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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3 레볼루션> 세계 첫 시사회에 다녀오다 [3]

키아누 리브스 인터뷰 난 <매트릭스>의 모든 것이 좋다 -키아누 리브스는 검은 셔츠에 검은 양복을 입고 <매트릭스> 속 네오처럼 걸어들어왔다. 3부작을 끝낸 그의 표정에선 홀가분하다기보다 허탈한 기운이 느껴졌다. ‘비교해달라’는 질문이 나오기만 하면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스포일러 때문에 일부 중요한 답변을 삭제해야 했다. =3편에서 보여지는 네오의 운명에 대한 생각은. 이 세계는 지속될 것이라는 것과 우리는 그와 같은 또 다른 영웅을 원한다는 것. 오라클이 말했던 매트릭스에 대한 아이디어는 계속된다. 어쨌든 네오는 깨닫게 된다. 정말 강한 정체성을 갖게 된다. 토머스 앤더슨이라는 것과 분리되어 평화를 갈망하는. 정말 멋진 혁명이 일어난다. 난 그것이 정말 좋다. 난 <매트릭스>의 모든 게 좋다. -당신은 네오의 일부가 스미스 요원이 되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나. 그는 머신시티로 간다. 그 머신시티는 에너지를 받아서 소비하고 다시 흡수하는 존재다. 그 완전한 에너지의 다른 존재가 스미스 요원이다. =바이러스가 바이러스를 공급하는 것 같은. 그런 것 같다. 바이러스와 안티바이러스, 히어로와 안티히어로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네오는 수단이 된다. 어둠 속에서 소비되고 태워 없어지는 빛 같은. -1, 2편과 3편에서 네오의 캐릭터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1, 2편에서 그는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오라클과 함께 일하지만 3편에서는 자기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 전편들에서보다 자기 자신과 훨씬 가까워져 있다. 네오는 자기 길을 자기 스스로 선택한다. 캐릭터가 성숙하고 더 많은 경험을 갖게 되는 것이다. 외부세계에 대해서도 알기 시작한다. 2편부터 시작되었지만 3편에서는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고, 그 전까지는 매트릭스에 관해서만 알았다면 이젠 시온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리고 이제 그는 매트릭스, 실제 세계, 시온을 넘나들고 다시 매트릭스로 돌아와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된다. 그리고 머신시티로 간다. 그는 여러 개의 다른 아이덴티티를 만나게 되는 캐릭터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임무이다. -매트릭스 혁명 이후의 시온과 머신시티의 관계를 당신은 예견해줄 수 있나. =잘 모르겠다.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겠다.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당신의 의견은 어떠한가. =재밌었다. 그리고 감동적이다. 정말 훌륭한 ‘센티멘트’(감정)다. -이 영화를 위해서 책을 많이 읽었다고 알고 있다. =읽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읽지는 않았다. 산에 가서 수도를 하지도 않았고 책도 그렇게 많이 읽은 건 아니다. -사람들은 네오의 캐릭터를 보면서 실제의 당신 모습도 그러할 것이라 상상할 거다. 그런 해석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난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잘 반응하는 편이 아니다. 오직 내가 뭔가 듣거나 보지 않으면. 로렌스 피시번 인터뷰 모피어스도 인간이다, 다들 잘 잊어버리지만 로렌스 피시번은 모피어스에 비할 바 없이 유쾌한 표정에 살이 제법 많이 오른 몸집으로 나타났다. 모피어스처럼 자신의 생각을 확신에 가득 차 말했다. 차이가 있다면 유머와 활기, 위트로 넘쳤다는 것이다. -기분이 어떤가. =행복하다. 영화가 너무 맘에 든다. 이번 영화는 세편 가운데 최고다. 사실 2편을 다시 봤을 땐 마음을 달리 먹었었는데, 3편을 보고 나니까 1편을 봤을 때처럼 흥분됐다. -감정적인 면에서든 다른 것이든, 당신의 시야를 넓어지게 한 어떤 깨달음 같은 건 없었는가. =더 똑똑한 인간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영화 속의 철학은 어디까지나 영화 속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도 훌륭하다. 영화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모피어스는 이 시리즈에서 어떻게 변화하는가. =그는 안 변한다. -그도 좀더 인간적으로 변하지 않나. =모피어스는 원래 인간이다. (웃음) 이 영화에서 당신이 알게 될 흥미로운 사실이 바로 그가 인간이고 또 연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1편에서는 그는 전지전능해 보였고, 2편에서는 슈퍼히어로, 슈퍼휴먼처럼 보였지만 3편에서는 그냥 인간이다. 그러나 그건 그가 변해서가 아니라 스토리의 맥락상 그의 캐릭터가 그런 식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다. 그가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연약한 존재가 되어가는군’이라는 변화를 겪어서가 아닌 것이다. 그를 둘러싼 상황이 그로 하여금 다르게 행동하게끔 만드는 것뿐이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폭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난 <매트릭스> 시리즈에 등장하는 폭력을 존중한다. 이건 다른 종류의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고도로 스타일화되어 있고, 또 당신이 알아봤는지는 모르겠는데 이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장면을 거의 보기 힘들다. 1편에서 스미스 요원이 네오를 죽일 때 네오의 가슴에선 거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 벽에서 피가 배어나올 뿐이다. 그런 면에서 난 우리 영화가 그렇게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이 영화가 유명해졌다고 생각하나. =왜냐하면 그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근대의 문맥에서 이야기되어진. 모든 문화에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이고 각자 나름대로의 버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 그것에 대해 반응한다. 시각언어로도 표현돼 있다. 만화책, 그래픽노블, 혹은 일본 애니메이션 등으로, 시각언어는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다. 세상에서 가장 대중적이며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어떤 요소가 있을 수 있을까? 아, 쿵후가 있다. 쿵후는 육체동작으로 싸우는 기술인데 이것 역시 세계에서 대중적인 시각언어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점들이 이 영화를 사람들이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삶에선 아는 것과 믿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질문에 관해선 내가 당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믿는다. (웃음) 캐리 앤 모스 인터뷰 쉽지 않았고, 그래서 자랑스럽다 캐리 앤 모스는 전사 트리니티를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따뜻하고 온화한 얼굴로 나타났다. 살이 약간 오른 탓도 있겠지만 그의 편안한 표정은 키아누 리브스와 정반대였다. 테이블을 돌며 인터뷰를 하던 그는 아이가 아프다며 일찍 일어서는 바람에 몇몇 기자들이 바람을 맞았다. -<매트릭스> 시리즈를 끝낸 소감이 어떤가. =너무 자랑스럽고, 이 영화에서 뭔가 특별한 역할을 한 것 같아 영광스럽다. 이 영화는 나에게 정말 중요한 의미다. -세편 중 어느 것을 가장 좋아하나. =모두 다 좋다. 나는 세편을 통합해서 생각할 때 좋다. 그건 나에게 통째의 경험이다. 이 시리즈가 1, 2, 3편으로 나뉘어져 있다고 해도 사실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굉장히 심오하게 하나로 통합돼 있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당신은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사이에서 갈등한다. 실제 삶에서는 둘 중 어느 것이 당신에게 더 중요한가. =(단호하게) 믿는다는 것. 아니, 둘 다 필요하다고 보지만 믿는다는 것이 나에겐 더 쉽다. 그리고 안다는 것은, 당신이 안다면 그건 아는 거다. 무언가에 대해서 답을 얻어내기 위해 생각하고 또 하고 생각하고 또 해도 일단 그것은 당신이 안다면 아는 거다. 둘 중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SF영화의 히로인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나? 예를 들자면 시고니 위버 같은. =잘 모르겠다.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음, 이건 너무 ‘모 아니면 도’ 식의 질문 같다. -<매트릭스> 시리즈를 하면서 당신 자신에 관해 무엇을 발견했는가.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이전보다 더 자신감이 생겼다. 외부에서 평가받는 내 자신에 대해 이전보다 덜 의식하게 됐다. -이 영화를 하면서 육체적으로 고된 촬영장면들이 많았다. 트레이닝을 받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이 자랑스럽고, 드디어 끝났다는 것이 기쁘다. 정말 힘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두려움과 맞닥뜨렸고 끊임없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해야만 했다. 어쨌든 나는 했고, 그런 점에서 난 어떤 것이든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가졌다. 아무리 어려워도 난 하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난 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증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몸으로 뭔가 해보여야 하는 사람은 아니다. 육체적인 수준 이상의 도전의식을 느꼈지만, 육체적인 단계만 거치고서도 난 내 자신의 영역을 넓혔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어려운 선택에 맞닥뜨렸을 때 판단 기준이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으냐에 달려 있다. 이 영화엔 많은 주제와 많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당신이 빨간 약을 고를 건지 파란 약을 고를 건지, 와 같은 문제처럼 상대적인 거다. 당신의 삶을, 길을, 혹은 어떤 믿음을 선택할 것인가 했을 때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함께 있는 것이다.

