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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황산벌> 이준익 감독

"거시기가 주인공이오" <황산벌>은 웃기되 개그 프로그램처럼 흘러가지 않고, 후반부의 비장미와 ‘반전’이라는 주제까지 절묘한 균형을 맞춰낸다. 지난 10년 동안 충무로의 성공한 제작자(<간첩 리철진><달마야 놀자> 등)였던 이준익(44) 씨네월드 대표는 “너무 생경하다는 이유로 제의하는 족족 감독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키드캅>(93) 이후 처음으로 덜컥 감독을 맡았다. 고사만 세번, “영화 찍다가 틈만 나면 부여 부소산성 삼충사에 가서 절을 했다”는 말처럼 그의 어깨엔 엄청난 짐이 놓여 있었다. 코미디 이미지가 강한 배우들이라 어려움이 있었겠다. 솔직히 오지명·박중훈씨에 비하면 이문식씨의 연기 톤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두 사람은 워낙 이미지들이 강하니까. 근데 대단하더라. 오지명씨는 간단하다. “이 장면 코미디야, 코미디 아니야” 물어보고, 어떤 연기든 해낸다. 박중훈씨는 초반에 딱 한번 다른 의견이 있어 밤새며 토론했다. 그러고 나선 일사천리였다. 자신이 승복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배우다. 영화가 상상력을 발휘한 건 두 장군보다 ‘거시기’였다. 계백과 김유신은 이미 역사 속 인물이기 때문에 비틀 순 있지만, 새로운 창출은 불가능했다. 거시기가 영화적 보편성을 이끌어갈 인물이다. 내러티브상 주인공인 셈이지. 사실 영화 끝에 ‘이 수많은 거시기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자막을 넣으려 했는데 너무 대놓고 가르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빼버렸다. 영화 후반부의 비장미에 당혹해 하는 반응도 있을 텐데…. 원래 영화 출발이 황산벌을 무대로 백제의 마지막 날을 그려보자는 거였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것을 증명하는 소재로 안성맞춤이었다. 역사가 소재일 때 상업성이 없다는 핸디캡 때문에 나온 아이디어가 사투리였다. 일종의 ‘변장’이지, 원래 우리 영화사 작품이 변장·위장술에 뛰어나지 않나.(웃음) 그래도 처음엔 솔직히 뒷부분을 어떻게 찍을지 계획이 없었다. 근데 영화 뒤에 나오는 김선아씨의 장면을 먼저 찍으며 감 잡았다. 이건 절규일 수밖에 없다, 전쟁터에 나가며 가족의 목을 베는 가장에게 아내는 절규한다. “전쟁이든, 나발이든 니가 뭔데 내 새끼 다 죽인다냐.” 그때 감을 잡으니 후반부 장면은 원래 생각보다 더 처절하게 찍어지더라. 그땐 상업이고 뭐고 계산 안 했다. 요즘 사람들에게 역사 회피주의가 있는 것 안다. 이 영화가 그걸 극복하는 데 조그만 계기가 된다면 정말 좋겠다. 글 김영희 기자, 사진 이정우 기자 woo@hani.co.kr

[영화비평릴레이] <스캔들> - 정성일 영화평론가

통하였느냐? 천만의 말씀, 감독은 그럴 용기가 없었다 연애와 사랑의 차이는 간단하다. 연애는 그것이 진심인 줄 알았는데 끝나고 나서야 진심인 척 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사랑은 그것이 진심인 척 했는데 끝나고 나서야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말은 18세기 프랑스 서간체 궁중연애소설의 대가 쇼데를로 드 라클라의 충고이다. 그 라클라가 1782년에 간행한 원작소설 ‘위험한 관계’를 대담무쌍하게 프랑스 궁중 사교계에서 18세기 조선 정조시대로 옮겨 유교사회에서 벌이는 사극으로 각색한 이재용의 세 번째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연애활극이다. 그러므로 같은 말을 이재용은 훨씬 간단하게 말할 것이다. 연애는 통한 줄 알았는데 끝나고 나니 통한 척 한 것이고, 사랑은 통한 척 했는데 끝나고 나니 정말 통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는 이쪽을 택하건 저쪽을 택하건 둘 다 ‘姦’(간)통한 것으로 여긴다. 사서삼경과 문중제례, 천주교와 ‘熱河日記’(열하일기), 사대부와 남아선호사상의 숨막힐 듯한 조선조의 무덤 같은 질서 속에서 자유연애에 눈을 뜬 요부 조씨부인(이미숙)과 바람둥이 사촌 조카 조원(배용준), 남편이 급사한 이후 9년째 정절을 지키면서 청승과부로 지내며 열녀문을 하사 받은 정절녀 숙부인(전도연), 그리고 본의 아니게 옆집 좌의정 막내아들 순진남과 새로 들인 숫처녀 소실이 얽히고 설키면서 위험한 내기가 시작된다. 바람둥이 조원이 정절녀 숙부인을 넘어뜨려야 한다. 물론 연애 시합을 구경하는 것은 흥미진진한 일이다. 적당한 음모와 음란한 대사들, 예의를 갖춘 척 하는 함정, 조선시대임이 분명한 데도 시침 뚝 떼고 흐르는 프랑스 궁정음악풍의 배경음악. 그러나 이 영화의 재미는 거기서 그냥 끝난다. 그건 이재용이 너무 시합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 명의 주인공은 그들 방식으로 모두 희생자들이다. 조씨 부인은 남존여비로 숨 죽여 지내야 하며, 조원은 사랑을 잃고 삶을 자포자기한다. 숙 부인은 사대부 가문의 정절을 위하여 과부로 지내야 한다. 그러므로 조씨 부인과 조원의 연애 내기는 사실상 조선시대의 질서에 대한 그들 방식의 저항이다. 그들의 한 마디, 그들의 행동 하나가 풍자이며 해학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숙부인을 넘어뜨리는 것이 조선조 시대의 가치를 굴복시키는 것이라는 음란한 저항이다. 그래서 숙부인을 따분한 조선조 시대의 앵무새로부터 인간의 목소리를 지닌 여자의 자리에로 인도하는 것이 이 내기의 실제적인 목표이다. 물론 처음에는 숙부인의 정절에 대한 고집만이 유일한 방해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을 제거하자마자 진정한 방해물이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조선조라는 그들 자신의 시대이다. 이 이야기는 그 역설을 이해해야 한다. 역설은 진정한 팜므 파탈은 숙부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녀는 시대정신의 블랙 홀이며, 시대의 자유인이었던 조원과 조씨 부인은 그들의 ‘작업’을 통해서 자발적으로 시대의 함정에 걸려들고 만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의 진수는 연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통한 척’ 한 줄 알았는데 정말 ‘통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벌어질 세상과의 싸움에 있다. 그들은 숙 부인과 통한 줄 알았는데, 결국은 조선조 이데올로기와 통한 것이다. 이재용은 그것을 간과한다. 또는 정말 조선조 순정 멜로드라마에 걸려 든 채 매달리는 사람은 이재용이다. 그러니 남은 길은 방법이 없다. 연애가 사랑이 될 때 추락하는 것은 조원과 조씨 부인만이 아니라 영화마저도 오갈 데 없이 순정에 빠진 채 감상에 넘쳐나면서 서둘러 끝을 낸다. 조원은 갑자기 (‘겨울연가’의) 준상이가 되어서 눈물을 글썽이며 사랑을 감추면서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천주교도였던 숙부인은 하느님의 뜻도 잊어버리고 스스로 ‘멋있게’ 자살한다. 그리고 조씨 부인은 속절없이 이 땅을 떠난다. 이재용의 영화가 언제나 그런 것처럼, 브라질로 떠나거나(<정사>), 알래스카로 떠난 것처럼(<순애보>), 여기서는 청나라로 떠난다. 이재용은 이 땅에서 어떻게 해서든 통해 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그 말의 뜻은 간단하다. <스캔들>은 ‘스캔들’을 일으킬 용기가 없는 것이다. 통하였느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 정성일/ 영화평론가

무섭고 섬뜩한 가족 호러,<아카시아>

