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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김수현 작가의 주말연속극 <내 사랑 누굴까>

김수현은 지난 2월23일 <여우와 솜사탕>(MBC 토·일 저녁 7시55분)에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여우와 솜사탕>이 자신이 집필한 <사랑이 뭐길래>(1992)와 상황뿐 아니라 대사가 발췌한 것같이 똑같다는 것이 소송의 내용이다. 3월7일 2차 심리에서 재판부는 판결이 종영 이후로 미뤄질 것을 감안해 김수현쪽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안했으며 3차 심리 직후 김수현쪽은 이를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3월2일 김수현의 새로운 드라마 <내 사랑 누굴까>가 방송을 시작하였다. “내가 말을 하지 말아야지. 내 눈을 내가 쑤셔놓고. 미쳤지 미쳤어. 하기는 안양 일대가 날더러 미쳤다구 했지. 여부잣집 막내딸이 미쳐서 아무것도 아무것두 없이 방울 두개만 달그락거리는 사람한테 간다구….”(<사랑이 뭐길래>) “휴우 일러 뭐해, 말해 뭘해? 내 눈알 내가 쑤셔놓고. 부잣집 어말숙이 미쳐서 달랑 두쪽뿐인 인간한테 간다구 온 춘천이 다 뒤집어졌었는데.”(<여우와 솜사탕>) <여우와 솜사탕>의 방영 초반 상황설정이 비슷하다는 말들이 오고가긴 했지만, 10년 시간을 넘어 누가 드라마 대사를 꼭 집어 기억했으랴. 재판정에 출두한 테이프와 대본은 위와 같이 쌍생을 증거한다. MBC 법무저작권부에서는 “드라마는 2차 저작물이므로 방송작가가 표절을 시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지만, “<사랑이 뭐길래>가 드라마의 고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참고는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로 변호를 하기도 한다. ‘고전이 된 드라마가 작가의 것이 아니’라는 반격에서 반(半)은 옳다. <사랑이 뭐길래>가 한국 드라마 지형도에서 고전으로 자리잡을 만큼 독보적이라는 반, 그래서 도덕성이 함몰된 지형도에서는 더욱더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반. 그렇다면 틀린 반은? 드라마가 작가의 것이 아니라고 법에 명시한다면 예외적 조례사항을 두어야 할 첫번째 작가가 바로 김수현이라는 사실이다. TV드라마 김수현 이전과 이후 따뜻하기보다는 전투적인 김수현 드라마는 특징 그대로 한국 드라마의 전방을 개척한 전위부대였다. 1972년 <무지개>가 텔레비전 드라마로는 첫 저작이므로 올해로 딱 30년의 세월, 대한민국 국민은 김수현 드라마에 길들여졌다. 시청률 기록을 세우는 드라마의 분석은 방송사의 몫이고 이는 ‘김수현 드라마’의 전술이 ‘드라마’의 전략이 되도록 하였다. 김수현 이후 드라마에서 김수현 드라마의 흔적은 질기다. <사랑이 뭐길래> 이후 남자 집안의 보수성과 여자 집안의 진보성을 대립시키는 설정, 아울러 세트의 한옥/양옥 설정은 가정극의 정석이 되었다. 남녀 결혼이 주요한 문제로 떠오르게 마련인 가정극에서 이보다 더 극적인 설정을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지금 방영되는 드라마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일일극 <사랑은 이런거야>(KBS)는 이 설정 그대로이며, 여고동창생의 반목과 그 자식들의 사랑이야기가 변형되어 일일극 <매일 그대와>(MBC)에서 재생된다. 김수현의 <사랑과 진실>(1984) 이후 탄생의 비밀은 여러 차례 인용되었다. <비밀> <저 햇살이 나에게> 등의 드라마에서 본격적으로 쓰였고, 같이 자란 이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고, 비밀을 품고 대기업의 집안에 들어간다는 설정은 지금 <유리구두>(SBS)에서 그대로 쓰이고 있다. 김수현이 구현한 각각의 캐릭터는 연기자의 대표 성격이 되기도 했다. 김혜자의 ‘가부장제에 주눅 든 어머니’, 윤여정의 ‘자기 주장이 강한 어머니’, 한진희의 유능한 대기업 사원 등은 대표적이다. 심지어 양희경은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아이를 못 낳는 역을 맡은 뒤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에서도 비슷한 역을 부여받았다. 김수현은 듣도 보도 못한 상류층의 생활을 처음으로 안방에 가져왔다. 탕비실이라는 말을 김수현 드라마 이전 누가 알았을까. 상류층의 생활을 묘사하는 관습적인 표현들- 잠을 자다가 늦게 들어온 이를 맞으러 나오는 사람이 한마디 툭 던지며 가운을 여미는- 은 김수현이 본격적으로 다룬 ‘사실 확인이 안 되는 리얼리티’의 일종이다. 무엇보다 이름을 가리고도 표식을 드러내는 드라마는 김수현이 독보적이다. 그 표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마디도 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화려한 언어다. <내 사랑 누굴까> 역시 김수현 표식을 달고 있다. 대사는 점점 쫄깃해지고, 맥락은 점점 더 깊어지고 <내 사랑 누굴까>는 해피하우스라는 건물에 사는 3대 가족의 이야기다. 여기에 결혼 적령기를 넘긴 처녀 두명이 이사를 온다. 1대는 80이 넘은 할아버지(이순재), 할머니(여운계), 2대는 아내를 잃은 아버지(이정길), 3대는 그의 세 아들 윤식(윤다훈), 현식(류진), 상식(김정현). 두층에 걸쳐서 사는 이 집이 남자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사온 지연(이승연), 하나(이태란)의 집, 그리고 할아버지의 여동생(정혜선)과 그의 결혼하지 않은 과년한 두딸 경화(박정수), 경주(견미리)가 사는 집은 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남녀 집의 대결구도와 함께, 짚신이 짝이 있고 젓가락도 짝이 있는데 내 짝은 어디 있을까라는 결혼문제로 뛰어드는 구도가 명확하게 펼쳐진다. 그래서 김수현 드라마의 두 극점, 가정극과 멜로가 한데 섞인다. 이 두 극점의 화합은 작가가 그간의 드라마를 총결산하는 의도로 집필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요컨대 “내 드라마는 무엇일까”라는 총정리. 거기다 과거 김수현 드라마의 후기쯤에 해당할 듯한 설정들이 등장한다. 드라마가 시작됨과 동시에 여러 군데서 ‘재회’가 이루어졌다. 현식은 결혼까지 약속했지만 미국으로 결혼해서 가는 것으로 자신을 배신한 고은(명세빈)을 만나고, 사랑을 잊지 못해 아직 결혼하지 못한 경화 앞에는 그 옛날 자신을 버린 남자 차명환(한진희)이 등장한다. 야망을 위해 사랑을 버리는 인물은 김수현 멜로극의 단골소재였다. <청춘의 덫>의 동우가 대표적인 예. 그러니 이 드라마는 사랑했음에도 (캐릭터의 혹은 작가의) ‘젊은 날의 혈기로’ 헤어졌던 모든 커플에 용서를 구하는 작가의 심중을 담은 것이 아닐까. 대사는 ‘독하다’고 방영 때마다 몇번씩 도마에 오르곤 하는데 이번 <내 사랑 누굴까>에서 맨 처음 매를 맞은 것은 1회 딸과 어머니 사이의 대사였다. “엄마한테서 냄새 나. 늙은 사람 냄샌가”, “엄마가 나보다 오래 살 거야”는 “아무리 딸과 어머니 사이라지만”이라는 반응을 끌어냈다. 딸들이 나와서 살기 위한 험한 공방전이었는데, 이외에도 1회를 보면서는 고함지르고 윽박지르니 드라마 보느라고 편히 기댄 자리가 미안해지고 골이 얼얼해졌다. 지연이 맞선 자리에서 “이제 재혼 자리 알아볼 나이 아니에요”라는 독한 소리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정신없이 쏘아대는 대사가 완성되는 것은 맥락과 상황 속에서이니 1회에서 시청자는 배우는 드라마에 적응하지 못했다. 맥락 없이라도 대사는 빛난다. 그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싶도록 말이 많지만 그 말들은 다음 말을 듣는 것을 놓칠 정도로 꼬이는 적은 없다. 한마디가 오면 한마디가 간다. 말에 쫄깃한 리듬이 느껴진다. “뜸들이다가 밥 태워 먹을 놈이네” 등 ‘김수현 사전’을 펴내고 싶을 정도로 풍부한 비유법과 “소싯적 얌체가 평생 얌체야”, “독 안에 들었어도 팔자 도망 못 간대” 같은 어른 말씀 하나도 그릇된 것 없는 통찰력도 역시 반짝거린다. 그 맥락과 상황은 드라마가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깊어진다. 무엇보다 이는 작가의 귀가 얇기에 가능하다. 이것이 드라마 작가에게 단점이 아님은 말할 필요가 없다. 연기자 윤여정은 “어떤 배우가 안 되는 발음이 있으면 그걸 피하면서 대사를 쓴다”(<김수현 드라마에 대하여>)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러니 김수현 드라마에서 배우는 자신의 스타일에 가장 맞는 옷을 맞춤하게 된다. 대사뿐 아니라 설정도 마찬가지다. 훤칠하게 잘생긴 현식(류진)을 두고는 외모 칭찬을 아끼지 않고, 윤식(윤다훈)을 ‘닭눈’이라고 부르는 등 드라마가 진행될수록 연기자와 배역이 점점 맞춰간다. 작가의 다음 혁신은 어디일까 <내 사랑 누굴까>의 주제는 ‘사랑과 결혼’이다. 연속극치고 이거 아닌 게 있을까마는 <내 사랑 누굴까>는 정면돌파다. 적나라하다. 그리고 ‘강한’ 여성이 ‘사랑과 결혼’이라는 틀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약한 모습의 여자보다 더 반동적일 수 있다. 박사과정에 있는 지연에게 왜 결혼은 중대사일까. 혼자 살기가 충분해보이는데 남자가, 결혼이 필요한 이유는 무얼까(젓가락도 짝이 있고 신발도 짝이 있지만 짝없는 물건은 얼마나 부지기수인데). 그건 가부장적 통념에서 나왔다. 남들이 보기에 과히 안 좋다는 것. 치과의사인 경화는 자신을 버리고 간 남자가 “사별한 부인과의 결혼생활이 행복했다”고 말하는데다 “당신이 질투하는 건 죽은 여자라는 걸 아시오”라는 말까지 하는데도 남자에게 끌린다. 남자가 재미볼 것 다 보는 세월 동안 허벅지나 찔렀던 그 세월이 불쌍해서라도 자신을 구제하겠다는 남자의 오만함을 분질러버려야 한다. 그 세월 동안 행복했다면 ‘그 나이니 재취 자리에나 앉으라’고 제안하는 남자와 결혼할 이유도 없다. 80 먹은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부인을 위해 모든 이가 다 아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속고 살아온 세월이 대략 50년, 남북이 헤어진 세월만큼이다. 무엇보다 정서로 용납되지 않는 것은 신흥 부르주아지의 으리으리함. 아무리 대사에 혼을 빼앗겨도 억을 날려먹고 왔는데 그걸 눈감아주고, 어머니하고 살기 싫다고 억대 오피스텔을 금세 얻어나오는 순간을 맞으면 드라마에 빠져들기 어렵다. 치과의사, 수의사, 회사 사장, 전문 경영인, 모델, 중소기업보다 낫다는 디자이너, 레스토랑 경영인, 건축설계사, 커피숍 주인, ‘점빵’이라 칭해지는 대형 상점 주인 등이 진열된 쇼윈도는 눈이 부시다. 결국 해피하우스의 해피한 결혼소동은 한명의 진짜 ‘점빵’의 딸을 신데렐라로 만들면서 노동자 계급한테 안위와 위안을 줄 예정인 것 같다. 덧붙이는 의문 하나. 장르를 개척했고 드라마의 아우라를 완성했던 대가의 다음 혁신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 작가의 최근 행보는 안주(安住)였다. <청춘의 덫>은 리메이크였고 <불꽃>은 그와 비슷한 멜로였으며, <내 사랑 누굴까>는 가족극과 멜로의 종합이다. 개척자 작가의 혁신은 종종 드라마 자체를 개혁해왔다. 많은 이들은 그가 여전히 전선에 있기를 기대한다. 구둘래 kuskus@dreamx.net<내 사랑 누굴까> KBS2TV 토·일 저녁 7시50분

