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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뉴스(2003)

CJ ENM, 콘텐츠 제작에 5년간 5조 투자... 글로벌 토탈 엔터테인먼트 꿈꾼다

CJ ENM이 콘텐츠 제작에 5년간 5조원을 투자해 영화, 드라마, 웹툰, 공연 간 트랜스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완결형의 자체 제작 생태계 구축에 나선다. 강호성 CJ ENM 대표는 31일 마포구 상암동 CJ ENM에서 비전스트림 행사를 열고 ▲콘텐츠 제작 역량 고도화 ▲음악 메가(Mega) IP 확보 ▲디지털 역량강화 ▲ 제작역량 글로벌화에 대한 성장 전략을 제시했다. 올 한해만 8천억 원을 투자해 글로벌 토탈 엔터테인먼트로 도약하겠다고 밝힌 CJ ENM은 최근 영화 <터미네이터> <미션임파서블>로 잘 알려진 미국 제작사 스카이댄스와 협력 계약을 맺어 <호텔 델루나> 등의 자사 IP를 리메이크 중이며, 애플 TV+와 공동 기획·제작 계약을 체결해 글로벌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미국 드라마 <더 빅 도어 프라이즈>를 만든다. 아울러 콘텐츠 제작 역량의 고도화를 위해 경기 파주에 단일 규모로는 국내 최대인 6만5천 평 규모의 콘텐츠 스튜디오도 제작 중이다. 초점은 콘텐츠 사업자가 고객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D2C(Direct to Consumer) 플랫폼으로서 CJ ENM의 디지털 역량 강화의 핵심축인 티빙에 모아졌다. 양지을 티빙 공동대표는 지난해 10월 출범 후 누적 유료 가입자 수가 63%, 같은 기간 앱 신규 설치율은 67% 증가했다고 호조세를 알리며 올해 1월 합작법인을 출범한 JTBC 스튜디오, 전략적 협업을 맺고 멤버십 상품을 출시한 네이버와 교류에 힘을 실었다. 양 대표는 3사의 제작 스튜디오-유통 플랫폼 간 시너지를 통해 “디즈니, 넷플릭스 등 해외 사업자들과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시기를 대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타 PD 출신으로 티빙에 합류한 이명한 공동대표는 오리지널 투자의 50% 이상을 프랜차이즈 IP에 집중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올해 1월 처음 선보인 오리지널 <여고추리반>처럼 “텔레비전을 통해 이미 사랑받은 IP에 티빙만의 재미를 더하는 ‘부가 콘텐츠’, ‘스핀오프 콘텐츠’로 팬덤 확장”을 꾀하겠다는 취지다. 이같은 방침 아래 티빙은 2023년까지 약 100편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 800만명의 유료 가입자를 확보하고 내년에는 글로벌 시장으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향후 멀티 스튜디오 구조에서 제작된 CJ ENM의 콘텐츠는 티빙뿐만 아니라 넷플릭스를 비롯한 글로벌 OTT에도 공급해 수익성을 극대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최근 IPTV 3사와 수신료 인상을 놓고 갈등을 겪은 CJ ENM은 수신료 인상을 통해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는 수익 구조를 갖추야한다는 입장도 다시 내비쳤다. 강호성 대표는 K-콘텐츠의 질적 성장과 국내 유통·분배 구조의 비대칭을 지적했다. 그는 “제작비의 100~120%를 수신료로 받는 미국 시장에 비해 우리는 3분의1 수준에 그쳐 나머지를 부가수익인 협찬 등에서 찾아야한다. 수신료를 이유로 해외 사업자에 가면 IP를 모두 넘겨 하도급에 불과해진다”고 문제를 설명하면서 유통, 분배 구조의 선진화를 위해 수신료 인상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에릭 로메르: 은밀한 개인주의자>, 로메르에 대한 진실의 지표

에릭 로메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도덕과 계절의 연작, 비극보다는 희극, 영화 애호가이자 비평가였던 그를 생각한다. 우리에게 로메르는 도덕과 욕망의 순례자였고, 예술적 호기심의 다양성 자체였다. 그의 작품이 주는 단아하고 가벼운 리듬과 심오하고 낭만적인 문체는 그를 ‘현대적이고 문학적인 연출가’로 완성시켰다. 그러고 보니 그 어떤 정보도 영화의 바깥쪽을 가리키지 않는다. 개인으로서 그가 무슨 에피소드를 지녔는지 우리는 듣지 못했다. 이를테면 마리 리비에르, 아리엘 돔바슬, 로제트, 파스칼 오지에와 같은 여배우들과 그의 필모그래피를 연대기적으로 연결해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에릭 로메르: 은밀한 개인주의자>라는 이 책의 제목처럼 그의 면면은 은밀하게 감춰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전기가 발간된다는 소식은 놀라웠다. 로메르가 자신의 글쓰기 전략을 어떻게 숨겼으며 스스로의 흔적을 지웠는지를 설명하는 진실의 지표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저자인 앙투안 드 베크와 노엘 에르프가 집필에 뛰어든 계기는 ‘아카이빙 자료’의 존재였다. 2010년 1월 로메르가 숨지기 직전에, 그는 자신이 가진 자료와 영상들을 IMEC(동시대 출간 기념회)의 파리 사무소에 위탁하기로 결정했고, 그리하여 그의 사후에 140여개의 박스가 노르망디의 도시 캉에 위치한 IMEC 협회의 본관으로 이전됐다. 12세기 수도원 건축물을 재건축한 그곳의 자료실에서 한동안 이들 수집품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일부 평론가들과 학자들이 1994년에 방영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바탕으로 이들 문서의 내용을 추측했지만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아카이브 자료에 그가 만든 영화의 다양한 시나리오 버전이 속해 있을 것이란 추측이 나돌았고, 학창 시절 로메르가 작성한 노트가 다수 존재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했다. 어쩌면 보이지 않는 빛의 환상에 둘러싸인 듯, 로메르는 숭고한 영화감독의 영역에서 오직 영화만을 통해 언급됐다. 가장 먼저 아카이브 자료에 접근할 권한을 얻은 이는 앙투안 드 베크였다. 이후 그는 노엘 에르프에게 연락했고, 두 사람은 함께 캉의 보관소로 향했다. 그들은 로메르 영화의 제작 과정을 먼저 연도별로 분류했다. 하지만 서류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애초의 집필 계획은 변경되었다. 예를 들어 1969년작인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의 원작 소설이 1944년에 작성됐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비행사의 아내>(1980)의 원류 격인 단편소설이 1946년에 처음 작성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따라서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은 필모그래피 순서로 기술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로메르의 본명인 ‘모리스 셰레르’가 남긴 자료들에 의해, 그가 감독 ‘에릭 로메르’가 되어가는 과정을 시간순으로 추적한다. 따라서 비교적 사적인 시간의 흐름에 몰두해서 본문 내용이 진행된다. 이를테면 영화 <클레르의 무릎>(1970)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1970년 즈음에 적힌 ‘네편의 도덕 이야기’ 분량을 찾아서 읽어야 하고, 더불어 1949년 12월 5일에 그가 ‘질베르 코르디에’라는 가명을 사용해서 작성한 단편소설의 집필 과정도 함께 찾아야 한다. 저자들은 최대한 의견을 배제한 채 감독이 남긴 자료를 바탕으로 글을 써내려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2014년에 온전히 예술가 중심의 전기가 탄생했다. 흥미로운 반전이 이 과정에서 몇몇 발견된다. 비록 로메르는 늦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비평가로서 그가 ‘실패했다’고 단언하는 사람은 없었다. 영화비평가로서 그는 앙드레 바쟁과 비교해서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이른바 ‘히치콕 논쟁’을 포함해서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자로서 그는 <포지티프>와 구분되는 잡지의 정체성을 완성한 장본인이다. 하지만 책은 편집장의 자리에서 물러날 당시의 그를 이렇게 적는다. “어느 날 로메르씨는 쫓겨났다”고. 자크 도니올 발크로즈의 이러한 언급은 다소 복합적이지만 독자로서는 충격적이다. 이 과정을 통해 서서히 그에 관한 선입견이 사라진다. 로메르가 남긴 여러 연작들 대신에, 중요한 것은 그가 추구한 ‘교육자’로서의 면모와 상상력 없는 ‘남자’적인 취향임을 깨닫게 된다. 심지어 어머니에게 자신이 감독이란 사실을 숨기면서까지 그가 보호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끊임없이 ‘실패’하고 ‘구체적 변형’을 거쳤던 그가 그럼에도 특유의 ‘독일식 취향’이나 ‘페르스발’에 관한 연극적이고 회화적인 방식을 중요시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의 영화 <갈루아인 페르스발>(1978)을 떠올린다. 이 책은 로메르가 택한 교육적인 노선이 그의 작품이 지닌 희극적이고 혼동스러운 관습의 발아 지점과 겹치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스스로 빚어낸 선하고 빛나는 ‘고립’이 ‘로메르적인 것’의 기원이며, 또한 사적이고 미학적인 고집이 사회가 아닌 스스로에게서 출발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런 의미에서 로메르는 진정한 ‘개인주의자’일 것이다. 한결같이 우리의 생각은 기존의 로메르로부터 벗어난다. 그의 대표작이 담은 자연과 사실의 요소들, 젊음의 순간적 아름다움, 명쾌함과 지적인 뉘앙스가 전부가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 어쩌면 이 책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집필됐고, 로메르가 숨긴 전체를 보여주기 위해 기획됐다. 마치 본인이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로메르는 자신의 일부를 드러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의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은 단 하나의 예술 영역이 ‘영화’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모두가 알다시피 로메르는 늦깎이 데뷔를 했고, 고전적이지만 현대적으로 보이는 프랑스영화의 견본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누구도 어린 모리스가 사촌들과 함께 연극을 했고, 진지하게 대사를 연기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이 저작은 가장 근원적이고 기본적이며, 또한 독창적인 로메르를 발견하게 만든다. 그는 온갖 호기심에 휩싸인 모습으로, 모순을 가진 채 살았다. 그런 탓에 우리는 잊힌 그의 텔레비전 연출작을 찾아보아야 하고 사라져버린 필름을 되살려야만 한다. 두꺼운 표지 때문인지, 음울한 흑백사진 때문인지, 책의 첫인상은 지나치게 고전적이었다. 게다가 모리스 셰레르라는 생소한 이름이 프루스트의 구절인 양 생경하고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소설 속 ‘마들렌’을 대하듯 천천히 ‘클레르’의 안시 호수를 떠올렸고, 비아리츠 바닷가의 ‘녹색 광선’을 상상했다. 개인적으로 캉대학교 재학 시절에 만났던 노엘 에르프의 이름을 되살리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한 학기 내내 그가 열정적으로 소개했던 ‘시적 리얼리즘’의 리듬과 로메르의 클래식한 취향이 겹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이야기들은 비자발적인 기억을 소환해내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 “작은 마르셀은 작가가 되었다”를 떠올리며 “작고 성실한 셰레르는 영화감독이 되었다”라고 적는다. 누구나 알고 있는 세상의 영역을 로메르는 순간의 예술로 포착하는 작가였다. 이제 로메르에 관한 “깨지기 쉬운 로즈버드와 비슷한 어떤 것”들은 더이상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다.