<매트릭스3 레볼루션> 세계 첫 시사회에 다녀오다 [1]

<매트릭스>의 마지막 장이 열리다 <매트릭스3 레볼루션>이 11월5일 밤 11시 세계 동시 개봉이라는 초유의 일정을 잡았다. 이걸 오만한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세기말의 1999년, <매트릭스>가 개봉되자 세상은 이 영화가 일으킨 ‘소란’을 ‘문화 현상’이라고 일컬었다. 철학자, 종교학자, 과학자들이 <매트릭스> 따라잡기에 뛰어들었다. 그 최종 마무리를 어느 한곳에 먼저 풀어놓지 않겠다는 건 흥미로운 배려다. 오만한 건 2편의 마케팅이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니. 이야기의 진폭을 넓혀가다 툭 멈춘 듯한 영화에 일부에선 혹평을 쏟아냈다. 최종편을 앞두고는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 안에 마련된 세계 첫 시사회도 어둠이 내려앉은 뒤 조용하게 열렸다. 다음날의 인터뷰 역시 조그마한 소란도 없이 나직이 진행됐다. 그러나 영화는 조용하거나 움츠러든 기색이 전혀 없다. <스타워즈>의 무게에 비견될 법한 SF 3부작답게 육중하게 마침표를 찍었다. 그 소식을 미리 전한다. 검은 재킷의 보안요원들에게 두 차례 가방 검사를 받고, 11월3일까지 리뷰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일방적인 ‘서약서’에 서명을 하고서야 입장이 허락된 워너브러더스 스튜디오의 스티븐 J. 로스 극장. 10월18일 오후 7시30분(현지시각) 예정이던 <매트릭스3 레볼루션> 시사회는 세계 각지에서 초청된 기자들이 고요히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20분가량 늦게 시작됐다. <매트릭스>와 <매트릭스2 리로디드>의 화려한 첫 액션 시퀀스와 달리 <매트릭스3 레볼루션>은 ‘사막의 현실’에서 조용히 그러나 긴박한 대화로 출발했다. 네오 일행을 태운 호버크래프트가 행방이 묘연해진 니오베(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로고스호를 초조하게 찾는 중이다. <…리로디드>의 마지막에서 네오는 달려드는 센티넬(살인기계)을 향해 “뭔가 변했어”라며 손을 번쩍 들어 마치 매트릭스 내부인 것처럼 가볍게 처지해버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코마 상태의 네오는 시온 병사 베인과 나란히 누운 채였다. 베인은 시온으로 몰려드는 수십만의 센티넬을 길목에서 지키며 기습작전을 펼치려던 시온 저항군의 작전이 누군가의 방해로 실패한 뒤 남은 유일한 생존자다. 3부작은 종결되었나 3편의 뼈대는 2편에서 던져진 힌트와 공개된 3편의 예고편을 토대로 놀랄 만큼 완벽하게 추리됐다(인터넷에 떠도는 그 추리는 <씨네21> 423호 씨네스코프에 소개됐다). 베인의 몸이 매트릭스에서 현실로 파고든 스미스 요원의 ‘분신’이라는 점이 드러나기 직전, 네오는 미지의 공간에서 눈을 뜬다. ‘모빌 애버뉴’(Mobil Ave)라 쓰인 전철역. 네오는 그곳에서 <…리로디드>의 ‘키메이커’ 같은 새로운 인물 ‘트레인맨’을 만난다. 모빌 애버뉴는 현실과 매트릭스 사이의 중간세계다. 이곳을 관할하는 트레인맨은 사악한 프로그램 밀매업자 메로빈지언의 수하. 전철을 타지 않고는 빠져나갈 수 없는 이 닫힌 공간에서 네오는 매트릭스 3부작을 종결짓는 결정적인 실마리(혹은 깨달음)를 얻게 된다. 행방불명된 네오의 정신을 찾으려는 트리니티와 모피어스는 예언자 오라클을 지키는 세라프의 안내로 메로빈지언의 클럽 ‘헬’(Hell)을 찾아간다. 첫 액션신은 바로 이곳에서 펼쳐지는데 매트릭스의 팬이라면 이 순간 잠시 향수에 빠질 법하다. 1편의 정부청사 로비신을 패러디한데다가 트리니티의 그 유명한 ‘더블 이글’ 동작이 모처럼 다시 등장한다. 공중에 떠서 독수리 자세로 상대를 가격하던 발차기 말이다. 로비신과 다른 점이라면 상대방이 천장에 거꾸로 붙어 매끄럽게 움직이며 총탄을 피한다는 것과 이 신이 격렬한 총격과 사방으로 튀는 파편에도 불구하고 마치 먹먹한 진공상태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충분히 예고된 바 있는 시온의 최후 결전은 전반부에 펼쳐진다. 수십만의 센티넬과 시온의 기갑부대 ‘APU 군단’의 충돌은 <…레볼루션> 스펙터클의 핵을 이룬다. 프로듀서 조엘 실버가 아주 끔직스러웠다는 표정으로 수많은 돈을 잡아먹었다며 혀를 내두른 긴 시퀀스다. 현실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신인 만큼 (매트릭스 내부의 디지털적 스펙터클과 비교해) 아날로그적 스펙터클이지만 세어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몰려드는 센티넬들은 수없이 덧씌워진 CG로 생명력을 얻었다. 그들이 징그러운 진풍경을 연출한다. 1999년 5월에 시작해 2003년 11월에 완결되는 3부작이나 시온의 혈전을 어떻게 매듭짓느냐는 모두 네오에게 달렸다. 네오는 트리니티와 함께 니오베의 로고스호를 타고 머신시티로 향한다. 싸우러 간다기보다 모종의 거래를 하기 위해서다. 인간 전지를 재배하는 거대한 ‘농장’ 너머에 있는 머신시티가 호락호락하게 인간의 접근을 허용할 리 없다. 머신시티를 지키는 센티넬 군단이 새까맣게 달려들고 로고스호가 그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혁명은 원점으로 돌아온다 네오의 선택은 머신시티와 시온의 공존이다. 그렇다면 변한 건 없는 게 아닌가? 아니 최종 결말은 끝없이 지연되는 게 아닌가? 그러나 매트릭스 시리즈가 다시 이어지더라도, 조엘 실버는 결단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거듭 말했지만, 네오와 트리리티가 재등장할 가능성은 아주 적어 보인다. 워쇼스키 형제의 장난스러우면서도 난해한 게임을 수용하려면, 3부작의 진정한 주인공일지 모르는 오라클과 스미스 요원을, 그리고 ‘매트릭스’의 등장(1편)과 ‘매트릭스의 재장전’(2편)을 거쳐 어떻게 ‘매트릭스 혁명’(3편)에 이르렀는지 그 긴 여정을 매트릭스의 시선으로 되짚어봐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매트릭스의 위상을 네오가, 아니 워쇼스키 형제가 실은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추측해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편 <매트릭스>에서 해커 네오이기도 한 컴퓨터프로그래머 토머스 앤더슨은 보드리야르의 책 <시뮬라크라와 시뮬라시옹>(1981)을 이용해 불법 프로그램을 거래한다. 모피어스가 “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라며 매트릭스의 정체를 직시하게 된 네오에게 건네는 인사도 보드리야르의 인용이었다. 이는 “원본도 없고 현실성도 없는 현실을 모형에 의거해서 만들어내는 것, 즉 과도현실”의 시뮬라시옹이 현실을 대체해버린 진실을 가리킨다. 현실은 “단지 사막 위에 여기저기 흔적”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보드리야르는 시뮬라시옹의 네 가지 단계에서 과도현실이 승리한다는 ‘염세주의’를 펼쳤다. 1편 <매트릭스>는 그 염세주의에 역행하는 듯 했다. “진실을 볼 수 없도록 우리 눈을 가려온 세계”라며 매트릭스의 정체를 일갈하고 네오에게 인류 해방의 메시아적 기능을 부여했으니까. 뜻밖에도 <…리로디드>에선 혼란과 또 다른 출구의 가능성을 던져줬다. 네오와 모피어스에게 길을 밝혀주던 예언자 오라클은 인간심리 연구용 프로그램이었다(이에 반해 인공지능 로봇에게 심리치료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최초의 SF작가는 아이작 아시모프다). 오라클의 애초 기능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해주는 건 1편이다. 스미스 요원은 포로가 된 모피어스에게 씹어뱉듯 입을 놀렸다. “매트릭스가 처음에는 인간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었던 것을 아는가? 고통도 없고 모두가 행복했지. 그런데 그게 재앙을 불렀지. 아무도 프로그램에 적응을 못했어. 농작물이 몽땅 죽어버렸어. 프로그래밍 기술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너희 종족은 고통과 불행을 통해서만 현실을 인식하는 거야.” 인간은 바이러스 같은 존재이지만 고통과 불행이 없으면 죽어버리는 이상한 ‘농작물’이었다. 농사를 망치지 않으려고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 바로 오라클이었다. ‘매트릭스의 어머니’라는 오라클에 이어 <…리로디드>에 등장한 ‘매트릭스의 아버지’ 설계자는 네오도, 모피어스도, 심지어 관객도 허탈하게 만들 만한 놀라운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냈다. 시온이 파괴된 건 5번째였고, 네오는 6번째 파괴를 막아보려 나선 6번째 ‘그’일 뿐이라는. 메시아라던 네오는 매트릭스가 만든 불규칙의 산물이었다. 그러니 3편에서 오라클이 네오에게 “너의 목적과 나의 목적은 같다”라고 말하는 건 당연지사일망정 배신은 아니다. 오라클은 네오를 돕다가(그게 매트릭스를 돕는 길이기도 했겠지만) 재프로그래밍되는 수난을 겪는다(2편 촬영 뒤 오라클 역의 글로리아 포스터가 지병으로 숨지는 바람에 비슷한 인상의 매리 앨리스로 대체된 게 실제 이유이지만). <…레볼루션>은 1편에서 부정했던 보드리야르의 염세주의 옆으로 돌아왔다. 좌표를 달리한 채 열린 시선으로 문제를 수용할 따름이다.

