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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반환 이후의 이미지들: 1997년 이후의 홍콩독립영화’에서 만난 감독들

1997년 이후 홍콩영화 더이상 전과 같을 수 없다 지난 12월 1일 오후 6시 20분 CGV아트하우스 압구정 아트1관에서 ‘반환 이후의 이미지들: 1997년 이후의 홍콩독립영화’를 주제로 한 대담이 열렸다. 올해 서독제는 홍콩아시안영화제와 함께 1997년 이후 주목할 만한 홍콩 독립영화 10편을 모았다. 김성훈 <씨네21> 기자의 진행으로 열린 이번 대담은 클라렌스 추이 홍콩아시안영화제 집행위원장이자 홍콩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 디렉터, 윤영도 성공회대학교 교수, <메이드 인 홍콩>(1997)의 프루트 챈 감독, <대람호>(2011)의 제시 창 취이샨 감독, <10년>(2015)의 앤드루 초이 프로듀서가 참여했다. 1997년 이후의 홍콩과 홍콩 영화산업에 대한 밀도 있는 이야기가 오간 자리였다. -1997년은 홍콩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진 해인지, 홍콩영화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클라렌스 추이_1997년 7월 1일은 홍콩이 영국 식민지에서 특별행정국으로 바뀐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정권뿐 아니라 홍콩 사람들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겼다. 홍콩 사람들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거다. 1980년대부터 97년까지 수많은 홍콩 영화감독들, 특히 허안화나 왕가위 등이 대표적으로로 홍콩 반환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면서 이를 영화에 담으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함께한 프루트 챈 감독의 <메이드 인 홍콩>,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1998), <리틀 청>(1999) 모두 이러한 주제의 맥을 이어갔다. =윤영도_1997년이 지금 홍콩의 첫 출발인 셈이다. 1980년대부터 홍콩영화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92년쯤부터 텔레비전을 틀면 배우 주윤발, 주성치, 이연걸, 성룡 등이 출연하는 영화가 나왔다. 당시 영화산업이 그렇게 발전하지 못했던 우리나라는 한해 50~60편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홍콩은 무려 300편을 만들 정도였다. 수치로 따지면 전세계에서 할리우드와 인도 다음이 홍콩이었고, 수출액으로 따지면 홍콩이 2위였다. 홍콩이 반환 직전의 위기상황을 겪고 있던 94년, 홍콩 영화산업은 인기의 정점을 찍자마자 썰물 빠지듯 자본이 빠져나갔고, 이후 침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매해 20%씩 하락하더니, 97년에는 홍콩의 굵직한 영화사들이 전부 사업을 접기 시작했다. 일년 뒤에는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홍콩 영화시장은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후 유명한 배우들은 할리우드나 중국으로 넘어갔다. -<메이드 인 홍콩>은 반환 직전 홍콩인들의 불안감을 그린 작품이라는 점과 8만달러 정도의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었다는 시도에서 큰 의미가 있다. =프루트 챈_그 당시에도 나는 한두편 정도의 상업영화를 찍고 있었다. 상업영화를 찍는 감독 중 한명도 홍콩 반환을 주제로 다루려 하지 않아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각본을 쓰기 시작한 게 <메이드 인 홍콩>이다. 비록 저예산이었으나 당시 홍콩 반환에 무관심했던 홍콩 사람들에게 이러한 주제가 진실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랬기에 내게도 더 의미 있는 영화다. 당시 영화를 찍은 후 필름이 남아서 홍콩이 반환되는 새벽에 해방군이 홍콩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찍었다. 불꽃놀이 장면도. 이게 <그해 불꽃놀이는 유난히 화려했다>에 들어간다. 작품에 반영해야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찍은 건 아니었다. 다만 찍고 나서 보니 역사는 항상 변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아시아 금융위기,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세파(포괄적 경제동반자 협정) 등 홍콩 반환 직후에도 중요한 사회적 사건이 일어난다. 프루트 챈_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홍콩 영화산업은 완전히 침체됐다. 세파 협정 이후 홍콩은 중국과 합작 영화를 만들 수 있었지만 심사라는 이름하의 검열을 거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홍콩 관객은 중국과의 합작 영화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홍콩 정부가 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을 차츰 늘려가며 신진 감독들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클라렌스 추이_조금 보충하자면 80, 90년대에 활동하던 감독들은 식민지 시절과 홍콩 반환을 함께 겪었다. 그 외에도 천안문사태 등 일련의 정치사건과 사회현상들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홍콩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를 표현하는 데 젊은 세대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메이드 인 홍콩>은 홍콩에서 먼저 상영하지 못하고 1997년 로카르노국제영화제, 밴쿠버국제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 등의 해외 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홍콩영화계의 침체 속에 아시아 금융위기까지 겪으면서 더 이상 상업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수출하지 않고 영화제를 통해 해외진출을 도모한 것이다. 윤영도_기존의 영화계에 이름난 거물급 인사들은 대륙이나 할리우드에 진출해서 활동을 이어나갔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의 환경은 더 열악해졌다. 중국과의 합작 시 정치적으로 중국을 비판하면 안되고 마약이나 미신 등도 등장시킬 수 없었다. 홍콩에서 기획해서 만든 영화지만 중국영화 같은 영화만 남게 되었던 게 당시의 분위기였다. -제시 창 취이샨 감독과 앤드루 초이 프로듀서가 바로 그 젊은 세대들이다. =제시 창 취이샨_1997년 나는 영화를 공부할 수 있는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프루트 챈 감독의 <메이드 인 홍콩>은 내게 영감을 준 영화다. 중간에 홍콩을 떠나 베이징으로 가서 일도 하고, 내 삶을 돌아보는 시간도 가졌다. 단편영화도 찍었고 저예산 장편영화도 찍으며 차츰 상업영화쪽으로 규모를 넓혀갔다. =앤드루 초이_2012년 홍콩 특별행정 정부가 중국에 대한 애국을 강조하는 과목을 필수 교과로 지정하는 국민교육을 도입하려다 시민들의 반발로 철회했었다. 이는 홍콩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정체성에 큰 깨달음을 준 사건이었다. 이후 우산혁명을 비롯한 여러 사건을 통해 젊은 세대가 정치나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제시 창 취이샨_앞서 이야기한 국민교육 사건 이후 홍콩 내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시민들은 정치나 사회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우리 또래의 젊은 세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시기 나를 포함한 홍콩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런 지점들을 자연스레 영화에 담아내게 된 것 같다. 클라렌스 추이_세대간 차이도 눈에 띄지만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사이의 관계에서도 흥미로운 지점이 보인다. 상업영화를 많이 찍는 배우들이 더 적극적으로 독립영화를 지지한다. 또한 홍콩의 유명 연예인들도 사회적 이슈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독립영화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고 직접 영화에 참여하곤 한다.