■ Story 전원주택에서 살고 있는 도일(김진근)과 미숙(심혜진) 부부는 아이가 없다는 것말고는 남부러울 데가 없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아이를 입양하기로 한 두 사람은 보육원에서 여섯살난 진성(문우빈)이란 남자아이를 데려와 양자로 삼는다. 부부는 어두운 성격의 진성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려 노력하지만 둘 사이에 친자식이 생기면서 예전처럼 진성에 대해서만 마음을 쏟을 수 없게 된다. 도일 부부가 자신의 진짜 부모가 될 수 없음을 안 진성은 정원에 있는 큰 아카시아 나무를 엄마라 여기며 대화를 나눈다. 어느 날 진성이 사라진 뒤 앙상한 가지만 있던 아카시아 나무에 꽃이 피면서 가족들에게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 Review 아마도 어떤 관객은 2년 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된 싱가포르영화 <나무와 아이>(데이지 챈 감독)에서 죽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커다란 나무와 특별한 교감을 나눈 아홉살 소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아이처럼, 영화 속에서 아이들은, 특히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는 아이들은, 종종 보통 사람들이 소통의 대상이라고 생각지 않는 그런 존재와 대화를 나누곤 한다. <아카시아>의 여섯살난 소년 진성 역시 그런 아이다. 어느 상류층 가정에 입양되었다가 양부모들이 그만 친자를 갖게 된 바람에 새로 얻은 가족으로부터 배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 아이는 정원에 말없이 서 있는 아카시아 나무가 죽은 ‘진짜 엄마’라고 생각하고 그 나무하고만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비극은 아이와 나무 사이의 그 은밀한 소통이 방해받는 그때부터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다. 박기형 감독의 신작 <아카시아>는 굳이 장르 구분을 하자면 초자연적인 현상을 끌고들어온 호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영화는 진성의 아카시아 나무 주위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하면서 끔찍한 사건들이 우리의 주의를 모은다. 하지만 <아카시아>는 일반적인 종류의 호러영화, 즉 보는 이로 하여금 즉물적인 공포의 감정을 얻어내려고 기를 쓰는 유의 호러영화는 아니다. 아마도 이 점은 최근에 국내에서도 소개된 일본 호러영화 <주온>과 비교해보면 확실해질 것이다. <주온>이라는 영화의 관심사가 이런저런 영화적 테크닉을 동원해 온통 관객을 깜짝 놀라게 하고 그들에게 순간적인 두려움의 감정을 주입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면 <아카시아>는 그런 식의 화들짝 놀라게 하는 공포를 전달하는 데는 큰 관심이 없는 것 같다(물론 여기서도 몇몇 짧은 꿈 혹은 환상장면들에서 과장된 사운드 같은 것을 이용해 일종의 충격효과를 노리기도 한다). 그래서 <주온>이 제공했던 것과 같은 유의 공포 효과를 기대하는 관객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카시아>는 어쩌면 영 실망스런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하튼 <아카시아>는 무서운 영화이고 섬뜩한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이건 무엇보다도 이 영화가 우리 자신의, 혹은(이 말이 너무 직접적이라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면)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현대인들의 흉하거나 잔인한 초상을 꽤 날카롭게 그려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우리가 속한 가족(과 사회)이란 게 지극히 배타적인 연대감 위에 형성된 것은 아닌가, 하고 묻는다. 가족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가족의 작동원리 아래에서 비틀린 가족적 연대감이 형성되고 자연스레 ‘타인’에 대한 배제가 일어난다. 처음에 이해심 많고 자상한 사람들처럼 보였던 진성 가족은 결국 핏줄이 다른 진성을 집 밖으로 내몬다. 그런 진성의 처지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에서 친자식의 귀환과 함께 부모의 사랑을 잃게 되는 로봇 데이빗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가 않다. 그러나 그 둘의 공통된 처지는 집을 나가기 전까지이다. 집을 나선 뒤 모험의 여정을 벌이는 데이빗과 달리 진성은 말 그대로 ‘실종’된다. 그리고 <아카시아>의 카메라는 진성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때 그를 가족으로 맞아들였던 집안에 계속 머무르면서 그 가족이 서서히 파멸에 다가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노인들은 진성과 특별한 교분을 가진 아카시아 나무의 저주 아래 놓이고 예전에 서로 사랑했던 도일과 미숙 부부는 서로 적대적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는 관계로 돌입한다. 이 파멸의 홈드라마에는 아무래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 어느 정도 담겨 있기에 이걸 보는 데에는 공포의 감정이 동반되지 않을 수가 없다. 한편으로 여기에는 박해자 진성의 자취가 남아 있고 묻어 있기에 이 홈드라마는 슬픈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올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아카시아>는 분명 영화팬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자질을 갖춘 영화다. 그건 우선 이 영화가 박기형 감독의 장편데뷔작 <여고괴담>과 마찬가지로 장르의 틀 안에다가 사회적인 발언을 녹여내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같은 일을 좀더 세련되고 번듯한 스타일과 외양으로 꾸며낼 줄 아는 영화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영화에서 특히 돋보이는 스타일 가운데 하나는 긴 호흡으로 카메라를 이동해가면서 하나의 테이크를 만드는 방식인데, 이런 방식을 통해 영화는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관계’의 문제를 다루는 것임을 알려주기도 하고 아니면 다른 경우에는 이것이 희생자 혹은 그에 동조하는 자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붉은 실이나 아카시아 나무 등을 이용해 만들어낸 초자연적인 비주얼 역시 매력적이다. 한편으로 <아카시아>는 내러티브상의 무언가 미약함 혹은 미진함이 느껴져 아쉬움을 남기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무리 이것이 비주얼과 분위기를 중시하는 영화라고 해도 분명 이야기를 전달하는 대중영화임을 고려한다면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구축에서의 밀도가 좀더 강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특히 심혜진이 연기한 미숙 캐릭터는 진성에 대한 끌림과 반발을 함께 갖고 있는 인물이지만 그런 입체적인 면이 잘 살아 있지 않은 편이다. 그리고 이건 아마도 스토리가 좀더 꽉 짜일 수 있는 가능성을 약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있을 것이다. 번듯한 비주얼 만들기에 들인 노고를 내러티브 구축에 조금 더 나눠주는 그런 영화를 보기가 참 쉽지 않다. ::가족호러가족이란 유리그릇 같은 것 <장화, 홍련> <아카시아>, 올해 주목받은 이 세편의 공포영화는 공포의 대상을 가족에서 구한 영화다. 가족을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여기는 이런 영화가 한꺼번에 쏟아진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유교적 전통에 입각한 가족이데올로기가 파괴되는 과정을 암시하는 흥미로운 사례처럼 보인다. 물론 이런 유의 영화가 한국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흔히 ‘가족호러’라 불리는 이 장르는 60년대부터 미국 호러영화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해왔다. 히치콕의 <싸이코>는 초기 가족호러에서 가장 대표적인 영화. 어머니는 아들을 유혹하는 여자들을 참지 못하는 질투의 화신, 금욕의 감시자로 등장한다. 히치콕의 무서운 어머니는 <캐리>나 로 이어진다. 어머니에 이어 공포의 대상으로 떠오른 건 아이들이었다. <엑소시스트>와 <오멘>에서 아이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거나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한다. 가족 구성원 일부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비정상적 상태로 등장하는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도 70년대 미국 가족호러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영화에 나오는 도살자 가족은 베트남전의 악몽에 시달리는 미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80년대 가족호러는 <할로윈> <나이트메어> 등 시리즈물로 나온 슬래셔영화들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할로윈>의 마이클은 부모를 살해한 아이로 등장하며 <나이트메어>의 프레디는 부모 세대에 대한 복수를 아이들에게 자행했다. 한편 최근 일본의 호러영화들은 미국영화보다 한국의 가족호러에 훨씬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로 보인다. 나카다 히데오의 <링> 시리즈와 <검은 물 밑에서>, 미이케 다카시의 <오디션> 등은 현대 도시를 살아가는 핵가족이 처한 위험과 불안을 보여준다. 오늘날 가족의 평화는 유리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것이 되고 있다.

