥 감독은 몇개의 “관념적인” 모델을 거쳐 영화기업 신필림에 이르렀다. <성춘향>(1961)은 이같은 전환의 “모두 다”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당시 <성춘향>의 흥행은 서울 상영만 38만명, 한국영화 평균 4만명을 압도하는 기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이 수치는 관념에서 실체로 도약한 신필림의 경이를 이해하는 손쉬운 해결법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당대의 논자들이 질문했듯이, 흥행기록의 이면에서 “한국영화에 <성춘향>이 제기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서울영화사라는 건 관념적인 것이었다. 배급해야겠다 생각해서 그냥 한 것이지. 지금은 우리가 배급도 하고 제작도 하고 다 하지만 옛날에는 배급회사가 따로 있었다고. 그럼 거기다 팔아먹고 하는 식이었으니까. 그러나 우리가 힘도 없고, 자본도 없으니까 배급은 실패했고 그래서 제작일을 시작하게 됐다. 역시 제작회사로서 모양을 갖췄다 하는 건 <춘향전>(<성춘향>) 이후지, 모두 다. 가령 그전에도 호흡 맞춘 스탭이야 있었지만 월급 주고 고정 사원을 쓴 것은 <춘향전> 이후다. 그때 정동에 신필림인가, 신프로닥션인가를 채리고 있었다. 신인모집을 했는데 한 3천명이 왔다. 쓸 만한 게 없어서 성일이(신성일)밖에 못 뽑았는데, 지금 KBS 모집한다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때는 테레비니 뭐니 아무것도 없었을 때 아냐? 영화 이외는. 영화가, 영상미디아가 모든 것을 지배할 때니까. <춘향전> 이후부터는 우리가 안양촬영소 그만둘 때까지 한 250명가량 사원이 있었다. 그러니까 도금봉, 남궁원, 허장강, 김승호, 신성일, 신영균이 전부 전성기였으니까. 전속은 남 못하게 하기 위해서 둔 것이 아니고, 영화를 한달에 세개 백이니까(촬영하니까) 도저히 전속을 안 시킬 수가 없다. 빵구를 내면 안 되는 거니까. 영화 하나에 두달 이상 걸리니까 한달에 동시촬영 다섯개 해야 두개 나온다고. 여기서 충무로 대 신필림이 갈라진다. 충무로에서는 ‘독립푸로’들이 하고 있고, 신필림이 커져가지고 하나의 세력으로서 충무로하고 충돌하는 경향이 생겼다. <춘향전> 때부터 영화가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고 기업화하는 시대였거든. 영화사나 문화사나 모든 것이 희랍처럼, 이집트처럼 시발점이 있고, 죽 가다가 전성기에 굵어지고 그랬다가 또 가늘어지고, 한번 돌아서 다시 굵어지는 것으로 보는데 영화도 마찬가지다. 제일 처음에는 독립푸로로 가다가 마지막엔 역시 ‘메이자’, 왜 그런고 하니 모든 것을 다 찍을 수 있는 시설을 갖추려면 메이자가 돼야 하니까. 메이자로 갔다가 다시 또 독립푸로로 가는 거다. 순수하게 얘기하면 작가정신 가지고 독립푸로 하는 게 좋긴 하지만, 그래가지고는 영화가 안 나오잖아. 자기가 찍고 싶은 건 못 찍잖아. 그러니까 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요번에 내가 제시함으로써 재벌들도 영화에 끼어들 것이다 생각했다. 5·16 이후에 영화법이라는 게 생겼다. 영화사라는 데가 하도 부도들 내고 도망다니고 이러니까. 스타디오는 몇평 있어야 되고, 카메라 몇대 있어야 되고, 일년에 몇편 제작해야 되고, 이런 식의 인위적인 제재를 썼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해결되는 게 아닌데. 내가 안양촬영소 큰 시설 가지고 하는 데도 세개 이상 제작 못하는데 쬐그만 창고 하나 가지고 일년에 세개 이상 하겠나? 영화법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아무 실효를 못 거뒀다고 봐야지. 남들은 내가 큰 영화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촬영소 안 가진 사람 못하는 법을 맨들어가지고 탄압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법이라는 건 군인들의 단순한 발상이다. 나는 처음에는 법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상록수> 때문에 박정희하고 가까워지긴 했지. 박정희가 <상록수>를 보고 울었다고 그래. 그뒤로 상록수운동,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그 바람에 친해졌고 안양촬영소 불하까지 왔다, 그건 그렇게 봐야지.대담 신상옥·이기림정리 이기림/ 영화사 연구자 marie320@hanmail.net