매혹적 액션영화 <킬 빌> 그리고 쿠엔틴 타란티노 [1]

매혹적 액션영화 들고 온 쿠엔틴 타란티노를 도쿄에서 만나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6년 만에 새 영화를 만들었다. 이소룡의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우마 서먼의 사진만으로도 이미 범상치 않았던 영화 <킬 빌>이다. 인용한 영화는 세다가 지칠 정도고,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장르도 빠짐없이 들어갔다. 그러나 <킬 빌>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르면서도 한 계단 도약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내가 만든 첫 번째 액션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타란티노를 만났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에서 칼에 벤 사무라이는 죽음이 다가오는 소리를 듣는다. “이건 추운 겨울 찬바람이 스치는 소리군. 항상 들어보고 싶었는데….” 그리고 사무라이의 상처에서, 뿜어져나오는 핏줄기가 서걱거린다. 사막 같았던 그 비장미를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이미 30년 전에 사라진, 피묻은 원한은 피로 갚아야만 하는 세계. 쿠엔틴 타란티노는 검을 든 두명의 여전사를 눈밭에 세워 바로 그 세계를 현재로 이끌어냈다. 그의 네 번째 영화 <킬 빌>은, <타임>의 표현에 따른다면, “가장 순수하고 영화적으로 독창적이었던 옛 영화들을 재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하게도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한” 영화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과 마카로니 웨스턴, 사무라이영화, 쇼브러더스의 쿵후영화가 <킬 빌>의 여정을 따라 몸을 섞는다. 세상 모든 복수담이 여기에 모여, 한편의 매혹적인 액션영화가 되었다. <킬 빌>은 타란티노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그는 지금까지 시간과 공간이 뒤엉키는 복잡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대사는 폭포처럼 거셌고, 편집은 조급하게 달음질쳤다. 그러나 <킬 빌>은 면사포 아래 짓뭉개진 신부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첫 장면부터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낸시 시내트라가 쓸쓸한 어조로 부르는 <뱅뱅>, 검은 실루엣으로 떠오르는 코마 상태의 여인, 4년 만에 깨어나 뱃속에 있어야 마땅한 아기를 찾는 다급한 몸짓, 납작해진 배를 쥐고 터져나오는 통곡. 그 순간 <킬 빌>은 무고하게 죽은 아홉명의 목숨을 보상받으려는 처절한 복수극으로 나가려는 듯 보이지만, 곧 짧게 챕터를 끊어가면서 블랙스플로이테이션의 찬란한 원색과 텍사스의 나른한 냉소로 옮겨간다. 도대체 이건 무슨 영화인가. 타란티노에게 <킬 빌>은 “앨범으로 치면 그레이트 히트 앨범”이다. 그는 여전사와 복수라는 기둥 두개를 박아두고선 숱한 애창곡들로 그 사이에 그물을 쳤다. 센 영화, 그 핏빛의 미학 타란티노는 친구들에게 듣고서야 알았다지만, <킬 빌>은 이미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있는 소설과 비슷한 이야기다. 코넬 울리히의 추리소설을 프랑수아 트뤼포가 연출한 <검은 옷의 신부>는 결혼식장 앞에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신부가 차에 탔던 사람들을 차례로 살해하는 내용이다. <킬 빌>도 외양은 비슷하다. 살모사 암살단의 킬러였던 브라이드(우마 서먼), 코드명 블랙 코브라는 텍사스 엘파소로 달아나 결혼식을 올리려 한다. 그러나 보스 빌과 옛 동료 네명이 들이닥쳐 식장 안에 있던 사람 전부를 죽이고, 빌의 아이를 배고 있던 브라이드의 머리를 총으로 쏜다. 브라이드는 코마 상태에서 4년을 보낸 뒤 깨어나 복수를 시작한다. 200페이지가 넘는다는 시나리오의 정체가 궁금해질 정도로 <킬 빌>은 단순하다. 최소한 1편만은 그렇다. 그러나 이 영화를 만든다는 건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타란티노는 브라이드가 복수 대상 리스트에 오른 다섯명을 찾아갈 때마다 다른 장르의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살모사 암살단원을 여기저기 흩어놓고, 관객에게 “브라이드와 함께 멀티플렉스 사이를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어했다. 그 때문에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은 브라이드가 리스트의 이름 하나를 지울 때마다 새로운 스타일을 고민해야 했다. 타란티노가 그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인에게 상처받은 청년 같은 표정”을 짓곤 했으므로. 1편에서 그 절정은 청엽옥의 전투였다. 도쿄 암흑가의 여왕 이시이 오렌(루시 리우)은 수백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것이 당연했다. 컴퓨터그래픽을 싫어하는 타란티노는 일 대 백에 달하는 그 난투극을 찍느라 <펄프 픽션>의 전체 촬영기간 10주에 육박하는 8주를 소비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가 원한대로 청엽옥 전투는 “<지옥의 묵시록>의 헬리콥터 장면이 전쟁영화에서 차지하는 것과 같은 위치”를 액션영화에서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컷 한컷을 모두 언어로 폭로한다고 해도, 그 피바다는 눈으로 확인해야만 진가를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일본을 제외한 국가의 관객은 붉은 피보라를 모노크롬으로 탈색한 흑백 버전을 보게 될 것이다. 타란티노는 아시아 관객을 위해 청엽옥을 컬러로 촬영했지만, 눈알이 뽑혀나가고 발목이 잘리는 장면을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청엽옥 전투는 <금연자> <복수> <외팔이 검객> 등이 보여준 장철의 잔인한 사지절단 액션에 분수 같은 피를 사랑하는 사무라이영화의 관습을 더했다. 전선과 전선이 만나 불붙는 하얀 불꽃처럼, 처절한 핏방울이 튀어오르는 것이다. 전투의 대미, 칼날에 찢긴 오렌의 흰 기모노 위에 흐르는 일본 노래는 <학살의 꽃>이다. "앨범으로 치면 그레이트 히트 앨범" 인터뷰 도중 오마주라는 단어를 수없이 언급한 타란티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여러 영화들에서 버나드 허먼과 퀸시 존스, 아이작 헤이즈,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가져와 인용했다. 그것은 쇼브러더스가 좋아한 방법이었다. 타란티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골랐다는 이유에 덧붙여 이렇게 설명한다. “<구>는 <샤프트> 테마를 썼고, <태권진구주>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테마를 썼다. 저작권은 사지 않았다. 어차피 작곡가들은 알지도 못했을 테니까. <구>의 음악은 원작보다도 멋있어서 몇번을 듣고 싶어질 거다.” 타란티노가 <킬 빌>을 그레이트 히트 앨범에 비유한 것은 어쩌면 비유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명인 하토리 한조가 브라이드에게 일본도를 선물하는 장면에는 마카로니 웨스턴과 함께해온 엔니오 모리코네의 선율이 깔린다. 비정하고 차갑지만 지켜야 할 계율이 있는 전사들, 혹은 총잡이들이 국경을 넘어 하토리 한조의 다다미방에 발을 딛는 듯하다. 그러나 넘친다 싶으면, 타란티노는 음악을 걷어낸다. 오렌이 마지막 말을 남기는 대목에서 들리는 거라곤 겨울 바람소리와 딸그락거리는 수통 소리뿐이다. <아들을 동반한 검객>의 사무라이가 들었던 세상 마지막 소리를, 오렌도 들으면서 쓰러진다. 타란티노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날마다 영화 한편을 필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를 만드는 것은 한데 얽혀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펄프 픽션>을 찍으면서 처음으로 복수에 나선 여전사를 떠올렸을 때, 그 머리 속에는 하나의 목록이 타이핑되고 있지 않았을까. 타란티노는 수많은 복수극들을 참고했고, 그 절절하면서도 무자비한 정서를 <킬 빌>에 누벼넣었다. 타란티노가 아는 영화의 여인들은 이런 사연을 가지고 있다. 어느 부모는 매음굴에 팔려간 딸을 보고 절망해서 목숨을 끊는다, 남편은 살해당하고 자신은 강간당한다, 낭인들에게 살해당하는 부모를 지켜본다, 그러나 모두들 살아남아 복수를 한다. 이 사연들이 피눈물을 모아 애니메이션 파트 <오렌의 족보>에 흩뿌리는 것이다. 오렌은 아홉살 때 일본도가 아버지의 몸을 바닥에 못박는 걸 보았고, 침대 밑에 숨어 침대 위에서 죽은 어머니의 핏방울을 맞았다. 2년 뒤 그녀는 원수를 갚고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피를 음미하면서 웃는다. 오렌의 과거를 설명하는 브라이드의 내레이션은 다소 코믹하지만, <킬 빌>은 이처럼 미국인으로서는 쉽게 터득할 수 없는 감정을 품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브라이드의 사부로 출연하는 액션스타 고든 리우는 “쿵후 동작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은 당신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운다”고 말했다. 타란티노는 쿵후가 아니라 영화를 통해서, 존중하는 법을 익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존중하면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타란티노는 <킬 빌>을 단 한컷도 포기할 수 없었다.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은 세 시간 넘는 액션영화를 시장에 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킬 빌>을 두편으로 나누어 개봉하기로 결정했다. <킬 빌> 2편은 내년 2월 미국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한때 브라이드의 연인이었던 보스 빌이 얼굴을 보여주고, “모종의 이유로 밝힐 수 없었던” 브라이드의 진짜 이름을 알 수 있고, 타란티노가 능숙하게 써내려간 좀더 많은 대사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전해지는 소문이다. 넉달간 기다리는 일은 지루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킬 빌>은 “복수는 차가울 때 먹어야 맛있는 음식과도 같다”는 격언으로 시작한다. 그 경구는 <킬 빌> 2편을 기다리며 몸달아하는 관객에게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 듯하다.