제4장 구조

4 사고는 뜻을 가진 명제이다. 메시지, 또는 메모. “사람들 보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 해놓고, 놔두고 보면, 서로들 서로를 흉내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에릭 호퍼) 또는 “우리들 행동의 부조리함은 거의가 우리가 흉내내서는 안 될 것(그게 사람이든 뭐든)을 흉내내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새뮤얼 존슨)라는 말을 2000년 8월 <생활의 발견> 트리트먼트 서문에 홍상수가 (홍보자료에 따르면) 붙여놓았다고 한다. 두 문장의 공통된 단어는 흉내이다. 4-1 흉내를 내는 것은 여기서 세 가지 서로 다른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그 하나는 등장인물이 다른 등장인물을 따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사건이 다른 사건 안에서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같거나 유사한 사물이 아무 상관없는 서로 다른 숏에 등장해서 그 사이의 무관함 속에서 연관성을 유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흉내는 단지 이미 본 것을 따라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알지 못하는 상대에 대한 텔레파시가 존재한다. 이를테면 명숙이 쓴 문장을 선영이 반복한다. 그런데 선영은 명숙을 만난 적이 없다. 한 가지 더. 선영이 쓴 문장을 경수는 고발장을 쓰면서 다시 베낀다. 그 문장은 “자연현상은 언제나 우리에게 무심한 듯 보입니다”이다. 이 문장을 선영은 맨 앞에 쓰고, 경수는 맨 뒤에 쓴다. 그러니까 세개의 글은 서로 이어 쓴 것처럼 한 문장씩 겹쳐져 있다. 그러나 일직선으로 놓이며, 뫼비우스의 띠처럼 매듭이 묶이지는 않는다. 그건 이 영화의 전체 구조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생활의 발견>을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하는 것은 내게는 이상하게 보인다. 여기에는 원형 구조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 두개의 매듭은 같은 방식으로 묶이지 않았다. 또는 이야기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미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텔레파시와 데자뷔는 <생활의 발견>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 발견은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 또는 발견이라고 믿은 것은 이 영화를 다시 보면 대부분 착시-효과이다. 그러므로 대상과 왜상 사이에 있는 구조가 중요해진다. 4-2 그러므로 이 흉내에서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반복이 아니라 차이이다. 또는 차이 안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그 어떤 흉내도 그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선배 성우가 술을 마시면서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을 경주에서 경수가 반복하지만, 그 반복은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경주의 삼겹살집은 4숏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경수와 선영은 술을 마시는데 61신에서는 몸을 흔들지 않는다. 테이블에는 소주 1병과 사이다 1병이 올려져 있다. 그러나 63신에서는 몸을 흔들면서 술을 마신다(그 사이에 있는 62신은 잠시 삼겹살집 바깥으로 나왔다가 하늘을 보는 경수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시간의 생략이 있다. 테이블에는 소주 4병과 사이다 1병이 올려져 있다. 경수의 말에 의하면 몸을 좌우로 흔들면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춘천에서 성우는 대리 운전이 없기 때문에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몸을 좌우로 흔든다. 성우는 옷 벗는 술집에서도 몸을 좌우로 흔든 것 같다. 거기서 성우의 파트너는 “몸을 왜 이렇게 흔들어요, 재수 없게”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경수가 갑자기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은 단지 취하지 않기 위해서일까? 성우는 취하지 않아도 여자 옆에 앉은 술좌석에 오면 몸을 좌우로 흔든다. 경주에서 경수는 성우의 면티를 입고 있다. 4-2-1 이상하게 그 흉내의 반복과 차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또는 놓치는) 대목은 명숙과 선영이 쓴 메모의 마지막 문장의 차이이다. 서로 다른 앞 문장 뒤에 명숙은 “내 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라고 쓰지만, 선영은 “당신 속의 나! 내 속의 당신!”이라고 순서를 바꿔 쓴다. 반복은 결코 고스란히 겹쳐지지 않는다. 4-2-2 그런데 이 문장은 명숙이 경수를 향해서 쓴 “명숙 안의 경수, 경수 안의 명숙”, 또는 선영이 경수를 향해서 “경수 속의 선영! 선영 속의 경수”이지만 동시에 내게는 “명숙 안의 경수, 경수 안의 명숙”으로부터 “명숙 속의 선영! 선영 속의 명숙”으로 읽혔다. 그러나 “명숙 안의 선영, 선영 안의 명숙”으로는 읽히지 않았다. 이 말에 주의해야 한다. 왜 상호 전이가 일어나지 않은 것일까? 또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홍상수는 나와 당신의 순서를 서로 다르게 썼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는 그 순서가 중요해진 것이다. 우리(와 경수)는 선영을 만나기 전에 명숙을 만났지만, 명숙을 만나기 전에 이 문장을 알지 못한다. 선영은 2인칭 주어를 먼저 불러들인다. 알랭 레네의 참고할 만한 말. “영화의 숏에 과거와 미래는 없다. 기억과 예감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항상 앞에서 뒤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홍상수는 결코 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되돌아오는 경우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심리적으로 자꾸 뒤를 돌아본다. 또는 그렇게 하도록 유혹 당한다. 한번 더 강조할 만한 점. 홍상수 영화의 미학은 플래시백 효과이다. 물론 방점은 효과에 놓인다. 4-2-3 두개의 사례. 나에게 가장 이상한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그 중 하나는 명숙과 선영이 남긴 문장이다. 같은 문장을 쓸 수도 있었는데 (아마도 의도적으로) 반대로 적혀 있다. 마치 거울에 비춰본 것처럼. 다른 하나는 춘천에서 오리 배를 타고 가면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가 경주에서 선영의 남편이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이야기로서는 우연이지만, 또는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걸 보는 우리는 거기에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우연과 의미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홍상수의 의도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의도에 대한 대답이 영화 안에 없다. 그 의도가 이야기 안의 등장인물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잘못된 해답의 구조가 있다. 22신의 춘천 공지천에서 오리 배를 타고 경수와 선배 성우와 명숙이 이야기할 때 우연히 마주쳐서 라이터를 빌리는 사람을 주목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시간5분이 지난 뒤에, 그러니까 62신이 더 지난 다음에 갑자기) 83신 경주장에서 경수가 그때 그 남자가 선영의 남편 같다고 선영에게 말할 때 우리는 틀림없이 이미 보았으나 놓칠 수밖에 없는 인물 때문에 이제까지의 이야기의 중심을 다시 설정해야 한다(그러나 여기서 홍상수가 속임수를 썼다고 말할 수는 없다. 꼼꼼하게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그걸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명숙과 만난 이후 헤어질 때까지 경수와 명숙과 성우 사이에 끼어드는 인물은 성우의 사촌누나를 제외하면 오리 배를 타고 라이터를 빌리던 그 장면의 선영 남편뿐이다. 이 세심함이란!). 그러니까 홍상수는 이야기에서 우리가 괄호 치고 보는 의미의 영역을 자꾸만 의심하게 만든다. 의미가 없었다고 넘어간 것이 우리를 붙들고, 그 반대로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도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이를테면 나는 명숙이 비에 젖은 휴대폰에 남겨놓았다는 메시지가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경수는 경주에 간 이후로 그 말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또는 그 ‘알려지지 않은’ 메시지가 경주에서 ‘무의식의 형태’로 집행되는 것일까? 그래서 결국 편지는 도착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외재성의 이름으로 이야기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와의 어떤 거래가 있다. 주목할 만한 점. 경수는 선영의 남편을 알아보는데, 선영의 남편은 경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경주장에서 우리는 선영의 남편의 자리에 불려간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선영의 남편은 없다. 4-2-4 그러나 없는 그 자리가 채워진다. 그 자리는 그걸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당신에 의해서 매듭지어진다. 그러니까 이미 충만해 있는 화면에서 불안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핍이라고 생각되는 잉여이다. 왜냐하면 반복되어지는 대사와 소도구와 상황과 카메라의 차이가 나타날 때 그 신의 내부에는 그 자체로 문제가 없지만, 그 설명은 외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외부는 여전히 이야기 안이다. 같은 말이지만 사실은 거기에 없는데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스스로의 가정 아래 발견하려는 노력은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노력은 영화의 고정점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자꾸만 중심을 벗어나는 것이다. 매우 비극적인 이야기지만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자리가 항상 기만당하는 것은 영화의 속성 때문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시간을 통해서 연쇄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되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지나간 것은 기억에 의지해야 한다. 그 기억의 오류가, 순서와 배열을 통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영화 안에서의 지식은, 그러니까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가정되어진 그 자리는, 사실은 대상에 이끌린 것이 아니라 원인에 떠밀린 것이다. 그러나 그 원인의 자리가 비어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그러므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의미는 지어낸 환상이다. 여기서 의도는 홍상수의 몽타주이며, 위장은 홍상수의 미장-센이다. 또는 어쩌면 그 역이다. 같은 말이지만 홍상수의 영화에서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그 장면은 플래시백 효과를 생산한다. 그런데 그 환상을 만들어내는 매듭을 만드는 사람은 경수나, 명숙이나, 선영이나, 성우가 아니라, 당신이다. 또는 당신은 그 효과-증후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당신은 경수나, 명숙이나, 선영에 비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알고 있다는 말은 모순이다. 왜냐하면 지식의 잉여는 결국 그것을 포함하여 이루는 하나의 지식으로서 오류이기 때문이다. 4-3 한 가지 더. 신4 영화사 엘리베이터 앞에서 감독은 경수에게 “우리 사람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한다. 그런데 이 말을 경수는 춘천에서 두번 반복한다. 그러나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는다. 술집에서 나와서 경수는 성우에게 “우리 사람되는 거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고 말한다. 또 호수에서 휴대폰으로 명숙에게 “저, 우리 사람되는 거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고 말한다. 감독은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수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 요구에 대한 대답을 경수가 춘천을 떠나기 전에 버스터미널에서 선배 성우가 한다. “경수야! 너 사람한테 사람 이상의 것을 요구하지 말래!” 이 대답 이후 (하여튼) 경수는 이 말을 경주에서 더이상 반복하지 않는다. 이미 자신이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더이상 버티기를 포기한 것일까? 또는 사실은 괴물이 되고 싶은데 될 수 없는 자신이 괴롭다는 억압의 표현일까? ▶ 성일, 상수의 영화를 보고 회전문을 떠올리다 ▶ 제2장 자막 ▶ 제3장 회전문 ▶ 제4장 구조 ▶ 제5장 착각 ▶ 제6장 아버지 ▶ 제7장 …그리고 침묵