[파리] 프랑스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 평단의 호평 쏟아져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는 파리의 한 의대 냉장고에서 깨어나는 잘린 손과 함께 시작된다. 손은 창문으로 아슬아슬하게 탈출한 다음 잃어버린 자신의 몸을 찾아 도시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손의 시점으로 경험하는 파리와 그 외곽의 풍경은 모질고 참혹하지만 동시에 기이한 시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이 괴상한 오디세이는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를 잃고 프랑스에 보내진 마로크 출신 청년 나우펠(손의 주인)이, 양파를 추가한 피자와 존 어빙 소설을 좋아하는 가브리엘이라는 소녀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와 동시에 진행된다. 기욤 로랑의 소설 <해피 핸드>가 원작으로, 소설에서는 손의 내레이션을 통해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제레미 클라핀 감독은 손의 목소리를 아예 없애는 대신 손의 시점에서 바라본 감각적이고 촉각적인 화면으로 거대한 거미를 닮은 이 신체의 일부에 관객이 감정이입하도록 유혹한다. 이 작품은 클라핀 감독의 첫 장편 데뷔작으로, 2019년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청되어 그랑프리상을,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장편부문 크리스털상을 수상했다. 영화 전문 월간지 <프리미어>는 “자크 오디아르 이후 프랑스 영화에서 이렇게 우아한 미장센을 본 적 없다”, 문화 주간지 <텔레라마>는 “익살과 시가 넘치는 훌륭하고 강렬한 애니메이션 스릴러”, 영화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얼마나 열정적인 길을 열어가는지 금세 느낄 수 있다”라며 극찬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 – 떠오르는 감독의 초상

데뷔작 <워터 릴리스>(2007), <톰보이>(2011), <걸후드>(2014)까지 셀린 시아마는 동시대의 소녀들, 젊은 여성들의 정체성과 관계맺음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그런 감독이 자신의 첫 시대극을 만들면서 18세기 여성들의 삶을 오늘날과 공명하도록 매우 선명한 비전을 갖고 꿰어낸 작품이다. 1980년생, 프랑스의 감독이자 각본가로 활동해온 셀린 시아마는 간결한 화면 구성과 전개를 추구하는 미니멀리즘적 성향을 보여왔다. <톰보이>로 자신을 남자로 생각하는 10살 여자아이의 첫사랑과 성장기를 그려내면서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테디상을 수상했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으로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영화제 기간 중 가장 훌륭한 평가를 받은 작품 중 하나였기에 각본상을 수상한 것이 다소 아쉬운 결과라는 평가도 받았다. 작품의 완성도는 물론 시기적인 면에서 셀린 시아마의 커리어에 감독상이 가장 적합해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워터 릴리스>에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이르기까지 관객과 비평가들이 입을 모아 셀린 시아마의 매 작품이 진보하고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는 점이다. 어쩌면 칸이 이 영화에 각본상을 준 것은, 시아마의 놀라운 능력이 아직 시작일 뿐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아마는 예술가이면서 열렬한 활동가다. 2018년 제71회 칸영화제에선 영화계의 성평등을 촉구하는 레드카펫 퍼포먼스에 참여해, 칸 뤼미에르 극장 앞에서 82명의 여성 영화인들과 행진을 벌였다. 그는 (당시) 7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이 오직 제인 캠피온뿐이라는 사실(명예황금종려상까지 포함한다면 아녜스 바르다도 해당한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감독 중 하나였다. 시아마는 또 2020년까지 프랑스의 영화, 텔레비전을 비롯한 미디어 업계의 남녀 성비를 50대 50으로 끌어올리자는 ‘50/50 무브먼트’의 창시자 중 한명이다. 공교롭게도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19세기의 시대 배경을 비롯해 거친 자연을 뚫고 외딴섬에 진입한 여성 예술가로부터 파생되는 이야기 구조, 자연을 묘사하는 방식 등에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제인 캠피온 감독의 <피아노>와 비교해보고 싶어지는 작품이다. 유사한 컨셉 안에서 캠피온의 영화는 이성애를, 시아마의 영화는 동성애를 그린다. <피아노>가 섹슈얼리티에 기반해 여성의 각성과 주체성에 집중했다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주제의 구현보다도 두 사람의 사랑과 감정 그 자체를 응시하면서 보다 현대적인 태도를 고수한다. 캐릭터로서 두 사람의 자립성과 주체성은 이미 충분히 완성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전자는 사랑을 실현하지만 후자는 시대적 제약으로 헤어지는데, 시아마의 영화는 이 과정에서 퀴어영화가 주로 부각하는 대단한 갈등이나 비극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는다. 그저 절절한 레즈비언의 사랑 이야기, 훌륭한 멜로 장르를 어떻게 힘 있게 창조할 것인가에 몰두하고 있다. 이는 셀린 시아마가 자신을 레즈비언이라고 소개하고, ‘피메일 게이즈’ 이상으로 레즈비언 중심의 영화가 이성애 중심의 영화만큼 영향력을 갖길 원한다고 고백한 것에서도 그 출처를 확인할 수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오랜 투쟁과 분명한 의식이, 영화라는 예술에 숨결처럼 스며든 결과다.

