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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삶의 무게를 조용히 내려놓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그때 난 박사 논문을 쓴답시고 허덕대고 있었다. 한편의 논문에 그 무엇인가를 걸고 어느어느 대학교수가 될 수 있다는 기대에 내 인생을 팔려고 하고 있었다.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가빠하면서도 아이 키우는 것과 시집살이하는 것과 공부하는 것이 모두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나를 단련시키고 강화해주는 예방주사와 같은 것이라고 위안하며 살았다. 그러다 그 영화를 만난 것은 어느 청명한 가을날 오랜만에 호젓하게 슬그머니 찾아간 한적한 영화관 스크린에서였다. 그 즈음 나는 안팎으로 밀려오는 분주함을 혼자서 잠깐씩 해소하는 방법으로 영화관을 찾는 것이 낙이었다. 그날도 작은 아이를 놀이방에 맡기고 집 앞의 번화가에서 커피를 한잔 하고서 영화관으로 들어섰던 것 같다. 사실은 아무 기대도 없었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서는 내 몸 전체가 숨은 듯 착각을 하듯이 그 숨가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상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심지어 내가 사는 목표라고 정해놓은 것까지 나를 괴롭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길을 꾸역꾸역 가고 있는 내가 구역질날 때마다 커다란 영화관 스크린 속으로 밀어넣어서 흔적도 없이 소멸시키고 싶었는지도. 그곳에서 난 친구를 찾아가는 아마드를 만났다.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는 교실, 혼나는 아이, 그리고 잘못 가져온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려고 애쓰는 그 아이를 만났다. 숙제를 하다 말고 바람에 휘날리는 빨랫감들을 바라보다가 친구를 떠올리고는 이웃 마을의 친구가 사는 곳을 찾아가는 아마드는 낯선 마을의 꼬불꼬불 골목길을 해가 질 때까지 헤맸지만 끝끝내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어두운 밤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은 무슨 일이 있었는가? 선생님에게 혼나게 될 친구를 안쓰러워 하는 아마드와 숙제를 하지 못한 친구가 있었고 그 사건은 아무리 크게 확대돼봐야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잠깐 매를 맞든지 야단을 듣든지 하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영화에서의 그 담담한 일상의 사건 속에서 무엇인가 가슴속에 잔잔하게 차오르는 것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아이의 눈동자였다. 슬프게도 난 아이가 가지고 있는 순진함과 진지함과 티없는 걱정거리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거창하게 추상적인 개념들을 나열하면서 인생과 학문의 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는 양 가장해야 했고 그렇게 가장된 중요한 문제들 뒤로 잔잔한 걱정거리들은 언제나 앞으로 나가려는 나의 발목을 잡는 방해꾼들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마드가 친구를 찾아 올라가는 언덕길의 상형이었다. 그 언덕의 꼭대기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이쪽에서 보면 올라가는 길은 그리로 향해 있었다. 그런데 아마드가 그 길을 따라 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서 난 갑자기 시간이 멈추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멍해졌다.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인생 전체가 마치 장면의 한 컷처럼 내게 덮쳐왔기 때문이었다. 그 길은 언덕 아래에서부터 꼭대기의 나무까지 지그재그로 난 비탈길이었다. 난 그때 이미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았지만 솔직히 말한다면 난 그 방법을 몰랐다. 젖을 먹일 때와 죽을 먹일 때와 밥을 먹일 때의 구분이라든지, 똥오줌을 가릴 때는 어떻게 해주어야 하는지, 특히 아이가 아프면 가장 당황스럽게도 밤낮을 노심초사해야 했다. 그저 어두운 밤, 깊은 숲속을 더듬거리며 한 발자국씩, 때로는 헛디디지만 때로는 모르는 자신감에 마구 달려보기도 하고 그러다 다시 무서워져서 옴짝달싹도 못하다가를 반복하면서 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박사 논문’이라는 가상의 목표가 나를 짓누르면 아이들을 키우는 것 자체가 커다란 부담이 되어서 덮쳐왔다. 나는 솔직히 그러는 내가 무서웠다. 그때 영화의 그 장면은 바로 어두운 산을 올라가는 내 주위로 갑자기 조명탄이 터지면서 난 어디쯤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영화는 일상의 걱정거리들을 제대로 느끼고 감상하고 살지도 못하는 내가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무지했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마치 어둔 밤길에는 이 길로만 똑바로 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환한 낮이 되면 목표점과는 상당히 거리나 각도가 빗나간 채로 가고 있는 나를 알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게 깊은 통찰을 주었던 것은 선명하다고 생각했던 목표조차 하나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마드의 눈동자와 산비탈길이 내게 보여주었다는 점이었다. 지금은 비록 어디를 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여기에서 생기는 문제가 나를 일으켜서 어디론가 향하게 하고 그것을 따라가다 보면 또 다른 방향의 무엇인가의 사건이 나를 달려가게 하리라는 것을. 잡다한 걱정 뒤로 사건들은 이어질 것이고 난 아마드처럼 순수하고 인정스럽게 그것들에 대처할 능력을 점차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길은 지그재그였고 아마드의 눈동자는 가을 하늘처럼 맑게 비어 있었다. 조명탄이 터진 듯이 분명하게 보였던 총체적인 언덕 사진에서 꼭대기에 있었던 나무 한 그루는 사실은 궁극적인 목적지가 아니었다. 언덕 너머로 또다시 그런 꼬부랑길이 있을 것이고 그 길들은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이니까. 그것은 그저 우리가 환상하고 상정한 숨가쁜 인생의 목표들이었다. 조명탄이 터지는 듯한 섬광으로 인생을 조명하는 것은 영화를 보러 들어와 앉은 나를 벗어나는 때에만 가능한 것이었고 난 그저 어두운 밤길을 묵묵히 걷거나 달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삶의 무게를 조용히 내려놓을 수가 있었다. 내가 가장한 가상적인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왜 내게 그토록 무거운 짐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어차피 삶은 그 본래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아마드와 같은 그 순수한 걱정만으로도 혹시 가장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꼬불꼬불 언덕길이 언덕 너머 또 언덕 너머로 이어지듯이 일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질 텐데 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진 목표만을 염두에 둔 채 일상의 사건들을 따스하게 감싸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평상시라면 귀찮고 성가시다고 느끼던 저녁준비를 위해 기꺼이 반찬거리를 고민하면서 장을 보았다. 그리고 혼자 조용히 이렇게 생각하며 즐거웠다. 사는 것은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를 위해 맛있는 저녁밥을 짓는 것일 뿐이라고….