영화사신문 제 20호 (1950∼1951)

영화사신문 제20호 The Cine History 격주간·발행 씨네21·편집인 김재희 1950 ~ 1951 일본영화의 발견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일본영화가 세계 영화계에 화려하게 등극했다. 1951년 9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사제의 일기>, 장 르누아르의 <강>, 엘리아 카잔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을 제치고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또한 <라쇼몽>은 이탈리아 평론가상도 함께 수상했다. 물론 일본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다자카 도모타카 감독의 전쟁영화 이 1938년 베니스영화제에서 문화장관상을 수상했지만, 이는 파시즘 국가간에 주어진 의례적인 상이었다. <라쇼몽>의 수상은 일본 영화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라쇼몽>이 1950년 일본 개봉 당시 비평과 흥행에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터라 놀라움은 더욱 컸다. 누구보다 제작사인 다이에이 경영진이 이 영화를 못마땅해했다. 다이에이 사장은 제작 초기부터 이 영화에 대해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고 완성된 영화에 대해서는 난해하다고 불평했고, 이 영화를 제작하자고 제안한 회사 중역 및 제작자는 강등됐다. 사실 다이에이가 <라쇼몽>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건 순전히 ‘저렴한 제작비’에 혹해서였다. 이미 다른 스튜디오에서 2번이나 퇴짜맞은 시나리오를 들고 다이에이를 찾아간 구로사와는 필요한 세트는 문과 법정 안뜰뿐이라서 저예산 촬영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 외로 세트 제작비가 많이 들었고 이 또한 다이에이 경영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사정이 이런지라 이탈리아 영화인 지울리아나 스트라미지올리의 추천으로 <라쇼몽>의 베니스 출품이 결정됐을 때, 다이에이는 베니스에 제작진을 보내기는커녕 감독인 구로사와에게 출품 사실을 알리지도 않았다. 따라서 시상식날, 영화제 집행위원회 사람들이 베니스 시내에서 찾아낸 동양인이 수상을 대신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라쇼몽>의 수상은 구로사와에겐 ‘행운의 반전’을 가져올 기회가 될 것 같다. 구로사와는 <라쇼몽>에 이어 쇼치쿠에서 제작한 <백치>까지 실패한 데다 다이에이가 차기작 제작 제의를 철회하자 낙담에 빠져 있었다. 그는 그런 좌절감을 달래기 위해 낚시를 갔다 집으로 들어서던 길에 수상 소식을 들은 것으로 알려졌다. 20년 만의 화려한 외출 루이스 브뉘엘 <잊혀진 사람들>로 칸영화제에서 감독상 수상 잊혀졌던 감독, 루이스 브뉘엘이 <잊혀진 사람들>과 함께 돌아왔다. <잊혀진 사람들>로 1951년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브뉘엘은 멋지게 컴백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황금시대>로부터 무려 20년 만이다. 그는 어디에 있었는가? 1930년 프랑스에서 만든 <황금시대>의 소동을 뒤로 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브뉘엘은 1932년 우르데스라는 산악지역으로 달려가 다큐멘터리 <빵없는 대지>를 찍었다. 절대적인 빈곤과 무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곳 주민들의 삶을 그린 이 다큐멘터리는 스페인 정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바람에 상영이 금지됐다. <빵없는 대지>는 1936년에야 공개가 가능했다. 그뒤 그는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한다. 그래봤자 영화계 언저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긴 하지만. 