<프로디걸 선> 연쇄살인마 아버지와 프로파일러 아들의 수사드라마

프로파일러와 연쇄살인마가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범죄수사드라마 <프로디걸 선>. 디즈니에 인수된 이후 새롭게 재정비한 가 야심차게 내놓은 신작이다. FOX 엔터테인먼트와 벌랜티 프로덕션, 워너브러더스 텔레비전이 공동 제작했으며 지난해 9월 에서 2편의 파일럿이 방영된 이후 시즌 첫 번째로 22개 에피소드의 풀시즌 오더를 받았다. 미국 드라마 <워킹데드>에서 지저스 역으로 국내에 이름을 알린 톰 페인과 <닥터 두리틀> <패신저스> 등에서 열연한 마이클 신이 주연을 맡아 부자 관계로 등장한다. 연쇄살인마와 프로파일러의 대립은 너무도 익숙한 설정이지만, <프로디걸 선>은 여기에 가족사를 덧입혀 기존 수사물과의 차별화를 꾀한다. 또한 <프로디걸 선>은 가을 시즌 1849타깃 시청률 1위라는 쾌거를 이루며 고유의 장르적 매력이 여전히 유효함을, 충성도 높은 팬덤 또한 두텁게 존재함을 증명해냈다. 2월 7일 캐치온에서 첫 방송되며 2월 10일 캐치온 VOD 및 모바일 앱에서 동시 공개된다. 같은 듯 다른 부자의 공조수사 <프로디걸 선>의 공식 포스터는 극의 주요 서사를 압축해 보여준다. 과일 껍질처럼 벗겨낸 말콤(톰 페인)의 표피 사이로 속살처럼 드러난 마틴(마이클 신). 마트료시카처럼 겹쳐져 있는 두 인물의 시선은 같은 장소에 안착한다. 말콤은 아버지 마틴의 살인마로서의 본성이 자신에게도 발현될까 두려워 사력을 다해 그로부터 도망쳐왔다. 그러나 피의 운명은 가혹하리만치 질겨서, 그를 자석처럼 끌어와 다시 한번 마틴 앞에 세운다. 둘 앞에 펼쳐진 살인사건은 마틴에게 피가 끓는 흥미로, 말콤에게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다가온다. 말콤은 FBI의 프로파일러다. 때로 의욕이 너무 앞서 자신과 동료를 위험에 빠트리기도 하는데 그 빈도가 잦아지자 FBI는 그를 권고 퇴사시킨다. 여기에는 그가 “외과의”라는 별칭의 유명 연쇄살인마의 아들이며 과거사로 인해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 또한 참작되었다. 이후 그는 뉴욕경찰(NYPD)의 자문 요원 일을 시작한다. 그곳에서 맡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버지의 카피캣임을 깨달은 말콤은 자문을 얻기 위해 마틴을 찾아간다. 10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함께 사건을 수사하기 시작한다. <프로디걸 선>은 여러 수사드라마를 자연스레 연상시키는 작품이다. 과학수사물계의 대부인 시리즈로 시작해 ‘레드존’이란 정체불명의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멘탈리스트>, 단시간에 수많은 단서를 조합해 범죄를 재현하는 <셜록>, 범죄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사건을 풀어가는 <마인드 헌터> 등 굵직한 작품들의 흥행 요소들을 영리하게 차용한다. 특히 연쇄살인마와 프로파일러의 대척 관계라는 설정은 흥미롭지만, <셜록> 이후 일종의 클리셰처럼 자리 잡은 터라 새롭진 않다. 그렇다면 <프로디걸 선>은 앞선 작품들의 동어반복일까. 이런 우려를 감지한 듯 <프로디걸 선>은 ‘가족’이란 패를 꺼내든다. 드라마는 범죄와 수사 양극단에 위치한 두 인물을 부자 관계로 엮으며 수사물이라는 레드오션에서 자기 영역을 확보한다. 그리고 그 영역의 중심에 말콤을 세운다. 사건의 중심에 선 프로파일러 말콤은 수사드라마 속 인물치고 밀도가 높다. 이유인즉 그가 다양한 시공간과 사건들의 교차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는 마틴을 밀고한 장본인이다. 그가 아버지의 ‘취미방’에서 시체가 담긴 박스를 발견한 것이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다. 아버지는 체포되었으나 해당 시체는 마지막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부모는 그가 헛것을 봤다 말하지만 그는 반복해서 박스 앞으로 불려가는 악몽을 꾼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말콤이 아버지의 본성을 확인한 동시에 그 본성이 자신에게도 존재할까 두려워하기 시작한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안은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며 그가 여타 프로파일러 캐릭터들과 다른 궤적을 그리게 한다. 매 순간 냉정함을 유지하는 기존의 프로파일러들과 달리 말콤은 감정적이며, 사건을 과격하게 해결한다. 사건 장소에서 의견을 달리한 보안관을 폭행해 FBI에서 해고당하고, 폭탄에 묶인 피해자를 구출하기 위해 손을 자르는 식이다. 잘린 손이 담긴 아이스박스를 들고 병원으로 달리는 말콤의 눈은 섬 할 만큼 반짝인다. 단순히 사건을 해결해 기뻐서가 아니라 혹시 피를 보고 흥분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혹시’라는 의구심은 말콤 스스로 그러했듯이, 시청자의 내면에 자리 잡은 채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그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게 만든다. 살인마의 피가 흐르는 수사관의 숙명인 셈이다. 또한 그는 낮에는 현재의 사건을, 밤에는 과거의 사건을 탐구하며 시공간을 확장하는 인물이다. 