슬픔의 바오밥나무

어린 왕자의 소혹성 B612호의 면적은 11평 정도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11평의 아파트를 생각해도 좋고, 그 아파트의 바닥을 구체(具體)로 뭉친 형태를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말건 펴건, 어쨌거나 11평이란 공간은 그리 넓은 곳이 아니다. 아니, 90%의 사람들은 그곳을 좁다고 말한다. 5%의 사람들은 그런 평수가 있는지도 모르고, 나머지는 기권이다. 11평의 아파트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더욱 얘기는 쉬워진다. 공간은 빤하고, 무언가 엎질러지면 야단이 나고, 숨을 곳도 숨길 것도 그곳엔 없다는 사실을- 하루만 살아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대개 그곳에 사는 이는 알게 모르게 청빈하고, 부지런하고, 겸손하게 마련이다. 늘 장미를 돌보고 바오밥나무를 감시해야했던- 어린 왕자처럼. 나는 때로, 집의 면적이 인간의 겸손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면적과 겸손함이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면 곤란하다. 말해 무엇하지만, 91평에 사는 인간이라면- 죽어도 홈쇼핑의 라꾸라꾸 침대광고를 보며,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예컨대, 그러하단 얘기다. 라꾸라꾸 침대의 광고를 보며 오호, 하고 침을 흘리는 인간은- 불과 몇년 전까지 11평의 아파트에 살았던 나 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다. 91평이라면, 마치 장미를 키우듯 바오밥나무를 키울 수도 있는 거겠지. 지난 주말 나는 친구의 집들이에 참석했다. 그룹의 친구들 중 세 번째로 40평형대에 진입한 대기업 과장의 집들이였다. 축하해. 이미 40평형에 진입한 친구들도, 아직 40평형에 도달하지 못한 친구들도, 모두가 축하의 술을 한잔씩 주고받았다. 처음 왔을 땐 말이야, 애가 방에 있는데도 한참 찾아다녔지 뭐야. 마치 숨어 있기라도 한 듯, 모두가 모인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2년 만이지? 2년 만이네. 친구는, 지난주 회사에서 실시하는 ‘혁신학교’란 곳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곳에서 회사의 슬로건인 ‘1등 합시다’를 외치다가- 목소리가 작다는 이유로 오리걸음을 걸었다고 한다. 하하하. 술잔을 넘기는 친구의 등 뒤에 선, 검고 푸르스름한 저 슬픔의 바오밥나무. 서른을 넘기면서 내 인생도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도달치 못한 평형에 선착한- 친구의 집들이에 질투가 일지 않았으며, 믿기 힘들게도- 부자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게 되었다. 좁은 집에서 살다보니 어린 왕자가 된 것이 아니라- 뭐랄까, 마치 지금의 삶이 군 시절의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나 지금 일병 3호봉이야. 나 이번에 상병 진급한 거 알지? 야 야, 병장 계급장은 그저 다는 줄 아냐? 너무나 낯익은- 그 측은한 비교와 부러움에 대해, 이제 나는 기권을 행사하기로 한다. 주특기가 다를 뿐- 우리는 모두 병장을 향해, 혹은 ‘준위’를 향해 달려가는 보병들이었다. 수고했다 친구여. 너도, 나도. 각자의 막사에서 다리를 뻗은,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의 서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지금 이 어른은 프랑스에서 살고 있는데 거기서 굶주리며 추위에 떨고 있다. 이 어른을 위로해주어야 한다. 이 모든 사정들도 부족하다면, 지금 이 어른이 되어 있는 예전의 어린아이에게 이 책을 바치고 싶다. 어른들도 처음엔 다 어린이였다(그러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들은 별로 없다).- 기억하긴 힘들겠지만, 아주 오래전 우리는 어린 왕자였다. 라꾸라꾸 침대 같은 걸 떠올려도 좋고, 아파트의 바닥을 구체로 뭉친 형태를 상상해도 좋을 것이다. 아니면 마치 소혹성 B612호와도 같았던, 어머니의 자궁은 어떠한가. 이 바오밥나무의 세계에서,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많은 위로를 받아야만 한다. 그대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본 적이 있는가. 별 아래에 선 우리는, 모두가 불쌍한 사람들이다. 박민규/ 무규칙이종소설가

<살인의 추억> 영평상 주요부문 석권

올해 최고 흥행기록, 대종상 4개부문 석권, 산세바스티안 감독상 수상 등으로 관객 동원과 영화제 수상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살인의 추억>(제작 싸이더스)이 영화평론가들로부터도 최고로 뽑혔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주진숙)는 제23회 영평상 심사 결과 <살인의 추억>이 작품상, 감독상(봉준호), 남우주연상(송강호) 등 11개 부문 가운데 노른자 3개 부문을 휩쓸었다고 7일 발표했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미숙은 치열한 경합 끝에 배종옥(질투는 나의 힘)과 문소리(바람난 가족)를 누르고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베니스영화제 본선 진출에 빛나는 <바람난 가족>은 각본상(임상수)에 만족해야 했다.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차지한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은 신인감독상에 뽑혔으며 남녀 신인배우상은 <질투는 나의 힘>의 박해일과 <장화, 홍련>의 임수정에게 돌아갔다. 이밖에 촬영상에는 이모개(장화, 홍련), 음악상에는 이병우(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기술상(미술 부문)에는 장근영ㆍ김경희(지구를 지켜라)가 각각 선정됐다. `영평 회원 선정 2003년 베스트 10'에는 <살인의 추억>,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장화, 홍련>, <지구를 지켜라>, <바람난 가족>, <질투는 나의 힘> 등 부문별 수상작과 함께 <동승>(감독 주경중),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김기덕), (이수연), <황산벌>(이준익)이 포함됐다. 제23회 영평상 시상식은 13일 오후 7시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1층 하이퍼텍나다에서 열린다. (서울=연합뉴스)

자유주의자 조지 클루니 [1]