파리의 파라마운트에서는 2년간 더빙작업을 했고 스페인의 워너브러더스에서는 공동 제작을 감독했다. 그러던 브뉘엘은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공화당 정부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부의 명령을 받고 할리우드로 간다. 기술 고문으로 스페인공화국에 관한 영화 제작을 감독하라는 지시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쟁이 끝났고 그는 친구도 일자리도 없이 미국에 남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간신히 뉴욕 현대미술관에 큐레이터로 취직했으나 1942년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해고됐다. 빈털터리가 된 그는 미군이 만든 영화의 스페인어판 해설가로 고용돼 생활을 연명했다. 이렇듯 오랫동안 메가폰을 놓았던 그는 1946년 멕시코로 이주하면서 ‘행운의 반전’을 맞는다. 그는 멕시코인 프로듀서 오스카르 단시헤르스의 요청으로 남미로 간다. 그리고 1947년 감독 복귀작 <그랑 카지노>를 내놓지만 실패한다. 하지만 단순 유쾌한 코미디 <난봉꾼>이 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그의 야심작인 <잊혀진 사람들>에 착수할 수 있었다. 1950년 12월에 개봉된 이 영화는 그의 옛날 영화처럼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멕시코 수도의 슬럼가에 사는 10대들의 불량스런 삶을 적나라하게 그린 이 영화는 “멕시코에 대한 모욕”이라는 비난을 샀다. 그 여파인지 단 4일간 극장에 걸릴 만큼 흥행에서도 참패했다. 하지만 칸영화제 수상으로 상황은 역전돼 <잊혀진 사람들>은 재개봉에 들어갔다. 할리우드 300명 퇴출 반미조사위 청문회 재개…공산주의 혐의자 줄줄이 캐내 1951년 말, 재개된 반미조사위원회(House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이하 HUAC) 청문회 결과 공산주의자로 밀고된 300여명의 영화인이 소속 스튜디오에서 해고되었다. 이들은 또한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일하는 것이 금지된다. 이 명단에는 대시엘 해밋, 줄르 다신, 조셉 로지, 폴 무니, 존 가필드 같은 작가, 감독, 배우들이 포함되어 있다. HUAC의 새 의장인 존 우드는 지난 봄, 45명의 비우호적인 증인을 불러 청문회를 재개했다. 그리고 그해 말까지 계속된 청문회에서 110명이 증언했고 그들 중 58명이 공산당 당원임을 고백했다. 이렇듯 이번 청문회의 분위기는 1947년과 사뭇 달랐다. 당시 할리우드 10으로 찍힌 영화인들이 할리우드에서 해고된 데 이어 구속 수감까지 당하는 걸 지켜본 새 증인들은 대부분 HUAC에 협력했다. 시나리오 작가인 마틴 버클리는 무려 155명의 공산주의 혐의자를 댔고 감독 로버트 로슨은 54명, 배우 리 제이 콥은 20명, 감독 엘리아 카잔은 11명을 고해바쳤다. 한편, 할리우드 10의 한 사람인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은 이번 청문회를 ‘재기’의 기회로 삼았다. 곧 그는 지난 4월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요량으로 청문회에 출두해 24명의 전직 공산당원의 이름을 댔고, 몇주 뒤 킹스 브러더스에 다시 일을 시작했다. 블랙은 들러리인가? 레나 호른, <쇼 보트> 여주인공 역할 에바 가드너에게 밀려 흑인 여배우 레나 호른이 절친한 친구 에바 가드너에게 고배를 마셨다. 1951년 <쇼 보트>의 여주인공 역할은 가드너에게 돌아갔다. <쇼 보트>는 1946년작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의 ‘쇼 보트의 줄리’ 이야기를 토대로 하는 MGM의 새 뮤지컬. 그때 줄리로 출연한 배우가 호른이었기 때문에 호른은 당연히 여주인공에 캐스팅되리라 기대했지만, MGM은 흑인 분장을 한 에바 가드너를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 호른으로서는 몹시 씁쓸한 일이다. 레나 호른은 흑인으로는 드물게 할리우드에서 성공한 여배우다. 한때 출연진 전원이 흑인인 흑인영화들이 제법 만들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흑인단체들의 압력으로 정부가 할리우드에 흑인배우를 더 많이 고용할 것을 촉진한 덕이었다. 