낮에는 NYPD의 프로파일러로서 사건을 해결하고, 밤에는 꿈속에서 과거 실종된 시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아버지와의 반복된 만남은 마들렌처럼 그의 과거 기억을 조금씩 불러일으킨다. 어둠 속의 조각들이 짜맞춰지면서 그는 사건의 외부자로 물러나 있던 어머니가 누구보다 깊이 개입하고 있었음을 기억해낸다.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 그에 얽힌 인물과 사연 등 말콤은 개별자로 존재하는 요소들을 하나의 실로 꿰어가며 극을 이끌어간다.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따라가기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말콤에게 너무 많은 역할을 부여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캐릭터들의 비중이 적다. 특히 마틴의 경우, 사건 발생-조언-해결이라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 너무 얕게 소비된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말콤 역시 짜임새가 헐거운 인물이다. 셜록처럼 예리하게 단서를 찾지만 그만큼의 논리가 부족하다. 드라마 구조상 시청자는 말콤에게 의지하게 되는데, 논리가 약할 경우 충분히 납득하며 따라가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말콤은 단순한 프로파일러가 아니다. 그는 매회 아버지의 자문을 통해 현재 사건을 해결하는 동시에 과거 사건을 추리할 단서를 얻는다. 말콤은 시공간을 초월해 자기 존재와 사건을 탐구하는 탐험가이자, 그 미지의 영역으로 시청자를 이끄는 인도자다.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살인마의 행적을 뒤쫓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말콤이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걸을지, 아니면 거리를 둘지 시청자는 알 수가 없다. 그가 자기 심연의 퍼즐을 완성한 뒤엔 어떻게 될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마지막까지 의심하고 궁금해하며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콘텐츠 전쟁 3] 인재 영입 경쟁이 콘텐츠 산업에 끼칠 영향은

인사가 만사다. 영입 인사를 보면 거대 제작사들이 어디에 주안점을 두고 있는지 보인다. 일단 카카오M은 모바일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준비하면서 지상파 출신 예능 PD들을 대거 영입하고 있다. 카카오M은 20분 미만의 디지털 콘텐츠를 제작할 디지털콘텐츠 스튜디오(가칭)의 제작 총괄로 <뜨거운 형제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비긴 어게인>을 연출한 오윤환 PD를 선임했다. MBC every1에서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를 연출했던 문상돈 PD,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박진경 PD, 같은 프로그램에서 실험대상으로 등장해서 ‘모르모트’라는 별명이 붙은 권해봄 PD도 합류했다. MBC <진짜 사나이>를 연출하고 YG엔터테인먼트에서 를 만들었던 김민종 PD도 카카오M에 둥지를 틀었다. 한수경 카카오M 커뮤니케이션 팀장은 “지상파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더라도 TV에서 보기 어려운 새로운 콘텐츠를 시도했던 분들이 합류 중”이라며 “<마이 리틀 텔레비전>은 한국 지상파에서 없던 포맷의 예능프로그램이었고, 김민종 PD는 넷플릭스와 함께 일한 경험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드라마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은 인정받은 프리랜서 드라마 PD들과 유연하게 계약을 맺는다. 시청자가 가장 빨리 만나볼 수 있는 스튜디오드래곤 드라마는 오는 3월23일 종합편성채널 tvN에서 방영되는 <반의반>이다. 연출을 맡은 이상엽 PD는 드라마 <쇼핑왕 루이>와 <빛과 그림자>를 연출했던 지상파 MBC 출신이다. 이상엽 PD는 <반의반> 직전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나 홀로 그대>를 만들었는데, 이상엽 PD처럼 스튜디오드래곤과 계약을 맺고 방송사와 넷플릭스에 출품하는 연출자가 점점 더 늘어날 전망이다. ‘유태오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드라마 <머니게임>은 KBS 출신 프리랜서 김상호 PD가 연출했다. 오는 4월 SBS를 통해 방송될 <더 킹: 영원의 군주>의 백상훈 PD는 KBS 출신이다. 스튜디오드래곤은 연출 PD와 전속적으로 노동계약을 맺는 지상파 방송사와 달리 연출자를 외부에서 데려온다. 스튜디오드래곤 내부는 영화 프로듀서처럼 드라마 스탭을 꾸리고 전반적인 상황을 체크하는 프로듀서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의 역할은 연출자와 다르다. 제이콘텐트리의 자회사인 JTBC스튜디오는 디즈니를 꿈꾸고 있다. JTBC스튜디오는 디즈니 스튜디오처럼 제작과 유통을 다 해내기 위해서 영화와 드라마 제작사를 레이블로 두고 있다. 과거에는 방송사가 채널에만 집중하면 됐다. 