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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서효인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지속되는 우리의 삶처럼

감독 코르넬리우 포룸보이우 / 출연 마리시아 안드레스쿠, 테오도르 코반 / 제작연도 2006년 1988년 겨울, 5공 청문회가 열렸다. 그해의 기억을 소환한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내게 1988년의 기억은 청문회만이 또렷하다. 7살에 불과했으니 텔레비전에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던 군인들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마찬가지로 무지렁이 같은 차림으로 중계 카메라 앞에 주눅 들어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작은 화면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어른들과 그들이 풍기던 분위기였다. 그곳은 광주였고, 할머니가 하던 함바집의 작고 두툼한 텔레비전 앞이었다. 그들은 화를 내다가 중얼거리다가 차갑게 돌아섰다 다시 돌아와 술잔을 기울였다.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는 1989년 독재자 차우세스쿠를 쫓아낸 루마니아의 혁명을 다룬 영화다. 그러나 혁명의 드라마틱함은 자료화면처럼 스치듯 지날 뿐이다. 남은 건 사람들의 기억. 그때 거기 있었는지 아닌지를 두고 벌이는 설전 아닌 설전이 유머 아닌 유머를 만들어낸다. 오랜 시간을 시민 위에 군림한 절대 권력이 헬기를 타고 도망가는 모습이 생중계된 역사적인 순간이지만, 그때에 거기에 있었던(혹은 없었던) 사람들의 기억은 모두 다르다. 영화관에 막 들어섰을 때, 혁명의 정중앙에 있었던 소시민의 남은 열정 같은 것을 기대했던 내게, 영화는 혁명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다시 묻는 듯했다. 그때에 거기에 있었던가, 있었다면 무엇을 했었나. 기억을 더듬는 순간 감독은 마지막 시퀀스로 슬쩍 힌트를 준다. 하나둘씩 켜지는 가로등 불빛. 이어서 낮은 조도로 불을 밝힌 크리스마스트리. 혁명 후 16년 지난 오늘, 다시 시작되는 하루. 혁명의 기념은 거대한 조형물, 으리으리한 기념관, 달력의 빨간 날 같은 것들로 완성될 것이지만, 그것들을 구성하는 본질은 사람이다. 우리의 기억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그때 거기에서 누가 사라져갔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1988년 청문회 생중계 화면 앞, 더 나아가 1980년 광주 변두리 마을, 나의 삼촌과 고모와 부모와 이웃 어른들은 있었다. 그리고 하나둘 켜지고 꺼지는 가로등처럼 깜박이며 삶은 지속된다. 혁명은 완성되지 않는 것이다. 각자의 기억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어느 훗날, 2016년의 촛불은 어떻게 기억될는지. 우리는 그때 거기 있었고, 지금도 여기에 있다. 미래에도 우리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어두운 사위를 밝히는 가로등이 될 것인지 어두움에 잡아먹힌 망각의 그림자가 될 것인지는 마저 지속될 우리의 삶이 증명할 것이다. 그날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어딘가에서 무엇을 하며 있었다고, 삶으로 대답할 수 있기를, 그때와 거기를 들먹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진 않기를, 다시 돌아온 겨울에 다짐한다. 이 다짐이 기억되길 바라면서. 서효인 시인, 출판편집자.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와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이 있다.

[영화와 건축] 공간구조와 이야기구조를 통해 <로건> 읽기

최근에 영화를 보면서 가장 눈에 들어왔던 디자인은 영화 <로건>(2017)에 나오는 자율주행 트럭이다. 스토리의 전개에는 로건(휴 잭맨)이 운전하는 리무진이 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더 인상적인 디자인은 자율주행 트럭이다. 영화에서 배경이 되는 2029년은 자율주행이 상용화된 상태이고, 운전자주행 자동차와 자율주행 자동차가 도로에 공존하고 있다. 자율주행 트럭은 로건과 자비에 교수(패트릭 스튜어트)가 돌연변이 소녀 로라(다프네 킨)를 데리고 미국 중서부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장면에서 나온다. 자율주행으로 달리는 대형 트럭 하나가 로건의 픽업트럭 앞으로 무리하게 끼어들고 이를 급하게 피하던 로건이 역방향으로 주행하는 장면이다. 로건의 트럭을 무시하며 거칠게 밀고 들어오는 자율주행 트럭의 모습은 시대에 뒤처져 소수자로 변해버린 운전자 자동차의 모습을 보여준다. 관습적인 선택으로부터 벗어나라 <로건>에서 미래의 자율주행 운송트럭은 운전석 공간이 사라진 형태다. 마치 컨테이너가 도로 위를 달려가는 느낌을 주고 있다. 감정 없는 자율주행 트럭이라는 영화 속 성격을 극대화하는 이 인상적인 트럭의 형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논리적인 설계의 결과물이다. 운전자가 필요 없는 절대적인 자율주행의 조건에서 굳이 동력장치를 앞에 배치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의 미래를 예상하는 자동차 디자인의 대부분이 좌석의 방향 같은 문제에 집중하는 것과 비교하면 <로건>의 자율주행 트럭은 ‘운전석을 삭제해서’ 새로우면서도 낯선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로건>의 영화미술에서 이와 비슷한 접근은 자비에 교수가 숨어 지내던 폐공장 디자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로건과 자비에 교수의 은신처는 멕시코 외딴 장소에 위치한 낡은 공장과 쓰러진 철재 물탱크다. 폐공장을 은신처로 사용하는 것이 영화의 공간디자인으로 자주 나오는 시도라면, 쓰러진 물탱크는 새로운 아이디어다. 산업 구조물을 활용해서 거주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이 이제는 유행으로 변해버린 현상이라면, 물탱크가 옆으로 누웠을 때 만들어지는 공간을 생각해내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는 항구의 산업용 부지를 이용해서 건설되었다. 박람회 부지에는 시멘트 저장고로 사용하던 2개의 콘크리트 사일로가 있었다. 박람회를 위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새롭게 건설된 반면, 2개의 사일로는 재활용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이 산업용 구조물을 건물로 변환하기 위해 설계공모전이 진행된다. 1차, 2차 두 단계로 나누어서 진행된 공모전에서 1차에서 뽑힌 5팀 중 한팀은 나머지 팀들과는 다른 접근의 계획안을 제안했다. 4팀이 사일로를 치장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반면에 일러스트레이터로도 유명한 건축가 오영욱의 안은 사일로 2개 중 하나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쓰러트리는 것을 통해서 원통형의 사일로는 우리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맨홀을 사용해서 건물을 만든 것과 같을 것인데, 오영욱의 계획안에서 사일로는 바다 방향으로 열려 있다. 쓰러진 사일로와 서 있는 사일로는 한쌍을 이루고 있다. 최종 당선작은 오영욱의 안이 아니었다. 아마도 심사위원들은 콘크리트 사일로를 쓰러트리는 계획에 불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관습적이고 안정된 선택은, 우리가 새로운 공간을 가질 기회를 놓치게 했다. <로건>은 울버린 같은 슈퍼히어로도 늙고 병든다는, 단순하지만 생각의 전환이 필요한 아이디어로 시작된다. 슈퍼히어로영화의 관습적인 길과는 다른 길을 택하고 있다. 엑스맨 영화의 뮤턴트들도 늙고 병들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은 영화를 현실 세계로 내려오게 한다. 이제 자비에 교수와 로건은 자신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다. 로건의 자연치유능력이 약해진 후 생겨난 몸의 상처들과 나이 든 자비에 교수의 나약한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몸의 변화뿐만이 아니다. 생활인으로서의 로건은 힘겹게 리무진 운전사로 일하고 있다. 이유는 다르겠지만 다른 나이 든 은퇴자들처럼 로건도 돈을 모아 바다에서 생활할 수 있는 요트를 구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 영화미술 측면에서도 나이 든 뮤턴트라는 사실은 낡은 폐공장의 모습과 쓰러진 물탱크로 표현되고 있다. 그들은 왜 북쪽으로 가는가 <로건> 속 공간구조를 살펴보면 영화는 북미 대륙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로건>의 카지노 호텔방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셰인>(1953)과 같은 서부영화들이 동부에서 서부로 향하는 영화라면, <로건>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다. 로건 일행은 멕시코의 폐공장 은신처에서 시작해서, 캐나다 국경에 면한 노스다코타주의 산불 감시탑까지 연결되는 길을 이동한다. 그사이에는 텍사스의 주유소, 오클라호마시티 카지노, 캔자스주의 옥수수 가족 농장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캔자스주의 가족농장은 서부영화, 특히 <셰인>을 바로 연상시키고 있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는데, 서부시대와 달리 이 흑인가족의 농장을 차지하려는 세력은 옥수수를 사용해서 음료를 만드는 거대기업이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2016)에서 이미 한번 언급한 것처럼 서부 개발의 기폭제가 되었던 홈스테드법은 서부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2년에 제정된 홈스테드법은 동부 13개주 밖 서부에서 최소 5년 이상 정착하고 개간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의 공유지 땅을 무상으로 분배하는 법이다. 이 법에 따라 미국 토지의 약 10%에 해당하는 크기의 땅이 독립 자영농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서부시대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들은 토지 소유에 관한 분쟁들을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토지보다는 난민이나 소수자의 인권 문제가 더 중요한 오늘날 미국의 현실은 영화의 여정을 남쪽에서 북쪽 캐나다로 향하게 하고 있다. <로건>의 공간구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면 이야기의 구조는 로건 자신의 복제에 관한 것이다. 멕시코에 위치한 한 기업이 뮤턴트들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돌연변이 아이들을 만들어낸다. 이곳을 탈출한 아이들 중 로라는 로건의 유전자를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탈출한 아이들을 추적하는 기업의 킬러는 로건의 복제품이다. 이를 통해서 로건은 로라와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관계가, 로건의 복제킬러와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과 싸우는 울버린’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는 로라가 로건의 무덤을 만들고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로건은 돌연변이 아이들이 캐나다로 탈출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로라는 로건의 무덤을 떠나기 전 십자가 +를 쓰러트려 X로 만들고 떠난다. <로건>은 영화미술도 흥미로운 영화다. 훌륭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 자율주행 트럭과 물탱크 은신처, X로 변한 십자가는 개별적으로 봐도 좋은 디자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영화와 건축이 아이디어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외화 베스트⑥] 개봉 대기 중인 슈퍼히어로영화들 ― <블랙팬서> <앤트맨과 와스프> 등

