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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 추천작⑤] <지난밤 너의 미소> <라스 크루세스> <애칭>

<지난밤 너의 미소> Last Night I Saw You Smiling 카빅 능 / 캄보디아, 프랑스 / 2019년 / 75분 / 국제경쟁 1963년 지어진 캄보디아 프놈펜의 상징적인 건물 화이트 빌딩이 철거를 앞두고 있다. 2017년 5월, 일본의 한 기업이 캄보디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화이트 빌딩 매입을 발표했고, 이후 콘도가 들어설 예정이다. 화이트 빌딩에서 자란 영화의 감독이자 촬영을 맡은 카빅 능은 자신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이주를 앞둔 철거민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카빅 능의 카메라는 차분하고 정직하게 건물의 곳곳을 비춘다. 대부분의 신에서 카메라는 정지된 채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복도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요리하고 빨래를 너는 사람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가족, 이웃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마지막으로 건물과 작별하고 짐을 챙기는 손길 등. 2019년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넷펙상을 받은 작품. <라스 크루세스> The Crosses 테레사 아레돈도, 카를로스 바스케스 멘데스 / 칠레 / 2018년 / 78분 / 월드 시네마스케이프 1973년 9월, 칠레의 군사 쿠데타 직후 제지회사(CMPC)에서 일하던 19명의 직원이 종적을 감춘다. 경찰에게는 노동조합, 좌파 정당 활동을 하는 이들의 리스트가 존재했고, 이 리스트에 의해 구속된 19명은 결국 싸늘한 주검이 되어 묻힌다. 테레사 아레돈도와 카를로스 바스케스 멘데스 감독은 사건이 일어난 라자 지역의 현재를 포착하며 그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를 상기시킨다. 억울한 죽음이 있었지만, 여전히 나무는 베어지고 사람들은 출퇴근하고, 종이는 만들어진다. 영화는 중간중간 블랙 화면을 삽입하고 다양한 시각 자료와 사운드 요소를 더해 사건의 잔혹성을 알린다. 칠레 정부가 민간인 학살에 관여하고 45년이나 지나서야 이 사건은 공개되었다. 아직 이것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애칭> Pet Names 캐럴 브랜트 / 미국 / 2018년 / 75분 / 시네마페스트 지친 표정으로 밤거리의 놀이기구를 바라보는 리(메러디스 존스턴)의 시선을 따라가며 시작된다. 대학원까지 중퇴하고 말기 암 환자인 엄마를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하는 딸이지만, 그녀의 하루는 무기력하다. 와중에 엄마의 병세 악화로 함께 계획한 캠핑도 혼자 가야 할 처지가 된다. 즉흥적으로 고등학교 시절 남자친구였던 캠(르네 크루즈)을 캠핑으로 초대하고, 캠의 강아지 구스까지 함께 숲으로 떠난다. <애칭>은 헤어진 연인이 숲에서 주말을 보내며 오랜 상처와 마주하고, 암울한 현재와 불확실한 미래,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을 솔직하게 풀어가는 이야기다. 메러디스 존스턴은 주연배우이자 각본가, 협력 프로듀서, 작곡가로 영화에 참여했다. 르네 크루즈 역시 주연 배우이자 작곡가로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33년씩이나? 유명 영화들이 지각 개봉한 사연

다르덴 형제의 1999년 작품 <로제타>가 5월 관객들을 만난다. 당연히 재개봉일 것 같았지만 엄연히 극장 개봉은 처음이다. 흔히 영화계에 조롱거리로 등장하는 '창고 영화'와는 아예 의미가 다르다. 창고 영화란 한참 전에 만들어졌지만 만듦새가 만족스럽지 않다거나, 시기적으로 흥행을 장담하기 어려운 경우 개봉을 미룬 영화들에게 붙여진 다소 불명예스러운 별명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영화들은 다르다. 도리어 '늦게라도 개봉해줘서 고맙다'는 안도를 부른 영화들을 모았다. 로제타 / 20년 다르덴 형제의 첫 번째 걸작이라 불리는 <로제타>는 오는 5월 국내에서 처음 개봉된다. <내일을 위한 시간>(2014), <언노운 걸>(2016) 등 다르덴 형제의 근작들은 모두 극장에서 개봉돼 시네필들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 모았다. 때문에 형제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고 해도 좋을 <로제타>가 20년 만에 첫 개봉을 앞뒀다는 사실이 놀랍다. 지금은 다르덴 형제 특유의 리얼리즘 영화 세계를 추종하는 팬들이 많지만, <로제타>가 발표되던 1999년 당시에는 국내 관객들에게 낯선 화법의 영화였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와 함께 사는 십대 소녀 로제타가 경제적 위기로부터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제52회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칠드런 오브 맨 / 10년 <칠드런 오브 맨>의 지각 개봉은 오히려 타이밍이 절묘했다. 알폰소 쿠아론의 SF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은 2006년에 만들어졌지만 10년이 지난 2016년에서야 한국에서 개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씩이나 미뤄진 개봉이 절묘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영화가 다루고 있는 ‘난민’, ‘저출산’의 화두가 2010년대에 이르러 극심한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칠드런 오브 맨>이 다루고 있는 암담한 미래, 디스토피아의 서사는 결코 대중들이 선호하는 주제가 아니기에 이같은 시대적 상황이 맞물리지 않았더라면 철저히 외면 받았을지도 모른다. 뒤늦은 개봉으로나마 <칠드런 오브 맨>을 본 관객들은 일제히 쿠아론의 마스터피스라며 입을 모았다. 환상의 빛 / 21년 고정적으로 찾는 관객이 많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그만큼 꾸준히 작품을 내놓는 성실함 마저 팬들에겐 달가운 점이다. 2016년의 여름은 그의 영화 두 편이 동시에 극장에 걸린 계절이었다. 하나는 11번째 장편 <태풍이 지나가고>, 다른 하나는 데뷔작 <환상의 빛>이다. 무려 21년이 지나 유능한 감독의 출발을 알렸던 히로카즈의 첫 장편이 스크린에 옮겨졌고, 팬들에게는 그의 가장 오래된 작품과 최신의 작품을 비교 감상할 수 있는 독특한 기회가 됐다.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남편의 그림자를 지고 살아가는 유미코의 이야기 <환상의 빛>은 죽음과 상실의 테마를 관조적 시선으로 바라본 히로카즈의 남다른 시작이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 26년 대만 뉴웨이브 영화사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명감독 에드워드 양. 그의 영화 중 최고라 일컬어지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만들어진 지 26년이 지나 한국 관객들에게 소개됐다. 그동안 명성만 무성히 듣고 이 영화를 궁금해하던 영화 팬들은, 237분(4시간 남짓)에 이르는 상당히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앞다퉈 극장을 찾았다. 10대 소년 소녀들의 어두운 세력 다툼과 풋풋한 사랑의 감정을 그린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59년의 대만이 안고 있던 사회 정치적 상황과 시대의 분위기를 탁월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찬사를 받았다. 대만을 대표하는 배우 장첸의 어린 시절 모습도 이 영화를 감상하는 하나의 묘미가 돼 준다. 천공의 성 라퓨타 / 18년 <천공의 성 라퓨타>는 18년 만인 2004년에서야 늦개봉을 했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창립작이다.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하늘에 둥둥 떠있는 섬’에서 착안해 구상한 라퓨타 성을 통해, 하야오는 그의 일관된 주제인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역설했다. 사실상 초기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이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작품들이 수년을 훌쩍 넘겨 개봉했다. 여기엔 <이웃집 토토로>(1988년 작, 2001년 개봉), <마녀 배달부 키키>(1989년 작, 2007년 개봉), <붉은 돼지>(1992년 작, 2003년 개봉) 외 다수 작품이 해당하는데, 2000년대 초기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던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서 역사적 배경을 찾을 수 있다. 라붐 / 33년 영화보다 사운드트랙으로 더 유명한 프랑스 영화 <라붐>은 1980년에 만들어져 2013년에 한국의 극장에 걸렸다. 무려 33년 만의 개봉이다. 그럼 도대체 그 유명한 헤드폰 신과 함께 자동 재생되는 음악 ‘리얼리티(Reality)’며, 책받침 3대 여신 중 하나였다던 소피 마르소의 인기는 어디서 온 걸까? <라붐>은 극장이 아닌 브라운관을 통해 소개됐다. 당시 한국은 <라붐>의 TV와 비디오 판권만을 갖고 있었으며, 텔레비전을 통해 더빙 방영되기도 한 <라붐>은 첫사랑의 감수성을 자극하며 국민적 인기를 얻었다. 2013년 첫 극장 개봉을 치른 <라붐>은 그간 국내에서는 공개되지 않았던 마지막 장면을 함께 공개했다. 에이리언 / 8년 지금까지 나열된 영화들의 지각 개봉에 비하면 8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다. 하지만 속편 <에이리언 2>가 본편인 <에이리언>보다 먼저 개봉됐다는 사실이 흥미로워 소개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역작 <에이리언>은 1979년이라는 제작 시점을 믿기 힘들 만큼 정교한 만듦새를 자랑하는 괴수 영화였다. SF 영화의 새 역사를 쓴 <에이리언>은 많은 후대감독들의 손에서 태어난 속편들로 인해 다시 그들을 명감독의 반열에 올리기도 했다. 최초의 <에이리언>은 단순히 ‘잔인하다’는 이유로 국내에 제때 개봉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제임스 카메론이 연출한 <에이리언 2>가 먼저(1986년) 개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속편의 흥행으로 인해 본편인 <에이리언>은 8년 만인 1987년에서야 늦개봉을 했지만, 2편에 한참 못 미친 흥행 성적을 냈다.