그러나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인터넷방송 플랫폼과 해외 OTT 등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다. JTBC스튜디오는 영화 제작사 비에이엔터테인먼트, 퍼펙트스톰필름, 하우픽처스, nPIO와 드라마 제작사 드라마하우스, 콘텐츠지음을 레이블로 두고 있다. 소속 레이블이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내고 해외 OTT 플랫폼인 넷플릭스, 디즈니+,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등이 JTBC스튜디오 콘텐츠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면 JTBC스튜디오로서는 성공적인 구도가 될 것이다. <클로젯>(2020), <백두산>(2019), (2018) 등을 제작한 강명찬 퍼펙트스톰필름 대표는 “현재 여러 가지 드라마와 영화들을 기획하고 개발해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장영엽 편집장] 가해자의 서사

미국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의 네 번째 시즌에는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걸 멈추게 해달라며 범죄 현장에 도와달라는 문구를 남기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시리즈의 주인공인 프로파일러들 대신 범죄자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이 에피소드에는 절절한 사연이 한가득이다. 살인자의 잔혹한 범죄 행각이 불행한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하필이면 그가 죽인 여성의 시각장애인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을 안 살인마가 소년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는 내용이다. 살인마와 소년의 지속될 수 없는 우정을 다룬 해당 에피소드(2009년에 방영되었다)는 2020년에 돌이켜 생각했을 때 경악스러운 지점이 많다. 살인자에게 과거의 트라우마라는 서사를 부여해 그의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잔혹하게 살해된 피해자들의 죽음을 트라우마의 희생양으로 치부함으로써 피해자의 자리를 지우는 방식의 연출은 요즘이었다면 시청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으리라 짐작한다. <크리미널 마인드>의 한 에피소드를 지금 이 시점에서 떠올리게 된 이유는 텔레그램 박사방 성 착취 사건의 주범 조주빈이 남긴 말 때문이었다. 그는 3월 25일 종로경찰서 포토라인 앞에 몰려든 기자들에게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악마’로 지칭하며 자신의 범죄를 밝혀낸 수사팀에 감사의 말까지 전하는 조주빈의 화법은 <크리미널 마인드>의 한 대목을 모방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황하고 과장된 자아도취의 표현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착잡하게 느껴진 건 스스로 범죄드라마의 주인공 역할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 성범죄자의 장단에 맞춰 가해자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언론의 보도 방식이었다. 조주빈이 포토라인에 선 뒤, 기사의 초점은 그가 맥락 없이 사죄의 뜻을 언급한 유명 인사들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쪽으로 방향을 옮겨갔다. 대학 시절 그의 행적과 학점을 구체적으로 보도하며 평범한 청년/흉악한 범죄자로서의 이중성을 부각하는 기사도 적지 않았다. 이에 언론노조 성평등위원회와 민주언론실천위원회가 3월 24일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 피해자 보호를 최우선할 것, 가해자의 책임이 가볍게 인식되지 않도록 할 것, 성범죄는 비정상적 특정인에 의한 예외적인 사건이 아님을 분명히 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긴급 지침을 발표하기도 했다. 짐승, 늑대, 악마와 같은 표현을 가해자에게 적용하는 건 가해 행위를 축소하거나 가해자를 비정상적인 존재로 타자화해 예외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한다는 지적, ‘성 노리개’라는 표현 자체가 인간인 피해자를 물건 취급함으로써 피해자가 느꼈을 감정에 대해 공감할 수 없게 한다는 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가해자의 잔혹함과 기이한 행각을 강조함으로써 가해자 중심의 서사를 극적으로 서술하고 피해자를 도구화하는 옐로저널리즘적 행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테러범에게 악명조차 불허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폭력적인 개인이 갈구하는 대중적 관심을 원천 차단하겠다고 말한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결정이 한국에서는 어려운 일일지 생각해보는 한주다.

