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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콜라주 영화로서의 '침입자'와 '프랑스여자'

기억과 장소에 관한 이야기로 <침입자>와 <프랑스여자>를 나란히 들여다보았다. 두 영화의 결말에 관한 누설이 있음을 밝혀둔다. 궤적이 영화를 지탱할 때 손원평 감독의 장편 데뷔작 <침입자>에 관한 주된 반응은 잘 진행되던 서사가 중·후반부에 이르러 무너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응은 영화가 스릴러에 기반을 둔 장르영화임을 전제한다. 스릴러영화로서의 <침입자>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 영화가 스릴러영화와는 다른 시작을 보여준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영화는 서진(김무열)의 시선에 과도하게 기대면서도 그를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자신이 유진(송지효)이라 주장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에 맞춰진 스릴러의 초점을 분산시킨다. 서사가 진행되는 중에도 ‘이 모든 것이 서진의 과대망상이 아닌가’라는 의문은 끈질기게 따라붙는다. 무엇보다 서진의 아내 실종 사건과 동생 유진의 귀환이 맞물리기 이전에, 서진의 기억을 통해 둘의 관련성이 처음으로 암시되었다는 점이 특히 의심스럽다. 서진은 뺑소니 범인을 찾기 위한 최면 치료 도중 동생을 잃은 과거의 기억과 마주한다. 그렇다면 서진은 예지몽을 꾼 것일까. 혹은 조작된 기억으로 인한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 영화는 끝까지 답을 명확히 정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것도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 책임 회피의 결과이거나, 모호함을 의도한 장르적 제스처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전에 나온 비슷한 서사들을 느슨하게 참고하되 다른 선택의 방식을 탐색하고 있으며 그것이 곧 영화의 주제와 맞물린다. 영화가 주는 기시감을 차용과 변용을 통한 콜라주 영화, 전환적 모자이크 영화의 흔적으로 읽어보려 한다. <침입자>의 서사는 갑자기 나타난 동생 유진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그가 누구인지를 파악해가는 서진의 이야기로 요약된다. 미스터리한 여성을 추적하는 남성 관점의 이야기가 드문 것은 아니나, 그중에서도 변영주 감독의 <화차>(2011)는 비슷한 이야기 구조 속에 각각의 선택과 차이가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적절한 비교 대상이다. <화차>에서 문호(이선균)는 결혼을 앞둔 약혼자 선영(김민희)이 휴게소에서 갑자기 실종된 뒤 그가 알아온 존재가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낯설어지는 <화차>와 달리 <침입자>에서 25년 만에 나타난 동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낯선 사람일 뿐이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사라짐과 귀환이라는 대조적인 상황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들이 마주한 여성이 누구인지를 스스로 파악해야 하는 공통의 과업을 지닌다. 계급 욕망이 사라진 이후의 카오스 두 영화에서 가장 첨예한 부분은 여성 캐릭터를 어떻게 퇴장시킬까를 둘러싼 선택과 판단이다. 선영과 유진은 공히 추락의 운명을 맞는데, 추락의 장소와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은 대비된다. 선영이 살인을 저지른 주된 원인에는 자본과 계급 상승의 욕망이 깔려 있다. 추락하기 직전 경찰의 추격을 피해 백화점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은 선영의 욕망을 직접 보여주는 장치다. 추락 장면은 롱숏과 클로즈업을 통해 배경 속의 인물과 인물의 표정을 두루 비추며 자세히 시각화된다. 반면 <침입자>에는 현대 스릴러의 무대라고 하기에는 낯선 바위산이 배경으로 등장하며, 추락 장면은 기이할 정도로 생략된다. 추락하는 유진을 직접 보여주는 장면은 단 한숏뿐이다. 서진의 눈에서 멀어지는 유진의 정면 얼굴 부감숏을 제외하고는 서진의 시선 바깥에서 추락하는 유진의 모습을 담은 비인칭적 숏은 제거되어 있다. 생략된 추락의 순간은 추락 그 자체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든다. (유진은 정말 추락한 것일까.) 이와 함께 상승이라는 대조적인 의미망 역시 위태롭게 만든다. 유진의 추락은 상승을 꿈꾸는 추락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녀 안에서 상승과 추락은 결국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그녀에게 상승이란 어릴 적 오빠의 손을 놓쳐버린 순간에 하늘로 떠오르던 풍선의 궤적 같은 것이다. 풍선의 맥락에서 볼 때 극단적인 상승은 결국 존재의 사라짐을 의미한다. 서진이 절벽에 매달린 유진의 손을 다시 한번 놓치는 결말은 과거의 기억을 상하 반전시킨 채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상승이냐 추락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지기반으로서 땅을 소유할 것인가에 있다. 이때 땅은 매끈한 표면이 아니라 서진의 기억 속에서 액체의 표면처럼 왜곡된 어지러운 곡선의 움직임이거나 혹은 유진이 발 딛고 선 가파른 산 위의 돌과 같은 형태로 위태롭게 존재한다. 영화가 외딴곳에 독채로 자리한 ‘집’을 주된 공간으로 삼은 것도 상승과 추락이라는 극단 대신 단단한 평지에 대한 갈망이라는 소망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건축가 서진이 부모님을 위해 지은 이층집에서도 상승의 의미는 위협받는다. <침입자>의 집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 속 이층 가옥을 느슨하게 참고한 것처럼 보이는데, 두 작품의 공간을 비교할 때 각각의 특징이 두드러진다. <하녀>의 가옥 구조에서 1층은 병약한 아내(주증녀)와 보조 기구의 도움 없이는 걸을 수 없는 딸의 공간이다. 이들에게 2층은 일종의 한계가 된다. 아내는 2층에서 이뤄지는 남편(김진규)의 사적인 관계를 통제할 수 없고, 딸은 동생의 놀림을 견디면서도 한발 한발 내딛어야 하는 수치의 장소다. 각자의 욕망을 지닌 채 계단을 올랐던 하녀(이은심)와 경희(엄앵란)는 추락하거나 모욕을 받으며 욕망을 처벌받는 공간이다. 반면 <침입자>에서 계단은 1층과 2층을 잇는 층계라는 사실 외에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는 서진의 어머니 윤희(예수정)는 <하녀> 속 모녀가 지닌 장애를 연상시키나, 그들과 달리 윤희는 2층에 오를 이유가 별로 없다. 그보다는 유진이 데려온 보조사 덕분에 장애가 비정상적인 활기의 요소로 전환되는 순간도 있다. 2층의 서진은 창문을 통해 다른 가족들을 내려다보는 것으로 자신의 위치를 표시하려 하지만, 마당에 있던 유진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듯 서진을 올려다보면서 시선의 우위는 유지되지 못한다. 소파가 놓인 1층 거실에 서진을 제외한 모든 거주자가 한데 모여 있는 광경은 감시의 전환을 명시한다. 서진이 집 안에 들어섰을 때 가족들은 마치 서진을 위한 포즈를 취하듯 각자의 위치에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이들이 어색해 보이는 건 그들이 딱히 그곳에 모여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보통 시선이 모이는 거실 벽 한가운데에 텔레비전이 놓여 있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거실에서 텔레비전은 보이지 않을만큼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거실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방문자가 현관에 들어오는 장면을 직시할 수 있는 통로가 있다. 현관문을 통과해 들어온 서진은 텔레비전을 대신해 시선의 표적이 된다. 표면상으로 관찰하는 것은 서진이지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시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서진을 관찰하고 있음이 감지된다. 이층집은 잃어버린 동생의 방을 떼어다 붙이는 방식으로 복원한 집이라는 상징성을 지닌다. 복도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아치형의 방문은 기이한 접합의 흔적으로 보인다. 주거지 방문 모양으로는 이색적인 아치형의 문은 공간 전체의 모습을 낯선 것으로 만들며, 성당, 교회, 절 같은 종교 기관의 출입문 형태를 연상시킨다. 