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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검색결과

기사/뉴스(9404)

미래사회에 대한 예언 혹은 숙고,그렉 이건의 SF스릴러 <쿼런틴>

그렉 이건의 <쿼런틴>은 사립탐정일을 하고 있는 은퇴한 테러 전담 경관 닉이 병원에서 갑자기 실종된 여인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으며 시작된다. 어떻게 보면 뻔하디 뻔하다고 할 수 있는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도입부이고 이건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우선 쓰기가 쉽고 진짜 추리소설에서는 굉장히 뻔한 장르 공식이라도 SF와 같은 다른 장르와 결합하면 그 진부함이 쉽게 감소되기 때문이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이건의 안전한 선택은 오히려 최선이다. <쿼런틴>에서 이야기의 독창성이나 힘, 캐릭터의 개성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닉의 캐릭터나 그의 고민, 실종된 여인을 찾아나서는 그의 수색은 점점 무게를 잃고 독자들 역시 그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 이 소설이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다른 데 있는데, 만약 정말로 독창적인 스토리 라인이 이 소설에 따라주었다면 오히려 독자들의 시선은 엉뚱한 데로 분산되었을 것이다. 닉의 수색을 따라가는 독자들이 초반에 진짜로 관심을 가지는 건 정신지체자인 여성이 어떻게 철통같은 병원 경비를 뚫고 바람처럼 사라졌는가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궁금하긴 하겠지만 그런 것에 신경쓰기엔 독자들을 압박하는 정보들이 너무 많다. 닉을 안내인 삼아 이건은 엄청난 정보들을 빼곡하게 담은 21세기 중엽의 세부 묘사 속으로 독자들을 집어던진다. 신은 디테일 안에 산다고 누가 그랬던가? 아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쿼런틴>에도 살 것이다. 이건이 그리는 21세기 중엽의 지구는 첨단기기들이 가득 찬 대형 장난감 상점과도 같다(업그레이드 병에 걸린 독자들은 미리 주의하시길. 책장을 덮기도 전에 심각한 갈증에 시달릴지도 모른다). 주인공 닉은 직업상 어쩔 수 없이 첨단기기들을 다룰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그런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 세계는 장난감들이 지나칠 정도로 많다. 처음 등장할 때마다 상품명과 가격이 따라붙은 이 기기들에 대한 작가의 열광은 종종 스토리와 당위성까지 갉아먹는다. 종종 닉은 사립탐정을 위장한 쇼호스트 같다. 다행히도 그가 소개하는 장난감들은 대부분 흥미진진하다. 특히 나노 테크놀로지로 연결되어 인간의 욕구와 자유의지까지 조종하는 다양한 신경 모드들은. 이 소설이 단순한 장난감 가게로 끝나지 않은 이유는 이건이 사용하는 장난감들이 어느 순간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사고를 멈추는 추상적인 공간까지 숨어들어오기 때문이다. 신경 모드는 단순한 편리함의 추구가 형이상학적인 사고와 만나는 지점에 놓여 있다. 이건은 이런 변화에 조건반사적으로 질겁하는 대신 냉정한 과학자적인 관점에서 그 변화를 탐구한다. 사이버펑크 시대를 거쳐온 독자들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할 법한 이 난잡한 장난감 가게를 반쯤 헤매다보면 독자들은 양자 역학과 연관된 새로운 세계와 마주치게 된다. 전형적인 사이버펑크물처럼 시작되는 이 이야기엔 안 어울릴 것 같은 엉뚱한 설정이 하나 삽입되어 있다. 닉의 모험담이 시작되기 30여년 전에 명왕성 궤도 두배나 되는 거대한 검은 구체 버블이 갑자기 나타나 태양계를 완전히 감싸버렸던 것이다. 닉의 모험담은 앙상블이라는 수수께끼의 단체와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버블의 비밀과 연결되고 곧 SF 역사상 가장 뻔뻔스러운 허풍과 연결된다. 처음 이 아이디어를 읽고 놀라지 않았다는 걸 뻐기고 싶은 독자들은, 양자 역학의 기본 이론들에 대해 몇번 생각해본 사람치고 이런 상상을 해보지 않은 적 있겠냐고 덤덤한 척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생각해! 보라. 정말 이런 식의 막 나가는 아이디어 전개를 당연한 척하며 전개하기가 쉬운 일인지. 결국 이 모든 건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다. 누가 먼저 하느냐가 중요하고 그 무언가를 먼저 하기 위해선 엄청난 담력이 필요한 것이다. <쿼런틴>은 다양한 사고실험들을 가득 담은 상자와 같다. 어떤 것들은 대담한 물리학적 추론이고 어떤 것들은 흥미진진한 사회학적/기술적 예언이며, 어떤 것들은 자유의지와 같은 비교적 전통적 형이상학적 대상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나노 테크놀로지의 티끌만한 세계에서 우주 전체의 운명까지 커버하는 이건의 세계는 성실한 하드 SF가 커버하는 범위가 얼마나 넓을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극중 인물 중 한 명인 포콰이는 “1980년대 이래, 형이상학은 실험과학이 되었다”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하드SF는 그 실험과학을 가상으로나마 커버할 수 있는 가장 쓸 만한 도구인 셈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사족 하나. 21세기의 발달될 대로 발달된 세계의 비전을 그린 소설 속에 여전히 남자주인공에게 존댓말을 올려붙이는 여자들을 보는 것처럼 어색한 일은 없는 듯하다.) 듀나 djuna01@hanmail.net