흑인 집사들의 핀업걸이었던 호른은 <폭풍우> <하늘의 오두막> 같은 영화에서 진가를 발휘해 기회를 잡았다. 하지만 2차대전 뒤 흑인배우를 고용해야 하는 의무가 해이해지자 흑인영화는 사실상 제작이 중단된다. 특히 스튜디오들은 남부 백인 관객의 눈치를 살피느라 흑인배우의 출연을 자제시켰다. 남부의 검열관들은 흑인이 품위있게 그려지는 것을 눈뜨고 보지 못했다. 유모, 하인, 매맞는 바보여야 봐줄 수 있었다. 호른이 맡았던 유혹적인 미녀 역할은 그나마 흑인 여배우에게 주어진 최선이었다. 호른은 그 이상을 원했다. 인종이 혼합 캐스팅된 영화에서 진지한 배역을 맡고 싶어했고 제작사가 자신을 2류 취급하는 데 반발했다. 하지만 차별의 벽은 견고했다. 1940년대 호른은 “나는 할리우드에 있었지만 흑인인 까닭에 할리우드의 구성원은 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점점더 잔인한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어깨:<선셋대로>의 빌리 와일더 감독 인터뷰 “관객이 보지 못하는걸 들려줘야” 독일에서 나치 집권 뒤 할리우드로 건너왔던 감독들은 유난히 필름누아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로버트 시오드막, 오토 프레밍거, 프리츠 랑, 막스 오퓔스 등 필름누아르의 수작들 다수가 이들 손에서 나왔다. 빌리 와일더도 여기에 속하는 감독으로 그는 <이중배상>(1944), <잃어버린 주말>(1945)에 이어 1950년 <선셋대로>를 내놓았다. 여느 누아르영화처럼 <선셋대로>에도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서 연원하는 스타일의 기운이 넘쳐난다. 이건 의식적인 것일까, 무의식적인 것일까? 그와의 인터뷰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독일 감독들을 만나면 으레 하는 질문인데, 독일 표현주의가 당신 영화 패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감독은 영화마다 다른 스타일로 작업한다. 나는 한 종류의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 히치콕이 그러하지 않는 것처럼. 패턴 같은 건 모른다. 우리는 ‘이 영화는 무슨 장르’ 따위로 구분하지 않는다. 스타일은 그냥 서체처럼 자연스럽게 나온다. 다만 매번 재미있고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할 뿐이다. 서체처럼 스타일이 발전할 수도 있지만, 그건 무의식적인 거다. 그래도 영화를 시작할 때는 독일의 표현주의 운동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그건 그냥 우리가 사는 환경이었다. 베를린은 그런 도시였다. 우리는 초기 갱스터영화에 나오는 세트에서 사는 것 같았다. 독일 감독들마다 다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의식하진 않았다고 해도 무의식 중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글쎄, 그럴 거다. 하지만 50명의 작가, 50명의 감독, 50명의 접근법이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집에 돌아온 남편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보는 장면이 있다고 치자. 감독마다 작가마다 다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방식으로 그려낼 것이다. 내 영화가 다 다르길 바란다. 같은 영화를 만드는 건 지루한 일이다. 당신이 <이중배상>에서 일인칭 화자를 내세워 성공한 뒤 이는 할리우드에서 하나의 유행이 됐다. 제대로 된 내레이션을 쓰는 건 쉽지 아니다. <선셋대로>에서 죽은 내레이터라는 설정은 이야기를 경제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내레이션을 쓰면 20분 동안 보여줘야 할 걸 2줄로 전달할 수 있다. 내레이션을 쓰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기술들을 잘 모른다. 관객이 이미 보고 있는 걸 내레이션으로 전달한다면 실수다. 내레이션은 새로운 것, 다른 면을 들려줘야 한다. 그나저나 세실 B. 