유진의 정체가 드러나는 결말부와 관련해 종교적인 징후가 집 내부에 이미 잠재되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집과 종교의 관계를 이야기로 풀어내기 이전에 건축적인 차원으로 구조화한다는 점에서 <침입자>는 한국형 오컬트 영화에서 사이비를 다루는 방식과는 거리를 둔다. 그보다는 집단과 종교의 기이한 형상을 그려온 <유전>(2018), <미드소마>(2019)의 아리 애스터의 방식이 연상된다. <유전>에서 아리 애스터는 한쪽 벽을 비워둔 미니어처 건축 구조물로 줌인하면서 그 속에서 실제 인물들이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히치콕의 <이창>(1954)에서 맞은편 아파트를 관찰하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기이한 집은 안락한 영화 촬영 세트의 의미를 음울하고 기괴한 것으로 비튼다. 잔혹함과 죽음, 희생과 대체 등의 종교 서사는 공간에 신비한 이미지를 덧씌운다. <침입자>에서 유진이 소속된 사이비종교는 ‘참아이’를 신의 대체물로 삼는 특징이나 대체되는 여자아이들을 통한 영속의 구도 정도가 드러날 뿐, 종교 자체의 기이함이 지나치게 강조되지는 않는다. 종교는 유진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반전의 요소이기보다는 오늘날의 문제의 원인으로 소환되곤 하는 자본과 대결하는 의지의 표명처럼 보인다. 다시 <화차>에 관한 이야기를 언급하자면 선영의 실종 사건은 약혼 관계인선영과 문호의 결합 직전에 일어나 이들의 관계를 중지시킨다. 이를 통해 자본이 가족과 사랑의 탄생을 가로막는 요인임이 강조된다. <침입자>는 자본으로 상징되는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것에 관한 의심을 포석처럼 깔아둔다. 유진을 향해 “돈이 필요해서 그러는 거냐”고 묻는 서진의 외침은 공허할 뿐이다. 자본은 이를테면 유전자 검사 결과와 비슷하다. 99.99%의 친자 확인 결과는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데, 이를 믿지 못하는 서진은 자의적으로 재검사를 신청한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유진의 죽음 이후 너무 늦게 도착한다. 서진은 결과물이 든 우편물을 열어보지 않은 채 파쇄기에 집어넣는 것으로 서류적 진실에 대한 거부와 불신을 표한다. 이 장면은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의 결정적인 장면을 연상시킨다. 형사 서태윤(김상경)과 용의자 박현규(박해일)가 철길이 보이는 아치형의 동굴 아래에서 대치 중일 때, 형사 박두만(송강호)이 미국에서 도착한 용의자 유전자 검사 결과지를 들고 달려온다. 그러나 검사 결과는 이들의 기대를 배반한다. <살인의 추억>은 서류에 입각한 합리성이라는 조건의 탄생과 자의적 해석에 기댄 육감 시대의 종말을 선언한다. 뜯지 않은 유전자 검사 결과를 파쇄기에 집어넣는 <침입자>의 결말은 서류적 진실은 땅에 떨어졌고, 그것이 필요 없다고까지 선언한다. 합리성과 육감이 공통으로 향해가던 진실이라는 목적지는 오늘날에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훼손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제 믿을 것은 기억이라는 이름의 개별적 진실일 것이나, 그마저도 불완전하며 왜곡된 형태로 드러난다. 절벽 아래로 떨어질 위기에 놓인 유진은 자신이 진짜 유진임을 증명하기 위해 실종될 당시 풍선 색깔이 파란색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서진은 최초의 기억 속 파란 풍선을 노란색으로 바꾸고는 유진의 손을 놓아버린다. 그 순간에 서진이 갑작스러운 각성을 한 것인지, 의지에 의해 기억을 변환시킨 것인지 확증할 수는 없다. 자신의 과거를 속인 유진은 그로 인해 처벌을 받는 대신, 거짓을 진심으로 포장해 환심을 산다. 이는 왜소화된 진실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침입자>는 자본에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던 추락과 상승의 의미를 퇴색시키면서 자신의 시선에서만 가능해지는 믿음과 진실의 현재를 비춘다. 김희정 감독의 <프랑스여자>는 기억의 층위를 건드린다는 점에서 <침입자>와 나란히 놓을 만하다. 미라(김호정)는 서진만큼이나 불완전한 기억을 지닌 채 관객의 유일한 안내자 노릇을 한다. 서진의 기억이 특정 사건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것이라면, 미라의 기억은 좀더 일상적인 차원에 머문다. <침입자>의 서진이 특정 사건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기억에 붙들린 인물이라면, <프랑스여자>의 미라는 유학 전과 후의 관계에 있어서 일상적인 디테일을 명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미라는 친구들의 이야기에 종종 “내가 그랬어?”라고 몰랐다는 듯 되묻는다. 그러나 기억은 사적인 층위에만 머물지 않고, 기억의 오류는 한계가 아닌 가능성의 차원으로 전환된다. 미라는 광화문광장을 찾아 세월호 노란 리본을 제작 중인 사람들 사이에 가만히 누워본다. 한 인물의 행위와 경험, 그리고 기억을 통해 국내의 참사는 개인을 넘어 프랑스에서 일어난 실제 테러 사건과 연결된다. 이를 통해 사적인 층위의 이야기는 공통의 기반을 잃고 무너져내리는 상태를 공유하는 기반이 된다. 여기에서 어떤 희망과 긍정이 읽힌다. <침입자>가 가족을 비롯해 자신마저 믿지 못할 정도로 피폐해진 오늘을 진단한다면, <프랑스여자>는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도 연결과 생성의 가능성에 눈을 돌린다. 기억이라는 불안한 은신처 사적 기억과 공적 기억을 연결하는 영화의 방식은 장소의 차원에서 한국과 프랑스를 이음매 없이 연결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프랑스는 영화가 사랑해온 이국의 장소라 할 텐데, 예상과는 달리 영화는 제목에 프랑스를 언급하면서도 프랑스라는 장소의 정체성을 전혀 강조하지 않는다.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한 술집은 사람들이 불어를 쓴다는 것을 제외하면 한국이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다. 반면 한국 역시 어딘가 낯설다. 미라가 친구들과 만난 술집에서 프랑스 사람이 미라에게 불어로 불을 빌려달라고 말하자 미라는 아무렇지 않게 불을 붙여주며 불어로 답한다. 미라가 머무는 숙소 욕실에는 휴대폰으로 녹음한 쥘과의 대화가 환청처럼 울리는데, 이처럼 국가의 경계는 언어의 차원에서만 가까스로 존재하며 그렇기에 쉽게 장소를 이동한다. 목소리의 주문은 쥘의 환영을 한국으로 불러내고 현실과 환각은 뒤섞인다. 이러한 뒤엉킴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연극을 주요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탓도 있다. 연극에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점프하는 것이 관객의 암묵적 동의하에 허용되듯, 연극을 주요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 역시 극적 허용의 맥락 속에 프랑스와 한국, 현재와 과거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공간의 변화를 매개하는 장소는 공공화장실이나 골목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무국적의 ‘비장소’들이다. 프랑스에서 미라가 쥘과 주희를 피해 숨을 고르기 위해 찾아든 화장실은 불빛을 깜빡이며 비상 신호를 보내고, 야외로 연결된 한국의 단골 술집 옆 화장실은 벽면의 포스터를 통해 시간의 변화를 표시한다. 일상을 소재로 한 SF영화에서 의외의 장소가 시공간의 변화를 이끄는 매개로 등장한 것처럼 <프랑스여자>에서는 화장실이 SF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인 셈이다. <침입자>에서 집은 그것이 얼마나 낯설든 여전히 붙들고 싶은 거점 공간임은 여전하다. <프랑스여자>에서 집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이방인으로서의 인물은 외부인의 침입을 통제할 수 없는 임시 거처에 머문다. 이제 이들이 의존하는 곳은 ‘국가’라는 허상에 가까운 이미지다. 파리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해란(류아벨)이 ‘파리도 별것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화를 낸 것이나, 미라가 남편과의 관계가 불안해지자 서둘러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것도 관계와 장소의 불안과 집착이라는 맥락을 건드린다. 지지대를 잃고 부유하며 각자의 머릿속에서 상연과 왜곡을 반복하는 기억만 남았음을 자조하는 <프랑스여자>는 <침입자>보다 한층 강화된 디스토피아로 보인다. 그런데도 <프랑스여자>는 기억이라는 장소가 존재함에 안도한다. 그것은 가장 공포스럽고도 서글픈 위안일 것이다.