`그림책`이 아니라 만화다,<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와 <곰>

만화는 아이들과 친하다. 상상력이 고갈되고 사고의 체계가 굳어버린 어른들에게 만화는 읽히지 않는 난독의 텍스트이지만, 어린이들에게는 어떤 만화라도(설령 그 만화의 수준이 조악하다 해도) 놀라운 상상력의 바다다. 어린이들의 상상력, 특히 이미지 언어에 대한 열려 있는 독해력은 만화의 칸을 넘나들며 자유롭게 유영한다. 자유롭게 열려 있는 그래픽, 특정한 이야기를 분할된 화면에 나누는 연출, 말풍선이라는 매우 독특한 대화표현방법, 효과선이나 효과음처럼 기호의 힘을 활용한 표현방식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왼쪽부터)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 와 <곰> 레이먼드 브릭스의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와 <곰>은 오랜만에 만난 어린이 만화다. <곰>은 곰돌이와 함께 잠이 든 틸리에게 거대한 곰이 찾아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전개에 따라 효율적으로 나뉜 칸 속의 세밀한 파스텔 작화는 매우 인상적이다. 거대한 곰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그 곰을 덤덤하게 맞이하는 틸리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어른들에게 있어 ‘곰’은 상상이지만, 틸리에게 ‘곰’은 현실이다.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는 석기시대를 배경으로 돌바지 대신 부드러운 바지를 찾으려 하는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 두 작품의 원작자인 레이먼드 브릭스는 애니메이션 <스노우맨> <산타할아버지>의 원작자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은 이 두편 이외에도 여러 편이 출판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레이먼드 브릭스와 그의 작품이 만화가와 만화로 소개되지 않고 그림책 작가와 그림책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2003년에 새롭게 출간된 <석기시대 천재소년 우가>에 수록된 작가 설명에는 ‘어렸을 때 꿈이 바로 만화가였’지만 일러스트레이션에 관심을 갖게 되며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고 쓰여 있다. 당혹스럽게도, 명백히 만화인 <석기 시대 천재 소년 우가>의 작가설명에 ‘이 사람이 어린 시절에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제대로 미술을 배우고 나서는 일러스트레이션 작가가 되어 그림책을 그리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만화에 대한 편견은 크게 변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어린이들에게 ‘만화’는 피해야 할 대상이라 멀쩡한 만화가 ‘그림책’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작품들은 대부분 만화다. ‘만화의 형식’을 빌렸거나, 아니면 ‘만화의 표현’을 빌린 것이 아니라 그대로 만화다. 레이먼드 브릭스의 대표작인 <스노우맨>과 <바람이 불 때에>, 그리고 <곰>도 역시 모두 만화다. 부드러운 파스텔이나 수채를 활용한 친근한 그래픽은 일러스트레이션이 아니라 칸 속에 존재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만화다. 하지만 역시 이들 작품도 모두 ‘그림책’으로 출판되고 팔리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아침 TV 홈쇼핑에서 레이먼드 브릭스의 작품이 포함된 56권까지 그림책 시리즈를 판매하는 방송을 보면서다. 2003년 한국에서 그림책은 이제 출판시장의 대안으로 자리잡으며 홈쇼핑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그림책’이란 이름으로 자기의 정체성을 숨긴 ‘만화’들이 숨어 있었다. 어디 이뿐인가. 실질적으로 많은 그림책들은 이전의 설명적 일러스트레이션을 극복하고 일러스트레이션이 이야기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다양한 기호를 활용하고, 칸(보이는 칸은 물론 보이지 않는 프레임까지)을 활용하는 표현의 방법으로 만화를 대대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오랜 세월 만화는 아이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만화는 매체를 넘어 표현의 방법으로도 아이들에게 다양하게 소비되어졌다. 하지만 역으로 또 오랜 세월 만화는 이 세계의 시민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 국외자의 처지로 존재해야만 했다. 만화에 시민권을 되찾아주는 일은 누구의 몫인가. 그림책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자신의 존재증명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만화에 ‘만화’라는 제 이름을 붙여주어야 할 사명은 ‘만화’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90년대 이후 일본시장의 모범을 따라 청소년용 만화만을 죽어라 찍어대던 출판사에, 일본 만화잡지의 신작연재 소식을 발빠르게 자기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부의 만화가(혹은 스토리작가)들에게, 대형만화출판사의 잡지만화만이 한국 만화시장을 끌어간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레이먼드 브릭스의 ‘만화’를 권한다. 한국만화시장을 구원할 대안은 이런 ‘다양함’이고, 한국 만화시장의 문제는 이런 ‘다양한 만화들’이 만화로 인정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시작된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

[새 영화] 프리다를 아십니까?

장애인…양성애자…공산주의자…멕시코 천재화가… 교통사고로 인한 장애인이자, 멕시코로 망명온 트로츠키를 후원했던 열렬한 공산주의자였으며 숨김없는 양성애자였던 여성. 이렇듯 독특하고 복잡한 정체성조차, 몸에 새겨진 상처와 고뇌를 담은 원색의 화폭 앞에서는 사소하게 만드는 멕시코의 천재화가 프리다 칼로(1907~54)의 일생을 담은 영화 <프리다>가 개봉한다. 구릿빛 이마 아래 단호하게 그어진 일자 눈썹과 그 아래 검게 빛나는 눈동자의 프리다로 분한 배우는 멕시코 출신의 셀마 헤이엑이다. 마돈나, 제니퍼 로페즈 등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이 영화의 주인공 뿐 아니라 공동제작까지 맞은 헤이엑은 예술적으로, 정치적으로 또한 성적으로 열정의 화신이었던 프리다의 십대시절부터 40대까지 생동감있게 연기했다 영화는 분방한 소녀였던 프리다가 전차사고로 참혹한 부상을 입은 뒤부터 죽음 직전 첫 전시회를 열기까지 30년의 시간을 사랑과 예술이라는 두 축으로 이어나간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프리다가 자신의 작품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에게 보여주면서 두 사람의 길고 긴 인연은 첫 매듭을 묶는다. 스물 한살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두 사람은 정치적 동지이자, 예술적 동료로 부부의 연을 맺지만 여성과의 잠자리를 ‘악수 한번’ 정도로 여기고 사는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에게 육체적 상처 못지 않은 정신적인 고통을 안긴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여러번 자연유산을 하면서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내 인생에서 충돌사고는 두 차례였는데, 한번은 교통사고였고 다른 한번은 당신과의 만남”이라면서 “두번째가 훨씬 나빴다”고 퍼붓지만 두 사람 사이의 강렬한 동지애는 죽을 때까지 둘을 묶어놓는다. <프리다>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디에고의 바람기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프리다의 실제 작품 속에 포개 놓으면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에 대한 해설서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남편의 외도로 인해 분노에 찬 프리다가 머리를 싹둑 자르고 양복을 입은 모습은 <짧은 머리 자화상>으로 포개지고 말년에 척추가 내려 앉아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모습은 <부러진 척추>로, 뱃속의 아이를 잃고 절규하던 모습은 <생명의 열매>로 이어진다. 또한 셀마 헤이엑의 사실감 있는 연기와는 반대편에서, 열차사고 장면에서 황금가루가 뿌려지고 디에고가 킹콩의 애니메이션으로 묘사되는 등 감각적이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연출해 보는 재미를 덧붙이고자 했다. 에드워드 노튼, 애슐리 주드, 안토니오 반데라스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헤이엑과의 인연으로 비중이 작은 역을 자처해 등장한다. 뮤지컬 <라이언 킹>으로 토니상 연출상을 수상했던 브로드웨이 출신 여성 감독 줄리 테이머의 두번째 연출작품이다. 21일 개봉.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일본 드라마 내년부터 유료채널서 본다