[내 인생의 영화] 유태경 감독의 <열혈남아>

감독 왕가위 / 출연 유덕화, 장만옥, 장학우 / 제작연도 1988년 나는 하숙생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갓 상경한 대학 새내기 시절, 하숙집에서 선배들의 머슴(?) 생활을 했는데 그들은 밤에 나를 종종 불러 재밌는 이야기를 시키곤 했다. 처음 며칠은 무사히 넘겼지만 레퍼토리는 바닥났고 재미가 없거나 준비된 얘기가 없으면 난감했다. 몇주 뒤 새로 선배 한명이 입주했는데 그와는 늘 영화 이야기를 나누며 잠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로드쇼>나 <스크린> 같은 영화 월간지를 탐독하던 나였지만 대학에서 학사경고를 받아가며 영화 생각만 하던 선배가 해주는 얘기는 신세계가 따로 없었다. 그런 선배 덕분에 비디오방에서 재발견한 영화가 <열혈남아>(원제 <몽콕하문>)다. 이미 중학생 때 친구집에 모여서 봤던 영화다.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을 기대했던 친구들에게 온갖 비난을 들었지만 이 영화를 몰라본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던 경험이 있다. <열혈남아>는 다른 홍콩영화들과 달랐고 비현실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이며 설익은 청춘과 닮았다. 그래서 이 영화와 왕가위 감독이 좋아졌다. 어린 시절 사람을 죽이고 뒷골목 건달로 살아가고 있는 소화(유덕화)는 불안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동생들을 보살피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어느 날 먼 친척뻘인 아화(장만옥)가 병원을 다니러 소화 집에 머물고, 아화는 거칠고 불안한 모습의 소화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소화 역시 아화를 마음에 두지만 자신의 불안한 미래를 함께할 수 없을 거라 직감한다. 멜로는 엇갈림의 서사다. 김영하 작가가 어느 글에서 “엇갈리지 않고 오다 가다 만나면 그건 텔레토비지 멜로가 아니다”라고 얘기했던 게 기억난다. 사실 멜로가 엇감림의 서사라는 대목보다 텔레토비는 오다 가다 만날 수 있나, 라는 궁금증으로 기억되는 문장이지만 아직도 멜로를 대할 때면 슬며시 떠오르는 말이다. <열혈남아>는 내게 멜로영화다. 필연적으로 비극으로 끝날 걸 알면서도 마음 한쪽에서 엇갈리지 않기를 러닝타임 내내 바라면서 보게 된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엇갈림이 있다. 첫째는 소화와 아화가 보여주는 사랑의 엇갈림이다. 애초에 소화는 사랑 때문에 다른 걸 저버릴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화는 번번이 엇갈리는 결정을 하지만 그런 소화에게 나 역시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화와 창파(장학우)가 보여주는 의리의 엇갈림이다. 잠시라도 영웅으로 살고 싶어 하는 창파는 자신이 믿고 따르는 소화를 위해 잘해보려 하지만 매번 일을 그르치면서 상황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나의 대학 초년 시절은 엇갈림에 대한 감상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감정이 풍부해서 그랬을까. 나의 불안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그런 식으로 소독하며 지냈던 것 같다. 가끔 대학 시절 감정에 흠뻑 빠져 써놓은 글들을 읽게 될 때가 있다. 그 문장은 나 스스로도 낯설 만큼 짙은 감정들이지만 억누르지 않은 솔직한 감정들로 채워져 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는 망설여지지만 날 나처럼 이해해줄 것 같은 사람들에게는 꺼내 보이고 싶은 글들이다. 내게 <열혈남아>는 그런 글들과 같은 영화다. ● 유태경 영화감독. VR툰 <조의 영역> <살려주세요>를 연출했다. 현재 중앙대학교 예술공학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리메이크한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 호평과 혹평 사이에 놓이다