클루니, 네 멋대로 해라! 조지 클루니는 블록버스터와 조지 부시를 혐오한다. 기이한 일이다. 그는 할리우드 최고의 실력자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드라마로 스타덤에 올랐고, 몇편의 블록버스터에서 지구의 평화와 안녕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뛰었더랬다. 1천만달러의 개런티를 받아챙긴 적도 있고, 파파라치들의 입맛을 당기는 먹잇감이 된 지도 오래다. 누가 뭐래도 그는 지금 할리우드의 중심에 선 스타다. 그런데 그는 좀 별나다. 할리우드를 움직이는 것은 스튜디오고, 스튜디오를 움직이는 것이 블록버스터일진대, 그는 블록버스터와 절연선언을 해버렸다. 대중스타에겐 정치와 사회에 대한 발언이 금기시돼 있지만 그는 조지 부시의 하야운동에 버금가는 원색적인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현지언론은 반할리우드적인 조지 클루니의 최근 행보를 “자기를 먹여주고 키워준 주인의 손가락을 깨물어버리는” 배신행위로 간주한다. 이상한 것은 앙탈도 심하고 오지랖도 넓은 이 배우를, 보수적인 할리우드가 먼저 껴안았다는 사실이다. 2003년 ‘조지 클루니의 힘’을,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25위로, 미국판 <프리미어>는 29위로 가늠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녀들의 사랑, 그들의 대장 몇년 전만 해도 조지 클루니는 그냥 ‘섹시한 남자’였다. 그가 의 바람둥이 소아과 의사로 인기 몰이를 하던 무렵, 여자들은 팬레터를 빙자해 낯뜨거운 로맨스소설을 전했고, 남자들은 그에게 다가가 “당신 때문에 아내가 날 떠날 것 같다”고 쏘아붙이곤 했다. 클라크 게이블과 스펜서 트레이시를 추억하게 하는 그의 고전적인 기품과 남성적인 아름다움은, 낯설고도 익숙한 매혹이었다. 그러나 조지 클루니는 엇비슷한 역할을 되풀이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보여주던, 그때 그 배우들의 전철을 밟지는 않았다. 물론 그들처럼 조지 클루니도 당대 최고로 매혹적인 여배우들(니콜 키드먼, 제니퍼 로페즈, 줄리아 로버츠, 캐서린 제타 존스)을 파트너로 맞았다. 그러나 고독하고 터프한 바다 사나이(<퍼펙트 스톰>), 쿨한 도적단의 리더(<쓰리 킹즈> <오션스 일레븐>), 사랑에 빠진 속물 변호사(<참을 수 없는 사랑>)일 적에 그는 험프리 보가트 스타일의 터프가이에 더 가까워졌고, 남자들의 경계심을 해제시켰다. 유난히 강도와 절도 행각이 잦은 그의 분신들은 그나마도 인정(또는 사랑)에 이끌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런 ‘인간미’는 이 고전적인 미남이 머무는 곳이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했다. 조지 클루니는 액션과 멜로를 모두 소화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는 멜 깁슨, 해리슨 포드, 덴젤 워싱턴의 계보에도 속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없고 조지 클루니에게만 있는 미덕이 바로 비주류 감성이다. 그들이라면 문신투성이 몸으로 흡혈귀와 맞붙어 싸우지 않을 것이고(<황혼에서 새벽까지>), 불경한 애니메이션에 그것도 동성애 성향을 지닌 강아지 캐릭터에 목소리를 빌려주는 일(<사우스 파크>)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조지 클루니는 여자들의 연인이고, 남자들의 리더이면서, 비주류의 상징적 대변자로, 운신의 폭을 넓혀왔다. 그럼에도 조지 클루니를 ‘연기파 배우’라고 부르기는 여전히 망설여진다. “<심판>의 폴 뉴먼과 <나의 왼발>의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봤을 때 나는 결코 그런 연기를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조지 클루니는 자기에겐 배우가 지녀야 할 천부적인 재능이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 실토한 바 있다. 하지만 그는 결핍에 연연하지 않는다. 자신이 파는 것은 연기가 아니라 ‘자신감’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 마르지 않는 자신감의 원천은, 조지 클루니가 정통파에서 변칙 복서로 선회한 과정과도 맞물린다. 쇼비즈니스 가문 출신의 잡초 인생 성장 배경을 살펴보면,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조지 클루니를 키운 것은 5할이 무명 시절의 그늘이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지역방송인이었고, 어머니는 미인대회 입상자였다. 재즈가수 로즈마리 클루니가 그의 고모였고, 훗날 그에게 배우의 길을 열어준 사촌이 배우 미구엘 페레였다. 온 가족이 엔터테이너로 꾸려진 특수 환경 속에서 어린 조지는 냇 킹 콜을 흉내내면서 일찌감치 주목받고 사랑받는 법을 터득해갔다. 하지만 프로 야구선수의 꿈이 좌절된 뒤, 아버지의 강권에 따라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고모의 차를 대신 몰아주고, 숙녀화 외판원으로 일하면서도, ‘영화배우’가 되리라는 생각을 그는 해본 적이 없었다. ‘영화현장’의 실체를 접해보기 전까지는. 사촌 덕에 작은 영화에 단역을 따내긴 했지만, 조지 클루니의 화려한 족보도 할리우드 입성의 프리 패스가 돼주진 못했다. 첫 영화는 미완으로 남았고, 그가 참여한 드라마 파일럿 프로그램은 번번이 사장됐다. 그는 시시한 소프오페라와 <토마토 공격대> 속편 같은 영화로 20대를 소진했다. 이 시절 조지 클루니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브랫팩’ 대열에 끼지 못했고, <델마와 루이스>의 히치하이커 역을 엉덩이가 더 예쁜 브래드 피트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까지 그렇게 10년이 걸렸다. 조지 클루니가 집안 덕을 봤다거나 한 작품으로 벼락스타가 됐다는 건 오해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조지 클루니는 ‘핀업스타’에 불과했다. 조지 클루니가 소더버그를 만났을 때 로 스타덤에 오른 뒤, 그는 한동안 정해진 수순을 밟았다. 다정다감한 닥터 로스의 이미지를 차용한 로맨틱코미디 <어느 멋진 날>을 거쳐, 액션블록버스터 <배트맨 & 로빈>과 <피스메이커>에 연달아 출연했다. 개런티도 1천만달러대로 치솟았다. 그러나 그를 VIP로 모셔간 <배트맨 & 로빈>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그에게 “나쁜 시나리오는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치욕스런 교훈만을 남겨줬다. 그는 블록버스터의 경제학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이며, 수천만달러의 개런티가 어떻게 배우를 망가뜨리는지를 똑똑히 깨달았다. 그 즈음 스티븐 소더버그와의 만남은, 안개 속을 헤매던 조지 클루니의 시야를 틔워줬다. ‘감독’이 가장 중요하다는 깨달음. 자신은 무너질 수도 있다는 절박함. 1분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얼굴을 내밀기 위해 <씬 레드 라인>(테렌스 맬릭) 촬영장에 달려간 것이나, <쓰리 킹즈>(데이비드 O. 러셀)의 개런티 절반을 자진 반납한 사실이나, 시나리오도 읽지 않은 채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조엘 코엔)에 출연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감독의 작품에 출연했고, 그 작품들은 그를 담보로 제작이 성사됐다. 돈에 이어, 커리어도 그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지루했다고 할까. 영화의 제작 여부가 내 손에 달려 있었지만, 정작 나는 좋은 시나리오를 만나지 못했다. 할리우드가, 그 시스템이 좋은 시나리오를 죽이고 있었으니까. 나는 내가 보고 싶은 영화를 만들어내고 싶었다.” 영화에 대한 애정과 향수를 나누며 친구로 가까워진 소더버그를 부추겨, 조지 클루니는 아예 영화사 ‘섹션 에이트’를 차렸다. 그는 자신의 안목과 이름값을 믿었고, 그렇게 섹션 에이트의 지붕 아래서, <인썸니아> <파 프롬 헤븐> <웰컴 투 콜린우드>와 관객의 만남을 주선했다. 조지 클루니가 캐스팅 디렉터를 자청한 <오션스 일레븐>은 그의 친화력 덕에 모인 드림팀의 선전으로 눈부신 결과를 낳았다. 척 베리스의 소설을 각색한 찰리 카우프만의 시나리오 <컨페션>의 4년에 걸친 방황에 종지부를 찍어준 이도, 연출과 조연 출연을 자청한 조지 클루니였다.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그가 골라낸 작품들은 요령 부득의 작가주의를 지향하지도, 기존 대중영화의 소재와 화법을 반복하지도 않았다. 대중에게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 <쓰리 킹즈> <표적> 등 그의 분신들은 유난히 강도와 절도 행각이 잦다. 그나마도 인정에 이끌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모습은 조지 클루니를 더욱 ‘인간적’인 미남배우로 각인시켜주었다. 방탕하지 않은 자유주의자 지난해, 조지 클루니는 데뷔 이래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참을 수 없는 사랑>과 <솔라리스>에 출연하면서, <컨페션>의 연출과 출연을 겸하느라, 양말 갈아신을 짬조차 내지 못했다. “타락할 시간조차 없다는 건 참으로 지루한 일”이라고 그는 회상한다. 아직도 오랜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바비큐를 해먹고 야구 중계를 보는, 그런 소소한 일상을 즐기는 그다운 답변이다. 조지 클루니는 “여섯살 사내애처럼 자신의 유명세를 즐기는” 흔치 않은 스타지만, 동시에 자연인으로서의 사생활도 온전하게 사수할 줄 안다. 공인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도 없고, 내키지 않는 일을 공인이기 때문에 하는 법도 없다. 그는 자신의 우주에서 완벽하게 군림하는, 자유주의자다. 조지 클루니는 스타덤에 오른 직후, 자신의 사생활을 무단으로 침해한 연예 프로그램 <하드 카피>와 그 자매 프로그램인 <엔터테인먼트 투나잇>을 보이콧하면서 이를 이슈화했고, 동료들은 물론 대중으로부터도 뜨거운 호응을 얻어냈다. 올 베를린영화제에서는 <솔라리스>가 지루한 영화라고 깎아세운 기자에게 소심한 감독 대신 폭언을 퍼부어줬다. 무례하고 경솔한 언론을 그는 방관하지 않는다. 조지 부시를 비난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이라크 전쟁 반대를 목청껏 외치고, 대안적 리더로 민주당원 출신의 전 뉴욕주지사 마리오 쿠오모를 지지한 바 있다. 이런 정치적 발언은 ‘의식있는’ 또는 ‘지적인’ 배우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제스처가 아니다. 뭔가를 의도했다면, 그건 스타의 발언이라는 프리미엄이 얼마간 파장을 일으키리라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미국의 보편적이고 주류적인 가치를 체현하며, 목적 지향적인 행보를 보여온 톰 크루즈의 삶과 커리어, 그 정반대 지점에 이렇듯 조지 클루니가 있다. 둘 다 할리우드의 생리를 잘 알고 있지만, 가는 길은 달랐다. 조지 클루니는 ‘모범생’이 되는 대신 ‘잘 노는 아이’가 되는 쪽을 택했다. “나이가 들수록 난 자유로워지고 명쾌해진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은, 영화 안에서는 자신을 지우고 부수느라, 영화 밖에선 대중의 사랑을 좋은 영화로 환원하느라 분주한 그의 행보가 꽤나 흥미진진해 보인다. 클루니, 네 멋대로 해라.

<실미도> 210일간의 혹독한 촬영의 기억 [2]