60년대 로맨틱코미디의 `이미테이션`,<다운 위드 러브>

■ Story 바바라 노박(르네 젤위거)은 여성의 행복을 위한 지침서 <다운 위드 러브>(사랑은 사절)의 저자.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사랑에 얽매이지 않고 섹스를 즐기며 직업적 성공을 최대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남성지 <노>(KNOW)의 간판 기자이자 희대의 바람둥이 캐처 블락(이완 맥그리거)은 바바라가 촌뜨기 노처녀일 거라고 짐작하고 인터뷰를 펑크낸다. 그러나 베스트셀러 작가로 스타덤에 오른 바바라는 캐처를 공개 비난하고, 캐처는 반격에 나선다. 순진한 우주비행사로 가장해 그녀를 유혹한 뒤 ‘현대 여성의 우상’이 사랑에 휘둘리는 모습을 기사로 폭로하겠다는 계략이다. 한편 바바라의 열혈 담당 편집자 비키(사라 폴슨)와 <노>의 상속자인 소심남 피터(데이비드 하이드 피어스)의 데이트 게임도 고비를 맞는다. ■ Review “대체 언제까지 전화만 할 거냐?” <묻지마 패밀리>의 명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도리스 데이와 록 허드슨 커플을 마스코트 삼는 1960년대 초의 스크루볼코미디는 그렇게 요약할 수 있다. <필로우 토크> <꽃은 보내지 마세요> 같은 히트작으로 대표되는 섹스 혁명 이전의 청결한 로맨스들 속에서 베드신은 끝도 없이 뒤로 미루어진다. 대신 섹스를 에둘러 가리키는 암시와 대체물이 연신 난무한다. 바비 인형한테 뺏은 것 같은 옷가지를 걸치고 파스텔 색조로 꾸민 침실에서 아침을 맞는 주연 남녀는, 애무 대신 전화로 설전을 주고받으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다운 위드 러브>는 이처럼 깐깐한 범절을 준수하며 만들어진 60년대 와이드스크린 로맨틱코미디의 작정한 ‘이미테이션’이다. <파 프롬 헤븐>이 1950년대 더글러스 서크의 멜로드라마를 놓고 시도한 복제 작업에 <다운 위드 러브>는 원본을 바꿔 도전한 셈이다. <다운 위드 러브>가 계승한 청교도적 모럴은 성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스타일 복제에 임하는 페이튼 리드 감독과 제작진의 노동윤리 역시 청교도적이다. ‘이십세기 폭스가 제공하는 시네마스코프영화’라는 고색창연한 로고가 막을 열면 50년대의 타이틀 디자이너 솔 바스풍을 본뜬 오프닝 자막 시퀀스가 뒤를 따르고, 이어 테크니컬러로 채색된 뉴욕 시가지로 카메라가 미끄러진다. 화면은 전화벨이 울리기 무섭게 반으로 분할되고, 배우들이 택시에 오르면 뒷창에는 거리 풍경이 따로 영사된다. <다운 위드 러브>의 연인 바바라와 캐처는 그러니까 수십년 전 그려진 게임의 말판 위에서 움직이는 장기말이다. 어차피 전형을 복원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뻔뻔한 강수를 두는 편이 낫다. 바바라는 ‘사랑은 여성의 적’이라는 슬로건으로 현대 여성의 교주로 떠오른 스타 작가이고, 캐처는 007과 돈 주안의 우성 교배로 태어난 듯한 사나이다. 이들은 글자 그대로 당대 최고 바람둥이와 당대 최고 페미니스트의 명예를 걸고 허허실실의 줄다리기를 벌인다. 시트콤 출신의 작가 이브 알러트와 데니스 드레이크가 쓴 시나리오는 두 남녀에게 숨가쁘게 전략과 전술을 공급한다. 애초 사랑보다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기획된 사랑영화 <다운 위드 러브>는 어쩔 수 없이 많은 영화의 추억을 일깨운다. 시대적 정서를 환기시키는 대목에서는 <캐치 미 이프 유 캔>이, 록 허드슨과 도리스 데이가 봤다면 기절할 대담한 자세로 전화 통화를 섹스 절차에 대응시킨 시퀀스에서는 <오스틴 파워>가 얼쩡거린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운 위드 러브>는 한없이 뮤지컬에 가까운 로맨틱코미디다. <시카고>와 <물랑루즈>를 경유한 배우 르네 젤위거와 이완 맥그리거는 모든 장면에 스텝을 밟으며 ‘입장’하는데, 언제고 책상 위로 뛰어올라 ‘달타령’이나 세레나데라도 한 곡조 뽑을 것 같아 내내 조마조마하다. 끝까지 미뤄지는 그들의 노래와 춤은, 유예되었던 로맨스와 나란히 최후의 순간 꽃을 피운다. <다운 위드 러브>의 영화적 장점은 곧 최대의 약점이기도 하다. 두 남녀의 연애 소동은 가면무도회에 불과하다. 사랑을 회의하는 바바라가 캐처의 구애 공세에서 느낄 법한 불안이나 진정한 감정이 생성된 경위에 대해 영화는 그다지 정성껏 설득하지 않는다. 요즘 관객의 눈높이로 남녀의 위치를 바꿔 반전을 시도한 3막은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지만, <어댑테이션>의 형식주의적 막판 뒤집기가 그랬듯 건조한 요식 행위로 느껴지는 것까지 막을 도리는 없다. 오히려 이야기로서 더 매력적인 쪽은 데이비드 하이드 피어스와 사라 폴슨이 호연한 ‘방자와 향단이’ 커플의 연애담. “당신이 동성애자라고 우리가 결혼 못할 이유는 없잖아요?”를 외치는 비키와 “나, 그녀에게 이용당한 기분이야”라고 투정부리는 소심남 피터의 캐릭터는 또 다른 로맨틱코미디영화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어쩌랴. 감독은 ‘사랑은 사절’이라고 제목부터 선언한 것을. 극중 여자들이 진짜 사랑을 나누는 대신 베어무는 초콜릿의 달콤한 맛, 그것이 <다운 위드 러브>의 맛이다.