무술년 극장가에 공개될 슈퍼히어로영화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일단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블랙팬서>가 첫 스타트를 끊는다. 비브라늄 생산국인 와칸다의 왕 티찰라(채드윅 보스먼)가 비브라늄 이권을 노린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와칸다를 지켜냄과 동시에 자신의 왕좌인 ‘블랙팬서’ 자리를 노리는 동족 킬몽거(마이클 B. 조던) 무리와도 싸워야 하는 이야기. 예고편에도 등장한 부산 촬영 장면으로도 화제가 됐는데, 해당 장면에서 블랙팬서의 슈트가 전편보다 완벽한 방탄 소재에 힘 조절이 가능한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것이 확인됐다. 그에 상응하는 액션과 비밀의 왕국 와칸다의 환상적인 비주얼이 주요한 볼거리로 등장할 것 같다(2월 14일 개봉). 뒤이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가 4월에 개봉하고 나면 <앤트맨과 와스프>가 기다리고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20번째 작품으로, ‘시빌워’ 사건 이후 앤트맨으로서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려는 스콧 랭(폴 러드)과 새로운 미션을 수행하게 될 ‘와스프’ 호프(에반젤린 릴리) 두 사람의 이야기다(7월 개봉). 마블의 또 다른 <엑스맨> 시리즈도 대거 공개된다. 시리즈의 11번째 작품인 <엑스맨: 뉴뮤턴트>는 스스로를 뮤턴트로 자각하기 시작한 5명의 젊은이들이 이상한 시설에 감금되자 자신들의 과거에 맞서며 병동을 탈출하기 위해 싸우는 이야기. <안녕, 헤이즐>의 조시 분 감독이 연출을 맡았는데 10대 뮤턴트들의 우울한 정서와 방황에 관한 어두운 이야기를 기대해본다. 배우 안야 테일러 조이가 텔레포트 능력을 지닌 러시아 여성 마직,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로 얼굴을 알린 찰리 히턴이 공중부양이 가능한 캐논볼, 메이즈 윌리엄스가 늑대인간과 같은 능력을 지닌 라네, 헨리 자가가 태양에너지를 조작할 수 있는 선스팟, 블루 헌트가 사람에게 환영을 조작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미라지 역을 맡는다. 이들 다섯 사람이 영화의 실질적인 주인공. 이들의 멘토인 의사 세실리아(앨리스 브라가)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바이오필드를 만들 줄 아는 능력자다(4월 개봉). 같은 시리즈의 12번째 작품은 <데드풀2>로, 이미 1편 개봉 때부터 2편 제작을 예정했던 영화다. 1편의 팀 밀러 감독은 라이언 레이놀즈와 의견 차이로 하차하고 최종적으로 <아토믹 블론드>의 데이비드 레이치 감독이 이어받았다. 조시 브롤린이 케이블 역을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현재까지 제대로 된 줄거리를 일부러 공개하지 않고 있다(6월 개봉). 이어지는 시리즈의 13번째 작품은 <엑스맨: 다크 피닉스>다. 이는 내용상으로는 <엑스맨: 아포칼립스>의 속편 격인 영화로 사이먼 킨버그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원작 그래픽 노블인 <다크 피닉스 사가>의 이야기인 시아 제국의 외계인과 다크 피닉스의 전지전능한 힘에도 맞서야 하는 사건을 다룬다. 때문에 이전 시리즈의 엑스맨 멤버들이 총출동할 예정이며 제시카 채스테인도 정체불명의 외계인 역으로 출연한다. 사실상 그녀가 강력한 악역일 것으로 예상된다(11월 개봉). 올해 대미를 장식할 슈퍼히어로영화는 MCU 영화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스파이더맨을 다르게 해석하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가 될 예정이다. 필 로드와 크리스 밀러 감독이 제작과 각본을 맡고 밥 퍼시게티, 피터 램지, 로드니 로스먼 감독이 공동 연출한 애니메이션영화로 원작 그래픽 노블 <얼티밋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기반으로 만들어질 영화다. 2대 스파이더맨이 된 흑인 소년 마일스 모랄레스의 이야기로, 원작의 캐릭터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배우 도널드 글로버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캐릭터다(12월 개봉).