아침·저녁은 파카, 낮에는 강렬한 햇살 “꿈을 꿨다. 우린 실미도에서 열심히 촬영을 하고 있는데 전쟁이 났다! 한국전쟁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우리는 우연히 부상당해 피해온 국군 한명에게 소식을 듣는다. 서울이 함락되었고, 부산 정도만 남아 있다고…. 어찌할 바 모르던 감독님은 최후의 최정예 부대원들이 바로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바로 우리 훈련병들이다! 북에서도 전혀 실체를 모르고 있던 <실미도> 배우 훈련병들!!! 감독님은 그들에게 실제 무기를 주고 북으로 북파를 시킨다. 김정일 목을 따오라고! 잠을 깼다. 헉… 개꿈이다. ….” - 연출부 제작일지 중 징그러운 지네와 ‘돈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무의도 숙소에서 빠져나와 물이 빠진 길을 걷거나, 보트를 타고 실미도에 도착하면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일단 실미도에 도착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변을 뛰었다. 8km가량 되는 실미도 앞 하나개 해변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다양하게 펼쳐진 천혜의 운동코스였다. 휴식시간이면 모두 모여 족구를 하고, 틈틈이 비닐하우스 내에 지어진 체력단련실에서 푸시업과 벤치프레스로 몸을 단련했다. “완전히 육군 체육부대인 거야. 군대야, 자발군대.”(설경구) 그도 그럴 것이 실미도에서 찍어내는 분량은 몸이 쉬이 견뎌내기 힘든 촬영이 대부분이었다. 촬영 전 액션스쿨에서 두달가량 몸을 단련하긴 했지만 아침저녁은 파카를 입어야 할 정도로 춥고, 낮에는 화상을 입을 만큼 강렬한 햇살이 쏟아지는 가운데 갯벌에서 뒹굴고, 물에 빠지고,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반복해야하는 실제 촬영에서는 연기를 떠나 ‘체력이 곧 국력’이었다. 설경구와 정재영이 벌이는 권투장면은 쑥쑥 빠지는 모래밭에서 거의 탈진상태에 이를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긴장감 때문인지 이런 무리에 가까운 촬영은 별다른 문제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어느덧 섬생활이 안정되어가고 석달 가까이 진행된 실미도에서의 촬영은 단조로운 일상 속에 지쳐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엔 육지에 한번 나오면 안 들어가고 싶더라고, 휴대폰 꺼놓은 적도 있어요.”(설경구) 섬에 들어오면 촬영이 있든 없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시간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소일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존재만으로도 중심이 잡히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안성기 역시 촬영을 제외한 시간엔 아이처럼 놀았다. 그는 스탭들에게 감자, 고구마 구워주면서 좋아하고, 조개껍질을 구해 바닷가에 던지는 단순한 놀이만으로도 1시간은 거뜬히 채우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소라라도 주워 올라치면 안성기는 부러운 듯이 말하곤 했다. “야, 좋겠다. 너 2시간짜리 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치던 훈련병 역의 변경수가 촬영 중간에 “악∼” 하고 소름끼치는 비명을 지른다. 글러브 속에 들어가 있던 지네가 그의 손가락을 문 것이다. 땅바닥을 구르는 그의 손가락이 파랗다. 상주하는 의사도 없고 지네에 대한 상식도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독이 퍼지지 말라고 손가락, 팔꿈치, 어깨를 묶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응급조치도 못하고 해변에서 무작정 배를 기다려야 했다. 무의도 보건소에서 큰 병원으로 옮겨진 그는 무사히 귀환했고 이 사건 이후 원래 ‘훈련병 14번’이었던 변경수는 ‘지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어이, ‘지네’ 니가 일루와 봐.” 조금 더 자주 카메라에 잡혔음은 물론이고, 평소 문제가 있었던 그의 허리는 지네독이 죽지 않을 만큼 퍼진 덕에 말끔히 나았다. 서서히 실미도의 광기에 젖어들고 “강우석 감독님은 콘티를 보다가 잘 안 풀리면 해변을 걷곤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꼭 똑같은 갈매기가 주변을 서성였다고 하신다. “그 놈 참… 내 고민을 아는지….” “왜? 잘 안 풀려?” “니가 뭘 안다고….저리 날아가 임마!” “콘티를 더 열심히 봐! 그럼 분명히 해답이 있을 거야.”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영화 파워1위야!” “난 갈매기 파워1위다!” “이 자식이!” - 연출부 일지 중 촬영 내내 강우석 감독은 쇼핑백에 지금까지 나온 각기 다른 버전의 시나리오를 한 가득 담아서 실미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해변에 도착하자마자 파라솔부터 펼치고 그 아래 앉아 한참을 시나리오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6월달이라도 저녁이 되면 추운데도 반바지, 반팔만 입고 정신없이 촬영장을 오가는 그에게 “안 춥냐?”고 물을라치면 “니네는 춥냐? 나는 덥다”며 또 어딘가로 분주히 발을 옮기곤 했다. “다른 때와 달리 언제나 불안불안해 하고, 배우들에게도 확인하고 또 하고, 말타 촬영이 끝나고도 마지막 엔딩까지 늘 긴장상태였던 것 같아요. 모두들 외롭지만 이번 촬영에서는 아마 감독님이 제일 외로웠던 것 같어.”(설경구) 아직 50년도 안 지난 실화를 다룬다는 부담감과 함께 한국 블록버스터가 또 망하면 안 된다는 중압감은 강우석 감독의 다리를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불안함은 모두 어느 정도 나누어지고 있었다. 인천 파라다이스호텔 앞에서 거의 초반 촬영을 할 때쯤 김성복 촬영감독은 설경구와 담배를 나눠 피우면서 “이번처럼 갑갑하고 암담한 영화는 처음이다”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설경구에게도 “긴가민가 어떻게 풀어야 하나”라고 하소연하곤 했다. 그러나 찍어가면서 모두의 얼굴에 자신감과 탄력이 붙어간다는 것을 느낀 것은 비단 설경구뿐만이 아니었다. “흔한 이야기지만 결국 한배를 탄 운명인 거예요. 살면 같이 살고, 죽으면 같이 죽는. 영웅이 하나만 나와도 안 되는 거고, 다 주인공이고 희생자니까.” 실미도의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면 질수록 스탭들은 조금씩 68년의 훈련병들처럼 날이 섰고 단련되어갔다. 서서히 그들도 실미도의 광기에 젖어들어간 것이다. “실미도 촬영이 한달 정도 지났을 때 모두 ‘외박’이란 걸 나가게 되었거든요. 하루는 신촌에서 모이기로 했는데 백화점 앞에 그 머리 빡빡 깎은 시커먼 놈들이 무슨 배타는 새끼들처럼 우르르 서있는데, 와∼ 진짜 쪽팔려서 도망갔잖아요. 그리고 술먹으러 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볼 수밖에. ‘여러분 좆나게 죄송합니다, 우리 나쁜 사람 아니거든요’ 하고 인사하고 술먹었지. 2차를 가는데 이 미친놈들이 신촌 한가운데 길바닥에서 3열종대로 앉아 번호를 하네? 그런데 왜 그랬지? 그냥 그 모습을 보는데 기분이 참 좋더라구. 약간 미친 것도 같고. 돈 것도 같고, 이게 실미도의 힘이구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들고….” - 설경구 뉴질랜드 눈밭에서 빤스만 입고 총들고 1월 초, 이민호 PD는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전화를 한통 받는다. “이 PD! 밤에 바다 한가운데 비가 오면서 파도가 치고 보트로 배우들이 연기를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하겠지? 외국 세트장 좀 알아봐.” 결국 이 이탈리아 남쪽에 자리한 섬나라 말타에 있는 수중전문세트 MFS(지중해 필름 스튜디오)에서 촬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스튜디오는 불과 2m에 불과한 수심을 가진 바다와 인접한 커다란 수조에 파도를 일으킬 수 있는 기계장치와 바닷물을 그대로 끌어올려 뿌릴 수 있는 비 타워 10여조에 기타 조명장비들을 갖추고 있었다. 북으로 침투한 실미도 훈련병들이 중도에 작전이 취소되어 돌아오게 되는 장면은 3일 만에 ‘쫑’을 냈고 MFS 사람들은 “코리아 톱 엑터들”이 분장실이 아닌 밖에서 분장을 하고, 알아서 의상을 챙겨 입고 “코리아 넘버원 디렉터”가 비 오는 현장에 이리저리 비 맞으며 뛰어다니는 광경을 기이하게 쳐다보았다. 8월에는 모두 뉴질랜드로 떠났다. 실미도 부대가 훈련받는 것은 3년인데 “겨울장면이 없으니 아무래도 후회할 것 같다”는 강우석 감독의 고집은 겨울훈련의 몽타주 한 장면을 찍기 위해 5억여원의 예산을 들여 전 스탭을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오르게 했다. 1700고지 정도 되는 그곳에서 3개의 산을 넘어 2시간30분쯤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푸른 하늘과 흰눈밖에 없는 신천지였다. “되게 추웠어요. 단화에 빤스만 맨발에 총들고 뛰어야 하는데 살갗은 눈에 찢어지고, 넓적다리는 면도날로 찢는 듯이 아프고…. 그런데 이상한 건 아무도 춥다는 말을 안 하더라고, 독종들.”(설경구) 부대원(?)들의 긴밀하고 재빠른 협조 아래 예상보다 빨리 촬영을 끝내고 돌아가는 강우석 감독이 처음으로 눈을 만지며 말한다. “어? 이거 눈 아니네? 얼음이네….” “나도 버스를 타야 하는데….” 이 말은 촬영 내내 모든 배우들의 입에서 입버릇처럼 터져나온 말이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바로 실미도 대원들이 버스를 탈취해서 대방동으로 가다가 자폭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실미도에서 죽은 임원희, 강신일 같은 배우들은 “유령으로라도 나오면 안 되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결국 이들은 “미안해서 군복이라도 입고 있었야 되겠다”며 얼굴을 가리고 군인 역을 자처했다. “슛” 소리가 나기도 전에 몇몇 대원들이 울음을 터트린다. 촬영 중간중간 여기저기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버스가 불타고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기분이 묘하더라구요.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지금이 1971년이고 이 버스가 그 태화고속버스 같다는 생각, 그리고 모두 죽어간다는 생각. 아마 아이들도 그런 기분이 들었나봐요.” 버스 안에서만 200여컷을 찍어야 하는 부안에서의 힘든 촬영을 모두 마치고 나니 버스 안이 온통 피투성이다. 이때 설경구가 외친다. “이거, 과다출혈로 죽은 거 아냐?” “허… 영화 끝나니까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네…” “우린 할 만큼 했고 더 뭐 어째볼 수 없을 만큼 했잖아.” - <실미도> 출정을 앞둔 인찬(설경구)의 대사 길고 긴 7개월간의 촬영을 무사히 끝내고 촬영팀은 위령제를 지내기 위해 오랜만에 실미도로 향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파도로 배는 실미도에 끝내 닻을 내리지 못했다. 누군가 이야기한다. “허… 영화 끝나니까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네….” 너무 험한 파도 때문에 결국 무의도에서 안개에 싸인 실미도를 보며 위령제를 지낸다. <실미도>의 촬영이 끝나고 1달쯤 지난 지금, 설경구의 휴대폰은 바쁘게 울린다. 같이 출연했던 어린 배우들에게 ‘뭐하냐 씨발놈들아’ 하고 단체 문자메시지를 한번 날릴라치면 ‘형, 나 운전면허 시험봐요. 흐허허.’ ‘경구형! 술사줘요’ 등등 쏟아지는 답장으로 휴대폰이 “지랄발광”을 한다. 31명의 대원들이, 아니 100여명의 배우와 스탭들이 늘 술잔을 부딪치며 버릇처럼 외쳤던 “실미도를 사랑합시다!”는 구호는 마지막 회식날 “실미도를 잊읍시다!”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들이 망각을 시작하는 순간, 실미도 유령들의 혹독한 기억의 행군은, 관객의 심장을 향한 무덤으로부터의 외침은 비로소 시작되었다.