2004년 1월1일부터는 일본에서 제작한 대부분의 드라마를 케이블이나 위성방송을 통해 볼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방송위원회는 11일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일본방송 2차 개방 계획안’을 발표하고 13일 관련 전문가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방송위 안은 12살 이상이면 시청할 수 있는 일본 드라마는 유료채널을 통해 방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거의 대부분의 드라마가 이에 해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중가요 분야는 뮤직 비디오를 포함해 한국 가수가 부른 일본어 노래나 한국과 일본이 공동공연을 하는 경우 등에 한해 제한적으로 개방적으로 개방하기로 했다. 또 생활정보 등 교양 프로그램은 전면 개방하는 한편 영화는 공인된 국제영화제 수상작과 15살 이하 관람가에 한해,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해서만 개방을 허용할 방침이다. 그러나 유료 채널에서의 오락 프로그램 개방은 보류됐으며, 지상파 텔레비전에서의 일본 방송 추가 개방은 여전히 보류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오광혁 방송위 정책3팀장은 “유료 채널에서 일본 전문 프로그램 공급자가 나오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며 “이미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방송위는 문광부와 공식 합의절차를 거친 뒤 전체회의 의결을 거쳐 안을 확정한다. 전종휘 기자 symbio@hani.co.kr

계몽적이지 않고 재밌게,<여섯개의 시선>

■ Story 여상 졸업반 선경은 취업에 중요한 것은 ‘외모 관리’라는 지도교사들의 닦달에 조바심이 난다. 쌍꺼풀 수술비를 벌어보겠다는 일념은 선경을 위험한 결단으로 내몬다(<그녀의 무게>). 이웃 감시 구조의 아파트에 신상이 공개된 성범죄자가 살고 있다. 이웃의 오줌싸개는 소금을 얻어오라는 엄마의 명령을 따르느라 아파트를 헤매다 경계해야 할 ‘그 남자’의 집에 다다른다(<그 남자의 사정>). 뇌성마비 장애인 문주에겐 취직도 사랑도, 외출도 쉽지 않다. 그래서 그는 리프트도 없는 지하도뿐인 광화문 네거리의 지상 도로를 무단 횡단하기로 한다(<대륙 횡단>). 아들의 영어 조기 교육에 열을 올리던 젊은 부부는 발음 교정을 위해 혀의 하단 근육을 잘라내는 설소대 성형술을 감행한다(<신비한 영어나라>).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운전자와 여성 매표요원 사이에 사소한 시비가 일고, 이는 ‘얼굴값한다’는 언쟁으로 번진다(<얼굴값>). 길을 잃은 네팔 노동자 찬드라는 한국 사람처럼 생겼다는 이유로 행려병자 취급을 받고 보호소와 정신병원에 6년 넘게 방치된다(<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 ■ Review <여섯개의 시선>의 포스터엔 배우가 없다. 턱시도를 차려입은 여섯 감독이 저마다 다른 포즈로, 저마다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채로 ‘따로 또 같이’ 어우러져 있을 뿐이다. 감독들이 이렇게 몸으로 때우는 포스터는 처음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세울 만한 배우가 없었는지, 여섯개의 단편을 아우를 시각적 아이디어가 궁했는지 따져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에 대한 설명은, 이 감독들의 명단만으로도 충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여섯개의 시선>의 단편들은 ‘차별’ 또는 ‘인권침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곤 서로 닮은 구석이 없다. “계몽적이지 않게 재밌게 만들자”는 것 정도가 합의된 사항일 뿐 장르도, 스타일도, 길이도 제각각이다. 각자 개성과 자율성을 발휘해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한 만큼 이는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니까 <여섯개의 시선>을 즐기는 방법은 이들이 인권이라는 동일 화두를 어떻게 ‘자기 식으로’ 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일 터이다. 하나. 임순례 감독의 <그녀의 무게>는 ‘용모 단정’의 필수 조건을 갖추지 못한 채 취업 전선에 뛰어든 여고생의 좌절을 따라잡고 있다. 학교와 사회는 성형수술과 다이어트를 권장하지만, 이는 집안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한 미션이다. <그녀의 무게>는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경쾌하고 직설적인 코미디지만, 웃음의 끝맛엔 슬픔이 남는다. 출구를 찾아 방황하는 청춘들(<세친구> <와이키키 브라더스>)을 껴안아주던 임순례 감독의 품은 여전히 따스하다. 그리고 한결 넉넉해졌다. “저 뚱뚱한 아줌마가 감독이라구요?” 촬영장을 지나치던 행인의 한마디로 맺음하는 그 여유를 보라. 둘. <고양이를 부탁해>의 정재은 감독의 도전은 낯설고 야심차다. “보장받을 가치가 없는 인권이란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 그가 품은 의문. 성범죄자의 신상 공개라는 민감한 사안을 골라잡은 그는 미래사회의 전체주의를 상징하는 적 공간에 한번의 실수로 영원히 치욕의 낙인을 안고 사는 <주홍글씨>적 인물을 결합해, 매끈한 SF적 우화를 만들어냈다. 여느 우화와 달리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오줌 싼 아이의 옷을 벗긴 채 소금을 얻어오게 하는 벌칙과 성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제도에서 유사성을 찾으려는 시도에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 셋. 여균동 감독은 <외투> <내 컴퓨터> 등의 단편을 통해 인권이라는 주제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대륙 횡단>에서 그는 일상을 영위하는 것이 대륙을 횡단하는 것만큼 힘겨운 장애인의 현실에 주목한다. 뇌성마비 1급 장애인 김문주씨의 일상을 따라잡은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는 ‘각본’이 실종돼 있다. 외출을 하고, 사진을 찍고, 연애를 하고, 가족의 경조사에 참석하는 것조차 힘겨운 일상이 십여개의 에피소드로 쌓이고 난 뒤, 영화는 리프트 없는 지하도뿐인 광화문의 지상 도로를 무단 횡단하는 문주씨의 ‘1인 시위’를 따라붙는다. 이처럼 <대륙 횡단>은 ‘정공법’으로 만든 인권영화다. 현실로 현실을 이야기하기. 드러내놓고 이야기하기. 넷. <죽어도 좋아>의 박진표 감독은 영어 콤플렉스가 불러온 아동 인권유린에 초점을 맞춘다. 낭랑하게 울려퍼지던 <알파벳송>이 R에서 막혀버린 것은 불길한 징조. 구강구조를 바꿔서라도 영어 발음을 좋게 해주겠다는 부모의 욕심은 어린 아들의 혀에 메스를 들이댄다. 아이의 울부짖음과 함께 적나라하게 중계되는 설소대 수술 실황은, 호러영화보다 끔찍한 공포와 분노를 전한다. 소재에 밝은 눈, 다큐와 극영화의 경계에 내디딘 발. <신비한 영어나라>가 <죽어도 좋아>와 같은 줄기에서 갈라져 나왔음을 짐작게 하는 증거다. 다섯. 박광수 감독의 <얼굴값>은 일종의 ‘깜짝쇼’다. 그가 인권을 이야기한다면 <그들도 우리처럼> <칠수와 만수> 같은 모양새가 될 것이다, 라는 안일한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하기 때문. 기획단계부터 ‘가볍게’를 부르짖던 박광수 감독은 ‘미녀’의 인권은 또 다른 방식으로 무시되곤 한다는 이야기를, 호러의 틀을 빌려 풀어내고 있다(차기작 <방아쇠>의 분위기를 가늠하게도 한다). 주차요원에게 ‘얼굴값한다’고 모욕을 준 운전자는 주차장에서 빠져나오자마자 그녀의 영정사진과 마주친다. 외모도 유령처럼 허상에 불과한 것인가. 이 소름 돋는 결말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여섯. 박찬욱 감독의 <믿거나 말거나, 찬드라의 경우>는 소재의 무게에 견주었을 때 미학적으로 대단히 자유로운 영화다. 행려병자로 오인받아 6년 넘게 한국의 정신병원을 전전한 네팔 노동자 찬드라의 실화는, 그가 거쳐간 관공서와 병원 관계자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재현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시점과 시제다. 과거 찬드라의 시점과 현재 제3자의 시점이 공존하는 것. 90%가량을 차지하는 찬드라의 시점숏은 ‘당신이 나라면…’이라는 영문 제목처럼 ‘입장 바꿔 생각해보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무능과 무지, 오만과 편견에 관한 풍자코미디(이건 진정 코미디다!)는 네팔의 찬드라와 마주하는 에필로그에 이르러 조용히 옷깃을 여민다. 길고 묵직한 여운을 남기며.