[노순택의 사진의 털] 나도 한때는 MBC를 보았다

텔레비전을 없앴다. 영리한 바보상자에게서 달아나고픈 마음을 품어왔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 나는 텔레비전에 빠져들곤 했다. 탐사기획과 뉴스는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눈이었다. 헌데 어느 날부턴가 그것들이 꼴보기 싫어졌다. 이명박의 계절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괜찮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괜찮은 목소리로 전해주던 세상의 희로애락이 방송에서 자취를 감췄다. 농부를 고깃배에 태우는 식으로 기자와 PD를 쫓아내자 방송은 마치 사전의 뜻풀이를 시연하듯 ‘정권의 나팔수’가 되었다. 나팔수의 중요 임무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침묵이었다. 거짓 저널리즘이 침묵의 토양 위에서 날개를 폈다.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시청료가 그 후원금처럼 여겨졌다. 때마침 텔레비전이 고장나자 미련 없이 버렸다. 그것은 MBC <뉴스데스크>와 <시사매거진 2580>과 작별을 고하는 일이기도 했다. 산하를 난자한 4대강 사업과 비리로 얼룩진 자원외교, 정권연장을 위한 정보기관의 선거개입과 민간인사찰의 국면에서 방송저널리즘은 무슨 짓을 했는가. 뒤이은 박근혜의 계절에서 방송은 사악한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허수아비들의 활약은 세월호 참사 앞에서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처럼 빛났다.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실체가 드러나고 촛불의 파도가 광장에서 넘실대던 겨울밤, 나는 보았다. 매끈하게 빛나는 MBC 현장중계 차량에 쌓이던 분노의 손팻말을. 누군가는 가래침을 뱉었다. 기시감일까. 1980년 오월광주 시민들의 손에 불타던 MBC 사옥이 떠올랐다. 다른 시공간이지만, 같은 장면이었다. 그랬던 MBC가 돌아왔다! 고 한다. 사실일까. 고깃배를 타고 떠났던 농부들이 들녘으로 돌아왔다. 최승호 신임사장이 그중 한명이라는 점이 반갑기만 하다. MBC는 지난날의 애칭 ‘마봉춘’을 되찾을 수 있을까. 쓰라린 기억을 곱씹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리라. 그래서 제안하고 싶어졌다. 사장실 벽에 방송의 밝은 미래를 걸지 말고, 어둡고 치욕스런 과거를 걸라고. 불타는 MBC 사옥과 가래침 쌓인 중계차량이 눈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하라고. MBC의 미래는 결국 과거에 있다.

피해 의식

페미니스트에게 세상이 자주 붙이는 딱지가 있다. ‘피해 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강의를 하다보면 이런 질문도 곧잘 들어온다. “페미니즘을 알고는 싶은데 피해 의식만 잔뜩 생길까봐 겁이 나기도 해요. 피해 의식을 갖지 않고 페미니스트가 될 방법이 있나요?” 무리도 아니다. 페미니즘을 통해 우리 사회를 다시 둘러보는 시각을 갖게 되면 그 이전과는 너무나도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된다. 그냥 지나쳤던 부분들이 다르게 다가온다. 이런 새로운 앎은 환희만 주지 않는다. 고통이 뒤따른다. “페미니스트가 되고 난 다음에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수가 없어요. 재미있게 보던 예능 프로그램은 짜증이 나고, 드라마나 영화도 보다보면 화가 나요. 친구와 가족들과도 점점 말이 안 통해서 조금씩 멀어지는데, 어떡하면 좋죠?”라며 울음에 가까운 물음을 던지는 이들도 있다. 나 역시 영화를 보다보면 영화 외부에서 읽고 들었던 이야기와 겹쳐서 몰입에 방해가 될 때가 있다. 영화관에서 흘러가는 대사와 별도로 이런 자막이 내 머릿속을 흘러간다. ‘저 어마어마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촬영장에서 감독이 여자일 때와 남자일 때 태도가 너무나 다르다던데, 여자감독을 티나게 무시한다지. 사실적인 연기로 극중 긴장을 잘 이끌어가는 저 배우는 애드리브라며 상대 여배우에게 갑자기 육두문자를 날렸었다지. 저 겁탈 장면은 사전에 여배우와 협의는 된 걸까….’ 이러니 피해 의식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피해 의식이 생기는 걸 두려워할까. 일단 우리 사회에서 ‘피해 의식’은 ‘남 탓을 한다’는 말과 동의어로, 보통 부정적인 어조로 쓰인다. 하지만 이건 과대망상이나 남 탓하기라는 문제 행동을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이다. 이런 식의 덧씌우기는 피해자가 ‘건강한’ 피해 의식을 가지는 걸 방해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피해 의식(victim mentality)의 원뜻은 다음과 같다. 첫째, 피해자는 문제의 발생 원인이 아니다. 둘째, 피해자는 문제의 발생을 막을 의무가 없다. 셋째, 피해자는 권리를 침해받은 자로서 공감받을 자격이 있다. 이렇게 피해 의식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없어져야 할 것은 피해 의식이 아니라 피해자를 비난하는 문화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피해 의식 때문에 재미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비슷비슷한 영화만 보고 그 익숙함을 재미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때문에 재미를 잃었다면 페미니즘을 멀리한다 해서 다시 재미가 생길 리 없다. 새해에는 남자들로만 가득 찬 스크린에 변화가 생기기를 기대한다. 재미가 없는 건 내 탓이 아니다.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코코>는 소리와 영상으로 기억을 소환한다