순간 포착! <영어완전정복> 포토코멘터리 [2]

8) 쉬 이즈 프로! 김성수 조민환 대표의 눈은 정확했다. 안젤라 켈리는 정말 프로페셔널한 배우다. 낯선 곳에 와서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환경, 새로운 음식에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을 텐데, 늘 밝고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이다. 한국어 대사 연습도 어찌나 열심인지, 연출부와 제작부들에게 한국어 대사를 발음해달래서 각각의 특징을 분석하고, 공통점을 찾아 거기에 자기만의 연기를 섞는 식으로 준비를 해온다. 촬영 마치고 돌아갈 때 서운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9) A는 B가 아니고, B는 C가 아니지 이나영 감독님과 장혁이 담배를 피우러 또 밖으로 나간다. 감독님은 내가 연기나 캐릭터의 방향을 잘못 잡았을 때 꼭 “이나영씨, 모니터 좀 보러오세요”하고 존댓말을 하신다. 그런데 장혁에게는 “담배나 피우러 가자”라고 한다. 음…. 둘 사이에 어떤 교감이 있는지 궁금하다. 여자배우인 내가 모르는 둘만의 무언가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음…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장혁 감독님이 또 “담배나 피우러 가자”라고 한다. 백화점에 들어온 이래 반복되는 상황이다. 감독님은 내가 설정한 대로 문수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게 마음에 안 드나보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담배만 피우다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올 뿐이다. 내게 그 상황은 ‘네가 설정한 문수 캐릭터는 틀렸어’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감독님은 아실까? 결국 내가 ‘압력’에 못 이겨 감독님의 실제 모습과 비슷하게 연기하면 “그게 바로 정답”이라고 오케이한다는 것을. 그렇다면 문수는 결국 감독님의 분신이란 말인가? 김성수 장혁이 속을 썩인다. --;; 어설프게 바람둥이 흉내를 내느라 자꾸 오버하는 연기가 나온다. 내가 원하는 건 너스레 떠는 바람둥이가 아니라 영주의 왕자님인데…. 어쨌거나 영주가 첫눈에 반하는 것을 누구나 이해할 만큼은 되어야 하는데, 사기꾼 같은 느낌을 주지 말아야 하는데, 혁이는 이 캐릭터가 어려운 모양이다. 자기가 준비해온 아이디어와 설정을 자꾸 꺼내기에 자제시키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볼수록 괜찮은 놈이다. 연기도,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 쑥쑥 늘어가는 게 눈에 보인다. 근데 이놈 연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단 말야…. 10) 확실한 사랑∼의 도장∼을 찍어∼♪ 이나영 목욕탕 세트에서 목욕을 하며 잠수하는 신을 찍었다. 스탭들이 온도를 맞춰주는 척하면서 목욕물에 막 손을 담갔다. 금방 물이 시커멓게 변할 수밖에. 그래놓고선 때가 많아 구정물이 됐다며 나를 놀린다. --; 목욕하면서 발을 까딱거리면서 <사랑의 이름표>를 부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감독님은 내가 창피해할까봐 그랬는지 연출부, 촬영부, 조명부 가리지 않고 다 <사랑의 이름표>를 불러보게 하셨다. 보기와 달리 꽤 세심한 감독님…. 11) 꿈속에서 만나요 이나영 영주는 꿈에서도 영어에 시달린다. 낭만적인 꿈속에서조차 갑자기 특공대가 튀어들어온다. 이 신을 준비하면서 나는 영주의 꿈이니까 영주가 평소에 못 보여줬던 예쁜 모습, 그러면서도 엉뚱한 캐릭터가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현정 언니(스타일리스트)와 ‘망가진 오드리 헵번’ 컨셉으로 가자고 아이디어를 냈다. 머리도 헵번처럼 올리고 빨간 드레스에 빨간 장갑을 끼었다. 장혁은 나를 보자마자 바로 쓰러졌다. 내가 너무 아름다워서냐고? 하도 웃어서 몸을 못 가눴단 말이다. ㅠ.ㅠ 게다가 장혁은 특공대에게 쫓기는 장면에서 나를 인정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촬영할 때는 웃기기도 하고 정신없기도 해서 몰랐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양쪽 팔과 발등, 다리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호오∼. 장혁 나영씨는 자기 꿈장면이어선지 신나는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드리 헵번처럼 분장을 하고 나타나서 나를 웃겼다. 오랫동안 갈래머리에 안경 쓴 모습만 봐서 그런지 오드리 헵번처럼 예쁘게 분장한 모습이(조금 웃기기도 했지만)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큰 액션신도 아니었는데 하도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웃느라 계속 NG가 나서 촬영은 힘들었다. 특공대원으로 나온 두홍이 형(정두홍 무술감독)까지 영어로 대사를 하는 바람에 더 웃겼다. 브러더 두홍, 스톱 플리즈. 김성수 상상신 촬영에 나름대로 꽤 신경을 쓰고 있다. 누구나 꿈에서는, 자기만의 상상 속에서는 자신이 주인공이 된다. 아무리 거지 같은 인간도 마음속으로까지 스스로를 비하하지는 않는다. 영주도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는 눈치없고 엉뚱한 왕따지만, 꿈속에서는 영주도 예쁜 옷 입고 예쁜 모습만 보이는 주인공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망가진 오드리 헵번’ 컨셉은 꽤 근접했다. 촬영하면서 다들 웃겨서 껌뻑 죽는다. ㅎㅎ. 12) 엘비스는 수평선 저 너머에 이나영 이번엔 문수의 꿈이다. 촬영지인 주문진 해수욕장에 오니 촬영엔 별 신경을 안 쓰고 서로 바닷물에 빠뜨리느라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도 스탭들은 감독님을 무서워했는데, 내가 대희 오빠(조명부)를 부추겨서 감독님을 바다 속에 빠뜨렸다. 푸핫! 장혁 내 꿈장면. 수염도 붙이고 보석 반지도 주렁주렁 끼고 하와이언 셔츠에 흰 양복 차림으로 해변을 바라보며 섰다. 덧없는 세상, 나는 떠나리…. 누아르영화의 주인공처럼 피를 떠올리고 총을 떠올렸다. 그러다 이 외로운 마피아의 눈에 띈 인어 공주 같이 아름다운 해변의 여인! 내 마음속의 암흑을 물리쳐줄 사람은 오직 이 여자뿐! 이렇게 진지하게 컨셉을 잡아가는데 다들 웃기만 했다. --;; 13) 에브리보디, 베리베리 땡큐∼ 이나영 크랭크업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자꾸 의식하면, 더 슬퍼질 것 같아서 그냥 평소처럼 말하고 행동하려 애썼다. 당장 내일이라도 다시 만나 촬영할 사람들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촬영을 마쳤다. 감독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장혁, 정말 장혁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절대적으로 좋은 의미에서 단순한 사람. 그리고 누구보다도 고마운 우리 스탭들. 여러분이 없었으면 저는 절대 코미디영화 찍을 수 없었을 거예요. 에브리보디, 베리베리 땡큐랍니다. 꾸벅∼. 장혁 이 영화는 한마디로 이거다. ‘이나영의 (연기가 아닌) 삶+김성수 감독님의 코미디 자아 발견+장혁의 가식적인 바람둥이 연기=<영어완전정복>.’ 내가 배우가 된 뒤 처음 찍은 영화는 <짱>이었다. 그리고 6년 뒤인 지금 찍은 영화는 <영어완전정복>. 그러면 내 6년간의 배우 인생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영어완전정복 짱’이 되네? 영어완전정복 짱!! 김성수 다들 마지막 촬영이 실감나지 않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촬영 준비를 한다. 나영이와 혁이만 메이킹 카메라를 들고 스탭들 코멘트를 따고 있다. 나영이도, 혁이도, 정말 많은 걸 해줬다. 고맙다. 그리고 우리 스탭들. 정말 이 맛에 영화하는 거다. <영어완전정복>을 괜찮은 영화로 완성시켜서 여기 영화판 한구석에 단단히 자리잡고 싶다. 그러자면 흥행이 잘되어야 할 텐데…. 그건 내 운인가? ^^;;