드밀 같은 거물이 어떻게 <선셋대로>에 출연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스튜디오 사장이 부탁하고 돈도 듬뿍 주었으니까. 그의 하루 출연료가 1만달러였다. 단 신 들 영화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 창간 1951년 4월 프랑스에 영화전문 월간지 <카이에 뒤 시네마>가 창간됐다. 앙드레 바쟁, 자크 도미올 발크로즈, 로 두카가 공동 편집장을 맡은 <카이에 뒤 시네마>는 <레뷔 뒤 시네마>의 편집방침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1929∼31년 발행됐던 <레뷔 뒤 시네마>는 유럽의 예술영화, 아방가르드영화, 미국영화 감독들을 주요하게 다뤘고, 1946년∼49년 재발행됐을 때도 필름누아르를 중심으로 한 미국영화, 네오리얼리즘에 큰 비중을 두었다. 애초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에 내정됐던 사람도 <레뷔 뒤 시네마>의 전임 편집장 장 조르주 오리올이었다. 하지만 그가 1950년 자동차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편집장이 교체됐다. 앞으로 <카이에 뒤 시네마>에는 젊은 평론가들이 대거 합류할 예정이다. 바쟁과 절친한 평론가 프랑수아 트뤼포가 기고하고, <카이에 뒤 시네마> 창간에 참여한 에릭 로메르를 매개로 ‘카르티에 라틴 시네클럽’에서 함께 소식지를 냈던 자크 리베트, 장 뤽 고다르도 합류하기로 했다. <선셋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이 표지를 장식한 창간호는 오리올에게 헌정됐으며, ‘영화언어의 진화’에 관한 바쟁의 글 등이 실렸다. 주디 갤런드 “이렇게 사느니…” 1950년 6월20일 할리우드 여배우 주디 갤런드가 자살을 시도했다. 갤런드는 유리 조각으로 목을 그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지만 다행히 가족들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최근 주디 갤런드는 깊은 침체에 빠져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로 단박에 스타덤에 오른 주디 갤런드는 연이어 MGM의 뮤지컬에 출연했는데, 기분을 고조시키고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의 약물중독 증세는 점점더 심해졌고 그에게서 비롯되는 실수를 보다못한 MGM은 그와의 계약을 철회했다. 또한 갤런드는 남편인 빈센트 미넬리와도 별로 사이가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도 ‘빨갱이 사냥’ 1950년 여름 일본 영화계에서도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이른바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이 벌어졌다. 연합군총사령부(GHQ)는 도호, 쇼치쿠, 다이에이 등 세 회사를 중심으로 공산주의자 및 동조자 색출 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감독인 고쇼 헤이노스케, 이마이 다다시 등 137명의 영화인이 추방됐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3]

숙부인 정씨 금욕의 푸른색 “남녀가 유별한데 발도 치지 않고 어찌 대면할 수 있겠느냐고 전하거라.” ⑤ 열녀문을 하사받은 숙부인 정씨는 시집도 오기 전에 정혼자가 급사한 청상과부로 유행이나 치장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다. 사랑받지 못한 공허감을 사랑을 베풀어 채우려고 하는 그녀는 천주학에 이끌리며 봉사하지 않으면 독서와 수놓기로 소일하며 마음의 평화를 가꾼다. 물론, 천하의 능수능란한 유혹자 조원의 눈이 그녀에게 머물기 전의 이야기다. 숙부인의 테마색은 청아하고 금욕적인 푸른색이다. 몸에 붙이는 보석도, 광채나는 귀금속을 즐기는 조씨와 대조적으로 비취와 옥이다. 단정한 쪽머리를 유지하는데 흔히 사극에 쓰이는 일제 시대식의 칠보 비녀 대신 백동과 은을 쓴 비녀, 전문 장인이 옥을 덩어리째 깎아 이음새 없이 만든 비녀를 감상할 수 있다. 간결한 죽잠도 잘 살펴보면 끝의 섬세한 옥 장식을 볼 수 있다.⑤ 유행에 맞춰 일자 소매, 바짝 잘린 저고리를 맵시있게 입는 조씨 부인이 한심해할 정도로 숙부인의 저고리 도련은 길고 소매통도 여유가 있다. 