[촬영현장] 판타지 멜로영화 <인어공주>

전도연, 해녀 변신해 우도 바다서 물질 제주도 동쪽에 소가 길게 누운 형상으로 성산일출봉을 바라보고 있는 섬 우도(牛島). 지난달 30일 오후 이곳 하고수동 선착장 앞바다에서는 해녀들의 물질이 한창이었다. 1960∼70대 해녀들 틈에서 유난히 앳된 비바리(`처녀'란 뜻의 제주 방언) 하나가 눈에 띈다.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쉰 뒤 몸을 뒤집어 물에 잠기는 품세가 그럴 듯하지만 유난히 입수 시간이 짧고 얼굴에 힘든 표정이 역력하다. 주인공은 톱스타 전도연. 영화 <인어공주>(제작 나우필름)에서 20여년 전의 해녀 연순과 우체국에서 일하는 그의 딸 나영으로 1인2역을 맡았다. 이날 촬영장면은 스무 살의 연순이 짝사랑하는 우체부(집배원) 진국(박해일)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며 바다에서 굴과 소라 따위를 따는 대목이다. 두렁박(해녀들이 물에 띄워 몸을 의지하는 도구로 예전에는 박으로 만들었으나 이제는 스티로폼을 쓴다)을 붙잡고 있던 전도연은 감독의 '큐' 사인과 함께 바닷속에 잠겨 1분 가량 버틴 뒤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어 숨비소리(숨을 고르며 동료들과 신호하는 휘파람)를 낸다. 차량 엔진 소리, 휴대전화 벨 소리, 카메라 플래시 등으로 NG가 거듭되자 사람 좋아 보이는 박흥식 감독도 참지 못하고 고함을 버럭 지른다. "배우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야!" 아무리 북위 33도의 남쪽 섬이라고는 하지만 10월 말의 바다 수온은 18℃. "끙끙"하며 신음소리를 내는 전도연이 안타까워 감독은 "따뜻한 물 좀 줄까"라고 묻는데도 전도연은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옹골찬 모습을 과시한다. 1시간 가량 바다에 있다가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채 뭍으로 나온 전도연은 곧바로 따뜻한 물이 담긴 플라스틱 물통에 몸을 담그고 담요까지 뒤집어쓴다. "70대 할머니들도 한겨울에 물질을 한대요. 길에서는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걷는 분이 물에서는 날렵하게 자맥질을 하지요. 영화 속에서는 제가 상군(물질을 가장 잘하는 해녀)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아직도 똥군(초보 해녀)이어서 걱정이에요." 9월 초에 우도에서 촬영을 시작했으나 태풍 매미가 섬 주변 바다를 온통 뒤집어놓고 가는 바람에 한달 가량 진행이 늦어졌다. 우도에서 찍는 분량은 65% 정도로 주인공 연순과 진국의 로맨스가 여기서 모두 이뤄진다. 눈길 돌리는 곳마다 절경인 우도. 장선우 감독의 <화엄경>과 이현승 감독의 <시월애>도 이곳에서 찍었다. 마을사람들이 외지인에게 배타적이라는 소문을 듣고 잔뜩 겁을 먹었으나 해녀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고 하니 주민들이 모두 스태프와 엑스트라를 자청하고 나섰다. 특히 눈망울이 선한 박해일은 해녀들 사이에서 인기 최고여서 곤란한 문제가 생기면 해결사 역할을 척척 해낸다. 내년 봄 개봉 예정인 이 영화는 20대 숙녀가 어머니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가슴 벅찬 사랑을 체험한다는 것이 기둥줄거리. 20여년 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판타지 멜로물이다. 2001년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를 선보인 박흥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전도연과 다시 호흡을 맞추며 <질투는 나의 힘>과 <살인의 추억>의 박해일이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제주도 출신의 중견 탤런트 고두심이 모처럼 다시 스크린에 얼굴을 내미는 것도 관심을 모은다. (북제주=연합뉴스)