영화아카데미 20년 [5] - 영화광 정성일이 `질투심으로` 날리는 충고

(매우 비통한 이야기지만) 나는 영화아카데미를 다니지 못했다. 영화아카데미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개교했지만, 나는 그때 소년 가장이었다. 나는 취직을 했고, 정말 한없이 부러운 심정으로 내 친구들을 그저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난 그때 진정한 영화광이란 결국 영화를 만드는 마지막 계단에 올라야 한다는 트뤼포의 말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함께 영화 스터디를 하던 김소영은 용용 죽겠지, 하는 표정으로 입학을 했고, 황규덕은 속마음도 모르고 너 내년에 시험 볼 거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로 영화현장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걸 보면서 떠들어대는 것은 다 헛수작들이거나, 잡담이거나, 그도 아니면 질투이다. 영화평론가란 아무리 잘해봐야 이류 영화감독이다(그래도 삼류감독들보다는 낫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하여튼 영화아카데미 1기들과 모두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그렇다고 이 말이 그들 모두와 친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부러운 마음으로 그들을 쳐다보았으며, 나도 언젠가는 이 학교에 다니고 말 거라는 결심을 다지고 다시 다졌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일년 만에 졸업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차라리 빨리 현장으로 가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충고를 해주었다. 결심을 망설이는 동안 지나치게 어린 나이에 영화잡지 편집장이 되었고(<로드 쇼>), 나는 그때 막 29살이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지금도 그 망설임을 후회한다. 그 사무치는 망설임을 안고서 나는 그들의 졸업작품을 기회가 닿는 대로, 그렇게 닥치는 대로 보았다. 그리고 낯선 사실을 발견했다. 정말, 정말로 내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카데미 졸업작품인) <공무도하가>를 만든 김소영이 왜 따분하게 아직도 아이들과 칠판 앞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소망하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페스탈로치가 아니다. 혹은 <목소리>를 만든 유지나가 무엇 때문에 지지부진하게 온갖 잡다한 명함을 부여안고 시시한 시사프로그램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목소리>의 시각장애 주인공은 <선택>의 감독 홍기선이다!). 당신은 12년 전 내게 무엇이라고 말했던가? 만일 글쓰기로 뒤라스와 겨룰 수 없다는 것을 안다면 친구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영화로 뒤라스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또는 <창수의 취업시대>를 만든 김의석이 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버려두고 장르영화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아직도 정말 그의 졸업작품을 좋아한다. 또는 황규덕이 두편의 영화를 만든 다음에 왜 12년 동안 마냥 세월을 보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박광수 선배는 19년 전 황규덕이 방위 시절에 만든 영화를 보던 자리에서 그는 매우 좋은 감독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었다. 사실 광수 형은 남의 영화를 여간해서 칭찬하지 않는다). 나는 여기에 계속해서 명단을 추가할 수도 있다. 그들은 정말 한국영화의 새로운 물결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첫 번째 영화아카데미는 세상과 만나지 못했다. 혹은 많은 시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물론 그들의 후배들이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변혁과 이재용의 <호모 비디오쿠스>에는 쇼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서로의 길을 각자 걸어간 다음의 행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기어이 임상수의 졸업작품을 찾아보았다. 그는 자신이 거부하려고 하는 충무로의 영화를 자꾸만 (나쁜 의미에서) 닮아간다. <바람난 가족>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진부한 영화이다. 그는 자신이 영화아카데미를 다니던 시절 가졌던 꿈을 어디선가 흘렸다. 혹은 허진호의 가장 솔직한 영화는 <고철을 위하여>이다. 그의 주제는 결국 어디선가 끈을 놓친 가족이다. 그러니 제발 멜로드라마로 위장한 채 본심을 빙빙 돌려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그가 순정만화 같은 말투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좋은 상업적 전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사실 그는 그걸 잘하지도 못한다). 그렇게만 하면 그는 홍상수와도 맞장 뜰 수 있는 사람이다. 그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실 허진호가 하려는 척하는 것은 이정향이 훨씬 잘한다. 그러나 이정향은 더 잘할 수 있는 것을 놔두고 자꾸만 기획영화에 매달린다. 그건 안타까운 일이다. 이제는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다. 또는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고치지 못한 것은 졸업하고 나서도 나쁜 습관이 되어 악착같이 쫓아다닌다. 이를테면 봉준호는 아카데미 다니던 시절에 가지고 있던 약점을 아직도 고치지 못했다. 그래서 <지리멸렬>(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잘못 편집된 추적장면이 <살인의 추억>에서도 고스란히 실패로 반복된다. 혹은 민규동과 김태용(과 박은경)의 <열일곱>은 통쾌무비한 십대영화이다. (나는 이 영화를 그해 나온 <나쁜 영화>보다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의 첫 번째 장편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다. 이수연의 <라>는 귀기 서린 요염한 영화이다. 하지만 (그토록 야심적이었던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은 그 기분(aura)을 가져오지 못했다. 당신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원래의 자신의 것을 다시 가져와야만 한다. 물론 당신들은 알 것이다. 이 모든 말이 내가 영화아카데미를 다니지 못한 질투와 부러움에서 온 못된 심술이라는 것을. 그들은 영화아카데미에서 그렇게 전투적으로 영화를 만들었으며, 그들 자신의 진심을 가지고 연출했으며,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들 자신의 평생의 테마를 안고 졸업하였다. 영화아카데미는 그런 학교이다. 그건 학교에서 누가 가르쳐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동료들을 설득하고, 다투고, 달래고, 속이고, 억지를 부리면서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간신히 획득한 것이다. 그들 자신(을 대신해서 지금 영화아카데미의 원장을 하고 있는 박기용)의 말을 빌리면 “모든 것을 혼자서 해내야만 살아남는다는 것을 가르쳐준 곳”이다. 아마도 그것이 영화아카데미의 정신일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영화아카데미의 입학심사나 졸업작품 평가회에 불려가면 매우 악랄하고, 잔인하고, 끈질기게 질문한다(그래서 나 때문에 울고 나가는 졸업생이나 입학지원자들이 있다).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것이 영화아카데미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처음으로 고백하건대) 내가 영화아카데미를 다니지 못한 데서 오는 심술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들은 나를 가엾게 여겨야 한다. 불타는 질투심으로 당신들의 이십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천삼년 시월 마지막 목요일 정성일 씀.