'욕창' 심혜정 감독 - 돌봄노동은 왜 여성만의 몫인가

심혜정 감독은 대학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아이를 낳아 기른 뒤 39살에 늦깎이 미술학도가 되어 퍼포먼스와 미디어아트 등 작품 활동을 쉼 없이 이어왔다.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미디액트를 찾았다가 후에 자신의 페르소나가 될 배우이자 감독인 김도영을 만났다. 그로부터 10년가량 흐른 뒤에 심혜정 감독은 첫 장편영화 <욕창>을 만들었고, 그의 페르소나인 김도영 감독은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했다. <욕창>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노년의 여성에게 욕창이 생기면서 서서히 드러나는 가족의 욕망과 갈등을 서늘하게 재현한 극영화다. 미술계 활동을 오래해온 까닭에 심혜정 감독을 실험영화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정작 그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에 따라서 장르가 결정되는 것 같다. 실험영화나 미디어아트만 하고 싶다고 영역을 정해두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심혜정 감독은 실제로 아픈 어머니를 돌보면서 겪은 경험과 감정을 바탕으로 직접 <욕창>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병상에 누워 있는 모든 사람들이 힘들 여름날에 심혜정 감독을 만나 영화 <욕창>과 돌봄노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실제로 어머니가 아프셨다고 들었다. 다큐 <아라비아인과 낙타>에서 어머니와 간병인 중국 동포를 직접 비추기도 했는데. =<아라비아인과 낙타>는 아픈 어머니를 둔 딸인 나를 주인공으로 한, 선주민과 이주민의 관계에 대한 다큐였다. 제목은 <이솝 우화>에서 따왔다. 사막에서 추위에 떨던 낙타가 텐트 안의 주인에게 발 하나만 넣어도 되냐고 묻고 허락을 구한 뒤에 발만 넣는다. 조금 있다가는 머리를 넣어도 되냐고 묻더니 점점 텐트를 차지해나가고 주인인 아라비아인은 텐트 밖으로 쫓겨난다. 선주민이 느끼는 불안이란 알량한 텐트 자리를 뺏길까 우려하는 두려움인 것 같다. 실제로 친정에 갔을 때 내 어머니 집 같지 않아서 어떤 불편함 같은 걸 느꼈다. 다큐 작업은 그 불편한 감정이 뭘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가족 돌봄은 85% 이상 여성이 전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봄노동의 특성은 아픈 이를 자주 보는 사람일수록 더 마음이 쓰이고, 자주 보지 않고 챙기지 않는 사람일수록 마음이 편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영화에서 돌봄노동 문제에 대해 쉽게 결정내려버리는 아들들에게 어머니 길순(전국향)과 대면하는 장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맞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픈 부모를 돌보는 일은 대부분 여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옛날과 달리 지금은 책임지지 않는 낡은 가부장 사회라고 느낀다. 가부장이란 권위는 여전하지만 책임은 여자들이 지는 거다. 그래서 딸 지수(김도영)가 막내였으면 좋겠다 싶었다. 맏딸이라면 남매간 서열에 따른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 않나. 그래서 오빠 둘에 막내 여동생으로 구성된 남매로 설정했다. 실제로 내가 집안에서 막내이기도 하다.(웃음) 가족회의에서 아들(김재록)보다 며느리(권미아)가 좌불안석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사회가 며느리에게 요구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내 몫은 아닌 것 같은데 거절하기 편치 않아서 생기는 감정이다. 요즘 육아는 남녀가 함께해야 한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뀐 것 같다. 하지만 노인 돌봄은 여전히 여자의 몫이다. -창식(김종구)은 제자리에서 오르내리는 스테퍼를 이용해 운동한다. 수옥(강애심)은 텔레비전 뉴스와 공중파 연속극을 보면서 똑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쩌면 노년의 삶이란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닐까 싶다. =노인의 일상을 옆에서 지켜보면 계속 반복되는 패턴들이 있다. 젊은 세대가 볼 때는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지만 노인들은 그걸 지키려고 굉장히 노력한다. 천보를 걷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이고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노력한다. 실제로 노인들이 굉장히 노력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길순이 딸기를 잘 먹는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산딸기 밭에서 젊은 시절을 회상하는 잉마르 베리만의 <산딸기>가 떠오르고, 돌아가시기 전에 딸기는 잘 드셨던 조부모 생각도 났다. =실제로 노인들이 부드럽고 먹기 좋은 딸기를 좋아하더라. 딸기는 사실 잘 무르는 과일이다. 금방 곰팡이가 핀다. 어쩌면 젊음은 딸기처럼 찰나적인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영화제 버전에서는 딸기가 썩어서 곰팡이 핀 장면도 있었다.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관객이 잘 이해하기 때문에 개봉을 준비하면서 뺐다. -관객에 따라 창식과 수옥이 춤추는 장면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창식만의 욕망이 아니라 두 사람의 화합처럼 비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배우들이 느낀 건 애정은 아니라더라. 나는 애정이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춤 신은 시나리오에서 한줄 정도였고 무드를 만든 건 배우 두분이다. 춤을 추면서 김종구 선배가 어깨를 토닥이니까 강애심 선배가 설움 같은 게 복받쳐 올랐다더라. 사실 수옥은 애썼다. 그런데 가족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 거다. 그때 창식이 수옥의 어깨를 토닥이니까 고맙고 서러워서 눈물이 터졌다고 하더라. 창식 입장에서도 오랫동안 마음을 나누면서 함께 지낸 수옥을 지키고 싶었을 것 같다. 굳이 성적 욕망이 아니더라도 가까이에서 자신을 알아봐주고 웃어주고 위로해주고 아프면 파스 붙여주는 사람인데, 그를 잃는 건 힘든 일이다. 춤 신은 두 사람이 위로를 주고받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창식이 앉아 있는 의자와 <아라비아인과 낙타>에서 실제 감독의 아버지가 앉아 있는 의자가 매우 흡사했다. =아버지의 의자를 보여주며 미술감독에게 비슷한 흔들의자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의자는 가부장이라고 하는 낡은 권력이 앉는 특별한 자리라 생각했다. 집집마다 단독으로 앉는 흔들의자 같은 것들이 있지 않나. 문제는 그걸 누가 차지하느냐, 주로 앉는 사람이 누구냐다.(웃음) -영화 마지막에 창식이 부엌에서 나는 연기를 걷어내려고 쓰는 도구가 방석이라 인상적이었다. 엉덩이로 무겁게 깔고 앉아 있던 방석을 손에 쥐고 휘두르면서 창석이 직접 돌봄노동에 나서게 될 앞날을 예상하게 한다. =현장에서 필요에 의해서 방석을 쓴 건데 의미들이 달라붙어서 좋더라. 김종구 선생님도 창식이 그렇게나 지키고 앉아 있던 게 작은 방석만 한 알량한 권위일 뿐이라고 하면서 좋아하셨다.(웃음) -방석을 휘두르는 엔딩 장면에서 음악은 나오지 않고 창식의 거친 숨소리만 들려준다. =창식의 마지막 감정은 불안이다. 거친 숨소리에서 느껴지는 창식의 불안을 관객이 같이 귀기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음악을 쓰지 않았고, 호흡 소리가 증폭되면서 들릴 수 있게 사운드 믹싱을 했다. -김도영 감독을 딸 지수로 캐스팅한 계기가 궁금하다. 김도영 감독은 전작들에서 ‘고마운 분들’에 빠지지 않고 이름이 올랐던데. =우리는 2008년 미디액트 단편영화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다. 도영은 연극영화과를 전공해서 연극계에서 많이 활동했다. 도영도 당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고 나도 미술영상을 하다가 영화를 하고 싶었다. 그렇게 워크숍에 참여하게 됐는데 둘이 같은 조가 되어서 짧은 단편을 만들면서 친해졌다. 그 뒤부터는 서로 작업을 독려하고 채찍질하는 좋은 동료가 됐다. 기획이나 아이디어 단계에서부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다. <82년생 김지영>이 대종상에 초청됐을 때는 함께 시상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도영은 내 모든 영화에 출연하는 페르소나다. (웃음)

[런던] 영국 방송·영화계, 인종차별 반대 및 문화 다양성 확보 목소리 높여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으로 촉발된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이 그간 영국의 방송·영화산업계가 문화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데 소홀히 했다는 지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노예 12년>으로 흑인 최초로 오스카상을 거머쥔 감독이자 터너상을 수상한 스티브 매퀸은 지난 6월 21일자 <옵서버>를 통해 “영국은 흑인, 아시아계, 소수민족(Black, Asian and Minority Ethnic, BAME)을 대변하는 데 미국보다도 훨씬 뒤처져 있다”고 말했다. 최근 방문한 친구의 영화 촬영지에서, 여전히 BAME 노동자를 많이 볼 수 없어 큰 충격을 받았다고 밝힌 그는 “내가 미국에서 3편의 영화를 찍는 동안 영국은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정말 치욕적이다”라고 덧붙였다. 영국의 방송·영화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700여명의 BAME 노동자들 역시 문화부 장관 올리버 다우든에게 편지를 보내, 주요 텔레비전 방송사들이 그간 미디어의 ‘문화 다양성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6월 22일에는 4천명이 넘는 영국의 제작자, 작가, 감독, 배우들이 공개서한을 통해 영국의 방송·영화산업이 시스템적인 인종차별에 대처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공개서한에는 배우 추이텔 에지오포, 미카엘라 코엘, 노엘 클라크, 데이비드 오옐러워, 미라 사이얼을 비롯해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 거린다 차다 감독 등이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백인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이야기는 규모가 너무 작거나 흥행 면에서 위험하다는 등의 이유를 드는 것은 구차한 변명일 뿐”이라며, “BAME 감독 및 작가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제작자들에게도 좀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는 2021년부터 3년간 1억파운드(약 1486억원)의 예산을 들여 “다양하고 포괄적인 콘텐츠 제작에 힘쓸 것”이라고 발표했다. 가 모든 텔레비전 채널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이 연 17억파운드라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적은 금액이라는 비난이 있으나, 는 영국 TV산업 역사상 가장 큰 재정적 투자라고 주장했다. 는 또한 2021년 4월부터직원의 20%를 BAME, 장애인, 사회경제적 배경이 낮은 이들로 구성할 것이라고도 전했다. 한편 지난 6월 28일 이드리스 엘바는 <더 타임스> 기고를 통해 “최근의 Black Lives Matter 운동 덕분에 영국 사회도 비로소 영화산업에서 문화적, 인종적 다양성의 필요성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에겐 우리가 가진 재능을 발전시키고, 나와 같은 사람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할 수 있도록 영화 문화를 살려나가야 할 의무가 있다. 서로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우리가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희망”이라고 말했다.

카카오M, 출범 이래 첫 미디어 데이 개최

“2023년까지 총 3천억원을 투자해 3년 후에는 블록버스터급 영화 포함 연간 15편의 오리지널 영상 콘텐츠를 제작하겠다.” 영화, 드라마, 음악, 디지털 콘텐츠를 아우르는 종합 콘텐츠 기업 카카오M 김성수 대표가 지난 7월 14일, 2018년 11월 출범 이래 첫 미디어 데이를 개최하며 밝힌 포부다. 이날 행사는 김성수 카카오M 대표의 프레젠테이션과 그에 대한 질의응답으로 이루어졌다. 2011년부터 2018년까지 CJ ENM 대표이사를 역임한 김 대표는 케이블TV 채널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콘텐츠와 IP의 기획, 제작, 부가사업 확장까지 잇는 안정적 콘텐츠 사업구조를 구축”하겠다는 비전을 내세웠다. 카카오M은 플랫폼의 다변화와 언택트 시대의 도래에 발맞춰 모바일 최적화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MBC <황금어장>, JTBC <비긴 어게인>을 연출한 오윤환 제작총괄을 비롯해 MBC <진짜 사나이> 김민종 PD,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박진경·권해봄 PD가 카카오M에 합류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준비 중이다. 한편 지난해 9월 사나이픽처스와 영화사 월광을 인수하며 영화 제작으로도 발을 넓힌 김성수 카카오M 대표는 “감독들도 극장 영화를 고집해야 하나 고민한다”며 영화 또한 모바일에 적합한 방식으로 기획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BH 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 숲, 어썸이앤티 등의 배우 매니지먼트를 다수 보유한 만큼 배우들을 활용한 IP를 개발하고, 할리우드식 패키징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톱 탤런트 그룹’으로 나아가겠다는 뜻도 내비쳤다.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 제기된 독과점 우려에 대해 김 대표는 “뜻이 맞는 제작자들의 결합” 으로 봐달라고 답변했다. 카카오M만의 채널을 구상 중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플랫폼보다 스튜디오 성격에 집중” 한다며 카카오톡에 기반을 두고 유튜브를 병행해 콘텐츠를 선보이겠다고 답했다.