그러나 조원을 만나 성애에 눈뜨고 천주와 인간의 인연에 값하는 남녀간의 인연을 깨달으면서 숙부인의 옷장에도 약간의 붉은 기운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조원이 그녀에게 선사해 정표가 되는 목도리도 빨간색. 결말에 이르러 그녀가 입은 치마는 처연한 핏빛이다. 숙부인의 화장은 언제나 노메이크업에 가깝지만, 조원을 만나러 외출할 때에는 엷은 볼연지가 뺨에 살짝 내려앉는다. 조 원 풍류로 덧입혀진 하얀색 “첫 번째 잘못은 나를 만난 것이오. 두 번째는 내 말을 귀담아 들은 것이오. 세 번째는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줬는데도 떠나지 않은 것이오.” 사촌누이 조씨 부인과의 사련(邪戀), 실패한 첫사랑은 조원의 인생 전반을 요약하는 상징적 사건인지도 모른다. 조원은 학문에도 능하고 무공까지 높은 강한 남자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조선 양반사회와 자신이 서로를 용납할 수 없을 거라는 견고한 사실을 알고 있다. 그의 공격적 에너지는 세련된 취향과 예민한 감각으로 발현되고 남는 여분은 연인의 손길을 원하는 사대부 부인이 기다리는 밀실에서 쓰인다. 조원의 의상은 여인들에 비해 단조롭다. 그는 백색과 진한 감색 두 가지 색깔의 옷만입는다. 하얀 옷은 세상 사람들에 눈에 비치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넘치는 바람둥이 조원의 옷이다. 반면 심리적으로 언뜻언뜻 음영이 드러나는 순간에는 백색과 강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감색 옷이 등장한다. 백색과 감색은 초반부터 교차하면서 등장하고 이야기가 뒤로 갈수록 감색의 인상이 진해진다. 조원의 옷은 다른 남자들의 것과 첫눈에 구분되지 않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자들이 잘하지 않을 법한 붉은색의 허리띠에 호박을 조각한 추를 다는가 하면 은입사한 살을 쓴 비단 부채 같은 액세서리로 드러날 듯 말 듯한 포인트를 주고 있다. 프로덕션 디자이너 정구호 인터뷰 조선 후기의 끝없는 화려함에 놀랄 거다 언제, 어떻게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 합류했나. 1998년 <정사>를 마친 직후다. <정사>를 하면서 불가능한 것들을 고안해서 영화 속 세계를 구성하는 SF나 시대극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치밀하고 세련된 스타일의 사극에 대한 의욕도 감독과 일치했다. <정사> <텔미썸딩> <쓰리>에서 보여준 미니멀한 스타일과 극히 대조적인 영화 아닌가. 실은 그렇지 않다. <순수의 시대> 같은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다채로운 요소를 써도 각각의 가치가 정밀한 조화를 이루면 미니멀리즘의 단아한 가치와 상통한다. 의상과 소품의 직접 제작을 고집해 비용이나 인력면에서 부담이 컸을 텐데. 처음부터 제작사에 약속받은 사항이다. 영화나 연극이라고 해서 눈속임을 하는 것은 싫다. 진짜를 보여주는 것도 영화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유산을 제대로 아는 데에도 외국에 알리는 데에도 은연 중에 작용하는 가치다. 현대극처럼 현장에서 없거나 부족하다고 즉석에서 조달할 수가 없어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고, 궁중사극이 아닌 사가 상류층의 이야기라는 점, 제한된 공간이 무대라는 점도 어려웠다. 고증과 상상을 결합하는 작업이었을 텐데. 전문화, 분화된 자료가 많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그럴 때는 상상력을 발휘했다. 이를테면 조원이 이를 닦는 장면에서 어떻게 생긴 칫솔을 써야 할지 지푸라기나 소금이 이용됐다는 문헌 외에는 자료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솔잎을 따 묶어 나뭇가지에 붙이면 향도 나고 닦는 기능도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칫솔을 만들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당대 문화에 대해 디자이너로서 발견한 것은. 조사를 하다보니 조선 후기의 화려함이란 요즘에는 비할 수도 없이 끝이 없었다. 