영화아카데미 20년 [3] - 졸업생들이 회고하는 영화아카데미 ①

영화아카데미의 졸업생들은 아카데미를 다니던 1년 또는 2년을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시간’으로 기억한다. 영화아카데미 출신 5명의 영화인이 회고하는 ‘나는 왜 영화아카데미에 갔는가’, 또는 ‘아카데미에서 나는 무엇을 배웠나’, 혹은 ‘아카데미는 현장 생활에 어떤 도움을 줬나’. 미운정 고운정 다 들었다 조근식 | 13기·<품행제로> 연출 내가 속한 영화아카데미 13기는 변화의 시대를 살았다. 우선 우리 기수들은 남산에서 홍릉으로 이전한 뒤 뽑힌 첫 번째 기수인데, 덕분에 나는 페인트 냄새 채 가시지 않은 새 건물과 새 책상, 그리고 새로 구입한 실습장비들을 마음껏 흠집내며 다닐 수 있었다. 또 우리 기수 때부터 1년에서 2년으로 교육기간이 늘어났는데 내가 기억하기로, 원래는 1년 반 정도의 3학기였던 것 같은데 우리가 졸업작품을 6개월 넘게 찍는 바람에 그냥 2년으로 정리됐던 것 같다. 세 번째는 12기까지 12명 정도를 뽑다가 우리 기수부터 정원이 18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니까 12명의 소수 정예인원이라기보단 6명의 찌꺼기 불순물들을 포함한 18명이었다. 뭐든지 처음이라는 것이 그렇듯 우리의 분위기는 10년 넘게 면면히 이어져온 영화 아카데미의 규칙과 전통이라기보단 혼란과 시행착오쪽에 더 가까웠다. 아니, 그보다는 그런저런 요소들이 이리저리 섞여 어떻게 보면 참신하고 어찌보면 개판인 것 같은 헷갈린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통제와 획일화에 기반한 교육에 수십년간 마음 편안해했던 나로서는 때때로 그런 혼란과 정해지지 않은 것들에 불안해했고. 나에게는 과분하다 싶을 정도의 자유와 방임에 두려워했는데, 그건 아마 다른 아이들도 비슷했던지 우리는 늘 불만을 터뜨리며 매일 무언가를 정해주기를 요구했다 .바꿔 생각하면 어쩌면 우리는 늘어난 인원과 기간만큼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욕심도 많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위기의 절정이 졸업작품 기간이었다. 늘어난 인원에 비해 부족한 장비와 예산, 일정들은 물론이거니와 작품을 찍을 조를 짜는 문제에서부터 작품을 찍는 순서까지 무엇하나 그냥 정해지는 게 없었다. 우리는 매일 토론에 회의에 불만이었다. 이러다가 혹시 내 졸업작품을 제대로 못 찍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도 생겼다. 그러면서 우리는 점점 외부에서 주어지는 통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통제하고 협의하고 양보하는 법을 알아갔다. 우리는 각각 9명씩 2개조로 나누어 6개월 동안 계절을 두번 바꿔가며 연출과 촬영,조명, 동시녹음 그리고 허드렛일을 번갈아 했다. 한 사람당 대략 7∼8개의 작품을 소화해내며 자기 작품까지 연출해야 하는 강행군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고 사랑했으며 서로에게 희생하고 뺀질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끝에 공동연출을 포함한 15개의 작품을 생산해냈다. 그 하나하나들은, 정말이지 온통 우리의 땀과 노동으로 얼룩진 생산물이었다. 그 하나하나들은 12개의 정예와 6개의 불순물도 아니었으며 작품의 길이나 질적 차이와도 상관없는, 그냥 15개의, 각자의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모양과 색깔을 지닌 결실이었다. 나는 우리가 지나쳐온 이 현기증나는 일들이 장편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책상머리에서 촬영현장으로 김소영 | 1기·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교수·<거류> <황홀경> 연출·현재 단편 <질주환상> 준비 중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당시 친구들은 내가 약간 껄렁한 태도로 영화감독을 할 거야, 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좀더 심각하게 영화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알랭 레네의 <지난해 여름 마리앙바드에서>를 보고 나서였다. 시시한 주말의 명화나 극장 개봉작을 보고도 전대미문의 즐거움을 느꼈던 나는, 그 시나리오를 쓴 마그리트 뒤라스와 알랭 레네의 세계를 일별하곤 앞으로의 내 삶을 영화에 바쳐야지 하고 ‘결정’ 했다.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 수업을 빼먹고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를 미친 듯이 좋아하게 되었고 브레송의 <무쉐트>를 보고 모든 사물의 소리에서 무쉐트의 딸각거리는 발소리를 듣곤 했다. 그러다가 대학 3학년이 되어 영화공부 모임을 하게 되었다. 김동원 선배(<상계동 올림픽>과 <송환> 등)의 권유였다. 김동원 선배와는 서강 연극반 때 연출자와 배우로 만난 적이 있었다. 첫날 모임에 가보니 영화와 첫사랑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정성일 선배, 당시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빠져 있던 강한섭 선배, 영화를 위해 모든 것들을 섭렵하던 중인 조재홍, 이미 모든 것을 섭렵하고 이른바 ‘걸어다니는 영화 사전’이던 전양준 선배가 나와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신과학 산책>을 쓰게 되는 김재희 선배도 있었다. 그러다가 졸업할 때쯤 영화아카데미가 처음 생겼다. 막연하게 영화연출을 위해 미학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망설일 때, 김동원 선배는 술을 마시다 말고 갑자기, 영화아카데미를 가지 않으면 영화연출에 진정한 뜻이 없다고 간주할 것이라 협박했다. 그 협박 때문에 그뒤 1년간 난 동기들과 강원도의 촬영지들을 유랑하며 20대에 어울리는 강렬한 삶을 보냈다.

영화아카데미 20년 [1]