[기자수첩] <선택>과 <매트릭스3>

"선택:매트릭스3= 3:364?" <매트릭스3-레볼루션>이 5일 전국 364개 스크린에서 상영된다. 이는 320개의 <매트릭스2>나 <터미네이터3>에 앞서는 최고기록. 좌석 수로 따지면 10만250석에 이른다. 364라는 숫자는 지난달 31일 현재 확보된 스크린 수로 주말인 1∼2일을 지나면 더 늘어날 전망이다. 전국 스크린 수를 1천개(2002년 12월 기준)로 보면 열에 서넛은 <매트릭스3> 간판을 내거는 셈. <매트릭스3>는 논쟁의 여지 없이 많은 영화 팬이 학수고대해 온 화제작이다. 270일 동안 3억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수많은 관련 서적과 마니아를 양산해내며 '문화현상'으로까지 칭송받고 있다. 지난달 24일 개봉한 한국영화 <선택>도 몇 가지 면에서 '최고'라는 말을 듣고 있다.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장기수 김선명씨의 일생을 다룬 영화라는 점에서 그렇고, 홍기선 감독이 첫 작품 이후 충무로에 계속 있으면서도 작품을 내놓지 못한 12년이라는 세월도 꽤나 긴 시간이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올해 본 영화 중 최고로 감동적인 영화"라며 감상을 밝히는 관객도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화는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최저' 수준의 흥행을 기록할 위기에 처해 있다. 영화의 흥행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선택>은 지난달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연일 매진을 기록하며 관객이 뽑은 PSB관객상을 수상했다. 지난달 24일 개봉한 <선택>을 첫주 주말에 상영한 극장의 스크린은 서울 5개를 합쳐 전국 20개. 이마저도 서울의 경우 예술영화전용관인 씨네큐브나 씨어터2.0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차상영(일일 상영회차 중 일부만 상영)됐다. 개봉 1주일째를 맞은 1일부터는 서울 2개, 지방 1개관에서만 상영하고 있다. 네티즌 사이에서 영화의 재상영 운동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 '동감'이라는 이름의 네티즌은 영화의 홈페이지(www.45years.com)에 남긴 글에서 "너무 탄탄한 영화인데 오전에만 상영을 하고 있다"며 "영화를 사랑하는 관객들은 왜곡된 상업주의 때문에 영화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긴 듯하다"고 주장했다. 물론 상업예술인 '영화'에서 흥행성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 없는 사실. 하지만 개봉영화 극장잡기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관객의 볼 권리나 다양한 영화의 제작, 그리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극장 흥행의 성패가 작품 자체보다는 마케팅과 상영관 수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 된 지 오래. `좋은 영화는 관객이 알아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이나 `작품성이 흥행 성적에 직결된다'는 고지식한 믿음은 환상에 가깝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같은 영화를 한 극장의 여러 개 스크린에서 상영하는 중복상영과 교차상영 등 바람직하지 못한 상영 관행이 이러한 현상을 부추기는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중복상영이 허용되다보니 작은 영화에도 상영 기회를 줄 수 있다는 멀티플렉스 극장의 순기능이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작은 영화의 보호를 위해 이를 규제할 법규 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최근 2주일 동안 새로 간판을 내건 영화는 모두 19편. 전국 220개씩의 스크린을 확보하고 흥행 호조를 보여온 <황산벌>이나 <위대한 유산>은 5일 <매트릭스3>가 364개 스크린을 점령하더라도 기존의 70~80% 가량으로 스크린 수를 유지할 계획. 이날 선보이는 한국영화 <영어완전정복>도 비슷한 수준으로 상영관 규모를 잡고 있다. 그렇다면 그 외 영화들은? 고래 싸움에 밀려나 허무하게 간판이 내려지는 영화의 관계자들은 울상을 지을 수밖에 없고 원하는 영화를 보려던 '취향 독특한' 관객들은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 선택의 권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다. (서울=연합뉴스)

[인터뷰] <인어공주> 주연 박해일

"섬 생활 두 달에 `우도 청년'이 다 됐지요" 올해 충무로가 발굴한 남자배우 가운데 최대어로 꼽히는 박해일(26)이 제주도 동쪽의 작은 섬 우도에 두 달째 머물며 섬 청년으로 변했다. 틈나는 대로 바다낚시를 즐기며 즉석에서 생선회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나이 든 해녀들과 수다도 곧잘 떤다. <국화꽃향기>, <질투는 나의 힘>, <살인의 추억> 등에서 보여준 깨끗한 마스크와 탄탄한 연기력으로 이제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인 그가 이처럼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곳에서는 내년 봄 개봉 예정인 박흥식 감독의 <인어공주>(제작 나우필름)가 한창 촬영중이다. 지난 9월 중순 태풍 매미가 섬 주변 바다를 온통 뒤집어놓고 가는 바람에 섬을 떠날 기약이 미뤄졌다. "시선을 두는 곳마다 정말 절경이에요. 마을 사람들도 무척 잘해주시고요. 다른 잡생각이 전혀 나지 않을 정도로 이곳에 푹 빠져 촬영기간이 길어진 게 고맙게 느껴질 때도 있더라구요. 나중에 나이가 더 들면 다시 와 한동안 살고 싶어요." "혹시 당신 이름 때문에 이곳에 태풍이 찾아와 해일(海溢)이 일어난 것 아니냐"고 묻자 "제 이름 한자는 한 일(一)자예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마세요"라며 손사래를 친다. 전도연이 1인2역을 맡아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인어공주>는 20대 여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통해 20여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부모의 사랑 이야기를 체험한다는 줄거리의 판타지 멜로물. 박해일은 섬 마을 우체부(집배원)인 아버지의 젊은 시절 모습으로 등장해 해녀 연순과 사랑을 나눈다. "마을이 손바닥만하다보니 편지나 소포, 그리고 전보를 전할 일이 그리 많지 않지요. 그러니까 읍사무소(당시에는 우도가 구좌읍에 속한 연평리였으나 86년 우도면으로 독립했다)나 보건소에서 지급하는 쥐약과 회충약 등을 집집마다 배달하는 역할도 하지요. 머리 속에 떠올리시는 대로 착하고 순수한 청년이지요." 그의 상대역은 초특급 스타로 꼽히는 전도연(30). 신인급인 박해일로서는 버겁게 여길 만도 한데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는 마음뿐이다. "한번 꼭 함께 연기해보고 싶었고 보면 볼수록 진짜 배우라는 생각을 재확인하게 됐다"며 즐거워한다. "저도 부모님께 연애 시절이 궁금해 여쭤보니 잘 대답을 안하세요. 어머니는 아버지가 꼬셨다고 하시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매달려 할 수 없이 결혼했다고 하시더군요. 이 영화는 중년 관객에게는 추억을, 젊은 관객에게는 부모님의 연애 시절을 엿보는 재미를 줄 겁니다. 감독님의 의도도 이 세상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젊은 시절로 되돌려보내자는 것이지요." 박해일은 송강호, 설경구, 신하균 등 대학로 출신 충무로 스타의 계보를 이을 만한 재목으로 꼽힌다. 99년 <청춘예찬>으로 각종 연극상을 휩쓸면서 충무로의 뜨거운 `러브 콜'을 받았고 2001년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주인공 이얼의 고교시절을 연기하며 스크린 신고식을 치렀다. 신인치고는 작품 고르는 눈이 예사롭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비결을 물어봤더니 "특별히 작품성을 따진 것이 아니라 시나리오가 좋고 대중적인 작품을 선택했는데 분에 넘치게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아울러 받게 됐다"고 겸손하게 말한다. "멜로 전문배우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자 "대부분 사람들이 서로 사귀고 결혼해 아이를 낳으니 모두 멜로배우나 다름없지요"란 잠언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인디아나 존스 & 카우보이 비밥

<인디아나 존스> : 꼼꼼히 단장 화질과 사운드 ‘만족’ 매력적인 고고학자의 좌충우돌 모험담으로 1980년대를 휘어잡았던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가 드디어 디브이디 타이틀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것도 1장의 부록 디스크를 포함해 시리즈 세 편이 함께 들어 있는 트릴로지 박스 세트의 형태로 말이다. 이 타이틀을 접하는 순간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박스 케이스부터 메뉴 화면에 이르기까지 일관성과 안정성을 보여주는 디자인이다. 그러나 81년도라는 1편의 개봉연도를 고려했을 때 제대로 리마스터링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화질과, ‘티에이치엑스’ 인증 시스템을 적용한 사운드가 주는 만족감과는 비교가 어렵다. 특히 최신 액션영화의 박진감 넘치는 사운드와는 다소 거리가 있으나 각종 벌레 소리에서부터 비행기의 굉음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정리된 사운드는 기대 이상이다. 부록 디스크에 담긴 방대한 양의 인터뷰들의 경우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의 포만감을 안겨주는 것이 특징이다.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와 제작자 조지 루커스가 풀어내는 엄청난 뒷이야기들은, 인터뷰조차 훌륭한 엔터테인먼트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지 루커스가 기르던 털북숭이 애완견의 이름을 따 주인공의 이름을 ‘인디아나’로 짓고, ‘스미스’라는 성으로는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스필버그가 버티는 바람에 ‘존스’로 바꿨다는 등의 이야기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카우보이 비밥> : 인기 TV시리즈의 성공한 극장판 한편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만큼이나 매력적인 모험담을 미래를 배경으로 엮어내 많은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카우보이 비밥〉 시리즈 극장판도 디브이디 타이틀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우보이 비밥〉 극장판은, 극영화를 보는 듯한 사실적인 묘사와 쿨하면서도 끈끈한 정을 나누는 캐릭터들 간의 관계 그리고 적재적소에 사용되는 배경음악 등으로 이른바 ‘비밥’ 마니아들을 만들어낸 텔레비전 시리즈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내용상으로는 텔레비전 시리즈 중 한 에피소드가 선정되어 극장판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관련 부록의 첫머리에서 감독이 밝혔듯이 ‘텔레비전 시리즈물에 익숙한 기존 팬과 처음 비밥을 접하는 극장용 관객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이 이 애니메이션의 성패 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소였는데, 다행히 아주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본편과 함께 각 캐릭터의 성격과 취향을 창조해내는 과정에서 제작진들이 만들어낸 다양한 기초자료들을 만날 수 있는 ‘작은 화면에서 큰 스크린으로’ 꼭지와 감독의 유명한 음악 선곡 능력이 뛰어난 애니메이션과 어우러져 빛을 발하는 ‘뮤직 비디오’ 꼭지 등이 담긴 부록도 상당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 이 타이틀의 매력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디브이디의 한글자막이 원작 텔레비전 시리즈물이 가지고 있던 캐릭터들의 매력을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건방지기까지 한 현상금 사냥꾼인 주인공이 존칭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상당한 어색함이 느껴진다. 김소연/디브이디 칼럼니스트 The Adventure Of Indiana Jones-The Complete DVD Movie Collection | 1981, 1984, 1989 | 감독-스티븐 스필버그 | 화면-아나모픽 2.35:1 | 오디오-돌비디지털 2.0, 5.1(THX) | 지역코드-3 | 출시사-파라마운트 Cowboy Bebop : The Movie-Knockin’ On Heaven’s Door| 2001 | 감독-와타나베 신이치로 | 화면-아나모픽 1.85:1 | 오디오-돌비디지털 5.1 | 지역코드-3 | 출시사-콜럼비아 ▶▶▶ [구매하기] ▶▶▶ [구매하기]