영화관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면 등장하는 신데렐라의 성, 그곳에는 두 가족이 산다. 하나는 월트 디즈니의 직계가족. 미키마우스가 휘파람을 불며 방향키를 돌리는 <증기선 윌리>(Steamboat Willie, 1928)의 대표 장면이 이 가족의 문패이다. 또 하나는 픽사. 이들의 문패는 룩소 주니어가 폴짝거리며 등장하는 장면이다. 한 지붕 두 가족, 전략적 공생관계, 그러면서도 그 아래에 깔려 있는 치열한 경쟁의식. <코코>의 상영은 이러한 긴장감을 여실히 드러낸다. 픽사에서 만든 장편은 늘 단편애니메이션을 먼저 보여준다. 장편 <코코>도 마찬가지다.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라는 단편이 마중물 구실을 한다. 잠깐! <겨울왕국>(2013)의 그 올라프? 반갑기도 하지만 갑자기 혼돈이 인다. <겨울왕국>은 디즈니 스튜디오의 작품이 아니던가? 디즈니·픽사, 한 지붕 두 가족 뭐지, 이 상황은? 일단 지켜보자. <겨울왕국>의 짧은 속편 혹은 크리스마스 후일담과도 같은 이 작품을 보면 꽤나 치밀한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기도 하고, 내심 디즈니와 픽사의 경쟁적 동거관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는 본편 <코코>를 위한 바람잡이 역할을 충실히 한다. 짧은 이야기 속에 무려 여섯개의 노래(물론 하나는 아주 짧아서 온전한 노래의 형식으로 쳐주기 애매하다만)가 담겨 있다. 크리마스 스페셜 미니 앨범으로 내놓을 만한 구성의 뮤지컬 단편애니메이션은 <겨울왕국>을 싱어롱 콘텐츠로 즐겼던 관객에게는 반가운 보너스와도 같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코코>의 관객에게 ‘싱어롱 이벤트를 다시 즐길 준비 되셨습니까?’라고 외친다. 우리는 <코코>에서 노래가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하는지 이미 알고 객석에 앉아 있다. 오프닝 무대 치고는 꽤나 성대하다. 그런데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는 그 짧은 시간에 뭔가 끈질긴 집착을 보여준다. 바로 ‘가족의 전통’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가족의 전통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올라프의 짧지만 화끈한 여정이 펼쳐진다. 그리고 <코코>에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와 <코코>는 ‘가족의 전통’이라는 시제를 두고 디즈니 스튜디오와 픽사 스튜디오가 각각 자신들의 답안을 제시하는 백일장과도 같다. 그런데 이미 두 스튜디오가 출제자의 의중을 꿰뚫고 있다. 즉, 가족은 소중하며, 전통이라는 것은 외부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 가족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이며, 세상은 다양한 전통이 어울려 공존해야 한다는 모범답안을 공유한다. 좀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모범답안을 찾아가는 도중에 배치된 몇 가지 설정들이 서로 겹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다락방 속 상자. 이는 추억의 저장고이면서 흔히 무의식 속 기억으로 이해된다. 엘사와 안나가 공유했던 크리스마스의 추억, 그리고 미구엘이 가족 몰래 에르네스토 델라 크루즈의 기념물을 모아둔 곳. 차이라면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에서는 거기에서 해답을 찾았고, <코코>에서는 거기에서부터 해답을 찾고자 출발한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교차점은 바로 애니메이션 자체에 대한 접근법을 들 수 있다.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에서는 뜨개질을 활용한 애니메이션이 등장한다. 단순한 패턴으로 구현된 형상은 2차원 평면이면서도 털실의 3차원적 텍스처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털실 한올 한올은 마치 저해상도의 비트맵 덩어리를 연상시킨다. 이에 화답하듯, <코코>는 파펠 피카도(papel picado)라는 멕시코의 전통 색종이 공예를 끌어들인다. 천이나 종이에 구멍을 뚫어 형상을 만들어내는 이러한 기법을 활용하여 주인공 미구엘 가족의 역사를 펼쳐 보인다. 빨랫줄에 널린 색조각들은 그 자체로 영화의 스토리 보드가 된다(움직임이 결부된 애니메틱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카메라는 이러한 2차원 조각의 앞뒤 좌우를 훑어가면서 3차원 공간에 나부끼는 이미지의 평면성을 한껏 부각시킨다. 뜨개질과 색종이 조각을 둘러싼 2차원과 3차원 사이의 탐색은 디즈니와 픽사가 애니메이션 제작을 어떻게 ‘가업’으로 꾸려나가려 고민하는지를 보여준다. 그것도 ‘수작업/수공예’를 공통적으로 부각시키는 식으로. 이처럼 <올라프의 겨울왕국 어드벤처>와 <코코>는 여러모로 닮아 있다. 디즈니·픽사, 가문의 전통을 찾아나서다: 해골춤, 음악, 멕시코 언제부턴가 우리는 더이상 픽사를 픽사라 하지 않고 디즈니·픽사로 부른다(입에 붙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더 필요하긴 할 테다). 디즈니와 픽사 중 누가 진정한 가업의 계승자인지는 앞으로도 두고 볼 일이기는 하지만 주인공 미구엘처럼 우리도 사진 하나를 들고 그 가문의 전통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과 월트 디즈니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그렇다, 소비에트연방의 바로 그 ‘에이젠슈테인’ 그리고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사는 바로 그 ‘월트 디즈니’가 맞다). 꽤나 뜬금없고 의아해 보이는 이 사진은 1930년대 초반에 찍은 것이다. 어떤 연유로? 당시로 말하자면 영화에 사운드가 도입된 직후였다. 몽타주 이미지와 사운드를 어떻게 결합시킬지 관심이 컸던 에이젠슈테인에게 가장 전범이 되는 작품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었다. 여타의 실사영화와 견주어볼 때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소리와 영상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졌다(‘미키마우징’이라는 말이 영상과 사운드의 ‘싱크’를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그 노하우를 어떻게든 알아내고자 에이젠슈테인은 먼 길을 떠나왔다. 기록상 최초의 유성애니메이션은 <증기선 윌리>지만 에이젠슈테인을 비롯한 다수의 영화감독들에게 펀치 한방을 먹인 작품은 <해골춤>(The Skeleton Dance, 1929)이었다. 해골들이 뼈다귀를 두드리며 다양한 악기 소리를 내다니! 막상 할리우드에 와보니 에이젠슈테인도 이곳에서 영화를 찍고 싶은 마음이 생겼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채플린이 함께 시간을 보내주긴 했지만 아무도 제작 제안을 하지는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에이젠슈테인이 발걸음을 옮긴 곳이 바로 멕시코다. 멕시코에 머물면서 가장 많이 본 것은 아무래도 해골 이미지들이라 현지에서 제작한 <멕시코 만세!>에는 해골이 그득하다. 디즈니의 <해골춤>에 이끌렸던 에이젠슈테인의 행보는 멕시코의 해골 전통으로 귀결된 것이다. 그 와중에 교류를 한 현지의 유명 예술가 중 한명이 디에고 리베라였다. 멕시코의 전통과 당대의 시대상을 뒤섞어 거대한 벽화 작업을 하면서 국민 화가로 추앙받던 디에고 리베라. 그런데 지금은 프리다 칼로의 남편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듯싶다. 