가진 자들의 부패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아름다운 물건들은 한 시대가 지닌 기술력, 디자인 파워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후대인에게도 그것을 알 지식의 권리가 있고, 현대 디자인의 발전에도 밑거름이 될 텐데 특정 소수만 그것을 소장하고 본다는 점이 안타까왔다. 그래서 더 영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1]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2]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3]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4]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프로덕션디자인 [5]

바람직한 엔딩을 찾습니다

단조로워진 할리우드 엔딩, 감독보다 시사회 관객 반응 우선시한 결정이 큰 원인 <버라이어티>가 영화를 마무리하는 할리우드의 솜씨가 볼품없어졌음을 개탄하는 기사를 실었다. “<뜨거운 것이 좋아> <대부> <차이나타운> 같은 걸작의 마지막 장면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지만 <헐크>나 <툼레이더2: 판도라의 상자>를 기억할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라는 물음으로 서두를 뗀 이 기사는 최근 할리우드영화의 맥빠진 엔딩을 초래한 요인을 분석했다. 드림웍스의 마케팅 책임자 테리 프레스는 영화의 대단원에서 속편을 넌지시 예고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원흉’으로 지목한다. 최후의 의미심장한 대사나 대담한 반전을 시도하는 대신, 속편에서 살아남을 캐릭터를 가려내고 모든 것을 영점으로 돌려 새로운 에피소드의 발판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엔딩이 많아졌다는 것. 거대 예산의 프랜차이즈영화가 할리우드의 주력이 되면서 영화의 결말을 속편의 티저 광고로 짭짤하게 이용해야 한다는 욕심이 널리 퍼진 탓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엔딩’이 빈약하고 단조로워지는 좀더 근본적인 원인은, 감독과 작가의 예술적 비전보다 테스트 시사회 관객의 다수결이나 시장조사 회사의 컨설팅이 더 큰 발언권을 갖는 스튜디오의 의사결정 구조에 있다고 <버라이어티>는 지적했다. 테스트 시사로 스토리가 뒤집힌 영화의 대표격으로 널리 거론돼온 영화는 1987년작 <위험한 정사>. 글렌 클로즈가 분한 캐릭터가 마이클 더글러스의 가정을 위협하다 자살하는 것이 본래 결말이었던 이 영화는 시사회 관객의 ‘여망’에 따라 더글러스의 부인이 미쳐 날뛰는 클로스를 칼로 찔러 죽이는 것으로 엔딩을 바꿨다. 그러나 이같은 사례는 어느새 할리우드의 표준적 관행이 됐다. <버라이어티>에 의하면 엔딩에 대한 할리우드의 비공식적인 모토는 “속편을 위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핵심 관객층 가운데 누구도 소외시키지 말라”다. 또한 지나치게 뭔가를 주장하는 결말도 기피대상이다. <버라이어티>는, 공포영화 <데스티네이션>의 시나리오상 결말이 마지막 생존자가 친구들의 무덤을 방문하는 장면이었지만, “요즘 10대 관객에게 너무 무겁다”는 제작사 뉴라인의 판단에 따라 테스트 시사 관객의 미움을 한몸에 산 캐릭터가 날아든 간판에 맞아죽는 엔딩으로 바뀐 사례를 들었다. 무기력한 엔딩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시나리오 작법의 획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존 부어맨 감독은 영화 <어댑테이션>에서 상업적 영화의 각본 공식을 설파하는 인물로 나온 저명한 시나리오 작법 교수 로버트 매키 같은 인물이 한 세대의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을 세뇌시켜 여운이 남는 엔딩을 멸종시켰다는 견해를 <버라이어티>에 밝히기도 했다. “캐릭터의 소개, 갈등의 명시, 내러티브의 전개, 3막 구성 등의 정해진 공식이 모든 영화를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었고, 관객이 정해진 패턴에 길들여지도록 부채질했다”는 것이 부어맨의 비판이다. 그렇다면 <버라이어티>가 정의한 바람직한 엔딩은? “불이 켜진 뒤 관객으로 하여금 화장실에서 논란을 벌이게 하는 엔딩, <디 아더스>나 <아메리칸 뷰티>처럼 영화 전체를 다시 곱씹고 모든 것을 새로운 앵글로 보게 만드는 결말”이다. 김혜리