한국영화 전문배급사 청어람 대표 최용배

올해 배급시장에서 청어람의 약진은 눈부시다. 이건 공치사도 사탕발림도 아니다. 수치가 말해준다. 영화진흥위원회가 9월까지 흥행 통계를 바탕으로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청어람은 <싱글즈>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등의 삼두마차를 앞세워 시네마서비스, CJ에 이은 ‘넘버3’의 자리를 차지했다. 살림을 차린 지 겨우 2년. 게다가 한국영화만을 배급하는 이 조그만 배급사가 할리우드 직배사를 포함하여 덩치 큰 배급사들을 제친 저력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죽어도 좋아>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선택> <여섯개의 시선> 등 작은 한국영화까지 도맡아 배급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지난 9월 플레너스(주)시네마서비스의 품에서 독립한 청어람의 최용배 대표를 만나 물었다. <선택>에 이어 <여섯개의 시선>도 배급을 맡았는데, 스크린을 따내는 것부터 힘든 영화들 아닌가? 결정의 이유가 궁금하다. 영화가 좋다. <선택>은 세번 보면서 세번 다 울었다. 가족들과의 면회 시퀀스에서는 특히. 되게 가슴에 와닿더라. 홍기선 감독이 오랫동안 어렵게 만드신 영화인데 극장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으로 묻히면 되나. 내 능력으로 만들어드릴 수 있다면 보람있겠다 싶었다. 큰 한국영화들 사이에 있는 작은 영화들도 조화롭게 잘 배급해야 한다는 게 우리 방향이기도 하고. <여섯개의 시선>의 경우,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해서 여섯명의 감독들이 최 대표가 아니었다면, 이라고 치사를 돌리던데. 쟁쟁한 감독들 아닌가. 그런 감독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를 내가 배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 ‘한국영화’ 전문배급사라는 타이틀에 잘 부합하는 선택이라고 본다. 제작을 겸하고 있는데. 혹시 추후 감독 섭외를 위한 사전 투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 계산은 해본 적 없는데. 물론 그런 계기나 기회가 될 수 있다면 너무 행복하겠지만. 사실 <여섯개의 시선>은 <씨네21> 기획기사를 보고서 알게 됐는데. 거기 실린 국가인권위원회 남규선 과장의 기획 배경을 보고 감동받았다. 인권을 주제로 한 영화가 만들어진다면 남들 나라에서 받고만 살았던 우리도 돌려줄 수 있겠구나. 한국의 문화 상황과는 언밸런스하긴 하지만, 어쨌든 세계 많은 인권단체들에 격려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멋있고 뜻깊어 보였다. 그때부터 영화를 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언젠가 정재은 감독한테서 이 영화의 P&A 비용이 없어서 개봉에 어려움이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서 우리가 비용을 대겠다고 한 거다. <여섯개의 시선>은 대중적 반응을 고려해서 여섯 감독들의 에피소드를 배치하는 데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임순례 감독의 <그녀의 무게>를 제일 앞으로 옮겨왔다. 관객이 혹시 인권영화라고 해서 지레 재미없을 것이라는 오해를 할까봐 미리 안심시켜주는 게 필요하다고 봤다. 임 감독은 앞으로 코미디 시나리오 많이 받으실 거 같다. (웃음)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감동을 가지고 갈 수 있게 마지막에 놨고. 그리고나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정재은 감독의 <그 남자의 사정>, 상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여균동 감독의 <대륙횡단>, 일종의 공포버전이라고 할 만한 <신비한 영어나라>, 가장 화려한 배우들이 나와서 가장 편안한 박광수 감독의 <얼굴값> 등을 중간에 배치했다. 감독들의 각기 다른 스타일이 묻어나고 장르 또한 다양하고 에피소드마다 나름의 고소한 재미가 있다. <선택> <여섯개의 시선>의 배급은 올 여름 <싱글즈> <장화, 홍련> <바람난 가족> 등의 성공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게 가능하게 해준 측면이 있다. 큰 영화들을 배급하고 나면 잉여배급력 같은 게 생긴다. 그것을 여타 한국영화들이 개봉할 수 있도록 환원하고 싶었다. 극장 관계자들 입장에선 이런 영화들을 가지고 가면 경기를 일으킬 수 있다. (웃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데는 두 영화가 지닌 재미와 감동뿐만 아니라 앞의 영화들의 힘이 도움이 됐다. <선택> 이후에 극장쪽에서도 먼저 같이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어서 <여섯개의 시선>은 출발이 좋다. 하고 싶었던 영화를 풀 수 있는 현실적 조건들이 마련되어서 다행이다. <여섯개의 시선>의 개봉 규모는 얼마나 되나. 일단 30개는 기본으로 간다. 대중성이 있지만, 비교적이다. 절대적 기준으로 봤을 때 극장에서 사전에 확신을 갖기란 쉽지 않겠지. 관건은 마케팅인 듯하다. 재미에 더해서 건강하고 유익한 교육용 영화로 포장할 참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관변영화나 선전영화로 오인받으면 큰일이다. 11월7일에 국가인권위원장이 호스트로 주최하는 VIP시사를 비롯해서 몇 가지 시사회 아이템을 마련해놨다. 벌써 어떤 정부부처에서는 개봉날 단체관람을 하겠다는 곳도 있고. 올해 <죽어도 좋아> <동승> 등의 영화들도 배급했다. 배급사로서 일정한 물량확보 측면도 있겠지만, 와이드 릴리즈가 일반화된 현 배급시장 아래서 작은 영화들도 배급전략만 잘 세우면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판단 아래서 계속 욕심을 내는 것 같은데. <묻지마 패밀리> 때 업계 사람들이 별게 다 되네, 하는 분위기였다. 절대적 수치로 본다면 지금이야 기억나지 않는 영화겠지만 첫주에 박스오피스 1위를 하는 걸 보면서 일단 한번 해보자고 덤볐던 나도 놀랐다. 처음에 동숭아트센터 1관, 씨티극장의 시사회용 스크린으로 시작해서 조금씩 늘려갔는데, 얼마 지나니까 큰 극장에서도 왜 우리한테는 안 물어봐 그러더라. 전국 100개관까지 자가발전하는 걸 쭉 지켜보면서 느낀 게 많다. 