멕시코 버전의 <맥베드>,<시에라 마드레의 보물 SE>

1920년대, 멕시코의 소도시 탐피코에 몰려드는 외국인은 두 종류다. 이곳의 경제를 장악하고 있는 실권자거나, 아니면 본국에서 도피 중인 조무래기 범죄자. 멕시코인과 외국인 실권자 양쪽으로부터 배척당하는 범죄자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가끔씩 굴러들어오는 일용직이거나 구걸뿐이다. 돕스와 커틴 역시 그렇게 하루하루 간신히 입에 풀칠하며 살아간다. 예전에 이곳에서 금을 캐내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봤다는 노인 하워드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돕스와 커틴은 지금까지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몽땅 투자하여 금을 찾으러 가기로 한다. 아무도 정체를 알지 못하는 신비로운 작가 B. 트레이븐이 발표한 소설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은 소유에 대한 극단적인 불신과 반자본주의적 비판정신으로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출판사조차 트레이븐의 본명이나 얼굴을 알지 못했고, 작품들의 일관된 주제나 스타일을 보고 잭 런던이나 앰브로즈 비어스가 필명을 쓰는 게 아닐까, 혹은 유럽이나 남아메리카쪽의 혁명가가 아닐까 하는 추측만이 난무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중 전장에서 군인들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허망한 생사의 갈림길을 생생하게 목격했던 존 휴스턴이,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의 염세적인 테마에 이끌린 건 당연해 보인다. 그는 돕스와 커틴의 비극적인 모험담으로부터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고자 하는 욕망의 진공상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전후 최고 스타였던 험프리 보가트의 ‘로맨틱한 안티히어로’ 이미지를 완전히 깨뜨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원작의 비열하고 냉소적인 톤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했던 휴스턴은,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올 로케이션을 감행하며 아주 기이한 ‘안티-웨스턴-어드벤처 무비’를 탄생시켰다(전쟁 직후 영화 속에서나마 안락한 판타지를 기대했던 관객은 이 차가운 영화를 결코 사랑할 수 없었다. 대신 아카데미는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에 감독상과 각본상, 남우조연상을 안겨주었다). 그러니까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은 멕시코 버전의 <맥베드>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예언된 부와 명성, 그리고 동시에 예정된 파멸과 비극. 동전을 던져주며 “앞으로 내 도움없이 살아봐”라고 빈정거리는 미국인 자본가에게 모욕당하고, 구두닦이나 레모네이드 장수라도 하고 싶지만 외국인이기 때문에 배척당하는 사회에서 숨죽여 살아가던 사내들은 황금의 유혹에 홀린다. “모험을 해야 게임이 되지”라고 희망에 부풀어 고행을 자청하던 남자들은 자신들의 자유 의지가 능멸당하는 순간 점점 미쳐간다. 네오리얼리즘영화들을 떠올리게 하는 거칠고 황량한 배경, 스크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산의 품속은 광대한 만큼 동시에 옥죄어오듯 협소하다. 바위와 물과 바람은 사내들의 행로를 자꾸만 비틀고, 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내들은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보도록 강요당한다. 황금에 눈이 멀어 친구 커틴을 살해한(혹은 그렇다고 믿은) 돕스는 “양심이 있다고 믿으면 괴로워 죽을 거야”라며 가슴을 쥐어뜯으며 잠 못 이룬다. 죄지은 자들에게 수면이 약속하는 평화는 사라지고, 악마처럼 마녀처럼 시시각각 출몰하는 멕시코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영토를 약탈하는 백인들을 차갑게 비웃는다. 금맥을 발견함으로써 ‘왕이 되려 한 사나이들’은(존 휴스턴의 또 다른 영화이자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의 쌍둥이 같은 작품), 혹은 조셉 콘래드나 허먼 멜빌의 계보를 잇는 초라한 후예들은 일체의 낭만을 거부당한 채 운명적인 패배를 시인해야만 했다. 보물은 결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김용언 mayham@empal.com The Treasure of the Sierra Madre SE1948년 | 감독 존 휴스턴 출연 험프리 보가트, 월터 휴스턴, 팀 홀트, 브루스 베넷장르 드라마 DVD 화면포맷 1.33:1 오디오 돌비디지털 1.0 출시사 워너브러더스 ▶▶▶ [구매하기]

어떤 협박