내숭은 몰라요,코미디는 알아요, <위대한 유산>의 김선아

체크인 배우 김선아에겐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어 보인다. 인터뷰 당일날 아침까지 촬영현장에 있다 오느라 잠은커녕 화장할 시간도 없었다는 사람이 두뺨에 예쁜 생기만 얹고 있다. 머리를 질끈 동여맨 이 키 큰 여배우가 대뜸 묻는다. “<황산벌> 보셨어요?” 이 질문은 분명 <위대한 유산>과 엇비슷한 개봉일을 염두에 두고 업계 동태 파악용으로 물은 것이리라. “저 이상하게 나오지 않았어요?” 그제야 생각났다. 김선아가 계백 장군의 아내로 출연했던 사실. 덜그럭대는 갑옷소리 틈으로 새나왔던 젊은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 우직한 계백 장군이 최후가 될지도 모를 결전을 앞두고 처자식 눈앞에서 독하게 칼을 휘두른다. 그러나 더 독한 쪽은 그의 부인이었다. 야속한 칼날 끝 살벌한 바람을 콧방귀 한방으로 날려버리고 악에 받친 여인네가 곧은 소릴 내지른다. 죽일 테면 죽여보랑께! 니가 뭔데 내 자식을 죽이네 마네 하는 것이여! # 첫인상의 현관 김선아의 얼굴에선 가파르지 않게 갸름한 턱선과 윤기어린 짱구 이마가 인상적이었다. <예스터데이>와 <몽정기>를 떠올리면 쉽겠지만 사실 씩씩하고 코믹한 김선아의 이미지는 영화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단 몇편의 CF에서 짧은 시간 극대화되었다고 봐야 옳다. 물론 본인 성격도 여기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김선아는 이른바 ‘예쁜 척’을 굉장히 꺼린다. <몽정기> 때도 촬영 내내 걱정스러웠던 건 “내가 지금 너무 예쁜 척하는 게 아닌가, 너무 예뻐 보이려고 하는 게 아닌가”였다고 한다. 세련된 의상에 걸맞게 고운 분칠과 머리단장까지 하고 나서도 그는 틈만 나면 장난을 치려 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고단수의 예쁜 척’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주목받는 것도 이 대목이 아닐까 싶다. “이번 영화(<위대한 유산>)도 사실 코미디를 한 건 아니에요. 오히려 상황은 되게 사실적이거든요. 너무 리얼하고 진지하다보니까 오히려 재미있어지는 거죠. 트레일러에 나왔던 웃긴 표정들은- 사실 저도 왜 그런 표정이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하다보니까 그런 표정이 나온 건데, 보신 분들이 그러더라구요. 너 평소 표정 그대로 나왔다. 그런데 정말 이상해요. <몽정기>에서 ‘유리’는 되게 얌전하고 예뻐 보이려는 역할이잖아요. 근데 그때도 평소의 나 같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도 그런 얘길 듣고… 그래서 저도 제 자신을 잘 모르겠어요. 전 사람이 가장 편해 보일 때가 가장 예뻐 보일 때라고 생각하거든요. 이번 영화가 저에게 정말 좋았던 이유도 제가 예뻐 보이려고 노력한 적이 없어서 그런 것 같아요.” # 환한 테라스 김선아가 <위대한 유산>에 출연하고 싶어했었다는 건 이미 공개된 얘기다. 캐스팅이 확정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김선아는 러닝머신 위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고 고백했다. 지금 그는 자신의 선택이 맞았다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미친 듯이 조르고 쫓아다녔던 게 틀리지 않았다”는 느낌. “평생 동안 몇번 찾아오지 않을 지독한 바람” 중에 하나를 이룬 것이다. 오상훈 감독은 작품에 들어가기 전 김선아에게 “이번에 너의 유작을 만들어주겠다”는 말을 건넸다고 한다. 이번 영화가 그의 “대표작”이 되게 하겠다는 의미였다. 이 과감한 표현에 대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기자가 대꾸할 말은 없었지만 김선아는 “자만일지 몰라도”란 전제를 반복하며 영화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임창정씨랑 호흡이 너무 잘 맞았어요. 사실 긴장 많이 하고 있었거든요. 사람들이 그러는 거예요. 그 사람 여우다, 연기 너무 잘한다, 여차하면 네가 밀릴 거다. 그런데 막상 같이 해보니까 날 풀어주려고 애쓰더라고요. 그런 게 오히려 프로다운 거겠죠. 연기에 대해서 충고도 많이 해주었는데, 처음엔 그게 그냥 인사치레려니 했거든요. 그런데 끝까지 가더라고요.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 유산(遺産)이 놓인 거실 여름 내내 그는 <위대한 유산>과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의 두 촬영장을 분주히 오갔다. 육체적인 피로는 당연했다. “그래도 두 캐릭터의 대비가 확실하니까 저로선 다행이었죠. 연기하기가 훨씬 수월했거든요. <위대한 유산>의 미영이는 욕심도 있고 야무지고 적극적이에요. 남들한테 절대 지지 않으려고 하고.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의 민경이는 낭만적인 사랑을 기다리는 소녀 같은 여자고, 소극적이에요. 한마디로 (탁자 위에 있던) 이 휴지박스를 칠 때 민경이가 손가락 하나로 이렇게 툭 건드린다면 미영이는 이 손으로 그냥 팍 쳐버리는 거예요.” 2년간 세편, 정확히는 네편의 영화를 해오면서 김선아는 빠르게 스타덤 자리를 얻었다. 두 현장을 동시에 오갔다는 것이 단적인 증거자료일 것이다. 무엇보다 본인 스스로 기분좋게 부풀어 있는 심정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봐주시면 감사하죠. 예전엔 만날 퇴짜맞았던 내가…. 그땐 혀가 짧아서 발음도 안 되고 국어도 못한다고 말이 많았거든요. 우리 감독님도 처음에 저 캐스팅할 때 그것 때문에 반대하셨대요. 그런데 이렇게 잘됐으니까 감사해요. 그 다음에 뭘 할지 고민할 수 있는 이 시기가 행복한 것 같아요.” 체크아웃 김선아는 쉽게 눌리지 않는 쾌활함과 밝음으로 사는 사람이 틀림없다. 지금까지도 그 한면에 모든 조명이 집중돼왔다. 본인도 “지금 같은 연기가 내가 가장 편할 수 있고 가장 잘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게다가 요즘 많이 행복하다니, 재뿌리는 독촉은 삼가야 할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가 언제까지고 CF의 코믹한 ‘피자걸’에만 머물 거란 생각은 접어두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세계적인 골퍼라고 하는 타이거 우즈한테도 선생님이 있는 것처럼 사람은 꾸준히 배워야 하는 것 같다”는 믿음을 성실하게 지킨다면 그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기다림도 좀더 짧아지려나. 카메라 앞에서 정신없이 장난기를 휘두르던 그가 어느 순간 반항기 짙은 소년처럼 입술을 깨물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때, 지금껏 보지 못했던 김선아의 또 다른 얼굴이 보였다.