충격과 공포 그리고 혼돈. 이탈리아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를 관람한 뒤 당신이 느낄 감정이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동명 호러영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오리지널 영화의 팬들과 감독의 전작(<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을 사랑한 관객 모두의 기대를 벗어난다. 마지막 순간까지 완전히 봉합되지 않는 수많은 서사의 갈래들과 실험영화를 연상케 하는 불균질한 장면들, 난폭한 점프컷과 음험한 이미지의 향연을 2시간32분에 걸쳐 체험하고 나면 당장 인터넷 검색창을 열어 이 모든 것들의 의미를 해설한 글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다리오 아르젠토는 어떻게 봤을까 이처럼 과감한 탈주는 필연적으로 영화에 대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2018년 제75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영화가 처음 공개된 뒤, <서스페리아>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극명하게 갈렸다. “오래된 악몽에 대한 풍부하고 명쾌한 해석”(<인디와이어>), “신념, 정치, 무용, 마녀사냥에 대한 복합적이고 도발적인 함의”(<데일리 텔레그래프>)를 담았다는 평가가 있는 한편 “무섭지도, 재밌지도 않다”(<버라이어티>)거나 “기묘하게 열정적이지 않은 영화”(<가디언>)라는 반응도 있었다. 분명한 점은 루카 구아다니노가 원작의 후광에 기대지 않고 그 무게에 짓눌리지도 않은 채 오롯이 자기만의 관점을 담아 <서스페리아>를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 관점에 동의할 것인지 반대할 것인지는 관객의 몫이겠으나, 호러영화 역사의 영원한 고전이 된 작품의 발자취를 따르면서도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의 어떤 장면도 생각나지 않았다는 점만큼은 리메이크작의 놀라운 성취라고 할 수 있겠다. <서스페리아>는 “바더 마인호프(서독의 극좌파 테러리스트)를 석방하라!”는 구호가 베를린의 잿빛 거리에 울려퍼지던 1977년을 배경으로 한다. 넋이 나간 듯 보이는 소녀 패트리샤(클로이 머레츠)가 정신과 의사 클렘페러(틸다 스윈턴)를 찾아와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다. 유서 깊은 아카데미의 무용수인 그는 클렘페러에게 “그 여자들은 마녀”라며 자신이 그들에게 조종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클렘페러는 패트리샤의 말이 망상에 불과하다고 여기지만, 패트리샤는 사라지고 그는 소녀의 실종에 무용 아카데미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패트리샤의 실종 뒤 무용단에는 수지 배니언(다코타 존슨)이라는 미국인 무용수가 입단한다. 미국 오하이오 출신으로 마담 블랑(틸다 스윈턴)에게 무용을 배우기 위해 베를린으로 온 수지는 특유의 거침없는 태도로 블랑의 관심을 끌고 무용단의 대표작 <폴크>(VOLK)의 주연 자리를 따낸다. <폴크>의 공연이 다가올수록 아카데미의 소녀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수지가 악몽을 꾸는 일도 잦아진다. 수지의 단짝이자 패트리샤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라(미아 고스)는 클렘페러로부터 패트리샤의 일기장에 적혀 있던 마녀의 존재에 대해 듣는다. 다리오 아르젠토가 연출한 오리지널 <서스페리아>의 이야기는 단순했다. 미국인 무용수가 마녀들이 운영하는 독일의 무용 아카데미에 입단해 기이하고 두려운 일들을 겪고, 자신을 희생제물 삼아 젊음을 유지하려는 사악한 마녀에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찬찬히 뜯어보면 말도 안 되는 설정이 수두룩하지만 아르젠토의 영화 대부분이 그렇듯 이 작품의 매력은 탐미적이고 과장된 프로덕션 디자인과 소름 끼치는 스코어, 독창적이면서 끔찍한 살인 장면에서 비롯되는 말초적 쾌감을 즐기는 데 있었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리메이크작은 훨씬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결을 가지고 있다. 1977년의 베를린이라는 특정 시공간(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가 개봉했던 바로 그해다)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당대 독일의 역사, 사회, 정치, 윤리적 맥락 안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려 하며, 관객 또한 이를 충분히 염두에 두고 영화를 봐주었으면 하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가 본능적인 감각으로 만든 영화였다면,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지성을 통해 정교하게 구축된 영화다. 다리오 아르젠토가 구아다니노의 리메이크작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위와 같은 이유로 리메이크작 <서스페리아>를 이해하려면 1977년의 베를린 또는 독일 사회에서 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1977년 중에서도 서독의 극좌파 테러리스트 그룹 바더 마인호프가 위력을 떨치던 마지막 몇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서방의 자본주의 세력들은 소련을 중심으로 힘을 키워가던 사회주의 세력을 막는 데 급급해 나치주의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않았다. 독일의 젊은 세대들은 파시즘에 물들었던 사회가 아무런 반성 없이 민주주의 사회로 이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본격적인 학생운동을 시작한다. 저널리스트였던 안드레아스 바더와 좌파 성향 잡지의 편집장이었던 울리케 마인호프가 결성한 ‘바더 마인호프’(‘적군파’라는 명칭으로도 유명하다)는 그중에서도 가장 과격하게 운동을 전개하는 단체였다. 급진적인 사회 변혁을 꿈꿨던 이들은 루프트한자 비행기를 납치하고 독일 연방검찰총장과 경제인연합회장 등을 암살한다. 독일 언론은 바더 마인호프가 감행한 일련의 사건들을 ‘독일의 가을’이라고 불렀다.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에서 ‘독일의 가을’과 관련된 소식은 극중 TV, 라디오 등의 미디어를 통해 도처에서 들려온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과 통제, 지도자에 대한 학생들의 선망과 경의로 운영되는 마르코스 무용단에서 바더 마인호프 테러와 같은 외부의 사건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잡음일 뿐이며 파시즘은 이곳에서 은밀하면서도 분명하게 작용된다. 사실 이 무용단을 이끄는 건 마녀들이다(원작 영화에서 선생들의 정체는 일종의 스포일러였지만 이 작품에서 무용단을 지도하는 선생들의 마녀로서의 정체성은 영화 초반부터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마르코스와 무용단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블랑은 마녀 집단의 두 실세로 아슬아슬한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마르코스의 세력이 블랑의 그것보다 조금 더 우세해 보인다. 이들은 마녀 의식을 위해 학생들을 희생제물로 삼지만 단순히 가해자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블랑 선생님은 전쟁 때도 무용단을 지켜낸 강인한 분”이라거나 “우파가 여성을 애 낳는 기계로만 볼 때도 저항했다”는 사라의 말, 여성의 재정 자립을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모든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는 무용단의 운영 방식은 초자연적인 맥락을 넘어 사회적 맥락으로 구별되는 ‘마녀’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이 영화는 여성을 마녀에 비유하는 여성 혐오적인 사상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 알다시피 마녀라는 개념은 중세 시대와 계몽주의 시대에 도입되면서 선입견을 낳았다. 교회와 공동체 사회에서는 독립적이거나 모임을 좋아하는 여자들 혹은 혼자 다니는 여성이 마녀라는 사상을 퍼뜨렸고 실제로 마녀라고 낙인 찍었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준비하며 아예 자신을 마녀라고 칭하는 여자를 생각해냈다. 그러면 마녀로 몰려 희생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자신의 힘을 당당히 외치게 되니까.”(루카 구아다니노) 틸다 스윈턴이 연기하는 블랑은 마녀들 가운데서도 가장 매혹적인 존재다. 그는 의식에 제물로 쓰일 학생을 발탁하고 통제하는 음험한 목적을 가졌지만 동시에 완벽주의자적인 태도로 무용이라는 예술을 대하는 아티스트다. 재능이 엿보이는 제자이자 가르침을 온전히 따르지 않음으로써 스승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수지와 교감하는 모습은 블랑을 한층 더 복합적인 인물로 만든다. 특히 블랑과 수지의 관계를 필두로 한 스승과 제자,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영화의 몇몇 설정은 전복적이면서도 도발적이다. “어머니는 으레 (아이를) 돌보고 양육하며 헌신적이어야 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우리의 지레짐작이라면? (중략) 모성은 깊은 갈등과 산후우울증, 아이와의 연결에 대한 거부를 동반하며 엄마와 딸 사이에는 종종 경쟁이 벌어진다.” 그 자신의 말처럼 루카 구아다니노는 이 영화를 통해 모성에 대한 선입견에 이의를 제기하고 모녀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서스페리아>의 어머니들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식을 희생시키려 하고, 유일한 어머니가 되기 위해 투쟁한다. 딸들은 어머니를 따르지 않으며 때로는 어머니의 자리를 야심만만하게 넘본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여성들이 대상화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호러영화에서 주인공은 폭력의 대상이 되거나 위협당한다. 우리는 수지가 때때로 위험에 노출되지만 결국은 공포영화의 주체가 되길 바랐다”라는 각본가 데이비드 카이가니치의 말과 맥락을 함께한다.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에서 겁에 질려 살해당하던 여성들은 구아다니노 영화에서 그 의도와 결과가 어떻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을 하고 힘을 사용하며 그 결과를 감수한다. 영화의 후반 30분 내내 이어지는 거대한 피의 축제 역시 누구의 것도 아닌, 그들 자신의 것이다. 이들 여성이 집단적으로 행하는 제의인 무용은 (아르젠토의 영화와 달리) 시종일관 어둡고 음울한 이 영화에 시각적으로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순간을 선사한다. 다윗의 별을 닮은 무대 안에서 붉은 실로 짠 옷을 입고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무용수들은 폭력적인 동시에 흠결 없이 아름다웠던 나치 시대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공연의 이름이 ‘민족’을 뜻하는 ‘VOLK’라는 점, 공연을 관람하는 이가 홀로코스트를 경험한 세대인 클렘페러라는 점은 더욱 노골적으로 이 장면의 의도를 드러낸다). 이 영화에서 몸의 움직임은 마녀의 주술을 이루는 수단이다. 수지가 블랑의 지도에 따라 격정적으로 춤을 출 때, 거울방에 갇힌 올가의 뼈와 장기가 수지의 움직임에 맞춰 기묘하게 뒤틀리는 장면은 잔혹하면서 그로테스크하다. 생성과 파멸이 한데 뒤얽힌 이 장면은 오리지널 영화와 차별화되는 리메이크작만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스페리아>는 어둠 라디오헤드의 보컬 톰 요크가 맡은 스코어는 생성과 파멸의 기운이 격렬하게 맞부딪히는 이 영화의 무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그의 음악은 전설적인 오리지널 영화의 스코어를 맡은 고블린의 찢어지는 사운드와 다른 방식으로 불길하고 매혹적이다. “이미지와 사운드를 통해 불안하고도 변화무쌍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그것을 구현하기에 톰 요크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었다”라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말처럼 톰 요크의 영화음악감독 데뷔작인 <서스페리아>는 속삭이는 듯한 멜로디와 악몽같은 사운드로 감각적인 공포를 체험하게 하는 데 일조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태양이라면 <서스페리아>는 어둠이다.” 이 영화의 편집을 맡은 월터 파사노는 이렇게 말했다. 전작을 통해 인간 내면의 욕망과 어둠을 과감하게 탐구해왔던 루카 구아다니노는 그러한 자신의 관심사를 이어가되 가장 전위적이고 담대한 스타일과 형식으로 <서스페리아>를 완성했다. 이 작품이 구아다니노 최고의 걸작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20세기 유럽 사회의 가장 어두운 역사를 끌어와 초자연적 현상과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야심만큼은 루카 구아다니노가 현재 가장 주목받는 동시대 유럽 감독의 위치에 놓인 이유를 짐작하게 한다.