'후쿠오카' 장률 감독 - 관계를 잇는 소통에 대하여

중국과 한국 사회를 비추며 작품 활동을 해온 장률 감독은 일찌감치 일본 후쿠오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었다. 아시아 포커스 후쿠오카국제영화제에 이런저런 이유로 초청받아 그곳을 오간 지 10년이 되자 “후쿠오카가 궁금했고 관련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현지 지인들에게 후쿠오카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말하자 사람들이 언제 찍느냐고 물었다. 누구나 먼 곳에 사는 친구에게 언젠가 찾아가겠다고 기약 없는 약속을 하지만, 장률 감독은 영화로 약속하고 영화로 약속을 지켰다. <후쿠오카>는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윤제문)이 손님이자 말동무인 소담(박소담)과 함께 후쿠오카를 여행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영화다. 제문의 대학 동아리 선배지만 연애사가 복잡하게 얽힌 탓에 28년 간 연락을 끊었던 해효(권해효)까지 등장하면서 세 사람의 기묘한 어울림이 시작된다. <경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이하 <군산>) 등 지방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삶의 면면을 섬세한 눈으로 들여다보는 장률 감독. 그와 나눈 대화를 옮긴다. -10년 동안 다닌 후쿠오카는 어땠나. =아주 편하다. 후쿠오카는 일본 같지 않다. 일본 같지 않다는 건, 도쿄 같지 않다는 뜻이다. 다양한 문화가 섞여 있고, 개인주의 성향도 덜하다. 예를 들면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옆자리 사람들과 말이 통하면 같이 술을 마신다. 이건 도쿄에서 상상도 못하는 일이고, 서울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도시는 세련됐는데 사람들 마음은 개방적이어서 재밌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공간에서 윤동주 시인이 돌아가셨다. 윤동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후쿠오카에 윤동주 시비를 세우자는 움직임이 있지만, 반대가 심해 아직 성사되지 못하고 있다. 이건 또 뭘까 싶고 후쿠오카가 계속 궁금했다. 영화에서 해효가 술집을 운영하면서 옛사랑 순희를 기다리고, 술집에 윤동주 시인의 시를 걸어놓았다. 후쿠오카에는 이런 복합적인 분위기가 있다. -배우 박소담이 전작 <군산>에 이어 또 출연한다. <군산>에서 일본 교포 주은을 연기하면서 부르던 일본 노래를 <후쿠오카>의 소담도 부르는데. =군산이란 도시가 일제강점기에 유명한 항구도시였고, 군산을 거쳐 한국의 쌀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래서 <군산>의 주은과 아버지 이 사장(정진영)을 일본 교포로 설정했다. 그런 다음 ‘일본에서 내가 제일 잘 아는 도시가 어디일까’ 생각해보니 후쿠오카여서 두 캐릭터를 후쿠오카 출신으로 정했다. 실제로 후쿠오카는 한국과 가깝고, 재일교포가 많이 사는 곳이다. 두 캐릭터가 부르는 일본 노래는 아이들이 부르는 어머니에 대한 노래다. 주은의 어머니는 죽었고 소담의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렸다. 두 캐릭터 모두 성장과정에 어머니란 존재가 없다. 그렇다면 두 캐릭터 모두 어머니가 그립지 않겠는가. -<후쿠오카>의 소담은 영화 중반까지는 <군산>의 주은과 유사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완전히 다른 성장 배경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장률 감독의 전작을 의식하면서 보는 관객을 배반하는 셈인데. =이 세상은 배신의 연속이다. (웃음) 물론 한 배우가 두 영화의 인물을 각각 연기했지만 <후쿠오카>는 <군산>과 완전히 다른 영화다. 사람들은 의외로 비슷한 면이 많다. 이 사람 몸에서도 저 사람이 보이고, 저 사람 몸에서도 이 사람이 보인다. -장률 감독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캐릭터에 자신의 성격이 반영되는 신선한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후쿠오카> 역시 마찬가지인가. 배우 권해효, 윤제문, 박소담의 실제 성격이 반영됐나. =내 영화뿐 아니라 다른 영화에도 배우의 어떤 면이 들어간다고 본다. 그게 뭐냐면, 그 사람의 냄새다. 그 사람의 냄새는 어디 갈 수가 없다. 사람마다 어떤 특징이 있다. 동작도 좋고 표정도 좋고 언어도 좋다. 그게 영화 속에서 작용한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소담, 권해효, 윤제문 배우간의 호흡은 어땠나. =세 배우 다 아주 좋은 배우다. 세 사람 모두 연기를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았나 싶다. 박소담은 몸에 연기가 딱 붙어 있다. 연기 세포 같은 게 있다. 세명이 다 그렇다. 배우들은 누구와 함께 연기하는지에 따라 연기가 다를 수 있다. <후쿠오카>의 세 주연배우는 서로를 너무 좋아했다. 서로 연기하는 것도 좋아했다. 배우로서 함께 연기하는 배우에게 어떤 주문을 받고, 자신도 또 다른 연기를 주었다. 현장에서 배우들이 아주 유창하고 아름답게 서로 연기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니 너무 좋았다. -동네 책방 주인 제문과 젊은 손님 소담이 즉흥적으로 후쿠오카 여행을 떠난다. 관객에 따라 두 캐릭터가 함께 숙소에 머문다는 설정에서부터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는데. =우리 삶에서도 타인을 일단 믿는 사람이 있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남녀 둘이 함께 있으면 뭔 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지만, 실제로 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서로 통하는 사람들이 있다. 통하기만 한다면 젊은이도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구가 될 수 있다. 그게 우리 삶의 아름다움이 아니겠나. 영화를 준비할 때부터 제문과 소담, 해효 세 캐릭터를 남녀 관계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해효와 제문 사이의 28년간 묵은 감정이 어떻게 풀리는가 생각해보면, 사람을 믿는 소담 같은 캐릭터가 풀어줄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소통하고자 하는 소담과 같은 사람. -서울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제문이 해효, 소담과 함께 후쿠오카의 헌책방을 방문한다. 배경이 서울의 정은서점과 후쿠오카의 이리에서점인데, 두 헌책방은 마치 미로 같아 보이기도 하고 때론 아늑한 비밀 공간 같아 보인다. =책방을 아주 좋아한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예전에는 며칠만 책방에 못 가도 불안했다. 요즘은 스마트폰이 있고 텔레비전이 있지만, 내가 성장할 때만 해도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길은 책밖에 없었다. 그리고 책방에서 서로 주고받는 눈길은 꽤 아름답다. 금품이 있는 곳에서 나누는 눈길과는 다르다. 과거에는 책방에서 사랑도 많이 이뤄졌다. 해효와 제문은 19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냈다고 설정했고, 그렇다면 책방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PC방 대신 책방에 와 있는 소담은 옛날 사람들의 정서와 통할 수 있다고 봤다. 지금 젊은 사람들 중에도 소담 같은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중국에서 책방을 자주 다니던 청년이었나. =그땐 나만 그런 게 아니고 세상에 호기심이 있는 청년들은 다 책방에 다녔다. 중국에서 도서관은 좀 달랐다. 출입 조건이 까다로웠다. 직장도 따지고 누구나 들어갈 수는 없는 공간이었다. 도서관에 일종의 권위가 있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차차 좋아져서 지금은 누구나 갈 수 있다. 반면 서점은 당시에도 누구든 막지 않았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야나가와>를 다 찍어놓고 후반작업을 못하고 있다. 중국 배우들을 데리고 일본과 중국을 오가며 촬영했다. 색보정은 베이징에서 하고 믹싱은 타이완에서 하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내가 그 어디도 못 가고 있다. 주제는 역시 사랑이다.