제 8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1]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9일 동안의 여정을 끝마쳤다. 10월10일 박기형 감독의 <아카시아> 상영을 마지막으로 스크린을 거둔 이번 영화제는 예년과 달리 한달가량 앞당겨 치러졌다. 높고 화창한 가을 날씨의 엄호 아래 벌어진 이번 축제는 ‘해운대 원년’이라는 점에 시선이 모아졌다. 남포동에 자리했던 영화제 사무국이 수영만 요트경기장으로 자리를 옮겨 게스트들의 행렬을 이끌었고, 해운대쪽 상영관도 10개관으로 늘어나 관객의 발길을 유혹했다. <인디펜던트>에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 로저 클락은 “지난해와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해운대가 새로운 거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아름다운 해변과 밤마다 벌어지는 파티는 게스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는 말로 해변의 영화제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3년 만에 부활된 야외상영 큰 호응 날로 커져가는 부산영화제의 규모는 수치로도 입증된다. 영화제쪽이 밝힌 바에 따르면, 올해 공식 게스트 규모만 5329명. 지난해 5318명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올해 영화제가 초청한 게스트 규정이 한층 강화됐음을 염두에 둔다면 실제로 영화제를 찾은 이들은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61개국에서 243편이 출품된 이번 영화제는 전체 좌석점유율이 83%로 지난해에 비해 2.3% 소폭 상승했다. 한편, 3년 만에 부활된 야외상영은 좋은 반응을 얻었다. 쾌청한 날씨가 계속되면서 개막작이었던 <도플갱어>를 시작으로 <굿바이 레닌!> <웨일 라이더> <자토이치> 등을 보기 위해 관객은 4500석 규모의 야외상영관을 연일 메웠다. 치열한 각축을 벌인 각 부문의 수상자도 결정됐다. 아시아 최고 신인감독상에 해당하는 뉴커런츠상은 <광산에 내리는 진눈깨비>를 연출한 이란 감독 알리레자 아미니와 이번에는 배우가 아닌 감독으로 <불견>을 들고 영화제를 찾은 이강생에게 돌아갔다. “영상미의 새로움과 영화의 깊이감 그리고 휴머니즘을 기준으로 선정했다”고 심사위원들은 전했다. 홍기선 감독의 <선택>과 탈레반 정권 붕괴 이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장편영화 <오사마>는 PSB 인기상을 나란히 받는 데 그쳤다(<오사마>는 뉴커런츠상에 특별언급됐다). 국제영화평론가협회가 수여하는 국제비평가상(FIPRESCI Prize)은 이란 감독 파르비즈 샤흐바지의 <긴 한숨>이, 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NETPAC)은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각각 차지했다. 인권영화 프로젝트 <여섯개의 시선>은 영화진흥기구상에 특별언급됐다. 단편영화에 주어지는 선재펀드상은 박정선 감독의 <춘희>와 손광주 감독의 <제3언어>가 공동으로 수상했으며 다큐멘터리에 주어지는 운파펀드상은 이호섭 감독의 <그리고 그 후>가 차지했다. 다큐멘터리 제작활성화를 위해 올해 처음 마련된 영산펀드상은 최하동하 감독의 <택시 블루스>에 돌아갔다. 해외 게스트 한국영화 열기 여전 수상결과와 상관없이 한국영화에 대한 해외 게스트들의 관심은 올해도 식지 않았다. 영화제쪽에서 해외 게스트를 위한 추가상영을 잡았을 정도다. 시드니 아시아태평양영화제페스티벌 디렉터인 폴 드 칼발로는 <스캔들…>을 첫손에 꼽으며 “한국영화의 약진이 어느 해보다 눈에 띈다. 영화제에 출품된 한국영화들의 수준은 이제 세계 언론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평했다. 또 내년에 열리는 베를린영화제에서 <스캔들…> <장화, 홍련> 등은 상영이 확정됐으며, 정창화 감독 회고전도 내년 파리영화제 상영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비즈니스를 위한 미팅도 잦았다. “폐막 이후에도 미팅을 갖을 정도였다”는 한 관계자의 말처럼, 올해 부산프로모션플랜(PPP) 행사 또한 성황을 이뤘다. 10월5일부터 7일까지 열렸던 제6회 PPP에는 총 30개국 300여개 회사에서 1100여명의 게스트가 참석해 공식 미팅만 500여건이 성사됐다. 또한 18편의 공식 프로젝트와 함께 신인감독들의 NDIF 프로젝트 5편, HAF in PPP 5편 등도 선정됐다. “아시아영화는 부산에서”라는 기치 아래 아시아필름마켓인 인더스트리센터도 쾌조의 스타트를 보였다. 시네마서비스, 시네클릭 아시아, 쇼박스 등 국내 10개 세일즈 회사를 비롯 차이나 스타, 미디어 아시아, 포르티시모 필름즈 등 국내외 22개 회사들이 비즈니스를 벌였다. PPP 폐막일에는 총 7개 부문의 프로젝트에 대한 시상도 있었는데, 부산상은 구로사와 기요시의 <로프트>, 후버트 발스 펀드상은 아딧야 아사랏의 <상류사회>, 코닥상은 허진호 감독의 <행복>(가제), MBC 무비스상은 이명세의 <크로싱>, BFC상은 헬렌 리의 <벤츄라>, 무랄리 나이르의 <버진 카우>는 예테보리영화제 필름펀드상을 수상했다. NDIF 프로젝트 중에는 정소연의 <엠브리오>가 아이픽처스상을 수상했다. PPP · BIFCOIM 더블진행으로 시너지 효과 올해 산업관련 행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부산국제필름커미션·영화산업박람회(BIFCOM)가 파라다이스호텔에 PPP와 한집 살림을 차리면서 “상호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봤다”는 점이다. 실제로 14개국 56개팀이 참가해서 300여회의 비즈니스 미팅이 이뤄졌으며 5천여명의 인파가 전시장을 찾았다. 이는 지난해에 비해 70%나 증가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게스트들은 아이디어와 자본이 만나는 장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프로덕션 전반을 아우르는 ‘원 스톱 멀티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 후한 평가를 줬다. 성과만큼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어렵사리 상영이 결정된 북한영화 특별전의 경우 기대에 비해 호응이 크지 않았다. 영화제쪽은 “1999년부터 추진해온 일이라며 이번 특별전이 남북영화 교류의 물꼬를 텄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쳤지만, 이는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10월7일부터 일반상영이 시작됐지만 평균 좌석점유율은 60%에 이르지 못했다. 게스트에게만 입장을 허락한 제한상영 2편 또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상영관을 두고서는 찬사와 비판이 오갔다. 해외 게스트들 중엔 “해운대쪽 상영관의 관람조건이 좋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실제로 408회의 상영이 진행되는 동안 해마다 2∼3건씩 터지던 대형 영사사고도 없었다. 그러나 해운대 메가박스가 10개관으로 상영관을 늘렸으나 인기작들이 좌석 수가 배로 많은 남포동(대영시네마 3개관, 부산극장 3개관)에 대거 배치되는 바람에 해운대-남포동간 교통이 불편하다는 해묵은 불만은 더욱 불거졌다. 좌석 수가 적은 해운대에 대거 몰려 있는 게스트들의 경우 티켓을 구하기가 유난히 힘든 해라는 불평이 터져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 라이프치히 시네마테크 매니저인 마크 지그문트는 “해운대에서 남포동으로 이동하려면 무려 1시간 이상 걸리는데다 올해는 좌석을 구하기가 더욱 어렵다”며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영화제가 관객들과 게스트들의 이러한 불평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전용관을 마련하기까지 이같은 진통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게 영화제쪽을 힘들게 만든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순 없는 일. 부산영화제는 내년부터 상영관을 조정하고 재정비할 계획을 갖고 있다. 남포동 부산극장의 경우, 폐쇄가 결정된 이상 해운대 중심으로 상영관을 추가 마련한다는 것. 이를 위해 영화제쪽은 해운대 일대 극장들을 리모델링하거나 지근에 새로 들어서는 멀티플렉스와 협의를 진행해 500석 규모의 대형 스크린을 2개 이상 확보하기 위해 나설 것으로 보인다. 