배급이라는 게 안 될 영화를 되게끔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영화 자체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고 증폭시킬 순 있다. 그걸 보는 게 즐거웠다. <죽어도 좋아> <동승> 등은 흥행성적이 만족스럽진 않았을 텐데. <죽어도 좋아>는 일반공개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었던 작품이다. 스코어도 이 영화의 규모를 보면 나쁘지 않다. 저예산 비주류영화들의 제작비와 스코어를 훑어보면 알 것이다. <동승>은 마케팅의 힘이 상당했다고 생각한다. 주경중 감독과 홍보사쪽에서 개런티 대신 인센티브를 받겠다, 대신 배급사가 이 정도 스크린 규모는 보장해달라고 했는데 그때만 하더라도 주위에서는 다들 <동승>이 무슨 영화인 줄도 몰랐다. 감독과 마케터와 배급사가 확신을 갖고 밀어붙인 경우인데, 과정이나 결과나 모두 만족스럽다. 회사의 규모에 비해서 인적 네트워크 확보가 탄탄한 느낌이 있다. 기동성도 돋보이고. 돈이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린다. (웃음) 개인적으로 돈 모아서 뭘 한다라는 건 순서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돈을 모을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게 먼저 아닌가. 자금은 조금씩 늘려가면 자연스럽게 커진다고 본다. 기동성이라고 했는데 그건 내 생각엔 강우석 감독한테서 배운 것 같다. 할 것은 빨리 서둘러서 하고 안 할거면 빨리 접고. 하려고 맘 먹으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다가도 안 되면 운이 아닌가보다, 라고 빨리 딴 걸로 돌리는 것들. 최근 청어람의 지분 구성에 변화가 있었는데. 플레너스가 소유했던 지분 50%를 내가 인수했다. 그래서 내가 (가진 지분이) 60%가 됐고, 무한투자가 가지고 있었던 40%를 일단 아이픽처스가 인수를 해서 거기가 40%다. 시네마서비스 자매회사로 시작했는데, 이젠 청어람 2기가 시작된 셈이다. 시네마서비스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고 보긴 어렵지만, 자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오를 한다. 새로운 파트너들과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는 점도 있고. 양쪽 모두 변화의 필요성을 느낀 결과인가. 사업구조 중복이라는 게 계열분리의 공식적인 사유다. 플레너스쪽에서는 청어람에 자금을 대줘야 하는 상황도 올 수 있는데, 사업부문이 중복되는 회사를 동시에 끌고 가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 전에는 시네마서비스가 배급하는 영화가 너무 많아서 넘치는 영화를 우리가 배급했는데, 그동안 시네마서비스의 배급력은 더욱 커졌고. 또 투자를 하면 배급도 하는 패턴이 있는데, 플레너스(주) 시네마서비스가 투자를 하고 우리가 배급하는 건 특별한 케이스가 돼버리니까. 특별한 일은 자주 일어나면 좋지 않은 것 아닌가. 청어람의 적정 라인업을 연간 7편 정도로 얘기했었는데. 올해는 이미 넘치지 않았나. 많이 얘기했다가 못 맞추면 불성실하게 일을 했거나(웃음) 거짓말하는 사람처럼 보일까봐 내가 자신있는 숫자를 얘기한 것이다. 7편이라는 숫자는 아마 그 시점에 이미 확보가 된 작품들 개수일 거다. 연간 12편 정도가 딱 맞다고 생각한다. 자체 제작은 3편까지 하고 싶은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효자동 이발사>를 직접 제작하면서 뭔가 달라진 게 있을 텐데. 제작자를 겸하면서 생활 패턴도 달라졌을 것이고. 할 일이 많아졌으니까. 지금 30% 정도 찍었는데, 제작하면서 술을 끊다시피 했다. 최근 4개월 동안 나랑 술 제대로 마셔본 사람은 없을걸. 밤 늦게까지 회의도 해야 하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야 하고. 뭐든 처음하면 능숙하진 못하니까. 경험했던 거라면 빠르고 현명한 판단이 뒤따를 텐데. 뭣보다 가장 힘든 건 제작과 관련된 모든 의사결정을 내가 책임지고 해야 한다는 데서 오는 긴장감과 중압감인 것 같다. 평소 하고 싶던 일이라 마음만은 즐거울 텐데. 제작자가 되는 게 꿈이었고 옆에서 많이 부러워했는데. 막상 되고 나니까 여러 편 만드는 제작자가 되고 싶다. (웃음) 추후 라인업이 어떻게 되나. <아빠하고 나하고> <가능한 변화들>이 연내에 잡혀 있고. 내년 라인업 중 확정된 건 <고독이 몸부림칠 때> <마지막 늑대> <효자동 이발사> <거미숲> <바람의 파이터> 등이다. 봉준호 감독 작품이 2004년 8월쯤 들어갈 것 같고. 박종원, 김태용·민규동, 그리고 몇몇 신인감독들의 작품도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올해까지 채우면 영화쪽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되는데. 한국영화의 빠른 변화를 몸으로 느낀 적이 있다면. 시네마서비스에서 처음 한국영화를 배급할 때는 어려움이 컸다. 외화 위주의 시장에서 한국영화를 배급하려고 악도 많이 질러댔는데, 성질도 많이 버렸다. 홧병이 도져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시네마서비스 5년 중 앞의 2년 반이 그랬다면, 그 이후에는 하루도 시네마서비스의 영화가 극장에 안 걸려 있는 적이 없는 시기였다. 우리가 배급날짜를 정하면 그 날짜 중심으로 다른 영화의 배급날짜가 정해졌고. 시장점유율에서 직배사들을 다 제쳤고. 엄청난 반전이었다. 과거엔 나보고 배급을 왜 하느냐, 별볼일 없는 한직 아니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는데 인식 자체가 많이 바뀌었다. 그때는 나도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다. 나중에 프로듀서를 할 건데, 배급 경력이 혹시 누가 되지 않을까 싶어서. 심지어 크레딧에서 내 이름을 빼달라고 했고, 명함에도 제작·배급 최용배라고 새길 정도였다. 그런데 그 동안에 영상원에도 배급 관련 과목이 2개나 생겼고, 배급팀 직원을 뽑는 데도 경쟁률이 몇백 대 일씩 되더라. 중국 베이징에 새 오피스를 개설했다고 들었는데. 개발 중인 프로젝트 중 중국쪽과 결합해야 하는 작품이 있나. 아니다. 장기적으로 보고 하는 거다. 현재는 한 국내 메이저 회사의 영화들의 개봉, 비디오 판권 등에 대한 컨설팅 업무를 하면서 중국에서 제작하려면 어떤 모델이 합리적인가를 연구하고 있다. 중국쪽은 WTO 개방과 함께 영화쪽도 순차적인 개방 계획들을 갖고 있으니까. 그쪽 일은 유영호 중국사업팀장이 맡고 있는데 전에 삼성영상사업단에서도 중국쪽 영화비즈니스를 맡았던 유능한 인물이다.