에이젠슈테인이 프리다 칼로와도 교류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디즈니와 해골, 멕시코 그리고 프리다 칼로를 연결시키려면 또 다른 경유로를 거쳐야 한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프리다 칼로의 생애를 그린 <프리다>(2002)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에서 프리다 칼로(셀마 헤이엑)가 교통사고를 당해 사경을 헤맬 때, 갑자기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한 해골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작품 전체의 스타일과는 유독 구분되는, 말 그대로 ‘튀는’ 장면이다. 이 작품을 감독한 줄리 테이머가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이름을 강렬하게 각인시킨 계기는 <라이온 킹>(1994)을 뮤지컬로 옮겼을 때다. 줄리 테이머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한 <라이온 킹>은 무엇보다 화려한 색감을 빼놓을 수 없다. 애니메이션으로 구현한 색감보다 한층 더 도드라진 채도로 무대에 올려진 컬러 팔레트였다. 이러한 정글의 화려함이 <프리다>에서는 해골의 차가움으로 급변한다. 이렇듯 멕시코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코코>의 해골 커넥션은 디즈니의 족보에서 꽤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굳이 요약하자면, ‘디즈니-에이젠슈테인-디에고 리베라-프리다 칼로-줄리 테이머-디즈니…’ 뭐 이런 식의 연결고리라고나 할까. 디즈니·픽사가 이런 식의 가계도를 애써 추적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쨌거나 <코코>에서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예술의 대명사로 등장한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관객은 ‘멕시코’ 하면 ‘프리다 칼로’를 즉각 떠올린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반면 디에고 리베라는? 미구엘 가족의 성이 ‘리베라’로 설정되어 있다는 것에서 그나마 그 흔적을 찾아야 할까? 그러기엔 리베라는 흔한 멕시코 성씨이긴 한다. 시네마라는 기록 미디어의 족보 미구엘이 그랬던 것처럼 디즈니·픽사도 가족의 전통을 좇다보면 가업의 족보 또한 챙겨봐야 할 것이다. 시네마토그래프가 탄생한 1895년, 같은 해 11월에는 또 다른 쇼킹한 이미지가 선보였다. 뢴트겐이 엑스레이 기술을 활용하여 살아 있는 사람의 뼈를 촬영한 이미지를 발표한 것이다. 별안간 갑자기, 한쪽에서는 피부와 근육을 손상시키지 않고 뼈를 보여주는 ‘사진 아닌 사진’, 다른 한쪽에서는 사실적인 사진 이미지가 살아서 움직이는 ‘활동사진’의 세상이 펼쳐졌다. <코코>에서 살아 있는 자는 피부로 덮여 있고, 죽은 자는 해골로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미구엘은 죽은 자들의 세상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피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해골로 위장을 해야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뼈가 노출되면서 원래 속해 있던 살아 있는 자의 세상으로 돌아가기 힘들어진다. 엑스레이와 시네마토그래피가 겹쳐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좀더 미디어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사진과 축음기가 있다. 에디슨은 이 둘을 결합시키고자 했다. 사진은 살아 있던 순간을 영원히 담아놓는 기록물이다. 미라처럼 사진으로 온전히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면 죽은 자는 돌아갈 수 있다, 적어도 <코코>의 설정은 그러하다. 뒤집어보면 산 자는 사진을 통해 이미 떠난 자를 추억하고 기억한다. 그렇기 때문에 <코코>에서 아무도 죽은 자를 더이상 기억/추억하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했을 때, 그는 자신이 마치 프로메테우스가 된 것마냥 한껏 들떴으면서도 그만큼이나 안타까움을 표했다. 이유인즉 조금이라도 일찍 축음기를 발명했다면, 그 사이에 세상을 떠난 이의 목소리를 기록해두었을 테니까. 에디슨은 사람들이 사진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 사진의 여러 활용법 중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부분이 어느 지점인지를 알고 있었다. 죽은 자의 소환 혹은 기록을 통한 영생불사. 다만 사진은 살아 있을 때의 ‘순간’만을 이미지로 포착할 뿐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하지도 않는다. 소리를 기록하는 매체인 축음기는 목소리를 온전히 통조림 통(축음기의 원통과 흡사하다) 속에 영원히 저장하고, 언제든 반복해서 재생할 수 있다. 마치 가족 앨범처럼 말이다. 실제로 에디슨은 축음기의 다양한 활용 예를 제시했는데, 음악 녹음 및 재생은 순위가 한참 아래였으며, 가장 전도유망한 활용법은 가족 목소리 앨범이었다. 에디슨은 소리를 기록하는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영상에도 적용하고자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 우리는 메트로폴리탄 무대에 선 오페라 가수를 언제든, 어디서든 불러올 수 있다!” 기록 장치로서의 영화이자 복제 매체로서의 영화를 전망한 것이다. <코코>에서 에르네스토는 에디슨의 예언처럼 이승과 저승 모두에서 영생불사의 생명력을 지닌다. 그리고 여기에 다시 텔레비전과 비디오라는 한층 업그레이드된 테크놀로지가 결합한다. 미구엘은 에르네스토의 공연과 그가 등장한 영화를 비디오에 녹화하여 무수히 반복 시청하면서 빠져든다. 반면 에르네스토의 고약한 과거 행적에 대한 실체는 TV 카메라를 통해 공연장 무대 스크린 위에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이러한 폭로는 위장된 본모습을 드러내는 엑스레이와도 같다. 소리와 영상, 축음기와 사진, 영화, 텔레비전, 비디오, 엑스레이 등 <코코>는 과거를 재구성하고 기억을 소환하기 위해 이제껏 발명된 미디어의 계보를 하나로 묶어서 보여준다. 결국 <코코>가 미디어의 족보를 되짚으면서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혹은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되고,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의 관계이다. 이런, 하필이면 지금 시기에 멕시코라니 <코코>의 제작 기획은 2013년부터 시작되었다. 2013년의 미국과 2017년의 미국은 극명히 다르다. 당시만 하더라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리라고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테다(트럼프 자신조차도!). 트럼프의 선거 캠페인에서 가장 선명했던 비전은 ‘멕시코 장벽’ 설치였다. 만리장성을 쌓겠다는 무모함은, 그러나 트럼프의 지지 기반인 반이민정책 지지자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상징이자 청사진이었을 것이다. 멕시코는 이웃이 아니라 불법 체류자의 무한 공급처와도 같았다.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를 오가는 관문에서 해골-얼굴을 스캔해 생전의 사진과 대조하는 절차를 굳이 따지자면 기획 당시로서는 9·11 이후 강화된 공항 내 보안검색에서 착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이 완성되고 개봉되던 때의 상황은 훨씬 고약하게 바뀌었다. 검색대의 스캐닝 타깃은 테러리스트에서 불법 이민으로 확대되었으며, 불법 이민자는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재분류되는 식으로 흘러간다. 그러니까, 만약 <코코>가 트럼프 당선 이후에 기획되었다면, 이승과 저승 사이의 출입국관리소는 훨씬 엄격하고, 살벌하게 묘사되었을 것이다.