'단편영화가 발굴한 감독들' 될성부른 감독들의 시작

될성부른 감독은 단편에서부터 반짝반짝 빛난다. 20년간의 한국 단편영화 궤적을 총망라한 이번 미쟝센단편영화제에는 감독의 현재와 과거를 비교하거나 혹은 고유의 인장을 재확인할 수 있는 재기 넘치는 작품들이 상영된다. <엑시트>의 이상근 감독은 한때 웃음기 없는 단편을 만들었다. <감상과 이해, 청산별곡>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선생님과 계속 공격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학생의 대화를 담다가 막판에 서늘한 반전을 제시하는 사회 드라마다. <살아남은 아이>의 신동석 감독이 연출했던 단편 역시 장편과 소재가 사뭇 다르다. <가희와 BH>의 BH는 고시 공부에 집중할 수 없다며 최근 헤어진 여자 친구를 찾아서 몇년 전에 줬던 물건을 돌려달라고 다짜고짜 신경질을 내고 집 안 곳곳을 헤집는다. <한공주> <우상>의 이수진 감독은 ‘웃픈’ 블랙코미디를 만든 적이 있다. <적의 사과>는 노동자(간호조무사였음이 밝혀진다)와 전투의경이 대치하다가 허무한 이유로 다리 한쪽을 잘라내야 할지도 모르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린다. 김종관 감독은 짧은 단편에서부터 감독의 아이덴티티가 형형히 빛난다. 배우 정유미의 탄생을 목격할 수 있는 <폴라로이드 작동법>, 6시간 후 낙태 수술을 받기 위해 분투하는 청소년 커플을 카메라가 좇는 <사랑하는 소녀> 두편이 이번 특별전에서 상영된다. <숨바꼭질> <장산범>의 허정 감독 역시 호러 장르에서 보여준 그의 장기가 단편에서도 확인되는 경우다. <저주의 기간>은 2년 전에 잃어버린 개를 매개로 아이들에게 벌어지는 섬뜩한 미스터리를 다루고 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김초희 감독의 <산나물 처녀>는 감독만의 독특한 감성과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해온 배우 윤여정의 행보를 확인할 수 있는 귀여운 단편이다. 윤성호 감독은 <은하해방전선> 이전에도 그다운 단편을 찍었다. <이렇게는 계속 할 수 없어요>는 원래 찍으려던 영화를 찍지 못한 대신 예술과 연애에 대한 여러 인용들을 자기 기준으로 해석하는 구성을 취했는데, 이후 <은하해방전선>에도 이 단편의 어느 장면이 재인용된다. <침입자>의 손원평 감독이 만든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은 제목 그대로의 남자 캐릭터를 양익준이 연기한다. 순수하게 자신의 노동을 즐기는 그를 줄곧 무시하는 텔레마케터 여성은 살아남으려면 적당히 속물처럼 굴어야 한다고 믿는데, 자본주의사회의 ‘인간성’에 대해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던진다. <혜화, 동> <소울메이트>의 민용근 감독의 <도둑소년>은 엄마의 시신과 6개월 동안 함께 살았던 일본 청소년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눈에 커다란 점이 있고 햇반, 스팸, 동전 같은 것을 무표정으로 훔치는 소년의 얼굴을 집요하게 클로즈업하며 그와 가까워지기를 갈망한다. <우린 액션배우다> <악녀>의 정병길 감독이 연출한 <락큰롤에 있어 중요한 것 세가지>는 일본의 인디밴드 기타울프의 한국 내한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건방지다는 사실 하나로 베이스가 됐다느니 경력이 10개월이라느니 하는 말을 듣다 보면 페이크 다큐멘터리인가 싶지만, 실존하는 밴드이다. ‘가오’가 중요하다는 로큰롤 정신 그 자체로 만든 에너제틱한 단편이다.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카트>의 부지영 감독은 단편 <눈물>에서 이유 없이 눈물을 흘려 주변에서 이상하게 바라보는 소녀와 사내를 만나게 한다. 소녀의 눈물과 공간의 침잠을 환상적으로 연계해 연출한 신이 인상적이다.

'소요산' '동두천' 김진아 감독, VR을 통해 여성 재현의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했다