부산영화제 이용관 부위원장은 “내년에도 10월 초에 영화제를 개최할 것”이라면서 “가설극장을 세우는 등의 방법도 고려하는 등 모든 가능한 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해 전체 예산은 37억5천만원으로 현재 영화제가 추정키로 3억∼5억원의 흑자가 예상된다. 관객의 지지와 기업들의 후원을 버팀목으로 영화제를 치른 결과다. 하지만 기업들의 후원은 경제사정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다. 스폰서에만 의존하기에 부산영화제는 규모나 위상이 기대 이상으로 너무 커버렸다. 전용관 마련 등 안정적인 영화제 운영을 위해 지속적인 국고지원 약속이 필요한 시점이다. 관객의 열정과 스탭들의 열의만으로 8년을 버텨온 강행군이 이젠 좀 안쓰럽다. 부산의 말, 말, 말 “국민배우라… 엊그젠가 이승엽 선수가 56호 낸 기념으로 특별프로그램을 준비하는 쪽에서 곁다리로 ‘국민’자가 들어간다고 나에게도 인터뷰를 청해왔다. 조용필씨도 나간다더라.” (웃음) - 안성기, 아쿠쇼 고지와의 오픈토크에서 ‘국민배우’라는 호칭에 대해 묻자 “상상력의 시각화는 돈이 아니에요.” - NDIF 프리젠테이션에 <황소부랄과 하나님>으로 참여한 ‘톡톡 튀는’신인감독 김중, 판타지를 만든다고 하면 무턱대고 고예산이라고 기피하는 제작자들에게 “전체 인구가 6만명이 조금 넘는다. 인구가 적으니까 영화 만드는 사람이 적을 수밖에.” (웃음) - <여행자와 마법사>를 만든 부탄의 고승 키엔체 노부르, 부탄에 영화인력이 적은 이유에 대해 “제가 폐가 많았습니다. 이런 패가망신이 없도록 조심하겠습니다.” - 박중훈(개막식 사회자), 개막식 진행 도중 개막작인 <도플갱어>를 폐막작으로 소개한 것에 대해 “출연료를 두 사람 몫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제작자는 한 사람 몫만 주더라.” - 야쿠쇼 고지(<도플갱어> 주연), 개막작 기자회견 도중 <도플갱어>에서 하야사키 역할과 그의 분신 역할을 동시에 맡은 느낌을 묻는 질문에 대해 “액션영화이다 보니 여자를 어디에 집어넣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 프라차야 핀카엡(<옹박> 감독), <옹박>에는 왜 멜로 코드가 없냐는 질문에 대해 “카메라는 눈이고, 그 눈은 곧 마음으로부터 온다.” - 이란 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 영화의 역할을 묻는 질문에 “나는 원시적인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 캐나다 감독 가이 매딘, 꿈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영화를 만든다고 설명하면서 “내 나이는 48살이다. 일본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지만, 한국에 오면 나이 많은 감독일 것 같다.”-일본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한국의 영화인들이 젊은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사실 내가 그 극중인물이라면 이강생 같은 남자와는 안 사귄다.” - <로빈슨 표류기>로 한국 찾은 양귀매, <로빈슨 표류기>의 쳰셍치가 <구멍>의 이강생보다 더 잘생겼지 않냐는 질문에 한사코 농담이라고 발뺌하면서

<아카시아>로 5년 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온 배우 심혜진

그녀가 돌아왔다, 라고 말한다면, 스크린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오만을 범하는 일일 것이다. 드라마와 방송 활동에 주력했던 배우 심혜진의 새 영화가 개봉한다. <실락원>(1998)이후 5년 만의 신작이고, 한국영화 르네상스와 더불어 영화(榮華)를 누렸던 ‘1990년대 스크린 스타’의 호칭이 과거시제가 된 지도 3년이 지났다. 심혜진과 영화를 붉고 질긴 실로 다시 이어준 작품은 박기형 감독의 <아카시아>. 박기형 감독에게는 심혜진이라는 배우를 적절한 예우로 스크린에 다시 초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의욕의 촉매가 됐고, 심혜진에게는 ‘미숙’이라는 고요한 극중 인물과 “당신 아니면 안 된다”는 감독의 요란한 확신이 거절할 수 없는 초대가 되었다. 심혜진은 여의도 약속장소에 청바지 차림으로 들어섰다. 시간은 그녀의 유명한 볼우물에 찰랑이던 청량한 물기를 거두어갔지만 대신 갸름한 눈과 입술에 굳센 기운을 불어넣어주었다. 어디 아주 먼 곳에라도 가는 듯한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는, 달콤한 케이크를 잔뜩 주문하고는 눈으로 물었다. “자, 뭐가 궁금하죠?” 오랜만에 집중적으로 인터뷰가 이어지는 나날이겠네요. 너무 피곤해요. 아마 배우나 연예인들은 인터뷰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을걸요? 인터뷰해서 별로 좋은 결과가 없으니까. 사람 만나는 건 좋아하지만 똑같은 이야기를 짧은 기간 동안 여러 차례 반복하려니 조금 체력이 달리네요. 나오는 질문도 비슷하죠? <아카시아>가 부산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기분이 어떠냐, 오랜만에 영화하니 어떠냐가 제일 많죠. 인터뷰하러 오면서 <그들도 우리처럼>(1990)에서 심혜진씨 모습이 문득 떠올랐어요. 탄광촌 다방 아가씨 영숙이가 얼굴이 안 보일 때까지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내 이름은 영숙이가 아니라 이금란이에요’ 하던 장면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었어요. 요즘 전지현씨를 보면, 그맘때 심혜진씨가 비슷한 케이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일부러 옛날을 회상하지는 않는데… 얼마 전 <세상 밖으로>를 오랜만에 봤는데, 내가 지금 전지현씨만큼 머리가 길더라고요. 나, 내 머리가 그렇게 길었는지 잊고 있었어요. 참, 이상하죠? 긴 머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이었더라고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란 별로 특별하진 않구나 싶었어. 궁금한 것은 <초록물고기> 이후의 일이에요. <꽃을 든 남자>(1997), <마리아와 여인숙>(1997), <생과부 위자료 청구소송>(1998), <실락원>(1998)의 시기인데, 이 영화들이 남긴 경험을 어떻게 자평하나요? <초록물고기>까지 정말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품을 많이 했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운이 다할 때가 있잖아? 작품운이나 선별능력이 없어질 수도 있고. 시나리오는 내가 직접 봤어요. 하지만 흥행이 안 돼서 좋지 않는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건 선입견이기도 해요. <꽃을 든 남자>나 <마리아와 여인숙>이나 두 감독이 모두 TV드라마에서 영화로 전화한 분들이야 경험 미숙도 있었고 계산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나쁜 영화라고 생각지 않아요. <초록물고기>를 마치고 영화를 얼마든지 고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을 텐데요. 그 영화들을 선택한 건 시나리오가 완성도뿐 아니라 여배우에 줄 수 있는 메리트를 갖췄다고 판단해서 아닌가요? 인맥이나 내부적 관계, 여러 요소가 있었어요. <꽃을 든 남자>는 같이 드라마를 했고 내가 팬이었던 황인뢰 감독님의 의뢰라는 점이 컸어요. <마리아와 여인숙>도 비슷한 이유가 있었지만 시나리오도 재미있게 읽었어요. 원래 내 영화를 민망해서 잘 못 보는데 가끔 케이블에서 나와 못 이긴 척하고 보면 지금도 괜찮더라. 내 작품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내 작품이라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영화도 있어요. <실락원>이요? 사실 내가 선택된 것이 괴로웠어요. 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다른 작품 배급문제가 얽힌 부분도 있었고. 배우가 항상 자기가 좋다고 영화를 선택하는 건 아니에요. 2000년쯤 캐스팅 소식이 있었던 왕가위 감독의 은 어찌된 거죠? 은 전혀 안 찍었어요. 왕 감독의 제트톤필름과 계약을 정리하고 끝냈어요. 시나리오는 원래 없고 시놉시스만 받았죠. ‘부산’ 편에서 찍으려고 한 대목이 어떤 이야기인지는 왕가위 감독만 알아요.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양조위도 모르고, 장만옥도 몰랐어요. 