[영화와 책①] 감독이 쓴 책들 - 박남옥·오즈 야스지로·연상호·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감독은 영화로 할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감독이 직접 쓴 책은 많지 않다. 박남옥, 오즈 야스지로, 연상호, 고레에다 히로카즈 등 4명의 영화감독이 쓴 책이 반가운 것도 그래서다. 박남옥과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쓴 책은 자전적인 이야기고, 오즈 야스지로가 쓴 책은 생전 그가 쓴 글들을 묶어낸 것이며, 연상호 감독이 쓴 책은 새로운 창작물임을 미리 밝혀둔다.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지음 / 마음산책 펴냄 그는 언제나 아기를 포대기로 싸 업고 있었다. 첫 연출작이자 유일한 작품인 <미망인>(1955)을 찍을 때 돌도 안 지난 아기를 맡길 데가 없어 업은 채 촬영장을 누볐다. 매일 아침 아기를 업고 시장에 가 장을 본 뒤 배우와 스탭에게 먹일 점심을 마련했다. 촬영이 없는 날에는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기를 데리고 고향 대구와 촬영지 부산을 오갔다. 온갖 수고로움을 감수하며 영화를 찍었던 이 사연의 주인공은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이다. 박남옥이 업고 다닌 딸 이경주씨가 생전 어머니가 써놓은 원고를 일일이 타이핑해 옮긴 책 <박남옥>은 기가 차고 눈물도 차는 박남옥 일대기다. 전쟁 때문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1950년대 충무로에서 고군분투하며 만들었던 영화 <미망인>의 메이킹필름이기도 하다(<미망인>은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 한국영상자료원에 보관돼 있다가 1997년 서울여성영화제에서 상영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편집자). 1923년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고, 영화, 미술, 무용 등 예술 다방면으로 관심이 많았던 만능 소녀였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영화 포스터를 사랴, 영화잡지에서 신일선·복혜숙·김소연·김신재·문예봉 등 영화배우 사진을 스크랩하랴, <수업료> <집 없는 천사> <수선화> <풍년가> 등 한국영화의 신문광고 사진을 모으랴 혼자 바빴던 원조 영화 ‘덕후’였다. 특히 일제시대 조선영화의 최고 스타 배우였던 김신재의 열렬한 팬이었다. 손수건을 꺼내야 하는 대목은 해방과 함께 박남옥이 광희동 촬영소에 입사해 영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다. <자유만세>(감독 이규환, 1946) 녹음 작업을 시작으로 편집조수로 일하다가 배우 최은희의 데뷔작인 <새로운 맹서>(감독 신경균, 1947)에서 스크립터를 맡으며 촬영현장으로 나가게 된다. 이후 부모님의 강요로 고향 대구로 귀향하지만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1953년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해 총알이 날아드는 전쟁터를 누비며 기록 영화를 작업했다. 전쟁이 끝난 뒤 친언니로부터 거금 380만원을 빌려 남편이자 시나리오작가 이보라가 쓴 시나리오로 <미망인>을 찍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미망인> 이후 그는 더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가업인 동아출판사 일을 하면서 1960년 창간된 영화잡지 <씨네마 펜> 편집장으로 영화에 관한 글을 쓰다가 영화계를 떠났다. 영화계에 배우 말고는 여성이 전무했던 그때 그 시절, 영화 현장에서 분투했던 박남옥의 몸부림은 울컥하기 전에 존경심이 먼저 든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감독이 손에 꼽을 만한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요건 몰랐지?_ 박남옥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남자가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다. <라쇼몽>(1950), <7인의 사무라이>(1954), <요짐보>(1961) 등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 주로 출연했던 대배우다. 미후네 도시로 옆에서 웃고 있는 남자는 한국 배우 김진규(<하녀>(감독 김기영, 1960), <오발탄>(감독 유현목, 1961) 등 출연). 1960년 4월 도쿄아시아영화제 파티에서 찍힌 사진인데 박남옥은 “이 사진이 마음에 들고 평생 가보처럼 간직했다”고 말했다.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오즈 야스지로 지음 / 마음산책 펴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1962년작 <꽁치의 맛>은 꽁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영화다. 오즈가 도호에서 <고하야가와가의 가을>(1961)을 촬영하던 중, “쇼치쿠가 빨리 다음 작품의 제목을 정해달라고 재촉해 어쩔 수 없이 정한 제목”이라는 게 노다 고고의 회상이다(노다 고고는 <만춘>(1949) 이후 오즈의 유작 <꽁치의 맛>에 이르기까지 오즈와 평생을 함께 작업한 시나리오 작가다.-편집자). “그저 꽁치를 화면에 보이지 말고 전체 느낌을 그런 식으로 하자는 의도로 지은” 제목이라는데, 이 사연을 알고 나니 책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또한 꽁치와 하등의 관계가 없지만 읽고 나면 꽁치가 막 생각나고… 믿거나 말거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가 시대극으로 할리우드와 유럽을 매혹하고 있을 때조차 오즈는 자신의 영화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급변하는 격랑의 시대에 오즈 영화의 인물들은 다다미에 가지런히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가족과 결혼과 장례를 천천히 논했다.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는 생전 오즈가 일본 영화잡지 <키네마준보>를 포함해 여러 매체나 책에 썼던 산문, 편지, 자신의 영화에 대한 평, 대표작 <동경 이야기>(1953) 감독용 각본을 모아 낸 책이다. 잘 알려진 대로 오즈는 1937년 9월 입대해 전쟁터인 중국 상하이에 상륙한 뒤 1939년 6월까지 중국 각지를 거듭 옮겨다니다가 일본으로 귀환했는데, 이 시기 노다 고고, 영화평론가 하즈미 쓰네오와 주고받은 귀중한 편지들과 종군일기가 이 책에 실렸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오즈는 친구들과 편지를 부지런히 주고받았다. 비슷한 시기에 입대한 야마나카 사다오 감독(<백만냥의 항아리>(1935)와 <인정 종이풍선>(1937) 연출)의 병사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져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내준 소설, <키네마준보>를 읽으며 적적한 밤을 달랬다. 이 편지 중 일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내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는데, 일본군 위안소 운영과 관련된 세세한 내용들도 기록돼 있다. 물론 오즈는 위안소의 존재를 불편해하고 싫어했던 것 같다. 또 오즈가 <오차즈케의 맛>(1952)부터 <가을 햇살>(1960)까지 자신의 영화에 평을 단 ‘오즈씨의 회고’(<키네마준보> 1960년 12월 증간호에 실렸다)는 오즈의 영화를 볼 때마다 참고하면 그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요건 몰랐지?_ <안녕하세요>(1959)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이야기다. 인간 무리라는 것은 시시한 얘기는 늘 주고받지만 막상 중요한 얘기를 나누려면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 영화를 찍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감독협회 같은 데 가서 이 스토리를 이야기하면 모두 재미있다고 하지만 막상 손을 대지 못해 “역시 내가 해보자”하고 결심해서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얼굴> 연상호 지음 / 세미콜론 펴냄 <돼지의 왕>(2011), <사이비>(2013), <서울역>(2016) 등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섬뜩하다. 위선적이고, 욕망이 필터를 지나 그대로 말이나 행동에 투사되기 때문이다. 전작이 그랬듯이 연상호 감독의 첫 그래픽노블 <얼굴> 속 인물들도 그렇다. 임영규는 시각장애라는 한계를 이겨내고 자그마한 도장가게를 캘리그래피 연구소로 키우는 데 성공한 전각 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 없이 아버지 임영규와 단둘이 살아온 임동환은 자신의 어머니로 추정되는 한 여성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경찰의 전화를 받는다. 그 시신은 신시가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한 야산에서 발견됐는데, 죽은 지 30년이 더 돼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함께 발견된 주민등록증을 통해 임동환의 어머니임이 밝혀질 수 있었다. 임동환은 다큐멘터리 PD 김수진과 함께 어머니의 죽음에 얽힌 사연을 추적하기로 한다. 어머니의 가족, 직장 동료를 만나 알게 된 진실은 임영규, 임동환 두 부자의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사람들에게 ‘못생긴 괴물’로 기억되는 어머니 정영희의 삶을 추적해 맞닥뜨린 풍경은 개발 광풍이 거세게 불었던 1970, 80년대 한국 사회와 그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한 가정이었다. 노동과 개발만을 미덕으로 삼던 그때 그 시절은 ‘내 얼굴이 어때서!’라고 대들 수 있는 용기도, 주변 사람들의 괴롭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인권도 허락되지 않았다. 임동환이 마주한 젊은 시절 어머니의 삶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못생겼다는 이유로 가족에게 버림받았고, (못생긴 얼굴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를 가진 아버지와 결혼해 밤낮으로 노동만 하다가 어떤 사건을 겪고 세상을 떠났다. 감독의 전작 애니메이션에서 익숙하게 봐왔던 그림체라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지만, <얼굴>은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통틀어 연상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그다운 색깔이 진하게 묻어난 작품이다. 대체 어머니 정영희의 정체가 무엇인지 긴장감을 가진 채 책장을 넘기다가 마지막 장에서 확인한 그의 맨 얼굴은 책을 덮은 뒤에도 가슴 한켠을 먹먹하게 한다. 그것이 이 이야기가 애니메이션으로도, 영화로도 만들어지길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요건 몰랐지?_ <얼굴>은 연상호 감독이 <돼지의 왕>과 <사이비>가 끝나자마자 떠올린 이야기다. <사이비> 다음 장편애니메이션으로 염두에 두었지만 <서울역>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후 연 감독은 <부산행>을 만들었고, 불안한 마음에 오래 묵혀뒀던 <얼굴> 시나리오를 들추게 됐다. <염력>의 프리 프로덕션이 끝나기 전에 <얼굴>을 세상에 내놓겠다고 결심했고, 그간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자유롭게 작업했다”는 게 그의 얘기.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 / 바다출판사 펴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인 시절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텔레비전용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연출 경력을 시작했다. 거장의 신인 시절 대단한 무용담이라도 있을 것 같지만 정반대다. 그의 연출 데뷔작 <지구 ZIG ZAG>(1989)는 대학생이 해외에 나가 홈스테이를 하면서 현지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내용의 방송 다큐멘터리다. 짧은 체류 기간 안에 방송에 내보낼 만한 사건을 연출해야 하는 상황이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고레에다 감독은 현지인이 제작진의 의도와 다른 반응을 보이거나 주인공 대학생이 제작진의 기대와 딴판이라 낭패를 당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이 실패기는 28살의 그에게 취재 대상에 대한 ‘공작(연출)’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던져주었는데, 이 질문은 훗날 그가 극영화를 만드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은 방송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신인 시절부터 영화 데뷔작 <환상의 빛>(1995), 칸국제영화제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아무도 모른다>(2004), 최근작 <태풍이 지나가고>(2016)까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생각한 것들을 한데 모은 책이다. 자서전보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가미된 음성 코멘터리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이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아무래도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2008),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등 그의 대표작에 얽힌 비화들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침팬지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출연한 아베 히로시를 보고 풍채는 근사하지만 멋이 없는 주인공 료타 역을 떠올렸고(<걸어도 걸어도>), 현장에서 좀처럼 엔지를 내지 않는 배두나에게 어째서 연기 엔지가 없는지 물었다가 “한국의 영화현장에서는 나 같은 신인이 엔지를 낼 여유가 없으니 거기서 단련되었다”는 대답을 듣고 감탄했다(<공기인형>). 기획부터 시나리오 작업, 캐스팅, 현장에서의 연기 디렉팅까지 각 과정에 대한 고민들이 무척이나 솔직하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건 그가 다큐멘터리를 찍던 시절이다. 그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1991)는 미나마타병 화해 소송의 국가쪽 책임자였던 한 관료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사건을 ‘피해자인 시민’과 ‘가해자인 국가(복지 행정)’라는 이분법적인 구도로 다루지 않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관료의 사연을 중심으로 사건을 입체적으로 다루었다. 카메라와 대상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니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바탕에는 저널리스트적 면모가 깔려 있고, 그런 면모가 어쩌면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인지도 모른다. 요건 몰랐지?_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걸어도 걸어도>에서 시도한 것 중 하나는 감독 조수 시스템이다. 기획부터 자료 리서치, 촬영, 편집, 마무리까지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을 감독 옆에서 경험하게 하고 감독에게 언제, 어떤 의견이든 말해도 좋은 역할이다. 조감독과는 다른 개념이다.