“욕망과 디아스포라”. 2019년 뮌헨에서 열린 김진아 감독의 회고전의 타이틀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정확히 요약한다. 유학 생활 6년 간 거식증을 포함한 자신의 일상을 비디오 카메라로 기록한 후 157분의 비디오 에세이로 편집해 탄생한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 사랑하는 남편과 관계에서 임신이 잘 되지 않자 한국에서 온 불법체류자 지하(하정우)와 비밀리에 잠자리를 갖는 중년 여성 소피(베라 파미가)가 주인공인 <두번째 사랑> 등 김진아 감독의 영화는 늘 여성의 욕망과 이방인의 정서를 담고 있었다. 그가 만든 VR 영화 연작 역시 여성주의와 타자성과 관련이 깊다. 1992년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사건을 다룬 <동두천>, 1970년대 초 성병에 걸렸다고 의심받는 기지촌 여성들을 감금하고 치료했던 ‘몽키 하우스’가 배경인 <소요산>은 김진아 감독의 ‘미군 위안부 3부작’에 해당한다. UCLA 영화과 종신교수로 재직 중인 김진아 감독이 현재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포함한 일로 한국에 체류 중이란 소식을 듣고 만남을 청했다. <동두천> <소요산>을 감상할 수 있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XR 섹션 ‘비욘드 리얼리티(Beyond Reality)’는 인천국제공항 제1교통센터에서 7월 18일까지 열린다. -워낙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비디오 아트와 설치 미술, 독립영화와 대기업 스튜디오 영화를 자유롭게 오갔던 터라 VR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처음에 VR 작업을 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 =원래 미술을 전공했다 보니까 이 내용은 판으로 찍었으면 좋겠다, 설치 미술로 해야겠다, 퍼포먼스용이다 하면서 매체를 자유롭게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은 분명 있다. VR은 2016년 처음 붐이 일어났을 땐 다른 극영화를 준비하느라 바빠서 크게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VR에 관한 국제 컨퍼런스 모더레이터를 맡게 된 거다. 잘 모르면 민폐라는 생각이 들어서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다. 참석자들이 발제하는 글을 미리 읽고 준비하다 보니 VR의 핵심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치 유레카처럼, 내가 그토록 영화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윤금이 이야기를 VR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파바박! 하고 들었다. -감독님에게 주한미군 윤금이 씨 살해사건이 큰 숙제였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내가 서울대학교에 들어갔던 1992년에 윤금이 사건으로 학교가 시끌시끌했다. 내겐 너무 큰 사건이었다.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 개인이 처절하게 살해된 사실 자체가 묻혀버릴 뻔했다는 것, 무엇보다 그 이미지를 직접 사용한다는 게 가장 충격적이었다. 한 여성이 죽은 모습을 세상에 보인다는 것 자체가 너무 큰 폭력이었고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든 언론에 그 이미지가 나갔다. 폭력의 재현은 보는 사람에게도 그 피사체에게도 굉장한 폭력이라는 생각을 그때 직관적으로 했다. 왜 이 이미지가 포스터나 데모할 때 돌리는 전단지에 나와야 하는가에 대해 항의도 많이 했는데, 결국 학생회에서 돌아오는 답은 “위에서 그렇게 결정이 났다”, “이미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참을 수가 없었고 같은 여성으로서 너무 아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이 훼손된 사체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미지를 착취하며 그 반대가 됐으니까. 그 사진을 사용해야 한다고 끝까지 우겼던 사람들의 입장은, 이 정도 충격적이고 선정적인 무언가가 있지 않으면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결국 한미관계 역사상 최초로 주한미군 케네스 마클은 한국 법정에 섰고 실형을 받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승리라고 생각한다. =전단지에 있는 말도 안 되는 영어 문구로 된 이상한 슬로건이 몸에 낙인을 찍는 것처럼 베였다. 이 사건이 창작을 하는 내게 어떤 정체성을 만들어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시아, 그것도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살아가는 여성이구나. 언어의 제국주의를 당해내지 못해서 얼렁뚱땅 영어로 된 표현을 할 수밖에 없는 후기 식민주의 사회의 한 존재라는 게 너무 강렬하게 체화됐고 이후 내가 만든 모든 작품도 결국 그 얘기였던 거 같다. 윤금이 이야기를 극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는데 매번 같은 딜레마에 봉착했다. 이 여성의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이미지를 착취하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는데 없었다. 기본적으로 2D 시네마 매체 자체에 우리가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심리학적 기제가 관음이다. 자본주의 사회와 결탁해서 영화로 장사를 하면 결국 폭력과 섹스를 벗어날 수 없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영화 문법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VR을 체험하고 난 후 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고 불이 딱 켜지듯 생각이 든 거다. 그렇게 <동두천>을 만들었다. 내가 VR을 하게 된 건 1000%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소요산>은 1970년대 초 설립된 기지촌 여성들을 감금하고 치료했던 ‘몽키 하우스’를 담았다. 이 소재는 어떻게 발견했나. =2015~16년 사이에 촬영 로케이션 스카우팅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다가 몽키 하우스에 가게 됐다. 아주 어렴풋이 정부가 기지촌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를 하고 낙검자들을 관리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 건물이 그렇게 멀쩡하게 남아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국사회가 잘 살게 되면서 한때 낙후됐던 동네를 완전히 싹 밀어내고 고층 빌딩을 올려서 다시 알아볼 수 없는 동네가 되기도 하는데, 그런 와중에 기지촌 여성들의 슬픔과 고통이 맺힌 장소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너무 희한했다. 이 건물을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게 너무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다음 작품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거다. -미군 위안부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VR 매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나. =영화는 감독의 편집에 의한 거의 강압적인 주체성이 있다. 감독이 보여주는 것만 관객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학생들에게 다큐멘터리를 가르칠 때 중립적인 프레임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프레임을 잡는 순간 그 밖의 세상은 모두 버리는 거다.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독단적이고 남성적이고 반민주적인 매체다. 그에 반해 VR은 감독이 컨트롤할 수 있는 게 없다.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관객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스토리텔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되게 난감해하는 감독들도 많은데 오히려 난 그게 너무 재미있었다. 실험연극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궁극적으로 <동두천> <소요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게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어떤 시공간에서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쓰러져서 없어진 분들이다.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귀신이라 불러도 좋고 유령이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있는, 어쨌든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 안에서 떠도는 존재들이다. 이 분들을 어떻게 표현하는 게 맞을까, 보여주지 않는 게 맞다. -당신의 작품에는 늘 유목민으로서의 시선이 녹아있거나, 욕망하는 여성을 다뤘다. 이 테마가 <동두천> <소요산>에는 어떻게 연결이 되고 바뀌었나. =어느 나라건 20대 여성이라면 내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자리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뿌리내릴 수 없는 여성의 정체성을 기록한 게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였다. 