<요로나의 저주>를 계기로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를 생각함

2013년 <컨저링> 시리즈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워런 부부는 호러 팬들에게 유명 인사였다. 소위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귀신영화나 텔레비전물이 나올 때면 그 사건을 맡은 워런 부부의 이름이 어딘가에 박혀 있거나 극중 캐릭터가 이들을 모델로 하고 있기 마련이었다. 워런 부부는 20세기 호러물에 지울 수 없는 하나의 틀을 만들었다. 악령에게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구원해주는 초자연현상 전문가. 이들이 없었어도 이 틀은 존재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는 세계에서는 워런 부부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요새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컨저링> 유니버스 영화를 통해 안다. 나에겐 이게 굉장히 이상해 보인다. 초자연현상을 다룬 호러영화를 만드는 것이 금지된 중국이나 베트남에 사는 게 아니라면, 워런 부부의 사건 파일에 실린 사건들에 영감을 받아 귀신 나오는 호러 영화를 만드는 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워런 부부가 맡은 사건을 영화화하면서 이들의 캐릭터를 실명으로 등장시키는 것도 자연스럽다. 워런 부부가 보관하고 있는 귀신 들린 인형을 주인공으로 스핀오프를 제작하는 것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주인공인 유니버스를 만들어 귀신영화를 만드는 건 좀 다른 일이다. <컨저링> 영화들의 가장 막강한 무기가 무엇인가. 영화가 그리는 사건이 실화라는 것이 아닌가. 초자연현상을 다룬 이야기를 접할 때 사람들은 어느 정도 융통성 있는 태도를 취하긴 한다. <컨저링> 영화의 고정 관객이라고 워런 부부의 주장을 다 믿는 건 아니다. 전혀 믿지 않는 관객이라도 이 영화를 즐기는 건 가능하다. 영화를 보기 위해 초자연현상에 대해 입장을 가져야 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주연배우들이 실존 인물과 이렇게 밀접한 인간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허구의 이야기로 유니버스를 확장하는 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비슷해 보이지만 전작들과는 다른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보건 말건 <컨저링> 유니버스는 넓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세편의 <애나벨> 영화가 나왔고 <컨저링 2>(2016)에서 이명박 닮은꼴로 화제가 됐던 수녀 귀신이 악역으로 나오는 <더 넌>(2018)이 나왔고 얼마 전에는 <요로나의 저주>가 개봉했다. 이들 중 <애나벨> 시리즈의 2편인 <애나벨: 인형의 주인>(2017)은 기대 이상의 성취를 보여준다.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에서 한참 떨어져 있긴 하지만. 실화와 <컨저링> 유니버스를 연결하던 마지막 연결고리인 로레인 워런이 세상을 떴으니 이 세계의 이야기는 점점 더 막 나가지 않을까? <요로나의 저주> 이야기를 해보자. <컨저링> 유니버스의 이야기가 모두 그렇듯 이 영화의 시대배경도 20세기 후반, 그러니까 1973년이다. 경찰 남편을 잃은 주인공 안나 테이트 가르시아는 두 아이를 키우며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다. 안나는 파트리시아 알바레스라는 여자가 자신의 두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 안 벽장에 감금하자 아이들을 엄마로부터 격리시킨다. 파트리시아의 아이들은 얼마 되지 않아 초자연적인 상황에서 살해당한다. 안나는 이들의 죽음에 ‘라 요로나’라는 악령이 개입하고 있으며 그 악령의 다음 타깃이 바로 자기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전문가들을 불러오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다. 다행히 안나가 찾아간 페레스 신부는 사제 출신이지만 다른 접근법을 쓰는 전문가인 라파엘 올리베라를 소개시켜준다. 아, 그리고 페레스 신부는 <애나벨>에도 나왔다. 이렇게 안나와 아이들의 이야기는 <컨저링> 유니버스에 통합된다. 이 스토리 전개는 앞에 나온 두편의 <컨저링> 영화와 흡사하다.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고통받는 가족과 이들을 구하러 온 초자연현상 연구가. 단지 이들을 갈라놓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워런 부부가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다음은 이 이야기의 타이틀롤 라 요로나가 원래부터 멕시코 문화권에서 잘 알려진 슈퍼스타라는 것이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에도, 남편에게 애인이 생긴 사실을 알게 되자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죽였다는 이 흐느끼는 유령이 등장하는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라 요로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민속학자들에게 의미 있는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 요로나와 같은 인기 있는 유령의 등장은 이야기의 현실성을 떨어뜨린다는 것이다. <컨저링> 영화들과 <요로나의 저주>는 비슷한 이야기지만 후자는 (더) 장르화되어 있다. 이 차이는 참 오묘하다. <컨저링> 역시 장르화된 이야기일 테니.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귀신영화, 또는 귀신 들린 집 영화로 분류되는 장르는 좀 까다로운 구석이 있다. 이들 상당수는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다른 서브 장르보다 더 ‘현실성’을 추구한다. <디스커버리 채널>의 <헌팅> 같은 인기 재현 프로그램은 시즌10 동안 꾸준히 귀신과 귀신들린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해왔는데, 그것들은 모두 비슷비슷한 내용의 미니 호러영화였다. 이 따분할 수 있는 이야기의 반복을 10년 이상 끌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실화’라는 인증이었다. 여기에 참여한 전문가 중 워런 부부가 있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 <요로나의 저주>는 괜찮게 만들어진 영화다. 아역들을 포함한 배우들의 연기가 좋고 현실 논리를 깨트리며 공포를 창출해내는 몇몇 매력적인 아이디어도 있다. <애나벨: 인형의 주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아이디어의 구현은 굳이 실화인 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라 요로나의 등장과 함께 20세기 후반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멕시코 사람들의 문화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고 이를 활용할 수도 있었다. 워런 부부를 주인공으로 했다면 이 이야기를 그렇게까지 깊이 파지는 못했을 테니 라파엘 올리베라의 등장도 의미가 있다. 이 영화는 실화 소재의 <컨저링> 영화들이 건드리지 못했던 영역에 있다. 하지만 <요로나의 저주>는 <컨저링>처럼 고만고만한 이야기에서 안주해야 할 ‘실화’의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 비슷한 이야기를 해도 <컨저링> 영화와 달리 <요로나의 저주>의 익숙함이 더 식상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컨저링>에서 사실의 추구였던 것이 <요로나의 저주>에서는 이야기꾼의 안이함처럼 보인다. 이는 영화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컨저링> 유니버스의 한계이기도 하다. 여기 질문이 있다. 비현실적인 공포 현상을 실화라고 내놓으며 만든 허구의 유니버스에서 그 공포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최대한 다양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이야기의 씨앗이었던 ‘사실’의 씨앗을 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빛과 그림자로 만들어진 쇼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고 할 수 있는 걸 다 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워런 부부는 어떤 답을 갖고 있었을까?