영화에서 심혜진씨의 주도적 이미지로는 훼손된 순수나 구원의 여인상이 기억에 남는데, TV드라마에서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여성의 이미지가 강조됐죠? 복잡하고 다면적인 게 인간이고 그중에서도 제일 복잡한 인간이 배우예요. 잠재된 성격이 작품에 의해 하나씩 끄집어 올려지는데 그러다보니 다중인격이 되지. 이런 역 저런 역 다 하지만 어떤 역을 하면 각별히 빛날 때가 있잖아요? 그게 그 사람한테 가장 농도 짙게 자리한 요소겠죠. <마지막 전쟁> <아줌마> 하면서 나의 다른 면이 노출되어 반응이 두렵다기보다 편하고 속이 시원했어요. 사실 20대 중반 이후 여성캐릭터를 만드는 솜씨에 있어서는 아직 영화가 TV드라마를 쫓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죠. 영화는 TV보다 굉장히 느려요. 영화는 TV만큼 대중매체가 아니에요. 시간이 걸리는 매체잖아요. 하루에도 수십 가지로 변화하는 유형을 기계적으로 찍어낼 수 있는 것이 TV야. 영화는 한 감독의 팀이 움직이지만 방송사는 조직이 움직이죠. 조직이 움직이는 가운데 많은 사람이 치열하게 경쟁까지 하죠. 그러니까 앞서가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배우들은 방송에서 기증적으로 연기를 해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내가 연기를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싶을 때도 있지만 그게 드라마의 단점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TV가 영화의 깊이는 없다 해도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유일한 매체 같아요. 항상 옆에 있는데 없으면 돌아버리죠. 그런데도 드라마를 경시하는 풍조가 있죠. 사람들이 매일 극장에 갈 수도 없는데 말이에요. 지금 영화계에서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등 주로 남자배우들이 연구할 만한 자기 세계가 있는 배우로 주목받는 데에는, 개인의 뛰어난 능력도 능력이지만 관객에게 이 배우들의 훌륭함을 음미할 기회를 주는, 그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영화가 제작되는 현실도 중요한 전제다 싶어요. 반면, 여배우들에게는 능력을 계발하고 다양한 면을 보여줄 기회 자체가 희귀한 게 아닐까요? 아니, 그런 기회는 내가 먼저 가졌지. 지금 말한 배우들에게는 기회가 늦게 온 거고요. 기회는 공정하다고 생각해요. 단지 시기의 문제죠. 나는 지금 영화도 드라마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송강호씨나 설경구씨는 지금 드라마를 안 하겠죠. 그것도 하나의 기회를 놓치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한번쯤 변화는 찾아올 수 있는데 어떤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면역성으로 따지면 누가 나만 하겠어요? 난 배우들한테 영화만 고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나도 예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닌 것 같아요. TV를 기피하는 것은 소모된다는 느낌 때문 아니겠어요? 그럼, 영화는 소모되지 않나? 어차피 다 소모성이에요. CF는 그럼 왜 찍어요? 만약 나처럼 영화로 시작했으면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TV에서 시작한 친구들이 더 그렇게 말하잖아요. TV의 생리를 알면 더 효과적으로 이용해야죠. 30대 여배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영화가 부족하다는 일반론 전에, 영화활동을 중단한 5년간 심혜진씨가 거절한 시나리오, 원했지만 캐스팅 안 된 작품 이야기가 궁금하네요. 5년 동안 몇 작품 없었겠어요? 서로 여건이 안 맞아서 못한 거니까 지난 이야기를 해서 좋을 일은 별로 없겠죠. 잘 모르는 신생영화사도 많았어요. 기획이 도중에 엎어질까봐 믿을 수 없는 점도 있었지만 그보다 시나리오를 믿을 수 없었고 그렇게까지 하면서 영화를 할 생각이 안 드는 거죠. 마음에 안 드는데 시작하면 끝이 안 좋은 걸 경험으로 아니까 미련을 버렸어요. 박기형 감독님이 심혜진씨에게서 있는 ‘메마름’의 이미지가 <아카시아>의 미숙 역에 적격이라고 판단했다는 말씀도 들었어요. 그게 무슨 뜻일까? 왜 그랬을까? 내가 메말라 보여요? 하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아. 나무에 꽃도 있고 가지도 있고 다 갖춘 것같이 보이는데 뭔가 촉촉함이나 온기가 없어 보이는 거. 스테인리스처럼 만지면 차갑고 겉보기에는 메마르고. 보통 우리 나이가 되면 부족하건 넘치건 보통은 가정이라는 자리로 돌아가 앉아 있잖아요? 둥지없이 홀로 서 있는 모습이 그런 느낌을 줄 수도 있어요. 아니, 그런데 감독은 안 그런가, 뭐? (웃음) 결혼이 그렇게 사람을 많이 바꿔놓나요? 나는 예전에 결혼을 2개월 만에 끝내서 얼마나 사람을 바꿔놓는지는 몰라요. 그러나 분명히 사람을 대하는 느낌과 가치관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아요.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서 할 수 있었던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안 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 <아카시아>! 결혼을 안 하고 혼자 살아왔기 때문에 감독이 느낀 메마름이라는 것이 있었던 거잖아. 자식이나 남편이 있는 사람하고는 다른 마르고 이기적인 분위기. <아카시아>는 가해자를 끝까지 숨겨야 하니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데다가 컷도 많아서 호흡 조절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오랜만에 영화를 하는 주연 여배우로서 좀더 숨이 길고 화려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 텐데요. 원래 스크린에서 예쁘게 보이는 걸 싫다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얼굴만 예쁘게 많은 신에 나오면 뭐해요. 관객이 쟤 그만 들어갔음 좋겠다 하면 무슨 소용이야. 많이 나오더라도 긴장감 있게 봐주고 미숙이 나오면 무슨 일일까? 저 여자는 왜 속고 있는 걸까? 생각하게 만든다면 그보다 화려한 연기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거기 초점을 맞춰줬으면 하는 바람이 감독과 제작자에게 있었어요. 어차피 시나리오부터 여배우가 화려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나는 좋은 작품으로 돌아오고 싶다, 흥행도 잘된다면 바랄 게 없지만 무엇보다 이른바 후진 작품에 출연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전제조건을 달았어요. <아카시아>의 미숙이 어떤 마음으로 아이를 입양했다고 보세요? 결혼 안 해도 아이를 갖고 싶을 때가 있어요. 나는 미숙이 그런 심정과 흡사할 거라고 가정했어요. 남편과의 관계는 별개의 문제예요. 예컨대 내가 독신인데 아이를 갖고 싶다, 결혼은 싫고 몸은 망가지기 싫고 일은 계속해야 한다고 쳐요. 그렇다고 아무 아이나 가질 수는 없겠죠? 미숙의 상황을 그것과 비슷한 경우로 봤어요. <아카시아>의 가족은 전혀 사악한 사람들이 아니죠. 그런데도 ‘이 애가 없었다면 더 나을 텐데’라는 티끌만한 무의식이 비극을 불러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예요. 한 뱃속에서 나온 형제라고 부모가 편애를 하지 않을 것 같나요? 우리집을 봐도 주변 사람들을 둘러봐도 같은 친자식이라고 해도 생각하는 마음이 똑같지 않아요. 내 뱃속으로 낳았거니 생각해서 드러내지 않을 뿐이죠. 그런데 <아카시아>는 친자식이 아니니까 한꺼풀 씌워서 보이는 거예요. <아카시아>에서 미숙과 남편은 영화 도입부에서는 연인처럼 다정한 부부인데 가족 안에 비밀이 생긴 것만으로 둘 사이의 별다른 계기도 없이 완전히 관계가 파괴됩니다. 상대역 김진근씨와 드러나지 않는 감정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를 한 적이 있나요? 분석하고 연구하면 되는 작품이 있고 아닌 작품이 있어요. 이 부부는 분석할 만한 상황을 갖고 있지 않아요. 특별히 싸움도 문제도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10년간 잘 지낸 부부가 거꾸로 다정하면 얼마나 다정하겠어? 