<사냥의 시간> OTT 개봉 보류한다

개봉까지 산 넘어 산이다. 4월 10일 넷플릭스에서 전세계 공개될 예정이던 <사냥의 시간>을 당분간 볼 수 없게 됐다. 지난 4월 8일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이승련 부장판사)는 <사냥의 시간>의 해외 세일즈를 맡은 콘텐츠판다가 이 영화의 해외 배급과 관련해 배급사 리틀빅픽쳐스를 상대로 낸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씨네21> 1249호 포커스 기사 ‘<사냥의 시간>의 넷플릭스행이 의미하는 것’에서 보도된 대로, 코로나19가 장기화되자 리틀빅픽쳐스는 <사냥의 시간>을 넷플릭스에서 공개하기로 결정했고, 콘텐츠판다는 약 30개국 세일즈사에 선판매된 상황에서 리틀빅픽쳐스가 충분한 협의 없이 계약 해지를 통보해왔다며 가처분 소송을 낸 바 있다. <씨네21>이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리틀빅픽쳐스가 콘텐츠판다와의 계약을 해지한 행위가 무효이고 그 효력을 정지한다”라고 판결했다. 리틀빅픽쳐스가 콘텐츠판다와의 계약을 해지하는 과정에서 “천재지변 등에 의한 사유로 계약을 해지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영화 제작이 이미 완료돼 콘텐츠판다가 해외 배급을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지 코로나19로 인해 향후 만족할 만한 수익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사정이 그 이유가 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국내를 제외한 전세계에서 극장, 인터넷, (지상파, 케이블, 위성방송 포함한) 텔레비전을 통해 상영, 판매, 배포하거나 비디오, DVD 등으로 제작, 판매, 배포하거나 그 밖의 방법으로 공개해서는 안된다”며 “만약 이를 위반할 경우 리틀빅픽쳐스가 1일 2천만원을 콘텐츠판다에 지급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사냥의 시간>은 한국이 아닌 해외에선 넷플릭스로 볼 수 없다. 법원의 판결이 나오자마자 4월 9일 넷플릭스는 <사냥의 시간> 공개를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넷플릭스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단을 존중해, 4월 10일로 예정되어 있던 <사냥의 시간> 콘텐츠 공개 및 관련 모든 행사를 보류하기로 결정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번 판결에서 쟁점이 된 건, 리틀빅픽쳐스가 콘텐츠판다와의 계약 해지 사유로 든 천재지변에 코로나19가 해당되는가였다. 강민주 이강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코로나19 같은 전염병 발병은 계약 해지 사유인 천재지변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신청인(콘텐츠판다)의 소명이 충분히 인정되고, 가처분신청이 인용됨에 따라 피신청인(리틀빅픽쳐스)이 입는 손해와 가처분신청이 기각됐을 때 신청인이 입는 손해를 비교형량하여 신청인의 손해가 더 현저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그는 “앞으로 천재지변 사유를 해석함에 있어 전염병과 같은 위난을 계약상 해지 사유로 보기 어려운 선례가 될 수 있으므로, 계약 체결 시 이같은 사정을 감안하여 명확히 계약 해지 사유를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강윤희 법무법인 원 변호사는 “천재지변 등을 이유로 계약을 해지할 수 있는지 판단하려면, 어떠한 사건이 천재지변에 해당하는지 일률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그러한 사건으로 인하여 계약당사자가 자신의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는지 여부를 구체적인 사안 내에서 살펴야 한다”며 “이번 결정은 향후 코로나19로 발생 가능한 많은 사안에서 인용되리라 판단된다”고 전했다. 그는 “코로나19가 국가적 재난으로 천재지변에 해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콘텐츠판다의 해외 배급이 불가능한 것인지, 당장 어렵다 하더라도 이후에 가능한 것인지 여부 등이 쟁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고 말했다. 이번 법원의 인용 판결로 인해 콘텐츠판다가 칼자루를 쥔 가운데, 이 판결을 바라보는 영화계의 의견은 분분하다. 한 대기업 투자·배급사 임원은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는 명제에 충실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한 제작자는 “리틀빅픽쳐스가 콘텐츠판다와 계약을 맺은 해외 세일즈사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하겠다고 하는데도 <사냥의 시간>이 소생할 기회를 막는 건 영화계 정서에 맞지 않는 듯하다”고 얘기했다. 한편 콘텐츠판다는 “한국영화계 전체를 위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리틀빅픽쳐스와의 협상 채널은 열려 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리벤지' 강간당한 여성이 핏빛 복수를 벌이는 스릴러영화

젊고 아름다운 미국 여성 제니퍼(마틸다 안나 잉그리드 루츠)는 사냥을 핑계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프랑스 남성 리처드(케빈 얀센스)와 불륜에 빠진다. 가족과 문명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헬기가 필요한 모로코의 사막 한가운데의 저택에서 두 사람은 미래에 대한 계획 없이 서로의 외적인 매력만 탐닉한다. 그러던 중 리처드가 사냥에 나설 친구들을 모아놓고 잠시 집을 비운 사이, 리처드의 친구 스탠(빈센트 콜롬보)에게 제니퍼가 강간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제니퍼는 리처드의 또 다른 친구 드미트리(기욤 부셰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내지만 외면당하고, 돌아온 리처드에게도 싸늘한 대우를 받는다. 제니퍼만 없으면 강간을 없던 일로 할 수있다고 착각한 리처드는 급기야 그녀를 높은 벼랑에서 밀어버린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제니퍼는 악에 받쳐 리처드 무리에게 복수를 감행하고, 이들도 제니퍼를 죽이는 데 혈안이 된다. 