오슨 웰스와 테리 길리엄, 감독을 매혹하는 돈키호테

저주받은 프로젝트 혹은 결코 완결될 수 없는 작품, 지난 30여년 동안 악운이 겹치며 번번이 무산돼왔던 테리 길리엄의 시대착오적 소동극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작품은 2018년 칸국제영화제 폐막식으로 선정되어 기대에 부푼 관객에게 처음 소개되었다. 우스꽝스럽고 서글픈 초현실주의 코미디로서 테리 길리엄의 독창적 상상력을 반영하는 작품이라는 반응에서부터 난삽하고 파편적인 근래 작품들의 결함을 이어받았다는 반응까지 평가는 다양했다. 냉혹한 현실을 부정한 채 망상에 빠진 자라는 모티브는 테리 길리엄이 이미 <피셔 킹>(1991)에서 보여주었다. 시대착오적 모험담의 주인공이 미치광이라는 설정은 <바론의 대모험>(1988)과도 상통한다. 이성과 계몽의 시대에 상상과 판타지의 권능을 예찬하던 바론 남작, 이미 사라진 궁정연애와 기사도의 세계를 향수하는 돈키호테는 모두 시대착오적 광인이다. 몽상의 시대에서 CG의 시대로 영화 패러다임이 바뀌었음에도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감독 테리 길리엄의 경우도 유사하다. 그가 펼치는 편력담은 바로크적 세계관을 상기시킨다. “바로크적 관점에서 세계는 인간이 지은이를 알 수 없는 한편의 희곡을 그 의미도 모른 채 보이지 않는 관객 앞에서 공연하고 있는 무대”(제라르 주네트)다. 환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바로크 연극과 마찬가지로 테리 길리엄 역시 자신의 영화에서 미장아빔(Mise en Abyme, 액자기법) 혹은 극중극을 적극 활용하거나 ‘세상은 연극 무대’라는 모토를 비유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사용해왔다. 확장하는 돈키호테 서사 보르헤스가 <돈키호테>에는 “무한적용의 테크닉”이 발휘된다고 하였던 바(<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중), 이 마법 같은 책에는 참으로 많은 판본이 있으며 작가인 세르반테스도 책의 2부에서 작품의 진위 여부와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농담을 반영하기조차 했다. 단일한 원본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한히 복제되고 증식하는 판본들, 자기 충족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채 끊임없이 다시 써내려지면서 앞선 판본에 뒤의 판본이 겹쳐 써지는 상호텍스트성이야말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보여준 놀라운 근대성이었다. 영화의 세기인 20세기 이후로도 이 책은 피터 오툴이 등장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1972)에서부터 오슨 웰스의 문제적 프로젝트 <돈키호테>(1992), 알베르트 세라의 명상적 무훈시 <기사에게 경배를>(2006)에 이르기까지 영화적 판본도 거듭 만들어졌다. 설정은 이러하다. 스페인에서 보드카 광고 촬영을 하는 CF감독 토비(애덤 드라이버)는 의욕 상실과 상상력 고갈에 봉착해 있다. 그는 우연히 과거 자신이 촬영한 졸업작품이자 출세작인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DVD를 보게 된다. 그는 근처에 있던 당시의 영화 촬영지를 방문하고 뜻밖의 장소에서 과거 자신의 영화에 돈키호테 역으로 출연했던 구두수선공 노인 하비에르(조너선 프라이스)를 만난다. 노인 하비에르는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데다 토비를 산초 판자로 착각하기까지 한다. 하비에르와 토비는 어설픈 돈키호테와 산초로 분한 채 기이한 편력을 시작한다. 이후 등장하는 이슬람교도들의 여관, 신비한 동굴 체험, 성에서의 가장무도회 등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에피소드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것들이다. “나는 이 철의 시대에 잊혀진 기사도를 다시 세워야 한다. 나는 라만차의 돈키호테다.” 영화는 이렇게 선언하며 돈키호테가 종복 산초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스스로를 라만차의 기사로 명명하며 편력의 길을 떠나는 오프닝 시퀀스는 사실 주인공 토비가 찍는 보드카 광고의 한 장면이다. 자신의 상관의 아내와 밀회를 가지려고 하던 호텔방에서 그가 보는 장면 역시 돈키호테가 자기를 명명하며 모험을 떠나는 장면이다. 자신의 옛 영화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이 영화의 제목과도 같은 이 영화의 오프닝 장면은 극중 극으로 작품 곳곳에 등장한다)를 접하며 토비는 광고 속 돈키호테의 세계는 가짜(허상)이고 영화 속 과거 자신이 추구하던 것이 진실(원본)이라는 묘한 향수에 젖어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돈키호테가 모험을 떠나는 장면은 토비가 낡은 자동차극장에서 자신의 영화를 우연히 관람할 때 다시 등장한다. 여기서 자신의 과거 작품이 진실(원본)이라 여기던 토비는, 망상에 빠진 노인 하비에르(자신을 돈키호테라고 착각하는)를 만나는 순간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이 자기 명명은 하비에르의 죽음 이후 이제 자신을 돈키호테로 여기는 토비의 입을 통해 반복되며 영화의 엔딩을 장식하게 된다. 물론 돈키호테라는 광인 캐릭터를 현대성의 세계에 소환시키는 상상력을 테리 길리엄이 처음 선보인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돈키호테는 오슨 웰스의 저주받은 프로젝트였다. 그의 <돈키호테>는 1957년부터 이후 30여년간 멕시코와 스페인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촬영되었다.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지 못한 채 오슨 웰스가 사망하자 그의 반려자였던 오야 코다가 미완성 프로젝트를 편집해 1992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이를 공개했다. 개봉 제목이 <당신은 언제 돈키호테를 완성할 것인가?>가 될 뻔했던 이 작품은 현대에 뛰어든 돈키호테와 산초 판자의 착란적 모험을 다루었다. 테리 길리엄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시대착오적 인물의 편력담인 돈키호테 텍스트는 오슨 웰스에게도 테리 길리엄에게도 자신의 영화적 삶을 반영한 것이기에 매혹적이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감독 자신에 대한 자기반영적 발언을 영화 속에 넣고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오슨 웰스가 작품에 직접 카메라를 들고 등장해 스페인에서 돈키호테 영화를 찍겠노라 인터뷰하고, 이 장면을 텔레비전을 통해 현대로 소환된 산초가 보고 있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에 등장하는 토비는 명백히 감독 자신의 페르소나다. 그리고 묘한 점은 두 작품 모두 원작이 품은 시대착오성으로 ‘영화’와 만난다는 점이다. 조르조 아감벤은 <세속화 예찬>에서 오슨 웰스의 <돈키호테>의 한 장면을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6분”이라 말한 바 있다. 장면의 시작은 종복 산초가 돈키호테를 찾아 시골 마을 영화관에 들어가는 데서 시작한다(타인의 손에 의해 편집된 칸 공개 버전에는 이 장면이 빠져 있다). 산초는 극장에서 돈키호테를 찾지만 다가가지 못한다. 상영되는 영화 속엔 무장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한 여자를 위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영화를 지켜보던 돈키호테가 일어나 갑자기 스크린으로 돌진하여 스크린을 찢기 시작한다. 스크린은 암전되고 관객은 떠나지만 아이들은 이를 열렬히 환호한다. 허구(기사 이야기)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돈키호테는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오슨 웰스와 마찬가지로 테리 길리엄도 원작 내용의 재현을 넘어서 원작의 형식인 자기반영성과 상호텍스트성을 활용했다. 앞선 웰스의 장면과 유사한 장면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도 등장한다. 스페인의 시골 마을에서 돈키호테의 표지판을 보고 찾아간 곳에서 살아 있는 돈키호테를 보여주겠다는 노파를 만난다. 그는 돈을 내고 트럭에 설치된 이동식 극장에 들어가는데, 그 안에는 자신이 대학 시절 촬영한 돈키호테 영화가 상영되고 있다. 극장의 스크린 뒤에는 과거 영화에서 돈키호테 역할을 맡았던 노인 하비에르가 감금된 채 영화 내레이션을 하고 있었다. 산초의 모습에 토니의 얼굴이 겹치고 찢겨진 스크린 너머 돈키호테는 토비를 보고 그를 산초로 착각한다. 영화라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세계에 진입한 자가 현실과 영화를 구분하지 못한 채 그 속으로 돌진하여 스크린을 찢고 그 너머의 세계로 간다. 이는 사실 이전에 테리 길리엄의 <바론의 대모험>과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2009) 같은 현란한 바로크극들이 이미 보여준 설정들이기도 하다. 오프닝에서 흰색 상하의 슈트에 흰 모자를 쓴 토비의 의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차차 변하게 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우선 토비가 상사의 아내와 바람을 피우려다 도망칠 때 그는 검은 모자를 집어든다. 이 검은 모자의 주인인 집시는 기이하게도 토비가 가는 곳마다 등장하며, 영화의 초반 그에게 졸업작품 DVD를 건네는 것도 그다. 검은 머리의 집시는 우연히도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하고 때로 토비와 오인되기도 한다. 21세기 영화에 고하는 패배선언 나는 이 집시와 같은 캐릭터를 <바론의 대모험>에서 본 적 있다. 주인공인 허풍선이 바론 남작의 주위에는 늘 검은 베일로 된 옷을 입고 낫을 든 사신이 등장한다. 사신은 때로 다른 인물로 변신한 채 바론의 주위를 배회한다. 필멸의 운명에서 벗어나 기상천외한 모험을 하는 바론의 곁에 죽음이 배회하는 것처럼,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도 영화 전반적으로 죽음의 무드가 깔려 있으며 이를 상징하는 것이 검은 머리 집시며, 아마 그는 토비의 도플갱어일 것이다. 어쩌면 토비가 젊은 시절 영화 찍던 마을인 수에노스(단어의 의미는 ‘꿈’이다)로 향하는 장면에서부터 죽어 있던 것일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그가 방문한 수에노스 마을에서 예수의 고난,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성주간’(Holy Week) 가장행렬이 이루어지고 있음도 인상적이다. 영화 속 사람들은 스스로를 돈키호테로 착각하는 하비에르와 산초 취급 당하는 토비를 가장행렬 인물로 착각한다. 성주간의 가장행렬 장면은 영화의 후반부에 성에서 일어나는 거대한 가장무도회 장면과도 이어진다. 광고주인 보드카 회사 사장이 광기에 빠진 하비에르(돈키호테)와 토비(산초)를 골탕먹이기 위해 16세기 기사도의 시대처럼 꾸민 성에서 가장무도회를 연다. 그리고 영화 촬영 스탭들을 동원해 하비에르(돈키호테)에게 사악한 마법사와 맞서는 모험을 경험하게 한다. 이 작품에서 ‘영화’란 21세기의 사악한 마법이다. 광기에 빠진 순순한 몽상가를 기만하고, 그를 우스꽝스러운 구경거리이자 싸구려 스펙터클로 전락시킨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적 인물이 돈키호테적이지 않은 세상과 대적할 때 벌어지는 서글픈 상황을 풍자와 해학으로 승화시켰다. 테리 길리엄은 동시대 영화의 세계를 자신과 대적하는 세계로 인식하고 있는지 모른다. 몽상과 상상력만으로 놀라운 영화 세계를 만들어내던 시대를 지나, CG 디지털의 시대가 되자 테리 길리엄의 영화는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 채 힘을 잃었다. <그림형제: 마르바덴 숲의 전설>(2005)이나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처럼 CG를 한껏 활용하여 이미지의 권능을 과시한 영화들이 도리어 앙상하고 초라했다. 이번 영화의 대사 속에서 주위 사람들이 토비를 두고 CG를 싫어하는 감독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감독의 페르소나인 토비가 영상사업이라는 거대한 괴물에 기만당한 채 돈키호테를 (상징적으로) 죽이고 그 죄책감을 잊기 위해 망상 속에 빠져 스스로를 돈키호테라 선언하고 모험을 떠나며 끝난다. 이는 20세기 영화가 21세기 영화에 내리는 패배 선언이며, 망상과 광기 없이 할리우드에서 생존할 수 없음에 대한 성찰인 셈이다.