난 실제로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유목적인 삶을 살았다. 욕망과 디아스포라에 대한 이야기는 <그 집 앞>과 <두번째 사랑> 같은 극영화에서 더 강해졌다. 여성들에겐 주어진 한계가 분명하게 있는데, 그런 금기나 사회적인 제약을 깨게 하는 것은 결국 욕망이고 그게 멜로드라마의 본질이다. <두번째 사랑>에서 소피나 지하가 하는 행동은 결국 금기를 건드리는 것이다. 욕망 때문에 선을 넘고 나면 원래 갖고 있던 자기 정체성에 대한 향수가 생기고 분열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디아스포라다. 그런데 여자는 나이가 들면 행복해지는 게 있다. (웃음) 개인의 분노가 사회로, 나보다 더 변방에서 타자로 살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대변해야겠다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많이 했다. 미국에서 종신교수가 되면서 이 생각이 더 강해졌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주립대 교수로서 여러 가지 사회 활동을 하면서 내가 누군지, 내가 가진 한계가 무엇인지도 봤다. 그리고 한미 관계에서 사라진 여성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두 언어를 다 쓰는 사람들이 쿨하고 멋있다고들 하는데, 사실 비극적으로 끝나버린 쌍둥이 같은 존재가 미군 위안부와 기지촌 여성들이다. 한미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버려지고 소외당하고 양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진짜 유목민이다. 기지촌을 평생 떠날 수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디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완벽한 유목민들. 어렸을 때는 내 이야기를 더 많이 했다면, 나이가 들고부터는 내가 아니면 기지촌 여성의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작품 세계도 변한 것 같다. <동두천> <소요산>엔 전작과 다른 에너지가 있다.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는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찍었다면, <동두천> <소요산>은 여성의 몸을 이야기하기 위해 몸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때는 시각 예술가로서 작업하던 때라 진짜 래디컬한 생각을 많이 했다. 여성의 몸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실험하는 작품도 많이 기획했고, 그중 하나가 <김진아의 비디오 일기>였다. 서사로 풀어가는 극영화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보여줘서는 안 됐다. 미군 위안부 3부작의 미학적 전략의 키워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몸의 부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여성의 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제나 재현 윤리의 한계에 봉착한다. 몸을 보는 순간 생기는 많은 심리적 기제들은 이미 세상이 그렇게 되어있기 때문에 내가 멈출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보여주지 않는데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주는 충격은 상당하다. 그리고 아주 불편하다. -자신의 몸으로 다양한 실험을 했던 초기작의 경험이 있어서 몸의 부재로서 몸을 이야기하는 지금의 작업도 가능하지 않을까. =음, 맞는 것 같다. 워낙 내 몸을 재료로 너무 미친 짓을 많이 해봐서. (웃음) 보여준다고 해도 남성적 시선과는 다르게 보여주는 것 같고. <그 집 앞>에서 여성이 혼자 자위를 하다 오르가슴을 느끼고 눈물을 흘리는 6분짜리 롱테이크 신이 있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충격을 많이 받았다. <두번째 사랑>에서 소피가 먼저 옷을 벗는 신도 남자들이 되게 불쾌해했다. 여성의 몸이 보여지는 관습과 전통이 있는데 그것을 따르지 않아서 불편한 거다. -헨리와 양자경이 나온 한중 합작 영화 <파이널 레시피>는 어떻게 작업하게 됐나. 요리 대회 이야기다. 김진아 감독의 작품 중 유일하게 여성의 신체에 관한 영화가 아니며 CJ E&M과 함께 작업했다. =<두번째 사랑>을 만들고 나서 여러 투자사에서 연락이 왔다. 한미 합작 영화 제작에 대한 노하우가 있으니 제작자로 참여를 하거나 개발 단계만이라도 도와달라는 제안도 있었다. <파이널 레시피>는 처음에 크리에이티브 제작자로 시작했던 작품이다. 그러다 이 프로젝트의 끝을 보고 싶다는 오기도 생기고, 언어의 제국주의를 깨보고 싶다는 야심도 있었다. 미국에서 영어 제국주의는 정말 뼈에 와닿는 이야기다. <미나리>는 영어 대사가 거의 대부분인데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노미네이트되지 않았나. 아시안은 영어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미국은 전 세계 어딜 가서도 영어 영화를 찍는다. 중세시대 프랑스가 배경인데 영어를 쓴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데 할리우드니까 용인한다. 그런데 중국에서 영국 배우들을 데리고 와서 <오만과 편견>에 버금가는 중국의 고전을 중국어로 찍게 하는 건 가능할까? 백인들이 그렇게 하는 건 되고 아시안은 그렇게 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걸까. 그래서 밀어붙인 게 <파이널 레시피>였다. 어쩌면 인종문제보다도 더 오래갈 영어 제국주의 문제를 상업영화에서 꼬아서 시도해보고 싶었다. -평소 미국과 한국에 체류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되나. =작년엔 정확히 반반 있었다. UCLA 종신교수가 된 후에는 한국에 오래 있지는 못했는데, 작년엔 <소요산>의 후반 작업과 집안일 때문에 한국에 있어야 했다. 어차피 팬데믹 상황이라 줌으로 수업을 한다면 한국에 있어도 괜찮지 않냐고 학교에서 이해해줬다. 그런데 말이 쉽지 진짜 죽을 맛이더라. 새벽 3시에 일어나서 강의를 한다는 게…. (웃음) -하버드대학교에서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연출, 한국영화 이론을 강의한 걸로 아는데, 지금 UCLA에서 어떤 걸 가르치나. =UCLA의 영화, 텔레비전,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 학과에서 영화를 담당한다. 연출 수업도 하고 내가 좀더 특화되는 영역은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다.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는 트랜스내셔널한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데, 그 사람들의 정체성은 20세기의 모순과 연관되어 있다. 경제적 이유로 했던 이민, 제국주의, 식민주의, 인신매매, 입양, 난민, 전쟁…. 영화적인 매체를 통해 사회 변혁을 이루어내는 방법을 연구하고 학생에게 가르치는 일도 한다. -해외에서 가르치는 학생들은 한국영화나 트랜스내셔널 시네마에 대해 어떤 시선을 갖고 있나. =트랜스내셔널 시네마는 공감하는 학생이 굉장히 많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니까. 하버드에서 한국영화를 가르치던 2005~2006년에는 좀 배운 게 많고 가방끈이 긴 학생들이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았다. (웃음) 유럽에선 더 이상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나 이창동 감독의 예술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2013년에 다시 하버드로 갔을 때는 평범한 미국·영국 백인 학생들이 그냥 제작 수업인데도 한국영화 얘기를 하는 경우가 정말 많았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는 예술영화까지 찾아보더라. <기생충> 이후에는 한국이 문화 선진국, 영화의 제1세계라는 인식은 너무나 만연해 있다. 외국어 영화라는 단서를 달지 않아도 좋은 영화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도 여러 자리를 통해 김진아 감독의 작품을 돌아보고 특히 젊은 여성들이 영향을 받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도 한국의 재능 있는 2~30대 여성들을 발굴하고 교육하고 멘토링 하는 것을 좋아한다. UCLA에서 익명의 기부자가 기금을 만들어 매년 아랍계 여성 5명을 뽑아 장학금과 생활비를 대겠다고 했다. 세계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랍 여성들이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찡했다. 지금 한국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2~30대 여성들이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정당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장이 건강하게 마련되어야 한다. 그들의 영화도 계속 나와야 한다. 최근 한국 여성 감독들이 많이 등장한 것은 너무 반가운 일이지만 왜 상업영화는 여전히 남성 위주인지,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하고 바꾸어나갈지 신랄하고 솔직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 지금의 악순환 구조가 선순환 구조로 바뀔 수 있다.