드라마 <비밀의 숲2>, 검경 수사권 조정을 ‘비숲’ 방식으로

침대에서 과자를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SNS를 뒤적거리던 경위 한여진(배두나)이 몸을 일으켜 TV 볼륨을 키운다. 그가 경찰 고위 간부의 비리 뉴스에 반응하는 것은 자신의 직무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비밀의 숲2>의 1회에서는 이쪽 귀로 들어와서 저쪽 귀로 빠져나가는 라디오 뉴스들, 망막에 들어와 정보로 취합되지 못하고 금세 까먹게 되는 뉴스 화면의 양이 너무 많았다. 생초보도 드라마를 이렇게 쓰진 않을 텐데. 왜일까? 검경수사권 조정이라는 이번 시즌의 이슈에 접점을 대지 못하다가 인물들의 좌표가 정리되는 2회부터 비로소 자세를 고쳐앉았다. 2년 전 서부지검 비리를 밝히는 특임팀 안에서 공조했던 검사 황시목(조승우)과 경위 한여진은 대검 형사법제단과 경찰청 수사구조혁신단 소속으로 각자 검찰과 경찰의 입장 양 끝에서 재회한다.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공덕동 서부 지검 포장마차는 사라졌고, 달라진 둘의 좌표에 한겹씩 덧씌워지는 장소가 함축하는 메시지는 이들이 이전 방식으로 소통하긴 어려울 것을 예고한다. 내가 아는 ‘비숲’의 방식이다. 수사지휘와 종결, 권한의 범위를 두고 갈등하는 검찰과 경찰의 오랜 입장 차를 두고 일반 시민인 내가 갖는 의견은 ‘검정소와 누렁소, 각자 일이나 잘했으면’ 하는 정도였을 뿐. 한데 시목과 여진을 비롯해 형사법제단 부장검사 우태하(최무성), 혁신단 단장 최빛(전혜진) 등의 인물에 살이 붙으면서 관련 뉴스들이 머릿속에서 훨씬 긴밀하게 꿰어지기 시작했다. 실망했던 1회로 돌아가 다시 보니, 흘렸던 뉴스들이 이렇게 쏙쏙 박힐 수가 없다. 부연 안개 같던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에 헛웃음이 나오는 한편, 방만했던 1회가 넘치는 뉴스 헤드라인의 숲이었나 싶기도 하다. VIEWPOINT TV 속의 TV 드라마 속 인물들도 TV를 본다. 시청자에게 전달할 필요가 있는 정보를 화면에 띄우는 가장 구태의연한 방식은 리모컨을 들고 전원을 누르면 기다렸다는 듯 바로 속보가 나오고 인물간 대화를 방해하지 않도록 알맞게 끄는 식이다. 좀더 자연스럽게, 일상처럼 전달하기 위해 고민하는 드라마도 눈에 띈다. JTBC 드라마 <우리, 사랑했을까>의 최향자(김미경)는 아침 식탁에서 스마트폰 영상에 시선을 고정한 손녀에게 “폰이면 폰 밥이면 밥 하나만 해. 보지도 않는 텔레비전은 왜 자꾸 켜놔”라고 타박하며 TV를 끄기 직전 짧게 정보를 노출했다.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시간은 영화적 스토리텔링의 비옥한 토지"

“전세계 영화인들이 만들고 있는 어떤 영화든 사람들이 그걸 볼 수 있을 때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개봉까지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어서일까. 전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테넷>을 공개한 뒤 <씨네21>과의 서면 인터뷰에 응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테넷>이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어 무척 흥분된다”고 기뻐했다. <테넷>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통해 비선형적 스토리, 아날로그적 스펙터클, 가족 등 자신의 인장을 아로새기고 변주해온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이다. 이 영화는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가 인버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오가며 세상을 파괴하려는 무리를 막는 스파이물로, 전세계에 개봉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관객 사이에서 ‘N차 관람’을 부르며 팬덤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 개봉 첫날인 지난 8월 26일, 그와 주고받은 긴 대화를 공개한다. -<테넷>은 20년 전 당신이 연출한 영화 <메멘토>의 특정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얻으면서 출발한 프로젝트로 알고 있다. =항상 시간 경험과 그것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고, 시간이 얼마나 추상적이고 복잡한지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시간은 우리 존재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묘사할 수도, 분명하게 표현할 수도, 여러 방법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카메라, 특히 필름 카메라는 시간을 볼 수 있고 포착할 수 있는데 그것은 100년 전 영화라는 매체가 처음 생겼을 때 보여준 근본적인 혁신이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를 보는 방식과 시간과의 관계가 매혹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영화는 관객에게 시간을 묘사하는 메커니즘을 각각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은 대개 감추어져 있다. 나는 관객이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묘사하는 메커니즘을 폭로하고, 함께 토론하며, 자신의 생각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들이 매우 흥미롭다. <테넷>은 오랫동안 생각해온 특정 이미지와 컨셉들이 있었다. -그게 무엇인가. =벽에서 총알이 튀어나오면서 두개의 타임라인이 교차하는 이미지다. 그것은 20년 전부터 이리저리 구상해온 이미지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과학 원칙이 자리 잡고 있다. 물체가 관통되고, 사람들이 시간을 거슬러 움직이는 세계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2014년에 대본을 본격적으로 작업했다. <메멘토>에서 총알이 역행하는 장면은 주인공 레너드의 시점을 표현하기 위한 일종의 은유였는데 이 아이디어에 첩보 스릴러의 옷을 입혀 SF를 결합했다. -전작을 통틀어 스파이영화는 이번이 처음이다. 평소 스파이 장르에 어떤 매력이 있다고 생각했나. =스파이영화는 관객이 등장인물과 함께 모험에 나선다는 점에서 시각적인 스릴이 있지 않나. 일상에서 보기 힘든 풍경들을 보고, 절대 갈 수 없는 공간들을 경험하는 게 스파이영화의 매력이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스파이영화는 <007과 여왕>(1969)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릴 때부터 ‘007 시리즈’를 좋아했고, 특히 <007과 여왕>은 제임스 본드 영화의 좋은 표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007 시리즈는 대규모 엔터테인먼트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거대한 스크린에서 화려하고 이국적인 전세계의 공간을 누비는 모험이 무척 매력적이어서, <테넷>에서도 그것을 담아내고 싶었다. -전작 <인터스텔라>를 함께 작업한 이론 물리학자 킵손 박사는 언제 본격적으로 합류했나. 그의 합류가 <테넷> 시나리오 작업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킵은 자신이 주도했던 <인터스텔라>가 진짜 과학을 기반으로 한 SF영화가 되길 원했다. <인터스텔라> 세트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테넷> 시나리오를 쓰다가 다소 상상이 과한 컨셉을 실제 생활에서 어떻게 응용할 수 있을지 궁금하면 킵에게 전화를 걸어 점심을 함께 먹자고 요청했다. 킵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또 물리학적인 아이디어를 현실 세계에서 구현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게 많은 영감을 준 든든한 조력자다. -영화 속 인물이 과거로 이동한 결과를 보여주는 보통의 시간 여행 영화와 달리 <테넷>은 시간을 역행하는 과정이 구체적이고, 열역학 법칙에 충실한데. =인버전의 과정이 스토리의 토대를 이루는 동시에스토리 자체이기 때문이다. <테넷>은 시간을 여행하는 영화가 아니다. 보통의 시간 여행 영화는 여행 과정이 시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핑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 영화에서는 인버전에 물리학적인 한계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회전문을 언제, 어디에서 사용할 수 있는지가 스토리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우리 영화의 특정한 규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하는 데 세심하게 공을 들인 것도 그래서다. -<테넷>은 새로운 냉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기후 변화가 인류에 큰 위협이 될 거”라는 평소의 생각이 영화의 배경을 설정하는 데 얼마나 반영됐나. =확실히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를 다룰 때 우리의 존재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게‘오늘’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 핵무기 경쟁 등을 소재로 한 007 영화가 1960년대에 제작됐을 때 핵의 위험성이 경고처럼 제기되지 않았나.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지구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우리 생활에 위협이 되는지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걱정해야 한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을 영화내내 알 수 없다. 그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아이콘이 된 영화 캐릭터 중에서 이름이 없는 캐릭터가 전통처럼 전해진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이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데리고 만든 ‘이름 없는 남자’(Man with No Name) 3부작(<황야의 무법자>(1964), <석양의 건맨>(1965), <석양의 무법자>(1966))도 있고. 드라마 중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더 프리즈너>(1967)에서도 주인공이 이름이 없는데, 이 드라마는 <테넷>을 만드는 데 많은 영감을 주었다. <테넷>에서 ‘주도자’를 통해 이루어내고 싶었던 건, 우리 영화의 심장 같은 아이콘적인 존재감을 만드는 것이었다. 캐릭터의 이름도, 살아온 배경도 특정하지 않은 시네마의 전통을 활용하되,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표현해낸 캐릭터에 관객의 생각을 투영하게 했다. -존 데이비드 워싱턴이 출연했던 코미디 드라마 <볼러스>를 인상적으로 보고 출연을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의 어떤 면모가 당신의 시선을 붙잡았나. =그의 카리스마가 시선을 확 끌었다. 이후 스파이크 리 감독의 초대를 받아 칸국제영화제에 갔는데 칸에서 <블랙클랜스맨>을 보고 그가 주도자 역에 적임자임을 확신하고 캐스팅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연기하는 인물에는 따뜻한 인간미가 있고, 그걸 잘 묘사하고 부각시킨다. -사토르와 그의 아내인 캣을 설정하는 과정에서 고민했던 건 무엇인가. 특히 당신의 전작에서 여성은 대체로 부재하거나 존재가 지워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캣은 그렇지 않아 눈에 띄었다. =대본에서 사토르는 ‘차가운 눈에, 짧은 턱수염을 기른 중년 남성’으로 묘사했다. 사토르는 무자비하고 이기적이며 지적인 데다가 난폭하다. 원초적인 본능이 강하고 이기적인 인물로, 한마디로 짐승 같은 존재다. 그가 그렇게 된 데는 그가 성장기를 보낸 난폭한 환경이 작용한다. 캣은 다양한 면모를 가진 인물로 아들 때문에 사토르와 끔찍하게 얽혀 있다. 내 영화를 통틀어 가장 복합적인 여성 캐릭터로, 극도로 영리하고 직관적이며 매우 건조한 ‘교수대 유머’(gallows humor) 감각을 갖춘 인물이다. -주도자가 알고리즘을 되찾기 위해 인버전해서 고속도로로 다시 가는 영화의 중반부에서, 주도자가 과거의 시간을 기다리는 장면은 인버전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였다. =자동차 추격 신은 같은 인물들, 자동차들, 사건들이 거꾸로 갈 때 또 등장하므로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야 어떤 타임라인에 적용해도 그 사건을 정확하게 볼 수 있으니까. 모든 것이 들어맞았고, 일치해야 할 타이밍 모두 정확하게 맞췄다.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인 마야(Maya)를 활용해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계산했고, 수정을 거쳐 두개의 타임라인을 정확하게 대칭시켰다. 다양한 기법을 연구했는데 카메라를 순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도 순방향으로 할 수 있고, 아니면 카메라를 역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도 역방향으로 할 수 있다. 혹은 카메라를 역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를 순방향으로 할 수 있고, 카메라를 순방향으로 돌리고 연기를 역방향으로 할 수 있다. 네 가지 방식으로 구분해서 찍은 이유는 시퀀스마다 강조하고 싶은 효과가 제각각이었기 때문이다. -당신의 영화 속 시간은 서사에서 여러 역할들을 한다. 공간을 조립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이 이야기를 쓰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치나. =시간은 모든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 내 영화에서 다른 점이라면 시간의 메커니즘을 스토리텔링에서 당연시하지 않고, 그 메커니즘을 밝힘으로써 관객이 시간의 역할을 탐색하고, 어떤 식으로 액션이 보여지며, 그게 어떻게 스토리에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이야기가 전달되는지 고민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테넷>에서 주도자가 노르웨이 프리포트에서 미래에서 온 자신을 마주한 기억을 떠올렸듯이, <메멘토>에서 레너드가 과거 아내와 있었던 기억을 해체하고 재조립했듯이, 당신의 영화 속 시간은 인물이 기억을 떠올리거나 기억을 왜곡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시간과 기억은 어떤 연관성이 있나. =내가 만든 영화들 중에는 시간과 기억의 상관관계가 도드라지는 영화들이 있다. 언급해준 <메멘토>가 그 관계를 다룬 첫 영화였고, <인셉션>도 그렇지만 구현하는 방식이 달랐다. <테넷>을 통해 시간과 기억의 상관관계를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었다. 시간이 우리 존재의 토대이고 그래서 분석,설명, 이해가 힘들다는 견해가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인 스토리텔링을 하기에 비옥한 토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최근 당신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테넷>에 핵의 위험성과 기후 위기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차원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인터스텔라>에서도 기후 위기를 다뤘는데 영화에서 만 박사가 “우리는 잘 돌보면서 후손들이 처할 문제에는 공감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나. 윤리적 측면에서 이 질문에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계속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행성을 놓고 후손들과 갈등을 빚는 세대의 이야기. 끔찍한 방향으로 흘러가긴 하지만 점점 이해도가 높아지는 문제다.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전세계 영화산업이 많은 변화를 겪고 있는데 이 광경을 어떻게 보고 있나. =공동체적 스토리텔링의 매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1950년대의 텔레비전이든 1980년대의 홈비디오든, 오늘날의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이든 극장과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매체들은 나중에 상호보완적인 역할인 것으로 판명되지 않았나. 큰 극장 스크린이 됐건, 작은 화면이 됐건 영화라는 매체는 앞으로도 발전하고 진화할 것이고, 우리 또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여성, 영화사' 조각난 영화를 체험하는 일에 관해