<재밌는 영화> 프로듀서 김상오

<선물> <재밌는 영화>와 같은 기획영화의 탄생 이면에 서 있던 김상오 PD(34)는 감독이 자칫 놓치기 쉬운 대중성의 측면을 끊임없이 자각시키는 것이 프로듀서의 중요한 역할이며, 이 시대의 관객이 어떤 영화를 요구하는가 하는 고민에서 PD의 역할은 시작된다며 긴 대화의 운을 뗐다. 그의 말을 빌리면 영화판에서 PD가 하는 일이란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실무의 모든 것. 작가나 감독에 의해 미리 시나리오가 나와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PD가 최근의 경향을 분석하여 시놉시스도 쓴다. 작품 기획이 끝나면 장르와의 궁합을 살펴 어떤 영화사와 함께 일할 것인지 결정한다. 호러물을 잘 만드는 영화사가 있고, 코미디물과 잘 맞는 영화사가 있기 때문이다.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등을 제작해온 좋은 영화사는 그런 의미에서 <재밌는 영화>의 적격 산실. 그리고나서 감독을 지목하는데 대개 전작의 분위기로 판단하며, 신인감독의 경우 더욱 엄밀하고 객관적인 평가의 잣대를 들이댄다. 장규성 감독이야 워낙 김상진 감독이 비기(秘技)를 전수하며 ‘아들’처럼 키운 사람이기에 별 고민없이 결정된 케이스. 감독이 정해지면, 감독의 스타일과 제작사가 원하는 방향, 대중의 요구 등을 일치시키는 것도 PD의 능력이다. 그 다음은 투자자 모집. 대개의 영화사는 하나에서 여러 개의 투자사에 줄을 대고 있지만, PD가 직접 나서서 기업이나 개인 투자자를 모색하기도 한다. 좋은 영화사는 시네마 서비스라는 든든한 언덕이 있어 김상오의 짐을 덜었다. 투자자 모집이 끝나면 배우와 스탭 캐스팅. 기껏 전달한 시나리오가 거부당하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지만, 아예 시나리오가 배우 손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서 이럴 땐 PD가 나서서 소속 회사의 이름과 모든 인맥을 총동원한다. 대개 어느 영화사에서 흘러들어온 시나리오냐를 가려서 매니지먼트사에서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이번 <재밌는 영화>는 배우보다 스탭 캐스팅에 더 신경을 썼다. 코미디영화이기 때문에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나야 한다는 김PD의 고집 때문. 촬영이 시작되면 하루에 몇천만원 단위의 제작비를 고스란히 까먹느냐, 예정된 일정과 예산에 촬영을 마치느냐가 PD의 재량에 좌지우지된다. 그 와중에서도 감독의 연출권을 보호하는 것은 기본. 촬영이 끝나고 후반 작업에 돌입하면 그야말로 몸은 녹초가 되지만 정신은 더욱 날카로워지는 시기. 믹싱, 편집, CG, 텔레시네, 현상을 거쳐 프린트가 나오면, 시사회 일정 잡고, 마케팅과 배급에도 관여한다. 개봉관이 잡히고 영화가 상영되면 비로소 그 무겁던 임무에서 면책되는 순간이라고. “<선물>에 이어 <재밌는 영화>까지 일년에 한편씩 꼬박꼬박 프로듀싱하는 실로 이상적인 상황”이라고 자평하는 김상오는 현재 ‘진짜 재밌는 영화’ 시나리오를 한편 구상중이다. 글 심지현 simssisi@dreamx.net·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프로필 1969년생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출신 <영원한 제국>(94) 제작부 <내 안에 부는 바람>(97) 제작 총지휘 <질주>(98) 제작실장 <선물>(2001) PD <재밌는 영화>(2002) PD

“고생하고도 푸대접 받았지만, 상관하지 않았어”

90년대에 들어서 규모가 큰 대작들이 많이 기획됐어. 해외에서 올로케로 찍는 작품이 생기는가 하면 의상 제작비만 1억5천만원이 든 <사의 찬미> 같은 작품도 제작됐지. 91년도만 해도 <개벽>(임권택), <사의 찬미>(김호선), <은마는 오지 않는다>(장길수) 등 꽤 굵직한 작품들이 많았어. 이미 총각 때부터 영화로 알고 지낸 임 감독이야 작품만 들어가면 날 찾았으니까 <개벽>도 자연스럽게 내 손에 들어온 거고. 근데 그 영화 찍을 때 스탭들이며, 조합원(엑스트라)들이 어떻게나 말을 안 듣던지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천지가 개벽할 날들이었어. 처음 영화 들어갈 땐 동학당이 400명 나온다고 했거든. 거기다 군인까지 더 포함되면 한 5백벌 의상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래서 다 준비를 해놨는데, 막상 숏 들어가고 조합원을 세어보니 100명도 안 되는 거야. 원래 그날 찍을 장면에는 200명이 필요하댔는데, 반도 안 나왔으니 감독 심정이 어땠겠어. 나 역시 준비해간 옷을 반이나 그대로 가지고 와야 했으니 마음이 안 좋지. 그게 시작이었어. 촬영기간 내내 조합과의 마찰로 제때 원하는 인원이 수송된 적이 없었어. 게다가 온 인원들도 통제가 안 되고. 날씨는 춥고 주로 산에서 촬영이 이루어지는데, 아무 데서나 오줌 누고, 툭 하면 술 먹고 행패 부리고. 아마 만들어놓고 반도 못 입힌 영화는 그게 유일할 거야. 물론 아예 처음부터 엎어진 영화는 빼고. 게다가 스탭들도 추운 데서 고생하다 나중엔 협조를 잘 안 하더라고. 그렇게 어렵게 찍어놨더니 역시나 흥행에 대참패를 했지. 다행히 미리 의상비를 받을 수 있어서 큰 손해는 안 봤지만, 입히지 못한 의상 때문에 계속 미안한 맘이 들더라구. 같은 해 찍은 <사의 찬미>는 거대한 제작 스케일로 일단 화제를 모았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의상비만 1억5천이라는 거야. 조연들 옷을 지었던 내가 받은 돈이 3천만원이었으니까 장미희 옷을 맡은 이가 무려 1억2천을 받았다는 얘기지. 이걸 능력 차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배우의 힘이라고 해야 하나. 아주 기분이 씁쓸하더라고. 그래도 김호선 감독 사정을 뻔히 아는 내가 돈 때문에 투정을 부릴 순 없었지. 나중에 그해 <사의 찬미>를 비롯한 세개 작품이 의상상 후보로 올라가는 바람에 시상식엘 몇번 갔었는데, <사의 찬미> 시상식장에 장미희 옷을 지은 여자가 앉아 있는 거야. 처음엔 ‘설마 회원도 아닌 이가 상을 타겠어. 그냥 자리를 빛내는 거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식장에 그녀의 이름이 불려지니까 꼭 배신당한 기분이더라고. 물론 그녀의 솜씨로 여주인공이 맵시있게 표현된 건 인정하지만, 영화 전체의 의상을 만진 나로서는 서운할 수밖에. 그 일이 있고 나서 김 감독이 미안했던지 춘사영화제에서 의상상을 주도록 애를 썼나봐. 난 그래도 지금껏 한번이라도 “그때 왜 회원인 나는 푸대접하고, 비회원에게 상을 주느냐”는 소리 해본 적이 없어. 아쉬운 소리만큼 하기 싫은 게 있을까. 안 주면 그만인 거지. 그때 내가 속으로 그랬지. ‘그래, 상은 니가 타가라. 일은 내가 다 할게’라고. 한진영화사에서 찍은 <은마는 오지 않는다>가 몬트리올영화제와 백상영화제 등에서 상을 휩쓸면서 91년이 끝났지. 92년도에 가서 제일 먼저 받은 시나리오가 최영철 감독의 <백백교>야. 지금도 내 필모그래피에 등장하는 이 영화는 사실은 완성된 작품이 아니야. 찍다가 돈이 없어서 중간에 엎어진 영화거든. 그래서 내 작품이라고 부르기도 뭣해. 고 다음에 찍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박종원), <장군의 아들3>(임권택), <하얀 전쟁>(정지영)이야말로 96년 <애니깽>(김호선)으로 작품활동을 마무리할 때까지 맡은 작품들 중 백미라고 할 수 있어. <장군의 아들>은 30년대 종로 거리가 배경이라 한복과 양복이 한데 어울려 등장했어. 양복의 경우, 내 전공이 아니니까 주로 사서 쓰거나 양복점에다 맡겼지. 극중에 등장하는 기생들의 경우 실제 복장보다 더 화려하게 각색이 됐어. 원래 기생들은 관에 속한 몸이라 일종의 유니폼이 정해져 있거든. 나라에서 허가를 받은 차림새란 게 고작 남색 치마에 흰 저고리가 다야. 우리가 알고 있기론 기생들 옷이 화려하고 다양할 것 같지만 그게 정석이라고. 그치만 감독들은 밋밋한 그림 대신 변화를 주고 싶어하지. 그러다보니 언제부턴가 영화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기생들이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었지. 그건 무당도 마찬가지야. 굿을 할 때나 오색도복을 입는 거지 평상시엔 기생과 같이 남치마에 흰저고리야. 임 감독의 경우, 앞서도 얘기했지만, 아주 별나거나 튀는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옛날에 실제 입었던 옷차림, 사실에 가까운 그림을 쓰는 감독이었어. 기생의 옷차림은 시각적 즐거움을 주기 위해 변형됐지만, 다른 배역의 옷들은 거의 실제 그대로의 옷차림이 재현됐지. 그리고 항상 자기의 바람에 부합하는 의상들을 두고 칭찬했지. 서로에 대한 믿음이 컸어. 정리 심지현 simssisi@dreamx.net 구술 이해윤/ 1925년생ㆍ<단종애사> <마의 태자> <성춘향> <사의 찬미> <금홍아 금홍아> <서편제> <친구> 의상 제작