'제74회 칸국제영화제 중간결산'...현실의 균열 속에서 영화는 탄생한다

7월 13일(현지시간) 프랑스 칸 해변에 화려한 불꽃 쇼가 펼쳐졌다.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를 축하하는 바스티유데이 불꽃놀이를 기점으로 7월 6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칸영화제도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다. 코로나19로 인해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열린 만큼 크고 작은 문제가 없진 않았지만 순조롭게 축제의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다. <씨네21>에서는 올해 칸영화제의 전반적인 흐름과 함께 유난히 치열했던 경쟁부문의 추세를 점검했다. 24편의 작품 중 16편이 공개된 가운데 개막작 <아네트>, 폴 버호벤의 <베네데타>,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가 높은 평가를 받으며 두각을 드러내는 중이다. 현지 통신원이 전해온 74회 칸영화제 중간 평가와 함께 <베네데타> <드라이브 마이 카>의 기자회견을 정리해보았다. 올해 칸을 장식한 말들을 통해 영화제의 고민과 나아갈 방향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의 세찬 파도 앞에서도 스크린의 불은 꺼질 줄 모른 채 밝기만 하다. 우리가 알던 일상으로의 복귀와 영화제의 정상화. “지구상에서 영화는 한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던 봉준호 감독의 선언으로 문을 연 2021년 칸영화제는 코로나19 확산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영화제를 목표로 달려가고 있다. 2019년 황금종려상 수상자를 굳이 모셔와서 연속성을 부여하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완벽히 예전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19로 극장이 문을 닫고 모든 것이 멈췄던 만큼 예전보다 다소 많은 24편의 경쟁작에도 불구하고 영화 한편이 공개될 때마다 꼼꼼한 관심과 다양한 반응들이 쏟아지고 있다. 레드카펫 행사와 스타들의 연이은 포토콜, 관객과의 만남이나 영화마다 이어지는 기자회견까지 최소한 겉보기엔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영화제의 일상을 되찾은 것만 같다. 코로나, 스트리밍 서비스, 환경보호 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현실은 익숙한 듯 미묘하게 달라졌다.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코트다쥐르 해안의 풍경을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우선 입장할 때마다 확인하는 코로나19 패스는 물론이고 인터넷 티켓 예약이 의무가 되면서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이 사라졌다. 바뀐 규칙에 맞춰 유연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크고 작은 마찰과 변화를 따르지 못한 균열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칸의 코로나19 방역이 의외로 촘촘하지 못하다는 <뉴욕타임스>의 지적을 시작으로 프랑스 언론에서도 칸의 상황에 연신 우려를 표하고 있다. 칸이 속한 알프마리팀 지역은 프랑스에서 가장 많은 확진자가 나온 곳(10만명당 61명)이기도 하다. 일각에선 백신에 대한 불안감도 번졌다. 프랑스 배우 레아 세두가 백신을 맞고도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으며 영화제에 불참했기 때문이다. 레아 세두는 세편의 경쟁작(<프렌치 디스패치> <더 스토리 오브 마이 와이프> <프랑스>)과 한편의 프리미어 초청작(<디셉션>)에 출연하여 행사를 앞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칸 곳곳에선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은 채 악수와 포옹 등 밀접 접촉을 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개막작이 시작되자 주변 관객 중 4분의 3이 마스크를 벗었고, 기립박수가 길어지자 레오스 카락스와 애덤 드라이버는 극장 안에서 담배를 피웠다”며 극장 풍경을 전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는 스타와 관객을 향한 항의가 SNS를 통해 번지자 집행위원장 티에리 프레모는 “마스크가 칸영화제를 끝까지 이어갈 수 있는 법”이라고 호소했다. 조직위원장 피에르 레스큐어는 아예 상영 시작 전 내보낼 메시지를 녹음하기도 했다. 다행히 영화제의 반환점을 돈 지금까지도 확진 사례는 나오지 않았다. 운영위원회측에서도 초반 다소 느슨했던 방역 규칙을 점차 강화해나가는 중이다. 코로나가 바꿔놓은 건 거리의 상황뿐만이 아니다. 칸영화제가 구체적으로 당면한 도전 과제는 어쩌면 코로나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빠르게 성장한 플랫폼 산업과의 관계 재정립, 그리고 기후 재앙에 대비한 환경문제에 대한 화답이 더 두드러졌다. 영화 수입사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마켓의 풍경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넷플릭스를 비롯한 스트리밍 서비스와의 긴장관계는 일정 부분 여전한 가운데 이들과의 공존이 불가피한 만큼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들이 발견된다. 일례로 개막작 <아네트>와 경쟁작 중 일찌감치 화제를 모은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티탄>, 미국 독립영화계의 신성이자 한국계 영화감독 코고나다의 <애프터 양>의 판권을 단독으로 사들인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국의 스트리밍 업체 왓챠다. 또 하나의 화두인 환경보호에 관한 인식 변화를 위해 칸은 이른바 ‘슈퍼 그린’을 제창하는 중이다. 특히 이번 칸영화제에서는 과시적인 행사를 축소하는 것은 물론 환경영화를 위한 섹션을 마련하고 필요성을 홍보하는 등 공을 들이고 있다. 프랑스의 한 라디오 매체는 심사위원장인 스파이크 리 감독이 2018년 칸에 들고 왔던 <블랙클랜스맨>이, 환경영화제가 주는 상(그린 실 EMA 어워드)을 수상한 바 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정치적이고도 예술적인 익숙한 듯 미묘하고 사소한 변화는 24편의 경쟁작을 둘러싼 분위기에서도 감지된다. 16편의 작품이 공개된 7월 14일 현재, 확실한 황금종려상 후보라고 할 만한 화제작이 나오지 않아 누구도 수상작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단독으로 치고 나가는 작품이 없는 대신 몇편을 제외하곤 후보들 사이에 편차가 거의 없다는 점이 올해 도드라지는 특징 중 하나다. 대체적으로 작품마다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고르고 무난한 반응을 얻고 있지만 지배적인 예측이 없는 건 아니다. 결국엔 심사위원단이 정치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에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언론의 반응이다. 조망하는 주제, 세계관, 인물과 시대를 다루는 방식 등이 서로 겹치지 않는 가운데서도 거의 모든 작품에서 사회적인 균열을 포착하고자 하는 열망과 에너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평론가 장 미셸 프로동은 “직접적이건 그렇지 않건 올해 칸에 소개된 작품들은 사회적 균열을 다룬 작품들이 많다. 여기서 균열이란 사회구성원간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계층의 분리 현상을 말한다”라고 진단했다. 계층 분리에 따른 균열은 올해만 특별한 것이 아니다. 2019년 황금종려상을 차지한 <기생충>이 대표적이다. 그 영향인지도 모르지만 올해는 특히 유사한 문제의식을 가진 작품 편수가 늘어난 상황이다. 비단 경쟁작뿐 아니라 감독주간에 선보인 에마뉘엘 카레르 감독의 <위스트르앙>, 비평가주간 사뮈엘 테이스 감독의 <리틀 네이처> 등 여타 섹션에서도 사회적 균열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경쟁부문에서도 카트린 코르시니 감독의 <분열>이나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의 <6번의 칸>, 어머니의 죽음과 자유의 상실을 고찰하는 나다브 라피드의 <아헤드의 무릎>, 소비에트연합 해체 시기의 비이성과 폭력을 정면에서 응시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의 <페트로프의 플루>,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 등 적지 않은 작품이 계층 갈등에서 촉발된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러시아에서 출국금지당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경우 화상으로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으며 칸측은 극장에 그의 자리를 상징적으로 비워두었다. “가택 연금을 받는 동안 쓰여진 이 영화는 억압을 향한 당당하고 짜릿한 복귀”(<버라이어티>)라 할 만하다. 그중 대표적으로 <분열>은 이별을 앞두고 있던 두 여자가 프랑스의 노란조끼운동 시위로 병원에 갇히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방식으로 개인과 집단 사이의 충돌을 표현한 이 작품은 “사회운동이 개인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미치는 영향을 예리하게 포착”(<스크린 인터내셔널>)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평단의 반응은 평범하지만 정치적 메시지가 두드러지는 <분열>이 황금종려상에 오른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전반적으로 고른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두각을 드러내는 작품은 개막작 <아네트>와 폴 버호벤 감독의 <베네데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 정도다. <르 필름 프랑세즈>는 “레오스 카락스가 아직 칸에서 한번도 상을 받지 못했다”는 걸 상기시키며 애덤 드라이버의 남우주연상을 비롯해 어떤 상이든 주어질 것이란 예상을 내놓았다. 여우주연상 후보로는 <베네데타>의 비르지니 에피라, <최악의 사람>의 레나트 레인스베, <분열>의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가 거론되는 상황이다. 지금까지의 승자는 <드라이브 마이 카> 한편 지난해 칸영화제 공식 선정작이자 오랜 기대작이었던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는 대체로 평이한 반응이다. 68혁명을 배경으로 하되 프랑스의 한 가상도시를 무대로 한 이 영화는 <뉴요커> 스타일의 잡지 뒤에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짧은 챕터들을 여러 개 이어나가는 방식은 마치 영화를 하나의 잡지처럼 보이도록 구성했다.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은 여전한 가운데 프랑스 뉴웨이브 실험에 가까워진, 혼란스런 앙상블”(<인디와이어>)이라는 평이다. “에피소드는 물론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콜라주, 재창조하는 과정에서 여러 영감을 제공하지만 한편으론 익숙한”(<텔레라마>) 연출과 주제라는 한계도 지적된다. 화제작 중 하나인 폴 버호벤의 <베네데타>는 아마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일 것이다. 지난해 칸영화제 공식 선정작 중 한편이었던 이 작품은 1987년 발간된 논픽션 <수녀원 스캔들: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한 레즈비언 수녀의 삶>을 원작으로 한다. “숭고함에 도달하기 위해 성적 환상과 에로틱한 장면을 뒤섞는 위험을 감수하는”(<포지티프>) 이 영화를 두고 <프리미어>는 “역사적인 동시에 로마네스크적 특성을 지닌 버호벤식의 훌륭한 이야기”라고 긍정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반면 프랑스 시사 일간지 <르 피가로>는 “이런 유치함은 놀이터나 광대쇼에서나 허용된다”라며 폴 버호벤의 작가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여러 각도에서 촬영된 에피라의 육체는 지나치게 현대적이고 시대착오적일 만큼 명료하다”는 <텔레라마>의 평을 통해 여러 측면에서 이 영화의 성취와 한계를 짐작할 수 있다. <스크린 데일리>는 물론 <카이에 뒤 시네마> <르 필름 프랑세즈>의 별점 모두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이끌어낸 건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다. <포지티프> <텔레라마> <레쟁록> 등 프랑스 언론 중 세곳이 이 영화를 황금종려상의 주인공으로 전망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아내를 잃은 연극 감독의 여정을 따라간다. 각본을 쓰던 파트너이기도 했던 아내를 잃은 남자는 작품 연출을 위해 히로시마로 간다. 말이 없는 한 여성이 그의 운전기사로 고용되면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고요한, 하지만 산산이 부서지는 고통을 응시하는 이 영화는 “3시간의 러닝타임이 모자랄 정도로 농밀하다”(인디와이어). 산산이 부서진 세계에서 오늘을 버티고 살아가야 하는 시간은 히로시마라는 상징적인 공간과 연극 무대라는 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찬찬히 흩뿌려진다. “3시간 동안의 완벽한 경험, 꿈처럼 흘러가는 러닝타임, 죽은 시간도 없고 단 한번의 서두름도 없는 마스터의 솜씨”(<프리미어>), “연금술과도 같은 침묵”(<르 몽드>) 등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시간을 찍은 뒤 편집이라는 영화적 운동을 통해 리듬을 창조해내는 하마구치의 연출이 정점에 달했다는 평이다. 하마구치의 필모그래피 중 최고작이라는 반응이 이어지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황금종려상에 제일 가까운 영화로 거론 중이다. 어느덧 반환점을 돌았지만 숀 베이커의 <레드 로켓>, 일디코 에네디의 <내 아내의 이야기>,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 브루노 뒤몽의 <프랑스> 등 쟁쟁한 기대작들이 아직 베일에 싸여 있는 만큼 섣부른 예측은 금물이다. 올해 칸의 성과가 풍요 속의 빈곤이 될지, 기념비적인 풍년이 될지는 아직 좀더 지켜볼 일이다.