[인터뷰] <영어완전정복> 이나영

"이상하게 빈둥거렸어요" “해가 갈수록 외로움을 느끼는 강도가 세져요.” 김성수 감독의 <영어완전정복>이 마지막 촬영을 마친 지난 20일 서울 올림픽 공원, 이나영은 불쑥 말을 꺼냈다. “이전엔 끝나면 울고, 인사하고 막 그랬는데 요즘엔 그런 게 너무 싫어요. 정리하는 말 같은 것도 싫고.” 이 여자, 머리가 더 복잡해졌나보다. 1년여 전 <후아유> 때 만났을 때도 이나영은 ‘나’에 대한 질문이 많은 배우였다. “법정 스님의 <산에는 꽃이 피네>를 읽었을 때부터인데, 그런 이성적 고지를 하나 넘은 삶을 따라살 수 없는 내 생활과의 갭에 너무 괴로워했어요. 그러다가 남들도 다 그럴텐데 왜 나만 아파하나 그런 생각도 들어요. 이런 나 자신이 너무 싫고. 이젠 머리속 정리정돈을 하지 않고 다 놓아버리기로 했어요. 말도 횡설수설하고 싶고, 감성적으로 살아보고 싶고.” 사실 이나영은 뭐든지 ‘열심’인 스타일이었다. 마치 “수험생 가방”처럼 영어책·일본어책 공부거리를 잔뜩 싸들고 다니고, 작품을 붙잡으면 분석하고 따지고 공부에 밤새는. “근데 <영어완전정복>은 신기했어요. 이상하게 빈둥거리고 있는 거에요. ‘너 뭐 믿고 그러니’ 되물을 정도로. 근데 촬영장에서 슛 사인이 떨어지면 나도 모르게 영화속 ‘영주’가 돼요.” 이쯤에서 <영어완전정복>의 영주를 만나보자. 대한민국 동사무소에서 근무하는 9급 공무원. 어느날 들른 외국인 때문에 자그마한 소동을 빚은 동사무소에서 ‘소주병 돌리기’로 영어학습 대표로 당첨돼 영어학원에 간 첫날, 뺀질뺀질 틈만 나면 ‘작업’에 들어가는 구두매장 직원 문수(장혁)에게 한눈에 필이 꽂힌다. “감독님도 이렇게 배우들과 캐릭터 놓고 얘기 많이 한 작품이 없었다 할 정도에요. 저랑 얘기하면서 내 생각, 내가 좋아하는 것 그런 게 많이 담겼어요.” 항상 꽂고 다니는 어린왕자의 뺏지, 민망하면 ‘헤~’ 혀를 쑥 빼물거나 ‘흐흐흐~’ 웃는 버릇, 엉뚱하고 눈 큰게 ‘외계인’같다는 묘사까지 양쪽으로 머리를 질끈 매고 안경을 꼈다 뿐이지 영주는 이나영과 닮았다.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한 부담은 있었죠. 오버하는 건 싫고, 상황으로 웃겨야 하는데. 사실 <후아유>나 <네멋대로 해라>처럼 감정이 중요하고 앞뒤 장면의 감정연결이 중요한 영화는 어떻게든 혼자서도 가능하잖아요. 근데 <영어…>는 다르더라고요. 작품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중요하다는 걸 느껴요. 카메라의 포커스가 나가더라도.” 이나영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 ‘자연스런 모습’에 더 자신이 생긴 걸까. “왜 설경구 선배가 인터뷰할때 자기 캐릭터 그대로 드러내며 툭툭 말 던지잖아요. 브래드 피트나 주드 로, 캐머런 디아즈를 좋아하는 게 그들은 ‘망가지더라도’ 확실히 자신이 즐기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물론 한국에서 힘든 것 알죠. 특히 여배우는 이미지가 중요하잖아요. 불만이기도 하고, 갑갑하기도 하지만.” 생각을 놓기로 했다면서 그의 생각은 더 많아진 것 같다. 스타에게 좀 이상한 말일지 모르지만 이나영은 칭찬이나 사랑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는 사람이다. “혼자 외로움을 많이 타서 그런 것 같아요.” 시간만 나면 장애우들을 찾아가는 자원봉사활동도 알려질까봐 웬만하면 말을 꺼내지 않는다. ‘감성적’으로 살고 싶다는데 여전히 그에겐 신비한 이미지가 있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공식석상을 즐기지 못하니까 그래요. 전 지금 사는 게 재미있거든요.” 그래도 이 말을 할 땐 확실히 20대다. “지금 전 아주 진실되고 거기에만 빠지는 사랑을 하고 싶어요. 근데 <바람난 가족>을 보니까 너무 서글프더라고. 그런 역은 지금은 못할 것 같아요.” 마지막날, 쉴 새 없이 하늘을 나는 공군 비행기와 쉴 새 없이 울어대는 아기역의 배우 때문에 고생고생 촬영을 마친 <영어완전정복>은 11월5일 개봉한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