이 글은 <여성, 영화사>에 관한 본격적인 비평이기보다는 다양한 영화 클립으로 채워진 아카이브 영화 관람기 혹은 비평을 위한 사전 작업의 흔적에 가깝다. 클로즈업과 목소리의 영화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작 중 단연 눈길을 끈 건 마크 커즌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여성, 영화사>(2019)이다. 장장 840분에 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여성감독의 영화를 재료 삼아 40여개의 주제를 탐구한 로드무비다. ‘영화사’라는 제목과 840분이라는 방대한 분량은 장 뤽 고다르의 <영화사(들)>(1997)를 연상시킨다. 영화사를 쓰는 동시에 해체하는 고다르의 작품은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인간의 두뇌에서 일어날 법한 기억과 망각의 투쟁을 상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불규칙하게 명멸하는 고다르식 영화사와 달리 커즌스는 명확한 규칙성을 지닌 채 개별 영화를 공들여 소개하는 쪽에 가깝다. 그 이유는 아마도 이 영화들이 관객에게 일단 기억되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시작하고 끝맺는가’에 관한 질문을 앞뒤로 세운 뒤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와 주요 장르와 주제 등에 관한 질문을 차례로 배치한다. <영화사(들)>가 영화사를 구성하는 개별자로서 작가 고다르의 존재감을 더욱 또렷이 드러냈다면, 커즌스의 작품 속에서 작가로서 감독은 자취를 감춘다. 타이핑하는 고다르의 모습과 활자가 등장했던 자리는 다양한 장소와 시간으로 점프하는, 하나의 스크린으로서의 자동차 안에서 촬영한 무빙숏과 이따금 등장하는 여성 화자의 모습으로 채워진다. 작가로서의 주체가 사라진 자리에 수백개의 클립으로 분산된 여성감독의 작품만이 온전한 스포트라이트의 대상이다. 내레이션에서 밝히듯 <여성, 영화사>는 여성 영화감독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영화 학교이자, 영화 교재이다. 내레이션은 또한 이 여정의 목적이 감독의 일생이나 연대기적 역사 혹은 남녀의 차이나 최고작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영화와 영화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처럼 보인다. 한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싶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매년 영화제 기간을 전후로 여성감독이나 제작자, 평론가 등을 초청해 시네 페미니즘 학교를 연다. 2019년에는 다양한 분야의 영화인들을 초청해 그들의 노하우를 듣는 시간으로 꾸려졌다. 총 6회로 진행된 자리에 나는 강연 후 질의응답을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자주 들었던 요청은 페미니즘적인 부분을 채워달라는 것이었다. 여성 영화인의 직무 관련 이야기를 듣는 것이 곧 페미니즘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나는 영화인들의 직업적 노하우와 페미니즘적인 것을 애써 분리하는 어색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여성감독과 남성감독의 차이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여성, 영화사>의 전제는 ‘여성’을 카테고리에 넣었을 때 발생하는 ‘여성만의 특별함’에 관한 이중적 속박을 걷어내기 위한 조치다. 물론 ‘여성감독의 영화를 모은 것만으로 페미니즘적인 의미가 생성되는가’라는 질문은 가능하다. 이에 답하자면 ‘그렇다’이다. 여성감독의 영화를 모은 것만으로 의미가 생성되는 이유는 영화사가 남성 중심으로 편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틸다 스윈턴이 도입부 내레이션에서 밝혔듯 영화의 역사는 ‘보이 클럽’이다. 우리는 인용될 가치가 충분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인용되는 영화의 목록을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여기에 소환된 여성감독의 영화가 모두 페미니즘적이라 단언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영화의 일부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뤼실 하지할릴러비치의 영화 <에볼루션: 새로운 탄생>(2015)에서 한 소년이 절벽 아래에서 벌거벗은 채 누운 여성의 무리가 뒤엉켜 천천히 몸을 움직이는 광경을 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다. 전체 영화 중 이 장면만 떼어놓고 보면 전형적인 남성의 판타지처럼 보인다. 관객은 여성감독의 영화에는 불필요한 노출이나 섹스 장면이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필요와 불필요는 해석자의 주관적인 의지가 개입된 판단이다. 더군다나 필요에 걸리지 않는 과잉은 영화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며, 그것은 때로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오스카 와일드를 인용해 언급하자면 예술에 있어 도덕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은 없다. 다만잘 만든 작품과 못 만든 작품이 있을 뿐이다. <여성, 영화사>에서 논하는 것도 바로 좋은 오프닝, 좋은 구도, 좋은 대화 등 ‘좋은 무엇’에 관한 것이다. 수많은 영화 리스트를 마주한 관람자의 불안 한 가지 전제할 것은, 이 글은 인용된 모든 영화를 관람하고 쓴 것이 아닐뿐더러 언급한 모든 영화를 관람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나아가 등장한 모든 영화를 관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려 한다. 관람하지 못한 영화뿐만 아니라 관람했으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진 영화까지 포함하면 봐야 할 영화의 수는 더욱 늘어난다. 게다가 <여성, 영화사>를 소화하는 것만도 벅차기에 사전에 대부분의 영화를 관람하지 않은 이상 모든 영화를 관람한 상태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명하고 싶은 것은 <여성, 영화사>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그것이 파생시킨 영화 관람에 관한 질문, 특히 분절된 형태의 클립으로 영화를 만나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한 경험은 한계만큼이나 가능성을 지닌다. 영화에 인용된 클립을 통해 영화를 경험하는 것은 온전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영화를 체험한 것과는 물론 다르다. 분절된 상태로 영화를 본다는 것은 클로즈업으로 영화를 경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분리된 그 자체로 일종의 확대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에 덧붙은 내레이션은 관객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경험이 영화의 본래적 체험보다 열등한 방식이라고 확언할 수는 없다. 이 글이 체험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을 전제로 개인적인 일화를 덧붙이고 싶다. 특정 부분을 취하는 것은 때때로 실제 영화 경험을 초과한다. 나의 최초의 시네마틱한 경험 역시 클립처럼 분절된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작은 텔레비전 모니터 속에서 영화가 이미 시작된 채 흐르고 있었고, 어떤 이야기인지 모른 채 빨려들었다. 그 영화는 레오스 카락스의 <소년, 소녀를 만나다>(1984)였다. <여성, 영화사>에 언급된 주제 중 ‘분위기’에 관한 챕터에서 내레이터는 피리오 홍카살로의 <콘크리트 나이트>(2013)를 두고 “영화 자체가 분위기”라고 말했는데, 이는 레오스 카락스의 영화에도 적절한 수식처럼 보인다. 후에 이 영화를 온전히 관람했을 때는 처음과 같은 사로 잡힘을 경험하진 못했다. 물론 그사이 다양한 영화 경험을 쌓은 탓일 수도 있으나 적어도 분절된 영화 경험을 모조리 배격하지 않아도 된다는 근거로는 충분할 것이다. 또 다른 경험은 TV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2000)를 보았을 때다. 이때 화면 속에는 교수대를 향해 가는 배우의 가벼운 발걸음이 등장했다. 발걸음을 세는 숫자는 노래로 변했고, 실제와 환상의 뒤섞임은 나를 사로잡았다. 죽음을 향한 발걸음은 결국 나를 극장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정작 극장 경험의 강렬함은 영화 바깥에 있었다. 함께 영화를 보던 친구가 과도한 핸드헬드 화면에 어지럼증을 느끼고는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독하게도 끝까지 남아 영화를 관람했으나, 최초의 마주침을 뛰어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이후 <어둠 속의 댄서> 장면 일부를 국립현대미술관 <하룬 파로키-무엇으로 사는가?> 전시에서 다시 만났다. 하룬 파로키의 <110년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2006)이 12채널 설치로 전시되었으며, 이중 하나로 <어둠 속의 댄서>가 포함되었다. 