사랑한다고 하지만 어떤 깊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이걸 의논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죠. 깊은 대화없이 농담 따먹기나 하고 “가니? 갔다와” 하면서 각자 다른 라이프 스타일로 사는 부부의 느낌이 김진근씨와 나의 실제 상황과 딱 맞는다고 봤어요. 그리 친하지도 않으면서 현장에서 인사하고 농담하고 일할 때는 일하는 관계와. 10년의 연기생활을 하면서 여자의 아름다움이나 배우의 힘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겠지요. 어렸을 때는 그냥 뭐 얼굴 예쁘고, 사람들 말하는 대로 내면의 미도 가꾸면 되겠지 했어요. 하지만 이제 여자는 가장 부드러울 때 아름다운 것 같아요. 항상 헤헤거리고 상냥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제압할 수 있고 아무리 성격 더러운 사람 앞에서도 분위기를 평정할 수 있는 부드러움을 말하는 거예요. 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계발하고 도전하고, 뭐 거창한 게 아니라 필요한 부분을 훈련하고 취하면서 얻는 힘은 여자로서도 배우로서도 아름다움과 힘이 돼요. 특별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중년 여성이 있나요? 나! 하하하. 글렌 클로즈와 미셸 파이퍼가 좋아요. 그들의 연기는 힘이 넘쳐나지 않아요. 너무 부드럽고 일상적인데 거기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올해 방송통신대 방송정보학과에 진학하셨죠? 영화음악 프로그램 DJ도 4년째인데 방송인의 전망을 동시에 키우고 있는 건가요? MC나 DJ는 매체를 이해해야만 실수를 안 하겠구나 싶었고 배우려는 욕심이 생겼어요. 앞일을 알 수 없지만 라디오를 하다가 시사 프로그램을 할 수도 있고 아침 방송을 하면서 시사 한 꼭지를 내보낼 수도 있잖아요. 그럴 때 정확한 의사전달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배우는 연기자들하고만 연결되는데 방송인은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아요. 어차피 이 나이가 되면 내가 구성한 ‘나의 사회’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에 따라 내 사회성이 인정되고 성격이 평가되고 레벨이 정해진다고 생각해요. 요새 중간고사라 시험이며 과제물이며 무지 바빠요.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얘네들(<아카시아> 홍보팀)이 이렇게 뺑뺑이를 돌리네. 통 공부할 시간을 안 준다니까?

페이스 조절을 잘했어야지,<스캔들‥>

아가씨 <스캔들>을 보고, 나약한 프로페셔널리즘에 찡그리다 <오션스 일레븐>보다 허술하고 아류냄새나는 이야기 구조에도 불구하고, <오션스 일레븐>보다 오빠들의 면면이 다소 처진다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안 잡>은 썩 매력적인 영화였다. 여러 층의 건물바닥을 폭파시키며 대형금고를 통째로 챙긴다는 대범한 행동이나 깜찍이 미니 3형제(자동차)가 달리는 지하철 앞으로 뛰어드는 살떨리는 액션도 좋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오션스 일레븐>과 같은 결말, 도둑놈들이 결국 금괴를 차지한다는 결론이었다. 물론 건전한 상식을 가지고 법질서를 수호하는 데 앞장서고자 하는 시민의 일원으로서 나는 세상의 모든 도둑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 정도의 프로페셔널한 재능과 투철한 직업윤리, 그리고 상부상조의 미덕을 가진 도둑들이라면 가끔은 성공해주는 게 말 잘 듣고 살아봤자 별볼일 없는 인생들에게 위안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그것이 두 시간 동안이나마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는 영화에서라면! 만약 배신자 스티브를 다른 팀원들이 경찰에 신고해서 윌 스미스같이 날렵한 형사가 등장해 스티브를 감옥에 처넣거나, 아니면 이들이 스티브를 때려잡은 다음 그 많은 금괴를 경찰에 양도하고 자신들의 전력을 반성하면서 표창장이나 한장씩 받고 끝났다면 “아이 씨×, 역시 정의는 승리하는구나”라는 감탄 아닌 감탄을 하며 극장을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웃기게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를 본 뒤 비슷한 장탄식을 하면서 극장을 나왔다. “아이 씨×, 역시 진정한 사랑이 승리하는 구나.” 약간 억지를 부리자면 수천만달러를 챙긴 찰리 일행이, 자신들이 부순 건물의 경비 아저씨가 직장에서 잘리고 비참해진 모습을 보고는 깊이 깨달은 바 있어 그 돈을 모두 세계 빈민 구제에 썼다는 식으로 끝나는 버전의 <이탈리안 잡>을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탈리안 잡>과 <스캔들…>의 공통점은 프로페셔널의 세계와 그들이 벌이는 게임을 그린다는 것이다. 도둑과 바람둥이라는 사회도덕과 법질서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업계의 프로페셔널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비슷하다. 다른 점이라면 전자는 성공한 프로의 세계를, 후자는 실패한 프로의 세계를 그린다는 점이다. 물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듯 프로페셔널도 때로는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한다. 그리고 이해심덩어리인 나 같은 관객은 프로의 실패도 자주만 하지 않는다면 너그러이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알고보면 <이탈리안 잡>도 조직관리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난 프로팀이 써내려간 일종의 재활성공담 아닌가. 그런데 <스캔들…>은 아마추어들을 깔아뭉개고 비웃던 프로페셔널들이 단 한번의 실패를 통해 나약하게도 신념을 뒤집고, 동료들을 배신하며 태연하게 써내려간 ‘사상전향서’나 ‘반성문’처럼 보여서 기분이 나쁘다. <이탈리안 잡>의 천재들이 도둑질에 실패한 다음 그 재능으로 경찰에 들어가서 일한다면 얼마나 재수없었겠는가. 기왕이면 숙부인을 비롯한 세 주인공이 재기에 성공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세 사람의 파국이야 원작소설이 정해준 운명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영화 <위험한 관계>나 <발몽>에서도 발몽과 투르벨 부인은 비참한 죽음을 맞고, 메르테유 부인은 죽음보다 못한 야반도주길에 오른다. 그러나 칼에 찔린 발몽이 조원처럼 투르벨 부인의 거처를 찾아가는 길 가운데서 죽는다거나(조원은 크지도 않은 칼에 찔렸으니 의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받았으면 죽지 않고 사랑의 결실을 맺었을 것을!), 메르테유 부인이 발몽(조원)에게서 받았던 꽃을 보자기에 곱게 싸가지고 품고 있다가 야반도주길에 하늘에 날리는 행동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진정한 사랑뿐이었어’라고 참회하거나 ‘우리 다같이 회개하자’고 관객에게 강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들의 죽음은 다만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채 룰을 깨뜨린- 사랑과 질투라는- 프로로서 유감스럽게도 재기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그 대가를 치른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진정한 사랑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프로페셔널들이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조원과 조씨 부인이 투철한 프로의식을 가지고 좀더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다면 조선사회의 퇴폐적인 금욕정신이 무너지는 데 일조하지 않았을까. 잘되면 내 탓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일찍이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깨기는커녕 잘난 척만 하다가 오히려 공고하게 다지면서 프로의 세계를 떠난 조씨 집안의 두 어른이 원망스럽다.김은형/ <한겨레> 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