한 사람이 포승줄에 묶여 조사를 받는다. 남의 물건을 훔치지도, 남의 등을 치지도, 남을 때리지도 않았다. 탈세를 한 것도, 밀수를 한 것도 아니고, 마약을 판 것도 아니다. 하다 못해 이웃집 여자랑 바람피우다가 들통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포승줄에 묶여 있다. 왜 그럴까? 난 모르겠다. 그를 잡아다가 조사하는 자들도 그 이유를 모른다. 그래서 그 이유를 그들은 그에게 묻기로 했다. “당신이 왜 조사를 받아야 하는가?” 얼마나 초현실주의적인 상황인가. 근데 이건 부조리극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이 땅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송두율 교수가 구속됐다. 참으로 너절하게도 그 사유가 국보법 위반이라고 한다. 북한에 다녀오고, 노동당에 가입을 하고, 여행 및 학회 운영 경비 받아쓰고, 북한의 학자들과 몇번 학술회의 열고, 수령님 초상집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는 것뿐이다. 개성에 출장을 가고, 평양에 쇼핑을 가고, 금강산에 소풍을 가는 시대에, 겨우 이 정도로 인신을 구속할 사유가 되겠는가? 당연히 안 된다. 검찰에서도 이 정도의 낯간지러운 사유로는 인신을 구속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왜 잡아 가둬야 하는가? 검찰에서 알고 싶은 게 바로 그거다. “대체 우리는 왜 송 교수를 잡아다 조사를 해야 하는가?” “우리가 그를 구속해야 할 필연적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실존적 물음이 검찰에서 밝혀내야 할 이 사건의 핵심의혹이다. 온갖 자료를 뒤지며 수사를 했지만,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건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이는 누굴까? 송두율! 그래서 그들은 일단 구속부터 하고 송 교수에게 묻기로 했다. “송두율, 당신이 여기에 잡혀와 조사를 받는 이유를 대라.” 얼마나 황당한가. 초현실주의 예술가를 가진 나라는 더러 있어도, 초현실주의 검사를 가진 나라는 오직 대한민국밖에 없을 게다. 송 교수를 구속하려면 제대로 된 사유를 제시해야 한다. 자기들이 장담했듯이 그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북한의 권력 서열 23위라는 사실을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떠들썩하게 그 난리를 치고도 검찰에서는 그 부분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한 모양이다. 이렇다 할 확증도 못 잡았으면서 검찰은 덜컥 구속 영장을 신청했고, 무슨 이유에선지 법원에서는 덜렁 영장을 내주었다. 제 발로 걸어 고향에 들어온 이 학자에게 ‘도주의 우려’가 있고, 국정원에 잠입해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다고 본 모양이다. 하긴, 초현실주의 검사도 있는데, 초현실주의 판사라고 왜 없겠는가? 저들은 자기들이 밝혀내지 못한 것을 송 교수에게 밝히라고 요구하는 중이다. “당신이 서열 23위 노동당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낼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이 구속당해 마땅한 사유를 당신 스스로 밝혀라.” 그에게 자백을 강요하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자기들이 져야 할 입증의 책임을 피의자(?)에게 떠넘기는 격이다. 그렇다면 좋은 수가 있다. 수사권을 아예 송 교수가 넘겨받아, 검사들을 포승줄에 묶어놓고 마구 불라고 닦달을 하는 거다. 제일 먼저 너희들이 뭘 불어야 할지 스스로 불라고 하면 어떨까? 검찰은 예술만 하는 게 아니다. 무대 위로 진출해 부조리극 연출을 하다가, 이제 종교계에까지 진출해 사제 개업을 했다. 고해성사를 하고 죄 사함을 받으라는 것이다. 태극기 아래 네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주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라. 이로써 검찰청사는 졸지에 성령 충만하고 은혜 넘실거리는 성전이 된다. 하기 싫다는 사람, 기어이 ‘전향’시켜서 황장엽처럼 반공 부흥회장 찾아다니며 ‘간증’이나 하며 먹고사는 애국 전도사를 삼을 작정인가? 검찰의 임무가 기껏 이교도를 ‘대한진리교’로 개종시키는 데에 있단 말일까? 할 일 되게 없다. 시간이 막 남아돈다. 거기도 구조조정 좀 해야겠다.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이라더니, 혐의 내용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구체적인 ‘행위’가 전혀 없다. 그래서 기껏 머릿속의 ‘생각’을 문제삼는 거다. 나리들께서 송 교수 저서의 이적성을 검토하겠단다. 자기들이 학술서적 심사위원씩이나 할 주제가 된다고 믿는 걸까? 무지 중에서 가장 무식한 무지가 이렇게 제 주제를 모르는 것이다. 지금 검찰이 송두율 교수를 붙잡아놓고 하는 짓은 아무 짝에도 쓸데없는 야만적 의식이다. 좋게 말하면 골 빈 보수층들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드리는 장수만세 위문공연, 나쁘게 말하면 허접한 혐의로 구속해놓고 석방과 전향을 맞바꾸자고 흥정하는 야쿠자 협박질이다. 그만하면 됐다, 마이 무구따. 애먼 사람 그만 괴롭히고, 이제 좀 풀어주라. 뭘 더 바라는가? 진중권/ 문화평론가