[영화와 건축] <1987> 남영동 대공분실과 도시계획으로 만들어진 근대 공공 공간

도시의 긴 역사를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공공 공간’이 확대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도시 지도를 그릴 때 건물을 검은색으로 칠하고 외부 공간은 흰색으로 남겨놓은 지도 표현방식을 ‘형상-배경 다이어그램’(figure-ground diagram)이라고 한다. 지도에서 건물들을 검은색으로 표시하면 길과 광장, 공원 같은 비어 있는 공간의 구조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런 방식의 지도 중에서도 1748년 조반니 바티스타 놀리가 그린 로마의 지도는 특별한데, 교회나 관공서같이 공공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건물들은 검은색 대신 내부 평면을 그려서, 공공 공간이 건물 내부로 확장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근대적인 도시계획으로 잘 알려진 오스만 남작의 파리 개조 계획은 1853년에서 1870년 사이에 파리 시내 2천채 정도의 건물을 철거하고 도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오스만은 마차도 들어가기 어려운 좁은 길로 이루어진 파리를 관리가 가능한 근대도시로 바꿔놓았다. 오스만 남작의 도시계획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오페라 대로(Avenue de l’Opera) 같은 도시를 관통하는 직선도로의 개설이다. 파리를 가로지르는 이 직선도로들은 주요 공공장소들과 유적, 기념비들을 도시 외부에 노출시킨다. 이 직선도로는 이동에 대한 기능적인 역할뿐 아니라 근대 공공 공간의 삶이 도시에 도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도시의 공간, 투명하거나 관리되거나 귀스타브 카유보트의 1877년 그림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은 우산을 쓰고 파리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속 남자들은 모두 신사복 위에 코트와 모자를 걸친 정장 차림이고, 여자들도 평상복이라기보다는 다소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공공 공간의 복장’을 하고 있다. 마치 사진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카유보트의 그림은 넓은 직선도로가 도시에 준 변화, 공공 공간에 대한 자각을 보여주고 있다. 공공 영역의 확대라는 측면으로 본다면 1902년은 건축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벨기에의 기술자 에밀 푸코가 큰 크기의 유리판을 산업적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해냈다. 투명한 유리창의 대량생산과 건물 입면의 사용은 외부의 공공 공간과 사적인 건물 내부로 구분되던 도시를 변화시켰다. 이전 시대의 건물에서 발견되는 작은 창문들이 석재를 쌓아서 만드는 구조방식에 더 기인하는 측면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큰 유리판의 생산은 큰 창문 디자인을 촉발했다. 투명한 유리의 건물 외벽 사용은, ‘투명성’이라고 정의될 수 있는 새로운 시대의 도시 모습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리의 사용을 통해서만 현대 도시의 ‘투명성’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과도한 의미 부여로 보인다.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공공 건물들의 탄생이다. 이전 시대의 도시에서 거리와 광장이 갖고 있던 역할이 아케이드, 백화점, 쇼핑센터, 경기장 등 새로운 종류의 공간들로 확대되었다. 심지어 개별적인 주택마저 ‘유리’로 만들어진 텔레비전에 의해서 변화된다. 이제 개인의 사적인 공간도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등록되고 기록되는 현대 도시의 삶은, 앞에서 말한 ‘놀리 지도’에 남아 있던 어두운 공간을 더욱더 사라지게 만들었다. 모든 것이 모두에게 노출되는 현대 도시는 역설적으로 다양한 ‘섬’을 만들어내고 있다. 경찰서, 사기업, 교도소, 정보기관 같은 공간이 그것이다. 이러한 시설들은 그 폐쇄성의 정도에 따라 다른 형태를 띠게 된다. 경찰서와 사기업이 신분 확인을 통해 출입이 허락되고, 교도소가 높은 담으로 도시로부터 격리된다면 정보 기관은 그 존재조차 사라진 유령 공간이다. 그리고 이렇게 ‘관리’되는 공간과 독재정권이 만날 때 그 안에서 쉽게 근대 이전의 어두운 공간들이 다시 나타나게 된다. 영화 속 공간의 인과관계 남영동 대공분실은 건축가 김수근의 작품이다. 현재는 7층으로 증축되었지만 원래의 설계에선 5층 건물이었다. 건물을 보게 되면 금방 낯선 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5층 창문이 지나치게 작다는 점이다. 다른 층과는 다르게 얇은 수직 창들이 5층 벽에 늘어서 있다. 검은색 벽돌을 외장재로 사용한 이 건물은 5층의 작은 창문들만 본다면 중세시대의 건축을 닮아 있다. 게다가 5층으로 올라가는 나선형 직통계단은 첨탑의 유배를 연상시킨다. 이 창문들의 좁은 폭이 자살을 방지하기 위해 설계됐다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취조실로 사용되는 5층을 외부세계로부터 격리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아니, 고문실로서 5층의 긴 역사는 좁은 창문이 정말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갖게 하기도 한다. 영화 <1987>(2017)은 남영동 5층 대공분실에서 시작해서 시청 앞 광장에서 끝이 난다. 남영동 밀실의 죽음은, 검찰, 부검병원, 교도소를 거쳐서 조금씩 광장으로 퍼져나왔다. 언제나처럼 공간을 컨트롤할 수는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컨트롤하는 데엔 실패한다. <1987>에는 두개의 피가 흐르고 있다. 박종철 시신을 덮은 천 위로 배어나오는 피와 이한열의 얼굴 위에 흘러내리는 피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은밀한 공간에서 흐르는 피는 천천히 배어나오고, 연세대 정문 앞의 피는 빠르게 아스팔트 위로 떨어진다. 본래의 속성에 따르면 자유롭게 열려 있어야 할 대학교 캠퍼스도 1987년에는 관리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학생을 분리해내기 위해 교문 앞에서 학생증을 검사하고, 집회하는 학생들을 캠퍼스 안에 가둬놓으려고 최루탄을 동원한다. 남영동 대공분실이 내부에서 관리하는 섬이라면, 대학 캠퍼스는 밖에서 관리하는 섬이다. <1987>의 마지막 장면, 시청 앞 ‘광장’ 집회는 엄밀하게 말하면 시청 앞 ‘도로’ 집회다. 당시의 시청 앞은 분수를 중앙에 둔 교통 광장이었다. 광장을 원하지 않는 시대에 도로를 점거해서 광장으로 만드는 것은 독재의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도로 위 아스팔트 위에 서 있는 경험은 사람들에게 지금과 다른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나요?”라고 말하던 연희(김태리)도 찾아간 마지막 집회 장면의 흥미로운 점은 광장 주변 건물들의 창문 모습이다. 열려 있는 사무실 창문들마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광장은 건물들에도 스며들었다. 그렇게 공공 공간은 정말로 건물 안까지 확장된다. 이번이 ‘영화와 건축’으로 쓰는 마지막 글이다. 지나고 보니, 영화와 건축을 연결하는 논리가 억지스러운 경우도 적지 않아서 창피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 영화와 건축에 대한 글을 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영화가 시간과 관련해서 인과관계나 개연성에 대해서 민감하지만, 공간의 인과관계엔 관심을 덜 기울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공간 구조가 허술한 영화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 칼럼이 영화가 공간을 다루는 데 관심을 좀더 갖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씨네21 추천도서 <오정희 컬렉션>