제74회 칸국제영화제 총정리…되짚어 본 주요 이슈와 경향

올해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가장 아찔하고 짜릿했던 순간은 폐막식에서 벌어졌다. 단편부문과 명예 황금종려상 등의 시상이 이루어진 뒤 본격적으로 경쟁부문 결과 발표가 시작될 참이었다. 사회자는 심사위원장인 스파이크 리에게 배우상, 심사위원상, 각본상, 감독상, 심사위원대상, 황금종려상 중 어떤 상부터 시상하면 되냐는 의미로 질문을 건넸다. “어떤 게 첫 번째 상(first prize)이죠?” 수상자 명단이 적힌 종이를 펼쳐보던 스파이크 리는 중간 과정은 생략한 채 최종 결과로 직진해버렸다. “황금종려상은 <티탄>.” 사회자는 다급하게 “잠깐만!”을 외쳤고, 동석한 심사위원들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거나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제일 마지막에 발표해야 할 최고상을 제일 먼저 공개하다니. 수습이 불가능한 대형 사고였다. 결과적으로 시상식은 70분짜리 혼돈의 스릴러가 돼버렸고, 스파이크 리는 폐막식을 망쳐버려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발표 과정이 아찔했다면 결과는 파격적이었다. 스파이크 리가 의도치 않게 서둘러 <티탄>을 호명한 건 명백한 미스 커뮤니케이션의 결과지만, 한편으론 스파이크 리의 뇌리에 <티탄>이 강렬히 박혀 있어 심사위원단의 과감한 선택을 빨리 알리고픈 조급증이 무의식중에 작동한 결과가 아닌가 짐작해보게 된다. 그만큼 <티탄>의 황금종려상 수상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티탄>이 처음 공개된 뒤 평론가들의 반응은 극단으로 갈렸다. 문화 주간지 <텔레라마>는 “<티탄>이 영화제에 전기 충격을 가할 거라 알려졌는데 그 소문이 딱 맞았다.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이들도 많고 성급하게 거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미지근한 반응은 없다”며 이 영화가 만장일치를 받기는 힘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참고로 영화제 영어 공식 데일리인 <스크린 데일리>의 평점은 1.6점으로 낮았고, 프랑스 공식 데일리 <르 필름 프랑세즈>의 평점에선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 다음으로 총점이 높았다). 문화 시사 잡지 <레쟁록>은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탈리아의 거장 마르코 벨로치오가 영화감독으로서 가져야 할 중요한 자질로 “상상력과 용기”를 꼽은 것을 언급하며 “상상력과 용기에 관해서라면 <티탄>은 부족할 게 하나도 없다. 사실 이 두 가지가 <티탄>의 가장 큰 덕목이다. 심사위원들의 이 선택은 현대영화의 지배적 미적 기준을 바꾸고자 하는 열망을 확실히 보여준다”고 했다. 시사 일간지 <르 파리지앵> 또한 “<티탄>에 황금종려상을 주는 건 시적 선언이다. 작열하는 이미지에 대한 송가이며, 트라우마를 겪은 젊은 여성의 이야기를 하는 젊은 여성감독의 용기를 칭송하는 송가다”라고 평했다. <티탄>, 영화제에 전기 충격을 가하다 화제의 중심에 선 젊은 여성감독은 1983년생 프랑스 여성감독 줄리아 뒤쿠르노. 참고로 올해 경쟁부문에 오른 감독 중 가장 젊다. 줄리아 뒤쿠르노는 <티탄>으로 칸영화제의 역사를 새로 썼다. 지금까지 칸에서 여성감독이 단독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3년 <피아노>의 제인 캠피언이 여성감독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았지만, 당시 제인 캠피언은 <패왕별희>의 첸카이거 감독과 공동으로 수상했다. 올해 24편의 경쟁작 중 여성감독의 영화가 단 4편뿐이라는 사실은 실망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경쟁부문뿐만 아니라 주요 부문의 최고상이 모두 여성감독에게 돌아간 것은 기억할 만하다. 단편 황금종려상(<세상의 모든 까마귀들>(감독 탕이)),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언클렌칭 더 피스츠>(감독 키라 코발렌코)), 황금카메라상(<무리나>(감독 안토네타 알라마트 쿠시야노비치))까지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두드러진 해였다. <티탄>은 <로우>에 이은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2016년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소개된 첫 장편 <로우>는 채식주의자였던 소녀가 성적 욕망과 카니발리즘에 눈뜨는 잔혹한 성장의 과정을 충격적으로 제시하는 호러영화였다. 자동차와의 교배, 젠더 유동성(gender fluid), 부성애의 탐색 등을 한데 뒤섞는 <티탄>의 이야기는 <로우> 못지않게 파격적이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머리에 티타늄을 심은 알레시아(아가트 루셀)는 자동차에 특별한 애정을 느낀다. 모터쇼의 에로틱 댄서로 살아가던 그녀는 초자연적 임신을 하고, 연쇄살인을 한 뒤 남자로 위장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러다 소방관 뱅상(뱅상 랭동)을 만나는데, 뱅상은 그(녀)가 10년 전 사라진 자신의 아들이라 생각한다. 줄리아 뒤쿠르노는 “스스로는 아주 전형적인 장르영화를 만든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모든 관습을 날려버리는”(<프랑스 텔레비전>) 감독이다. 심사위원 밀렌 파르메르가 “영화제에서 장르영화는 언제나 인정받지 못한다”고 말했듯, 관습을 파괴하는 장르영화, 그것도 파격적 호러영화에 칸영화제 최고상이 돌아간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줄리아 뒤쿠르노 감독 또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수상 직후 무대에서 눈물을 보이며 “괴물에게 자리를 내줘 감사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영화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내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기괴함은 누군가를 공포에 떨게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가두고 서로를 분리시키는 정상성의 벽들을 밀어낼 수 있는 무기이며 힘”이라 말했다. 반골정신과 젊음이 주요 키워드 스파이크 리, 마티 디옵, 예시카 하우스너, 밀렌 파르메르, 매기 질런홀, 멜라니 로랑, 송강호, 클레베르 멘돈사 필류, 타하르 라힘까지 올해 심사위원들의 선택에 대해선 놀랍지만 균형잡혔고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는 반응이 다수다. 특별히 수상을 하지 못해 슬퍼해야 할 작품은 없다는 것인데, 다만 심사위원상과 심사위원대상이 모두 공동 수상이었기 때문에 “모든 작품에 상을 주고 싶어 하는 ‘팬들의 학교’ 같은 면이 보였다”(<르 누벨 옵세르바퇴르>)는 지적이 있었다. 올해의 수상작들, 심사위원대상을 공동 수상한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와 유호 쿠오스마넨의 <6번 칸>, 감독상을 받은 레오스 카락스의 <아네트>, 각본상을 수상한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 심사위원상을 공동으로 받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와 나다브 라피드의 <아헤드의 무릎>은 모두 현대적인 문법과 고유한 예술적 제스처를 취한 작품들이다. 폐막 이후 티에리 프레모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은 라디오 채널 <유럽1>과의 인터뷰에서 “<티탄>은 폭력적인 영화가 아니라 그저 다른 영화”이며 “올해 칸의 선택은 오늘날의 영화가 어떤 것인지 잘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영화. 그것은 관습을 거부하고 열린 태도를 보이는 ‘젊은’ 영화, 그래서 기존의 영화와 ‘다른’ 영화를 칭하는 말일 것이다. 다수의 거장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스 카락스 감독은 반골정신과 젊음이라는 키워드에 부합한 <아네트>로 감독상을 받았다. 개막작으로 공개된 <아네트>는 레오스 카락스가 선보인 첫 영어영화인 데다 무려 장르는 코미디 뮤지컬이다. 60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독창적인 레오스 카락스의 ‘젊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게 외신의 평이다.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와 유호 쿠오스마넨의 <6번 칸>은 사이좋게 심사위원대상을 나눠 가졌다. 칸 경쟁부문에 네 번째 초대받은, 칸이 사랑하는 이란 감독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히어로>는 영화제 내내 수상권에 이름을 올린 작품이다. 도덕적 딜레마를 집요하게 다루는 아시가르 파르하디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장기는 이번에도 여전해 보인다. 빚을 갚지 못해 교도소에 간 라힘이 이틀간 휴가를 얻어 밖에 나왔다가 여자 친구가 발견한 돈가방 때문에 점점 복잡한 미로에 빠지는 이야기다. <인디와이어>는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이후 최고작이라 평하기도 했다. <6번 칸>은 <올리 마키의 가장 행복한 날>로 2016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받았던 핀란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북극권의 고고학 발굴 현장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탄 핀란드 여성 로라가 러시아 남자 광부와 좁은 침대칸 객실을 나눠 쓰게 되면서 긴 여행의 한 자락을 공유해야 하는 상황을 따라간다. “느린 속도로 만경을 찍는 작품”(<프랑스 텔레비전>)이다. 고유의 리듬과 템포가 돋보이는 화제작들 각본상을 받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와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메모리아>, 나다브 라피드의 <아헤드의 무릎> 또한 고유의 리듬과 템포가 돋보이는 영화들이다. 3년 전 <아사코>로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처음 초대받았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각색해 3시간짜리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를 완성했다. 아내를 잃은 연극배우이자 연출가인 남자와 그의 전속 운전기사로 고용되는 여성의 로드트립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 영화와 연극의 이야기가 혼합된다. 정교한 영화적 언어로 채워진 이 작품에 단순히 각본상만 주는 건 아쉽다는 반응도 확인할 수 있었다. <메모리아>는 <열대병>으로 칸에서 심사위원상을 받고 <엉클 분미>로 황금종려상을 받았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처음으로 모국 태국이 아닌 남미에서 찍은 영화이며, 할리우드 배우 틸다 스윈튼과 협업한 영화다. 동생을 만나러 콜롬비아의 보고타에 도착한 제시카(틸다 스윈튼)가 어느 날 미스터리한 감각 증후군의 일종으로 수면 중 큰 폭발음을 듣게 되고, 알 수 없는 소리의 근원을 찾아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을 방문하는 이야기다. 실제로 콜롬비아를 방문했다 남미와 사랑에 빠진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여행 중 폭발성 머리 증후군(Exploding Head Syndrome)을 경험한 것이 영화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시너님즈>로 2019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한 이스라엘 감독 나다브 라피드는 <아헤드의 무릎>을 통해 이스라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정부로부터 검열을 당하는 영화감독이 자유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을 동시에 맞닥뜨리는 이야기로, 역시나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된 영화다. 나다브 라피드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어머니에 대한 애도이자 조국에 대한 애도”라 했다. 여우주연상은 <최악의 사람>의 레나트 라인스베에게 돌아갔다. 요아킴 트리에의 <최악의 사람>에서 라인스베는 노르웨이의 오슬로에 사는 방황하는 서른살의 줄리를 연기한다. 놀랍게도 이번 영화가 타이틀롤을 맡은 첫 번째 영화다. 영화가 공개된 뒤 외신은 일제히 ‘스타 탄생’을 외쳤다. 남우주연상은 <니트람>의 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수상했다. 저스틴 커젤의 <니트람>은 1996년 호주에서 발생한 포트 아서 학살 사건을 다룬 영화로, <쓰리 빌보드> <플로리다 프로젝트> 등으로 익숙한 미국 배우 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참혹한 총기 난사 사건의 가해자를 연기했다. 비극적 결과를 향하는 외로움, 분노, 광기를 비범하게 연기했다는 평을 들었다. 많은 이야기를 남긴 채 74회 칸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올해 칸영화제는 용기 있는 영화에 힘을 실어주는 과감한 선택을 보여주었고, 이 선택이 앞으로의 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이 영화들을 하루빨리 국내 극장에서 만나고 싶다.