이 `머저리` 같은 남자들, <미저리>

강아지 부르듯 남자가 손짓을 했다. 영화관에서 나오던 사람들이 킬킬거렸다. 나를 ‘미저리’라고 부르는 남자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캐시 베이츠의 연기와 집착에 대해 생각하며 발걸음을 내디디던 나는 남자의 철딱서니없는 장난에 황량한 바람이 일었다. 당시 ‘가로왕창뚱땡이’인 나를 보고 ‘미저리’라고 단세포적으로 부른 것 같지만 그 영화의 끔찍한 장면이 얼굴에 확, 쏟아져내렸다. 폭력, 피, 고함소리를 유난히 싫어하는 나를 ‘미저리’라 부르며 좋아하니 잔혹의 모서리에 찔린 기분이었다. 남자는 남의 기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미에 걸신들린 듯 ‘미저리, 미저리’ 하며 신이 났다. 아, 이 ‘머저리’ 남자를 어쩌지요? ‘내 인생의 영화’ 하면 유별났던 남자들이 떠오른다. 그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장면만 줄줄이 고드름이다. 남자 복이 없든지 영화 복이 없든지 둘 중 하나다. 아니, 두 가지 다 그 모양 그 꼴인지도 모른다. 영화관에서 나온 뒤 헤어진 경우도 있고 그 잔상의 풍경이 마음을 괴롭혀 헤어질 결심을 할 때도 있었다. <닥터 지바고>를 본 건 1978년이다. 흥건한 눈물을 애써 참고 있는데 남자는 영화 보는 동안 내 눈치만 살피는 기색이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영화를 보러 온 건지 아니면 컴컴한 영화관에서 호시탐탐 나를 염탐하러 온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는 대충 짐작하지요? 시절이 시절인지라 남녀간에 손 한번 잡으려면 통상 1년 정도는 연애를 해야 했던 시절이니까. 그런데 평소 온순하고 말없던 사람이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예고도 없이 ‘꼬챙이’로 변신해 돌격해왔다. <닥터 지바고>가 아니고 그냥 영화에 대해 마구잡이로 찔러댔다. “사극 찍는 데 연탄재가 굴러다니고, 옷소매 사이로 시계 찬 게 보이지 않나, 하여간 영화하는 사람들 아직 멀었어요. 남이씨는 잘 모르겠지만.” 굉장한 발견을 특별히 누설하는 기분으로 열을 올렸는지 모르지만 남자의 돌변에 놀라 ‘아니, 이 남자가?’ 하는 마음만 들었다. 진한 감동의 여운에 흠뻑 젖어 있는데, 라라의 테마가 귓가에 맴돌고 있는데 그런 먼 나라 말들이 들어올 리 만무다. 어이가 없어서 멀뚱히 쳐다보니 자기 말에 감탄이라도 한 줄 알고 상하좌우 정신없이 찔러댔다. <닥터 지바고>의 장면이나 <라라의 테마>가 아수라장이 되는 기분, 정말 꽝이지요. 심지어 <베티블루 37.2°>를 보고 나온 한 남자는 침을 퉤, 뱉듯이 ‘뭔 영화가 이래!’ 하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돈만 버렸네, 시간 아깝네’ 하며 중얼거렸다. 이 ‘시들남’은 모든 걸 다 하찮게 보는 버릇이 있더군요. 별쪼가리에도 감동받는 나와 인연을 이을 수 없는 건 당연지사다. 가슴을 설레게 하는 포스터가 ‘넌 뭐야! 뭐가 불만이야!!’ 하는 소리에 위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영화만큼 강렬한 그 포스터 다 아시죠? 코미디영화를 보러 가서 혼자 뒤집어지던 남자도 생각난다. 희한한 웃음을 내 귀에 꽂아 경련을 선물한 남자. 그 이상한 웃음소리는 세월이 지난 지금 떠올려도 의아하다. 평소 음성이 참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웃는 소리가 어찌나 요사스럽고 천박하던지. 평소 소리없이 웃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그래서 평상시에는 그 괴이한 웃음소리를 감추느라고 벙긋거리기만 했는지도 모르지. 다들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무차별 기습공격을 하니 낸들 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나저나 난 왜 이런 허망한 일만 겪는 운명이지? 평온한 일상처럼 편한 영화데이트가 왜 오지 않는 거지? 새삼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니 흘러간 청춘이 아깝다.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들이 이상하게 내게는 운명처럼 이별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이상한 일도 다 있지요? 환상적인 데이트나 평생 잊지 못할 데이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저 수수하고 소박한, 그런 남자 어디 없어요? 겨울이 오기 전에 마음에 남는 영화 한편, 같이 보실까요?