해당 영상은 비욕과 카트린 드뇌브가 공장을 나서며 대화하다가 불쑥 끼어든 한 남자에 의해 방해를 받는 장면이었다. 나는 기억 속에서 지워진 이 장면과 생경하게 재회했다.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다만 분절된 경험을 통해서도 영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음은 물론이다. 분절된 영화들은 훗날의 재회를 기다리는 작은 씨앗이다. 여러 편의 영상 속에서도 유독 관객을 사로잡는 영상이 존재한다. 되도록 강렬한 것이 오래 기억되기 마련이다. 앞서 언급한 나의 체험을 구성하는 것도 가위, 교수형과 같은 강렬한 이미지다. <여성, 영화사>에서도 클립만으로 울림을 준 작품들이 있다. 그중 몇편만 언급하자면, 포르흐 파로 허저트의 단편 <검은 집>(1963)에서 칠판 앞에서 집에 관해 써보라는 질문을 받은 사람이 침묵 속에 사람들에게 열리지 않는 문을 떠올린 뒤 마침내 ‘집은 검은색이다’라고 쓰는 장면의 고요함이다. 혹은 킴 론지노트의 다큐멘터리 <잊지 못할 그날>(2002)에서 어린 딸이 할례를 받게 만든 어머니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던 중 옆에 있던 어린 동생을 언급하며 그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으면 어머니를 용서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은 잊기 힘들다. 영화는 ‘노동’ 챕터에서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1975)을 소개하면서 이례적으로 작가의 말을 언급한다. 샹탈 애커만은 이미지의 위계에 저항하고자 했으며, 소외된 여성의 가사 노동을 보여주며 그것을 실천했다. 물론 <잔느 딜망>에도 폭발의 순간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강렬한 사건은 그조차 지루한 시간의 연속을 삼키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여성, 영화사>는 기나긴 러닝타임과 주제 분류를 통해 영화와 장면간의 위계를 없애려 한 샹탈 애커만의 시도를 잇고자 한다. 질문 바깥의 질문 영화를 관람하는 동안 우리는 늘 어떤 목소리와 동행한다. 목소리는 흘러가는 영화를 예측하거나 설명하면서 관람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개별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탐험하는 데 익숙하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은 영화 유튜버들의 등장으로 다시 활기를 띤다. 좀더 창의적인 방식으로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있다. 영상을 분절하고 연결해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키며 개별 영상 작품으로의 가치를 지닌다.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에서 이미지의 연속만으로 발언을 대신한 예도 있으나, 대부분은 내레이션이나 자막을 통해 화자의 목소리를 낸다. 이러한 목소리의 진정한 효용은 영화를 정확히 설명할 때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설명에 실패하면서 관람자의 저항을 일으키는 데 있다. 화면 밖 목소리나 영상 위에 덧붙은 자막은 언어를 통해 장면을 한정한다. 그러나 장면의 의미는 결코 해설에 걸리지 않는다. <여성, 영화사>는 40개의 주제로 분류되어 있지만 같은 영화의 다른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하며, 특정 장면 역시 여러 주제를 동시에 환기한다. 영화를 인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특정 장면을 선택해야 하지만 영화에 담긴 풍부한 정보와 이야기는 포착되기보다는 흘러간다. <여성, 영화사>의 중요한 가치는 정확한 설명의 실패에 있으며 아울러 필연적인 실패로서 비평 행위와 만난다. 이것은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 전반에 해당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성, 영화사>의 내레이션은 대부분 질문으로 이뤄져 있다. ‘엔딩’ 챕터에서 소개된 수미트라 페리에스의 <걸즈>(1978)는 거울에 대고 자신의 인생에 관해 질문하는 소녀의 독백과 함께 흰색의 물음표 하나를 비추는 독특한 엔딩을 보여준다. <여성, 영화사> 역시 그 모든 것을 포함한 하나의 거대한 물음표를 던지려는 것 같다. 관객에게 주어진 몫은 영화가 제시하는 질문에 만족하지 않고 이를 포괄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특히 ‘신뢰성’ 챕터는 질문이 생성되는 장이다. 디나라 아사노바의 <당신이 선택한 것>(1981)에서 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이끌린 채 카메라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여자아이는 겁을 먹은 채로 자세를 낮추어 천천히 올라왔다가 다른 아이의 부축을 받은 채 같은 자세로 내려간다. 카메라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이들의 모습을 지켜본다. 내레이터는 신뢰성을 위해 배우를 실제로 높은 곳에 올라가게 한 뒤 솔직한 반응을 보여줬다고 설명한다. 이 말은 의문을 불러온다. 장면의 진실함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괜찮은가. 영화를 사이에 두고 제작자와 관객 사이에 구축해야 할 신뢰성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성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이 실제 위험에 처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장면은 과장된 위험이 아닌 일상에 산포한 단순한 위험일 뿐이지만, 적어도 이에 관한 코멘트는 의심스럽다. 확장하자면 배우가 대역을 쓰지 않고 고난도의 장면을 촬영했다는 것은 여전히 홍보 포인트가 된다. 그러나 관객은 과연 배우가 위험을 무릅쓰기를 원하는가. 코미디 챕터에 등장한 페니 마셜의 <위기의 암호명>(1986)에서 우피 골드버그가 공중전화 부스에 든 채로 납치된 상황이 펼쳐진다. 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람한다면 웃어넘길 수 있을 장면이다. 그러나 잘린 장면 속에서 자동차 끝에 매달린 채 위험천만한 레이스를 펼치던 우피 골드버그가 마침내 차에서 분리돼 공중전화 부스와 함께 나뒹구는 장면은 신뢰성 챕터에서 생성된 질문과 만나 그 장면의 위험천만함을 생각하게 된다. 발레리 마사디안의 <나나>(2011)에서는 엄마가 사라진 뒤 홀로 남은 어린 나나가 근처 숲에서 발견한 죽은 토끼를 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장면이 있다. 우리는 영화를 위해 동물이 희생되지 않았음을 믿고 싶어 한다. 영화 속에서 재현된 죽음이 실제 배우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신뢰성에 관한 질문은 발리 엑스포트의 실험 SF <인비저블 애드버서리>(1977)에서 한층 복잡해진다. 이 영화는 학소스라는 외계인에 의해 정신분열증을 겪는 한 여성의 일상을 보여준다. 식탁 위에 식재료를 하나하나 내려놓던 여자의 놀란 얼굴이 클로즈업된 직후 식탁 위의 식재료가 동물과 곤충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식재료를 칼로 자르는 클로즈업 몽타주에는 실제로 잘리거나 잘릴 위험에 처한 생선, 햄스터, 앵무새, 딱정벌레가 포함된다. 몽타주는 마침내 냉장고 속에 들어있는 아기의 이미지로 정점을 찍는다. 식자재와 인간을 연결하는 몽타주는 인간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일까, 아니면 동식물의 가치를 격상하는 것일까. 이 모든 이미지를 ‘폭력 이미지’로 명명한 채 배격해야 할까, 아니면 전체 영화를 마주한 뒤에 판단할 문제일까. 이러한 시선은 검열이라 할 수 있을까.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하고도 위험한 리얼리티의 시퀀스들은 과연 위험한 리얼리티를 재현의 영역 바깥으로 배격해야만 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여성, 영화사>의 마지막 주제로 ‘죽음’과 ‘엔딩’이 놓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엔딩’ 뒤에 ‘노래와 춤’으로 마무리되는 것은 다소 의외다. 그중에서도 <비욘세: 레모네이드>의 뮤직비디오 영상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이 영상 속에서 노란색 드레스를 입은 전사를 연기한 비욘세는 미소 지으며 다가와 손에 든 방망이를 휘두르며 세트장 곳곳을 파괴한다. 이 퍼포먼스는 마침내 카메라를 때려부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마지막에 배치하면서 영화는 부서진 카메라와 함께 스스로 파괴되고 싶은 것일까. 혹은 남성 위주로 꾸려진 기존 영화사를 파괴하고자 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의 유희일까. 흥미로운 다른 포인트는 <여성, 영화사>라는 분절된 영화 경험 속에서 뮤직비디오와 시리즈 드라마, 단편영화와 장편영화가 구분 없이 뒤섞여 있으며 모두 영화처럼 인식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욘세의 방망이를 빌려 영화가 깨부순 것은 영상간의 암묵적 위계인 것일까. 영화들의 여정은 그렇게 제멋대로 영화 안팎을 아우르며 흘러든다.