<고스포드 파크>, 혹은 인간 난장의 오만한 지휘자 로버트 알트먼

또다시 반전이다. 1980년대의 침체를 <플레이어>(1992)로 보기 좋게 역전시켰던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장 르누아르의 시선으로 추리한 앙상블 미스터리 <고스포드 파크>로 근작 <진저브레드 맨>과 <닥터 T>가 남긴 미진한 뒷맛을 후련하게 일소했다. <고스포드 파크>에서도 인간 군상들의 쇼는 알트먼 영화에서 늘 그렇듯이 난장판으로 끝나고, 그 아수라장을 빚어나가는 솜씨는 경이롭다. 유사시 연출을 대행할 감독을 두고 메가폰을 잡는 77살의 나이에도 인간 일반과 주류 할리우드를 향한 독설을 누그러뜨릴 줄 모르는 로버트 알트먼 감독은 지금도 차기작을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고 있다. 최근 본 할리우드영화를 묻는 질문에 “기억이 잘 안 난다”라고 대답하는 이 오만하고 냉정한 노장의 스테이지 뒤쪽을 영화평론가 유운성이 들여다보았다. 편집자 1990년은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사망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때 구로자와 아키라와 모리스 피알라는 각각 <꿈>(1990)과 <반 고흐>(1991)에서 이 불운했던 화가의 삶을 자신들의 영감의 원천으로 끌어들였다. 화려했던 70년대를 뒤로 하고 지지부진하게 80년대를 보내던 로버트 알트먼 또한 <빈센트>(Vincent & Theo, 1990)를 통해 조심스럽게 자신의 90년대를 열어보였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단지 반 고흐를 끌어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영화 속에 자신의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었던 이는 오직 한 사람, 모리스 피알라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로버트 알트먼은 여전히 잊혀져가는 감독일 따름이었다. <플레이어>(1992)와 <숏 컷>(1993)이 없었더라면 알트먼의 90년대는 얼마나 초라한 것이 되었을까? 특히 당시 우리나라의 영화광들에게, 즉 알트먼의 필모그래피 가운데 가장 시시껄렁한 영화로 간주될 만한 <야전병원 매쉬>(MASH, 1970)나 기이한 심리극 <사랑의 열정>(Fool for Love, 1985) 정도만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나와 같은) 이들에게, 이 두 영화는 진정 거장의 힘을 느끼게 하는 걸작으로 다가왔었다. 이후 알트먼은 완전히 환골탈태한 모습으로 자신의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다중적 서사구조를 채택한 <패션쇼>(Pre^t-a`-Porter, 1994)와 <캔사스 시티>(1996) 등의 영화가 차례로 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번에 우리를 찾아오는 알트먼의 영화는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의 무대를 1932년의 영국으로 옮겨놓은 느슨한 미스터리극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 2001)이다. 장르의 역사는 오직 부수어지기 위해 존재한다 영화학자 노엘 캐롤은 <인유(引喩)의 미래: 70년대의 할리우드>라는 논문에서, 장르를 옮겨다니며 거기에 개인적인 비전을 새겨넣는 미국감독들에 대해 언급하며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정말이지 현역 미국감독들 가운데 알트먼만큼이나 여러 장르를 옮겨다니며 작업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서부극(<멕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1976)), 필름 누아르(<기나긴 이별>(1973), <플레이어> <진저브레드맨>(1998)), 전쟁영화(<야전병원 매쉬>(1970)), 공상과학영화(<카운트다운>(1968), <퀸테트 살인게임>(Quintet, 1979)), 뮤지컬(<뽀빠이>(1980)), 그리고 갱스터(<우리 같은 도둑들>(1974), <캔자스 시티>) 영화들 사이를 종횡무진으로 오가며 작업한다. 다소간 장르영화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한 <내시빌>(1975), <패션쇼> 같은 영화도 고전기 할리우드의 백스테이지 뮤지컬로부터 서사구조를 차용해오고 있다. 물론 캐롤은 알트먼이 오직 장르 내부에서만 작업하는 감독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비록 알트먼이 장르를 오가며 작업하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의 영화들을 장르영화로 간주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의 영화들은 장르의 쇄신이라기보다는 장르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라는 관점에서 검토되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단적으로 알트먼의 영화에서 장르의 역사는 오직 부수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시팅 불의 역사수업’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시팅 불’(Sitting Bull)은 이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 추장의 이름이다- 은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쇼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라, 미국 개척사를 재조명한 것입니다.” 이 말은 영화 전체의 구조와 맞물릴 때 매우 아이러닉한 정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주로 존 포드에 의해 발전, 완성된 서부극에 대한 재검토를 목표로 하고 있는 듯한 이 영화에서, 전형적인 서부극의 영웅은 일개 쇼비즈니스의 광대이자 사기꾼의 모습으로 축소된다. 물론 이러한 뒤집기는 알트먼 최고의 걸작으로 꼽힐 만한 서부극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에서 이미 시도되었다. 그가 장르의 틀 안에서 다룬 인물들은 언제나 매우 유약하고 무능력하거나(<기나긴 이별> <우리 같은 도둑들> <퀸테트 살인게임> <진저브레드맨>), 비열하다(<플레이어>). 그러나 알트먼이 자신의 영화에서 즐겨 사용하곤 하는, 모종의 이화효과를 노린 장치들은 로빈 우드와 같은 평론가들에 의해 저열하고 일개 ‘속물근성’의 발현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사실 이건 전혀 근거없는 비난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생각건대 알트먼의 영화가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은, 그가 장르의 역사에 대한 어떠한 향수도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듯싶다. 스스로가 오랜 기간 쌓아올렸던 성채, 혹은 그 자신을 매혹시켰던 그 무언가를 직접 무너뜨려야 한다는 데서 오는 아픔 따위는 알트먼의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와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의 거리는 바로 이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혹은 버트 랭카스터가 루키노 비스콘티의 <레오파드>(1963)와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에서 각각 맡은 역할이 그 표면적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다른 느낌을 주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알트먼 특유의 ‘냉담함’을 확인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알트먼의 몇몇 영화는 오직 ‘머리로만 만들어진’ 영화의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빌모스 지그몬트가 촬영을 맡은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은 필터촬영이 불러일으키는 노스탤지어의 감각, 눈발이 날리는 가운데 눈에 파묻혀 죽어가는 멕케이브(워런 비티)의 모습 등을 통해 알트먼의 장르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깊은 정서적 공명을 끌어내기도 한다. 쇼는 언제나 망쳐진다, 그럼에도 계속된다? 알트먼에게 있어서 세상은 쇼비즈니스가 펼쳐지는 무대이다. 즉 그에게 세상은 허위로 가득한 것이라는 말이다. 아마 <내시빌>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플레이어> 그리고 <패션 쇼> 등이 가장 직접적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숏 컷>이나 <캔자스 시티> 또한 이러한 알트먼의 인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알트먼의 관심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쇼 자체가 아니라 무대 뒤(backstage)에서 벌어지는 추악하고 속물적인 인간들의 거래에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팀 로빈스(<밥 로버츠>(1992))와 폴 토마스 앤더슨(<매그놀리아>(2000))의 세계관은 모두 알트먼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때 알트먼의 영화는 백스테이지 뮤지컬과 유사한 것이 된다. 쇼는 언제나 망쳐지고야 만다. 그럼에도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Show must go on). 왜? <내쉬빌>의 무대만큼이나 온갖 인물들의 이해관계가 추악하게 얽혀 있는 곳도 없을 것이다. 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해 온 가수들, 선거전을 펼치기 위해 몰려든 정치인들, 가수가 될 꿈을 안고 서성이는 가련한 인물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취재하기 위해 온 기자 등등. 결국 이 혼란한 무대 위에서 최종적으로 쇼 진행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정치인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계획은 뜻밖의 저격사건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야 만다. 그럼에도 ‘여기는 내시빌’이기 때문에 계속 노래가 불리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수와 그의 뜻을 좇아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군중들의 모습은 정말이지 우습다 못해 씁쓸하기까지 한 것이다. <패션 쇼>는 알트먼이 <내시빌>의 무대를 90년대에 다시 한번 불러들인 영화이다. 알트먼의 영화는 종종 다른 곳으로부터 영화의 중심적인 공간이 되는 곳으로 인물들이 이동해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쇼비즈니스가 다루어지는 영화들은 물론이고,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 <세 여인>(1977) <퀸테트 살인게임> <뽀빠이> <사랑의 열정> <고스포드 파크> 등의 영화도 그러하다. 여기서 알트먼의 영화는 근본적으로 웨스턴과 유사한 것이 된다. 이동해온 인물들은 형성된 공동체 안에서 모종의 갈등에 휘말려들게 된다. 아니 차라리 이동해온 인물들 자신이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갈등을 비로소 불거져나오게끔 만든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이때 선과 악의 결투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헤어나올 길 없는 파국으로 치닫는다(단 <뽀빠이>만은 예외이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어떠한 인물과의 감정이입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알트먼의 전략으로 인해 파국은 언제나 낯설고 기이하다. 이러한 전략이 반드시 성공적인 것만은 아니지만 <숏 컷>은 그것이 대단한 정서적 효과를 끌어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알트먼 특유의 냉담함이 슬쩍 가셔진 <패션 쇼> <캔자스 시티>나 <고스포드 파크>와 같은 영화들은 분명 그의 변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유럽영화에의 한없는 지향 만일 알트먼을 사로잡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여러 평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유럽영화에 대한 한없는 지향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해 걸작으로 평가되는 <내시빌>이나 <숏 컷>, 그리고 최근의 <고스포드 파크>가 보여주는 다중적 서사구조가 르누아르로부터 끌어온 것임은 분명하다. 여러 인물들의 대사의 중첩, 대화 도중 소음이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를 불쑥 끼워넣기- 알트먼의 사운드 활용방식은 특별히 주목받아왔다-, 그리고 다분히 즉흥적인 연기 또한 이른바 르누아르적인 것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이다. 캐롤은 알트먼의 작업이 “르누아르적 전통으로부터 영향받았다기보다는 그것을 모방하고 확장하는 쪽에 보다 더 가까운” 것이라고 말한다. 알트먼이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발휘한다고 여겨지는 것도 대체로 이 영역에서이다.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과 <캔자스 시티> 같은 영화도 어느 정도는 이와 같은 작업의 영역 내에 속해 있는 것이다. 알트먼이 자주 사용한 줌인·줌아웃과 단조로운 팬과 틸트는 영화의 성격에 따라 다소 다른 의미를 띤다. 장르에 대한 재해석의 성격이 강한 영화들에서 이는 고전영화의 미장센과 그 영웅주의를 조롱하기 위해 존재한다(이를테면 <멕케이브와 밀러 부인>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뽀빠이> 등). 반면 심리극적인 성격이 강한 영화들에서 이는 황량함, 불확실성의 느낌 등을 강화하기 위해 존재하며(<세 여인> <퀸테트 살인게임> <사랑의 열정>), 다중서사구조의 영화들에서는 완벽한 혼란의 느낌을 전달하기도 한다. 어떤 식이든 간에 알트먼이 자신의 영화에서 활용하는 영화적 장치들은 그의 영화가 명백히 깊은 자의식을 지닌 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알트먼이 1977년에 발표한 <세 여인>은 영화가 담고 있는 그 불길함만큼이나 그 자신에게도 불길한 징후가 되었다. 알트먼이 여기서 끌어들이는 것은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페르소나>(1966)이다. 베르히만의 영향은 SF영화 <퀸테트 살인게임>에서도 감지되는데- 이 영화에는 베르히만 영화에 자주 등장한 비비 안데르손도 출연하고 있다-, 이 두편의 영화에서 알트먼은 그 스스로 완전히 혼란에 빠져든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이러한 혼란스러움이 두 영화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 자유분방하고 거침없는 밀리(셜리 듀발)를 동경하다 그 자신 스스로 밀리가 되어버리는 <세 여인>의 핑키(시시 스페이섹)나, 목숨을 담보로 한 기괴한 게임에 빠져드는 <퀸테트 살인게임>의 폴 뉴먼은 거의 알트먼 자신의 반영처럼 보인다. 그의 추종자들조차 입다물게 만들어버릴 만한 실패작 <뽀빠이>로 80년대를 시작한 알트먼은 오랜 기간 자신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원작만화의 캐릭터들을 고스란히 끌어오고 슬랩스틱 코미디, 뮤지컬 그리고 무성영화의 스타일을 한데 버무려놓은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오직 올리브 역을 맡은 셜리 듀발의 독창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던가 하는 기억밖에 남지 않는다. 그게 또 알트먼의 의도였을 테지만, 여하간 이 영화는 작가의 ‘냉담함’이 영화의 정서적 매력을 완전히 거세시켜버릴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예이다. 달리 보면 <뽀빠이>는 알트먼의 ‘진정한’ 실험영화일 수도 있다. 주로 텔레비전에서 작업했던 80년대 후반, 알트먼은 장 뤽 고다르, 데릭 자만, 켄 러셀, 그리고 니콜라스 뢰그 등과 함께 옴니버스 영화 <아리아>(1987)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그는 18세기 귀족들의 오페라 극장에 눈요깃거리로 초청된 정신병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외 <사랑의 열정>- 이 영화에서 알트먼은 <기나긴 이별>에 이어 다시 한번 (빔 벤더스를 경유해서) 안토니오니를 불러들인다. 또한 알랭 레네의 영향도 조금쯤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위험한 사랑>(Beyond Therapy, 1987)이 이 시기의 필모그래피를 채운다. 설득력 있는 파국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러한 침체기를 거친 뒤에 나타난 <플레이어>와 <숏 컷>은 진정 놀라운 영화이다. 알트먼은 이후 자신의 영화들에서 단지 냉담한 시선만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거의 해부학적이라 할 만한 꼼꼼함으로 그 자신이 속한 시스템의 구조를 파헤치는 한편 그것에 통렬한 저주를 퍼붓는다. 파국은 보다 설득력 있는 것이 되었다(<숏 컷> <패션 쇼>). 이전의 영화들에서 잘 드러나지 않았던 계급의 문제가 부상하고 이는 유머 가득한 영화의 구조 속에서 오히려 더욱 신랄하게 다루어진다(<캔자스 시티> <닥터 T>(Dr. T & the Women, 2000), <고스포드 파크>). 물론 알트먼은 한동안 상승곡선을 그리던 그의 경력에 찬물을 끼얹은 <진저브레드맨> 같은 영화도 내놓았다. 이건 <기나긴 이별>에 비하면 지나치게 평범한 필름 누아르이다. 하지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은 상류층 여성에게만 나타난다는 ‘헤스티어 콤플렉스’에 걸린 아내, 한껏 멋을 낸 옷차림으로 병원에 찾아와 수다를 떨어대는 부르주아 여성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놓인 혼란에 빠진 의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닥터 T>는 아주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분명 흥미로운 부분들을 찾을 수 있는 영화이다. 이제 <고스포드 파크>를 통해 다시 한번 온전히 르누아르의 세계로 들어간 알트먼은 정말로 그 세계의 ‘확대’를 모색하고 있는 듯하다. 이 영화가 비록 <숏 컷>만큼의 흥분을 가져다주진 못하겠지만, 아마도 <캔자스 시티> 이후 잠시 알트먼을 잊고 있었던 이들에게 그의 존재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고스포드 파크>, 혹은 인간 난장의 오만한 지휘자 로버트 알트먼 ▶ 로버트 알트먼의 동료들