제74회 칸국제영화제를 빛낸 한국 영화인들…봉준호 감독이 열고 이병헌 배우가 닫고

제74회 칸영화제를 찾은 한국 영화인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전한다. 개막식의 봉준호 감독과 폐막식의 배우 이병헌, 영화제 기간 내내 심사위원으로 바빴던 배우 송강호, 올해 칸에서 소개된 2편의 한국영화 <비상선언>과 <당신 얼굴 앞에서>의 프랑스 현지 반응도 함께 싣는다. 봉준호 올해 칸영화제는 봉준호 감독의 개막 선언으로 시작됐다. 코로나19로 1년을 쉬었던 칸영화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기에 2019년 황금종려상 수상자인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만 한 적임자도 없었다. 봉준호 감독은 칸영화제가 마련한 마스터클래스 행사인 ‘랑데부 아베크’에도 참석해 팬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이병헌 <비상선언>의 배우 이병헌은 폐막식 무대에 시상자로 나섰다. 여우주연상 부문을 시상하기 위해 무대에 등장한 그는 불어로 꽤 긴 인사말을 전하는 센스를 보였다. 이어서 “올해 칸영화제는 내게 무척 특별하다. 영화제의 문을 연 봉준호 감독과 올해 심사위원인 배우 송강호는 내 동료이고, 마침 심사위원장인 스파이크 리와 나는 성(LEE)도 같다”며 한 스푼의 유머를 더해 뿌듯한 마음을 전했다. 시상을 마치고 무대에서 퇴장할 땐 심사위원석에 앉아 있던 송강호와 가볍게 손바닥을 마주치기도 했다. 임시완 2017년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으로 칸의 레드카펫을 밟았던 임시완. 올해는 <비상선언>으로 칸영화제에서의 두 번째 추억을 쌓았다. <비상선언>의 프리미어 상영이 끝난 직후엔 “긴장하며 영화를 봤다. 선배님들과 함께 연기해 정말 영광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의 젊은 배우로서 또 한번 세계 영화인들에게 존재를 알렸다. 한재림 <더 킹> <관상> <우아한 세계> 등을 연출한 한재림 감독의 신작 <비상선언>은 칸 현지에서 시의적절하고 긴장감 넘치는 재난영화라는 평을 받았다. 뤼미에르 극장에서 관객의 실시간 반응을 체감했던 한재림 감독은 “장면마다 박수를 치고 영화를 즐기는 모습에 너무 행복했다”고 한다. 송강호 2년 전 봉준호 감독과 함께 <기생충>의 황금종려상 수상의 기쁨을 만끽했던 송강호는 올해 경쟁부문 심사위원이자 <비상선언>의 배우로 칸을 찾았다. 스파이크 리를 심사위원장으로 한 9명의 심사위원과 함께 매일 2~3편의 영화를 보고 심사회의를 해야 했던 그는 빠듯한 일정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비상선언>의 레드카펫 행사 등에 참석했다. <비상선언> 단체사진 한재림 감독과 송강호, 이병헌, 임시완 배우까지 <비상선언>팀이 칸의 레드카펫을 밟았다. 티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과 크리스티앙 전 부집행위원장은 포토콜 행사 직전 <비상선언>팀을 만나 한국영화 및 한국 영화인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직접 전했다고. 칸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비상선언>은 프랑스 현지시간으로 7월 16일 칸에서 최초 공개됐다. <비상선언> <당신 얼굴 앞에서> 현지 반응 올해 칸영화제에선 두편의 한국영화 <비상선언>과 <당신 얼굴 앞에서>가 공개됐다. 비경쟁부문에 초청된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은 초유의 재난 상황에 직면해 무조건적 착륙을 선포한 비행기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항공재난영화다. 송강호가 항공재난의 뒤를 좇는 형사로 출연하고, 이병헌은 비행기 공포증이 있지만 딸을 위해 비행기에 탑승한 승객을 연기한다. 전도연은 비상 사태에 맞서는 장관, 김남길은 비행기의 부기장, 임시완은 홀로 비행기에 오른 승객으로 출연한다. 영화가 공개된 뒤 주간지 <텔레라마>는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공포와 지상의 위기 처리 상황을 고전적 방법으로 다루는 효과적인 스릴러영화”라며 성공적 장르영화라 소개했고, 영화비평 사이트 <시네마티저>는 “할리우드영화가 더이상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한국 대중영화의 힘”이라고 호평했다. 홍상수 감독의 26번째 장편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는 올해 신설된 칸 프리미어 섹션에 초청됐다. 1980년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던 배우 이혜영이 미국에서 오래 살다 한국에 돌아온 인물 상옥을 연기한다. 한때 배우였던 상옥은 동생(조윤희)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자신을 캐스팅하고 싶어 하는 영화감독(권해효)을 만나면서 우리 얼굴 앞에 놓인 것들을 올바로 보고 주어진 시간을 감사히 보내자고 마음먹는다. 영화비평 사이트 <크리티카>는 이 영화를 두고 “영화의 제목은 이 정갈하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열쇠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가난해지고(다분히 일차원적인 의미로, 후반작업에 크게 기대지 않고 날것으로 보여지는 디지털 이미지), 감독은 한층 더 깊고 숙련된 작품 세계로 발전해간다”라고 했다. 영화비평 사이트 <르 폴리스터>는 이혜영의 카리스마 있는 연기를 칭찬하며 “만약 이 영화가 경쟁부문에 초청됐다면 여우주연상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 한 뒤 “<당신 얼굴 앞에서>는 홍상수 감독의 또 다른 걸작이 되었고, 그의 작품 중 가장 즉각적으로 감정을 파고드는 영화”라고 했다.

[장영엽 편집장] 너의 이름은

‘이것은 게임인가 영화인가, 지금껏 이런 콘텐츠는 없었다’. 이다혜 편집팀장이 이번호 기획 기사를 위해 멋지게 뽑아준 제목이다. 게임 회사 크래프톤이 얼마 전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한 영상 콘텐츠 <그라운드 제로>와 <미스터리 언노운>을 보면 기사의 제목처럼 이들 작품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일례로 크래프톤의 인기 게임 의 기원을 다루는 단편 <그라운드 제로>는 김지용 촬영감독(<남한산성> <밀정>)이 감독과 각본, 촬영을, 배우 마동석이 제작과 주연을 맡고 모그 음악감독과 허명행 무술감독 등 영화 스탭들이 대거 참여한 작품으로 흡사 한국 상업 액션영화의 한 대목을 보는 듯하다. 게임의 스토리와 맵이 단편 영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배틀그라운드’ 게임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호기심을, 팬들에게는 세계관을 알아가는 즐거움을 준다. <씨네21>은 지난해에도 게임을 닮은 영화, 영화를 닮은 게임을 소개하는 특집 기사를 준비한 바 있지만, <그라운드 제로>의 사례와 같이 올해는 매체를 넘어선 문화 콘텐츠의 융합이 훨씬 더 전방위적으로 빠르게 일어나고 있음을 실감한다. 게임 캐릭터와 스토리, 세계관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작업이 게임 업계와 영화계의 유기적인 협업을 촉진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 내 내러티브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겠다는 포부로 ‘펍지 유니버스’를 확장 중인 크래프톤, 영화 <신과 함께>의 제작사인 리얼라이즈픽쳐스와 협약을 맺고 조인트벤처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를 설립한 스마일게이트, ‘넥슨 필름&텔레비전’이라는 신설 조직을 출범시킨 넥슨 등 본격적으로 IP 생태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게임 회사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게임과 영화의 미래를 상상해보시길 바란다. 덧붙여 독자 여러분이 ‘이것은 지면 인터뷰인가, 영상 인터뷰인가’라고 질문하게 될 새로운 연재를 이번호부터 시작한다. 오랜만에 복귀한 김혜리 편집위원이 연재를 맡은 ‘김혜리의 콘택트’로, 한달에 한번 <씨네21> 공식 유튜브 채널의 영상을 통해 대중문화예술 창작자들과의 심도 깊은 인터뷰를 소개할 예정이다. 첫화의 게스트로 초대한 <킹덤: 아신전> 김은희 작가와의 인터뷰(유튜브에는 7월 30일 공개된다)는 이번호 지면을 통해서도 만날 수 있다. 다양한 특색을 가진, 그리하여 이름을 부르기 난감한 콘텐츠가 더 많이 기획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IP 유니버스의 미래는? 크래프톤,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 넥슨에 묻다