종래에는 사건에 엮인 네 사람이 서로를 사냥하기 위해 총과 칼을 겨누는 형국으로 치닫는다. <리벤지>는 강간당한 여성이 핏빛 복수를 벌이는 스릴러영화다. 제니퍼는 벼랑으로 떨어지면서 나뭇가지가 허리를 뚫고 나올 만큼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정신을 잃지 않고 가지를 부러뜨려 도망친다. 의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피를 동반한 복수는 한번 시작되자 멈추는 법이 없이 나아간다. 제니퍼는 배에 꽂힌 나뭇가지를 빼낸 다음 얇은 알루미늄 캔을 뜨겁게 달궈 상처 부위를 지지는데 의료용 실보다 매끈하게 상처가 아물기도 한다. 단번에 상처를 치료한 제니퍼는 세 사람을 차례로 죽여나간다. 영화의 개연성에 있어서 아쉬움이 남지만, 인물들이 처한 공간과 맥락은 괄호쳐진 반면 쫓고 쫓기는 과정에 흘러나오는 핏물의 존재감만은 확실하다. <리벤지>의 주인공은 어쩌면 강간당한 여성이라기보다 끈적끈적한 핏물일지도 모르겠다. <리벤지>에는 계속된 총질로 스크린 위에 일순간에 터지는 핏물도 있고, 상처를 헤집어 유리 조각을 빼내며 울컥 쏟아지는 핏물도 있다. 카메라는 여러 물성의 핏물을 성실하게 클로즈업하는데, 주인공 제니퍼의 내면을 담기 위한 얼굴 클로즈업만큼이나빈번하게 핏물이 터지고 흐르는 모습을 담아낸다. 피는 흙먼지가 이는 황색의 모로코 사막과 대비되면서 감각적으로 재현되며, 리처드의 대리석 저택을 붉게 물들이면서 그 끈적이는 질감이 느껴질 정도다. 코랄리 파르자 감독에 따르면, 대량의 핏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촬영 당시 준비한 핏물을 다 써버리는 일이 왕왕 벌어지기도 하면서 미술팀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리벤지>는 프랑스 영화감독 코랄리 파르자의 장편 데뷔작이다. 그동안 텔레비전 방송과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온 그는 이번 영화에서 각본과 편집까지 직접 맡았다. 그는 대사를 최소화하고 액션만으로 서사를 추동시켜나가면서 평단으로부터 성공적인 여성감독의 데뷔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주인공 제니퍼는 초반 30분가량을 제외하고는 단 한마디의 대사도 없이 스스로 상처를 치료하고 전투에 나서는 여전사로 변신한다. 어떤 면에서는 <언더 더 스킨>(2013)에서 강한 힘을 지녔지만 말이 없고 쉽게 웃는 법이 없는 로라(스칼렛 요한슨) 캐릭터와 같아 보인다. 파르자 감독은 <리벤지>를 만들면서 실제로 <언더 더 스킨>을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외에 데이비드 린치의 <광란의 사랑>(1990)과 니콜라스 빈딩 레픈의 <드라이브>(2011)를 영화적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밝혔다. 또한 피와 폭력을 그리는 데 천부적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들도 많이 참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벤지>는 2017년 토론토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매드니스 섹션에 공개되었으며, 시체스국제영화제에서‘판타스틱 최우수감독상’과 ‘시민 케인 주목할 감독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 초청돼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CHECK POINT 여성 복수극에 지극히 남성적인 시선? 영화 초반 제니퍼와 리처드가 서로를 탐닉할 때 제니퍼의 엉덩이를 집요하게 담아내던 카메라는 남성적 시선이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황량한 모로코의 사막 영화의 배경이 된 황량한 모로코 사막은 코랄리 파르자 감독이 각본을 쓸 때부터 이미 염두에 둔 곳이다. 저택도 사막의 비탈위에 세워져 제니퍼가 완벽하게 홀로되어 싸우는 느낌을 연출할 수 있었다. 총에 맞서는 유일한 무기는 라이터 사냥에 나선다며 총으로 무장한 남성 캐릭터들에 맞서는 제니퍼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라이터다. 편의점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프랑스산 ‘더 빅 라이터’로 불을 놓아서 찔린 나무를 태워 위험에서 벗어나고 상처를 치료한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를 연출한다 外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를 연출한다 이디스 워턴의 소설 <그 지방의 관습>을 각색해 연출할 예정이다. 애플TV+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협업은 이번이 두 번째다. 코폴라 감독이 연출하고 빌 머레이와 라시다 존스가 출연한 <온 더 록스>는 올해 극장 개봉한 뒤, 애플TV+에서 독점 서비스하기로 계약했다. 셧다운한 영국 영화 현장이 촬영을 재개한다 영국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가이드라인을 지키는 가운데 영화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재택 근무가 불가능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빨리 업무에 복귀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영화, 미디어, 스포츠 산업계에 청신호가 켜진 게 아니냐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나오던 가운데 5월 12일 공식적인 가이드라인이 발표됐다. 영국영화 제작 현장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지난 3월 23일 이후 줄곧 록다운 상태였다. 배우 리즈 위더스푼이 넷플릭스 로맨틱코미디 <유어 플레이스 오어 마인>과 <더 캑터스>에 출연한다 제작사 헬로 선샤인의 대표이기도 한 위더스푼은 두 작품에서 제작자로도 참여할 예정이다. 한편 스웨덴 출신의 할리우드 배우 빌 스카스가드는 스웨덴에서 벌어진 유명 범죄를 다룬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클라크>에 출연한다. 스카스가드는 스톡홀름신드롬이란 용어가 탄생하게 한 범죄자 클라르크 올로프손을 연기할 예정이다.