빈틈에서 많은 것들이 보여요,<여섯개의 시선>의 지진희

지진희는 길고도 추운 하루를 보내고 찾아왔다. 새벽 5시30분에 일어났다는 그는 서울보다도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을 의정부에서 열네 시간 넘게 <대장금>을 찍었다고 했다. 걱정이 됐다. 너무 피곤하진 않을까, 차가운 캔커피를 마다하진 않을까, 벌써 한밤인데 서둘러 가버리는 건 아닐까. 그러나 쓸데없는 소모였다. 지진희는 “너무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다 먹을 수 있어요”라면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커피와 함께 식어버린 샌드위치 한 조각마저 깨끗하게 먹어주었다. 두번 끓인 음식을 싫어하면서도 앞에 있는 건 맛있게 먹는다는 남자. 분명하지만 인간적인 그 습성이 배우 지진희를 만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는 곡절 많았던 첫 번째 영화 를 찍으면서 “말수가 적고 애늙은이처럼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조승우의 마음을 열어놓았고, 촬영이 끊어진 틈을 타서 염정아에게 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스스로 연기를 못했다고 말하는 그 무렵의 지진희는 그런 식으로 의 세 기둥 사이에 긴장어린 깊은 느낌을 끌어들였을지 모르는 일이다. 연기만으로는 채울 수 없을 그런 느낌을. 스물여덟, 아홉 무렵에야 연기를 시작한 지진희는 연기하는 방법을 정식으로 배워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디션 때문에 만난 박광수 감독과 황인뢰 PD는 그가 느낌이 좋은 배우라는 사실을 믿어주었지만, 언제까지고 이미지만으로 버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차례 시도했던 영화 출연이 무산된 것도 부족한 연기력 탓이었다. 그러나 지금 지진희는 드물게 선이 굵은 외모를 이용할 줄 알 뿐만 아니라 미묘하게 변해가는 감정도 드러낼 줄 아는 배우가 됐다. “가르치면 누가 못하겠느냐”는 것이 그의 설명이지만, 뭔가가 더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부족한 무언가는 그의 두 번째 영화 <여섯개의 시선>을 이야기하면서 채워지기 시작했다. <여섯개의 시선>은 여섯명의 감독이 인권을 테마로 각자 단편영화 하나씩을 연출한 옴니버스영화다. 지진희는 그중에서 박광수 감독이 만든 <얼굴값>에 출연했다. 영안실에서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운 남자는 자동차를 몰고 나가다가 예쁜 주차장 관리직원에게 치근덕거린다. 매몰차게 거절당한 그는 ‘얼굴값’ 운운하면서 심한 말을 내뱉다가 이 공간이 뭔가 음울하고 섬뜩한 기운으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짧은 영화, 평범한 캐릭터. 지진희는 운전석에만 앉은 채 굴곡을 타야 하는 이 이름없는 남자를 꼼꼼하게 분석했다. “웬만하면 음주운전을 하거나 대리운전을 부를 텐데, 뭔가 독특한 구석이 있구나 했어요. 이 남자가 차에서 잠을 깨자마자 거울을 보고 머리를 매만지거든요? 외모에 상당히 신경쓰는 사람이라는 거지. 이 남자는 아마 한번도 여자한테 숙이고 들어간 적이 없을 거예요. 그런데 말이죠….” 길고도 세밀한 주석이 이어졌다. 그 말을 듣다보면 빽빽하게 메모가 들어찬 시나리오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분석하는 그의 습관은 외부에만 적용되진 않는다. 지진희는 그 자신을 들여다볼 때도 냉정하고 가차없다. “항상 분석하니까 내 단점이 뭔지 너무 잘 알아요. 하지만 아는 것과 고치는 것은 다르잖아요. 정신적으로 힘들 때가 많아요.” 그러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아주 조금씩만 바꾸는 포즈와 달리 여러 가지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한번씩 웃는 얼굴도 모두 달랐다. 그는 분석하는 배우지만, 본능적인 감각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 배우이기도 한 것이다. 말보다는 공기를 타고 오는 느낌을 믿는. 지진희가 대사 적은 짐 자무시의 영화를 좋아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아직도 짐 자무시 좋아하세요?”라는 무심한 질문에도 그는 눈을, 정말로, 반짝 빛내면서 또다시 끝나지 않을 추억을 늘어놓았다. 그는 <천국보다 낯선>을 공짜표가 생겨서 우연히 보았다. “일단은 구도가 너무 완벽했어요. 그런데 대사가 정말 없더라고요. 한마디 하고 또 한참 있다가 한마디 하는데, 그 사이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떠오르는 거예요. 그렇게 많은 걸 느낄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뻤어요.” 눈을 감고 헬기 소리만 들으면서 <지옥의 묵시록>에 빠져들었던 중학생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리 많이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진희는 그런 자신이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어요. 보기만 해도 숱한 느낌이 있는데, 다들 들리는 말에만 신경을 쓰고 사니까 그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러나 모두가 잃어버렸다면, 홀로 간직한 그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지진희가 “십년 뒤에는 나아지겠지”라고 느긋하게 마음먹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한순간의 물결에서도 자잘한 물방울을 감지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걸 버리고 조급하게 앞으로 나아갈 이유가 없을 테니 말이다. 이제 서른을 넘긴 그는 그런 사람이다. 서두르지 않고, 자신이 지금 가장 행복하다고 믿는다. 너무 활짝 웃으면 주름이 보인다는 사진기자의 충고에, 지진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마저 웃었다. “주름이 좀 보이면 어때”라면서. 그는 주름이 보여도 괜찮을 것 같다. 많은 걸 품은 사람은 세월의 흔적으로 주름말고도 많은 걸 내보일 줄 알 것이다.

˝ 저를 초난강이라고 불러주세요 ˝ <환생>의 구사나기 쓰요시

구사나기 쓰요시. 국내에 ‘초난강’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지난해 7월 한국어로 발매된 싱글 앨범 <정말 사랑해요>의 홍보차 내한해서 이렇게 말했다. “저를 초난강이라고 불러주세요. 초난강은 제 이름의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발음입니다.” 성은 초난씨요, 이름은 강. 이 자체도 그렇거니와 앨범 재킷을 두른 구사나기의 얼굴이 아주 코믹스럽다. 발간 뺨에 예쁘장한 미소를 얹고 꽃들에 둘러싸여 행복해 하는 모습. 만화 캐릭터 같기도 한 이 사진과 그의 이름 석자가 합쳐진 이 귀여운 앨범은 구사나기 쓰요시가 자신을 한국에 소개하는 직접적인 첫인사였다. 일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일본에서 전설적인 인기를 누려온 그룹 SMAP을 모를 리 없다. 아이돌 그룹으로선 드물게 10여년 동안 대중적인 지지를 잃지 않고 있는 이 그룹은 멤버들 각각의 개별 활동도 활발하다. 구사나기 쓰요시 역시 일본에서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일본 드라마와 영화에도 출연했다. 그런 그에게 영화 <환생>은 첫 주연작이다. 연기자로서의 활동폭이 그다지 넓지 않았던 그이지만 처음 주연을 맡았다는 것에 대한 소감은 소박하다. “대본을 펼쳤을 때 내 이름이 가장 앞에 나와서 정말 주연이라는 걸 실감했다. 대본을 펼칠 때마다 기분이 좋아서 빙긋빙긋 웃었다.” 구사나기가 연기한 관공서 직원 헤이타는 이성적이고 차분한 성격의 인물. 그러나 환생한 사람을 목격했다고 또는 본인이 환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사하면서 그는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이 현상에 조금씩 다가간다. 첫 주연작인 만큼 연기에 욕심을 내고 싶었던 구사나기는 후생성에 나가 헤이타와 비슷한 직책과 나이를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결론적으로 “그들도 보통 28살의 남자들이더라”는 것과 “자연스러운 연기”만이 해답으로 남았지만 그래도 그는 인물에 대한 호기심을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감독은 헤이타에 대해서 영화에 그려지지 않은 일상생활의 작은 부분까지 잘 알고 있었다. 나도 거기에 부응해서 헤이타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촬영 틈틈이 ‘헤이타 강론’을 하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다지 인정을 안 해줬다.” (웃음) 정갈한 양복이 잘 어울리는 배우들은 많기 때문에 영화 <환생>만으로는 구사나기에게 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정말 사랑해요>의 앨범 재킷이 준 강렬한 인상만 간직할 이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그건 모두 구사나기 쓰요시의 얼굴이다. 싱글 앨범의 독특한 컨셉 때문에 한국에는 자신을 코미디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구사나기는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초난강’은 내가 가진 어떤 한면을 부각시킨 것뿐이다. 나는 내가 새롭게 창조한 이 캐릭터가 재미있고 또 맘에 든다. 한국의 팬들도 나의 다양한 면들을 봐주었으면 좋겠다.” 구사나시 쓰요시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각별하다. 현재 <후지TV>에서 <초난강>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는 이 쇼에서 한국어로 말하고 일본어를 자막에 깐다. 영화 <쉬리>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한국어 발음이 몹시 예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독학으로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한국을 자주 방문했던 구사나기는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 신촌 거리를 특히 좋아한다. 주로 북적거린 데만 다녀서 그런지 그는 한국을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인천공항에서 서울 도심으로 들어서는 평온한 거리를 빼놓지 않는다. “그런 대조적인 느낌이 좋다. 한국은 정열적인 면과 온화한 면을 모두 가졌다는 점에서 마음이 많이 끌린다.” 구사나기의 이 커다란 애정을 모두 믿어줘야 할지도 난감하지만 그는 우리의 당황스러움조차 개의치 않는 것 같다. 한국에 대한 사랑을 순수하게 밀어붙여 이제는 아예 한국어로 제작되는 일본영화 <호텔 비너스>에 주연으로 출연 중인 구사나기. 나이를 빗나간 코믹한 컨셉에 스스로 즐거워하면서도, 영화 속에선 바람에 흩어진 머리칼이 신경쓰이는지 꼭 넷째손가락 하나로 곱게 빗어넘기고, 한국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해 토크쇼에 영화까지 열심히 애정을 실천 중인 일본의 톱스타. 어쩌면 헤이타의 귀여운 미소도 별로인 듯 느껴질는지 모르겠다. 호기심 많고 열정 넘치는 청년 구사나기 쓰요시의 이런 신기한 면들을 빼놓고 본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