[주성철 편집장] <기생충>에 대한 프랑스의 열광적 반응

지난 6월 5일 프랑스(현지시각)에서 개봉한 <기생충>이 첫 주말을 보내고 5일을 경과하며, 25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는 역대 프랑스 개봉 한국영화 중 최고 흥행기록(68만명)을 세웠던 <설국열차>의 개봉주 흥행기록 23만 관객을 넘은 성적이다. 또한 <기생충>은 같은 날 개봉한 <엑스맨: 다크 피닉스>에 이어 프랑스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 597개 관으로 시작한 <엑스맨: 다크 피닉스>의 3분의 1 정도인 179개 상영관에서 개봉했지만 관객수는 <엑스맨: 다크 피닉스>가 거둔 49만 관객의 3분의 2 수준이다. 관객점유율로는 훨씬 앞섰다고 볼 수 있으며, 금주 중 300여개관 이상으로 확대 상영될 예정이다. 프랑스에서 <설국열차>가 <취화선>의 31만 관객 흥행 기록을 넘어서기까지 무려 12년이 걸렸는데, <아가씨>의 30만 관객과 <부산행>의 27만 관객이 그 뒤를 이었다. 이제 <기생충>이 <설국열차>가 세운 기록을 넘어설 것은 무난해 보이며, 15만 관객을 동원했던 <괴물>(2006)까지 더해 현재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는 한국 감독이 봉준호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2종으로 제작된 <기생충> 프랑스 포스터 중 박 사장(이선균)이 연교(조여정)에게 귓속말하는 장면으로 만든 두번째 포스터다(이번호 <기생충> 비평 기획 중, 김나희 평론가의 ‘프랑스 현지 개봉 리포트’ 66쪽 참조). 프랑스 관객에게 배우 이선균과 조여정이 낯설다는 점, 프랑스에서 개봉하는 영화 포스터에서 큼지막한 카피를 쓰는 일이 드물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로 그 귓속말 장면에 마치 말풍선을 넣은 것처럼 “너 스포일러하면 죽여버린다!”라는 카피를 넣은 것은 무척 위트 있으면서도 의미심장하다.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이후, 많은 프랑스 관객이 ‘<기생충>은 스포일러를 조심해야 하는 영화’라는 것을 이미 전반적으로 알고 있음을 전제한 포스터이기 때문이다. 김나희 평론가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도 이른바 ‘N차 관람’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모든 방송과 리뷰에서 ‘의식적으로’ 스포일러를 조심하고 있는 분위기라 한다. 분량상 다 담아내지 못한 리포트 내용으로, 김나희 평론가는 ‘현지 개봉 후 <기생충>에 평점 5점 만점을 주는 매체의 다양성’을 언급했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포지티프>처럼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영화전문지부터 대중적인 <텔레라마>, 좌파성향이 강한 일간지 <리베라시옹>, 중도 좌파 성향의 <누벨 옵세르바퇴르>, 연극 등 마이너한 장르를 지지하며 좌파적 성향을 진하게 보여운 <뤼마니테>, 시사주간지 <르푸앙> 등 매체의 특성과 결이 무척 다름에도 불구하고 27개 매체 모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이례적인 만장일치 만점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외 <르몽드> <피가로> <프리미어> 등에서는 4점을 줬다. 보통 프랑스에서도 영화제 수상작이 흥행과는 별도로 인정받는 분위기인데, <펄프 픽션>(1994) 이후 이 정도의 관객 반응을 끌어낸 것은 사실상 처음이 아닐까 싶다. 무려 24년 만의 일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고도 덧붙였다. 더불어 봉준호 감독의 전작 <옥자>를 함께한, 미하엘 하네케의 칸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무르>(2012)를 촬영한 다리우스 콘지 촬영감독이 지난 김나희 평론가와의 <옥자> 단독 인터뷰를 인연으로, 이번 <기생충>에 대한 감상을 <씨네21>로 전해왔다. 기사로 확인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기생충>에 관한 기사는 다음주에도 이어진다.