김은형의 오! 컬트 <넥스트 베스트 씽>

물론 최선은 완벽한 남자를 만나는 것이다. 동석한 친구에게서 “정말 사람좋게 생겼다”는 따뜻한 위로를 들을 필요없고, 함께 피트니스센터를 다니기로 했을 때 “등록비가 10만원이래. 내일까지 내 계좌로 넣어줘” 따위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딴에는 서프라이즈 해준답시고, 바꾸러가는 수고를 덤으로 얹어주는 선물은 절대 하지 않고, 아이가 있을 경우 둘 다 바쁠 때는 당연히 자신의 사무실이나 약속장소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어쩌다가 내가 한눈을 팔아도 “다음엔 발렌타인 30년을 마시자고 해”라며 여유있게 농담 한마디를 건네는. 그러나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중에도,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중에도 이런 파트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경험으로 봤을 때 최선은 영화 속에나, 플라톤의 이론 속에나 있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어떤 차선을 선택하느냐인데 마돈나가 선택한 차선(‘넥스트 베스트 씽’)은 차선 중의 최선으로 보인다. 비현실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생활인으로서의 마돈나와 마돈나적인 라이프스타일이 공존한다. 실연당한 뒤 “또 2년을 허비했어. 좀더 나이를 먹으면 아이를 낳을 수도 없단 말이야” 질질 짜는 마돈나의 모습을 보는 건 통쾌한 구석까지 있다. 음악에서나 이전의 영화에서나 마돈나의 이미지는 대개 내가 원하는 건 뭐든지 얻을 수 있다는 식이었으니까. 그 모습은 부러우면서도 꼭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말하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마돈나가 평범한 선택을 하는 건 아니다. 그는 게이친구 로버트와 대안가족을 만든다.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에서 백명의 남자친구가 부럽지 않은 줄리아 로버츠의 게이친구 역을 했던 루퍼트 에버렛이 여기서도 멋진 게이로 등장한다. 그는 실연으로 괴로워하는 마돈나를 위로하기 위해 전 애인을 찾아가서 엿을 먹이고, 마돈나의 침대에서 함께 뒹굴뒹굴하며 텔레비전을 보기도 한다. 너무 많은 마티니잔에 의해 잠시 자신의 정체성을 까먹은 로버트와 애비(마돈나)는 하룻밤의 실수로 아이를 가진다. 한참 뒤에 애비의 전 애인 아이로 밝혀지기는 하지만. 아이를 위해 한지붕 아래 살면서 이들은 훌륭하게 부모노릇을 한다. 물론 부부는 아니다. 아주 가까운 친구에게 애인이 생기면 섭섭한 감정이 생기듯 이들은 서로의 애정생활에 샘을 내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오랫동안 한 이불을 덮었다는 이유로 양해해야 하는 무례함이나 거짓말,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게 진정한 인생이라는 듯 독신친구들을 향해 피우는 구차한 거드름 따위가 필요없는 관계다. 이 영화도 그렇지만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이나 <파니 핑크>처럼 ‘잘 키운 게이친구 하나, 열 애인 안 부럽다’식의 관계설정이 영화에서 종종 등장한다. 단지 영화의 판타지적 속성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나에게도 게이친구가 있다. 하룻밤의 사고를 칠 경우 게이 문중에서 당할 쪽팔림을 두려워하는 소심증 환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좋은 아빠가 되기에는 게을러터졌기 때문에 나중에 내 아이를 키울 일은 없겠지만 실연을 당했을 때 “쌔고 쌘 게 남자야” 따위의 비난만도 못한 위로를 하는 여자친구보다 나은 친구다. 남녀가 한지붕 아래 사는 건 곧 섹스하고, 결혼하고, 애를 낳는 것을 의미하는 한국에서 게이친구를 갖는다는 건 좀더 특별한 것 같다. 내 친구들에게 그 친구 이야기를 하면- 쫀쫀한 년이라는 욕일 때도 많은데- 대부분 부러워한다. 이 작품의 국내개봉 제목이 이렇게 바뀌었더라면 좀더 많은 관객이 특히 여성 관객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게이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김은형/ <한겨레21> 기자