미국 대선의 이면을 파헤치는 #고발 #킹메이커 #체인지메이커 #스캔들 영화 살펴보기 1

11월 3일부터 미국 대통령 선거가 시작된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국가이지만,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독립선언문의 정신이 선거를 통해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물음표가 붙는다. 시스템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각종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정치판이지만, 그 안에는 변화를 이끄는 ‘체인지 메이커’들과 묵묵히 뒤에서 일하는 ‘킹메이커’의 헌신이 있다. 집에서도 만날 수 있는 미국 선거영화를 4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소개한다. 다큐멘터리에 꾸준히 투자해왔던 넷플릭스에는 미국의 선거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돕는 좋은 콘텐츠가 많다. 이들 다큐멘터리는 불법 데이터 수집부터 게리맨더링(특정 정당이나 특정 후보에게 유리하도록 부당하고 기형적으로 선거구를 획정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기득권 정치인을 수호하는 시스템의 부조리를 강력하게 꼬집는다. 10월 19일부터 30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에서 열린 에도 미국의 선거 과정과 그 이면을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영화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접하는 준비된 정치인의 모습이 아닌 남다른 사연과 은밀한 속사정을 지닌 개개인으로서의 모습,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치열하게 캠페인을 준비하는 참모들의 모습 등이 궁금했던 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될 듯하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특별전은 끝났지만 <거대한 해킹> <세상을 바꾸는 여성들> <익스플레인: 투표를 해설하다>는 넷플릭스에서 만날 수 있다.

'아니아라' 펠라 카게르만 감독 - 인간이 지구라는 우주선을 잃는다면

우주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직사각형 형태의 아니아라호. 그 안에는 지구 멸망 후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탑승해 있다. 3주 후 화성에 도착할 계획이던 아니아라호는 우주 부유물과 충돌한 후 경로를 이탈하고, 승객들은 자신들이 영원히 이 공허한 우주를 떠돌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제9회 스웨덴영화제 초청작인 영화 <아니아라>는 노벨상 수상자 하뤼 마르틴손의 동명 SF 서사시를 각색한 작품이다. 2018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 후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환경에 관한 경이로운 SF우화" "무섭도록 황홀한 우주 오디세이" (<가디언>) 란 평을 받았고, 2020년 스웨덴 최고 영화상인 굴드바게 어워즈에서 여우주연상을 포함해 4관왕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예술 학교를 졸업하고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던 펠라 카게르만 감독은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영화를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란 질문에서 출발해 휴고 릴리아 감독과 함께 영화 <아니아라>를 연출했다. 영화는 “지구가 없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가”란 질문에 극단적인 답을 제시하며, 현재 우리가 누리는 지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역설적으로 깨닫게 한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내한하지 못한 펠라 카게르만 감독과 <아니아라>에 관해 화상으로 나눈 대화를 전한다. 올해 스웨덴영화제는 11월 5일 서울에서 시작해 부산, 대구, 광주, 인천을 거쳐 오는 16일까지 열린다. -<아니아라>의 어떤 점에서 매료돼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나. =<아니아라>는 스웨덴에선 굉장히 유명한 시다. 나의 부모 세대는 이 시를 학교에서 배웠을 정도니까. 내용이 무척 복잡하고 어려운데 나는 할머니와 함께 상황극을 하면서 그 내용을 자연스레 익혔다.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였는데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는 아니아라호의 승무원, 환자들은 탑승객, 이런 식으로 현실과 시를 접목해 연극을 하곤 했다. 그때부터 이 시가 내 마음에 강렬하게 남았다. -<아니아라>는 지구가 멸망한 후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란 질문에 굉장히 암울한 답을 내놓는 영화다. =그렇다. 비유하자면 이 지구가 우리의 유일무이한 우주선 아닌가. ‘우주선을 잃으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 어떻게 살아갈까’란 질문을 계속 스스로에게 던지며 영화를 만들었다. -아니아라호의 형태는 긴 직사각형으로 굉장히 독특하다. =많은 사람들이 큰 메모리카드처럼 생겼다고 하더라. (웃음) 우주선의 모양과 크기 등은 시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었고, 내부 요소들까지 원작을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초기 설계 과정부터 공을 들였다. 다만 아니아라호의 웅장함을 부각하기 위해 우주선 외부에 조명을 켜는 디테일을 추가했다. -지구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AI 프로그램 ‘미마’도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형상화했던데. =미마는 좀더 현대적으로 디자인을 바꿔봤다. 고전이라 그런지 <아니아라>에선 미마를 TV처럼 묘사해놓았는데 그것보다 더 흥미롭게 보였으면 했다. 미마란 존재는 AI 프로그램이지만 한편 신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천장으로 끌어올렸다. 그 편이 후반 CG 작업하기에도 편했고. (웃음) 또 자연스레 지구가 연상됐으면 해서 거대한 물결의 흐름처럼 구현했다. -승객들은 항상 쿠션을 베고 엎드려서 미마와 텔레파시를 주고받는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승객들이 후두엽을 통해 미마와 연결된다는 설정이었다. 그래서 전부 시체처럼 엎드려 있는 거다. 또 다들 지구가 파괴된 후 원치 않게 화성으로 떠나게 된 사람들이라 이들이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느꼈으면 해서 평화롭고 깨끗한 자연의 이미지를 보여줬다. -휴고 릴리아 감독과는 어떻게 함께 작업하게 됐나. =휴고와 나는 12년을 함께한 연인이다. 본래는 각자의 작업을 하다가 ‘이런 혼란스러운 시기에 영화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보자’란 생각이 들어 함께 <아니아라>를 연출하게 됐다. 주 업무를 분리해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로 긴밀하게 협업했다. -미마를 관리하는 미마 로브 역에 에밀리아 가버스를 캐스팅한 이유도 궁금하다. 에밀리에는 휴고 릴리아 감독의 전작 <더 언리빙>의 주연배우이기도 했는데. =사실 에밀리아와는 18살 무렵부터 친구 사이였다. 휴고가 단편을 찍는다기에 에밀리아를 주연으로 추천했고 이후 <아니아라>도 함께하게 됐다. 처음부터 에밀리아를 염두에 두고 각본을 썼기 때문에 주인공의 이름도 에밀리아다. 그는 굉장히 다재다능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는 배우다. 촬영 전부터 스웨덴에서 핀란드를 오가는 페리에 올라 리허설을 하며 미마 로브 캐릭터를 구축하더라. -영화에선 기억이라는 테마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화성에서의 삶도 대안책이 되지 못하니 결국 생존자들 전부 미마를 통해 지구의 기억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사실 미마도 지구의 대용품이지 않나. 인간들은 지구를 계속 소비해 지구를 파괴한 후 같은 방식으로 미마를 파괴한다. 인간들에겐 그 어느 것도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에서 벗어나 과연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결국 인간들에게 지구가 얼마나 필요한지에 대한 답으로 귀결된다. -평소 환경문제에 관심이 많은 편인가. =솔직히 그동안엔 그렇지 않았는데, 이번 영화를 제작하면서 환경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에밀리아는 애인이 자살한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생을 이어나간다. 이처럼 강인한 여성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이유를 말해준다면. =처한 현실을 각기 다르게 받아들이는 여러 인물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니아라호의 캡틴은 낙관주의의 끝을 보여주고, 주인공에게도 그런 면이 일정 부분 존재한다. 그러나 반대의 인물들도 등장한다. 승객 중 한 사람인 천문학자는 다른 관계자들과 달리 현실을 은폐하지 않고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에밀리아의 애인 이사벨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아주 냉정하게 받아들인다. 이런 식으로 양극단의 사람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또 서로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리고 싶었다. -물리적인 폭동보다 사람들의 감정과 생각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심리적인 묘사도 기본적으로 원작의 묘사를 따랐다. 다만 원작은 영화보다 훨씬 더 암울하다. 가령 탐사선 하나가 아니아라호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있지 않나. 원작에서는 이 탐사선이 아니아라호 옆을 스쳐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건 너무 허무한 것 같아서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작게나마 희망적인 요소를 넣었다. -<아니아라>라는 제목을 ‘원자의 움직임’ 혹은 그리스어로 ‘슬픔, 절망’ 등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던데, 감독이 설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같은 자료를 조사한 것 같은데. (웃음) 우리는 그리스어에서의 ‘우울, 절망’이란 뜻을 차용했다. 원작자는 아니아라(Aniara)의 ‘A’에서 미학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해 이를 제목으로 설정했다고 들었다. -<아니아라> 이후론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나. =다음 작품은 한 젊은 저널리스트가 평행 세계를 통해 여러 시대를 겪는 SF영화를 계획하고 있다. 일종의 성장영화다. -끝으로 관객이 영화 <아니아라>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받길 원하나. =이 영화를 보고 밖에 나가 신선한 공기를 마셔보길 바란다. 우리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에 살고 있는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지구가 우리를 신경 써주는 만큼 우리도 지구를 지켜줘야 한다는 걸 깨닫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