섹스로 말의 불완전성을 그리는 영화 <정사>

살다보면 위장이 텅 빈 듯, 섹스가 고플 때가 있다. 영국에 사는 두 남녀, 클레어와 제이가 그런 사람들이다. 슬픈 눈을 가진 남자와 지적인 열망을 숨긴 여자는 매주 수요일에 만나, 아무 말 없이 섹스를 나눈다. 이름도 대화도 필요없는 두 사람의 섹스는 발기된 성기와 체질하는 육신과 부스러기처럼 남아 있는 음모와 반쯤 말려올라간 콘돔을 맨살로 드러낸다.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과, 프랑수아 오종의 <시트콤>과 카트린 브레야의 <로망스> 등등 이제 유럽 아트무비 속의 섹스는 어쩌면 유행일지 모르지만, <정사>의 섹스야말로 건조하고 절절하다. 환상을 걷어낸 섹스는 물질화된 공허와 물질화될 수 없는 육신의 감촉을 동시에 전달해준다. 이 영화의 섹스는 그야말로 실제상황인 것이다. 모든 영화적 요소를 충돌시키다 정사에서 에릭 고티에의 촬영으로 이루어진 케리 폭스와 마크 라일런스의 육체에 대한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오히려 그들의 육체를 롱숏으로 잡을 때와 똑같은 질감으로 다가온다. 파편화된 육체의 질감은 오히려 관객으로 하여금 카메라로 멀리서 그들의 행위를 관망할 때와 비슷한 소름끼치는 고립감을 느끼게 만든다. 접혀지는 피부로 장식된 인간의 육체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서 베르톨루치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듯, 파트리스 셰로가 또 다른 영국 출신의 화가인 루시안 프로이트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기도 한 루시안 프로이트는 미감 가득한 ‘누드’가 아닌, ‘네이키드 보디’ 즉 벗은 몸을 통해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잔인하리만큼 정직하게 노출했다. 마찬가지로 셰로는 정사에서 축축 처진 우리의 살갗들이 갖는 정서적 가치와 관계의 진원지로서의 몸을 직시한다. 바텐더인 제이나 연극배우 클레어 모두 수많은 타인의 시선과 관심을 끄는 직업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절절하게 상대의 육체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 늪 같은 관계의 공허함은 헤어진 아내 곁에서도 그녀를 만지지 못하고 고작해야 그녀의 팬티를 앞에 두고 수음을 하는 제이의 행동에서 절정을 이룬다(어쩌면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통한 셰로의 육체의 질감에 대한 성찰은 당분간 계속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근작 <그의 형제>에서 죽어 가는 주인공의 육신을 정물화 그리듯 스케치함으로써 육체의 실체를 다시 한번 묘파했다). 피부와 주름, 부숭부숭한 털, 머리카락에 파묻은 손의 적막과 아무렇게나 똬리 튼 등의 자세까지, 영화 시작에서 제이의 육신을 훑는 고티에의 카메라는, 육체가 없다면 관계도 존재할 수 없다며 마치 현미경을 장착하듯 주인공의 육체에 카메라를 들이민다. 그리하여 정사는 파트리스 셰로의 그 어떤 영화보다 미세한 감정적 떨림까지 잡아내는 섬세한 연출력으로 감각적인 생명력을 터득한다. 일례로 그는 섹스신이 아니라 오히려 제이가 자신의 두 아들과 목욕탕에서 행복한 한때를 보낼 때 오직 그 기억에만 슬로모션을 준다. 그것은 너무나 행복한 과거라 현재를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기억이다. 게다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 아내를 둔 제이와 앤디의 집안은 오히려 따뜻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파트리스 셰로는 모든 영화적 요소를 충돌시키고 역발상으로 배치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룬다.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것 같은 바(bar)나 버스, 기차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혼자 사는 제이의 집의 적막함을 충돌시키고, 보헤미안적인 삶을 영위하는 제이의 푸른 빛과 전형적인 런던 중산층 집안인 앤디의 황금빛을 충돌시킨다. 문만 열면 소음투성이인 런던의 길가에서 제이는 처음으로 클레어를 미행한다. 격렬한 정사가 영화의 주제를 드러내는 따옴표라면, 들고 찍기로 찍힌 이 길거리 장면은 제이의 클레어에 대한 흔들리는 마음과 허물어지는 일상과 잡을 수 없는 소망, 꿈, 방향상실감을 숨겨놓는 괄호처럼 보인다. 런던, 깊숙이 자신의 욕망을 숨긴 도시 혹 당신의 삶도 그러한가? <정사>에서 모든 사람들은 몇날 며칠이 아니라 무슨무슨 요일로 삶을 헤아린다. 예를 들면 수요일에 친구를 만나고 토요일에는 해고를 당하고 화요일에는 극장에 오는 식이다. 이와 함께 <정사>에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공간과 음악이다. 공간과 음악. 당연히 1969년부터 오페라 연출자로 일한 파트리스 셰로의 경력이 수렴되는 이 두 가지 요소는 <정사>에서도 가장 효과적인 메타포로 빛을 발한다. 제이는 가족을 떠나올 때 오직 존 레넌의 사진만을 가져왔고, 빌리 조엘을 싫어한다. 클레어는 제이가 모은 CD들에 관심을 보이며 격렬한 섹스로 빠져든다. 크래시와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이 떠도는 정사는 오로지 영국의 뮤지션들로 철저히 채워져 런던의 에너지 넘치는 공기를 미묘하게 진동시킨다. 