정성일의 <복수는 나의 것> 비판론 [1]

저 사람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편견은 공허해져버렸다. 스스로 악이고자 했던 것은 일종의 선일 뿐이며, 악의 매력은 무(無)화시키는 힘에 집착할 뿐이므로 무화(無化)가 완성된 이후에는 그것은 더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악의는 ‘가능한 최대한으로 존재를 무(無)로 변모’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의 행위가 실현이므로 무가 존재로 변하고, 동시에 악인의 절대성은 예속으로 들어선다.’ 다른 말로 하면, 악은 선이 그렇듯이 하나의 의무가 되었다. - 조르주 바타유 <문학과 악> 모든 말은 말하여지기 위하여 말하여지지 않은 곳 속에서 그 자체를 둘러싼다. 그리고 문제는 이 모든 말이 어째서 이 금지 자체를 말하지 않는가를 아는 것이다. 즉 이 금지는 그것을 인정하고자 하기도 전에 인정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말은 그것이 말하지 않은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부재조차도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정한 거부는 금지된 말을 배격한 행위에까지 확대되며, 그 부재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 삐에르 마실레 <문학생산의 이론을 위하여> 코러스: (좀 난데없긴 하지만… 중략… 록 밴드) U2는 그들의 이미지를 동명영화에 담았습니다. 특히 는 정말(본인들이야 진지했겠지만, 듣는 사람들을 진짜 웃긴) 히트였죠. “더운 여름날 로스앤젤리스의 한 호텔 방, 나는 존 콜트레인의 러브 수프림스를 듣고 있었지, (중얼중얼) 옆방의 커플은 목사가 나오는 티브이 프로를 보고 있다네… (그러더니 난데없이 흥분해서) 내가 아는 신은 돈이 부족하지 않다구! 엘살바도르의 하늘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지… 미국으로 가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이 내레이션은 너바나의 벨기에 공연에서 다시 패러디되었습니다. “나는 벨기에의 한 호텔에 앉아 있다네, (쫑알쫑알) 갑자기 벨기에의 와플이 먹고 싶다네, (궁시렁궁시렁) 벨기에 와플을 먹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이게 텔레비전에서 다시 인용되는데) 소녀가 하루는 학교에 안 가겠다고 떼를 씁니다. (중략) 그러자 아버지가 일장 연설을 합니다. “네가 학교에 안 가겠다고 하는 동안, 엘살바도르의 상공에서는 미사일이 떨어지고 있다구… (어쩌구 저쩌구)” 목자와 양떼 올해 가장 웃기는 대사를 꼽으라면 나는 이의없이, 판결문, 차영미 피살사건을 심리한 결과, 박동진이, 한국무정부주의자 동맹의 일원을 고문하고, 살해한 죄가 인정되므로, 재판부 전원합의에 의해, 무산계급과 혁명의 이름으로 사형을 언도한다, 라고 쓰여진 종이를 박동진의 가슴에 칼로 꽂을 순간을 선택할 참이다. 이건 비꼬는 말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장사는 끝났다. 그렇다면 이제는 진담을 말해야 한다. 목자와 양떼들 사이에서 거짓말쟁이 소년은 누구였는가? 우리는 늑대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늑대는 양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목자는 잃어버린 단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오늘도 헤맬 것이다. 하지만 누가 영화에서 본 것에 보지 않은 것을 덧붙이는가? 보았다고 말한 것이 정말 거기서 보이는가? 이제 소설을 쓰는 일은 중단되어야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을 보고 너무나 잔인해서 기절할 뻔했다고? 아마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웃을 사람은 박찬욱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웃자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아니라 박찬욱이 한 말이다. “어떤 사람들이 아무리 호러라고 주장해도 나는 코미디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람들이 안 웃어도 모든 장면 또한 다 웃음이 있다.” 나는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페인트가 많이 사용되고, 14명이 누울 자리가 부족하게 죽은 척하고 누워 있다고 해서 영화가 잔인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광 박찬욱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말 사람들이 웃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무언가 서로 빗나간 대상이 있다. 왜 웃음의 대상이 불가능한 욕망이 된 것일까? 반대로 대중들은 어디서 영화가 바라지 않는 오해의 환상을 연출해낸 것일까? 이 숨바꼭질의 진짜 술래는 누구일까? 왜 술래는 속지 않는가? <복수는 나의 것>은 처음부터 술래잡기를 자처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첫 대사, 그러니까 시작하자마자, 전 착한 사람입니다, 성실한 근로자죠, 라는 여자의 목소리가 먼저 들릴 때, 그리고 나서야 그 목소리와 글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순간 우리는 경기장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경기는 끝까지 계속되는데, 이 술래는 자기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라고 말한 그 장소로 되돌아와야 한다. 경기장은 결국 거기이다. 엽서에 그려보낸 강가는 실재하는 장소이고, 그 장소에로 모든 등장인물들은 결국 돌아와야 한다. 영화는 거기서 시작해서 거기서 끝난다. 술래에게 붙들려 그 장소로 가면 그건 결국 죽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 그려진 그 강가의 물 속으로 카메라가 잠길 때, 그 순간 의도적인 페이드가 개입할 때, 우리는 이제부터 벌어지는 이야기가 사건인지 상상인지, 실재인지 무의식인지, 종잡기 힘들어진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 라디오 소리를 듣지 못하는 류가 신청엽서를 보내고 누나와 듣는(척 한)다. 글은 하나인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글을 쓴 사람 중 어느 것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다. 결여를 결여로서 자리매김하는 과정으로서의 빈자리의 술래들. 그리고 다시 페이드. 생략과 설명,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 그렇게 페이드는 반복된다. 그때마다 우리들은 어리둥절해진다. 페이드는 설명을 괄호친다. 그때마다 우리는 알아서 알았다 치고, 넘어가야만 한다. 생략은 점점 과감해지고, 설명은 점점 늘어진다. <복수는 나의 것>은 빼먹고 넘어가는 것이 많은 영화이다. 반대로 지루한 설명이 반복되는 장면이 많은 영화이다. 또는 그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류(와 영미)가 동진의 딸 유선을 유괴하는 장면은 빼먹지만, 동진에게서 돈가방을 빼앗는 장면은 장소를 옮겨가며 그 과정을 보여준다. 류가 장기밀매 사기에 말려들어 수술하는 장면은 빼먹지만, 물에 빠져죽은 유선을 부검하는 장면은 꼼꼼하게 (복부를 가르는 데까지만 보여준 다음) 들려준다. 또는 장기밀매단 가족을 죽이는 장면은 꼭 챙긴다. 팽기사가 자해극을 벌이는 장면은 보여주지만, 팽기사 가족이 음독자살극을 벌이는 과정은 빼먹는다. 여기에는 원인과 결과의 비대칭이 존재한다. 비대칭의 구조 속에서 가장 이상한 점. 남은 것은 모두 자살, 살인, 자해, 꽁꽁 묶인 채 헐떡거리는 숨소리, 고문, 비명, 피, 그리고 죽음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이 모든 것이 2천400만원을 챙기려는 유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영화 중반 이후) 돈가방은 어떻게 된 것일까? 왜 아무도 그 돈가방을 기억하지 못할까? 그 비대칭 사이에서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이미 벌어진 사건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나쁜 선택으로 해결하고 싶은 의지가 개입한다. 류의 누나는 류의 바지에서 퇴직금 수령증을 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유선의 유괴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유선을 돌려주려는 그 어떤 노력을 하는 대신 그냥 자살한다. 그 누나의 시체를 차에 태워서 류는 밤새 차를 몰아 고향까지 간다. 더 대담하게 생각되는 점. 그 옆에 유괴한 유선을 태워서 같이 간다. 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영화사상 가장 대담한 유괴범이다. 또는 가장 무모한 유괴범이다. 그리고 기어이 그 강가에 도착해서 유선은 죽어야 한다. 유선은 거기서 죽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만일 있다면 딸은 죽어서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 장소로 기어이 불러온다. (동진은 류의 방에서 때려죽일 수도 있었는데, 기어이 강가로 데려온다. 마치 딸의 추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듯이) 엘렉트라 이야기의 가장 무시무시한 버전. 궁금한 점 한 가지 더. 돈을 받는 데 성공했는데, 또는 애인의 유일한 혈육인 누나가 죽었는데, 영미는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유괴에 성공한 날도 쉬지 못하고, 그녀의 말을 빌리면 “그런 자본의 이동으로 화폐의 가치를 좇나게 극대화”하는 데 성공한 날도, (아마도) 혁명동맹 건설에 너무 바쁘다. 또는 오직 그녀만이 강가에 오지 못한다. (후렴구) 내가 아는 신은 돈이 부족하지 않다구! 천국으로 가기 위한 돈 계단, 어쩌구저쩌구. 거꾸로 선 결정주의, 원인에 우선하는 결과 류는 동진을 협박하기 위해 어린 유선의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그녀는 류의 집에서 모두들과 참 친하게 지낸다. 그녀를 울리기 위해 달라는 목걸이를 빼앗는다. 사진을 찍은 다음, 유선의 아버지에게 보내기 위해 목걸이와 유선의 인형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진과 인형이 유선의 아버지에게 도착한다. 그런데 그 사진 속의 유선의 목에는 목걸이가 걸려 있다. 어리둥절. 죽은 유선의 시신을 거두면서 딸을 죽인 자들을 찾는데, 그 앞에 유선의 목걸이를 한 뇌성마비 장애인이 나타난다. 사진 속의 목걸이와 장애인을 대조한 동진은 그가 그 순간 그 장소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장애인은 (정말 보통 사람이 해내기 힘든) 탁월한 기억력으로 류가 타고 온 자동차 번호와 색깔을 알려준다. 옥의 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비대칭은 점점 이 영화를 웃음의 도가니로 몰고가기 시작한다. 사건은 원인으로 시작해서 결과를 향해 가는 대신 모든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내기 시작하고, 또는 원인은 결과에 의해 채워지고, 그 순간 일어나는 대상에 대한 착란은 구조의 고정점을 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술래가 기만하는 것인가, 쫓기는 자가 착각한 것인가? 이 비대칭의 구조 안에서 실재가 모순을 일으키는 단계까지 밀고 나아가자, 그 반대로 원인과 결과의 연쇄를 차단하고 그 의미의 연쇄망의 내부에서 모순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그 틈새를 메꾸는 결정주의가 개입한다. 이 순간 사악한 순환이 시작된다. 실재의 왜곡을 지배하는, 우연과 필연이 자리를 바꾸는, 모든 차이가 필연성으로 와해되는, 그래서 설명하려는 대상들이 결정상태에서 모순을 무시하고서라도 사후승인이라고 불리는 그 어떤 절대적 질서를 끌어들인다.