잘 가요! 명장면으로 복습해 보는 <엑스맨> 시리즈

<엑스맨> 시리즈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엑스맨: 다크 피닉스>(이하 <다크 피닉스>)가 지난 6월 5일 개봉했다. 그러나 <다크 피닉스>는 시리즈 사상 최악의 오프닝 스코어를 기록, 아쉬운 성적을 거두고 있다. 2000년 개봉한 <엑스맨>을 시작으로, 히어로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엑스맨> 시리즈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마지막이다. 그러나 시작이 있다면 끝은 존재하는 법. <엑스맨> 시리즈도 이제 보내줄 때가 됐다. 현시점에서 명장면을 통해 지난 <엑스맨> 시리즈를 복습하는 ‘추억팔이’ 시간을 가져보려 한다. 찬사를 받은 영화도, 혹평을 받은 영화도 있지만 그 모두를 아울러봤다. 장면은 주관적인 기준으로 선정했으며, 혹시 빠진 장면이 있다면 댓글로 남겨주시길 바란다. 세계관을 공유하지만 직접적인 연관적은 없는 <데드풀> 시리즈와 현재 상영 중인 <다크 피닉스>는 제외했다. ※ <엑스맨> 시리즈의 줄거리 스포일러가 대거 포함돼있습니다. 오리지널 삼부작 울버린과 더불어 <엑스맨> 시리즈에서 가장 두터운 팬덤을 보유한 캐릭터는 금속을 조종하는 능력자, 매그니토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는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간달프 역으로도 유명한 이안 맥켈런이 그를 연기, 관록의 카리스마를 자랑했다. 매그니토는 뮤턴트인 동시에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 소수를 향한 핍박을 경험한 그는 완강한 태도를 가지게 됐다. 영화의 초반부, 프로페서 X(패트릭 스튜어트)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자신의 앞을 막지 말라며 프로페서 X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는 모습은 전운이 감돌았다. 시리즈 전체를 보면 명장면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엑스맨> 시리즈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이 처음 드러났던 켈리 의원(브루스 데이비슨)의 탈출 장면. 매그니토의 실험으로 돌연변이가 돼버린 그는 신체가 늘어나는 능력을 이용해 감옥을 탈출한다. 액체 괴물이 떠오르기도. 매그니토와 울버린(휴 잭맨)이 맞붙는 기차 신, 그리고 이어지는 정류장 신은 매그니토의 놀라운 능력을 볼 수 있었던 장면이다. 온몸에 아다만티움이 심어진 울버린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경찰들의 총을 역으로 겨누는 매그니토. 금속을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처음으로 선보인 장면이다. <엑스맨> 시리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또 다른 캐릭터 미스틱(레베가 로미즌). 그녀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덕에 여러 명장면들을 탄생시켰다. 능력까지 구현할 수 있어 두 명의 울버린이 맞붙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위 사진은 울버린으로 변신했다가 본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다. 클로를 이용한 공격력도 있지만 울버린의 진짜 힘은 극강의 회복력을 자랑하는 ‘힐링 팩터’ 능력. 덕분에 생명력을 나누어 로그(안나 파킨)을 살려냈다. <엑스맨>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던 순간. 아주 잠깐 등장했지만, 죽지 않고 켈리 의원 행세를 하고 있는 미스틱의 모습도 반전을 선사했다. 마지막은 플라스틱 감옥에 갇힌 매그니토와 그를 방문한 프로페서 X가 체스를 두는 장면이다. 두 사람은 액션신 보다 대화가 오갈 때 더 큰 긴장감을 자아냈다. 가치관이 뚜렷이 갈리기 때문. 찰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By any means necessary)”라고 말하며 뮤턴트 탄압 정책을 막겠다고 하는 매그니토. 이는 강경파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X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후로도 체스는 오랜 세월 함께 해온 두 사람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단으로, 혹은 대립하는 은유로서 빈번히 등장했다. <엑스맨 2> 역시 동공을 확장시켰던 장면들이 다수 등장했다. 그 시작은 나이트 크롤러(알란 커밍)의 백악관 침투 신. 순간 이동이 가능한 그는 경호원들을 물리치며 순식간에 대통령의 코앞까지 도달한다. 화려한 액션에 웅장한 음악까지 더해져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미스틱이 주입한 철분을 간수의 몸에서 빼 내어 플라스틱 감옥을 탈출하는 매그니토. 그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여유로운 태도가 강조, 악역으로서의 위압감을 자랑했다. 다음은 새롭게 등장한 캐릭터 데스 스트라이크(켈리 후)와 울버린의 액션. 데스 스트라이크는 울버린의 능력을 토대로 만들어진 뮤턴트다. 다만 칼날이 손등이 아닌, 손톱에서 나온다.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둘의 대결은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했다. 투박한 울버린과 달리 스트라이크는 유연한 액션이 강조된 점이 돋보였다. <엑스맨>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장치 세레브로. 찰스의 텔레파시 능력을 극대화해 전 세계 사람들과 소통, 혹은 조종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기계다. <엑스맨 2>의 주요 빌런으로 등장하는 윌리엄 스트라이커(브라이언 콕스)의 계략에 빠져 모든 뮤턴트를 세레브로를 사용해 죽이려는 프로페서 X. 그러나 매그니토는 그와 미스틱의 능력을 이용해 타깃을 인간으로 바꾼다. 매그니토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질 뻔한 순간이다. 이후 이어지는 “잘 가게. 찰스(Good Bye Charles)”도 명대사. 진 그레이(팜케 얀센)는 이때 박수받으며 떠나야 했을 듯하다. 엑스맨 멤버들을 살리기 위해 밀려오는 강물을 막아내며 죽음을 택하는 진. 연인 스캇(제임스 마스던)의 절규가 안타까움을 더했다. <엑스맨: 최후의 전쟁>(이하 <최후의 전쟁>)에서 갑자기(?) 살아 돌아온 진 그레이. 이는 부족한 개연성으로 팬들의 질타를 받았지만 진과 스캇의 재회는 애틋함을 자아냈다. 헌신적인 사랑의 끝을 달린 스캇이 처음 맨눈으로 진을 마주했기에 더욱. 물론 영화의 문제점 중 하나였던 ‘캐릭터 죽이기’가 곧바로 이어지지만. 엑스맨의 수장 프로페서 X도 폭주한 진의 손에 허망하게 떠났다. 그러나 온몸이 분해되기 직전, 울버린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띠는 그의 표정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최후의 전쟁>에서 반전 묘미를 줬던 부분은 뮤턴트의 능력을 이용한 매그니토의 노림수. 인간들은 뮤턴트들의 캠프를 기습하지만 이를 미리 알아챈 매그니토는 분신술이 가능한 뮤턴트를 통해 뒤통수를 친다. 그 사이 매그니토는 섬 한가운데 위치한 인간들의 시설로 쳐들어간다. 이때 “찰스는 인간과 뮤턴트 사이의 다리가 되고 싶어했지”라고 말하며 거대한 철교를 통째로 옮겨 버린다. 센스 있는 대사와 함께, 오리지널 시리즈 속 매그니토는 능력 범위의 정점을 찍었다. 그렇게 폭주하던 진은 울버린의 손에 사망했다. 지금은 진부해진 소재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제 손으로 죽이는 장면은 울버린 팬들의 마음도 덩달아 아프게 했다. <최후의 전쟁>은 부족한 개연성, 산만한 스토리 등으로 혹평을 받았지만 오리지널 삼부작을 마무리한 중요한 장면이다. 프리퀄 시리즈 <엑스맨> 시리즈의 양대 산맥, 프로페서 X와 매그니토의 시작을 다룬 만큼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이하 <퍼스트 클래스>)는 매 순간 명장면이 넘쳐났다. 그 첫 번째는 <엑스맨>의 시작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오프닝. 2006년 혹평을 들으며 마무리된 줄 알았던 <엑스맨> 시리즈가 다시 부활한 벅찬 순간이다. 맥주 광고 아니다. 에릭(마이클 패스벤더)은 나치 잔당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술집으로 찾아간다. 일순간에 그들을 처단할 수 있었지만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후 복수를 강행하는 에릭. 그 사이 흐르던 긴장감은 마치 스파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퍼스트 클래스>는 기원을 시작점을 다룬 만큼 ‘ㅇㅇ했던 첫 순간’이 여럿 등장했다. 위 장면은 레이븐(제니퍼 로렌스)이 처음으로 매그니토, 프로페서 X라는 닉네임을 지어주는 순간. 철없는 행동을 하는 어린 뮤턴트들이 혼이 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곱씹어 보면 의미가 큰 장면이다. 스틸컷은 섬뜩하지만 실제로는 감동적인 장면이다. 찰스(제임스 맥어보이)의 도움으로 분노가 아닌 행복한 기억으로도 힘을 끌어올리는 에릭. 그는 눈물과 함께 미소 지으며 한 단계 더 성장한다. 이 장면 덕에 마이클 패스벤더는 ‘이빨 부자’, ‘상어’라는 별명이 생겼다. 미스틱이 왜 본모습인 파란색 피부를 고집하게 됐는지도 밝혀졌다. 남들과 다른 외모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레이븐은 “숨을 필요 없다”는 에릭의 말을 듣고 더 이상 스스로를 숨기지 않는다. 화룡점정으로 파란색 레이븐을 보고 “완벽하다”고 말하는 에릭. 미스틱이 왜 그토록 매그니토를 따르게 됐는지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묘한 로맨스가 흐르기도. 드디어 모든 원흉이었던 세바스찬 쇼(케빈 베이컨)을 죽이는 데 성공한 에릭. 그러나 그는 곧바로 세바스찬이 사용하던 텔레파시 능력을 막는 헬멧을 쓴다. 훗날의 매그니토 하면 빠질 수 없는 아이템이자 찰스와의 대립이 본격화되는 시점이다. 이어지는 뮤턴트들을 향한 인간들의 폭격. 에릭은 능력으로 미사일을 돌려보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립해야 한다고 주장, 찰스는 화합을 주장한다. 결국 미사일은 찰스의 저지로 공중분해되지만 그 과정에서 찰스는 에릭의 실수로 허리에 총알이 박힌다. 두 사람이 왜 갈라서게 됐고, 프로페서 X가 왜 걸을 수 없었던지를 박진감 넘치게 풀어냈다. 그렇다. 또 에릭 렌셔다. <퍼스트 클래스>는 거의 매그니토의 탄생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화의 엔딩 역시 에릭이 스스로를 매그니토라고 지칭하며 막을 내렸다. <퍼스트 클래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유전자 세포를 지나 세레브로가 닫히는 오리지널 삼부작의 오프닝. 그러나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이하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는 이를 음악까지 그대로 가져왔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다시 복귀, 오리지널 삼부작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다. 그렇게 영화는 시리즈의 흑역사로 불린 <최후의 전쟁>을 시간 여행을 통해 갈아엎는데 성공, 완성도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 이어지는 센티널과 뮤턴트들의 결투. 이전까지는 개개인의 능력이 강조됐다면 이 장면은 협공을 통해 더욱 화려한 액션을 자랑했다. 그러나 결국 센티널 앞에 맥없이 쓰려지며 말 그대로 ‘이길 수 없는 적’에 대한 공포까지 유발했다. 새로운 신 스틸러도 탄생했다. 엄청난 속도를 낼 수 있는 퀵실버(에반 피터스)다. 여타의 영화에서 빠른 캐릭터는 CG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현했지만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는 반대로 그 이외 모든 것이 느리게 연출했다. 덕분에 신기하면서 코믹한 장면이 완성됐다. 긴박한 상황이지만 혼자서만 여유로운 퀵실버가 듣는 곡, 짐 크로스의 ‘Time in the Bottle’도 한몫했다. 역시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가 호평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오리지널 삼부작과 프리퀄 시리즈를 완벽하게 아울렀기 때문. 이를 가장 잘 대변한 장면은 젊은 날의 찰스와 노년의 찰스가 서로 얼굴을 맞대며 대화하는 부분이다.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장면을 완벽히 구현, 팬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에서 모든 뮤턴트들을 살린 일등 공신은 레이븐이다. 에릭을 따라 인간들에게 복수할지, 혹은 찰스를 따라 화합을 추구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상황. 끝내 총을 내려놓은 그녀는 미래를 바꿨다. 바로 이렇게. 바뀐 미래에서 깨어나 죽었던 진과 사이클롭스를 마주하는 울버린. 이야기 상으로도 감동을, 영화 외적으로는 흑역사를 완벽하게 지우는 데 성공했다. 프리퀄 시리즈를 보면 매그니토가 왜 악역으로 변모하게 됐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는 항상 인간들의 과오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는다. 이런 에릭의 ‘짠내’가 폭발한 것은 <엑스맨: 아포칼립스>에서. 매그니토라는 이름을 버리고 평범히 살아가려 했지만 그는 동료들의 밀고로 아내와 딸을 눈앞에서 잃는다. 퀵실버 또다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때와 같은 기법으로, 거기에 더욱 커진 스케일로 모든 동료들을 구했다. 그 유명한 유리드믹스의 ‘Sweet Dreams’가 흘러나오며 경쾌한 분위기를 더했다. <아포칼립스>는 <엑스맨> 시리즈 중 스펙터클 면에서는 최고치를 자랑했다. 최초의 뮤턴트 아포칼립스(오스카 아이작)는 찰스를 조종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핵폭탄을 모두 우주로 날려보낸다. 베토벤 교향곡 7번과 함께, “바벨탑을 세운다 한 들 신에게는 닿을 수 없다”라는 아포칼립스의 외침은 웅장함을 극대화했다. 이 장면에서 마블의 대부, 고 스탠 리가 부인과 함께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이외에도 매그니토가 금속이 아니라 자기장 자체를 조종하는 것, 아포칼립스가 순식간에 피라미드를 세우는 장면 등이 있었다. 신 스틸러 역할을 한 만큼 이 장면도 선정했다. 사실 그는 매그니토의 숨겨진 아들. 그러나 정작 매그니토와 마주한 순간, 그는 이를 밝히지 못하며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가히 <엑스맨> 시리즈의 홍길동이 됐다. 명장면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퍼스트 클래스>의 장점 중 하나였던 ‘ㅇㅇ한 순간’도 등장했다. 제임스 맥어보이 팬들에게는 안타까움을 줬을 장면이다. 프로페서 X는 나이가 들어 대머리가 된 것이 아니었다. 아포칼립스의 숙주가 될 뻔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 <다크 피닉스>의 등장은 이미 <아포칼립스> 때부터 암시됐다. 아포칼립스를 자신의 정신 공간으로 끌고 와 막으려 한 찰스. 그러나 그 힘에 비례해 거대한 크기로 표현된 아포칼립스를 막지 못한다. 절망스러운 상황을 모두 뒤엎는 것은 봉인됐던 능력을 해방하는 진 그레이(소피 터너). 힘의 일부였음에도 아포칼립스를 재로 만드는 모습은 <엑스맨> 세계관 속 최강자다운 면모를 자랑했다. 울버린 삼부작 울버린의 울부짖음은 언제 봐도 처연하다. 과거를 청산하고 아내와 행복한 삶을 꾸리지만 이마저도 이루어지지 않는 로건. 그가 어떻게 울버린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됐는지도 이 장면 직전에 등장했다. 오리지널 시리즈에서 매번 울버린의 기억으로만 문득문득 등장하던 장면. 바로 아다만티움 이식 장면이다. <엑스맨 탄생 : 울버린>에서는 그 전체가 등장했다. 기억이 지워지고 몸에 아다만티움이 주입된 채 깨어나는 울버린. 폭주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모습은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워 보였다. 데드풀이 찾아와 총구를 겨눌 듯하지만 언급 안 할 수가 없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고 있지만 차마 명장면이라 말할 수는 없는 그 장면. 울버린과 웨이드(라이언 레이놀즈)의 결투 신이다. 온몸이 개조당한 웨이드는 끔찍한 혼종이 됐다. 울버린과 같은 능력에 순간 이동이 가능, 눈에서는 레이저까지 쏜다.(심지어 배역 이름도 데드풀) 이 장면만큼은 <데드풀 2>의 백미였던 진짜 데드풀의 타임라인 정리로 대체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붙잡혀 있던 울버린. 그는 힐링 팩터 능력으로 원자폭탄이 터지는 순간에도 살아남는다. 불멸을 중심 소재로 잡은 만큼 그 한계치를 보여주며 이목을 끈 도입. <스파이더맨 2>, <원티드> 등 기차 액션 하면 생각나는 영화들이 있다. <더 울버린>도 기차 위에서의 액션 신만큼은 그 대열에 합류해도 좋을 듯하다. 울버린의 클로를 활용해 마치 암벽을 기어오르며 싸우는 것처럼 연출했으며 주위 사물을 통해 독특한 장면을 완성했다. 마지막 영화는 울버린 그 자체가 된 휴 잭맨의 완벽한 퇴장 <로건>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든 <로건>은 히어로 울버린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로건에 초점을 맞췄다. 힐링 팩터 능력을 점점 잃어가는 로건의 ‘짠내’ 가득한 모습이 시종일관 유지된다. 도입부터 무덤에 서있는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포착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그토록 강력했던 클로도 하나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맨손으로 피를 흘리며 빼낸다. 로건 앞에 나타난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토대로 한 작은 뮤턴트 소녀 로라(다프네 킨). 청소년 관람불가를 택한 <로건>인 만큼, 그녀는 어린아이라는 특성에 맞는 민첩하고 유연한 몸놀림으로 적들을 잔혹하게 죽인다. 반전과 함께 완성도 높은 액션이 돋보였다. 퀵실버처럼 연출이 돋보였던 장면도 있다. 치매에 걸려 자신도 모르는 채 주위 모든 이를 죽이게 되는 병에 걸린 프로페서 X. 로건 일행이 휴식을 취하던 호텔에서 그의 증세가 다시 시작된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이 장면에서 화면을 마구잡이로 흔들어 시공간이 무너지는 듯한 효과를 줬다. 눈알만 움직일 수 있는 디테일 등도 긴장감을 더했다. 역시 프로페서 X의 죽음은 <최후의 전쟁>에서가 아닌, 이 장면에서라고 말하고 싶다. 로건과 떠나기로 한 희망의 배, ‘선시커’를 나지막이 내뱉으며 숨을 거두는 그는 팬들의 눈물샘 자극 1차 포인트였다. 새로운 캐릭터 칼리번(스테판 머천트). 햇빛을 보면 피부가 타버리는 그는 적들에게 붙잡혀 고통받는다. 그리고 끝내 로건 일행을 위해 자폭을 선택한다. 로건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약물을 투여,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끌어올린다. 힘겹던 그가 드디어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만큼 멋짐보다는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엑스맨> 팬이라면 이 장면을 보고 눈시울 붉어졌을 것이다. 끝내 목숨이 다한 로건. 로라는 그의 무덤을 만들고, 꽂혀 있는 십자기를 눕혀 X로 만든다. 오랜 시간 사랑받았던 캐릭터와 배우를 향한 예우란 이런 것이 아닐까.