또한 두 사람이 격렬한 섹스를 나누는 제이의 아파트는 화장실과 함께 쓰는 클레어의 연극무대처럼 남루하고 비어 있다. 남자의 사적인 공간인 집이 여자에게는 공적인 공간이 되고, 여자의 사적인 공간이 남자에게는 공적인 공간이 되는, <정사>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런던 노동자 계급 버전을 연상시킬 것이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여왕 마고>라는 230억원짜리 프랑스 코스튬드라마로 일약 유명해진 파트리스 셰로가 왜 하필 영국계 배우들과 함께 파리가 아닌 런던에서 영화를 찍기로 마음먹었는가 하는 점이다. 물론 하니프 쿠라이스의 원작 <나이트 라이트>의 배경이 런던이고, 셰로는 “너무나 포토제닉한 도시, 빨강과 녹색과 자주로 물든 런던의 색깔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야기하지만 말이다. 사실 약물과 크래시의 음악과 이층버스가 함께하는 런던에서 격렬한 섹스가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은, 다른 어떤 유럽 도시보다 런던이 무엇인가 깊숙이 자신의 욕망을 숨겨놓은 듯 느끼게 만든다. 한때 데니 보일이 보여준 스코틀랜드가 그러했듯이, 셰로가 보여주는 지금 여기의 런던에서 실재하는 모든 것은 신화나 낭만의 코러스가 아닌 현실의 파열음을 내면서 다가오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은 늘 시끄러운 소음과 타인의 시선이 버글버글한 공적인 장소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막상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혼자서 담배를 뻐끔거릴 뿐이다. 이 도시에서 그들은 정말로 무언가 삶을 잊을 만한 강력한 것을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만약 파트리스 셰로가 다시 한번 파리에서 외로움에 지친 중년 남자의 탱고를 찍으려 했다면, 정말 이 영화는 ‘파리의 마지막 정사’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상처란 삶이 주는 가장 깊은 문신 그리하여 반쯤 처진 여자의 젖가슴이 움푹 팬 남자의 옆구리에 안부를 묻는다. 한 때는 당당하게 자신의 여자를 휘감던 남자의 다리가 누군가의 손길을 원하는 여자의 어깨에 사그라들지 못하는 열망을 얹는다. 정사는 결국 35분짜리 리얼터치섹스에 관한 영화였던가. 하드고어가 B급영화에서 주류 공포영화 속으로 진입하고, 하드코어가 포르노에서 유럽 아트영화 속으로 진입하는 가운데, 벌거벗은 섹스라는 코드에 가장 민감한 감독들이 대부분 프랑스 출신이라는 점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팻걸>과 <로망스>의 카트린 브레야나 <트러블 에브리데이>의 클레어 드니, <돌이킬 수 없는>과 <아이 스탠드 얼론>의 가스파 노에,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의 프레드릭 폰테인과 프랑수아 오종까지. 린다 윌리엄즈가 지적한 대로 정치와 섹스와 철학을 함께 엮어내었던 사드의 후예들답게 이들은 때론 금기를 깨는 철퇴 같은 섹스를 휘두르기도 하고 로망스의 허상을 폭로하는 섹스를 들이미는 등 천차만별의 뉘앙스를 신음섞인 인간의 몸짓에 부여한다(이 점에 있어서 출신 성분이 예외적인 감독이라면 <백치들>에서 바보들의 짓거리로 경량급의 혼음난교를 펼쳐 보인 덴마크의 라스 폰 트리에 정도가 있을까). 그러나 파트리스 셰로는 이러한 일단의 프랑스 감독들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이고 육감적인 방식으로 섹스 액트(sex act)에 접근한다. 기이하게도 정사는 섹스를 통해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사는 여전한 소외와 익명의 섬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으로 육체적 관계를 탐구하지만, 결국 마지막 방점을 찍는 것은 육체를 통해 확인되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관계에 숙명적으로 따라붙는 ‘말의 불완전성’이다. 아무 말 없이 섹스를 나누며 시작된 둘의 관계는 처음으로 남자의 ‘집’에서 ‘말 다운 말’을 나눈 뒤 파탄에 이르른다. 아내의 부정을 알아챈 남편은 고작해야 아내의 연기 실력이 얼마나 한심한지 추궁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무감각하게 와서 재미를 보는 것’은 아니냐고 따진다. 나말고 누군가 있다는 게 정말 고통스럽다고 고백하며 두 사람 모두 한줄기 눈물을 흘리지만 이 소금물줄기는 오해와 불신으로 점철된 말의 위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사그라든다. 그래서 <정사>는 보면 볼수록 주인공들의 행위에서 멀어져서 그들의 소통 불가능성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그런 영화이다. 피와 땀이라는 체액으로 잔혹의 역사를 복원시켰던 파트리스 셰로는 다시 한번 <정사>에서 피부는 인간의 가장 좋은 옷감이며, 상처란 삶이 주는 가장 깊은 문신이라는 점을 일깨운다. 기존의 연기가 에로티시즘의 후광을 두른 연기였을 뿐임을 여실히 깨닫게 만드는, <정사>는 육체가 존재를 증거하는 한바탕의 퍼포먼스이자, 정사는 여전한 배고픔이고 외로움이며, 유일하게 살아 있음을 약속하는 익명의 초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