[Review] 리턴 투 네버랜드

■ Story 전편 <피터팬>으로부터 세월이 흘러, 피터팬을 따라 네버랜드로 갔다온 웬디는 결혼해 두 자매, 제인과 대니의 엄마가 됐다. 런던은 2차대전에 휩싸여 수시로 나치군의 공습을 받게 된다. 위태로운 전시상황에서도 웬디는 피터팬을 만났을 때의 동심을 간직하고서 수시로 두딸에게 네버랜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피터팬을 만났을 때의 웬디처럼 10대 초반인 큰딸 제인은 피터팬과 네버랜드를 꾸며낸 이야기로 여길 뿐 그 존재를 믿지 않으려 한다. 공습이 잦아져 시골 마을로 떠나기로 한 전날 밤, 피터팬 이야기를 두고 엄마와 한바탕 다투고 잠이 든 제인에게 후크 선장이 해적선을 타고 날아와 네버랜드로 납치해간다. ■ Review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피터팬과 개구쟁이 고아들이, 인어와 인디언과 해적 후크 선장과 함께 살고 있는 네버랜드. 그곳의 흥미진진한 모험에 신이 났지만 가족을 떠나 낯선 땅에 남기가 두려워, 우리는 웬디를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고 기어코 어른이 됐다. 그러나 피터팬과 개구쟁이 꼬마들은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서 모험을 펼치고 있을까. 1953년에 만든 만화영화 <피터팬>에 이어 디즈니가 내놓은 속편 <리턴 투 네버랜드>는 어린이들의 동심 못지않게 어른들의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다. 마침 이야기는 소녀 웬디가 커서 두 자매의 어른이 된 시점에서 시작한다. 어릴 때 평화롭던 런던은 전쟁터가 돼버렸다. 포화 자욱한 런던은 웬디에게 인어가 뛰노는 네버랜드에 대한 향수를 더 부추긴다. 웬디는 제인에게 네버랜드 이야기를 싫도록 해대지만, 어려서부터 처참한 현실을 목격한 제인은 ‘동화 속에나 있는 꾸며낸 이야기’로 여긴다. <피터팬>은 네버랜드를 믿는 웬디가, 딸이 빨리 몽상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에게 네버랜드를 믿게끔 만들면서 끝났다. <리턴…>은 거꾸로 어른인 웬디가 어린 제인에게 네버랜드의 존재를 설득시키려고 애쓴다. 이렇게 역전된 설정이 자못 위태롭다. 포탄을 피해 대피한 제인 집의 방공호는 <피터팬>의 아늑했던 웬디의 방보다 더 네버랜드의 판타지를 갈구하게 만들지만, 네버랜드는 무엇보다 어린이들의 땅이다. 그 판타지의 생명력은 어른을 거부하는 데 있다. 그곳을 등돌리고 돌아온 어른이 일깨워주는 네버랜드가 어른의 향수 안에 갇히지 않고 어린이의 상상력으로 새롭게 살아 움직일 수 있을까. 마침 후크 선장은 중대한 실수를 범한다. 제인을 웬디로 알고 잘못 납치해간 것이다. 웬디가 다시 갔다면 네버랜드는 이전과 똑같을 수만은 없었을지 모른다. 제인이 네버랜드에서 겪는 모험은 엄마가 들려준 이야기가 사실이었음을 확인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 후크의 왼팔을 삼킨 악어는 사라진 대신 거대한 문어가 후크를 괴롭힌다. 정치적으로 좀더 올바르게 인어와 팅커벨과 제인 등 여자들이 피터팬을 놓고 다투지 않고 서로 연대한다. 이런 식으로 별반 새롭지는 않지만 전편의 재미를 적절히 변형해 복제한다. 또 마지막에 제인과 함께 런던에 온 피터팬이 잠깐 동안 웬디와 재회할 때는 가슴이 저려오는 걸 피하기도 힘들다. <리턴…>은 디즈니사가 원래 텔레비전용으로 기획한 프로젝트를 나중에 확대해서 극장에 내건 영화다. 바닷물이 물결조차 보이지 않게 파란색 단색으로 처리되는 등 텔레비전용 애니메이션의 한계가 화면에 드러나는 건 큰 약점이다. 임범 isman@hani.co.kr