한국영화 르네상스, 여기서 싹텄다 한국영화아카데미가 20년을 맞았다. 1984년 남산 영화진흥공사 건물(현 영화감독협회)의 구석진 방에서 출발한 영화아카데미는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올해까지 배출한 296명의 영화인 중 대다수가 충무로 현장을 바쁘게 누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햇수로 20년 영화아카데미의 역사는 곧 한국영화의 최근사와 동의어나 다름없다. 2000년 만하임-하이델베르그영화제, 2001년 발라돌리드국제영화제 등에서 ‘한국영화아카데미 특별전’이 열리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영화아카데미의 20년을 돌아본다. 얼마 전 토론토영화제에 들른 임상수 감독은 이곳 프로그래머로부터 다소 엉뚱한 질문을 받았다. “도대체 영화아카데미가 뭐하는 곳이냐”는. 이 영화제에 초청된 한국 감독들은 임 감독을 비롯해 장준환, 봉준호, 박경희, 김기덕 감독이었는데, 이중 김기덕 감독을 제외하곤 모두 아카데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리에서 “돈도 없고, 선생도 없고, 학교라 하기에는 좀 그런 곳이다”라고 답하며 웃고 말았지만, 새삼 “아카데미가 엄청난 에너지를 품고 있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임상수 감독의 말이 아니더라도, 영화아카데미는 최근 10여년간 한국 영화계의 근간이 되는 감독들을 숱하게 배출했다.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지면낭비일지도 모른다. 대신 올해 개봉한 영화로만 예를 들자면, <청풍명월>의 김의석, <싱글즈>의 권칠인, <보리울의 여름>의 이민용,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의 이재용, <살인의 추억>의 봉준호,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의 이수연, <이중간첩>의 김현정 감독이 모두 아카데미 출신이다. 여기에 <오! 브라더스>의 박현철, <영어완전정복>의 김형구, 의 조용규 등 촬영감독과 <지구를 지켜라!> <살인의 추억> <싱글즈>의 노종윤, <아카시아>의 유영식, <장화, 홍련>의 김영 등의 프로듀서가 이곳 졸업생이다. 누군가 “90년대 이후 한국 영화사는 영화아카데미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말을 할 정도로 영화아카데미는 최근 한국영화의 발흥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한해에 만들어지는 문제작 중 절반 이상이 모두 한 교육기관 졸업생들에 의해 이뤄졌다는 이 ‘불가사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열정, 졸속행정의 허술함을 이기다 “어느 날 영화실습을 나가서 촬영준비를 마치고 슈팅에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투다닥 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조명을 함께 맡은 김의석과 황규덕이 싸우고 있더라고요. 알아보니까 조명의 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말다툼을 하다가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열정이 대단했다는 얘기죠.”(이용배 교수·1기) 지금에야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게 됐지만, 출범 당시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이렇게 성공하리라 예측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영화아카데미는 ‘졸속행정’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아카데미가 문을 연 84년은 한국 영화계가 극심한 침체를 겪고 있던 시절이었다. 한국영화는 정부로부터 허가를 얻은 20개의 제작사에서만 만들 수 있었고,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영화 또한 외화 수입권을 따내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으니 경쟁력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인들은 영화법 개정 등 한국영화 진흥책을 마련해달라며 목청을 높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시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는 83년 후반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한 인재양성’이라는 명분 아래서 영화아카데미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신입생 모집공고를 낸다. 철통 같은 군사독재 시절, 정부가 만든 일종의 ‘관제기관’에 누가 지원했으랴 싶지만, 사정은 정반대였다. 80년대 초반 ‘영화운동’의 씨앗을 불태우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영화를 제작하던 청년들에게 이곳은 ‘이용가치’가 높은 곳으로 보였다. 영화학과를 졸업하고 갈팡질팡하던 이들에게도 이 모집공고는 단비처럼 여겨졌다. 대학을 다니며 막연하게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온 졸업생들 또한 사정은 비슷했다. 각기 출발점은 다르지만, 이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탓에 첫해부터 경쟁률은 높았다. 그들이 아카데미를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실습 위주의 현장교육’이라는 모토 때문이었다. 응시생들은 ‘내 힘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데서 가장 큰 매력을 느꼈다. 그 점에 있어선 그 이후 세대도 마찬가지겠지만 초기 세대들의 경우, 열망의 정도는 더했다. 당시엔 영화를 가르치는 사설기관도 없었고, 대학이나 기타 기관의 장비가 지금처럼 좋지 않았기 때문. 충무로의 사정 또한 경쟁률을 부추긴 원인이다. 당시 한국영화는 침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도제시스템도 확고했다. 2기 권칠인 감독에 따르면 “스크립터로 3편을 해야 세컨드로, 세컨드를 3편 해야 퍼스트로, 퍼스트를 3편 해야 입봉”이라는 속설이 나돌았다. 1기 김의석 감독은 “당시엔 교수님들도 충무로에 나가지 말라고 할 정도였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우수인력을 양성해 현장에 배출하겠다’는 아카데미의 계획은 자연 연출의 포부를 가진 젊은이들에게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학기 초에는 이론수업이라는 명분 아래 지루하면서도 보수적인 내용의 강의가 이어졌다. 당장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될 줄 알았건만, 교실에 갑갑하게 갇혀 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었던 1기들은 84년 5월의 어느 날, 집단적으로 무단결석을 감행한다. 이들은 교외로 나가 밤을 새워가며 술을 마시며 단결력을 보여줬다. 이 ‘사보타주’ 이후 학생들의 요구가 대폭 반영돼 강사진은 이장호, 이두용 감독 등 현장 인력으로 바뀌었고, 본격적인 실습도 시작됐다. 85년부터 98년까지 영화아카데미의 행정을 맡았던 김재균씨는 “너무 다급하게 준비하느라 1기가 다니던 84년엔 충무로 현장의 장비를 빌려서 교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모두 열심히 임해줬다”고 회고한다. 결국 정부의 어설픈 ‘졸속행정’의 허점을 메운 것은 학생들의 ‘배우고자 하는 의지’였던 것이다. 외부의 충돌, 내부의 결속 “우리가 다니던 게 87년이었잖아요. 동기 이수정 프로듀서는 수업을 빼먹고 명동 거리에 나가 있었는데, 어느 날 미국 TV의 촬영차 거리에 나왔던 유영길 촬영감독과 마주쳤대요. 알고보니 유 감독님도 강의를 해야 하는데 빼먹었다고 하더라고요.”(김태균 감독·4기) 시간이 웬만큼 흘러도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최소한 90년대 중반까지는. 시절이 시절이다보니 학생들은 공무원들이 관할하는 조직과 다양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초창기에는 영진공 사무실에 안기부 직원이 상주했고, 간부들은 학생들의 시나리오를 사실상 검열했다. 내용에 ‘불온’한 요소가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옛날 서류를 봤는데, 간부들과 안기부 직원이 학생작품을 시사하며 벌인 회의기록이 있더라. 내가 만들었던 단편에 대해서도 ‘영화에 왜 이렇게 판잣집이 많이 나오냐’ 등의 ‘지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박기용 감독의 이야기처럼, 아카데미는 정부 산하기관의 한 부서였던 탓에 더욱 민감한 주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사회에 뿌리를 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학생과 학교간의 예고된 충돌은 6기들이 다녔던 89년 일어났다. 당시 6기생들은 임수경의 방북을 소재로 공동작품을 제작하려 했으나, 학교쪽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에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와 맞섰다. 이때 벌어진 골은 끝내 좁혀지지 않아 교육과정은 파행 운영됐다. 결국 이 사건은 6기생 중 3분의 2가 졸업장 대신 수료증을 받는 것으로 귀결됐다. 6기뿐 아니라 대다수의 기수가 학교쪽과 마찰을 빚었다. “이렇게 대립이 치열해질수록 동기들끼리의 결속력은 좋아졌다”고 박기용 감독은 설명한다. 아카데미 학생들의 유난스런 동기애는 학교와 세상과 맞서는 가운데 싹텄다는 이야기다. “우리 기수는 영화전공자보다 비전공자가 훨씬 많았는데, 다양한 관심의 사람들이 모이면서 서로에게 자극이 됐던 것 같아요. 영화적인 테크닉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면 그런 분위기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조근식 감독·13기) 아카데미 출신 감독들의 특징이 있다면, 인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그리고 이러한 성향은 한국영화의 영역을 넓히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는 다양한 전공자들을 한데 폭넓게 수용했다는 데서 비롯됐다. 허진호, 장준환, 김태용 감독 등은 아예 카메라를 구경해본 적도 없는 ‘생짜 초보’였다. “입학시험을 보는데, 감독 5명이 제시되고 이들에 관해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타르코프스키, 베리만, 고다르, 뭐 이런 감독들인데, 그땐 영화를 잘 모를 때라 그중 딱 한명만 알겠더라. 결국엔 답을 아예 안 썼다. 시간이 없어서 못 쓴 것처럼 보이려고.” 허진호 감독처럼 영화의 ‘왕초보’들은 어떻게 단 1년 만에 4년간 영화를 전공한 동기들과 비슷한 수준에 오를 수 있었을까. 박기용 감독은 “초반에는 전공자 또는 단편작업 경험자와 비전공자 사이에 수준차가 존재하지만, 첫 작품을 하고나면서 서서히 실력은 비슷해지더라”라고 말한다. 촬영, 조명, 녹음 등 서로 역할을 바꿔가며 다양한 일을 해야 하는 탓에 경험도 많이 쌓이고, 상호교류를 하는 동안 전공자의 경험이 전달되기 때문이라는 것. 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교수진이 제대로 짜여 있지 않았던 탓에, 학생들은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품앗이’를 해야 했다. 1년 또는 2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의 연출작을 포함해 4편 이상의 영화를 정신없이 제작하다보니 각자의 경험은 빠르게 축적될 수 있었다. 특히 ‘극성맞은 기수’로 소문났던 13기의 경우, 자신의 연출작 또는 동료의 연출작에 참여한 게 1인당 평균 20편 이상일 정도다. 결국, 아카데미에서 초보자도 영화를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이수연 감독의 말마따나 “다양한 경험과 전공을 가진 사람들이 뭉치면서 만들어내는 시너지 효과”에 힘입은 것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연혁 1984년 | 3월 한국영화아카데미설립(제1기 감독분야 12명 선발) 1985년 | 2월 제1기 졸업생 10명 배출 1995년 | 10월 영화진흥공사 홍릉사옥으로 이전 1996년 | 3월 교육연한 1년 6개월, 3학기제로 학제 변경(13기) 1999년 | 3월 한국애니메이션예술아카데미 설립(제1기 12명 선발) 2000년 | 3월 영화연출 및 촬영전공 교육연한 2년, 4학기제로 학제 변경(18기) 2001년 | 2월 애니메이션예술아카데미 제1기 졸업생 10명 배출 2001년 | 8월 영화 및 애니메이션예술아카데미 교육공간 통합 이전(남산 옛 서울예대 예술관)

<스캔들‥> 베를린영화제 포럼부문 초청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가 내년 2월 열리는 제54회 베를린영화제의 '러브콜'을 받고 있다. 8일 부산영화제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베를린 영화제 조직위원회가 <스캔들‥>을 포럼부문에 초청해 같은 원작을 영화화한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1988년작 '위험한 관계'와 비교상영할 예정"이라고 베를린 영화제 포럼 부문 프로그래머 도로테 베너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베를린 영화제의 초청작 선정은 각 부문의 프로그래머들이 별도로 담당하고 있으며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공식경쟁부문에도 출품해 놓은 상태다. <스캔들‥>의 경쟁부문 진출 여부는 이달 안으로 밝혀질 예정이다. 10월 초 개봉해 1-2일 주말까지 전국 323만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조선 최고의 요부 조씨부인(이미숙)과 바람둥이 조원(배용준)이 수절 과부 숙부인(전도연)의 정절을 놓고 벌이는 위험한 '게임'을 그린 영화로 18세기 말 프랑스 서간체 소설 '위험한 관계'를 원작으로 한다. 올해로 2회째를 맞는 베를린 영화제의 인재 양성 프로그램 '탤런트 캠퍼스'는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특강을 요청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연합뉴스) 김병규 기자 bkkim@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