[TVIEW] <백종원의 요리비책>, 참 쉽죠?

“만들 수 있는 요리가 일곱 가지입니다. 일곱 번째 순서가 지나가면 다시 첫 번째 요리로 돌아간답니다.” 1980년 이후로 요리를 하지 않았다는 미국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말을 보며 생각했다. 아니, 일곱 가지나? 카레, 떡볶이, 박막례표 간장국수… 다시 카레로 돌아가던 중, 유튜브 채널 개설 사흘 만에 구독자 100만명을 훌쩍 넘긴 <백종원의 요리비책>을 클릭했다. 목살이 없으면 아무 돼지고기나, 새우젓이 없으면 액젓, 하지만 국간장이 없으면 진간장은 조금만 넣어야 한다며 느슨한 듯하면서도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지 않는 백종원의 입담은 요리 의욕이 0에 수렴하는 사람마저 사로잡는다.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tvN <집밥 백선생>, SBS <골목식당>의 레시피와 솔루션을 합쳐놓은 듯한 이 채널에서 특히 보는 재미가 있는 것은 한 가지 메뉴를 100인분씩 만드는 업소용 대용량 레시피다. 커다란 냄비에 돼지고기 10kg을 한꺼번에 익혀 제육볶음을 만들고, 마요네즈를 3.4kg이나 턱 쏟아넣어 감자 ‘사라다’를 완성하는 능숙한 손놀림에는 <메가팩토리> 같은 다큐멘터리를 볼 때처럼 경이로운 중독성이 있다. 그리고, “절대 우리 팀들은 좌절하실 필요 없습니다”라는 격려에 힘입어 일주일 전 카레를 만든 뒤 처치 곤란해진 감자, 당근, 양파를 꺼내기로 했다. 곧 만들 수 있는 요리에 감자 샐러드가 추가될 것 같다. 재료를 100분의 1로 무사히 계량할 수만 있다면….

[파리] 프랑스 노장 알랑 카발리에 감독의 <살아 있기와 알기>

올해 87살인 프랑스 노장 감독 알랑 카발리에가 신작 다큐멘터리 <살아 있기와 알기>로 관객을 만났다. 감독의 전작 <파테르>는 프랑스의 국민배우 뱅상 랭동이 국무총리 역을 맡고 카발리에 자신이 공화국 대통령으로 변신, 최저임금이 아니라 최고임금을 법으로 규정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치인 역할 놀이를 소형 DV 카메라로 촬영해 2011년 칸국제영화제 상영 시 20분간의 기립 박수를 받았다. <살아 있기와 알기>는 시나리오작가 에마뉘엘 베른하임에게 바치는 오마주다. 카발리에와 베른하임은 30년이 넘게 우정을 쌓아왔다. 베른하임은 스위스에서 ‘적극적 안락사’로 생을 마감했던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다 잘 끝났습니다>라는 자서전으로 발간했다. 2005년 <필름 맨> 이후 꾸준히 삶과 죽음의 경계를 탐구해온 감독은 소설가 베른하임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어 했고, 두 사람은 함께 각색 작업을 시작한다. 감독은 소설가에게 그의 장기인 ‘역할 놀이’를 제안한다. 베른하임은 그대로 아버지를 보내는 자신의 역할을 맡고, 감독은 소설가의 죽어가는 아버지 역할을 맡고 싶다는 거다. 그런데 갑자기 소설가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두 사람의 역할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올해 칸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서 상영된 이 작품에 대해 프랑스 언론은 “범속하면서도 깊이 있는 걸작”(<레 피쉬뒤 시네마>), “삶을 향한 전율적 찬가”(<르피가로>), “위엄 있으면서 감동적인 다큐멘터리”(<프리미어>), “부끄럽고 시적인 일기. 가슴을 아리게 한다”(문화 주간지 <텔레라마>)라고 입을 모아 극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