<집으로…>의 감동, 그 인공성에 관하여

● <집으로…>(감독 이정향)는 올해 나온 영화 가운데 가장 의미있는 문제작이라고 생각된다. 텍스트 외적인 차원에서 이 영화가 끼치게 될 영향만 예상하더라도 범상치 않다. 산업적으로 이 영화는 <쉬리>(1999, 감독 강제규)의 역할에 필적하는 중요성을 갖지 않을까 싶다. <쉬리>가 주제나 형식상으로 적절한 흥행 코드를 배합할 경우 한국 시장에서도 600만명의 관객 동원이 가능하다는 사상 초유의 경험을 안겨줌으로써 영화산업의 규모를 급팽창시켰다면, <집으로…>는 통상 비상업적이라고 간주돼온 요소만으로도 대형 흥행을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기획과 제작의 다양성을 고무하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작가주의/여성/어린이, 가장 비주류적인 것이 얽어낸 성취 어떠한 제작자나 투자자라도 이른바 ‘예술영화’ ‘작가주의영화’에 손대고 싶다는 욕망을 피력한다. 속칭 블록버스터나 대형 장르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예산을 들이면서도 합리적인 선의 자본 회수가 가능하리라는 기대야말로 그같은 욕망을 현실로 끌어내는 첩경이다(이 때문에 멀티플렉스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 배급망과는 별도로, 공익성과 수익성을 절충한 대안적인 배급망을 설계할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판단된다). <집으로…>는 한국영화에서 가장 비주류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요소들을 가지고 이런 성취를 선도해냈다는 점이 돋보인다. 쉽게 말해 산골 오지에 사는 할머니와 7살 짜리 손자 이야기를 가지고 비평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면, ‘상업영화’로 만들지 못할 소재란 없다는 용기를 주는 셈이다. 특히 이 역할을 여성 감독이 해냈다는 것도 의미있다. 여성 감독의 작품은 어떤 의미로든 주변적인 성격을 띠는 경우가 많다. 여성으로서 감독을 하는 것은 심지어 할리우드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소수자의 자의식이 강해지고 여성 문제를 비롯해서 소외된 이들의 현실을 천착하는 진정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아니면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앞세워 특화된 시장에 호소하는 것을 생존전략으로 삼기도 한다. 이정향 감독은 ‘외할머니’라는 여성의 계보를 강조하고 여성적인 섬세함이라고 부를 만한 특성을 보여주면서도 이것을 주류 영화계 안에 안착시켰다는 점에서 여성 감독의 역할을 편견없이 활성화하는 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영화는 또한 사실상의 어린이영화, 성장영화로 분류할 수 있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1970년대까지는 <엄마 없는 하늘 아래>(1977, 이원세) 같은 일종의 새마을영화, 계몽영화의 범주 속에서 의미있는 어린이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고, <로버트 태권브이>(김청기) 같은 어린이용 만화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오늘날 한국영화계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어린이영화는 사실상 사각지대 중의 하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찾아간 극장에서는 까르르거리는 보이 소프라노의 웃음소리가 관객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또한 할머니와 꼬마의 관계 발전이 멜로드라마 속 주인공의 관계공식(순정파 여인과 이기적인 남자)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멜로드라마가 제공하는 풍부한 자양분을 재확인하게 된다. 이질적인 것의 충돌, 이정향 플롯 이제 <집으로…>라는 텍스트 안쪽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볼 차례다. 이 영화의 성공 요인은 ‘감동’이라고 말해진다. 코미디가 아니면서도 웃음을 지을 수 있고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게 만든 감동은 풍부하게 발굴되어 있는 에피소드들의 효과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정향 감독은 에피소드의 광맥을 캐어내는 자기만의 비법을 하나 갖고 있는 듯하다. 바로 이질적인 두 존재를 하나의 공간 안에 강제적으로 병치시키기라는 플롯 장치이다. 전작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는 ‘미술관’의 느낌을 주는 여성(우아하고 지적이지만 어딘가 폐쇄적이고 까탈스럽다)과 ‘동물원’의 느낌을 주는 남성(거칠지만 귀엽기도 하다)을 하나의 방 안에 밀어넣었고, <집으로…>는 첩첩산중을 벗어나본 적이 없는 칠순의 할머니와 도회지 물에 흠뻑 젖은 7살 소년을 오두막 안에 동거시켰다. 이질적인 것의 충돌은 당연히 많은 상황을 발생시킨다. 감독은 그것을 상상하고 관찰하면서 적절한 에피소드를 솜씨 좋게 걷어올렸을 것이다(이정향식 플롯 장치라는 개념은 한겨레문화센터 비평교실의 수강생 박순영씨로부터 얻은 통찰이다). 이 에피소드들은 매우 강력한 이야기성을 가진 메인 플롯 위에 실려 운반된다. 그 ‘이야기성’이야말로 <집으로…>의 성공을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가 이 영화에 대한 작품적인 평가를 가름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 앞서 <집으로…>의 영화적 스타일과 대상에 대한 태도에 관해 말하자면,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987년작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필두로 그의 영화가 유럽에 소개되었을 때 그쪽의 일부 언론은 “키아로스타미가 세계 영화를 구원할 것이다”라는 찬사를 바쳤다. 필자 역시 1995년 한국에서 개봉되었을 때 느꼈던 기이한 전율감을 기억한다. 키아로스타미가 세계 영화를 정말로 구원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소박한 접근법, 로케이션 위주의 촬영, 현지에서 발견한 비직업 배우, 무심한 듯 보이는 에피소드를 통해 사회적인 컨텍스트 드러내기, 오래되고 낡아보이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경외를 통해 현대 사회에서 소외된 전통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재부각하기 같은 전략이 아름다운 페르시안 양탄자처럼 뒤섞인 키아로스타미적인 스타일이 최근 유럽의 국제영화제에서 접하게 되는 아시아영화들 가운데 하나의 흐름으로 관찰되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1940년대의 이탈리아 네오 리얼리즘에 비견할 만한 영향력이라고 평가한다면 지나친 속단일까? <집으로…> 역시 이러한 형식적 특징과 태도를 공유하고 있다. 물론 이 영화가 특정 대가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진단이 곧 이 영화의 미덕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청출어람은 세상 모든 신예들의 권리이자 책임이고, 좀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영화 비평 혹은 한국영화사 연구에서 외국 영화와의 지속적인 접촉과 상호작용이라는 이슈가 진지하게 부각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현대 도시인의 기대를 충족시킨 인공성의 승리 영화 <집으로…>의 감동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양한 세대에게 폭넓게 호소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답한다면 그것은 동어반복이거나 모순적이다. <집으로…>의 극장 관객 역시 여느 상업영화들과 마찬가지로 20대의 젊은 층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어린이나 좀더 나이 든 세대가 단지 ‘섞여’ 있을 뿐이다. 할머니와 어린이라는 마이너 주인공을 가진 이 영화가 모든 세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비결은 바로 대상에 대해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집단적인 이미지를 솜씨 좋게 건드리며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축한 데 있다고 생각된다. 그 대상은 모성과 농촌이다. 여기서 할머니는 모성 혹은 모성의 변형이다. 이 나이든 어머니는 시골에 산다. <집으로…>는 우리 안에 내장된 모성과 농촌 이미지를 정확히 반복한다. 듣기만 할 뿐 말하지 못하는 할머니라는 설정은 매우 상징적이다. 어머니와 시골은 그들이 낳은 자식을 도시/현대 사회/문명 사회로 내보내는 데 필요한 모든 요구들을 다 들어주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옷이 낡고 고무신이 떨어지고 지붕이 내려앉는 절대 빈곤을 감내했다. 그러면서도 도시와 자식들을 향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입을 닫았고 자식들은 어머니와 시골의 관용에 대해 한편으로는 미안해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 같은 모성과 농촌을 개발독재시대의 권력자와 부르주아들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악용해왔다. 도시로 나간 자식들은 농촌의 부모에게 절대 착취자들이며 개발독재의 공범자다. 오늘날에는 도시의 자동차족이 되어 농촌을 급기야 휴식과 소생의 이미지를 가진 관광상품으로 재활용한다. 이같은 원죄의식은 일년에 한두번씩 벌이는 발작적인 귀향 행렬과 효도의 세리머니로 표출되고 부모가 싸주는 촌스러운 선물꾸러미를 죄 사함의 증표로 받아들고 되돌아온다. <집으로…>에서 죄의식은 아이에게 전이되고 투사되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못된 짓은 고작 요강을 발로 차서 깨뜨리거나 밥숫가락 위에 얹어주는 김치를 덜어내고 비녀를 뽑아가는 정도이기에, 혀를 끌끌 차거나 함께 눈물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얻는 정도로 소화할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외양간을 비게 만들고 지붕을 무너뜨리고 논밭을 팔아먹은 성인 세대 자신의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죄의식은 감당하기 어려워지고, 영화는 웃고 울며 즐기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성장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가 <집으로…>에 함께 열광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것은 모성과 농촌의 이미지가 인공적이고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한국인의 집단의식 속에 주입되고 있지 않은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전원일기>를 20년이나 지속되는 국민드라마로 만들고, 개그맨이 진행하는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도시의 자식들에게 “난 잘 있다. 느그들 건강하고 가끔씩 전화해라”고 카메라를 향해 외치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한동안 히트 상품으로 만든 비결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텔레비전의 모니터는 달리는 자동차의 유리창만큼이나 안전거리를 유지시키면서 노스탤지어만을 취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영화 <집으로…>는 현장에서 추출된 듯이 보이는 풍부한 에피소드와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을 직조하는 이야기 자체는 집단적인 기억에 호소하는 매우 인공적인 것이며, 꼬마 상우는 어른의 조작된 기억을 모사하는 영특한 악동이다. 생각 여하에 따라서는 귀여운 것이 아니라 무섭다. 요컨대 <집으로…>는 영화형식상으로 다큐멘터리적인 진정성을 채용한 반면, 주제적으로는 모성과 농촌에 대한 현대 도시인들의 기대를 차용해서 감정을 끌어내고 그것을 확대재생산한다. 죄의식과 감동 그 자체가 꼭 나쁜 것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반응이 천편일률이라면 문제가 있지 않을까. 김소희/ 영화평론가 cwgod@hanmail.net

영어로 임권택 감독론 공동 출간한 김경현

교수라기엔 너무나 털털한 모습의 김경현씨(33). 그는 한사코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책이 주인공이 되었음 좋겠다며 피플란 인터뷰를 사양하는 눈치였다. 그의 책이란 바로 지난 1월 미국의 인터넷서점 아마존에 등장한 한국영화 학술서적 . 김경현씨는 영문으로 된 이 연구서적의 공동편자 중 한명으로, 한때 <씨네21> LA통신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현재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UCI) 동아시아 어문학과에서 문화이론을 담당하며 대중문화론, 영화이론 등을 강의하고 있는 젊디 젊은 교수다. 그가 임권택 연구서를 구상한 건 석박사 과정 재학중이던 1997년, 남가주대학(USC)에서 임권택 회고전이 열렸을 때였다. <깃발없는 기수>부터 당시 최근작이던 <축제>까지 임권택 감독의 영화 20편을 튼 이 회고전에 미지의 영화나라 한국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표명하듯 많은 학생 관객이 찾아들었고 이에 고무된 그는 ‘임권택 영화를 중심으로 한국영화 서적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임권택 감독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영화 40년을 되짚어볼 수 있어요. 그의 잡초 같은 영화인생에 매력도 느꼈죠. 60, 70년대만 해도 영화계의 야인이었던 양반이 어떤 식으로 한국영화의 중심이 됐나, 그걸 통해서 한국영화 역사의 어떤 모순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은 데이비드 E. 제임스의 <임권택:한국영화와 불교>, 김경현의 <전쟁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태백산맥’에 나타난 기만적 성과 다시 남성화하는 나라>를 비롯, 조한혜정의 <서편제:그 문화적 역사적 의미>, 조은순의 <‘아다다’와 ‘씨받이’에서 여성의 몸과 발언> 등 두 엮은이를 포함한 국내외 연구가 8명의 한국영화에 대한 논문과 김경현씨의 임권택 감독 인터뷰, 한국사 연표와 임권택 필모그래피, 한국영화에 대한 문헌목록을 싣고 있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김경현 교수는 미국 내 영화학학회, 아시아학회 등에 필진을 모집하는 공고를 내 글을 받았고, ‘부지기수로’ 임권택 감독을 만났다. 하지만 출판사와 계약을 맺기가 쉽지 않았다. ‘시놉시스’에 해당하는 기획안을 여기저기 보냈지만 퇴짜를 맞기 일쑤었고, 그 끝에 웨인스테이트유니버서티프레스의 ‘컨템포러리 필름 앤 텔레비전 시리즈’에 채택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자세히 들어보면, 제 한국말이 좀 서툴다는 걸 알거에요.” 김경현씨는 건설회사 주재원이던 아버지를 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을 떠났다. 동남아, 중미 등지의 외국인학교를 다녔고, USC에서 영화를 전공, 지난 97년 어바인대학의 교수로 임용됐다.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지만 ‘영화광’이라는 그는 한국영화를 한국에 있던 사람 못지않게 많이 보았다. 한국에 올 때마다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을 보는 것은 물론 비디오로 그간 보지 못했던 영화들을 챙겨보는 부지런을 떨었던 덕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그런 그에게 자못 특별하다. <길소뜸> <아제아제 바라아제> <씨받이> 등을 비디오로 보고 영화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니 말이다. 그의 박사논문은 한국영화를 사회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 <뉴코리안시네마:흔들리는 경계, 역사, 계급 그리고 성>. 임권택 연구서에 이어 그는 최근 20년간 한국영화 25편을 텍스트분석한 <뉴코리안시네마:남성성과 현대성>을 준비중이다. 문화텍스트로서의 영화를 사회적, 심리분석학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 그의 주요관심사. 그는 부인인 김진아 감독(1999년 서울여성영화제에 <빈 집> 발표)과 함께 차린 ‘픽쳐북무비스’라는 독립영화사의 이사를 맡아 김진아 감독의 장편 <그집앞> 제작도 돕고 있다. 은 곧 한글 번역판으로 국내 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