게임 IP ‘유니버스’의 구축이 게임 업계에서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게임사 크래프톤이 지난 7월26일 단편영화 <그라운드 제로>를 공개했고, 크래프톤은 자사의 인기 게임 (이하 <배틀그라운드>)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애니메이션과 웹툰을 차례로 선보일 예정이다. 게임의 캐릭터와 스토리, 세계관을 연결하고 확장하는 게임사의 공격적 행보는 게임의 영화화 시도와는 확실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지난 3월, 게임사와 영화사가 손을 잡아 주목받았던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의 출범도 이 돌풍 속에 있다. 넥슨은 지난 7월16일, 월트디즈니와 액티비전블리자드 스튜디오를 거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전문가, 닉 반 다이크를 수석 부사장 겸 최고 전략 책임자(CSO)로 선임했다. 게임 IP에 기반해 거대한 유니버스 구축을 진행 중인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 넥슨, 크래프톤을 만나 게임 IP의 쓸모와 미래를 물었다. 크래프톤, '생존' 테마 중심으로 게임 넘어서는 세계관 구축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서바이벌 슈팅 장르 게임 <배틀그라운드>를 중심으로 한 펍지 유니버스를 구상 중인 크래프톤은 조너선 프레이크스가 진행자로 나선 페이크 다큐멘터리 <미스터리 언노운>과 마동석 주연의 단편영화 <그라운드 제로>를 필두로 대중 타깃의 세계관 확장 콘텐츠에 불을 붙였다. 이성하 크래프톤 펍지 유니버스 총괄은 “펍지 유니버스는 ‘배틀그라운드’에서 싹을 틔운 세계관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펍지 유니버스의 일부가 구현된 형태가 ‘배틀그라운드’라고 보면 적절할 것이다. ‘생존’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를 구상하고 있다”라고 크래프톤의 시도가 단순 2차 창작물이나 다른 플랫폼으로의 전환 형태가 아님을 강조했다. 교도소 폭동 스토리를 담은 <그라운드 제로>의 기획 단계부터 마동석의 이미지를 염두에 둔 크래프톤과, 기획·제작을 겸하는 배우 마동석의 만남은 절묘했다. 이성하 총괄은 “마동석 배우는 제작자에 가까울 정도로 의견을 주었고 감독과 스탭도 직접 꾸렸다”라고 전했다. 스토리모드가 따로 없는 생존게임인 <배틀그라운드> IP에서 점차 세계관을 구축 중인 크래프톤은 최근 <저지 드레드>(2012), <론 서바이버>(2013),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캐슬바니아>(2012) 등을 프로듀싱한 할리우드 제작자 아디 샨카를 애니메이션 부문 총괄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임명하며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에도 시동을 걸었다. 넥슨, 팬덤 넘어서는 대중 타깃의 콘텐츠 노린다 넥슨이 신설 조직인 ‘넥슨 필름&텔레비전’(Nexon Film and Television)에 닉 반 다이크 부사장이 총괄도 겸임하도록 임명한 것은 넥슨이 보유한 대표 게임 IP와 유럽 무대를 노리는 자회사 엠바크 스튜디오의 신작 개발 등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IP 사업 확장에 주력하겠다는 뜻이다. 그동안 넥슨은 유저들이 직접 나서 2차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창구를 마련해 참여형 IP 확장의 사례를 열긴 했지만, 이는 콘텐츠 제작을 토대로 한 IP의 사업 확장과는 다소 거리가 먼 방향이었다. 넥슨의 권용주 IP 사업팀장은 “자사가 확보하고 있는 IP의 확장을 위해 게임의 세계관을 정비하고 새로운 서사를 입히는 콘텐츠 영역까지 고민해보고 있다”고 답했다. 올해 8월에 선보일 넥슨의 신작 <프로젝트 HP>외에도 신규 MMORPG 게임, <테일즈위버M> 등의 대형 프로젝트, 그리고 등 독특한 게임성을 앞세운 타이틀까지 향후 넥슨 필름&텔레비전에서 새로운 형태의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될 지 기대를 모은다. 권용주 팀장은 “유니버스화를 단순히 마케팅적 접근으로 시도하면 위험할 수 있다. 게임은 특히 팬덤에 의해 성장하는 산업이기 때문에 기존 게임 유저들의 공감대에 집중하기 쉽지만 유니버스화를 꾀하려면 특정 IP의 유저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보편적 재미와 퀄리티가 담보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 철저한 현지화 통한 게임과 영화의 상생 스마일게이트의 핵심 IP인 <크로스파이어>는 국내 기업이 오리지널 FPS(First Person Shooting) 게임 IP로 해외에 진출해 성공한 첫 사례로 꼽힌다. 특히 중국 내 인터넷 보급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던 2000년대 말, 스마일게이트는 현지화를 공략해 중국 내 온라인 게임 시장을 선점하고 IP 확장을 이어갔다. 2020년 중국에서 첫선을 보인 드라마 <천월화선>에 이어 할리우드의 콜롬비아 픽쳐스에선 영화화를 추진 중이다. 지난 3월엔 영화 제작사 리얼라이즈픽쳐스와 협약을 맺고 조인트벤처(Joint Venture)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를 설립해 본격적인 문화 산업으로의 진출도 꾀하고 있다.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 백민정 대표이사는 “<신과 함께> 시리즈는 시즌제 드라마를 목표로 기획 중인데, 리얼라이즈픽쳐스가 3개 시즌 드라마를 제작할 때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는 IP의 글로벌 확장 계획을 고민하는 식”이라며 양사의 긴밀한 시너지를 예고했다. 콜롬비아 픽쳐스와의 <크로스파이어> 영화화에 관해선 “게임 세계관 내에서의 기본적인 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다 . 유니버스를 구축한다 생각하고 세계관을 유지하는 선에서 다양하게 IP를 확장”할 것이라고 현지화 전략을 밝혔다. 극영화, 페이크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테마파크와 가상의 홈페이지 등 하나의 IP에서 뻗어나온 콘텐츠가 모여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유니버스’ 콘텐츠가 화두로 떠오른 지금, 한국 게임 업계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한국의 마블’이 게임 회사에서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결코 섣부른 것이 아니다. 이성하 크래프톤 펍지 유니버스 총괄, 넥슨의 권용주 IP 사업팀장, 스마일게이트리얼라이즈 백민정 대표이사의 인터뷰, 게임 산업이 먼저 주목한 IP 유니버스의 미래에 대한 심층 리포트는 <씨네21> 1217호 기획 ‘게임 산업이 주목하는 IP 유니버스의 미래'(송경원, 김현수 기자)를 통해 더욱 자세히 만날 수 있다.

넥슨, ‘넥슨 필름&텔레비전’이라는 도전

넥슨은 IP 유니버스로 향하는 거대한 게임 업계의 흐름 속에서 최근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해왔다. 7월 16일, 월트디즈니와 액티비전블리자드 스튜디오를 거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전문가, 닉 반 다이크를 수석 부사장 겸 최고 전략 책임자(CSO)로 선임했다. 넥슨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넥슨의 글로벌 전략 수립, IP 관리 및 파트너십 등을 총괄하게 될 닉 반 다이크 수석 부사장은 신설 조직인 ‘넥슨 필름&텔레비전’(Nexon Film and Television) 총괄도 겸임하게 된다. 이는 <던전 앤 파이터> <바람의 나라> <메이플스토리> <카트라이더> 등 넥슨이 보유한 대표 IP와 넥슨의 유럽 진출에 박차를 가하게 될 자회사 엠바크 스튜디오의 신작 개발 등 글로벌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IP 사업 확장에 주력하겠다는 뜻이다. 그동안 넥슨이 주력해온 IP 확장 사업 중 대표적으로 손에 꼽을 성과는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젝트였다. 국내 애니메이션 업체들과의 협업을 통해 애니메이션 시장 활성화와 IP 충성 고객을 늘리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게임에 참여하는 유저들의 경험을 확장시키고자 했다. 한편으로는 기업이 IP 사업 확장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유저들이 직접 나서 2차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창구를 마련했던 것도 업계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어줬다. 유저들이 직접 2차 창작물을 공유하며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굿즈를 제작하는 등 이른바 참여형 IP 확장을 시도했던 것이다. 게임을 함께 즐기는 충성 고객의 만족도는 확실히 올라갔지만 콘텐츠 제작을 토대로 한 IP의 사업 확장과는 다소 거리가 먼 방향이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더해서 넥슨 필름&텔레비전의 설립은 세계 시장을 겨냥해 본격적으로 IP 시장을 확보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마침 넥슨의 권용주 IP 사업팀장은 “자사가 확보하고 있는 IP의 확장을 위해 게임의 세계관을 정비하고 새로운 서사를 입히는 콘텐츠 영역까지 고민해보고 있다”고 답했다. 이미 넥슨이 갖고 있는 자사 IP의 가치는 책정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기존 IP 활용뿐만 아니라 신규 IP를 확보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안도 고민하고 있다. 올해 8월에 선보일 넥슨의 신작 <프로젝트 HP> 외에도 <테일즈위버M> 등의 대형 프로젝트 등 독특한 게임성을 앞세운 타이틀을 개발하고 있다. 이 게임들이 앞으로는 넥슨 필름&텔레비전에서 새로운 형태의 작품으로 재탄생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넥슨의 더 나은 미래가 IP 확장 사업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