“오래전에 쓴 자신의 소설들을 읽는 일에는 어느 정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그것은 참 이상하고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오정희 작가의 문학 50년을 맞이해 출간된 전작 개정판 <오정희 컬렉션>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오정희는 위와 같이 썼다.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그의 글을 오랜만에 다시 읽는 국문과 출신 독자에게도 어느 만큼은 용기가 필요했다. 갓 대학에 입학한 10여년 전, 합평 시간이었다. 신입생다운 패기와 미문을 쓰고 싶은 욕망이 잔뜩 묻어나는 문체, 소설인지 싸이월드 일기장인지 모호한 여학생의 첫 단편소설을 한 남자 선배가 이렇게 평했다. “네가 오정희를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이건 오정희도 뭣도 아니야. 여류 소설 그만 보고 서사 강한 걸 많이 봐라.” 여성 작가들은 서사가 약한 자기고백적인 사소설을 많이 쓴다는 편견이 그 속에 있었다. 신입생이 19살, 그 선배 나이도 고작 스물대여섯이었으니 어린 문청들 사이에 있을 법한 흔해빠진 에피소드다. 아마도 그 남자 선배는 오정희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시 읽은 오정희의 소설에는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불안, 가지지 못한 것만 탐하고 주어진 것은 버리고 싶은 인간의 부조리, 전후 빈곤 속에서 소외받은 아이들과 여성들의 삶이 겹겹으로 쌓아올려져 생생한 공간 속에 틈입하고 있었다. 이것이 강렬한 서사가 아니면 무엇이 서사인가. 그는 오정희를 오독했다. 한때 문학도였다면 오정희 이름 석자에 소환되는 풍경과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글을 쓰는, 혹은 글을 쓰고 싶은 이들은 죄다 그의 소설을 읽으며 자랐고 질투했고 결국 도달하지 못한 채로 쓰고 있다. 1968년 <완구점 여인>으로 등단한 오정희의 1970년대 소설을 묶은 <불의 강>, 그의 소설 중 가장 널리 읽힌 <유년의 뜰>과 <중국인 거리>가 수록된 작품집 <유년의 뜰>, 주로 중산층의 허위와 우울을 응시했던 80년대 후반의 작품집 <바람의 넋>, 주로 여성의 공허함을 그린 90년대작 <불꽃놀이>, 오정희의 첫 장편소설 <새>까지 총 5권이 실린 <오정희 컬렉션>은 이미 오정희 소설이 한권쯤 서가에 꽂힌 사람이라도 구비해야 할 소설집이다. 오독의 발견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끄자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졌다. 문을 막아선 아버지의 땅땅한 몸피와 검게 번들대는 가죽 잠바에 묻어온 쇳내 나는 찬 공기는 스산히 저무는 오후 늦은 점심상의 묵은 김치 냄새와 담배 냄새로 절어 있는 방 안 정경을 남루하게 가라앉히며 단번에 방을 가득 채웠다. 아무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 않았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꺼지는 것과 함께 문득 감지된 그 침묵은 돌연하고 이상스러웠다. 정지된 화면처럼 큰어머니는 입을 벌린 채, 큰아버지는 안경을 벗던 손짓 그대로 우리의 등 뒤로 불투명하게 흐르던 오후의 흐름 속에 잠시 붙박였다. (<새> 16쪽)

씨네21 추천도서 <다이스맨>

서른이 넘은 뒤 희열이라고 부를 만한 도전이 인생에서 사라진 것 같다고 느끼는 한 남자가 있다. 그 문제를 동료(정신과의사)들에게 말했더니, 다들 말하기를 육체가 쇠퇴하듯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단다. 문제는 자살 욕구가 있음을 깨달으면서부터다. “외국에 가도, 불륜을 저질러도 만날 똑같은 기분입니다. 돈을 벌어 쓰는 것도 그렇죠. 분석을 받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죄다 약에 취했거나, 절망에 빠졌거나, 만날 보던 얼굴들이고요. 제 일은 효과는 있지만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새로운 철학이라는 것도 결국 그게 그거고, 제가 자부심으로 삼았던 정신분석도 이 문제에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 그는 집의 창가에서 프로이트의 초상화를 보다가 주사위를 보고 생각한다. 그러고는 “주사위 윗면이 1이라면 알린을 강간하자”고 마음먹는다. 알린은 그와 함께 일하는 동료 정신과의사의 아내이자 그의 아내와도 절친한 사이다. 1은 강간, 다른 숫자는 침실. 그리고 주사위의 결과는 1. 여기서 결과에 놀라 움츠러들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며 다시는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탄생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주사위를 계속 던진다. 처음에는 섹스와 강간을 위해 주사위를 던진다. 그 와중에도 두 가지 원칙은 지키려 노력한다. 첫째, 내키지 않는 선택지는 포함시키지 않는다. 둘째, 언제나 다른 생각을 하거나 핑계를 대지 않고 주사위의 결정을 따른다. 즉, 자신이 하고 싶지만 통제를 벗어난 행동이라 저어될 때, 주사위라는 핑계를 만들어낸 셈이다. 하지만 질문은 점점 통제를 벗어나는 쪽으로 흐른다. 이제 그는 가족을 버리고 떠나거나 사람을 죽이는 문제에까지 주사위를 던진다. <다이스맨>은 1971년에 쓰인 소설. 저자 루크 라인하트는 대대로 고위 공직자를 배출한 명문가의 장남으로 영문학 강사로 일하며 뉴욕에서 아내와 살았다. 그가 갑자기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고 완성한 <다이스맨>은, 정신과 의사에게 강간살해의 경험을 욕설을 섞어 토로하는 내담자 이야기를 듣는 장면을 비롯해 남성이 할 법한 폭력적인 상상들로 가득하다. 이 소설은 <런던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컬트소설’로 꼽히기도 했다. TO YOU 독자들이여, 좋은 친구이자 나와 같은 어릿광대인 독자들이여, 나의 다정하고 하찮은 인간들이여, 그래, 여러분이 주사위맨이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들은 내가 여기서 묘사한 자아, 타버린 자아, 즉 주사위맨을 영혼 속에 영원히 담고 가야 하는 운명이다. 당신들은 다중인격이며 그중 하나가 나다. 나는 당신들 속에 영원히 가려움증을 유발할 벼룩 한 마리를 만들어놓았다. 아, 독자들이여, 내가 태어나게 하지 말아야 했다.(3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