[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기억

극장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라이온 킹>이다. 그날 영화를 보기 전에 엄마는 매표소 직원에게 어떤 부탁을 했다. 늦게 와서 앞부분을 놓쳤으니, 다음 상영시간까지 기다렸다가 그 부분만 보고 나오면 안되냐는 것이었다. 마음씨 좋은 그 직원은 흔쾌히 허락해줬고(그때는 이런 일이 은근 많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우리는 약속대로 앞부분만 본 뒤 나왔다. 고백하자면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었다. 지금은 스트리밍, 다운로드 서비스 덕분에 내가 원하는 시간에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내가 상영시간에 맞춰야 했다. 조금이라도 텔레비전을 늦게 트는 바람에 만화영화 앞부분을 놓치면 그다음 날까지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그건 내가 놓친 부분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앞부분을 놓치는 바람에 그 회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는 ‘분노’ 탓이 더 컸다. 그런데 엄마, 앞부분을 나중에 보라니요? 그래서인지 나는 <라이온 킹>을 꽤 감정적으로 기억한다. 어두컴컴한 극장에 엄청나게 큰 화면이 떠오르고,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갈 수 없어서 그저 불만스러운 기분으로 불편한 의자에 몸을 밀어넣고 있던 그런 느낌으로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엄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기억이 조금 비틀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 말에 의하면 내 첫 번째 극장 경험은 <알라딘>이고, 극장에 늦었던 것도 그때였다고 했다. 이에 나는 별다른 반박을 할 수 없었는데, 실제로 <알라딘>이 <라이온 킹>보다 먼저 개봉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논쟁 자체가 불가능했다. 물론 <라이온 킹>을 볼 때도 늦게 들어갔고, 그래서 기억이 헷갈렸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그렇다. 내게 놀라운 사실은, <라이온 킹>과 달리 <알라딘>을 내가 꽤 편안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극장에서의 경험을 말이다. 정말? 전혀 집중하지 못했던 게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즐거운 기분으로 봤다고? 내가 정말 그랬다고? 영화 <프랑스여자>의 주인공 미라(김호정)도 비슷한 질문을 계속 한다.“내가? 정말 내가 그랬어?” 그녀는 자신의 친구들에게 이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러니까 한때 배우와 연출가의 꿈을 꾸며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이들에게 말이다. 네명 중 한명은 사라졌고, 두명은 각각 연극연출가와 영화감독이 되었으며 한명은 한국을 떠났다. 극중 미라는 기억의 부딪힘을 꽤 여러 번 맞이하는데, 가장 큰 계기는 남편과의 헤어짐이지만 질문을 거듭하게 만드는 건 그녀를 기억하는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그녀는 그들이 말하는 자신을 낯설게 여긴다. 그렇게 보인다. 멋있는 여자, 프랑스와 잘 어울리는 사람, 좋은 언니, 뛰어난 재능을 가진 배우…. 그녀는 자신을 향한 수사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묻는다. 그래? 정말 그래? 그 질문은 행동의 진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 수사에 숨어 있는 자신의 모습, 이미지, 그것을 둘러싼 어떤 풍경들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매우 어색한 시선으로 친구들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 때문만은 아닌 듯한데, 그녀 역시 친구들을 실제와는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질문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다. 정말? 그때 내가 그랬어? 그리고 네가 그랬어? 너는 그런 사람이야? 하지만 결국 이 질문들은 궤를 같이하고 있는 듯하다. 미라가 그 반문 혹은 질문을 통해 집요하게 쫓는 것은 자신의‘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에게 무엇을 원했던 걸까.” 그러니까 나는 어떤 사람이기를 원했던 걸까. 어린 시절, 나는 타인에게 내 모습을 설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꽤 많은 시도를 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랐고, 그걸 위해서 그만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도 믿었다. 사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좋은 사람, 지금보다 나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내가 게을러지지 않도록 한다. 그렇게 해준다. 동시에 이 욕망을 자각하는 것은, 진짜 내가 원하는 것과 주변에서 원하는 것의 간극을 인식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단적으로 말해 아름답게 존재하고 싶다는 건, 요구와 생산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자의식을 유지하는 건 그 위험부담을 감지하며 정신을 붙드는 나만의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질문하는 것. 미라처럼 계속 기억 속으로 되풀이해 들어가는 것. 정말? 내가 그랬어? 그리고 나는 그 질문이 나 자신을 변명하는 것이 아니기를 늘 바라곤 한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과 그들의 기억, 혹은 그들의 욕망과 나의 기억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모습을 들여다보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럽고 치열한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자주 패배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보려 애쓴다. 나는 혼란까지도 나 자신의 일부임을 인정하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늘 그렇게 생각한다. 미라 역시 그런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미라의 질문이 끌어내는 여정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그것을 증명하듯 <프랑스여자>의 서사는 후반부로 갈수록 점점 복잡해진다. 미라는 자신의 기억과 타인의 기억 사이를 오가며 ‘진짜’를 찾으려 애쓴다.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고 상처이기도 하고 이별과 고독이기도 하며 우정과 배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표정이기도 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을 향한 어떤 얼굴. 그들을, 그러니까 나를 쳐다보던 그녀의 시선. <프랑스여자>를 본 날은 비가 많이 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하나의 기억. 시사회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유지하며 이루어졌다. 입장할 때 모두 체온을 쟀고, 서로 한열씩 비워두고 앉았으며 영화를 보는 내내 마스크를 착용했다. 미리 안내를 받은 사항이긴 했지만 막상 실제로 경험하니 기분이 남달랐다. 순식간에 어떤 이후의 시대로 훌쩍 넘어와버린 것 같았다. 내게 새로운 ‘최초’가 생긴 셈이다. 그 때문인지 나는 이전 시대의 기억을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불만스럽고 불편한 와중에도 어떻게든 이야기의 맥락을 따라가려 애쓰던 순간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놓친 이야기를 계속 상상했다. 그래야 이해할 수 있으니까. 왜 어린 사자는 혼자 남았는지, 두려움과 죄책감에 휩싸여 있는지 계속 생각했다. 회피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끝내 돌아가서 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해서. 때문에 <라이온 킹>은 내 최초의 극장 경험이 맞다. 이야기에 대한, 그리고 기억과 나 자신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